애와 사
- 감독
- 최경옥
- 제작년도
- 1970
- 출연
- 신성일, 최경옥, 송재호, 여수진, 김동원, 김웅, 김신재, 김정옥, 조덕성, 전숙, 임은자, 강세영, 이종철, 이전희, 문희
지루한 영화를 보는 것만큼 우리를 소외시키는 경험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영화는 몰입감과 소외감을 동시에 느끼도록 함으로써 이야기에 빠져들게 하고, 길을 잃게도 하며, 끝내 좌절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러한 혼란에 대한 관객의 반응은 두 가지 중 하나이다. 첫 번째 스토리를 해석하는 인지 활동에 몰두하는 것, 두 번째 혼란을 유발하는 퍼즐을 풀기 위해 노력하기보다 혼란 자체를 경험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써 혼란에 투항할 때 발생하는 쾌감에 자신을 의탁하는 것이다. 혼란의 출구를 찾는 것이 일반적인 반응일 것이나, 때로는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동해보는 것이 즐거움을 제공할 수도 있다. 방향감각의 상실은 모 아니면 도의 문제가 아니며, 우리가 어떤 종류의 혼란에 처해 있는지에 주목하는 것이 영화의 성취를 이해하는 데 중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해피엔드 >(1999)는 이와 같은 관람의 속성 안에서 혼란에 대한 우리의 반응을 엿보는 영화이다. 이 영화는 외환위기가 조성한 환란의 무드 아래 실업과 파산, 자멸의 사연들이 곳곳에 넘쳐나고 세기말의 불확실성과 새로운 세기에 대한 불안이 교차하던 20세기 말 한국 사회의 공기를 배음으로 깔고 있다. 성별 위계질서의 변화, 여성 권리의 부상, 근대적 국가 정체성과 남성성에 대한 회의(懷疑), 가부장제의 위기 따위로 요약되는 당대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징후들을 드러낸다. 영화의 도입부는 불륜과 추리, 애틋한 로맨스를 골자로 하는 대중 소설에 탐닉하는 남자 서민기(최민식)를 등장시켜 두 가지 중추적인 플롯 포인트를 설정한다. 플롯의 핵심을 이루는 사건은 민기의 부인인 최보라(전도연)와 그녀의 애인 김일범(주진모), 그리고 민기의 뿌리뽑힌 관계 사이에서 벌어진다. 민기는 (아마도) IMF의 여파 속에 실직한 뒤 딸을 돌보고 공원에서 소설을 읽는 한가로움에서 보람을 느끼는 전직 은행원이다. 민기의 아내 보라는 어학원을 운영하는 성공한 커리어우먼으로 군대에 징집되어 몇 년 전에 헤어진 전 남자친구 일범과 혼외관계에 빠져 있다. 처음에는 보라와 민기를 묶는 불운한 결혼을 제외하고는 인물들이 거의 교차하지 않는다. 보라와 일범은 열정적인 연애와 사진 촬영에 몰두하면서 그들만의 세계를 구축한다. 민기는 자신의 도피처인 헌책방에서 매일 탐정 소설과 로맨스 소설을 읽는 것에서 성취감을 느낀다. 민기가 탐닉한 세계는 보라와 일범이 누리는 세계와 닮아있는데, 우리가 영화를 통해 전달받게 될 사연은 바로 이 두 장르(탐정 + 로맨스)를 결합한 이야기가 될 것이다. 서로에게 매료된 불륜 커플이 섹스 이상의 것을 갈망하는 동안 민기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게 되면서 점진적으로 파국의 분위기가 고조되어 간다. 조용한 탐정의 역할을 수행하던 민기가 평정심을 잃게 되는 이유는 보라가 일범을 만나기 위해 아이에게 수면제를 탄 우유를 먹였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부터이다. 민기의 상처 난 가부장의식이 발동하는 순간 살의도 피어난다. <해피엔드>의 전체적인 톤은 무기력하고 조용히 인간을 갉아먹는 메스꺼움 같은 불안, 때때로 폭발적인 폭력으로 표출되는 비극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극중 보라가 지저분한 일을 저질렀음에도 불구하고 전도연이 캐릭터에 부여한 감정적 깊이 때문에 우리는 그녀에게 동정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보라는 항상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반면, 민기는 금욕적이고 심지어 시들어있는 모습이다. 단란한 가족의 소중함을 알고 있지만 보라는 새로 찾은 사랑의 포로가 되었고, 일범은 두 번째 이별을 상상할 수 없다. 민기는 이미 파탄이 난 부부관계에 큰 미련이 없지만, 가정을 파괴할 생각이 없으며 보라가 가족의 안위를 해칠 행동을 했을 때 분노한다. 어떤 캐릭터도 완전히 잘못했다고 말할 수 없고, 그들의 행동이 완전히 정당화되지도 않는다. 모두 현실에서 벗어나 섹스와 혼외정사, 사진 또는 책을 통해 자신만의 위안을 찾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인물들이 거짓에 의존할 뿐 아니라 그들의 행동은 거짓에 의해 자극을 받는다. 하지만 환상(거짓)에 오래 빠져들수록 현실의 위기는 깊어진다. ‘거짓의 위기’를 통과하는 이 인물들이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해피엔드>는 어떤 의미에서 경제적 몰락이 결혼, 성 역할, 고용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사회적 논평이자 심리적 황폐화, 그리고 일부 관객들에게는 가슴 아픈 로맨스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이야기이다. 이와 관련하여 보라가 떠다니는 풍등을 붙잡으려 애쓰는 <해피엔드>의 몽환적인 라스트 신은 주목할 만하다. 이 장면은 한국영화 사상 가장 아름답고 수수께끼 같은 결말 중 하나이다. 클라이맥스에서 엔딩으로 이어지는 20여 분의 시퀀스는 이전까지 느슨하게 얽혀 있던 서사의 실타래를 태피스트리로 묶어내려는 시도로부터 도리어 멀어진다. 이 신으로 넘어옿기 전 민기는 잔혹한 방식으로 보라를 살해했다. 이야기 안에서 처음으로 응집력 있는 흐름이 발생하고 가시적인 잔학 행위가 벌어지는 국면이다. 촘촘한 형식과 정서적 강렬함을 가진 이 영화의 모호한 결말 구조는 곱씹어볼 만한 여지를 남긴다. 이 혼란스러운 이중 결말은 먼저 민기가 보라를 살해하는 장면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 뒤에는 보라의 죽음을 의심하게 하는 호환되지 않는 결말이 이어진다. 혼란, 우발성, 자의성에 기초한 정지우의 영화를 돌이켜보면 이 이중 결말은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오해의 소지가 있는 연결고리를 미묘하게 도입하여 관객의 반응을 수정하게 만드는 것에 흥미를 느끼는 감독이다. 여기서 정지우는 실패한 관계의 잔해 위에서도 낙관적인 미래를 갈망하는 사람들에 관한 탁월한 미장센을 전개한다. 거울이 놓인 화장실에서 민기가 ‘장미빛 인생’이라고 적힌 성냥 케이스 안에 보관된 은반지를 변기 속에 던져버리고 폴라로이드 사진 안에서 행복하게 웃는 보라의 이미지에 불을 붙이는 순간, 녹아내리는 모양으로 타들어 가는 사진은 아파트 창가에서 담배를 피우는 보라의 이미지로 오버랩된다. 아래를 내려다보는 보라의 시점으로 주황색 풍등이 바람이 실려 떠오르고 걸쇠에 잠시 걸려 보라의 눈앞에 머무르던 풍등이 다시 하늘로 솟아오른다. 손을 뻗어 그것을 잡으려는 보라의 제스쳐에도 불구하고 풍등은 잡히지 않는다. 이어지는 쇼트에서 온화한 햇살 아래 아이와 함께 잠들어있던 민기가 깨어난다. 보라는 그의 곁에 없는 것 같다. 민기는 보라를 살해한 것인가 또는 풍등을 잡으려는 보라의 애절한 몸짓은 민기의 꿈인가? 정지우는 확실히 혼란과 방향 감각의 상실에 관심이 있는 작가이다. < 사랑니 >(2005)와 < 모던 보이 >(2008), < 은교 >(2012)로 이어지는 필모그래피는 자의적이고 우발적인 사건들에 직면함으로써 방향 감각을 잃는 인간에 대한 탐구로 요약될 수 있다. <해피엔드>의 결말이 야기하는 혼란과 방향 감각 상실은 영화의 의미와 방법 모두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일련의 신들의 교환은 현실과 바깥을 왕래하면서 이야기의 목표가 성취되었다는 안도감을 주지 않는다. 결과 없는 원인, 울림 없는 행동, 긴장의 끈이 풀려버리는 이 결론은 민기가 읽고 있는 소설과 비슷하다. 민기의 살인 행각과 소설은 모두 허구이지만 죽음은 실재처럼 보이기도 한다. 영화가 그려내고자 하는 세계를 관객들이 모두 알 수 없다는 사실은 예술이 삶을 모방하고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라는 개념을 가지고 노는 이 영화의 방식이다. <해피엔드>를 한국 사회가 신자유주의와 민주주의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남성의 불안과 폭력에 대한 비판적인 해부도를 제시한 영화라는 평가를 받았다. 정교한 카메라 워크와 편집은 여성 캐릭터가 다양한 비판적 관점을 대변할 수 있게 함으로써 사실, 진실과 허구가 뒤섞인 후기 자본주의 도식 아래서 곪아 터진 분노의 초상화를 통해 남성 관음증의 폭력성과 여성의 새로운 주체성에 대처하지 못하는 남성의 무능력을 그려낸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영화의 내러티브와 비유적 전략은 허구의 인물에게 우연적인 것이 반드시 관객에게 자의적인 것으로 경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한다. 따라서 방향 감각 상실은 영화의 에너지를 소멸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증폭시켜 우리를 새로운 차원으로 이동하게 한다. 이보다 더 생산적인 활동이 있을까?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여명> 이후 ‘과부’ 전문 배우로 전환 이민자(李民子)는 이향이나 김동원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배우가 되었다. 일본 도호(東寶)영화사에서 조감독 생활을 한 안진상(安鎭相)이 처음 메가폰을 잡은 <여명>(1948)을 통해서였다. 해방 후 <안중근사기(史記)>(이구영, 1946)로 한국영화사의 서막을 연 후 34편째 제작된 작품이다. 뇌물을 받고 밀수를 묵인하려던 경찰관(이금룡 분)이 양심의 가책을 받은 나머지 이 사실을 자백, 밀수범을 일망타진케 한다는 밀수 근절용 계몽영화로, 이민자는 여기에서 어촌의 처녀 역을 맡았다. ‘이민자의 섬세한 표정은 앞날이 촉망된다’ (정용배, 「영화평 ‘여명(黎明)을 보고’」, 『자유신문』, 1949.3.25) 는 고무적인 평을 들었다. 이 영화를 제작한 인천의 건설영화사 대표 최철(崔鐵)은 뒷날 배우가 된 최불암의 아버지이다. [사진] 데뷔작 <여명>에서의 이민자 이민자는 2년 후 신상옥의 감독 데뷔작 <악야>(1952)에 여주인공 양공주 역으로 기용돼 다시 카메라 앞에 서게 된다. 6.25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제작이 무산될 뻔했으나 피난지 대구에서 촬영돼 부산에서 빛을 볼 수 있었다. 환도 후 정창화 감독의 <최후의 유혹>(1953)을 출발점으로 <미망인>(박남옥, 1955)을 비롯한 <마의태자>(전창근, 1956), <마인>(한형모, 1957), <유혹의 강>(유두연, 1958), <생명>(이강천, 1958), <어머니의 길>(안현철, 1958), <내가 낳은 검둥이>(김한일, 1959), <행복의 조건>(이봉래, 1959) 등과 <과부>(조긍하, 1960), <내일의 태양>(오영근, 1962), <아낌없이 주련다>(유현목, 1962), <여인천하>(윤봉춘, 1962), <피리 불던 모녀 고개>(강찬우, 1962), <김약국의 딸들>(유현목, 1963), <모녀 기타>(강찬우, 1964), <갯마을>(김수용, 1965), <산호의 문>(엄심호, 1966), <슬픔은 파도를 넘어>(김효천, 1968) 등 모두 140여 편에 출연하게 된다. 절반 이상이 주연이었다. 이 가운데 신경균 감독의 <화심(花心)>(1958), <애모>(1959), <유정무정>(1959), <회정>(1959), <그대 목소리>(1960), <울지 않으련다>(1960), <정조>(1961), <여자의 일생>(1962), <형부와 새 언니>(1964) 등 9편에 출연함으로써 그의 단골배우가 되었다. [사진] <내가 낳은 검둥이>에 출연한 이민자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미망인>에서는 사회윤리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전쟁미망인의 삶을, <유혹의 강>에서는 납북된 남편을 잊지 못해 수절하는 여자의 고행을, <내가 낳은 검둥이>에서는 혼혈아로 인해 겪어야 하는 차별의 비애를, <마인>에서는 복수를 위해 위장 결혼한 여성의 마성을, <모녀 기타>에서는 모진 삶의 시름을 노래로 사르는 극단 가수의 사연을, <아낌없이 주련다>에서는 연하의 청년에게 모성애적 사랑을 쏟는 30대 미망인의 열정을, <김약국의 딸들>에서는 초혼에 과부가 된 큰딸(용숙)의 빗나간 배금주의적 면모를, <갯마을>에서는 풍랑 속에 주체하지 못하는 과부 해녀의 애욕을, 그리고 <산호의 문>에서는 가정교사와 도색행각에 빠진 과부의 회한을 특유의 농염한 몸매와 감정선으로 표출해냈다. 그 대부분이 박복한 미망인, 과부 캐릭터였다. [사진]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연출작 <미망인>에서의 이민자, 오른쪽은 이택균 이와 같은 그녀의 욕망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배역이 바로 <아낌없이 주련다>의 댄스홀 마담 우정원이였다. “어마! 사내 냄새.” 파도가 밀려오는 송도 바닷가에서 막냇동생과 같은 11세 연하의 지배인 하지송(신성일 분)의 품에 안기며 놀란 듯이 쏟아낸 우 마담의 대사는 육감적인 그녀의 개성을 함축한 것으로, 제6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의 트로피를 쥐게 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사진] 이민자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현한 <아낌없이 주련다>의 한 장면 학업마저 포기하고 들어선 배우의 길 이민자는 1929년 4월10일 서울에서 한의사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호적상의 이름은 이용량(李容瑯)이다. 다음은 그녀가 언급한 과거 회상기. “우리 집은 11대 선조가 충무공 할아버지였다는 사실 때문에 가정적으로 항상 엄숙한 분위기가 감도는 편이었다. 그러기에 귀여움을 받는 초등학교 때도 나는 쾌활하고 성미 급한 버릇 때문에 항상 어른들의 꾸중을 많이 들었다. 물론 내적으론 무척 귀여워했겠지만 외형적으로는 항상 근엄한 아버지였다. 내가 서울에서 방산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무학여중(경성 무학여자고등보통학교 : 필자)을 다닐 때였는데, 어느 날 밤 친구들과 같이 한복으로 옷을 바꿔 입고 부모님 몰래 극장에서 현대극장의 공연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이때 마음속으로 “저렇게 화려한 배우가 되어 보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그리하여 다음날 현대극장을 찾아가서 책임자를 만났는데 의외로 반가워하면서 훌륭한 배우가 될 수 있는 소양이 있다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아랑곳하지 않고 배우의 길을 선택한데는, 선천적으로 적극적인 성격을 지녔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민자. 「나의 데뷔 시절을 회상한다」 , 『스크린』, 1964년 9월호) 이용량이 학업을 중단하고 찾아간 곳이 현대극장 연구부였다. 1944년이었다. 현대극장은 1941년 유치진이 함세덕과 함께 이른바 ‘국민연극’을 표방하며 설립한 극단이다. 이민자라는 예명이 알려질 무렵 영화 <태양의 아이들>(최인규, 1944)에 출연하게 된다. 종을 치는 학교급사로 두세 컷에 불과한 단역이었다. 16세 때였다. 이 영화는 섬마을 초등학교 여교사(김신재)가 학생들에게 내선일체 교육을 시켜 군 입대를 독려하는 내용을 담았다. 일제 강점기 아래서 제작(1944년 11월4일 명치좌 상영)된 마지막 영화이기도 하다. 해방 이듬해, 서울 동양극장에서 조선악극단의 뮤지컬 <카츄샤>의 공연이 있었다. 이 작품의 음악 지휘를 맡은 김형래는 김진규와 숙질간이었다. 그는 조카를 단역으로 출연시키고 이민자를 발탁했다. 그녀는 잇따라 같은 해 6월 현대극장과 아랑이 통합해 만든 낙랑극회의 창단공연 <산적>(함세덕 작, 연출)에 황철, 이해랑 등과 함께 출연하고 2개월 후 <산홍(山紅)아, 너만 가고>에 주역으로 나서게 된다. 눈이 크고 살결이 고운 이민자는 이 무렵 7살 연상인 김진규와 결혼하고 첫 아들을 낳았다. 이 같은 행복감 속에서 영화 <여명>에 출연하게 된다. 하지만 무명배우나 다름없던 남편(김진규)이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1955)로 부각돼 인기 스타의 반열에 오르면서 그녀는 두 아들을 둔 채 이혼하게 되는 시련을 겪는다. 1959년이었다. 30대 중반에 이른 남편이 영화 <옥단춘>(1955, 권영순)으로 배우의 길에 나선 열아홉 살 처녀 김보애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에바 가드너’로 불렸던 고혹적인 관능미의 소유자 이민자는 1968년 은퇴 후, 5년 만에 일본 도쿄로 건너가 룸살롱을 경영하며 재일 한국인과 재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듯했으나 이혼 끝에 1986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수용 감독은 자신이 영화 연출에 임하는 태도와 방식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각본을 받으면 주어진 제작 일정과 예산 범위 내에서 등장인물들을 어떻게 운용하고, 영화의 도입부터 결말까지를 어떻게 구성할 것인지 설계한다. 그리고 밤에 잘 때마다 머릿 속에 구축해놓은 영화 한 편을 처음부터 끝까지 ‘본다’. 촬영을 한 부분은 찍은 장면대로, 아직 안 찍은 부분은 콘티대로 연결하면서 작품 전체를 몇 번이고 ‘보는’ 연습을 하다 보면 실제로 제작이 끝나는 시점에는 머릿 속에서 이미 여러 차례 ‘다 본’ 영화대로 완성되는 것이다.” 여기서 ‘본다’는 것은 어떻게 시청각 이미지로 구현하는가를 화두로 잡고 있다는 뜻이다. 그의 표현에 따르면, 영화는 연극이 아니고 라디오극이 아니다. 어떻게 하면 영화적으로 접근하는 화면들을 구축하여 정서와 이야기를 전달할 것인가를 꼼꼼하게 계산했다. 덕분에 촬영 현장을 신속하게 지휘했고, “사람을 지루하게 하는 건 참 싫다”는 본인의 말대로 그는 영화 속에서 불필요한 반복이나 서사 전개가 지연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리하여 김수용은 1958년 데뷔작 <공처가>부터 2000년에 개봉한 <침향>에 이르기까지 무려 109편의 영화를 연출했다. 그가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감독으로 꼽히는 이유는, 기념비적인 다작을 이룬 영화 장인일뿐만 아니라 영상예술로서의 영화에 대한 신념을 일관되게 견지한 영화 작가이기 때문이다. 1950년 서울사범학교 졸업 후, 김수용이 교단에 서자마자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그는 9.28 수복 후에 징집되어 군에 입대한다. 전시에는 통역장교로 근무하고 휴전 후, 1954년에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 배속된다. 근무지는 서울 중구 필동 남산에 위치한 적산가옥이었는데 편집실, 녹음실, 영사실 및 스튜디오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국방부 영화과 시설에서 군 영화뿐만 아니라 당시 한국영화의 거의 모든 작업들이 이루어졌다. 전후 1950년대 중후반에는 민간 현상소나 편집실 등의 후반작업 시설이 전무했기 때문이다. 김수용은 이곳에서 영화인들의 작품 제작 현장을 눈여겨보면서 전반적인 영화 제작 과정을 터득한다. 그 무렵 정훈국 영화과는 종전의 군 뉴스 제작에서 한발 나아가 홍보 및 교육용 문화영화를 시도하였고, 김수용은 군 교육 문화영화 <잊지말자 6.25>(1955)를 감독하며 처음으로 영화 연출을 하게 된다. 이어서 <10분간 휴식>, <윤 중사의 수기>, <해뜨는 마을> 등의 군 영화들을 연출하였는데, <10분간 휴식>은 군인들이 행군 도중 휴식 시간에 나누는 이야기가 영화 속에서 장면화되었다가 현실로 돌아오는 구조로 만들었다. (사진 1)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 근무 당시, 가운데가 김수용 김수용은 <배뱅이굿>(양주남, 1957)의 조감독을 맡아 장편극영화 제작 현장에 참여하고, 군 영화들을 연출하면서 영화감독으로서의 소양을 쌓았다. <배뱅이굿>의 제작자였던 김보철이 이듬해 그에게 영화 <공처가> 연출을 의뢰한다. 그리하여 그는 정훈국 영화과 간부들의 배려 하에 근무시간 외의 시간에 촬영을 진행하여 장편극영화 감독으로 데뷔한다. (사진 2) <공처가>(김수용, 1958) 포스터. 이 작품은 김수용이 현역 군인 시절에 감독으로 데뷔한 작품이다. <공처가>는 장소팔, 김희갑, 구봉서, 백금녀 등의 당대 희극배우들이 주연을 맡은 코미디 드라마였고 관객의 반응을 얻는 데 성공한다. 때문에 “촬영소에 있는 김 대위”에게 연출 의뢰가 계속 들어왔고, 김수용은 <3인의 신부>(1959), <청춘배달>(1959)을 연출하여 그가 군 복무 시절에 감독한 작품들은 총 3편이다. (사진 3) <청춘배달>(김수용, 1959)을 관람하기 위해 명보극장에 모여든 관객 이후 군복을 벗고 본격적인 직업 영화감독의 세계에 들어선 김수용은 <애상>(1959)을 시작으로 왕성한 작품 활동을 펼쳤고,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서 촬영을 담당했던 전조명과 장석준이 그의 작품들을 다수 촬영한다. 전조명은 <3인의 신부>(1959)의 촬영감독으로 데뷔하여 <혈맥>(1963), <굴비>(1963), <갯마을>(1965), <일요일의 손님들>(1973), <도시로 간 처녀>(1981) 등의 작품들을 촬영했고, 장석준은 <구혼결사대>(1959)를 시작으로 <버림받은 천사>(1960), <만선>(1967), <안개>(1967), <일본인>(1968), <봄봄>(1969), <토지>(1974) 등의 작품들을 촬영했다. (사진 4) 모파상의 소설 「 귀향 」 을 번안한 영화 <돌아온 사나이>(김수용, 1960)의 스틸사진. 주인공 박남우(배우 김진규)는 전쟁터에서 당한 부상 때문에 얼굴에 심한 화상 흉터가 있다. 영화 속에서 실감나는 화상 특수 분장으로 등장한다. 1962년에는 한양영화공사가 홍콩과 합작한 <손오공(원제 화염산(火焰山)>의 한국 측 감독을 맡아 홍콩에서 연출한다. 한국 배우 김희갑, 김지미, 조미령, 양훈, 최무룡, 양미희 등이 출연했다. 손오공 일행의 여정이 중화권에서는 익숙한 이야기로 해마다 영화화되었지만, 김수용은 한국 관객을 감안했을 때 캐릭터 및 설정 소개가 필요하다고 판단하여 직접 영화 도입부를 작성하여 추가 촬영했다고 한다. (사진 5) <손오공(원제 화염산 火焰山)>(김수용, 1962) 촬영현장. 김수용 감독(오른쪽에서 두 번째)이 손오공 역을 맡은 배우 김희갑(왼쪽에서 두 번째)에게 연기 지도를 하고 있다. 이후 한국으로 돌아와서 <사춘기여 안녕>(1962), <청춘교실>(1963)과 같은 청춘물 등을 선보이고, 1963년에 그의 초기 대표작으로 꼽히는 <굴비>, <혈맥>을 연출한다. 두 작품은 각각 라디오극과 연극 원작으로 김수용은 이를 영화적으로 소화하는 데 심혈을 기울인다. <혈맥>은 원작 희곡이 방공호 토굴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것을 영화적으로 장면화 하기 위해 판잣집으로 바꾸고, 서울역 근처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에 판자촌 오픈 세트를 짓고 촬영했다. 도시 빈민의 현실을 그리고 있지만 인물 각자의 개성을 활력있게 그려내어 극이 암울하거나 무겁게만 느껴지지 않도록 연출했다. 이 작품은 1963년 청룡영화상, 1964년 대종상 주연상 · 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사진 6) <혈맥>(김수용, 1963)에서 열연한 배우 김승호(왼쪽)와 조미령(오른쪽) 1965년 작 <갯마을>은 오영수의 단편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김수용은 바다에 운명을 맡기고 살아가는 어촌 마을의 이야기에서 한국적인 드라마를 발견하고, 여배우들의 개성 있는 연기를 발현해보겠다는 목표를 세웠다. 시집 오자마자 남편이 바다에서 실종된 주인공 해순을 비롯하여, 마을 아낙네 대다수가 과부로 동병상련을 나누며 삶의 애환을 함께 한다. 이들이 해질녘 해변가에서 망중한을 즐기는 장면에는 영화음악가 정윤주가 제안한 국악인 김소희의 창이 깔린다. 이 소리와 여인들의 건강한 육체가 바다를 배경으로 아름답게 어우러져, 인물들이 고난을 견뎌가는 명랑함이 서정적으로 전해진다. (사진 7) <갯마을>(김수용, 1965) 중 해변가 망중한 시퀀스. 김수용이 연출한 연기 앙상블, 전조명 촬영 감독이 담아낸 유려한 미장센 그리고 김소희의 창이 어우러져 탄생한 명장면이다. <갯마을>은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여 문예영화의 흥행가능성을 보여준 작품이 되었고, 이후 수많은 문예영화들이 기획·제작되는 데에 영향을 끼쳤다. (사진 8) <갯마을> 출연진을 연기 지도 중인 김수용(왼쪽). 누워있는 이가 배우 이낙훈이고 오른쪽부터 배우 신영균, 고은아, 황정순 (사진 9) <갯마을>의 촬영감독인 전조명(왼쪽)과 김수용 “바다 냄새까지도 스크린에 담고자 했다”는 <갯마을> 이후 김수용은 바다를 테마로 한 작품 <만선>(1967), <물보라>(1980)를 연출했고, 이 작품들에 대한 애정을 표한 바 있다. <만선>은 천승세의 희곡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바다에 생계와 목숨을 걸고 분투하는 어촌민들을 그려냈다. 당대 최정예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여, 만선으로 돌아와도 선주(船主)로부터 제 몫을 받을 수 없는 어부들의 갈등과 바다에 자식을 잃은 가족의 비애와 사랑을 열연한다. (사진 10) <만선>(김수용, 1967)에서 만선의 기쁨을 누리는 어부들. 가운데가 곰치 역을 맡은 배우 김승호 (사진 11) <만선>에서 임금 문제로 선주와 갈등하는 어부들. 맨 앞이 배우 김승호, 그 뒤로 허장강(왼쪽 세 번째)과 김칠성(왼쪽 다섯 번째) (사진 12) <만선>에서 폭풍우를 겪고 만신창이로 돌아온 배를 맞이하는 마을 사람들. 앞줄 오른쪽부터 배우 남정임, 주증녀, 김칠성 한편 <갯마을>과 같은 해에 개봉한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1965년 최고 흥행작으로, 초등학생 이윤복이 쓴 일기인 『저 하늘에도 슬픔이: 11세 소년이 외치는 인간의 소리』(서울: 신태양사, 1964)를 영화화했다. 가난이라는 굴레에 쓰러지지 않고자 애쓰는 윤복이의 여정이 동요 따오기 선율과 함께 마음 아리면서도 담대하게 펼쳐진다. (사진 13) <저 하늘에도 슬픔이>(김수용, 1965)에서 윤복이네 식구가 사과로 끼니를 때우는 장면. 윤복의 아버지로 출연한 배우 장민호(가운데)는 이 영화의 제작자이기도 하다. 왼쪽부터 배우 정해정(순나 역), 김천만(윤복 역), 이지연(태순 역), 김용연(윤식 역) (사진 14)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서 윤복(왼쪽)에게 일기가 책으로 출간된 사실을 알려주는 약사(오른쪽)로 출연한 최현민은 이 영화의 기획자이자 희곡 <만선>을 연출한 연극인이기도 하다. 한편 이 영화는 대만에서 <추상촌초심 秋霜寸草心>이라는 제목으로 상영되었다. 아역 배우들의 연기가 출충하고, 특히 배우 김천만(이윤복 역)은 이후 김수용이 연출한 <맨발의 영광>(1968)에서도 서울시립아동보호소 축구팀원으로 열연한다. (사진 15) <맨발의 영광>(김수용, 1968)에서 헝겊으로 만든 공을 가지고 맨발로 축구 연습을 하는 진호(왼쪽, 배우 김천만) 이외에도 김수용은 <사격장의 아이들>(1967), <가위 바위 보>(1976), <달려라 만석아>(1979) 등의 어린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작품을 다수 연출했다. 교단에 서자마자 전쟁이 발발하여 뜻하지 않게 학생들과 헤어졌던 기억을 갖고 있는 그는 항상 아이들에게 각별한 관심을 품어왔고, 아역들이 촬영장에서 위축되지 않고 기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었다. (사진 16)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 아역 배우에게 연기 지도 중인 김수용(왼쪽)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은 휴전선 근처 군 사격장 인근 마을에서 포탄 파편을 주워 생계를 돕는 아이들을 통해 전후에도 지속되는 전쟁의 상처를 그려낸다. 이 영화는 기적 같은 행운이나 해결책 없이, 아이들이 겪고 있는 비극적인 현실을 냉정하게 제시하는 채로 끝나는데 바로 이 점이 작품을 울림 있게 한다. (사진 17)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의 한장면. 아이들이 행여 불발탈이면 폭발할지도 모르는 탄피를 안고 서로 차지하겠다고 뒹구는 장면들은 보는 이를 안타깝게 한다. (사진 18) <사격장의 아이들>(김수용, 1967)에서 영규(배우 송현규)는 불발탄이 터지는 바람에 머리를 다치고 고막이 터진다. 연기 경험이 없던 아역 송현규의 자연스러운 연기가 호평을 받았고, 김수용은 이 작품으로 제5회 청룡영화상 감독상을 수상했다. 1966년 한국영화 흥행 1위 역시 김수용이 연출한 작품 <유정>이다. 서울 개봉 관객만 32만명을 돌파하여 전년도 자신이 세운 흥행 기록(<저 하늘에도 슬픔이>(1965) 서울 개봉 관객 28만 돌파)을 갱신했다. 이광수 소설을 영화화한 <유정>은 일본 로케 촬영으로 북해도 설경을 담아낸 컬러 작품이고, 배우 남정임의 데뷔작이다. 김수용은 소수의 스타들에게만 작품이 집중되는 한국영화 제작 관행을 타파하고 연기자층을 넓히기 위해, 기성 배우들의 아성에 도전하는 신인 배우들을 육성하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그가 영화배우로 발굴한 남정임은 여배우 트로이카(남정임, 문희, 윤정희) 중 한 명으로 성장했고 한성, 이훈, 최난경, 주연, 김정철, 임지운 등이 당시 김수용이 주목한 신인 배우들이었다. 이후 강석우(<여수>(김수용, 1978) 주연), 금보라(<물보라>(김수용, 1980) 주연) 등이 그의 작품을 통해 배우로 데뷔하여 활발히 활동했다. (사진 19)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에서 배우 한성(왼쪽)과 배우 전계현(오른쪽). 한성은 이 작품에서 겹치기 출연을 하느라 바쁜 톱스타로 등장한다. (사진 20) <웃음소리>(김수용, 1978)에서 주인공 학자를 연기한 배우 남정임. 김수용 감독 작품으로 데뷔하고 은퇴한 배우 남정임의 마지막 영화 출연작이다. 1967년에는 김수용이 데뷔 9년차 감독으로서 이제껏 그의 연출작들에서 함께 일해 왔던 스태프들과 이상적인 호흡을 자랑하는 일종의 ‘드림팀’을 갖추게 된다. 이러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만든 <만선>, <어느 여배우의 고백>, <산불>, <안개>, <사격장의 아이들>, <까치소리> 등은 한국영화사에 길이 남는 수작으로 꼽힌다. (사진 21) <산불>(김수용, 1967) 촬영 현장을 지휘하는 김수용(가운데 흰 모자 쓴 사람). 그는 1977년에 이 작품을 컬러 영화로 스스로 리메이크 하기도 했다. (사진 22) <산불>(김수용, 1967)에서 열연하는 배우 신영균(왼쪽)과 도금봉(오른쪽). 차범석의 동명 희곡을 영화화했다. 한국전쟁으로 여인들만 남아있는 마을에 빨치산 규복이 숨어든다. 그를 둘러싼 여인들의 욕망과 파국을 통해 전쟁의 비극을 이야기한다. <어느 여배우의 고백>(1967)은 1960년대 한국영화계를 배경으로 한 ‘영화에 대한 영화’이다. 주연 배우들이 실명으로 출연하고 당시 영화 제작 현장과 기자재들, 스태프들 그리고 이른바 ‘충무로 영화인들’의 문화와 실정이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심지어 김수용 본인도 감독으로 출연한다. 왜냐하면 이 작품의 제작에 투자한 지방흥행사(<어느 여배우의 고백>에는 호남 흥행사가 제작자와 면담하는 장면도 있다)가 흥행 감독으로 유명한 김수용의 모습도 관객들이 스크린에서 보길 원한다며, 감독이 직접 출연할 것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이는 당대 관객들의 관심이 관람하는 영화 뿐만 아니라 이러한 영화를 ‘만드는 이’와 한국영화계로까지 확장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사진23)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에서 영화감독으로 출연하는 전창근 감독 (사진24)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위의 컷 다음에 등장하는 영화 촬영 장면에서 김수용 본인(썬글라스를 쓴 사람)이 감독으로 출연한다. (사진25)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촬영 현장에서 배우 김진규(왼쪽)와 김수용(오른쪽). 이 작품에서 김진규는 신인 배우 남정임을 지원하는 원로 배우로 출연한다. 한국 모더니즘 영화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안개>(김수용, 1967)는 한국영화의 혁신을 목표로 기획되었다고 한다(제작 김동수· 황혜미, 원작·각본 김승옥). 김승옥의 소설 「무진기행」을 영화화한 <안개>는 입도선매 없는 자체 제작이었고, 제작자들의 간섭도 없었기 때문에 감독이 비교적 구애받는 바 없이 작품에 몰두할 수 있었다. 이를 김수용은 이제껏 쌓아온 영화연출 역량을 제약 없이 발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겼다. 그리하여 주인공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실재와 환상, 현재와 과거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새로운 감각의 작품으로 연출했다. (사진26) <안개>(김수용, 1967)에서 기준(오른쪽, 배우 신성일)의 고향인 무진으로 가는 버스 안. 뒤쪽 엑스트라 중 모자 쓰고 담배 문 사람이 원작자인 소설가 김승옥이다. <안개>는 1967년 제14회 아시아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면서 한국의 모더니즘 영화로 주목 받고, 관객의 호응도 얻었다. 일찍이 김수용은 <굴비>(1963)를 감독할 무렵부터 기존의 인습적인 한국영화 표현 방식에 회의를 느끼고, 이를 탈피하는 연출을 강구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한 시도는 앞서 <갯마을>(1965)의 ‘시네포엠’적인 몽타주나 <까치소리>(1967)에서 의식의 흐름을 영상화한 장면들에서도 볼 수 있으며, 이후 김수용 특유의 영화적 개성으로 발전한다. <야행>(김수용, 1973년 제작·1977년 개봉)은 그가 “시간과 공간이 항상 유동적이고 주인공이 잘 흔들리고 있다.” 1) 는 점에서 <안개>와 비슷한 시나리오라고 회고한 작품이다. 프리즈 프레임을 통한 비약과 플래쉬백, 점프컷 등을 활용하여 주인공의 심상을 예상치 못한 방향과 템포로, 때로는 권태롭게 때로는 위트 있게 표현한다. <화려한 외출>(1977), <웃음소리>(1978)에서도 선형적인 시공간 구성을 탈피하고, 인물의 내면을 대사 없이 영상과 사운드만으로 직조하는 과감한 시도를 전개하기도 했다. (사진27) <야행>(김수용, 1977)에서 길 가던 행인이 던지는 추파를 거절하는 주인공 현주(배우 윤정희) <수전지대>(김수용, 1968)는 김수용의 조감독이었던 이원세 감독의 오리지널 시나리오(68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시나리오부문 입선작)를 영화화했다. 어릴 적 염전마을에서 자라난 이원세 감독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 문예영화를 다수 연출했던 김수용은 그의 조감독들에게 장차 감독이 되려면 문학적 감수성과 글쓰기에 대한 이해를 갖추고, 반드시 시나리오를 쓸 것을 당부했다. 그렇게 김수용의 조감독을 거쳐 데뷔한 감독들로는 조문진, 이원세, 김수형, 정지영, 장길수 등이 있다. (사진28) <수전지대>(김수용, 1968)에서 아낙네들이 소금을 훔치는 장면. 염전마을 사람들은 낮에는 소금밭에서 일하고, 밤이 되면 그 소금을 훔쳐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사진29) 동료 감독들과 야유회. 1960년대 후반, 왼쪽부터 이만희 감독, 김수용 감독, 김기덕 감독 1970년대에도 김수용은 소설을 원작으로 한 <토지>(1974), <극락조>(1975), <황토>(1975), <내일은 진실>(1975), <내 마음의 풍차>(1976), <발가락이 닮았다>(1976), <야행>(1977), <화려한 외출>(1977), <웃음소리>(1978), <망명의 늪>(1978), <사랑의 조건>(1979) 등을 연출하는 한편 70년대 초반에는 홍콩 영화제작사 쇼브라더스의 초청을 받아 홍콩에서 <와와후링 娃娃夫人>, <우중화 雨中花>를 연출했다. 그리고 미국으로 건너가 1970년대 초반 할리우드와 미국 영화들을 접하고 돌아온다. 그는 당시 홍콩, 미국 영화계를 방문하고 영화 자본 및 기술력 측면에서 동시대 한국영화계와의 격차를 절감했다고 한다. 70년대 한국영화 시장은 침체기에 접어들었고, 검열에 발목이 잡히는 작품들도 적지 않았다. 김수용이 연출한 <가위 바위 보>(1976)는 베트남에서 서울로 피난 온 아이들이 엄마를 잃고 고아가 되어 뿔뿔이 흩어지게 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베트남 패망을 이유로 주인공이 베트남 국기를 든 모습이 검열 제재를 받는다. <망명의 늪>(김수용, 1978)은 “70년대라는 특수상황 속에서 그것도 영화라는 간섭 심한 장르를 통해서 위선적 지식인을 비판한 것은 감독이 아직 작가로서의 한 가닥 맥박이 뛰고 있음을 증명한 것이다.” 2) 라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당시 군사문화에 익숙한 지식인을 통해 ‘인간의 양심을 묻는 영화’라는 이유로 상영 제재를 가한 당국의 권유로 인해 제작비만 보상 받고 창고 속에 묻혀있었다고 한다. 80년대에도 상황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도시로 간 처녀>(김수용, 1981)는 버스안내양들의 열악한 근로환경과 비인간적인 처우 등을 다루었는데, 상영 중지 및 작품 수정, 재상영 등의 고초를 겪었다. 당시 영화평론가협회는 ‘<도시로 간 처녀>의 상영중지에 대한 우리의 주장’이라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영화 창작의 자유에 관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삐에로와 국화>(김수용, 1982)는 영화 속 북한의 모습이 “너무 잘 그려졌다”는 이유로 용공 시비에 휘말려 당국으로부터 재촬영을 강요받았다고 한다. 이와 같이 연이어 작품 연출에 제약을 받는 와중에, 그가 의도적으로 서정적인 작품을 선택하여 검열 제재를 피하고자 한 영화가 <만추>(김수용, 1981)이다. 이 작품은 주연을 맡은 배우 김혜자의 호연과 더불어 늦가을이라는 짧은 시간을 배경으로 정일성 촬영 감독의 수려한 화면이 더해져, 원작인 이만희 감독의 <만추>(1966)와 함께 수작으로 꼽힌다. 그러나 중광의 삶을 다룬 <허튼 소리>(김수용, 1986)가 공연윤리위원회의 심의 과정에서 10여개 장면이 잘려나갔고, 김수용은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영화계 은퇴를 선언했다. 대학에서 후진 양성에 매진하던 그는 동료 교수이자 극작가 차범석의 권유로 1995년 일본영화 <사랑의 묵시록>을 연출하여 10여년만에 감독으로 복귀하고, 1999년 김지헌 작가와 정일성 촬영 감독과 의기투합한 ‘K.J.K필름’이란 이름으로 제작한 <침향>을 연출했다. (사진30) <만추>(김수용,1981)의 해외용 포스터. 주연 배우 김혜자가 제2회 마닐라국제영화제(1983)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김수용 감독은 당대 관객에게 소구되거나 당대 영화정책에 따른 제작 환경이 요청하는 작품들 모두를 다양하게 만들었다. 데뷔작부터 두각을 보인 코미디영화를 시작으로 청춘영화, 사극영화, 멜로영화, 문예영화 등의 여러 장르를 연출했다. 그는 빈민촌의 고단한 인생살이부터 오픈카를 타고 등교하는 최상류층 대학생들의 청춘까지 다양한 소재와 이야기를 소화하는 폭넓은 스펙트럼의 영화연출력을 갖춘 감독이었다. 그는 철저한 사전 콘티 작업과 함께 “제작기간을 지연시키는 일은 하지 않았고, 밝고 빠른 템포의 즐거운 필름을 칼날같이 약속기한 내에 만들어내는 것을 특기로 삼았다.” 3) 이처럼 김수용은 제작자와 관객, 평단 모두를 만족시키는 영화감독으로서,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를 이끌었다. 그가 사회적 약자인 어린이들을 다룬 작품들은 아동물로만 소통되지 않고, 전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아 한국 대중영화의 폭을 넓히는 데 일조했다. 또한 문학적 감수성을 스크린에 발현하여 문예영화의 부흥을 이끄는 한편 자신만의 직관과 개성을 담은 영상 표현을 시도하여 한국영화 화법에 새로운 결을 가져왔다. 김수용의 영화 세계가 선사하는 대담한 담대함, 그리고 특유의 리듬과 위트는 세월이 변해도 관객을 흔드는 영화적 감각, 영화적 체험이다. 1) 권용숙,「김수용」,『한국영화사 구술채록 연구 시리즈 <생애사>』, 2012, 한국영상자료원, 351쪽. 2) 영화평론가 정용탁,「79 문화회고 <6> 영화」,《동아일보》, 1979년 12월 27일. 3) 김수용,「연출기: <혈맥>과 나」, <혈맥> DVD 소책자, 한국영상자료원 제공, 블루키노, 2012, 6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