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정무한
- 감독
- 전택이
- 제작년도
- 1958
- 출연
- 이택균, 최지희, 노경희, 황정순, 한림, 이미, 나유, 고 보슈, 동진, 차보요, 전택이
약초극장은 대정관의 운영자 오카모토 세이지로(岡本淸次郞)가 대정관의 흥행권을 가지고 1935년 12월 경성부 약초정 41번지에 설립한 영화관이다. 약초극장의 설립은 대정관과 관련이 있다. 1934년 7월 쇼치쿠가 오랜 파트너인 대정관을 대신하여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를 쇼치쿠의 경성 개봉관으로 바꾸자, 쇼치쿠 2번관으로 전락한 대정관은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게 된다. 1934년 10월 후쿠자키 하마노스케(福崎濱之助)에 이어 대정관을 운영하게 된 오카모도 세이지로는 대정관이 쇼치쿠 2번관으로 남느니 후발주자인 PCL의 경성 봉절관이 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동년 11월 15일 PCL과 경성 봉절관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대정관은 서울의 가장 오랜 영화관이자 낙후한 극장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열악한 상태였기에 PCL의 경성 봉절관의 지위도 동아구락부로 넘어가게 된다. 대정관에서는 다이토(大都)의 영화를 상영하면서 향후 쇼치쿠영화의 경성봉절관이 되기 위해 약초정 큰길가에 약초영화극장을 신축하기로 한다. 1935년 7월 건축허가를 얻은 오카모도는 9월 말 상량식을 거행하고 극장 설립 공사를 시작한다. 극장의 설계는 조선공업협회 부회장 가와자와 미치마사(川澤道正)가 담당했으며, 건축은 이쿠타구미(生田組)에서 맡았다. 총 공사비 218,000원을 들인 이 극장은 대지 면적 약 300평, 건축연면적은 658평에 철골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지상 4층 건물이었으며 총 좌석수 1,172석(1943년 현재 1,000석)의 대형극장으로 2개층의 관람석을 가진 순수 영화관으로 계획되었다. 1935년 12월 16일 대정관이 문을 닫았고 경성 최초의 신양식 대영화극장(“京城 最初의 新樣式 大映畵劇場)”으로 광고된 약초극장은 1935년 12월 30일 낙성식을 거행한 후, 다음날인 12월 31일부터 흥행을 시작했다. 개관 기념 작품으로 유니버설 초특작 괴기영화 <화석인간>(Night Life of the Gods, 1935)과 다이토(大都)영화사의 <검운용호당>(劍雲龍虎黨)과 <말괄량이와 소년>(ジャジャ馬と坊や)이 상영되었다. 쇼치쿠의 경성 봉절관이 되려는 시도는 쇼치쿠가 명치좌(明治座)의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와 손을 잡으면서 실패했다. 약초극장은 1930년대 들어선 1,000석 이상의 거대한 토키극장의 효시였다. 황금좌, 명치좌, 경성극장과 더불어 4대 상설관으로 조선의 극장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보니 당국에서는 이들 1류급 극장들을 각종 선전활동에 이용했는데 중일전쟁 발발 이후인 1938년 12월 본정경찰서에서는 약초극장과 더불어 명치좌, 황금좌, 낭화관에 아래와 같은 방첩표어를 게시하도록 했다. 1. 우리들 총후국민은 힘을 다하여 스파이의 암약을 방지하자. 2. 우리들 총후국민은 군기를 잘 지킴으로써 군기보호를 다하자. 3. 우리들 총후국민은 정치경제 각반의 국정의 비밀을 잘 지킴으로써 국방력을 한층 더 굳세게 하자 4. 우리들 총후국민은 황도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항상 눈과 귀를 잘 활용함으로써 스파이를 없이하자. 오카모토흥행부가 맡아 운영하던 약초극장은 개관 초기 서양영화를 위주로 프로그램을 편성하였다가 점차 일본영화를 늘려나갔다. 서양영화의 경우 계통과 상관없이 자율 배급이던 상황에서 1935년부터 1939년 사이에는 할리우드 영화를 주로 상영했으며 할리우드 영화의 상영이 금지된 이후에는 독일 영화를 주로 상영하였다. 일본영화의 경우 개관 초기 다이토영화가 토키영화관에 걸맞지 않은 프로그램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자 1936년 4월 이후에는 PCL 영화로 계통을 바꿔 상영하였다. 경성의 PCL 봉절관으로 인식되던 약초극장은 1940년에 일어난 9개월에 걸친 흥행권 분규로 큰 손해를 입기도 했다. 사건의 발단은 1940년 2월 약초영화극장이 PCL의 후신인 도호(東寶) 영화의 경성개봉관 지위를 포기하고 신코키네마(新興キネマ)와 계약을 체결하여 신코의 개봉관이 되자 도호가 위약금 5만원을 청구하였다. 도호의 소송에 약초극장이 신코키네마와 계약을 해지하고 다시 도호영화를 상영하기로 결정하자 이번에는 신코키네마에서 약초극장에 대해 7만원의 소송을 시작했다. 도호와 신코를 대상으로 한 흥행권 계약 문제는 결국 약초극장 운영자 오카모도 세이지로가 신코에 위약금 1만 5천원을 지불하고 도호영화를 계속 상영하기로 확정하면서 9개월에 걸친 분규는 일단락된다. [자료] 1941년 6월 설립된 약초악극단(《매일신보》, 1941.06.08) 중일전쟁이 장기화 되어 필름 부족현상이 일어나자 약초극장에서는 어트랙션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악극을 영화와 함께 상연하기로 하고 전속의 악극단을 두기로 하고, 1941년 6월 조선연예기업사 사장 안익조가 주재하는 신흥악극단을 전속으로 삼았다. 신흥악극단이 이름을 바꾼 약초악극단 내에는 정대택, 김영택, 백란, 김연실 등 연극, 영화계에서 활약하는 인물들과 밴드까지 60여명의 단원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개막 공연작은 박운학 연출의 <그리운 멜로디>, <반도의 선율> 등이었다. 약초극장의 어트랙션의 큰 인기를 끌면서 1941년 7월 말부터는 <바다의 카니발>(전13곡)로 프로그램을 바꿔가며 연장공연을 계속했다. 전속의 악극단을 둔 약초극장은 1941년 8월 8일부터 9월 2일까지 무대공연에 걸맞게 개축하게 된다. 1943년에는 무대 공연활동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극장 전속의 가극단을 조직했다. 이번에는 기성의 극단과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아닌 약초극장 주인 오카모토 세이지로가 대표가 되어 가극단을 조직한 것이다. 총무는 약초극장의 지배인 우라노 하지메(浦野元), 연출은 김승구, 작곡은 이면상, 단원으로는 김옥춘, 현정남 등이 포진되었다. 1943년 7월 27일 당국에 정식 인가를 받은 약초가극단은 8월 8일 약초극장에서 첫 공연을 했다. [자료] 연극전용관으로 전환한 약초극장 전속 약초가극단의 공연 광고(《매일신보》, 1944.11.23) [자료] 약초흥행주식회사 직속극단 현대극장의 <봉선화> 공연 광고(《매일신보》, 1945.05.15) 영화관으로 운영되던 약초극장은 1944년 11월 23일 연극전문관으로 전환하게 된다. 약초극장에서는 예원좌(<별의 합창>, <봄바람>, <어머니와 아들>, <눈 나리는 밤>), 고협(<흰독수리>, <삼남매>, <만리장성>, <상아탑에서>, <양자강>), 현대극장(<백야>, <청춘의 윤리>, <대추나무>, <에밀레종>, <애정무한>), 극단 태양(<야화>)의 연극공연과 후생악단, 경성교향악단의 음악회, 후지하라 요시에의 독창회, 약초가극단(탐정활극 <여간첩>), 경성악극단, 조택원무용단의 공연이 이어졌다. 1945년 5월에는 약초가극단 이외에 유치진이 주재하던 현대극장을 약초흥행주식회사의 직속극단으로 두었으며 약초극장에 뿌리를 둔 약초흥행주식회사는 해방 전까지 약초가극단과 현대극장을 거느린 흥행전문회사로 진화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약초흥행주식회사의 간부로 있던 홍찬이 적산관리인으로 있으며 약초극장을 인수하였으며 이름도 수도극장으로 바꾸었다. 해방 직후 수도극장의 프로그램은 연극과 악극이 주였으나 할리우드 영화가 본격적으로 상영되기 시작하자 서울의 대표적인 할리우드 영화 개봉관으로 이용되었다. 수도극장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키우던 홍찬은 무리하게 안양촬영소를 건설하면서 생긴 자금난으로 1959년 부도가 났고 수도극장은 매각되었다. 1962년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된 수도극장은 이름을 스카라극장으로 바꾸었다. 2005년까지 존속하던 이 극장은 정부에서 근대 문화유산으로 등록하여 보호하려 하자 소유주가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있다는 이유로 헐어버리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약초영화극장의 기공을 알리는 신문기사(《조선신문》, 1935.07.17.) [자료] 《 조선중앙일보 》 , 1936.03.29. 조택원 ( 趙澤元 ) 무용회 , 4 月 6 日 , 10 日 까지 , 약초극장 에서 무용가 조택원 ( 舞踊家 趙澤元 ) 씨는 오는 사월 육일부터 십일까지 약초극장 ( 若草劇場 ) 에서 무용회를 연다는 바 무용 종목은 『 일허진 혼 ( 魂 ) 』 외 아홉까지나 된다는 바 조택원 씨 외 연구소원 일동이 총출연하는데 이번에는 주야 공연이라고. [자료] 《 매일신보 》 , 1937.07.15. 북촌 유일의 영화극장 단성사 , 연극으로 전향 , 중앙무대와 계약 성립 북촌 유일의 양화전문 영화극장으로서 남북촌의 영화 『 팬 』 들의 인기를 독점하고 잇든 단성사는 강력한 경쟁 상대의 진출에 의하야 순 ( 純 ) 영화극장으로서 경영해 나가기 곤란을 느끼게 되어 벌서부터 연극상설관으로 전향한다는 풍문이 돌드니 드듸어 칠월 삼십일일부터 연극을 상연하기로 극단 중앙무대와 간에 계약이 성립되였다고 한다 . 수년전ᄭᅡ지는 경성 유일의 양화봉절관으로 독보 ( 獨步 ) 해오든 단성사도 경성의 흥행시장을 노리는 외래의 대자본의 진출에 의해서 명치좌 약초극장 갓흔 대 ( 大 ) 영화극장들이 생기게 되자 이 영화 『 팬 』 유치에 비책을 다하게 되엿스나 단성사는 극장의 협착 ( 狹窄 ) 이라는 『 핸듸 - 캡 』 이 잇슬 뿐 아니라 경쟁이 초래한 양화가격의 등귀 ( 騰貴 ) 로 인하야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잇드니 최근에는 해마다 잇는 일이나 하절이 되자 관람객이 붓적 줄어버리고 말았음으로 그 타개책을 연극으로 전향하는데서 구해보게 된 것이다 . 금후로는 흥행기업에 이해를 가진 대자본의 적극적 진출에 의하야 냉방 , 온방 , 장치 등 새로운 설비를 구비한 대극장을 신축하기 전에는 일류 양화극장으로서의 존속은 허락지 않는 정세에 잇슴으로 만일 단성사가 영영 연극극장으로 전향하야 버린다면 이로써 조선인 경영의 영화극장은 그 자최를 감춰버리게 되는 세음인데 중앙무대와 단성사 간의 계약 성립에 관하야 양측 관계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위선 ( 爲先 ) 삼주간의 계약 , 중앙무대 홍찬 ( 洪燦 ) 씨 담 ( 談 ) 중앙무대는 제 2 회 공연ᄭᅡ지를 부민관에서 햇고 삼회 공연 역시 이십일일부터 부민관에서 할 예정이나 부민관은 연극을 상연하기에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만흘 ᄲᅮᆫ 아니라 집대 ( 貸 ) 가 워낙 비싸기 ᄯᅢ문에 경비가 만히 들고 해서 단성사와 위선 칠월 삼십일일부터 삼주간의 계약을 매젓습니다 . 앞으로 장기계약을 맺을지 어ᄯᅥᆯ지는 두고 보아야 알겟습니다 . 시험적으로 연극을 해볼터 , 단성사 박응면 ( 朴應冕 ) 씨 담 아시는 바와 가티 최근의 양화가격이 무척 비싸진 데다가 협착한 단성사로서는 수용인원이 수배되는 상대와 경쟁하기에는 힘이 들고 기외에 말못할 불리한 사정이 잇는데다가 금년에는 웬일인지 소위 『 하고 ( 夏枯 ) 』 가 우심 ( 尤甚 ) 함으로 이 타개책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ᄭᅳᆺ해 연극을 해보기로 햇습니다 . 중앙무대와 결정적으로 계약이 확정된 것은 아니나 금명간 확정을 볼 것입니다 . 여름 『 씨 - 슨 』 이 지나고 가을에도 역시 연극을 계속 할지 ᄯᅩ는 다시 영화를 상영할지는 아직 미정입니다 . 좌우간 연극을 공연시켜보아 그 성적 여하에 따라 결정할 작정입니다 . 최근 더욱이 악해진 흥행계에서 적은 자본으로 다수한 경쟁자를 상대로 싸워 나가기에는 남이 모르는 여러 가지 고심이 숨어잇습니다 . [ 자료 ] 《 매일신보 》 , 1945.05.16. 현대극장과 약초의 제휴 국민극 수립을 표방하고 성립된 현대극장은 그동안 고정한 극장이 없어 상연할 적마다 장소가 갈니여서 그 활동이 얼마간 ○○ 되어 왓는데 이번에 새로 생긴 약초흥행주식회사와 특수계약 ( 特殊契約 ) 이 결성되여 매월 정기 공연을 하게 되엇다 . 압흐로 동 극단은 약초극장을 중심으로 하야 연극활동을 하게 될 것으로서 이와 갓흔 극단과 극장의 합리적 제휴는 크게 그 장래가 주목된다 .
“그녀는 어머니 역할을 많이 하여 한국의 어머니란 소리를 들을 정도지만 그러나 그녀가 표현하는 어머니는 시츄에이션에 따라 모두 다르다. 말하자면 누구보다 제대로 변신을 할 줄 아는 배우인 것이다.” -연출가 이해랑, 1967년“ 1) 2014년 연기자 황정순이 타계했을 때, 세상은 ‘한국영화의 영원한 어머니’가 떠난 것을 추모했다. 그녀는 1940년 동양극장 전속 극단 청춘좌의 연구생으로 연기를 시작한 이래로 연극, 라디오드라마, 영화, TV드라마를 넘나들며 폭넓은 연기 활동을 펼쳤다. 10대에 연기를 시작하여 마지막으로 무대에 섰던 80세까지(2005년) 오로지 연기에만 전념했다. 그녀가 평생을 바친 연기 인생을 단지 ‘어머니’ 전문 배우라는 한가지 인상만으로 설명하기는 부족하다. 황정순은 다층적이고 깊이 있는 감성을 개성 있는 연기를 통해 선사했다. 황정순은 1925년 경기도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손윗 남매들도 일찍 세상을 떠나 오빠만 남게 되었다. 홀로 된 어머니가 막내 외동딸은 오래 살길 바라며 위해준 덕분에 귀하게 자랐다. 학창시절에 서울로 수학여행을 가서 영화를 처음 본 것이 <타잔>이었다. 스크린 위에 펼쳐지는 스릴과 장관 그리고 특히 여자주인공 ‘제인’의 활동적인 모습에 흠뻑 매료되었다. 그 후로부터 거주하던 인천의 애관극장이나 표관극장으로 영화 구경을 다니기 시작했다. 영화 바람이 난 것이다. 어릴 적 몸이 약했던 그녀는 오빠 등에 업혀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아픈 것을 잊을 수 있었다. 미국 배우 타이론 파워(Tyrone Power)를 흠모하기도 하고, 배우 문예봉이 연기하는 영화 촬영 현장을 구경하기도 하면서 연기자에 대한 동경을 키웠다. 이듬해, 16세가 된 그녀는 연기자의 꿈을 안고 서울로 향해 동양극장 배우모집에 응시한다. <장화홍련전> 낭독 시험을 통과하고, 동양극장 전속극단 청춘좌의 연구생으로 입단하여 연기자의 첫 발걸음을 내딛는다. 선배들의 심부름과 무대 허드렛일부터 시작하여 엑스트라를 맡고, 마침내 대사 있는 단역으로는 처음 출연하게 되었다. 그러나 한 마디 있는 대사의 문장을 앞뒤로 바꿔 말하는 실수를 저지르는 바람에 관객들로부터 얼뜨기라는 야유를 받으며 호된 무대 신고식을 치렀다. 눈물 바가지를 쏟으며 속상했지만 이내 포기하지 않고, 극단을 따라 전국 순회 및 중국 만주 등지로 공연을 다녔다. 그렇게 동양극장에서 9년을 활동하는 동안 홍해성, 박진, 김영수, 나웅 등의 연출가들로부터 연기 지도를 받았다. 맡은 역할의 과거사와 현재, 미래까지 꿰뚫으며 충실하게 성격 분석을 하고, 이를 토대로 인물을 부각시켜 연기해야하는 대목과 극의 맥락이 되는 지점을 찾아 강조해야하는 점을 익혔다. 그리고 상업극단의 숨가쁜 일정에 맞춰 짧은 시간 안에 집중적으로 연습하여 극을 완성하는 훈련을 했다. 2) 이러한 경험은 황정순이 연기 실력을 다지는 데 큰 자산이 되었다. 이윽고 그녀는 연극 <대지의 어머니>에서 비중 있는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고 주연급 연기자로 발돋움했다. 극중 대감의 하녀로서 두 아들을 낳아 기르는 역을 맡았는데, 그녀의 나이 19세에 해낸 어머니 역할이었다. 3) 황정순의 영화 데뷔작은 단역으로 출연한 일본영화 <그대와 나(君と僕)>(허영, 1941)이다. 영화 현장을 처음 경험한 그녀는 인물 사진 찍듯이 자꾸 카메라를 봐서 NG를 냈고, 결국엔 영화에 뒷통수만 출연하게 되었다. 그 뒤 몇 년간 ‘카메라를 쳐다보는 배우’라는 별명이 붙어다녔다고 한다.“ 4) 극단 지방 공연 중에 해방을 맞이했고, 서울중앙방송국에서 성우로도 활동하면서 1947년 라디오드라마 <청춘행로>에서 목소리 연기를 했다. 그리고 이 작품을 영화화한 <청춘행로(촌색시, 一名 며누리의 설음)>(장황연, 1949)에서 황정순은 첫 주연을 맡는다. 또한 같은 해에 영화 <파시>(최인규, 1949)와 한국 최초의 컬러 영화 <여성일기>(홍성기, 1949)에 출연하였다. (그림1) <청춘행로>(장황연, 1949)에서 주인공을 맡은 황정순 (그림2) <여성일기>(홍성기, 1949) 출연 당시 황정순(앞줄 오른쪽)과 배우 주증녀(앞줄 왼쪽) 1950년, 국립극장 전속 극단이 된 신협에서 활동하면서 국립극단 정기공연 첫 작품 <원술랑>과 2회 작품 <뇌우>에 출연했다. 한국전쟁 직전에 공연한 이 작품들은 각각 5만명, 7만5천명의 관객을 동원하며 크게 흥행했고, 덕분에 황정순은 연극배우로서 성장세를 타고 있었는데 그만 전쟁이 발발하고 말았다. 그녀는 9.28 수복 이전까지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 있다가 납북될 뻔한 위기를 겪고, 1951년 1.4 후퇴 당시 신협 단원들과 함께 국군을 따라 대구로 피난 갔다. 피난 시절, 신협은 군예대 소속으로 전선 위문 공연을 다녔고 여주인공은 황정순이 도맡았다. 낙하산 천으로 의상을 만들어 입고, 군용 트럭 여러대를 동원하여 트럭 헤드라이트를 켜서 무대를 밝혀 연극을 했다. ‘탱크부대’라는 별명을 얻을만큼 공연에 열의를 쏟아부었고, 황정순의 인기도 날로 높아졌다. 환도 후에도 공연을 이어가며 연극 무대에서 주연 배우로 주목 받았으나 전후 50년대 중반부터는 연극이 침체되고 영화가 부상하기 시작했다. 연극인이 카메라 앞에 서면 무대 예술을 저버리는 것이라는 인식이 있었으나 생계 유지를 위해서는 영화 연기로 활동 범위를 넓혀야했다. 그녀 역시 연극인 이해랑, 김동원 등과 함께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1956)에 출연했고, 같은 해에 <유전의 애수>(유현목, 1956), <백치 아다다>(이강천, 1956) 등에 출연하며 본격적으로 영화 활동을 시작했다. (그림3)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1956)에 출연한 황정순 (그림4)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1956)에 출연한 황정순 (그림5) <왕자호동과 낙랑공주>(김소동, 1956)에 출연한 황정순(왼쪽), 김동원(오른쪽) 황정순은 무대에서 쌓은 기량을 발휘하여 영화계에서도 연기파 배우로서의 입지를 굳혀간다. <사랑>(이강천, 1957)에서 불치병에 걸린 현모양처를 연기하여 1957년 제1회 한국평론가협회상 여자연기상을 수상했고, <인생차압>(유현목, 1958)에서 개성 있는 연기로 제2회(1959)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 수상,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의 피고인 역으로 1959년 제1회 문교부 우수국산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연달아 수상하며‘무대의 프리마돈나’에서‘은막의 스타’로 자리잡는다. 또한 한홍합작영화 <애정무한(愛情無限)>(전택이・도광계(屠光啓_홍콩측) 공동감독, 1958)에 출연하여 홍콩에서 촬영을 하기도 했다. (그림6)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에서 순이(황정순)가 겨울밤 혼자 출산하는 장면 (그림7)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에서 피고인 순이(황정순)가 변호인에게 진술하는 장면 (그림8) 한홍합작영화 <애정무한>(전택이·도광계, 1958)의 한 장면, 맨 오른쪽에 앉아있는 사람이 황정순 그녀가 애착을 갖는 출연작 <청춘극장>(홍성기, 1959)은 김래성 작가의 동명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으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의 활약과 사랑을 그렸다. 국제극장에서 개봉하여 관객 14만명을 동원 5) 하며 1959년 한국영화 흥행 1위를 기록했고, 이를 계기로 제작사 선민영화사와 전속계약을 맺어 황정순, 김동원, 최무룡, 김지미, 장동휘 등의 연기자와 홍성기 감독이 ‘선민군단’으로 불리며 활발하게 활동했다. (그림9) <청춘극장>(홍성기, 1959) 포스터, 왼쪽에 총을 들고 있는 사람이 황정순 (그림10) <청춘극장>(홍성기,1959) 출연진 및 제작진들과 함께, 왼쪽 4번째가 황정순 6) 이듬해 주연을 맡은 <귀거래>(이용민, 1960)에서는 월남한 전쟁 미망인을 연기했고, <울려고 내가 왔던가>(김화랑, 1960)에서는 1.4후퇴 때 헤어진 아들을 찾아 헤매면서 혼자 사는 어머니를 맡아 전쟁의 비극을 표현했다. 한편 같은 해 출연한 <박서방>(강대진, 1960)에서는 배우 김승호와 부부 연기를 선보였고, 강대진 감독의 다음 작품 <마부>(1961)에서도 김승호와 커플 연기를, 또한 <삼등과장>(이봉래, 1961)에서도 김승호와 부부로 출연하여 연기 호흡을 맞췄다. 이후로도 황정순은 김승호와 여러 차례 상대역으로 열연하면서 황정순·김승호 명콤비의 연기가 관객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았다. 겹치기 출연으로 동시에 여러 작품을 소화해야했던 김승호와 황정순은 함께 역할에 대한 설정과 연결을 자세히 점검하고 연기 짜임새를 논의했다고 한다. (그림11) <박서방>(강대진, 1960)에서 부부로 출연한 황정순과 김승호(앉아있는 두 사람), 오른쪽부터 배우 김혜정, 김진규 (사진 12) <삼등과장>(이봉래, 1961)에서 부부로 출연한 황정순과 김승호 (사진 13) <마부>(강대진, 1961)에서 마부 춘삼(김승호)과 수원댁(황정순)의 극장 데이트 장면 삼십대 중반이었던 황정순은 <굴비>(김수용, 1963)에서도 김승호와 노부부를 연기했고, 그녀의 차분하지만 힘 있는 표현력을 눈여겨 본 김수용 감독은 다음 작품 <혈맥>(1963)에도 황정순을 캐스팅하여 김승호와 연기 대결을 펼치게 했다. 김 감독은 두 배우가 극 중 싸우는 장면을 연기하던 현장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두 사람은 드디어 육탄전을 벌인다. 땅 위를 구르면서 엎치락 뒤치락을 여러 차례, 배우들은 서로 지지 않으려고 안간힘이다. 이렇게 되면 연기가 아니라 실기다. 카메라가 멎으면 서로 다시 한번 더 찍자고 한다.” 7) 황정순은 이 작품에서 함경도 사투리를 쓰며 강한 생존력을 보이는 월남민을 열연하여 제1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 제3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주연상, 제7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을 휩쓸었다. (그림 14) <굴비>(김수용, 1963)에서 노부부를 연기한 황정순과 김승호(앉아있는 두 사람), 그 뒤로 왼쪽부터 배우 김석훈, 조미령 (그림15) <혈맥>(김수용, 1963)에서 털보(김승호)와 다투는 복순 어머니(황정순) (그림16) <혈맥>(김수용, 1963)에서 열연한 황정순이 제1회 청룡영화상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모습 황정순 영화 연기의 또 하나의 특징은 대다수의 출연작에 후시 녹음을 직접했다는 점이다. 당시 한국영화는 겹치기 출연으로 바쁜 배우들 대신 성우들이 목소리를 녹음 했다. 그러나 황정순은 촬영장에서 한 연기에 본인의 음성을 입혀야만 자신이 추구했던 연기가 온전히 완성되는 것으로 여기고 직접 녹음까지 마쳤다. 왜냐하면 가지각색의 생활 감정을 나타낼 때, 그녀만의 연기 호흡과 대사 톤은 본인이 아니면 그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김수용 감독에 따르면, “시나리오 작가가 고심한 극 중 대사나 감독의 연기 표현이 가끔 그녀 앞에서 말끔히 정리되는 것을 보는 때가 있다. 관념에 흐르기 쉬운 한국영화의 대사가 그녀의 입에서 지극히 사실적인 일상 용어로 바뀐다.” 8) 는 것이다. 이처럼 맡은 배역을 보다 현실적이고 실체적으로 소화하고자 했던 그녀의 노력은 빛을 발해 관객들에게 한층 호소력 짙은 연기로 다가왔다. (그림17) <김약국의 딸들>(유현목, 1963)에서 자식들을 보살펴달라고 고목에 기도하는 어머니(황정순) 또한 그녀는 언제나 배가 불룩이 나온 의상 가방을 들고 촬영 현장에 나타나 직접 의상 설정을 만들어서 입고 스스로 분장을 했다. <갯마을>(김수용, 1965)을 각색했던 극작가 신봉승은 촬영장에서 바닷가 촌부를 연기하는 황정순이 입은 빛바랜 베 치마에 수천 개의 작은 구멍이 송송 뚫려 있는 것을 보았다. 그런 낡은 치마를 어디서 구입했는지 묻자 그녀는 지난 밤, 집 마당에 새 치마를 펼쳐놓고 돌로 톡톡 찍어서 구멍을 낸 것이라고 답한다. 그리고 작가가 작품을 쓰듯 연기자는 배역에 몰입하기 위해 마땅히 뭔가를 해야한다고 덧붙였다고 한다. 9) 평소 그녀는 맡은 배역에 대한 탐구가 풀리지 않으면 마치 숙제를 못 끝낸 기분이 들어 잠을 못 이루었다고 한다. 이러한 연기에 대한 집념과 헌신 덕분에 황정순이 펼치는 아내, 편모, 계모, 과부,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등의 ‘어머니’ 연기의 입체성과 고유성은 독보적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인자하고 정감있는 어머니인 한편 고난과 운명에 맞서 감정을 패배적으로 과잉하지 않고, 체념과 포용을 모두 담아낸다. 그리하여 영화가 끝난 후에도 살아가야 할 극 중 인물을 생생하게 체화했다. (사진 18) <갯마을>(김수용, 1965)에서 아들을 바다에 잃은 어머니(황정순)는 혼자 된 며느리가 인습에 얽매이지 말고, 자신의 행복을 찾길 바란다. 황정순은 이 작품으로 제5회 대종상영화제 여우조연상, 제9회 부일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영화인들은 황정순씨를 어머니라고 부르고 있다. 물론 연령으로 쳐도 어머니뻘이 되고도 남음이 있지만 결코 그러한 이유에서만은 아니다. 그녀가 스크린 위에 새겨 놓은 어머니의 상은 거의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여배우가 악역마저 무난히 소화할 수 있으니, 그녀를 연기파의 일인자로 손 꼽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10) 고 평한 김수용 감독은 그녀의 연기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 바 있다. ①인자한 어머니 ②쾌활하고 코믹한 중년부인 ③악의에 찬 변덕스러운 여인 ④육감적인 요부 등과 같이, 연기자 황정순에게는 “한계선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기”때문에 연기 폭이 넓다는 점을 극찬했다. 11) 이렇듯 어머니 역할 외에도 그녀는 <유정>(김수용, 1966)의 사감, <월급봉투>(김수용, 1964)의 올드미스, <서울의 지붕 밑>(이형표, 1961)의 주모와 <말띠 신부>(김기덕, 1966)의 정력적인 아내 역할을 맡아 손색 없는 희극 연기를 선보였고, 스스로 “심각한 역보다는 즐겁고 재미있는 역을 좋아했다” 12) 고 밝혔다. (그림19) <말띠 신부>(김기덕, 1966)에 출연한 황정순과 박암 (그림20) <말띠 신부>(김기덕, 1966)에서 부부관계를 주도하는 아내를 코믹하게 연기한 황정순 (그림21) <말띠 신부>(김기덕, 1966)에서 백말띠 딸을 출산하길 바라는 말띠 신부들(가운데 황정순) 그런가하면, 배우 황정순을 떠올리면 주로 한복에 쪽진 머리를 한 전통적인 이미지가 지배적이지만 <흙>(권영순, 1960)에서는 흰 가운을 입은 산부인과 의사 ‘닥터 현’으로 출연한다. 그녀는 주인공이 멘토로 따르며 의지하는 인물로 등장하는데, ‘올드 미스’를 자칭하며 비혼을 선택하고 주체적인 삶을 사는 전문직 여성을 연기했다. 그녀는 이 작품으로 제1회 공보부 우수국산영화상 여우조연상을 수상했다. (그림 22) <흙>(권영순, 1960)에서 결혼하지 않는 이유를 밝히는 닥터 현(황정순) 그리고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 <무정의 40계단>(정진우, 1965)에서는 각각 양공주와 조폭 두목이라는 그늘진 정체를 숨기고, 자식을 위하느라 분투하는 모성의 복잡한 심성을 연기했다. 특히 주연을 맡은 <육체의 고백>은 연기자 황정순의 다면적인 매력을 접할 수 있는 그녀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그림 23) <무정의 40계단>(정진우, 1965) 조직폭력배 두목을 연기한 황정순(하단 왼쪽) (그림 24)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에서 부산 텍사스 거리의‘프레지던트’라 불리는 마담(황정순) (그림 25) <육체의 고백>(조긍하, 1964)에서 매춘부들이 섬기는 “정의감 강하고 인정 많은 대통령 엄마”(오른쪽, 황정순)는 서울에서 공부하는 세 딸들에게는 양장점 주인인 척하며, 자식 뒷바라지를 위해 밀수까지 감행한다. (그림 26) <어느 여배우의 고백>(김수용, 1967) 실명으로 출연한 황정순의 집에서 촬영한 장면, 방에 보이는 트로피도 실제로 황정순이 받은 상들이다. <팔도강산>(배석인, 1967)은 배우 김희갑과 황정순이 노부부로 출연하여 전국에 흩어져 사는 자식들을 방문하는 이야기이다. 황정순은 자녀들의 허물과 부족함을 너그러이 포용하는 어머니를 연기하여, 근대화의 피로감 속에서 기댈 수 있는 ‘마음의 고향’ 같은 모성을 연기했다. 이 작품은 크게 흥행하여 이후 <팔도강산(속)>(양종해, 1968), <아름다운 팔도강산>(강혁, 1971), <내일의 팔도강산>(강대철, 1971), <우리의 팔도강산>(장일호, 1972), <돌아온 팔도강산>(정소영, 1976)까지 총 5편이 더 제작되었다. 황정순은 팔도강산 시리즈의 성공으로 국민 배우이자 ‘국민 어머니’로서 널리 사랑받는 연기자가 되었지만, 1970년대 KBS TV 드라마 <꽃피는 팔도강산>까지 역할이 지속되면서 이미지가 더욱 굳어져 이후 어머니 역할로 배역이 고정되는 면도 있었다. 그녀는 한국영화가 침체기에 접어든 1970년대 이후 TV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며 주로 가족 드라마에서 다정한 어머니나 할머니로 분하여 원숙한 연기를 펼치는 한편, 사극 <사모곡(思母曲)>(신봉승 작, 동양텔레비전)에서는 연산군의 할머니인 인수대비 역을 맡아 실권을 갖춘 대비로서의 카리스마를 보여주기도 했다. (그림 27) <장마>(유현목, 1979)에서 동란 중에 아들을 잃고 천둥 번개치는 하늘에 토로하는 어머니(황정순) (그림 28) <장남>(이두용, 1984), 고향집이 수몰지구로 선정되어 서울의 장남 집에 온 어머니(황정순)가 딸과 통화하는 장면. 마치 다큐멘터리 속 인물을 보는 듯한 황정순의 생생한 자연스러움에 빠져들게 된다. 연출의 존재가 전혀 의식되지 않는 달관의 경지에 이른 연기를 보여준다. (그림 29) <장남>(이두용, 1984)에서 어머니가 가족들에 둘러싸여 임종을 맞이하는 장면 1972년부터는 후진 양성을 위해 황정순장학회를 설립하여 서울예술대학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했고, 1984년에는 극단 신협 ‘황정순 연기생활 45주년 기념공연’ <안네의 일기>를 공연했다. 1988년에는 혜화동에 ‘극단 신협 황정순 극장’을 개관했고, 2005년에 뮤지컬 <팔도강산>에서 노부부의 어머니 역으로 무대에 섰다. 그녀는 2007년 여성영화인축제 공로상을 수상하였는데, 주최하는 여성영화인모임은 “여성영화인의 큰 숙제 중 하나는 부침 많은 영화계에서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활동하여 살아남는 것” 이라며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영화와 연극, TV를 넘나들며 ‘한국의 어머니’가 되어준 그녀의 열정과 성실함에 박수를 보낸다” 고 밝혔다. 13) 황정순은 ‘나를 버리고 또 다른 나를 찾는 직업’의 매력에 빠져 “특별히 영역을 두어 벽을 쌓지 않고” 여러 매체에서 다양한 역을 소화하며 배우 인생을 사랑했다.“ 14) ‘카메라를 보는 배우’는 연기파 배우로 성장하여, 촬영 첫 날 반드시 현장에 모셔야 작품 운이 트인다는 ‘크랭크 인 배우’로 각광받았고, 60여년 동안 400편에 가까운 영화와 200여편의 연극, 수십편의 방송 드라마 등을 통해 꾸준히 활동했다. “연기 그것은 곧 나의 삶”이라고 여겼던 그녀의 혼신을 다 하는 연기자로서의 열정을 떠올리면서, 이 뛰어난 예술가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그림 30) 극단 신협 황정순 극장 개관식(1988년)에서 황정순(왼쪽에서 두 번째) 15) “온 몸과 맘으로, 온 정성으로 연기에 취해 정신없이 지나온 젊은 시절, 그러나 시간은 붙들어 맬 수 없는 것. 거듭 말하지만 나는 다시 태어나도 연기자가 되고 싶다. 솔직한 나의 고백이다.” - 황정순 16) 1) 명사가 본 한국배우의 실루엣”, 《여원》, 1967년 3월, 225~226쪽. 2) 김남석,“배우로 보는 한국연극사|황정순 선생과 함께 1”,《(국립극장)미르》,2004년 3월호, 39쪽 참고. 3) 유민영,「무대와 영상에 표현된 한국의 전형적 모상/ 황정순」,『한국 인물연극사 1』,태학사, 2006, 687쪽 참고. 4) 나의 데뷰시절⑥ : 황정순”,《Screen》,1988년 12월1일, 251쪽. 5) 「작년도 방화의 수지결산서」,《국제영화》,국제영화사, 1960년 4월호, 81쪽. 6) “연기 그것은 곧 나의 삶 / 황정순[원로배우]”,《연예세계》,1988년 6월1일, 83쪽. 7) 김수용,「배우의 변신」,한유림 외,『위대한 여배우 황정순』,한국영화인복지재단, 2007, 138쪽. 8) 김수용,“한국배우론① : 황정순”,《신여성》 제1호, 1970년 4월, 272쪽. 9) 신봉승,「한국의 어머니 황정순 선생」,한유림 외, 위의 책, 132쪽. 10) 김수용, 앞의 글, 271쪽. 11) 김수용, 앞의 글, 270쪽. 12) “연기 그것은 곧 나의 삶 / 황정순[원로배우]”,《연예세계》,1988년 6월1일, 84쪽. 13) 강병진,“올 한해 영화계를 빛낸 여성들_2007 여성영화인축제서 공로상 수상한 배우 황정순 외”,《씨네21》, 2007.12.17. 14) 연기 그것은 곧 나의 삶 / 황정순[원로배우]”,앞의 글, 82~84쪽 참고. 15) “〈그의 생활〉 만년 어머니 배우 황정순의 예술과 삶”,《오늘의 한국》통권72호, 1989년 1월, 77쪽. 16) 황정순,「다시 태어나도 여배우의 길을 가련다」, 한유림 외, 위의 책, 2007, 119쪽.
전택이 (田澤二) 선생은 영화도 다섯 편이나 연출했지만 감독보다는 배우에 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1958년부터 출연 짬짬이 제작을 하며 메가폰을 잡았으나 관심을 끌지는 못했다. 신파극 <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 >를 리메이크한 첫 연출작 < 애정무한 >(1958)부터 마지막 작품 < 홍도야 울지 마라 >(1965)까지 그 연장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전택이라면, 나이 많은 사람들은 < 망나니비사 >( 김성민 )의 참수인이나 < 춘향전 >( 이규환 , 이상 1955)의 방자 역을 기억하겠지만, 후대의 사람들은 오히려 뒤늦게 발굴된 광복 전의 < 집 없는 천사 >(1941), < 사랑과 맹세 >(1944)의 엿장수나 화물차 운전기사 역할을 더 가깝게 느낄지도 모른다. 나는 전 선생으로부터 들은 몇 가지 얘기를 잊을 수가 없다. 그가 1998년 3월 2일 8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으니, 그로부터 1년 전과 3년 전 두 차례가 된다. 처음은 그가 사는 충무로아파트(13평) 부근의 어느 다방이었고 그다음은 배우 김일해 선생과 관련된 다큐멘터리를 찍는 자리였다. 셋이 함께였다. 장충단공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먼발치에서나마 그를 처음 본 것은 1957년 대학 2학년 때였다. 영화인들이 자주 들르던 서울 명동의 나일구 다방이었다. 배우인 아내(노경희)와 자리를 같이하고 있었다. 그 때 받은 인상은 매우 깐깐하고 자신만만한 모습이었다. 전 선생은 80대 중반에 들어선 말년에도 몸단장에 신경을 쓰고 기억력이 또렷했다. 쇳소리가 나기는 했으나 언어 구사도 정상이었다. 영화계에는 1935년 같은 해에 출발했으나 네 살 위인 김일해 선생에게 깍듯이 ‘형님’이라 부르며 스스럼없이 대했다. 노령이라 몸이 불편한 데다 말이 어눌한 그가 기억이 흐려 말을 더듬을 때는 언성을 높여 바로잡아주곤 했다. 아무튼 그때 전 선생이 들려준 회고담에 따르면, 나운규의 < 아리랑 >(1926)은 7권. 45분 정도의 분량으로 1권이 900~1000자(尺)였다고 한다. 영사기는 수동으로 1초당 1자반 정도 돌아갔는데, <아리랑>의 경우는 18~20코마로 돌려 속도에 따라 50분이 넘을 때도 있었다. 주제가 가운데 ‘풍년이 왔네’라는 대목이 ‘좋은 세상’ 곧 ‘독립’을 뜻하는 것으로 해석돼 의심을 받기도 했다. 그는 폐병으로 기력이 떨어져 수염도 깎지 못한 채 연출한 나운규 의 < 강 건너 마을 >(1935)로 데뷔하여 < 아리랑 3편 >에 출연하고 <불가사리>의 주인공으로 내정됐으나 < 오몽녀 >(1936)로 기획이 바뀌는 바람에 좌절되고 말았다며 아쉬워했다. < 아리랑 >과 < 풍운아 >(1926), < 들쥐 > < 금붕어 >(1927)를 제작한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의 사주 요도 도라조(淀虎藏)에 대해서는 경성촬영소를 운영한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조차 무시하지 못한 존재였다고 언급했다. 그가 조선키네마에 앞서 본정(충무로)에 개업한 모자점 ‘요도야(淀屋)’는 아내가 경영했는데, 요도는 아라시 조즈로(嵐寬之郞, 본명 아라시 조사브로) 주연의 연극을 유치하여 황금좌에서 공연한 적이 있다고 새로운 사실을 들려주었다. 조선키네마프로덕션을 설립하기 2년 전이었다. 연극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고 하였다. 나운규 에게 발탁되어 < 칠번통 소사건 > < 무화과 > < 강 건너 마을 >(이상 1935), < 아리랑 3편 >(1936) 등에 출연하며 가까워진 여배우 현방란 (玄芳蘭)의 그 뒤 행방에 대해서도 알게 해주었다. 나운규가 임종할 때까지 병상을 지킨 현방란은 장례식 때 참석한 전라도 출신인 애인 전씨(全氏)와 두 달 만에 살림을 차리고 아들까지 낳았다. 말년에는 치매증세를 보여 청량리 정신병원에 입원했는데, 아들과 수양딸이 찾아와도 알아보지 못했다고 한다. 그때 일흔 살이었다. 1995년의 일이다. 전 선생은 나운규의 여성관계에 대해서도 털어놓았다. 그중 하나가 1925년 극단 취성좌와 조선악극단을 거쳐 뒷날 한형모 감독의 < 청춘쌍곡선 >(1956)으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지방열 (池芳烈)의 부인 강보금 과 관련된 얘기다. 이 여자가 배우가 되고 싶어 나운규가 묵는 개성여관까지 찾아왔는데 어느새 서로 눈이 맞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지방열이 그들이 묵는 여관을 찾아와 각목을 휘두르는 일이 벌어졌다. 마침 이 자리에 있었던 전 선생이 일본도로 위협하여 나운규를 보호한 덕에 봉변을 피할 수 있었다는 일화였다. 전 선생은 이처럼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몸을 사리지 않는 직선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만큼 다혈질이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뒷날 아내 노경희 가 < 인생역마차 >(1956)에 출연했을 때의 일이다. 영화에서 신문기자와 암흑가 보스로 1인 2역을 한 이향과 입술을 포개는 키스신을 연기했는데, 그는 자신이 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양해 없이 키스신을 연기했다며 이향 을 찾아 충무로의 다방과 단골술집, 영화사를 찾아 나섰다. 어쨌거나 전택이 선생은 나운규 감독이 연출한 17편 가운데 열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말년의 작품 < 강 건너 마을 >로 영화계에 이름을 얹게 된다. 술장사를 하는 여자에게 빠져 남의 돈을 훔쳐 도망가는 농촌 청년 용수 역이었다. 이로써 그는 신일선 , 이금룡 , 윤봉춘 , 전옥 , 김연실 , 유신방 등을 배출한 나운규 문하의 막내 격으로 합류하게 된다. 이후 < 청춘부대 >(1938)를 비롯한 < 성황당 >( 방한준 ), < 국경 >( 최인규 , 1939), < 망루의 결사대 >(이마이 다다시, 1943), < 출격명령 >( 홍성기 , 1954), < 실락원의 별 >(홍성기, 1957), < 돈 >( 김소동 , 1958) 등 114편에 출연하고 1966년 이봉래 감독의 < 무정가 1번지 >를 끝으로 촬영 현장을 떠나게 된다. 그에게 돌아온 배역들은 주연보다 조연이 많았으나 대부분 활달하고 경쾌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