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종
- 감독
- 에드워드 드미트릭
- 제작년도
- 1955
- 출연
- 데보라 카, 밴 존슨, 존 밀스
1975년 대마초 파동으로 대한민국 연예계는 쑥대밭이 됐다. ‘그건 너’의 이장희 를 비롯해 신중현 , 윤형주 , 김추자 , 장현 , 정훈희 , 어니언스의 임창제 , 그리고 코미디언 이상해 등 구속과 불구속, 체포와 자수 등이 마구 뒤엉켜 23명의 가수, 2명의 코미디언, 26명의 악사, 그리고 3명의 배우가 붙들렸다. 이듬해 1976년까지 100명이 넘는 연예인들이 이른바 ‘대마초 파동’ 명단에 올랐으니, 방송국에서는 ‘틀 노래가 없다’는 볼멘소리까지 나왔다. 이장희, 신중현, 김추자 등 낯익은 이름들 사이에서 발견한 이름이 바로 배우 정미하 다. 대부분 다시 활동을 재개했지만 어떤 식으로든 ‘그 날 이후’ 완전히 사라져버린 정미하는 < 애종 >(1975)과 < 비녀 >(1976) 단 두 편만을 남겼다. 진하게 생기지 않은 그녀는 당시의 시선으로 보자면 무척 담백하고 세련된 외모였다. 신인으로서 연기력은 부족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도도하게 느껴졌다. 어쨌건 더 꽃을 피워보기도 전에 영화계를 영영 떠나버렸다. 시신의 발견과 다양한 과학수사 한국영상자료원 홈페이지 정보에 따르면 대한극장에서 433명의 관객만 관람한, 정미하 의 두 번째 영화이자 마지막 작품인 < 비녀 >는 전형적인 B무비 스타일의 스릴러다. 데이트 중이던 연인들에 의해 무려 뼈다귀가 삐져나온 시체가 발견되는데, 의치를 단서로 밝혀낸 정보에 따르면 살해당한 시체(정미하)는 1년 전에 죽임을 당한 것이며 당시 나이는 27~28세였다. 이에 과학수사연구소에서 복안술의 권위자 송 박사( 최정훈 )와 황 박사(신구), 그리고 또 다른 여성연구원 하 박사( 김영애 )를 중심으로 수사가 펼쳐지고, 뼛속에서 검출된 플랑크톤으로 인해 익사로 판명된다(과학수사연구소의 놀라운 실력!). 그를 바탕으로 범인을 추적하는 이가 바로 원경식 형사( 박근형 )다. 두 명의 ‘꽃할배’가 펼치는 공조수사랄까. 게다가 범행현장에 있던 벤츠 승용차의 차번호까지 입수되는데(3-3027이라는 번호판을 보고 ‘3학년3반 27번’으로 기억한 놀라운 소녀!) 정작 그 차의 주인 유옥련( 도금봉 )은 도둑맞은 차라며 발뺌한다. 그렇게 다른 단서들이 더해져 익사가 아니라 이미 죽임을 당한 상태에서 옮겨져 온 것임이 드러난다. 과학수사연구소 박사들과 원 형사 이후 과학수사연구소의 송 박사와 황 박사가 돋보기를 들고 증거물을 살펴보고, 현미경을 들여다보는 장면이 뭔가 당시로선 대단한 과학수사 분위기를 뽐낸다. 비록 미흡한 세트이긴 하나 연구소 내부의 분위기도 어딘가 조악한 SF 세트 느낌이다. 중요한 전달사항은 내부의 스피커를 통해 방송되기도 한다. 그들이 주고받는 대사는 더 압권이다. 신구는 마치 인기 TV 프로그램 <부부클리닉 사랑과 전쟁>에서 막 빠져나온 듯한 말투로 황 박사가 죽은 아가씨의 뻐드렁니를 근거로 예쁘지 않은 여성일 거라 판단하고, 반곱슬인 것으로 보아 성격이 강할 것이라 추측한다. 또한 가난한 여자가 값비싼 의치를 한 것에 더해 ‘정신 바른 여성은 염색을 하지 않는다’는 시대착오적인 멘트로 염색을 한 그 여성이 행실이 바르지 못한 일류 호스티스라는 결론까지 다다른다. 게다가 황 박사는 골반을 보고 직감하건대 ‘성행위가 아주 능한 여자라 생각된다’고도 말한다. 하나같이 어리둥절한 얘기들이지만 그들은 너무나도 진지하게 과학적 접근이라 여기는 듯하다. 그렇게만 끝나면 황당하겠지만, 당연히 과학수사도 잊지 않는다. ‘피해여성의 음모는 범죄해결의 열쇠’라며 털 집착증을 보이는 황 박사는 그 털 대신 피해자의 손톱에서 남자의 피 흔적을 발견하면서 수사는 다시 활기를 띤다. 그렇게 얻은 정보들로 과학수사연구소는 무려 3D로 복원해낸 몽타주를 만들어 배포한다. 하지만 여자의 정체를 알게 되면서 밝혀지는 사연은 무척 기구하다. 거의 < 화차 >와도 같은 이야기다. 몽타주가 신문에 실리면서 피해자가 자신의 사촌 동생인 것 같다는 울산으로부터 제보가 도착한다. 시골 출신의 ‘깍쟁이’ 미라( 정미하 )라는 여자가 집을 나간 지 7년이나 됐고 성형수술을 한 뒤 유력 재벌 고두만의 정부로 생활했다. 그 사이 ‘옷 벗고 버는 직업’으로 돈을 벌었고 직업소개를 통해 바에 취직도 했으며 심지어 이름 또한 ‘변화자’로 바꾸었다. ‘화자’라는 이름 또한 왠지 <화차>를 떠올리게 한다, 고 그냥 마음대로 생각해봤다. 원 형사가 그 행적을 뒤쫓는 긴박한 수사장면은 정지화면의 스틸컷으로 스타일리시하게 보여주기도 한다. 그러다 숨겨진 남자친구 유종근( 김추련 )의 존재도 알게 된다. 그를 상대로 마치 거짓말 탐지기 사용하듯 심문하는 하 박사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음악 좋아해요?” “자동차 운전할 줄 아세요?” 어떤 기준으로 뽑은 질문인지 모르겠으나 김영애의 표정은 사뭇 진지하다. 급기야 발뺌하는 유종근 앞에 미라의 골반뼈를 보여준 다음 실제 머리를 보여주는데, 잠깐이나마 진짜 정미하의 머리가 드러날 때는 거의 소스라칠 정도로 놀랍다(정미하가 테이블 밑에 들어가 머리만 쏙 나오게 한 것이다). 그를 통해 서서히 사건의 충격적인 전말이 드러난다. 결국 회장에게 살해될 수밖에 없었으나, 미라 혹은 화자는 끝까지 매력적인 ‘센’ 여자였다. 그와 별개로 < 비녀 >의 비디오 재킷은 하얗게 메이크업을 한, 실제 출연 분량은 얼마 되지 않는 도금봉 의 사진이 꽉 차 있어서 놀라움을 주기도 했다. 아무래도 ‘도금봉’과 ‘비녀’라는 제목이 더 어울린다는 판단 때문이었을 것이다. 웃는 머리 정미하 의 희생이라는 측면에서 더 가슴 아픈 영화는 그녀의 데뷔작인 정진우 감독의 < 애종 >이다. 끝내 여주인공의 죽음으로 마무리되는 <애종>은 이장호 감독의 < 별들의 고향 >(1974)으로 시작된 이른바 ‘호스티스 멜로드라마’의 영향권 아래 있다. 은행 지점장이었던 아버지( 최불암 )가 몰락하고 세상을 뜨면서 졸지에 소녀 가장이 된 미다(정미하)는 피아니스트의 꿈을 포기하고 생계 전선에 뛰어든다. 첫 장면부터 지긋지긋하다. 여관방에서 취업을 미끼로 미다를 성적으로 유린하려는 총무과장은 침대 위에서 뻣뻣하게 누워만 있는 미다에게 “너 송장이냐? 협조해야 할 것 아냐!”라고 다그친다. 순진한 미다는 “어떻게 하는 게 협조인가요?”라고 되묻는다. 첫 장면부터 과감한 노출을 선보이는데 그 육체가 아름다울수록, 나이 든 총무과장의 얼굴 뒤로 ‘집에 연탄 한 장 없다’는 어머니의 보이스오버가 겹칠 때 거의 지옥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오죽하면 여관방을 탈출하듯 나와서는 명동성당 앞을 지나며 “당신의 아들 예수는 죽었나요? 그럼 나한테 멀쩡한 취직자리 하나 달라고 해주세요.”라는 독백까지 내뱉는다. < 애종 >이 더욱 슬프게 다가오는 것은, 다른 호스티스 드라마의 여주인공들과 달리 이런저런 남자들에 인해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꿈을 포기해야만 상황을 견디지 못했다는 것이다. 살롱에서 연주하며 생계를 유지하게 된 상황에서 “앞으로 < 대부 >는 바흐를, < 러브 스토리 >는 베토벤을, < 007 >은 모차르트를 생각하며 치겠어요. 개가 돼서 개처럼 살아가렵니다.” 혹은 “바흐보다는 ‘목포의 눈물’이 돈이 되는 세상이에요.”라고 한탄할 때 가슴이 찢어진다. 결국 미다는 그토록 좋아했던 바흐를 연주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비록 단 두 편이지만 공교롭게도 정미하 는 매번 죽음으로 영화를 마무리했다. 안타깝게도 뭔가 꿈을 펼쳐보기도 전에 대마초 파동을 겪으며 현실의 배우로서의 삶도 끝났다. 정미하가 이후 순탄하게 더 활동하며 대단한 배우가 됐을 거라 감히 마음대로 상상할 수는 없겠으나, < 애종 >과 < 비녀 > 단 두 편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이미지로 다가왔던 배우다. 영화 속에서 뭔가 멍하게 슬픔 가득한 표정이 쉬이 잊히지 않는다. 정미하 박근형 김영애 신구 김추련 도금봉 감독: 이신명 각본: 문상훈 개봉극장: 대한 관람인원: 433명
한국영화계에서 영화작가를 논할 때, 편애하는 경향이 분명히 있다. 그것은 작가영화를 거론하되 리얼리즘 색채가 강한 작가를 우위에 두는 것으로 멜로드라마 작품보다 사회성드라마를 연출하는 감독을 영화작가로 대접하겠다는 한국영화비평계의 편향성이다. 정진우 는 ''사랑의 부재''를 극복하고자 하는 ''사랑의 작가''로 < 초우 >(1966년) 이후 멜로애정물에 애착을 갖고 있는 영화작가이다. 정진우가 말하는 사랑의 부재는 남녀 간의 사랑이야기에서부터 일제와 민족분단 그리고 군부독재 권력에 의해 무너진 인간적 존재에 대한 물음까지 광범위하다. 어쨋든 사랑타령하는 영화를 주로 만들어 왔던 그의 영화에 대한 영화작가로서의 홀대는 영화비평계의 편견에 있다. 그러나 정진우 의 영화작가정신은 작품세계는 물론 한국영화에 대한 애착과 자긍심을 고취하는 그의 노력에서 더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의 영화수준이 떨어진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한국 영화작가로서 정진우의 작품평가가 인색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정진우의 한국영화의 세계화를 부르짖는 실천력은 치열하였고 그 성과도 무시할 수 없었다. < 섬개구리 만세 >가 1972년 제 23회 베를린영화제에 참가할 때, 인도 레이의 <천둥소리>가 수상하고 <섬개구리>는 후시녹음때문에 대사와 입이 안 맞는 영화라고 현지의 매스콤에서 망신을 당한 일이 있었다. 그때 정진우는 인도영화보다 기술적으로 뒤진 한국영화의 현실을 개탄하고 동시녹음만이 한국영화 세계화의 첫걸음임을 확신하였다. 결국 그는 < 율곡과 신사임당 >(1978년)에서 동시녹음을 시도하여 후시녹음을 전적으로 하였던 한국영화 제작풍토를 쇄신하는 데에 공헌하였다. 이후 기술의 세계화에서 내용의 세계화를 모색하던 그는 < 심봤다 >(1979년) 등 일련의 향토물로 한국영화 세계화의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정진우 의 한국영화의 세계화는 작품에만 승부를 걸지않았다. UIP파동 이후 미국메이저회사에 대항하여 한국영화 공급과 배급체계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시네마 콤플렉스 <시네하우스>를 건립하였고 이후 우후죽순으로 생겨난 멀티콤플렉스 극장은 한국영화 세계화의 경쟁력을 고취하는 데에 일조하였다. 정진우는 한국 사실주의 영화의 맥을 이어 온 최인규 의 문하생 정창화 감독 밑에서 연출수업을 하여 1963년 < 외아들 >로 감독 데뷔하였다. 이후 1969년 우진필름을 창립하기 전까지 무려 27편의 작품을 연출하였고 1970년부터 그가 운영하는 우진필름에서 직접 제작하거나 연출한 작품까지 계산하면 99편에 이르렀다. 여기에 타영화사에서 의뢰받아서 연출한 30작품을 합하면 무려 129편의 한국영화를 혼자서 만들고 제작하였다. 척박한 한국영화계에 뛰어들어 나름대로 한국영화를 위해 열심히 살아 온 정진우 는 1938년 1월 17일 경기도 김포군 양촌면 양곡리 골말에서 부친 정원모 鄭元謨와 모친 황을순 黃乙順의 4남 5녀 중 3남으로 태어났다. 부친은 김포와 강화에서 36년간을 교육에 종사해 온 그 일대에선 존경받는 교장선생님으로 통했다. 정진우는 고향에서 양곡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김포중학교와 농사에 대한 야심으로 김포농고에 진학하여 축산의 꿈을 키우고 있었다. 그러나 고등학교 1학년 때 우연히 참가하게 된 학생연극에 출연하면서 배우로서 낙농의 꿈과 먼 다른 길을 열망하게 된 것이다. 그가 중앙대학 법대를 진학한 것은 연극영화학과가 없었던 당시 연극부가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였던 중앙대에 입학한 것이다. 그는 연극부 써클에서 활동하며 연극부 회원인 최무룡 선배의 소개로 영화계에 단역배우로 출연하기도 하였다. 본격적인 영화계 입문은 1958년 박상호 의 < 장미는 슬프다 >에서 강범구 촬영기사의 조수로서 였다. 그는 촬영경험을 거치지 않고는 열악한 한국영화계의 제작여건을 극복할 수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이후 정진우 는 한국 액션영화의 거장인 정창화 의 조감독으로 활동하다가 25세에 < 외아들 >을 연출해서 한국 최연소 감독이 되었다. ''신필름''의 신상옥 감독 이후 한국영화의 대중화와 세계화를 겨냥해 다양한 장르를 연출하고 제작해 온 감독으로서도 기억되어야 한다. 정진우 의 한국영화에 대한 신념과 그 실천에 대한 한국영화인들의 공감은 1985년 그를 ''한국영화인협회'' 원장으로 추대하였다. 이 자리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실감한 정진우는 한국영화의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한국영화의 주체인 영화인의 복지향상을 증진하여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으며 지금도 ''한국영화인 복지재단''의 원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히 관주도로 거행되었던 ''대종상영화제''를 영화인협회 주관하에 영화인 손으로 영화제를 치를 수 있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이러한 정진우 의 작품활동을 시기별로 분류하면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다. 첫째, 1963년 < 외아들 >로 데뷔한 이후 1969년 ''우진필름''을 설립하여 제작자로서 활동하기 전까지의 시기이다. 정진우 는 영화작가로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이던 이 시기에 자기 중심적인 인간드라마의 작품세계를 구축하였다. 영화 < 외아들 >은 정진우 의 자서전적인 영화임을 짐작케 한다. 정진우의 성장배경에서 들어나듯이 부친이 돌아가신 이후 정진우의 청소년 시절은 농촌에서 어머니와 농사지으면서 많은 고생을 겪었고 집을 떠나 온 이후 <외아들>로 감독 데뷰하기까지 숱한 사람을 만나면서 그가 경험한 인생공부는 인간의 이중적 심성인 선악의 갈등을 체험케 하였다, 그의 휴머니즘은 바로 인간의 양면성을 극복한 참 인간상의 표현으로 표출되었다. <외아들>의 주인공은 정진우의 이념으로 그려지고, 그의 이념으로 채워진 작품세계는 정진우의 현실적 삶에서 원동력을 얻어 그 중심에 자리잡은 정진우의 작가정신인 주제의식으로 강조되었다. 정진우 를 한국영화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한 첫 작품으로서 < 초우 >는 그의 초기영화 특징을 잘 보여주었다. 소재와 영화적 기법 그리고 주인공들의 연기가 눈에 띄게 신선하여 그 당시 비교적 잘 만들어진 작품으로 알려졌다. <초우>는 현실성이 부족한 인물묘사로 단점이 들어나기도 하였지만 영상기교의 놀라운 일면과 일상적인 규격 속에서 탈피해 보려는 두 주인공의 내면을 포착하였다. 청춘영화 <초우>는 흑백 영상의 밀도를 높힌 작가의 의욕으로 정진우 스타일을 구축하여 그의 영화작가로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둘째, <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1970년)과 <동춘>(1970년)을 계기로 중견 감독으로 부상하던 시기이다. 이 시기에 정진우 는 역사의식으로 민족의식을 추구하는 한편 멜로드라마의 깊이를 모색하였다. 역사의식에 눈을 뜬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은 일제에 대한 반제국주의 의식을 피력하였고 < 국경의 밤 >(1970년)은 분단된 민족의 비극과 이산가족의 아픔을 그렸다. < 동백꽃 피고지고 >(1970년)는 일제에서 6.25를 거친 근현대사를 통한 한민족의 한맺힌 마움을 평범한 가족 이야기를 통해 풀어 갔다. 정진우 는 척박한 한국 근현대사의 극복을 위해 일제침략과 동족상잔의 6.25동란으로 겪어야 했던 민족의 비극사를 그의 역사의식으로 조망하였다. 셋째, < 심봤다 > 등 향토물로 동시녹음과 영화기술의 세계화에 매진하여 < 무궁화꽃이 피었읍니다 >로 개화하던 한국영화의 세계화를 모색하던 시기이다. 멜로애정물이나 민족의 비극사를 떠나 더 원류적인 우리의 문제를 바라보기 시작한 정진우 는 한국영화의 세계화로 우리의 정체성을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1980년)는 정진우의 연출 기량이 가장 두드러진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는데, 그 시작은 원시종교 무속을 내세운 < 석화촌 >(1972년)에서 시작하여 < 심봤다 >(1979년)부터 정진우의 향토물로 자리잡았다. 이 작품은 한국영화의 전통성과 정체성을 포착하기 위해 토속적인 경향을 띤 영화로 스케일보다는 깊이있는 내면을 탐색하려는 노력이 드러난 정진우의 다섯 번째 동시녹음 필름이다. 정진우의 향토물은 주인공들의 삶의 공간이 다를 뿐 부당한 힘의 횡포에 도전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작가정신은 일맥상통하게 향토물의 모든 작품세계를 관통하고 있다. 이제 정진우 는 진화된 주제의식과 영화기술력으로 우리의 주체성을 주장하고 정체성을 정립하여 한국영화의 세계화를 향한 주제의식을 탐구하고 있다. 김진명 원작 < 무궁화꽃이 피었읍니다 >(1994년)는 그 첫 시도로서 내용상으로는 ''침략자는 예고가 없다''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모토아래 강국의 간섭으로부터 벗어나 핵무기를 보유함으로써 외세에 의존하지 않고 대내외의 적으로부터 우리를 지키자는 의지를 과시한 주체성을 강조하고 있다. 영화기술상으로는 시각적인 특수효과와 동시녹음으로 한국영화의 세계화에 매진하였으나 한국영화계의 현실은 정진우의 이상을 실천하기엔 그의 끈질긴 실천력만으로는 역부족이었다. 정진우 의 영화작가 정신은 우리사회의 사랑의 부재를 극복한 사랑의 쟁취를 통해서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인간군상들을 묘사하였다. 하지만 영화적 현실로 표현된 정진우의 영상은 그의 영화작가적 의지를 충분히 담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영화의 세계화라는 정진우의 집념을 그의 작품세계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김수남 (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1938년 1월 17일 경기도 김포 출생 1960년 중앙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졸업 1962년 외아들 로 감독 데뷔 1967년 감독협회 창립 (부회장) 1969년 (주)우진필름 설립(대표이사) 1973년 영화진흥공사 창립 초대 제작 상임이사 문교부 교육의 날-< 섬개구리 만세 > 국민 훈장 수여 1981년 한국영화제작협동조합 수석 부회장 한국영화 자율정화 위원장 1985년 복합극장 '씨네하우스' 설립 한국영화 복지재단 설립(원장) 1987년 사단법인 한국영화인협회 원장 / 한국예술총연합회 이사 1994년 프랑스 문화훈장 기사장 수상 1999~ 현 한국영화인 복지재단 원장 ㅇ 정진우 감독 작품 1962 외아들 1964 배신 , 국경 아닌 국경선 , 목마른 나무들 1965 밀회 , 난의 비가 , 가을에 온 여인 , 무정의 40계단 1966 초연 , 8240KLO , 초우 , 하숙생 , 악인시대 1967 밀월 , 하얀까마귀 , 4월이 가면 , 춘희 , 폭로 , 정부마농 , 구름 , 별아 내가슴에 1968 파란 이별의 글씨 , 미로 , 여여여 1969 국경의 밤 , 황진이의 첫사랑 , 청춘 , 차라리 남이라면 , 항구무정 , 동백꽃 피고지고 , 돌아오지 않는 밤 1970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 동춘 1971 풋사랑 1973 황소타고 시집왔네 1975 애종 , 초연 1978 율곡과 신사임당 1979 심봤다 , 가시를 삼킨 장미 1980 바다로 간 목마 ,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1981 앵무새 몸으로 울었다 1982 백구야 훨훨 날지 마라 1984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 자녀목 1991 사랑과 죽음의 메아리1 , 사랑과 죽음의 메아리 2부 1994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ㅇ 수상 경력 초우 -서울대학생 최악 영화상 동춘 -제7회 한국일보 연극영화상 작품상/부일영화상 작품상, 감독상 석화촌 -제9회 청룡상 최우수작품상/부일영화상 작품상, 감독상 섬개구리 만세 -제10회 청룡상 감독상/베를린 영화제 최초 본선 경쟁부문 진출 마지막 황태자 영친왕 -제10회 대종상 계몽 및 우수작품상/아시아영화제 최우수 청년감독상 율곡과 신사임당 -제17회 대종상 특별상(한국영화 최초 동시녹음 작품) 심봤다 -제18회 대종상 감독상/ 한국영화 기자상 작품상 뻐꾸기도 밤에 우는가 -제19회 대종상 우수작품상 자녀목 -제23회 대종상 작품상, 감독상/ 동경국제영화제 '세계영화 베스트30'선정 베니스영화제 본선 진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춘사영화예술상 심사위원 특별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