앤디워홀의 위대한 세계
- 제작년도
- 2010
2017년 하비 와인스타인의 성추문이 드러나면서 미투 운동이 본격화된 이후 전 세계는 물론이고 영화계도 큰 폭의 변화를 맞아왔다. 영화 산업 내부에서 여성들이 노골적으로 차별받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레 드러났고, 그동안 얼마나 적은 수의 영화가 여성의 크레딧을 달고 생산됐는지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그동안 영화계가 남성들만의 친목과 우정, 그리고 지배 카르텔 안에서 굴러왔다는 사실이 폭로됐다. 이후 변화는 극적이라 할만하다. 여성 감독들의 영화가 해가 갈수록 더 많이 만들어지고, 여성 캐릭터가 중심에 나서는 영화들의 비중도 높아지고 있다. 여성을 대상화하는 영화도 줄어드는 분위기다. 최근 가장 두드러지는 경향은 여성 전기영화 붐이다. 방사능 연구에 혁혁한 공헌을 세워 두 차례 노벨상을 받은 마리 퀴리의 이야기 < 마리 퀴리 >(마르잔 사트라피, 2019), 멜버른컵이라는 경마대회에 우승한 최초의 여성을 다룬 < 라라걸 >(레이첼 그리피스, 2019), 여성의 정체성을 노래로 승화했던 호주 가수 헬렌 레디의 이야기 < 아이 엠 우먼 >(문은주, 2019),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스타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삶을 네 배우(주로 줄리안 무어와 알리시아 비칸데르)를 통해 들려주는 <더 글로리아스 The Glorias>(줄리 테이머, 2019), 1960년에서 70년대 흑인 민권운동을 지지했다가 FBI의 무차별 공격에 시달린 영화배우 진 시버그의 이야기 <시버그 Seberg>(베네딕트 앤드류, 2019), 어린 날의 영광을 뒤로 한 채 쓸쓸한 말년을 보내는 주디 갈랜드에 관한 < 주디 >(루퍼트 굴드, 2019) 등이 실존했던 굵직한 여성들의 삶을 되돌아본 전기영화다. 폭스뉴스 사장 로저 에일스의 성추문을 그린 <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제이 로치, 2019)은 전기영화는 아니지만 실존하는 두 여성과 폭스뉴스에서 일했던 여성들을 일체화한 가공의 여성을 등장시켰다는 점에서 유사한 면이 있으며, 1970년 미스 월드 대회 반대 투쟁을 벌였던 여성들의 < 미스비헤비이어 >(필리파 로소프, 2020)도 실제 사건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점에서 전기영화적 성격을 갖고 있다. 또한 화제의 미국 드라마 <미세스 아메리카 Mrs. America>(크리에이터 다비 월러, 연출 안나 보덴, 라이언 플렉, 엠마 아산테, 로르 드 클레르몽-토네르, 자니크자 브라보, 2020)는 1960년대에서 70년대 사이 미국 페미니즘 운동의 걸출한 인물들의 삶을 교차시키며 보여주는 '옴니버스 전기영화'로 볼 수 있다. 이들 전기영화/ 드라마가 중요한 이유는, 당연한 얘기지만 실존했던 인물들을 통해 여성의 삶을 구체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 영화는 온갖 제약을 뚫고 여성의 한계를 극복하는 주인공을 다루거나(<마리 퀴리> <라라걸>) 여성의 삶을 바꾸기 위해 헌신하는 인물을 담아낸다(<아이 엠 우먼> <더 글로리아스> <밤쉘: 세상을 바꾼 폭탄선언> <미스비헤이비어> <미세스 아메리카>). 상당수가 여성 감독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 또한 의미 깊다. <라라걸> 같은 경우 여성 스태프들의 힘만으로 만들어졌을 정도라고 한다. 결국 이들 여성 전기영화는 그 내용 뿐 아니라 생산 방식에서도 미투 운동 이후 세계 영화계의 새로운 흐름을 보여준다 할 수 있다. 2020년 베니스국제영화제 경쟁 부문 초청작인 수산나 니키아렐리 감독의 < 미스 마르크스 >도 여성 전기영화다. 이 전기의 주인공은 무려 카를 마르크스의 막내딸 엘리노어 마르크스(1855~1898)다. 그 옛날 마르크스주의를 익혔던 사람들조차 채 알지 못했겠지만, 엘리노어는 카를 마르크스의 공식 후계자로 여겨지면서 19세기 중후반 온갖 분야에서 열렬한 활동을 펼쳤던 인물이다. 1855년 런던에서 카를과 예니 폰 베스트팔렌 부부의 일곱째 아이(이중 넷은 사망했다)로 태어난 그녀는 어릴 적부터 아버지를 도우며 ‘사회주의 신동’의 면모를 드러냈다. ‘투시’라는 별명을 갖고 있던 그녀는 14살 때부터 <자본론> 저술을 도왔고 16살 때부터는 아버지의 비서 역할을 하며 여러 투쟁의 현장을 쫓아다녔다. 성인이 된 뒤로 그녀는 당연하게도 노동운동의 최전선에 나선 최초의 여성 중 하나가 되었으며 세계 사회주의 운동의 지도자 반열에도 올랐다. 또한 맹아 단계에 있던 여성운동에서도 가장 앞줄에 선 인물이었다. <미스 마르크스>는 엘리노어 생애의 후반기인 1883년부터 1898년까지의 삶을 다룬다. 이야기는 카를의 장례식식장에서 시작된다. 이 첫 시퀀스에는 이후 그녀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 모든 인물이 등장한다. 돌아가신 카를부터 그의 영원한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 이미 사망한 큰 언니 예니첸의 남편 샤를 롱게와 아들 조니, 또 다른 언니 라우라의 남편 폴 라파르그, 가정부 헬레네 데무트, 그리고 엘리노어의 사랑이자 원수가 되는 에드워드 에이블링까지. 이들 인물을 담은 영화는 세 개의 축으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첫 번째는 운동가 엘리노어의 모습이다.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급속히 퍼져감과 동시에 노동운동이 활성화되고 사회주의 사상이 막 퍼지기 시작하던 19세기 중후반, 카를 마르크스의 공식적 계승자는 절친 엥겔스였지만, 아버지로부터 유산 관리권을 물려받으며 사실상 '후계자'로 지명됐던 엘리노어 또한 이 '운동권'에서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영화는 엘리노어가 여러 투쟁에 참여하는 모습과 함께 자신의 사상을 설파하는 모습을 직접 화법으로 보여준다. 엘리노어가 <자본론>의 자본 축적 법칙에 관한 구절을 관객을 똑바로 쳐다보며 읊는다든지 당대로선 매우 급진적이었던 여성 평등에 관한 연설 장면을 꽤 길게 편집하는데, 이는 그녀가 이야기하는 바가 19세기를 넘어 현재의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임을 드러내기 위해서인 듯 보인다. 두 번째는 가족들과 관련된 이야기다. 카를 집에서 오랫동안 가정부로 일했던 데무트에게는 프레데릭이라는 아들이 있었는데 데무트는 죽을 때까지 아들의 아버지가 누군지 밝히지 않았다. 아버지에 대한 믿음이 강했던 엘리노어는 여자 관계에선 방탕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엥겔스가 프레데릭의 친부라고 굳게 믿었다. 하지만 죽기 직전 엥겔스를 통해 진실을 알게 되면서 엘리노어는 혼란에 빠진다. 또한 언니 예니첸이 사망한 뒤 자신이 돌보고 있던 조카 조니가 아버지 롱게에게로 가면서 그녀의 외로움은 더욱 커진다. 세 번째 축은, 어쩌면 그녀의 삶에 가장 치명적인 영향을 미쳤던 실질적 남편 에드워드 에이블링과의 이야기다. 엘리노어에게 에이블링과의 사랑은 유부남과의 사랑이라는 당대의 틀을 깨는 파격이었지만, 이 과정에서 너무 많은 상처를 입는다. 마르크스 가문이나 엘리노어 마르크스에 관한 대다수의 전기가 얘기하는 것처럼, 에이블링은 엘리노어에게 아킬레스의 건과 같은 존재였다. 공식적으로 에이블링은 엘리노어와 함께 사회주의 사상을 곳곳에 설파한 운동가로 기록되지만, 사적인 영역에서는 엄청난 낭비벽과 쉴 줄 모르는 성편력으로 엘리노어의 삶을 자글자글 갉아먹었다. 이 영화에는 간략하게 언급되지만 에이블링은 미국 유세여행에서 고급 와인과 꽃을 마음껏 질러대며 비용을 낭비해 이들을 초청한 미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을 곤경에 빠뜨렸고 영국으로 돌아와서도 마르크스와 엥겔스로부터 엘리노어가 물려받은 유산 또한 펑펑 낭비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엘리노어는 인생의 거의 마지막 순간에 이르기까지 에이블링을 신뢰하려 애썼고 그것이 그녀 삶 최대의 불운이었다. 영화는 가뜩이나 힘겨운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의 나날을 살아가던 엘리노어가 아버지의 과거사에 배신당하고 에이블링에게 연달아 결정타를 맞으면서도 분투하지만 끝내 스스로 삶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보여주며 마무리된다. 사실, <미스 마르크스>에서 아쉬운 부분을 찾아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워낙 파란만장하고 굴곡이 뚜렷한 삶을 살았던 주인공을 그려서인지 영화는 순간순간 에피소드를 단순 나열하는 듯 보이기도 하고, 운동가로서의 엘리노어 보다는 한 남성과 가족 관계에 휘둘리는 면모가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는 듯하며, 워낙 많은 인물들이 한꺼번에 등장하다 보니 그들에 대한 설명이 부족해 풍부한 이해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감독은 나름의 '필살기'를 보여준다. 한때 밴드 벨벳 언더그라운드나 앤디 워홀 같은 예술가들과 어울렸던 전설적 가수 니코가 1980년대를 맞아 독자적 삶을 꾸려가는 모습을 그린 여성 전기영화 < 니코, 1988 >(2017)로 데뷔한 수산나 니키아렐리는 자신의 두 번째 장편영화에서 전기영화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를 펼친다. 전기영화의 한계라 하면 실재했던 인물의 삶이라는 굴레에서 궁극적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일 텐데, 니키아렐리는 여러 장치를 통해 엘리노어 마르크스에게 새로운 '영화적 삶'을 부여하려 한다. 가장 두드러지는 대목은 후반부 엘리노어가 펑크록 사운드에 맞춰 격렬한 춤을 추는 장면이다. 자신의 마음대로 바뀌지 않는 세상에 대한 갑갑함과 버젓이 자신을 두고도 다른 여성과 결혼한 에이블링을 보는 괴로움에 둘러싸여있던 엘리노어는 이 장면에서 그동안의 고통을 벗어버리려는 듯 무아지경의 상태가 되도록 몸을 마구 내던진다. 어쩌면 진혼 의식이나 살풀이와도 같은 이 장면을 통해 니키아렐리 감독은 엘리노어 마르크스에게 순간의 해방을 선물한다. 그리고 이 한 장면은 앞서 언급한 여성 전기영화보다 이 영화가 한 발 앞선 지점이며, 어쩌면 이 지점이 앞으로 영화들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지도 모른다. P.S. 영화 속 ‘살풀이 의식’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는 것은 미국 밴드 다운타운 보이즈 Downtown Boys의 음악이다. 영화의 문을 여는 장면에서 사용된 'Waves of History'부터 엥겔스가 사망하는 장면 직후에 흘러나오는 '인터내셔널가 L'Internationale'까지 여러 장면에서 곁들여지는, 좌빨 성향 농후한 이 미국 밴드의 거침없는 사운드는 어릴 적부터 "Go Ahead"라는 인생의 모토를 갖고 살아온 엘리노어 마르크스의 삶에 대한 태도를 잘 드러낸다.
1. (... 그리고 계속) 이렇게 시작할 수밖에 없다. 전혀 의도했던 것은 아닌데 작년에 나는 이 지면에서 장-피에르 레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아마 영화에 관심이 있다면 누구라도 자기의 방식으로 장-피에르 레오의 영화를 본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프랑수아 트뤼포의 첫 번째 영화에 14살의 나이에 출연한 소년. 앙뜨완 드와넬이 마지막 장면에서 바다를 달려가다 말고 문득 멈춰 서서 우리를 바라볼 때 그 하나의 쇼트는 영화사의 사건이 되었다. 다섯 편의 앙트완 드와넬. 그 곁에는 장-뤽 고다르와 함께 68년 5월을 기다리면서 파리를 서성거리는 청년 장-피에르 레오가 있다. 혁명에의 예감. 그러나 장 외스타슈의 영화에서 레오는 실패한 혁명의 멜랑코리에 관해 카페에서 장황하게 넋두리를 늘어놓는다. 그 사이에 12시간 30분 동안 분주하게 뛰어다니는 자크 리베트의 장-피에르 레오가 있다. 피에르 파올로 파졸리니의 영화에서 레오는 여전히 철들지 않는다. 베르날도 베르톨루치는 누벨바그에 적대적인 감정을 안고 말론 브란도의 맞은편에 세워 놓았다. 예르지 스콜리모프스키와 글라우베 로샤를 빼놓고 싶지는 않다. 장-피에르 레오는 종종 영화에서 사라진 것처럼 보일 때가 있었다. 누벨바그가 완전히 끝난 다음에도 장-피에르 레오는 살아남았다. 아키 카우리스마키는 장-피에르 레오를 브레송 영화의 모델처럼 찍었다. 그리고 난 다음 전혀 예상하지 않은 순간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레오를, 나이 든 레오를, 거의 낙엽이 된 것만 같은 레오를 만났다. 청춘은 저물고 있었다. 나는 작년에 슬픈 마음으로 알베르 세라의 영화에서 내내 침대에 누워있는 장-피에르 레오를 보았다. 그러면서 중얼거렸다. 이 소년을 볼 날이 많지 않겠구나. 그런데 갑자기 가을에 전화를 받았다. “장-피에르 레오를 만날 볼 생각이 있으세요?” 나는 처음에는 무언가 잘못 들었는 줄 알았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두 편의 영화. 장-뤽 고다르의 1985년 작품 < 작은 독립영화사의 흥망성쇠 >와 스와 노부히로의 새 영화 <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을 상영하면서 두 편의 영화의 주연인 장-피에르 레오를 초대하기로 했다는 사실을 곁들여 알려주었다. 장-피에르 레오라니! 나는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아니, 너무 감사한 나머지 내 쪽에서 고맙습니다, 라고 말해버렸다. 해운대의 호텔에서 장-피에르 레오를 만난 것은 10월 13일 오후 5시 30분이었다. 날씨는 맑았고 바람이 몹시 불었으며 창문 바깥의 구름은 저녁을 기다리며 한가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내 앞에 나타난 장-피에르 레오는 < 400번의 구타 >의 소년이 아니라 < 루이 14세의 죽음 >의 저물어가는 태양왕이었다. 그는 거동이 몹시 불편했고, 의자에 앉는 것조차 힘들어했다. 그 의자는 최고급이었으며, 마치 침대처럼 푹신한 것이었다. 나는 세세한 디테일을 쓸 수 있지만 지면이 허락하지 않는다. 장-피에르 레오는 남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앉자마자 내가 질문하지도 않았는데 고다르와 함께 작업한 이야기부터 꺼내 들었다. 아아, 고다르라니! 장-피에르 레오는 내가 만난 고다르 영화에 출연한 두 번째 배우이다. 첫 번째는 태안반도에서 만난 (< 다른 나라에서 >를 찍으러 방문한) 이자벨 위페르였다. 그런 다음 장-피에르 레오는 주머니 속의 구슬을 꺼내듯이 차례로 이름을 호명했다. 그는 말할 때 (영화에서 보던 것처럼, 정확하게 그 자세로) 커다란 제스처로 양팔을 치켜들고 웅변하듯이 흔들었다. 하지만 가엾게도 이미 목소리는 지쳐서 갈라졌고 종종 가까스로 힘을 내서 말했다. 게다가 발음은 불분명하게 뒤섞였고 내가 알고 있는 영화 제목들도 때로 놓쳤다. 하지만 몹시 산만하게 이야기를 하다말고 문득 내게 말했다. “내가 그들에게 배운 게 뭔지 알아요? 배우에게 연기는 철학하는 방법이라는 겁니다. 고다르가 내게 해준 말이에요. 영화는 그 방법을 쳐다보는 예술인 거죠” 나는 갑자기 누벨바그 배우들의 연기에 대해서 많은 것을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중얼거렸다. 아아, 이것만으로 충분해. 이걸로 나는 충만해. 두 번의 토크, 나흘 동안 아주 많은 일이 있었다. 나는 당신이 누벨바그의 작은 영화사에 관해 절대 알 수 없는 많은 이야기를 들었다. 장 외스타슈에 대해서도 들었다. 차이밍량의 연기 지도에 대해서도 들었다. 하지만 장-피에르 레오는 정말 공개적인 자리에서의 토크를 원치 않았다. 나는 당신의 이야기를 한국의 시네필들이 간절히 원한다고 애절할 정도로 간청했다. 한 가지는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장-피에르 레오가 그렇게 당신들 앞에 의자에 오래 앉아있었던 건 내 간청에 대한 대답이었다. 장-피에르 레오와의 두 번의 토크가 끝났다. 두 번째 토크가 끝난 다음 그는 아내의 부축을 받으면서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 그는 문이 닫히기 전에 내게 말해주었다. “당신도 트뤼포처럼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이군요” 그리고 포옹을 해주었다. 나보다 키가 작았지만 약간 힘겹게 고개를 들고 내 뺨에 그의 뺨을 비벼주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고 그런 다음 순식간에 내 앞에서 사라졌다. 약간 멍한 기분으로 그 앞에 잠시 서 있었다. 문득 내가 평생 동안 꿈꾸었던 일 중의 하나가 이루어진 순간임을 깨달았다. 어떻게 달리 말할 수 있을까. 2. 올해 나의 영화는 망설일 필요 없이 데이빗 린치의 < 트윈 픽스: 더 리턴 >(시즌 3)이다. 그저 괴이하다고밖에 달리 설명할 수 없는 이 시리즈는 여전히 데이빗 린치가 우리 시대에 가장 멀리 나아간 예술가 중의 한 명이라는 걸 보여주는 데 망설임이 없었다. 게다가 (역시) 우연의 일치이겠지만 올해 1월 3일 나의 첫 토크는 데이빗 린치의 < 블루 벨벳 >이었다. 그런 다음 데이빗 린치에 관한 다큐멘터리 < 아트 라이프 >를 진행했고, 가을에는 < 이레이저 헤드 > < 트윈 픽스: 불바다를 나와 함께 건너자 > < 로스트 하이웨이 > < 멀홀랜드 드라이브 >를 차례로 진행했다. 12월에는 데이빗 린치에 대해서 이야기할 자리가 기다리는 중이다. 말하자면 올 한 해는 내게 ‘다시 찾아온’ 데이빗 린치의 한 해였다. 왕빙의 두 편의 영화는 한 마디로 굉장했다. < 15시간 >은 15시간 40분 동안 진행된다. 쯔린성에 자리한 아동복 피복 공장 15,000개 중의 한 작업실을 막 일이 시작되는 아침 시간에 찾아간 다음 하루 종일 그 장소에 머물면서 그들이 퇴근하는 한밤중까지 하루 종일 버티고 있는 이 영화는 (좀 이상한 의미에서) 왕빙의 (앤디 워홀의) <엠파이어>이다. (아마 이 영화에 대해서는 길게 이야기할 다른 자리가 있을 것이다.) 다른 한 편 < 미세스 팡 >은 알츠하이머로 죽어가는 할머니 팡슈잉(方?英)을 찍었다. 여기서 찍은 것은 말 그대로 ‘죽어가는’ 시간이다. 왕빙은 죽음을 착취하지 않는다. 그저 무시무시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미세스 팡>은 죽음 앞에서 영화가 가져야 할 태도를 다시 한번 질문한다. 이 두 편의 영화는 한 편은 한 장소에 대해서, 다른 한 편은 한 사람에 대해서 찍는다. 왕빙은 점점 더 멀리 나아가고 있다. (부산에서 만난) 프랑스 프로듀서에 의하면 왕빙은 이미 다음 영화를 파리에서 편집하는 중이다. 안타깝지만 나는 다음 영화에 대해서 비밀을 지키기로 약속했다. 아마 2018년에 만나게 될 왕빙의 영화는 하나의 사건이 될 것이다. 그것만은 분명하다. 왕빙의 영화가 고통스럽다면 프레드릭 와이즈만은 잠시 동안 천국에 다녀온 기분을 안겨준다. <미세스 팡>에 올해 본 최고의 클로즈업 쇼트가 있다면 < 뉴욕 라이브러리에서 >에는 최고의 롱 쇼트가 기다리고 있다. 프레드릭 와이즈만은 내가 알고 있는 한 롱 쇼트를 가장 의미 있게 찍는 감독이다. 거의 천국처럼 진행되는 이 영화가 와이즈만도 미처 예기치 않게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에서 가장 정치적인 영화가 된 것은 동시에 이 영화의 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프레드릭 와이즈만의 21세기 영화가 항상 좋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번 영화는 걸작이다. 역사적으로 유명한 인물의 초상화를 그려낸 두 편의 기괴한 영화 <자네트>와 < 재키 >는 서로 다른 의미에서 굉장하다. 아마 <자네트>는 찬반이 갈릴 것이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브뤼노 뒤몽의 새로운 뮤지컬에 완전히 승복한다. 올해에는 두 편의 파블로 라라인의 영화를 볼 수 있었는데 (다른 한 편도 마찬가지로 전기영화인 < 네루다 >이다) 나는 이 사람의 영화를 더 많이 보고 싶다. 원작에 기대어 만든 두 편의 서사 에픽 < 잃어버린 도시 Z >와 <자마>는 영화와 ‘자연’이 만나는 방법에 대한 진지한 탐구이다. 점점 영화에서 자연을 그래픽으로 그려내는 동안 어떤 영화들은 ‘생생한’ 자연 안으로 들어가서 그것을 영화라는 장치 자체가 경험하는 것을 기록하고 싶어 한다. 올해 가장 신선한 영화는 조쉬와 베니 사프디 형제의 < 굿 타임 >이다. 아마 사프디 형제는 점점 더 놀라워질 것이다. 이 선택은 지지의 표명이다. 물론 마지막에 선택한 스와 노부히로의 <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는 단지 장-피에르 레오를 만났기 때문에 일종의 기념으로 포함시킨 것이 아니다. 스와 노부히로는 여기서 매우 느슨하게 진행하면서 마치 프랑수아 트뤼포의 영화를 다시 보는 것만 같은 기분을 가져온다. 물론 이 영화의 대부분에서 보여준 그의 연출방식, 즉 배우에게 영화를 그저 맡긴 채 그 리듬을 따라가는 흐름은 스와 노부히로만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이제까지 항상 어떤 긴장을 품고 있었다면 여기서는 드물게도 기분 좋은 한여름의 휴가를 즐기러 온 것만 같다. 아마 이 영화 속의 아이들이 보여주는 그 자연스러움이 한몫했을 것이다. 한 가지 더. < 퍼펙트 커플 >이 로셀리니의 < 이탈리아 여행 >의 오마주라면 분명히 < 오늘밤 사자는 잠든다 >는 < 400번의 구타 >의 오마주이다. 특히 마지막 장면. 영화 속의 영화에서 잠든 연기를 하던 장-피에르 레오가 문득 눈을 뜨고 우리를 바라볼 때 거기서 어린 앙트완이 우리를 바라보던 그 장면이 어쩔 수 없이 떠오를 수밖에 없었다. 추신: 여러 가지 이유로 한국영화를 뽑지 않긴 했지만 올해의 연기에서 < 밤의 해변에서 혼자 >에서 김민희 는 정말 아름답고 애처롭다. 특히 어둠이 다가오는 커피숍 앞에서 노래를 부르는 장면의 롱 테이크 씬은 홍상수의 모든 영화 중에서도 가장 아름답고 슬픈 장면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을(를) 위한 선’이라는 제목이 붙은 백남준 의 작업은 1961년부터 1964년 사이에 집중적으로 분포되어 있다. 가장 먼저 선보인 작업은 <머리를 위한 선>(1961)으로, 작곡가 라 몬테 영(La Monte Young)이 쓴 퍼포먼스 스코어 <구성 19 #10 밥 모리스에게 Composition 19 #10(to Bob Morris)>에서의 지시문 “선을 그리고 그것을 따라가라”를 백남준이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잉크를 머리에 묻혀 길이가 긴 종이에 선을 그리는 퍼포먼스였다. 이 외에도 사람 머리 조각을 쇠사슬로 매달고 신어볼 수 있게 만든 <걸음을 위한 선>(1961), 거름 체에 물건을 매달아 악기처럼 소리를 내 볼 수 있도록 한 <손을 위한 선>(1961), 슬리퍼, 양철 주전자, 열쇠, 나무 인형 등 잡다한 사물을 줄에 매달아 바람에 의해 서로 부딪히게 만들어 풍경처럼 소리를 내게 만든 <바람을 위한 선>(1963)과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사물을 설치한 후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한 <코를 위한 선>(1963), 검은 TV 화면 가운데에 가늘고 긴 흰색 세로줄이 나타난 < TV를 위한 선 >(1963) 등등이 있다. 이 작업들이, 그리고 백남준이 선 사상과 어떻게 관련되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을뿐더러 그의 예술적 실천을 이해하는 데 있어 그리 유용한 접근은 아닌 것 같다. 그보다는 대부분의 작업이 전시되었던, TV를 처음으로 전시장 안에 들여옴으로써 백남준을 유명하게 만든 부퍼탈의 파르나스 갤러리에서의 개인전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을 떠올려 보자. 이 전시의 독특함은 작업을 드러내는 방식에 있었다. 전시의 제목을 가만히 곱씹어 보면 그가 원했던 것은 ‘음악’을 ‘전시’하는 것이었던 듯한데, 관객은 전시장에 놓인 각종 작업을 직접 다루고 소리를 내 보면서 경험할 수 있었다. 음악을 가만히 앉아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전시로 보여주고자 했던 인터미디어적 특성, 작업에 대한 자유로운 경험과 자율적인 의미 생산에 대한 강조. 백남준은 1962년 갤러리스트 롤프 예를링에게 쓴 편지에서 자신의 전시가 “회화나 조각이 아닌 ‘시간-예술’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즉 그에게 중요했던 것은 음악이 그러하듯 시간을 통해서 가능한 미적 경험이었고 그리하여 전시장에서의 작품이란 관객의 시간과 상호적일 수 있는 장치였다. 그림 1: <흰색 회화>(1951) 앞에 앉아 있는 라우센버그 < 영화를 위한 선 >(1962-64)은 ‘비어 있는’ 필름의 프로젝션이다. 즉,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리더 필름을 영사기에 넣고 빛으로 쏴 흰 화면을 만든다. 이 화면 안에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필름에 난 스크래치나 묻어 있는 먼지 때문에 무언가가 빠르게 나타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것뿐이다. 일반적으로 필름 프로젝션에서 볼 수 있는 이미지의 형식과 내용은 어디에도 없는 이 반영화(antifilm)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존 케이지는 이미지 없이 프로젝션 되는 <영화를 위한 선>을 보고 라우센버그의 <흰색 회화 White Painting>(1951)를 떠올렸다고 한다. 케이지가 라우센버그의 회화에 영향을 받아 <4분 33초>(1952)를 만들게 되었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라우센버그는 “캔버스는 절대로 비어있지 않다”라고 믿었고, 케이지는 “소리는 언제나 존재한다”라고 말하며 이에 응답했다. 그림 없는 회화, 소리 없는 음악, 그리고 이미지가 없는 영화. 서로 상이한 매체지만 이들은 모두 비어있는 것이자 가득 찬 것에 대한 실험이었다. 라우센버그가 시각의 영역에, 케이지가 소리의 영역에 있었다면, 유령과 같은 이미지가 물러난 백남준 의 화면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시간이다. 일반적으로 영화에서 기대되는 서사가 아니라 영화를 구성하는 물적 조건인 기계 장치가 만들어내는 시간은 투명하다. 볼 것 없는 화면과 반복적으로 돌아가는 소리 앞에서 관객은 자기 자신의 시간에 대한 감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우게 된다. 백남준은 기본적으로 지루함의 미학에 대해 관심이 많았다. 그는 지루함이 발생할 때 경계가 사라지는 일종의 미학적 순간이 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루함은 흥미를 가능하게 하는 전제이기도 하다. ‘음악의 전시’ 서문에 백남준은 다음과 같이 썼다. “그러니 해보라. 처음에는 (아마) 흥미롭겠지만 나중에는 지루해질 것이다. 견딜 것! (아마) 다시 흥미를 느끼게 될 것이다, 그러다가 지루해질 것이다. 견딜 것!” 백남준이 보기에 영화라는 것은 시간을 구조화하는 주요한 시간 기반 매체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 시간을 드러내기 위해 영화를 지배하던 형식과 내용이 직조된 기존의 구조를 제거해야만 했을 것이다. < 영화를 위한 선 >이 1960년대에 등장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 테다. 60년대는 전반적인 모든 예술의 영역에서 기존의 질서와 가치에 대한 급진적인 대안적 실천이 쏟아져 나오던 시기였다. 로버트 모리스는 1961년 <두 개의 기둥 Two Columns>을 만들어 마이클 프리드가 ‘연극성’이라고 폄하한 바로 그 전시장에서의 경험, 현상학적 미학을 강조한 미니멀리즘의 시작을 알렸다. 루시 리파드는 개념 미술의 맥락에서 미적 오브제가 사라져가는 60년대의 경향을 가리켜 ‘비물질화’라는 용어를 그의 1973년 저서에서 사용한다. 1958년 1월, 이미 앨런 캐프로는 「아트뉴스」지에 ‘잭슨 폴록의 유산’이라는 글을 발표하며 삶의 영역으로 확장된 예술의 가능성에 대해 말했고 플럭서스 또한 마찬가지로 예술과 삶의 경계를 지워 예술을 모두에게 접근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자 했다. 다다에 뿌리를 둔 플럭서스는 단순함을 중요하게 생각하였고 다양한 방식으로 ‘DIY(Do-It-Yourself)’ 미학을 전파했다. 여기에는 1950년대에 존 케이지가 탐구한 불확정성이라는 개념이 깔려 있다. 영화의 영역에서 또한 대단한 에너지를 지닌 움직임이 있었다.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시네마를 중심으로 아방가르드 영화가 활발히 전개된 것이다. 1962년 23명의 독립영화 감독이 모여 뉴 아메리카 시네마 그룹이 정식적으로 조직되었는데 이들이 적극적이었던 것은 새로운 형식과 내용의 영화를 유통시키는 대안적인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었다. 특히 조나스 메카스가 1964년 세운 필름메이커스 시네마테크는 당시 등장하던 영화와 비디오 예술 실천을 위한 중요한 장소였다. 이곳은 시각예술과 퍼포먼스가 활발하게 상호작용하는 곳이 되었고, 다양한 방식의 전시와 유통을 통해 주류 예술 밖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에 대해 고민했다. 이곳에서 영화를 보여주는 다양한 방식들이 실험되었다. 그림 2: 1965년 10월 28일자 「빌리지 보이스」 1964년 뉴욕으로 이주할 당시 백남준 의 여행용 비자를 위한 스폰서가 바로 메카스였다. 메카스는 플럭서스의 핵심 인물이었던 마키우나스와 잘 알고 지냈다. 백남준이 뉴욕에서 처음으로 < 영화를 위한 선 >을 선보였던 것은 1964년 마키우나스가 초대해서 참여하게 된 플럭스홀(Fluxhall)에서의 6주간의 플럭서스 페스티벌(Fully Guaranteed 12 Fluxus Concerts)이었다. 백남준은 4월 25일 다섯 번째 콘서트(Concert No. 5)에서 <피아노를 위한 플럭서스 콘서트 Fluxus Concert for Piano>라는 제목의 작업과 함께 <영화를 위한 선>을 선보였고, 5월 8일 여덟 번째 콘서트(Concert No. 8)에서는 <영화를 위한 선>을 단독으로 상영했다. 브루스 젠킨슨에 따르면, 이 행사에서 <영화를 위한 선>은 “업라이트 피아노와 더블베이스가 놓인 다락 공간의 전면에 위치한 가정용 영화 스크린의 절반도 채우지 못한” 크기로 상영되었다. 1965년 11월 2일에는 조나스 메카스가 필름메이커스 시네마테크에서 만든 행사 ‘뉴 시네마 페스티벌Ⅰ’에서 <영화를 위한 선>을 선보였다. 다케히사 고수기는 이 행사에서 백남준이 노출된 빈 필름과 노출되지 않은 빈 필름 두 가지 버전으로 스크리닝했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라이브 퍼포먼스를 결합시켰다고 회고한다. 피터 무어가 촬영한 <영화를 위한 선>과 관련된 가장 유명한 사진이 바로 이 행사에서의 기록이다. 이 사진을 보면 백남준은 <영화를 위한 선>이 상영되는 스크린을 마주하고 서 있다. 한 해 전의 상영과는 달리 스크린의 크기가 훌쩍 커졌다. 그는 영사기와 스크린 사이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며 화면을 드나드는 간단한 행위를 수행했는데, 이는 퍼포먼스라기보다는 <영화를 위한 선>에 대한 백남준 자기 자신의 관람 행위처럼 보이기도 한다. 즉 영화의 미니멀리즘적 경험인 것이다. 메카스는 「빌리지 보이스」에 다음과 같이 썼다. “백남준의 (시네마테크에서의) 저녁을 보았을 때, 나는 깨달았다. 라 몬테 영, 스탠 브래키지, 그리고리 마르코폴로스, 잭 스미스, 혹은 (의심의 여지 없이) 앤디 워홀의 예술처럼, 그의 예술은 천 년 동안 이어진 미학적 법칙에 의해 지배되고, 다른 고전적인 예술의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분석되고 경험된다. (...) 빛이 이미지가 된 자리에 이미지 자체를 없애버렸다.” 그림 3: 플럭스키트, 1965 그림 4: 플럭스키트 안의 <영화를 위한 선> 패키지 < 영화를 위한 선 >이 언제 최초로 만들어졌는지는 모호하다. 「플럭서스 Etc: 질베르트 & 릴라 실버만 콜렉션」에 따르면 <영화를 위한 선>이 포함된 백남준 의 필름 스크리닝이 1962년 12월 파리의 학생과 예술가를 위한 미국인 센터(American Center for Student and Artists in Paris)에서 있었고, 마키우나스 또한 「필름 컬처」 1966년 겨울호에 <영화를 위한 선>의 제작연도를 ‘1962-1964’로 표기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이 작업은 제작년도를 표기하기에 무척 까다로운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영화를 위한 선>의 필름은 이후 여러 버전으로 제작되어 유통되었을 뿐만 아니라, 과연 이 작업의 핵심을 무엇으로 볼 것인지 모호하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기록되지 않은 생필름을 프로젝션하는 것이라면, 과연 이 작업의 요체는 필름일까? 백남준이 사용했던 바로 그 원본 필름이 중요한 것인가? 아니면 작업이 제공하는, 백남준이 고민했던 시간에 대한 경험이 중요한 작업일까? <영화를 위한 선>은 형식과 그것이 놓이는 맥락이 끊임없이 바뀌기 때문에 무엇이라 규정지을 수 있는 위치가 고정되어 있지 않다. 1962년의 상영에 대해 케이지는 “1시간 길이의 이미지 없는 필름”으로 기억했으며, 메카스는 시네마테크에서 16mm필름으로 30여분 길이로 상영했다고 밝힌다, 여기에 더해 마키우나스가 플럭서스의 오브제와 인쇄물을 보급하고 유통시키기 위해 DIY 버전으로 만든 에디션 플럭스키트(Fluxkit, ‘A’ 카피와 ‘B’ 카피 모두 1965년 제작) 이후에는 <영화를 위한 선>이 주로 루핑으로 상영되었음을 상기해보면(이는 유통을 위해 작은 크기의 패키지로 제작된 탓에 필름의 길이가 짧아졌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작업의 정해진 상영 방식은 없는 듯하다. 이 말은, <영화를 위한 선>의 물질적 상태가 정해진 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최근 <영화를 위한 선> 단 한 작품에 대한 연구를 통한 전시를 기획하고 이에 관련된 책 「Revisions: Zen for Film」을 펴낸 한나 횔링이 다루는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그는 <영화를 위한 선>을 전시장에서 봤던 세 번의 경험을 떠올리는데, 한번은 필름 프로젝터로, 한번은 디지털화된 이미지의 프로젝션으로, 한번은 필름이 담긴 캔이 유물처럼 전시되어있는 경우였다. 그는 작품이 여러 방식으로 존재할 수 있는 이러한 상태, 계속적으로 재물질화 되고 관객의 참여 또한 그 의미가 갱신되는 이러한 상태가 <영화를 위한 선>의 복잡하고 흥미로운 점임을 얘기한다. 마키우나스는 플럭서스의 이벤트를 조직하는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데, 영화의 문화와 이것을 유희적으로 즐기는 데 관심이 많았다. 플럭서스의 활동을 영화의 영역으로까지 확장하고자 한 그의 노력 덕분에 플럭서스 그룹은 플럭스필름(Fluxfilm)라는 이름 아래 많은 필름 작품을 만들어냈다. 마키우나스는 1962년부터 1970년 사이에 백남준 , 오노 요코, 벤 보티에, 폴 샤리츠 등 플럭서스 그룹에서 제작한 영화 37편을 모아 플럭서스 앤솔로지(Fluxus Anthology)를 편집했는데, 그 첫 번째(Fluxfilm No.1)가 바로 < 영화를 위한 선 >이다. 이 버전에서 <영화를 위한 선>의 러닝타임은 7분 58초이다.(플럭서스 앤솔로지의 전작은 모두 우부웹에서 감상할 수 있다. http://www.ubu.com/film/fluxfilm.html). <영화를 위한 선>의 16mm 버전은 뉴욕현대미술관(MoMA)에서 아카이브 형태로 수장고에 보존 중이다. 질베르트 & 릴라 실버만 플럭서스 컬렉션에 포함된 이 필름은 현존하는 필름 중 유일한 극장용의 긴 버전이지만, 이는 더 이상 상영용으로 쓰이지 않는다. 흥미로운 것은, 누군가가 뉴욕현대미술관이 소장 중인 <영화를 위한 선>의 이 버전을 대여하고자 하는 경우 미술관은 필름을 대여해주는 것이 아니라 스크리닝의 개념만을 대여할 뿐이라는 사실이다. 즉 <영화를 위한 선>을 빌리는 이는 프로젝터를 구비하기만 한다면, 길이를 마음대로 정하여 아무 16mm 빈 필름 리더를 상영에 사용할 수 있다. 최근 뉴욕현대미술관의 정책은 원본 필름을 이 작업의 필수적인 요소로 생각하지 않는 것으로 바뀌었다고 한나 횔링은 밝히고 있다. 이는 분명 설치나 참여형 예술, 이벤트로서의 영화, 퍼포먼스 등 최근의 예술 실천뿐만 아니라 디지털 사본이 무한히 증식 가능한 당대의 매체적 조건과도 맞닿아 있는 문제일 것이다. <영화를 위한 선>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메인 사진 설명: 피터 무어, <영화를 위한 선> 앞에 서 있는 백남준. 1965년 11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