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울나라의 앨리스
- 감독
- 토마스 스테이시
- 제작년도
- 2005
하나, 김정민의 영화를 보았다. < 감자 >(2018)가 2019년에 가장 뜨거웠던 단편영화 중 한 편이라는 거, 나는 몰랐다. 당연히 김정민이란 감독의 이름도 알 리 없었다. 그러다 < 긴 밤 >(2020)이란 영화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 2020년에 열린 미쟝센단편영화제에서 ‘절대악몽 부문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한 작품. 은근히 < 기생충 >(2019)에 딴지를 거는 듯한 영화에 매혹당하는 데는 단 몇 분이면 족했다. 너무나 예쁜 컬러 – 근래 김정민이 만드는 영화들의 특징 중 하나다 – 로 포장된 세계는 아마도 반지하나 지하로 보이는 어떤 공간이다. 거기서 벌어지는 기괴한 행태, 혹은 사건은 페미니스트들이 기겁하고 입을 막을 그런 류의 것이다. 당연히 영화제마다 받아들이는 형국이 극과 극으로 다를 수밖에 없을 터, 사실 그것은 김정민이란 감독이 그간 만들어온 수십 편의 단편영화가 겪었을 수난의 한 예에 불과하다. 내가 아는 한 제일 먼저 나온 김정민의 영화는 <홍상수 영화를 찍기로 했다>라는 제목의 2016년 작품이다. ‘홍상수 영화’라니. 홍상수에 관한 영화인가 싶었는데 그야말로 홍상수 영화를 따라가며 흉내 낸 그런 영화다. 극 중 대사를 빌리자면 ‘어설프게 따라하는 것보다 똑같이 베끼는 게 영화제 취향에 맞을 것 같다’라는 논지다. 영화제 취향을 어설프게 간파한 죄인지, <홍상수 영화를 찍기로 했다>가 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아마도 영화제의 예심을 보는 수많은 사람에게 비웃음을 사며 여기저기 떠돌다 사라진, 그런 운명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김정민이 방향을 튼 거 같지는 않다. 노골적인 베끼기는 아니어도 특정 감독의 영화를 떠올리게 하거나 오마주를 바친 듯한 영화의 리스트는 끝도 없이 전개되었다. 내가 대충 감을 잡은 감독의 이름만 나열하더라도 ‘홍상수, 봉준호, 왕가위,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장 뤽 고다르, 오즈 야스지로, 기타노 다케시, 스탠리 큐브릭, 폴 토마스 앤더슨, 허준호, 이마무라 쇼헤이, 미카엘 하네케’ 등이다. 하나같이 위대한 거장의 이름이니 창피함을 무릅쓴다는 생각도 들고, 한편으로 참 겁도 없다 싶다. 그런 경향의 작품 가운데 피식대며 본 작품도 있고, 썩 마음에 드는 작품도 있다. 2018년 작품 <세 아들>은 후자에 해당한다. 4:3 화면비에 흑백으로 찍은 카메라의 눈높이가 정확하게 오즈 야스지로의 그것과 일치하고, 제목(특히 영어 제목 - A Winter Afternoon)이나 음악도 영락없이 오즈의 그것이다. 만약 오즈가 이 영화를 본다면 네 인물이 빚는 관계의 이야기에 슬며시 미소를 지을지도 모르겠다. 단, 온전히 오즈의 인장만 박힌 것도 아니다. 김정민의 감성과, 어쩔 수 없이 끼어드는 21세기 청년의 분위기가 이건 디지털영화라고 말한다. 물론 김정민이 그런 영화만 고집하는 건 아니다. 여기저기를 찔러대는 시도가 별로 바뀌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시간이 흐르면서 자기 색채를 갖춘 작품도 하나둘씩 만들어내기에 이르렀다. <감자>가 그런 작품이다. 다시 말하거니와, 5년에 걸쳐 어림잡아 스물다섯 편이 넘는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근작인 <감자>와 <긴 밤> 외에 주목을 받은 영화는 드물다. ‘숏컷 시리즈’라 이름 붙인 영화들은 습작처럼 보이고 완결성이 아쉬운 터라 그간 영화제에서 선택하지 않은 이유를 충분히 짐작 가능하다. <왼다리>(2019)와 <첩첩산중>(2019)처럼 느슨하게 연결된 영화의 경우 나란히 보지 않으면 매력을 놓쳤을 수도 있다. 이렇게 이유를 따져 보면 너무나 많은 (영화제) 불합격의 사유를 꺼낼 수 있겠으나, 그중 가장 큰 것 하나를 들자면 ‘이단성(異端性)’ 때문이라 하겠다. 이 말을 설명하기 위해 아래의 앨범 재킷을 먼저 보았으면 한다. 그룹 ‘스틸리 댄’의 명반 시대를 연 1972년 앨범 <Can’t Buy a Thrill>의 재킷이다. 위에서 잠시 언급한 김정민 특유의 색감이 궁금하다면 이 앨범의 재킷을 보면 된다. 노랗고 빨간 색깔에 변형을 가해 어딘지 인공적이고 조잡한 인상을 주는데, 김정민은 여기에 파스텔 톤을 좀 더 강화해 ‘이것이 김정민의 세계다’라고 주장한다. 위 재킷에서 컬러보다 더 신경 써서 보아야 할 건 소재다. ‘거리의 여성, 나체의 남자와 여자, 욕망을 은유하는 싸구려 물품’은 재킷의 컬러와 묘한 조화를 이루는데, 포스트 히피 시대에나 어울릴 것들인 게 사실이다. 스틸리 댄의 앨범 재킷이 종종 육감적인 소재를 다루긴 하지만, 이 앨범의 키치적 취향은 다른 앨범 재킷의 고상한 톤과 거리가 멀다. 21세기에 저런 재킷을 앨범의 커버로 사용하는 팔푼이는 없을 게다. 김정민의 영화가 저런 소재나 주제를 다루지 않지만, 시대와 주변의 눈길을 의식하지 않고 생산해 내는 그의 영화와, 위의 재킷이 주는 인상이 스무드하게 오버랩된다. 이상한 세계의 앨리스의 눈으로 현실의 세계를 보려는 정신 나간 시도. 심지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주제를 살짝 다룰 때에도 현실감보다 생뚱맞은 시선을 들이대곤 한다. 굳이 김정민의 영화를 독립영화로 규정한다고 하더라도, 한국의 주류 독립영화의 경향과 그의 영화는 어떤 연결점이 없다. ‘똑같은 고민, 지배적인 정서, 하나의 목소리’가 반복되는 독립영화와도 거리가 먼, 김정민의 영화에는 전혀 다른 세계가 발견된다. 만듦새에서 부족할지 몰라도 나는 그의 개성을 찬양한다. 게다가 그는 한 해에 최소 다섯 편 정도의 영화를 쏟아낸다. 그건 열정의 다른 얼굴이다. 아무도 안 봐주는데 이렇게 미치도록 영화를 만들어내는 열정, 무기력한 영화들 사이에서 그 에너지가 어찌 각별하지 않겠나. 둘, 김정민의 집을 찾아서. 몇 개월 전, 어찌어찌 <감자>와 <긴 밤>을 본 뒤로 나는 김정민이란 감독에 대해 호기심을 품기 시작했다. 당시엔 그가 그렇게 많은 영화를 만들었는지 알지 못했다. 우연히 지인이 그를 한 영화제에 초대했다는 걸 알게 돼 이런저런 이야기를 전해 듣기는 했다. 짐작했듯이 영화와 별로 상관없는 학교를 나와 주변 사람들을 모아 영화를 찍는다고 했다. 진짜 발견은 유튜브에서 일어났다. 거기에 그는 ‘정민김’이란 집을 지어 그와 친구들이 찍어온 영화 전부를 공개해 두었다(<감자>와 <긴 밤>은 판권이 팔린 건지 제외됐다). 유튜브의 거대한 세계에서 김정민이란 이름으로 집을 지었다간 검색해도 쉬 찾기 힘들 텐데, 정민김으로 검색하면 그가 세운 영화의 집이 바로 뜬다. 동영상 항목을 누르면 스물다섯 편이 넘는 영화와 영상이 쭉 나열된다. 보통은 영화 속 이미지 하나를 따서 영화를 소개하기 마련인데, 김정민은 영화와 어울릴 만한 이미지를 따로 구해 썸네일을 만들었다. 그래서 얼핏 보면 아주 예쁜 디자인 하우스의 홈페이지 같은 인상을 준다. 듣기로, 심리학을 전공한 서른 청년이라는데, 예쁘게 세워놓은 유튜브의 집과 과감하고 와일드한 영화 중 그의 본디 모습이 어디에 가까울지 마구 궁금해진다. 1990년대의 시작과 함께 태어난 김정민은 필름과 거리가 먼 세대다. 그가 열 살을 지날 즈음 세상의 영화는 디지털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그러니 극장에서 필름으로 영화를 보는 행위가 그에게 익숙하다면 거짓말이다. 당연히 그즈음 영화 매체는 디지털을 화두로 삼아 영화의 미래를 논의했다. 초기에 디지털로 찍은 초기의 박철수의 영화에 대고 비판했던 글들이 기억난다. 그 영화는 디지털의 자세로 찍지 못했다고 뭇매를 맞았다. 대상과의 거리가 좁혀지지 않았다느니, 카메라의 움직임이 필름의 그것에서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느니, 그 영화는 그런 비판을 들어야 했다. 지금 그 평자들이 자기가 쓴 글을 다시 읽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들이 짧은 시선으로 예상하고 그렸던 디지털 영화가 나오지 않은 건 아니다. 그러나 영화 산업이 디지털로 재편된 현재, 대다수의 영화는 그들이 말했던 영화와 전혀 딴판이다. 적어도 이미지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디지털 시대의 영화는 밋밋하고 시시해졌다. 극장에 걸리는 대중영화 사이에서 독특한 이미지를 발견하는 건 필름 시대와 비교해 더 힘들어졌다. 필름에서 벗어나 뭔가 혁명적인 이미지가 나올 거라던 예상은 완벽하게 빗나가, 디지털은 그냥 ‘표준화된 컬러와 이미지’의 다른 이름에 불과한 시대로 발전했다. 앞서 말했듯이 김정민은 필름 시대의 영화감독은 아니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고전적인 필름 시대의 영화와 뮤직비디오 같은 비디오 시대의 이미지 사이에 위치한다. 필름 영화에 대한 애정을 느끼지만, 동시대의 디지털로 영화를 만드는 데 별로 콤플렉스를 느끼는 것 같지 않다. 필름의 질감을 흉내 낸 영화도 만들고, 다수의 독립영화가 보여주는 전형적인 디지털 질감의 영화도 만들면서 그는 어느덧 김정민스러운 디지털 영화를 하나씩 내놓는 중이다. 물론 내가 본 그것들이 최후의 완성된 형태는 아닐 것이다. 김정민스러운 컬러를 보여준다고 해서, 김정민스러운 카메라의 움직임을 보여준다고 해서, 김정민스러운 간략한 편집을 보여준다고 해서 이게 김정민의 디지털 영화다, 라고 말할 생각은 아직 없다. 내가 아는 한 그는 고작 4년에서 5년 정도 영화를 만들어온 초보 작가일 따름이다. 무어 그리 대단한 영화를 만들었겠나. 그렇다면 인터넷, 유튜브에 있는 집을 찾아가면서까지 김정민이란 감독의 영화에 왜 호기심을 보이는지 나는 설명해야만 한다. 대답은 그가 영화를 생산하고 관객과 만나는 방식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그는 현재 자신의 포지션을 영화감독이라는 데 두고 있으며, 그 직업에 맞게 꾸준히 영화를 찍는 게 자신의 본령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다. 그렇게 영화를 찍다 경지에 오르면 다행이고, 그게 아니더라도 영화감독이 영화만 찍다 죽었다고 해서 욕을 들을 일은 없다. 코로나 시대에 영화와 극장의 운명을 두고 여러 예측이 오간다. 흥미로운 말씀도 있고 별것도 아닌 걸 대단한 양 예언한 글도 읽었다. 지금은 습관이 변하는 시간이다. 그게 언제 어떻게 문화를 형성할지 나는 알지 못한다. 분명한 사실은 어떤 문화가 형성되리라는 것뿐이다. 관객의 수가 줄어든 것을, 극장이 문을 닫는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있다. 나는 거꾸로, 우리가 그동안 너무 많은 영화를 소비하고 있는 건 아닌지 의문스러웠다. 마을마다 극장이 들어선 것이, 골목마다 들어선 교회만큼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그동안의 영화 과소비가 극장을 편의점처럼 보이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시간에도 김정민은 멈추지 않고 영화를 찍는다. 아마 이런 시기를 반영한 영화를 찍을지도 모른다. 중요한 건 그가 계속해서 영화를 찍는다는 것이다. 내가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그는 <다큐멘터리: 일렉트릭 러브>라는 괴상한 영화를 만들었고, 그걸 유튜브의 자기 집에 선물처럼 올려두었다. 향후 영화와 영화 문화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냐만, 내겐 김정민 같은 감독이 영화를 찍는다는 것으로 족하다. 평범한 감독이 만든 아무 감흥 없는 영화 열 편보다, 내가 사랑하는 감독의 영화 한 편 한 편이 더 소중하다는 걸 실감하는 요즘이다. 김정민은 그렇게 만든 영화들로 자기 집을 만든다. 그게 꼭 극장이 아닌들 무슨 상관인가.
올해는 13편을 골랐다. 리스트에 오르지 않은 영화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 빈 폴 , 사마에게 인데, 이들은 모두 작년 영화라고 한다. 하지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빼면 내 리스트는 허망해질 것이고, 사마에게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지금 러시아에서 공장생산되는 것처럼 쏟아져 나오는 회고조의 제2차 세계대전 영화들이 걱정되는 관객들은 빈 폴이 이 상황에서 얼마나 강력한 치료제인지 알 것이다. 리스트에 오른 영화들을 보자. 남매의 여름밤 은 벌새 의 뒤를 잇는 올해의 한국 영화이다. 하지만 극장 바깥을 보면 난폭하고 정신없고, 충무로 내부에서는 절대로 만들어질 수 없는 보건교사 안은영 이 질주하고 있다. 인비저블 맨 은 시네마틱 유니버스에 대한 할리우드의 집착이 얼마나 허망한지, 이를 벗어나면 얼마나 다양한 가능성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다. 레디 오어 낫 은 호러 영화가 사회적 메시지를 담는다고 해서 뻔뻔스러운 장르적 즐거움을 포기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걸 보여준다. 소년시절의 너 는 동아시아 교육 시스템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사람이라면 공감과 공포를 모두 느낄 수밖에 없는 폭탄 같은 멜로드라마다. 월드 오브 투모로우 에피소드 3: 앱센트 데스티네이션스 오브 데이비드 프라임 을 만들면서 돈 허츠펠트는 21세기의 가장 훌륭한 SF 삼부작 영화를 완성했다. 작은 아씨들 을 빼먹고 오래된 고전의 새로운 재해석에 대해 이야기할 수는 없다. 딕 존슨 이즈 데드 에서 영화 만들기의 작업은 감독의 가족사와 아름답고 유쾌한 조화를 이룬다. 퀸스 갬빗 에 대해 말할 것 같으면, 이전엔 아카데미를 노리고 만들어졌던 훌륭한 드라마들이 넷플릭스로 옮겨가고 있는 것 같다. 반쪽의 이야기 를 해보자. 이 작품은 올해 본 영화들 중 가장 개인적인 작품이 될 텐데, 그건 내 어린 시절 덕질과 관련있다. 어렸을 때 나는 요새 중고등학생들이 아이돌을 파듯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를 팠다. 실존 인물을 판 게 아니라 에드몽 로스탕이 자신의 희곡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에서 재창조한 코쟁이 시인을 판 것이다. 왜냐고 묻는다면 길게 설명할 수 있지만 그건 좀 무의미한 일이다. 어린 시절은 아무 것에나 심장이 찔리기 마련이고 그 상흔은 꽤 오래간다. 그냥 그랬다고 할 수밖에. 반쪽의 이야기는 내가 본 시라노 각색물과 파생물 중 최고다. 그리고 나는 꽤 많은 작품들을 보았다. 장 폴 라프노가 감독하고 제라르 드파르디외가 나오는 시라노 는 많이들 결정판으로 여기고 있지만 둔중하고 맥빠진 영화라 영 별로다. 호세 페러가 아카데미 상을 받은 마이클 고든의 할리우드 영화는 그보다 낫지만 좀 녹화된 연극 같다. 프레드 셰피시가 감독하고 스티브 마틴이 코쟁이 소방서장으로 나오는 록산느 가 오히려 괜찮다. 마이클 레만의 고양이와 개에 관한 진실 은 성별을 뒤집은 사랑스러운 영화이다. 시라노 연애조작단 은 잘 만든 로맨틱 코미디지만 편지 대필이라는 설정만 남고 캐릭터가 빠져 있다. 그 외에도 수많은 오페라, 뮤지컬, 텔레비전 드라마, 라디오 각색물들이 있고 이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여기서 멈추기로 하자. 훌륭한 시라노 영화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요약만 읽으면 도저히 납득이 안 가는 구식 설정을 영화의 현대적인 설정 속에서 이치에 맞아 보일 수 있도록 개조하고 그 안에서 세 주인공들을 바보스럽지 않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새로운 시라노를 만들어야 한다. 원작은 큰 문제가 없다. 원작이 나왔을 무렵에도 과거였던 시대를 배경으로 하는 무대극, 심지어 대사 대부분이 시인 운문극을 보면서 설정의 사실성을 따지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새 시리노 이야기의 배경이 21세기 미국 고등학교라면 사정이 다르다. 사실 반쪽의 이야기에서도 시라노의 설정은 아주 잘 맞지 않는다. 일단 지금은 아무도 종이 편지를 쓰지 않기 때문에. 심지어 이건 영화가 대사를 통해 직접 언급하고 넘어가는 내용이다. 하지만 21세기의 변화한 사회는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설득력 있는 시라노 이야기를 가능하게 한다. 우리의 새 시라노는 편지를 대신 쓰기도 하지만 모바일 문자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새 시라노를 만들어야 한다. 로스탕의 시라노는 코가 지나치게 컸다. (실존 인물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고 한다). 우린 외모지상주의 사회를 살고 있으니 외모의 핸디캡은 여전히 먹힌다. 하지만 원작이 백년 넘게 써온 소재 안에서 경쟁하기는 쉽지 않다. 반쪽의 이야기가 택한 것은 인종과 성별이다. 이 영화의 시라노는 중국계 동성애자 여성이다. 조금 뒤에 역시 넷플릭스에서 풀린 블라이 저택의 유령과 비교할 만 하다. 모두가 아는 고전 이야기의 주인공을 현대 또는 가까운 과거로 데려와 새로운 핸드캡을 주기 위해 퀴어 설정이 도입된 것이다. 단지 여기서 ‘선택’이라는 단어는 잘못 쓰였다. 이 영화를 쓰고 감독한 앨리스 우는 새로운 시라노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인종과 성별을 선택한 게 아니라 인종과 성별의 이야기를 하기 위해 시라노를 선택한 것이다. 미국에 사는 중국계 퀴어 여성인 감독은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 알마나 쉽게 시라노가 되는지 알고 있다. 반쪽의 이야기는 아무도 믿지 못할 어처구니 없는 설정이 자연스러울 수 있는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개조된 상황을 보자. 엘리 추는 사교성 없는 중국계 학생이다. 동양인은 자신과 아버지밖에 없는 작은 시골 마을에 살고 있다. 모범생인 엘리에게 학교 미식축구 선수인 폴 먼스키가 접근해 온다. 폴은 엘리가 자기 대신 짝사랑하는 애스터 플로레스에게 편지를 써주길 바란다. 엘리는 이전부터 돈을 받고 다른 학생들의 숙제를 대신 해주고 있으니 이건 또다른 아르바이트에 불과하다: 폴이 모르는 건 엘리 역시 애스터를 짝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설정을 수정하면서 반쪽의 이야기는 원작에서 몇 걸음 더 나아간다. 시라노는 자신의 아바타로 잘생긴 크리스티앙을 내세웠다. 둘은 모두 백인 남자로 그들의 차이는 당시 생각했던 것만큼 크지 않다. 시라노의 정신과 크리스티앙의 외모의 결합이라는 비유도 자연스러워졌다. 하지만 이 영화의 주인공 엘리는 시라노처럼 ‘자신과 같은 부류지만 더 잘생긴 누군가’를 내세우지 못한다. 반쪽의 이야기는 자신 또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주인공으로 상상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자판으로 ‘나’라고 칠 때 그 ‘나’가 고의적으로 실제 자신을 비껴가는 사람들. 자신의 욕망을 있는 그대로 전시하지 못하고 아바타를 빌리는 사람들. 그리고 그들 대신 아바타로 등장하는 건 이성애자 백인남자다. 자신이 아닌 것의 총집합. 이건 굉징히 잔인하고 날카로운 코미디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반쪽의 이야기는 그런 영화가 아니고, 그보다 훨씬 더 어려운 길을 간다. 영화는 나오는 거의 모든 사람들을 이해하고 그들에게 따뜻한 시선을 보낸다. 이 이야기에는 어리석은 사람은 등장하지 않는다. 글도 못쓰고 말도 못하며 생각이 단순한 폴도 어리석지는 않다.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의 좁은 생각 안에 갇혀 있다. 하지만 폴은 늘 자기 바깥으로 나간다. 처음엔 그냥 대필작가로 머리를 빌리려 했던 엘리와 친구가 되고 결국엔 엘리의 입장을 이해한다. 사기의 희생자로 그려지기 쉬운 록산느 역할의 애스터도 마찬가지다. 후반 설정을 잘 짜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엘리와 애스터의 대화에는 진짜 소울메이트를 만난 사람들의 흥분이 느껴진다. 디지털 시대가 일방적인 시라노의 편지 공격을 완전히 다른 형태로 바꾸어놓은 것이다. 로스탕의 시라노는 백인 남자 예술가의 자뻑 이야기다. 아무리 오랜 덕질 대상이라고 해도 그 사실을 외면할 수는 없다. 시라노의 이야기는 비극적인 예술가자 자의로 감추고 있던 비밀이 죽음 직전에 밝혀지면서, 그 자뻑이 하늘을 찌를 때 끝이 난다. 하지만 남자 예술가의 일방적인 편지가 아닌 세 청소년의 열린 대화를 다룬 반쪽의 이야기는 더 성숙하다. 시라노와는 달리 이들에겐 미래가 열려있다. 그들은 이 소동이 끝난 뒤에도 계속 성장하면서 아직 어디로 흐를 지 알 수 없는 자기만의 이야기를 만들 것이다. 그리고 엘리 추는 ‘나’가 자기자신인 글을 쓸 것이다.
< 사냥의 시간 >( 윤성현 , 2020)에 담겨있는 ‘영화’들에 관하여 영화가 시작하면 두 명의 양아치가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면서 네가 내 옷을 몰래 입었네 마네를 가지고 말씨름을 한다. 구제 옷을 훔쳐 외국으로 넘기는 브로커 형을 통하면 300벌 정도를 팔았을 때 100불은 벌 수 있을 거라 말하는 장호( 안재홍 )와 “가오 떨어지게 그지 새끼도 아니고 남이 입던 옷을 으트케 팔어?”라며 불평하는 기훈( 최우식 )의 대화를 보여주던 카메라는 이들이 편의점 문을 나설 때 따라 나가서는 거리 풍경을 시계 반대방향으로 훑는다. 그리고 두 사람이 탄 자동차가 출발하면 퉁퉁탁탁거리는 음악과 함께 영화의 타이틀이 화면에 박힌다. 나는 이 첫 시퀀스에서 이미 <사냥의 시간>이란 영화를 당신이 받아들일 수 있는지 없는지가 결정된다고 본다. 장호와 기훈이 그들의 우두머리 격인 친구 준석( 이제훈 )의 출소 날에 마중을 나가는 이 첫 시퀀스는 비유하자면,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에 빠져드는 터널과도 같은 역할을 하는 신이다. 이 영화는 앞으로 망해버린 미래 도시의 을씨년스러운 거리 위에서 펼쳐지는 이야기가 될 것이며, 그 거리의 주인공들은 ‘스투시’와 ‘슈프림’을 즐겨 입는 양아치들이 될 것이란 사실을 끝내 주는 사운드와 미술로 꾸며서 보여준다. 최근 몇 년 간 나는 이렇게 용감한 오프닝 신을 가진 한국영화를 보지 못했다. 편의점에서부터 장호와 기훈을 따라 나선 카메라의 움직임은 <칠드런 오브 맨>에서 주인공 테오(클라이브 오웬)가 커피를 사서 카페를 나서다가 폭탄이 터지는 장면과 유사하다. 두 사람이 준석을 만나러 교도소까지 가는 와중에 보여주는 길거리 풍경에는 <아키라>가 상상하며 담아낸 2019년의 망해버린 도쿄 거리의 이미지와 <공각기동대>의 홍콩과 상하이 뒷골목을 섞어 만들어낸 이미지, <증오>에 등장하는 파리 외곽 상트르 레비뉴의 낡은 아파트 이미지 등이 뒤섞여 있다. 윤성현 감독이 제시하는 미래 도시 서울의 이미지는 수많은 서브컬처 이미지에 기반해 만들어졌다. 그러나 영화로 신속하게 빠져들도록 의도한 이 오프닝 신이 되려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로도 작용한다. 이 영화를 스마트폰이나 모니터, TV로 관람한 대부분의 관객은 영화가 제시하는 방식대로 이 판타지의 세계에 빠져들지 못한 것 같다. (이야기가 아닌) 내가 지금 뭘 본 것인지, 이미지를 믿지 못한, 혹은 속지 않은 관객은 아마도 다음 신에서는 귀를 의심하게 됐을 것이다. 원화 가치가 폭락해 수중에 지니고 있던 화폐가 휴지조각으로 변해버리고, 도모할 미래 역시 불투명한 상황에서 준석의 무리들은 범죄를 모의했다 실패한 전력이 있다. 그 책임을 준석 혼자 떠안고 감옥에 다녀왔으며 이제 이들은 또 다른 범죄를 구상한다. 캐릭터의 상황을 묘사하는 이 클럽 장면에서 주인공들은 직설적이고 낯간지러운 대사를 주고받는다. 이를테면 하와이를 닮은 대만의 어떤 섬에 가서 사업을 할 수 있다는 말, 20만 불만 있으면 아는 형님이 소개해준 대로 관광객을 상대로 한 장사로 한 몫 잡을 수 있다는 말, “야 거기 가서 우리 다시 시작하는 거야. 이 지옥에서 벗어나서.”라는 준석의 대사를 들을 때 아마도 추정컨대, 많은 관객들은 영화가 그저 허황된 것들을 휘황찬란하게 제시하고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영화가 시작한 지 7분도 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눈과 귀를 모두 의심하게 되는 순간이 펼쳐진다. 그런데 나는 <사냥의 시간>이 공개된 후 지난 몇 주간 이 오프닝 장면을 10번도 넘게 돌려봤다. (어떤 스피커를 보유하고 있는지에 따라 확연한 차이가 느껴지는) 가슴을 울리는 프라이머리의 음악과 허공을 헤매는 듯한 카메라워크, 그리고 직설적인 대사가 만들어내는 조화는 나의 눈과 귀를 모두 만족시켜줬다. 이 글을 쓰는 지금도 다시 보는 중인데 <사냥의 시간>의 오프닝은 말그대로 키치적이다. 나는 진지한 몰입을 스스로 거부하게 됨으로써 오히려 이 판타지의 세계로 손쉽게 미끄러져 들어갈 수 있었다. <사냥의 시간>은 동화에 가깝다. 이 영화의 오프닝 신이 용감하다고 느낀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스스로를 지옥에 갇혔다고 여기는 순진한 악동들이 끔찍한 범죄를 모의하는 오프닝. 별 의미 없는 20만 불이란 숫자. 인생 역전을 모의하면서 펼쳐 놓는 너무나도 소박한 하와이 같은 대만의 섬 이미지. 윤성현 감독이 꾸며 놓은 서브컬처 기반의 환상 동화 첫 페이지를 2020년의 관객들은 상당히 낯설어 하는 듯하다. 2019년, 윤성현 감독을 처음 만났던 날을 기억한다. 그가 후반작업과 편집 중인 <사냥의 시간>을 소개하며 해준 말도 기억한다. 그날의 대화 주제는 다음의 세 가지로 요약된다. ‘헬조선’에 대한 문제의식, 데뷔작 < 파수꾼 >(2010) 이후의 두 번째 윤성현 영화라는 어떤 기대를 배반하고자 하는 의지, 그리고 자신이 오랫동안 꿈꿔왔던 80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를 향한 애정에 대해 그는 꼼꼼하게 설명했다. <사냥의 시간>에서 윤성현 감독은 헬조선에 관한 문제의식을 이미지로 표현한다. 영화 내내 준석이 감옥에 갈 수밖에 없었던 과거 범죄가 뭐였는지, 이들을 추격하는 한의 사정이 무엇인지, 준석과 상수( 박정민 ) 사이에는 어떤 일이 있었기에 <파수꾼>의 한 장면을 재현하듯 하는지 등등 저간의 사정을 알 길이 없다. 아무 것도 보여주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의 도움도 없이 이 순진무구한 청년들이 탈주극을 벌이는 과정에서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는,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는 결국 거대한 조직의 보스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는 무력한 순간의 핏빛 안개가 곧 헬조선이다. 또 윤성현 감독은 <파수꾼>과 <사냥의 시간>의 차이에 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파수꾼>을 감독 윤성현이 가져가야 하는 방향이나 테두리로 생각했던 것 같다. <파수꾼>은 어찌 보면 내 안에 없는 재료를 가지고 나를 바꿔가며 만든 작품이다. 남자아이들이 주인공이지만 <파수꾼>의 연장선상이라곤 생각되지 않는다. 정서적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파수꾼>이 현미경같이 내면을 들여다보는 영화라면 <사냥의 시간>은 현상 체험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말했다. 이 영화의 현상 체험은 윤성현 감독이 좋아하는 80년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기인한다.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준 작품으로 일본 만화 <베르세르크>와 <아키라>를 꼽는 그는, <파수꾼> 이후 한동안 사이버펑크 영화를 준비하다가 <사냥의 시간>으로 선회했다. 추격자 한과 준석 무리의 대치를 통해서 그는 <매드맥스>와 <터미네이터>를 오마주한다. 준석이 친구들에게 도박장을 털자고 꼬시면서 “다 잘될 거야.”라고 말하는 부감숏에서는 저 멀리 화려하고 거대한 빌딩들이 만들어내는 마천루의 이미지가 펼쳐진다. 그 위에는 네온사인을 내건 애드벌룬이 하나 둥둥 떠다닌다. <블레이드 러너>가 상상하며 꾸몄던 영화 속 2019년의 도시 풍경이 떠오른다. 마지막으로 <사냥의 시간>에서 가장 마음을 뒤흔든 이미지는 예고편에도 잠깐 등장하는 장면인데 이 무모한 범죄를 모의하고 나서 준석 무리가 창고에서 총을 테스트해보는 장면의 이미지다. 허름한 트레이닝복 차림의 청년들은 서로 총구를 겨누며 웃고 떠들지만 며칠 뒤면 그들의 인생은 세상에서 처음 겪는 끔찍한 악몽으로 뒤덮이게 될 것이다. 그들이 새로운 삶을 꿈꾸면서 마지막으로 콩알만한 행복에 겨워하는 순간. <시티 오브 갓>과 <고모라>의 이미지가 <사냥의 시간>에도 담겨있다. <사냥의 시간>을 둘러싼 이미지의 재료가 무엇이 됐건 관객은 어색한 가짜라며 충분한 거리두기를 지켰다. “내 시간을 사냥당했다”며 댓글을 토해내던 관객들이 돌비 애트모스를 지원하는 극장 시스템에서 이 영화를 봤다면 어땠을까. 그 압도적이면서 디테일이 뛰어난 총격 소리와 음악에 지금보다는 더 빠져들 수 있었을까. 안개 자욱한 도시의 뒷골목, 사방이 꽉 막혀 미로 같은 지하 주차장, 더는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항구의 끝자락이 지닌 을씨년스러운 이미지를 대형 스크린에서 봤다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열린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을까. 마블과 블록버스터의 시대에, 그리고 하필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어쩔 수 없이 OTT의 터널 속으로 빨려 들어간 <사냥의 시간>에 대해서는 언제든 더 길게 더 오래 이야기하고 싶다. 그 대화의 주제는 언제나 영화적 향수로 가득한 레퍼런스 영화 리스트가 될 것이다. 우리는 <사냥의 시간>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이미지의 재료에 관해 적어도 지금보다는 더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