앰뷸런스
- 감독
- 마이클 베이
- 제작년도
- 2022
- 출연
- 제이크 질렌할, 야히아 압둘 마틴 2세, 에이사 곤살레스, 가렛 딜라헌트, 케어 오도넬
임권택 감독 연출로 1984년 <비구니>는 태흥영화사의 창립 작품이 될 뻔했던 영화, 걸작이 될뻔 했던 영화, 불교계의 반대로 제작중단이 된 군부정권 시절 비운의 영화다. 그런데 당시 송길한 작가의 각본 170여 장면 중 약 1/5 분량 촬영이 끝난 상태로 유실됐던 필름은 2014년 태흥영화사 창고에서 발견됐고, 그 후 한국영상자료원과 전주국제영화제 (이하 JIFF)의 협업으로 39분 길이의 본편으로 복원, 편집됐다. JIFF는 송길한 작가 특별전의 일환으로 관계자 인터뷰 위주의 24분 길이 다큐멘터리도 제작했고, 지난해 본편과 함께 제18회 JIFF 관객과 만날 수 있게 했다. 발굴, 복원된 필름은 편집이 전혀 안 된 16mm 러시 필름이었고, 사운드는 아예 없었다. 박홍렬 촬영감독이 생필름 촬영본을 편집했고, <비구니> 촬영을 맡았던 정일성 촬영감독이 색보정을, <취화선> 등의 작품에서 정일성 촬영팀의 일원이었던 박정훈 촬영감독이 편집과 다큐멘터리 연출을 맡았고, 김영진 JIFF 수석프로그래머가 인터뷰들을 진행했다. 올해 봤던 <비구니>가 인상에 남은 것은 제작 중단으로 실현하지 못했던 가능성에 대한 아쉬움이나 표현의 자유 보장의 필요성에 대해 시사하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발굴돼서 복원, 편집된 작품 자체가 사운드 없이도 강렬하기 때문이다. 원숙한 김지미 배우의 연기는 무성영화 시절 표정, 자태, 몸짓만으로도 거의 모든 것을 전달하던 배우들처럼 공명한다. 대사는 안 들리지만 그녀의 눈빛만 봐도 극적인 갈등과 욕망, 염원이 충분 느껴진다. 또한 작가, 감독, 촬영감독이 함께 로케이션 헌팅부터 해서 영감을 얻은 후 시나리오 작업을 한 만큼, 장면 하나하나의 압축된 구성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비구니>는 임권택 감독과 송길한 작가가 1981년 작 <만다라>로 개인 수련을 중심으로 한 소승적 불교 수행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에 이어, 새로운 영화로 ‘중생과 더불어 밝음을 지향하는 대승적 수행’을 그려내고자 한데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주인공이 세속적인 집착과 번뇌에서 벗어나 마침내 큰 스님이 돼가고 ‘스스로 자기를 완성하는 과정’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꼈다고 송길한 작가는 전한다. 마침 그 당시 연기의 전환점을 찾던 김지미 배우도 이 영화 공동기획으로 참여했고, 삭발, 노출, 그리고 영하 12도의 추위에도 물속으로 뛰어드는 등 전심전력을 다 했다. 애초에 제작 의사도 표시했지만, 임권택 감독은 대규모 예산에 안정적인 프로덕션을 꾸려줄 회사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극장 흥행사에서 영화제작으로 활동영역을 넓혀 나가려던 이태원 사장은 국제영화제에서 활약을 기대할 수 있는 <비구니>를 태흥영화사 창립 작품으로 하기로 했다. 이렇게 야심 차게 꾸려진 <비구니>는 1984년 3월 13일 문공부와 영화진흥공사에 제작신고를 했으나, 3개월 후 결국 제작 포기를 하게 됐다. 시나리오 작업할 당시 불교계에서는 자문과 고증을 도왔음에도 막상 대본을 전달받은 조계종에서는 불교를 모독할 우려가 있음을 표명하며 문공부에 제작중지 요청 공문을 보냈다. 태흥영화사와 임권택 감독, 송길한 작가는 조계종 사회부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대본을 수정하는 등 “수준 높은 불교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협조 요청”을 했으나 종단에서는 불교의 성역을 영화화하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고 했다. 주인공이 비구니로 입산 후 속세에서의 사랑과 번민을 회상하는 장면이나 전쟁 통에 고아들을 피난시키기 위해 트럭 운전사에게 몸을 준 것 등을 문제 삼았다. 그리고 결국 제작중지 궐기대회에, 법원에 제작중단 가처분 신청까지 이어 나갔다. 그런데 이때 조계종 전국 비구니 대표자 회의가 내놓은 요구 사항은 한번 살펴볼 만하다. 다음과 같다. 1. 불교재산관리법을 철폐하라. 2. 10.27 불교법란을 정부는 공개 사과하라. 3. 불교 탄압을 중지하라. 4. 국영방송과 기독교인은 공개 사과하라. 5. 극영화 <비구니> 제작을 중지하라. 사실상 <비구니> 관련된 것은 다섯 가지 요청 사항 중의 하나밖에 안 되는데, 심지어 순위도 맨 마지막이다. 여기서 ‘불교법란’은 전두환 정권 초기 1980년 10월 27일 전국의 사찰 및 암자를 수색하고 스님들과 불교 관련자들을 대거 연행하고 고문한 사건을 일컫는다. 불교계는 이런 치욕과 탄압에 분노하다가 영화 <비구니>가 나타나면서 마침 기폭제를 만난 것으로 보인다. 이때쯤 당국에서도 제작자 이태원을 만나 제작을 포기하라며 설득과 회유를 시도했다고 한다. 법원에 가처분 신청 변론과 심문이 진행되는 가운데 데모하던 비구니들이 전경에 맞서다가 다치기까지 했다. 이에 제작자는 사회적 물의가 너무 크다고 판단하여 제작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전에 대본 수정과 함께 제목이 <수연 비구니>로 바뀌어 있었던 영화에 대한 제작신고를 ‘자진 취하’하는 문서를 6월 13일 문공부에 접수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됐다. 제작비 2억여 원을 날린 태흥영화사도 그랬지만, 임권택 감독, 송길한 작가, 김지미 배우 등 모두가 열과 성을 다해 임하고 있었던 작품이 중단되자 충격을 못 이기고 일정 기간 창작 의지를 상실하게 됐다고 한다. 물론 그 이후에 다시 작품 활동들을 하게 됐지만, 당시 타격이 컸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관계자들은 ‘그때는 우리 영화인들이 힘이 없어 접었지만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영화 안팎에서 표현하고 있다. 어쨌든 30년이 흐른 후, 창고에서 16mm 러시 필름이 나왔다. 시나리오의 1/5 분량밖에 촬영하지 못한 것이라 아무래도 원래 대본에서 빠진 것이 많고, 사운드가 없어서 가끔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서로 다른데 중첩될 때 나타날 수 있는 영화적인 효과를 놓치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또 배우들의 소리 없는 모습에서 전달되는 것도 많다. 시작 장면에 수경이 민간인 복장으로 산사로 걸어 들어갈 때 애인쯤 돼 보이는 남자가 얼굴과 발걸음만으로도 ‘정말 이래야만 하겠어?’ 하는 안타까움과 답답함 표현하며 동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경은 절에 들어가 추운 날 나무도 해 가고 냇물에서 빨래도 하는 등 행자 생활을 하다가 이윽고 장엄한 삭발식을 치른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용 앰뷸런스에 타고 가는데 아까 본 남자가 도와주다가 뭔가 엄청난 소식을 전달하면서 떠나고, 비구니는 눈물과 번민에 주저앉기도 한다. 스크린 위의 영상이 펼쳐지는 동안 정적을 깨는 듯한 것들이 가끔 있다. 분명 사운드는 없다. 그렇지만 김지미 배우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한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머니 집을 찾아가 원삼을 받아 입고 돌아가신 줄도 몰랐던 어머니 무덤에 삼배한 후, 시집갈 때 입으라고 지어주신 그 옷과 함께 집착을 불태워버리려 할 때 불꽃 타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대규모 전쟁 장면에서 폭파의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도 든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 전쟁 피난길 장면들인데, 최근에 나온 스펙타클한 CG 전쟁영화들과는 좀 달리, <비구니>는 폭격의 불길과 먼지와 연기 속을 고되게 뚫고 나가야만 하는 인간상들이 인상적이다. 임권택 감독은 1936년생으로 한국전쟁이 터졌을 당시 이미 십 대였고, 정일성 촬영감독은 1929년생으로 심지어 군 복무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화면에 묻어 나오는 인간성이 다른 듯하다. 피난민의 절박하거나 훈훈한 얘기들 외에도 난리 통에 기회주의적으로 실속을 챙기려고 하는 나쁜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 암시 아닌 암시가 처음부터 떠오르기도 했다. 수경은 가족 잃은 꼬맹이 여섯 명을 챙기며 피난을 가다가 화물 트럭 운전사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한다. 책임감을 느끼고 끈질기게 호소하는 비구니를 순간, 운전사는 음흉한 눈빛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문제의 협상이 이뤄진다. 아이들을 구하려면 원하는 대로 해달라. 사운드는 없지만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비구니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그리고 추위에 떠는 꼬맹이들을 보며 어떻게 결심을 하게 되는지 너무도 뚜렷하게 보인다. 그녀는 폐허에 이끌려가 일을 치르고 와서는 아이들을 트럭에 실어 떠나 보내고 횡 하니 서있는다. 이윽고 눈 덮인 냇가에 가서 아랫도리를 씻는데 얼굴 클로즈업이 되면서 마치 감정에 북받쳐 나온 것처럼 영화에서 기대치 않은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아주 미니멀한 우리 소리가 눈발을 맞으며 땅을 치면서 우는 수경의 모습 위로 흐른다. 정적 속에 마치 귀가 막혔다가 트이는 것 같은 느낌이 흡사 개도나 카타르시스를 얻는 것 같은 느낌 같기도 하다. 마침내 수경은 옷을 다 풀어헤치고 알몸으로 물속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지 않고 후두두 떨면서 기도한다. 목숨을 건 김지미 배우의 과감하고 단호한 선택이었다. 정일성 촬영감독의 말 대로 촬영 당시 영하 12도의 날씨면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그 기도 하는 모습이 연기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목숨까지 건 영화 창작이 그렇게 암울한 시절 중단됐다는 것은 잊혀서 안 될 일이다. 영화제 관계자나 영화 학자,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아키비스트, 사회학자, 민속지학자, 박물관 관계자 등이 관심을 갖고 상영 및 포럼을 기획해도 좋을 것 같은 작품이다. 영화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면 무성영화 시절 사용했던 것 같은 인터타이틀 삽입도 고려해볼 만할 것 같다. JIFF는 특별전에 맞춰 『작가 송길한』이란 책에 인터뷰, 기사, 사진 자료 등을 비롯해 영화 <비구니>의 시나리오 전편도 수록했다. 이 글을 쓰는 데에도 참조가 많이 된 것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비구니> (JIFF 2017 편집 본)에 들을 수 없는 대사와 미처 다 찍지 못해 볼 수 없는 일제강점기부터 시대를 관통하는 이야기와 원래의 엔딩 등 더 많은 것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조현병 환자 영군( 임수정 )은 앰뷸런스에 실려 가는 할머니를 ‘하얀맨’에게 끌려갔다고 생각한다. 할머니에게 틀니를 가져다주려 자전거로 쫓지만 앰뷸런스를 따라잡을 수 없자 영군은 스스로를 ‘방전된 싸이보그’라 이해한다. 그래서 다소 엽기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몸을 충전하려다 정신을 잃게 되고, 그 길로 ‘신세계 정신병원’에 수용된다. 박찬욱 감독의 2006년 작 <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는 이렇게 시작한다. 병원에 갇힌 영군은 자신이 ‘고장’날 것이라는 걱정으로 밥을 먹지 못하고 결국 아사 직전까지 간다. 건전지로 자신을 충전하려 하지만 건전지의 전력은 턱없이 부족하고 또 충전이 될 리도 없다. 그런 와중에도 영군은 할머니를 찾으려 하는데, ‘하얀맨’들이 할머니를 어디로 끌고 갔는지도 알 수 없는 상태에서 영군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그리고 해두어야만 하는 것은 바로 동정심을 버리는 것이라 믿는다. 이를 위해 ‘뭐든지 훔칠 수 있는 남자’인 안티소셜증후군 환자 일순( 정지훈 )에게 자신의 동정심을 훔쳐 줄 것을 의뢰한다. 자신이 훔치고 싶은 것만 훔치는, 나름대로 지조(?) 있는 도둑 일순은 영군의 동정심을 훔치고 싶은 마음이 들 때까지 그녀를 미행하며 관찰한다. 그리고 마침내 일순이 영군의 동정심을 훔쳤을 때, 그는 사랑에 빠진다. <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를 처음 보았던 2006년의 어느 겨울, 스무 살을 바라보던 나는 ‘사랑은 구원’이라고 믿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 당시를 복기하자니 (감히) 한 개인이 다른 누군가를 구원할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는 사실에 얼굴이 붉어지지만, 그래도 그 당시의 나는 꽤 진지했다. ‘라이스 메카트론’이란 이름의 장치를 고안해 영군을 아사로부터 구해낸 일순. 그리고 안티소셜증후군 환자마저도 누군가를 동정하고 사랑할 수 있게 만든 영군. 당시 내 눈에 비친 영군과 일순은 서로에 대한 구원이었고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사랑을 하고 있었다. 사랑이 한창 궁금할 나이에 마주친 이 이상적인 사랑 이야기는 마치 알고 싶던 문제의 답지처럼 내게 다가왔고, 그렇게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는 박찬욱 의 작품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가 되었다. 하지만 지금, 10여 년의 시간이 흐르고, 그 동안 여러 차례 이 영화와 만나면서 처음의 그 감상만을 지니고 있을 수는 없었다. 청소기의 존재 목적은 청소이고 세탁기의 존재 목적은 세탁이듯 대부분의 기계는 탄생의 순간 고유의 기능과 목적을 갖지만 싸이보그로서의 영군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존재 목적을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마치 또래의 ‘인간’들이 그러는 것처럼. 하지만 영군이 아무리 밥 먹기를 거부하고, 건전지를 입에 대며 싸이보그의 방식으로 자신이 처한 상황을 극복하려 해도 그녀는 태생적으로 기계가 될 수 없다. 생물학적 불가능을 차치하더라도 영군은 동정심과 같은 인간성을 결국 버릴 수 없는 것이다. 영군은 그녀가 될 수 없는 존재가 되길 원했고, 결국 그녀의 본질과 그녀가 원하는 것 사이의 괴리로 인해 성장통은 또래의 그것에 비해 더 유별난 통증으로 찾아온다. “그냥 희망을 버려. 그리고 힘내.” 일순이 설미( 이영미 )에게 받아 영군에게 준 이 잔인한 대사는 영군과 일순에게 꼭 필요한 말이다. 싸이보그가 되어 세상을 끝장내는 것이나 인간으로서 언젠가는 겪게 될 소멸을 피하는 것과 같은 불가능한 꿈에 대한 희망은 버리고, 그저 힘내서 사는 것이 이들이 할 수 있는 최선일 테니 말이다. 내가 원하는 것을 결국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을 누구보다 예리하게 느끼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이기에, 사실 우리가 내심 원하는 것은 이미 어렴풋이 예감하기 시작한 실패를 통보해줄 누군가가 아니라, 어렵게 실패를 인정했을 때 준비해둔 반창고를 꺼내 붙여 주며 옆에 있어 줄 사람이다. 박찬욱 감독과 정서경 작가가 빚어낸 신세계 정신병원의 병자들이 참으로 부러웠던 건,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서로를 지적하지 않고 서로의 몽상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그들은 누군가가 인간이든 싸이보그든, 비행 양말의 존재를 믿든 말든, 요들송을 부르든 말든, 그 혹은 그녀의 존재와 방식을 보편에 맞춰 고치려 들지 않고, 그대로 받아들이며 옆에 있어 준다. 마치 일순이 영군에게 “당신은 싸이보그가 아니며 또한 될 수도 없다”는 말을 하는 대신 라이스 메카트론과 같은 싸이보그 영군이 납득할만한 방식으로 그녀를 돕고, 언젠가 필요해질지도 모를 반창고 또한 미리 챙겨 두었듯이 말이다. 어쩌면 < 싸이보그지만 괜찮아 >가 우리에게 제시하려고 한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의 방식이 아니었을까.
장률 감독의 영화 중 재중 동포의 디아스포라 문제를 가장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영화는 < 망종 >인데 거기서 최순희는 아들 창호에게 “너는 조선족 새끼다. 조선말을 알아야지”라고 말하면서 말을 가르친다. 창호는 ㅁ, ㅂ, ㅊ을 ‘므브츠’라고 발음하면서 조선어를 학습하는데, 별로 내켜 하지는 않아 하면서 TV를 사달라고 조른다. 최순희는 남편이 사람을 죽여 감옥살이를 하고 있는 관계로 고향을 떠나 북경 근처 공장 지대, 기차 길 옆 버려진 집에 성매매 여성들과 이웃해 살면서 김치 행상을 하며 생계를 이어 나간다. ‘조선포채’라고 쓰인 자전거를 끌고 다니며 행상을 하는 그녀의 모습은 어김없는 중국 소수민족 중의 하나인 조선인이다. 그녀는 허가증이 없어 경찰에게 자전거와 김치를 모두 빼앗기기도 하면서 힘들게 살아간다. 이런 최순희에게 김치를 사러 오는 남자들은 이러저러한 호의를 베풀거나 그녀의 육체를 요구한다. 김치를 사러 오던 경찰은 음식 판매 허가증을 내주고, 조선족 자동차 기술자 김 씨는 그녀를 노래방에 데리고 간다. 또 아들이 유리창을 깨어 사과 차 찾아갔던 이웃집 남자는 김치 납품을 주선하겠다면서 자신과의 육체적 거래를 요구한다. 이러한 와중에 최순희가 어느 정도 마음을 여는 것은 조선족 남자 김 씨다. 처음 김 씨가 김치를 사러 왔을 때 최순희는 그의 조선어에 반응하지 않고 중국어로 말한다. 김 씨는 최순희가 담배를 꺼내 물자 조선 여자가 웬 담배냐며 질책하듯 말하다가 괜한 간섭을 했다고 말을 거둔다. 이후 김 씨가 김치를 사러 다시 오자 최순희는 “뭐 사겠습니까?”라고 조선어로 묻는다. 그가 배추김치를 사자, 다른 김치를 덤으로 얻어 준다. 그러고 나서 최순희는 공안들에게 김치와 자전거를 빼앗긴다. 혼자 길을 걸어가던 최순희를 발견한 김 씨는 그녀를 자신의 자전거에 태우고 가 저녁을 먹고 이야기를 나눈다. 그는 그녀의 배경을 궁금해한다. 하지만 그녀가 입을 열지 않자, 이곳은 조선 사람 보기 힘든 곳인데 조선 사람끼리 터놓고 이야기하자고 권유한다. 다음과 같은 대화가 이어진다. “그래 남편은?” “사람 죽였어요.” “뭣 때문에?” “돈 때문에” “그래서?” “벌 받았지요.” 이후 김 씨는 최순희의 집을 찾아가 잠자리를 함께한다. 최순희와 이웃해 사는 성매매 여성들은 김 씨가 질이 좋지 않은 사람이라고 만류하지만 “나도 그리 좋은 여자는 아니지.”라고 대꾸한다. 김 씨의 부인이 경찰들을 데리고 오자 김 씨는 최순희가 매춘을 한 것이고, 자신이 돈을 주었다는 거짓 정보를 부인에게 흘린다. 경찰은 최순희에게 김치 파는 여자가 몸도 판다는 비방을 한다. 최순희는 경찰에 끌려가서 자신의 신상명세를 털어놓는다. 길림성 연길시에서 살던 조선족이며 32세다. 이후 자신의 김치를 사주며 호의를 보이던 왕 경관에게 바로 경찰서에서 성폭행을 당하고, 아들을 잃는다. 왕 경관의 약혼녀가 그들 결혼식 연회 음식으로 김치를 부탁하자, 최순희는 김치에 쥐약을 섞어 버무린 후 배달한다. 결혼식장으로 많은 앰뷸런스들이 도착하고 최순희는 집을 나와 기차 길을 건너 보리밭을 향해 걸어간다. 조선족의 기표인 김치는 여기서 일종의 카타스트로프, 재앙의 기호로 바뀐다. 김치는 쥐약과 인접한 죽음의 기호가 된다. 영화의 이러한 결말에 다다르기까지 최순희의 김치는 여러 것들과 치환되는 은유이자, 그 이전 7위안의 돈과 교환되는 물물이었다. 영화가 그려내는 일상은 많은 부분, 김치를 담그기 위해 무를 손질하고 배추를 씻는 그녀의 노동의 과정이 차지하고 있다. 이 영화는 중국의 조선족이 구성하는 기호적 공간의 미장센을 김치 만들기와 그렇게 만들어진 김치가 팔리고 빼앗기고 또 다른 용도로 사용되는 과정을 따라간다. 김치 파는 사람이 몸도 판다는 조롱과 질타는 남편의 범죄로 조선족이 주로 살고 있는 길림성 연길 시에서 북경 근처의 산업 지역으로 이주했고 가부장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조선족 여자가 무엇을 매매해야 하는가를 드러내는 부분이다. 조선족 남자에게 배신당하고 경찰에게 성폭행을 당하고 풀려난 후, 그녀는 창호가 조선어를 연습하는 것을 보고 연습장을 찢으면서 공부할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창호의 죽음 후 그녀는 김치를 독극물로 바꾸어버린다. 장률 감독은 인터뷰에서 김치와 조선족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정성일: < 망종 >은 김치를 파는 32살 조선족 최순희의 이야기다. 중국 사람들에게 김치란 어떤 음식인가. 별미로 찾아 먹을 수도 있겠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결혼식에 김치를 가져다 달라고 하는데, 전통적인 의례인 결혼식에 김치를 올리는 것이 한국인에겐 굉장히 낯설다. 이 영화에서 조선족 최순희가 다른 걸 팔 수도 있었을 텐데, 김치를 팔 때 어떤 울림을 가질 것이라고 생각했나. 장률 : 중국에 200만 명의 동포가 살고 있다. 한국에서 4,700만 명 중 200만 명은 굉장히 크지만 그것을 14억 중국 인구 중에 흩트려 놓으면 찾지도 못한다. 옌볜에만 가면 조선족이 많지만, 중국 다른 지방에선 알아보지 못한다. 생긴 것도 같고. 그런데 딱 한 부류의 사람들은 보면 안다. 전국 각지 어디나 김치 파는 아줌마들이 있는데 보면 다 조선족이다. 조선 부녀들의 생명력은 대단하다. 김치 팔아서 잘사는 사람은 없는데, 가난해도 성실하게 계속 그 김치를 밀고 다니며 판다. 중국에서 김치를 아는 사람이 그래서 많다. 그건 <대장금> 때문이 아니다. 그전부터 알았던 거다. 중국에는 행상이 많은데, 그중에서 제일 깨끗한 게 바로 김치 파는 사람들이다. 그건 모두가 인정하는 거다. 먹어도 문제없고 배탈 안 난다고. 그렇게 깨끗하게 열심히 사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을 볼 때는, 항상 멀리서 바라본다. 고생하면서 저렇게 열심히 사는구나, 라면서. 그들을 볼 때는 항상 나의 친척 같고 자매 같다. 그리고 김치를 중국 결혼식에 놓는다는 게 한국인들에게는 이상할 수 있지만, 중국은 요즘 급격히 변하고 있어서, 결혼식 음식이 완전 짬뽕이다. 중국 물만두 올라왔다가, 서양식 요리가 올라오고.... 32살 최순희가 김치 파는 아줌마로 등장할 때, 그녀는 위와 같은 김치-조선족 여자-성실-청결 등의 기호적 작용 속에서 감지된다. 조선족 여성의 김치에 관련된 재현인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김치가 독약으로 바뀔 때, 문화적 접촉이나 번역이 이루어지는 경계를 가지고 있는 세미오스피어(semiosphere)가 카타스트로피(catastrophe)로 바뀐다. 두 세계를 잇는 마술사 대신 앰뷸런스가 등장하고, 조선족 여성과 나머지(여기에는 조선족 남성도 있다)의 적대는 폭발한다. 남편은 돈 때문에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가고, 그래서 연변을 떠나 이 북경 근처의 공장 지대에 왔던 최순희는 아들을 잃고, 생계의 수단이었던 김치에 쥐약을 타 몇 대의 앰뷸런스가 오는 재앙을 만든다. 청결한 맛은 치명적인 독으로 바뀐다. 김치는 두 개의 문화를 매개(catalyst)하는 대신 재앙(catastrophe)이 된다. 그녀가 독김치로 의미화하는 것은 급진적 거부다. 자신의 김치를 필요로 하고 샀던 모든 남자들에 대한 부정이다. 그녀의 김치는 7위안이라는 돈으로 교환되는 것이 기본이지만, 조선족 김 씨, 이웃집 남자, 왕 경찰관 등은 늘 덤, 잉여, 그녀의 육체를 원했다. 그래서 김치에 독을 탈 때 그녀는 그 잉여에 독을 놓는 것이다. 잉여가 저주의 몫이 되는 것이다. 특히 그녀의 독김치가 작용하는 곳은 왕 경관으로 대변되는 공안, 국가 소 권력 집단이다. 그녀의 복수는 국가로 향한다. 그녀는 헐벗은 삶, 무능력 즉 자유의 박탈 외에는 어떤 잠재성도 지니고 있지 않은 삶으로 가고 있는 듯 보였으나 세미오스피어의 변경을 보여주고 번역 행위의 불가능성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정적인 카메라, 장식이 없는 미장센, 판타지의 틈입이 없는 방식을 고수하다가 한 장면에서 다른 논리를 따라간다. 최순희가 일을 마치고 돌아온다. 이전 최순희의 아들 창호는 용이 그려진 연을 푸른색 스프레이로 뒤덮었다. 창호가 푸른색으로 색칠해나가는 장면이 보여주는 것은 자신만의 특이한 세계의 고집이고 창조다. 기차 길 옆, 집 앞에서 벌어진 일이다. 일을 마치고 돌아온 최순희가 프레임 안으로 들어온다. 그 프레임 속, 기차 길 옆 사람들이 모여 있고 앰뷸런스가 보인다. 사람들은 최순희를 본다. 최순희가 그들을 본다. 앰뷸런스의 닫혔던 문이 열리고, 최순희는 슬픔과 패닉에 빠진 표정이다. 이때 최순희를 보는 시선이 최순희에 포커스 인했다가 포커스 아웃되면서 그들의 집에 맞추어진다. 망자의 시선, 죽은 창호의 시선이다. 이 소년 망자의 엄마 최순희는 연변에서 살다가 남편이 사람을 죽여 감옥에 가자 북경의 외곽 지대에서 김치 행상을 하게 된다. 조선족들이 모여 사는 연변을 떠나 북경 외곽 지대에 있는 최순희는 두 번의 이주를 겪은 것이다. 한번은 그녀 부모나 더 먼 조상들이 조선에서 중국으로 이주한 것이고, 또 중국 내에서 다시 한 번 조선족 집단 거주지를 떠난 것이다. 최순희는 창호와 이곳에서 성매매 여성들과 이웃해 지냈다. 사는 집은 온기 없이 황량하고 쥐가 출몰한다. 나는 망자의 시선, 이러한 집을 들고나는 죽은 어린 소년의 시선으로 포착되는 엄마, 집 그것의 그러한 유령성, < 망종 >이 사유하는 모국, 엄마, 집의 문제가 흥미롭다. 친숙한 것이 낯선 것으로, 낯선 것이 친숙한 것으로 동요하는 이 운동. 예컨대 이 집, 폐가는 이들의 집이 아니지만 또한 집인 것이고 망자의 시선이 엄마에게 머물다 이 집에 머문 후 떠날 때 익숙한 것의 부재와 현존(un-home-liness)의 느낌이 지극하다. 친밀한 낯섦의 깊은 동요(the deep stirring of the uncanny)라고 부를 수 있는 망자의 시선으로 포커스 인 되는 이 장면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머무르거나 소유할 수 없는 집과 소수자의 관계를 보여준다. 자리를 잡았으나 머무르지 못하고 떠나야 하는 자의 시선이다. 나의 삶의 거주지로서의 세계(Oikos), 나의 존재노력으로서의 거주의 관리(Oikonomia). 이 사건이 종결되는 순간 엄마에게 부여되었다 집으로 이동하는 시선. 엄마의 얼굴과 집이 포커스 인, 아웃되는 이 장면을 레비나스 윤리학과 영화적 재현을 가능하면 관통해 생각해보기로 하자. 레비나스는 광학으로서의 윤리학, 즉 윤리학이 존재론적 철학이라기보다는 주체와 타자의 구제적이고 다양한 관계를 조명하는 광학(optics) 혹은 영혼적 광학이라고 본다. 이때 일종의 광학으로서의 윤리학은 개요적이고 전체화 시키며 객체화하는 시각의 특성을 배제한 이미지 없는 또 다른 시각이며 완전히 다른 종류의 도상이나 관계라는 점이 흥미롭다. 영화에서 얼굴의 클로즈업은 유리 로트만에게 있어서는 ‘친밀함’ 과 ‘내밀함’ 이다. “영화의 클로즈업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의 관찰이라는 일상의 경험을 자동적으로 연상시킨다.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 사람들의 얼굴을 관찰하는 것은 어린아이의 세계나 지극히 친밀한 세계의 특징이다. 영화는 이를 통해 모든 등장인물- 친구와 적들 -이 관객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세계로 우리를 옮겨 놓는다. 그리고 이 경우에 있어서의 친분 관계란 인물의 특징을 상세히 알고 있는 것뿐만 아니라, 핏줄의 불거짐과 얼굴의 주름을 직접적으로 보는 것까지를 포함하는 매우 내밀한 관계인 것이다.” - 김수환, 「영화 기호학과 포토제니: 로트만의 ‘신화적 언어’개념을 중심으로」, 『문학과 영상』 208, 43쪽. 반면 엡스탱, 발라즈(Bela Balazs), 그리고 바르트(Roland Barthes)는 바로 얼굴에서 의미심장한 ‘타자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클로즈업된 인간의 얼굴, 그것은 기호학의 잠재적 위협으로서의 ‘자족적 실재’에 다름 아니다. 언제가 엡스텡을 그토록 매혹시켰던 클로즈업(그는 클로즈업을 영화의 영혼이라고 불렀다)은 발라즈의 이른바 “인상학적(physiognomic)” 영화 이론의 중심 테마이기도 했다. 이러한 클로즈업의 포커스 인과 아웃의 운동에서 아이를 잃은 소수자 여성의 얼굴은 타자성과 내밀함을 동시에 극대화한다. 이후 그녀는 자신을 경찰서에서 성폭행한 경찰관의 결혼식에 피로연 음식으로 가져간 김치에 독극물을 탄다. 그녀가 이렇게 얼굴을 잃을 때, 체면을 버릴 때 그녀의 괴물성이 생산한 중국 공안의 괴물성이 드러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