앰비언스
- 감독
- 위삼 알 자파리
- 제작년도
- 2018
고백하자면 나는 게임을 좋아하지만 잘 못한다. 반응속도가 느려 적을 처치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릴 뿐 아니라 방향치에 지도 독해력까지 떨어져 게임 공간에서도 길을 잃고 헤매기 일쑤다. 연결/협력 플레이도 선호하지 않아 다중접속롤플레잉 게임들은 피하고 콘솔용 싱글 플레이에 집중해왔다. 선호하는 게임 장르도 편협하다. 게임 자체에 깊은 재미를 느껴서라기 보단 디지털 영화 연구의 연장선에서 게임을 시작해 그런지 게임 목록은 주로 ‘영화적인’ 스펙터클의 체험을 제공하는 오픈 월드 어드벤처나 영화적 장르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롤플레잉 장르로 한정된다. 게임도 잘 못하고 좋아하는 게임도 많지 않은데 도대체 무슨 재미로 플레이 하냐고 묻는다면 난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고독을 즐기기에 게임 세계만큼 좋은 장소는 없다.’ <폴 아웃>, <엘더 스크롤>, <레드 데드 리뎀션> 시리즈 같은 오픈 월드 어드벤처 게임을 할 때 (자의든 타의든) 이곳저곳을 헤매다 어느 새 미션은 잊고 압도하는 자연 풍경 속에서 디지털 시뮬레이션이 만들어 놓은 햇빛과 바람을 맞으며 서 있을 때면 평온하면서도 비로소 고독할 수 있다고 느낀다(그런 점에서 지나치게 디테일한 미션이 많은 <레드 데드 리뎀션 2>는 개인적으로 불호였다). 특히 주요한 서사적 장소 혹은 필수적인 미션 수행의 장소가 아님에도 개발자와 디자이너들이 공들여 만든 곳에 할 일 없이 내가 플레이 하는 아바타를 그저 존재하게 할 때면 더욱 그렇다. 아바타는 거기에 어떤 목적 없이도 존재한다. 그렇다고 플레이어와 아바타 간의 연결이 완전히 끊긴 건 아니다. ‘거기 있음’이라는 액션이 있기 때문이다. 다만 게임 플레이의 수많은 다른 순간들과 달리 목적 없는 순간은 아바타와 그 아바타에 연결된 플레이어의 존재의 감각을 고조시킨다. 여기에는 두 가지 모순된 감정이 있다. 다수는 아닐 테지만 어느 플레이어든 그 장소를 방문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개발자와 디자이너들이 공들여 만든 창조적 노동의 호의가 한편에 있다면, 그 세계가 물리적 세계와 마찬가지로 ‘나’와 상관없이 존재할 것이라는 디지털 객체의 존재론적 감각이다. 디지털 세계와 물리적 세계는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분리되어 있고, 인공적이면서도 자연적이다. 지나치게 사실적인 흔들리는 갈대, 나의 움직임에 상호작용하는 부서지는 햇빛들, 너른 지평선 같은 자연풍경속에 서 있을 때면 낯선 친숙함, 언캐니(uncanny)의 감정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지평선을 바라볼 때면 그 세계가 무한으로 연장될 수 있는 것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걸 확인하기 위해 ‘트루만 쇼’의 바로 그 벽, 즉 게임에서 늘 더 이상 접근 불가능한 바다, 넘어갈 수 없는 높은 산과 절벽들에서 버둥거려 본다. 이번에 선정한 ‘사사로운 리스트’에는 작품성이나 영화적 쟁점에 있어 < 니트 아일랜드 >보다 뛰어난 영화들이 다수 있다. 그럼에도 이 다큐멘터리가 정말 사사롭게 나의 어떤 마음을 정확하게 건드렸기에 리뷰를 쓰기로 결심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내가 디지털 게임의 가상 세계에서 느꼈던 그 존재론적 외로움을 발화하다. 장편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니트 아일랜드>의 감독은 세 명의 프랑스 청년, 에키엠 바르비에, 길렘 코스, 캉탱 렐구아크이다. 이들의 영화제작 현장은 <DayZ>(Bohemian Interactive, Dean Hall, 2013)라는 멀티플레이어 온라인 생존 게임의 가상세계이다. 가상의 소비에트연방 공화국, 체르나루스가 배경인 게임 세계는 플레이어가 자유롭게 공간과 사물에 접근할 수 있는 오픈 월드로 구성되어 있고 필수적으로 수행해야 하는 미션이나 주요한 서사진행이 많지 않아 높은 자율성을 보장한다. 제작팀은 전작에서는 <Grand Theft Auto 5>(록스타, 2013)의 게임 플레이 장면을 녹화하고 편집해 단편 <말로위 드라이브>(2017)를 만든 바 있다. 이 경험을 바탕삼아 좀비 아포칼립스 장르인 <DayZ>를 963 시간 플레이하며 다큐멘터리를 제작했다. 엔딩씬을 제외한 모든 장면이 게임 내의 플레이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은 다른 플레이어들을 만나기 위해 긴 거리를 떠돌아다닌다. 당연하게도 실시간 게임 플레이와 결과물로서의 영화는 다르다. 최종적으로 영화에 무엇을 담았는가를 생각해보면 오히려 이 영화는 ‘게임적인 것’이 아니라 ‘영화적인 것’에 집중했음을 알 수 있다.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그들은 963 시간을 플레이하기 위해 좀비와 싸우거나, 다른 생존자와 전투를 벌이거나, 아이템을 찾거나, 때로는 죽어서 게임이 초기화되는 과정을 여러 번 겪었을 것이다. 실제로 죽음의 위기에 처하면 점진적으로 흑백으로 변하고 죽고 나면 기본 아이템만 소지한 채 해변으로 돌아와 처음부터 게임을 다시 시작해야 한다. 한 인터뷰에서 감독들은 가상 카메라로 촬영하면서 화면이 흑백으로 변하지 않게 생명력을 적절하게 관리하는 것이 제일 힘들었다고 말한 바 있다. 일종의 카메라 뒤의 장면, 즉 그 세계에 살아남기 위해 플레이했던 게임적 순간들은 편집되어 영화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제작팀은 가능한 사살되지 않기 위해 ‘PRESS’라고 적힌 조끼를 입고 카메라를 들고 인터뷰 대상을 찾아다닌다. 좀비로 인해 인류가 멸망해 가는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뿔뿔이 흩어져 생존해 있는 사람들을 만나 그들이 살아가는 방식을 듣고 기록한다. 국가를 비롯한 기존의 사회 체제가 사라진 세계에서 개인 혹은 부족은 자기들만의 삶의 모습과 가치를 만들어 간다. 아포칼립스의 그리스 어원은 ‘덮개를 걷어내다(uncovering)’라는 뜻을 갖고 있다. 우리의 정체성과 관계를 반강제적으로 제한하고 정의하는 기존의 체제가 무너질 때 우리는 오히려 자신들이 어떤 사람인지, 어떤 사회와 관계를 만들기를 원하는지, 아니면 사실 그다지 원하는 바가 없는지를 알 수 있다. 더불어 인터뷰 대상과 세계가 제작자들에게 생존의 위협이 될 수 있는 상황에서 다큐멘터리의 제작 조건을 새삼 고심하게 된다. 제작팀은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좀비나 적대적인 생존자들에게 언제든 살해당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필수적인 물과 음식, 의류, 의료 용품, 무기 등의 보급품을 수색하고 채집해야 한다. 물리적 환경에서도 강도는 다르지만 다큐멘터리를 제작할 때 이 조건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영화는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양한 신념과 생존방식을 취하는 부족들에 대한 민족지적(ethnographic) 호기심 그리고 비의미의 풍경으로서의 지평선을 조명한다. 제작팀은 처음부터 신뢰를 얻을 수는 없기에 우선은 ‘PRESS’ 뱃지에 의존해본다. 그들에게 카메라는 그들을 보호하는 무기가 된다. 그들은 자신들을 영화제작팀이라 밝히고 죽이지 말라고 요청한 후 플레이어들에게 다가간다. 900 시간이 넘는 긴 여정에서 약탈적인 갱단, 자기들만의 신과 교리를 만들고 사마리아 윤리를 따르는 종교적인 집단, 호박을 키워 자급자족하는 사람들, 사람이 거의 없는 광활한 자연 속에 자기만의 비밀 아지트를 만들고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호기심 많은 방랑자들을 만난다. 특히 오프닝에서 제작팀과 관객은 윤리적인 충격에 직면한다. 카니발리즘으로 악명 높은 갱단 ‘다크 에즈 미드나잇’의 리더 아이리스는 게임에서 현실에서라면 하지 못할 짓을 마음껏 하며 플레이 한다. 제작팀의 눈앞에서 보란 듯이 ‘장난감’이라 부르는 죄수를 말 그대로 가지고 놀다가 총으로 쏘아 죽인다. 선정적인 이 장면은 다큐멘터리 제작의 윤리적 갈등을 드러낸다. 아이리스는 카메라, 즉 제작팀이 있기 때문에 더 위악적으로 행동했을 수 있다. 제작팀은 이미 아바타의 삶과 죽음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이 상황은 게임이기 때문에 그다지 심각하지 않을 수 있다. 아이리스와 그녀의 무리들이 인간의 형상을 한 아바타를 포박하고 죽이면서 노는 것을 기록하고 보여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이것이 게임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픽션은 아니다. 오픈 월드에서 그들이 자율적으로 선택한 행동들이기 때문이다. 특히 충격과 두려움, 호기심과 경외가 뒤섞인 제작팀의 가상 카메라의 움직임과 마이크를 통해 전달되는 제작진의 실제 숨소리는 이 상황이 현실의 삶과 완전히 분리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낸다. 이 장면은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만들며 디지털 시대에 다큐멘터리 윤리가 어떻게 새롭게 정립될 수 있는지 질문한다. 이처럼 게임 플레이와 영화제작, 현실과 가상세계는 구분되지 않고 서로에게 침투한다.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로 분류될 수 있을 만큼 감독들과 다큐멘터리 등장인물들은 게임 속 아바타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우리는 현실에서의 그들의 외양과 정체성을 알 수 없다. 성별, 인종, 패션 등은 아바타를 꾸미기 나름이다. 하지만 아바타의 움직임은 플레이어들에 의해 조종되고 행동되어진다. 더 중요하게는 마이크를 통해 플레이어들의 실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대화뿐 아니라 마이크를 통해 현실에서 들려오는 앰비언스 사운드는 실제 삶의 레이어를 중첩적으로 드러낸다. 사운드가 다큐멘터리에서 리얼리티를 뒷받침 하는 데 큰 역할을 하고 있음을 예증한다. 많은 이들이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적이라고 꼽는 장면 중 하나는 아이를 재우고 밤에 게임을 하는 여성 플레이어와의 만남이다. 이 플레이어는 지하에 있는 방에서 게임을 하는 시간이 양육에서 벗어나 유일하게 쉬는 시간이라고 말하는데 그 순간 넘어져 우는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며 현실의 삶이 게임에 깊숙이 들어온다. 플레이어는 양해를 구하고 아이를 돌보러 잠시 컴퓨터 앞을 떠난다. 플레이어의 컨트롤이 해제된 아바타는 말 그대로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다. 흔적이나 유령 같은 몸은 외로워 보인다. 이 장면은 두 세계가 나눠져 있지 않으며, 오히려 그의 신체가 현실에도 가상세계에도 분주하게 분유되어 있음을 각인한다. 영화는 뒤로 갈수록 생존을 위한 투쟁이나 위악적인 기행보다는 다른 감정과 가능성들에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 영화가 제작되는 중간에 코로나19가 발발한 것과 연관이 깊을 것이다. 유럽을 비롯한 지구의 일부 지역들은 봉쇄되었고 고립된 그들은 그들의 아포칼립스 세계를 닮아가고 있는 현실을 벗어나 게임공간에서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우정과 공존의 실마리를 찾는다. 특히 하늘에서 헤엄칠 수 있게 디자인된 자신들의 비밀 아지트에 초대해준 부부 플레이어, 채소를 키우고 자립생활을 하는 농부 플레이어들, 고립된 이들을 받아주는 종교적인 단체, 밤에 함께 캠프파이어를 하고 음악을 듣는 사람들은 지친 현실을 위로한다(DJ가 된 플레이어들이 현실에서 음악을 재생하고 마이크를 통해 공유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가장 강렬하게 남기는 감정은 실존적 외로움이다. 현실의 봉쇄에 지친 이들은 함께 게임세계의 끝으로 모험을 떠나기로 한다. 하염없이 몇날 며칠을 지평선을 향해 걸었지만 광활한 공간 뒤에는 다시 광활한 공간이 나올 뿐이다. 끝이 있다는 것을 알긴 하지만 얼마만큼 가야 있는지는 알 수 없다. 코로나19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이 우울감에 빠졌던 것처럼, 누군가는 그저 함께 하는 것에 흥미를 느끼지만 다른 누군가는 끝이 보이지 않는 것에 절망하고 게임 속에서 자살한다. 자살한 후 남겨진 아바타 주위에 모여 그를 애도하는 사람들의 모습은 뭉클한 감정을 자아낸다. 그들은 외로움을 공유한다. 부재와 상실을 애도하는 순간(사실 플레이하는 동안 현실의 일부를 잃고 게임에 몰입한다는 점에서 게임하기는 반드시 상실을 동반한다), 지평선을 바라보는 장면, 끝이 어디인지도 모른 채 하염없이 걷는 사람들, 의미를 넘어선 ‘거기-있음’, 그저 함께 있음을 즐기는 사람들, 바다에 다다라 유유히 헤엄치던 종교집단의 리더인 카우보이 스톤 목사가 그의 현실 이름을 말하며 “나는 프랭크일 뿐이에요”라고 나직하게 고백하는 장면은 모두 외로움과 상실의 감정을 자아낸다. 이 장면들은 오히려 대립되는 세계라고 여겨지는 현실과 가상이 모두 물질적으로 절실하게 촉지되는 순간들이다. 간격이 있지만 그럼에도 내 신체를 매개삼아 레이어링되는 두 세계의 물질성은 오히려 외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 외로움은 세계가 내가 있든 없든 존재한다는 진실이다. 그것이 실제 삶이든 게임의 가상세계든 말이다. 저기 어딘가에 내가 모르는, 혹은 지금은 보고 있지 않은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 그것은 소외가 아니며 오히려 부재이고 상실을 통한 강력한 실존적 감각이다.
폴리아티스트란 영화에 나오는 목소리와 음악을 제외한 모든 소리를 진짜처럼 재창조하며 그 소리에 감정까지 표현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엔지니어’가 아닌 ‘아티스트’라고 불린다. 2008년 처음 폴리아티스트란 일을 시작했으니 내년이면 딱 10년째다. 처음엔 이 직업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으나 군대에서 TV를 보다가 우연히 폴리아티스트란 직종을 처음 접했고, 그 후로 막연히 이 일을 하겠다, 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영화 사운드 후반 작업은 크게 대사, 폴리, 이펙트, 앰비언스로 나뉜다. 그중의 한 파트가 바로 내가 담당하는 폴리(Foley) 파트이다. 군 제대 후 학교에 복학하고 주위 선배, 친구들에게 수소문한 결과 운 좋게도 학교 선배 중 한 분이 폴리아티스트에 종사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연락처를 받아내고 여러 번의 연락을 거쳐 어렵게 선배가 일하는 장소로 구경을 가게 되었다. 첫눈에 난 너무나 신기하고 재미있어 보이는 폴리아티스트란 직업의 매료되어 버렸고, 무조건 폴리아티스트가 되겠다는 결심을 굳건하게 다졌다. 그 이후로도 선배에게 계속 연락하며 선배가 일하는 회사에 자주 놀러갔었는데 그때 회사에서 작업하던 작품이 <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이었다. 그때 선배가 “한번 녹음해볼래?” 해서 엉겁결에 폴리 부스에 들어가 쇠사슬 소리와 자물쇠 소리를 녹음을 했고, 그것이 바로 내 인생 최초의 폴리 녹음이 되었다. 학교를 다니면서 시간 날 때마다 선배 회사에 놀러 가게 되었고 운 좋게 학생 인턴에 뽑혀 한 달간 인턴 생활을 하게 되었다. 당시 회사에서는 < 미쓰 홍당무 >를 할 때였는데, 선배들이 녹음하는 걸 한 달간 지켜보면서 더욱더 이 일에 대한 애정이 깊어만 갔다. 한 달 학생 인턴이 끝나고 선배 회사에서 아티스트를 뽑는다는 연락을 받았고, 대망의 면접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2008년 8월부터 회사에 출근하라는 합격 통보를 받게 되었다. 기쁨도 잠시, 회사에 폴리아티스트로 들어가게 되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래서 선배가 폴리 녹음하는 현장을 구경하고 선배가 작업한 폴리세션으로 에디팅 하며 정리하는 일부터 시작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한 느낌이 들어 회사에서 작업했던 영화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입사하고 약 한 달간 40~50편의 영화를 봤던 것 같다. 그 당시에는 주위 환경 때문에 폴리녹음을 밤 10시부터 시작했는데 낮에는 영화를 보고, 밤에는 폴리 녹음을 구경하는 시간이 계속 반복되었다. 선배가 녹음을 하지 않는 시간이나 쉬는 날에 혼자 나와서 걷는 발, 뛰는 발 등등 발 연습을 했고, 길을 걸으면서도 앞에 지나가는 사람의 걸음을 따라 하는 연습을 가장 많이 했었다. 그래도 혈기왕성했던 신입 시절, 뭔가 아쉬웠는지 당시 회사가 대치동에 있었는데 퇴근하고 삼성 코엑스에서 심야 영화로 영화를 항상 챙겨보고 했었다. 회사에서 그때 진행 중이던 작품은 <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 > < 쌍화점 > < 핸드폰 >이었는데 선배가 작업하는 걸 보면서 녹음하는 방식이나 걷는 방법, 소리 내는 방식을 배우려 부단히 노력하며 똑같이 따라 했지만 나에겐 전혀 그런 소리가 나지 않았고 또 좋은 소리도 아니었다. 사람의 몸은 모두 달라 단순히 따라 한다고 같은 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깨달음을 얻은 순간이었다. 결국 내 방식을 찾으려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러던 중,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된 작품은 봉준호 감독의 < 마더 >였다. 본격 폴리아티스트로 투입된 첫 작품인 만큼, 내가 이 영화의 폴리를 도맡아서 해야 한다는 것에 굉장히 부담스럽고 떨리며 긴장되었지만 한편으론 폴리아티스트로서 제대로 작업을 하게 되어 기쁜 마음도 컸다. 편집본을 받고 그림을 보며 제작부에게 폴리도구를 요청을 했고, 그래서 약재, 약재 자르는 칼, 문아정( 문희라 )의 마네킹, 도준 모( 김혜자 )의 신발, 침 상자 등을 받을 수 있었다. 이중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도준 모의 신발, 즉 도준 모의 발소리였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신발들로는 그림과 어울리는 소리가 나지 않았고 해서 도준 모의 신발을 요청하여 받았지만 김혜자 배우의 발이 무척 작아 신을 수조차 없었다. 지금이야 여러 경험을 통해 신발 소리는 충분히 낼 수 있지만 그때 당시엔 엄청나게 고민이 많았다. 시장에 있는 신발 가게, 백화점 신발 코너 등을 전전하며 비슷한 소리가 나는 신발을 구매하였으나 여전히 그림과 잘 어울리지 않았고, 결국 영화에 사용된 도준 모의 신발을 억지로 신고 발소리를 녹음하게 되었다. 처음 작업하는 거라 익숙지 않아서인지 선배가 하면 두 번의 녹음으로 끝낼 것을 당시에 난 10번, 20번, 30번을 해야 하나의 소리가 나올 수 있었다. 그렇게 6개월간 연습을 했지만 실제 녹음에 들어가니 그림과 싱크 맞추랴 느낌 맞추랴 강약 맞추랴 정말이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녹음을 들어가기 전에 그림을 외운다곤 했지만 정작 들어가면 싱크 맞추는 데 급급했다. 영화 속 인물이 열 발자국을 걸으면 처음에 녹음했던 발 두 개의 소리, 두 번째로 녹음했던 발 두 개의 소리, 세 번째에 녹음했던 발 두 개의 소리... 이런 식으로 열 개의 걸음이더라도 최소 5~10번 정도의 녹음을 해서 하나의 발소리를 완성시켜야했다. 이렇게 작업을 하니 하루 종일 녹음했는데도 약 10분 정도의 분량이 나올 뿐이었다. 그러니 녹음하다 동이 트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작업을 하면서 있었던 에피소드 하나. < 마더 >에서 도준( 원빈 )이 벽에 소변을 보는데 도준 모가 쫓아와 도준에게 약을 주는 장면이 있다. 스파팅 때 봉준호 감독은 도준이 오줌 누는 줄기가 굉장히 세야 한다고 요청했다. 이걸 녹음하려고 정말 여러 가지 방법으로 녹음을 시도했으나 잘되지 않았다. 폴리룸이 물바다가 될 정도로 물을 뿌리기도 하고 물총에 넣어 쏴 보기도 하는 등 갖은 방법을 동원했지만 생각처럼 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게 진짜로 소변을 극한으로 참았다가 싸는 소리를 실제로 녹음하면 어떨까, 하는 거였다. 새벽에 녹음기 들고 밖으로 나가 소변 소리를 녹음했고(녹음 후 청소는 깨끗이 했다...) 결국 영화에 실제로 쓰인 소리는 나와 폴리 레코딩 한 선배의 소리, 그러니까 두 명이 소변보는 소리가 쓰인 것이다. 이후 과정은 무사히 끝냈고, 그렇게 나는 폴리아티스트로 데뷔를 하게 되었다, 그 이후 폴리 작업은 계속 진행되었고 나도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경험이 쌓이면 정말 소리를 쉽고 편하게 낼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더욱 어려워지고 고민은 끝이 없다. < 차우 >의 멧돼지 발소리, < 해운대 >의 물소리, < 설국열차 >의 각 칸마다 들리는 발소리, < 최종병기 활 >의 속도감이 느껴지는 발소리 등등 매 작품마다 다르고 어렵고 그래서 고민하며 여러 에피소드가 불쑥불쑥 생기지만 그중 가장 어려운 건 각 캐릭터마다 소리를 다르게 하고 감정을 표현하며 캐릭터의 성격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이건 늘 굉장한 스트레스로 다가온다. 가정을 책임지는 가장이 술을 한잔 걸치고 집으로 향하는 발소리, 상대방에게 복수하고 돌아가는 발소리, 슬프지만 상대에게 들키지 않으려고 억지로 즐거운 척 하는 발소리... 발소리 말고도 장례식장에는 담배를 꺼내 피는 소리, 양아치가 씹는 껌 소리 등. 영화에 나오는 여러 장면, 여러 감정들을 소리로 표현해 내는 건 참으로 어려운 일이며 다양하게 녹음하여 그림과 딱 맞는 소리를 찾는 건 정말 인내심이 많이 요구된다. 1 더하기 1은 2. 이런 정답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눈에 보이는 것도 아니며, 그냥 듣는 내 귀로 판단하는 수밖에 없는 거니까. 100%의 정답도 없고 100%의 오답도 없는 그런 분야이다. 내가 생각하는 사운드의 최종 목적은 딱 하나다. 너무 당연하고 간단한 것 같지만 ‘진짜 같은 소리’를 만드는 것. 관객들이 듣는 소리는 진짜 리얼 사운드는 아니지만 그게 마치 리얼하게 느껴지고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며 폴리아티스트의 존재조차 인식하지 못하게 된다면 난 성공한 거로 생각한다. 10년을 바라보는 지금도 많이 부족하지만 최종 목적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 또 노력하겠다.
< 나만 없는 집 >의 첫 시놉시스가 나온 것은 영화가 완성되기 3년 전인 2014년이었다. 당시 나는 어떤 이야기가 단편 영화로 적합하고 매력적일 것인지에 대한 감이 전혀 없어서,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무작정 기록으로 남겨두고 있었다. <나만 없는 집>은 그렇게 쌓인 여러 글 중에서 내 어린 시절을 반영한 유일한 작품이었다. 나는 이야기를 만들 때 늘 구조를 먼저 세워놓고 시작을 하는데, < 나만 없는 집 >도 마찬가지였다. 처음 시놉시스를 구상하던 2014년에는 작법 입문서로 유명한 사이드 필드의 「시나리오란 무엇인가」를 참고했고, ‘걸스카우트를 하고 싶은 어린 소녀가 가족에 의해서 반대를 겪는다’라는 중심 아이디어를 세 개의 장, 두 개의 구성점(plot point)에 맞춰 구체적인 사건으로 풀었다. 몇 차례 수정 끝에 완성한 시놉시스는 한동안 컴퓨터 폴더에 고이 저장되어 있었다. 그리고 2년 후인 2016년, ‘대구 다양성영화 제작지원 사업’의 공고가 떴고, 고민 끝에 <나만 없는 집>의 시놉시스를 다시 꺼냈다. 제작지원 사업에 내자고 결심은 한 것은 마감일이 고작 5일밖에 남지 않던 때였다. 어떻게든 시나리오를 완성해야 했는데, 그 당시 나는 크리스토퍼 보글로의 「신화, 영웅 그리고 시나리오 쓰기」라는 책으로 좀 더 심화된 이야기 구조법을 공부하고 있었고, 그것을 토대로 시나리오를 쓰기 시작했다. 이미 이전에 구조적인 고민을 충분히 했던 터라 초고는 예상보다 빠르게 완성할 수 있었다. 제작지원 사업에 선정된 후에도 시나리오의 수정 작업은 제1순위였다. 전작인 < 은하 비디오 >와 < 나만 없는 집 >의 프로듀서 및 조연출 역할을 해준 오성호 PD는 나의 첫 영화 현장인 < 소나기 >의 감독이자 영화 스승이기도 했는데, 그는 늘 강박적으로 시나리오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나는 오성호 PD에게 끊임없이 시달리며(?) 한 씬, 한 씬 꼼꼼히 점검해나갔다. 각 씬의 목표를 정확하게 정의하면서, 목표에 맞지 않는 대사나 지문 등은 삭제하고 좀 더 강조가 필요한 부분은 반복하거나 변주했다. ‘걸스카우트에 가입하고 싶은 소녀의 이야기’에 부합하기 위해서, 되도록 봄에 가까운 계절에 찍고 싶었지만, 개인 사정상 바로 작업을 진행할 수 없었다. 결국 8월 중순에 크랭크인을 하기로 하고, 프리 프로덕션 기간을 약 7주로 계획했다. 하지만 프로듀서, 촬영감독 외에 스태핑을 완료하지 못한 채 프리 프로덕션 기간이 다가오면서 불안감은 커져갔다. 게다가 이전에 제대로 된 영화를 만든 건 고작 1편에 불과했고, 내 경험과 실력에 비해 < 나만 없는 집 >은 시대극, 아역 배우, 단체 장면 등 촬영 난이도가 무척 높은 편이었다. 로케이션, 미술, 캐스팅, 연기연출, 콘티 등 어느 것 하나 소홀하고 싶지 않았다. 문제는 시간이었다. 촬영 전까지 할 일은 절망적으로 많았고, 손은 턱없이 부족했다. 촬영 예정일에 맞추기 위해, 각 업무의 최소한의 마감일만을 정해둔 채, 매일매일 TO-DO 리스트를 만들었다. 나와 오성호 PD는 스태핑 전까지 서로의 손발이 되어 업무를 분담했고, 정말 전투적으로 영화를 준비했다. 머리가 멍해질 정도로 쉴 틈이 거의 없었다. 세영의 집 < 나만 없는 집 > 프리 프로덕션의 시작은 주요 무대가 될 세영의 집을 찾는 것이었다. 하루는 예전에 살던 동네를 찾아갔었다. 비가 오던 날이었는데, 신기하게도 어릴 때 살던 연립주택이 그대로 있었고, 특유의 분위기에 가슴이 벅찼다. 하지만 감상에 젖어있던 내 마음과 달리, 집주인은 수차례 제안을 거절했다. 결국 그곳은 추억으로만 남겨둔 채, 대구 전역에 있는 오래된 아파트를 다시 조사하러 다녔다. 그리고 엉뚱하게도 현재 살고 있는 집과 매우 가까운, 재개발 예정인 빈 아파트를 섭외하게 되었다. 완전히 비어있던 만큼 미술이 용이한 곳이었지만, 그만큼 할 일이 많았다. 손걸레와 스팀 청소기 등을 동원해 온 집 안을 쓸고 닦았고, 대구 외곽에 있던 이삿짐센터에서 버리는 가구들을 실어 날랐다. 전작인 < 은하 비디오 > 때도 그랬지만, < 나만 없는 집 > 또한 로케이션과 미술이 거의 막노동 수준이었다. 1998년을 시대적 배경으로 하는 만큼, 그냥 둘 수 있는 것이 거의 없었다. 학교의 책걸상을 교체하고, 중고나라 사이트를 수시로 들락거렸고, 옛날 문방구에서 각종 보물들을 찾으러 다녔다. 길을 다니다 버려진 고가구를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눈이 갔고, 결국 주워오곤 했다. 걸스카우트 입단식 의상도 문제였다. 현재 걸스카우트 유니폼은 초록색이지만, 1998년도 당시에는 갈색이 주요 색상이었다. 전국에 있는 걸스카우트 연맹에 메일을 보내고 전화도 걸어봤지만, 갈색 유니폼은 단 한 벌도 남아 있지 않다는 답변만 돌아왔고, 직접 찾아간 대구 연맹에만 두 벌의 옷이 남아 있었다. 다행히 대구 연맹 쪽은 꽤 호의적이었고, 옷을 대여해줌과 동시에 음악, 율동 등을 알려주시기도 하셨다. 이후 대여받은 옷과 최대한 유사한 천을 구해, 30벌가량의 걸스카우트 유니폼을 의뢰, 제작했다. 한편, 프리 프로덕션 이전부터 가장 고민해왔던 아역 배우의 캐스팅은, 대구-부산-서울 3개의 도시에서 아역 전문 엔터테인먼트 및 학원에 찾아가, 오디션으로 진행했다. 주로 시나리오 속 인물의 대한 이해와 유사 경험을 묻는 질문을 했고, 즉흥 연기 또한 부탁했다. 단시간에 한 명의 배우를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이 사실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아이들에게 오디션의 기억이 조금이나마 상처로 남지 않도록, 나를 포함한 스태프 모두가 참여한 아이 한 명, 한 명에게 집중했다. 그렇게 치열했던 캐스팅 과정 끝에, 매우 운이 좋게도 < 나만 없는 집 >을 이끌어 줄 좋은 배우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세영’ 역의 김민서 ‘세영’ 역의 김민서 양을 캐스팅하면서 가장 큰 걱정거리는 역시 사투리였다. 서울 토박이인 민서에게 캐스팅 결정을 통보하기 전까지, 시나리오를 표준어로 수정해서 진행할지, 아니면 민서에게 대구 사투리를 가르칠 것인지를 끝까지 고민했었다. 결국 답이 나오지 않아 민서의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어 상담했고, 어머니께서는 민서가 이전에 전라도 사투리를 암기해서 연기를 해봤다고 말씀해주셨다. 대사를 통으로 암기하면, 현장에서 즉흥적인 연기를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내면의 갈등이 있었지만, 사실 대구 사투리를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훨씬 더 컸다. 그 날 나는, 민서에게 캐스팅 결정 통보와 함께, 남은 프리 프로덕션 기간 동안의 연기연습과 사투리의 중요성을 말하고, 또 말했다. 연기 연습은 약 5주에 걸쳐 진행되었다. 민서와는 사투리 때문에 거의 매일 통화를 했고, 일주일에 한 번은 민서가 어머니와 함께 대구에 내려와 이틀 동안 언니, 엄마, 아빠, 친구 역의 배우들과 번갈아가며 연습을 했다. 연습 방식은 대사 리딩을 시작으로, 실제 촬영 타이밍을 고려한 동선과 동작을 연습하고, 대사를 더 풍성하게 만들기 위해 배우들과 함께 상의하는 시간을 갖기도 했다. 아역 배우들과 함께 작업을 하면, 반드시 그들의 부모와 엮일 수밖에 없다. 사실 나는 그런 면에서 굉장히 운이 좋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의 부모님들은 적극적으로 나서주실 때와 뒤에서 기다려주실 때를 정확히 눈치채주셨다. 아이들은 혼자서도 충분히 잘 견디다가도, 눈앞에 자신의 부모가 보이면, 갑자기 그들에게 기대려 하고 스스로 하려는 의지가 약해지곤 한다. 그런데 이번 현장에서는 부모님이 아이들을 강하게 책려하다가 홀연히 사라지셨고, 되레 나에게 “잘한다, 잘한다” 하시며 응원과 위로를 보내주셨다. 정신없이 하루, 하루를 보내다 보니, 어느덧 스태핑과 함께 여러 프리 프로덕션 업무도 완료되어갔고, 마지막으로 숏 구성과 콘티 작업만을 남겨두고 있었다. 아직 숏 구성에 자신이 없던 내가 믿을만한 것이라곤 레퍼런스뿐이었다. < 나만 없는 집 >의 콘셉트와 유사한 레퍼런스 영화들을 반복해서 보면서, 그를 기반으로 기초적인 숏 구성을 했다. 이후 카메라 렌즈 앱을 이용해서, 실제 로케이션에서 수백 장의 사진을 찍으며 숏을 구체화시켰다. 그렇게 모은 자료를 토대로 미술 스태프와 함께 그림으로 콘티를 정리했고, 완성된 콘티는 촬영 직전에 촬영 팀과 마지막 점검 작업에서 유용하게 활용됐다. 원래 프로덕션은 7회 차로 예정되어 있었다. 사실 35분의 러닝타임을 예상한, 20페이지 분량의 시나리오로는 7회 차는 꽤 적절한 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2분 이상의 롱테이크 숏들이 꽤 포진되어 있는 데다, 평상시 테이크를 많이 간다고 악명 높은(?) 연출 스타일에서 이번엔 얼마나 내 자신과 합의할 수 있을지 나도 짐작할 수 없었다. 촬영은 시작되었고, 난 이번에도 악마가 되어, 양보 없이 배우와 스태프들을 수없이 괴롭히며 영화를 찍었다. 그리고 최종 회차는 1회 차가 늘어난 총 8회 차로 마무리했다. 자매 유난히 뜨거웠던 8월, 찜통 같은 더위에 배우와 스태프를 몰아놓고, 지치는 몸과 마음을 제대로 달래주지도 못하고, 그렇게 촬영을 강행했다. 평소 가장 심한 말이라고 해봤자 ‘바보’ 정도였던 민서와 지후는, 악에 받친 자매를 연기하느라, 마지막엔 부둥켜안고 엉엉 울고 말았다. 어머니 역을 해주신 이미정 선배님은 유당불내증이 있었음에도, 촬영에 차질이 생길까봐 끝까지 그 사실을 숨기기까지 하셨다. 김용현 촬영 감독님을 비롯한 촬영 팀은 한 장면이 끝날 때마다, 묵묵히, 가장 먼저 다음 촬영을 준비하며, 부족한 나를 항상 배려해주셨고, 부처 다음으로 인성이 가장 뛰어나다는 전상진 동시녹음기사는 무거운 붐대를 들고서 믿음직하게 자리를 지켜주었다. 그리고 나에게 가장 많은 괴롭힘을 당한 오성호 PD는, 나의 부족함으로 늘 동분서주했고, 건널목 장면을 찍은 날엔 종아리에 햇볕 화상을 입어 한동안 제대로 걷지를 못했다. 북적거렸던 촬영 현장이 끝나고 나니, 남은 건 그동안 주워 모았던 가구들과 두 장의 외장하드, 밀려드는 공포심이었다. 일단 촬영 현장을 정리하고서, 급하게 서울로 향했다. < 은하 비디오 > 때부터 함께 작업해 온, ‘이음편집실’의 원창재 편집기사님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우선 나는 기사님과 촬영 소스에 대해 염려되는 부분, 편집 방향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기사님이 콘티와 시나리오를 중심으로 만들어 주신 1차 가편을 토대로, 약 3개월에 걸쳐 세밀하게 수정 작업을 진행했다. 특히 예상보다 훨씬 더 짧은 시간 안에 찍어야 했던 걸스카우트 율동 장면과 특별히 정해진 콘티 없이 촬영한 선영과 세영의 싸움 장면이 가장 큰 걱정거리였는데, 다행히 기사님이 잘 봉합해주셨다. 그렇게 시나리오에 충실하게 편집을 끝내고 나니, 이야기는 매끄럽게 잘 이어졌지만, 씬과 씬의 리듬감이 조금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한눈에 볼 수 있게 시나리오를 펼쳐 구성점을 다시 파악했고, 리듬감이 조금 더 빠르거나 느리면 좋을 부분을 확인해 최종적으로 수정, 편집을 마무리했다. ‘대구 다양성영화 제작지원 사업’의 마지막 단계는, 그해 지원을 받은 작품을 모아 관객을 초청해 상영하는 것이었다. 상영 시기는 12월로 정해졌고, 나는 그 전까지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후반작업에 박차를 가했다. 완성된 편집본을 들고 색보정, 믹싱, 음악 작업을 거의 동시에 진행했다. 형준석 색보정기사님은, 제대로 준비하지 못한 채 변덕만 부리는 나를 끝까지 받아주셨다. 믹싱의 경우, 개화만발의 양정우 실장님과 홍랑기 믹싱기사님과 함께 작업했는데, 여름에 어울리는 앰비언스와 드라마가 강조되는 효과음을 적절히 삽입해 작품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주셨다. 또한, 류재학 음악감독님은 아이들의 정서를 잘 살려주며 울림이 있는 멋진 엔딩곡을 완성해주셨고, 마지막으로 이 모든 작업을, 동시녹음기사이기도 했던 전상진 군이 훌륭하게 엮어주었다. 길고 치열했던, 영화 제작의 과정에서 정말 많은 분들에게 민폐를 끼쳤다. 게다가 여기에 언급된 분보다 언급되지 않은 분들이 더 많다. 비록 이 영화는 ‘자기 치유’라는, 오롯이 사적이고 이기적인 이유로 시작하게 됐지만, 그런 수많은 분들의 도움을 받고서야 비로소 완성할 수 있었다. 이제는 < 나만 없는 집 >이, 나뿐만 아니라, 많은 분들에게 위로가 되고, 공감이 되는 영화이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