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야광주
- 감독
- 장일호
- 제작년도
- 1974
- 출연
- 리칭, 이승룡, 김무영, 남석훈, 진봉진, 이향자, 김기주, 고선애, 고상미, 신찬일, 이승일, 이민웅
< 야광(Glow Job) >(2018)은 임철민 감독의 (공개된) 5번째 작품이다. < 프리즈마 >(2013)에 이은 두 번째 장편영화이고, 1인 제작 작품이었던 전작들과는 다르게 소규모 스태프들과 함께 한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프로젝트 <야광>’은 영화와 공연예술 형태로 동시에 진행되었다. 그 프로젝트는 2017년 12월 광주 아시아문화전당(ACC)의 ‘젊은 공연예술 창작자 인큐베이팅 SHOWCASE’에 선정되어 먼저 공연 형식으로 소개되었고, 영화는 2018년 8월 DMZ 다큐멘터리 영화제를 통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감독의 말에 따르면, <야광> 프로젝트의 출발에는 두 가지 계기가 있다. 하나는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다 잠이 들었던 개인적 체험이고, 다른 하나는 디지털 시대의 도래와 함께 사라져 가고 있는 어떤 문화에 대한 궁금증이다. 잠이 들었다 깨어난 순간의 몽롱하고 기이한 느낌은 임철민의 영화 세계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모티브다. < 골든 라이트 >(2011)와 <프리즈마>도 바로 그 순간의 체험에서 비롯된 영화다. 차이가 있다면, 전작들에서의 그것이 잠에서 깨어나 마주한 창밖의 빛 체험이었다면, <야광>에서 그것은 영화관 스크린의 (명멸하는) 빛에 대한 체험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전작들이 그 순간의 느낌을 영화를 통해 되찾으려는 시도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야광>은 처음부터 ‘영화관’ 또는 ‘영화적 체험’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을 향해 나아간다. 그리고 단지 개인적 체험의 차원이 아니라 집단적인 문화적 체험의 차원으로 그 질문을 확장하고 있다. 이것은 개인에서 집단으로의 확장일 뿐만 아니라, 현재에서 과거(자신이 경험하지 못했던 역사)로의 확장이기도 하다. (이미 사라진) 파고다극장, 극동극장, 성동극장, 그리고 (이제 사라지게 될, 즉 아직은 그 ‘흔적’이 남아있는) 바다극장 등은 6~90년대에 영화관이자 남성 성 소수자들의 ‘크루징 스팟(cruising spot)’으로 향유되었던 장소들이다. 남성 성 소수자들은 영화관이라는 공적 공간을 공과 사의 경계를 넘나드는 리비도의 장소로 점유/전용했다(일종의 ‘스쾃 운동’). 디지털의 도래와 함께 그 남성 성 소수자 하위문화는 사라졌고, 그 문화의 물리적 토대였던 극장도 이미 사라졌거나 사라져가고 있다(이제 그 문화 또는 커뮤니티는 인터넷과 미팅 애플리케이션을 통해 가상공간으로 이동했다). <야광>은 이 사라진 장소와 문화의 흔적을 찾아 탐색하는 영화다. 그 과정은 ‘디지털 시대의 영화/영화관’에 대한 존재론적 탐구의 과정이기도 하다. <야광>의 구체적 내용은 몇 마디 말로 요약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자기중심적 서사 구성의 욕망에 저항하는 영화이고, 쉬운 대답을 제시하기보다 기꺼이 실패 가능성을 무릅쓴 수행적 질문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미완의 영화’ 또는 ‘과정으로서의 영화’인 이런 텍스트에 대해서는, 안이한 요약과 평가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거듭 보면서 함께 그 질문을 수행할 파트너로 삼는 것이 더 의미 있고 생산적일 수 있을 것이다. 이 자리에서는 그 동참을 위해 필요한 몇 가지 콘텍스트 또는 정보만을 소개하고자 한다. 첫째는 앞서 이야기한 이 프로젝트의 (식별 불가능하게 혼합된) 두 가지 계기이고, 둘째는 임철민의 영화 만들기가 보여주는 어떤 특징이다. 임철민은 먼저 계획(시나리오 또는 구성안)을 세우기는 하지만, 정작 영화 만들기를 시작하면 그 틀을 깨고 과정에서 마주친 우연적 요소들을 수용한다. 이 비우기와 채우기의 과정은 매우 직관적이지만, 최종적인 전체의 구성은 매우 논리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프리즈마>와 마찬가지로 <야광> 또한 매우 논리적인 3부 구성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직관적으로 선택된 우연적 요소들과 논리적으로 배치된 3부 구성은, 매우 특이한(풍부하고 깊이 있는 질문으로 확장되는) 상징체계를 설립한다. 물론 이런 영화 만들기의 과정은 <야광> 또는 임철민만의 특징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좋은 작품은 이런 과정을 거쳐 태어난다고 말할 수 있다. <야광>에서 특별한 것은 그 상징체계를 구성하는 요소들이, 그 어느 때보다 의미론적으로 충전된 것들이라는 점이다. 가령, <야광>의 첫 쇼트에서 들리는 ‘빗물 소리’는 그냥 채집된 소리가 아니라 만들어진 소리다. 임철민은 이 프로젝트를 수행하는 과정에서 자신이 체험하지 못한 과거 필름 시대 영화관 스크린에서 ‘비가 내리는’ 현상(일종의, ‘시각적 노이즈’)을, ‘빗물 소리’라는 청각적 요소로 전환하여 현재로 옮겨 놓는다(이 빗물 소리는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 직접 제작한 ‘빗물 장치’를 통해 얻은 소리다. 그 빗물 장치는 앞서 말한 공연에서 매우 중요한 무대 장치로 사용되었다). 이렇듯 사라진 과거의 흔적을 현재의 물리적 현상으로 되살려낸 이 소리는, 앞서 말한 ‘극장-크루징 스팟’의 분위기를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환경적 요소였을 것이다. 이 현재화된 과거의 소리는 디지털 시대 남성 성 소수자 하위문화를 구성하는 다른 청각적 요소들(미팅 애플리케이션 알림음 소리, 그 커뮤니티에서 유행하고 있는 커버-댄스 문화를 제유적으로 함축하고 있는 엔딩곡 ‘숨바꼭질’)과의 차이를 통해 일정한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요소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미 매우 의미론적으로 충전된 요소이다. 영화 <야광>은 이런 맥락에 대한 아무런 소개 없이 영화의 첫 부분에 던져 놓는다. 이 무심 또는 불친절은 <야광>을 또 다른 의미에서 ‘미완의 영화’로 만든다. 다시 말해서 <야광>은 ‘완결된 미학적 대상으로서의 작품’이라는 신화, 또는 ‘폐쇄된 극장에서만 진정으로 수행되는 영화적 체험’이라는 시네필의 신화에 대해서도 질문을 던지는 텍스트라는 점에서, 진정한 ‘포스트-시네마(영화이자 영화관이라는 이중적 의미에서의 시네마)’라고 할 수 있다.
안현철 감독은 1929년 평양시 대찰리에서 수산업을 하시던 아버지 안영범(安永範) 선생과 어머니 이영팔(李永八)씨 사이에 삼남매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1948년 평양고보(평2중)를 졸업하고 이듬해 1949년 북조선 영화촬영소에 입소하여 영화감독이 되기 위해 스타니 스라브스키의 배우수업론과 에이젠슈타인 및 푸토푸 킨의 몽타쥬 이론을 주축으로 한 영화수업을 했다. 특히 에이젠슈타인이 연출한 '징기스칸의 후예'라는 영화를 통해 많은 감동을 받고 그의 몽타쥬 이론과 연출론을 집중적으로 공부하기 시작했으며 후에 영화감독으로써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1950년 그렇게 열심히 영화감독의 꿈을 키워가고 있을 때 뜻하지 않은 6·25 전쟁으로 인해 안현철 감독은 가족들과 함께 북한 땅 이곳 저곳으로 피난을 다니며 어려운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그해 10월 국군의 평양 입성과 더불어 조국통일의 기쁨으로 터질 것 같은 가슴을 주체하지 못한 안현철 감독은 몇 일 밤을 지새우고 평양 시내를 누비며 시민들에게 질서 유지를 호소하기도 했다한다. 그러나 통일의 기쁨은 잠시였다. 1951년 중공군의 개입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작전상 후퇴를 하게 되었으며 수많은 피난민들이 그러했듯이 안현철 감독 또한 3, 4일 후면 다시 고향땅을 밟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고 부모 형제와 아무런 약속도 없이 그렇게 헤어졌었는데 반세기가 지나간 지금껏 생사조차 모르고 이산의 한을 가슴깊이 묻은 채 백발이 성성한 모습으로 기독교 안수집사로서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단신 월남한 안현철 감독은 당시의 전쟁 상황으로선 빠른 시간 안에 가족들과 다시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국군에 입대하여 3년간의 군복무를 1954년에 끝낸 후 상경하여 (고) 이창근 감독을 찾아간다. 안현철 감독의 매형인 (고) 이창근 감독(일제 시대부터 영화를 했으며 해방 후 1948년에 월남하여 우리 영화 기술발전에 공로가 큰 대선배 감독이며 기술자임)은 북조선 영화촬영소 출신 안현철을 이만흥 감독(극영화 '구원의 정화' 감독)에게 소개하여 그의 조감독으로서 한국 영화에 입문케 하였다. 그후 ' 인생화보 '(이창근 감독), ' 숙영낭자전 '( 신현로 감독) 등 여러 작품의 조감독을 거쳐 1957년 ' 어머니의 길 '이란 제명의 멜로 영화를 갖고 대한민국의 영화감독으로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당시 이 영화를 본 서울의 5대 신문이 과감한 연출기법을 사용한 템포 빠른 한국영화가 탄생했다고 격찬을 했다고 한다. 그때는 어려운 전쟁기여서 16m/m 필름으로 영화가 제작되다가 막 35m/m 필름으로 전환되는 시기였기에 모든 작업을 조심스럽게 하던때였다. 영화 창작기법 또한 귀납법적인 것 이외의 것은 감히 생각조차 못하던 시기였다. 즉 파격의 기법을 도입한다면 관객들에게 화면속의 인물 및 물체들에 대한 위치상의 착각 등으로 혼란을 일으켜 작품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다. 그런데 안현철 감독은 첫작품인 ' 어머니의 길 '에서 원근촬영에 파격적인 기법을 과감히 사용, 템포감있는 몽타쥬를 구사하여 영화인들을 놀라게 했다. 아마 혈기왕성한 지금의 젊은이들처럼 당시의 안현철 감독도 젊음이 그러한 모험을 하게 했으리라 생각된다. 첫 작품을 성공시킨 안현철 감독은 계속해서 ' 과거를 묻지 마세요 ', ' 어머니의 힘 ', ' 푸른하늘 은하수 ', ' 윤심덕 ' 등 많은 멜로 영화를 감독하여 흥행적으로는 물론 작품성도 인정되어 멜로 영화의 대가라는 소리도 들었다. 안현철 감독이 멜로 영화를 많이 다루었던 건 1951년 1·4 후퇴 때 눈보라치던 대동강변에서 아무런 약속도 없이 따뜻한 인사말 한마디 못하고 3, 4일 후면 다시 만나리라 생각하고 헤어진 부모형제에 대한 그리움과 사랑의 한을 영화 예술로 승화시키고자 노력한 결과 멜로 영화가 주류를 이루었다 한다. 그러나 사극도 예외가 아니라고 한다. 안현철 감독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1962년도작 ' 주유천하 '는 왕위를 동생에게, 물려준 양녕대군과 이를 물려받은 동생 세종대왕간의 끈끈한 인정과 형제간의 아름다운 사랑을 표출하고자 최선을 다한 작품이라고 한다. 방탕한 생활로 왕족의 품위를 훼손시킨 양녕대군을 책하라는 신하들을 뒤로한 세종대왕은 정주(평안도)에서 양녕이 사귄 과부를 궁궐로 불러들여 두 사람을 만나게 해줌은 물론 크게 잔치까지 베풀며 형인 양녕대군의 심사를 헤아리는 정감 넘치는 장면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뭉클하다는 안현철 감독의 말은 곧 안현철 감독의 작품성향을 짐작케 한다고 하겠다. 1957년의 처녀작 ' 어머니의 길 '에서 시작하여 안현철 감독이 연출한 모든 작품에 한 두장면씩 본인이 꼭 출연을 했다고 한다. 이는 1·4 후퇴 때 헤어진 가족이나 친지들을 만날 수 있는 행운을 바라는 마음 때문이었으나 지금껏 연락 온 사람은 아무도 없다며 우리 영화인들은 남과 북이 영화 교류를 통해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여 평화통일을 앞당기는데 밑거름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한다며 북쪽 하늘을 향해 연신 담배 연기를 뿜어낸다. 내 나이가... 내 나이가... 신음처럼 내뱉는 그 소리는 살아생전 고향땅을 밟아보려는 한의 소리이며 아픔의 소리이리라. 민족의 염원인 그날. 그리움과 사랑의 한이 절절히 서려있는 안현철 감독의 영화가 통일된 평양 시내 영화관에서 상영될 수 있는 그때가 하루 빨리 찾아와 주길 기원한다. 김수남 (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1929. 7. 17일 평안남도 평양 출생 1958 < 어머니의 길 > 데뷔 작품명 1958 어머니의 길 / 낙화유수 1959 다시 찾는 양지 1960 과거를 묻지 마세요 / 어머니의 힘 / 아들의 심판 / 푸른하늘 은하수 1961 8.15전야 / 별 / 양산도 / 비단이장사 왕서방 1962 슬픔은 나에게만 / 주유천하 / 인목대비 1963 거지왕자 / 천관녀 / 사명당 1964 세종대왕 / 남이장군 1965 장보고 1966 생일없는 소년 1968 내목숨 다하도록 1969 용문의 여검 / 사랑이라는 것은 / 윤심덕 / 마곡의 결투 / 떠나도 마음만은 / 사랑은 가고 세월 만 남아 / 야적 1970 아빠 품에 / 야광주 1971 열두여인 / 아내여 미안하다 1979 용문호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