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소
- 감독
- 윤진
- 제작년도
- 2023
- 출연
- 윤성진, 정상훈, 박용, 김찬민, 손인찬, 채민결, 송보근, 김범, 윤홍설, 정의현, 정순분, 김혜영, 유정희, 이현우, 강승우
20대 때 아르바이트를 했던 카페의 매니저는 < 타짜 >의 모든 대사를 외우고 있었다. 디자이너로 일하다 카페 창업의 꿈을 품고 매니저가 된 지 1년, 쥐콩만한 월급을 받으며 하루 12시간씩 일했고 마감 후에는 편의점 테이블에 앉아 캔맥주를 마시고 컵라면을 먹었다. 나도 종종 그와 함께 했다. 그는 스니커즈 수집이 취미였고 옷을 잘 입었으며 한번도 험한 말을 하거나 알바생을 괴롭히지 않았다. 그가 험한 말을 할 때는 오로지 <타짜>의 대사를 따라 할 때 뿐이었다. 나는 어떻게 여기까지 왔느냐? 잘난 놈 제끼고 못난 놈 보내고.. 안경잽이같이 배신하는 새끼들 다 죽였다... 고니야? 담배하나 찔러봐라. 한창 유럽산 예술 영화에 빠져 있던 나에게 <타짜>는 그저 그런 영화였다. 영화계는 < 범죄의 재구성 >이 개봉했을 때 이미 천만감독이 될 최동훈의 잠재력을 알아봤지만 나는 전혀 감을 잡지 못했고 간혹 <리피피> 같은 영화가 레퍼런스로 언급되면 줄스 다신의 영화를 찾아봐야겠군! 하고 중얼거리며 서치를 했다. 그러다 줄스 다신이 훗날 그리스의 문화부 장관이 되는 배우 멜리나 메르쿠리와 결혼했다는 사실과 그녀가 그리스의 파시스트들과 싸운 용기 있는 배우였다는 사실을 알게 됐으며 결국 줄스 다신과 멜리나 메르쿠리가 함께한 영화 < 일요일은 참으세요 >에 이르게 되는 이상한 경로를 밟을 뿐이었다. 매니저가 <타짜>에서 가장 좋아했던 캐릭터는 “호구”로 간혹 예림이! 예림이! 내가 잘못했어 내가 나쁜놈이야 같은 대사를 중얼거리기도 했다. 나는 “호구” 캐릭터에 대한 그의 애정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20대 내내 수많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만나본 최고의 매니저였고 지금까지 가장 좋아하는 사람 중 하나로 남아있지만(그가 어디선가 이 글을 읽기를) 당시에는 왜 이렇게 <타짜>를 좋아할까?? 뭐가 그리 좋지?? 라는 생각뿐이었다. 그런데 웬걸, <타짜>는 개봉 당시의 히트를 넘어 21세기 한국 영화의 새로운 고전으로 등극했고 수많은 밈을 낳았으며 거의 모든 캐릭터가 재생산됐다. 그러니까 금정연이 박무석이 어쩌고 저쩌고 했을 때 나는 매니저가 떠올랐고 2008년 즈음 편의점에서 캔맥주와 컵라면을 먹던 시절이 떠오른 것이다. 비록 우리는 망원동의 카페 테라스에 앉아 아메리카노와 휘낭시에를 먹고 있지만 말이다(솔직히 말하면 나는 박무석이 누군지 몰랐다. 아마 박무석을 아느냐 알지 못하냐에 따라 한국 영화-문화에 대한 친숙도를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이를 K-man지수K-man factor라고 부르자. 당신이 만약 박무석을 알고 박무석이 부른 노래 제목까지 안다면 당신은…). 그렇죠, 지돈씨. 금정연은 이주 전 일산으로 이사했고 훨씬 쾌적한 환경에서 육아와 집필을 하게 되었다며, 결국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시네마의 실행Exercise”라고 했다. 크리스티앙 메츠는 말했죠. 나의 목표는 시네마의 실행이 폭넓은 인류학적 형상들에 뿌리를 내리기 위해 통과하는, 여전히 잘 알려지지 않은 일련의 경로들을 지적하는 것이다. 오….. 메츠의 이론적 논의에서는 시네마 장치의 정신분석학적 구성이 중요하지만, 우리는 그 부분은 우선 제쳐두기로 했다(어쩌면 영원히 제쳐둘지도…). 우리가 만들 오버디터미네이션 에세이 필름overdetermination essay film <한국 영화에서 길 잃은 한국 사람들>에서 중요한 건 “인류학적 형상들”이라는 말이며 우리의 목적은 21세기 한국 영화가 포착하고 실행되어 루핑 작용을 일으킨 계기들을 탐색하여 상상적 테크닉으로서의 인류학 장치인 한국 영화를 수행하는 거라고, 금정연은 말했다. 뭐라고요? 이제부터 저를 K정연이라고 불러주세요. 금정연은 Keum정연이고, 그러니까 K정연… 나는 정연 K.가 맞는 거 아닌가 잠깐 생각했지만 나름 생각이 있겠지.. YS나 DJ처럼 JY로 불러 달라고 하지 않는 게 어디냐고 생각했다. 동시에 20대 중반 일했던 (또 다른) 카페의 사장이 나를 JD라고 불렀던 게 떠올랐고 최근에 지인과 나눴던 대화도 떠올랐다. 지인은 봉준호의 이름이 준호라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냐고 말했다. 친구들은 준호라고 부르겠지? 아니, 친구들도 봉이라고 부르지 않을까? 근데 그게 중요해? 이게 무슨 대화야? 우리는 잠시 의문에 빠졌지만 지인은 단호한 태도를 취했다. 이번 씨네21에서 뽑은 2010년에서 2020년 영화 베스트10에서 통합 1위를 먹은 영화가 < 기생충 >이야. 그 사실을 기억해. 음……(무슨 상관?) 하지만 호칭은 언제나 중요한 문제다. 특히 영화의 이름에 관한 문제는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왜 영화를 무비라고 했다가 시네마라고 했다가 픽쳐라고 했다가 필름이라고 하는가. 하물며 지금은 필름으로 찍지도 않는데! 넷플릭스의 토크 프로그램 <사인펠드와 함께 커피 드라이브>에서 사인펠드와 윌 패럴은 이 문제에 대해 간단히 정의 내린다. (<커피 드라이브>는 억만장자 코미디언인 사인펠드가 고급 클래식카를 타고 명사들을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으로 버락 오바마도 출연했다. 심지어 재임 중에. 세계에는 제정신이 아닌 지도자가 너무 많다: 미국의 지도자 오바마 왈). 사인펠드 : 이 단어들이 얼마나 가식적인지 순위를 매겨봐요. ‘필름’, ‘픽쳐’, ‘무비’ 패럴 : 가장 가식적인 단어는 픽쳐예요. It’s a wonderful Picture. 사인펠드 : 아주 의식적으로 멋있는 척 하는 것 같아요. 패럴 : 두 번째는 필름이요. 무비가 확실히 덜 가식적이에요. 사인펠드 : 무비, 필름, 픽쳐에 나오는 사람들은 왜 자신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할까요? 패럴 : 몰라요… 그래도 저는 영화가 너무 좋아요…. 존 포드는 자신의 영화를 절대 film이나 movie라고 하지 않았어요. K정연이 말했다. 항상 picture라고 했지요. 하지만 더 중요한 사실은 이 사람들이 cinema는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K정연이 콩고물 휘낭시에를 한입 잘라먹으며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네마를 해야합니다. 비록 제가 가장 사랑하는 영화 10 중에 <스탭 브라더스>가 있지만 말이에요. * 참고. 윌 패럴이 주인공을 맡은 <스탭 브라더스>는 이혼 가정의 두 백인 극우파 망나니가 중산층 속물 좌파로 개종하는 과정을 그린 유사 가족 로맨스로 지금은 주류 좌파 감독으로 변신한 아담 맥케이가 연출했다. 혹시 영화가 궁금한 사람은 보지 마시길… 시네마를 한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일반적으로 시네마는 극장과 영화 산업 전반을 모두 아우르는 용어로 정의된다. 가끔 무비와 차별되는 예술 영화를 지칭하는 어휘로 쓰이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하는 시네마는 그게 아니었고 특히 21세기 한국 영화로 시네마를 수행한다는 건 전혀 다른 문제일 수 있다. 전후 일본에서 활동한 시나리오 작가이자 감독인 하시모토 시노부는 자신의 경험을 담은 책 <복안의 영상> 시작을 일본 최초의 영화주제가 “도쿄행진곡”(1929)으로 시작한다. 시네마를 보시겠습니까, 차를 마시겠습니까. 차라리 오다큐선을 타고 도망가시겠습니까. 변해 가는 신주쿠… <도쿄행진곡>은 기쿠치 간의 장편 소설을 미조구치 겐지가 감독한 것으로(기쿠치 간은 아쿠타가와 상과 나오키 상을 제정한 사람이다), 주제곡의 가사는 프랑스 유학파 출신 상징 시인 사이조 야소가 작사했다. 시네마가 나오는 구절의 가사는 원래 “장발의 마르크스 보이 / 오늘도 붉은 사랑을 안고”였으나 검열을 두려워한 레코드 회사의 요청으로 바꿨다고 한다. 마르크스를 시네마가 대체한 것이다. 그러므로 (비약하자면) 시네마는 단순히 영화 한 편이 아니라 삶의 문제다. 시네마를 하는 것, 시네마를 하지 않는 것 모두 생활을 새롭게 조직한다. 정연씨가 < 나랏말싸미 > 대본을 쓴 것처럼요? K정연의 표정이 잠깐 어두워졌다. 지돈씨, 지돈씨는 그 영화 안 봤잖아요. 어떻게 안 볼 수가 있죠? 내가 그 영화를 극장에서 보지 않은 건 사실이다. 정연씨에게 여러 번 얘기했지만 마음이 아파 볼 수가 없었다. 왜 마음이 아프냐고? 그건 <나랏말싸미> 네이버 평점을 확인하면 알 수 있다… 아무튼 나는 얼마 전 왓챠로 <나랏말싸미>를 봤고 정연씨에게 당당히 얘기할 수 있었다. <나랏말싸미>는… 한국 영화입니다. 조선 시대가 배경이지만 노래하는 장면도 있고 목욕 장면도 있고. K정연은 잊고 있었다는 듯 중얼거렸다. 송강호가 말하죠.. 아픕니다. 아파요… 그 씬 쓰면서 아저씨들이 참 좋아했는데… 우리는 성산초등학교에서 망원 유수지에 이르는 골목을 산책하며 한국 영화에 대해 말하는 것의 곤혹스러움에 대해 대화했고 - K정연은 익명의 트윗을 인용했다 “모든 씨네필은 자국 영화를 싫어한다, 미국의 씨네필만 빼고” – 제3세계의 씨네필들은 결국 자국 영화를 발견할 유무형의 의무 또는 압박을 느낀다, 문학이나 미술이 그렇듯 로컬의 역사와 정체성을 드러내지 않으면 세계 시장에서 먹힐 수 없기 때문에, 또는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하거나 기반이 사라진다고 여기기 때문에 그렇다, 따위의 이야기를 나눴다. 산책이 마지막에 이르렀을즈음, 우리는 우연히 ㅁㅈ출판사의 편집자 h와 마주쳤다. 종종 소식을 주고받는 분으로 감동을 주는 책의 편집자이자 개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우리는 거리에 서서 출간될 책들과 – 알렉산더 클루게, 스베틀라나 보임,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 등등 두근거리는 이름들이 언급됐고 – 사소한 근황을 주고받았다. 두 분은 요즘 뭐하세요? 영상자료원에서 연재를 시작했어요. 아, 그러고보니.. 편집자 h가 말했다. 영화평론가 임재철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나네요. 순간 K정연의 표정이 굳었다. 무슨 말씀을? 편집자 h에 따르면 최근 임재철 선생님은 서교동과 망원동 일대에 출몰하며 지식을 전파 중이었고 K정연도 잠시나마 숙주가 된 적이 있었다. 나도 한번에 불과하지만 임선생님이 주관한 영화 상영회에서 K정연과 함께 장 피에르 고랭의 <Routine Pleasures>를 봤다. 영화가 끝나고 임선생님은 고랭과 아녜스 바르다, 자크 드미에 대한 차마 여기 적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들려줬다… 임 선생님이 언젠가 정연씨를 만난 다음 날 저한테 전화를 걸어 정연씨 얘기를 했어요. 편집자 h가 말했다. 같이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에 금정연과 많은 대화를 나눴다고. 어쩌면 금정연이 자기 후계자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했던가…아닌가… 편집자 h와 헤어지고 난 뒤 나는 K정연에게 물었다. 정연씨 대체 임재철 쌤과 무슨 얘기를 나눈 거예요? K정연이 말했다. 지돈씨.. 그건… (다음회에 어쩌면 계속…) *참고도서 『복안의 영상』(하시모토 시노부, 강태웅 옮김, 소화, 2012) 『존 포드』(태그 갤러거, 안건형, 신범식 옮김, 이모션북스, 2018) 『영화에 관한 질문들』(스티븐 히스, 김소연 옮김, 울력, 2003)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경성극장은 일제강점기 본정 3정목 94번지에 위치했던 대표적인 일본인 극장으로 1921년 8월 개관하여 해방 직후까지 존속한 극장이다. 경성극장은 지금의 충무로 남산스퀘어빌딩 북편, 과거 수좌(壽座)가 있던 자리에 들어섰다. 그 곳은 1907년 이전 설립된 판본좌(坂本座)가 있었던 곳으로 서울의 일본인 극장 역사에 빼놓을 수 없는 유서 깊은 곳이다. 경성극장의 전신이자 판본좌의 후신인 수좌는 1908년 건립되었고 1921년 그 자리에 경성극장(京城劇場)이 신축되었다. 경성극장의 설립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으로 인한 호황으로 주식회사의 형태의 대형 극장이 우후죽순 격으로 설립되던 상황에서 이루어 진 것이다. 경성의 일본인 자본가들은 본정 2정목에 위치한 수좌(壽座)를 신축하기로 하고 이를 위해 주식회사 경성극장을 설립한다. 1919년 10월 기존의 수좌는 헐려 원산으로 이전되었고, 1921년 8월 가부키나 연극, 무용과 같은 무대공연을 할 수 있는 경성극장이 만들어졌다. 경성극장의 주주와 경영진은 경성의 주요 실업인들이 주축이 되었다. 경성극장 제4기 대차대조표에 표기된 중역의 이름을 살펴보면, 취체역 회장 고조우 간도(古城菅堂), 전무취체역 무라카미 코지로(村上幸次郞), 취체역 구기모토 도지로(釘本藤次郞), 카지와라 수에타로(梶原末太郞), 야자와 긴지로(矢澤近次郞), 사노 히코조(佐野彦藏), 고가와 카츠헤이(小川勝平) 감사역에는 이케다 쵸베이(池田長兵衛), 미타 마사지로(三田政治郞), 시이키 우노스케(椎木宇之助), 세키 시게타로(關繁太郞), 야마자키 시카조(山崎鹿藏)이었다. 이중 회장 고조우 간도는 일본인 의사이자 실업가로 조선상업은행의 대주주 중 한명이었으며 전무 무라카미 코지로는 무라카미 텐신(村上天眞)이라는 이름을 쓰던 무라카미 사진관의 주인이었다. 취체역 중 한명인 구기모토 도지로는 조선의 철물왕으로 불리던 인물이었고 야자와 지로는 동양생명보험회사의 경성지점장이었다. 이처럼 경성극장의 주요 인물들은 경성의 대표적인 일본인 실업가들이 망라되었다. 경성극장에서 일본의 텐카츠(天勝)나 텐와(天華)와 같은 유명한 연예단이나 연극단, 가부키단이 경성에 와서 공연을 했다. 특히 시즈마 고지로(靜間小次郞)는 이기세(李基世)가 그 문하에 있었을 정도로 일본 연극계의 지도자 중 한명이었다. 이와 같은 일본 연극계의 유명 인물이 이끄는 단체들이 경성에서 공연 할 때에는 경성극장이 중요한 공연장으로 활용되었다. 경성의 대표적 흥행 장소였던 경성극장은 1929년 2월 13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되었다. 당일 화재는 오전 5시 40분경 경성극장에서 발화되었고 6시 30분경 진화되었는데 당시 바람이 심하여 극장 내 집기들을 꺼내지 못한 채 극장이 전소하고 말았다. 이로 인해 경성극장은 극장가격 12만5천원, 집기 2만 여원 도합 15만 여원의 피해를 입었다. 화재 발생 직후 경성부에서는 불탄 그 자리에 극장을 재건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하면서 주주의 일부가 주식회사의 해산을 주장했다. 이때 일본국수회 경성지부장이자 야쿠자 두목 와케지마 슈지로(分島周次郞)가 주주총회를 요구하며 1.극장신축, 2.다른 극장(중앙관)과의 합병, 3.해산 중 하나를 선택하여 결론을 내자고 주장했다. 1930년 2월 27일 열린 경성극장 주주총회에서 주주 18인이 불탄 옛 자리에 10만 2천 여원 예산으로 극장을 재건하기로 결정하면서 새로운 극장의 설립이 추진된다. 1931년 9월, 과거 경성극장이 있던 자리에 신축된 극장의 이름을 경성연예관으로 정하고 와케지마 슈지로의 분도흥행부에서 극장운영을 맡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와케지마는 흥행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분도흥행부(分島興行部)를 대일본흥업회사(大日本興業會社)로 확대한다. 특히 와케지마는 영화제작을 추진하기 위해 원산프로덕션의 도야마 미츠루(遠山滿)를 끌어들였는데 당시 도야마는 경성운동장 근처에 원산프로덕션 경성촬영소를 설립하고 영화촬영을 시작했다. 원산프로덕션에는 조선의 유명 영화인인 나운규가 합류하여 영화 제작에 참여하고 있었다. [자료] 원산프로덕션 경성촬영소 개소식(《조선신문》, 1930.12.14.) 설립 초기 대일본흥업회사는 사장 와케지마 슈지로, 전무취체역 나루키요 다케마쓰(成淸竹松), 취체역에는 도야마 미츠루, 사토 카츠타(佐藤勝太)가 맡았다. 대일본흥업회사 원산프로덕션에서는 나운규가 출연한 <금강한>(1931)을 비롯해 <남편은 경비대로>(1931), <경성 온 퍼레이드>(1931)와 같은 영화가 제작되었다. 하지만 대일본흥업회사의 영화제작 활동은 평탄치 않았다. 도야마 미츠루가 회사를 탈퇴하자 영화제작은 한동안 소강상태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 쇼치쿠에서 활약하던 야마자키 유키히코(山崎行彦)가 합류하고 무용가 배구자(裵龜子)의 극장 설립을 돕고 있던 이필우가 합류하면서 대일본흥업회사는 경성극장 뒤편에 경성촬영소를 짓고 영화촬영을 재개하게 된다. 이로써 와케지마의 경성촬영소는 제2기를 시작한다. 1934년부터 1937년 사이에 경성촬영소에서는 3편의 무성영화와 6편의 토키영화가 제작되었다. 이중에는 조선 최초의 토키영화인 <춘향전>(1935)과 나운규의 마지막 작품인 <오몽녀>(1937)가 포함되어 있다. 경성의 대표적인 연극장으로 운영되던 경성연예관은 1935년 9월 3일 개축되었다. 종래의 기석(寄席) 형태의 극장에서 좌석을 확대하여 정원을 늘리고 끽연실, 휴게실, 화장실 등을 정비하는 등 극장 안팎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이름도 종래의 경성극장으로 되돌아갔다. 경성극장의 운영주 와케지마 슈지로는 1937년 명동 중국영사관 부지를 인수하여 극장을 세울 계획을 세우지만 실패한다. 와케지마는 경성촬영소를 고려영화협회에 매각하고 1939년 봄 강원도 철원의 철원극장을 인수하여 근거지를 철원으로 옮기게 된다. 이에 따라 1939년 3월 1일부터 경성극장의 운영권은 와케지마에서 도쿄 후지흥행부의 마쓰오 구니조(松尾國三)에게 넘어가게 된다. [자료] 상설영화관으로 바뀐 경성극장( 『キネマ旬報』(제57호), 1942.08.21) 새로운 운영자들은 경성극장을 영화관으로 개축하였다. 1939년 9월 개축공사가 완료되고 상설영화관으로 인가를 얻게 되자 경성극장은 10월부터 신코키네마의 조선봉절관으로 운영된다. 신코키네마 봉절관이던 경성극장은 영화법 제정과 함께 영화산업의 통폐합으로 1942년 신코키네마가 해산되어 다이에(大映)로 통합되자 다이에 직영관으로 운영되었다. 당시 영화순보의 기록을 토대로 살펴보면 1943년 현재 경성극장은 흥행주는 다이에, 지배인은 가와무라 타다시(川村正)였으며 총 750석의 객석을 가지고 있었다. 경성극장은 해방 후 이름을 서울극장으로 바꾸었으며 적산관리인은 강상률이었다. 하지만 국제극장이 시공관으로 바뀌게 되자 1947년 12월 전 국제극장 관리인이던 김양성이 강상률을 대신하여 서울극장의 적산관리인이 된다. 김양성이 운영하던 서울극장은 6.25전쟁 중 파괴되어 재건되지 못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김태현,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김계자,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1』, 도서출판 문, 2012.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한상언, 『조선영화의 탄생』, 박이정, 2018. * [사진](상단) 1921년 설립된 경성극장 [자료] 매일신보 1929.02.14. 십삼일 조(朝) 본정(本町)에 대화(大火), 폭풍에 불길 날려, 경성극장 소실! 화재원인은 실화인모양, 전부 사호(四戶) 사동(四棟) 전소(全燒) 작13일 5시35분에 본정3정목 경성극장 2층에서 실화(목하 조사 중)로 불이 일어나 때마침 불어오는 맹렬한 폭풍에 불길은 기세를 얻어 동극장 360평 3층 1동을 전소하고 이웃집 4동 4호를 회신한 후 동6시40분경에 진화하였다. 손해 십여만, 사상( 死傷) 도 있다, 소방조원의 결사적 활동, 마치 활동사진 같이 이번 불은 금년 이래 제일 큰 화재로 그 피해금액은 십여만원의 거액에 달하며 더욱이 福田소방조원이 참사한 희생까지 있었고 이 외에도 동극장의 하인 崔順吉의 일개월 가량의 화상과 소방조원들의 부상도 다수하였다. 화재의 당소는 상점, 회사, 요리점 등의 宏大한 건물이 즐비하야 남부 일대의 시민의 소동은 그 극에 달하였고 소방조원의 연소를 방어하는 활동 등 실로 전란의 한 당면을 방불케 하였다. 보험은 7만원 금번 재난을 당한 경성극장은 주식제로 古城사장, 村上전무의 손으로 경영하여 오든 터인데, 동극장은 일직 7만원의 화재보험이 있었고 동일 10시경부터 본정 3정목에서 중역회의를 개최하고 선후책을 토의하는 중이더라. [자료] 동아일보 1927.05.09. 경극(京劇)에 불경사건(不敬事件), 천황폐하 어진으로 흥행타 임장한 경관에게 발각되어, 배우 6명 본서에 인치(引致) 동경에서도 이름 있는 현대극단 원산만(遠山滿) 일행 47명이 재작 칠일 밤부터 시내 수정(壽町) 경성극장(京城劇場)에서 연행을 하게 되었던바 동 아홉시 경에 둘째로 상연한 현대극 피묻은 군도(血染軍刀) 제3장에 이르러서 황실 존엄에 대한 불경한 거조가 있다고 하야 돌연히 임장하였든 소관 본정서 횡산(橫山) 경부보가 중지를 명령하는 동시에 극단장 원산만이라는 본명 소원록(小原綠)(35) 등 배우 영정복(永井福)(34) 무대감독 파가철조(破家哲助)와 및 동 극장 막짓는 사람 길미말태랑(吉尾末太郞)(49)과 원산극단측 막짓는 사람 인여정칠(人與淸七)(51)과 옥정자삼(玉井滋三)(34) 등 여섯명을 본정서로 데려다가 검속한 후 동극단의 경성흥행을 중지케 한 사실이 있어서 일시는 대 혼잡을 이루었다는데 그 내용은 전기 각본은 니항(泥港)에서 전사한 성야소좌(星野 少佐)에 대한 연극인대 제3장은 “성야가의 안방”이라고 한 장면인바 성야 소좌가 전사한지 일 년 제일을 당하야 그 미망인 추자(未亡人 秋子)가 성야 소좌의 사진을 불단에 놓고 제를 지내고자 할 즈음에 그와 비밀한 관계가 있는 등전광(藤田光)이라는 남자가 들어와서 그 사진을 깨처버리고자 하며 불의의 짓을 하는 마당인데 그 불단에 올려놓은 사진을 성야 소좌의 사진 대신 모 일문신문 3월 5일부 부록인 천황폐하(天皇陛下)의 어진을 모시어 놓고 그와 같이 연극을 행한 것이라더라. [자료] 동아일보 1939.09.29. 신흥 봉절관(封切館)으로 / 경성극장 개관 개축공사가 완성된 경성극장은 그간 신청 중이던 상설영화관으로서 인가도 되겠음으로 1일부터 4일까지 동보단원(東寶劇團) 일행 100여명의 출연으로 개관. 5일부터 신흥키네마 조선 제일 봉절관으로 본격적 흥행에 들어설 모양이다. 이에 앞선 30일은 피로초대관극회(披露招待觀劇會)를 개최한다는 바 이로써 경성에도 송죽의 명치좌, 동보의 약초극장, 일활의 황금좌와 함께 신흥의 경성극장이 서로 꽃다운 홍업전을 연출하게 되었다.
영화에서 사라진 위대한 전통 중 하나는 변사(辯士)일 것이다. 물론 인간문화재처럼 기예를 갖추고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그건 아주 특별한 자리에서만 볼 수 있는 진귀한 기회가 되어가고 있다. 토키영화는 그들을 무대에서 쫓아냈고 그들을 위한 새로운 영화는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고 있다. 나는 그걸 늘 안타까워한다. 하지만 그건 슬프게도 일제강점하 식민지의 유산이기도 하다. 영화와 함께 일본에서 건너온 변사는 일본영화의 발명 중 하나이다. 일본에서는 변사라는 말 대신 가쓰벤(活辯)이라고 불렀다. 일본에서 가쓰벤이 언제 나타났는지 찾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가쓰벤은 그 전통이 17세기 에도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이다. 그때 그림과 이야기를 하나의 화폭에 담는 에도키(繪解)의 전통이 나타났고(전문가들의 설명에 따르면 여기서 일본 불교화의 전통에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런 다음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에도키를 읽어주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읽기만 했지만 점점 더 거기에 감정을 담고 심지어 자기가 새로운 내용을 덧붙이기까지 했다. 에도키가 곧장 영화로 넘어온 것은 아니다. 분라쿠 인형극이 진행될 때 그 곁에 사미센 연주자들과 함께 해설자들이 앉았다. 그들은 단지 인형의 대사만을 낭송한 것이 아니라 때로는 상황을 설명하기도 했다. 여러 명의 해설자가 앉기도 했지만 진정한 대가는 혼자서 여러 인형의 목소리를 번갈아가면서 낭송했다. 이 전통의 섬세한 구분이 좀 더 필요하지만 내가 다시 만나고 싶은 영화사의 순간은 가쓰벤의 고고학이 아니다. 어쩌면 활동사진을 구경하러 온 20세기 초의 일본 관객들에게 가쓰벤의 존재는 너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뤼미에르 형제의 영화가 일본에서 상영될 때부터 가쓰벤은 무대에 함께 올라왔다. 심지어 일부 극장에서는 영화가 시작하기 전에 입담 좋은 가쓰벤들이 일종의 여흥으로 재담을 늘어놓기까지 했다. 게다가 가쓰벤의 존재는 유럽이나 미국에서 수입한 영화의 자막을 구태여 번역할 필요 없게 만들면서 경제적인 기능도 수행했다. 영화가 점점 대중의 관심을 모으자 점점 더 많은 영화가 상영되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점점 더 많은 가쓰벤이 서로 경쟁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일부 열렬한 관객들은 같은 영화를 다른 가쓰벤의 공연으로 보기 위해 구태여 찾아가기도 했다. 일본 영화사는 위대한 가쓰벤들의 명단을 갖고 있다. 그중에서도 최고의 공연(!)은 1912년 요코다상회(橫田商會)에서 제작한 <곤자키야샤(金色夜叉)>를 혼자서 낭송한 가쓰벤 쓰치야 쇼토(土屋松濤)의 무대라는 데 일본영화사 연구자들은 동의하고 있다. <곤자키야사>는 말 그대로 ‘돈 귀신’이라는 뜻인데, 오자키 고요가 요미우리신문에 1897년 1월 1일부터 1902년 5월 11일까지 연재한 대중소설이 원작이다. 이 소설은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으며 당시 식민지 조선에도 조중환이 번안해 「장한몽」으로 소개했다. 좀 더 간단한 설명이 있다. 우리에게는 ‘이수일과 심순애’로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이수일이 사랑하는 여인 심순애가 돈 많은 김중배에게 시집을 가자 “김중배의 다이야 반지가 그렇게도 좋더냐”라고 한 다음 고리대금업자로 변신해 복수하지만 결국 비극으로 끝나는 전형적인 신파. <곤자키야샤>를 상영하는 극장에서 가쓰벤 쓰치야 쇼토는 “칠색음(七色音)이라는 그의 명성에 걸맞게 인물들 사이를 자유자재로 오가면서 그 감미로운 음성으로 관객의 넋을 빼놓다가 하지마 간이치(말하자면 이수일)가 비통하게 죽어가는 연인 시가사와 미야(말하자면 심순애)에게 후회를 고백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객석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라는 절찬을 받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쓰치야 쇼토의 공연을 담은 기록 필름은 남아 있지 않다. 토키영화의 등장으로 가쓰벤은 설 자리를 잃었지만 아직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여성 가쓰벤 아소코야타(麻生子八咫, 사진2)와 그의 아버지 야소야타 (麻生八咫, 사진1) 의 공연 모습 일본에서 가쓰벤은 점점 더 많은 인기를 끌었으며 첫 번째 토키영화 < 재즈싱어 The Jazz Singer >(앨런 크로슬랜드)가 미국에 등장한 1927년에는 (공식적으로 등록된) 가쓰벤이 6,818명이었며, 그중 180명이 여성 가쓰벤이었다고 한다. 영화는 계속해서 새로운 테크놀로지를 발명하면서 한편으로 그 자신의 역사를 살해했다. 영화사의 순간들은 언제나 그렇게 섬광처럼 지나갔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