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수같은 사나이
- 감독
- 끌로드 샤브롤
- 제작년도
- 1969
- 출연
- 미셸 뒤쇼수아, 장 안느, 카로린 셀리에
< 그때 그사람들 >(2004)은 남자들의 이야기이다. 1979년 10월 26일, 궁정동의 밤을 소재로 한 이 가상 역사극은 절대권력을 구가하던 늙은 독재자와 그의 충직한 수족들, 저들의 카르텔에서 배제된 험악한 야수들의 쟁투를 블랙코미디의 작풍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남자들의 아귀다툼을 흥미로운 풍자극으로 전환하는 것은 저들의 틈새에 끼어있던 여성들의 몫이다. 이 영화의 여성 캐릭터들은 VIP를 위해 일신(一身)을 단장하고 순번을 기다리는 비키니 걸들이거나 거간꾼 노릇을 하는 마담 뚜, 중앙정보부 비밀 연회의 악사로 흥을 돋우는 가수 등 주변적인 역할을 맡는다. 그러나 사소한 배역과는 별개로 그들의 진가는 텍스트를 운위하는 또 다른 기능에서 찾을 수 있다. <그때 그사람들>의 플롯은 10.26의 시작과 끝을 나레이터(화자)의 목소리에 실어 전달한다. 문학적인 개념으로 치자면 3인칭 화자의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으로 볼 수 있는 간접 전술이 스토리를 주재한다고 볼 수 있다.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은 이 영화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는 형식적 장치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보이스오버의 통념적인 용례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영화적 담화에서 보이스오버는 일반적으로 친밀감을 주거나 대화나 이미지를 통해 나타낼 수 없는 정보들을 설명하는 역할을 한다. 다른 한편으로 보이스오버는 언어 코드와 시각적 코드의 결합을 통해 복잡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 보이스오버는 언어적 의사소통 수준과 시각적 의사소통 수준 사이의 인터페이스를 제공함으로써 시청각 기호들에 대한 더 풍부한 이해를 돕는다. <그때 그사람들>에서 임상수는 스토리의 여러 측면들을 해설함으로써 그 흐름과 전개를 조력하는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의 일반적인 함의에 도전한다. 이 도전의 토대는 내러티브 안에서 주변부에 머무는 여성들이 서사의 바깥에서 화자 역할을 하도록 함으로써 가능해진다. 한편으로 스토리로부터 여성의 관점을 분리(나레이터)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표현 전략을 통해 한국인들의 기억 속에 잠재해있는 이 정치적 사변의 직, 간접적 가담자들의 정체성을 투영(작중인물)하는 중첩의 기능을 부여한 것이다. 이러한 보이스오버의 활용은 내러티브의 주체와 내레이션의 주체를 이중화한다. 전자는 스토리 사건에 참여하여 그것을 조정하는 반면, 후자는 내러티브를 자율적으로 통제하고 주관하는 더 강력한 저자, 더 큰 주체를 표시한다. 비(非) 동기화된 보이스오버 나레이션은 화면 밖의 스토리텔러에게 내러티브 권위를 부여한다. 그것은 창조주로서 신뢰를 가진 의인화된 영화의 목소리가 된다. 이러한 방식으로 보이스오버는 <그때 그사람들>의 의미 맥락을 결정하는 중요한 구성 요소가 된다. 임상수가 설계한 내러티브에 프레임을 설정하고, 윤리적인 기준을 제공하며, 특유의 씁쓰레한 풍자를 담당하는 목소리는 전적으로 여성들의 것이다. 이렇게 계산된 플로팅 컨셉트에 따라 나레이터의 역할을 떠맡은 것은 김윤아와 윤여정이다. 전술한 바와 같이 두 나레이터는 화자이자 작중 인물로 이중적으로 기능한다. 이중적으로 기능한다고 함은, 임상수의 서술 전략이 관객들로 하여금 캐릭터와 스토리텔러라는 양자의 기능을 견주어보도록 부추긴다는 것을 의미한다. 밴드 자우림의 보컬이기도 한 김윤아는 프롤로그의 나레이터이자 궁정동 안가 만찬에 초청되어 엔카를 부르는 가수로 등장한다. 프롤로그에 나오는 김윤아의 보이스오버를 들어보자. “박정희, 그가 군사 쿠데타 이후 18년째 정권을 유지해오던 1979년 가을, 부산과 마산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의 뜻밖에 대규모 시위가 있었습니다. 폭압적인 정권에 저항하며 민주화를 요구했지만, 박정희 정권은 군대를 동원해 이를 간단히 진압해 버렸습니다. 질식할 것만 같은 거짓 평온이 흐르고, 시민들은 한껏 웅크리고 살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뜬금없게도, 박정희는 총에 맞습니다.” 김윤아의 음성 해설은 스토리의 배경을 소개한다. 그는 이후 에피소드들에서 자신이 등장한 것을 예고하는 류의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나레이션 행위를 통해 스토리의 서막을 연다. 구연동화의 도입부를 암송하는 것 같은 어조는 이 이야기의 역사적 지위, 박정희의 생애를 먼 옛날의 신화적 서사로 기억하고 있는 한국인들의 의식을 반영한다. 따라서 김윤아가 화자이자 등장인물로서 스토리의 안과 바깥의 경계에 있는 특권적인 나레이터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는 디제시스 안의 사건에 참여하기 때문에 다른 등장인물들과 동일한 방식으로 권위에 있어서 제약을 받는 것처럼 보인다. 즉, 김윤아는 사태의 전말에 대해 초월적인 지위를 갖지 않는다. 김윤아보다 높은 자리에서 이야기의 핵심을 관통하면서 그 위상을 결정하는 인물은 윤여정이다. 윤여정은 김윤아와 마찬가지로 1인 2역을 맡았다. 그는 모든 사태를 관망하는 자이다. 프롤로그에서 윤여정은 여성 편력이 극심한 어르신(박정희)에게 자신의 딸을 맡겼으나 단물만 빨리고 용도폐기당한 상황에 항의하는 어느 연예인의 모친을 연기한다. 색정광 권력자의 방탕을 은근히 조롱하는 이 철없는 엄마는 중앙정보부의 채홍사 노릇을 하는 주 과장(한석규)에게 육두문자를 섞은 모욕을 당하고 12차선 도로 한복판에 나뒹군다. 뇌리에서 사라진 윤여정의 목소리를 다시 듣게 되는 것은 영화가 끝나기 10여 분 전이다. 국가 원수 암살이라는 중대한 사건이 우스꽝스러운 소동극으로 마무리된 뒤 이 계획에 가담한 사람들의 후일담을 소개하는 서술 화자로 윤여정의 목소리가 나온다. 절대권력의 서슬 앞에서 입을 놀리다 굴욕을 당한 프롤로그의 철없는 엄마와 다르게 에필로그의 나레이터에게서는 이 모든 사태를 관장하는 전지적 화자의 위엄이 있다. 서사와 주제, 태도, 세계관을 아우르는 그녀의 초월적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관객들은 비로소 심수봉의 노래에서 빌어 온 ‘그때 그사람들’이라는 표제의 뉘앙스를 분명히 짐작할 수 있다. 그 일부를 옮겨보자. 검은색 가림 유리막이 처진 중앙정보부의 밀실 너머에서 김 부장(백윤식)이 치도곤을 당하는 꼴을 바라보면서 검은 선글라스의 국군 장교(전두환으로 추정된다)가 내뱉는 대사에 이어 윤여정의 나레이션이 갑자기 끼어든다. “어때요, 저 사람. 혁명적 민주투사로 보입니까? 아니면 과대망상에 빠진 돈키호테였을까요?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은 저 사내의 법정 최후진술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는 설이 있습니다. 글쎄, 관심 있으신 분은 찾아서 읽어보시도록.” 이 나레이션에서 화자의 존재와 시각은 분명해진다. 어리석은 사내들의 난장극을 목격하고 종국적으로 살아남아 이를 증거하는 것은 여성들의 몫이다. 저개발 시대의 국가주의를 논평하는 화자로서 윤여정은 권력의 무망함과 덧없음을 조롱하는 자의 위치로 이동한다. <그때 그사람들>은 암살자의 심리를 파고드는 드라마가 아니요, 독재자의 죽음을 묵상하는 성찰극은 더더욱 아니다. 1979년 10월 26일의 궁정동 스토리에는 야수의 마음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았다고 일갈한 용자(勇者)도 있었으나 도대체 무슨 일이 진행되는지도 알지 못한 채 상사의 지시에 따라 좌표를 잃고 우왕좌왕하였던 경호원들, 권력투쟁의 뒤안길에서 소모품처럼 쓰인 필부들, 역사의 현장을 목격한 뒤 기나긴 침묵에 빠진 커튼 뒤의 사람들, 그리고 이 모든 사정에 눈이 멀었던 다수의 대중도 있었다. 여성들의 보이스오버는 대사 외적 수준에 대한 그녀들의 관점을 중심으로 쓰였다. 그들은 말하는 사람이며 하나의 사태 주변에 모인 여러 개의 역사적 관점들을 나레이션 아래로 통합하는 초월적 자아이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것은 말의 스타일이다. 저들은 경어체를 쓰고, 보이지 않는 청중들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듯이 말한다. 여성의 목소리는 회심의 거사라는 계획이 무색하리만치 밤의 만찬장을 엉망진창으로 만든 남자들의 딱한 처지를 조소하는 주체의 위치를 설정하고 있다. 동시에 나레이션의 요구에 따라 역사를 재구성해야 하는 상상적 관객으로서 우리들이 있어야 할 자리도 바로 그곳이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한국에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나 실존 인물을 모델로 한 영화를 만드는 일은 쉽지 않다. 특히 한 인간의 업적과 과오, 명암이 고루 담긴 사실적 전기(傳記) 영화는 더욱 만들기 어려운 것 같다. 예전에 한 원로 가수의 전기 영화를 만들면 어떨까 싶어 몇몇 제작자와 선배들에게 조언을 구한 적 있다. 기획은 괜찮지만 내가 강조한 몇 개 에피소드 때문에 모두 힘들 거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분이 직접 TV에 나와 말씀하신 일화들인데요?” 하지만 당사자보단 그 일과 관련한 다른 이들의 반발이 거센 경우가 많다. 귀신같이 알고서 딴지를 걸어온다고 한다. 피해당사자보다 오히려 가해자 쪽에서 명예 훼손을 문제 삼고 나온다. 조용히 잘 살고 있는데 왜 옛날 일을 다시 끄집어내느냐? 내 자식들이 봐도 괜찮은 영화를 만들 수 있느냐? 이런 입장을 가진 모두와 만나서 허락을 구하는 일은 힘들고 괴롭다. TV의 르포 프로만 봐도, 인터뷰만 요청했는데 경찰부터 부르는 장면을 우리는 자주 본다. 그렇다고 문제의 에피소드를 빼려니, 이 인물을 묘사하고 이해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점의 이야기를 제대로 전달할 수가 없다. “그럼 이 분의 전기를 만들 이유가 없는데요?”, “그냥 픽션으로 만들어. 그게 편해.” 실화를 모티브로 한 범죄물이 주로 이런 방식을 택한다. 그러나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가명의 가해자와 익명의 피해자가 나온다고 근원의 현실이 휘발하지 않는다. 피해자의 고통이 전시에 그치거나, 2차 가해에 가까운 과도한 표현을 하거나, 연출의 시선이 가해자의 시점과 동일시되어 피해자에게서 원인을 찾는 우를 범할 위험성은 항상 존재한다. 그리고 관객들은 극장을 나오면서 꼭 모티브가 된 사건을 검색해본다. 영화에서 현실성과 사실주의를 담보하려는 노력은 너무나 중요하다. 이것은 물론 표현의 자유이지만, 또한 윤리의 문제다. 내가 오로지 남자들만 나와서 치받고 죽이는 완전 픽션을 볼 때 좀 더 안심하는 이유가 있다. 영화는 본질적으로 현실을 모사(模寫)하는 매체이기에 특별히 민감하게 현실과 선을 긋는다. 그래서 외국 영화의 엔드 크레딧 말미에는 ‘This is a work of Fiction. 이 작품에서 묘사된 이야기, 모든 이름, 캐릭터 및 사건은 허구적인 창작입니다…’로 시작하는 문구가 꼭 들어간다. ‘허구의 면책’을 명시한 조항은 즉 과거에 있었던 소송의 결과다. 러시아의 괴승 라스푸틴 암살 사건을 영화화한 MGM의 1932년 영화 <Rasputin and the Empress>가 고소를 당한 이후로 할리우드 영화에 이와 같은 문구가 들어가기 시작한 것이다. 우리 역시 언젠가부터 비슷한 문구를 넣고 있다. ‘…만일 실제와 같은 경우가 있더라도 이는 우연에 의한 것입니다.’ 개인과 단체의 프라이버시와 명예 훼손을 피하다보니, 한국 영화에선 존재하는 고유한 지명조차 없는 지명을 만들어 대체하는 경우가 잦아졌다. 땅값이 떨어진다고 지역 주민이 반발한다는데, 의외로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국 영화 속에서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상한 지역을 자주 접한다. 예민한 관객에겐 가짜 지명이 꽤나 신경 쓰인다. 2시간 동안은 이 픽션이 현실이라는 착각에 온전히 빠져들어야 하는데 적잖은 방해가 되는 것이다. 시나리오를 쓰는 작가 입장에선, 현실에 없는 지명을 지어내는 순간 힘이 빠지는 느낌을 받는다. 실제 한국사회 같은 핍진한 작품을 쓰려 했는데, 대신 어떤 한국적인 총체의 원더랜드를 그리는 느낌이랄까. 그래서 가끔 엉뚱한 상상도 해본다. 차라리 한국 영화용 지명을 미리 정해서 영화사나 작품별로 공유해 쓰면 어떨까? 가령 상남자 픽쳐스라는 제작사에서 만드는 모든 남성폭력영화는 ‘한남시’를 배경으로 한다던가. 그럼 굳이 ‘유니버스’를 따로 만들려고 고민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물론 지금 나는 농담을 하는 중이다. 한국 영화 전체를 하나의 유니버스로 받아들여도 상관없을지 모른다. 한국 영화는 왜, 이른바 “다이내믹”한가? 한국이 다이내믹하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별의별 일이 다 일어나는 한국의 근대사는 영화화해서 보고픈 온갖 사건과 인물들로 가득하다. 이 다이내믹 코리아 유니버스의 세계관을 뒤흔들고 재정립한 몇 차례 이벤트가 있었고, 그 중 하나가 영화와 드라마 등을 통해 여러 번 영상화가 이루어진 10.26이다. 1979년 10월 26일, 종신 집권에 함몰해있던 독재자가 야심한 밤 별채에 여가수와 모델을 불러다 놓고 최측근과 술 마시며 놀다가 정보기관장이 쏜 총에 맞아 죽었다. ‘오직 한 사람을 위한 시대’였던 유신이 멱살 잡아 끌어내려지듯 막을 내렸으나 민주주의 대신 신군부라는 새로운 도둑들이 나타나 또 다른 유혈을 불러왔다. 그 잔재와 상처는 지금도 남아 현재진행형이다. 유신의 망령까지 오래 남아서, 그 부왕과 영애를 신격화한 추종자들 세력도 여전히 건재하다. 누구나 아는 내용이지만 정확한 내막은 아무도 모른다. 궁정동 안가는 독재자의 권력을 국가와 괴리시켜놓은 은밀하고 초현실적인 공간이었다. 그날 밤 안에서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나? 경호실장과 충성 경쟁을 하던 2인자이자 “여자를 남자로 만드는 일 말고는” 못 하는 게 없었다고 할 만큼 서슬 퍼런 권력을 휘두르던 중앙정보부의 우두머리가 왜 그날 갑자기 “야수의 심정으로 유신의 심장을” 쏘게 되었을까? 거사는 사전에 계획되었나, 순간의 충동이었나? 그는 “혁명적 민주 투사”였을까, “과대망상에 빠진 돈키호테”였을까? 사건의 맥락 혹은 복선을 찾다 보면 또 다른 미스터리만 만날 뿐이다. 토사구팽 당한 뒤 정권을 저격한 회고록으로 살 길을 노리던 이전 정보부장은 시체도 찾질 못했다. 프랑스 파리에서 행방불명된 그는 양계장 모이가 되었을까, 외교행낭 컨테이너에 실려와 청와대 지하 벙커 사격장의 표적이 되었을까? 신상옥 감독의 < 증발 >(1994)은 “이 영화는 실제로 있었던 일을 모델로 하였지만, 어디까지나 픽션이며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미리 밝혀 두는 바이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이 영화는 5.16 군사정변부터 10.26까지 18년의 시간을 밀실에 갇힌 사내들의 히스테리와 궁정동 여인들의 비소로 채운, 유신의 형이상학적 다이제스트다. 만약 한국판 <살로 소돔의 120일>을 찍는다면 바로 이 영화 같을지 모른다. 당시 독재자 역은 (누구도 맡으려는 한국 배우가 없었다는 설이 있다) 일본계 미국 배우 조지 타케이(초대 <스타트렉>의 ‘술루’ 역할로 유명하다)가 이강식 성우의 목소리로 연기한다. 주로 미국에서 찍은 걸로 알려져 있고, 배우의 동시 녹음과 성우의 후시 더빙이 알 수 없는 기준으로 뒤섞이며, 고증과 상관없이 현대 배경으로 옮겨 오프닝부터 곳곳에 80년대 시위 현장을 찍은 실제 기록 영상을 삽입한 이 영화는 아시아 어딘가에 있을 어느 정신 나간 독재정권을 그린 SF처럼 보일 지경이다. 그러니까 조지 타케이가 극중에 그냥 영어나 일본어로 말해도 영화를 보는데 있어 위화감은 전혀 없었을 것 같다. 실제로 감독은 애초 이 영화의 배경을 남미의 가상 독재국가로 옮겨 찍을 계획이었다. 주연으로 진 핵크만을 내정했었다는 이야기가 옛날 뉴스 기록에 남아있다. 파리에서 붙잡혀 컨테이너에 실려 한국으로 온 전 국가보안부 장관( 김희라 )은 이 영화의 화자이자 주인공이다. 그가 “혁명의 배신자”로서 독재자의 뜻에 반기를 든 계기는 과거 자신의 공작으로 파멸시킨 교수의 딸( 강리나 )과 우연한 조우 때문이다. 그는 그녀가 당하는 끔찍한 폭력을 밀실의 모니터로 지켜보았다. 얄팍한 죄의식을 되갚아주기 위해 놓은 이중의 덫은 황당한 비약이지만, 파리에서 김희라가 요원들에게 붙잡히는 순간에 강리나의 피아노 연주는 인상 깊은 장면이다. 마지막으로 “역사의 십자가”를 지겠다는 독재자 면전에 “누가 당신더러 십자가를 져달라고 했습니까?” 일갈한 친구의 처형을 목격한 현 보안부 장관( 신성일 )은 총구를 돌릴 대상이 누구인지 깨닫는다. 10.26을 다룬 작품 중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영화일 < 그때 그사람들 >(2005)은 “이 영화는 역사의 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세부사항과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는 모두 픽션입니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개인적으로 임상수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는 물론이고, 한국영화 르네상스 시기에 나온 영화들 중 단일 작품의 완성도에 있어 정점에 도달한 영화라는 생각이다. 이 블랙 코미디는 이 글에서 다루는 10.26 소재의 작품 중 가장 희극적이지만, 의외로 객관적이고, 아마도 사실에 가장 근접한 해석이란 느낌을 준다. 무엇보다도, 한국 영화는 이 작품 이후 정치적인 소재를 놓고서 대범하게 낄낄거려본 적이 없다. 대책 없이 저질러진 거사는 예정된 실패를 향한다. 영화는 권력자와 2인자들 사이 암투보다는 그들 바로 아래의 하수인과 관련자들에게 집중한다. 엄한 시간 엄한 장소에 있었던 실무자들과 두 여인의 비애가 있다. 압권은 오프닝에서 “어르신”의 성은을 입은 딸의 몸값을 셈하러 왔던 극중 명칭 ‘철없는 엄마( 윤여정 )’의 내레이션으로 마무리되는 에필로그 속 그들의 말로다. 저 철딱서니 없는 작자들이 한 짓들 보라는 식의 말투로, 관객의 입장에서 이 황당무계한 사건에 대해 진심으로 실소한다. 취조실에서 얻어맞는 정보부장에겐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담은 저 사내의 법정 최후 진술은 감동적이기까지 하다는 설이 있습니다. 글쎄, 관심 있는 분은 찾아서 읽어보시도록!” 이렇게 말하고 끝이다. 어르신의 실제 장례 영상이 나오는 엔드 크레딧에서 오열하는 시민들까지 보면 관객의 실소는 웃다 못해 울고 싶은 기분으로 변한다. 공교롭게도 현 시점에서 코로나 직전의 마지막 극장 흥행작이 되어버린 < 남산의 부장들 >( 우민호 , 2019)은 앞의 영화에서 관심 있거든 찾아보라고 한 그의 진술을 마지막 장면에 실제 음성으로 들려준다. 먼저 나는 이 영화가 김충식의 논픽션이 바탕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을 실명으로 하지 않은 것에 실망했다. 이럴 거면 원작을 굳이 내세울 필요가 있었을까? 누구나 아는 그들의 이름을 이 시대에까지 볼드모트 취급을 해줘야 하나? 글 서두에서 장황하게 떠든 만큼, 충분히 이해하지만 아쉬운 대목이었다. 겁쟁이들은 용감한 자가 먼저 간 길을 따라 가고 싶으니까. “이 영화는 1979년 대통령 암살 사건을 바탕으로 사건이 일어나기 전 40일을 재구성한 이야기입니다. (…) [남산의 부장들]을 바탕으로 실제 사건에 기초했으나, 일부 설정은 영화적 상상력을 가미한 픽션임을 밝힙니다.” 나는 이런 자막으로 시작한 영화가 결말에서 굳이 실명의 인물들을 보여주며 끝내는 것이 영화적으로 옳은지 고민했다. 보안사령관의 수사 발표와 중앙정보부장의 최후 진술은 군더더기인가 아닌가? 논픽션을 바탕으로 한 픽션이 끝에 가선 픽션 밖의 사실을 갈구한다. 어떻게든 사건의 의미를 찾으려는 발버둥처럼. 그러나 결국 이것도 영화가 선택한 해석으로서의 사실일 뿐이다. 결국 받아들이는 건 관객의 마음이다. 누구는 왜곡이라 할 것이고 누구는 정론이라 할 것이다. 정치적일 수밖에 없는 소재를 다루는 영화는 어느 쪽이든 선택을 하지 않는 게 더 나쁘다. 선택을 안 하는 류의 패착을 나는 오히려 완전 픽션인 < 인랑 >( 김지운 , 2018)에서 보았다. <남산의 부장들>은 연출자의 선택이 분명한 영화다. 그날 밤에 각하에게 총을 쏜 부장은 적어도 혁명과 민주주의를 나름대로 고민했다고 보는 믿음이다. 야간에 허가 없이 누구도 통행하지 못하는 불 꺼진 세계 속, 야근하는 부하를 불쑥 찾아와 손수 술을 따라주는 상관( 이성민 )이 살갑게 속삭인다.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 손 안대고 코 풀기의 미학. 영화는 가장 야비한 용인술로서 권력자의 레토릭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여준다. 클라이맥스에서 조명이 꺼지고 권총을 바꾸러 내려간 부장( 이병헌 )이 돌아와 거사를 마치고, 흥건한 피에 미끄러진 다음 일어나 안가 밖으로 나갈 때까지 롱테이크로 찍어낸 장면은 연기와 연출과 기술이 합쳐진 한국 영화의 밀도가 지금 어느 정도의 수준에 왔는지 가늠하게 한다. 마지막으로 이 영화는 그래서 10.26으로 야기된 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분명하게 집어주는 미덕이 있다. 나라를 훔친 새로운 도둑. 거의 사이코패스처럼 묘사된 보안사령관( 서현우 )이 어둠 속에 나타나 씬을 훔치고 나라를 훔치는 장면은 섬뜩하다. 10.26을 다룬 이들 세 편의 영화는 거의 10년 주기마다 나온 셈인데, 나는 개인적으로 10.26 소재 영화를 계속해서, 가능하다면 매년 보고 싶은 마음이다. 온갖 연출자와 작가와 배우들이 이 사건을 끊임없이 자유롭게 해석하고 표현해줬으면 좋겠다. 전 배역이 여배우들로만 이루어진 10.26은 나만 보고 싶은가? 완전히 작정하고 아이돌 주연의 BL로 만든 10.26은 어떤가? 가상 독재국가의 근미래 SF로 옮겨 외국 배우들이 연기하는 10.26도 재미있지 않을까? 그날 밤의 진실은 여전히 아무도 모른다. 현실은 아마도 그 어떤 작품의 묘사보다 훨씬 더 엉망진창이고 속수무책이었을 것이다. 역사의 활발한 해석은 역설적으로 끊임없는 진실을 요구한다. 10.26 사건은 근대사가 우리에게 준 한국 고유의 원천 스토리 콘텐츠다. 셰익스피어가 부럽지 않은 비극과 희극의 절묘한 조합이 여기 있다. 반인반신이었던 국가 원수가 총 맞아 죽는 이야기는 전 세계 관객 대상으로 전혀 부끄럽지 않다. 인류 보편적으로 재미있고 유익하며 교훈이 넘친다. 이미 죽은 자의 추종자들과 아직 살아서 침묵하길 원하는 자들은 실제 역사와 인물을 바탕으로 한 영화 만들기를 계속 어렵게 만들 것이다. 현실을 바탕으로 한 창작의 자유는 국가가 보안 아니 보호해주어야 옳다. 권력자들의 압제 아래 엄혹한 세월을 피와 눈물로 버텨온 피해당사자이자 그 후손으로서, 우리는 이런 이야기들을 계속 보고 즐길 자격이 있다.
그야말로 ‘디즈니 세상’이다. 올해 7월까지 한국 극장가 흥행 성적을 들여다보자면 절로 그런 생각이 든다. 십여 년 전부터 전 세계 극장가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는 마블 스튜디오의 수퍼 히어로 영화 대부분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이름을 달고 전 세계에 배급된다. (디즈니는 2009년 12월 마블 엔터테인먼트를 사들였고, 특히 마블의 영화 제작사인 마블 스튜디오는 2015년 8월부터 월트 디즈니 스튜디오 직속 산하에 두고 있다). 해마다 이 영화들 한두 편이 국내 극장가에서 크게 흥행 몰이를 하는 건 더 이상 놀랄 일도 아니다. 올해도 어김없이 ‘디즈니가 배급한 마블의 수퍼 히어로 영화’ < 캡틴 마블 >(3월 6일 개봉)과 < 어벤져스: 엔드게임 >(4월 24일 개봉)이 영화관입장권통합전산망에서 8월 2일 집계한 결과, 각각 580만 명과 1392만 명의 관객을 모으며, 7월 24일까지 집계한 수치에서 올해 흥행 순위 2위와 6위를 차지했다. 올해 디즈니의 맹위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5월 23일 개봉해 53일 만에 ‘천만 영화’에 등극한 <알라딘>과 7월 17일 개봉과 함께 박스오피스 1위에 오르며 14일만에 관객 400만명을 돌파한 <라이온 킹> 역시 디즈니의 이름으로 배급된 ‘디즈니 영화’다. 더욱이 이 두 작품은 2010년대 들어 디즈니가 박차를 가하고 있는 ‘애니메이션 실사화 프로젝트’의 산물이다. ‘애니메이션의 명가’로 명성을 쌓은 스튜디오답게 디즈니는 < 신데렐라 >(2015) < 정글북 >(2016) < 미녀와 야수 >(2017) <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 >(2018) 등에 이어, 올해 <알라딘>과 <라이온 킹>을 거쳐, 2020년에 <뮬란>, 이후 <인어공주> <피노키오> <백설공주와 일곱 난쟁이> 등, 디즈니의 고전 애니메이션을 실사로 리메이크하는 작품의 제작 계획을 빽빽이 늘어놓고 있다. 주목할 것은, 그중에서도 올해 개봉한 <덤보>, <알라딘>과 <라이온 킹>이 한국 관객으로부터 뜨거운 사랑을 받고 있다는 점이다. 2017년 개봉해 국내 극장가에서 관객 513만 명을 기록한 <미녀와 야수>도 빼놓을 수 없다. <신데렐라>(71만 명) <정글북>(253만 명)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49만 명), <덤보>(34만 명)의 흥행 성적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이 국내 관객에게 폭발적인 사랑을 받은 이유는 무엇일까. 이 프로젝트가 리메이크하는 애니메이션 중에서도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은, 디즈니가 1990년대에 발표한 작품이다. ‘디즈니 르네상스’, 그러니까 디즈니가 고전적인 이야기를 완성도 높은 애니메이션 영화로 만들어 평단의 박수를 받는 동시에 전 세계 극장가에서 높은 흥행 수익을 올렸던 시기 말이다. ‘아름다운 동화의 나라’라는, 지금까지 이어지는 ‘디즈니’의 브랜드 가치를 굳건히 한 때이기도 하다. 더욱이 이때는 국내 비디오 시장이 활성화됐던 때다. 애니메이션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을 극장에서 보지 못했어도 비디오로 몇 번이고 돌려 볼 수 있었다. 그렇게 ‘애니메이션은 디즈니’라는 공식, 아래 어릴 적부터 이 영화들을 수없이 보고 자란 세대가 지금의 20~30대다. 더군다나 이 세 작품 모두 뮤지컬 형식의 애니메이션이다. 장면장면이 아름다운 노래와, 그와 하나 되는 환상적인 이미지로 기억되는. 올해 개봉한 실사영화 <알라딘>을 볼 때 깨달았다. 이 영화가 일깨우고 있는 건 ‘세대의 기억’이라는 걸.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되지 않아 첫 노래 ‘아라비안 나이트’가 흘러나오는 순간, 이 영화가 재미있는지 없는지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는데도, 내 안의 어떤 기억이 깨어나 영화와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기분이었다. 어릴 적 보고 또 봤던 애니메이션의 기억, 그러면서 빠져든 노래와 뮤지컬 장면에 대한 기억, ‘램프의 요정 지니를 만나면 난 어떤 소원을 빌면 좋을까’ 밤새 고민했던 기억…. 한 세대의 공통된 기억, 그것도 눈과 귀가 함께 기억하는 즐거운 추억을 불러일으키는 것만큼 강력한 문화적 경험은 없다. 찬란한 상상력에 빛나는 애니메이션을 감쪽같은 실사 영상으로 탈바꿈할 수 있는 기술력, 달라진 시대를 반영하는 재치 넘치는 각색 등, 새로운 <알라딘>의 즐길거리를 더 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알라딘> <미녀와 야수> <라이온 킹>이 한국 관객에게 사랑받은 가장 큰 이유는, 20~30대 이상 관객들에게 ‘세대의 기억’을 생생히 돌이키고 그걸 새로이 할 장을 마련해 줬다는 데 있다고 확신한다. 진정 놀라운 것은, 1990년대 ‘디즈니 르네상스’가 일군 ‘세대의 기억’이 20여 년의 세월을 넘어, 지금 진행되고 있는 ‘애니메이션 실사화 프로젝트’를 통해 보다 젊은 세대로 계속 전승되고 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관객이 실사 버전의 <미녀와 야수> <알라딘> <라이온 킹>에 열광하고, 그 노래를 따라 부른 경험은 수십 년 뒤 ‘디즈니 월드’의 또 어떤 자산이 될 것인가. 조금 다른 예로, 십 수 년 뒤 디즈니가, 개봉 당시 세계적인 흥행기록과 함께 수록곡 ‘렛 잇 고’ 열풍을 일으킨 디즈니 애니메이션 <겨울왕국>(2013)의 실사 버전을 만든다고 상상해 보자. 또 어떤 진풍경이 일어날지 눈에 선하지 않은가. 세대의 기억을 창조하고, 그것을 새 시대에 맞게 새롭게 계승하고, 그 유산을 바탕으로 무너지지 않는 왕국의 영토를 확장해 가는 디즈니의 전략이 이쯤 되면 영리하다 못해 무시무시하게 느껴질 정도다. 마블의 슈퍼 히어로 영화가, 히어로마다 각기 다른 개성을 부여하고, 그들을 때로는 개별 시리즈로 헤치고, 때로는 ‘어벤져스’ 시리즈로 한데 모으는 전술로 그 세계를 매력적으로 확장하는 전략 역시 감탄스럽기 그지없는데 말이다. 그러고 보면 디즈니는, 이 시대의 가장 크고 강력한 영화적 기억을 일구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도 이러한데, 앞으로도 그 자리를 내어놓지 않겠다고 벌써부터 탄탄한 기초 공사를 다지는 치밀함까지. 감탄을 넘어 그 치밀함이 무섭기까지 한 ‘시네마 수퍼 히어로’다. 말 그대로 ‘디즈니 왕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