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
- 감독
- 야시 초프라
- 제작년도
- 1975
- 출연
- 샤시 카푸르, 아미타브 바찰, 니투 싱
<BECK: Mongolian Chop Squad> 중 (사진: " BECK: MONGOLIAN CHOP SQUAD ", MUBI)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 컷의 크기는 순수한 제 마음의 표현입니다!!” 『H2』, 『러프』 등을 그린 청춘 스포츠 만화의 거장, 아다치 미츠루의 『미유키』엔 위와 같은 대사가 등장한다. 한 소녀에 대한 소년의 애정을 편집자적 논평으로 일체화해 드러낸 귀여운 사례다. 이 발화는 단순한 말에 그치지 않고 미학적 실행으로 옮겨진다. 아다치 미츠루가 소녀를 그린 만화의 컷은 단행본의 한 페이지를 차지할 정도로 정말 커다랗다. 다만, 이 진담 섞인 농담처럼 만화의 컷은 진정 마음의 크기로 고스란히 치환될 수 있을까. 만화는 지면의 물리적인 크기 조정을 통해 독자적 의미 작용을 생성하는 매체일까. 이를 밝히기 위해서는 먼저 만화(일본식 만화인 ‘漫画’에 한정)의 컷이 어디서 왔는지, 어떤 원리를 따르는지 살펴보는 일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만화와 영화, 그리고 애니메이션이란 매체 사이의 차이, 그리고 ‘실사’를 기반으로 한 영화의 감각이 무엇을 낳았고 낳을 수 없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다치 미츠루의 장난스러운 명제를 진지하게 받아치자면 우선 말의 역이 성립하기는 어려울 듯하다. 만화 속 감정의 크기가 컷의 크기에 따라서만 조율되진 않기 때문이다. 익히 알려져 있듯, 오즈 야스지로의 필로 숏을 떠올리게 하는 아다치 미츠루의 공백 컷이 대표적인 만화적 감정의 형성 방식이다. 서사의 고조가 일어나야 할 플롯의 이음매에 잠자리나 하늘, 물과 같은 자연물을 집어넣어 감정과 정취 사이의 낙차를 일으키는 그것. 투수가 던진 야구공이 포수의 글러브 혹은 타자의 배트에 닿기 전, 그 찰나의 순간을 유예하려 들어선 무관한 이미지의 연속과 충돌들. 이처럼 아다치 미츠루는 칸의 크기뿐 아니라 청춘 스포츠 만화의 장르적 내러티브에서 탈락한 오브제의 개입과 몽타주로 새로운 감각의 지평을 여는 작가다. 아다치의 몽타주는 곧바로 영화의 용어로도 (거슬러 올라가) 통역된다. 오쓰카 에이지의 말에 따라 모더니즘 시대의 일본 만화가들은 에이젠슈타인과 쿨레쇼프의 몽타주 등 소련 아방가르드 영화 이론과 렌즈 기반의 카메라 문법을 흡수하여 만화의 컷에 활용했기 때문이다. (이후부터는 영화의 컷과 구분하기 위해 만화의 컷을 ‘칸’이라 씀) 망가의 아버지 데즈카 오사무는 이로부터 영화 기호론을 주창하기도 했다. 더불어 말년의 데즈카 오사무 등은 ‘필름 만화’를 통해 만화와 영화의 관계를 더욱더 긴밀하게 고찰했다. 필름 만화란 필름의 한 프레임에 담긴 움직임 하나하나를 만화의 칸 하나하나에 그대로 대입하여 그린 방식이다. 영화의 1초 24프레임 상영 이전 단계에서부터 컷과 칸의 의미를 사유하고, 이로써 필름 운동의 근원적 사진 이미지를 고찰하며, 만화와 영화의 관계를 더욱 견고하게 연결한다. 근래의 만화가들도 이 유산을 지키는 중이다. 대표적으로 『체인소 맨』의 후지모토 타츠키는 인물의 움직임을 앵글이나 칸 사이즈의 변화 없이 다수의 컷으로 나누어 그리는 필름 만화의 작법을 즐겨 쓰는 이다. 그러니 칸의 연속과 충돌이든, 몽타주이든, 기호적 이미지의 작용이든 만화와 영화의 칸-컷은 대개 분리 불가한 의미론 속에서 순환하는 편이다. 만화와 영화의 경계는 이래저래 더욱 희박해진다. 『H2』 중 (사진: “ Mitsuru Adachi ”, Character Design References) © Character Design References / Original artist Mitsuru Adachi ‘천상의 목소리’란 <BECK>의 제약 만화와 영화의 친족관계를 하나씩 밝히다 보니 만화가 영화처럼 보이고, 영화가 만화처럼 읽힐 지경이라 어지럽다. 그럼에도 두 매체를 감상할 때 느껴지는 감정의 차이는 명확하고, 이 차이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선 또 다른 만화가의 말을 빌릴 필요가 있겠다. 재즈 만화 『블루 자이언트』의 작가 이시즈카 신이치가 처음 편집자에게 『블루 자이언트』의 기획을 전했을 때다. 편집자는 “자네, 종이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는단 거 알지···?”라며 물음표를 던진다. 이에 작가는 “그렇긴 하죠. 그래도 뭐 책을 두드리면 소리가 나기도 하니까···.”라고 능청스럽게 답한다. 요컨대 만화와 영화의 커다란 차이가 있다면 역시 소리이지 않을까. 기본적으로 사운드가 기재될 수 없는 만화, 그 대척에 있는 영상 매체의 틈이 사운드의 유무에 있다고 보는 것이 가장 단순하고 명확한 발상이겠다. 아다치 미츠루의 만화에서 소거될 수밖에 없는 영화의 속성이 있다면 그것 역시 투수의 150km/h 짜리 직구가 날아가는 소리, 필로 숏 속 잠자리의 울음소리에 있을 것이란 뜻이다. 만화 『BECK』 시리즈(한국어판) 표지 (사진: “ BECK 10 ”, “ BECK 30 ”, 교보문고) 이러한 논지에서 만화와 영화의 관계 일변을 가장 적절히 포착할 수 있는 예시는 해롤드 사쿠이시 작가가 2000년부터 2008년까지 연재한 소년 밴드 만화 『BECK』이다. 『BECK』이 걸작의 자리에 오른 큰 이유는 만화가 밴드 공연을 그린다는 본원적 모순에서부터 나온다. 밴드의 라이브 무대를 라이브의 순간으로 작동시킬 수 없다는 만화 매체의 커다란 제약이 있는 것이다. 이 한계에서 『BECK』이 택한 전략은 무척 흥미롭다. 그것은 주인공이자 밴드 BECK의 멤버인 유키오가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천상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다는 설정이다. 기타를 잡은 지 2달 정도밖에 되지 않은 유키오가 단숨에 밴드 신의 스타가 되는 근거로 (아마 오아시스의 보컬 리암 갤러거를 모티프로 한) 그의 목소리가 제시된다. 즉 만화 『BECK』은 음악 없는 음악 만화라는 제약에 ‘목소리 없는 천상의 목소리’라는 이중의 제약을 가한다. 마치 『헌터x헌터』에 등장하는 제약과 서약의 원리(무언가를 제한하는 대신 그에 상응하는 힘을 얻는단 설정)와도 같다. 유키오의 목소리를 만화로 그리지 못할 바엔 그것을 더욱 추상적인 경지로 이끌어, 독자에게 최대한 커다란 상상의 장을 마련한 것이다. 그러나 『BECK』에겐 커다란 어려움이 찾아왔다. 바로 인기 만화의 상업적 운명으로 인해 작품의 영화화가 이뤄진 것이다. 보통이라면 기뻐할 일이지만,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를 어떻게 실사화할지란 큰 문제에 부닥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영화 < BECK >(츠츠미 유키히코, 2010)은 아주 파격적인 작법을 택한다.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를 실사화할 수 없다는 판단에서인지, 아예 유키오가 노래하는 목소리를 작중에서 소거해 버린 것이다. 유키오가 마이크를 잡고 노래하는 순간마다 영화는 보컬의 마이크를 끈 듯 유키오의 목소리를 묵음 처리한다. 2010년 영화가 개봉했을 당시 관객과 평자들은 이 선택을 비난했다. 음악 없는 음악 만화야 매체의 본질적 제약이라 친다 해도, 음악 있는 음악 영화가 기술적으로 불가능한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그렇다면 영화 <BECK>은 영화적이지 않은 것일까. 라이브 무대에 실사의 ‘소리’를 덧대지 않았기 때문에? 글쎄, 외려 영화 <BECK>이 택한 소리의 공백은 원작 만화의 설정을 이어가며, 소리의 효과를 이미지의 기호로 펼치는 영화적 역량을 보여준 사례다. 영화 <BECK>의 방식은 근원적으로 데즈카 오사무의 영화 기호론과 같은 일본 만화 고유의 작법을 세심히 이식한 쪽에 가깝다. 영화에서 유키오가 노래를 부를 때마다 화면은 일련의 몽타주를 늘어놓는다. 둥둥 떠다니는 구름, 슬로 모션으로 만화적 놀람의 표정을 기호로 발산하는 관객의 표정 등이 교차한다. ‘천상의 목소리에 놀란다’라는 사실을 가시적 문법이 아닌 기호의 원리에 빌려 구현하고, 소리의 공백을 메운 것이다. 아다치 미츠루가 강속구의 시간을 잠자리 등의 자연물과 인물들의 표정에 가뒀다면, 영화 <BECK>은 유키오의 목소리를 구름 등의 자연물과 청중들의 표정에 구속했다. 시간의 리듬을 능동적으로 조작하는 만화의 영화적 작법이 한 바퀴 돌아 영화에 쓰인 것과도 같다. 돌고 돌아 만화와 영화는 또 비슷해지는 것일까. <BECK> 중 여기-있을 것의 애니메이션 여기에서 홀로 다른 선택을 하여 사고를 확장한 『BECK』의 산물이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코바야시 오사무 감독이 2004년에 만든 『BECK』의 애니메이션 <BECK: Mongolian Chop Squad>다. <BECK: Mongolian Chop Squad>는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란 문제를 정공법으로 받아 쳤다. “HUSKING BEE”라는 실존 밴드의 보컬리스트 히라바야시 카즈야의 목소리를 유키오의 가창 성우로 기용한 것이다. 유키오의 보컬이 본격적으로 두드러진 TVA 12화의 <Moon on the water> 라이브부터 BECK이 일본 최고의 화제 밴드로 일약 올라서는 그레이트풀 사운드 페스티벌 무대에서 유키오의 목소리를 묵음 아닌 실제의 소리(가창)로 드러낸다. 히라바야시 카즈야의 목소리가 ‘정말 천상의 목소리냐?’를 따지는 일은 무용하다. 여기서 재론하려는 바는 결국 매체 간의 차이다. 만화와 영화 <BECK>은 유키오의 목소리를 소거하고도 작동할 수 있었지만, 왜 애니메이션은 실사의 목소리를 택해야 했던 것일까. 단서는 애니메이션과 영화를 ‘영상’이라는 하나의 영역에 두지 않는 일에서부터 발견될 것이다. 앞서 반복했듯이 만화와 영화의 유사성을 짚고, 그 바깥에서 애니메이션만이 독자적으로 지니는 돌출성을 찾음이 마땅하다. 롤랑 바르트는 영화의 허구성을 ‘여기-있음’으로, 사진 매체의 경험을 ‘여기-있었음’으로 설명했다. 영화는 어느 이야기든 현재 어딘가에서 일어나는 일처럼 느껴지는 공백의 범주에 있고, 사진은 놀라울 만큼 이전의 시간을 비논리적이고 마술적으로 결합한다는 의미에서다. 영화와 만화 <BECK>이 유키오의 목소리를 현실화하지 않고 소리의 불능이란 제약에 묶어뒀던 것을 이 맥락에서 살펴볼 수 있겠다. 오쓰카 에이지의 말처럼 만화의 원류가 영화적 뿌리에 깃들어 있다면 만화는 시간의 일상적 흐름을 거부하는 사진의 역량, 이와 동시에 칸과 컷의 공백(혹은 몽타주)을 활용해 감정의 찰나를 유예하는 영화의 힘을 함께 작동시킨다. 영화 <BECK>은 그러한 만화의 메커니즘을 영화에 거꾸로 옮겨와 실현한 경우다. 그렇다면 애니메이션은 어떠한 지대에 존재하는 매체일까. 이에 대해 필자는 < 신세기 에반게리온 >(안노 히데야키, 1995)과 <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 >(안노 히데야키, 츠루마키 카즈야, 1997)의 현대성에 대한 글에서 애니메이션을 ‘여기-있을 것’을 바라는 매체라고 설명한 적 있다. [1] 영화적 이미지는 현실-스크린-관객 사이에서 도래하는 결과물이고, 만화는 그러한 영화적 망상에서 기반한 칸의 펼침이다. 반대로 애니메이션의 망상은 공급자가 일방적으로 구현해야 할 ‘의도’의 집합체다. 애니메이션은 기본적으로 현실에 없는 시공간을 인공적으로 창조해야 한다. 곤 사토시의 말처럼 애니메이션의 “모든 장면엔 의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우연은 없다.” 애니메이션의 이미지와 사운드는 창작자(들)의 순수한 망상이다. 현실에 ‘없던 것’이자 ‘없는 것’의 표현이다. 말하자면 유키오의 ‘천상의 목소리’란 현실에 기반한 영화와 만화에서 발생할 수 없는 이데아적 사건이다. 이에 반해 애니메이션은 이 무한의 상상을 ‘의도적으로’ 실현해야만 자신의 미학을 지킬 수 있는 매체다. 요컨대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로 분화한 <BECK>의 선택, 구체적으로 유키오가 지닌 ‘천상의 목소리’를 표현한 방식들은 각각의 매체성을 즐거이 논할 수 있는 사례다. 밴드물의 정전이라 불리는 세간의 평가에 합일될 정도로 각 매체의 존재론을 증명하는 문제작이자 걸작이다. 아, 그러면 이쯤에서 “컷의 크기는 순수한 제 마음의 표현입니다!!”라는 아다치 미츠루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되새길 수 있겠다. 아마 의도의 측면에선 참이나 결과적으론 거짓일 듯하다. 영화적 논리에 기댄 칸의 크기는 결국 이미지와 시간의 공백으로서 독자(관객)의 능동성에 복무할 수밖에 없으며, 현대의 만화는 결국 태초의 영화적 속성과 떼놓을 수 없이 다수의 실사 영화적 기법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애니메이션만의 ‘의도적 세계’는 만화-영화의 유착관계에서 벗어나 ‘순수한 마음’이란 추상을 자체적으로 실현할 수 있다. 혹은 그래야만 한다. 그리하여 <BECK: Mongolian Chop Squad> 유키오의 목소리를 능동적으로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었고, 이 속의 유키오는 <Moon on the water>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 만화, 애니메이션, 실사 <BECK> (사진: “ BECK 22 ”, 교보문고 / “ Beck: Mongolian Chop Squad ”, IMDb) *** [1] “ [기획] 안녕? 에반게리온, 21세기 오타쿠, <엔드 오브 에반게리온>의 시대를 탐하다 ”, 《씨네21》 1440호, 2024. 1. 18. 이우빈(영화기자) l 《 씨네21 》 기자. 친구가 없어 영화나 보러 다니고 집에선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열심히 본 1997년생.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박: 애니메이션영화제 했었을 때, 아까 <에반게리온> 얘기했었지만. <에반게리온>이나 < 공각기동대 >, 뭐뭐 < 에스카플로네 > 이런 거 했었거든요. 근데 잘 됐었어요. [1] 해당 구술채록문을 읽다 보면, “아까 <에반게리온> 얘기했었지만”이라는 말에서 이상함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말이 나오기 이전까지 구술에서 단 한 번도 < 에반게리온(新世紀エヴァンゲリオン) >(안노 히데야키, 1995)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사실 여기서 말하는 ‘아까 한 이야기’는 인터뷰 사이 잠시 쉬는 시간 동안 나눈 대화를 말하는 것이다. 구술담당자로서 인터뷰에 참관하면서 구술자의 이야기를 듣다가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이 생기면 이렇게 쉬는 시간에 살짝 물어보곤 한다. 그리고 당시 구술자에게 <에반게리온>에 대해 물어본 것은, 내가 에바팬이라거나 그래서 그런 것은 절대로 아니다. 그 이유는 이제부터 천천히 풀어갈 것이다. 닫힌 영화, 열린 영화제 사실 광주 ‘ 영화로 세상보기 ’ 운영자였던 박상백 구술(2024년 10월 17일 진행) 이전에 그와 관련된 재미난 이야기를 들은 바 있었다. 황: 일본영화 같은 경우는, 사실은 광주 기획을 좀 본따고 그랬는데. 광주 ‘영화로 세상보기’에서 그때 돈을 막 많이 벌었더라고요. 한: 재패니메이션으로? 황: 그래서 액정도 바꾸고. 이게 그때 ‘소년 탐정’인가? <에반게리온> 시리즈. 저는 뭐 내용도 아직도 모르는데, ‘야, 저런 매니아층이 또 있구나.’ 그래서. 저희도 해보니까 아닌 게 아니라 사람이 꽤 오더라고요. [2] 대전 ‘ 씨네마떼끄 컬트 ’의 운영자였던 황규석 (2024년 6월 29일 인터뷰 진행)에게서 이 이야기를 듣고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에반게리온> 상영으로 ‘돈을 많이 벌었다’라는 사실보다도 ‘저런 매니아층이 있다’라는 깨달음에 있었다. 이러한 관객층을 지금의 관점에서 그냥 ‘오타쿠(オタク)’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에반게리온>이 등장했던 시기만 해도, 국내에서는 ‘오타쿠’에 대한 뚜렷한 사회적 인식도 없었고, 특정 애니메이션 작품에 대한 열렬한 지지층의 활동이 눈에 띄지도 않았었다(존재는 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적어도 외연적으로는 드러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구술자가 이들을 ‘저런 매니아층’이라고 표현한 데에는, 어느 정도 오늘날 재패니메이션 ‘오타쿠’에 대해 사후적으로 형성된 느낌도 내재되어 있다. 그러나 어쨌든 이 사후적인 인식을 제외하더라도 평소 이상의 어떤 관객층들이 <에반게리온> 상영 당시 몰려왔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들은 누구이고 왜 여기 왔을까? 정: 제 세대뿐만 아니라 바로 윗세대들도, 제 바로 다음 세대들도 너무나 보고 싶었던 영화가 있었어요. 너무나 보고 싶었던 영화. 일본영화. … 유학을 가지 않으면 그건 접할 수가 없는 거니까. 사실은 프랑스영화・독일영화에 대한 갈증보다 일본영화에 대한 갈증이 훨씬 컸어요. [3] 한: 혹시 그런 건 없었나요? 선호하는 영화 통계 같은 거. 조: 있었죠. 한: 아, 있었어요? 조: 네. 일본영화, 뭐 (사이) 제일 많이 봤던 영화가 아마 < 러브레터 >. 수입되기 전에. 그리고 피터 잭슨 < 데드 얼라이브 >, < 천상의 피조물 > 이런 게 공식적으로 소개 안 됐었거든요? … 되게 압도적으로 피터 잭슨 영화하고 일본영화하고 미국의 인디영화들, 이런 영화들이 사람이 많이 왔었어요. [4] 영화평론가 정성일 과 1990년대 문화학교 서울 의 운영자로 일했던 조영각 은 당시 시네마테크를 찾아오는 관객들은 근본적으로 기존에 볼 수 없었던 영화를 보고 싶다는 욕구를 갖고 있었다고 말한다. 당시에 한국 극장에서는 보기 힘든 프랑스영화, 독일영화, 미국의 인디영화들을 실제로 보고 싶다는 마음도 강했지만, 이 영화들이 수입자유화와 함께 쏟아지는 미국영화들 속에서 틈새를 찾아 소규모의 예술영화전용관들을 채울 때조차도 들어오지 못했던, 원천적으로 수입 자체가 금지되어 있던 일본영화, 그리고 일본 애니메이션에 대한 욕구는, 그것이 문화적・심리적 거리가 가까울수록 더 강해질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여기에 시네마테크의 운영자들의 근원적인 고민 역시 있었다. 시네마테크를 찾는 관객들이 원하는 것이 한국사회로부터 ‘닫힌 영화’들 이기 때문에, 이들의 자료 확보와 상영 활동은 불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한: <러브레터>는 처음에 어느 쪽에서 구하셨어요? 곽: (목소리를 낮춰서) 어디서 구했을까요? 어디서 구했을까. [5] 후지이 이츠키 스트레이트 플러쉬! 조: 영화를 보려면 무조건 회원가입을 해야 돼요. 그게 저희 문턱이었고. 저희는 그렇게 운영해야지 여기가 안전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게 사실 불법이잖아요. 비디오를, 영화를 트는 게 심의를 받은 것도 아니고 우리도 저작권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회원제라는 규정을 만든 거고. … 그런 규칙들이 있어서 내부 결속력은 되게 탄탄했던 반면에 다른 데서 보기에는 “좀 폐쇄적이다” 이런 얘기들도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6] ‘회원제로 운영되는 폐쇄적 시네마테크를 통해 극장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영화들을 본다’라는 것이 어쩌면 ‘특권’처럼 읽힐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정반대였다. 음지화된 공간에서 불법적인 방법으로 들어온 작품을 보고 있다는 사실, 즉 ‘ 모두 함께 모여 허락되지 않은 것을 보고 있다 ’라는 비밀(?)은 시네마테크를 찾는 관객들의 소속감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여기에 이들의 응집력을 높이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개인용 컴퓨터 통신전용망을 이용해 취미와 관심이 같은 사람 또는 전문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온라인으로 정보를 교환하거나 토론을 벌이는 개인용 컴퓨터 통신동호회들이 많이 결성돼 활발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 동호회 회원들은 시간을 정해놓고 특정 주제에 대하여 온라인 토론을 벌이는 외에도 전자게시판 기능을 이용, 알리고 싶은 소식을 회원 모두에게 공개하거나 공동 자료실을 만들어 쓰고 있다. - “PC통신 동호인 모임 활발”, 《한겨레》 1990. 8. 14. 8면 기사 “이 영화가 < 미져리 >보다 무섭다는 ‘ PC통신 ’을 보셨습니까?” (《조선일보》 1994. 6. 10. 18면 광고) 1990년대 초 PC통신 이 본격적으로 국내에 도입되면서,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정보를 교환할 수 있는 공간이 생겨났다. 사실 이 새로운 공간은 서로의 존재를 확인시켜주고 정보를 준다는 것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김: ‘이제 그런 영화들이 인정받는 세상이다’ 이런 부분에 대한 어떤 각인? 취향을 드러내게 되는 거죠. … 팬과 마니아라는 거에 대한 나의 소속감 ? 그게 굉장히 컸던 거 같아요. [7] 이 온라인 공간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취향을 더욱 공고히 하는 동시에,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영퀴’를 풀면서 소속감을 다져갔다. 이러한 소속감이 커질수록, 각자의 취향은 숨기거나 혼자만 누리는 것이 아니라, 다른 누군가와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이 생겨났고, 그렇게 자신들이 보고 싶은 영화를 어디에 가면 볼 수 있는지 정보를 공유하며 시네마테크로 자연스럽게 모이게 되었다. 다시 처음의 이야기로 돌아가서, 나는 쉬는 시간을 빌어 구술자 박상백에게 ‘영화로 세상보기에서 <에반게리온>을 상영했을 때 정말 많은 사람들이 왔다고 들었는데, 어떻게 그렇게 많은 관객을 동원할 수 있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본 인터뷰 때 이야기한 것처럼 그 시기가 “닫힌 시대이기는 했지만 좀 알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이미 다 알려져 있던 것들”이었고, 소문만 무성한 그 ‘화제작’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을 뿐이라고 겸손하게 답했다. 그리고 덧붙여 ‘왜 <에반게리온>에 당시 관객들이 그토록 열광했다고 생각하냐’라는 질문을 이어 했고, 이에 대해 “<에반게리온>은 이야기할 거리가 많은 작품이라 당시 시네필뿐만 아니라 많은 대중들이 열광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답했다. 확실히 <에반게리온>은 지금까지도 말도 많고 해석도 다양한, 참 어려운 애니메이션이다. <에반게리온>에 대한 세기말 관객들의 관심이 상당 부분 이 ‘해석놀이’에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또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에반게리온>만 특별한 관심의 대상이었던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 시기 재패니메이션의 인기를 이끌어가는 또 다른 한 축으로는 ‘지브리 애니메이션’이 있었다. 구술자 송정환은 평택의 ‘ 시네마드리밍 ’에서 < 폼포코 너구리 대작전(平成狸合戰ポンポコ) >(다카하타 이사오, 1994)을 상영했을 때 많은 관객들이 영화를 보러왔고, 특히나 평택시민아카데미로 공부를 하러 오던 청소년들이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재미있어했으며, 이에 같은 공부방에 있던 아이들끼리 상영 프로그램을 직접 기획하고 함께 감상을 했던 일을 인상 깊게 기억하고 있었다. [8] 누가 뭐래도 지브리 최고 남주는 ‘ 아시타카 ’다. (필자 개인 의견임) 뿐만 아니라, 시네마테크 운영자들은 애니메이션에 대한 관심과 호응을 한국 단편 애니메이션 쪽으로 이끌고 갔다. 지금도 사정이 크게 다르진 않지만, 단편 애니메이션의 경우 영화제가 아니면 일반 관객에게 상영을 할 수 있는 기회가 극히 드물었다. 시네마테크는 자신들이 갖고 있는 전국적인 시네마테크 배급망(전국씨네마떼끄연합은 1997년 결성되었다)을 이용해, 각 지역에서 활동하는 애니메이션 창작자들의 작품을 모아 순회상영을 하거나 장편 사이에 단편 작품들을 끼워 넣어 함께 상영하는 등 프로그램을 다양화했다. 박: 그때 해외에서 들어온 독립영화하고 국내 독립 애니메이션을 붙여 가지고 긴 독립영화, 해외 독립영화 장편에 앞서서 마치 인트로를 열듯이, 국내 단편 애니메이션을 상영하고 그다음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의 영화가 딱 이렇게 된다든가, 데이비드 린치의 < 이레이저 헤드 >를 상영하는 데 앞서서 나기용 감독의 단편이 상영된다거나, 이런 식으로 하는 시도들도 있었고. 그리고 독립영화협회하고도 좀 같이하는 활동들이 있었고. 문화학교 서울이라고 지금은 없어졌는데 거기하고 저희랑 같이 해서 상영회를 조그맣게 한다든가 이런 활동들이 더러 있었죠. [9] 손: 저기 문화학교 서울인가, 정말 하꼬방 같은 그런 극장에서. 기억나네. 완전히 다락방 같은 극장이었는데, 거기서 < 생존 > 틀고 이랬을 때 무렵이었거든요? 그러면서 교류를 하게 된 거죠. 그러니까 저는 모션&픽쳐에 있으면서 독립영화, 시네마테크 이런 쪽 하는 사람들 하고 교류가 되기 시작한 거죠. … 자체 영화제가 이런 때 서울에 있는 작품들 가져올 때도 지역 뭐 같이 해서 틀기도 하고. 그러면서 교류가 많이 일어나기 시작했죠. …그러니까 전체적으로 시네마테크 활동하던 분들이 독립영화협회를 만들기 시작한 시기가 맞물린 거죠, 대구도 . 그래 가지고 대구에서도 원승환 이라는 친구하고 이렇게 해서 협회를 만들어보자라는 분위기가 있었어요 … 그렇게 이제 모션&픽처하고 독립영화 하는 친구들하고, 시네마테크 하는 사람들하고 이렇게 해서 ( 대구독립영화협회를 ) 만들게 되었죠. [10] <생존>(손영득, 1997)의 한 장면 물론 < 아키라 >(오토모 가츠히로, 1988)나 <공각기동대>(오시이 마모루, 1995)를 보러 왔던 관객들, <에반게리온>의 팬들, ‘지브리 애니메이션’이나 한국 단편 애니메이션을 보던 관객들이 모두 같은 성격의 관객층이라고 뭉뚱그릴 수 없다. 심지어 <에반게리온> 상영회를 보러 왔던 관객들조차도 하나의 성격을 가진 집단으로 묶을 수 없다. 개중에는 정말 <에반게리온>을 좋아하는 오타쿠도, 그저 심도 깊은 작품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시네필도 있을 것이고, 혹은 ‘워낙 화제가 되는 작품이라니 나도 구경이나 한번 해볼까’라는 가벼운 마음으로 시네마테크를 찾는 이들도 있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너무 보고 싶지만 좀처럼 볼 수 없는 작품이 상영되는 곳 , 그런 작품을 찾는 이들이 편안하게 자신의 취향을 드러내며 모일 수 있는 곳, 배급 경로를 찾지 못한 창작자들이 자신의 작품을 들고 관객과 만날 수 있는 곳으로서 시네마테크가 다양한 관객층을 끌어모으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렇게 형성된 관객층들이 2000년대 초반, 흔히 ‘한국영화의 화양연화’라고 이야기되는 시기를 불러오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킹덤>의 팬덤 1990년대 가장 ‘힙한’ 공간이었던 이 민간 시네마테크들은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을까. 결론을 대신하여 2024년 주제사에서 가장 핫했던 작품 < 킹덤(Riget) >(라스 폰 트리에, 모턴 안프레드, 1994)과 < 킹덤 2(Riget II) >(라스 폰 트리에, 모턴 안프레드, 1997)에 대한 이야기로 마무리를 짓고자 한다. 두 작품의 상영과 관련된 에피소드들은 시네마테크의 관객층이 갖는 응집력의 폭발 인 동시에 이들이 주류의 문화 안으로 흡수되는 과정 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다.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가 개최된 이후로, 부천의 판타스틱영화제・서울여성영화제・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영화제(SICAFF) 그리고 2000년 전주국제영화제에 이르기까지 각자의 개성을 가지고 만들어진 영화제 들은 영화팬들에게 또 다른 놀이터였다. 영화제는 ‘합법적’으로 새로운 영화를 제공했고 관객들은 그곳에서 마음껏 놀았다. 그리고 영화제에 참여하지 못한 이들에게도 신문 기사나 PC통신 동호회 등등을 통해 참석자들의 뜨거운 후기는 전해졌다. 수보다 중요한 것은 관객들의 열기. < 브레이킹 더 웨이브 >의 감독 라스 폰 트리에가 연출한 무려 4시간 반짜리 영화 <킹덤>이 대표적인 경우. 지난달 30일 자정에 열린 첫 상영에는 4백여 석 극장에 2천여 명이 몰려 급히 다른 극장을 잡아 시차를 두고 두 곳에서 상영했으며 그러고도 수백 명이 발길을 돌려야 했다. - “시네마 부천, 9만 관객 갈채”, 《동아일보》 1997. 9. 6. 26면 기사 영화제가 끝난 뒤에도 <킹덤>과 심야영화 의 붐은 계속 이어졌다. 당시 <킹덤>과 심야상영을 찾던 관객 안에는 좋은 작품을 찾아 헤매는 시네필들도 있었지만, 단순히 심야상영 문화를 즐기고 그 열기에 섞이고 싶은 젊은이들도 모여들었다. 최근 들어서는 심야시사회로 일반화되는 추세.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던 예술영화의 재상영 기회 로도 그 몫을 한다. 심야상영이 인기를 끄는 이유는 우선 값이 싸기 때문이다. 일반영화 한 편 값으로 서너 편의 영화를 볼 수 있는 IMF형 문화상품. 단순한 영화관람에만 그치지 않고 젊음과 영화를 매개로 한 일종의 공동체 의식을 형성한다는 것도 한 이유. 여대생 박진아 양(22)은 “영화관에 있으면 한배에 탄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이심전심으로 통하는 전율과 긴장, 공포와 웃음으로 밤을 지샌 뒤 인적없는 새벽거리로 나설 때의 쾌감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고 말한다. - “값싸고 젊음・마니아 상징에 만원사례, 심야상영 신세대문화로 뿌리”, 《경향신문》 1998. 5. 29. 22면 기사 상대적으로 수도권에 비해 문화적 전파가 더딜 수밖에 없는 지역에서도 뒤늦게 <킹덤>과 심야상영을 즐기려는 관객들이 자신의 지역에 위치한 시네마테크에서의 재상영을 찾았다. 박상백은 “전라도의 모든, 이런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들이 다 왔던 것 같다”라고 당시의 분위기를 표현했는데, 이런 엄청난 관객 동원은 기존 시네마테크를 찾던 시네필들만으로는 이룰 수 없는 것이었다. 박: 그때 부천영화에서 이미 상영을 했었고, 필름으로. 저도 그때 가서 봤고. 열기를 봤었고. 자연스럽게 볼 수 없는 상황이 되니까 비디오테이프로 그거를 작업해서 돌았었어요 . 그래서 그거를 가져다가 이제 상영을 한 건데. … 심야 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그게 또 사람들은 새로운 거에 대한 호기심이나 그런 걸 경험해보고 싶은 충동이 있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들이 잘 이렇게 융합이 돼 가지고 아마 그렇게 많은 관객분들이 오시게 된 단초가 되지 않았나 싶은데. 잘되니까 다른 시네마테크에서도 했었던 걸로 알고 있고. [11] 원: 그중에서 관객들이 제일 많이 봤던 영화가 <킹덤>이라는 영화였어요. 그 영화가 97년도 부천영화제에서 매진이 되고, 그해 12월에 동숭씨네마텍에서 개봉을 했는데, 대구에는 이 영화가 내려올 일이 없다고 생각을 한 것죠. 그래서 2월쯤에 그 영화만 가지고 상영회를 했어요. 근데 어느날 배급사에서 연락이 왔어요. “우리가 그 영화 권리를 가지고 있는 회사인데 무단으로 틀었다고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지금 재산상 손해를 이렇게 봤으니까 만나자.” … “그러면 대구에서 <킹덤>이 개봉되는데 홍보를 하면 어떻겠냐”고 제안 을 주셨는데, … <킹덤>이라는 영화가 우리나라에서 흥행했던 영화들하고 다르게 전국 로드쇼를 했던 영화고. 서울 상영이 대박이 터지면서 부산 상영을 했고, 부산에서도 대박이 터지면서 대구로 이제 상영이 옮아온 거고. 그게 12월이었는데 대구가 2월이니까 한 3개월 뒤에 오는 거잖아요. 그래서 서울에서 홍보가 이미 다 끝났고 지역에서 개봉할 때는 지역 언론사에 별도로 홍보를 해야 되는 필요가 생겼는데. … 또 <킹덤 2> 할 때는 아예 처음부터 ‘지역에 있는 시네클럽들, 시네마테크들하고 홍보를 같이 하자’ 라는 계획을 세웠어요. … 대구에서는 그걸 제가 했던 거고, 광주에는 뭐 광주극장에서 워낙 잘하시니까 그걸 했던 거고. 부산은 뭐 부영극장에서 잘하시니까 그랬던 거고. 대전은 이제 ‘컬트’가 그거를 하게 된 거고. [12] 대전 씨네마떼끄 컬트에서 개최된 ‘킹덤 상영회 포스터’ ※황규석 기증자료 박상백이나 원승환의 말처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킹덤>을 향한 관객들의 뜨거운 열기를 확인한 시네마테크들도 앞다퉈 <킹덤> 상영회를 추진했고, 그 열기에 동참하고, 함께 즐기고자 하는 이들이 찾아오며 시네마테크에서도 연이어 흥행에 성공했다. 이들은 이듬해 <킹덤 2>의 상영회도 추진하고자 했지만 <킹덤 2>의 정식 수입사인 KJ엔터테인먼트에서는 이 시네마테크의 불법적 상영에 제동을 거는 한편으로, 오히려 이들이 갖고 있는 지역에서의 홍보 노하우를 적극 활용하여 전국 상영을 진행했다. 그렇게 <킹덤 2> 역시 흥행에 성공하기는 했지만, 이제 시네마테크들의 입장에서는 합법적 상영 공간에 자신들의 역할을 내어줄 때가 되었음을 깨닫게 되는 일이기도 했다. 그렇게 2000년대에 들어서서 일부 시네마테크 운영자들은 멀티플렉스에 자리를 빼앗긴 소극장이나 각 지역 대표 단관극장들과 손을 잡고 독립·예술영화전용관을 운영하거나, 자신들의 특기를 살려 독립예술영화 배급 쪽으로 자리를 옮겨 활발히 활동을 이어갔다. 그렇게 은밀한, 그래서 더 자유롭고 끈끈했던 관객들, 그리고 그들에게 아지트가 되어준 문화공간들은 사라져 버렸지만, 각 지역의 민간 시네마테크들이 남긴 유산은 여전히 한국영화 산업 내에서 여러 형태로 이어지고 있다. 이들이 지역의 영화문화와 독립・예술영화 산업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를 자세히 알고 싶다면, KOFA컬렉션을 통해 공개된 2024년 주제사 ‘1990년대 전후 지역 영화문화의 변화와 네트워크’ 에서 직접 확인해보도록 하자! *** [1] 공영민 채록연구, 『2024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90년대 전후 지역 영화문화의 변화와 네크워크> 1권: 정희섭・박영정・박상백・송정환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4, 217~218쪽. [2] 공영민・한나리 채록연구, 『2024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90년대 전후 지역 영화문화의 변화와 네크워크> 3권: 이진이・원승환・황규석・강민구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4, 192쪽. [3] 공영민・한나리 채록연구, 《2023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영화문화의 변화와 사설 시네마테크의 활동> 2권: 정성일・이하영・손주연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3, 37~38쪽. [4] 한나리 채록연구, 『2023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영화문화의 변화와 사설 시네마테크의 활동> 3권: 안정숙・곽용수・조영각・김영덕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3, 188~189쪽. [5] 한나리 채록연구, 앞의 책, 101쪽. [6] 한나리 채록연구, 위의 책, 147~148쪽. [7] 한나리 채록연구, 『2023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영화문화의 변화와 사설 시네마테크의 활동> 3권: 안정숙・곽용수・조영각・김영덕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3, 224~226쪽. [8] 공영민 채록연구, 『2024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90년대 전후 지역 영화문화의 변화와 네크워크> 1권: 정희섭・박영정・박상백・송정환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4, 295쪽. [9] 이문주 채록연구,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8권: 박보경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1, 69쪽. [10] 유은정・박지윤 채록연구, 《한국 애니메이션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21권: 손영득 편》, 한국영상자료원, 2021, 95~96쪽. [11] 공영민 채록연구, 앞의 책, 한국영상자료원, 2024, 216~217쪽. [12] 공영민・한나리 채록연구, 앞의 책, 한국영상자료원, 2024, 142~147쪽.
<무소주>(2024)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마땅히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내라. 금강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차이밍량은 2012년부터 <행자(行者)> 연작을 찍기 시작했다. 장소만 달려졌을 뿐 내용은 모두 동일하다. 리캉성이 붉은색 가사를 입고 약간 고개를 숙인 다음 한 손은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어 불가의 공(空)을 표시하고 다른 한 손은 내린 채 펼친 다음, 혹은 마찬가지로 원을 만들어서, 천천히 걷는다. 맥락과 배경, 그리고 거기에 대한 해설을 달 수 있겠지만 영화에서 보는 건 그게 전부이다. 차이밍량은 2013년 < 떠돌이 개 >를 찍은 다음 더 이상 극영화를 찍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물론 언젠가부터 점점 차이밍량의 영화에서 극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 부분들이 희박해져 갔다. 그는 < 안녕, 용문객잔 >(2003)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이미 모두 했다고 말했다. 그렇다고 <행자> 연작을 오래전부터 준비해 온 것은 아니었다. 처음에는 무대에서 시작되었다. 2011년 타이베이 국립극장에서 300석 규모의 무대에서의 공연을 제안받았다. 세 명의 배우를 무대에 불러 각자의 모노드라마를 올릴 계획이었다. 세 명은 양구이메이, 루이징, 그리고 리캉성이었다. 리캉성에게는 일인삼역을 부탁했는데, 리캉성 본인과, 차이밍량의 아버지, 그리고 현장(玄奘)법사였다. 현장법사는 당나라 시대의 승려이다. 불교 교리를 연구하려고 했지만, 그때 중국에는 불교 경전이 없었다. 그래서 경전을 구하기 위해 천축국(지금의 인도)으로 길을 떠났다. 627년의 일이다. 둔황을 거쳐 천축국에서 불경을 얻은 다음 당나라의 수도 장안(長安)으로 돌아온 것은 645년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는 그 여정을 명나라 시대에 신괴소설(神怪小說)로 쓴 오승은 작가의 『서유기』이다. 삼장법사와 세 명의 제자, 손오공, 저팔계, 사오정과 함께 그들을 기다리는 온갖 요괴와 난관을 헤쳐 나가는 모험극. 하지만 무대에서 리캉성은 무얼 하려고 하지 않았다. 대신 사각형으로 된 무대 끝 선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차이밍량은 그 모습이 너무 아름다워서 무대에서 한 번 공연한 다음에 사라져 버리는 게 너무 안타까워 그걸 기록하고 싶어졌다. 이 말을 다시 한 번 옮기겠다. <행자>는 영화로 만들어지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기록하기 위해서 시작되었다. <모래>(2018)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하지만 무대에서 이미 한 것을 카메라 앞에서 반복하지 않았다. 차이밍량은 리캉성에게 붉은 가사(袈裟)를 입히고 길거리로 데려 나갔다. <무색>(2012)이라는 제목의 첫 번째 <행자>는 2012년 타이베이의 야시장(夜市場)에서 걸었다. 아주 느리게 걸었다. 이 해에 세 편의 <행자>를 더 찍었다. 처음에는 상영시간이 짧았지만, 점점 더 길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덟 번째 <행자> 연작인 <모래>(2018)에서 처음으로 1시간 상영시간을 넘어섰다. 아무 사건도 없고, 아무 이야기도 없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아무 대사도 없다. 리캉성은 그저 고개를 숙이고, 언제나처럼 붉은 가사를 입고 한 손으로 엄지와 검지로 원을 만들고 다른 손을 내린 채 맨발로 몹시 천천히, 아주 느리게, 마치 멈춘 것 같은 속도로 걷는다. 하지만 길거리로 나가자 구체적인 문제와 만나야만 했다. 기후의 가혹한 조건. 환경이 요구하는 한계. 한여름 뜨거운 햇빛으로 달궈지다시피 한 말레이시아 쿠칭의 아스팔트 위를 맨발로 걸었고(다섯 번째 <행자>인 <물 위 걷기>) 추운 한겨울 밤에도 도쿄의 길거리도 맨발로 걸었다(여섯 번째 <행자>인 < 무무면(無無眠, No No Sleep) >). 그래서 차이밍량은 모든 테이크를 단 한 번만 찍었고, 리캉성은 같은 장소에서 두 번 걷지 않았다. <행자>는 정신적인 여정이지만 육체적인 기록이다. < 곳 >(2022), < 무소주 >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열 번째 <행자>인 < 무소주(無所住, Abiding Nowhere) >(2024)에서 리캉성은 미국 워싱턴 DC를 걷는다. 아홉 번째 <행자>인 <곳(何處, Where)>(2022)에서 그러했던 것처럼 이번에도 아농 홍앙시가 등장한다. 하지만 두 사람은 만나지 못하고 각자의 일을 각자 한다. 부사(副詞)로서의 각자(各自). 서로 따로따로. 어떤 일? 리캉성은 쉬지 않고 걷고, 아농은 외출하고 돌아와서 면을 끓인 다음 먹는다. 그 둘은 무슨 사이일까. 전주에서 만난 차이밍량은 내게 비밀을 알려주었다. (올해 전주영화제에서 차이밍량 <행자> 전작 회고전을 했고, 차이밍량은 전주에 방문했다. 이때 긴 인터뷰를 할 기회가 있었다. “언지무(言之無)―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 나는 이를 추구한다”, 《필로》 38호, 2024 May_June.) “<행자> 연작 일부분은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 예를 들면 내가 어릴 적에 읽은 『서유기』에 나오는 요괴 같은 개념들을 몰래 넣기도 합니다. 당신에게 알려줄 수는 있지만, 관객들에게 내 생각을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습니다. 확실한 건 <행자> 연작을 찍을 때는 어떤 방법을 통해 표현할지 생각을 많이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파리에서 찍은 <곳> 속의 아농은 거미 요괴를 닮았습니다. 그가 리캉성, 그러니까 행자가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요괴를 닮았습니다. 내 머릿속에는 이런 생각들이 들어있습니다.” 하지만 차이밍량은 거기까지만 비밀을 알려주었다. <무소주>에서 아농이 요괴인지 그렇다면 어떤 요괴인지, 거기까지는 말해주지 않았다. <무소주> 중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무소주>의 마지막 장면에서 석양이 저물어가는 물가를 리캉성이 걷는다. 그때 해가 저물어가면서 물 위로 반사광이 피어오른다. 구태여 비유를 빌리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사바세계(娑婆世界)를 건너서 극락에 이른 것처럼 보인다. 그때 노래가 흐른다. ‘了悟心性究竟之上師祈請文’. 문자 그대로 옮기면 ‘완전한 깨달음을 얻기 위한 스승들의 기도’이다. 이 노래가 들릴 때 리캉성은 마치 긴 여정을 마치는 것만 같다. 차이밍량은 베를린 영화제에서 이 열 번째 <행자>가 연작의 마지막 작품이 될 것이라고 했다. 추신 _ 전주영화제에서 차이밍량에게 열한 번째 <행자>를 제안했고, 차이밍량은 다음 <행자>를 전주에서 찍을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아직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았다. 이것이 새로운 <행자> 연작의 첫 번째 영화가 될지, 아니면 열한 번째 <행자>일지, 그도 아니면 번외편이 될지, 또는 에필로그가 될지, 아무것도 정해진 바 없다고 했다. 나는 두근거리면서 기다리는 중이다. 정성일(영화감독, 영화평론가) l 매일 영화를 보고 종종 영화 평을 쓰고 가끔 영화를 만들고 때로 영화제 일을 한다. 『임권택이 임권택을 말하다』(2003) 인터뷰 진행,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2010), 『필사의 탐독』(2010) 비평집 집필. 첫 영화 < 카페 느와르 >(2009) 이후 < 천당의 밤과 안개 >(2015), < 녹차의 중력 >(2018), < 백두 번째 구름 >(2018) 연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