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간의 야유회
- 감독
- 최하원
- 제작년도
- 1979
- 출연
- 엄인태, 김유정, 주선태, 문정숙, 윤양하, 강계식, 이일웅, 정래협, 최성호, 이치우, 오경아, 안재은
그래서 우리는 유튜브 라이브를 하기로 했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2020년 5월에는 정지돈의 『농담을 싫어하는 사람들』 출간 기념 라이브 북토크를 했고(촬영하던 아이패드 배터리가 중간에 떨어지는 바람에 강제 종료됐다), 2021년 5월에는 오한기의 『인간만세』 출간 기념으로 셋이서 라이브 북토크를 했다(오한기가 화장실에 가야겠다며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갔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줌을 통해 진행했던 것까지 포함하면 라이브 경험은 더 많다. 우리가 연예인도 아니고 무슨 라이브냐고, 너무 민망하다고, 식은땀 흘리며 새하얘진 머리로 아무 말이나 하던 시절은 이제 지나갔다(이제 멀쩡한 정신으로 차분하게 아무 말이나 한다). 그렇지만 이런 적은 처음이다. 정말로… (하나, 둘, 셋-) (심호흡) 1. 23 아이덴티티 -안녕하세요? 우리는 한영한사! 지금부터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신년 특집 유튜브 라이브를 시작하겠습니다. 저는 K정연이고요, 제 옆에는- -안녕하세요 JD입니다. -처음 연재 제안 받고 서교동 카페에 둘이 마주보고 앉아서 도대체 뭘 써야 하나 하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해가 바뀌었어요. 신년인데 어떻게 지내시나요? 근황부터 좀. -네, 저는 요즘 누워 있는데요. 누워서 책도 보고 누워서 소설도 쓰고 밥도 누워서 먹고 지금도 사실 누워 있어요. -세상에, 지금 라이브 스트리밍 중이잖아요! 어떻게 그럴 수 있죠? 독자들을 기만하시는 건가요? How dare? -어차피 안 보이잖아… 근데 꼭 이렇게까지 해야 해요? 이게 뭐야 진짜. 그러게.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하자면 이건 장난이 아니다. 오늘을 위해 나는 유튜브 채널까지 만들었다. 이름은 레코드 디스코드(검색해도 안 나옴), 오디오 비주얼 전문(일단은) 채널이다. 계획은 이랬다. 영자원에 미리 양해를 구해서 라이브 시작과 동시에 유튜브가 임베드 된 연재 페이지를 올린다, 스페셜 게스트들과 함께 2시간 남짓? 지난 10화 동안의 연재를 돌아보고 21세기 한국 영화에 대한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며 앞으로 남은 11화 동안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시간을 갖는다, 라이브가 끝난 다음에는 AI 노트 어플을 통해 자동으로 푼 녹취를 연재 페이지에 추가한다, 클립 일부를 NFT로 판매해서 에세이 필름 제작비를 확보하고 남는 돈은 사회에 환원한다… 다시 봐도 완벽한 계획이다. 단 하나, 유튜브에서 라이브 스트리밍을 하려면 구독자가 1000명을 넘어야 한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지금 구독자가 몇 명이죠? -사실 좀 아까워요. 딱 23명이… -23명이 모자라다고요? -딱 23명이라고요. -그게 뭐가 아까워요? -그럼 안 아까워요? -?? 2. 그는 사막에 서서 인생의 순간들을 세고 있다 1954년 12월 10일 요나스 메카스는 절망적인 소식을 듣는다. 동생 아돌파스 메카스와 뉴욕 언더그라운드 영화계의 다른 백수들과 함께 전설적인(그때는 아니었지만) 영화 잡지 [필름 컬쳐]를 창간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돈이라고는 고작 120달러가 전부라는 소식이었다. 다음 호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돈은 700달러. 메카스는 심플한 해결책을 떠올린다. 편집위원들에게 100달러씩 갹출하는 방법이었다. 참고로 초등학교 시절 나의 꿈은 전국민에게 100원씩 받아서 놀고먹는 것이었다. 물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조지는 남미 여행을 준비하느라 빈털터리 신세였다. 루이스는 잡지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줄 수 있다고 했다(“돈만 빼고”). 메카스 형제는 원래 돈이 없었다. 고든은 돈이 있다, 하지만 돈을 낼 수는 없다, 그건 신념의 문제다, 라고 말했다. 왜? 엘비스 프레슬리 모창 가수와 동명이인이자 훗날 에드워드 마이브리지, 토마스 에이킨스, 미국 영화의 기원에 대한 책을 출간하게 될 고든 헨드릭스가 메카스를 쏘아붙였다. 왜 돈도 없으면서 잡지를 시작한 거야? 최소한 3호나 4호 정도는 낼 돈은 쥐고 있었어야 하는 거 아냐? 만약 우리들이 전부 그렇게 생각했다면 [필름 컬쳐]를 시작하기 위해 22세기까지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메카스는 말했다. 세상에는 돈도 있고 사업 수완도 있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건 돈도 없고 사업 수완도 없는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신은 잔인하다… 무거운 마음으로 집에 돌아온 메카스는 일기장을 펼쳤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오늘 아침 법원에서 소환장이 날아왔다는 얘기는 차마 꺼내지도 못함. 인쇄비를 주지 않았다며 인쇄소에서 우리를 고소했다. 783달러 91센트를 갚아야 한다, 일주일 안에… -제가 하고 싶은 말이 이거예요. -돈도 없고 구독자도 없지만 우리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고요? -신은 잔인하다고요. 3. 볼륨을 높여라! 최근 나는 오디오와 엘피에 빠져 8개월 할부(그 이상은 무이자가 안 됨)로 너무 많은 것을 샀다. 최소한 3/4분기까지는 뭘 사기는커녕 마리모처럼 꼼짝없이(움직이면 돈이니까) 누워 지내야 할 판이다. 마감은 늘 밀려 있고 시간은 부족하고 의욕적으로 시작한 유튜브 채널의 구독자는 23명이다(아마 다 아는 사람이지 싶다). 그렇지만 최근 몇 년 중에 가장 의욕이 넘치고 동시에 홀가분한 마음이기도 하다. 인생, 우주, 그리고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의 답인 42(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 참고)살이 되어서 그런가? 마치 [기나긴 이별]이라고 이름 붙인 장편소설의 초고를 끝낸 레이먼드 챈들러 같은 기분이다. 1952년 5월 14일 담당 편집자에게 보내는 편지를 챈들러는 이렇게 썼다. “나는 이것을 내가 원하던 대로 썼습니다. 왜냐하면 이제 그럴 수 있게 됐으니까요.” 물론 나는 챈들러가 아니다. 일기나 트윗, 심지어 메모조차 내가 원하는 대로 쓰지는 못한다. 영상이라면 조금 다를지도 모르지만, 영상을 다룰 줄도 모르고 다루는 법을 배울 여유도 없다. 하지만 내게는 이미 이중의 우회로가 마련되어 있다. 1)이건 글이 아니라 유튜브 라이브임 2)유튜브 라이브지만 글을 통해서 송출되는 라이브임 말하자면 누구의 눈치도 볼 필요 없는 일종의 회색지대가 있고, 그곳에서 나는 중력의 존재를 모르기 때문에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는 사람처럼 굴 준비가 되어 있다. 개연성과 물리법칙을 가볍게 무시한 채 라이브 스트리밍 도중에 보이스-오버 내레이션을 하기도 하고(이렇게), 중간중간 의미없고 지루한 부분을 빠르게 건너뛰며 플래시 포워드를 하기도 할 것이다(저렇게). 서두르자. 어쨌거나 밤은 짧을 것이고 우리에겐 아직 많은 이야기가 남아 있다. 4. 비카인드 리와인드 -21세기 한국 영화가 < 박하사탕 >과 함께 시작했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아니요? -2000년 1월 1일이 딱 되자마자 개봉했대요. 자정에, 특별 이벤트로. 새로운 천년의 시작을 나 다시 돌아갈래! 하는 절규와 함께 시작한 셈이죠. How ironic? -2000년 1월이면 20세기잖아요. 21세기는 2001년부터고요. -…넷플릭스에 있길래 다시 봤는데 저희가 그동안 연재를 통해 이야기했던 한국 영화의 특질들, 그러니까 목욕탕이니 노래방이니 화면을 가득 채운 K-얼굴의 스펙터클 같은 것들이 전부 나오더라고요. 종합선물세트처럼요. 정말이지 깜짝 놀랐지 뭐예요. 우리가 더듬더듬 어떻게든 길을 찾아가고 있구나, 하는 생각도 들어버렸고요, 하핫. -저기요? -그럼 이쯤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은데요. 이창동 감독은, 그 전직 문화부장관은, 아니 미래의 문화부장관은 과연 <박하사탕>을 통해 어디로 돌아가고자 했던 걸까요? -K정연? 제 말 안 들려요? - 설경구 가 기차 선로에 서서 문제의 대사를 외쳤다는 사실을 주목할 필요가 있어요. 설경구와 충돌한 기차는 뒤로 가기 시작하고요. 1994년 여름으로, 1987년 봄으로, 1984년 가을로, 1980년 5월로, 1979년 가을로, 그리고… -야. 물론 <박하사탕>은 회귀물이다. 그리고 이창동은 21세기 한국 대중서사의 우세종이 된 웹툰과 웹소설의 트렌드를 선취했다. 혹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박하사탕>은 한국 현대사의 외상적인 사건들을 통해 재구성한 ‘60년생 김영호’(아마도 그의 생일은 4월 19일일 것이다)의 이야기다. 그렇다고 이창동이 [82년생 김지영]의 성취를 선취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이창동의 영화가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떠밀리다가 흐름 그 자체가 되는 문제적-남성-개인의 픽션을 보여준다면, 조남주의 소설은 거대서사 속에서 매번 남자주인공의 아내(김여진)로, 정부(서정)로, 작부(고서희)로, 첫사랑(문소리)으로 주변화되고 대상화되는 여성들의 삶-이야기들을 통계와 기사를 재료로 픽션의 형태로 재구성한 것이다, 아주 가까스로(소설이 지영을 진료한 남의사의 진술을 통해 성립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것. 그것이 바로 소설이라는 근대적 양식의 본질이다). 둘의 차이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또 다른 자리가 필요하다. 20년의 시간을 회귀해 스무살의 천변으로 돌아간 김영호는 첫사랑 순임을 다시-처음 만난다. 손으로 뷰파인더를 만들어 주위를 둘러보며 나중에 사진을 찍고 싶다고, 사진기를 메고서 이런 이름 없는 꽃들을 찍고 다니고 싶다던 영호는 순임에게 말한다. -이상해요. 여기 내가 한 번도 와본 적이 없거든요? 근데 옛날에 한 번 와본 데 같아요. 저 철교랑 강이랑 다 낯익어요. 여긴 내가 너무나 잘 아는 데거든요? -그럴 때가 있어요. 그런 건요, 꿈에서 본 거래요. -정말 꿈이었을까요? -영호 씨, 그 꿈이요. 좋은 꿈이었으면 좋겠어요. 그렇지만 그 꿈은 좋은 꿈이 아니고 악몽이고 그 속에서 영호는 스스로 다른 이들이 꾸는 악몽의 주재자가 된다. 그렇기에 그는 손뼉을 치며 ‘나 어떡해’ 노래를 부르다가도 홀로 무리에서 떨어져나와 돌바닥에 누워 철교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눈물 흘리는 것이다: 그는 그것이 꿈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 혹은, 그것이 꿈이라는 걸 알지만 그 꿈에서 깰 수 없다는 것도 안다. 아무리 역사의 열차를 뒤로 가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궤도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따라서 이건 회귀물이라기보다는 루프물이다(“나 ‘다시’ 돌아갈래!”). 정해진 루트를 반복해서 달리는 열차의 운동이 그런 것처럼. 그런데 만약 충분히 많이 되돌린다면 어떨까? 20년이 아니라 아예 100년 쯤을 되돌린다면? 처음으로, 1895년 12월 28일 파리의 그랑 카페에 뤼미에르 형제의 열차가 도착하던 때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세계 규모의 전쟁이나 유대인 문제에 대한 최종 해결책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고 크툴루의 부름은 아직 들려오지 않았으며 원한다면 누구나 아무 거리낌 없이 이름 없는 꽃을 찍고 서정시를 쓸 수 있었던 시대로. 그땐 어쩌면 좋은 꿈을 꿀 수 있을지 모른다. 최소한 더 길고 다채로운 꿈이라도. 그리하여 영호(와)의 악몽이 조금이나마 희석될 수 있도록. 물론 이것은 비약이다. 왜 아니겠는가? -차라리 저는 이렇게 말하고 싶네요. <박하사탕>의 회귀(루프)는 가리봉 봉우회에서 야유회를 갔던 천변에서 시작하고 또 끝나지만, 21세기 한국 영화는 설경구의 외침과 함께 과거(트라우마적)-현재(망가진)의 무한 루프를 벗어나 대과거(기원)로의 동반 회귀를 감행했다고요. -요즘 웹소설을 너무 많이 읽은 거 아니에요? -그곳에서 한국 영화는 현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최소한 현실이 아직-도래하지-않은-척은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한국 영화는 ‘정치적인 것’을 생산해내기를 멈추고, ‘정치’를 서사 내부에 가둔 채 극의 논리에 따라 자체적으로 소멸되고 해소될 수 있는 스펙터클을 더 잘 만드는well-made 일에 매달리기 시작했지요. 그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요. 마크 피셔를 따라 말하자면 21세기 첫 20년 동안 한국 영화의 장르는 단 하나, 바로 자본주의 리얼리즘입니다! -그만! 저는 여기서 나가야겠어요. -한국 최초의 천만 영화가 실화를 바탕으로 한 강우석의 < 실미도 >라는 사실을 기억하세요. 물론 그 영화는 웰메이드가 아니지만요. 거기서 설경구는 1971년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죠. 비겁한 변명입니다… 5. 노 홈 무비 2001년 1월 1일 <박하사탕>과 함께 시작한 21세기 한국 영화의 첫 20년은 2019년 12월 26일 지각 개봉한 허진호 의 < 천문: 하늘에 묻는다 >와 함께 끝난다. 혹은 그보다 조금 이른 7월 24일에 개봉한 송강호 박해일 주연의 < 나랏말싸미 >와 함께 끝났다고 해도 좋다. 둘 다 세종대왕을 내세우고 있다는 게 지금 생각하면 무척 묘하게 느껴진다. 하지만 진정한 끝은 2019년 12월 31일 당시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신문 기사와 함께 왔다(뉴시스, “中 우한서 원인불명 폐렴 환자 집단 발병...당국 긴장”). 돌아보면 21세기 첫 20년의 한국 영화는 대규모 물량 공세와 와이드릴리즈를 통해 누가 천만이라는 깃발을 가져갈 것인가를 두고 다투는 ‘극장전(劇場戰)’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충무로의 토착자본이 CJ나 롯데 같은 대기업의 자본으로 재편된 21세기 한국 영화가 돌아가고자 했던 곳은 어쩌면 스튜디오 제작 체계가 확립되던 무렵의 헐리우드, 황금기라고 불리는 시절의 헐리우드였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것이 더는 불가능해진 지금 한국 영화는 모두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러나 그게 정확히 무엇인지는 누구도 모르는 것처럼,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덩달아 내 인생도 새로운 시기에 접어들었다. 다들 그렇듯 나 역시 종종 새로운 인생을 꿈꾸긴 했다. 회귀나 빙의나 이세계 같은 황당무계한 상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결코 이런 식은 아니었다. 지금 같은 삶은 아니었다. 한동안 내가 그렸던 미래는… 우리 가족이 살 수도 있었을 그것은… 솔직히 나는 <나랏말싸미>가 천만 영화가 될 줄 알았다… 6. 내 차 봤냐? -요즘에도 극장 자주 가세요? -요즘에도 극장 안 가세요? -작년에는 한 번 갔던 것 같아요. 같이 갔잖아요, < 라스트 듀얼 > GV하러. 아 GV 전에 미리 보느라 시사회도 갔었으니까 두 번이죠. 아내가 시간 나면 지돈씨랑 같이 영화나 보라고 유효기간이 12월 31일까지인 라이카 시네마 초대권 두 장 줬는데 결국 그건 못 갔네요. 아쉬워라. -정말… 너무 아쉬워서 눈물이 날 것 같네요… 그래도 올해는 벌써 한 번 다녀왔다. 3시간짜리 영화였으니 1.5번이라고 해야 하나? 맞다, 하마구치 류스케의 < 드라이브 마이 카 > 이야기다. 타임라인에 쏟아지는 트네필들의 기립박수에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과연. 영화는 재밌었다. 중간중간 지루할 법도 한데 3시간짜리 영화라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한 2시간 26분 정도로 느껴졌달까? 물론 엉덩이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나는 욱신욱신 쑤시는 꼬리뼈와 함께 도서관에 갔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원작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어정쩡한 자세로 의자에 걸터 앉아 일기장을 열었다. 그리고 이렇게 썼다. 새삼 느낀 하루키의 인기 비결: 그건 그가 통속성을 다루는 방식에 있는 것 같다. 하루키의 소설은 일종의 제로 콜라다. 통속적인 멜로드라마를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기보다는,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에서 결정적인 ‘X’를 제거한 채 그것에 조금 미달하는 방식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하마구치 류스케는 다르다. 내 생각에, 그건 이 영화가 탐구하는 핵심적인 질문이 통속성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 라는 문제이기 때문인 것 같다. 혹은 이 영화가 탐구하는 핵심적인 질문은 인생을 어떻게 대할 것이냐 라는 문제인데, 하마구치 류스케는 인생이 통속성 그 자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중략…) (…중략…) 다시 말해보자. 가후쿠에게는 맹점이 있다. 아내가 살아 있을 때 발견된 맹점은 아내가 죽은 후 더 커지지도 줄어들지도 않은 채 그 상태 그대로 거기에 있다. 그것이 커지지 않은 이유는 가후쿠가 때마다 안약을 넣기 때문이다. 즉, 가후쿠가 눈물을 흘리기 때문이다! 그는 무엇을 보려하지 않는가? 그건 바로 통속성이다. 정확히 말하면, 통속성 자체가 바로 맹점이다. 통속성이란 어떤 것들을 설명하는 가장 간편한 방식인 동시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그럼 결국 주인공의 녹내장은 나은 건가요? -의사는 정확한 원인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완치가 불가능하다고 말했잖아요. 그럼 정확한 원인을 알게 되면 완치할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닐까요? 물론 이건 제 생각일 뿐이지만요. 진료는 의사에게 약은 약사에게. -저도 재밌고 잘 찍은 영화라고 생각하는데, 몇몇 장면은 도저히 못 참겠더라고요. 특히 마지막 눈밭에서 연설하는 부분. 보면서 진짜 와 저래도 돼? Really? -엄청 뻔뻔하죠. 저도 그 부분 보면서 좀 그랬는데, 이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도 아마 그 부분까지 좋아하는 건 아닐 것 같아요. 다만 뭐랄까, 그 부분이 있기 때문에 영화를 더 좋아할 수는 있겠죠. 어떤 결정적인 작은 흠이 전체를 더 매력적으로 느껴지게 하고, 나아가 옹호해주고 싶게 만드는 것처럼요. 그러니 우리도 좋은 이야기만 하죠. -저는 운전하는 장면들이 좋았어요. -저는 담배 피우는 장면들이 좋았어요. -저는 니시지마 히데토시가 너무 잘생겨서 깜짝 놀랐어요. 원래 이렇게 잘생겼나? 얼굴을 좀 고쳤나? -잠깐, 왜 우리가 <드라이브 마이 카>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하고 있는 거죠? 지금? 한국 영화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기에도 모자랄 판에. 7.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런데 한국 영화가 도대체 뭘까요? 이제 와서 새삼 묻는 것도 우습지만, 연재가 지속될수록 한국 영화가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자꾸 들어요. -언젠가 이승훈 시인(하늘에서 평안하시기를)은 시가 무엇인가를 안다면 우리는 시를 쓸 필요가 없다고 말했어요. 한국 영화가 무엇인가를 안다면 우리는 한국 영화에 대한 에세이 필름을 만들 필요도 없겠죠. 이런 글을 쓰고 있을 이유도요. -한국 영화를 새롭게 발견하려고 하고 있다는 말인가요? -내 인생을 새롭게 발견하려고 하고 있다. 그렇다. -?? 왜 갑자기 반말…? -정신 차리세요! 지금 우리에게는 격식이나 따지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틱톡 틱톡! 단도직입적으로 물을게요.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한국 배우들이 셋이나 출연하고 한국말도 자주 나오죠. 한국인 스텝들도 여럿 참여했고요. 에필로그 같은 마지막 장면의 배경이 부산이기도 한데요, 그럼 <드라이브 마이 카>는 한국 영화일까요 아닐까요? A)한국 영화라면 그 이유는? B)한국 영화가 아니라면 그 이유는? -갑자기 그런… -그만! 대답하지 마세요. 어차피 시간도 없으니까! 결론부터 말하겠습니다. 중요한 건 <드라이브 마이 카>가 한국 영화냐 한국 영화가 아니냐가 아니에요. <드라이브 마이 카>를 한국 영화로 받아들일 것인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인가가 문제인 거죠. -받아들인다고요? -아카데미 위원회가 21세기의 새로운 20년을 맞아 < 기생충 >을 미국 영화로 받아들인 것처럼요. -도대체 누가 <드라이브 마이 카>를 한국 영화로 받아들인다는 건데요? 무슨 자격으로요? -그건… 그때 갑자기 화면 멈추고, 멈춘 화면 위에 빨간 자막이 뜬다. (자막) “K-씨네필의 이름으로(In The Name of The K-inephile)” (To be continued…)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2001년 | 좋은영화 감독: 김상진 | 원안: 이해영 이해준 김영호 | 각본: 박정우 | 제작: 김미희 | 기획: 강우석 | 촬영: 정광석 | 미술: 조성원 | 음악: 손무현 CAST 박영준: 이성재 | 최기동: 차승원 | 민주란: 김혜수 | 민주섭: 이종수 | 천수: 이원종 | 덕섭: 성지루 | 넙치: 유해진 2000년대 전반기 한국영화의 가장 강력한 트렌드 중 하나는 이른바 ‘조폭 영화’였습니다. < 친구 >( 곽경택 , 2001)를 필두로 < 달마야 놀자 >( 박철관 , 2001) < 조폭 마누라 >( 조진규 , 2001) < 가문의 영광 >( 정흥순 , 2002) 등은 모두 이후 시리즈로 이어지는 흥행작들이었죠. <신라의 달밤>도 이 시기 나온 영화였고 큰 흥행을 기록한 작품입니다. < 주유소 습격사건 >(1999)로 상승곡선을 그리기 시작한 제작사 좋은영화와 김상진 감독이 다시 만난 이 영화는, 조폭 영화이면서 동시에 삼각관계를 그린 로맨틱 코미디라는 점에서 독특합니다. 현장 공개는 주란(김혜수)이 경영하는 ‘주섭이네 라면’ 가게입니다. 주섭(이종수)이는 주란의 말썽쟁이 동생으로 조폭이 꿈인 고등학교 ‘짱’이죠. <신라의 달밤>에서 이 공간은 주란과 영준(이성재)과 기동(차승원)의 관계가 시작되고 변화하는 중요한 곳인데요, 영화를 위해 지은 오픈 세트입니다. 꽤나 그럴 듯해서, 촬영 기간 동안 진짜 분식집인 줄 알고 찾아온 사람들도 있었다고 하네요. <신라의 달밤>의 가장 큰 갈등은 영준과 기동 사이에서 생깁니다. 두 사람은 고등학교 동창이죠. 차승원이 역할을 맡은 기동은 당시 ‘짱’이었지만 이젠 모교의 체육 교사입니다. 한편 과거 ‘범생이’였던 영준은 지금 조폭이 되어 있죠. 하지만 겉모습만 보면, 기동이 조폭 같고 영준이 선생님 같습니다. 사실 차승원과 이성재는 < 자귀모 >( 이광훈 , 1999)에서 만난 적이 이었는데요, <신라의 달밤>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친해졌습니다. “내성적인 성격의 이성재와 외향적인 제 성격으로 인해 껄끄러운 부분이 있을까 걱정이 되기도 했죠.” 하지만 기우였고, 두 사람은 금방 편한 관계가 되었다고 합니다. 주란과 동생 주섭. 주섭은 매일 같은 싸움질에 얼굴에 상처가 가실 날이 없습니다. 코미디 이미지가 강한 배우지만, 놀랍게도 <신라의 달밤> 이전에 차승원은 코미디 영화에 출연한 적이 없었습니다. < 세기말 >( 송능한 , 1999) < 리베라메 >( 양윤호 , 2000) 등에서 비열하거나 악한 캐릭터를 맡았는데요 <신라의 달밤>에서 확실하게 이미지가 변하죠. 이후 < 광복절 특사 >(김상진, 2002) < 라이터를 켜라 >( 장항준 , 2002) < 선생 김봉두 >( 장규성 , 2003) < 귀신이 산다 >(김상진, 2004) 등이 연이어 흥행에 성공하면서, 2000년대를 대표하는 코미디 배우가 됩니다. 사실 이성재가 맡은 영준은 쉽지 않은 캐릭터였습니다. 영화에선 아무래도 기동이 돋보였고, 영준은 뉘앙스를 통해 연기해야 하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기동처럼 내지르는 캐릭터가 아니었으니까요. 그런 면에서 이성재는 매우 뛰어나게 임무를 완수하고 있는데요, ‘젠틀한 조폭’인 영준은 부드러우면서도 은근한 살기를 지니고 있습니다. 한편 3월의 촬영 현장은 꽃샘추위가 대단했는데요, 설정상 가을 양복을 입어야 했던 이성재는 꽤나 추위 때문에 고생을 했지만, 일단 촬영에 들어가면 그런 기색을 내지 않았습니다. 1998~2000년에 <김혜수의 플러스유>를 진행하면서 김혜수는 다시 배우로 돌아오기 위해선 새로운 이미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런 점에서 <신라의 달밤>은 그녀에게 유쾌한 선택이었던 셈입니다. 여행 중이던 비행기 안에서 시나리오를 읽고 출연을 결심했다고 하네요. 차승원과 김혜수는 동갑내기이자 이미 <김혜수의 플러스유>에서 MC와 게스트로 만난 적이 있었죠. 그런 이유로 별 어려움 없이 공연할 수 있었고, 호흡도 잘 맞았다고 합니다. 차승원은 김상진 감독의 전작 <주유소 습격사건>에 카메오로 출연했지만 편집 과정에서 아쉽게 잘린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김 감독에 대한 애정(?)은 여전했고, <리베라 메> 촬영이 끝날 즈음 <신라의 달밤> 시나리오를 접한 후 읽자마자 출연을 결정했다고 합니다. 주란과 영준 사이에 약간 어색하면서도 미묘한 감정이 흐르는 장면을 연출하고 있는 김상진 감독입니다. 사실 이 영화를 김 감독이 연출하기까진 약간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습니다. 원래 이 영화는 강우석 감독이 연출할 예정이었죠. 그런데 잘 풀리지 않았고, 강우석 감독의 조감독 출신인 김상진 감독이 개입하면서 일이 풀리기 시작했고 결국 직접 메가폰을 잡게 되었습니다. 김 감독은 박정우 작가와 함께, 가장 먼저 조폭과 교사의 성격을 바꾸었다고 하는데요, 원래는 교사가 과거엔 짱이었고 조폭은 예전엔 모범생이었다는 설정을 넣은 게 ‘신의 한 수’였다고 합니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베테랑 중의 베테랑인 정광석 촬영감독이 잡았습니다. < 동감 >( 김정권 , 2000) 포스팅 에서도 언급했던 정광석 촬영감독은 1960년대부터 활동했던, <신라의 달밤> 현장에선 60대 중반이었던 카메라의 장인이죠. 그럼에도 직접 크레인에 올라가 뷰파인더를 직접 챙기는 모습이었습니다. 김상진 감독은 다음 작품인 <광복절 특사>(2002)도 정광석 촬영감독과 함께 했습니다. 이 날 촬영은 조금 정신 없었는데요, 분식집에 걸려 있는 여러 신을 한꺼번에 찍었기 때문이죠. 그 중 한 장면은 분식집을 찾아온 기종이 굳게 잠긴 문을 보고 이상한 낌새를 채는 신이었습니다. 주란과 영준이 함께 야유회를 간 것이었는데요, 기동만 허탕 친 게 아니었죠. 여학생 세 명도 분식집 문이 잠겼다며 다른 곳으로 가는데요, 이 학생들은 현장에서 캐스팅 했습니다. 하교 중이던 경주여중 학생들이었는데요, 한 번의 NG도 없이 한 번에 오케이 사인을 받아 스태프들의 박수를 받았습니다. 엉겁결에 분식집 일을 돕게 된 기동의 엉거주춤한 모습입니다. <신라의 달밤>이 7번째 영화인 차승원은 코믹 연기가 처음이었습니다. 그래서 심적인 부담감도 적지 않았다고 합니다. “코미디는 해보니까 정말 어렵더라고요. 웃기기 위한 설정으로 장면을 만들어내는 건 사실 뻔하잖아요. 상황이 만들어내는 웃음, 그래서 박장대소할 수 있는 웃음이라야 먹히는 거죠. 근데 그게 쉽지 않더라고요.” 김혜수 이성재 차승원의 조합이 좋았던 로맨스 조폭 코미디 <신라의 달밤>. 원래는 강우석 감독이 고소영 이성재 박중훈 캐스팅으로 찍으려 했던 작품이었다고 합니다. 이미지 디지털화 지원 NAVER
1990년대 중후반 한국 사회와 영화계 한국 사회가 언제 평탄한 적이 있었을까 싶지만, 1990년대 중후반 역시 엄청난 시련과 문화적 역동이 함께한 시기였다. 1993년 출범한 김영삼 정부는 개혁 행보로 국민의 지지를 얻었지만, 정권의 부패에 1997년 국가 부도 사태까지 직면하며 국민을 궁지로 내몰았다. 6·25전쟁 이후 최대 국난이라 불린 외환위기는 1997년 12월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을 받고서야 간신히 넘길 수 있었고, 바로 그때 1971년부터 대통령에 도전했던 김대중이 당선되며 1998년 국민의 정부가 서막을 올렸다. 하지만 새로운 희망을 품기에는 국민의 삶이 너무 고단했다. 생활고로 인한 자살과 ‘IMF 생계형 범죄’가 속출하는 가운데, 보험금을 받으려는 아버지가 어린 아들의 손가락을 자른 끔찍한 사건이 그 비극의 정점을 찍었다. 2000년을 기점으로 눈물의 카타르시스로 영화적?사회적 갈등을 봉합하는 신파·멜로드라마 장르가 약화되고, 잔혹한 폭력이 전시되는 ‘조폭영화’ 그리고 범죄스릴러 장르가 득세하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1990년대 후반의 한국 사회가 이미 예견하고 있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한편 1990년대 중후반은 ‘문화의 시대’라고 불리기 시작한 때였다. 새로운 밀레니엄과 함께 찾아온 ‘문화의 세기’, 그 전조였을 수도 있다. 정치, 경제 등 사회 전반이 문화라는 프리즘으로 매개되었고, 정치·경제 권력으로부터 예속되지 않는 문화 영역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1995년 1월 TV 드라마 <모래시계>가 한국 정치사와 멜로, 액션 장르를 결합하며 선풍적 인기를 끌었고, 온 국민의 뇌리에 ‘조폭’ 이미지를 각인하기도 했다. 그해 ‘서태지와 아이들’이 ‘시대유감’의 노래 가사 심의로 공연윤리위원회와 맞서는 사건이 있었고, 1996년 1월 그들의 은퇴 기자회견은 10대뿐만 아니라 온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1996년 6월에는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음반 사전심의가 폐지되었다. 이는 가수 정태춘·박은옥이 사전 심의를 받지 않은 ‘불법’ 음반을 제작하고 유통하는 방식으로 1990년부터 투쟁해온 결과이기도 했다. 한국 대중예술의 영향력을 의미하는 ‘한류(韓流)’라는 용어가 중국의 한 매체를 통해 처음 등장한 것도 1997년이다. 할리우드 외화 직배로 위기를 맞은 한국영화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내고 문화계의 중심으로 진입하기 시작한 것도 바로 이때다. 물밀듯이 들어오는 외화의 틈바구니 속에서 1997년부터 25% 선을 회복한 한국영화 점유율은 1999년 39.7%까지 올랐다. 서울 관객 기준으로 1995년 < 닥터 봉 >(이광훈)이 37만, 1996년 < 투캅스 2 >(강우석)가 63만, < 은행나무침대 >(강제규)가 45만, 1997년 < 접속 >(장윤현)이 67만, 1998년 < 편지 >(이정국)가 72만, < 약속 >(김유진)이 66만, 1999년 < 쉬리 >(강제규)가 244만, < 주유소 습격사건 >(김상진)이 96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한국영화 흥행을 견인했다. 특히 <쉬리>는 전국 스크린 수가 600개도 되지 않던 시절, 처음으로 전국 58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하며 2000년대 한국영화의 ‘1천만 관객 시대’를 예고했다. 1990년대 중후반의 산업적 활력이 작가주의 감독의 시대를 만들어낸 것도 주목할 부분이다. 젊은 감각의 영화사들은 흥행뿐만 아니라 작품성까지 고려할 패기가 있었고, 작가라 불리는 신인 감독들 역시 대중영화와 예술영화의 접점을 적극적으로 고민했으며, 이를 고대하는 젊은 관객들이 한국의 영화문화 지형을 새롭게 짜고 있었다. 특히 <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 >(1996)로 데뷔한 홍상수가 < 강원도의 힘 >(1998)을 이어가며 모더니즘 영화의 본격적인 흐름을 만들었고, < 악어 >(1996)로 데뷔한 김기덕은 원초적인 에너지와 남근 중심적인 폭력성이 찬반의 평가를 낳는 가운데 국내외 마니아층을 확보하고, 2004년 베를린(< 사마리아 >)과 베니스(< 빈집 >)의 감독상을 석권하기도 했다. 치열한 창작의 고통을 원고지에서 스크린으로 옮겨간 이창동 감독은 < 초록물고기 >(1997)에 이은 < 박하사탕 >(2000)으로 세계적인 작가주의 감독으로 도약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편 박찬욱 감독은 영화광으로서의 취향을 앞세운 데뷔작 < 달은 해가 꾸는 꿈 >(1992)과 < 3인조 >(1997)를 내놓으며 관객과의 접점을 찾는 데 더딘 행보를 보였지만, < 공동경비구역 JSA >(2000)로 흥행과 비평을 두루 만족시키며 2000년대 ‘웰메이드(well-made) 영화’의 흐름을 만들어냈다. 단편영화, 시네마테크, 국제영화제, 영화저널 등 한국의 영화문화가 새롭게 꽃피기 시작한 점도 반드시 언급해야 할 것이다. 단편영화가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가능성을 점치는 통로가 된 것도 바로 이때다. 특히 1994년부터 4년간 대기업(삼성나이세스)이 주관한 서울단편영화제를 통해 임순례 , 김태용 , 민규동 , 곽경택 , 정지우 , 정윤철 , 윤종찬 등 주요 감독이 배출되었는데, 국립영화학교라 할 한국영화아카데미의 졸업생과 유학파 출신이 많았다. 1995년 한국 최초의 영화전문 주간지 「씨네21」에 이어 마니아층을 겨냥한 「키노」가 창간되었고, 1996년 부산국제영화제의 출범을 위시로 1997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가 이어진 것도 한국 영화문화의 자양분이 되었다. 소설가 출신 감독의 치열한 행보 1954년 대구에서 태어난 이창동 은 경북대 국어교육과 졸업 후 1981년부터 1986년까지 고등학교 국어 교사로 살았다. 1983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중편 부문에 「전리」가 당선되어 소설가로서의 삶도 시작했는데, 1992년 한국일보 문학상을 받은 「녹천에는 똥이 많다」 등의 소설을 썼다. 영화계 입문은 박광수 감독이 권유했다고 한다. 마흔이던 1993년 < 그 섬에 가고 싶다 >(박광수)의 각본과 조감독으로 첫 영화 작업에 참여했다. 그는 충무로의 전통적인 도제식 연출부를 거친 게 아니라 문학적 자산과 치열한 창작 정신을 바탕으로 영화계에 진입한 경우다. 1995년에는 <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박광수)로 그해 백상예술대상 각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그의 영화 세계가 형성되는 데 1980년대 후반 ‘코리안 뉴웨이브’ 감독들과의 영향 관계도 감지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감독 데뷔는 명계남, 문성근, 여균동이 만든 이스트필름의 창립작 <초록물고기>에서다. 이 영화는 이창동 감독 만들기 프로젝트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그해 주요 영화제의 각본상, 신인감독상, 감독상을 휩쓸었다. 두 번째 영화 <박하사탕>은 스무 살의 순수한 청년 영호가 1980년 광주의 경험으로 점차 영혼이 파멸되어가는 것을, 1999년에서 1979년으로 2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그려낸 작품이다. 이 영화는 2000년 1월 1일 0시에 개봉했는데 21세기라는 막연한 희망에 들뜬 한국 사람들에게 비극적 현대사를 상기시키고 싶었기 때문일 것이다. 체코 카를로비바리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수상했고, 칸국제영화제 감독 주간에 초청됐다. 세 번째 영화 < 오아시스 >(2002)에서는 장애인 여성과 하류계층 청년의 러브스토리를 통해 한국 사회의 기저를 형성하는 가족 이데올로기의 민낯을 드러냈고, 59회 베니스국제영화제 감독상과 신인배우상(문소리)을 수상했다. 네 번째 영화 < 밀양 >(2007)과 다섯 번째 영화 < 시 >(2010)는 아들을 잃은 여성과 성폭행을 저지른 외손자를 키우는 여성을 통해 인간의 고통과 치유에 대해 질문했고, 칸영화제에 진출해 각각 여주우연상(전도연)과 각본상을 수상했다. 8년 만의 연출작 < 버닝 >(2018) 역시 71회 칸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했다. 영화 속 종두와 벤의 세계는 <초록물고기>에서 막동이와 배태곤이 그려낸 한국 사회가 20년의 시간이 흐른 모습처럼 보이고, 좀처럼 소설을 쓰지 못하는 종두는 이창동 자신으로 읽히기도 하는 작품이다. 한편 그는 2003년 2월 노무현 정부 출범과 함께 현역 영화감독으로는 처음으로 문화관광부 장관에 임명되어 1년 4개월간 관직을 수행하기도 했다. 이스트필름 사람들. 왼쪽부터 명계남, 이창동, 문성근, 여균동 순수한 청년 막동이의 꿈과 비극 영화는 군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한 청년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열차의 난간에 매달려 밖을 바라보던 청년은 앞 칸에서 똑같이 난간에 매달려 있는 한 여성을 발견하는데, 그녀에게서 날아온 장밋빛 스카프가 그의 얼굴을 감싼다. 남자는 전역 후 일자리를 찾아야 하는 막동이( 한석규 )이고 여자는 밤무대 가수인 미애( 심혜진 )다. 스카프를 돌려주려고 미애를 찾던 막동이는 그녀를 괴롭히던 불량배들과 시비가 붙어 폭행을 당한다. 한국 사회의 가장 폭력적인 공간을 막 벗어난 그가 또다시 폭력과 맞닥뜨린 것이다. 분을 삭일 수 없는 막동이는 복수하기 위해 불량배들을 따라 내리지만 결국 기차를 놓치고 짐까지 잃어버린다. 밤늦게 일산의 고향 마을로 돌아온 막동이는 어머니와 뇌성마비 장애가 있는 첫째 형을 만나지만 다른 형제들은 이미 각자의 삶을 찾아 흩어진 후였다. 이어 영화는 막동이가 계란 장사를 하는 셋째 형과 다방 레지로 일하는 여동생을 만나는 모습을 보여주며 신도시로 급변한 일산의 풍경을 담아낸다. 막동이는 미애가 남긴 전화번호를 들고 서울로 가 성인 나이트클럽에서 노래 부르는 그녀를 만나게 된다. 사실 미애는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는 조직 보스 배태곤( 문성근 )의 연인이었다. 그녀의 부탁으로 태곤은 막동이에게 주차장 관리 일을 소개해주고, 그는 자신의 손가락까지 부러뜨려가며 배태곤의 재건축 개발 건을 해결해 조직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진다. 한편 미애는 막동이에게 사랑을 느끼지만 배태곤을 벗어날 수 없는 현실에 절망한다. 배태곤의 옛 보스이던 김양길이 출소해 인근의 나이트클럽을 운영하며 구역을 침범해오자, 태곤은 막동이에게 양길을 살해할 것을 지시한다. 그는 간직해오던 미애의 스카프를 태운 후 김양길을 살해하고, 큰형에게 전화해 어린 시절 초록물고기를 잡던 이야기를 하며 두려움과 눈물을 삼킨다. 왜 한석규가 1990년대 중후반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얼굴이었는지를 보여주는 명장면일 것이다. 배태곤은 재개발을 앞둔 건물로 막동이를 불러내 칼로 찌르고, 그는 태곤의 차 앞 유리에 쓰러져 미애를 쳐다보며 죽어간다. 시간이 흐른 후 막동이의 꿈대로 가족들이 함께 모여 식당을 한다. 태곤과 임신한 미애가 우연히 식당에 들르고, 그녀는 생전의 막동이가 준 사진 속 고향집이 이 식당임을 알고 오열한다. 장르적 공감대와 리얼리즘의 양식 <초록물고기>가 보여주는 사실주의 영화 스타일은, 국내외 영화평론가들이 언급한 것처럼 허우 샤오시엔 등 대만 뉴웨이브 영화와 연결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1980년대 코리안 뉴웨이브의 자산을 물려받은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창동만의 화법과 작가적 인장이 이 영화에 새겨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는 한국 사회의 단면을 예리하게 포착하고 그곳에서 파멸해가는 순수한 주인공을 통해 관객과의 정서적 공감대를 구축해간다. 이창동의 영화 역시 코리안 뉴웨이브 영화와 마찬가지로 한국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고 그 방법론으로 리얼리즘적 태도를 견지하는 동시에, 동시대 관객과의 소통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하지만 그의 영화는 분명히 다른 지점에서 태어난 것처럼 보인다. 이는 필름 누아르 혹은 갱스터 장르에 기대면서 그 장르적 언어를 예술영화의 것으로 소화해내는 순간, 지극히 양식적인 카메라의 움직임을 통해 리얼리즘적 접근과 관객의 영화적 몰입이라는 두 가지 기능을 완수해낼 때, 환상은 현실과 양면처럼 붙어 있다는 그의 세계관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으로 영화는 서울 영등포의 유흥가와 재개발 지역을 배경으로 조직폭력배들의 면면을 그린 누아르 장르이면서도, 영화적 세계(디제시스)와 현실 세계(리얼리즘)를 밀착시킨다. 당시 관객들로부터 진짜 깡패를 섭외한 것인지 기함하게 만든 배우 송강호의 연기도 오랫동안 회자된 바 있다. 막동이가 초록물고기의 사연을 관객에게 알려주는 공중전화 박스 신도, < 열혈남아 >(왕가위, 1988) 같은 홍콩영화와 < 게임의 법칙 >(장현수, 1994)을 경유해 이창동만의 것으로 수용되었다. 고향집에 돌아온 막동이가 군복 상의를 던질 때의 슬로모션 처리 역시 홍콩 누아르의 장르적 관습이 작가영화의 예민한 언어로 승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 영화의 사실주의 화법은 카메라의 움직임과도 관련해 생각해볼 수 있다. 영화는 중요한 순간마다, 카메라의 전지적 시점과 주인공인 막동이의 시점을 합치면서 리얼리즘을 배가한다. 자신을 구타한 불량배들에게 복수하기 위해 트로피를 들고 그들을 따라갈 때, 막동이의 시점처럼 보인 주관적 숏은 그가 프레임 인(frame in)하며 다시 제3자의 객관성을 확보한다. 막동이가 처음 나이트클럽으로 들어갈 때 또 배태곤 일파가 자리한 룸으로 들어갈 때도 그와 카메라의 시점 숏은 합쳐진다. 카메라는 막동이의 시선처럼 움직이기도 한다. 그가 옛날 아카시아 천지였던 들판이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고 얘기할 때, 막동이를 비추던 카메라는 그의 시선을 따라 팬(수평 이동)하고 점차 그의 얼굴을 가깝게 잡아낸다. 어머니의 생일을 맞아 마련한 모처럼의 야유회가 아수라장이 될 때도 자동차로 빙빙 돌며 그 난장판을 지켜보는 시점은 카메라의 것이기도 하고 막동이의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카메라의 운용은 고 유영길 촬영감독의 스타일이 이창동의 영화 세계로 수용되었다는 점에서, 코리안 뉴웨이브의 자산을 물려받은 대목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막동이의 시점이 카메라의 전지적 시점으로 합일되는 연출은 이 영화가 줄곧 그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과도 연결 지어 생각해볼 수 있다. 영화는 곧잘 거울 프레임 속 막동이를 잡으며 그를 하나의 이미지로 정박시키고 현실 너머의 존재인 것처럼 묘사한다. 기차의 화장실에서, 고향집의 방에 돌아왔을 때 또 자신의 손가락을 자해하는 화장실 신에서 거울에 비친 그의 모습을 카메라가 먼저 포착하는 것이 그렇다. 물론 이는 20대 청년 막동이가 꿈(환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고뇌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영화에서 가장 불가해한 부분은 막동이가 고향집에 돌아왔을 때다. 그는 이미 이 세상 존재가 아닌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막동이와 어머니를 비추고 있지만 어머니는 오랜만에 돌아온 막동이의 말소리를 전혀 듣지 못하고, 어머니의 대사는 막동이의 옛날 사진을 보여주는 인서트 이미지에서 들릴 뿐이다. 즉 둘의 대화는 성립되지 않는다. 큰형이 동네 어귀에 나와 그를 기다리는 장면에서도, 막동이는 커트되지 않는 숏을 통해 마치 귀신처럼 나타난다. 어쩌면 영화는 막동이가 이미 죽은 존재와 다를 바 없거나,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살아가야 함을 말하고 싶은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 한국영화, ‘웰메이드’라는 브랜드 1990년대 후반 다양한 개성을 가진 신인 감독들이 등장했고 이들의 역동성은 2000년대 한국영화가 산업적 활기와 장르적 완성도를 갖추는 기반이 되었다. 그들은 ‘충무로’라는 상업영화 시스템을 활용해 영화를 만들면서 본인만의 개성을 새기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특히 2003년 흥행성과 작가주의적 완성도를 겸비한 < 살인의 추억 >(봉준호), < 장화, 홍련 >(김지운), < 스캔들-조선남녀상열지사 >(이재용), < 올드보이 >(박찬욱) 등이 선보이며 ‘잘 만든’ 상업영화를 뜻하는 ‘웰메이드 영화’가 한국 영화산업의 새로운 화두로 등장했다. 장르영화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미학적, 기술적 완성도의 최고점에 도달한 영화들은 2004년 < 범죄의 재구성 >(최동훈), < 효자동 이발사 >(임찬상), 2005년 < 혈의 누 >(김대승), < 달콤한 인생 >(김지운) 등으로 이어진다. 한국 사회의 예민한 주제들을 장르적으로 해석하며 예술성까지 확보한 2000년대의 한국 상업영화는 해외에서도 인정받았다. 이는 < 복수는 나의 것 >(2002), < 올드보이 >, < 친절한 금자씨 >(2005) 등 복수 연작에서 작가주의적 미장센의 향연을 보여준 박찬욱이 주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