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정야화
- 감독
- 윌리엄 와일러
- 제작년도
- 1951
- 출연
- 커크 더글라스, 엘레노 파커, 윌리암 벤딕스
약초극장은 대정관의 운영자 오카모토 세이지로(岡本淸次郞)가 대정관의 흥행권을 가지고 1935년 12월 경성부 약초정 41번지에 설립한 영화관이다. 약초극장의 설립은 대정관과 관련이 있다. 1934년 7월 쇼치쿠가 오랜 파트너인 대정관을 대신하여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를 쇼치쿠의 경성 개봉관으로 바꾸자, 쇼치쿠 2번관으로 전락한 대정관은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게 된다. 1934년 10월 후쿠자키 하마노스케(福崎濱之助)에 이어 대정관을 운영하게 된 오카모도 세이지로는 대정관이 쇼치쿠 2번관으로 남느니 후발주자인 PCL의 경성 봉절관이 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동년 11월 15일 PCL과 경성 봉절관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대정관은 서울의 가장 오랜 영화관이자 낙후한 극장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열악한 상태였기에 PCL의 경성 봉절관의 지위도 동아구락부로 넘어가게 된다. 대정관에서는 다이토(大都)의 영화를 상영하면서 향후 쇼치쿠영화의 경성봉절관이 되기 위해 약초정 큰길가에 약초영화극장을 신축하기로 한다. 1935년 7월 건축허가를 얻은 오카모도는 9월 말 상량식을 거행하고 극장 설립 공사를 시작한다. 극장의 설계는 조선공업협회 부회장 가와자와 미치마사(川澤道正)가 담당했으며, 건축은 이쿠타구미(生田組)에서 맡았다. 총 공사비 218,000원을 들인 이 극장은 대지 면적 약 300평, 건축연면적은 658평에 철골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지상 4층 건물이었으며 총 좌석수 1,172석(1943년 현재 1,000석)의 대형극장으로 2개층의 관람석을 가진 순수 영화관으로 계획되었다. 1935년 12월 16일 대정관이 문을 닫았고 경성 최초의 신양식 대영화극장(“京城 最初의 新樣式 大映畵劇場)”으로 광고된 약초극장은 1935년 12월 30일 낙성식을 거행한 후, 다음날인 12월 31일부터 흥행을 시작했다. 개관 기념 작품으로 유니버설 초특작 괴기영화 <화석인간>(Night Life of the Gods, 1935)과 다이토(大都)영화사의 <검운용호당>(劍雲龍虎黨)과 <말괄량이와 소년>(ジャジャ馬と坊や)이 상영되었다. 쇼치쿠의 경성 봉절관이 되려는 시도는 쇼치쿠가 명치좌(明治座)의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와 손을 잡으면서 실패했다. 약초극장은 1930년대 들어선 1,000석 이상의 거대한 토키극장의 효시였다. 황금좌, 명치좌, 경성극장과 더불어 4대 상설관으로 조선의 극장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보니 당국에서는 이들 1류급 극장들을 각종 선전활동에 이용했는데 중일전쟁 발발 이후인 1938년 12월 본정경찰서에서는 약초극장과 더불어 명치좌, 황금좌, 낭화관에 아래와 같은 방첩표어를 게시하도록 했다. 1. 우리들 총후국민은 힘을 다하여 스파이의 암약을 방지하자. 2. 우리들 총후국민은 군기를 잘 지킴으로써 군기보호를 다하자. 3. 우리들 총후국민은 정치경제 각반의 국정의 비밀을 잘 지킴으로써 국방력을 한층 더 굳세게 하자 4. 우리들 총후국민은 황도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항상 눈과 귀를 잘 활용함으로써 스파이를 없이하자. 오카모토흥행부가 맡아 운영하던 약초극장은 개관 초기 서양영화를 위주로 프로그램을 편성하였다가 점차 일본영화를 늘려나갔다. 서양영화의 경우 계통과 상관없이 자율 배급이던 상황에서 1935년부터 1939년 사이에는 할리우드 영화를 주로 상영했으며 할리우드 영화의 상영이 금지된 이후에는 독일 영화를 주로 상영하였다. 일본영화의 경우 개관 초기 다이토영화가 토키영화관에 걸맞지 않은 프로그램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자 1936년 4월 이후에는 PCL 영화로 계통을 바꿔 상영하였다. 경성의 PCL 봉절관으로 인식되던 약초극장은 1940년에 일어난 9개월에 걸친 흥행권 분규로 큰 손해를 입기도 했다. 사건의 발단은 1940년 2월 약초영화극장이 PCL의 후신인 도호(東寶) 영화의 경성개봉관 지위를 포기하고 신코키네마(新興キネマ)와 계약을 체결하여 신코의 개봉관이 되자 도호가 위약금 5만원을 청구하였다. 도호의 소송에 약초극장이 신코키네마와 계약을 해지하고 다시 도호영화를 상영하기로 결정하자 이번에는 신코키네마에서 약초극장에 대해 7만원의 소송을 시작했다. 도호와 신코를 대상으로 한 흥행권 계약 문제는 결국 약초극장 운영자 오카모도 세이지로가 신코에 위약금 1만 5천원을 지불하고 도호영화를 계속 상영하기로 확정하면서 9개월에 걸친 분규는 일단락된다. [자료] 1941년 6월 설립된 약초악극단(《매일신보》, 1941.06.08) 중일전쟁이 장기화 되어 필름 부족현상이 일어나자 약초극장에서는 어트랙션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악극을 영화와 함께 상연하기로 하고 전속의 악극단을 두기로 하고, 1941년 6월 조선연예기업사 사장 안익조가 주재하는 신흥악극단을 전속으로 삼았다. 신흥악극단이 이름을 바꾼 약초악극단 내에는 정대택, 김영택, 백란, 김연실 등 연극, 영화계에서 활약하는 인물들과 밴드까지 60여명의 단원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개막 공연작은 박운학 연출의 <그리운 멜로디>, <반도의 선율> 등이었다. 약초극장의 어트랙션의 큰 인기를 끌면서 1941년 7월 말부터는 <바다의 카니발>(전13곡)로 프로그램을 바꿔가며 연장공연을 계속했다. 전속의 악극단을 둔 약초극장은 1941년 8월 8일부터 9월 2일까지 무대공연에 걸맞게 개축하게 된다. 1943년에는 무대 공연활동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극장 전속의 가극단을 조직했다. 이번에는 기성의 극단과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아닌 약초극장 주인 오카모토 세이지로가 대표가 되어 가극단을 조직한 것이다. 총무는 약초극장의 지배인 우라노 하지메(浦野元), 연출은 김승구, 작곡은 이면상, 단원으로는 김옥춘, 현정남 등이 포진되었다. 1943년 7월 27일 당국에 정식 인가를 받은 약초가극단은 8월 8일 약초극장에서 첫 공연을 했다. [자료] 연극전용관으로 전환한 약초극장 전속 약초가극단의 공연 광고(《매일신보》, 1944.11.23) [자료] 약초흥행주식회사 직속극단 현대극장의 <봉선화> 공연 광고(《매일신보》, 1945.05.15) 영화관으로 운영되던 약초극장은 1944년 11월 23일 연극전문관으로 전환하게 된다. 약초극장에서는 예원좌(<별의 합창>, <봄바람>, <어머니와 아들>, <눈 나리는 밤>), 고협(<흰독수리>, <삼남매>, <만리장성>, <상아탑에서>, <양자강>), 현대극장(<백야>, <청춘의 윤리>, <대추나무>, <에밀레종>, <애정무한>), 극단 태양(<야화>)의 연극공연과 후생악단, 경성교향악단의 음악회, 후지하라 요시에의 독창회, 약초가극단(탐정활극 <여간첩>), 경성악극단, 조택원무용단의 공연이 이어졌다. 1945년 5월에는 약초가극단 이외에 유치진이 주재하던 현대극장을 약초흥행주식회사의 직속극단으로 두었으며 약초극장에 뿌리를 둔 약초흥행주식회사는 해방 전까지 약초가극단과 현대극장을 거느린 흥행전문회사로 진화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약초흥행주식회사의 간부로 있던 홍찬이 적산관리인으로 있으며 약초극장을 인수하였으며 이름도 수도극장으로 바꾸었다. 해방 직후 수도극장의 프로그램은 연극과 악극이 주였으나 할리우드 영화가 본격적으로 상영되기 시작하자 서울의 대표적인 할리우드 영화 개봉관으로 이용되었다. 수도극장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키우던 홍찬은 무리하게 안양촬영소를 건설하면서 생긴 자금난으로 1959년 부도가 났고 수도극장은 매각되었다. 1962년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된 수도극장은 이름을 스카라극장으로 바꾸었다. 2005년까지 존속하던 이 극장은 정부에서 근대 문화유산으로 등록하여 보호하려 하자 소유주가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있다는 이유로 헐어버리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약초영화극장의 기공을 알리는 신문기사(《조선신문》, 1935.07.17.) [자료] 《 조선중앙일보 》 , 1936.03.29. 조택원 ( 趙澤元 ) 무용회 , 4 月 6 日 , 10 日 까지 , 약초극장 에서 무용가 조택원 ( 舞踊家 趙澤元 ) 씨는 오는 사월 육일부터 십일까지 약초극장 ( 若草劇場 ) 에서 무용회를 연다는 바 무용 종목은 『 일허진 혼 ( 魂 ) 』 외 아홉까지나 된다는 바 조택원 씨 외 연구소원 일동이 총출연하는데 이번에는 주야 공연이라고. [자료] 《 매일신보 》 , 1937.07.15. 북촌 유일의 영화극장 단성사 , 연극으로 전향 , 중앙무대와 계약 성립 북촌 유일의 양화전문 영화극장으로서 남북촌의 영화 『 팬 』 들의 인기를 독점하고 잇든 단성사는 강력한 경쟁 상대의 진출에 의하야 순 ( 純 ) 영화극장으로서 경영해 나가기 곤란을 느끼게 되어 벌서부터 연극상설관으로 전향한다는 풍문이 돌드니 드듸어 칠월 삼십일일부터 연극을 상연하기로 극단 중앙무대와 간에 계약이 성립되였다고 한다 . 수년전ᄭᅡ지는 경성 유일의 양화봉절관으로 독보 ( 獨步 ) 해오든 단성사도 경성의 흥행시장을 노리는 외래의 대자본의 진출에 의해서 명치좌 약초극장 갓흔 대 ( 大 ) 영화극장들이 생기게 되자 이 영화 『 팬 』 유치에 비책을 다하게 되엿스나 단성사는 극장의 협착 ( 狹窄 ) 이라는 『 핸듸 - 캡 』 이 잇슬 뿐 아니라 경쟁이 초래한 양화가격의 등귀 ( 騰貴 ) 로 인하야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잇드니 최근에는 해마다 잇는 일이나 하절이 되자 관람객이 붓적 줄어버리고 말았음으로 그 타개책을 연극으로 전향하는데서 구해보게 된 것이다 . 금후로는 흥행기업에 이해를 가진 대자본의 적극적 진출에 의하야 냉방 , 온방 , 장치 등 새로운 설비를 구비한 대극장을 신축하기 전에는 일류 양화극장으로서의 존속은 허락지 않는 정세에 잇슴으로 만일 단성사가 영영 연극극장으로 전향하야 버린다면 이로써 조선인 경영의 영화극장은 그 자최를 감춰버리게 되는 세음인데 중앙무대와 단성사 간의 계약 성립에 관하야 양측 관계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위선 ( 爲先 ) 삼주간의 계약 , 중앙무대 홍찬 ( 洪燦 ) 씨 담 ( 談 ) 중앙무대는 제 2 회 공연ᄭᅡ지를 부민관에서 햇고 삼회 공연 역시 이십일일부터 부민관에서 할 예정이나 부민관은 연극을 상연하기에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만흘 ᄲᅮᆫ 아니라 집대 ( 貸 ) 가 워낙 비싸기 ᄯᅢ문에 경비가 만히 들고 해서 단성사와 위선 칠월 삼십일일부터 삼주간의 계약을 매젓습니다 . 앞으로 장기계약을 맺을지 어ᄯᅥᆯ지는 두고 보아야 알겟습니다 . 시험적으로 연극을 해볼터 , 단성사 박응면 ( 朴應冕 ) 씨 담 아시는 바와 가티 최근의 양화가격이 무척 비싸진 데다가 협착한 단성사로서는 수용인원이 수배되는 상대와 경쟁하기에는 힘이 들고 기외에 말못할 불리한 사정이 잇는데다가 금년에는 웬일인지 소위 『 하고 ( 夏枯 ) 』 가 우심 ( 尤甚 ) 함으로 이 타개책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ᄭᅳᆺ해 연극을 해보기로 햇습니다 . 중앙무대와 결정적으로 계약이 확정된 것은 아니나 금명간 확정을 볼 것입니다 . 여름 『 씨 - 슨 』 이 지나고 가을에도 역시 연극을 계속 할지 ᄯᅩ는 다시 영화를 상영할지는 아직 미정입니다 . 좌우간 연극을 공연시켜보아 그 성적 여하에 따라 결정할 작정입니다 . 최근 더욱이 악해진 흥행계에서 적은 자본으로 다수한 경쟁자를 상대로 싸워 나가기에는 남이 모르는 여러 가지 고심이 숨어잇습니다 . [ 자료 ] 《 매일신보 》 , 1945.05.16. 현대극장과 약초의 제휴 국민극 수립을 표방하고 성립된 현대극장은 그동안 고정한 극장이 없어 상연할 적마다 장소가 갈니여서 그 활동이 얼마간 ○○ 되어 왓는데 이번에 새로 생긴 약초흥행주식회사와 특수계약 ( 特殊契約 ) 이 결성되여 매월 정기 공연을 하게 되엇다 . 압흐로 동 극단은 약초극장을 중심으로 하야 연극활동을 하게 될 것으로서 이와 갓흔 극단과 극장의 합리적 제휴는 크게 그 장래가 주목된다 .
[사진] 영화 <불멸의 밀사>(1947, 서정규)에 출연한 한림(사진 제공: 김종원) 한림(韓霖)은 <자유만세>의 김승호에 이어 해방 후 두 번째 배출된 영화배우이다. 1947년 4월 21일 우미관에서 상영된 서정규 감독의 <불멸의 밀사>(1947)가 그 발판이 되었다. 고종의 특사로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돼 을사조약의 무효와 한국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지원을 요청하다가 순국한 이준 열사의 이야기이다. 바로 이 16밀리 무성영화에 한림이 주연을 맡은 것이다. <자유만세>와 마찬가지로 애국심을 자극하는 내용의 특성상 전국적인 학생 단체 관람이 가능했다. 그런데 한림은 이에 앞서 김소동 감독의 <목단등기(牧丹燈記)>(1947)로 먼저 나올 뻔했다. 다음의 기사가 이를 말해 준다. “해방 후 첫 걸음을 내는 전혀 새로운 신인이다. 작품에는 내월 공개 예정인 <목단등기>, 또 제작 중에 있는 <불멸의 밀사> 등 함남 원산에서 출생하여 일본에 가서 일대 상경과를 마친 인텔리, 신장 5척7촌 어깨가 긁고 남성미의 넘버원! 지금 세상이 요구하는 남성에 딱 들어맞는다.(중략) 33세라면 늦은 감도 있지만 성격배우로서 등장하려는 씨의 배우생활은 아직도 장구하다. <목단등기> <불멸의 밀사> 양 작품의 주연인 씨는 조선의 획기적인 16밀리 탄생과 아울러 씨 역시 새로운 연기인으로서 탄생한 것은 16밀리 발전과 더불어 씨도 발전이 약속된 것 같다. 주로 연출자 김소동씨와 일을 하여 왔고 금후도 역시 김씨와 함께 일할 생각이라고 한다. 김씨와 관계는 일본에서부터 시작되어 예술 방면에 전적으로 지도를 받아왔고 일상 존경하고 있다고 한다.” - 홍병삼, 「신성(新星)을 차저서(3)」 , ≪예술통신≫, 1947.12.7. - 1946년 ‘영화과학연구소’를 설립한 김소동이 벼른 끝에 첫 작품으로 선택한 <목단등기>는 한을 남기고 죽은 처녀 귀신(이정순)이 성불하기 위해 한 남자(한림)와 동침한다는 내용의 괴기물로, 중국소설 전등야화(前燈夜話)에서 소재를 빌려 왔다 .(김소동, 「나의 이력서(47) 영화편력 절정기」, ≪한국일보≫, 1982.5.20) 김소동이 녹음기사와 함께 직접 만든 녹음기로 도전한 이 데뷔작에 아직 검증되지 않은 세 살 아래의 신인을 기용한 배경에는 전공학과는 달라도 동경의 일본대학 후배라는 점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이후 노래에 뛰어난 재능을 가진 시골청년(현인)이 청운의 꿈을 펼쳐나가는 음악영화 <푸른 언덕>(1948, 유동일)의 보조 역할을 했으나 8년 가까이 영화와 멀어졌다. <백치 아다다>로 존재감 드러내다 활동을 재개한 것은 사극영화 <단종애사>(1956, 전창근)의 사육신 중 한 명인 하위지 역할을 하게 되면서부터였다. 이렇게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했으나 몇 달 뒤 출연한 이강천 감독의 <백치 아다다>(1956)가 집중적으로 매스컴의 조명을 받으며 그에 대한 관심도 자연히 높아졌다. 그 첫 반응이 시사회장으로부터 나왔다. 미국공보원 영화과장 데일. E 하스 ( 「한국 최고작 ‘백치 아다다’」, ≪동아일보≫, 1956.11.22.) 는 “한국 농촌생활은 물론이려니와 극적 씬, 희비극의 교차 및 인간생활을 파고 들어간 현실주의적인 감각이 가득 찬 영화로서 확실히 한국영화 최우수 작품의 하나로 꼽을 만하다”고 했고, 작가 이봉구( 「신영화, 이상심리의 표현 ‘백치 아다다’의 예술성」, ≪조선일보≫, 1956.11.23)도 “오랜만에 보는 향토적인 서정과 날카로운 화면 정리와 이동에서 오는 정감이 영화를 성공케 한 바탕이 되어 주었다”며 “이 가운데서도 한림, 장민호의 연기는 페이소스하면서 박력이 있었다”고 호의적으로 평가했다. 영화평론가 이청기 (「신경지의 발견, 영화 ’백치 아다다‘의 예술성」, ≪조선일보≫, 1956.11.26) 역시 “대담한 터치로 아다다의 생태를 해부하고 내면세계에 파고들어 내면의식의 흐름을 극히 감각적인 수법으로 추구한 작품”이라며 한림의 연기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수룡 역의 한림은 좋은 연기를 보여 주었으나 생리적 조건 탓인지 머슴 성격으로는 지나치게 유약한 인텔리전스가 풍겼다”고 아쉬움도 곁들였다. [사진] 이강천 감독의 <백치 아다다>(1956)에 출연한 한림, 왼쪽은 나애심(사진 제공: 김종원) 한림은 그 뒤에도 <마인>(1957, 한형모)을 비롯한 <아리랑>(1957), <돈>(김소동), <형제>(김성민), <길 잃은 사람들>(이상 1958, 김한일), <외로운 사람들>(박충현), <언제까지나 그대만을>(이상 1959, 권영순). <지상에서 맺지 못할 사랑>(김성민) <사랑해선 안 될 사랑을>(이상 1960, 이봉래) 등 13편에 출연했으나 <백치 아다다> 경우만큼 주목을 받지 못했다. <외로운 사람들> 등 한 두 편을 빼고는 거의가 조연급이었다. 그 가운데는 <돈>의 김순경과 같은 단역급도 있었다. 역할에 대한 기복이 심한 편이었다. [사진] 한형모 감독의 <마인>(1957)에 출연한 한림, 앞의 여배우는 이빈화 한림은 1914년 12월 26일 함경남도 원산에서 출생했다. 그의 본명은 한정국(韓正國)이다. 일본대학 산업경영과를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영화에 출연하는 동안 비애, 실연이 담긴 감상적 인정극을 하고 싶어 했으나 그 희망이 얼마나 관철됐는지는 회의적이다. 간헐적으로 채운 12년의 배우생활 동안 대한영화배우협회 창립(1955년 4월16일)에 참여한 일 외에는 외부 활동이 거의 없었다. 프랭크 보재이즈 감독의 <역사는 밤에 이루어진다>(1937)를 본 후 그 주인공인 샤를르 보외이에를 좋아하게 됐다는 한림은 젊은 시절엔 주량이 거의 무한대, 담배는 ‘전매국 굴뚝처럼 코에서 연기가 나올 정도’의 애연가였다고 한다. 그는 오랫동안 영화계와 절연 상태에서 1994년 7월 28일 팔순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사진] 영화 <돈>(1958, 김소동)에서 단역인 순경으로 출연한 한림 1. <불멸의 밀사>의 감독에 대해 『한국영화총서』를 비롯한 국내의 모든 저작물이 김명순 감독으로 기재 하고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1947년 1월 14일자 ≪예술통신≫ 2면 「영화 ‘불멸의 밀사’ 남한 로케 견문기」에는 분명히 서정규(徐廷奎) 감독으로 명기돼 있다. 필자가 유족으로부터 받은 당시의 앨범 사진도 이를 입증하고 있다. 필자는 초등학교 시절 이 영화를 제주극장에서 단체 관람으로 봤다.
열 편 모두 사사로운 이유에서 선택한 영화들이지만, < 디아만티노Diamantino >(가브리엘 아브란테스/다니엘 슈미트, 2018)를 소개하는 이유는 이 리스트의 취지에 가장 어울린다는 생각에서이다. 가장 공감했거나, 탁월하다고 생각한 영화는 아니었다. 여러 유형의 영화들을 참신한 조합으로 선보일 수 있는가를 항시 고민해야 하는 직업의식의 발로에서 <디아만티노>를 봤을 때, 이 영화는 무논리, 무정형, 무감각의 진공상태로 빠져들게 하는 완력이 대단했다. <디아만티노>는 이민 위기, 민족주의, 트럼프, 인공두뇌학, 젠더 바꾸기, 정치적 부패, 인터넷 범죄 및 글로벌 스포츠 비즈니스의 뒤안을 구불구불 훑어간다. 포르투갈 출신의 영화감독 가브리엘 아브란테스와 미국인인 다니엘 슈미트가, 몇 편의 단편영화를 거쳐 공동으로 연출한 첫 번째 장편영화이다. 아브란테스와 슈미트는 허접한 컴퓨터 그래픽 이미지와 설익은 특수효과, 이미지 훼손, 장르 횡단, 불경스러운 상상력을 오가며, 어디서도 본 적이 없는 아방가르드 SF 코미디를 창조해냈다. 글로벌 축구 스타 디아만티노 마타모로스(미겔 고미스의 < 타부Tabu >(2012), < 천일야화As mil e uma noites >(2015)에 나온 배우 카를로타 코타가 뇌리에 각인되는 연기를 보여준다)는 타고난 운동능력이 아니라면, 세상 물정에 어두운, 공허한 청년이다. 페널티킥을 실축함으로써, 그가 이루려 했던 마지막 목표인 포르투갈의 월드컵 우승을 이루지 못한 디아만티노는 자신의 지평을 넓히고 사람들에게 믿음을 줄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기로 결심한다. 그 자신의 실책 때문에 심장마비로 사망한 아버지를 향한 부채감으로 선한 사역에 복무하기로 작정한 디아만티노는 모잠비크를 탈출한 난민 소년 라힘을 입양한다. 그러나 열심과 정성을 다해 살뜰히 돌보았던 이 소년의 정체는 포르투갈 정부의 비밀 임무를 수행하는 레즈비언 요원 아이샤. 아이샤는 디아만티노의 사악한 쌍둥이 자매가 연루된 돈세탁 작업을 조사하기 위해 저택에 잠입하였다. 여기에 국가의 자부심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무적의 슈퍼 팀과 위대한 포르투갈 재건을 위해 디아만티노를 복제하려고 하는 미친 과학자 람보르기니 박사가 준동한다. 더하여 이 미끈한 축구 아이콘의 공상 속에 등장하는 초고층 빌딩 크기의 털북숭이 강아지도 있다. 인물의 유형, 공간, 사건, 묘사의 수준에서 보는 이들을 어리둥절하게 하는 <디아만티노>는 전 지구적인 대격변을 현장에서 경험하는 축구 스타의 고통스러운 환상을 보여준다. 과연 다음 이야기는 무엇일까? 를 걱정해야 할 정도로, 중심을 상실한 채 흘러가는 이 영화의 내러티브를 달리 요약할 방법은 없다. 사건은 빠르게 진행되지만, 전개가 혼란스럽지는 않다. 강인한 육체를 가진 어린아이라고 할 수 있는 주인공 디아만티노는 모든 측면에서 메트로 섹슈얼 슈퍼스타 축구 선수 크리스티아누 호날두를 연상시키는 아바타이다. 대리모를 통해 아들을 입양한 호날두처럼 디아만티노는 아프리카 이민자 소년을 입양한다. 그러나 영화에는 다음과 같은 자막이 태연자약하게 달려 있다. “여기서 본 이야기, 모든 이름, 등장인물. 사건은 실제가 아닙니다. 실존 인물, 장소, 제품, 유전적 절차 또는 거대한 강아지에 대해 어떠한 유추도 해서는 안 됩니다.” 뻔뻔스럽기까지 한 이 경고는 스스로를 희롱하려는 듯한 이 영화의 어조를 닮았다. 디아만티노를 어떻게 볼 것인가? 라고 질문한다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판단은 곤란해진다. 우리의 주변에는 이런 유형의 사람들이 항존한다. 탄탄한 근육과 아름다운 몸을 가진 뇌가 텅 빈 사람. 그는 순수한 인간이거나 자신을 둘러싼 것들에 대해 무지한 저능아이다. 디아만티노는 그가 처한 상황에서 늘 소외된다. 딱한 처지의 난민들을 동정하는 그의 선의는 너무 순수해서 가장(假裝)한 것처럼 보인다. 디아만티노의 순수함과 유치함, 성실함은 이렇듯 심각한 세계와 대비되면서 풍자의 효과를 불러일으킨다. 빚어놓은 듯 단단한 육체는 디아만티노의 자선 의지와 한 몸을 이룬다. 성실한 육체에 깃든 성실한 의지. 디아만티노의 어린애 같은 태도는 경멸의 대상이지만 영화는 순수성의 인격화를 표상하는 이런 태도야말로 가장 위대한 인류의 자산이라고 말하려는 것 같다. 변화하는 캐릭터로서 디아만티노의 전환점은 난민의 위기를 발견하는 순간이다. 개인 요트와 저택에 파묻힌 그가 아는 유일한 고통은 축구경기에서 레드카드를 받는 것이었다. 그러나 별안간 그는 현실 세계의 고통을 알게 된다. 이 부조리극이 어떤 심각한 정치 드라마보다 논쟁적이 되는 것도 이 순간부터이다. 여기서부터 관객들은 그들이 살고 있는 ‘미친 시대’를 목도하게 된다. 어디서도 본 적이 없다고 했지만 <디아만티노>는 오만가지 장르, 작가의 계보를 활발하게 혼성한다.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초기작들을 연상시키는 인물들, 특별히 디아만티노의 쌍둥이 누이는 알모도바르적인 캐릭터의 전형이다. 글을 조각내어 다른 순서로 재조합한 윌리엄 버로우즈의 콜라주 플롯, 리차드 켈리의 < 사우스 랜드 테일Southland tales >(2006)의 허무주의, 존 워터스의 터무니없는 컬트 고전들, 한나 바르베라의 풍자만화, 제임스 본드의 패러디, 심지어 라이너 베르너 파스빈더의 성 정치학적 비전에 이르기까지 이질적 요소들의 접붙이기를 펼쳐 보인다. 서사는 고전적 팝 컬쳐, 신앙심이 깊은 시네필리아, 초현실주의 대중문화 아이디어의 융합이다. 아브란테스와 슈미트는 유럽을 잠식한 난민 위기, 네오-파시즘, 블랙시트, 감시 테크놀로지, 빈곤, 스포츠 애국주의, 인간복제와 같은 현대적인 주제들을 한밤중의 소동극 위에 얹는다.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흔들어댄 칵테일마냥 각각의 주제는 어떤 초점도 만들지 않고 평평해진다. 감독은 진정성 있게 이들 주제를 다루고 있는가? 이 유치한 ‘병맛 코미디’는 무엇을 표방하려는가? <디아만티노>는 하나의 상태에서 무작위적으로 확장해나가는 일종의 자유 형식을 채택한 영화이다. 이미지의 전략도 같은 맥락을 따른다. 어수선하고 화려한 색채, 지글거리는 16mm 필름의 터프한 룩, 한편으론 미끄러질 것처럼 블링블링한 상업광고의 비주얼, 의도적으로 장난스럽게 만들어진 CGI 화면을 합쳐 놓은 이 영화의 미학은 스토리텔링만큼 거칠고 우연적이다. 관념보다 이미지를 선호하는 영화감독은 일류가 될 공산이 크다. 숱한 연상을 자유로이 불러일으키면서도 편협한 목적으로 위해 소비되지 않는 이미지를, 이 영화는 보여준다. 총체성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만듦새에도 불구하고, <디아만티노>는 2018년 칸영화제 비평가 주간에 출품되어 그랑프리를 받았다. 카오스적인 무논리가 횡행하는 키치 미학에 비평가들이 호응했다는 사실은 아이러니이다. 평론가들의 눈이 어떻게 된 것일까? 영화의 표면에는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폭력적인 체제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 균질화된 표현의 영역 바깥으로 탈주하려는 욕망이 넘실댄다. 남발되는 시각효과는 기술적으로 하자가 있고, 참혹한 수준의 발 연기에 한숨이 나오는 사람도 있겠지만, 영화에는 개성을 더한다. 이 반(反) 미학이 겨냥하는 바는 명확하다. 어떤 영화로부터의 영향도 거부하지 않는, 그 무엇과도 다른 영화를 만들겠다는 것. <디아만티노>를 본 뒤 며칠간 한 편의 영화가 머리를 계속 맴돌았다. 스탠리 큐브릭의 < 시계태엽 오렌지Clockwork orange >(1971)이다. 물론 두 영화는 다르다. 누군가는 “격이 다르다”고 화를 낼 수도 있다. <시계태엽 오렌지>의 교화되지 않는 앙팡테리블 알렉스와 <디아만티노>의 백치 축구 선수 디아만티노는 불가역적인 강압과 제도적 폭력의 희생자들이다. 하지만 그들의 문제적 성정(性情)은 교정되지 않는다. 알렉스의 내면화된 폭력 성향에 의해, 디아만티노의 순진무구함에 의해 그들은 바뀌지 않는다. 두 영화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철저히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지만, 그것을 조롱하기보다는 인간의 결점을 즐긴다. 심지어 그 결점이, 살면 살수록 나빠져만 가는 이 세상에서 인간을 구제할 수 있다고 말한다. 디아만티노의 백치미는 그 우매한 순수성으로 인해 규범화된 폭력과 정치적 위선을 도드라져 보이도록 한다. 언제나 문제는 상상력이 아니겠는가. 오랫동안 인류를 사로잡았던 예술작품이 보여주었던 것도, 일상을 풍요롭게 할 최상급의 공상도, 그것이 없다면 영화를 볼 이유가 없는 희열의 기원도 모두 상상력에 있다. 행여 <디아만티노>는 모든 관객이 즐거이 볼 수 있는 영화는 아니다. 그러나 열광적으로 그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이상하지만 용감한, 올해의 영화를 뽑으라면, 나는 여기에 한 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