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살고개 2부
- 감독
- 우치다 토무
- 제작년도
- 1958
- 출연
- 카타오카 치에조, 나카무라 킨노스케, 하세가와 유미코, 츠키가타 류노스케, 우라사토 하루미, 오카 사토미, 고구레 미치요
정기적으로 필름을 교환하며 영화를 주요 프로그램으로 상영하는 영화상설관이 서울에 등장한 것은 경성고등연예관이 개관한 1910년이다. 초기 상설관은 대부분 황금정과 남대문통을 잇는 소위 ‘진고개’의 일본인 상권에 자리 잡고 있었다. ‘남산골 딸깍발이’가 아니면 출입을 꺼릴 정도로 비가 오면 유난히 흙이 질었다는 진고개는 개발이 본격화되면서 서울에서 가장 화려한 거리가 되었다. 미쓰이(三井) 상점, 히라다(平田) 상점, 미쓰코시(三越) 오복점 등 후에 백화점이 되는 진고개의 대형 잡화상점들은 양복, 포목, 과자, 기계류 등 없는 것 없이 다 갖춘 듯 했다. 흔히 남촌이라고 불렸던 이 거리는 서울에 사는 일본인들뿐 아니라 조선인들의 소비 욕망도 강하게 자극했다. 그래서 진고개에서 “입을 벌리고 정신 다 빠져서 헤엄치듯 걸어가는 조선부인들”은 “여기 물건만 몇 가지 사준다면 몇 번이든지 개가해 갈 것”이라고 빈정거림을 샀다. “일본말이 서투르니 물어보기도 힘들고 공연히 코 밑에 가져다 향내만 맡느라고 쭝긋쭝긋” 1 하는 양복 입은 조선신사가 우스워지는 일도 드물지 않았다. 종로로 대변되는 북촌 일대는 남촌에 비해 상대적으로 황량하고 어둠침침해 보였다. 그러나 진고개에서 호기롭게 가게에 들어가 물건을 살 배짱이 없는 조선인들에게는 종로가 실질적인 유흥 공간이었다. 1916년부터 해마다 4월부터 10월까지 종로에서는 전등불이 켜지는 밤이 되면 시끌벅적한 야시(夜市)가 열렸다. 대략 오후 7시부터 12시 사이에 열리는 야시는 ‘싸구려, 싸구려’라고 외치는 소리와 ‘세계에서 가장 좋은 물건’이라는 소리가 한데 뒤엉켜 소란스러웠다. 상인들은 무조건 ‘만병통치약’이라고 외쳐대거나 물건들을 흔들어대면서 손님을 끌었다. 사주쟁이, 관상가, 작명가도 모여들고, 약장수와 장기꾼도 모여들었다. 고무신, 머릿기름, 참빗부터 지팡이나 구두, 만화경, 석유램프나 호롱 등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를 아우르는 다양한 상품이 길거리 좌판 위나 천막 아래 전시되었다. 시끌벅적하고 요란한 종로 야시에 구경 오는 사람들은 “살 것이 있거나 없거나 밤이면 이 거리를 한 번 거닐기 때문에 사람의 물결을 이루어 서로 헤치고” 다녔다. 2 남촌이든 북촌이든 서울의 극장은 도시의 여가와 유흥, 소비의 경험을 구성하는 핵심이었다. 그러나 남촌이 일본인 거리, 북촌이 조선인 거리로 이원화되어 있던 만큼 극장 공간의 경험은 식민지의 경험과 중첩될 수밖에 없었다. 초기 상설관에서는 일본인 변사와 조선인 변사가 번갈아가며 함께 해설하기도 했지만, 우미관, 단성사, 조선극장 등 조선인을 상대로 한 상설관들이 생겨나면서는 변사의 해설 언어와 관객의 종족적 구성, 그리고 흥행 프로그램이 긴밀하게 연관되었다. 영화상설관 시대에 ‘활동사진 구경 가기’는 문화의 경험인 동시에 ‘종족성(ethnicity)’의 경험이라 할 수 있었다. 먼지 많고 시끄러운 종로 야시의 구경꾼들이 조선인 변사의 해설로 영화를 관람하며 도시의 피로를 위무 받는 북촌 상설관의 관객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극장은 “중산계급의 사람들이 시달린 머리를 쉬이며 삶의 위안을 받는” 오락장이다. 1925년 여름, 서울의 밤거리에 나선 어느 기자는 종로 야시를 지나 “환희의 웃음과 갈채의 박수”가 문틈 사이로 새어나오는 극장을 취재하는데, 그곳에서 목격한 학생과 신사, 기생 등 각계각층의 관객들이 “하룻밤 놀이터”를 향락하는 “여유 있는 사람들”임을 잊지 않고 적어두었다. 3 그런 극장이 소위 ‘일반 민중’에게 완전히 문턱을 낮춘 것은 1926년에 관람료를 ‘최하 10전’까지 인하하면서이다. 그해 여름 극장가는 불경기에 시달린 끝에 파격적인 관람료 인하를 감행했다. 신문에는 관람료가 대인(大人) 30전, 소인(小人) 20전이라고 광고하면서도, 실제로는 극장 앞 호객이나 가두선전으로 ‘10전 관객 몰이’를 하는 식이었다. 극장들은 관람료 인하뿐 아니라 일주일에 한두 번씩 프로그램을 교체하면서 주말과 휴일에는 상영 횟수를 늘리는 전략으로 관객을 더 확보하려 애썼다. 상설관끼리 제 살을 깎아먹는 무모한 경쟁이라는 우려도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일시적인 이벤트가 ‘10전 관객’을 상설관의 새로운 관객층으로 흡수하면서 관객의 폭을 넓혔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도서과가 조사한 1926년 한 해 동안 경기도 영화상설관의 관객 수 통계를 살펴보면, 관람료가 인하되었던 8월부터 10월 사이에 관객이 몰리면서 상반기에 비해 관객이 급증한 것을 알 수 있다. 한참 적에는 그나마 상설관 서너 개가 문이 닫을 지경이라, 하는 수 없이 일금 10전 하니까 전에 못 보던 팬들이 우아~하고 몰려든다. 내가 어렸을 적에 돈 10전을 내고 구경해본 적이 있지만, 요즈막 와서 상설관에서 10전 받는다는 것은 아마도 이 지구 위에 조선밖에는 없으리라. 그러나 어쨌든 잘한 일이다. 다른 것, 모든 예술보다도 가장 민중과 가까운 의미를 가진 영화조차 일반 민중에게서 자꾸 멀어간다는 것이 좀 섭섭한 일이니까, 10전 받을 때 몰려들어온 새로운 팬! 그들이 정말, 영화의 팬인 것을 짐작해야만 될 것이다. 4 위의 글에서 최승일은 “다른 것, 모든 예술보다도 가장 민중과 가까운 의미를 가진” 영화가 ‘10전 관객’을 얻은 것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영화 제작비를 생각하면 10전이라는 관람료는 터무니없이 저렴하지만, 도시의 하층계급 노동자도 영화를 볼 수 있는 시대로 진입하는 것이야말로 조선에서 영화가 ‘대중오락의 패왕’이 되는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1926년 가을, 단성사에서 개봉된 나운규의 <아리랑>이 경이적인 흥행을 기록하며 ‘한 개의 획시대적 산물’로서 조선영화의 아이콘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영화 자체의 예술적 성취 때문만이 아니다. 6.10 만세 등 민족적 감정이 분기했던 당시의 사회 분위기, 그리고 ‘10전 관객’의 흡수가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보는 편이 더 타당하다. <아리랑>은 이 ‘10전 관객’을 민족 혹은 ‘조선사람’이라는 이름으로 포괄함으로써 조선영화의 영역을 확고히 하는 계기를 마련했다고도 할 수 있다. ‘10전 관객 몰이’는 일시적이었을지라도, <아리랑>이 거둔 성공과 그에 대한 입소문은 수년간 <아리랑>이 조선 전역을 순회하며 관객을 끌게 했다. “일반 대중은 <아리랑>으로 하여 활동사진이란 것이 어떠한 것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5 는 말이 결코 과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1) 双S生, 「대경성광무곡」 『별건곤』 1929년 1월호, 82~3쪽. 2) 유광열, 「종로 네거리」 『별건곤』 1929년 10월호, 68쪽. 3) 「번화한 웃음소리에 박수성 높은 연극장」 《조선일보》 1925년 8월 27일자, 조간 2면. 4) 승일, 「라듸오·스폿트·키네마」 『별건곤』 1926년 12월호, 108쪽. 5) 안동수, 「영화수감(映畫隨感)」 『영화연극』 1939년 11월호, 45쪽. 상단 그림. 조선일보 기자의 서울의 밤 순례기 (사진은 극장의 관람석) 출처: 《조선일보》 1925년 8월 27일자, 조간 2면. <자료> ※ 이하 자료는 가독성을 높이기 위해 현대어 표기에 맞게 다시 썼다. 일부 표현은 문맥에 맞게 다듬었다. 1. 「번화한 웃음소리에 박수성 높은 연극장」, 《조선일보》, 1925년 8월 27일자 조간 2면. 서울의 밤은 오다. 때는 일곱 시 반! 종로 큰 거리에 군데군데 벌려 있는 각 극장, 활동사진관 등의 손[客] 끄는 유창한 주악(奏樂) 중에 서울의 밤은 어두워간다. 피리, 나팔, 북, 장구 등의 소리와 북악, 인왕의 산등성이를 넘어오는 서늘한 바람이 온종일 뜨거운 햇살에 시들고 시든 억만 장안 사람을 다시 삶의 무대로 불러들여 온갖 연극을 짓게 한다. 돈 있는 탕자는 기생을 다려 홍등녹주(紅燈綠酒)에 무르녹고 돈 없는 건달은 막걸리 한잔에 거리를 헤매며 야시(夜市)의 복판 공원의 벤치에도 사람의 물결이 이루기 비롯한다. 그리고 들려오는 흥겨운 주악을 따라 쏘는 듯한 등불 빛을 몸에 실으며 이곳저곳의 극장 문 앞으로 모여드는 사람들도 역시 수백수천을 이루어 그들의 자취가 끊일 여덟 시경부터는 문 닫힌 극장 안에서 오직 환희의 웃음과 갈채의 박수가 때때로 문틈을 새어 길거리로 흘러나올 뿐이다. 이것이 오직 서울 중산계급의 사람들이 시달린 머리를 쉬이며 삶의 위안을 받는 유일의 향락장이다. 아래위층 객석에는 수백수천의 각 계급 각 방면의 젊은 남녀가 희미한 전등 빛에 싸여 죽은 듯 고요히 앉아 있으나 그들의 날카로운 눈은 어둠에서 활약을 하고 까닭 없는 머리는 고요한 속에 음분(淫奔)을 짓는다. 무대와 스크린을 바라보고 좋아하고 웃는 학생이 있으면, 부인석의 아양피는 기생들을 건너다보고 어리석은 기쁨을 짓는 점잖다는 신사도 있다. 이리 하는 동안에 시간은 자꾸 간다. 아홉 시, 열 시! 지루한 중에 십분 휴식이 돌아온다. 기생 건너다보는 신사들은 일분일초라도 휴식을 더 늘이려 한다. 그러나 힘없는 어린이, 학생들은 휴식을 오히려 지루하다 소리친다. 이리하여 극장의 밤이 깊어가고 서울의 밤이 깊어간다. 최후의 일각. 닫혔던 극장 문이 후다닥 열리면서 봇물이 터지듯 사람의 물결이 밀려나온다. 그들의 머리에는 주마등 같이 지금 본 양극(洋劇)이 번듯번듯 거린다. 철없는 아이는 흉내를 내며 시시덕거리고 뜻깊은 젊은이는 머리를 기울여 묵상에 잠기면 탕자와 춘녀는 손에 손을 쥐어 “하상견지만야(何相見之晩耶)” [필자 주: “어찌 서로 만나기가 늦었던고.”, <운영전>의 한 구절] 를 부른다. 이리하여 여유있는 사람들 하룻밤 놀이터의 문이 닫힌다 2. 승일, 「라듸오·스폿트·키네마」 『별건곤』 1926년 12월호, 104~9쪽. (부분 발췌) -키네마- 사실상 영화는 소설을 정복했다. 왜 그런고 하니 그것은 대체상으로 소설은 지식적, 사색적이고, 영화는 시선 그것만으로도 능히 머리로 생각하는 사색 이상의 작용의 능력을 가진 까닭이다. 또한 경제상으로도 하룻밤에 3, 40전만 내던지면 몇 개의 소설–연출–직접 사건의 움직임을 보는 까닭이며, 또한 소위 바쁜 이 세상에서 짧은 시간을 가지고서 사건의 전적(全的) 동작을 볼 수가 있는 것이었다. 조선에서 우리의 힘으로(돈은 말고) 되는 영화가 있어온 지 햇수로는 삼 년도 못 되는데 벌써 기십종(幾十種)은 넘었으리라. 스튜디오도 없이 만들어내는 영화가 벌써 10개를 넘은 지 오래다. 날 흐린 날은 박지도 못하고 하늘만 쳐다보고 있다가, 해나 번쩍 나면 5전짜리 레프가 번쩍거린다. 5전짜리 레프가 사람의 몸뚱어리에 가로 벗기일 때 “자- 훌륭한 예술이오”, “박읍시다” 하는 소리가 산모퉁이 집 속, 길가에서 일어난다. 이리하여 돈 천 원이나 잡아먹은 조선의 영화가 단성사, 조선극장에서 봉절(封切)이 된다. 사람은 물밀듯이 들어온다. 그리하여 연극이 없는 불쌍한 이 우리 사회에서, 누구나 연극을 구경하는 셈으로 몰려들어 고개를 치켜들고 앉아 있다. 백의(白衣)가 영화면(映畵面)에서 펄펄 날린다. 이 얼마나, 가슴이 저리고도 회포 깊은 정경이냐? 민틋한, 아주 기운을 잃은 듯한 산모퉁이가 나오면서 여기저기, 어린 솔이 자라나는 것이 보인다. 그러나 한심한 일이다. 우리는 그 배경 속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2, 3의 고대 소설을 각색해낸 것 외에는 <장한몽>, <농중조>를 봤을 따름이었다. 그나마 감독이라는 이가 옷 한 벌을 못 얻어 입어 여름옷을 가을철에 입고 있으면서, 배우들은 점심 한 끼 똑똑히 못 얻어먹어서 눈이 퀑 들어가는 것을 당하면서 박아낸 것이다. 참으로 생각하면 필름에서 주림에 울던–피–눈물–탄식이 줄줄 흐른다. 그러나 그나마 자기들의 마음대로 똑똑한 것 하나 박아보지 못하고, 그 알뜰한 돈 천 원이나 내놓는 대자본가의 비위를 맞추느라고, 남이 다 구워먹고 남은 찌꺼기를 건져다가 또다시 구워내어, <장한몽>, <농중조>나 얻어 보는 꼴이라니 참으로 한심하기 짝이 없다. 또 보는 이들의 형편은 어떻고? 조선의 팬들의 주머니가 넉넉하기는 꿈에도 없을 일이다. 한참 적에는 그나마 상설관 서너 개가 문이 닫을 지경이라, 하는 수 없이 일금 10전 하니까 전에 못 보던 팬들이 우아~하고 몰려든다. 내가 어렸을 적에 돈 10전을 내고 구경해본 적이 있지만, 요즈막 와서 상설관에서 10전 받는다는 것은 아마도 이 지구 위에 조선밖에는 없으리라. 그러나 어쨌든 잘한 일이다. 다른 것, 모든 예술보다도 가장 민중과 가까운 의미를 가진 영화조차 일반 민중에게서 자꾸 멀어간다는 것이 좀 섭섭한 일이니까, 10전 받을 때 몰려들어온 새로운 팬! 그들이 정말, 영화의 팬인 것을 짐작해야만 될 것이다. 론 채니 [필자 주: Lon Chaney. <노틀담의 꼽추(The Hunchback of Notre Dame, 1923)>, <오페라의 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 1925)> 등에 출연한 미국의 영화배우] 씨의 일주일 봉급만(1만5천원) 가지면, 적어도 우리 땅에서 그것 가지고 영화 다섯은 만들 만한, 이런 하늘과 땅의 차이, 어찌하여 요 모양일까? 그러나 여기에 한 개의 획시대적 산물이 있으니, 그것은 <아리랑>, <아리랑>이 그것이다. 공연히 학교에 다니다가 미쳤다는 주인공은 지금의 현실 속에 부대끼는 우리는 그가 왜 미쳤는가를 다시금 중언부설(重言復說)도 하기 싫다. 다 찌그러져 가는 초가집과 가판 장인 듯한 바깥 기둥에는 ‘청년회’라는 간판이 붙어 있다. 긴 두루마기 자락을, 써늘한 바람에 나부끼면서 일하려 다니는 농촌의 인텔리겐치아인 박선생. 서울 가서 공부하다가 귀향한 대학생이 양복에다 고깔을 쓰고 농민들과 같이 “풍년이 왔다네. 풍년이 왔다네~”를 부르고 춤추는 씬. 이것이 조선에서 조선의 모든 것을 배경으로 하고 우러난 영화다. 청년회의 깃발이 날리면서 회원들의 행렬이 보인다. 얼마나 그리운 이 장면이냐? 화려하고 정묘한 장면이 없는 대신에, 침울하고 비통한 오뇌(懊惱)의 못 견딤이 이 장면에 나타난다. 기교로 말해도 영화의 역사를 수십 년이나 가진 일본 영화의 그것보다 못지않다. 나는 일본의 소위 신(新)영화라는 것을 남 못지않게 보았지만, 이른바 일본이면 일본의 참된 냄새나는 영화를 일찍이 본 적이 없다. 다만 광선이 없고 세트가 없기 때문에 거기에는 우리가 양보할 수밖에 없다. 나는 단 2년 동안의 조선의 영화계에서 이런 수확이 있는 것을 못내 기뻐한다. 여하간 이 <아리랑>이란 영화는 과거의 조선의 영화를 모조리 불살라버리고, 돈 없고는 살 수 없고 한숨 많은 이 땅 위에서 슬피 대공(大空)을 울려그 무엇을 광호(狂呼)하는 한 개의 거상(巨像)이다. 어쨌든 더욱 조선에서 모든 것을 빨리 실어다가 우리들에게 보여줄 것은 다만 영화밖에는 없다. 오전짜리 레프야? 길이 활동하기를 바란다. 조선의 문화도 차차 영화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너 나 할 것 없이 영화, 영화 한다. 한 개다, 한 개. <아리랑> 한 개다. 또 이후에는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주려느냐, 조선의 영화계여? 현대의 문명은 아무리 해도 라디오·스포츠·키네마이다. 언제나 이들의 문명(文明)도 우리와 거리가 가까워지려는고? (끝)
아, 임성민 ! 누군가 내게 한국영화계 최고의 미남배우가 누구였냐고 묻는다면, 이제는 불러도 불러도 대답 없는 고(故) 임성민이라 말할 것이다. 물론 남궁원도 잘 생겼지만 임성민이 좀 더 섹시했다. 고교 육상선수 출신의 탄탄하고 매끈한 체격, 그야말로 훤칠한 조각미남의 대명사였던 그는 ‘변강쇠’ 이대근 으로 대표되는 1980년대 후반 토속에로 장르의 반대편에서 치명적인 도시 남자의 ‘지골로’(gigolo)스러운 매력을 뽐냈다. 물론 마흥식 , 이영하 처럼 비슷한 계열의 다른 배우들이 있었지만 역시 그가 가장 섹시했다. 마치 ‘한국의 미키 루크’라 불러도 좋을 정도의 섹시함을 과시하며 < 달빛 멜로디 >(1984)에서는 안소영 , < 바람난 도시 >(1984)에서는 이미숙 , < 탄드라의 불 >(1984)에서는 오혜림 , < 무릎과 무릎 사이 >(1984)에서는 이보희 , 그리고 < 색깔있는 남자 >(1985)에서는 무려 오수미 , 오혜림 , 오경아 트리오의 상대역으로 출연하며 입지를 다졌다. 이즈음, 요즘 한창 잘 나가는 TV 예능 프로그램 <진짜 사나이> 류수영 의 본명인 ‘어남선’처럼 뭔가 수산업을 연상시키는 ‘임관배’라는 본명을 내던진 것은 가장 잘한 일 중 하나다. 달빛 멜로디 , 무릎과 무릎 사이 , 그리고 장사의 꿈 세월이 흘러 <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 >(1994)에서 최진실 에게 납치당한 한국 최고의 미남 배우도 바로 그였다(당시 최진실의 지시로 그의 목을 조르고 있던 무명의 신인배우가 바로 유오성 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1995년 8월 17일, 어린 딸을 하나 남겨둔 채 간경화 악화로 세상을 뜨고 말았다. < 사의 찬미 >(1991)에서 윤심덕( 장미희 )과 사랑에 빠진 와세다대학 영문과 학생 김우진으로 출연해, 동그란 뿔테 안경을 쓴 지적인 모습을 뽐내며 청룡영화상 남우주연상을 받기도 하는 등 배우로서의 원숙미를 서서히 드러내던 시기였다. 그렇게 남자배우로서 한창 뻗어 나갈, 불과 마흔 살의 나이로 세상을 떴으니 너무나 안타깝다. 그래서 한국형 하드보일드 장르가 안착한 지난 몇 년간 멋진 고참 형사나 보스로 출연한 그의 모습을 가끔 상상해본다. 공교롭게도 임성민 은 역시 세상을 뜬 장국영과 1956년생 동갑인데, 그보다 한 살 많은 1955년생 임달화의 현재 모습을 보면서 ‘임성민이 살아있다면 저런 느낌이지 않을까’ 헛된 상상을 해보기도 했다. 황석영 원작, 신승수 감독 < 장사의 꿈 >(1985)은 ‘털보’ 임성민 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씨름 선수 차일봉(임성민)은 서울에 올라와 방황하던 중 돈을 벌기 위해 새벽 인력시장에 나선다. 당연히 어딜 가나 눈에 띄는 외모다. “어이, 거기 털보! 덩치가 좋구먼. 나랑 같이 일하러 갑시다.” 하지만 공사판의 한 할아버지가 그의 육체가 부러운 듯 점잖은 표정으로 독설을 내뱉는다. “힘이란 믿을 게 못 되지. 늙어버리면 그만이니까. 이제 힘은 별로 쓸모가 없을 거외다. 용이 뭍에 오르면 개미가 덤비는 법이지.” 그러자 일봉은 갑자기 밥을 먹다 말고는 쌓아놓은 벽돌 탑을 단숨에 넘어트리며 장사의 희열에 젖는다. 고향에서는 황소를 독차지할 정도의 실력이었지만 전국 규모의 천하장사 대회에서는 크게 명함을 내밀 수준이 못 되니,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더 큰 도전의식으로 가득 찼을 것이다. 그런 식의 B무비스러운 고속촬영 판타지 장면은 영화 내내 반복되는데, 아마 연극으로도 만들어진 <장사의 꿈>이 흉내 낼 수 없는 영화적 효과를 위한 장치일 것이다. 영화의 시작, 털보 임성민 이후 그는 불고기를 사주는 돈 많은 게이( 남포동 )의 유혹에 넘어갈 뻔하면서 도시의 삭막한 공기에 눈뜨게 된다. 그러다 급기야 영문도 모른 채 지하실에서 은밀하게 만들어지는 에로영화에까지 출연하게 되는데, 그 촬영현장에서 맨 처음 맞닥뜨린 헐벗은 애자( 금보라 )를 보고는 한눈에 반한다. 하지만 바지가 부풀어 오른(-_-;) 일봉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대로 된 ‘합’을 맞춰보기도 전에 애자의 기둥서방 마대수( 송경철 )는 애자를 데리고 누드캘린더를 촬영하는 곳으로 휭 떠나버린다. 그래도 일봉의 남다른 체격과 외모 때문인지 곧 두 사람은 음지에서 승승장구를 거듭한다. < 부기 나이트 >(1997)의 덕 디글러(마크 왈버그)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그전까지 대머리 중년 남자배우와 뒹굴던 애자 역시 싱싱한 일봉이 마음에 드는 눈치다. 당연히 최고의 에로배우를 얻은 감독( 정진 ) 역시 신이 난다. 거리로 나간 고다르가 < 네 멋대로 해라 >(1960)를 찍었던 똑같은 16밀리 볼렉스 카메라로 골방에서 에로영화를 찍고 있는 처지일지언정, 그는 생긴 것과 달리 에로영화에 대해 진지한 철학을 설파하기 시작한다. “예술이 별건가, 바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거다. 자연의 아름다움, 육체의 아름다움. 그중에서도 남녀가 사랑할 때의 아름다움이 가장 아름답다. 사랑 앞에서는 어떤 가치도 무의미하다. 어서 옷을 벗고 그 폼 나는 육체를 아낌없이 뽐내고 자랑하라!” 급기야 그들은 깊은 산 속에서의 야외 로케이션도 감행하게 되는데, 쇠사슬을 두른 ‘타잔’ 임성민 이 쇠사슬을 끊고 하얀 천을 날리며 헐벗은 채 뛰어오는 ‘선녀’ 금보라 를 향해 달려간다. “도시 생활에 찌든 사람들에게 야성을 되찾아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감독의 하나 마나 한 개소리가 이어지는데 어쨌건 북한산에서 이뤄진 ‘타잔과 선녀의 합궁’이라는 아찔하고 키치적인 동서양의 만남 앞에 그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다. 순간 이마무라 쇼헤이의 < 인류학 입문 >(1966)이 살짝 떠올랐다고 고백한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타잔 임성민 , 선녀 금보라 임성민 도 그렇지만 ‘cute’와 ‘sexy’가 하나로 만나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던 금보라 의 매력도 그냥 지나칠 수 없다. < 장사의 꿈 >에서 일봉이 과거 시골 읍내를 주름잡던 천하장사였다면 애자는 바닷가 마을의 해녀였다. 그래서 “애자 씨는 너무 차가워요”라는 일봉의 질문에 “어려서부터 해녀로 자라서 피가 차가운가 봐요”라는 나름 그럴듯한 답을 내놓기도 했다. 그런 차가운 매력은 에로 연기가 서투른 일봉의 연기를 교정하는 데 있어서도 능수능란하다. “어렵게 생각하지 말아요. 우리는 서로의 몸을 만지는 게 아니라 조명 불빛을 만지고 있는 거예요”라는 충고는, 지금껏 봤던 그 어떤 에로영화들에서도 깨닫지 못한 최고의 ‘연기론’과 ‘형식미’ 모두를 함축하고 있다. 바로 그 차가움 속에 서울로 올라와 산전수전 다 겪었을 애자의 깊은 슬픔이 묻어나온다. 그것을 드러내기 위한 친절한 몽타주 역시 가슴을 후벼 판다. “서울은 캄캄한 어둠 속의 동굴과도 같다. 줄곧 어둠 속에서 살았다”는 내레이션이 흘러나올 때는 친절하게도 그 건너편에서 시각장애인 두 명이 지팡이를 짚고서 걸어가고 있다. 암흑과도 같은 도시생활을 시각장애인의 그것과 비교하며 B스럽다기보다는, 너무나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EBS스러운 몽타주라고나 할까. 또한 서울을 헤매고 다녔다는 말에는 곧장 벌거벗은 채 새벽 명동거리를 질주하는 애자의 싱싱한 뒤태를 보여준다. 정말 충격적인 몽타주가 아닐 수 없다. 앞서 김수용 감독의 < 도시로 간 처녀 >(1981)를 비롯해 <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 >(1981) 등으로 깜찍한 신인의 미모를 뽐냈던 그녀는 <장사의 꿈> 이후 < 금달래 >(1986), < 늑대의 호기심이 비둘기를 훔쳤다 >(1988) 등에 출연했다. '조명 불빛을 만지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두 사람의 사랑이 이뤄지고 난 다음부터가 문제다. 촬영장에서 폭력을 행사하는 못된 대수를 일봉이 무력으로 제압한 이후, 에로영화 촬영장에 경찰이 들이닥치고 두 사람은 떠돌이 신세가 된다. 우연히 만난 약장수 태산거사( 김인문 )과 함께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그들의 모습은 영락없이 펠리니의 < 길 >(1954)의 한 장면을 보는 것처럼 애처롭고 정감이 넘친다. 하지만 그들에게 행복은 쉬이 허락되지 않는다. 교통사고로 애자가 유산한 이후 1년 동안 떨어져 지내기로 한 것. 일봉은 남창으로, 애자는 그 문제의 기둥서방을 다시 만난다. 이때부터 영화에서 애자는 사라지고 일봉의 고난의 역사가 시작된다. 뚜쟁이인 방배동 오여사( 김영애 )의 안내로 산속에서 (둘 만의 암호인) 초록색 물통을 든 여사님( 김애경 )을 만나 격렬한 정사를 나눈 뒤부터 산에서도 하고, 호텔에서도 하고, 기차에서도 하고, 아이를 원하는 여자의 대리부 노릇도 한다. 수많은 여사님들에 둘러싸여 자라피도 마시며 승승장구하지만 이내 정력은 고갈되고 만다. 급기야 그는 함께 샤워를 하며 정사를 나누던 한 여사님으로부터 “이거 병신이잖아. 어쩌다 이따위를 보냈지”라는 씁쓸한 환불요구에 직면하는 신세가 된다. 병원의 의사로부터 “몸도 마음도 황폐해졌어요. 좀 쉬어야 합니다”라는 진단까지 받고 보니, 마치 그 모습이 혹독한 연예계 생활에 지쳐 간경화로 쓰러진 현실의 임성민 을 떠올리게 해 마음이 아프다. 말하자면 < 장사의 꿈 >은 고 임성민의 레퀴엠처럼 느껴지는 슬픈 에로영화다. 나이트클럽에서 수많은 남자들의 담배 연기에 파묻혀 나체쇼를 하고 있는 애자와 일봉이 조우하는 마지막 장면 또한 실로 충격적이다. 성인이 되어 영화를 다시 보면서는 그 마지막 장면에 눈물이 주르륵 흘렀더랬다. 1980년대 에로영화에 대해 막연한 조소와 냉소를 퍼붓는 사람들에게 <장사의 꿈>은 그야말로 감동의 명편이다. 마지막 장면 임성민 금보라 정진 김영애 감독: 신승수 각본: 신승수 개봉극장: 코리아, 동아 관람인원: 12,601(서울)명
성룡의 < 취권 >(1978)은 모든 것을 바꿔 놓았다. < 정무문 >(1972)으로 대표되는 이소룡 영화의 비장미는 이른바 ‘코믹 쿵푸’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그 변화의 물결은 유하 감독의 < 말죽거리 잔혹사 >(2004)의 마지막 장면에 잘 드러난다. ‘아뵤~’ 하며 쌍절곤을 휘두르던 아이들이 어느 날 갑자기 비틀비틀 취객 흉내를 내기 시작한 것. 이후 성룡은 < 사형도수 >(1978)까지 연달아 성공시키며 이른바 ‘소자’(小子) 장르를 굳건히 안착시켰다. 말썽만 피우던 철부지 아들이 가문의 복수를 위해 마음을 고쳐먹고 결국 승리하고야 만다는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이소룡의 <정무문>이 그러했던 것처럼 성룡의 <취권>도 무수히 많은 아류작들을 양산했다. 성룡 역시 <취권>을 스스로 패러디하여, 웃음보가 터져서 깔깔대며 상대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는 결정타를 날리는 소권(笑拳)을 소재로 한 < 소권괴초 >(1979)를 만들 정도였다. < 복권 >, < 원권 >, < 소권 > 이소룡 사후 본고장인 홍콩만큼이나 수많은 ‘짝퉁 이소룡’이 등장했고, 심지어 홍콩으로 수출까지 했던 ‘세계 2위의 무술영화 생산 국가’ 한국도 그 아류의 대열에서 빠질 수 없었다. 애무와 체위를 권법에 응용하여(하지만 관객 정서와 검열문제 등으로 인해 안타깝게도 진하게 표현할 수는 없었던) 사랑을 해야 잘 싸울 수 있는 이형표 감독의 < 애권 >(1980)을 시작으로 가공할 배치기를 선보인 김정용 감독의 < 복권 >(1980)과 원숭이의 동작을 응용한 < 원권 >(1980), 성룡의 ‘소권’보다 더욱 강력하게 상대를 웃겨 버리는 이혁수 감독의 < 소권 >(1980), ‘근육질의 짝퉁 이소룡’으로 명성을 날린 거룡과 함께 한 김시현 감독의 < 매권 >(1980)과 < 뇌권 >(1983), 영상자료원에 시나리오만 남아 있고 일체의 정보가 없는 남기남 감독의 <희권>도 있었다. 이미 제목들만 나열해도 현기증이 날 정도로, 당시에는 무슨 아무개 ‘권’만 붙이면 어지간히 흥행이 되던 시절이었기에 그 경쟁이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래서 당시 「경향신문」은 “국산영화 중 가장 문제가 많은 것은 홍콩무술영화 아류와 저질유행어에서 따온 것들로 예술적 감각이나 함축성이 전혀 없다”며 “해괴하고 엉뚱한 영화제목들이 늘어만 가고 있다. 얼토당토않은 조어들이 판을 치면서 언어순화의 사회적 차원은 물론 시민들의 의식구조에도 나쁜 영향을 끼친다”고 이런 무질서한 풍토와 제살 깎아먹기 경쟁을 준엄하게 비판하기도 했다. < 신애권 >, < 소애권 >, < 요사권 > 졸지에 시민들의 의식구조에 악영향을 끼치는 대표 감독이 돼버렸지만, 무려 서울대 영문학과 출신의 이형표 는 < 서울의 지붕 밑 >(1961) 등을 통해 소시민의 애잔한 삶과 일상을 정감 넘치게 그려온 감독이었다. 어쨌건 그는 당시 < 애권 >의 속편인 < 신애권 >(1982), < 여애권 >(1982), < 소애권 >(1983)을 차례로 만들며 그 흐름을 주도했다. 심지어 <여애권>의 서영란과 함께 일종의 스핀오프 격인 < 요사권 >(1980)을 만들기도 했다. 역시 다른 <애권> 시리즈와 마찬가지로 타락한 무도인들로 들끓던 만주를 배경으로 한 <요사권>의 포스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분홍색 하트 ♥ 그래픽과 함께) 어느 날 갑자기 무림에 나타난 홍일점! 희한한 내용, 요상한 재주, 유별난 스타일의 액션도원경!” 그러니까 만드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남들이 보기에 희한하고 요상하게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어쨌건 우리는 즐긴다!’는 그들만의 B급 공감대가 있었던 것이다. '흙바람 몰아치는 만주 비슷한 곳' 신나는 도입부 음악과 함께 < 애권 >이 시작하면 “1940년, 흙바람 몰아치는 만주 비슷한 곳”이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국경지대의 성문이 등장한다. 만병통치약을 파는 약장수가 등장해 사기를 치고, 주인공 황석불( 강용석 )은 그들을 꼬나본다. 이때부터 뻔한 컨벤션과 장난스런 키치의 미학이 폭발하기 시작한다. 분명 남한산성 어디일 텐데 사람들이 버젓이 중국옷을 입고 국경을 넘나든다. 주변에서 꿀차와 번데기를 파는 아줌마를 즉석 캐스팅했는지, 뽀글뽀글 싸구려 파마머리를 한 아줌마가 주인공의 활약상을 지켜보며 “어머! 어머!” 하는 과도한 리액션까지 선보인다. 그때 ‘이 약을 먹으면 칼도 배를 뚫지 못 한다’는 얘기에 석불이 “내가 한 번 해 보겠소”라는 얘기와 함께 약장수의 배를 칼로 찌른다. 하지만 약장수가 배에 두툼한 책을 숨겨놓은 것을 알게 된다. “내가 예전에 < 황야의 무법자 >라는 영화를 봤는데 배에 솥뚜껑이 있더라구!”라며 느닷없이 클린트 이스트우드 주연 영화의 실제 장면을 느닷없이 언급하는 황당함이란! 바로 ‘스파게티 웨스턴’의 장대한 시작을 알렸던 셀지오 레오네의 <황야의 무법자>(1964)에서 솥뚜껑을 방패삼아 총을 맞아도 아무렇지 않았던 장면이, 시대와 국경을 넘어 한국의 ‘김치 무협’ 영화에서 패러디됐다고나 할까. 바로 석불은 죽은 아버지의 원수 옥달평을 찾아 만주로 온 것이다. 옥달평은 돈벌이가 목적인 살인 무술대회를 열어 무림을 어지럽히는 장본인이다. 강직한 일도관의 청담사부( 이강조 )는 옥사부에게 ‘무도는 마음부터 닦는 것’이라 충고하지만, 청담사부의 눈 밑에 짙게 드리워진 다크 서클은 그가 곧 살해될 것임을 암시한다. 그렇게 무림은 옥사부의 세상이 된다. 하지만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찾아간 스승 화삼유( 배수천 )는 술주정뱅이 폐인이 돼 있다. 그래도 석불은 화삼유의 딸 쇼냥( 윤상미 )이 마음에 들어 그들과 함께 지내게 된다. 한편, 옥달평은 예정대로 무술대회를 개최하려 하고 전국 각지에서 (누가 봐도 용인 민속촌으로 보이는) 흑룡여관으로 고수들이 몰려든다. 그중에는 ‘흐르는 별’이라 불리는 유성(遊星)권의 달인도 있다. 헤어스타일부터 동작까지 ‘짝퉁 성룡’이라 할 수 있는 석불은 아버지의 원수를 찾는 와중에도 ‘작업’을 포기하지 않는다. 늘 책을 가까이 하는 쇼냥의 마음을 얻기 위해 “사랑이 무어냐고 물으신다면 눈물의 씨앗” 운운하며 “저도 시를 참 좋아합니다”라고 접근한다. 쇼냥이 들고 있는 책을 향해 ‘마음의 양식’이 아닌 “책은 양식의 마음이죠”라는 썰렁한 대사까지 서슴지 않는다. 나중에 적들과 싸울 때는, 적의 무기를 피해 조롱하면서 “삐빠빠룰라~ 멀리 기적이 우네~”라며 이은하의 ‘밤차’를 부르기도 한다. 만주를 배경으로 아무리 포스트모던하게 시공간을 뒤섞었다지만 잠시도 ‘자투리 개그’를 쉬지 않는다. 그저 보다 보면 자연스레 적응되는 경지까지 가게 되니, 그냥 마음 편히 당대 오락영화의 능청스런 풍경이라고 보면 될 것 같다. '석불이가 놈에게 잡혔소. 내일 구하러 가야겠소. 사랑해 주시오.' 좀 다른 얘기지만, 남기남 감독의 < 영구와 땡칠이 >(1989)의 도입부를 기억하는가. 닫힌 문을 배경으로 성우가 “어린이 여러분, 우리 함께 영구를 불러보기로 해요. 하나, 둘, 셋! 영구야~ 목소리가 너무 작아요. 자, 다시 한 번 불러볼까요? 하나, 둘, 셋!”이라 말하고 어린 관객들이 일제히 “영구야~”하고 부르면 심형래가 문을 열고 나타났다. 그러니까 관객과의 인터랙티브를 시도하는 그런 의도적인 조악함이 당시에는 별로 어색하지 않았다. 굳이 브레히트의 소격효과를 들먹이고 싶진 않지만, 원래 그것은 원본이라 할 수 있는 < 취권 >에서도 빠지지 않는 설정이었다. <취권>에서 성룡의 스승인 소화자(원소전)도 마지막 대결에 느닷없이 “영화에서 이런 중요한 장면에 내가 빠질 수 없지!”라고 외치며 등장했으니까. 게다가 술병을 달고 사는 화삼유는 누가 봐도 소화자를 패러디한 것 아닌가. 1~6번 순서로 편집되어있는 애권 의 다양한 권법들 하지만 알고 보니 화삼유는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 폐인 행세를 한 것이었다. 석불이 악당들에게 잡혀 가자 “석불이를 구하러 가야겠소. 어서 나를 사랑해 주시오”라며 대놓고 화류계의 여자를 만나 애권을 점검하기 시작한다. ‘애무난무권’이니 ‘일심충천권’이니 ‘양인상상권’이니 하는 이름을 갖다 붙이긴 했지만, 관객이 보기에 그저 똑같이 여자 몸을 탐하는 것에 지나지 않아 보인다. 아무튼 구조된 석불도 본격적으로 쇼냥과 함께 애권을 익히고, 결국 흐르는 별과 최후 대결을 벌이게 된다. 갑자기 싸우다 말고 포옹과 키스를 하려 하니 흐르는 별은 당연히 징그러워 질색할 수밖에 없다. 그렇게 석불은 마치 적과 함께 탱고를 추듯 “이것이 바로 만주의 마지막 밤의 탱고다!”라며 애권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정체불명의 애권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흐르는 별의 마지막 대사가 압권이다. “사랑이 날 죽이는 구나~” 그렇게 먹구름이 낀 무림은 홍콩 사람들도 듣도 보도 못한 애권으로 인해 평화를 찾게 된다. 애권이 독특한 것은 그 애권의 최대 적이 체력의 감퇴도 아니요, 의지의 부족도 아닌 바로 주인공의 권태기라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 신애권 >에서는 급기야 장인인 화삼유가 복수를 위해 사위의 외도를 용인하는 장면까지 등장한다. 이제 더 이상 아내를 보면서는 애정이 생기지 않으니까 말이다. 말하자면 예나 지금이나 ‘막장 드라마’는 장르를 초월하여 존재했던 것 같다. 정말이지 기발하다고 하기에는 뭔가 어설프고 조악한, 대체 이런 현기증 나는 권법이 어디 또 있었던가. / 글: 주성철 (씨네21 기자) 강용석 배수천 이강조 윤상미 김정란 감독 이형표 각본 이일목 촬영 양영길 개봉극장 아세아극장 개봉일 1980-04-24 관람인원 61,286(서울)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