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혼
- 감독
- 김영환
- 제작년도
- 1929
- 출연
- 나웅, 김영란, 김정숙
사진: " A Brighter Summer Day ", IMDb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 본 글에는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의 일부 장면과 결말에 대한 묘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 < 장손 >(2023)의 개봉 이후 인터뷰나 관객과의 대화를 통해 수많은 선배 감독의 영화를 참고하고 영향받았음을 솔직히 고백했다. 몇몇 필자들은 <장손>을 두고 존경받는 한국 감독들의 계보를 잇는 영화라 평하기도 했다. 감사하지만 과찬이라 민망할 따름이다. 지난 3월 한국영상자료원에서 열린 대담 에서 금동현 평론가는 나에게 내밀한 질문을 던져왔다. 그는 영화감독들이 공개적으로 영향받았다고 언급하는 영화들은 대개 거짓말이라 믿지 않는다며 나에게 숨기고 있는 진짜 영향받은 영화가 무엇이냐 물었다. 그의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가장 소중한 것은 가장 깊이 숨기는 법이다.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에드워드 양, 1991)을 처음 본 감각을 또렷이 기억한다. 무언가 대단한 걸 본 건 분명한데 이 영화가 왜 대단한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문득 다른 매체는 할 수 없는 무언가를 영화는 능히 해낼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십여 년이 지난 지금도 이 영화의 본질을 독자분들께 설명할 자신은 없다. 당시 대만 정치 상황과 에드워드 양의 영화 미학에 대한 뛰어난 평론은 많으니, 그것들을 참고해주기 바라며 나는 그저 ‘이 영화가 나를 스쳐 지나가며 남긴 흔적들’을 적어보려 한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1961년 6월 대만에서 최초로 발생한 미성년자 살인사건을 모티브로 만들어졌다. 공교롭게도 감독 에드워드 양은 살인을 저지른 소년과 동갑으로, 이 사건은 그에게 잊지 못할 기억으로 각인되었을 것이다. 데뷔 이후 < 공포분자 >(1986)에 이르기까지 대만의 모더니티를 탐구하던 그는 돌연히 1960년 자신의 어린 시절로 돌아간다. 이 영화의 주인공인 샤오쓰가 감독 에드워드 양처럼 상해 출신의 외성인이라는 설정은 우연일 리가 없다. 비록 자전적인 이야기는 아닐지언정 자기 삶이 깊게 밴 친숙한 이야기임이 틀림없다. 사진: " A Brighter Summer Day ", IMDb 이 영화는 지루하거나 불친절하지 않다. 하지만 다 보고 나서 이 영화가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 인물들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떠올려 보면 쉽사리 답할 수가 없다. 에드워드 양은 의도적으로 영화의 모든 씬을 연결하지 않고 파편화한다. 영화는 샤오쓰를 따라가기도 하고 샤오밍을 따라가기도 하고 제3자를 따라가기도 한다. 타이베이의 한 마을이라는 제약 아래 카메라는 마을 곳곳을 반복적으로 비추며 그 변화를 보여준다. 예컨대 영화 초반에 217파와 학교에서 다투던 슬라이가 몰래 만나던 여성이 샤오추이인줄 알았으나, 3시간 30분이 지나서 사실은 샤오추이가 아니라 샤오밍임을 알게 되는 식이다. 영화는 수많은 복선으로 가득해서 단 한 장면이라도 놓치면 이후 등장하는 장면에서 의도하는 바를 알 수 없게 된다. 하지만 모든 장면을 놓치지 않는다 한들 샤오쓰가 왜 샤오밍을 찌르는지, 에드워드 양이 이 영화를 통해 던지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선명하지 않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완성될 수 없는 조각 그림 맞추기인 셈이다. 어쩌면 에드워드 양의 목표는, 애초에 정답이 없는 조각 그림 맞추기를 관객들이 나름대로 필사적으로 맞추려고 노력하도록 하는 데 있지 않을까. 관객들이 서사에 함몰되지 않고 씬과 씬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유추하고 지연된 정보를 종합하는 사유의 과정에서 1960년의 장제스 치하의 타이베이 공기를 느껴보기를 에드워드 양은 바랄 것이다. 제목 그대로 영화 말미에 주인공 샤오쓰는 자신이 사랑하는 샤오밍을 칼로 찌른다. 사건을 저지른 직후 샤오쓰의 행동을 보면 마치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헛소리를 해대고 발작을 일으킨다. 마치 우리가 이제껏 보아온 샤오쓰와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샤오쓰가 왜 샤오밍을 칼로 찌르게 됐는지를 살펴보기 위해선 먼저 샤오밍에 대해서 알아볼 필요가 있다. 샤오밍은 마성의 매력을 가진 여학생으로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녀를 좋아한다. 현재 그녀는 소공원파의 보스인 허니의 애인으로, 허니는 그녀 때문에 산동파의 보스를 죽이고 타이베이를 떠나 잠적한 상태다. 자연이 진공을 허락하지 않듯 허니가 사라지자 동네 수많은 남학생은 샤오밍에게 접근한다. 그리고 샤오밍 또한 남자들을 뿌리치지 않고 다음 짝을 고르듯 만난다. 하지만 이를 샤오밍의 남성 편력으로 오해해서는 곤란하다. 슬프게도 샤오밍에게 남자란 생존 전략의 수단에 가깝다. 샤오밍과 그녀의 엄마는 외성인으로 타이베이에 마땅한 기반이 없다.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하던 그녀는 엄마의 지병인 천식이 도지자 남의 집을 전전한다. 핑 아주머니에게 쫓겨난 그들은 야박한 친척 집을 들렀다가 소공원파의 경쟁조직인 217파에게까지 의지한다. 의아해 보이지만 사실 그녀가 217파 보스와 연인관계였던 것을 떠올려보면 자신의 친정집으로 돌아간 셈이다. 그러다 사라졌던 허니가 다시 돌아오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허니에게 의지한다. 그런데 영화를 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허니와 샤오밍이 연인이라고 하지만 그 어떤 장면에서도 두 사람의 스킨십 장면이 없다. 그 흔한 손잡는 장면이나 포옹 장면도 없다. 그저 허니의 첫 등장에서 두 사람이 함께 서 있는 장면이 유일하게 함께 담긴 장면이다. 그리고 허니는 샤오쓰에게 “샤오밍이 널 많이 좋아한다고 그러더라”라고 말한다. 이게 어디 남자친구가 할 법한 말인가. 허니는 애인이 아니라 오히려 샤오밍에게 부재한 오빠나 아버지에 가깝다. 허니는 샤오밍의 유사 가족인 셈이다. 비극적인 사고로 허니가 죽자 다시 샤오밍은 떠돌아다닌다. 자신에게 환심을 보이는 의사 선생님에게 의지했다가 그에게 약혼녀가 생기자 다시 샤오마의 집에 식모살이로 들어간다. 그리고 아무런 능력이 없는 샤오쓰는 이 모든 과정을 무기력하게 보고 있을 수밖에 없다. 샤오밍과 허니 (사진: "A Brighter Summer Day"_ 1 , 2 , IMDb) 그러면 반대로 남자들은 왜 이렇게 샤오밍에게 열광하는가. 동네 불량배 남학생들은 허니가 사라지자 샤오밍에게 접근한다. 표면적으로 드러난 슬라이, 타이거, 샤오쓰 외에도 더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동네의 강력한 1인자 허니가 등장하자 꼬리를 감췄다가, 허니가 죽자 다시 샤오밍에게 접근한다. 샤오밍을 욕망하는 남자들은 샤오밍에게 경쟁적으로 구애하지 않고 서로 싸우기에 바쁘다. 그들에게 진정 원하는 것은 ‘샤오밍의 마음’이 아니라 샤오밍을 욕망할 수 있는 위치인 ‘허니의 위치’에 오르는 것이다. 르네 지라르를 빌려 이야기하면 자신 내부의 자발적 욕망이 아니라 중개자에 의해 만들어진 허상의 욕망인 셈이다. 남자들은 스스로 ‘샤오밍’을 욕망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거짓이며 욕망 중개자인 ‘허니’를 모방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 정작 중요한 것인 ‘샤오밍의 마음’을 얻어 다른 남자들의 우위에 서는 ‘허니의 위치’에 오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샤오밍을 욕망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샤오밍이 허니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질투하기는커녕 중요하게 생각한다. 샤오밍의 마음을 얻지 못한 남자들, 다시 말해 허니의 위치에 오르지 못한 자들은 모두 무너진다. 슬라이는 권력을 잃고 타이거 또한 말을 잃는다. 주인공 샤오쓰도 샤오밍을 평생 지켜주겠다며 고백하지만 거절당하자 언제 그랬냐는 듯 다른 여학생과 만남을 가지고 키스를 한다. 그리고 다음날 샤오쓰는 자신을 지켜준다는 약속을 지킬 거냐는 샤오밍에게 자신의 부정을 숨기고 뻔뻔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샤오밍과 교제를 시작한 샤오쓰는 잠시 행복할 뿐 그녀가 떠나 버릴까 봐 불안하다. 샤오쓰는 샤오밍이 주위 남자들을 정리하지 않으면 “사람들이 널 깔볼 거야”라고 말하는데, 이는 실상 다른 사람들이 아닌 샤오쓰의 본심이다. 불미스러운 일로 퇴학을 당한 샤오쓰는 점점 샤오밍과 멀어진다. 큰 나무 아래서 샤오쓰는 주간부에 들어가기 전까지 샤오밍을 보러 가지 않겠다고 말하자 샤오밍은 “허니가 타이난으로 떠났을 때랑 비슷하네”라고 대답한다. 이는 마치 앞으로 벌어질 일의 불길한 복선처럼 느껴진다. 두 사람의 가장 빛나던 순간인 나무 아래 장면 다음 샤오마의 집으로 연결된다. 샤오마의 아버지는 고위 장군으로 그의 집에는 커다란 일본 장도와 총이 가득하다. 캣과 비행기는 전쟁놀이를 하고 있고 총을 가지고 장난을 치던 샤오밍은 실수로 샤오쓰를 향해 총을 쏴버린다. 샤오쓰는 그대로 얼어버리고 놀란 샤오마는 샤오밍의 손에 들린 총을 빼앗고는 뺨을 때린다. 모두의 선망 대상이자 친구 샤오쓰의 애인이지만 샤오마에게는 샤오밍은 그저 입버릇처럼 말하는 ‘여자 따위’에 불가하다. 여기서 결코 좁힐 수 없는 권력의 차이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영화 속 남자들, 총을 겨눈 샤오밍 퇴학을 당한 샤오쓰는 주간부에 들어가기 위해 공부에 매진하지만 계속 샤오밍을 그리워한다. 캣의 집에 놀러 간 샤오쓰는 캣에게 샤오밍의 안부를 묻는데 이때 샤오쓰가 은장도의 주인이자 정절를 중요시한 일본 여자의 사진을 보고 샤오밍을 언급한다는 사실은 꽤 의미심장하다. 이후 샤오밍을 볼 수 없는 샤오쓰는 일본 여자의 사진을 통해 샤오밍을 생각한다. 불안한 샤오쓰는 샤오밍이 자신만을 생각하고 정절을 지키길 바라는 것이다. 하지만 슬라이를 통해 샤오밍이 샤오마의 집에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샤오쓰는 샤오마와 갈등한다. 캣이 중재해 보려 하지만 샤오마가 칼을 들고 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샤오쓰는 촬영장에서 종이에 글을 쓰더니 손전등을 두고 사라진다. 눈이 나쁜 샤오쓰가 항상 밤마다 들고 다니던 손전등을 버린다는 것은 더 이상 세상을 볼 필요가 없다는 뜻이며, 그가 쓰던 글은 나중에 밝혀지지만 둘째 누나에게 남기는 유서였다. 샤오쓰는 죽기를 각오한 것이다. 캣의 은장도를 들고 학교로 찾아간 샤오쓰는 샤오마 대신에 샤오밍을 우연히 마주치고는 이렇게 말한다. 사진: " A Brighter Summer Day ", IMDb “이제 네게 남은 희망은 나밖에 없어. 과거에 허니가 그랬지. 네가 왜 허니를 못 잊는지 알아? 그건 네가 날 허니처럼 생각해서 그래.” 자신이 곧 허니라고 말하는 샤오쓰는 자신이 샤오밍의 유일한 구원자라고 주장한다. 이에 샤오밍은 이렇게 대답한다. “내가 변하도록 도와주겠다는 거야? 너도 똑같아. 내가 사람을 잘못 봤네. 너도 다른 애들처럼 나한테 감정을 바라고 잘해 준 거였어. 그러면 안심이 될 테니까. 참 이기적이야. 네가 날 바꾸겠다고? 난 이 세상과 같아. 세상은 변할 수 없어.” 애석하게도 샤오밍은 샤오쓰를 ‘허니’가 아닌 허니가 되지 못한 ‘다른 애들’로 취급해 버린다. 순간 샤오쓰는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셈이다. 허니가 되지 못한 공허한 존재, 샤오쓰는 반대로 자신이 지키려던 존재, 샤오밍을 부정해 버린다. 그건 샤오밍을 죽여버리는 것이다. 그는 정절을 지키지 못한 샤오밍을 비난하듯 은장도로 찌른다. “넌 희망이 없어. 뻔뻔한 계집 부끄러운 줄 알아.” 자신의 존재를 부정당한 샤오쓰는 그대로 미쳐버리고 다시는 영화에서 그의 정상적인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샤오쓰가 샤오밍을 왜 죽였는지 묻는 영화가 아니라 샤오쓰가 샤오밍을 죽이기까지 어떻게 미쳐가는지 보여주는 영화라 할 수 있다. 아쉽게도 내 능력의 부족과 마감 기한이 임박한 관계로 영화 속 학생들의 세계 중 일부만 다루는 반쪽짜리 글로 마무리해야 할 것 같다.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영화 속 어른의 세계를 다뤄보기를 바라며 마지막으로 독자분들과 나누고 싶은 인상적인 장면 세 가지와 영화를 보며 해소되지 않는 질문 세 가지만 공유해보고 싶다. 1) 체육 시간에 캣은 허니를 무시하는 타이거에게 공을 날린다. 공에 맞은 타이거는 이를 샤오쓰의 행동으로 오해한다. 하교하던 샤오쓰 일행은 어둠 속에서 웃음소리와 함께 날아온 농구공을 마주한다. 개인적으로 태풍 속에서 217파를 살육하는 장면보다 훨씬 무섭다. 타이거로 유추는 가능하지만 상대방이 누군지 몇 명인지 어떤 무기를 들고 있는지 우리는 도저히 알 수 없다. 에드워드 양은 이 장면에서 공포를 보여주는 대신 상상하게 만든다. 보여주는 것에는 한계가 있지만 우리의 상상은 한계가 없다. 2) 샤오쓰의 아버지는 친한 친구 왕 선생과 연루되어 이적 혐의로 며칠 동안 비밀경찰의 심문을 받는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자신이 알고 모든 것을 진술하기를 강요받는다. 이 장면의 첫 컷에서 카메라는 아버지에게 천천히 다가간다. 발소리와 함께 진술을 그만해도 된다는 경찰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을 보면 경찰의 시점 샷으로 유추된다. 아버지는 시간을 조금 더 달라고 부탁하는데 이때 먼 곳에서 다른 경찰의 목소리가 들린다. 놀란 아버지는 뒤를 돌아보지만, 그곳에는 아무도 없다. 아버지는 환청을 들은 셈이다. 그런데 이때 샷 구성이 굉장히 흥미로운데, 두 번째 컷에서 아버지의 시점 샷 대신에 대신 경찰이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위치에서 시점 샷으로 연결된다. 아버지가 경찰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셈이다. 독재국가의 폭력에 미쳐버린 아버지를 보여줌과 동시에 자기검열과 감시의 시선을 내면화한 죄수의 모습을 효과적으로 그려낸다. 세 번째 컷에서 드디어 아버지의 시점 샷으로 문이 활짝 열린 모습이 나오는데 아버지는 왠지 열린 문으로 쉽사리 나가지는 못할 것 같다. 3) 샤오밍이 샤오마의 집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샤오쓰는 당장 샤오마의 집으로 찾아간다. 샤오쓰가 어떻게 된 일이냐고 따지자, 샤오마는 샤오밍이 자신의 집에 찾아와 일자리를 달라고 부탁해서 받아준 것이라고 대답한다. 마치 별일 아니라는 듯 들어와서 샤오밍을 만나고 가라고 하지만 샤오쓰는 끝내 들어가지 않는다. 이 장면에서 카메라는 샤오마를 따라 오른쪽으로 이동한 다음 아무런 움직임도 없이 샷이 나누어지지 않은 채로 지속된다. 우리는 집 안에 있는 샤오마를 볼 수 있지만, 바깥에 있는 샤오쓰는 볼 수 없다. 오직 목소리로만 샤오쓰를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에드워드 양은 왜 컷을 나눠서 샤오쓰를 비추지 않았을까? 에드워드 양은 이 장면에서 샤오쓰가 차마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없는 심정을 찍고 싶었을 것이다. 그는 샤오밍이 살고 있는 샤오마의 집에 한 발짝도 들이고 싶지 않은 샤오쓰의 내면을 샤오쓰가 등장하지 않는 장면으로 형상화해낸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모든 장면이 뛰어나지만 특히 이 장면이 가장 훌륭하다. 나에게 영화라는 매체에 대한 사유를 매번 하게 만드는 선생님 같은 장면이다. - - - 앞서 말했듯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은 완성될 수 없는 조각 그림 맞추기 같은 영화다. 몇 번을 봐도 해결할 수 없는 의문점이 생긴다. 첫 번째 질문. 의사 선생님은 왜 샤오밍에게 호의를 베풀었는가. 의사 선생님은 샤오밍과 그녀의 어머니까지 치료해 주고 지낼 곳을 마련해준다. 샤오밍의 말처럼 의사 선생님도 그녀를 좋아해서 무언가 대가를 바라고 한 행동인지 아니면 순수하게 의료인으로서의 호의를 베푼 것인지 알 수 없다. 샤오밍이 죽고 난 뒤 그녀와 어떤 관계였냐고 따져 묻는 기자의 말에 발끈하는 의사 선생님의 모습에서 우리는 그를 어떻게 판단해야 할지 주저하게 된다. 다음 질문. 샤오추이는 어떤 인물인가. 샤오밍이 샤오마의 집에 산다는 사실을 알게 된 샤오쓰는 샤오추이와 데이트를 한다. 이때 샤오추이는 슬라이가 학교에서 217파와 붙었을 때 옆에 있던 여자가 자신이 아닌 샤오밍이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슬라이가 허니가 돌아오면 맞아 죽을까 봐 샤오밍이 아닌 자신이라고 소문을 냈다는 것이다. 사실 샤오쓰는 몰랐던 사실이지만 샤오추이는 이런 비밀을 지켜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그런데 샤오추이가 고마워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궁금해진다. 남자들이 샤오밍을 욕망하며 허니가 되고 싶었던 것처럼 샤오추이도 슬라이를 욕망하며 샤오밍이 되고 싶었던 것일까. 마지막 질문. 엔딩 장면의 의미는 무엇인가. 결국 15년형을 선고받은 샤오쓰가 떠나고 남은 가족들은 대청소를 하고 있다. 그러던 중 고장 났던 라디오가 다시 작동하더니 대학 합격 명단이 흘러나온다. 마당에서 옷을 정리하던 샤오쓰의 어머니는 샤오쓰의 교복을 발견하고는 생각에 잠긴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수많은 명단 중 샤오쓰의 본명인 ‘장첸’이라는 이름이 흘러나오는데, 현실적으로 중학생이자 감옥에 있는 샤오쓰는 대학에 들어갈 수 없다. ‘장첸’이라는 이름이 우연으로 들어갈 리도 없는데 에드워드 양은 왜 이런 장면을 엔딩으로 선택했을까. 이 정답 없는 질문들을 공유하며 언젠가 독자분들과 함께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에 대한 대화를 나누기를 고대한다. 마지막으로 내 마음의 북극성 같은 에드워드 양 감독님께 존경의 인사를 보내며, 나 또한 이렇게 끊임없는 질문을 던질 수 있는 영화를 만들겠다는 약속을 남긴다. 오정민(영화감독) l 영화로 먹고사는 방법을 열심히 찾고 있는 베짱이. < 장손 >(2023) 연출.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 것도 몰라요 괜히 겁이 나네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난 정말 몰라요 들어보긴 했어요 가슴이 떨려 오네요 그런 말 하지 말아요 난 지금 어려요 열아홉 살인걸요 화장도 할 줄 몰라요 사랑이랑 처음이어요 웬일인지 몰라요 가까이 오지 말아요 떨어져 얘기해요 얼굴이 뜨거워져요 엄마가 화낼 거에요 하지만 듣고 싶네요 사랑이란 그 말이 싫지만은 않네요 - <나는 열아홉살이에요>: 윤시내 노래, 이장희 작곡: < 별들의 고향 >(이장호, 1974)의 주제가 한국영화의 여성상은 참으로 많은 부침을 겪었다. 감히 시대에 앞선 욕망을 추구하는 여자는 처참히 몰락해야 했으며 *주1 산업화가 이루어지는 7-80년대의 도시에서 순진무구하나 배운 것 없는 소녀는 기필코 사창가로 전락했다. 90년대 이후, 새로운 서사로 한국전쟁을 그려낸 수작들에는 발달장애가 있는 여성들이 단골로 등장한다. 머리에 꽃을 달고 마을을 내달리는 그녀들은 동화 같은 공동체에 폭력이 소개되는 순간, 가장 먼저 죽어야 하는 탄광의 카나리아들이다. *주2 이 중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린 여성상은 단연코, 몰락하여 사창가로 들어가는 여성들이다. < 영자의 전성시대 >(김호선, 1975), <별들의 고향>을 필두로 가히 하나의 장르로 자리잡은 7-80년대의 “호스티스 멜로” 영화들. 한국만큼 순수한 여성의 추락 서사에 집착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비비안 리를 주인공으로 한 < 애수 >(Waterloo Bridge, 마빈 르로이, 1940)가 한국에서만 유독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은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한국에서 <애수>는 < 벤허 >(윌리엄 와일러, 1959)나 < 아라비아의 로렌스 >(데이빗 린, 1962)만큼이나 “주말의 명화”의 단골 레퍼토리였다. 그러나 정작 영어권에서 이 영화를 본 사람은 한국영화를 연구하는 사람들 외에는 단 한 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파란 눈의 동료교수들은 유독 한국에서만 주목받은 이 영화가 도대체 어떤 내용이냐고 내게 묻는다. <별들의 고향> 중 거울 앞에서 기도하는 경아 20세기 한국영화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죄목은 대개 둘 중 하나다. 너무 많이 알거나, 혹은 너무 모르거나. 아는 여성은 많이 아는 죄로 응징을 당하고, 모르는 여성은 배운 것 없는 무식의 죄로 몰락한다. <별들의 고향>에서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것도 몰라요, 엄마가 화낼 거예요”라고 노래하는 천진난만한 경아( 안인숙 )의 죄는 아무것도 모름, 즉 순진함이다. 너무 순진해서 신마저도 그녀를 버린다. 여관으로 끌려가 반 강제적 성관계를 하기 전, 필요한 것은 콘돔과 녹음기, 변호사였겠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경아는 거울 앞에 서서 기도하는 것으로 이 모두를 대신한다. “저를 행복하게 해 주소서, (이 남자가) 저를 버리지 않게 해주소서”라고 화장실에서 기도한 그녀의 간절함은 어디에도 가 닿지 않았다. 당연하다.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 자신의 잘못이다. 세상은 그 사실을 경아에게 끊임없이 주지시킨다. 스스로에게 타락한 여자라는 굴레를 씌우고 죄의식과 수치심의 선악과를 베어 문 여자의 추락은 끝이 없고, 그런 그녀를 놓아두고 세상은 세상의 질서대로 묵묵히 발전해 나갈 뿐이다. < 가여운 것들 >(요르고스 란티모스, 2023)을 보는 내내 윤시내가 청순하고 앳된 목소리로 데뷔 전 부른 <별들의 고향>의 주제가가 내 머릿속에 울려 퍼진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메리 셸리적인 *주3 상상력으로 만들어진, 죽은 모체의 몸에 모체의 태내에 있던 태아의 두뇌를 장착한 벨라(엠마 스톤)는, 두뇌는 아기이나 몸은 성인 여성이다. 경아의 후예로 21세기의 한국에 등장한 베이글녀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얼굴은 해맑은 어린이이되 몸은 글래머인 성인 여성 -- 베이비와 글래머를 합성한, 어원부터 심상치 않은 포스트휴먼 냄새를 물씬 풍기는 여성상. 걷는 것조차 서툴던 벨라는 외부의 자극에 명민하게 반응하며 구강기-항문기-성기기를 꼭꼭 다지며 (두뇌만) 알차게 성장하여 끝없는 성욕을 가진, 그러나 “아무것도 모르는” 아름다운 여성이 된다. 여기까지는 이성애자 남성의 편의대로 주물(鑄物) 할 수 있는 완벽한 대상으로 보인다. <가여운 것들> 포스터 하지만, 그녀에게는 기억과 트라우마가 없다는 반전이 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은 맞지만, 그런 무지로 인해 일어나는 각종 사고와 사건들은 그저 재미있는 삶의 경험일 뿐, 벨라에게 죄의식이나 수치심을 주입하지 않는다. 수치심과 죄의식에 태생적 면역을 가지고 있는 벨라의 모습은 유아성욕의 묘사에서 첨예하게 드러난다. 마치 곤충의 다리를 하나씩 절단하며 관찰하는 어린아이의 천진한 호기심처럼 우리를 불편하게 하는 벨라의 성욕은, 최은미의 단편소설 「라라네」(2015, 『목련정전』, 문학과 지성사)에 등장하는 긴머리의 소녀 라라를 닮았다. 최은미의 소설 속 라라는 애정결핍으로 끊임없이 자위행위를 하고, 그의 엄마는 저주에 가까운 말로 겨우 유치원생에 불과한 라라에게 수치심과 죄의식을 주입한다. 그러나 벨라에게는 그렇게 할 엄마도 없다. 그녀를 저지하는 것은 “벨라 백스터”라는 의학적 프로젝트의 성장을 기록하기 위해 고용되었지만 후에 그녀와 사랑에 빠지고 약혼자가 되는 맥스(라미 유세프) 뿐이다. 그는 단호하고 진지하게, 남들 앞에서 자위행위를 하는 것은 예의바르지 못한(not polite) 행동이라고 훈육한다. 벨라에게 사회 속에서의 예의라는 개념은 이렇게 처음 뿌리를 내린다. 자신이 내키는 대로 할 수 있는 것과 없는 것의 경계를 억압이 아닌 타인에 대한 배려, 예의라는 개념으로 배운 셈이다. 이후 벨라의 삶은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를 단죄하지 않고, 과거에 얽매이지 않는 여성이 나아갈 수 있는 길의 극한을 보여준다. 집과 실험실 밖의 세상을 보여주겠다는 뻔한 거짓말로 자신을 유혹하는 던컨(마크 러팔로)의 속마음을 알면서도 벨라는 그의 리스본 여행 제안을 받아들인다. 지능발달로만 보면 엄연히 어린 아이인 그녀와 “성난 점핑(furious jumping)”이라고 명명되는 섹스를 질펀하게 즐기는 이 관계는 그러나 착취로 귀결되지 않는다. 한계치를 벗어나는 그녀의 욕망을 채우지 못하는 것은 던컨 쪽이며, 무료해진 벨라는 휴식을 취하는 그를 혼자 놓아두고 표표히 외출을 감행한다. 식음료의 냄새와 맛, 도시의 강렬한 비주얼과 소음 등, 오감을 자극하는 세계를 하나씩 맛보며 벨라의 두뇌는 유아기와 소년기의 모든 징후를 짧은 시간 안에 축약적으로 드러내며 성장한다. 바야흐로 청년기를 맞은 그녀의 두뇌는 어느 순간, 성욕을 지식에 대한 욕구로 환원시킨다. 책 읽는 것을 “성난 점핑”보다 좋아하게 된 그녀에게 던컨은 불만을 토로하지만 그녀의 지식에 대한 갈망은 이미 발사된 로케트처럼 궤도를 착실히 따르며 더 큰 우주로 나갈 뿐이다. 유람선에서 만나 벨라의 짧은 생에 처음으로 친구가 되어 주는 정갈한 매너의 청년 해리(제러드 카마이클)는 그런 그녀의 호기심에 촉매제 역할을 한다. 해리의 손에 이끌려 배에서 내려 난생처음으로 세상의 부조리와 불평등을 본 그녀는 연민이라는 감정에 휩싸여 역시 난생처음으로 번민을 맛본다. 유람선의 카지노에서 번 돈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그녀의 행위는 세상을 근원적으로 바꿀 수 없는 낭만적이고 어리석은 행위일지언정, 그 진정성을 의심받을 수는 없다. 그러나 벨라의 철없는 자선행위는 던컨과 그녀를 파산으로 내몰고 둘은 호화 유람선에서 내쫓기고 만다. 어찌어찌 파리에 도달한 두 사람은 자산도 생산수단도 없이 살아남아야 한다. 자본주의에 정면으로 도전해야 하는 이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벨라의 “선택”은 유일한 생산수단인 자신의 몸을 이용하는 것이다. 선택이란 참으로 희한한 단어이다. 소녀에서 여인으로 발돋움하는 젊은 여성에게 선택이란 단어는 대학에 진학하거나, 결혼을 하거나, 유학을 가거나, 가업을 잇거나, 직장을 갖거나 하는, 동등한 비중의 장단점을 가진 옵션들 중 개인이 자신의 가치관에 맞추어 고르는 것이다. 거리에서 굶어 죽는 것과 매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것은 선택이 아니다. 어떤 자살은 타살이듯, 이미 더러워진 몸으로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춘밖에 없다는 가스라이팅을 당한 젊은 여성이 스스로의 삶을 놓아버리는 결과인 매춘 행위를 “선택”이라고 명명할 수는 없다. 이렇게 사용된 선택이란 단어는 고장 난 시스템에 면죄부를 주고 개인에게는 가장 큰 폭력이 된다. 인권이 부재한 경제개발이라는 한국사회의 고장 난 시스템 안에서, 경아에게도 영자에게도 매춘은 결코 자발적 “선택”이 아니었으며 암묵적 합의에 의해 일어나고 방관되는 사회적 폭력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벨라는 이 사회적 폭력마저도 스스로 선택한 삶의 실험으로 만들어버린다. 자발적 성매매라는 위험천만하고 논쟁적인 설정은 관객들의 반감을 사기도 하고, 그녀의 실험적 태도를 입증하기 위해 그렇게 많은 정사씬이 필요했을까 싶기도 하다. 하지만 이 모든 상황의 중심에는 삶의 권태와 자신의 성적 판타지를 충족시키기 위해 자발적 성매매자가 되는 벨드쥬르, 세브린느 *주4 처럼 자신의 삶에 대한 멈출 수 없는 벨라의 실존적 갈증이 있다. 이처럼 벨라의 실험은 극한으로 치달으며, 삶은 또 다른 국면을 맞는다. 같은 직장에서 일하는 성노동자 뚜와넷(수지 벰바)의 이끌림으로 사회주의를 접하며 자신의 고민들을 단순한 낭만적 연민 이상의 의식(意識)으로 쌓아나가는 것이다. 휴일을 이용해 사회주의 전당대회에 나가는 그녀들 앞에 런던으로 돌아간 줄 믿었던 던컨이 다시 나타난다. 벨라에게 청혼을 거부당한 던컨이 창녀라고 소리 지르자 뚜와넷은 자신들은 “자립적인 생산수단을 가진 자”라고 친절히 정정해준다. 사실 이 모든 모험의 연대기와 별도로, 벨라는 이미 맥스와 약혼한 사이며 그 사실에 나름 놀랍도록 충실하다. 이미 알고 있는 던컨과의 관계는 물론, 매춘 경험에 대해 담담하고 정직하게 약혼자에게 이야기 하는 벨라를 맥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세상에 대한 무조건적인 관용을 가진 벨라가 동등한 관용으로 보답 받는 셈이다. 두 사람의 결혼식 장면은 영화의 다른 장면들에 비해 덜 선정적이지만, 주체적 선택권을 가진 여성이라는 벨라의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름다운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아버지 갓윈(윌렘 데포)의 손을 잡고 식장에 들어간 벨라는, 던컨이 데리고 온 처음 보는 남자에게 결혼을 저지당한다. 자신의 육체에 다른 사람(어머니)의 두뇌가 들어있을 때 함께 살던, 일종의 전남편, 알피(크리스토퍼 애봇)다. 솟구치는 호기심 반, 모호한 책임감 반으로, 벨라는 아버지와 약혼자의 만류를 무릅쓰고 알피를 따라간다. <별들의 고향>에서 정신적/신체적 건강을 잃고 상품성을 잃어버린 경아의 존재는 두 남자 사이에서 물건처럼 떠넘겨 지지만(버거우니 당신이 대신 좀 맡아주시오), 벨라는 자신을 추종하는 남성들 사이를 스스로 선택하며 자유롭게 횡단하는 것이다. 더 이상 매춘조차 할 수 없는 경아가 수면제를 먹고 눈밭에서 동사한다는 설정으로, 한 인간의 영혼과 육신의 완전한 파괴로 마감되는 근현대 여성잔혹사 <별들의 고향>과 달리, <가여운 것들>에서 파괴되는 것은 벨라를 착취하려 했던 남성들뿐이다. 희대의 카사노바 던컨은 그녀를 성적으로 착취하려 했지만 그녀에 대한 집착으로 스스로 파괴되고, 할례수술을 통해 벨라를 자신의 자손을 생산하는 자궁으로 축소하려 했던 알피는 염소의 두뇌를 갖게 된다. 인류의 역사 속 너무나 오랫동안 여성상의 두 축을 이루었던 창녀와 어머니라는 전형성은 이렇게 산산조각 난다. “아무것도 모르는 너의 잘못”이라는 가스라이팅에서 살아남은 벨라는 이렇게 자신의 삶을 오롯이 받아들이고, 즐기고, 도전하고, 성취한다. 세상의 부조리와 자신을 착취하려는 주변인물들을 가뿐히 넘어서며 자신의 세계를 확장해 나가는 그녀의 비밀은 무엇일까? 죄의식과 수치심이 없는 그녀에게는 맥스에게 교육받은 “예의”와, 해리를 통해 깨닫게 된 세상의 불행에 대한 “연민”이 있다. 맥스는 예의 바른 사람이지만 경계를 넘어선 세상을 꿈꾸는 상상력이 부족하고, 해리는 세계의 모순을 설명하는 일관되고 세련된 언어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 “세상을 두려워하는 소년”일 뿐이다. 반면 벨라는 자신과 타인에 대한 무모하고 무조건적인 관용을 지닌다. 그것은 궁극적으로 과학실험의 대상으로 자신을 탄생시킨 아버지를 용서하게 만들고, 세상의 부조리와 폭력에 저항하는 사람으로 그녀를 성장시킨다. 그녀는 오직 자신의 본능에 따라 행동할 뿐이지만, 자아와 타자를 아우르는 자유에 이르는 길은 어쩌면 벨라처럼 인간에 대한 예의와 연민이라는 두 대의 등대를 따라서 도달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느긋한 오후, 사랑하는 가족들과 함께 칵테일을 마시며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해부학 공부를 하는 벨라. 그녀가 “아무것도 모르는” 소녀의 노래를 다시 부른다면 이런 가사가 나올 것이다. 난 그런 거 몰라요 아무 것도 몰라요 괜히 신이 나네요 그런 말 더 해 주세요 난 정말 알고 싶어요 더 배우고 싶어요 심장이 세게 뛰네요 그런 말 더 해 주세요 난 지금 어려요 열아홉 살인걸요 화장은 필요 없어요 이 모든 게 처음이예요 웬일인지 몰라요 가까이 와 주세요 더 만지며 얘기해요 온몸이 뜨거워져요 엄마는 죽고 없어요 뭐든지 알고 싶어요 사랑이란 그 말도 가끔은 재미지네요 <별들의 고향> 중 경아와 <가여운 것들> 중 벨라 다시 경아의 세상으로 돌아가보자. 벨라가 경아처럼 대한민국의 70년대를 살아갔다면 어떨까? 일찌감치 데이트 살해를 당해 세상에서 사라지는 위험만 넘어설 수 있다면 경계가 없는 꿈을 꾸는 큰사람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아, 아니다. 정신병동에 감금되거나 감옥에서 평생을 살아야 하는 경우의 수도 무시할 수 없을 것이다. 사회는 이 모든 것은 “아무것도 모르는” 너의 잘못이라고 끝없이 세뇌했을 것이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벨라를 산산이 부수어 뜨리는 것으로 응징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벨라의 존재는 그레이의 소설과 란티모스의 영화 속에서나 이루어질 수 있는 터무니없는 꿈이고 동화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이미지는, 언어는, 아직 도달하지 못한 현상(現象 phenomonon)일 뿐이다. 벨라의 말처럼,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입증하기 전까지 지구는 평평했고, 전기가 발견되기 전까지 세상은 어두웠다. “그것이 다다르기 전까지 세상은 그 이전의 상태가 영원할 것이라 믿었다.” 그녀의 언어는 도발이 아닌 혁명이다. 주1. < 하녀 >(김기영, 1960), < 자유부인 >(한형모, 1956)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주2. < 그 섬에 가고싶다 >(박광수, 1993), < 웰컴 투 동막골 >(박광현, 2005)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다. 주3. 최초의 SF작가로 인정받는 영국의 여성 작가. <가여운 것들>은 메리 셸리의 소설 『프랑켄슈타인』의 여성주의적 해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더 흥미로운 것은 『프랑켄슈타인』의 설정과 제재는 물론, 작가인 메리 셸리의 삶의 궤적까지도 <가여운 것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메리 셸리의 결혼 전 성(姓)은 메리 갓윈 Godwin이다. 갓윈은 영화 속에서 벨라 아버지의 이름(first name)으로 차용 되고, 벨라는 그를 갓(God)이라는 애칭으로 부른다. 실제로 당대의 진보적 정치사상가였던 메리의 아버지 윌리암 갓윈은 일찌감치 어머니를 여읜 딸에게 당시 여성으로 받기 힘든 양질의 교육을 선사했다. 교육을 위해 딸을 급진주의 사상가 친구 집에 보내기도 하는데, 그 친구의 성(姓)이 영화 속 벨라의 성(姓)인 백스터(Baxter)이다. 메리는 백스터의 집에서 그의 네 딸들과 자매처럼 지내며 작가로서의 감수성을 발전시킨다. 메리 갓윈은 이후 아버지의 사상을 추종하는 유부남 퍼시 셸리와 사랑에 빠진다. 벨라처럼 도주하여 퍼시와의 유럽여행을 감행하는 메리 갓윈은 퍼시의 아내가 죽은 후 그와 결혼하여 마침내 우리에게 익숙한 이름, 메리 셸리가 된다. 파격적인 행보를 보였던 메리 셸리의 삶을 영화 속에서 찾아내는 것도 <가여운 것들>을 보는 큰 재미다. 주4. < 벨드쥬르(세브린느) >(Belle de Jour, 루이스 부뉴엘, 1967). 사랑하는 의사남편과 유복하고 여유로운 생활을 하는 세브린느는 완벽해 보이는 삶에도 불구하고 공허감을 이기지 못한다. 우연한 기회로 알게 된 고급 요정에서 남편의 근무시간인 낮에만 성매매를 하는 세브린느에게 마담은 벨드쥬르라는 애칭을 부여한다. 조세프 케셀의 동명 소설(Belle de Jour)을 원작으로 한, 논쟁적인 설정에도 불구하고 여성 주인공의 시선으로 이어지는 몽환적 서사와 부뉴엘 감독 특유의 아이러니와 검은 유머가 가득한 역작이다. 김진아 (UCLA 영화과 교수, 감독) l < 그 집앞 >(2003), < 두번째 사랑 >(2007), < 파이널 레시피 >(2013) 등 다섯 편의 장편영화와, 미군위안부3부작 < 동두천 >(2017), < 소요산 >(2021), < 아메리칸 타운 >(2023) 등을 연출. 미국 UCLA대학 교수로 시각예술의 재현 윤리, 초국가적 영화론을 가르치고 연구한다.
한국영상자료원 수장고에 있는 무궁무진한 자료 중에는 얼핏 사소해 보이지만 ‘비장한’’ 가치를 품은 원석들이 있습니다. 그런 원석을 골라내고 잘 다듬기 위해! 아키비스트들은 오늘도 여러 단서를 모아 추적에 나섭니다. 하찮아 보이는 자료가 역사적 의의를 지닌 원석 으로 발굴되기까지, 자료의 맥락을 추적하는 KOFA 추리반장 의 세계를 들여다봅니다. 2023년 12월, 한국영상자료원은 3년여에 걸쳐 정리한 대규모 컬렉션을 공개했다. 영화 < 집없는 천사 >(최인규, 1941)와 < 오발탄 >(유현목, 1961)의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이 그것. 정리부터 공개까지 오랜 시간이 걸린 데에는 규모가 워낙 방대한 탓도 있었지만, 컬렉션 자체가 거대한 한국영화사를 관통하는 자료들로 채워진 까닭도 있었다. 故 김학성 촬영감독 (1913~1982)이 생전에 꼼꼼히 모아둔 자료들로 구성된 이 컬렉션은 그의 삶에 대한 기록이자,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기, 한국전쟁기 그리고 전후 시기에 그가 경험하고 마주한 한국영화계에 대한 생생한 기록이었다. 와중에 끝끝내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자료 역시 존재해, 정리의 시간은 덧없이 흘러가기도 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한참이 지난 2008년부터 그의 아들 김충남 씨의 이름으로 기증된 자료들이다 보니, 자료의 원 주인을 직접 만나 물어볼 수조차 없었다. 그렇다면 자료를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며 그 안에서 단서가 될 만한 어떤 것이든 찾아 물고 늘어지는 수밖에 없었다. 이렇듯 정체를 알 수 없는 자료 중에는 이 일련의 사진들이 있었다.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사진 속 인물들의 의상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모두 같은 날에 찍은 사진으로 보인다. 사진마다 카메라가 세워져 있는 걸 보면 영화 촬영 현장인 듯한데, 대체 무슨 영화였을까? 간혹 기증된 사진 중에는 기증자가 사진 뒷면에 관련 정보를 적어두는 경우가 있지만, 아쉽게도 이 사진들에는 단서가 될 만한 정보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았다. 이쯤에서 해야 할 일은 사진 속 인물들의 필모그래피에서 교집합을 찾는 일이다. 위의 사진에서 우선적으로 식별 가능한 인물들은 하이라이트 쳐진 인물들, 즉 컬렉션의 주인공인 김학성과 배우 서월영 , 최은희 , 주증녀 , 감독이자 편집 기사로도 활동했던 양주남 그리고 많은 영화에서 김학성과 함께 작업한 조명감독 고해진 정도였다(사진 오른쪽 하단 김학성 기준 반시계 방향 순). 그렇다면 이것으로 사진과 관련된 영화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을까? 안타깝게도 이 정도 단서로는 어림없는 일이었다. 김학성, 서월영, 최은희, 주증녀, 양주남, 고해진의 교집합은 좀처럼 찾을 수가 없었다. 여기서 내릴 수 있는 잠정적인 결론 하나. ① 이 영화는 촬영은 되었으나 공개되지 못했거나 어쩌면 완성조차 되지 못한 영화일 것이다. 영화의 정체를 파악하는 것은 잠시 뒤로 미루고, 사진이 촬영된 시점을 추정해 보는 것도 좋겠다. 배우 최은희가 스크린에 데뷔한 것이 1947년 신경균 감독이 연출한 < 새로운 맹서 >(김학성 촬영)이니, 이 사진은 적어도 1947년 이후에 찍혔을 것이다. <새로운 맹서> 이후 부부의 연을 맺은 김학성과 최은희가 함께 있는 현장인 점에서, 이 사진은 그들이 공식적으로 헤어진 1953년 이전에 촬영되었을 것이다. 즉 ② 이 영화는 1947~1953년 사이에 촬영된 작품 이라는 말이 된다. 하지만 여기까지가 한계였다. 이 이상으로 추적할 만한 단서는 찾아지지 않았다. ‘1947~1953년 사이에 촬영되었으나 미완성된 혹은 미공개된 작품,’ ‘최은희·서월영·주증녀 출연, 김학성 촬영, 고해진 조명, 양주남 참여(역할 미상)’라는 것 말고는 영화의 구체적인 윤곽을 파악할 만한 정보는 여전히 부족했다. 결국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을 공개한 2023년 12월, 이 사진들은 ‘작품 미상 촬영 현장’으로 분류돼 공개되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달 후, 이 사진의 정체는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발견되었다. 2025년 공개를 목표로 정리 중인 “촬영감독 정일성 컬렉션(가제, 영화사 연구자 배수경 조사 및 연구)”에서였다. 이 역시 방대한 규모의 컬렉션이 될 예정으로, 각종 문헌과 사진, 박물 자료를 합쳐 3천여 점의 자료가 모여 있다. 그중 사진 자료만도 1,800여 점에 달한다(이는 복본을 포함한 수량으로, 컬렉션 공개 시 조정될 수 있다). 참여 연구자의 조사·연구가 끝난 결과물을 검토하던 중에 익숙한 사진 한 장이 갑자기 눈에 걸렸다. 정일성 촬영감독이 기증한 사진의 앞면 (좌)과 뒷면 (우)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에서 ‘미상 작품 촬영 현장’으로 분류했던 사진의 하나와 꼭 같은 것이었다. 천만다행으로 이 사진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정보가 적혀 있었다. 聖血 (성혈) 은 永遠 (영원) 히 빛나리 撮影 (촬영) 스탚과 口防部 (국방부의 오기로 보임) 映畫課 (영화과) * *은 식별 불가 / 괄호 안의 내용은 인용자 주 정일성은 < 가거라 슬픔이여 >(조긍하, 1957)를 통해 정식 촬영기사로 이름을 올리기 전에 김학성 문하에서 도제식 교육을 받았으니, 그가 이 사진을 가지고 있는 것은 충분히 그러할 만하다. 그가 영화계에 입문한 때가 < 출격명령 >(홍성기, 1954)을 촬영할 때였으니, 아마도 이 사진은 스승인 김학성을 통해 받은 것이지 않을까 조심스러운 추측도 해본다. 여하튼 정일성 촬영감독이 기증한 사진에서 두 개의 주요한 사실을 얻을 수 있었다. 그토록 알고 싶었던 영화의 정체가 ③ <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 >라는 영화일 수 있다 는 것과 ④ 국방부 영화과와 어느 정도 관련이 있는 영화일 수 있다 는 것. 이제 남은 일은 위의 ③과 ④의 가설을 입증하는 일이다. 영화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는 한국영화를 집대성한 편람이나 총서, 신문·잡지 등에서 한 번도 언급된 적이 없는 작품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에 소장된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일명 붉은 태풍)> 촬영 콘티」를 통해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일명 붉은 태풍)> 촬영 콘티_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 * 알록달록하게 꾸며진 표지는 김학성 촬영감독이 개인적으로 꾸민 것으로 추정된다. 영화는 한국전쟁 발발 하루 전인 1950년 6월 24일,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온 주인공 서준이 가족들과 평화로운 저녁을 보내다 이튿날 새벽, 전쟁 발발 소식에 군대에 복귀하고 악전고투 끝에 9월 28일 서울을 수복하는 과정을 그린 것으로 보인다. 콘티 앞부분에서는 스태프 명단 일부를 확인할 수 있는데, 김홍 이 연출하고 김학성이 촬영을, 고해진이 조명을 담당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 밖에 녹음, 미술, 음악, 편집, 배역 등이 비어있는 것으로 보아, 이 콘티는 제작진이 모두 정해지지 않은 상태에서 제본된 것으로 보인다. 이쯤에서 위의 사진들을 다시 들여다보니, 영화를 연출한 김홍 감독의 얼굴이 새삼 확인된다. 단체 사진에서 소매 배색 점퍼를 입고 선글라스에 모자를 쓰고 김학성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로 김홍 감독이다. 한편 온라인 고서점에서 개인적으로 입수한 동일본의 촬영 콘티 표지에는 “崔銀姬 瑛. 役(최은희 영. 역-인용자 주)”이라는 글씨가 적혀 있어, 배우 최은희가 이 영화에 캐스팅되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주1 이로써 위의 일련의 사진들이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 촬영 현장에서 찍은 사진일 것이라는 ③의 가설은 확신으로 굳어졌다.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 김학성 콘티 (좌,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와 최은희 콘티 (우, 개인 소장) 영화의 정체를 파악했으니, 이제 제작 정보를 좀 더 추적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정일성 촬영감독이 기증한 사진 뒷면에 적힌 정보를 신뢰할 경우, 이 영화는 국방부 영화과와 관련된 작품일 것이다. “신뢰할 경우”라 말한 이유는 사진 뒷면의 메모가 사후에 적힌 것이라면, 그것은 일종의 ‘회고’와 같아서 완벽하게 정확한 정보가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일단 이 정보를 신뢰하기로 하고 좀 더 추적에 나서보자. 이것이 군 영화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제일 먼저 국군홍보관리소가 1992년에 발간한 『군영화 40년사』(“ 연감총서 컬렉션 ” 참조)라는 책을 꺼내 들었다. 이 책은 1950년 국방부 촬영대 발족부터 1992년 현재까지 군의 영화 제작 역사를 정리한 책으로, 군 영화 제작에 참여한 여러 영화인의 회고록과 군 영화 목록, 촬영 현장 사진 등이 수록돼 있다. 그런데 책을 훑어보던 중, 위의 사진들과 유사한 사진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군영화 40년사』 화보 면 화보 면 아랫단 오른쪽 사진에서 최은희(2열 우2)와 양주남(2열 우1)의 의상이 촬영감독 김학성 컬렉션의 사진들과 동일한 것이 확인된다. 책에는 이 사진에 대해 “‘聖血(성혈)’ 로케 현장의 촬영대원들과 최은희 씨”라는 설명이 달려 있다.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를 줄여 <성혈>로 일컬은 것이지 싶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군영화 40년사』에서 이 영화에 대한 언급은 이뿐이었다. 연도별 군 제작 목록에서도 더 이상 영화의 존재를 찾아볼 수 없었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가 국방부 영화과와 관련이 있다는 추정은 든든한 힘을 얻게 되었다. 한편 이 같은 추정은 위의 ②번 가설, 영화 제작연도(1947~1953년 사이)를 보다 특정할 수 있는 단서가 되었다. 국방부 영화과의 정식 명칭은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로, 휴전협정 체결 후 서울 환도와 함께 1953년 8월, 정부 기구 및 국방부가 개편되면서 기존의 ‘군사영화촬영소’에서 변경된 명칭이다. *주2 영화의 서사가 한국전쟁 발발부터 9.28 서울 수복까지의 실제 사실을 기반으로 전개된다는 점, 그리고 1953년 8월에 명칭을 변경한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가 제작에 관계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⑤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는 추정컨대 1953년에 촬영된 작품일 것이다. 공적 기록이 부재하는 영화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 추적기는 여기서 ‘일단락’을 맺는다. 일단락이라는 표현에서 짐작할 수 있듯, 영화에 대해 추적해야 할 것들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가 이 영화에 관계한 정도는 여전히 밝혀야 할 숙제이며, 촬영 콘티의 스태프 명단에 적혀 있는 “각본 협영문예부”에 대해서도 좀 더 파고들 여지가 있어 보인다. 참고 자료와 시간적 제약, 한국영화사 연구에 대한 개인의 미진함을 탓하며, 남겨진 과제들을 후속 연구를 통해 보강할 수 있는 기회가 오기를 바라본다. * 미완성/미공개 영화 <성혈은 영원히 빛나리(일명 붉은 태풍)>(김홍, 1953년 촬영 추정)에 대한 정보를 아는 분은 언제든 제보 바랍니다. *** 주1. 이 촬영 콘티는 배우 최은희가 소장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판본의 「CAST」 면에는 주인공 서준의 여동생 서영 역에 색연필로 밑줄이 그어 있다. 서영은 최은희가 맡은 배역으로 추정된다. 한편 촬영 콘티에서 확인할 수 있는 배역 중 최은희, 주증녀와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 캐릭터는 서영과 유경옥으로, 주증녀는 서준의 약혼녀인 유경옥 역을 연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배우 서월영이 맡은 캐릭터와 양주남이 담당한 역할은 촬영 콘티에서는 확인되지 않는다. 주2. 국군홍보관리소, 『군영화 40년사』, 1992, 10쪽; 12쪽; 15쪽. 1950년 8월 대구에서 발족한 ‘정훈국 촬영대’는 1952년 1월, ‘군사영화촬영소’로 승격 발족했다. 이는 1953년 8월에 이르러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로 개칭되었으며, 이후 국방부 정훈국 군영화촬영소(1955년) → 국방부 국군영화제작소(1963년) → 국군홍보관리소로 잠정 통합(1979년) → 국군홍보관리소 정식 창설(1981년) → 국방홍보원(2000년)으로 변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