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
- 감독
- 김수용
- 제작년도
- 1974
- 출연
- 박근형, 홍세미, 양광남, 이순재, 윤양하, 주증녀, 이재균, 한인수, 임예심, 봉승현, 최봉령, 양춘, 전호진, 윤경하, 이기홍, 정연수
한국영상자료원의 '영화인 구술사' 시리즈를 바탕으로, 자료가 없어 실체를 알기 어렵던 사건과 인물, 작품들에 대한 이야기를 영화인의 입을 빌려 흥미진진하게 전달합니다. 조금 식상한 표현이지만 영화제, 그리고 영화 시상식을 우리는 ‘영화인들의 축제’라고 부른다. 한 해 동안 좋은 작품을 만들어낸 감독, 스태프와 배우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영화팬들 또한 이 순간만큼은 자신이 좋아하는 작품과 그에 참여한 배우, 스태프들이 상을 받는 모습을 보며 함께 기뻐하고, 영화에 깃든 자신만의 추억들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는다. 하지만 영화인 중 누군가가 “그저 상(賞)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라고 말한다면, 관객의 입장에서는 다소 배신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상이라는 것은 대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받거나 예술성을 인정받은 작품에 대해 부수적으로 주어지는 명예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한때, 정말 ‘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던 시절이 있었다. 심지어 이 상에 어마어마한 보상이 붙어있어서 영화사에는 회사의 존폐가, 감독에게는 차기작의 유무가 걸려있었고, 이로 인해 매년 이 상을 둘러싸고 갖은 암투와 비리들이 횡행하며 영화계에 온갖 잡음을 만들어냈다. 대종상 타면, 그 상 타는 데서 심사위원들한테 로비를 해서 해마다, 지금까지도, 문제가 있었지요.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 영화계에 스캔들이 생기고 그렇지요. 또 유명한 사람들이 거의 심사위원 안 한 사람들이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뭐 예술회원, 유명한 작가, 다 거의 심사시켜야 된다 그래 갖고. 또 (로비 받은 게) 걸려서 망신을 당하기도 하고. 그런 추악한 일이 오랫동안 계속 돼…. - 호현찬 , 2004 영화평론가인 호현찬이 말하는 것처럼 최근에도 대종상에서는 수상작 선정 과정과 영화인들의 시상식 불참 등 해마다 논란이 끊이지 않고 일어났지만, 1990년대 이전과 이후의 논란들은 성격이 많이 다르다. 여기서는 1980년대까지, 대종상 하나가 정말 중요했던 이유 와 그것이 불러일으킨 다양한 스캔들 에 집중할 것이다. 사실 1990년대와 그 이후 시기 대종상과 관련된 논란들에 대해서는 인터넷에 검색해보면 아주 쉽게, 그리고 정말 훌륭하게 정리된 글들이 많아서 굳이 영화인들의 입을 빌릴 필요가 없을 정도다. 그에 비해, 궁금하고 흥미롭지 않은가? 기록도 많이 남아있지 않은 옛날 옛날에 대종상을 놓고 영화인들 간에 온갖 정치와 거래가 오갔다는데, 당사자들은 이에 대해 어떻게 말할 것인가! 하지만 이를 알아보려면 우선 우리가 당시 대종상과 영화산업의 성격에 대해 이해해야 하는 지점들이 있다. 조금 지루하겠지만, 이에 대한 설명을 최대한 간결하게 하고 넘어가겠다. 나라에서 주는 상 대종상은 공보부 주최로 1962년 3월 30일 국립극장에서 처음 개최되었다. 이날 행사에서는 작품상, 감독상, 남녀 주⋅조연상을 포함해 총 16개 부문에 대한 시상이 이루어졌다. 당시 대부분의 상을 신상옥 감독이 이끄는 ‘신필름’에서 가져가면서, 신필름은 훌륭한 스태프들을 데리고 좋은 영화를 만드는 영화사로 명성을 굳혀갔다. 각종 신문과 잡지 기사에서도 이러한 신필름의 약진에 주목하는 한편, 처음으로 제정된 영화 시상식이 성공적으로 개최된 데에 대해 고무적인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1962년 3월 30일에 열린 제1회 대종상 시상식 사진 하지만 이러한 찬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대종상 시상식에 대한 불만이 불거지기 시작한 것은 이듬해 제2회 대종상부터였다. 영화평론가 이영일 은 대종상 심사위원 명단이 발표된 직후 신문 지면을 통해 대종상 심사위원들의 전문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버려야 할 전문가 기피증, 대종상 심사위 구성에 일언”, 《동아일보》, 1963. 2. 28. 6면 기사 *주1 ). 그렇지만 심사위원들의 교체 없이 제2회 대종상 시상식은 예정대로 3월 8일에 진행되었다. 그런데 대종상에 대한 논란은 시상식이 끝난 뒤에도 이어졌다. 당시만 해도 대종상 시상과 더불어 해외영화제에 출품할 작품도 함께 선정했는데, 이게 영화제작자들의 불만을 야기했다. 제작가협회에서는 며칠 후 아시아영화제 출품작 선정에 대한 건의서를 공보부에 진정했다. 11일 저녁 6시에 모인 제작가협회 이사회에서는 공보부 당국에 대하여 아시아영화제 및 백림영화제 출품작품 선정을 재심해줄 것을 건의하기로 결의하였다.… 근본적인 저의는 이번 대종상심사와 영화제 출품선정의 결과에 대한 영화가의 비등한 반발 여론에 비추어 심사결과에 대한 불만불신의 표기로 짐작된다. 영화계 일부에서는 이번 심사를 ‘보이코트’하자는 여론도 높았으나, 재심으로 출품작품을 엄선하자는 결정에 이르렀다. - “아주영화제 출품작 재심 건의키로”, 《동아일보》, 1963. 3. 12. 6면 기사 이전 해 대종상 시상식에서 제기된 불만을 의식한 것인지, 공보부는 제3회 대종상 시상식을 앞두고 영화평론가와 연극영화과 교수 등을 심사위원단에 포함시켰고, *주2 해외영화제 출품작의 경우 더 좋은 작품이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놓고, 추후에 별도 선정하는 것으로 방식을 변경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1964년 제3회 대종상부터 “우수영화를 장려하는 보상책”으로 대종상 수상작에 대해 ‘외화쿼터’를 지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외화쿼터 주어, 대종상시상식”, 《경향신문》, 1964. 3. 5. 8면 기사). 대종상은 (공보부) 영화과에서 맹글었어요, 우리가. … ‘우리나라 대표적인 영화제를 하나 맹글자, 영화상을’ 그래서 ‘상의 이름을 뭘루 허느냐?’ 게 생각허다가 ‘대종상으로 허자’ 이렇게 된 거예요. (우수영화) 장려를 말로만 허믄 또 시비가 되니까, 실제적인 실리를 주는 방향으로 허자. 그게 뭐냐? 쿼터. 우수헌 영화 장려하는 방법으로 쿼터를… 뭐 이렇게 된 거죠. - 이성철, 2009, 309~310쪽 1961년부터 공보부 공보국 영화과장으로 일했던 이성철은 대종상을 만들게 된 배경에 덧붙여, 우수영화 제작 장려 및 그 보상의 일환으로 ‘쿼터’가 주어지게 된 과정에 대해 언급했다. 아무래도 ‘상(賞)’이니까, 무언가 그에 맞는 적절한 혜택이 제공되어야 한다는 생각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렇게 일종의 보상으로서 주어진 것이 다른 것도 아니고 ‘쿼터’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쿼터란 국가에서 배정해주는 외국영화 수입 권한을 뜻한다. 앞으로 일어날 모든 갈등의 씨앗은 바로 이 ‘외화쿼터’로부터 나온다. 외화쿼터라는 것은 왜 그렇게 영화인들에게 중요한 것이었을까? ‘억’ 소리 나는 쿼터의 가치 1963년 1차 영화법 개정 이후 영화제작사와 외화수입업을 일원화시키는 동시에 이들 영화사의 수는 국가에서 등록제를 통해 조절하고 있었다(영화업 등록제는 1973년 제4차 영화법 개정으로 허가제로 바뀌며, 기존 20개사에서 거의 절반 수준인 12개로 줄어든다). 매 시기 영화법 시행령에 따라 허가된 영화사의 수나 외화수입쿼터의 수가 늘었다 줄었다 하기는 했지만, 궁극적으로 196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중반까지의 한국영화산업은 소수의 영화사들이 제한된 ‘쿼터’ 숫자를 놓고 경쟁하는 독과점 체제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외국영화 수입편수 및 상영편수(1964~1985) 위의 표를 보면, 그래도 1960년대와 1970년대 초반까지는 1년에 50~70편 정도의 외국영화가 배정⋅수입되었다(쿼터 수와 실제 검열을 받은 영화의 수가 다른 이유는 이전 해의 쿼터의 ‘이월’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표]에서 상영편수가 실제 수입편수보다 많은데, 이는 전 해에 수입되었지만 상영되지 못한 영화가 개봉하거나, 인기 있는 영화를 재상영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1970년대 중반 이후 수입추천(외화쿼터) 수가 줄면서, 외국영화의 수입이나 상영이 급격히 감소했음을 알 수 있는데, 이 때문에 외화쿼터를 둘러싼 각종 문제 역시 1970년대 중반을 넘어가면 더 심각해진다. 그때는 외화를 들여오면 1년에 20~25편이야. 그러니까 외국영화를 보려고 하면 하여튼 1년에 고것밖에 못 봐. 다른 작품은 들여오지를 못하니까. 그러니까 아주 그건 정말 커다란 특혜지, 그냥. 그 대신에 쿼터를 어떻게 해서 얻느냐. 1년에 4작품을 해야 돼. 그래야 인정을 받아, 영화사 영업하는 걸. 그러고 저 우수작품 뭐, 대종상 에서 상을 탔다든지, 뭐 아세아영화제 이런 외국 가서 (상을) 탔다든지 그러면 쿼터 하나씩 나왔다고. … 또 뭐 반공영화를 만들면은 좀 점수를 줬고. … 그렇게 하고 인제 수출을 많이 해서 실적을 올려서 (쿼터를) 타는 수가 있고. 여러 가지 정책이 그렇게 돼 있었지. - 강범구 , 2011 , 268쪽 외국영화도 상을 타면 쿼터 하나. 근데 쿼터 값이 얼마냐면, 국산영화 한 편 제작하는데 700만 원 내지 800만 원인데, 쿼터 하나 값이 1,500만 원이었어 , 외화 들여오는 거. - 최경옥 , 2008, 143쪽 그게 내가 파라마운트(극장)에 있을 당시니까, 66년도부터 72년도까지 있었거든요? 나도 거기서 외화를 우리 사장님이 쿼타를 사오고 팔고 해가지고, 나도 그때 쿼타를 사가지고 네 편을 수입해 봤거든요. 쿼타를 사고 팔고 했지, 그때는. (쿼터 하나에) 천만 원 했나? 그거 하나 있음으로 해서 내가 수입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 거니까. {그때 개봉관이 60원 정도할 때} 맞어, 60원. {그럼 억 단위네요, 지금은?} 크지. 그 당시에 60원 하면 요즘은 (입장료가) 6천 원이니까, 100배인가? 10억인가, 지금 돈으로? - 김성근 , 2010, 122~123쪽 그 대종상에서 작품상 타면 외화수입쿼터 하나 준 거야, 그냥. 그 외화쿼터 하나, 수입권을 얻으면 요새 가치로 봐서 약 한 50억 돼, 50억. 가서 외국영화 하나 괜찮은 거, 외국영화 수입을 무제한 개방해 놓은 게 아니고 1년에 20편, 24편 내외 수입쿼터로 맨들어 놨기 때문에, 우리나라 들어오면 그냥 어떤 거든지 그건 (관객이) 30~40만 들어간다니까? 음, 그러니깐 외국 나가서 한 10억 주고, 판권 10억 주고 외국영화 하나 사왔다 이거야. 근데 이게 여기서 100억이 되니 이게 얼마나 되냐, 돈이?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아니라, 황금알 채 생긴 거위야. 그래서 그냥 서로가 별짓을 다하고, 인제 사회상은 그랬어요. - 김영효 , 2013, 430~431쪽 위의 구술도 대체로 이 시기의 상황들을 설명하고 있다. 김영효 감독의 말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외화는 일단 상영을 하면 그게 어떤 영화든 상관없이 기본적으로 30~40만의 관객들을 끌어올 수 있었다. 그렇다 보니 영화사들은 위험성이 큰 한국영화 제작보다 외국영화 수입⋅상영을 선호할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최소의 비용만을 가지고 한국영화를 제작하고, 이를 통해 획득한 외화쿼터를 가지고 외국영화를 수입해서 상영하거나, 아니면 그 쿼터 자체를 팔아서 이득을 챙기자는 계산이 나오는 것이다. 강범구 감독의 구술에서 이 외화쿼터 획득 방법이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는데, 각 회사들은 할당된 한국영화 제작 편수를 채우거나, 우수영화로 선정되거나, 대종상을 수상하거나(시기에 따라 걸린 상의 개수가 다르기는 하지만 대체로 최우수작품상, 우수반공영화상을 수상하면 1편씩 쿼터가 지급됨), 해외 수출 실적이 있거나, 해외영화제에서 상을 받거나 하는 방법으로 외화쿼터를 하나씩 얻을 수 있었다. 다시 말해 1년 동안 영화사들은 최소한의 예산을 가지고 4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한다(제작권도 쿼터가 있어서, 이 숫자도 매해 조금씩 차이가 있다). 그 4편의 영화에는 우수(반공)영화 또는 대종상용 영화 1편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한다. 그래야 기본적으로 주어지는 외화쿼터 외에도 추가로 1편의 외화쿼터를 더 얻을 수 있다. 1960년대부터 신필름에서 실무를 담당했던 구술자 최경옥의 말에 따르면, 한국영화 1편 제작에 7~800만 원이 소요되었다고 하니, 4편의 한국영화를 제작하고도 이익을 남기려면 외화쿼터 2개는 필수나 다름없었다. 게다가 김영효 감독이나 외화수입사와 극장에서 일했던 김성근의 구술을 보면 그냥 외화쿼터를 팔았을 때는 오늘날 물가로 약 10억 원의 가치가, 직접 외화를 수입해서 상영했을 때는 적어도 50억 원의 이익이 보장되었다(심지어 이 역시 10년 전 물가를 기준한 것으로, 2024년의 물가를 반영하면 더 큰 금액이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은 최소 10~50억의 가치를 갖고 있었고, 수입해온 외화가 흥행에 성공하게 되면 김영효 감독의 말처럼 100억 이상의 가치도 충분했을 것이다. 그러니 ‘대종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다는 말이 나올만 했다. 대종상을 잡아라! 그러면 이제 구체적으로 대종상을 둘러싸고 어떤 일이 있었는지, 영화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먼저 로비는 어떻게 이루어졌을까? 대종상이 문제가 된 것은, 70년대 중반 이후부터예요. 형식은 이런 겁니다. 심사위원을 누가 맡았다 하면은, 그 심사위원 중에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을 로비대상으로 정해 만나는 거예요 . 가령 당시 심사위원 가운데 소설가가 있다면 ‘작가의 원작을 영화화 하겠다’ 이런 식으로 접근합니다. 그래서 영화화하기 어려운 소재라도 원작료를 주고 입수하는 거예요. 그거 안 받을 수 있어요? 명분이 있는데. 그게 시가(市價)보다 많아요. 그런 식으로 로비를 합니다. 그 당시 Y 모라는 유명한 심사위원이 있었습니다. 각계에 문어발식으로 관계했던 문화계의 마당발이었죠. 이런 사람들은 A영화상, B영화상 다 해요. 그럼 A영화상에서 로비 받아가지고 안 된 경우가 있어요. 로빈 받았지만 작품이 밀리니까. 그러면 B영화상 시상식 때 그것을 갚아요. 그럼 이쪽에선 불만이죠. 저쪽은 쿼터가 걸려 있고, 이쪽은 상금이 없다 보니까. 이런 식이에요. - 김종원 , 2008, 355쪽 누구한테 욕먹을 소리겠지만은, 대한민국 영화 대종상은 절대 정상으로 한 영화가 없어. 보믄 뒷거래가 다 있어. …내 누구라고 얘긴 하지 않지만은 대종상 시상날이야. 근데 인제 그날 6시부터, 6시 반부터 시상식을 하는데, 그날 최우수작품을 갖다 결정하는 날이 그때가 5시 반쯤 될 때, 막 거기서 회의를 하는데, 그 안에서 인제 투표를 허는 거야. 하기 직전에 누가 문을 탁 여는 거야. 문을 탁 열어가지고 “어이구, 죄송합니다. 이거 미안합니다.” 문을 닫은 거야, 그 사람이, 응? 그 사람은 왜 그거 문을 열었겠느냐? 자기가 만난 사람들 있잖아. 자기가 만난 사람들이 자길 잊을 수도 있잖어? 그니까 도장 찍을라고 문을 연 거야, 일부러. 그러구선 모르는 척하고 “어구, 이거 잘못 찾았습니다.” 문을 탁 닫은 거야. 그러니 그 만났던 사람들은 소름이 끼칠 거 아니야. 잘못했다간 나중에 탈이 날 거 아니야. 그 < 경찰관 >(이두용, 1978)이라는 영화가 있었어, 합동영화사. 그러구 우성영화사에서 < 세종대왕 >(최인현, 1978)이란 영화를 맨들었어. 막말로 대한민국 사람들 다 갖다 보여줘서, “이 영화가 좋으냐, 저 영화가 좋으냐?” 할 때 영화적으로 좋은 건<세종대왕>이 좋대는 건 다 인정될 거야. 돈도 많이 들었고. 그런 영화가 결과적으로 6:5로 졌어. … 쿼터가 걸린 데는 쫙 시커먼 게 쫓아댕겼으니까, 그때. - 양춘 , 2009, 210~211쪽 (상) 제17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경찰관> (하) 남녀조연상⋅미술상을 받은 <세종대왕> 위 구술에 등장하는 <세종대왕>은 우성영화사에서 말 그대로 ‘대종상을 노리고 만든’ 제작비 2억 5천여만 원에, 등장 인원만 16,000명이 동원된 대작 사극이다. 거기에다 교육성을 강조하기 위해 세종대왕기념사업회로부터 자료제공과 협찬을 받는 한편, 역사학자 10명의 고증⋅감수를 받았다. 그러나 흥행업자들로부터 영화적 재미가 없는 ‘교과서영화’라는 평가를 받고 외면당해, 완성한 지 4년이나 지난 1982년 3월 5일 대한극장 에서 개봉할 수 있었다. 여러모로 열심히 구애를 했으나 대종상에 외면당하고, 심지어 극장과 관객에게까지 버림받은 비운의 대작이 아닐 수 없다. 한편 영화제작자 양춘의 구술에서 언급된 합동영화사는 대종상 스캔들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름 중 하나이다. 특히 우성사와 합동영화사의 대종상 경쟁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 더 앞서 이들 사이에 있었던 갈등에 대해 들어보자. 최훈 감독이 감독한 그걸 골랐는데, 얘길 들어보니깐 얘기가 쪼금 낯익은 것 같기고 해서 시나리오를 봤더니 시나리오가 표절이라. 그래서 이걸 좋은 영화로 만들 순 있지만 소위 대종상이나 우수영화로 내놓기는 문제가 있다 그래서 세 번인가를 뜯어 고쳤어, 시나리오를. 그걸 뜯어 고쳐가지고 < 수선화 >(최훈, 1973)로 결정을 졌어. 그 최훈 감독이 대종상을 한 번도 못했잖아요. 그래서 후보작을 고르자 그래서 최훈 감독을 줬고,또 출연자들도 좀 그렇게 대종상의 혜택을 볼 수 있는 사람을 고르자 그래서 장동휘 씨 뭐 이래 가지고 배역진을 골라가지고 시작을 했고. … {그런데 이게 감독상하고 몇 가지 상을 받기는 했는데, 작품상은 못 받았더라고요} 작품상은 아마 < 비련의 벙어리 삼용 >(변장호, 1973)이 받았나? - 박행철 , 2014 , 295~297쪽 그다음에 <비련의 벙어리 삼용>을 우성영화사에서 했더니… 아침에 사장한테 대종상에서 11개 부문이 상이라고 연락을 받았어요. 근데 그때 대종상에는 쿼터가 붙어 있어요.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나오니까 김용덕 씨가 나한테 뭐라고 그러냐면 “밤에 대가릴 짤라 갔어요.” “그게 무신 소리요?” 그랬더니, 최우수작품상에만 쿼터가 붙어 있는데 나머진 다 놔두고 최우수작품상만 딴 데로 돌렸다 이거야. “그럼 어떻게 된 거요?” 그랬더니, 합동영화사에서 만든 < 홍의장군 >(이두용, 1973)이란 게 있어요. 그게 뭐냐 하면 태권도영홥니다. 그게 대종상 작품상 탈 영화가 못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친구들이, “엊그저께 새로 들어온 제작자가 11개 부문에 대종상을 휩쓸어 버리면 우린 뭐냐! 이거 우리를 아주 그냥 밟어 버리는 거 아니냐!” 굵직굵직한 회사 다섯 사람이 안기부국장을 만나자고 그래서, “이건 말이 안된다. <벙어리 삼룡> *주3 은 포르노영화다” (웃음) 그때 국시가 ‘자국안보’ 이런 거였어요. 그럼 “대통령의 뜻을 따르려면 <홍의장군>이 상을 타야지, 어떻게 포르노영화 상을 주느냐.” 국장이 어떨결에 “<홍의장군>이 타야지.” 그래서, 그때 문공부에서 주관을 했으니까, 상당한 돈도 오고 갔대요. 그러니까 밤에 소집을 했어, 심사위원들. “다시 심사해라. 국책영화에다 상을 줘야지 말이 되냐?” 그래서 심사위원들이 다시 투표를 해서 작품상을 <홍의장군>으로 바꿔쳤어요. 그러니깐 영화계가 “말이 되냐, 어떻게 <홍의장군>이 작품상이냐?” 그리고 심사위원들이 “우리는 <홍의장군>을 뽑은 일이 없다. 안기부가 동원을 했다” 막 시끄러워지니까 문공부도 골 아파지고. 이걸 수습할라고 그러는데 여론이 워낙 나빠지니까. 그래서 그러면 <벙어리 삼룡>도 쿼터를 하나 더 주자. 그래서 우수작품상까지 쿼터를 타 먹었어요. - 변장호 , 2016, 122~123쪽 <수선화>(좌)와 <비련의 벙어리 삼용>(우)은 모두 우성영화사 작품으로 제12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수선화>는 감독상⋅각본상⋅편집상⋅녹음상을, <비련의 벙어리 삼용>은 우수작품상⋅촬영상⋅여우주연상⋅여우조연상⋅음악상⋅미술상⋅조명상을 수상해, 총 11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영화제작자 박행철은 1970년대 우성사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하며 <수선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대종상을 노리고 기획된 것으로, 사실 일본영화 < 24개의 눈동자 >(기노시타 게이스케, 1954) 시나리오를 각색한 것이었다. 그러나 표절작은 대종상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원작과 차이를 만들기 위해 세 번의 시나리오 수정을 거쳤다. 그리고 아직까지 대종상을 받지 못한 뉴 페이스 최훈 감독에게 기회를 주고, 캐스팅은 ‘대종상이 사랑하는’ 배우들로 뽑았다. 그 결과 <수선화>는 감독상, 각본상, 편집상, 녹음상을 수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작품상은 받지 못했다. 박행철은 자신이 작품상을 <비련의 벙어리 삼용>에게 빼앗겼다고 기억했다(<비련의 벙어리 삼용>은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같은 우성사 작품이다). 하지만 박행철의 기억과는 다르게 <비련의 벙어리 삼용> 역시 작품상을 받지 못했다. 당시의 기록에 따르면 최우수작품상은 합동영화사에서 제작한 <홍의장군>에게 돌아갔다(변장호 감독은 <홍의장군>을 태권도영화라고 표현했지만, 이 영화는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활약상을 다룬 대작 사극영화이다). 변장호 감독의 구술은 한 줄 한 줄이 정말 흥미로운데, 무엇보다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합동영화사 곽정환 사장을 비롯한 ‘친구들’이 달려가서 “엊그제 새로 들어온 제작자가 11개 부문의 상을 휩쓸어” 버리는 것에 대해 항의를 했다는 이야기이다. 1973년 제4차 영화법 개정 후, 한국영화제작업은 등록제에서 허가제로 변경되면서 기존 영화사의 몇몇이 정리되고, 소수의 신생 회사들이 새롭게 인정받았다. 이중에서도 우성사는 가장 그 설립 시기가 늦었는데, 이를 가지고 기존 영화사 대표들이 몰려가서 텃새를 부렸다는 것이다. 이 ‘텃새’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구술자가 들려준 다른 내용의 구술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것이라 변장호 감독의 기억이 완전 거짓이나 과장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아무튼 변장호 감독 구술에 따르면 이 이야기의 결말은,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어디까지가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홍의장군>이 최우수작품상을 수상한 데 대해 온 영화계가 반발하였고, 이를 수습하기 위해 우수작품상인 <비련의 벙어리 삼용>에게도 쿼터 하나가 주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대종상에는 최우수작품상 외에도 쿼터가 주어지는 부문이 하나 더 있었는데, ‘우수반공영화상’이 바로 그것이었다. 워낙 이 부문도 경쟁이 심했기 때문에 영화제작자들은 머리를 잘 써야 했다. 각 영화사의 라인업을 들여다보면 일반적으로 대종상 최우수작품상을 받을 만한 작품으로 문예영화(문학작품을 각색한 영화), 예산이 많이 들어간 대작 역사영화, 새마을운동을 강조한 휴먼 드라마류의 영화들을 한두 편 제작하고, 우수반공영화상을 노린 전쟁액션영화나 첩보영화(이는 007 유행의 영향도 있었다)를 한 편 정도 제작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중앙정보부가 아주 막강한, 영화계에 못된 행세를 한 거지. 대종상에도 관여를 해가지고 뭐 뒤에서 압력해서 “이것 줘라” 이런 정도까지. 중앙정보부에서 파견 나온 사람이 영화계를 좌지우지 했다고 해도 맞는 정도로. … {그 압박 수단은 주로 검열…} 그렇죠. 검열 가지고 하는 거죠. 그때는 검열해서 우수영화, 좋은 영화, 또 외국 나가서 상을 타고 그러면 외국영화 쿼터를 하나씩 주고 그러니깐 그 사람들이 입김이 굉장히 셌다고 봐야죠. … < 지옥의 49일 >(이두용, 1979)이라는 이두용 감독의 울릉도 가서 찍은 영화가 있어요. 근데 그게 사실은 우수영화가 될 정도가 아닌데, 그게 반공영화라는 걸로 해가지고 그걸 압력을 좀 넣었다든지 뭐 어떻게 해가지고, 심사위원들한테 금일봉식으로 이렇게 나눠주고 어떻게 해가지고 그게 상을 탄 적도 있고 뭐 그런 예가 있어요. … 그렇게 하는 이유가 그 상을 타기 위해서 반공영화를 한 거죠, 그 당시에는. 그러고 이제 암암리에 “반공영화 좀 하나 해” {우수영화 타기 위해서?} 어어. 공공연하게 이루어진 게 사실이에요. - 주종호 , 2017, 156~157쪽 < 땅울림 >(설태호, 1980)은, 대종상에서 다 휩쓸 줄 알았어요. 어떻게 됐어? 심사하는데 대종상에서, 박암 만 조연상 탁 타버렸어. 그리고 또 뭐 하나 타고 그랬어. 그러구 이 양반이 화가 났어요. 중앙극장 사장이거든? 그래서 중앙극장에서 약간 (상영)한 것 같아요. 근데 손님들이 잘 안 들지만, 군에서는 괜찮았어요. … 우리 대종상 못 탔잖아요? 다 되는 걸로 알았거든요? 근데 안됐어요. 근데 누가 됐는가 하면, 임권택 이 한 < 짝코 >(임권택, 1980) 있지요? <짝코>가 당선된 작품이에요. 그래가지고 거기서 이제 작품상 탔어요. … {결국에 제작자는 쿼터 받아서 외화 수입하고자 하는 마음이 좀} 음, 그게 앞서는 거예요. 다! 그땐 다 그랬어요. 경제적으로 {수지를 맞추려면} 그렇죠, 엄청난 돈이 들어가는데요. - 설태호 , 2010, 251~260쪽 <땅울림>은 제19회 대종상 영화제에서 우수반공영화상을 노리고 있었지만, 남우조연상 하나를 받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설태호 감독의 <땅울림>은 대영영화사(영화사 대표 김인동 은 중앙극장을 운영했다)에서 국방부의 후원을 받아 제작된 군민 합작영화로, 제작 기간만 1년이 걸린 대작영화였다. 국방부로부터 제작비 일부와 각종 무기, 탱크, 전차, 화약 등을 지원받아 영화의 스케일도 크고, 총격⋅폭파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비슷한 시기 할리우드에서 제작된 영화 < 인천(오! 인천) >보다 볼 만하다!). 그러나 그 경쟁 상대가 <짝코>라니. 그저 운이 없었다고밖에는 볼 수 없지만, 엄청난 제작비와 시간을 들인 대영영화사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아쉬운 결과였을 것이다. 이렇듯 모두가 당시 상황 속에서 자신은 억울하다고 말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본인이 다른 이들의 기억 속에서는 ‘나의 상’을 빼앗는 가해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내가 대종상을 받을 때는 작품성을 인정받은 것이지만, 상을 겨냥해 만든 작품이 막상 그 상을 받지 못했을 때는 빼앗긴 것으로 표현되는 이들의 이야기는 정말이지 흥미진진하다. 그래서 사실 누가 상을 빼앗았고, 어떻게 상을 빼앗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저 오늘날의 시점에서 당시 대종상을 둘러싼 구술자들의 이야기를 들을 때에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상을 받기 위해’ 영화를 만들었던 이들이 느꼈던 자괴감과 그 자괴감을 뚫고 영화를 만들었음에도 그것을 모종의 암투로 인해 타인에게 빼앗겼을 때 느꼈을 좌절감 또는 그래도 ‘상을 받을 만큼의 작품을 만들었다’라는 자부심 사이에서 요동치는 이들의 양가적인 감정과 그 기억 속에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이다. 그리고 이는 결국 우리가 이 시기 한국영화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의 문제로 연결될 것이라 생각한다. *** 주1. 이영일의 해당 기사가 게재되기 전에 공개된 제2회 대종상 심사위원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강영수(대한일보 주필), 유건호(조선일보 편집국장), 이진섭(시나리오작가), 유석진(의사), 최정희(작가), 김대현(작곡가), 남홍우(교수), 심태진(명성여중고 교장), 김정환(미술가), 신용성(경향신문 사회부장), 이용상(공보부 공보국장). 주2. 제3회 대종상 심사위원은 다음과 같다. 정충량(평론가), 유건호(언론인), 여석기(고려대 교수), 이청기(영화평론가), 김붕구(서울 문리대 교수), 양광남(중앙대 영화연극과 주임), 박권상(언론인), 이진섭(시나리오작가), 이순근(교육평론가), 김진환(공보부 공보국장 서리), 강영수(언론인). 심사방식도 완전합의제로 변경되었으며, 기준 또한 이전보다 분명해졌는데 "①자기 목소리로 녹음하지 않은 연기 ②‘오리지널’이 아닌 음악 ③표절작품"은 수상에서 제외하기로 합의했다. ("6일에 대종상시상식", 《조선일보》, 1964. 3. 5. 5면 기사; "제3회 대종상 수상자 결정", 《동아일보》, 1964. 3. 7. 5면 기사 참조.) 주3. <비련의 벙어리 삼용>(변장호, 1973)을 의미한다. ※ 인용 구술 목록 한국영상자료원, 「호현찬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이채, 2005. 신필름채록연구팀, 『2008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신필름1: 최경옥⋅박행철⋅최승민⋅김갑의』, 한국영상자료원, 2008. 신필름채록연구팀, 『2008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주제사> 신필름2: 임원식⋅이형표⋅이상현⋅김종원』, 한국영상자료원, 2008. 공영민, 『2009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4권: 양춘』, 한국영상자료원, 2009. 공영민, 『2009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5권: 이성철』, 한국영상자료원, 2009. 권용숙, 『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1권: 김성근』, 한국영상자료원, 2010. 김승경, 『2010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생애사> 5권: 설태호』, 한국영상자료원, 2010. 권용숙, 『2011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강범구』, 한국영상자료원, 2011. 김승경, 『2013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1권: 김영효』, 한국영상자료원, 2013. 김승경, 『2014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2권: 박행철』, 한국영상자료원, 2014. 이정아, 『2016년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시리즈 <생애사> 5권: 변장호』, 한국영상자료원, 2016. 공영민⋅송영애, 『2017년 한국영화사 구술채록연구 시리즈 <주제사> 1970년대 한국영화계의 변동: 조관희⋅주종호』, 한국영상자료원, 2017.
거슬러 올라가는 대신에 바로 지금 잠시 멈추어 서 보자. 나는 지난해에 몇 편의 영화를 보았다. < 아가씨 > 혹은 < 밀정 >그리고 < 덕혜옹주 >와 < 해어화 >. 그런 다음 약간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그 자리에 < 암살 >이 떠오른다. 여기에 변주에 가까운 < 기담 >과 < YMCA 야구단 > < 그림자 살인 > < 경성학교: 사라진 소녀들 >이 뒤따라온다. 물론 맨 앞에 < 모던 보이 >가 있다. 올해에는 강제징용 간 조선인들이 노역에 지친 나머지 목숨을 건 탈출을 하는 < 군함도 >를 보게 될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경향인지 아니면 시대정신인지 혹은 일시적인 유행인지를 가늠하는 것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전염처럼 번져나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부정적으로 이 말을 사용하는 중이다. 새로운 세기에 들어서자 갑자기 일제 강점기 문화에로 인문학은 관심을 돌렸다. 좋은 일이다. 나는 언제나 일종의 단절처럼 다루어지고 있는 이 시간적 단층을 언젠가 역사의 담론이 채워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 담론들은 단층을 역사화 하는 대신 낭만화하기 시작했다. 물론 메이지유신이 가져온 일본의 근대화는 종종 식민지 경성에 믿을 수 없는 문화적 순간을 마련하였다. 나는 1930년대에 파블로 카잘스와 자크 티보, 알프레드 코르토로 이루어진 카잘스 트리오가 경성을 방문했었다는 기사를 읽고 어떤 쇼크를 받았다. 경성의 ‘모던 뽀이’들과 ‘모던 껄’들은 전설적인 카잘스 트리오의 연주를 감상할 기회가 가졌었다. 어쩔 수 없는 탄식. 눈앞에서 티보의 저 신비로운 활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니, 아니 코르토의 전성기의 미스 터치의 건반을 직접 볼 수 있었다니, 그리고 카잘스의 춤추는 것만 같은 첼로를 내 눈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니, 상상할 수 있겠는가. (다소 역겨운 표현이지만) 식민지 신민들의 과분한 기쁨.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부쉬 현악사중주단이 경성에 와서 베토벤 현악 사중주의 레퍼토리를 연주했었다. 이 악보를 역사상 가장 훌륭하게 연주할 수 있었던 단체의 연주로 들었던 세대. 21세기의 우리는 그걸 고작해야 SP 복각음반으로 수 없이 디지털 리마스터링을 하면서도 도대체 정말 그들의 음색은 어떠했을 지 상상만 하고 있을 따름이다. 물론 그걸 들으러 다닌 ‘뽀이’들과 ‘껄’들은 친일분자들의 자식들이었을 것이다. 이미 역사의 저 너머로 스러져버린 조선의 정체성 따위는 아무 관심도 없었을 것이며, 풍문으로 전해온 청산리 눈밭에서 벌어진 전투에 대해서 알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36년 일제 식민지 지배를 받은 다음 미국에 의해 해방되자 소설가 이광수가 했던 유명한 한 마디. “그렇게 빨리 해방이 될 줄은 몰랐다”는 이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그리고 이 말은 수없는 변주의 버전으로 식민지 강점하를 배경으로 한 해방 ‘이후’ 영화에서 마치 알리바이처럼 반복되고 또 반복된다. 나는 먼저 한계를 고백할 수밖에 없다. 이 36년을 설명하는 것은 내 능력을 훨씬 벗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이 말은 덧붙이고 싶다. 여기엔 아직도 설명되지 않은 (어쩌면 아직도 설명할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다. <밀정> (김지운, 2016) <암살> (최동훈, 2015) 한국영화사에는 일제 강점기 36년을 다룬 영화들의 두 시기가 있다. 하나는 1960년대 말에서 1979년까지이고 다른 하나는 바로 지금이다. 나는 앞의 시기에 만들어진 영화들을 전기 식민지 영화라고 부르고 바로 지금 만들어지는 영화들을 포스트 식민지 영화라고 부르겠다. 그 둘의 차이는 보기보다 단순하지 않다. 무엇보다 먼저 1960년대에 만들어진 전기 식민지 영화들과 바로 지금 만들어지는 포스트 식민지 영화들 사이의 결정적 차이. 한 쪽은 그 영화를 만든 사람들과 그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그 시대와 직접 맞대면하고 살아보았고 다른 한 쪽은 양쪽 모두 그 시대를 교육을 통해서 학습했다는 사실이다. 좀 더 단순하게 말해보고 싶다. 살아보았다, 라는 거의 절대적인 차이. 한 쪽은 영화를 보는 시각적인 리얼리티에 그 시대를 살아본 사람들의 경험이 포함되고 다른 한 쪽은 지식의 상태로만 알고 있을 뿐이다. 물론 경험과 지식의 차이를 단순하게 삶의 문제로 치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여기에는 어떤 수수께끼가 개입한다. 살아본 사람이 대상을 관념화할 수 있는 거리의 한계만큼 똑같이 경험해본 적이 없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거리의 한계에 대해서 생각해야 한다. 영화에서 재현의 표식들이 어떻게 공유되었는지를 질문하는 것은 경험이라는 네트워크의 토대를 물어보는 것이다. 별다른 해독을 요구하지 않는 기호들의 기억. 게다가 더딘 근대의 풍경은 아직까지 일제 강점하의 생활을 재현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었을 것이다. 그 말뜻은 일제 강점하의 이미지와 말이 여전히 일상 안에 머물고 있었다는 의미이다. (1970년대에 영화를 만들던 이들의) 증언에 따르면 촬영 팀은 서울을 떠나 지방으로 가면 마치 타임머신을 탄 것처럼 얼마든지 자신들이 살았던 시간의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고 한다. 이미지에서 기억은 지속이라는 흐름 안에서 머물고 있다고 일깨워준 베르그송의 조언을 잊으면 안 된다. 순수 지각없이 표상이 성립될 수 있을까. 그런데 그것 없이 세워진 포스트 식민지영화들의 향수들이 그리워하는 순수 지각은 어디서 출발한 것일까. 여기에 좀 더 복잡한 역사적 논점이 기다리고 있다. 1980년을 경계로 갑작스러운 부동산 산업은 거의 대부분의 도시에서 그 흔적을 폭력적으로 지워나갔다. 여기에 역사의 트라우마에 대한 국가적인 말소 따위란 없다. 오직 자본주의 경제학의 논리만으로 한국사회의 풍경을 바꿔나갔다. 그런 다음 포스트 식민지 영화들이 도착했을 때 그들은 일제 강점하를 오로지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부채 위에 세워진 채 정책적으로 편향되고 부정확한) 자료와 학교 제도의 교육을 통해서만 학습한 세대였다. 그건 만드는 쪽도 그렇고 보는 쪽도 그렇다는 뜻이다. 포스트 식민지 영화들의 풍경은 상상으로 만들어진 기호이며 사진을 경유하여 재현된 이차 자료들이다. 여기에는 어디에도 경험이 매개되어 있지 않은 지식의 한계 속에서의 인공적인 세계가 만들어졌다. 이를테면 더도 덜도 아닌 < 아가씨 >. <아가씨> (박찬욱, 2016) 임권택 을 설명하는 것은 까다로운 일이다. 나는 그의 영화들을 볼 때마다 종종 과도하게 (이런 표현이 용서된다면) 유물론적 경험론에 사로 잡혀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나는 지금 이 표현을 엄밀하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그의 영화가 일제 강점기를 무대로 건드릴 때마다 거기에는 위태로울 정도로 확신에 찬 어떤 장면들과 마주하게 된다. 거기서 감도는 어떤 정서, 어떤 추억, 어떤 감흥, 어떤 기억, 어떤 흔적, 어떤 시간. 아니 차라리 누군가. 그런 다음 임권택은 이 시간의 선을 망쳐버린 역사라는 법칙 앞에서 눈앞에 나타났다가 사라져가는 섬광 같은 순간을 붙잡기 위해 애를 쓴다. 임권택의 영화가 아름답다면 그것은 가련한 실패의 수단으로 시청각 기호들이 활동하기 때문이다. 어쩔 수 없지만 이 무자비한 목적론적 설명. 나는 < 왜 그랬던가 >를 말하기 위해서 여기서는 첫 번째 시기의 일제강점하를 무대로 한 전기 식민지 영화만을 건드려볼 생각이다. 그러면서 이따금 바로 지금 여기의 포스트 식민지 영화들을 호명할 것이다. 상황을 먼저 설명하겠다. <왜 그랬던가>는 그때 만들어진 거의 하나의 제도적인 장르라고 불릴만한 일제 강점기 독립군 영화중의 한 편이었다. 그냥 간단하게 이 영화들은 인기가 없었다. 이 영화들의 대부분은 마지못해 만들어졌다. 박정희 제3공화국은 북한과의 이데올로기 경쟁 속에서 두 가지 이념을 들고 나왔는데 하나가 (물론) 적대적인 반공주의였으며 다른 하나가 맹목적인 민족주의였다. 한국전쟁의 경험은 가까이 있었고 불씨를 안고 있는 휴전은 반공을 내세워서 민주주의를 향한 어떤 정치적 저항도 무력화시켰다. 그러는 한편 민족주의 이념 전파는 둘로 나뉜 한반도에서 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놓고 권력이 헤게모니 장악을 하기 위한 필연적인 과정이 되었다. 1960년대 남한 민족주의는 단군의 단일민족이라는 신화적 서사(‘우리는 하나다’)와 일제 강점하의 식민지 지배라는 다른 민족에 의한 침략의 경험을 경유시켜(‘소련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북한은 또 다른 식민지이다’, 라는 정식화. 그래서 북한을 괴뢰(傀儡)정권이라고 불렀다) 상상적 공동체로 접합시킨 이데올로기였으며 사실상 그것이 변형된 파시즘이라는 것을 드러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 정책 수행과정에서 문화부는 영화를 앞세워 대대적인 이념 홍보를 했으며 (아직 텔레비전이 대중보급되기 전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어주기 바란다) 영세자본과 탈세, 사실상 암시장 구조에 가까운 배급 체제를 갖춘 그 당시의 한국영화는 검열과 지원 정책이라는 채찍과 당근에 길들여져 정부가 요구하는 것을 순순히 수용하였다. 그 과정에서 만들어진 영화들은 힘세고 나쁜 일본, 힘없는 착한 조선으로 단순하고 도식적으로 이분화 되었다. 그런 다음 기괴할 정도로 이 과정에서 민족의 수난을 상징하는 구체적인 수사로 망설임 없이 가혹한 고문을 개입시켰으며 종종 이 장면에서 여자 등장인물들은 자신의 육체를 포박당한 채로 전시하거나 신체의 일부를 훼손당하면서 변태적인 관음적 시선의 에로틱한 대상이 되었다. 여기서 소름 끼치게 만드는 순간은 유교를 내세운 검열이 과도할 정도로 성적인 묘사에 히스테리에 가까운 가위질을 하다가도 일제 강점하의 고문장면에 대해서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관대해질 때이다. 이를테면 < 아가씨 >의 관음적 마조히즘의 전시와 < 밀정 >에서 잡혀온 다른 ‘남성’ 독립 운동가들을 제쳐놓고 유일한 여자인 연계순을 과도할 정도로 가혹하게 고문하는 장면은 얼마나 가까이 있는가. 그리고 이 장면들은 전기 식민지 영화들과 포스트 식민지 영화들 사이의 간극이 서로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에 다름 아니다. 우리들의 논점으로 돌아가자. 여기서 전기 식민지 영화들은 일제강점하 식민지 이야기를 다루는데 아무도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건 만드는 쪽도 그렇고 보는 쪽도 그렇다. 남한은 프랑스와 달리 해방 이후 부역자들을 심판하는 일에 실패했다. (아니, 실패한 정도가 아니라 그들만이 부를 성공적으로 축적했다) 그래서 일제 강점하를 다루는 것은 언제나 현실적으로 불편한 일이 되었다. 한국근대사에서 해방은 친일부역자들의 승리의 역사이다. 여기에 복잡한 계산이 끼어든다. 사실상 이 전기 식민지 영화들은 역사를 다룬다기보다는 1960년대 박정희 체제 혹은 1970년대 유신체제를 방어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데올로기 블록이었다는 사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국가에 무조건 복종하는 민족주의 이념의 전기 식민지 영화들은 어떤 이해관계에 앞서는 희생을 강요하면서 해방 ‘이후’의 국가에 관한 충성을 어디서 시작하건 동일한 결론에로 이르는 필연적인 정의의 진리인 것처럼 위장시켰다. 그들은 항상 동일한 결론에 도달한다. 그런 다음 자발적으로 희생을 받아들였다. 우리를 깜짝 놀라게 만드는 것은 포스트 식민지영화들조차 이런 희생양의 논리를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면서 반복 재생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거기서 보는 것은 우리의 학습 과정이 식민지 강점하의 지식이 아니라 거기서 파생된 해방 이후 이승만-박정희 체제라고 불리는 교육 프로그램이 얼마나 끈질기고 악랄하게 뇌에 달라붙어있는 것인지를 반복해서 확인하는 이미지 서사들이다. 이를테면 < 밀정 > 혹은 < 암살 >. 여기에는 어떤 전도가 있다. 이 전도를 이론화 시키는 것은 이 지면을 훨씬 벗어나는 일이지만 정식화시킬 필요는 있다. 이때 이 정식은 일종의 도착이라는 사실을 놓치면 안 된다. 나는 내 선택이 옳기 때문에 내 민족을 위해 희생한다, 로부터 부지불식간에 내 민족을 위해 희생하기 때문에 내 선택이 옳다, 라는 착각에로의 자리바꿈은 나를 국가 앞에 완전히 굴복시키기기를 요구하는 유신정권의 파시스트 정책에 완전하게 부합하는 문화적(이자 동시에 정치적인) 훈련과정의 반복이다. 나는 이 기괴한 정식을 들고 반대로 거슬러 올라가 식민지 시대를 경험했던 세대의 전기 식민지 영화에 대해서 질문해보려고 한다. 「마록열전」 그리고, 그리고 반드시 여기에 셈에 포함시켜야 하는 것은 < 왜 그랬던가 >를 만들었던 해이다. 1975년 11월 15일 허리우드 극장에서 개봉한 영화. 그 해 1월 유신헌법이 국민투표로 통과되었고 4월 8일에 긴급조치로 인민혁명당 재건위 관련자를 체포한 다음 대법원 판결을 내리고 8명을 채 하루가 되지 않아 사형 집행했다. 5월에 긴급조치 9호가 선포되었고 온 세상이 숨을 죽였다. 민방위를 창설하였고 무시무시한 시간이 시작되었다. 그해 이만희 는 < 삼포가는 길 >을 편집하다가 편집실에서 쓰러졌고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 바보들의 행진 >은 검열로 거의 사지절단 당하다시피 했다. 가장 나쁜 상황. 임권택 은 그때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물론 여기서 멈춰야 한다. 나는 지금 전기를 쓰는 것이 아니라 비평을 쓰는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물어보고 싶어진다. 그 순간 왜 당신은 잭 런던을 영화 안으로 끌어들여야 했나요?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데, 그저 세간에서는 새마을 국책영화를 만들고 B급 다찌마와리 영화를 만드는 감독이라고 당신을 부르던 시간에, 그저 혼자서 오로지 자기 자신만의 내면의 풍경 앞에서, 어쩌면 사정없이 조여들어오는 연좌제의 두려움 앞에서, 왜 위험하기 짝이 없게도 잭 런던의 「야성의 부름」을 만들어야 했나요?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왜 그랬던가>를 보다가 그 문제의 ‘桃苑茶室’에서 김참의의 아들이 송주희에게 잭 런던의 책을 건네주는 순간 무언가에 감전된 것만 같은 쇼크를 받았다. 그리고 이제는, 아마, 당신도 내 심정을 이해할 것이다. <족보> (1978) <왜 그랬던가> (1975) 나는 몇 번이고 같은 자리로 돌아와서 임권택 의 영화들이 서로를 이루는 방식에 대해서 종종 (데리다의 멋진 표현을 빌려) 서로 대리하거나 보충하면서 서로가 서로에 대한 토대를 이룬다고 설명했다. 여기에 한 가지 단서를 달아야 한다. 임권택의 영화 안에서 종합이란 없다. 그는 자기의 내부를 모순된 사태 그 자체로 내버려두기를 원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종종 영화들 사이에서 약간 의아할 정도로 이 영화가 저 영화의 무언가를 폭로하는 듯한 거울 효과를 발휘할 때가 있다. 이때 대부분 이 문제를 앞으로만 밀고 나아간다. 나는 오히려 반대의 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가보고 싶어진다. 그 자리에 놓인 영화중의 하나가 < 왜 그랬던가 >이다. 임권택의 영화를 설명하는 대부분의 비평은 <왜 그랬던가>를 거의 건드리지 않는다. 물론 이 영화는 숨은 걸작, 같은 평가와는 거리가 멀다. 하지만 이렇게는 말할 수 있다. <왜 그랬던가>가 없었다면 < 족보 >도 없었을 것이다. 사실상 두 영화는 같은 이야기를 두 번 반복한다. 두 영화의 공통점은 단지 같은 시대를 배경으로 한 것만이 아니다. 두 영화는 모두 친일부역자였던 아버지가 (서로 다른 이유이기는 하지만) 일련의 시련을 겪으면서 죽음을 대가로 치르면서까지 자기보다 소중한 그 무언가를 지키려고 한다. 같은 말이 반복. 자기보다 중요한 그 무언가. <왜 그랬던가>의 일본 경찰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동포를 밀고하는 마영과 <족보>의 모두로부터 존경받는 수원 유지인 설진영은 일제 강점기를 살아간다는 공통점을 제외하면 모든 면에서 서로 전혀 다른 자리에 있다. 그러나 이제까지 살아온 것처럼 살아가면 그들은 아무 것도 잃지 않고 살 수 있었지만 그것을 내주면 모든 것을 잃는다고 믿었기 때문에 자신의 모든 것과 바꾼다는 점에서 사실상 동일한 과정을 거쳐 같은 결론에 이른다. 심지어 <왜 그랬던가>에는 이야기의 진행과 아무 상관도 없이 조선 총독부의 경감이 기노시타 형사를 세워두고 조선 도자기를 감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거기서 경감은 감탄을 하면서 “조센징들이 우리들보다 월등히 앞섰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어”라는 대사를 한다. <족보>의 설진영은 자살하기 직전에 도자기를 정성스럽게 정리한다. 둘 사이의 유사점은 주인공에서 멈추지 않고 마치 서로 공명현상을 불러일으키기라도 하듯 이상한 곳에서 반복된다. <왜 그랬던가>에서는 아무 상관도 없는 송주희가 일본 형사들에게 고문당하는 것을 마영은 고통스럽게 지켜본다. <족보>에서 딸의 약혼자는 아무런 죄가 없는데도 설진영을 핍박하기 위해 붙들려가 고문을 당한다. 다소 가혹한 표현이지만 그들 자신은 고문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과정은 동일하게 그들을 자발적인 죽음에로 이끈다. 여기서 왜 구경꾼들이 죽음에 이르는 고통을 느끼는 것일까. 이때 나는 다소 기이하게 반문해보고 싶어진다. 일제 식민지 강점하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생긴 것일까. 차라리 이렇게 물어보면 어떨까. 임권택이 일제 식민지 강점하에서 생명보다 더 소중하게 여기는 보물은 무엇일까. 그런데 그 무언가는 해방 이후에도 여전히 동일한 보물로 취급될 수 있을까. 아니, 그렇지 않았다. 그렇다면 왜 그 보물은 해방이 되자 거의 돌아보지도 않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렸을까. 혹시 여기에 전기 식민지 영화(들)의 어떤 수수께끼 같은 핵심이 있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이 질문에 대해서 임권택 은 < 왜 그랬던가 >에서 거의 하나의 정식화와 같은 대답을 제시한다. 마영은 처음부터 끝까지 변함없는 하나의 조건에 놓여있다. 그것은 물론 일제 강점기에 놓여있는 그의 조국이다. 마영이 체포되어 감옥에 끌려 갈 때에도 세상에는 어떤 변화도 감지되지 않는다. 게다가 세상의 모든 일은 마침 그의 뜻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마영의 거의 유일한 소망대로 그의 아들은 경성제국대학에 합격했다는 통지서를 받는다. 그러므로 마영의 변화는 외부 조건의 변화에 반응한 것이 아니라 그의 내면에서의 어떤 요구에 따른 것이다. 어떤 정신적 신호. 그리고 응답. 이때 그 설명을 단순하게 마영의 신념이 바뀌었다고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그렇게 말해버린다면 차라리 이건 신념이라기보다는 변덕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겉으로 보기에 어떤 조건도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영의 변화를 주변의 누구도, 심지어 그의 가족들조차, 이제까지 아버지를 경멸했던 그의 아들조차, 이해하지 못한다. 마영은 이 순간 이제까지 믿어 의심치 않았던 세속적 성공의 거의 문턱 앞까지 가까스로 도달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걸 자포자기하듯이 버린다. 지금 자신이 하는 행위가 결국에는 실패를 향해 나아가는 것이라는 사실을 물론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무엇이 마영을 이기적이긴 하지만 현실적이고 합리적인 삶으로부터 도무지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차원의 비현실적이고 불합리한 희생의 선택에로 이끄는 것일까. 마영이 희생을 한다고 해서 독립운동의 큰 사건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고 국면이 전환되는 결정적인 순간을 맞이하는 것도 아니다. 마영은 민족, 과 같은 거대한 담론에는 끝끝내 아무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이것이 임권택의 영화가 그 주변의 전기 식민지영화들과 결별하는 지점이다. 역사 앞에서 좀 더 냉정하게 말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일본 식민지로부터 독립운동을 통해서 안으로부터 해방된 것이 아니라 미국과의 전쟁에 항복함으로써 바깥으로부터 수동적으로 얻어진 것이다. 게다가 <왜 그랬던가>의 인물들에게는 주어진 조건에 대한 어떤 외부적 정보도 주어지지 않는다. 차라리 임권택은 이들의 세계를 어떤 가능성으로부터도 차단된 상황으로 만들고 있다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끊임없이 전선을 확장하고 지칠 줄 모르는 전쟁을 했지만 마영은 세계의 새로운 질서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지 전혀 알지 못하며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가혹하게도 객관적으로 마영은 이 상황에서 그저 희생당하는 것이다. 객관과 주관 사이의 서로 넘을 수 없는 간극. 다시 한 번 반복하지만 그는 그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이 선택은 오로지 그 자신을 위한 결정이다. 여기에는 하나의 이행이 있다.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 마영이 자신의 정신적인 매트릭스 자체를 현실적인 조건으로부터 그 무엇인가의 환상에로 옮겨놓은 것이다. 마영은 왜 현실로부터 환상에로 자발적으로 이행하는 것일까. 가장 쉬운 대답은 마영이 윤리적 결단을 내린 다음 그 심연을 횡단한다고 설명하는 것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반론은 간단하다. 그렇다면 왜 해방이후에 임권택의 주인공들은 동일한 행위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내 대답은 전기 식민지영화들, 그 영화들 모두라고는 말하지 못하겠지만, 임권택은 오직 여기서만 성립하는 셈을 치루면서 그것이 보물과 바꿀만한 값어치가 있다고 결단을 내리는 중이라는 것이다. 마영 자객 그 보물은 무엇일까. 그 무언가를 설명하기 위해서 약간 장황하게 이야기의 윤곽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마영은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을 일본 경찰에게 밀고를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리 빼돌리며 양쪽에서 돈을 챙기는 박쥐같은 인간이다. 하지만 마영은 자신이 하는 행위에 대해서 조금도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런 순간은 단 한 장면도 나오지 않는다. 자신의 행위가 부끄러운 줄 모른다기보다 좀 더 정확하게는 자기 자신을 위한 알리바이가 있다. 알리바이? 그렇다. 말 그대로 자기 자신의 입장. 물론 그 자신도 자기가 무죄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의 죄의식을 성공적으로 떠넘긴다. 그때 그의 죄에 대한 책임은 영화에 존재하지 않는 그의 아버지에게 있다. 마영은 한일합방에 반대한 아버지 때문에 자기 인생을 망쳤다는 것에 대한 분노가 있다. 영화에서 자신의 아버지를 이야기를 할 때보다 더 분노한 마영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다. 그가 살아가는 세계의 밤. 박쥐가 마음껏 날아다니는 시간. 이때 박쥐는 오로지 자기의 이득을 취하기 위해서라기보다는 마치 자기의 망친 삶의 원인을 향해서 복수를 하는 것처럼 행동한다. 만일 그가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다른 기회가 있었을 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는 주변에 자기를 노리는 수많은 자객들에게 쫓기면서 수시로 이사를 다녀야 한다. 마영은 지금 목숨을 걸고 이 일을 하는 중이다. 첫 시퀀스가 끝나고 집으로 귀가하면서 그를 뒤쫓는 자객으로부터 몸을 숨기기 위해 두리번거리는 장면이 이어진다. 그런 다음 자객은 내내 그의 뒤를 쫓으며 기회를 보고 있다. 그런데도 그는 이 일을 단 한 순간도 멈추지 않고, 일말의 후회도 없이 수행하는 중이다. 무엇이 그에게 이 일을 하라고 명령을 내리는 것일까. 임권택 은 바깥이 아니라 안으로, 더 안으로 파고 들어간다. 그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가. 단순해보이지만 그의 삶 전체 내내 진행되어왔던 그 무거운 그림자와의 투쟁. 마영이 독립운동을 하는 이들을 배신하고 밀고하는 것은 역사의 이치를 반대한 아버지 때문에 망친 자기 삶에 대한 보상의 요구이다. 약간 따분하지만 좀 더 도식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 마영의 행위는 아버지의 결정으로 자기 삶이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을 과정과의 주관적인 인정투쟁이며 역사의 객관적인 진행을 외면하고 자기 서사의 내면화로 재도식화 해나가는 퍼포먼스이다. 이때 그 밑바닥에는 애처로운 호소가 들리는 것만 같다. 아버지, 왜 당신은 당신의 아들의 앞날에 대해서 아무 것도 생각하지 않았나요. 당신의 아들이 살아야 할 조선이 한일합방이 된 다음 식민지라는 사실이 되돌이킬 수 없게 될 것이라는 걸 정말 몰랐나요. 일본 식민지가 되었을 때 당신의 아들은 어떻게 견뎌야 하나요. 아버지의 침묵. 마영의 아버지는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아버지는 이미 마영에게 오직 부정하는 것 이외에 대결할 방법이 없는 대상이 되었다. 이때 이 모습은 마영의 절반이다. 그는 집에 귀가하자마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자애로운 아버지가 된다. 그런 다음 자신의 아들이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하기만을 바라면서 그걸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는 잠시 후에 마영이 그렇게 열심히 돈을 모으는 이유가 아직 합격하지도 않은 아들의 대학 입학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알게 된다. 아직 존재하지도 않는 이유를 서둘러 충족시키려는 이 간절함. 이때 마영의 행위는 자신의 아버지가 자기에게 행하지 않은 것의 정확한 반복이다. 혹은 해주기를 기대했던 것의 재현이다. 나는 내 아들이 살아가야 할 세상을 잘 알고 있어요. 그럴 뿐만 아니라 그걸 위해서 내가 무얼 해야 하는 지도 잘 알고 있어요. 그러므로 그걸 해야만 해요. 만일 이것을 마영이 아들을 위해 희생하는 행위라고 읽으면 그건 표면만을 건드린 것이다. 정확하게 마영은 그 자신이 아니라 그 자신의 아버지가 자신에게 하지 않은 역할을 수행하는 중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기에게 존재하지 않았던 아버지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데까지 밀고 나간다. 이 부정적 동일화. 혹은 자신이 만들어낸 가상의 서사와의 동일화. 이때 마영의 동일화는 보편 역사로부터 떨어져 나와 특수하고 개인적인 서사 안에서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런 다음 반대로 이 서사가 마영을 포획하고 그 안에서 텅 빈 서사의 공백을 메우라고 요구하기 시작한다. 비극은 마영이 객관적인 현실 속에서 가상의 대리인 역할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그 어디에도 의지할 수 없는 텅 빈 공허 안으로 이르게 된다는 것이다. “아버지도 내 청을 들어주시오.” 일본인들에게 폭행 당하는 마영의 아들 “아버지, 이야기나 할까요” 그리고 갑작스러운 중단 갑작스러운 에피소드. 마영의 아들은 합격통지서를 받아오던 날 술에 취해서 느닷없이 아버지에게 질문한다. “나도 아버지 부탁대로 했으니 아버지도 내 청을 들어주시오.” “아무 것도 필요 없어요. 나는 개의 자식으로 살으리오까, 늑대의 자식으로 살으리오까?” 물론 잭 런던의 책을 빌린 질문이다. 이때 이 책을 읽은 적이 없는 마영은 이 질문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아들이 술 취해 하는 소리로만 생각할 뿐이다. 바로 다음 시퀀스. 마영의 가족은 함께 경복궁에 나들이를 간다. 여기서 백주 대낮에 근정전 앞에서 오줌을 싸는 아이를 수수방관하는 일본인 엄마에게 마영의 아들은 예의를 갖추어 야단을 친다. 하지만 이것을 모욕이라고 생각한 일본인 엄마는 다른 일본인들을 끌고 와 마영의 아들에게 무자비한 폭행을 가한다. 자기 아들이 폭행을 당하는 꼴을 본 마영이 달려가 말리지만 그들은 함께 가세한 일본인들에게 그저 무기력하게 당할 뿐이다. 그런 다음 이상한 씬이 이어진다. 아들은 이불에 누워있고 마영은 벽에 기대앉아서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다. 아들은 아마도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건다. “누우세요, 아버님도” 그 말을 듣고 마영은 옆 자리 이불에 눕는다. 그러자 아들이 말한다. “아버지, 이야기나 할까요” 임권택 은 매우 공들여 연출하다가 갑자기 여기서 쇼트의 진행을 중단시킨다. 그 이야기가 무엇인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마영이 아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는지, 아니면 한 밤중에 부자지간에 언성을 높였는지, 그도 아니면 이야기는 중단되고 잠들었는지 알 수가 없다. 임권택은 이 결정적인 순간을 하나의 블랙홀로 만들어버린다. 아마 보물은 그 블랙홀에 있을 것이다. 이것이 임권택이 보물을 보여주는 방법이다. 마스크를 쓴 마영 물론 여기가 끝이 아니다. 마영은 그 다음 날 경찰서로 출근하면서 입가에 난 구타 흔적을 감추기 위하여 큰 마스크를 쓴다. 이때 이 마스크는 동시에 밀고가 어제까지의 일이었던 마영이 그 행위를 거절하는 하나의 기호처럼 읽힌다. 그런 다음 마영은 적극적으로 자신이 이제까지 밀고 대상으로 삼았던 김참의 아들을 도와주는 역할을 하게 된다. 물론 그것은 독립운동을 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 그렇다고 갑자기 민족에 대해 자신이 해야 할 어떤 임무를 깨달은 것도 아니다. 이 영화에는 그런 순간이 없다. 다만 이건 마영이 할 수 있는 유일한 저항의 제스처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는 할 수 있는 것을 할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용으로는 반대이지만 형식적으로 이 행위는 이제까지 마영이 해온 것과 완전히 동일한 것이다. 다만 그 방향이 세 개의 씬을 사이에 두고 반대로 바뀌었을 뿐이다. 여기서 까다로운 운동이 발생한다. 무엇을 하려는 지는 알겠다. 그런데 마영은 지금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이 대립의 운동에 대해서 먼저 그 성격을 살펴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마영은 이제까지 부정해온 것을 긍정하면서 긍정해온 것을 부정하는 중이다. 이때 목적어는 민족이나 독립운동이 아니라 자신의 아버지와 자신의 아들 사이를 매개하는 텅 빈 자신의 자리이다. 그는 이제까지 아버지와 자신의 선을 끊어내기 위해서 부정의 행위를 맹렬하게 해 왔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과 아들의 선을 새롭게 만들어낼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여기에는 어떤 절단도 중단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과정이 있을 뿐이다. 차라리 이 과정은 만들어지고 다시 만들어지는 과정의 반복인 것이다. 늑대는 개가 아니며 개는 늑대가 아니다. 그러므로 늑대는 개가 되는데 실패한다. 세 개의 선은 서로 연결된 것이며 사실은 하나의 선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긍정한다. “바카야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너희들 왜놈이 아닐까?” 이제 거의 기괴하다고 밖에 말할 수 없는 마지막 장면이 기다리고 있다. 임권택 은 여기서 보물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보여준다. 마영은 김 참의의 아들을 돕지만 그의 계획은 거의 완전히 실패로 끝난다. 모든 계획은 탄로가 나고 마영은 그렇잖아도 의심의 눈길을 보내던 기노시타 형사에게 체포된다. 마영이 이제까지 해 왔던 밀고 행위에 대해 단 한 번 속죄를 하기라도 하듯 목숨을 걸고 했던 행위는 실패로 끝난다. 더 상황을 절망적으로 만드는 것은 큰 부자인 김 참의는 총독부에 돈을 바친 다음 사건을 무마시킨다. 김 참의 아들 관점에샬옌뺨摸?여기까지 모든 일이 일사천리로 어떤 장애물도 없이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어리둥절할 정도이다. 그렇게 되면서 사실상 마영의 행위는 그 자체로 무의미해진다. 그렇다면 이 실패의 서사가 왜 필요해진 것일까. 나는 여기서 이 질문을 더 밀고 나아가고 싶다. 왜 세 개의 씬, 그러니까 블랙홀처럼 막아선 세 개의 씬 다음에 실패가 기다리고 있느냐는 것이다. 편집은 마치 이 실패가 세 개의 씬의 결과처럼 읽힐 수도 있게 배치되어 있다. 잡혀온 마영 앞에서 기노시타 형사는 거만하게 충고하듯 말한다. “바카야로, 아무리 날뛰어봤자 조선은 영원히 일본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거야. 알았나, 바카야로” 그러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마영은 기노시타 형사를 정면으로 마주보고 대답한다. “내가 광복된 조국을 못 본다고 치자, 그리고 또 내 아들이 조국의 광복을 못 본다고 치자, 그러나 아들에게는 손자가 있고, 또 손자의 아들이 있고, 이렇게 우리 민족이 멸망하지 않는 한 언젠가는 반드시 광복의 날이 온다. 바카야로는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너희들 왜놈이 아닐까?” 마영이 생각하기에 ‘왜놈’이 정말 깨닫지 못하는 것은 무엇일까. 대답은 언젠가 광복의 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이 아니다. 마영은 자신이 그걸 볼 수 없을 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아들도 볼 수 없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 그 아들의 아들도 볼 수 없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핵심은 이 선이 끊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때 마영의 대답에는 만일 아들의 아들의 아들이 광복을 볼 수 있다면 그건 자신이 보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가정이 전제되어 있다. 여기에 역설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이 선은 반대로 위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성립하는 것이다. 이 대답을 하는 순간 마영은 이제까지 부정한 아버지를 완전하게 긍정하는 것이다. 보물은 여기에 있다. 이 선의 핵심은 무엇인가. 그 대답을 임권택은 좀 더 정교하고 세련되게 < 족보 >에서 한다. 얼핏 보면 차이를 알 수 없는 그 대답 속에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어떤 심연이 있다. 대부분의 전기 식민지영화들이 그 대답을 민족에서 찾을 때 임권택은 거기서 더 거슬러 올라가 유교에서 이끌어낸다. 유교라는 절대적인 지식. 이때 절대적인, 이라는 표현은 거기에 모든 것이 우선권이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모든 것에 한계를 부여한다는 뜻에서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임권택은 우리가 무엇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무엇에로 되돌아오는지를 분명하게 만든다. 같은 동포들 중의 누군가가 해방을 보는 것은 보는 것이 아니다. 임권택은 그것을 분명히 한다. 내 아들이 보아야 하고, 아들의 아들이 보아야 하고, 아들의 아들의 아들이 보아야 한다. 나는 이것이 올바른 대답이라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대답은 여전히 논쟁적이다. (그리고 이 문제에 대해서 < 씨받이 >를 다루면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상황을 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지금 민족주의가 권력의 담론이 되었으며 동시에 법의 통치수단이 되었던 시기의 이야기를 진행하는 중이다. 영화에서 민족은 권력자의 형상이 되었으며, 그 안에서 국민은 끊임없이 민족으로 환원되고 있었다. 그 안에서 임권택은 예기치 않은 것을 꺼내 들었다. 이것은 단순하게 아버지와 아들의 정신분석적인 도식에로의 환원이 아니다. 마영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면서 운명에 이끌리는 오이디푸스와 달리 너무 많이 알고 있을 뿐만 아니라 잘 알고 있다. 여기서 제기된 것은 특수한 아버지와 아들, 이렇게 말하는 것이 허락된다면, 유교적 ‘父子’의 귀환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임권택은 이 과정에서 마영이 아버지라는 자리를 결국 떠맡게 되는 것을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안에 들어가는 대신 유교라는 의무의 체계 안으로 편입되는 것으로 뒤집는다. 이것은 비로소 그 속에 나도 포함되었다는 상상이 안겨주는 기쁜 희생이 아니라 결국 그 안에 있어야한다는 의무를 수행해야 하는 반성에 찬 희생이다. 보물은 아들을 아버지로 만들어주는 그 무시무시한 체계 안의 선이다. 그렇다면 뒤따라오는 질문에도 대답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왜 임권택 이 보물이라고 생각하는 이 귀환은 해방 이후에는 사라졌는가. 무엇이 이 귀환을 가로막는가. 반대로 무엇이 식민지 강점하에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만드는가. 거의 뒤따라 만들어진 < 깃발없는 기수 >나 < 짝코 >에서 그들은 보물을 누릴 기회를 갖지 못한다. 혹은 좀 더 뒤에 만들어진 또 다른 한국전쟁 이후의 정식화인 < 길소뜸 >은 그 보물이 완전히 유실되었음을 보여준다. 아니, 차라리 해방(과 뒤이은 한국전쟁)은 유교라는 체계를 어떻게 갈기갈기 찢어놓는지를 보여주는 것만 같다. 그때 무엇이 무엇으로 이행하고 있는가. 반대로 < 씨받이 >에서는 비극의 형태로 재빨리 그것이 되돌아온다. 여기에는 무슨 차이가 있는 것일까. 나는 이미 매우 느슨하게 임권택의 영화가 유물론적 경험론에 사로잡힌 것 같다는 표현을 썼다. 임권택은 종종 자기가 경험한 세계를 그 어떤 다른 것으로 환원불가능하게 다룬다는 느낌을 줄 때가 있다. 그것은 일회적인 세계이며 거기서 발을 빼는 것은 이미 경험한 것을 추상적으로 만든다는 두려움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완강해진다. 이때 그의 영화 안에서 내가 느껴보는 것은 완전히 파악될 수 없는 현실 안을 통과하기 위해서 (아마도,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는데, 아마도) 그 세상을 살아내고 있던 부모의, 부모의 부모의, 태도를 경유해서만 그 거리를 확보하고 있다는 흐릿한 인상이다. 고향이라는 공동체. 안전한 집. 오랫동안 이어져 내려온 반복적인 문중제례. 앞으로 나아간다기보다는 원을 그리는 것만 같은 시간의 계절. 여기에 갑자기 단절이 생긴다. 한국전쟁과 가출. 그런 다음 그가 부모 곁을 떠나서 만난 세상과의 관계에서 그는 그 거리를 완전히 잃어버린 것처럼 현실과 마주친다. 어떤 우회도 없는 경험. 그는 부모 곁을 떠나는 순간 그 보물을 잃어버렸다. 물론 이 표현이 몹시 위험하다는 것을 나도 알고 있다. 차라리 이것은 비평의 언어가 아니라고 말해도 좋다. 하지만 여기서 이렇게 설명할 수는 있다. 임권택의 영화를 나누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이번에는 1945년 8월 15일 해방을 기준으로 둘로 나눠보고 싶다. 임권택은 양쪽 모두에서 현실 속에서 해소되지 않는 적대적인 관계들이 어떻게 공존하고 있는 지를 다룬다. 이때 기이하게도 해방 이전을 다룰 때마다 임권택은 그 시간을 일종의 진공상태와 같은 상황에로 밀어 넣는다. 더 앞으로 나아갈 수도 없고 다시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상황. 그냥 그 자체로 주어진 세계. 그의 영화에서 이 시간이 역사성을 갖게 된 것은 < 개벽 > 이후에서나 가능해진 일이다. 임권택은 매번 이 시간에 이를 때마다 그 자체로 완결된 것만 같은 세계 안에서 사건을 만난다. 사건은 왜 발생하는가. 그것은 이 세계 안에 무언가 불완전한 것이 있기 때문이다. 사건 앞에서 비로소 진공상태는 자기의 형식 안에 결여된 구멍을 내보이고 임권택은 그 안으로 파고 들어가 그 내용을 끌어내는 것으로 자기 서사를 진행시켰다. 이때 주인공들은 이 사건을 어떻게 견디는가. 결정적인 차이는 해방 이후의 영화들에서 주인공들이 사건으로부터 소외되어 나간다면 반대로 해방 이전의 영화들은 그 사건 안으로 주인공들이 완전히 동화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이 말을 유심히 읽어주기 바란다. 그들은 상황에 동화되는 것이 아니라 사건에 동화되는 것이다. 이 동화의 과정에서 임권택은 일관되게 유교라는 규율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바라보면서 사건의 순환을 더 없이 순종적으로 따라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주인공들이 파괴되어도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가련하게 지켜본다. 반대로 이 규율이 파괴되자 임권택은 그 상실감에 가득 차 때로는 우울하게, 종종 차디차게, 그리고 어떤 동정심도 없이, 그저 수수방관하면서 쳐다본다. 거꾸로 뒤집어 세운 카메라 나는 여기서 이제 이 영화가 할 이야기를 다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다음, 그러니까 마지막 장면 다음의 마지막 장면이라고 불러야 할, 그저 괴이하다고 밖에 달리 말하기 힘든 장면이 기다리고 있다. 마영은 호기롭게 기노시타 형사를 꾸짖은 다음 그를 기다리고 있을 감옥에로 향하는데 그때 이제까지 그의 뒤를 쫓으면서 동포를 밀고했던 처단하려고 했던 사내의 기습적인 칼이 날아와 그의 등에 정확하게 꽂힌다. 물론 그 사내는 마영이 이제까지의 그의 행위를 반성하고 독립운동을 하던 김참의의 아들을 구하려고 했다는 사실을 모른다. 아이러니한 성공. 매번 실패하던 그 시도는 실패해야할 순간 기다렸던 것처럼 성공한다. 그 사내는 자신의 시도가 성공하자 재빨리 경찰청을 빠져나가려고 한다. 그때 등에 칼이 찔린 채 바닥에 쓰러져 죽어가면서 마영은 그 사내를 걱정하듯이, 마치 그 사내가 자기 말을 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중얼거리면서 말한다. “잡히지 마라, 잡히면 안 돼, 안 돼, 바보 녀석, 그리로 가면 잡힌다구, 담 쪽으로 뛰어, 그렇게 힘을 내서 뛰어, 잘했어, 왜놈에게 잡히면 안 돼지” 하지만 그게 이 장면의 전부가 아니다. 임권택 은 도망치는 사내를 마영이 쓰러져 누운 채 죽어가면서 바라보는 시선으로(point_of_view_shot) 찍었다. 이때 영화는 도망치는 사내를 아래 위가 뒤집힌 이미지로 보여준다. 그래서 사내가 담장을 넘을 때 뛰어오르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아래로 추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임권택은 이런 방식으로 그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찍은 적이 없다. 마영은 칼을 맞은 다음 그냥 돌아서서 볼 수도 있었다. 혹은 바닥에 누웠다 할지라도 구태여 카메라를 거꾸로 세워서 찍을 필요는 없다. 아니, 차라리 화면의 아래 위를 바꾸기 위하여 마영을 바닥에 눕혔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임권택의 카메라를 거꾸로 뒤집어 세운 것일까. 나는 여기서 마영을 민족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안으로 통합시키려는 유혹에 대한 임권택의 완강한 거절의 제스처를 느낀다. 마영은 자신과 아들 사이의 관계를 경유하여 자신과 아버지의 관계를 회복한 것에 대해서 (어쩌면) 완전히 오해한 것이다. 그가 회복한 것은 일제 강점기의 억압받는 민족이 아니라 그보다 훨씬 뿌리 깊은 유교의 부름인 것이다. 그래서 이 아래 위가 뒤집힌 카메라는 마영이 중얼거리는 그 말, 그가 자신의 등에 칼을 찌르고 도망치는 사내에 게 베푸는 관용에 대해서, 그 오해에 대해서, 그 잘못된 환대에 대해서, 교정하는 시선이다. 여기에는 민족을 향한 어떤 열정도 없다. 그러기는커녕 마영의 저 희생적인 용서에 대해서 아이러니한 감정을 품고, 약간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차갑게 거리를 유지하려는 듯이, 그렇게 뒤집는다. 임권택은 지금 자신이 무엇을 하는 지 잘 알고 있다. 그럴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보물이 무엇이 아닌 지도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떤 분리선. 하지만 아직은 그것을 어떻게 다루어야 할 지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 임권택에게 일제 강점기라는 시간은 그것을 분리해내는 시간처럼 보인다. 처음에는 이 모든 질문의 출발처럼 보이는 그 한복판에 선다. 그런 다음 그 안에서 나눔의 질문을 시작한다. 어떤 분류. 모두들 각자의 방식의 분류를 해냈다. 그걸 포스트 식민지 영화들이 보여준다. 박찬욱의 분류. 김지운의 분류. 류승완의 분류. 최동훈의 분류. 분류의 소음들. 그때 누가 어떤 부름을 따르느냐는 질문을 해야 할 것이다. 부름들 사이의 차이. 이 차이가 그들의 인물들을 이 식민지 시대를 살아가는 인물들을 각자의 주체로 만들어줄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주체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다. 그 안에서 임권택은 민족적인 주체와 유교적 주체를 분리해낸 다음 한 쪽을 버리고 다른 한 쪽을 따라가기로 결심한다. 그것이 이 장면을 대사와 이미지 사이를 둘로 찢어낸 것만 같은 결단의 이유일 것이다. 나는 이제부터 주체 앞에 붙어있는 이 술어에 대해서 반복해서 더 많은 질문을 던질 것이다. 아마 그래야만 할 것이다. (계속) 1975년 105분 컬러 2.35 감독 임권택 우성사 각본 이은성 촬영 이석기 조명 최임춘 편집 김희수 음악 한상기 허장강 박근형 양광남 박지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