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출발
- 감독
- 장우진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우지현, 이혜린, 허재원, 양흥주, 지성은
< 춘천, 춘천 >은 겹쳐진 표제어의 꼴이 말해주는 것처럼 두 개의 춘천에 관한 이중구조의 영화이다. 장우진이 묘사한 미시 우주는 과거를 그리워하는 사람과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의 교차를 매개하여 우연과 시간의 관계를 묵상하면서 인간 상호작용의 저류(低流)를 지도 그린다. 플롯은 세상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으려는 사람들에 관한 두 갈래 내러티브를 따라 평행하게 진행한다. 느릿한 페이드(fade)로 화면이 열리면 기차 안에서 한 청년(우지현)이 옆에 앉은 중년의 남녀(양흥주, 이세랑)가 나누는 대화를 엿듣고 있다. 그들의 목적지는 서울 동쪽에 있는 도시 춘천이다. 여행자의 행색이 완연한 중년 커플에 비해 청년의 차림새는 어딘지 헐거워 보인다. 비좁은 의자를 나눠 앉은 청년과 중년 커플 사이를 쇠기둥이 단호하게 가르고 서 있다. 프레임을 양분하는 쇠기둥이 접는 면을 이루듯 플롯의 전반부는 지현, 후반부는 흥주의 세랑을 따라 두 개의 여로를 제시한다. 나란한 서사 라인을 연결하는 이박삼일 동안의 두 조각 모음은 캐릭터의 병렬 경험을 따라서 흘러간다. 그렇다면 이 둘은 어느 지점에서 서로 엮이는가? <춘천, 춘천>의 시각 스타일은 미니멀리스트의 방식이다. 카메라는 움직이지 않고 간헐적으로만 패닝하며 움직이는 캐릭터들을 따라 트래킹하지 않는다. 단순한 구도의 1인 또는 2인 쇼트에 의존하는 이러한 스타일은 디테일에 집중하게 하고 캐릭터 행위의 미세한 변화를 새기게 하며 이런 진부한 스토리를 보고 있는 이유에 대해 계속 사고하게 한다. 서사적으로는 두 개의 시간 층위를 겹치면서 이야기의 주름을 만든다. 미래에 대한 전망이 불투명한 지현이 불안에 대처하기 위해 방랑하는 행장기 다음에 흥주와 세랑의 여정이 포개진다. 두 경로는 모두 고요한 휴양 도시의 지형도 위에서 펼쳐지는데 단지 그것만이 공통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저들의 우주는 근거리의 좌표 상에 그려진다. 일자리를 얻어 서울로 향하는 동향(同鄕) 친구와 춘천역 에스컬레이터에서 교차한 지현은 그날 밤 구직 면접에서 탈락했다는 통보을 받고 크게 낙담한다. 다음 날 이 도시를 대표하는 마라톤 경기의 출발선에 서 비틀거리던 지현은 페리를 타고 호수를 건너 청평사에서 기원을 추정하기 힘든 기도를 올린다. 정처 없이 떠돌던 청년의 발걸음은 친구 어머니가 운영하는 식당 평상에서의 넋두리를 지나 다음 날 아침 페리호 위에서 종료된다. 흥주와 세랑의 이동 경로는 지현의 꼬리를 밟는다. 저렴한 모텔 방이 모두 소진되어 비싼 숙소에 든 두 사람은 한 방에 묵게 된다. 다음 날 아침, 이번에는 마라톤 경기의 결승점에서 북적대는 인파들 사이를 빠져나와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식당의 야외 테이블에서 식사를 한다. 어색하고 썰렁한 식사를 마친 세랑은 23년 전에도 이곳에 들러 산채비빔밤을 먹었는데 그때도 맛은 별로였다고 회고한다. 페리를 타고 청평사에 들어가 세랑은 절을 하고 흥주는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늦은 오후 절에서 나온 두 사람은 소박한 식당에 앉아 낮술을 마신다. 다음 날 아침 안개 낀 호수 기슭의 잿빛 풍경을 보고 상념에 빠진 그들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점진적으로 분리된다. 캐릭터의 묘사는 섬세하고 상황의 전개는 느슨한 <춘천, 춘천>은 진정한 삶이 어떻게 경험되는지 보여줌으로써 그것이 항상 사이에 끼인 과정임을 깨닫도록 한다. 이 일상의 휴먼 드라마는 모든 영화적 감각이 시간의 흐름과 사소한 제스처, 빛의 변화에 맞춰져 있다. 영화의 진가는 시각적 표현, 소리, 우연한 마주침에 있으므로 사건에 대한 설명으로 훼손될 수 없다. 이와 관련하여 인간들이 상호작용하는 장소로서 공간을 새롭게 인식하는 두 개의 롱테이크 신에 대해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먼저 취업에 실패하여 한껏 울적해진 지현이 에스컬레이터에서 스친 고향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노래를 불러 달라고 조르는 밤의 정경을 묘사한 신이다. 후회와 자책, 망연함이 뒤섞이는 10분의 지속 시간 동안 우리는 천천히 무너지는 청년을 지켜본다. 음악을 그만두고 서울에 취직자리를 얻은 친구가 불러주는 애절한 노래의 마지막 음이 밤공기를 가르고 떠오를 때까지 지현은 숨을 참는 것 같다. 두 번째 롱테이크 신은 아마도 지현이 머물렀을 것으로 추정되는 식당에서 막걸리와 파전, 전골을 놓고 나누는 흥주와 세랑의 대화이다. 카메라가 거의 움직이지 않는 까닭에 우리는 머뭇거리는 저들의 대화에 집중할 수밖에 없다. 이 진부해 보이는 시간의 길고 유동적인 흐름은 얇은 비닐 가림막 뒤에서의 조용한 대화를 보여줄 뿐이다. 비닐 가림막 너머에 있는 태양이 구름 안으로 들어갔다가 나오기를 반복하는 동안 카메라는 두 사람의 과거를 회고하고 서로에게 마음을 여는, 서툴고 더듬거리는 말들을 수록한다. 주변에 떨어지는 빛의 명암은 그들의 변화하는 감정에 따라 황금빛에서 어두운 그늘로 수시로 바뀐다. 변화하는 빛과 서늘한 바람 소리, 시간의 흔적이 그대로 기록된 이 신의 도입부에는 사마귀도 등장한다. 흥주는 사마귀와 방아깨비의 차이를 설명하고, 가을이 더 깊어지면 사마귀도 색깔이 낙엽 색깔처럼 변해 천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한다고 이야기한다. 갑자기 생각이 났다는 듯, 세랑은 어린 시절 몸에 사마귀가 났을 때 사마귀가 그걸 먹어주면 없어진다고 했던 속설이 진짜인지를 흥주에게 묻는다. 흥주는 사마귀는 몰라도 잠자리를 사마귀에 갖다 대면 그걸 물어뜯기는 했었노라고 경험의 차이를 이야기한다. 이런 식의 한담과 그들 각자가 과거에 다른 연인과 춘천을 방문했던 기억을 나누는 동안 사마귀는 조용히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있던 흥주는 세랑이 앉은 쪽으로 자리를 옮겨 그녀의 옷에 붙어있던 사마귀를 쫓고, 어색한 두 사람을 한 자리에 나란히 앉도록 한 사마귀는 프레임 바깥으로 사라진다. 이 기우뚱한 구도 안에 세랑-흥주-사마귀가 나란히 놓인 형상은 춘천행 기차 안에서 쇠기둥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앉았던 세 여행자를 떠올리게 한다. 무려 12분이 넘는 시간 동안 인물들이 자신을 발견하는 무성한 풍경들을 천천히 축적하는 과정은 시간에 대한 감각과 미물(微物)에 투영된 복잡한 감정의 흐름을 전달한다. 평행 우주의 다른 좌표에서 지현은 청평사를 내려오는 길바닥 위에 죽어 있는 사마귀를 본 적이 있다. 사마귀는 어떻게 거기에 나타날 수 있었을까? 영화를 보는 사람들 모두가 장면의 비밀에 대해 알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지속 시간의 무게를 탑재한 이 장면들은 빛의 소멸, 미묘하게 반향하는 두 쌍, 투명함의 감각을 위해 시간의 드라마를 변환한다. 과거의 유령, 잃어버린 연결과 놓친 기회가 두 부분을 맴돌며 애잔한 사슬로 청년과 중년을 엮는다. <춘천, 춘천>은 일상적인 장소와 날씨, 빛의 기록이자 일시적이기는 하지만 그 시간을 통과한 인간과 자연에 관한 유려한 미니어처이다. 장우진은 풍부한 특성화와 미적 감성을 통해 세계의 복잡성을 추론하게 한다. 우리의 삶이 곧게 뻗은 직선이 아니라 구불구불한 곡선이며 때로는 이미 지나갔던 길의 되밟기라는 것을 이 영화는 이야기한다. 내러티브를 형성하는 반복된 말과 사물, 우연한 만남, 이상한 재조합, 전화 통화, 절, 마라톤, 사마귀는 내러티브의 체계 위에서 진동한다. 형식적으로 흥미로운 장우진의 기하학적 플롯은 이중구조와 심리적 묵시라는 수단을 흡수하여 스토리텔링을 해석하는 관객들에게 복합적인 층위를 상상하도록 한다. 정보를 많이 제공하지 않으면서 한 번의 몸짓이나 이미지에 평생의 후회를 담는 이 캐릭터들은 과거를 몇 번이나 회상해도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완전히 알아낼 수 없을 것이다. 생생한 계절의 톤에서 안개 낀 회색으로 반복적으로 흔들리는 이야기는 화장실 앞에서 초조하게 서성대는 카메라로 모호한 이중 결말을 이룬다. 표면적으로는 겸손하면서도 은근하게 야심에 찬 장우진의 연출은 세부 사항, 반복 및 후속 보기를 의미 있게 만드는 내적 운율을 통제하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작지만 결정적인 순간을 제시한다. 결과적으로 영화는 덜어냄으로써 남아있는 것들 안에 뉘앙스를 드러낸다. (관련글) 1. 2000년 1월 1일 0시, 거꾸로 가는 기차 - <박하사탕>(1999), 2021.04.16. 2. 넥타이로 총을 겨누었을 때 - <올드보이>(2003), 2021.05.14. 3. 요리사는 어디로 가는가? - <오!수정>(2000), 2021.06.04. 4. 고반장은 이렇게 말했다 - <논픽션 다이어리>(2013), 2021.07.09. 5. 머리를 자르고 새 옷을 입는다고 해서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다 - <무산일기>(2010), 2021.08.10. 6. 엄마의 침통은 죄를 기억한다 - <마더>(2009), 2021.09.03. 7. 수인동성동형론(獸人同性同形論)에 따르면 -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2003), 2021.10.15. 8. 유능한 이야기꾼은 진실이 거기 없다는 것을 잊도록 하는 이야기를 지어낸다 - <버닝>(2018), 2021.11.12. 9. 죽음의 한 연구(硏究) - <파산의 기술>(2006), 2021.12.10. 10. 사마귀가 사마귀를 먹다 - <춘천, 춘천>(2016), 2022.01.07. 11. 다시 태어난다면 다시 사랑한다면 그때는 우리 이러지 말아요 - <극장전>(2005), 2022.03.08. 12. 철없는 엄마와 파란만장한 남자들, 그리고 엔카 가수 - <그때 그사람들>(2004), 2022.04.06. 13. 도무지 집중이 안 되는 이야기 - <형사 Duelist>(2005), 2022.05.24. 14. 철의 신이 수장(水葬)시킨 고래의 추억 - <철의 꿈>(2013), 2022.06.16. 15. 골목길을 저절로 움직이는 자전거 - <풍경>(2013), 2022.07.14. 16. 일자로 아뢰리다 - <춘향뎐>(2000), 2022.08.11. 17. 연결연결, 믿음의 벨트 - <기생충>(2019), 2022.09.08. 18. 아마도 악마가 - <곡성>(2016), 2022.10.20. 19. 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 - <나쁜 영화>(1997), 2022.11.25. 20. 황야의 울부짖는 개 - <복수는 나의 것>(2002), 2022.12.14. 21. 숟가락을 구부리는 것은 의미가 없어 보일 수 있죠. 하지만 그러한 힘을 가지고 이 세계에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게 중요한 겁니다 - <88/18>(2018), 2023.01.04. 22. 완전하고, 만족스러운 진실은 없다 - <파수꾼>(2010), 2023.03.03. 23. 이미지의 확실성과 증거력에 대한 회의 - <김군>(2018), 2023.04.05. 24. 범죄의 요소 - <괴물>(2006), 2023.05.17. 25. 투명인간이 되는 법 - <빈집>(2004), 2023.07.05. 26. 어차피 우리는 유령이 될 거예요 - <후쿠오카>(2019), 2023.08.30. 27. 생라면, 참치 통조림, 라이터, 휴지, 그리고 사시미칼 - <넘버3>(1997), 2023.10.05. 28. 풍등(風燈)은 날아가고 - <해피엔드>(1999), 2023.10.18. 29. 504호, 고아, 사라진 애, 시체... 이제 마지막 남은 얘기 하나 - <소름>(2001), 2023.11.07. 30. 열여덟, 바람의 색깔 - <회오리 바람>(2009), 2023.11.20. 31. 가면고(假面考) - <반칙왕>(2000), 2023.12.11. 32. 문은 두 방향으로 나 있다 - <두 개의 문>(2012), 2023.12.28. 33. 지옥의 복도 - <아수라>(2016), 2024.01.08. 34. 삼(3)의 몰락 - <성적표의 김민영>(2021), 2024.02.05.
< 남매의 여름밤 >(윤단비, 2019)은 이젠 거의 멸종위기라고 전해지는 ‘시네필’의 영화다. 시네필은 영화에서 자신만의 특별한 순간, 장소, 인물, 움직임, 빛을 찾아낸다. 그리고 그렇게 사랑에 빠질 만한 영화적 이미지와 조우하면 흘러가는 그것을 소유하고자 절박한 몸짓으로 반복적으로 관람하는 물신주의자다. 실제로 영화를 재생해볼 뿐만 아니라 기억에 각인된 강렬한 이미지를 꺼내 가상적으로 돌려보기도 한다. 시네필의 반복강박을 야기하는 영화적 이미지들은 파편적이고 비인과적이며 그래서 자주 서사와는 상관없이 떠오른다. 영화학자 로라 멀비는 그의 저서 『1초에/24번의 죽음』에서 이러한 시네필을 ‘소유적 관객(possessive spectator)’이라 칭한다. 필름 시대를 지나 디지털 환경에서도 시네필은 돌려보고, 뜯어보고, 반복해 보는 매체의 특징을 맘껏 누리며 “텍스트 본래의 응집력을 공격하면서 예상치 못한 감정으로 열리는 즐거운 회상을”(35) 가져오고 그 과정에서 사색의 여지를 마련한다. <남매의 여름밤> 역시 인과적이고 극적인 서사보다는 여름밤의 빛과 공기, 냄새와 소리를 감각하게 하는 것에 집중한다.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은 아빠(양흥주)는 살던 집을 빼고 옥주(최정운), 동주(박승준) 남매와 함께 할아버지의 오래된 이층 양옥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곧이어 부부 갈등 때문에 집을 나온 고모가 이들에 합류한다. 옥주와 동주, 아빠와 고모,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는 그렇게 여름 한 계절을 함께 보내게 된다. <남매의 여름밤>은 캐릭터에 대한 서사적 정보를 거의 주지 않는다. 아빠와 고모가 겪고 있는 경제적 곤란과 부부 갈등이 무엇인지, 왜 옥주는 엄마를 미워하는지, 할아버지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옥주는 남자친구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의 사연은 극도로 절제된다. 대신 그 자리를 채우는 것은 공감각적이고 중첩적인 감각과 단편적 기억의 환기를 통한 다중적 시간성이다. 관객들은 여러 겹으로 이뤄진 감각과 시간의 미장아빔(mise en abym)에 포획된다. 그러면서 감각과 시간은 공간화 되고 관객은 남매와 함께 ‘영화-집’에 머물게 된다. <남매의 여름밤>에서 빛은 소리가 되고, 소리는 빛이 된다. 한낮의 뜨거운 빛은 끈적이는 장판에서 맨발이 떨어지는 소리가 되고, 서서히 열기가 식어가는 밤공기는 오래된 이층 양옥집의 시간이 켜켜이 쌓인 냄새가 되며, 환하게 열어젖힌 창으로 흘러나오는 저녁밥 냄새는 안팎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와 섞이고, 마당의 풀벌레 소리는 어두운 밤 잠 못 드는 할아버지가 켜놓은 낡은 전축 스위치의 초록색 전구불빛이 되고,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옛날 노래 소리는 할아버지의 삶과 그 삶이 가꾸고 거주해온 집이 된다. 그리고 커다란 마루 창문 덕택에 안이 훤히 다 보이는 집, 시시각각 다르게 빛이 들어오며 변신하는 집은 그 자체로 네모난 프레임의 영화가 된다. 그 ‘영화-집’에서 옥주와 동주 남매가 보낸 여름방학은 아빠와 고모의 지난 추억과 중첩되고, 그 시간이 옥주와 동주 남매가 성장해서 기억하게 될 특별한 순간이 될 것이라는 암시로 이어진다. 심지어 아빠는 할아버지가 자신에게 했던 장난(방학인데도 학교 갈 시간이라고 깨우기)을 동주에게 반복하고,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를 모실 요양원을 알아보고 오는 길에 옥주 남매가 자신이 병이 들면 동일하게 처리할까봐 걱정한다. 엄마가 보고 싶어 꾸었다던 고모의 꿈은 할아버지 장례식장에서 엄마를 만난 옥주의 꿈으로 반복되며 옥주의 엄마를 향한 그리움이 연극처럼 상연된다. 시간의 반복 속에서 차이를 각인하는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처럼 <남매의 여름밤>은 삶의 시간을 담담히 관조한다. 하지만 시간의 반복을 통달하고 희미한 회한만 남은 노년의 남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오즈의 영화와 달리, <남매의 여름밤>에는 그 시간의 초입에서 허우적대는 생경함과 혼란스러움이 공존한다. 그 시간을 경험하고 바라보는 주체가 사춘기 소녀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흔한 짝패인 장난기 많고 철없는 어린 남자 아이가 아닌, 사춘기 소녀의 시선으로 할아버지의 마지막을 지켜보게 한다. 이제 막 인생을 진지하게 성찰하기 시작한 옥주와 인생을 마무리하는 단계에 들어선 할아버지는 삶의 주기에서 가장 사색적인 시기를 살고 있는 이들이다. 옥주는 자신의 정체성뿐 아니라 자신과 타인의 관계, 그리고 그들이 거주하는 시공간에 대해 고민한다. 독립적이고 자존심이 센 옥주는 자기 영역이 중요하다. 그래서 모기장으로 자기 영역을 확실히 주장하는 만큼, 할아버지의 집에서 함께 사는 것을 허락받았는지 아빠한테 반복해 확인하고 할아버지의 집을 아빠와 고모가 자신들의 편의대로 처리해버리려는 것에 반발한다. 옥주는 할아버지에게 호기심이 있고 도움을 주고 싶지만 독립된 개체로서의 그의 삶에 무례하게 침입하기를 원치 않는다. 다른 사람들이 옥주 자신에게도 그렇게 대해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말이다. 옥주는 할아버지의 시간이 깃들여 있는 공간을 존중하고 그의 존엄을 지켜주고 싶다. 그 집을 포함해 맨들맨들해진 재봉틀, 오래된 사진첩과 담금주, 사용하기 편하게 나무에 묶어둔 정원용 가위와 물뿌리개, 방울토마토와 포도나무, 낡은 액자와 전축은 그와 함께 나이 들어 온 것이다. 아빠와 고모는 나이가 많고 병든 할아버지의 시간을 앞서 계산한다. 할아버지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계산하는 순간, 그의 현재는 덤이 된다. 하지만 옥주는 다르다. 현재 자기의 시간과 공간이 소중하듯이, 할아버지도 그렇다. 할아버지가 어색하고 낯설지만 잘 해드리고 싶은 옥주는 가족 중 유일하게 생일선물을 준비한다. 옥주는 할아버지가 생일선물인 모자를 쓸 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를 계산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옥주의 태도는 할아버지가 한밤중에 나와 홀로 낡은 전축에서 흘러나오는 노래 <미련>을 듣고 있는 장면에서 특별한 순간을 만든다. 노래 소리를 듣고 이층에서 내려온 옥주는 거의 말이 없고 가족에게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던 할아버지가 순수한 즐거움 속에서 자기만의 시간여행을 하며 노래를 감상하는 모습을 목격한다. 그러나 옥주는 더 다가가지 않고 조심스럽게 할아버지에게 보이지 않을 이층 계단으로 올라와 앉는다. 옥주는 그 노래를 함께 듣지만 그의 시간과 공간을 방해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의 삶에 대한 존중이다. 할아버지가 소파에서 맥주 한 병을 탁자에 놓고 음악을 즐기는 방식은 그야말로 시네필적인 태도다. 앞뒤의 시간(서사적 맥락)을 계산하지 않고 그 순간을 즐기고 몰입하기, 타자가 들어올 여지를 주면서도 자기만의 이미지를 소유하기,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나 지나가버린 과거에 대한 회한 없는 시간을 만들기. 그것들은 설명이 필요 없는 순간이다. 이 장면은 개인적으로 이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재생해 보는 순간이기도 하다. 내게 <미련>의 노래 소리는 전축에 켜진 작은 초록색 전구불빛과 전기 연장선 스위치의 주홍색 불빛으로 각인되어 있다. 나도 그 장면을 보지만, 그 불빛들도 나를 가만히 응시하며 여름밤의 공기를 전한다. 옥주가 자기 공간을 고집하면서도 필요한 순간에는 고모와 동주에게 공유했던 것처럼 그리고 할아버지의 노래를 같이 들으면서도 그를 방해하지 않았던 것처럼, <남매의 여름밤>은 여름의 개방성과 투명성을 통해 영화라는 매체가 가진 소유적이면서도 공유적인 체험을 사색하게 한다. 낯선 거리를 두고 타인을 존중하면서도 그의 내밀하고 사적인 시공간을 경험하게 해주는 영화 그리고 영화관이 새삼 그리워진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90년대생 감독이 쓸쓸한 유년의 기억을 담아내는 방식 처음 이 영화의 포스터를 보며 신기해 했다. 포스터엔 2층 양옥집에 가족들이 밥을 먹고 있는데, 집은 아주 크게, 사람들은 작게 배치돼있다. 영화를 보니 역시 주인공이 집이었다. 아름답고 넓은 마음으로 가족들을 받아 준 할아버지를 닮은 낡은 2층 양옥집. 고1 옥주는 아빠 병기( 양흥주 )와 남동생 동주(박승준)와 함께 철거되는 동네를 뒤로 하고 할아버지(김상동) 댁으로 거처를 옮긴다. 손주들의 인사에도 별 대답 없던 할아버지는 “애들 방학 동안만 지낼게요” 라는 아빠의 말에 처음으로 입을 연다. “좋을 대로 해.” 곧이어 이혼을 앞두고 있는 고모 미정(박현영)도 이 집에 들어 온다. 할아버지와 낡은 집, 두 쌍의 남매가 함께 하는 시간. 이 영화는 집의 시점에서 4명의 남매가 겪는 여름을 지긋이 바라보듯 담는다. 나이든 남매(병기와 미정)는 이혼이나 사업 실패 같은 현실적 어려움이 있다. 미정은 “날 괴롭히려고 태어난 요괴” 같은 남편을 떠나려 하고, 병기는 두 아이의 생계를 위해 가짜 브랜드 운동화를 팔며 새로운 직업을 가지려 노력 중이다. 어린 남매(옥주와 동주)은 헤어진 엄마를 향한 그리움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 부딪친다. 옥주는 첫사랑의 생채기도 안고 있다. < 남매의 여름밤 >은 각자의 폭풍 같은 시기를 잔잔하게 풀어낸다. 힘든 일이 있어도 식구끼리 콩국수, 잡채, 비빔국수 같은 요리를 해 먹으며 덤덤히 살아내는 시간. 각자 삶의 다음 구절로 옮겨가는 여름의 시간. 이 영화의 영제는 <Moving on>이다. 이러한 ‘성장의 기억’이라 주제는 최근 약진하는 젊은 여성 감독 영화에서 자주 발견된다. 김보라 감독의 < 벌새 >, 윤가은 감독의 < 우리집 >, 윤단비 감독의 <남매의 여름밤>까지 각자 다른 방식으로 훌쩍 커버린 한 시절을 영화에 박제한다. 이를 시대적 감수성 혹은 노스탤지어를 경유해 묘사하는 경향을 두고 송경원 평론가는 “이 기억들을 반영하는 형태에 구체성이 결여돼 있어 결과적으로 안전한 방식, 그러니까 추억으로 환원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고 평했다. <남매의 여름밤>을 두고 파생된 여러 질문 중 나를 사로잡은 건 ‘기억과 추억을 가르는 것은 무엇인가’ 였다. 시공간의 구체성과 통찰의 메시지를 담은 건 기억이고, 구체성을 뭉개고 예쁜 필터를 넣어 보정한 건 추억인가? 그렇다면 추억은 아름답고 아스라한 미장센으로 만들어지는 것인가? 혹은 에드워드 양이나 고레에다 히로카즈, 오즈 야스지로 같은 동아시아의 걸출한 영화 작가의 영향이 느껴지는 연출에서 오는 것인가? 물론 <남매의 여름밤>에선 위의 언급한 작가 감독들의 영향이 짙게 보인다. 인물의 클로즈업을 지양하고 인물의 움직임을 고요히 응시하는 촬영, 인물이 프레임을 나가도 당장 끊지 않은 편집 등등. 하지만 이 영화의 이런 연출은 그저 감독 개인이 좋아해온 고전영화를 흉내내거나, 그런 영화들을 그리워하는 감상으로 쓰인 것 같진 않다. 그보다는 대사나 연기 조율 같은 1차적인 연출 외의, 그 이상의 고전영화의 영화언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한다는 인상을 준다. <남매의 여름밤>은 그 문법을 차용해 영화의 시선을 쉼없이 양옥집으로 돌려놓는다. 양옥집이 보고 있는 두 쌍의 남매를 관객도 보게 하는 것이다. 이 영화의 중심은 ‘양옥집’이고 관객도 이 공간을 향유하길 바란다고, <남매의 여름밤>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양옥집의 존재감은 포스터에서 보이던 것만큼 대단하다. 윤 감독이 오랜 시간을 쏟아 인천에서 찾아냈다는 이 집은 원래 한 노부부가 살던 곳이다. 말하자면 너무도 현실적인 ‘남의 집’이다. 내부 인테리어도 그대로 썼다. 오래된 옥색 시계, 하회탈이 담긴 액자, 무심히 걸린 달마도까지. 현실에서 곧장 튀어나온 것 같은 이 곳은 극영화의 배경이라기엔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다. 이 영화가 실재와 재현 사이를 오가는, 다큐멘터리와 극영화 사이에 있는 듯 느껴지는 이유다. 병기와 미정을 연기한 양흥주와 박현영의 놀랄 만큼 뛰어난 일상 연기도 여기에 힘을 보탠다. 그런 이유에서 이 영화가 가장 관심있는 지점이자, 궁극적으로 달려 가는 지점은 양옥집의 소멸과 집 주인인 할아버지의 죽음이다. 이 나른한 영화가 관객의 마음을 가장 덜컥하게 하는 순간은 할아버지가 바지에 똥을 쌌을 때와 아빠와 고모가 할아버지를 요양원에 모신 후 집을 팔려고 할 때다. 어쩌면 이 영화를 지배하는 가장 중요한 정서는 잃어버린 것의 그리움이 아니라, 곧 잃어버릴 것에 대한 슬픔일 것이다. 그 슬픔이 <남매의 여름밤> 전체를 관통한다. 첫 장면, 옥주가 살던 반지하 집의 동네 자체가 철거되는 상황을 떠올리면 더욱 그렇다. 우리는 좋아했던 것을 부단히 잃어버리고 또 다른 소중한 것을 만들면서 성장한다. 옥주는 이미 엄마와 반지하 집을 잃었다. 그리고 다시 생긴 소중한 것은 할아버지와 바로 이 집이다. 엄마와의 재회를 두고 옥주와 동주가 크게 다투던 순간, 할아버지가 처음으로 2층으로 올라온다. 그리고 꺼이꺼이 우는 동주를 아무 말 없이 데리고 내려간다. 아이들이 겪는 상실의 상처를 조용하고 따뜻하게 보듬는 어른. 이 존재의 소중함이 가장 강하게 느껴지는 순간, 관객은 그 역시 사라질 것임을 직감한다. 다시 양옥집 얘기로 돌아가보자. 자신의 정서적 기억을 영화에 풀어내려던 젊은 감독은 영화의 핵심 요소로 왜 ‘남의 집’을 선택했을까? 인천에 오래 살았던 한 노부부의 손때 묻은 이 집은 지금은 실재하지만, 멀지 않은 어느 시기에 곧 사라질 것 같은 느낌 때문은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영화의 상상력과 실재하는 공간이 만나 이뤄낸 새로운 파동. 정리하면 <남매의 여름밤>은 타인의 공간을 빌려와, 소중한 것들을 잃으며 자란 쓸쓸한 기억을, 고전 영화의 문법을 능숙하게 구사해 말한다. 솔직하고 자유롭고 대담한 선택이다. 그리고 어쩌면 이들 세대에게 고전영화는 너무 소중히 여기며 승계할 게 아니라, 감독 개인이 좋아하고 친숙한 여러 영화 언어 중 하나인 듯 싶다. 이렇게 21세기 영화라는 매체 안에서 개인이 기억을 구체화하는 방식은 유연하고 자유로워 지고 있다. 이 흥미로운 변화의 흐름이 달갑지 않을 이유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