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복의 어린 시절
- 감독
- 조문진
- 제작년도
- 1974
- 출연
- 최유리, 허장강, 이경희, 김무영, 김난영, 장훈, 박성재, 이충휘, 신영선, 이예성, 이강조, 심상현, 이용복, 박지영, 김정훈, 최문섭, 안진수, 나갑성, 장춘언
셰익스피어의 『햄릿』에는 햄릿이 연출한 선왕 시해의 비밀이 담긴 극중극 《곤자고의 살인》이 나온다. 햄릿은 공연을 위해 극단원들에게 연기를 지도한다. 햄릿: 부탁하건대 그 대사를 읊을 때 내가 보여줬던 것처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해야 하네. 대부분의 배우들이 그러하듯이 고함에 과장에 야단법석을 떨 바에는 차라리 장사꾼에게 배역을 맡기겠어. 손놀림도 허공을 휘젓지 말고 점잖게 움직여야 해. 폭풍처럼 감정이 소용돌이를 치더라도 평정을 잃어서는 안되네. (…) 그렇다고 너무 단조로워서도 곤란해. 각자 맡은 역할에 신중을 기하고 행동에 어울리는 말을 하고, 말에 적합한 행동을 하게. 자연스러움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키면서. 알겠나? 햄릿이 연기에 대해 피력한 견해들은 16세기 영국의 연기법으로 유추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단서들을 담고 있다. 햄릿의 입을 통해, 셰익스피어가 생각한 당시 연기술과 그에 대한 부정적인 입장 그리고 추구하는 연기술을 집약적으로 담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작품에 작가 자신의 견해를 투영하는 것을 작가의 자기반영적 기법이라고 한다. 몇 가지 예시를 더 살펴보자. 17세기 스페인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시녀들>에는 국왕 부부의 초상화를 그리고 있는 작가의 모습이 등장한다. 관찰자이므로 화폭에서 모델이 될 수 없는 작가가 자신을 정면으로 표현한 것은 회화 역사상 처음으로 시도한 것이다. 의사 출신인 러시아의 극작가 안톤 체호프는 작품마다 의사 역을 넣어 자신의 페르소나로 삼았다. 프랑스의 소설가 앙드레 지드는 『위폐범들』에서 주인공 에두아르를 「위폐범들」을 집필하는 소설가로 설정한다. 에두아르는 자신의 일기와 수첩에 「위폐범들」의 창작에 관한 구상을 기록하는데, 여기서 수첩의 내용은 지드의 실제 작품일지를 거의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이처럼, 작품 속에 작가가 등장하거나, 페르소나를 통해 작가의 견해를 대변하거나, 작품 속에 작품 제작에 관한 내용을 드러내는 것 모두 자기반영적 기법이다. 이는 작품 밖 작가 차원의 영역을 작품 안에 개입시키면서 작품 스스로 허구임을 드러내고, 관객은 작품 세계와 현실을 오가며 모호한 상태로 작품을 관람하게 된다. 즉, 작품 속에 현실을 현실 속에 작품을 견인해 오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알모도바르 영화에는 감독의 자기반영성이 잘 드러난다. 초창기 영화에는 감독이 직접 카메오로 출연하며 영화 안에 영화 제작자인 자신의 모습을 담았다. <욕망의 법칙>에서 계산원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 내가 뭘 잘못했길래 >에서는 주인공들이 보는 TV속의 배우로 나타나 관객들에게 서프라이즈를 선사한다. 관객은 영화에 몰입하다가 작품에 등장한 감독의 모습을 통해 이것이 영화였다는 사실을 각인하게 된다. 그리고 다수의 작품에 영화감독 역을 등장시킨다. <욕망의 법칙>, < 욕망의 낮과 밤 >(원제: 나를 묶어줘!)에서는 상대에 대한 집착과 욕정을 가진 감독으로, < 나쁜 교육 >에서는 복수를 실현하기 위해 영화를 제작하는 감독을 그렸다. < 브로큰 임브레이스 >는 감독 역할에 알모도바르의 목소리를 적극적으로 담기 시작한 작품이다. 영화감독 마테오(루이스 호마르 扮)가 시각장애인이 된 다음에 온전히 음성으로만 듣고 편집한 장면을 돌려보는 앤딩의 대사는 마음을 울린다. “중요한 건 영화를 끝내는 거야. 비록 앞이 안 보여도 영화는 끝을 봐야 해.” 2020년 작 < 페인 앤 글로리 >는 알모도바르가 자기반영적 기법을 집약하여 만든 작품이다. 그는 영화를 두고 “나의 70년 인생을 담은 이야기”라고 밝혔다. 영화의 포스터는 주인공 살바도르(안토니오 반데라스 扮)의 그림자를 알모도바르의 그림자로 배치하여 보다 직접적으로 자전적 영화임을 드러낸다. 알모도바르는 배우 반데라스에게 자신의 옷을 입히는가 하면 자신의 집을 그대로 가져다 놓은 것처럼 세트를 재현했다. 심지어 미장센으로 사용된 살바도르의 부모님의 사진을 자신의 부모님 사진으로 배치하기까지 했다. 영화에서 나오는 감독의 유년시절의 이야기나 어머니와의 관계, 건강상태 역시 알려진 사실과 많은 부분 일치한다. 1) 2) 1)<페인 앤 글로리> 포스터-살바도르의 그림자는 알모도바르이다. 2)<페인 앤 글로리> 살바도르의 어머니 방에 있는 가족사진은 알바도르의 실제 부모님(안토니오 알모도바르와 프란체스카 카바예로)의 사진이다. 영화는 살바도르의 현재, 어린 시절이 등장하는 꿈, 그리고 첫사랑에 관해 고백하는 연극이라는 세 가지 구조를 통해 전개된다. 현재의 살바도르는 척추 융합 수술 후유증과 어머니의 죽음으로 의지를 상실한 휴직상태의 영화감독이다. 32년 전 개봉한 자신의 영화 <맛>을 리마스터링 한 기념으로 영상자료원에서 상영과 GV를 제안하는 바람에, 영화 이후 인연을 끊은 <맛>의 주연 알베르토(에시어 엑센디아 扮)와 32년 만에 재회하게 된다. 알베르토로 인해 접하게 된 헤로인은 살바도르를 어린시절 고향의 기억으로 인도한다. 어린 시절의 고향은 살바도르에게 영화적 감수성과 어머니에 대한 애절함의 근원으로서 존재한다. 카톨릭 학교는 무신론자가 되게 하는, 미장이 형 에두아르도는 동성애적 성향을 갖게하는 계기가 됨을 유추할 수 있다. 꿈에서의 어린 시절은 현재의 살바도르의 모든 원천이자 심연의 일부인 것이다. 살바도르의 자전적 이야기인 극중극 《중독》은 살바도르의 청년 시절, 동성애인과의 사랑과 이별에 관한 이야기를 모노로그 형식으로 전하는 연극이다. 살바로드의 집에 방문한 알베르토는 우연히 살바도르가 집필한 《중독》을 읽게 되고 매료되어 연극 무대에 올릴 것을 제안한다. 처음에 살바도르는 자신의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고해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거절하나, 결국 알베르토의 뜻대로 대본을 넘겨주며 자신의 대리자가 되는 것을 허락한다. 그러면서 살바도르는 연극 무대와 연기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전한다. 살바도르: 무대는 아무것도 없는 게 좋겠어. 스크린 하나, 의자 하나. 팔다리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으면 의자에 앉아. 알베르토: 팔다리 어떻게 해야 할지 정확히 알거든! 살바도르: 수정하고 나서 좀 멜로드라마틱 해졌어. 알베르토: 걱정마, 내 전공이 멜로드라마니까. 멕시코에 있었던 게 도움이 되겠네. 살바도르: 그래서 내가 얘기하는 거야. 감정을 좀 죽여야돼. 감정을 조절해. 울지마 배우들은 울 기회만 있으면 울더라. 잘 하는 배우는 눈물 흘리는 배우가 아니라 눈물을 참으려고 애쓰는 배우니까. 알베르토: 뽀뽀해줘야겠다. (…)이번엔 셰익스피어도, 체호프도, 로르카도 아냐. 너를 연기하는 거야. 살바도르: 이상하게 하면 내 기분이 엉망이 될 거야. 잘 하면 훨씬 더 엉망이겠지. 《중독》에서 자신의 역을 맡은 알베르토에게 원작자로서 지시사항을 전하는 부분이다. 살바도르의 연극에 관한 견해는 곧 알모도바르의 견해이다. 셰익스피어가 햄릿의 입을 통해 자신의 연기관을 피력한 것처럼, 알모바르도는 자전적 영화 <페인 앤 글로리>의 살바도르를 통해 자신의 연기관을 내비치고 있다. 《중독》 무대에는 살바도르의 조언대로 스크린을 하나 놓았는데 그것을 통해 어린 시절 살바도르가 살던 동네, 보던 영화, 연인과 갔던 추억의 장소 등을 사진과 영상을 통해 비춘다. 이는 실제 알모도바르의 장소이기도 하다. 감독은 현재의 살바로드, 꿈속 어린 살바도르, 연극의 알베르토를 통해 자신을 대리하게 한다. 관객은 세 가지 버전의 알모도바르를 중첩시키면서 영화 내내 알모도바르를 상기하게 된다. 영화의 디제시스는 독립적이지 않고 현실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것이다. 영화의 정수는 앤딩 장면을 통해 구축된다. 수술을 위해 마취를 한 살바도르는 다시 꿈을 꾸고, 영화 초반 등장한 기차역 꿈 장면으로 회귀한다. 그리고 카메라가 줌 아웃 되면 붐 마이크를 들고 있는 스텝과 바닥의 조명판이 드러나고, 살바로드가 컷을 한다. 스텝이 등장해 마지막 슬레이트를 치는데, 슬레이트에 적힌 영화 제목이 <첫 번째 열망>이다. 이 장면은 살바도르가 영화감독으로 제기했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영화에서 두 시간 동안 보여준 모든 내러티브가 촬영의 일부였음을 암시하게 한다. 즉, 영화와 현실의 구분을 모호하게 하고, 수미상관의 구조를 갖춤으로써 영화 속 세계의 층위가 무한히 순환하고 있는 구성을 취하는 것이다. 알모도바르의 실제를 바탕으로, 영화제작 과정, 영화적 현실, 꿈 그리고 연극이 상호 영향을 미치며 끊임없이 순환한다. 마치 뱀이 자기 꼬리를 물고 있는 형상과 같다. 막이 내려도 관객은 영화의 무한 순환 세계 속에 갇히게 된다. 이처럼, <페인 앤 글로리>는 감독의 자기반영성이 총 망라되어있는 영화다. 현실과 영화, 영화와 현실을 순환시키며 알모도바르는 자신의 유니버스에 관객을 가둔다. 팩트인지 픽션인지 모호한 상태, 그의 영화는 팩션이다. 어머니: 그 이야기꾼 표정하지 마라. 이런 얘기 네 영화에 넣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웃들 이 영화에 나오는 건 싫어. 난 팩션이 싫단다. 살바도르: 팩션에 대해 뭘 아신다고! 어머니: 네 인터뷰에서 들었다. 이웃들도 영화에 나오는 건 싫을 거야. 시골 무지렁이처럼 표현한다고 생각할거다. 살바도르: 말이 왜그래요 엄마. 존경과 정성을 담아서 표현하는데! 기회가 있을 때 마다 엄마 얘길 한다고요. 엄마와 이웃들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고요. 전부 그분들 덕택이라고 하는데.. <페인 앤 글로리> 중. 지금까지 영화와 영화를, 영화와 연극을, 그리고 영화와 현실을 연결하며 형성하는 알모도바르 유니버스를 1편 「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편 「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3편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을 통해 알아보았다. 글을 읽고 영화를 다시 관람하고 싶어졌다면 알모도바르 팬으로서 절반은 성공했다 자평하고 싶다. 그리고 알모도바르 영화에 대해 엉켜있던 날실과 씨실이 조금은 풀렸기를... 감상을 통해 알게 된 새로운 시각이 있다면 나눠주시길 바란다. (관련글) 1. 알모도바르 영화의 연결된 세계 - 2021.10.20. 2. 알모도바르의 영화 속 연극 - 2021.10.21. 3. 알모도바르 영화와 현실의 순환 - 2021.10.22.
한 번쯤은 티셔츠를 아무렇게나 벗어던지고 운동장에서 자유롭게 뛰놀고 싶은 욕망이 있다. 마치 ‘남자처럼’ 말이다. 그런 나의, 우리의 어릴 적 욕망을 닮은 아이가 있다. 영화 <톰보이>의 주인공 로레다. 짧은 머리를 하고 군살 없이 마른 몸을 가진 로레는 외형만으로는 소녀인지 소년인지 구분하기 어렵다. 자신에게 미카엘이라는 이름을 부여한 그는 스스로를 온전하게 받아들이기에 아직 미숙하고, 사회의 요구와 자신의 욕망이 들어맞지 않아 혼란스럽기만 하다. 로레는 리사와 만나면서 소년 미카엘의 삶을 시작한다. “넌 이름이 뭐니?” 첫 만남에서 리사의 질문에 미카엘이라고 답한 로레는 리사가 소개해준 동네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미카엘이 되기 위해 노력한다. 다른 남자아이들처럼 웃통을 벗고 침을 뱉기도 하고, 서툰 가위질로 자신의 수영복을 잘라내 남성용 수영복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남성 성기 모양의 찰흙을 만들어 수영복 안에 집어넣기도 한다. 남자아이들 사이에서도 축구를 잘하는 편이며 주먹도 꽤 쓰는 로레는 리사와 숲속에서 뽀뽀도 나누고 친구들에게 인정을 받으며 완벽히 미카엘로 거듭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로레와의 싸움에서 진 남자아이와 그의 어머니가 집으로 찾아와 부모님에게 거짓말이 들통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가족 안에서의 로레는 사랑받는 딸이자 언니이지만, 여성으로서 존재해야 하는 답답함과 동생을 돌봐야 하는 책임감에 무겁게 짓눌리고 있다. 입을 꾹 다물고 공백의 표정을 지은 로레는 어딘가 억눌린 것처럼 보인다. 그런 로레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 즉 미카엘로 존재할 때는 한결 표정이 가벼워진다. 연신 웃는 얼굴의 자유롭고 즐거운 아이의 모습이다. 여기엔 공간의 힘도 존재한다. 규정이나 사회적 편견이 깃든 학교가 아니라, 속세에서 벗어난 숲은 로레와 친구들에게 자유로움을 선사하고, 아이들은 어느 것에도 구속되지 않은 채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다. 비록 거짓으로 만들어낸 가면극이지만, 로레는 잠시나마 억압에서 벗어난다. 미카엘로 존재하고픈 욕망은 집에서도 이어진다. 영화에는 거울에 비친 로레의 모습, 즉 로레가 스스로를 바라보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이때 로레는 미카엘로서 존재한다. 콧수염을 붙이고 남성의 말투를 따라 하거나 웃통을 벗은 모습, 찰흙 성기를 넣은 모습에 만족스러워 한다. 자신이 본 다른 남성의 모습을 모방하며 남성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갈망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숲과 달리 집이나 학교에선 로레가 미카엘로 존재할 수 없고, 가면극은 학교에 갈 시간을 앞두고 집에서 끝이 나버린다. 거짓으로 시작된 존재는 위태롭고, 드러난 진실이 로레에겐 버겁다. 하지만 영화는 흔들리는 로레를 방치하지 않는다. 그를 지탱해주는 가족이 곁에 있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로레는 바람을 만끽하다 운전대를 잡는다. 어린아이는 운전대를 잡는 게 미숙하고, 그 때문에 어디로 나아갈지 알 수 없어 위험하다. 아빠는 그런 아이와 함께 운전대를 잡아준다. 잘못된 길로 들지 않게 그가 갈 방향을 제시해주기도 한다. 로레의 거짓말이 들통난 순간, 엄마는 로레에게 다소 강압적이고 폭력적인 모습으로 대응한다. 손찌검을 하고, 원피스를 억지로 입힌다. 그러나 이내 로레에게 행동의 이유를 설명하고 그를 차분히 설득한다. 로레도 엄마의 행동이 자신을 위한 것임을 안다. 친구들 앞에서 여자임이 드러나고 홀로 남은 로레가 상처받은 모습이 그려진 뒤 이어지는 장면은 로레가 평화롭게 가족과 함께 있는 장면이다. 가족 안에 있는 로레는 길을 잃어도 돌아갈 곳이 있으며, 좌절하더라도 나아갈 힘을 얻을 것이다. 가족들의 사랑이 부재해 엇나갔기 때문에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 게 아니라는 걸 보여주는 중요한 부분이기도 하다. 로레의 사랑스러운 동생 잔도 버팀목이 되어준다. 잔은 미카엘을 찾는 리사에게 굳이 로레의 거짓말을 밝혀내지 않고, 끝까지 비밀을 지킨다. 로레를 오빠라고 부르며 오빠여서 더 좋다고 말하기도 한다. 잔은 미카엘을 인지하고 존중하는 존재이며, 가장 편견 없이 로레를 바라본다. 그렇기에 잔의 시선으로 바라본 로레의 모습이 영화의 메인 포스터를 장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잔은 로레와 달리 전형적인 여자아이의 형상이다. 분홍색으로 꾸민 방과 그 안에 채워진 인형들, 긴 머리를 늘어뜨리고 발레를 하는 모습이 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잔이 미카엘을 꿈꾸는 로레를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건 얼마나 다르건 서로 이해하고 함께할 수 있음을 나타낸다. 리사 역시 로레의 성장을 돕는 인물이다. 리사는 로레에게 이름을 물어봐 주는 존재다. 영화는 초반부와 엔딩 장면에서 리사가 로레에게 같은 질문을 던지며 수미쌍관을 완성한다. “넌 이름이 뭐니?” 자신이 누군지 스스로 정의하고 대답할 수 있게 해주는 이 질문은 로레가 정체성을 만들어나가는 계기가 된다. 영화는 내내 사용하는 색상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한다. 타이틀 ‘Tomboy’는 파란색에서 빨간색으로, 다시 파란색과 빨간색이 뒤섞인 색깔로 바뀐다. 이는 기존 성별에 관한 고정관념을 뒤엎겠다는 것을 예고하고, 예고한 대로 영화 안에서 ‘남성의 색’, ‘여성의 색’은 뒤집혀 사용된다. 로레가 자신을 미카엘이라고 처음 소개할 때 입은 바지와 찰흙으로 성기를 만들어 넣었던 수영복의 색깔은 빨간색이고, 반대로 로레가 여자임을 친구들에게 밝힐 때 엄마가 억지로 입힌 원피스나 리사에게 화장을 받을 때 입은 후드는 파란색이다. 사회적 인식을 뒤틀어 사용한 색상은 성 고정관념에 대한 반발이며, 우리 안에 여성성과 남성성이 공존함을 보여준다. <톰보이>는 단순히 여성성, 남성성을 규정하는 사회의 강압적 분위기를 지적하고, 성 소수자의 이야기를 담아내는 것에서 멈추지 않는다. 영화는 어린 시절 정체성의 혼란을 겪고 자신을 찾아가는 로레의 성장 과정을 그려낸다. <보그 이탈리아> 인터뷰에서 셀린 시아마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 영화가 동성애자든 이성애자든 모두에게 전하는 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 시기에 옷을 차려입고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하지 않나.” 감독의 말처럼 우리는 성 정체성의 혼란을 겪은 게 아니더라도, 혼자만의 고민을 했고, 어떤 모습을 갈망했고,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되기 위해 노력했다. 로레는 다른 누구도 아닌 우리의 어린시절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에서 돋보이는 지점이자 이러한 <톰보이>의 메시지 전달을 더욱 가능하게 하는 것은 감독이 ‘소녀’를 그려내는 방식이다. 셀린 시아마 감독은 데뷔작 <워터 릴리스>에서도 보여줬듯이 소녀를 욕망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 그리며 소녀라는 이름에 투영된 사회적 인식을 깨부순다. 소녀라는 이름을 되찾아준 것이다. <워터 릴리스>는 플로리안을 향한 마리의 사랑, 키스를 꿈꾸는 안나의 환상, 누군가의 선망과 질시의 대상이던 플로리안의 내면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톰보이> 역시 로레가 남성의 모습을 열망하며 정체성 혼란을 겪는 것을 과장되거나 자극적이지 않게 담아낸다. 이들은 모두 순수하고 서툰 욕망을 가진 주체로, 욕망 앞에 솔직하고, 아픔을 겪으며 성장해나간다. 그렇기에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에서 그려지는 소녀는 불편함 없이 자연스럽게 다가오고, 어린 시절 우리들의 모습과 겹쳐 보인다.
9년전 쯤이었던가? 고맘때쯤 윤가브리엘 형을 만났던 것 같다. 낯선 나를 웃음으로 대해준 친절한 형이라는 첫인상이 남았던 사람. 뒤늦게 언론의 기사를 통해 그가 HIV/ADIS(후천성면역결핍증) 감염인이라는 것을, 어린시절부터 고된 삶을 살아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몇 번인가 마주쳤지만 긴 대화를 나누지는 못했다. 그리고 언젠가 길에서 우연히 그를 보고 다가가 인사했을 때 그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한참이나 내 얼굴을 뚫어져보더니 '경묵이구나!'하며 반가워 했다. 강한 성분의 항생제 복용으로 인해 그 사이 시력이 심각하게 나빠진 것이었다. 그날 헤어지며 그의 눈이 멀어지는 것이 그가 세상으로부터 점점 멀어지는 것 같은 처연한 기분이 들었다. 작년 한 영화제에서 고유정 , 노은지 감독을 만나 가브리엘 형과 그의 연인 두열을 다룬 < 옥탑방열기 >를 제작중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그의 삶이 영화를 통해 사람들에게 보여질 수 있다는 소식에 정말 반가웠다. 그리고 누구보다 먼저 영화를 보고 싶은 마음에 정식 상영 이전에 스크리너를 구해 보았다. <옥탑방열기는> 옥탑방에 동거하는 가브리엘과 두열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두 사람은 HIV/ADIS 감염인 쉼터에서 만난 연인 관계로 발전되었다. 영화는 극적인 사건과 강경한 어조로 다그치며 정치적 올바름을 무기로 우리를 설득하지 않는다. <옥탑방열기>라는 제목에서처럼 옥탑방 생활기를 통해 이 커플이 지닌 삶의 태도와 에이즈 감염인으로서 세상의 시선에 맞서야 하는 내/외면의 투쟁을 드러내고자 한다. 혹은 열기를 뿜어내는 연인의 사랑 이야기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시간 동안 우리는 옥탑방에 기거하며 두 사람이 청소를 하거나 음악에 맞춰 춤을 추거나 요리를 하거나 그저 드러누워있는 일상생활을 보게 된다. 그 일상 사이에 감염인으로서 에이즈를 대하는 차이를 드러난다. 가브리엘은 동성애자이자 에이즈 감염인으로서 차별받아야 하는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하는 인권 운동가인 반면, 두열은 자신을 감염시킨 동성애자 남성을 잊지 못한 채 HIV/ADIS 감염 이후 삶이 끝났다고 생각한다. 가브리엘은 여전히 자기 안의 포비아로부터 벗어나지 못하는 두열을 안타까워 하고, 두열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연인에게 섭섭해 한다. 그들에게 HIV/ADIS란 세상 밖의 시선뿐만 아니라, 자기 내면에 자리한 지리한 공포와의 투쟁을 의미한다. 그 싸움은 결국 이 관계에 생채기를 낸다. 반복되는 신경전을 겪다 두열은 옥탑방을 떠나기도 하고, 다시 돌아오고, 또 떠나간다. 그러던 어느 날엔 가브리엘과의 생활로 인해 어떤 변화가 있었는 지 두열은 가브리엘이 활동하는 에이즈 인권운동을 함께 하기도 한다. 기억에 남는 두 상황이 있다. 하나는 에이즈 치료제인 푸제온이란 명칭이 박힌 박스를 버리려 집밖에 둔 것을 주인집의 화분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을 발견했을 때다. 가브리엘은 '푸제온이 뭔지 검색해보진 않겠지'하며 어쩔 수 없이 내버려둔다. 그러나 만약 주인집이 그들의 `비밀`을 알게 될 경우의 상황은 상상만으로도 아찔한 것이다. 평범한 일상 속에서 감염인으로서의 산다는 것의 두려움이 보이는 장면이었다. 또 다른 장면은 출판 기념회에서 가브리엘이 가장 좋아하는 뮤지션 한영애씨의 음성을 들으며 백스테이지에서 뒤돌아 눈시울을 붉히는 모습이다. 그 이미지에서처럼 그가 이 사회에 처한 입장 역시 세상에 등 돌린 채 홀로 견뎌야 하는 것이 아닐까 싶은 서글픈 장면이다. 비좁은 옥탑방에 함께하는 내내 연출자는 자신의 존재를 서스럼없이 드러내고, 종종 그 카메라는 가브리엘이나 두열의 손에 들려있기도 하다. 카메라와 대상 사이 허물없는 친밀성이 주는 장점만큼 촬영은 헐렁하다. 도한 중요한 변화의 시기와 상황들이 보여지지 않고 간자막으로 건너뛰는 형식은, 관계에 초점을 맞춘 영화임에도 그들 관계와 정서적 묘사를 세밀하게 그려내지 못하는 것 같아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내가 구한 스크리너는 여전히 가편집본이기에 완성된 영화를 기대하며 기다려 보련다. 무엇보다 윤가브리엘과 두열의 삶을 지지하는 이로서 이 영화를 추천하고 싶다. `침묵은 곧 죽음`이라 믿는 가브리엘의 말처럼 그의 목소리가 많은 이들에게 들려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아마도 세상은 그리고 그들의 삶은 그렇게 조금씩 나아갈 수 있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