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 선
- 감독
- 메흐디 M. 바르사우이
- 제작년도
- 2019
- 출연
- 사미 부아지라, 나즐라 벤 압달라
윤대원 감독의 < 매미 >는 하나의 몸에서 또 다른 몸이 껍질을 벗고 나오는 이야기를 비유적으로 다룬 작품이다. 이 영화는 어느 여름밤 서울 남산 소월길에서 성매매를 하는 트랜스젠더 창현의 이야기를 변신의 모티브와 SF 영화의 관습을 활용해서 그린다. 매미가 유충에서 성충으로 거듭나기 위해 오랜 시간 동안 탈피의 순간을 기다리는 것처럼 창현은 생물학적으로 자신의 타고난 성을 완벽하게 바꿀 수 있기를 꿈꾼다. 또한, 외계인이라는 미지의 세계에서 온 타자와의 만남을 다룬 SF 영화처럼 이 작품은 창현의 몸으로 타자가 침입하고 그로 인해 벌어지는 충격적인 변화에 대해 다룬다. 창현의 몸은 창현의 것이면서도 그의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은 창현과 어떤 남성을 주요 등장인물로 활용하는 가운데 둘 사이에서 나타나는 차이와 대립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남성은 유사-탐정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흡사 범죄 현장에서 증발해버린 사건의 당사자를 쫓는 탐정처럼 서울 남산의 순환도로를 배회한다. 자동차를 운전하는 남성의 시선에 동기화된 카메라는 도로를 따라 줄지어 선 가로수를 위장막 삼아 서 있는 트랜스젠더들을 관찰자적인 시선으로 바라본다. 한편, 창현은 도시적 삶 곳곳에 도사리고 있는 여러 모험과 위험을 맞닥뜨리는 여느 멜로드라마 속 여주인공과 닮았다. 그는 자신처럼 거리에 나와 호객행위를 하는 트랜스젠더들과 가볍게 인사를 주고받거나 그들 중 누군가와 날이 선 대화를 나눈다. 그러던 중 창현은 남성을 만나 모종의 거래를 시도한다. 그들의 은밀한 거래는 대화, 언쟁, 성교, 몸싸움으로 이어진다. 남성은 창현을 잃어버린 대상으로 여기면서 그를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으려고 한다. 창현은 남성을 벗어나야 할 대상으로 간주하면서 그가 자신의 눈앞에 사라지기를 바란다. 두 사람 모두 서로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작품의 미덕은 이미지를 통해 언어적 담화를 구축하기보다는 이미지 그 자체에 대한 해독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관습적으로 접근했을 때 이 작품은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는 이원적 세계의 견고함을 다루는 것으로 이해될 소지가 다분하다. 젠더적 이분법이 하나의 규범처럼 작동하는 사회에서 성적 정체성은 주체의 자율적인 선택이 개입하기 이전에 이미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런 사회는 어떤 인칭, 어떤 주체, 어떤 기관을 명확히 규정하기 위해 하나의 몸이 다양한 관계 속에서 변화할 가능성을 사전에 차단한다. 언뜻 보면, <매미> 또한 남성과 여성의 구분이 명확한 이원적 세계에서 발생하는 모종의 갈등을 다룬 도식적인 이야기에 가깝다. 왜냐하면 이 영화 또한 기존의 여러 내러티브 중심적인 영화들이 주인공과 그것에 대립하는 인물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을 서서히 봉합해나가는 그런 관습을 부분적으로 따르고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부류의 작품에서 캐릭터는 특이하기보다는 전형적이고, 갈등은 복잡하기보다는 단순하고, 결말은 갈등을 봉합하는 방식으로 마무리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기존의 영화적 관습에 기대어 이미지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이 작품은 그저 남성 중심적인 세계에서 소외된 소수자의 정체성을 재현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작품은 이미지를 의미화하거나 그것을 서사에 종속시키는 방식 대신 이미지를 하나의 식별 불가능한 형상으로 다룸으로써 기존의 의미 체계를 무너뜨린다. 이를 위해 이 작품은 여러 시각적 이미지가 한 화면 속에서 복합적으로 교차하는 장면을 통해서 의미의 사슬에 포획되지 않는 형상들이 존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영화 초반부에 등장하는 트랜스젠더에 대한 시각적 묘사가 그러한 경우에 속한다. 영화는 남산 순환도로와 그곳을 통과하고 있는 자동차, 그리고 자동차의 동선과 겹치는 남성의 시선을 수평축으로 설정한다. 이 가상의 수평선들은 도로를 따라 늘어선 가로수와 그 뒤에 몸을 숨긴 채 서 있는 트랜스젠더들을 통해 형성된 수직축과 겹쳐서 가상의 격자를 만든다. 그것은 성적 쾌락을 추구하려는 남성의 욕망, 젠더적 구분을 초월하려는 트랜스젠더의 욕망, 그리고 음성적인 거래를 통해 법의 경계를 가로지르려는 소수자의 욕망이 교차한 결과이다. 이 영화에서 트랜스젠더는 그 단어를 구성하는 접두사 ‘트랜스(trans)’가 의미하는 초월 내지는 횡단을 수행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그들은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되는 의미 체계에 포착되지 않는 모호한 형상을 가지고 있다. 특히 그들은 외형적으로 정체를 파악하기 힘든 대상이다. 어두운 밤에 가로수 뒤편에 몸을 은폐하고 있기에 그 형태 자체가 흐릿하거나 어둡게 나타나는 비가시적인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은 외견상 여성의 헤어스타일과 의상을 갖추고 있긴 하지만, 그들 중 누군가는 아직 신체적으로 여성의 생식 기관을 갖추고 있지 않다. 그들은 남성도 그렇다고 여성도 아닌 중간자에 가까우며 바로 그런 이유로 그들은 사회적 체계 속에서 자리를 잃은 존재로 볼 수 있다. 그들은 어둠이라는 비가시적인 세계 속에서 누군가의 시선에 포착되는 순간에 등장하는 하나의 몸으로 존재할 뿐이다. 들뢰즈와 가타리에 따르면, 하나의 몸체를 결정하는 것은 어떤 지배적인 힘이 아니라 그 몸체가 어떤 관계 속에서 점하고 있는 위치이다. 모든 대상의 몸은 어느 시각, 어느 계절, 어느 분위기, 어느 공기, 어느 삶과 분리되지 않는 어느 배치물 가운데 하나의 사건으로 존재한다. 마치 <매미>의 창현이 어느 여름밤 남산 소월길에서 만난 한 남자와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몸과 그것에 깃든 정체성을 탈바꿈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창현의 몸은 저항의 장소, 파괴의 장소, 창조의 장소이다. 만약 창현을 신화적 영웅의 비범함을 가진 존재로 볼 수 있다면, 그것은 그가 인간 세계에서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어떤 규범으로부터 영향을 받기 이전에 그런 규범을 무효화시키고 더 나아가 스스로 새로운 질서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역량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매미>는 식별 불가능한 이미지와 그것의 변형 가능성을 탐구하고 이를 통해서 영화라는 매체가 이미지의 형상적 변화를 통해서 세속적인 대상들 가운데서 숭고한 대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웅변하는 작품이다. (관련글) 1. 우리는 달팽이의 시간 속에 살고 있다 - <달팽이>(2020), 2022.04.21. 2. 나와 유령이 함께 하는 시간 - <탈날탈>(2018), 2022.05.31. 3. 타인의 그림자를 집어삼키는 법 - <햄스터 죽이기>(2021), 2022.06.29. 4. 얼굴 없는 영화, 등으로 말하는 영화 - <말투>(2020), 2022.07.27. 5. 사랑의 약속으로 하나가 되는 세계 - <우리의 낮과 밤>(2020), 2022.08.25. 6. 이 몸체의 주인을 찾습니다 - <매미>(2021), 2022.09.23. 7. 이것은 감자인가 아니면 고구마인가? - <감자>(2018), 2022.11.08. 8. 일상을 적시는 시간들 - <햇볕을 볼 시간>(2022), 2022.11.21. 9. 찢김의 고통을 극복할 날을 기다리며 - <자르고 붙이기>(2022), 2022.12.06.
우리는 이미 안다(고 생각한다). 심훈의 <상록수>는 식민지시대 대표 농촌계몽소설이며, 영화 < 상록수 >는 1960년대 계몽적 문예영화다. 대중의 상식에서 문예영화는 문학작품의 충실한 재현이다. 신상옥 의 <상록수>는 사실 이러한 문예영화적 충실성에서 벗어나는데, 오늘날 우리가 <상록수>를 발견의 영화로 재고해야 한다면 신상옥만의 각색과 연출의 특이성에 놓여있을 것이다. 한국영화사에서 신상옥의 대표 문예영화는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다. 하지만 1961년 명보극장에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에 이어 선보인 영화가 <상록수>였음을 기억하는 자는 드물다. <상록수>는 < 동심초 >에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이어지는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 신상옥 영화의 고유한 아름다움, 즉 풍경을 정서로 이어가는 로케이션 촬영의 형식적인 특징을 잇고 있다. 다른 한편 < 로맨스 빠빠 > 및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로 이어지는 한국적 교양의 보편적 지평을 넓히는 영화로 과잉과 신파성을 배제한 담백한 연출도 <상록수>로 이어진다. 영화 <상록수>는 식민지 영화인 심훈 의 이루지 못한 영화의 꿈이었다. 소설가, 시인으로 알려져 있지만 심훈은 영화 < 장한몽 >(1926)의 주연 배우, 영화소설 <탈춤>(1926)을 비롯한 다수의 시나리오 작가, 영화 < 먼동이 틀 때 >(1927)의 감독이자 1920년대 중반 이후 중요한 글들을 남긴 영화평론가였다. 스스로도 “처음부터 문필로써 미염(米鹽)의 대를 얻으려 함이 본망(本望)이 아니었”으며 벽촌에 은거할 때조차 생활이 단조로울수록 “‘인’이 박힌 것처럼 영화”를 애착했던 시네필이었다. 1) 심훈의 영화 <상록수>는 당시 신문연재소설의 인기에 힘입어 고려영화사에서 감독 심훈, 촬영 양세웅, 주연 강흥식에다 총 출연 2000명이 넘는 대규모 발성영화로 만들어질 예정이었다. 시나리오만 남긴 채 심훈은 36세의 나이에 장티푸스로 세상을 떠났다. 좌측부터 영화 <상록수>의 각본 심훈, 주연 강홍식, 촬영 양세웅, 제공 이창용(동아일보,1936.3.18.) 소설 <상록수>는 잘 알려져 있듯 1961년 신상옥 감독에 의해, 1978년 임권택 감독에 의해 2차례 영화화되었다. 신상옥의 <상록수>는 원작 및 심훈(의 시나리오)과 임권택의 동명 영화와 상당히 다른 전개를 보인다. 소설 <상록수>는 동혁의 시점에서 시작해 서신 왕래라는 장치를 통해 자연스럽게 동혁과 영신의 시점을 오가다 최후에는 동혁의 시점에서 끝난다. 심훈의 남겨진 시나리오도 남주인공 ‘동혁’을 중심으로 진행되고 있다. 임권택의 영화 <상록수> 역시 동혁과 그의 고향마을 농우회를 중심으로 사건이 펼쳐지며 영신의 야학활동은 영신의 전언을 통해 플래시백 장면으로 에피소드화 된다. 반면 신상옥의 <상록수>는 영화의 오프닝에서부터 여성인물 영신을 중심으로 시작된다. 깊은 산골마을에 버스가 도착하고 짐을 싸매고 온 아가씨가 버스에서 내려 깊은 산골의 호젓한 길을 걸어간다. 배경으로 놓인 눈 덮인 산맥은 그녀가 겪을 인생에 대한 인유적 풍경인 양 놓여있다. 마치 2차례 영화화 된 <무정>이 원작소설처럼 근대적 지식인 이형식을 중심으로 한 계몽과 각성의 서사가 아니라 구여성 영채를 중심으로 한 ‘영채전’의 멜로드라마로 소비되었듯, 대다수 한국인들의 관람의 무의식 속에서 (영화와 소설을 포괄한 서사체로서의) ‘상록수’는 헌신적인 여선생 채영신의 이야기로 기억되는데, 그 기억의 원형을 제공한 영화가 신상옥의 <상록수>인 것이다. ‘상록수’에 대한 원형적인 서사로 기억되면서도 오랜 기간 동안 신상옥의 <상록수>가 저평가된 까닭은 무엇일까. <상록수>가 2차례 영화화된 시기는 1961년 5.16 직후 국가재건최고회의(최고회의)시절부터 1978년 박정희 정권의 유신 말기에 이르는 시기다. 그런 탓인지 영화화 된 <상록수>는 박정희 정권기 문화정치를 표방하는 대표적인 계몽영화로 알려져 있다. <상록수>가 개봉한 것은 1961년 9월 20일이었다. 같은 해 10월 11일, 유달영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은 농촌계몽을 소재로 한 영화 <상록수>를 국민에게 추천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한다. 이듬해인 1962년 1월 19일 최고회의 박정희 의장은 젊은 지식인들이 농촌진흥을 위해 삶을 바친 소재를 다룬 심훈 원작의 영화에 깊은 감명을 받아 <상록수>와 같은 영화를 많이 만들어 농촌으로 보내도록 지시한다. 박정희가 <상록수>를 좋아했던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며, 유달영 재건국민운동본부장은 <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모델인 ‘최용신’의 전기를 쓴 작가이기도 하다. 일련의 과정은 <상록수>라는 영화가 자체의 작품성을 떠나 5.16 군사 쿠데타와 군부정권에 의해 ‘사후적’으로 정권의 계몽영화의 상징이 된 과정을 보여준다. 이렇듯 전형적 농촌 계몽영화라는 표지는 영화 <상록수>를 정권홍보용 문화정치 영화라는 관념으로 둘러쌓아 두었던 것은 아닐까. <상록수>가 신상옥에 의해 영화화 되면서 1960년대식 개발주의 영웅서사로 자리매김했다는 역사학의 평가는 영화 자체가 의도하지 않았던 역사적 우연들에 의해 만들어진 허구는 아닐까. 신상옥의 <상록수>는 시작부터 영신의 시골행을 보여주며 맑고 깨끗한 여성 주도적 서사를 분명히 했다. 소설의 전개과정과 달리 영화는 영신이 청석골에 들어가 야학을 일구고 농촌 사람들의 생활 속으로 파고들어가는 과정을 덤덤히 보여준다. 그저 나약한 여자가 아니었다. 고학으로 학문을 익혔고 이념과 생활이 일치했으며 사회적 약자에 대한 연대의 입장도 분명했다. 영화 속 동혁과의 만남은 과거회상으로 등장하는데 이러한 영신 중심 시점은 임권택의 <상록수>가 동혁과 농우회 즉 남성 영웅과 남성 집단성을 강조한 경우와 반대가 된다. 신상옥과 임권택의 두 영화의 각본은 김강윤으로 동일하므로 이 차이는 연출의 차이임이 분명하다. “여자가 배우면 생지랄이야”라며 딸 교육을 홀대하는 시골 어른들을 설득해서 여자도 배우면 판사도 하고 변호사도 한다고 부드럽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품성,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독립적인 면모, 사랑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일도 중요한 굳건하고 부드러운 성격. 영신이 이끌어가는 여성 중심적 서사는 신상옥 감독이 1950년대 후반부터 만들어온 멜로드라마에 등장하는 여성인물에 대한 섬세한 연출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다. 구시대적이며 내성적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와 달리 진취적이며 자립적인 여성 영신을 선보인 <상록수>가 신상옥 감독의 연이은 문예물이며 주연배우 또한 최은희라는 점도 흥미로운 지점이다. 1) 심훈, 「다시금 본질을 구명하고 영화의 상도에로」, <조선일보> 1935.7.13. >> 상록수 고화질 VOD 보러가기 <<
돌파구는 그렇게 간단히 열리지 않았다. 극장 개봉 대신 OTT 서비스 넷플릭스를 돌파구로 선택한 < 사냥의 시간 >( 윤성현 , 2020)은 "넷플릭스를 통해 190여 개 국에 단독 공개한다"는 보도자료가 나온 지 꼬박 한달 간 '가다 서다'를 반복하다가 4월 23일(목), 드디어 관객을 만났다. 지난 3월 23일(월) <사냥의 시간>이 넷플릭스를 통해 단독 공개된다는 보도자료가 도착한 날부터, 과정이 매끄럽지 않을 조짐은 있었다. 넷플릭스의 보도자료가 도착한 뒤, 여섯 시간 만에 콘텐츠판다가 ‘이중계약에 깊은 유감을 표한다’며 법적 대응을 예고했고, 그날 저녁 8시 다시 리틀빅픽쳐스가 ‘이중계약 주장은 허위’라고 강한 반론을 제기하는 보도자료를 배포하며 팽팽한 공방을 예고했다. 결국 콘텐츠판다는 이미 해외 판권이 팔린 국가에서는 넷플릭스로 영화를 상영할 수 없도록 하는 ‘판매금지 가처분 신청’을 제기했고, 4월 8일(수) 법원은 콘텐츠판다의 손을 들어줬다. 현재의 '코로나19' 상황이 리틀빅픽처스가 주장하는 '계약해지가 가능한 천재지변'으로 간주하지 않았다는 것이 핵심이다. 4월 10일(금) 오후 4시 공개를 하루 앞둔 상황에서 넷플릭스는 영화 공개를 보류했다. 결국 4월 16일(목) 리틀빅픽쳐스는 "법원의 판결을 존중하며, 콘텐츠판다에 사과를 구합니다"라는 입장문을 발표해 깊이 머리 숙였고, <사냥의 시간>은 전세계 넷플릭스 구독자와 만나게 됐다. 우여곡절을 차지하더라도 <사냥의 시간>이 극장 대신 넷플릭스를 선택한 건 굉장히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코로나19 여파로 극장 관객 수가 1/10 수준으로 급감하고, 극장도 1/3이 문을 닫은 상황에서 차일피일 개봉일을 미루던 영화들이 <사냥의 시간>을 새로운 롤모델로 삼진 않을까. 극장에는 사람이 없지만, OTT 서비스에는 언제든 '새로운 콘텐츠'를 볼 준비가 되어 있는 시청자가 기다리고 있다. 기약 없는 기다림만큼 무서운 고문도 없지 않은가. 2020년 상반기 개봉 예정인 30여 편의 영화 중 <사냥의 시간>과 같은 돌파구를 택하는 영화가 등장하지 말란 법이 없다. 일부에선 (극장 대신 OTT 서비스 공개가) “충분히 현실적인 선택”이라는 목소리도 들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상반기 개봉을 계획했던 영화들은 다시 극장 문이 열리고 관객들이 극장으로 찾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길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 <사냥의 시간>에 관한 법원 판결이 나기 전, <더 스크린>이 취재한 개봉 예정 영화 관계자들은 "답답하고 안타깝지만 지금은 지켜볼 뿐이다. 아직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입을 모으면서도 <사냥의 시간>처럼 OTT 서비스로 직행할 가능성은 적다는 입장을 전했다. “다들 모든 옵션을 고민하고 있겠지만, 현재 개봉이 밀린 영화들은 모두 극장 개봉을 전제로 만들어진 작품이라는 점이 중요” “가능성이 큰 작품들을 극장에서 관객에게 제대로 선보일 수 없다는 점이 가장 큰 걸림돌”이라며 OTT 서비스 직행 가능성이 적을 것으로 전망했다. 현실적인 상황도 걸림돌이 많다. 한국 영화 기대작은 개봉 전에 해외 마켓에 소개되어 선판매되는 경우도 많고, OTT 플랫폼으로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프로세스 역시 검증된 바 없기 때문이다. <사냥의 시간>의 경우 넷플릭스가 영화 제작비와 이미 소진한 마케팅 비용을 보전하는 방향으로 판권 계약이 된 것으로 알려졌다. 즉, 흥행 수익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최소한 적자를 막기 위한 선택이다. 한 제작사 대표는 “(이미 해외 다수 국가에 판권이 판매된) 대형 영화의 경우엔 OTT 서비스가 비용을 감당할 수 있을까?”라고 반문하는 것으로 입장을 대신했다. 또한 영화 관객 수에 따라 수익이 결정되는 극장 상영 방식과 OTT 서비스의 수익 정산 방식이 다른 것도 현실적 제약이다. 다행히 두 달 가량 강력하게 진행된 물리적 거리두기의 결과로 코로나19 신규 확진자 수가 확연히 줄어들고, 개인 방역이 일상화되면서 극장들도 조금씩 관객을 맞을 채비를 하고 있다. 극장 문을 닫았던 멀티플렉스 극장들도 4월 29일(수)부터 전체 상영관을 정상 운영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다. 멀티플렉스 극장들은 관객 호응이 좋았던 재개봉 영화 상영에 이어, ‘마블 히어로 영화 특별전’을 진행 중이다. 재개봉이 흔치 않은 디즈니의 이례적인 결정에는 5월 개봉작 해리슨 포드 주연의 <콜 오브 더 와일드>,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 <온워드: 단 하루의 기적>, 크리스틴 스튜어트 주연의 <언더 워터>를 극장 상영하기 위한 ‘관객 마중물’ 전략도 포함된 것으로 보인다. 봉준호 감독의 < 기생충 > 흑백 버전도 4월 29일(수) 극장 상영 일정을 확정했다. 상반기 개봉 예정이었던 한국 영화들도 조심스럽게 5월 이후 개봉을 고려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됐다. “논의하고 있으나 개봉 일정을 공지하는 것이 조심스럽긴 하다. 마케팅 일정을 고려하면 시간이 많지 않은데, 자꾸 개봉이 밀리는 모양새라면 관객들도 김이 빠질 수밖에 없으니까.” 여름 이전 개봉을 준비하는 영화사 제작자의 고민이다. 본격적인 한국 극장 해빙기는 올여름, 7~8월이다. 한국 영화계 쇄빙선 역할은 천만 감독들의 신작 세 편이 맡았다. ‘좀비 천만 영화’ < 부산행 >의 스핀오프 속편 연상호 감독의 <반도>가 여름 개봉을 확정하고 예고편 공개 등 마케팅을 시작했다. <반도>의 제작사 레드피터 이동하 대표는 “물론 상황을 주시할 수밖에 없지만, 계획대로 진행 중이다”라고 여름 개봉을 확인했다. “해외도 한국과 마찬가지로 여름 시즌 개봉을 진행할 계획이었으나, 국가별로 상황이 다르기 때문에 지켜보고 있다. 예고편도 공개하기 어려운 상황인 국가도 있다.”라며 한국 상황보다 해외 개봉을 오히려 변수로 꼽았다. 한국 최초로 ‘오리지널 뮤지컬 영화’를 선보이는 윤제균 감독의 <영웅>도 올여름 개봉을 확정하고 예고편, 포스터 등을 공개했다. 뮤지컬 초연 공연부터 10여 년 간 안중근 역할을 연기해 온 배우 정성화가 영화에서도 안중근 역을 맡아 연기와 노래를 함께 소화한다. 작품의 메시지와 시기성을 고려해 7~8월 개봉이 유력하다. 현재 촬영을 종료하고 후반 작업 중인 류승완 감독의 <모가디슈>도 여름 개봉이 목표다. 배급사 롯데컬처웍스 관계자는 “여름 시장을 목표로 하고 있다. 다만 시장 자체가 예년과 비교해 많이 달라졌다. 예를 들면 여름 방학도 짧아질 것이고. 그래서 개봉 배급 일정은 탄력적으로 전략을 짜고 있다”라며 올해 여름 시장이 예년과 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전망했다. 조성희 감독이 연출하고 송중기, 김태리, 진선규, 유해진이 합류한 첫 SF 블록버스터 <승리호>도 여름 개봉을 놓치지 않을 계획이다. 시장의 보편적 회복 탄력성을 고려한다면 빠른 회복을 기대할 수도 있다. 매년 2억 장의 영화표가 판매되던 한국 극장 시장이 코로나19라는 강력한 외부적 요소로 위축된 만큼, 코로나19 종식에 이어 여름 대형 신작들이 공개된다면 한껏 눌러 두었던 스프링이 튀어 오르듯 관객 수가 폭증할 가능성도 높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코로나19로 어제와 완전히 다른 오늘이 시작됐다. 자연스럽게 수많은 ‘플랜 A’는 ‘플랜 B,C,D’로 변경되었다. 코로나19가 ‘극장이냐, OTT 서비스냐, 양자택일을 하라’고 위협하며 극장을 말살시키는 원흉처럼 느껴졌겠지만, 실은 위협보다는 백신으로 여기는 편이 적절하다. 전 세계 극장이 문을 닫고, 오프라인 활동이 일시 정지된 ‘미증유’의 현재는 냉정하게 짚어보면 새로울 게 전혀 없다. 코로나19로 인해 변화 속도가 현기증날 만큼 빨라졌을 뿐, 재택근무, 원격 수업, 배달 산업, OTT 서비스는 이미 대세였다. 첨단 정보통신 기술이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확산되고 삶의 모습이 혁신적으로 바뀐다는 ‘4차 산업 혁명’이 우리의 준비 상태와 무관하게 코로나19라는 광범위한 테스트베드를 통해 실용화 단계에 접어들었다. 사람들은 직접 몸을 이동해 오프라인 공간에 모이지 않고도 일을 하고, 수업을 듣고, 밥을 먹고, 영화를 보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경험하기 전엔 몰랐던 이점도 있다는 걸 체험해버렸다. 한편으론 ‘온라인 연결’이 절대 채우지 못할 오프라인 경험이 얼마나 귀중한 지도 뼈저리게 확인했다. 극장에서 볼 이유가 분명한 영화는 반드시 극장에서, 그럴 필요를 찾지 못한다면 경험한 바대로 극장이 아닌 플랫폼에서 보는, 관객의 선택은 단호하고 극명하게 갈릴 것이다. 원망도 들고, 안타깝긴 하지만 ‘코로나19만 아니었다면’이라는 가정은 쓸모없다. 동시에 온라인인가 오프라인인가, ‘모 아니면 도’ 식의 양자택일 예측도 쓸모 없다. 지금 더 중요한 질문은 영화와 극장 모두가 ‘최신 영화를 가장 빨리 보여주는 플랫폼 경쟁력’, ‘극장 홀드백’같은 독점적 안전망이 약해진 상황에서 ‘각자의 생존 무기는 무엇인가’하는 근본적인 물음이다. 이미 오래 전부터 똬리를 틀고 있는 이 질문의 답을 찾을 여유가 길지 않다. 코로나19보다 더 두려운 건, 이미 각성해 버린 관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