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호신룡기
- 감독
- 반수명
- 제작년도
- 1993
- 출연
- 정소추, 혜영홍, 여미한
Behind the Book : 저자에게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 한 사람의 질문이 늘어나고 깊어진 끝에 수백 쪽이 되어, 세상 밖으로 나오기까지. 마침내 책 한 권으로 독자에게 닿은 저자가, 치열하고도 가치 있던 여정을 들려줍니다. 영화를 좋아해 자주 극장을 찾는 편이었지만, 유난히 집중적으로 영화를 보았던 시기가 있다. 1999년부터 2004년까지 파리에서 박사학위를 준비하던 시절이다. 그때 나는 북역(北驛) 근처의 작은 스튜디오에 살았다. 아랍인, 인도인, 중국인, 아프리카인 등 여러 지역에서 흘러온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였다. 거리는 낡고 허름했지만, 이상한 활력과 혼돈으로 가득했다. 향신료 냄새가 뒤섞여 풍기는 공기에는 흥분과 불안이 실려 있었고, 길을 지날 때 들려오던 언어들은 바벨탑에서나 흘러나왔을 법한 다성(多聲)의 소음이었다. 그 자체로 ‘영화적’이던 이 온갖 감각들이, 마치 모래시계의 바닥에 쌓여가는 부스러진 시간처럼, 서서히 나의 내부에 침전되어 갔다. 여가라 부를 만한 것이 없던 일상에 유일한 출구가 있었는데 그것이 극장이었다. 파리는 시네마의 도시였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는 영화관이 서너 개 있었고, 생미셸의 낡은 옛날 극장들에서는 고전영화가 끊임없이 돌아갔다. 일 년 내내 열리던 회고전들, 퐁피두센터의 특별 상영들, 한국에서는 접하기 어려웠던 작품들, 한국 감독들의 전작(全作), 영화 교과서에서 이름만 보았던 옛날 작품들을 관람하는 기회를 누렸다. 논문을 쓰던 스튜디오와 극장은 삶의 두 극점(極點)이었다. 외로움, 침잠, 우울의 극을 이루는 스튜디오. 그리고 놀라운 이미지들이 주는 충격, 활력, 기쁨의 극을 이루는 극장. 나는 이 두 지점 사이를 오가던 진자와도 같았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일은 특별한 외출이 아니라 습관화된 생활 방식의 하나였다. 영화를 연구하거나 전공한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 내가 몰두한 공부는 이미지의 문제와 깊은 연관성을 갖고 있었다. 나는 벤야민의 저술들을 탐구하고 있었고,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에서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선생의 강의를 들으며 그의 이미지 철학과 (수업에서 다뤄지던) 아비 바부르크의 문화학에 매료되어 있었다. 이들은 이미지의 물질성, 역사성, 능동성, 생명력에 대한 감수성을 이론적 사유의 동력으로 전환한 사람들이다. 특히 바부르크와 디디-위베르만은 이미지에 대한 혁신적인 접근의 길을 연다. 바부르크가 바라본 이미지는 태어나고 변이하며,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는 생명 현상이었다. 이미지에 스며 있는 이 시간적 리듬을 그는 ‘잔존(Nachleben)’이라 불렀다. 이미지도 생명체처럼 고통을 겪고, 변형되며, 살아 나간다. 파토스(pathos), 곧 겪음, 시련, 고통이라는 문제의식이 바부르크의 사유를 관통한다. 이미지를 본다는 것은, 지진파를 온몸으로 받아내는 지진계처럼, 그것이 행사하는 힘을 겪어내는 일이다. 바부르크가 “파토스적 패러다임” [1] 을 실험한 이론가로 평가받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디디-위베르만은 바부르크가 던진 주제들을 한층 더 밀고 나가, 로고스를 중심으로 조직된 예술사 전통을 해체하고, 이를 징후학적 시각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시각 경험 고유의 현상학적 특성, 다시 말해 ‘본다(voir)’는 행위가 언제나 ‘응시당한다(regarder)’는 역관계와 함께 작동한다는 사실이었다. [2] 그는, 주체가 자신이 보는 것에 의해 찔리고 상처 입는 촉각적 경험, 그리고 이미지가 주체 내부로 스며들어 탈주체적 변화를 일으키는 순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그에게 이미지란 유령이자 파토스이며, 동시에 징후다. 이는 이미지를 의미나 사실, 표상으로 고정하고 물화하여 상징계에 예속시키려는 지적 경향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담고 있다. 당시에는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했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니, 내가 파리에서 천착하던 이미지 철학은 (지금 나에게 익숙한 용어로 이야기하자면) 다음의 세 가지 항목으로 정리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첫째, 이미지는 라캉이 말하는 상상계에 속하는 것이 아니라, 실재와 동등한 위상을 갖는 생명이며 힘이며 운동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존재론). 둘째, 인간이 이미지를 선험적 인식의 틀에 포획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이미지가 인간에게 침투하여 그를 흔들고 변화시키는 행위자라는 점(정동론). 셋째, 이미지를 보는 인간은 이러한 실효적 이미지에 의해 감응되어 변형되는 감수자라는 점이다(페이션시의 이론). [3] 『세계에 대한 믿음』 중 소개된 작품들 (상) < 부운 >(나루세 미키오, 1955), < 황혼의 빛 >(아키 카우리스마키, 2006) 중 (사진: “ Ukigumo ”, “ Laitakaupungin valot ”, IMDb) (하) < 헤어질 결심 >(박찬욱, 2022), < 나의 해방일지 >(김석윤, 2022) 중 (사진: “ 헤어질 결심 ”, 네이버영화 / “ 나의 해방일지 ”, JTBC) 서설이 길어진 이유는, 작년 겨울에 출판된 『세계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쓰이게 되었는지를 (청탁을 받은 후에) 곰곰이 떠올리다 보니 그 기원이 20여 년 전 파리 시절의 이미지 경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실 집필의 실제 시간대만 놓고 말하자면, 저 책은 2021년에서 2024년 사이에 쓴 글들로 이루어져 있다. 나는 《서울리뷰오브북스》, 『안과밖』, 《뉴래디컬리뷰》 같은 지면에 발표한 영화평들을 책으로 묶었고, 거기서 다룬 작가들은 나루세 미키오, 타르코프스키,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지아장커, 코엔 형제, 아키 카우리스마키, 켈리 레이카트, 박찬욱 , 박해영 등이다. 한눈에 보아도 쉽게 알 수 있듯, 저들을 묶는 단일한 주제나 특정 경향, 시대나 지역적 동질성 같은 것은 없다. 아마도 가장 느슨한 공통점은 내가 저들의 작품에 깊게 감응되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이런 점에서 나는 책을 쓰는 스스로의 정체성을 ‘시네필’이나 ‘비평가’가 아니라 영화를 겪는다는 의미의 ‘시네-페이션트(cine-patient)’라고 불렀다. 시네-페이션트는 이미지를 겪는 자다. 영화에 의해서 변형되는 자. 영화를 바이러스처럼 삼켜 그것과 함께 하나의 어셈블리지로 생성되는 숙주다. 최근에 내가 제안한 한 용어를 빌려 말하자면, “봄의 겪음(suffering seeing)”의 주체라고 부를 수도 있다. [4] 이런 존재는 도대체 영화에 대해 무엇을 말하고 쓸 수 있을 것인가? 이 질문이 책의 저변에 흐른다. 나는 영화를 정신분석이나 기호학, 또는 사회학이나 매체이론으로 ‘분석’하는 대신, 영화가 가져온 감각적, 감정적, 지적 변용을 ‘보고’하는 방식을 선택한 셈이다. 이는 책에서 자주 인용된 들뢰즈의 방식이기도 하다. 영화를 연구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 아니라, 사유의 동맹자로 만드는 것. 감독을 철학자로, 사상가로, (또는 나의 경우에는 사회학자로) 대우하는 것. 영화에 ‘대한’ 글이라기보다는 영화에 ‘의해’ 감응되어 쓰인 글. 이것이 내가 책에서 시도했던 비평의 한 방식이라 생각된다. 이런 점에서, 이 책은 앞에서 언급한 디디-위베르만과 바부르크의 ‘파토스적 패러다임’에 닿아있다. 시네-페이션트는 영화가 눈동자에 던지는 세계의 이미지들을 겪고, 견디고, 앓는다. 나는 책에서 여러 차례 영화의 힘의 바탕에 이런 수동성이 자리 잡고 있다고 썼다. 우리는 영화를 보면서 봄을 겪는다. 보지 않을 수 없는 상태를 겪는다. 극장에서, 우리의 눈동자는 그 안으로 세계가 침투하는 열린 상처, 또는 벌어진 구멍이 된다. 상처가 상처를 통해 상처를 바라본다. 기쁨이 기쁨을 통해 기쁨을 바라본다. 적어도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볼 때 나는 그렇게 느꼈다. 그런 체험의 파편들이 책 곳곳에 흩어져 있다. < 스토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1979) 중 (사진: “ Stalker “, IMDb) 아쉽게도, 이제 영화를 이런 방식으로 살아내는 이들을 만나는 일은 매우 드물어졌다. 우리는 이미 포스트-시네마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영화의 황혼이며, 극장의 황혼이며, 영화를 보러 가던 마음의 황혼이고, 영화를 보고 난 뒤 스며오던 그 막막하고 어둡고 따스한 기분의 황혼이며, 그 기분을 나누는 대화와 관계의 황혼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슬프지는 않다. 쇠퇴해가는 매체만이 마지막 순간에 방출하는 구원의 힘(벤야민)을 믿기 때문일까? [5] 『세계에 대한 믿음』은 영화를 통해 인간과 세계와 맺는 관계를 고민해 온 한 시네-페이션트의 기록이다. 이미지가 우리를 통과하는 겪음의 시간이 어떻게 사유와 행위로 전환될 수 있을지를 묻는 소박한 실험. 이 책이 독자들에게 각자의 방식으로 이미지를 겪고 말할 수 있는 영감을 제공하기를 희망한다. 시네-페이션트가 또 다른 시네-페이션트에 묻는다.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당신은 무엇을 보는 것을 겪었는가? *** [1] 조르주 디디-위베르만, 『잔존하는 이미지』, 김병선 옮김, 새물결, 2022, 270쪽. [2] Georges Didi-Huberman, 1992. Ce que nous voyons, ce qui nous regarde , Paris. Minuit, 1992. [3] 페이션시는 행위능력(agency)과 대립되는 개념으로 감수자의 위치, 경험, 힘을 포괄적으로 지칭한다. 그것은 무언가를 하는 힘이 아니라 겪는 힘이며, 겪음을 통해서 형성되는 잠재력이기도 하다. [4] 김홍중, “시대횡단의 징후학1.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중심으로”, 『사회와이론』 52, 2025. [5] 로절린드 크라우스, 『북해에서의 항해』, 김지훈 옮김, 현실문화A, 2017, 87쪽. 김홍중(사회학자) l 사회이론과 문학, 예술, 문화사회학을 전공한다. 그간 인간의 심적 활동이 어떻게 사회를 형성,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심리사회 연구를 수행해 왔다. 최근에는 21세기 생태파국에 대한 대안적 사회이론과 새로운 문화적 실천들을 탐구하고 있다. 저서로는 『마음의 사회학』(2009), 『사회학적 파상력』(2016), 『은둔기계』(2020), 『서바이벌리스트 모더니티』(2024), 『가까스로-있음: 브뤼노 라투르와 파국의 존재론』(2025)이 있다.
[사진] 김승호의 대표작 중 하나인 <혈맥>의 한 장면 ● 연극으로 시작한 3대 독자 김승호는 1918년 7월 13일 강원도 철원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났다. 농사를 했지만 경제적으로는 윤택하여 어려움을 모른 채 귀여움을 받으며 자랐다. 일설에는 그의 아버지가 승적을 가진 적이 있었다고 한다. 본인은 이에 대해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으나 “양친께서 석왕사(釋王寺)에서 불교를 신봉하셨다” (『국제영화』 1959년 10월호) 고 말한 적이 있어 뜬소문만은 아님을 시사하고 있다. 어릴 때 이 복덩이에게 붙여진 이름은 해수(海壽)였다. 그가 네 살이 되자 부모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종로 청진동에 정착한 뒤 복덕방과 전당포를 하며 사림을 꾸려 나갔으나 얼마 못가 숙박업으로 전환하였다. 해장국으로 유명한 청진옥 맞은편 서울관광호텔 옆 골목에 있었던 대흥여관이 바로 그 출발이었다. 그가 입학한 수송국민학교는 집과 가까운 곳에 있었다. 그래서 공휴일에도 조무래기 친구들과 어울려 학교 운동장에 나가 놀기를 좋아했다. 그러나 명문인 보성(普成)중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는 심한 우울증에 빠졌다. 수재들과의 경쟁이 벅차서였는지, 1년 만에 그만 두고 말았다. 그 대신 집 근처에 있는 우미관이나 낙원동의 조선극장, 수은동의 단성사 등 극장을 찾아다니며 연극과 영화 보기를 즐겨 했다. 그때 이미 ‘분바른 무대 인생’의 길을 염두에 두고 있었던 셈이다. 그는 스무 살 되던 해 봄 동양극장의 전속극단인 황금좌로 박진(朴珍)을 찾아갔다. 연출부장인 박진은 당돌하게 연극을 하게해 달라고 조르는 이 초면의 청년에게 대뜸 호떡을 좋아하느냐고 물었다. 무슨 영문인지 잘 몰랐지만 그는 사실대로 잘 먹는다고 대답했다. “그렇다면 내일부터 같이 고생을 하자”며 입단을 허용했다 .(김승호, 「나의 청춘과 예술의 편력」, 『국제영화』 1956년 3월호) 연구생 신분이었다. 그는 오래가지 않아 이 질문의 뜻을 알게 되었다. 공연지를 따라다니는 동안 정말 지겹도록 이 호떡을 먹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 당시 연극인들은 호떡으로 끼니를 때우다시피 했다. 그러나 김승호는 포기하지 않았다. 허기진 배를 참아가며 연극에 빠졌다. 선배들의 시중은 물론 단체의 잡일까지 마다하지 않았다. <전원교향악>이란 연극을 공연할 때였다. 그는 평소에 하고 싶었던 장님 역할을 맡고 있는 선배에게 떡을 사다가 권하며 아첨을 떨었다. 선배는 이런 호의가 기특했는지 주는 대로 받아먹었다. 그런데 공연 시간을 앞두고 급히 먹은 떡이 체했는지 그만 자리에 눕고 말았다. 그에게 대역의 기회가 왔음은 물론이다. 그동안 선배의 연기를 보며 익힌 보람이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이번에는 정식으로 캐스팅되었다. 그 첫 작품이 홍해성 연출의 <임자 없는 자식들>이었다. 1938년 그의 나이 스물두 살 때였다. 그 뒤 <백진주>, <아들의 심판>과 같은 연극에도 출연했다. 그러나 집에서는 이런 ‘광대 짓’을 못 마땅히 여겼다. 부모가 얼마나 완고했는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아들의 연극을 한 번도 보지 않았다. 이 무렵 동양극장 무대에 올려 크게 성공한 신파극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1936, 임선규 작, 홍해성 연출)가 영화로 만들어지게 되었다. 극장주인 홍순언이 김승호를 주연인 황철의 친구 역으로 나오게 해주었다. 그런데 현상 기사가 실수하는 바람에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황문평, 『인물로 본 연예사: 삶의 발자국 1』 ‘서민의 우상 명배우 김승호’ 도서출판 선. 1998, 334쪽) 그는 해방 후 변기종이 주도한 자유극장으로 옮겨 연기부장을 맡아 박상익, 송재로, 김신재 황정순 등과 함께 2년 여 동안 활약했다. 그 뒤 서월영, 유계선 등과 함께 극단 청탑(靑塔)을 창단하기도 했다. 김영수의 <민중전(閔中殿)>(1945)과 <망향>(1946), <선구자>(1946) 등이 이때 공연한 레퍼토리였다. [사진 ] <박서방>의 한 장면, 황정순은 오랫동안 김승호의 가장 중요한 파트너였다 ● 특유의 발성법으로 연기력 과시 김승호는 누구보다도 화려하게 한 시대를 누빈 대기만성형의 배우였다. 그가 활동한 1958년부터 1968년까지의 10년간은 한국영화 전성기와 일치되는 시기이기도 했다. 그동안 그가 이룬 업적은 명배우로서 부합될 만큼 큰 것이었다. 하지만 제작의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한 게 화근이었다. 1967년 처음 만든 <돌무지>의 흥행 성공과 제6회 대종상 최우수반공영화상 작품상 수상으로 받은 외화수입쿼터 보상에 힘입어 제작한 <영원한 모정>(원명 ‘머슴 칠복이’ 조긍하)이 실패한 뒤에도 부채를 안고 강행한 <7인의 밀사>(원제 사화산)가 그를 죽음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그는 고혈압에 시달리다가 1968년 12월1일 아침 자택에서 세수를 하다가 쓰러진 후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서른 살에 얻은 외아들(김희라)이 1년 뒤 <독짓는 늙은이>(1969, 최하원)로 영화배우의 꿈을 이룬 모습도 보지 못한 안타까운 51년의 짧은 생애였다. [사진 ] 영화 <돌무지>(1967)의 한 장면 [사진 ] 김승호의 장례식 장면 혀와 입술 사이에서 더듬듯이 굴려 내는 독특한 발성법과 안면을 수축시키며 만들어내는 표정 연기는 김승호 연기의 특징이었다. <박서방>, <마부>, <혈맥> 등의 경우처럼 탁월한 연기력으로 어려운 현실에도 순응하며 살아가는 서민의 정서와 애환을 적절히 녹여내는가 하면, <시집가는 날>, <인생차압>, <로맨스그레이> 등에서 볼 수 있었듯이 ‘능청스런 익살’ 연기로 관심을 끌었다. 반면에 한 가장이 화목한 가정을 깬 죄책감으로 고행의 길을 걸어간 <육체의 길>(1959, 조긍하)에서는 오버액션이라는 지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의 연기는 단연 고진감래(苦盡甘來)의 서민 역할에서 빛났다.
인간은 너무 빨리 성인이 된다. 세상에 태어나 겨우 20년만 살면 어른이다. 만 19세에 이르면 보호자나 대리인의 동의 없이 자의적으로 뭔가를 해도 괜찮은 법률적 나이로서 ‘성년’에 도달한다. 나는 이룬다는 뜻의 한자 ‘성(成)’이 신경 쓰인다. 내 생각에 인간은 죽을 때까지 영영 ‘성인’은 안 되는 것 같다. 어른과 어린이의 차이점은 거짓말을 할 때 어른이 더 뻔뻔하다는 것뿐이다. 어린이는 상대를 순간적으로 속이는데 급급하나, 어른은 자기 자신부터 영영 속인다. 또 성인은 미성년자에 비하여 욕구의 실행에 있어 좀 더 사회지향적인 눈치를 본다.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서는 훨씬 더 엉망진창이라는 뜻이다. 30살이 넘은 인간의 말은 함부로 믿지 말라고 한다. 서른이 넘어도 전혀 어른이 아닌데, 고쳐 쓸 수 없는 속물이 되는 건 확실한 모양이다. 그나마 이 기준선의 나이도 갈수록 더 어려진다. 어른이나 성인 말고 다른 단어가 필요하다. 속물을 대신 쓰기엔 좀 그렇다. ‘물(物)’은 인간이 아니라 물건을 가리킨다. 만 17세 고교생 주리( 김혜준 )는 아빠 대원( 김윤석 )의 뒤를 밟아 그가 지금 요릿집 사장과 불륜 진행 중인 사실을 확인한다. 같은 학교의 윤아( 박세진 ) 역시 엄마 미희( 김소진 )가 외간 남자와 연애질에 빠졌음을 알고 있고 주리를 옥상으로 불러내 최신 정보를 더해준다. “어떻게 모르냐? 배가 불러오는데.” 이때 주리 엄마 영주( 염정아 )의 전화가 걸려오자 윤아는 “아줌마 남편이 우리 엄마랑 바람났고 엄마는 임신했다”고 신속, 정확하게 알려준다. 엄마 모르게 아빠의 불륜을 없었던 일로 만들 생각이었던 주리는 당혹해서 윤아에게 앙앙대며 따지고, 윤아는 느닷없이 주리에게 입을 맞춘 다음 ‘없던 일로 하면 되는 건 세상에 없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우쳐 준다. 여기까지가 시작한지 10분이 채 되지 않은 지점이고, 영화는 구구절절하여 구질구질한 치정극으로 전개하지 않는 미덕을 스스로 예고한다. 서로를 가리켜 사이좋게 “미친년”을 주고받은 두 소녀는 이후 문제의 사생아가 막상 태어나자 실제로 사이가 좋아지기 시작한다. 시나리오를 쓰다 보면 현대 인물들이 매 상황마다 망할 휴대폰 없이는 존립이 안 되어 개인적으로 괴롭다. 인간이 네모난 직사각형 물체를 들여다보고 문자를 입력하고 귀에 대고 떠드는 장면을 커다란 스크린으로 그만 보고 싶은 마음마저 든다. 그런데 이 영화는 전화기에 입력된 서로의 호칭을 보는 깨알 같은 재미가 있다. 윤아가 들여다본 미희의 폰에서 대원은 ‘마지막 사랑’이지만, 대원의 폰에서 미희는 ‘덕향(오리) 김사장’이다. 입원한 미희를 보러 간 병원에서 대원은 ‘예쁜 딸 주리’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대원을 발견한 주리는 “아빠!”하고 부르고, 윤아는 “저 사람이야?” 묻는다. 딸을 보자 황망히 도망치는 대원은 자신을 “아빠, 아빠” 부르며 쫓아오던 낯선 (남의) 딸 윤아를 보자 “누구니 너?”라고 당황해서 묻는다. 윤아는 엄마 병원비를 영주에게 갚을 생각으로 오랫동안 봉인했을 존재를 엄마의 폰에서 검색한다. ‘ㅂㅅ’를 누르자(나는 이게 나쁜 말로 그것처럼 느껴졌다) ‘박서방’이 뜬다. 미희는 더 이상 내 남편도 아니고 내 딸의 아버지도 아닌 지긋지긋한 존재의 이름을 그녀의 부모측이 불렀을 ‘박서방’으로 저장해놓았다. 윤아의 나이도 모르고 아마 분명히 이름도 모를 친아빠는 실제로 ‘ㅂㅅ’이었다. 현 시대의 관객은 불륜을 저지른 중년 남자의 내면 따위 혐오스러울 뿐 깊이 알고자 할 관심이 없을 것이고, 영화는 그가 전면에 나서는 것을 영리하게 차단했다. 네 여자의 상황을 고통스럽게 만든 것만으로 남자가 끼친 영향은 충분히 드러났고, 대원의 캐릭터는 그저 대책 없이 허우적거림으로서 극에서 제 몫을 다 한다. 잘못했다고 비는 남편에게 “성욕이야, 사랑이야?” 냉정하게 묻는 영주는 성당의 신부 앞에서 울며 고해하며 “내가 미워하는 사람들이 정말 나쁜 인간”이기를, 일찍 태어나고만 사생아가 아픈 것이 “하느님이 내린 천벌”이기를 바란다. 그리고 ‘천벌’은 불가해한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 영화에는 잘 만든 데우스엑스마키나가 있다. 아마도 유전적 가능성마저 집요하게 고려했을 캐스팅은 극중 엄마와 딸들이 실제로 비슷한 외모로 보여서 영화를 더 그럴듯한 이야기로 느껴지게 만들었다. 주역 배우들의 훌륭한 연기는 물론이고, 선생 김희원 , 박서방 이희준 , 방파제의 이상한 아줌마 이정은 , 병실에서 남의 사생활을 관전하던 모녀 엄혜란 과 정이랑까지 단역일지언정 저마다 출연한 씬을 제대로 챙겨간다. 먼저 중견 배우로서 연기를 너무 잘 아는 감독의 어떤 배려를 짐작케 한다. 나는 한국영화사상 가장 무자비한 남성의 이미지를 가진 배우가 이토록 산뜻한 영화를 만들 거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영화 마지막에서 두 소녀가 60, 70년대 일본 야쿠자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애도의 방식을 보여주어도 그것이 충격적이거나 거북하지 않았다. 영화는 산뜻하나, 그렇게 느껴지게끔 적정선을 뽑아낸 연기 연출이 다만 무서웠다. 나중에 감독의 인터뷰에서 그가 어린 두 배우에게 했다는 말이 오래 기억에 남는다. “너희가 사랑받으려고 애쓰지 마라,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면 애쓰는 모습을 들키지 마라.” 나는 이 문장이 영화 <미성년>의 주제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