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메랄드
- 감독
- 앤드로 마톤
- 제작년도
- 1954
- 출연
- 스튜어트 그랜저, 그레이스 켈리, 폴 더글라스, 존 에릭슨
< 놉 >을 처음 봤을 때 선명한 지향점을 지녔음에도 부분적으로 불투명한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던 필의 전작인 < 어스 >(2019)처럼 구조의 뼈대가 매우 앙상하여, 숭숭 뚫린 구멍과 같은 알레고리가 여러 의미를 불러들이는 형태가 아닌, ‘영화’와 스펙터클이라는 분명하고 직선적인 길을 따라가다 여러 갈래의 분기점으로 갈라진 후, 분명 가려고 했던 목적지에는 도착했지만, 어느 것이 중심 도로였는지 잃어버리게 되는 영화 말이다. 때문에 갈림길 없이 메시지의 대로를 따라 장르가 지닌 속도와 감응하며 시너지를 내었던 < 겟 아웃 >(2017)과 비교하면 <놉>은 장르적으로도 어느 정도 불투명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선명한 듯 불투명하게 보이는 알레고리와 장르적 애매함에도 불구하고 <놉>에는 분명 기이한 매혹이 존재한다. 아니, 오히려 선명하게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상황이 매혹을 만든다 말하고 싶다. 똑똑히 눈으로 보았지만 구름과 언덕 사이를 유영하여 완전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UAP(미확인 항공 현상)를, 보았다고 믿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카메라라는 기계장치로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처럼 말이다. 당연히 <놉>을 향한 많은 해석과 이 글 또한 이러한 욕망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에메랄드(키키 파머)가 일명 오프라 쇼트라고 언급한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두려움을 안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처럼 이미지를 바라보고 해석하고자 하는 욕망을 따라 <놉>에 관해 간단히 이야기해보자. 영화를 두 번째 감상했을 때 하나의 의미로 깔끔하게 정리하기 힘든 두 요소가 마치 카메라와 피사체처럼 마주 보며 반복적으로 얽혀 있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카메라와 피사체라는 비유는 비유일 뿐 아니라 직접적인 소재로 등장하는 만큼 <놉>을 ‘영화’에 관한 영화로 이해하는 것은 자연스럽게 느껴진다. 그러면 영화의 오프닝에서부터 등장하는 ‘고디가 왔다’ 에피소드를 통해 피사체와 카메라의 권력 관계에 관한 이야기부터 생각해 볼 수 있다. 마치 관음의 대상이던 살인사건의 피해자가 스크린과 카메라 뒤편의 내가 될 수 있다고 말하는 < 이창 >(1954)처럼, 카메라 뒤편에 선 제프리(제임스 스튜어드)와 카메라의 피사체가 되는 쏜월드를 완전히 분리시켜 카메라-피사체의 권력 관계를 도식적으로 구조화하는 영화 말이다. <놉>은 당연히 <이창>처럼 딱 떨어지는 구조를 지닌 영화는 아니다. 쏜월드와 달리 진 재킷은 피사체이면서 동시에 카메라이기 때문이다. 진 재킷의 입/눈은 직관적으로 카메라를 유추할 수 있게 시각화되어 있으며 먹이를 먹기 직전에 내는 효과음 또한 셔터의 사운드와 닮았다. 그렇기에 <놉>의 진 재킷과 에메랄드와의 관계는 거울처럼 서로를 비추는 카메라이자 피사체면서 주프(스티븐 연)의 테마파크처럼 서부 총잡이들 간의 대결 구도와 같다. 대신 서로 한 방을 맞는 순간 끝이 나는 저격수들의 싸움이다. 촬영되는 순간, 찍히는 순간 죽는 것이다. 그렇기에 <놉>은 ‘영화’에 관한 영화처럼 보이지만 시선의 권력만으로 선명하게 의미화되지 않으며 피사체/카메라라는 이중 정체성으로 마주 보는 복합적 형태를 이룬다. 한쪽에만 카메라가 지닌 권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양쪽 모두 서로를 찍으려 하는 대결 구도는 자연스럽게 영화에서 스펙터클을 바라보는 시선으로 이어진다. <놉>에서 스펙터클을 다룰 때 중요한 지점은 <이창>이 지닌 관음의 구조가 아니라, 볼거리를 볼 수밖에 없는 본능 그 자체에 있다. 물론 주프가 어린 시절 겪었던 1998년 ‘고디가 왔다’ 생일 파티 에피소드는 피사체에 대한 존중 없는 스펙터클에 대한 경고로 읽힌다. 또한, 보면 안 된다(Nope)는 장르적 조건과 영화의 제목은 스펙터클에 맹목적으로 이끌리는 관객과 사회에 대한 비판처럼 보인다. 하지만 유사-고디라고 할 수 있는 진 재킷이 UAP가 아니라 동물이자 괴물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고 난 중반부 이후에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두 명의 사람이 사망한 참사에서 살아남은 주프는 고디-진 재킷으로 은유 되는 스펙터클에 대한 두려움이 아닌 매혹을 느낀다. 또한, 보면 죽는다는 조건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한 동물적 두려움에 의한 것이든 시선을 사로잡는 시각적 매혹에 의한 것이든, 진 재킷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때문에 보면 잡아먹힌다는 조건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 수밖에 없다는 스펙터클의 매혹을 강조하는 장치로서 스펙터클을 소비하는 행위에 관한 비판적 은유를 넘어선다. 부분적으로 아이맥스로 촬영된 영화와 진 재킷의 본 모습이 발산하는 거대하고 매혹적 자태가 그것을 증명한다. 이처럼 <놉>은 스펙터클에 대한 경고이면서 찬사이기도 한 모순적 상태를 카메라이자 피사체인 진 재킷과 피사체인 OJ(대니얼 칼루야)와 촬영자인 에메랄드 두 명의 주인공으로 구조화하고 있다. 주요인물인 OJ와 에메랄드가 각각 피사체와 카메라라는 것은 단순히 비유적 과장이 아니다. OJ는 전반부에서 많은 사람 앞에 서서 시선의 대상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던 인물이었지만 동생을 구하기 위해 카메라-진 재킷 앞에 서는 것으로 쇼맨(피사체)으로서의 정체성을 받아들이며, 에메랄드는 말-진 재킷을 갖지 못했던 과거를 괴물-진 재킷의 사진이라는 이미지 획득하며 촬영자로서의 정체성을 깨달으며 극복한다. 이 중 영화의 결말에 이르러 진정한 주인공이 되어 사건을 해결하는 것은 촬영자인 에메랄드이다. 이는 스펙터클에 관한 찬사가 비판을 넘어섰다고 말한 것처럼 <놉>에서 나타나는 양가적 구도 중 핵심이 되는 것은 피사체가 아닌 카메라이며, 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볼 수밖에 없다는 본능과 스펙터클을 촬영해서 이미지로 소유하고자 하는, 증명하고자 하는 욕망에 있음을 방증한다. 주프 또한 ‘고디가 왔다’의 참사를 겪으면서 자신이 봤다고 믿는 놀라운 광경을 단순히 마음속에 간직하는 것이 아니라 재현하여 소유하고 증명하려 한다. 당연히 타인의 죽음과 비극을 일종의 스펙터클로 만드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그도 알고 있다. 사무실 속 비밀의 방에 숨겨 놓았기 때문이다. 하지 않아야 하는 전시와 쇼를 알면서 비밀스럽게 행하는 주프처럼, <놉> 역시 할리우드와 쇼 비즈니스, 황색언론 그리고 그것들을 소비하는 인간을 풍자하고 비판하지만 동시에 시선을 사로잡는 대상을 이미지로 재현하고, 쇼로 재구성하며, 스펙터클로 만드는 고전적 구조와 장르적 쾌감을 재생산한다. 많은 이들이 주프와 OJ를 비교하며 이미지와 피사체에 관한 존중의 유무를 두고 둘의 차이에 주목하지만, 사실 통제 되지 못한 스펙터클로 발생한 참사라는 점에서 ‘고디가 왔다’의 사건과 진 재킷과의 마지막 결투에는 아무런 차이가 없다. 고디, 진 재킷과 교감하고 있다고 믿는 주프와 눈을 마주치면 공격한다는 동물의 습성을 파악한 것만으로 진 재킷을 통제할 수 있다고 믿는 OJ는 크게 다르지 않으며, 주프가 진 재킷을 비밀스러운 쇼를 통해 스펙터클로 소비한 것처럼 에메랄드 또한 진 재킷을 오프라 쇼트라는 상업적 이미지로 포착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결국, 같은 이야기를 반복하며 <놉>에서 말하려는 스펙터클이란 통제 되지 못했을 때 참사가 발생하는 불안정하고 위험천만한 이미지가 아니라, 반대로 통제되지 않아야 볼거리가 발생하고 갈등과 사건이 증폭되는 큰 그림 안에 놓인 하나의 대상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주인공이 해결함으로써 큰 그림의 쇼가 마무리된다. 그것이 통제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나쁜 기적(Bad Miracle)을 필수적으로 요구하며, 시선을 사로잡는 대상을 이미지로 재현하고, 재구성하여, 스펙터클로 만드는 ‘영화’라는 쇼의 구조이다. <놉>의 진정으로 탁월한 지점은 이와 같은 ‘영화’와 인간의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본질을 직접적이고 도식적으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장르라는 외피 안에 자연스럽게 배치했다는 것에 있다. 아니 반대로 ‘영화’라는 은유적 외피를 두르고 벌이는 기이한 장르 영화라는 것 때문에 매혹이 발생한다. 예컨대 진 재킷의 자기장에 의해 디지털 카메라에서 원시적 카메라로 퇴행하는 촬영 방식은 인물들의 목적이 쉽게 성취되지 못하게 하는 장치이자 액션 시퀀스의 긴장감을 만들기 위한 장르적 제한이면서, 일명 오프라 쇼트라 불리는 결정적 이미지를 소유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촬영 과정의 매혹을 고전적 틀 안에서 직관적으로 담아낸다. 이처럼 쇼트(Shot)가 총을 쏜다는 행위와 카메라로 찍는다는 행위를 동시에 의미하는 것을 활용했을 때의 비유 자체는 진부하지만, 게걸스럽게 먹이를 찾아 탐닉하는 진 재킷이라는 스펙터클/카메라가 볼거리와 위협을 동시에 만들어 스펙터클-이미지를 소유하고 싶어 하면서 이미지의 대상으로 서고 싶은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을 양면적으로 비추며 진부함과 도식성을 넘어선다. 그리고 그 본성이 죽음으로 이끌 수도 있다는 경고를 장르적 즐거움 안에 놓으면서 스펙터클의, 촬영한다는 것의, ‘영화’ 자체의 비윤리적 본질과 매혹을 모순적이고 기묘한 감흥 안에서 감각하게 한다. <놉>의 이러한 기묘한 감각은, 실제 말이든 말을 모사한 모형이든 구분하지 않고 모두 빨아들였다 내뱉는 진 재킷처럼, ‘영화’라는 시각 예술이 움직이는 대상을 이미지화 할 수 있게 된 이후에 획득한 의미망들을 수집광처럼 모아 광범위하게 발산시킨다. 그 과도함이 의미적으로 혹은 장르적으로 영화를 불투명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이미지를 완전히 컨트롤하지 못하여 찾아오는 위기가 영화라는 쇼 안에 포함된 하나의 과정인 것처럼, 결말에 이르러 과도하게 펼쳐진 의미망들을, 또 하나의 모순적이고 양가적인 이미지의 마주 봄으로 탁월하게 ‘영화’의 본질로 수렴시킨다. 그 본질이란 영화에서 끊임없이 반복되었던 카메라/피사체의 구도와 같이 두 개의 쇼트가 거울처럼 마주하는 엔딩에 있다. <놉>의 마지막 두 쇼트는, 영화 내적으로 카메라로 포착된 실재지만 영화 외적으로는 컴퓨터 그래픽의 환영일 뿐인 진 재킷의 사진과, 영화 내적으로는 에메랄드의 눈으로 포착된 ‘저 너머(OUT YONDER)’라는 죽음과 삶 사이의 환영적 이미지면서 영화 외적으로는 인간이 연기했음이 분명한 실재의 마주 봄이다. 이 엔딩은 오프닝 크레딧 위로 영사 됐던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의 <The Horse in Motion>(1878)처럼 ‘영화’란 실제 운동을 여러 장의 사진으로 재현한 것이며, 완전한 환영도 실재도 아닌 모호한 이미지임을 아이러니를 통해 꿰뚫는다. 그리고 마이브리지의 영상에서의 흑인 기수가 <놉>의 OJ로 재생산된 것처럼, 인간의 욕망과 두려움이 끊임없이 스펙터클을, 나쁜 기적(Bad Miracle)을, 영화를 필요로 할 것임을 나타낸다. 그것이 아무리 더럽고 위험한 즐거움이라 하더라도 인간과 ‘영화’가 무언가를 본다는 시각적 유사성을 공유하기에 맞이하는 저주이자 축복인 운명이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장면과 <놉>은 동양인 주프가 만든 서부극-테마파크에 서부 영웅이 되어 서 있는 흑인 O.J라는 결말처럼, 눈과 카메라, 인간과 ‘영화’의 핵심을 유머와 아이러니로 정확히 명중시키는 조던 필 다운 탁월한 오프라 숏이라 할만하다.
‘트렁크 소설(trunk novel)’이라는 말이 있다. 작가가 생전에 발표하지 않고 묵혀 두었던 원고를 사후에 책으로 펴내는 경우, 또는 작가가 묵혀두었던 원고를 모종의 사유로 출판사가 요청하여 생전에 책으로 펴내는 경우를 가리키는 말이다. 실존 인물의 명예를 훼손할 우려가 있거나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다루었기 때문에 발표하지 못한 것이 아니라면 대개는 작가의 작품 목록에서 B급으로 여겨지는 작품이다. 그런데 그 작가가 아직 살아서 왕성하게 활동하는(심지어 살아서 이미 전설이 되어 버린) ‘호러의 제왕’ 스티븐 킹이라면 어떨까? 10년 전 기준으로 이미 전 세계에서 3억 부가 넘게 팔린 책들을 써온 작가 스티븐 킹이 무려 33년에 걸쳐 완성한 7부작 판타지 소설이라면? 그가 베스트셀러를 숱하게 발표하는 와중에도 틈만 나면 책상 앞으로 돌아와 마침내 완성한, 그리하여 일생의 역작이라고 자부하는 대하 판타지 시리즈라면? 그렇다면 뭔가 있지 않을까? 그 질문의 답이 바로 이제부터 소개할 ‘다크 타워 The Dark Tower’ 시리즈다. < 석양의 무법자 >(1965)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시리즈의 2부인 「세 개의 문 The Drawing of the Three」에서 스티븐 킹이 밝힌 바에 따르면 다크 타워 시리즈는 로버트 브라우닝의 서사시 「롤랜드 공자 암흑의 탑에 이르다 Childe Roland to the Dark Tower Came」에서 시작됐다. 메인 주립 대학교 영문과 2학년이던 1967년, 킹은 전공 강의에서 그 시를 읽고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브라우닝이 쓴 가장 난해한 작품으로 꼽히는 이 시는 롤랜드라는 주인공이 어딘지 알 수 없는 황량한 대지를 지나 암흑의 탑에 이르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킹은 암울하고 스산한 상징으로 가득한 이 시를 너무나 감명 깊게 읽은 나머지 주인공 롤랜드의 여정을 언젠가 판타지 소설로 쓰고 싶다는 열망을 품게 되었다. 그로부터 3년 후인 1970년, 킹은 우연히 보러 간 영화 한 편에서 주인공 롤랜드의 모델을 발견하게 되는데…… 그 영화는, 하필이면, 세르지오 레오네 감독의 <석양의 무법자 Per qualche dollaro in piu>(1965)였다. 영화를 채 절반도 보기 전에 킹은 다음과 같이 깨달았다고 한다. “내가 쓰고 싶은 소설은 톨킨풍의 원정과 마법을 담은 이야기이되, 배경은 레오네 풍의 터무니없을 만큼 장대한 서부여야만 했다.” 그리고 물론 주인공 롤랜드는 “물 빠진 리바이스 청바지 같은 연청색 눈, 차갑고, 예리하고, 한 치의 오차도 용납하지 않는 조준경 같은 폭격수의 눈”을 지닌 클린트 이스트우드여야 했다. 이로써 킹은 세 가지 목표를 설정하고 다크 타워 시리즈를 쓰기 시작하는데, 그 목표란 다음과 같다. 1) <석양의 무법자>처럼 장대한 서부의 풍광을 배경으로 2)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닮은 총잡이를 주인공으로 삼아 3) 그냥 긴 책이 아니라 역사상 가장 긴 대중소설을 쓴다. 1)과 2)는 그렇다 쳐도 어쩌다가 3) 같은 목표를 세울 마음이 들었냐는 물음에 킹은 시리즈의 ‘여는 글’에서 이렇게 답한다. “그때는 그게 좋은 생각 같았거든요.” 3)은 (다행히도)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아예 실패했다고 보기는 힘들다. 이미 한국어판으로 출간된 5부까지의 분량만 해도 200자 원고지로 15,000 쪽이 넘는 데다, 출간을 기다리는 6부와 7부 및 시리즈의 외전 격에 해당하는 「열쇠 구멍으로 부는 바람 The Wind Through the Keyhole」의 분량을 합치면 무려 8,000쪽이 넘기 때문이다(6부와 7부의 한국어판은 내년에 나올 예정이다). 스티븐 킹이 1970년에 타자기로 친 문장 한 줄, 즉 “검은 옷의 남자는 사막을 가로질러 달아났고, 총잡이는 그 뒤를 쫓았다.”에서 시작하여 200자 원고지 24,000매에 이르는 대하 판타지 소설로 완성된 다크 타워 시리즈를 단선적으로 설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이 글에서는 중학교 1학년 수학 교과서 ‘순서쌍과 좌표’ 단원의 핵심 개념인 엑스축과 와이축을 이용하여 시리즈 전체의 얼개를 살펴보기로 한다. 다크 타워 시리즈 다크 타워 시리즈의 줄거리를 뭉뚱그려 요약하면 ‘가상의 세계에 사는 총잡이 롤랜드가 현실 세계의 인물들을 자기 세계로 끌어들여 파티를 구성한 다음, 모든 세계의 중심축인 암흑의 탑을 파괴하려는 크림슨 킹에 맞서 싸우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이때 각각의 인물들이 합류하는 과정을 엑스축이라고 하면, 이 축은 미국 환상 문학의 금자탑인 「오즈의 마법사」의 거울상이라고 할 수 있다.(「오즈의 마법사」와 반대로 현실 세계의 인물들이 가상 세계의 총잡이에게 납치당하다시피 합류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먼저 주인공인 총잡이 롤랜드 디셰인이 어떤 인물인지부터 알아보자. 롤랜드가 사는 세계는 우리가 사는 현실 세계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변질된’ 세계다. 폐허가 된 주유소나 수도 펌프, 모노레일 열차 같은 문명의 이기들이 뜨문뜨문 남아 있기는 하지만, 종이가 금처럼 귀하고 총은 그보다 더욱 귀한 세계인 것이다. 이 세계에서 총을 사용하여 질서를 유지하는 총잡이는 아서 왕 이야기의 기사와 같은 존재이고 그런 총잡이를 돕는 것은 마법사들의 일이다. 총잡이 가문의 후계자인 롤랜드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도시국가 길르앗의 군주가 될 운명이었지만, 마법사 마튼이 아버지를 배반하고 반역에 가담하면서 나라를 잃고 떠도는 신세가 된다. 그는 마튼이 변신한 인물로 추정되는 ‘검은 옷의 남자’ 월터를 쫓아 광대한 사막과 산맥을 지나 갖가지 사건에 휘말리면서 서쪽 바닷가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월터와 기나긴 대화를 나눈다(여기까지가 1부 「최후의 총잡이 The Gunslinger」의 내용이다). 독자들은 시리즈의 서장 격인 1부를 읽으면서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를 연발하다가 2부 「세 개의 문」으로 넘어가게 되는데, 본격적인 이야기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1부의 결말에서 검은 옷의 남자는 타로 카드로 총잡이의 미래를 점치며 ‘뱃사람’과 ‘사로잡힌 남자’, ‘그늘 속의 여인’, ‘죽음’, ‘탑’이 그려진 카드를 보여준다. 이 카드의 상징들이 바로 총잡이가 앞으로 만날 인연들인 것이다. 2부 첫머리에서 가재 괴물 떼에게 습격당해 총잡이의 생명이나 다름없는 오른손 손가락을 두 개나 잃어버린 롤랜드는 바닷가 백사장에 서 있는 수수께끼의 문을 통해 현실 세계로 건너가고, 뉴욕에 사는 에디 딘과 오데타 홈스를 자기 세계로 데려간다. 3부 「황무지 The Waste Lands」에서는 에디와 오데타, 롤랜드가 힘을 합쳐 뉴욕에 사는 소년 제이크를 불러낸다. 롤랜드와 함께 운명 공동체인 ‘카텟’을 결성한 세 사람의 면면은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와 함께 위대하고 무서운 마법사 오즈를 찾아가는 양철 나무꾼과 겁쟁이 사자와 허수아비만큼이나 범상치 않다. 1980년대의 마약 중독자 에디는 형을 인질로 잡은 마피아에게 협박을 당하여 바하마에서 뉴욕까지 헤로인을 운반하는 와중에 비행기에서 롤랜드를 만난다. 1960년대의 오데타는 흑인 민권 운동에 헌신하는 부유한 지식인 여성이지만, 지하철에 다리가 잘리는 사고를 당한 이후 조현병을 앓으며 ‘데타’라는 난폭한 인격을 숨기고 있다. 1970년대의 제이크는 전형적인 중산층 콩가루 집안의 외아들로 등굣길에 검은 옷의 남자 월터에게 떠밀려 차에 치여 숨을 거두면서 롤랜드의 세계로 건너가는데, 이곳에서 검은 옷의 남자를 쫓으려는 롤랜드의 욕심 때문에 또 한 번 죽음을 맞고(1부) 다시 한번 부활한다(3부). 「오즈의 마법사」에서 도로시의 동료들은 두뇌와 마음과 용기를 얻고자 마법사가 있는 에메랄드 시를 찾아 노란 벽돌 길을 따라 희망찬 모험에 나서지만, 「다크 타워」에서 롤랜드의 동료들은 자기가 왜 끌려왔는지도 모르는 세계에서 집에 돌아가기 위해 탑을 찾아 ‘빔(beam)의 길’을 따라 무시무시한 모험을 거듭한다(물론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는 보장은 전혀 없다.) 도로시 일행에 강아지 토토가 있었듯이 롤랜드 카텟에는 개와 너구리를 합친 것처럼 생긴 개너구리 ‘오이’가 함께한다. 스티븐 킹 멀티버스 시리즈의 4부 「마법사와 수정 구슬 Wizard and Glass」까지 거울에 비친 「오즈의 마법사」를 엑스축으로 삼아 진행되던 이야기는 5부 「칼라의 늑대들 Wolves of the Calla」에 이르러 또 하나의 축을 따라 상승 곡선을 그리게 되는데 이 와이축은 다름 아닌 ‘스티븐 킹 멀티버스(multiverse)’, 즉 킹이 쓴 여러 소설의 시공간과 등장인물들로 구성된 ‘다중 우주’다. 사실 스티븐 킹 멀티버스는 시리즈의 4부 「마법사와 수정 구슬」에서 이미 그 모습을 드러낸 바 있다. 폭주 모노레일 블레인을 상대로 수수께끼 대결을 벌여 승리한 롤랜드 카텟은 캔자스주 토피카에 도착하는데, 이곳은 킹의 다른 소설 「스탠드」에서 인류를 절멸의 위기에 몰아넣은 슈퍼 독감이 휩쓸고 지나간 현실 세계의 캔자스였다. 시리즈의 5부 「칼라의 늑대들」에서는 롤랜드 카텟에 새로운 동료가 합류한다. 현실 세계의 미국 뉴욕에서 온 그 동료의 이름은 도널드 캘러핸, 바로 킹의 소설 「살렘스 롯」에서 흡혈귀의 피를 마시고 신앙을 저버린 가톨릭 신부다. 「칼라의 늑대들」의 절반가량은 캘러핸이 살렘스 롯을 떠난 이후 미국 전역을 방랑하던 시절의 이야기로, 우리는 그의 사연을 통해 현실 세계에 수많은 ‘비밀 고속도로’가 있으며 이 길이 여러 다중 우주로 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이때 캘러핸의 뒤를 쫓는 크림슨 킹의 부하들은 「내 영혼의 아틀란티스」에 등장하는 ‘노란 코트를 입은 사내들’이다(크림슨 킹이라는 존재 자체는 킹이 1994년에 발표한 「불면증」에 처음 등장한다). 「칼라의 늑대들」의 결말 부분에서 캘러핸은 자신이 「살렘스 롯」이라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인 것을 발견하고 경악하는데, 아직 한국어판이 나오지 않은 6부 「수재나의 노래 Song of Susannah」에서는 아예 스티븐 킹 본인이 메인주에 사는 소설가로 작품 속에 직접 등장하면서 이야기는 메타 픽션의 성격을 띠게 된다. 또한 시리즈의 대단원인 7부 「암흑의 탑 The Dark Tower」에서는 (역시 올해 영화화되어 개봉을 기다리는) 킹의 소설 「그것」에 나오는 ‘거북이’가 중요한 역할로 등장하여 마침내 다중 우주의 비밀이 밝혀진다. < 다크 타워 >(2017)의 이드리스 엘바 이처럼 스티븐 킹의 작품 세계 전체를 망라하는 판타지 시리즈를 영화계에서 가만둘 리가 없다. 할리우드에서는 오래전부터 다크 타워 시리즈에 눈독을 들였고,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7년에 마침내 감독이자 제작자인 J. J. 에이브럼스와 아키바 골즈먼이 영화화 계획을 발표하여 화제를 모았다. 그러나 2008년에 에이브럼스가 손을 뗀다고 발표한 이후 다크 타워 영화화 프로젝트는 한동안 표류했고, 2010년 론 하워드 감독이 유니버설 픽처스에서 다시 추진한다는 발표가 나왔다. 하워드 감독은 심지어 영화 3부작과 드라마 2시즌을 함께 제작하여 ‘영화-드라마-영화-드라마-영화’의 순서로 시리즈 전체를 영상화하겠다는 야심 찬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포부가 너무 야심 찼던 걸까. 이듬해인 2011년에 유니버설 픽처스는 프로젝트를 포기한다고 공식 발표했고, 영화화 판권은 다시 워너브러더스로 넘어갔다. 워너브러더스는 러셀 크로를 주인공으로 캐스팅해 영화화를 추진했지만 이듬해인 2012년에 역시 프로젝트를 포기했다. 그로부터 한동안 소식이 없었던 영화화 프로젝트를 2015년에 소니 픽처스와 MRC가 다시 재개한다고 발표하더니, 이번에는 정말로 영화로 만들고 말았다. 연출은 < 미결처리반 Q > 시리즈의 각본가 출신으로 < 로얄 어페어 >를 연출하여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 올린 덴마크의 니콜라이 아셀 감독이 맡았고 주인공 롤랜드 역은 이드리스 엘바가, 검은 옷의 남자 역은 매슈 매코너헤이가 맡았다. 미국에서는 이미 개봉해서 박스오피스 1위를 기록한 이 영화는 우리나라에서는 8월 23일에 <다크 타워: 희망의 탑>이라는 제목으로 개봉될 예정이다(영화판 한국어 제목의 부제가 암흑의 탑(dark tower)이 아니라 ‘희망의 탑’이 된 까닭은 아마도 흥행을 간절히 바라는 수입사의 희망이……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모델로 창조한 총잡이 롤랜드 역을 어째서 이드리스 엘바가 맡았을까 하는 의문의 답은 아마도 다음의 한 줄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한다. “그때는 1967년이었고 지금은 2017년이므로.” 우여곡절 끝에 영화화되기는 했지만, 이 한 편으로 다크 타워 시리즈의 전모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물론 책을 읽으면 자세히 알 수 있다). 이번 영화의 흥행 성적에 따라 후속편의 제작 여부가 결정될 것이기 때문이다. 3부작 영화와 2시즌 드라마로 예정된 다크 타워 영상화 프로젝트는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스스로의 의지 때문이든 아니든 만나는 모든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건드리는 모든 대상을 파괴하며 살아온 주인공이 자신과 세계의 운명을 거머쥔 암흑의 탑에 이르기까지, 그리하여 그 탑의 꼭대기에 무엇이 있을지(또는 없을지) 밝혀지기까지는 적잖은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으로서는 스티븐 킹이 2부 「세 개의 문」의 닫는 글에 적은 한마디를 되뇌며 기다릴 때다. “그리고 탑은 더욱 가까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