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레종
- 감독
- 홍성기
- 제작년도
- 1961
- 출연
- 최무룡, 김지미, 조미령, 김진규, 김승호, 최남현, 최승이, 전택이, 김칠성, 장동휘, 주선태, 윤일봉, 변기종, 맹만식, 하지만, 최성, 이해룡, 독고성, 조석근, 전계현, 김동원, 이대엽, 유계선, 김현주, 김명란, 김옥경, 조현주, 정연자, 정철, 유춘, 박민호, 구종석, 이창식, 이영, 전예출, 강철, 전양도, 박세용, 곽태용, 박순봉
불량소녀 역할로 변신 시도 이후 조미령은 <자유결혼>(이병일, 1958), <여사장>(한형모, 1959), <십대의 반항>(김기영, 1959), <장마루촌의 이발사>(최훈, 1959), <이름 없는 별들>(김강윤, 1959), <이별의 종착역>(박영환, 1960), <박서방>(강대진, 1960), <지상의 비극>(박종호, 1960), <마부>(강대진, 1961), <에밀레종>(홍성기, 1961), <골목안 풍경>(박종호, 1962), <견습부부>(이봉래, 1962), <원효대사>(장일호, 1962), <인목대비>(안현철, 1962), <아빠 안녕>(최훈, 1963), <로맨스가족>(최영철, 1963), <혈맥>(김수용, 1963), <신식할머니>(백호빈, 1964), <홀어머니>(홍은원, 1964) <비무장지대>(박상호, 1965), <주홍 스카트>(이봉래, 1965), <사랑보다 강한 것>(이규웅, 1966), <나운규의 일생>(최무룡, 1966), <역마>(김강윤, 1967), <안방마님>(고영남, 1967), <로맨스 마마>(최인현, 1968), <몽땅 드릴까요>(유현목,1968), <춘원 이광수>(최인현, 1969), <두 아들 2>(조문진, 1981) 등에 출연했다. [사진] <신식 할머니>(백호빈, 1964)에서 조미령 <아들의 심판>(1960, 안현철)에서는 기생(황정순)의 딸로, <원효대사>(62, 장일호)에서는 원효(최무룡)를 따르는 아사다로, <에밀레종>에서는 명종의 완성을 기원하며 백일기도를 드리는 참마루(김진규)의 아내로 출연했다. 그러나 그녀는 <십대의 반항>(1959)을 전후하여 배역의 변화를 꾀한다. 숏커트의 헤어스타일로 건달과 사귀는 뒷골목의 불량소녀(필녀)에서 영문 주간지 『타임』을 읽고 가족들에게 성문제를 스스럼없이 말하는 <신식 할머니>(1963)의 노인으로, ‘여존남비’를 앞세워 전통적인 삶을 거부하는 여성잡지의 독신 <여사장>(1959) 요안나로 나타난다. [사진] <여사장>(한형모, 1959)에 출연한 조미령, 왼쪽은 상대역인 배우 이수련 이울러 그녀는 이지적이기보다는 백치미를 추구한 작품에서 존재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졸지에 맹진사댁 규수를 대신하여 꽃가마를 타게 된 <시집가는 날>의 대리 신부는 물론, 남편에게 얻어맞고 친정으로 쫓겨 온 <마부>의 벙어리 맏딸(옥례), 재취를 미끼로 구두쇠 영감(김승호)의 전대를 훔치고 도망간 <혈맥>(김수용, 1963)의 벙어리 여인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사진] <혈맥>(김수용, 1963)에서 조미령, 오른쪽은 배우 김승호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조미령은 현대적인 양장보다는 가냘픈 선의 맵시가 드러나는 전통적인 한복 차림이 더욱 돋보인다는 점이다. 학업마저 포기한 여덟 살 소녀의 도전 조제순(趙濟順)이 본명인 조미령은 1929년 2월 4일 경남 마산 출신이다. 일설에는 서울 효자동 태생인 것으로 알려졌다. 여덟 살 때 연극 팬인 언니의 권유로 동양극장의 전속 극단 ‘청춘좌’에 들어가 <임자 없는 자식들>(1937)로 첫 발을 디뎠다. 김승호의 연극 데뷔작이기도 하다. 『한국연예대감』(1962, 성영문화사) 등 일부 인쇄물에는 중학교를 중퇴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학교 문턱을 밟아본 적이 없다. (「비약을 꿈꾸는 여우 조미령, 그는 왜 은퇴를 결심하게 되었나」, 『한국일보』, 1958.11.02) 여덟 살 때 이미 극단(청춘좌)에 들어가 동양극장 후반기의 최대 히트작 <어머니의 힘>(1943, 이서구 원작)에 출연하는 등 해방이 될 때까지 11년 동안 무대생활을 한 사실이 이를 말해 준다. 조미령은 그 뒤 <해연(갈매기)>(1948)으로 영화계에 첫 발을 디뎠으나 6.25전쟁과 결혼으로 화면에 얼굴을 비치는 기회를 얻지 못했다. 그 대신 변기종이 주도한 상록극회(1951)와 자유극회(1953) 등 연극 단체에서 활약했다. 서울 신당동에 신접살림을 마련하고 두 남매를 키우는 일에만 매달리던 조미령이 <춘향전>으로 다시 카메라 앞에 선 것은 <해연> 이후 5년 만이었다. 남편이 전주(錢主)를 끌어들여 만든 이 영화는 적지 않은 일화를 남겼다. 그 가운데 하나가 조미령의 실신소동이다. 여배우 숙소에 밥을 지어 나르던 중년의 아낙네에 의해 처음 알려진 이 소동은 의처증이 있는 이철혁이 아내가 남주인공인 이민과 심상치 않는 관계로 의심한 데서 비롯되었다. 화가 난 그가 집어 던진 목침이 조미령의 뒷머리에 맞아 하마터면 죽을 뻔했던 것이다. 다행히 숙소에 있던 석금성(월매 역) 등 배우의 간호로 한참 뒤에야 깨어날 수 있었다. (이규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49)] 난산」, 『중앙일보』, 1980.02.20.) [사진] <춘향전>(이규환, 1955)의 한 장면, 왼쪽은 이도령을 맡은 상대 배우 이민 그런 남편이 그로부터 3년이 채 안된 1958년 3월 16일 밤 갑자기 심장마비로 숨졌다. 당시 46세였다. (「문화소식, 이철혁씨 급서」, 『서울신문』, 1958.03.19) 장례는 20일 아침 열시부터 ‘영화인동지장’(장의위원장 안종화)으로 고인의 자택인 신당동 앞마당에서 거행되었다. (「내외문화단신, 영화인 동지장으로」, 『한국일보』, 1958.03.20) 남편을 잃은 충격으로 영화출연을 삼가던 조미령이 다시 활동을 재개한 것은 김화랑 감독의 코미디 <사람팔자 알 수 없다>(1958)를 전후한 시기였다. 잇따라 중매결혼을 반대하고 자유결혼을 구가하는 <자유결혼>(1958, 이병일)의 셋째 딸 역을 맡아 종전과 다른 활달한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진] <자유결혼>(이병일, 1958)의 한 장면, 오른쪽은 배우 박암 사생활이나 대인관계에서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하다는 말을 들어온 조미령은 남편이 죽은 지 4년이 채 안 돼 하와이 이민 2세 최동원과 결혼(1962년)하고 69년 미국으로 떠났다. 그녀 역시 김소영, 김신재 등 선배배우와 마찬가지로 말년을 타국에서 보내야 했다. 처음에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살다가 브로드웨이의 연극을 볼 수 있는 뉴욕으로 옮겨 10여년을 지내고 1988년 아들딸이 사는 하와이로 건너가 토산품점을 경영했다. 하와이 민속박물관으로 가는 길목에 있는 대지 2천 4백여 평, 건평 1백 12평 규모의 큰 가게였다. 그 사이 ‘영화의 날’(1991년 10월) 행사와 1958년 첫 개봉이후 11년 만에 다시 리바이벌하는 하한수 감독의 <눈 나리는 밤>(1969), 조문진 감독의 <두 아들 2>(1981)에 출연하기 위해 잠시 귀국하기도 했다. 조미령은 무성영화시대에 처음 나온 일본인 하야카와 고슈 감독의 <춘향전>(1923)과 발성영화시대를 연 문예봉 주연의 <춘향전>(1935)에 이어 한국 독립 후 최초로 만든 <춘향전>(1955)의 히로인으로 주목을 받았으나 필름이 보존되지 않아 후대의 최은희(성춘향, 1961)만큼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하지만 조미령은 분명 해방 후 60년대 초까지 선배인 최은희, 후배 김지미와 더불어 삼각구도를 이루며 한국영화의 중흥에 이바지한 소중한 존재였다.
1926년 12월 2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함완섭은 진학을 위해 상경해 외숙부인 김성춘 조명기사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자연스레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장차 자신과 함께 작업하게 되는 영화인들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일제강점기 <전과자>(김소봉, 1934)의 최진과 더불어 1세대 조선인 조명기사로 활동했던 김성춘은 해방 후 한국영화 조명기사의 계보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한국영화 기술자들에게 ‘오야지(おやじ, 親父)’로 통했던 인물이다. 기술학교인 홍아학원을 거쳐 1944년 경성전기공업학교 전기과를 졸업한 함완섭은 김성춘의 추천으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광희동 촬영소 조명부에 입사하면서 영화 조명 일을 시작했다. 1942년 9월 발족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는 조선영화령(조선총독부제령 제1호)에 의거해 기존 10개의 민간 영화사가 강제 통합되어 친일, 군국주의 선전영화를 제작한 국책 영화사였지만, 200여 평의 촬영 스튜디오를 비롯해 녹음실, 현상소, 최신식 기자재 등을 구비하고 말단 기술진에게도 공무원 월급의 두 배를 지급했던, 당시로서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사진 1]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창립 기념 사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김성춘의 조명 조수로 최인규 감독의 <태양의 아이들(太陽の子供達)>(1944), <사랑과 맹서(愛と誓ひ)>(1945), <신풍의 아들들(神風の子供達)>(1945)에 참여한 함완섭은 해방 후에도 김성춘을 따라 조선영화건설본부의 뉴스영화와 최인규가 설립한 고려영화협회의 <자유만세>(최인규, 1946), <독립전야>(최인규, 1948), <죄 없는 죄인>(최인규, 1948) 등에 조명 조수로 참여했다. 그리고 스물세 살 되던 해인 1948년 계몽영화인 <국민투표>(최인규)로 최연소 조명기사로 데뷔한다. [사진 2] 영화 <사랑과 맹서>(최인규, 1945) [사진 3] 영화 <자유만세>(최인규, 1946) [ 사진 4] 영화 <독립전야>(최인규, 1948) 같은 해 <반도의 봄>(이병일, 1941)의 원작자였던 김성민의 감독 데뷔작 <사랑의 교실>(1948)로 극영화 조명기사로 정식 데뷔한 함완섭은 이후 조수 시절 인연을 맺은 최인규의 조감독 출신들인 홍성기, 신상옥, 정창화 등의 감독 데뷔작 조명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컬러 극영화 <여성일기> 1948년 함완섭은 한국 최초의 컬러 극영화인 홍성기 감독의 데뷔작 <여성일기>(1949)에 조명기사로 참여했다. 바로 1년 전 일본계 미국인이 촬영한 기록영화 <무궁화동산>(안철영, 1948)이 컬러로 제작된 바 있지만, 순수 국내 자본과 제작진으로 만들어진 극영화로는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사진 5] 영화 <여성일기>(홍성기, 1949)의 신문광고(출처: 경향신문 1949년 6월 6일자 2면) ‘최초’라는 수식어답게 함완섭은 이 영화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컬러 영화의 조명을 경험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더 큰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자신은 물론 감독도 촬영기사도, 심지어 스승인 김성춘도 컬러 촬영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함완섭은 늘 하던 대로 흑백 영화 촬영 때처럼 조명을 했는데, 결과물을 보고선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고 한다. 컬러 필터를 쓰는 법도 몰라 낮에도 텅스텐 조명을 그대로 쓴 데다 마침 낙엽이 지는 가을에 촬영해 화면에 붉은색이 많이 돌았던 것이다. 더욱이 <여성일기>는 네거티브 단계 없이 원본 자체가 포지티브 프린트로 변하는 리버설 필름(reversal film)으로 촬영했는데, 이 때문에 러쉬(rush)를 뜰 수가 없어 원본 필름으로 편집해야 했고 프린트도 만들 수 없어 극장에 영사기 두 대를 설치해 원본 필름과 녹음 필름을 따로 걸어 상영했다고 한다. 흥행은 어느 정도 되었다지만, 기술적으로는 함완섭의 표현대로 “반쪼가리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함완섭은 <애국자의 아들>(윤봉춘, 1949), <여인애사>(신경균, 1950)를 거쳐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 <악야>(1952)를 촬영하던 중 전쟁을 맞았고, 피난 시절에도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 <최후의 유혹>(정창화, 1953), <출격명령>(홍성기, 1954) 등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홍성기 감독과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조명 양상 한국전쟁 후 김성춘의 조명 조수 출신인 고해진, 이한찬 등과 함께 2세대 조명기사로 자리매김한 함완섭은 신경균, 윤봉춘, 이병일 등 원로 감독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홍성기, 정창화, 유현목 등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이끈 젊은 감독들의 작품에 다수 참여했다. 특히 홍성기와의 작업이 많았는데, <열애>(1955), <애원의 고백>(1957), <실락원의 별>(1957), <별아 내 가슴에>(1958), <실락원의 별(후편)>(1958) 등 그의 전성기 시절을 함께했다. [사진 6] 영화 <애원의 고백>(홍성기, 1957)의 한 장면 [사진 7] 영화 <별아 내 가슴에>(홍성기, 1958)의 한 장면 사실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조명은 열악하고 부족했던 기재와 여건 등으로 인해 조명기사 고유의 미학적 조명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단지 화면을 밝히는 수준의 인물 삼점 조명(three point lighting) 같은 기본적인 조명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성기는 조감독 시절부터 함께 고락을 같이한 함완섭을 유독 신뢰했고 조명에 있어서만큼은 그에게 전적으로 일임했다고 한다. 이 시기 홍성기 감독의 작품들 중 유일하게 필름이 남아있는 <열애>는 당시 한국영화의 조명 양상을 잘 보여준다. 세트 촬영이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 영화의 모든 공간을 오픈에서 촬영했는데, 실내 낮 장면에서 창문에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치고 촬영했던 것은 바깥의 광량을 커버할 만한 실내 조명이 부족해서였으며, 벽에 인물 그림자가 많이 지는 것은 세트 촬영일 경우엔 부감대 같은 높은 위치에서 조명을 할 수가 있지만 오픈에선 아무리 조명기의 키를 높여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진 8~11] 영화 <열애>(홍성기, 1955) 속 장면들. 부족한 실내 조명으로 인해 커튼과 블라인드로 광량을 조절해야 했으며, 그림자가 벽면에 가득 드리워졌다. 또한 당시 영화들에서 카메라에 감마(gamma) 필터를 끼워 낮에 밤 장면을 찍는 데이 포 나이트(day-for-night) 촬영이 많았던 이유는 산이나 해변에서 촬영할 경우 전기를 끌어올 재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이지만, <열애>에서 영옥(염매리 분)의 집 앞 장면처럼 전기를 끌어오기 용이한 장소에서의 촬영은 당시에도 웬만하면 밤에 촬영했다고 한다. [사진 12, 13] 영화 <열애> 속 야외촬영 장면들. 촬영 장소의 전기 수급에 따라 촬영 방식과 시간을 바꿔야 했다. 화영공작소와 <자유결혼> 1950년대 중반 조명 기재는 김성춘이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시절 일본의 아라시간주로(嵐寛壽郎)프로덕션에서 수입해 보유하고 있던 조명기 150kw와 전쟁 당시 북한의 국립영화촬영소에서 노획해온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서 보유하고 있던 소련제 조명기 100kw, 미공보원(USIS)에서 썼던 미제 조명기 70kw 등이 있었는데, 파손이 심해 실제 사용할 수 있는 대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더욱이 당시 영화 한 편에 50~100kw 정도의 조명기가 필요했는데, 네 명의 기사가 동시에 사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보니 함완섭은 자신의 촬영을 마치고 급하게 김성춘의 작업 현장으로 조명 기재를 실어날라 가며 번갈아 사용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57년 함완섭은 자신이 대여해 쓰던 미제 조명기를 샘플로 화영공작소에 의뢰해 총 120kw의 조명기를 자체 제작했다. 화영공작소는 김성춘의 문하에서 조명 조수로 일했던 김종철이 설립한 조명 기재 제작소로, 비록 수공업적 방식이긴 했으나 당시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영화 조명기를 국내에서 제작할 수 있게 되어 한국영화 조명인들의 숨통을 틔워주었던 곳이다. [사진 14] 영화 <자유결혼>(이병일, 1958)의 세트 촬영 현장 <자유결혼>(이병일, 1958)은 함완섭이 화영공작소에 의뢰해 제작한 조명기를 사용한 첫 번째 작품으로, 당시로선 나름 풍족했던 조명기 덕에 <열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된 조명이 보여진다. 오픈 실내 장면에서 벽에 드리워졌던 인물 그림자는 말끔히 사라졌고, 낮임에도 항상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쳐놓아 답답했던 화면도 커튼을 걷어냄은 물론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촬영해 시원한 느낌마저 준다. [사진 15~18] 영화 <자유결혼> 속 장면들 함완섭은 이러한 것이 풍부해진 조명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실내 장면을 세트에서 촬영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세트 촬영을 하면 조명기의 위치를 높일 수 있고 실외 광원 설정도 조명기로 조절할 수 있어 여러모로 오픈 촬영 때보다 작업하는 데 유리했다는 것이다. 최훈 감독과 광보영화사 함완섭은 홍성기의 조감독 출신인 최훈 감독의 데뷔작 <모녀>(1958)에서 조명을 맡은 후부터 <느티나무 있는 언덕>(1958), <사모님>(1959), <장마루촌의 이발사>(1959) 등 최훈과 호흡을 맞추어 나간다. 그렇다고 홍성기와의 작업을 곧바로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사진 19] 영화 <모녀>(최훈, 1958)의 한 장면 [사진 20] 영화 <느티나무 있는 언덕>(최훈, 1958)의 한 장면 당시 제작 편수에 비해 조명기사가 부족해 기사 한 명이 여러 작품을 동시에 진행했는데, 함완섭은 3팀을 운용했으며 각 작품마다 제1조수가 책임을 맡고 자신은 세트 촬영이나 로케이션 밤 촬영 같은 어려운 촬영에만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같은 시기 작업한 홍성기의 <별아 내 가슴에>, <실락원의 별(후편)>도 당시 최고참 조수였던 방영원(방기찬)이 전담하고 있었는데, 함완섭은 <청춘극장>(홍성기, 1959)부터 아예 그를 독립시켰으며 이후에도 자주 홍성기의 촬영장을 찾아 일을 도왔다. <사모님>, <장마루촌의 이발사>를 작업하며 기획⋅제작에도 관여했던 함완섭은 1959년 최훈과 함께 광보영화사를 설립한다. 당시 한국영화계는 해를 거듭할수록 풍작을 거두고 있었고, “영화가 흥행을 하면 몇 배가 남는 장사가 되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우후죽순 영화사를 만들던 시기였다. 1958년에 제작된 작품 편수가 74편인데 반해 당시 영화사가 72개사일 정도였다. 1959년엔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100편대를 넘어 111편이 제작되기도 했다. 하지만 제작자로 변신한 함완섭에게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광보영화사로 <어느 여교사의 수기>(최훈, 1960),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1960), <아버지>(최훈, 1961) 등을 제작했는데, 하필 <어느 여교사의 수기>가 개봉할 때 4.19가 터졌고 <아버지>가 개봉할 땐 5.16 쿠데타가 일어나 흥행은커녕 손해만 크게 입었던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2년 영화법이 제정되며 영화사 통폐합 조치가 내려졌고, 광보영화사는 동아영화흥업주식회사와 통합되고 만다. [사진 21] 영화 <어느 여교사의 수기>(최훈, 1960)의 포스터 [사진 22] 영화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1960)의 포스터 이후 함완섭은 동아영화흥업에서 제작 담당으로 일하며 <사랑의 승부>(최훈 ․ 이용호, 1962), <비밀통로를 찾아라>(이용호, 1962), <천동(天動)>(정승문, 1963)을 기획, 제작했지만, 동아영화흥업마저도 1963년 6월 영화사 등록요건이 더 강화된 제1차 개정 영화법의 시행으로 등록이 취소되었다. 신상옥 감독과의 재회 <에밀레종>(홍성기, 1961) 이후 조명을 중단했던 함완섭은 1964년 최훈 감독의 <눈물의 자장가>(1964)를 시작으로 다시 조명기사로 복귀했다. 그리고 홍성기 감독의 <대석굴암>(1964), <처녀성>(1964), 최훈 감독의 <울지마라 물새야>(1964), <파도>(1967), <밀어(密語)>(1967), <지금 그 사람은>(1968), <난풍(暖風)>(1968), 김묵 감독의 <폭력지대>(1965), <최후의 대결>(1967) 등을 작업하며 조명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1968년 함완섭은 신상옥의 부름을 받는다. <악야> 이후 16년 만이었다. <지옥화>(1958) 때부터 신상옥의 대부분 작품에서 조명을 담당했던 이계창이 1967년 3월 베트남에서 <여자 베트콩 18호>(강범구, 1967)를 촬영하던 중 불의의 폭파 사고로 사망하면서 그 공백을 함완섭에게 대신 맡기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신상옥과 해후한 함완섭은 <여자의 일생>(1968)을 시작으로 <내시>(1968), <천년호>(1969) 등의 조명기사로 신상옥과 함께했다. [사진 23, 24] 영화 <여자의 일생>(신상옥, 1968) 속 장면들 당시 신필름은 안양촬영소를 인수하고 자회사를 설립해 연간 3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던 국내 최대의 영화사였고, 일본의 류덴샤(柳電社)에서 수입한 조명기 등 최신 기재를 보유하고 있던 꿈의 영화공장이었다. 함완섭은 <내시>를 작업할 때 당시 보통 영화 한 편에 소요되던 광량의 두 배에 달하는 1,200kw를 썼을 정도로 풍족한 환경이었다고 기억한다. 촬영 스튜디오에는 300kw 이상의 기본 전력이 들어왔고, 한 장면에만 100kw 이상 쓴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었다. [사진 25, 26] 영화 <내시>(신상옥, 1968) 속 장면들 [사진 27, 28] 신상옥 감독의 영화 <천년호>(1969) 속 장면들 하지만 그 호사(好事)도 오래가지 않지 않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영화산업은 장기 불황에 빠져들었고 신필름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실 그 조짐은 함완섭이 신상옥의 작품에 참여하기 시작할 때부터 보였었다. 큰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 연간 30여 편의 영화를 양산해야 했지만, 흥행 성과는 미미했고 빚만 불어나는 악순환이 이미 그때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더욱이 신필름은 1970년 시설 기준 미달로 등록이 취소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규모가 대폭 줄어든 안양영화제작주식회사로 재설립된다. 함완섭은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를 작업한 후 1972년부터 최은희가 교장으로 있던 안양영화예술학교에서 조명과 전기 등을 관리하는 시설감독으로 근무했다. 이후 1973년 <삼일천하>(신상옥)에 조명기사로 참여하기도 하지만, 1975년 7월 신상옥이 외화 쿼터를 획득하기 위해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되는 등 어수선해지자 퇴사했다. [사진 29] 영화 <삼일천하>(신상옥, 1973)의 한 장면 [사진 30] 영화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의 한 장면 <세종대왕>과 마지막 작품 함완섭은 한동안 일선에서 물러나 지내다 1978년 당시 최대 제작비와 인력을 투입한 대작 사극 <세종대왕>(최인현)에서 조명 책임을 맡게 된다. 자신이 조명기사로 참여한 59편의 작품들 중 가장 애착하는 작품으로 꼽기도 한 이 영화에서 함완섭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작업했다. 낮 장면에 쓰는 데이라이트(daylight) 조명기 10대를 홍콩에서 전구를 수입해와 자체 제작했고 경복궁 오픈 촬영에서 유용하게 사용했다. 기존의 텅스텐 조명기도 당시 모을 수 있는 최대의 물량을 동원해 유려한 롱 쇼트 밤 장면을 구현해내기도 했다. 더욱이 1년여의 긴 촬영 기간에 로케이션과 오픈 촬영이 많아 고생을 많이 한 작품이었지만, 그해 대종상 후보에까지 오르고 수상은 하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고 한다. [사진 31~33] 당시 최대 제작비와 인력을 투입한 영화 <세종대왕>(최인현, 1978) 속 장면들 이후 함완섭은 1979년부터 현진영화사에서 조명실장으로 재직하며 직접 나서기보다 후배들을 돕는 일에 매진했다. 그리고 1980년 <느티나무 있는 언덕>에서 촬영기사와 조명기사로 만나 오랫동안 친구로 인연을 맺어온 심우섭 감독의 <난 모르겠네>를 마지막으로 극영화 조명을 그만두었고, 1986년 아시안게임 기록영화의 조명을 끝으로 은퇴했다. [사진 34~36] 함완섭이 참여한 마지막 극영화 작품 영화 <난 모르겠네>(심우섭, 1980) 속 장면들
약초극장은 대정관의 운영자 오카모토 세이지로(岡本淸次郞)가 대정관의 흥행권을 가지고 1935년 12월 경성부 약초정 41번지에 설립한 영화관이다. 약초극장의 설립은 대정관과 관련이 있다. 1934년 7월 쇼치쿠가 오랜 파트너인 대정관을 대신하여 동아구락부(東亞俱樂部)를 쇼치쿠의 경성 개봉관으로 바꾸자, 쇼치쿠 2번관으로 전락한 대정관은 새로운 탈출구를 모색하게 된다. 1934년 10월 후쿠자키 하마노스케(福崎濱之助)에 이어 대정관을 운영하게 된 오카모도 세이지로는 대정관이 쇼치쿠 2번관으로 남느니 후발주자인 PCL의 경성 봉절관이 되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고 동년 11월 15일 PCL과 경성 봉절관 계약을 체결했다. 하지만 대정관은 서울의 가장 오랜 영화관이자 낙후한 극장의 대명사로 불릴 정도로 열악한 상태였기에 PCL의 경성 봉절관의 지위도 동아구락부로 넘어가게 된다. 대정관에서는 다이토(大都)의 영화를 상영하면서 향후 쇼치쿠영화의 경성봉절관이 되기 위해 약초정 큰길가에 약초영화극장을 신축하기로 한다. 1935년 7월 건축허가를 얻은 오카모도는 9월 말 상량식을 거행하고 극장 설립 공사를 시작한다. 극장의 설계는 조선공업협회 부회장 가와자와 미치마사(川澤道正)가 담당했으며, 건축은 이쿠타구미(生田組)에서 맡았다. 총 공사비 218,000원을 들인 이 극장은 대지 면적 약 300평, 건축연면적은 658평에 철골철근 콘크리트 구조의 지상 4층 건물이었으며 총 좌석수 1,172석(1943년 현재 1,000석)의 대형극장으로 2개층의 관람석을 가진 순수 영화관으로 계획되었다. 1935년 12월 16일 대정관이 문을 닫았고 경성 최초의 신양식 대영화극장(“京城 最初의 新樣式 大映畵劇場)”으로 광고된 약초극장은 1935년 12월 30일 낙성식을 거행한 후, 다음날인 12월 31일부터 흥행을 시작했다. 개관 기념 작품으로 유니버설 초특작 괴기영화 <화석인간>(Night Life of the Gods, 1935)과 다이토(大都)영화사의 <검운용호당>(劍雲龍虎黨)과 <말괄량이와 소년>(ジャジャ馬と坊や)이 상영되었다. 쇼치쿠의 경성 봉절관이 되려는 시도는 쇼치쿠가 명치좌(明治座)의 이시바시 료스케(石橋良介)와 손을 잡으면서 실패했다. 약초극장은 1930년대 들어선 1,000석 이상의 거대한 토키극장의 효시였다. 황금좌, 명치좌, 경성극장과 더불어 4대 상설관으로 조선의 극장문화를 선도하고 있다 보니 당국에서는 이들 1류급 극장들을 각종 선전활동에 이용했는데 중일전쟁 발발 이후인 1938년 12월 본정경찰서에서는 약초극장과 더불어 명치좌, 황금좌, 낭화관에 아래와 같은 방첩표어를 게시하도록 했다. 1. 우리들 총후국민은 힘을 다하여 스파이의 암약을 방지하자. 2. 우리들 총후국민은 군기를 잘 지킴으로써 군기보호를 다하자. 3. 우리들 총후국민은 정치경제 각반의 국정의 비밀을 잘 지킴으로써 국방력을 한층 더 굳세게 하자 4. 우리들 총후국민은 황도조국을 지키기 위하여 항상 눈과 귀를 잘 활용함으로써 스파이를 없이하자. 오카모토흥행부가 맡아 운영하던 약초극장은 개관 초기 서양영화를 위주로 프로그램을 편성하였다가 점차 일본영화를 늘려나갔다. 서양영화의 경우 계통과 상관없이 자율 배급이던 상황에서 1935년부터 1939년 사이에는 할리우드 영화를 주로 상영했으며 할리우드 영화의 상영이 금지된 이후에는 독일 영화를 주로 상영하였다. 일본영화의 경우 개관 초기 다이토영화가 토키영화관에 걸맞지 않은 프로그램이라는 비판을 받게 되자 1936년 4월 이후에는 PCL 영화로 계통을 바꿔 상영하였다. 경성의 PCL 봉절관으로 인식되던 약초극장은 1940년에 일어난 9개월에 걸친 흥행권 분규로 큰 손해를 입기도 했다. 사건의 발단은 1940년 2월 약초영화극장이 PCL의 후신인 도호(東寶) 영화의 경성개봉관 지위를 포기하고 신코키네마(新興キネマ)와 계약을 체결하여 신코의 개봉관이 되자 도호가 위약금 5만원을 청구하였다. 도호의 소송에 약초극장이 신코키네마와 계약을 해지하고 다시 도호영화를 상영하기로 결정하자 이번에는 신코키네마에서 약초극장에 대해 7만원의 소송을 시작했다. 도호와 신코를 대상으로 한 흥행권 계약 문제는 결국 약초극장 운영자 오카모도 세이지로가 신코에 위약금 1만 5천원을 지불하고 도호영화를 계속 상영하기로 확정하면서 9개월에 걸친 분규는 일단락된다. [자료] 1941년 6월 설립된 약초악극단(《매일신보》, 1941.06.08) 중일전쟁이 장기화 되어 필름 부족현상이 일어나자 약초극장에서는 어트랙션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악극을 영화와 함께 상연하기로 하고 전속의 악극단을 두기로 하고, 1941년 6월 조선연예기업사 사장 안익조가 주재하는 신흥악극단을 전속으로 삼았다. 신흥악극단이 이름을 바꾼 약초악극단 내에는 정대택, 김영택, 백란, 김연실 등 연극, 영화계에서 활약하는 인물들과 밴드까지 60여명의 단원들이 포진해 있었는데 개막 공연작은 박운학 연출의 <그리운 멜로디>, <반도의 선율> 등이었다. 약초극장의 어트랙션의 큰 인기를 끌면서 1941년 7월 말부터는 <바다의 카니발>(전13곡)로 프로그램을 바꿔가며 연장공연을 계속했다. 전속의 악극단을 둔 약초극장은 1941년 8월 8일부터 9월 2일까지 무대공연에 걸맞게 개축하게 된다. 1943년에는 무대 공연활동을 보다 강화하기 위해 극장 전속의 가극단을 조직했다. 이번에는 기성의 극단과 계약을 체결하는 것이 아닌 약초극장 주인 오카모토 세이지로가 대표가 되어 가극단을 조직한 것이다. 총무는 약초극장의 지배인 우라노 하지메(浦野元), 연출은 김승구, 작곡은 이면상, 단원으로는 김옥춘, 현정남 등이 포진되었다. 1943년 7월 27일 당국에 정식 인가를 받은 약초가극단은 8월 8일 약초극장에서 첫 공연을 했다. [자료] 연극전용관으로 전환한 약초극장 전속 약초가극단의 공연 광고(《매일신보》, 1944.11.23) [자료] 약초흥행주식회사 직속극단 현대극장의 <봉선화> 공연 광고(《매일신보》, 1945.05.15) 영화관으로 운영되던 약초극장은 1944년 11월 23일 연극전문관으로 전환하게 된다. 약초극장에서는 예원좌(<별의 합창>, <봄바람>, <어머니와 아들>, <눈 나리는 밤>), 고협(<흰독수리>, <삼남매>, <만리장성>, <상아탑에서>, <양자강>), 현대극장(<백야>, <청춘의 윤리>, <대추나무>, <에밀레종>, <애정무한>), 극단 태양(<야화>)의 연극공연과 후생악단, 경성교향악단의 음악회, 후지하라 요시에의 독창회, 약초가극단(탐정활극 <여간첩>), 경성악극단, 조택원무용단의 공연이 이어졌다. 1945년 5월에는 약초가극단 이외에 유치진이 주재하던 현대극장을 약초흥행주식회사의 직속극단으로 두었으며 약초극장에 뿌리를 둔 약초흥행주식회사는 해방 전까지 약초가극단과 현대극장을 거느린 흥행전문회사로 진화하고 있었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 약초흥행주식회사의 간부로 있던 홍찬이 적산관리인으로 있으며 약초극장을 인수하였으며 이름도 수도극장으로 바꾸었다. 해방 직후 수도극장의 프로그램은 연극과 악극이 주였으나 할리우드 영화가 본격적으로 상영되기 시작하자 서울의 대표적인 할리우드 영화 개봉관으로 이용되었다. 수도극장을 중심으로 영향력을 키우던 홍찬은 무리하게 안양촬영소를 건설하면서 생긴 자금난으로 1959년 부도가 났고 수도극장은 매각되었다. 1962년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된 수도극장은 이름을 스카라극장으로 바꾸었다. 2005년까지 존속하던 이 극장은 정부에서 근대 문화유산으로 등록하여 보호하려 하자 소유주가 재산권 행사에 제약이 있다는 이유로 헐어버리면서 사라지게 되었다. 참고문헌 《경성일보》, 《동아일보》, 《매일신보》, 《조선신문》, 《조선중앙일보》 정병호·김보경, 『일본어 잡지로 보는 식민지 영화 3』, 도서출판 문, 2012.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일본어 잡지로 본 조선영화(1~6)』, 한국영상자료원, 2010~2015. * [사진](상단) 약초영화극장의 기공을 알리는 신문기사(《조선신문》, 1935.07.17.) [자료] 《 조선중앙일보 》 , 1936.03.29. 조택원 ( 趙澤元 ) 무용회 , 4 月 6 日 , 10 日 까지 , 약초극장 에서 무용가 조택원 ( 舞踊家 趙澤元 ) 씨는 오는 사월 육일부터 십일까지 약초극장 ( 若草劇場 ) 에서 무용회를 연다는 바 무용 종목은 『 일허진 혼 ( 魂 ) 』 외 아홉까지나 된다는 바 조택원 씨 외 연구소원 일동이 총출연하는데 이번에는 주야 공연이라고. [자료] 《 매일신보 》 , 1937.07.15. 북촌 유일의 영화극장 단성사 , 연극으로 전향 , 중앙무대와 계약 성립 북촌 유일의 양화전문 영화극장으로서 남북촌의 영화 『 팬 』 들의 인기를 독점하고 잇든 단성사는 강력한 경쟁 상대의 진출에 의하야 순 ( 純 ) 영화극장으로서 경영해 나가기 곤란을 느끼게 되어 벌서부터 연극상설관으로 전향한다는 풍문이 돌드니 드듸어 칠월 삼십일일부터 연극을 상연하기로 극단 중앙무대와 간에 계약이 성립되였다고 한다 . 수년전ᄭᅡ지는 경성 유일의 양화봉절관으로 독보 ( 獨步 ) 해오든 단성사도 경성의 흥행시장을 노리는 외래의 대자본의 진출에 의해서 명치좌 약초극장 갓흔 대 ( 大 ) 영화극장들이 생기게 되자 이 영화 『 팬 』 유치에 비책을 다하게 되엿스나 단성사는 극장의 협착 ( 狹窄 ) 이라는 『 핸듸 - 캡 』 이 잇슬 뿐 아니라 경쟁이 초래한 양화가격의 등귀 ( 騰貴 ) 로 인하야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잇드니 최근에는 해마다 잇는 일이나 하절이 되자 관람객이 붓적 줄어버리고 말았음으로 그 타개책을 연극으로 전향하는데서 구해보게 된 것이다 . 금후로는 흥행기업에 이해를 가진 대자본의 적극적 진출에 의하야 냉방 , 온방 , 장치 등 새로운 설비를 구비한 대극장을 신축하기 전에는 일류 양화극장으로서의 존속은 허락지 않는 정세에 잇슴으로 만일 단성사가 영영 연극극장으로 전향하야 버린다면 이로써 조선인 경영의 영화극장은 그 자최를 감춰버리게 되는 세음인데 중앙무대와 단성사 간의 계약 성립에 관하야 양측 관계자들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위선 ( 爲先 ) 삼주간의 계약 , 중앙무대 홍찬 ( 洪燦 ) 씨 담 ( 談 ) 중앙무대는 제 2 회 공연ᄭᅡ지를 부민관에서 햇고 삼회 공연 역시 이십일일부터 부민관에서 할 예정이나 부민관은 연극을 상연하기에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만흘 ᄲᅮᆫ 아니라 집대 ( 貸 ) 가 워낙 비싸기 ᄯᅢ문에 경비가 만히 들고 해서 단성사와 위선 칠월 삼십일일부터 삼주간의 계약을 매젓습니다 . 앞으로 장기계약을 맺을지 어ᄯᅥᆯ지는 두고 보아야 알겟습니다 . 시험적으로 연극을 해볼터 , 단성사 박응면 ( 朴應冕 ) 씨 담 아시는 바와 가티 최근의 양화가격이 무척 비싸진 데다가 협착한 단성사로서는 수용인원이 수배되는 상대와 경쟁하기에는 힘이 들고 기외에 말못할 불리한 사정이 잇는데다가 금년에는 웬일인지 소위 『 하고 ( 夏枯 ) 』 가 우심 ( 尤甚 ) 함으로 이 타개책을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ᄭᅳᆺ해 연극을 해보기로 햇습니다 . 중앙무대와 결정적으로 계약이 확정된 것은 아니나 금명간 확정을 볼 것입니다 . 여름 『 씨 - 슨 』 이 지나고 가을에도 역시 연극을 계속 할지 ᄯᅩ는 다시 영화를 상영할지는 아직 미정입니다 . 좌우간 연극을 공연시켜보아 그 성적 여하에 따라 결정할 작정입니다 . 최근 더욱이 악해진 흥행계에서 적은 자본으로 다수한 경쟁자를 상대로 싸워 나가기에는 남이 모르는 여러 가지 고심이 숨어잇습니다 . [ 자료 ] 《 매일신보 》 , 1945.05.16. 현대극장과 약초의 제휴 국민극 수립을 표방하고 성립된 현대극장은 그동안 고정한 극장이 없어 상연할 적마다 장소가 갈니여서 그 활동이 얼마간 ○○ 되어 왓는데 이번에 새로 생긴 약초흥행주식회사와 특수계약 ( 特殊契約 ) 이 결성되여 매월 정기 공연을 하게 되엇다 . 압흐로 동 극단은 약초극장을 중심으로 하야 연극활동을 하게 될 것으로서 이와 갓흔 극단과 극장의 합리적 제휴는 크게 그 장래가 주목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