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노반스 에코
- 감독
- 짐 클리프
- 제작년도
- 2011
- 출연
- 대니 글로버, 브루스 그린우드, 나타샤 칼리스, 이안 트레이시
‘IT 기술’의 플랫폼과 ‘교양’의 문제 최근(2017년 12월) 필자의 관심사는 인터넷이 대중화되면서 기술(IT)적인 ‘플랫폼’(≒미디어, 매체)이 세계화(글로벌화)되어 발생되는 고전적인 ‘교양’의 ‘해체’라고 불러야 할 상황에 대해 주로 기울어져 있다. 그 때문에 요즘 몇 번 출판계에 기고할 기회가 생길 때마다 마침 이 플랫폼(전자서적이나 웹툰, 웹 소설 등)에 관한 이야기를 자주 하게 되었다. (출판전문지 「기획회의」 2017년 12월 5일 453호 및 곧 출간 예정인 단행본 『한국의 논점 2018』 등.) 인터넷을 통한 각종 ‘플랫폼’은 주로 ‘IT 계열’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기 마련이고 (주요 플랫폼 기업이라고 한다면 아마존, 애플, 구글, 우버, 에어비앤비, 텐센트, 국내에서는 네이버와 카카오를 들 수 있을 텐데 보다시피 대부분 IT 기업으로 출발했다), 그에 따라 종래의 대량생산을 기반으로 했던 대중(mass)의 ‘매체(media)’의 대표 격인 ‘출판’이 가지고 있던 인문학적 속성과는 조금, 문화랄까 습성이랄까 배경에 차이가 있다고 여겨지는 상황이다. 일본의 평론가 오쓰카 에이지는 이런 상황에 대해 설명할 때 주로 ‘구(舊) 교양’이라는 말을 쓰곤 하는데, 말 그대로 출판 시절의 매체는 ‘과거의 교양’을 바탕에 둔 것이었으나 현대 인터넷 기반의 IT 플랫폼은 그렇지 않은 측면이 많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이런 상황이다. 일본을 방문한 트럼프한테 아베 정권이 당당하게 내보였던 일본문화가 트럼프 손녀딸이 좋아한다는 피코타로였고, 하지만 정작 그 손녀딸은 삼자경과 당시(唐詩)를 암송하는 동영상을 시진핑한테 보여주는 모습을 보고, 작년에 카와카미 노부오가 현대 일본의 교양은 이미 『소년 점프』가 되었다는 구태의연한 지적을 했던 것을 다시금 통감했다. 카와카미는(중략) ‘지적(知的)인 웃음’을 표현하고자 할 때 인용되는 것이 더 이상 고전이 아니라 『소년 점프』라는 사실을 간파했다. 하지만, 그러한 서브컬처는 트럼프에게조차도 교양으로 치부되지 못한다. 트럼프조차도, 교양이란 곧 고전이란 사실을, 어리석긴 해도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이다. 『소년 점프』나 피코타로가 ‘오타쿠 문화’라고 할 수 있는지 ‘서브컬처’라고 해야 할지, 그런 세세한 정의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도 없지만, 아베 마리오 코스프레까지도 포함해서 그것들을 한 묶음으로 하는, 지극히 경솔한 무엇인가를 체현시킨 것이 현 시점의 이 나라에선 문화이자 교양이라고 하는 사실이, 아베 정권에 접어든 이후 계속해서 가속되고 있다는 사실은 다들 이제 슬슬 느끼고 있지 않은가. 아소 타로의 교양이 ‘만화’였다는 것을 이젠 더 이상 아무도 화제로 삼지 않게 되었고, 이시바 시게루, 마에하라 세이지 등과 같은 차세대 국방족 의원들의 ‘교양’은 프라모델 만들기나 철도 오타쿠라는 것이야말로 이 나라 안전 보장에 있어서 최대의 문제라고 아무도 느끼지 않고 있다. 선거전 종반에 여당 당수가 연설 대상으로 했던 유권자는 아키하바라에 모인 사람들이었지 신주쿠 서쪽 출구의 샐러리맨이 아니었다. 논단에서도 젊은 학자나 논객의 ‘취미’가 아이돌에 관한 논의가 되어 있는 정도로는 ‘서브컬처’든지 ‘오타쿠 문화’이든지의 ‘교양화’는 확실하게 진전되었다. ‘오타쿠 문화’ 그 자체는 이제 와선 무한하게 세분화되었지만, ‘쇼와의 끝 무렵’ 시절에는 대략적으로 히라가나 표기의 ‘오타쿠(おたく)’란 단어 주변에 있던 것들(미야자키 쓰토무의 방에 있던 만화는 ‘모에’ 만화가 아니라 극화지와 『젊은 아내의 속옷』이었고, 수천 편의 비디오 컬렉션은 롤리타 포르노가 아니라 CF와 아이돌, 프로레슬링과 애니메이션에 야구 방송 녹화 등, 헤이세이 시대 이후로는 세분화되어버린 ‘오타쿠의 각 소비 영역’을 얕고 넓게 대강 대충 커버하고 있던, 도저히 ‘컬렉션’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이 이 나라의 중심이라고까지는 말하지 않겠으나, 교양만이 아니라 정치나 경제나 미디어에서도 분명히 그 일각을 점거하고 있다는 것은 확실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오쓰카 에이지, 「아베의 교양과 어디에도 없는 장소의 ‘오타쿠 문화’」, 『최전선』 편집부 블로그, 2017년 12월 7일) 참고로 약간의 해설. 이 글에서 나온 피코타로는 ‘PPAP’란 곡으로 유튜브를 떠들썩하게 했던 일본의 가수이고, 카와카미 노부오는 일본의 동영상 플랫폼 ‘니코니코동화’를 만들었고, 지금은 대형 출판사인 카도카와쇼텐과 합병하여 만들어진 KADOKAWA(카도카와)란 회사의 대표이사를 맡고 있는 인물이다. 카와카미는 스튜디오 지브리로부터도 인정을 받아 지브리에서 미야자키 하야오와 타카하타 이사오 감독을 보좌해온 베테랑 프로듀서 스즈키 토시오의 ‘제자’로서 미야자키 감독 작품인 < 바람이 분다 >와 타카하타 감독 작품인 < 가구야 공주 이야기 >에 ‘프로듀서 견습생’으로 크레디트되기도 한 인물이다. 하지만 그런 그에 대해서도 오쓰카 에이지는 매번 날카로운 지적을 해왔다. (실제로는 오쓰카 에이지는 카와카미와 친분이 있고, 니코니코동화가 주최하는 이벤트나 방송에도 자주 출연하고 있다.) 그리고 ‘아베 마리오’ 코스프레는 일본의 아베 총리가 2016년 리우 올림픽 폐막식에서 2020년 도쿄 올림픽을 홍보하기 위해 슈퍼 마리오 코스프레를 하고 등장했던 것을 가리키는, 일본 매스컴의 유행어(?)이다. 아소 타로는 일본의 전직 총리이자 현재에는 재무대신, 부총리 등을 역임하며 아베 정권의 일각을 담당하고 있다. 이시바 시게루는 자민당 간사장을 맡으며 아베파의 일각이었으나 현재는 거리가 멀어지면서 당내의 라이벌처럼 된 정치인이고, 마에하라 세이지는 야당인 민주당 당수였다가 그 뒤를 이은 민진당의 대표를 맡았다가 야당을 깨버리고 상당히 우익적인 행동을 하고 있는 일본 야권의 유력 정치인이다. ‘아키하바라에 모인 사람들’이란 표현은 젊은 오타쿠층(2010년대 일본의 젊은 층은 한국과 마찬가지로 보수·우익적이다), 즉 ‘프리터’(프리랜서나 아르바이트 정도를 하고 있는, 사실상 무직인 층)라든지 니트(NEET), ‘넷우익’과 친화성이 강한 층을 지칭하는 것이고, ‘신주쿠 서쪽 출구의 샐러리맨’이라 함은 한국에서 말하자면 ‘여의도나 명동의 회사원들’이란 식으로, 좀 더 상대적으로 ‘일반적인’ 회사원층을 뜻한다. (이 회사원들이 보수파가 아니라는 의미는 아니다. 보수나 진보와 무관하게 그냥 말 그대로의 ‘일반인들’을 지칭한다고 생각하면 될 것이다.) 쇼와 시대는 1989년에 끝났으므로 ‘쇼와의 끝 무렵’이라 함은 1980년대 중후반을 가리킬 것이고, 미야자키 쓰토무는 1989년에 도쿄·사이타마 연속 유아 유괴 살인사건의 용의자로 체포되어 사형 판결을 받고 집행된 인물이다. 그가 당시에 ‘오타쿠’를 대표하는 것처럼 매스컴에서 보도되는 바람에, 그 당시에 코믹마켓 등에 동인지를 내거나 애니메이션을 대량으로 시청하는 소위 ‘오타쿠’ 계층에 대한 일본 사회의 ‘왕따’와도 같은 분위기가 돌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 미야자키 쓰토무를 ‘오타쿠’라고 보도했던 주된 원인은 그의 방에 수천 개의 비디오테이프가 있었고 만화잡지를 포함한 책들도 꽤 있었다는 이유였는데, 실제 그 비디오테이프 중에는 불법적인 포르노도 없었고(일본에선 정상적으로 발매되었던 성인용 비디오는 있었지만, 당연하게도 유아 대상의 롤리타 계열도 아니었고 전부 ‘합법적인’ 성인물이었음) 대부분은 CF나 아이돌이 출연한 TV 프로그램과 TV 드라마, 프로레슬링 및 야구 시합의 녹화 비디오였다는 사실이 21세기에 들어 새롭게 주목받은 바 있다. 그 중에 포함되어 있던 애니메이션도 당시 ‘오타쿠’들이 즐기던 작품이라기보다는 < 우주전함 야마토 > <게게게의 키타로> < 요술공주 샐리 > 등 상당히 ‘일반인 취향’의 애니메이션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다. 드라마 역시도 당시 대중적으로 인기 있던 작품이 많았다. 하지만 역으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보다는 오타쿠에 가까웠던’ 그가 1980년대 당시 ‘세분화된 특정 장르’에 치우친 것이 아니라 이처럼 폭넓게 ‘오타쿠 문화 혹은 서브컬처’를 섭렵하고 있었다는 점을, 오쓰카 에이지는 현재의 ‘세분화된 오타쿠 문화 혹은 서브컬처’와 비교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오타쿠 계층에서는 미야자키 사건이 있었던 당시 일본 TV에서 대형 동인지 판매전인 코믹마켓을 배경으로 “여기에 10만 명의 미야자키 쓰토무가 있습니다!”라고 옐로 저널리즘스럽게 보도했다는 것이 마치 정설처럼 오랫동안 이야기되었지만, 실제로는 그런 보도가 없었던 것으로 추정된다는 것이 올해 밝혀지기도 했다. 참조:「‘10만 명의 미야자키 쓰토무’는 있었는가?」, 야후재팬 뉴스 개인(dragoner/블로거), 2017.09.29) 아무튼, 서브컬처가 ‘교양’이 되어버린 시대에 플랫폼은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가. 다시 한번 오쓰카 에이지를 인용해보겠다. ‘오타쿠 문화’, ‘서브컬처’는 카도카와 쓰구히코 등과 같은 인물이 말하는 소위 ‘에코 시스템’(이 사회 속에서 말하는 ‘에코’란 ‘에콜로지’(환경)라기보다 ‘이코노미’(경제) 아니겠는가?), 즉 플랫폼 기업은 사람들이 투고나 2차 창작을 자발적으로 행하도록 만들고 있는데, 동시에 그것을 각자 본인의 의지나 자기표현이라고 만족할 수 있도록 해주는 시스템을 갖춰놓고 있다. (중략) 하지만 이제 와서 거기에 모이는 사람들한테 당신들은 착취당하고 있다고 설명해주어봤자 마르크스주의 등장 이전의 노동자들한테 당신들은 소외당하고 있다고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고, 하물며 아무래도 ‘혁명’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 듯하니 더 이상 설명해줄 기분도 들지 않는다. 2차대전 이후 출생 세대인 구 ‘오타쿠’들은 ‘내용’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차세대인 카와카미 노부오나 히로유키로 대표되는 정보공학계 오타쿠들은 플랫폼을 만들어냈다. 그리고 그 위에서 오타쿠 문화가 경제나 문화의 중추로 편입될 수 있는 시스템이 만들어졌다. 그 의미와, 그 결과 초래될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서는 조금 더 진지하게 생각해두는 편이 좋다는 것만큼은 경고해두고자 한다. (중략) 어쨌거나 ‘오타쿠’는 이젠 플랫폼 안에 기관의 일부로서 편입되어, 플랫폼 그 자체에 위화감을 느끼지도 않고 회의(懷疑)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이 나라 ‘보수’의 기조(基調)라고 할 만한 것이라면, 요즘엔 그런 것들 안에서나 찾아야 할 것이다. (오쓰카 에이지, 위와 동일) 다만 오쓰카 에이지는 이런 식의 구세대 ‘오타쿠 교양’의 붕괴에 대해 “한탄도 찬미도 할 생각이 들지 않”는다고 말하면서, 21세기에 접어들면서 일본에서 몇몇 오타쿠 평론가들 사이에 유행했던 ‘오타쿠 세대론’(세대 차이론)을 주장하는 듯이 받아들여지는 것을 경계하고 있다. (그것은 오쓰카의 다른 최근 책에서도 여러 번, 분명한 사례를 들면서 강조되고 있으니 실제로 진심일 것이다.) 즉 과거의 오타쿠들은 내용(contents)을 만들어내었으니 훌륭하고 요즘 IT 계열 오타쿠들은 플랫폼밖에 만들지 못했으니 뒤떨어진다는 식의 논의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 글에서 오쓰카가 언급한 ‘내용’이란 단어는 영어 단어로 보자면 ‘콘텐츠(contents)’에 해당하는데, 이는 서적에서 ‘차례’를 보통 ‘contents’라고 표기하는 것처럼 바로 ‘서적의 본문 내용’을 가리킨다. 또 플랫폼이라는 것은 종이책에서라면 바로 그 ‘종이’, 제본되어 한 권 한 권 묶여진 책의 본체 그 자체를 말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내용(콘텐츠)과 종이(플랫폼) 사이에 어떤 ‘우열’이 존재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 않겠는가. 플랫폼이 없이는 우리가 콘텐츠를 접할 방도가 없으니 말이다. 오쓰카가 문제로 삼는 것은 그런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라, 과거에는 ‘콘텐츠’를 만들어냈던 오타쿠들이 (세대는 바뀌었을지언정 결국 똑같은 ‘오타쿠’이니까) 지금은 플랫폼 안에 그 구조물의 부품처럼 편입되어 버렸고 심지어 그 상태를 불편하게 느끼거나 회의하지 않고 오히려 편안함을 느끼며 안심하고 있게 되었다는 점이다. 오타쿠들은 인터넷 시대 이후 PC통신의 채팅실에서, MSN메신저와 네이트온과 카카오톡 같은 인터넷 메신저에서, 블로그에서, 그리고 지금은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 SNS에서, ‘편안함’을 느끼고 있지 않은가. 심지어 PC통신 시절에는 모두가 글을 쓸 수 있는 ‘게시판’으로 시작했다가 ‘가입’한 회원만이 글을 볼 수 있는 ‘동호회’란 것이 만들어졌고 그 뒤에는 동호회로부터 ‘소모임’이란 것이 생기는 등 갈수록 ‘좁은 문’을 선택했다. 또한 채팅실에서는 ‘강퇴’(강제퇴장)를 시켰으며, 블로그에선 ‘서로이웃만 보기 기능’을, SNS에선 ‘페친’과 ‘블락’과 ‘뮤트’를 통해서 점점 더 ‘자기가 보기 편한 환경’을 계속해서 추구해왔다. 이것이 바로 ‘플랫폼 안에 부품처럼 편입되어 버렸고 심지어 그 상태에 오히려 편안함과 안심감을 느끼는 상태’라는 말이다. 이는 ‘어떤 장르든지, 창작이든 패러디든지, 만화든 소설이든 평론이든 굿즈든’ 어떤 것에든지 개방된 상태에서, 또한 모두가 다 같은 ‘참가자’일 뿐 누구도 ‘주인’이거나 ‘손님’이지 않은 ‘열린 환경’을 추구해왔던 코믹마켓의 이념과는 정반대인 셈이다. 당초에는 인터넷의 이념도 바로 그러한 ‘개방성’에 있었을 텐데, 실제로 그 인터넷상에서 추구되는 것은 ‘끼리끼리 모일 때의 편안함’이 아닌가 하는 말이다. 당초에는 발언의 자유를 위해서 시작되었던 인터넷의 익명성조차도, 실제로는 수많은 ‘딥 웹’ 방식의 ‘초보자나 타인의 참여를 기피하는 익명성 커뮤니티’를 보게 되면 오히려 ‘자유’를 ‘제한’하기 위한 목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곤 한다. 실제로 한국의 익명성 커뮤니티에서는 소위 ‘닥눈삼’, 즉 ‘닥치고 눈팅 삼 년’이라 하여 해당 장소의 분위기 파악을 하기 전까지는 상당한 장기간 동안 글을 쓰지 말고 읽기만 하라는 분위기가 유행했고, 일본에서도 익명 기반의 게시판 2ch(2채널)에서는 ‘ROM’(리드 온리 메모리의 약칭)이라 하여 한국과 똑같이 우선은 글을 쓰지 말고 읽기만 하고 있으라는 분위기가 존재했던 것을 보면, 그런 의심이 들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일본 인터넷에서 말하는 소위 ‘공기를 읽어라’(분위기 파악을 하라)는 말은 곧 ‘플랫폼에 적응하라’는 뜻이 아니겠는가. 플랫폼 안에서 ‘유저’들이 ‘손님’으로서 편안함을 느끼고 싶다는 욕망에 따라서 만들어진 분위기인 것이다. 미국에서 ‘망 중립성’을 폐지한다고 하던 뉴스 역시도, 바로 이런 ‘인터넷 속에서 벌어지는 자유의 제한’의 상징적인 조치인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더 나아가서 생각해보자면, 사회의 방향성이 ‘콘텐츠’에서 ‘플랫폼’으로 변경된 것에서 그다음 단계로, ‘플랫폼’으로부터 더더욱 기술적인 ‘네트워크’로 가버리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 정도이다.) 플랫폼과 유저 마인드의 문제 오타쿠층의 ‘현재’가 과거의 ‘교양’ 시대, 즉 콘텐츠를 창출해내고자 했던 모습에서 지금의 플랫폼을 중심으로 한 시대로 움직인 것 아닌가 하는 오쓰카의 이 지적은 흥미롭다. 실제로 과거의 오타쿠들은 일본에서나 한국에서나, 시대의 차이는 있을지언정(일본에서의 ‘1세대 오타쿠’와 한국에서의 ‘1세대 오타쿠’의 시기가 달랐던 것처럼) 초기에는 미야자키 쓰토무와 같이 ‘얕고 넓게’ 다방면의 ‘오타쿠 장르’를 섭렵하던 모습이었는데, 점점 갈수록 자기 자신만의 취향에 기울어져 세분화되어 왔다. 이 ‘세분화’를 나는 ‘파편화’라고 불렀는데, 말하자면 과거엔 오타쿠라면 TV에서 일본애니메이션도 보고 극장에서 디즈니 애니메이션도 보고 LD나 비디오로 일본의 OVA도 보았다. 새로운 게임이 나오면 관심을 가졌고 주브나일과 판타지 소설에서 유래한 ‘라이트노벨’이란 것이 인기를 끌게 되면 소설도 읽었다. 또 남자라도 TV에서 『들장미소녀 캔디』를 보았고 동호회에서 화제가 되는 작품이라면 (여성 취향의) CLAMP 만화나 『나의 지구를 지켜줘』나 『그 남자! 그 여자!』(카레카노)도 읽었다. 여자들도 『슬램 덩크』를 열심히 읽었으며(여성향 동인지 신(scene)에서 항상 최대의 장르였던 것은 『슬램 덩크』나 『테니프리』 『강철연』 『쿠로바스』 등과 같은 소년만화였다), 차세대 게임기가 나오거나 온라인게임의 유행에도 적극적이었다. 남자가 구체관절인형을 사고 여자가 건프라를 사는 모습이 드물지 않았고, 그것이 지금까지도 한국에서 완구 판매의 어떤 한 특징으로서 자리잡고 있다는 분석은 그리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다가 콘텐츠에서 플랫폼 쪽으로 ‘메인스트림’의 중심이 옮겨가면서 더 이상 ‘얕고 넓은’ 것은 오타쿠층의 ‘기본 소양’이 아니게 되었다. 바로 그 점을 지적했던 것이 ‘얕고 넓은’ 오타쿠 세대의 대표 주자 중 한 명이었다고 할 수 있을 ‘오타킹’ 오카다 토시오(가이낙스 전 대표)가 2006년부터 말해왔던 ‘오타쿠의 죽음(「오타쿠 이즈 데드」)’의 내용인 것이다. (이와 관련되어 2008년에 『오타쿠는 이미 죽었다』란 제목으로 단행본이 출간되었다. 다만 오카다 토시오는 이에 관해 블로그에서 ‘첫 번째 저작 『우리들의 세뇌사회』 때부터 일관적으로 내 입장은 〈닥쳐오는 시대를 거부하지 않는다〉였다. 나는 지난번 이벤트 때에 한 마디도 “요즘 오타쿠는 안 되겠다”, “요즘 애니메이션은 재미가 없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옛날 같은 오타쿠가 줄어든 것은 당치도 않다”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게 받아들인 사람이 있다면 그건 그 사람의 〈이해의 한계〉인 것이지, 그에 대해서 반발하든 찬동하든 나로선 곤란할 뿐이다’고 답변한 바 있다. [오카다 토시오 블로그 2006.05.27]) 따라서 오쓰카 에이지든 오카다 토시오든, ‘그 좋았던 옛날(벨 에포크 Belle Époque)’에 대한 향수로서 구세대의 오타쿠를 긍정하고 현세대의 오타쿠를 비판하기 위해 이런 말(옛날 오타쿠들은 넓은 분야를 즐겼는데 요즘은 파편화되었다는 지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다만 오타쿠의 세대론과 무관하게, ‘교양이 존재하지 않는(존재할 필요가 없는) 플랫폼’의 등장과 함께 모든 사람들이 그 플랫폼의 ‘유저(손님)’로서 자기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정의하게 되었다는 점을 오쓰카는 지적했던 것이다. 이 부분은 내가 오랫동안 한국 오타쿠층의, 나아가서는 한국 대중의 ‘손님 마인드’에 관해 지적했던 것과도 연결되는 문제의식이다. 내가 손님 마인드라고 부르는 것은, 말하자면 본인을 항상 ‘손님’의 위치에 두고 타인이 자신한테 ‘서비스’를 해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태도를 뜻한다. 소위 ‘감정 노동’의 문제도 결국은 이 손님 마인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겠는가. 물론 실제의 업체-고객의 관계에서도 ‘손님 마인드’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손님 마인드를 모든 방면에 적용시키면서, 스스로를 약자, 피해자 입장에 놓고 타인을 공격하고자 하는 태도인 것이다. 예를 들어 직접적으로 지불하는 금액은 없고 기껏해야 ‘트래픽을 통한 광고’를 보아줄 뿐이면서도 스스로를 ‘손님으로 대접받아야 하는 입장’에 놓고서 연예인이나 웹툰 작가 등한테 심한 악플을 달거나 고자세를 취하는 것이 심각한 사건으로 비화되는 일이 있지 않은가. 물론 돈을 냈더라도 ‘감정 노동’을 하게 되는 종업원 등에 대해 심각할 정도의 안 좋은 태도를 취하는 것도 문제일 테니, 단순히 돈을 내고 안 내고에 달린 문제라고만은 할 수가 없겠지만 그나마 돈을 직접 지불하지도 않은 상황이라면 아무래도 제 3자 입장에서 볼 때에는 눈살을 찌푸릴 수밖에 없다. 과거의 오타쿠들은 ‘모두가 똑같은 참가자일 뿐, 판매자와 구매자 사이에 업주-고객 관계는 없다’라는 코믹마켓의 정신을 필두로 하여, ‘내가 좋아하는 장르에 작품이 없다면, 내가 스스로 만들겠다’라는 식의, 말하자면 일종의 ‘참여 의식’이 있다 보니 상대적으로 나를 손님으로 대해달라, 나를 ‘유저(user)’로 대해달라고 하는 마인드가 지금보다는 적었다는 ‘설명’을, 오쓰카를 필두로 한 몇몇 1세대 오타쿠 출신 평론가·연구자들이 지금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유저가 유저 입장에서 ‘유저 마인드’를 갖는다는 것 자체가 나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어쨌든 과거와 달리 오타쿠라는 사람들에게 그러한 변화가 일어났다는 분석 자체는 분명히 의미가 있다고 본다. 특히 전 세계가 글로벌화되고 인터넷으로 연결되면서 대부분의 국가에서 유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 속에, 국내에서도 오타쿠층, 혹은 인터넷 사용자들 사이의 세대 분화가 어떻게 이루어지고 있는지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분석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가르는 기준은 육체다. 아아. 저 한마디 뱉는 순간 벌써부터 무수한 항변과 반론들이 들려온다. 기실 땅바닥만 찍지 않는 이상(헤어조그가 그런 적이 있었다고 재반론하고 싶지만 참는다) 육체를 찍지 않는 영화는 100년 동안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육체의 범위를 문자 그대로(“corpus”) ‘물체’로 조금만 확장하면 카메라를 들이대는 순간 모든 피사체가 이미 육체다. 심지어 카메라도 육체이고, 그걸 찍고 보는 작가도 관객도 죄다 육체다. 하지만 고전적 육체와 현대적 육체에는 본질적인 차이가 있다. 물론 그들 모두가 환경과 상호작용하면서 이미지의 변화를 표현하는 주인행세를 함에는 어떤 차이도 없겠지만 말이다. 고전적 육체는 정신의 담지자로서 먼저 나타난다. 고전적 육체는 정신적 가치보다 더 앞설 수 없다는 의미다. 물론 드레이어와 베리만의 영화에도 육체가 있다. 하지만 그들이 하얗게 지워져서 지금이라도 얼른 복원되어야 할 정신의 심도보다 먼저이진 않다. 그저 정신이 심도를 복원할 때까지 느릿느릿 움직여주고, 그에 필요한 말씀(<오데트>)을 전달해주면 그만이다. 고전육체는 정신의 수단인 셈이다. 반면 현대적 육체는 (신을 잃어버려서 그런지) 비틀거리고 넘어질 때 나타난다. 즉 진짜 육체는 피 흘리고 다칠 수 있는 육체다. 진짜 육체는 죽을 수 있는 힘으로 정의된다. 팔다리만 있다고 육체가 아니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갈 수 있어야, 그에 비명 지르고 펄쩍 뛸 수 있어야 진짜 육체다. 프레이밍에 의해 가려져 있던 잔 다르크의 가멸력을 화형대로 옮겨놓은 브레송은, 그런 의미에서 현대적 육체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고 말할 수 있다. 정신의 심도? 뜨거워 죽겠는데 무슨 심도 타령일까. 온몸의 신경이 화염에 불타오를 때 심도보단 비명이 먼저다. 요컨대 고전적 육체가 불멸의 정신적 가치(정의ㆍ믿음...)를 위한 수단에 불과할 때, 현대적 육체는 소멸의 물질적 가치를 위한 수단이자 목적이 된다. 누구 말을 빌리면, 진짜 육체는 가멸성의 “순수수단”이다. 표표히 사라지는 서부극 인물 죽을 수 있는 육체만이 진짜 육체라고 한다면, 고전 서부극엔 육체가 없다. 아무리 역마차의 속도가 빨라 봤자 그 종착지는 아메리카의 정의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셰인과 링코 키드는 죽지 않는다. 그저 표표히 사라질 뿐(물론 죽은 거나 진배없다는 추가해석이 가능하지만). 더욱 결정적인 사례는 종교영화들의 경우다. 종교적 상황들을 다루었던 고전시대극들에서 육체는 바리새인이나 유대인 할 것 없이 모두 휘황찬란한 의상들로 가려져 있다. 드밀과 와일러의 영화에서 육체보다 색깔이 먼저인 이유는 다시 색깔이 정신의 심도를 방해하거나 도와주는 역할을 맡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테크니컬러 총천연색에 모세의 남루한 넝마주이 패션이 극한의 대조를 이룰 때, 우리의 영혼은 더더욱 가열차게 기도 모드에 돌입할 수 있음이다. 즉 고전종교영화에서 의상은 정신의 척도만을 내어주지, 육체의 척도를 내어주지 않는다. 심지어 로마 군인들이 바닷물에 휩쓸려 죽는 것마저도 그나마 파도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는다. 여기서 중요한 건 육체가 죽었단 사실이 아니라, 로마제국과 그의 폭정이 죽었단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가장 육체의 출현을 방해하던 고전적 문법은 클로즈업이라고 할 수 있다. 얼굴 한 방이면 세계의 모든 것이 거기서 표현되고 있었다. 베리만은 이걸 한껏 즐겼다. 클로즈업은 육체의 죽을 수 있는 능력을 영혼의 가속도로 대체한다. <잠입자Stalker> (1972) 반대의 상황들로 가보자. 웨스턴을 지나 네오웨스턴으로 가보면, 거기엔 육체가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육체가 있어도 너무 육체만 있다. 정의감이나 신념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금 한 덩이 차지하기 위해서 동물적 본능만 남은 네오웨스턴의 육체들은 가히 ‘사막의 좀비들’이라 할 수 있다. 페킨파의 < 와일드 번치 >에 한 총잡이는 기관총 드립에 사망하여 널부러진 한 시체에서 금니를 캐내려고 한다. 이것은 모세의 정신적 넝마주이와는 본질적으로 다른 동물적 넝마주이다. 심지어 페킨파는 육체의 가멸성이 충분히 강조되지 않을까 슬로우모션으로 죽는 순간을 찍어댔고, 많은 평론가들에게 상욕을 들었다. 페킨파의 슬로우모션은 클로즈업이 표현하던 영혼의 가속도와 대비되는, 영혼이 육체를 떠나는 가속도다. 헐. 현대의 신학영화는 그렇지 않을 거야! 여전히 신학은 정신이다, 육체가 아니라! 라고 울부짖는 그대에게 일독을 권장하는 영화는 타르콥스키의 영화다. 비록 그가 인터뷰에서 열심히 “영성”과 “희생”에 대해서 말하지만, 정작 그의 이미지들을 보라. 거기엔 안개와 유황 가스를 뒤집어쓰고 어쩔 줄 몰라하는 육체, 자신의 존재를 잊을까 봐 초원 위에 마치 비디오데크가 고장 난 것처럼 일시 정지된 상태로 몇 분이고 서 있는 육체, 무엇보다도 공중부양하는 육체가 있다. 이른 결론으로 건너뛰자면, 정신성의 회복을 위해 타르콥스키에게 먼저 고양되어야 할 것은 영혼이 아니라 육체인 것이다(물론 이건 인간의 육체만은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 타르콥스키는 클로즈업을 마뜩잖아 했다. 클로즈업이 보고 싶나? 말씀을 쏟아내던 입이 삭제된 뒤통수 클로즈업이나 봐라(< 스토커 >). 현대적 육체는 클로즈업을 경멸한다. 얼굴은 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몇몇 예외가 있다. 얼굴들을 겁나게 이어 붙여서 줄줄이 비엔나로 엮어낸 후 맥놀이 하듯 겁나게 흔들면 다시 육체가 나타난다. 이것이 카사베티스의 경우이고 그의 독특성이었다. 천의 얼굴은 하나의 육체와 맞먹는 셈이다(<얼굴들>). 오발탄 (1961) “가자...가자..” 요컨대 고전영화와 현대영화를 가르는 기준은 ‘고통’이다. 고통이 없는 모든 영화를 고전적이라고, 고통이 있는 모든 영화를 현대적이라고도 부를 수도 있을 터다. 현대 신학영화는 이 기준의 반대급부이기는커녕, 이 기준을 가장 먼저 밀고 나갔던 고통의 첨병들이었다. 유현목 의 영화들이 타르콥스키보다 이른 현대적 신학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거기엔 고통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천근만근의 짐짝”에 짓눌릴 때의 압사의 통각이고, “가자...가자..”의 환청에 고막이 찢어지는 통각이다(< 오발탄 >). 아무리 클로즈업과 의상으로 가려봐도 이 고통의 파동은 사라지지 않는다. 얼굴 안에 충치는 하나쯤 박혀있기 마련이고, 파동은 육체의 신경과 힘줄에 직접 작용하기 때문이다. < 막차로 온 손님들 >에서 도마질 소리에서 괘종시계 소리로의 이행을 들어보라. 모세가 듣는 신의 목소리는 노래방 마이크에서와 같은 에코라도 걸려 있었다. 그러나 유현목의 세계는 노래방이 아니다. 십계현판이라는 마이크도 없는데 울려 퍼지기 때문이다. 그 마이크는 내 뇌 속에, 내 신경 속에 이미 있다. 이건 거의 고막의 화형식이다. 너는 죽는다. 육체이기 때문이다. 믿음은 이에 대한 통각 없이 아무것도 아니다. 신은 압력이 되었다(타르콥스키는 “시압time-pressure”이라 불렀던 그것). 이것이 유현목이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다. < 순교자 >에서 신부를 휘어 감는 문제는 신이 있냐 없냐가 아니었다. 그건 신은 없는데, 어떻게 십자가가 있느냔 것이다. 저기에 우뚝 서서 이 폐허를 압박하고 있는 파동의 중심으로서의 십자가가. 이 모든 측면들이 유현목을 한국최초의 육체적 작가로 만든다. 유현목이 영화는 “체험”이라고 강조함을 잊지 않았다. 말 그대로 몸의 경험인 것이다. 고통으로만 존재하는 신념의 상태.
*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늑대-여자들 어떤 영화로 리뷰를 쓸까 고민하며 올해 뽑은 나의 ‘사사로운 영화 리스트’를 한참 노려보다 특정 형상이 떠올랐다. 그건 세대도, 국적도, 상황도 다른 ‘늑대-여자’의 형상이었다. 무정부주의적 에코 페미니스트인 노년의 늑대-여자, 수의대 신입생 통과의례로 날고기를 먹은 후 낯설지만 강력한 자신의 힘을 지각하게 된 식인 늑대-여자, 돌연변이 유전자 실험으로 태어나 초능력을 지닌 십 대의 늑대-여자. < 스푸어 >(아크네츠카 홀란드, 2017)의 두셰이코, < 로우 >(줄리아 듀콜뉴, 2016)의 쥐스틴, < 로건 >(제임스 맨골드, 2017)의 로라가 바로 그들이다(늑대가 아닌 다른 동물로 더 확장해 논의하면 < 우리는 같은 꿈을 꾼다 >(일디코 엔예디, 2017)의 주인공으로, 소 도축장 품질검사관이자 사슴이 된 마리어까지 포함할 수 있겠지만 지면의 한계 상 제외한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종의 경계를 가로지르고 이접, 혼종, 합종하며 인간성, 더 정확히는 자본주의적이고 가부장제 적이며 인간 중심적인 인간성에 실존적이고 윤리적인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인간은 이 상태로 존재해도 되는가?’이다. 그러나 두셰이코, 쥐스틴, 로라는 인간성을 질문하기 위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깊게 파고 들어가며 또다시 인간 중심성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방식을 비껴간다. 오히려 폭력적인 악당으로서의 인간은 캐리커처화되고 종을 횡단해 동물성을 탐험하는 데에 초점을 맞춘다. 그것은 인간의 관점에서 본 동물성이 아니라 동물이 되어 감각하는 동물성이다. 인간은 그 스스로도 동물의 일부면서 특히 자신 내부의 야만성, 폭력성, 자기중심적 욕구충족, 비성찰성, 폐쇄성, 생존을 위한 이기심과 무한경쟁 등을 자신의 것이 아닌 듯 묘사하기 위해 ‘동물성’이라는 단어를 사용해왔다. 그러면서 인간을 동물에서 분리해 예외적 특권을 가진 존재로 가정한다. 이러한 위치선점은 인간의 지구 지배를 정당화하고 여타의 동물을 타자화한다. 그러나 < 스푸어 > < 로우 > < 로건 >의 늑대-여자들은 늑대와 혼종하며 동물성을 다르게 감각한다. 그녀들은 절대적 공감, 기존의 기표에 포섭되지 않는 소수자의 욕망, 경계와 고정관념을 흐리며 배치를 다르게 만드는 공동체, 자율과 야성성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소수자를 지지하는 연대를 특징으로 한다. 늑대-여자들은 아웃사이더이며 순응적이지 않고 폭력적이기도 하지만, 고립되지 않고 불가능할 것 같은 공동체를 형성한다. 때문에 ‘짐승 같은 야만성’을 강조하는 남성들의 영화가 늘 떼로 몰려다녀도 결국은 반복적으로 ‘고독한 늑대’로 결론 맺는 것과는 현격한 차이를 갖는다. 늑대-여자들이 주인공인 이 세 영화에서 기성 권력을 놓지 않으려는 남성과 자연을 지배하려는 인간의 이기심에 반격하는, 그래서 살인과 식인도 서슴지 않는 동물성은 소수자의 욕망이다. 두셰이코Duszejko “블랙코미디 요소를 지닌 무정부주의적인 페미니스트의 범죄 이야기”라고 아그네츠카 홀란드 감독이 스스로 정의내린 이 영화는 리벤지 스릴러, 미스터리, 액션, 코미디 등 다양한 장르가 섞여 있어 때때로 영화가 덜컹거리는 듯한 느낌을 준다. 하지만 그 덜컹거림, 그 이종적이고 이질적인 것들의 혼종이 바로 이 영화의 주제이고 미학이며 즐거움이다. 그 혼종성은 이 영화의 포스터에 직접적으로 드러나 있다.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커다란 늑대의 얼굴을 자세히 보면 한쪽 눈은 인간의 눈임을 알 수 있다. 인간의 재미를 위해 잔인하게 동물을 사냥하고, 제도, 법, 종교가 그 폭력을 승인하는 사회(법은 계절별로 사냥 가능한 동물을 지정하고, 종교는 사냥꾼을 축복한다)에 두셰이코는 늑대가 되어 복수를 감행한다. 사냥꾼들은 단지 동물만 죽이지 않는다. 여성과 아이 등 사회의 소수자들에 자신의 권력을 휘두르고 폭력을 가한다. 즉 사냥은 인간의 동물성이 아니라 권력과 위계의 문제다. 서사적으로 보면 이 복수는 사계절에 걸쳐 일어난다. 대부분의 리벤지 스릴러는 최종 보스를 만나는 장면에서 가장 스펙터클하게 액션을 감행하며 억압되어 있던 분노를 터트리는 식으로 진행되지만, 이 영화는 반대다. 복수는 천천히 이뤄진다. 이러한 서사는 동물과 여성에게 가해왔던 폭력이 그만큼 길고, 오래, 일상적이고 체계적으로 지속되어왔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이 폭력은 한 명의 남성 악당이 아니라 남성 중심 네트워크가 조직적이고 구조적으로 만들어낸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형식의 측면에서 보면 이 영화에서 동물을 보여주는 방식은 매우 독특하다. 동물은 단순히 풍경이 되지 않는다. 총성이 울릴 때 동물들이 도망치는 인서트에서 흔들리는 카메라는 사냥하는 쪽의 액션이나 스릴이 아니라 도망치는 쪽의 위급함과 다급함을 재현하며, 살인현장에 나타난 늑대와 사슴들은 그들의 시점 쇼트를 갖는다. 그것은 쇼트와 역쇼트의 형식에서 비가시적이었던 시점이다. 동물의 시점 쇼트는 늑대가 되어 복수를 감행했던 두셰이코와 마찬가지로 관객들로 하여금 종을 가로질러 사슴이나 늑대가 되게 하고 그들의 정념을 감각하게 한다. 쥐스틴Justine < 로우 >는 장르적으로 < 캐리 >나 < 진저스냅 > 같은 공포영화의 전통에 닿아 있다. 이 공포영화들은 10대 중후반 소녀의 섹슈얼리티를 위험하고 비규범적인 것으로 규정하며, 그 은유로 주인공 여성이 초능력이나 이질적인 정체성을 지각하게 한다. <로우>는 이 서브 장르를 차용하면서도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혐오하는 클리셰를 반복하지 않고 가장 급진적인 페미니스트 정치학으로 향한다. 부모, 언니가 모두 수의사이고 엄격한 채식주의자이자 모범생으로 자랐던 쥐스틴은 수의대 신입생 통과의례로 강제로 토끼의 생간을 먹게 된다. 그녀가 경험한 수의학과는 동물을 존중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며, 위계가 심한 남성 중심적인 문화로 가득한 곳이다. 여자들은 성적 희롱의 대상이 되고, 게이인 남성은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 와중에 이상한 허기 속에 쥐스틴은 날고기를 먹고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충족감을 느낀다. 영화는 인간적인 것과 비인간적인 것 사이의 경계와 금기를 거부하고 비체적인 피부 발진, 머리카락, 날고기, 물어뜯기, 오줌 싸기, 토하기 등을 보여주며, 여성의 몸에 대해 질문한다. 날씬한 몸을 위한 식이통제, 가랑이 털을 밀어버리는 비키니 왁싱(자매의 비키니 왁싱 장면은 공포영화사에 남을 명장면이다!)은 무엇을 위한 고통인가. 이것은 정말 인간적인가. 자신의 식인 욕망이 모계로부터 왔다는 것을 안 쥐스틴은 윤리적 선택에 직면한다. 엄마처럼 엄격한 채식주의자로 살 것인가, 언니처럼 자신의 욕망을 풀어놓고 사회의 심판을 받을 것인가. 그러나 부계 혈통의 < 늑대아이 >와는 달리 이 선택은 그렇게 깔끔하지 않다. 쥐스틴은 여성으로서 어떠한 곳에 맞지 않으면 부끄러움을 느끼게 되는 감정을 먼저 극복해야 한다. 그것은 단순히 식인 정체성뿐만 아니라 여성 정체성의 문제이기도 하다. 자신의 어두움이 어디서 오는지 알아야 윤리적 선택도 가능하다. 쥐스틴과 같은 젊은 여성이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할 때 느끼게 되는 일상적 폭력, 불쾌함, 분노는 잔인한 유머와 함께 클로즈업과 롱테이크, 촬영 속도를 변화시키며 흐르는 듯한 움직임과 거리를 둔 으스스한 금욕적 설정 쇼트를 오가는 카메라를 통해 우아하게 구현된다. 로라Laura 전통적인 남성 장르로 여겨졌던 서부극과 슈퍼 영웅 액션의 혼종인 < 로건 >은 고독한 ‘늑대-남자’의 죽음이자 새로운 종(트렌시젠) ‘늑대-여자’의 시작을 그린다. 이 영화에서 로라를 비롯해 실험실에서 태어난 뮤턴트 아이들은 위의 두 영화에 등장한 동물들과 마찬가지로 인간을 위한 도구로 사용되기 위해 우리에 갇혔다. 이제 늙고 병든 울버린보다 힘이 센 로라는 포스트페미니즘 시대에 걸 파워를 보여주는 전형적인 ‘아빠 딸 Daddy’s Girl‘이다.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능력을 유지할 수 없는 남성들은 딸들의 힘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런 그들이 자신의 힘을 여전히 확인하는 방식은 그 딸의 힘이 엄마가 아닌 자신에게서 왔음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로건>이 흥미로운 슈퍼 영웅 액션 영화인 것은 거기서 더 나아간다는 것이다. 로라는 울버린이 포기하고 프로페서 엑스가 망쳐버린 뮤턴트 공동체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는다. 여전히 ‘고독한 늑대’로 서부극의 남성 멜로드라마를 만드는 울버린과 달리, 그의 죽음 후 로라는 다른 뮤턴트 아이들을 이끌고 함께 떠난다. 모가장의 공동체를 이루었던 두셰이코, 자신의 정체성을 버리지 않고 다른 이들과 함께 하는 법을 고민하는 쥐스틴, 억압받는 이들의 공동체를 재건하는 로라, 늑대-여자들은 홀로 떠나지 않는다. 모계를 강조하고 부계와의 단절을 말하는 이 영화들은 사실 세 세대의 페미니즘을 명시적으로 보여주기도 한다. 60대 여성인 두셰이코의 페미니즘은 급진적 변화를 원했던, 즉 혁명적 비전을 가졌던 이들의 것이다. 그녀들은 기성 시스템을 말 그대로 꺼버리고 무정부주의적 혁명을 원한다. 세계는 다시 변화할 것이고 새로운 사이클 속에서 예측할 수 없는 것을 기다린다. 그래서 < 스푸어 >에서 모든 버려지고 배제된 존재들이 모여 있는 환상적인 공동체는 사적인 소망성취라기보다는 아직 오지 않은 현재다. 쥐스틴의 페미니즘은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몸이 고정관념과 편견 속에서 얼마나 억압되고 비인간적으로 통제되고 있는지를 비판하는 2세대 페미니즘의 전통에 있다. 가부장제, 규범성으로부터 여성의 몸과 섹슈얼리티를 해방시키는 것은 여성들에게 엄청난 힘을 돌려줄 것이다. 로라는 여성 또한 강한 힘을 갖고 리더가 될 수 있다고 보는 포스트페미니즘의 걸파워를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그녀는 거침이 없으며 타고난 재능과 힘을 주저하지 않고 발휘한다. 이 세 세대의 페미니즘은 연대기적이지 않다. 이 다양한 페미니즘은 소위 ‘페미니즘 리부트’ 속에서 함께 공존한다. 공통적으로 이들은 동물 종을 가로지르며 그동안의 인간성이 얼마나 남성 중심적으로 구성되어 왔는지를 비판한다. 또한 부계의 전통하에 있던 장르들을 어떻게 성공적으로 모계화 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여전히 폭력과 살인이 존재하지만 그것이 소수자의 욕망을 위해 사용되었기에 가능한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