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상의 길
- 감독
- 월리엄 디터르
- 제작년도
- 1954
- 출연
- 엘리자베스 테일러(Elizabeth Taylor), 피터 핀치(Peter Finch), 다나 앤드류스(Dana Andrews)
정성일 _ 먼저 책 소개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한울), 이 책은 1990년 5월부터 1991년 5월까지, 한 번을 쉬고 12달 동안 (지금은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잡지 「로드쇼」에서 ‘도시에(dossier)’라는 이름으로 연재된 내용을 이듬해에 한 권으로 묶은 것입니다. 올해로 어느덧 책이 나온 지 25주년이 되었는데, 이 책을 지금 돌아보면서 어떤 느낌이 가장 먼저 들게 됩니까? 사실 이 글이 연재되는 동안에는 제가 이 잡지의 편집장이었기 때문에 저도 이상한 추억에 잠기게 됩니다. 김홍준 _ 개인적으로는 ‘도시에’를 연재하는 일 년 동안은 ‘도시에’를 쓰는 것이 내 삶의 전부였습니다. 먹고, 자고, ‘도시에’ 쓰고. 그게 다였습니다. (웃음) 난 이전까지 영화를 좋아했고, 8미리 영화도 찍어봤고, (서울대 영화동아리) ‘얄라성’에서도 있어 봤고, 서울영상집단에도 있었고, 심지어는 유학을 가서 영상인류학을 공부하기도 했지만, 내가 직업으로서 영화를 택하리라고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도시에’를 쓰면서 일로서 영화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한마디로 말해 가장 처음 떠오르는 생각은 ‘도시에’를 쓰면서 비로소 내가 영화인이 되었구나, 라는 것입니다. 정성일 _ 25주년이라는 이야기를 했는데, 저는 이 책의 판매 부수(한울 출판사 집계 2016년 1월 현재, 초판 30쇄 44,000부)보다 더 큰 의미는 25년이라는 시간을 견뎠다는 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김홍준 _ (단호하게) 난 동의하지 않습니다. 정성일 _ 아니, 이 의미는 필자의 동의와는 관계가 없습니다. 그저 객관적으로도 이 책이 만약에 그렇지 않았다면, 애초에 출판사 한울에서 절판시켰을 테고, 인쇄를 하고 창고에 두는 것이 다 돈이기 때문에 실용적인 의미에서 봤을 때에도 이 책을 남겨놓을 이유가 없습니다. “동의하지 않는다”가 주관적인 대답이었다면, 객관적인 사실로서 이 책이 오래 견딜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는지요, 혹은 왜 이 질문을 부정하고 싶은지요? 김홍준 _ 왜냐하면, (잠시 생각) 책이 절판 안 되고 고맙게도 계속 나오긴 했지만, 이 책이 영향을 미칠 만큼 사람들에게 팔리고, 읽히는 부수는 굉장히 미미했습니다. 상대적으로 이 책은 책이라기보다는 영화라는 세계로 나서기 위한 문 앞에서 망설이는 사람들에게 손을 내밀어 이끌어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한 책과 정보가 필요했던 시절에 운 좋게도 내가 이 역할을 맡았던 것이고, 그래서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많은 사람들에게 반응을 일으키고 팔렸던 것입니다. 이 책이 감당했던 역할과 반응들은 어느 시점에선가는 거창하게 말하면, 역사적인 시효가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그 뒤에 이 책을 본다는 것은 한 시대의 기록으로서 혹은 하나의 복고 취미로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합니다. 책 자체의 의미로서 (현재까지 유효한 정보라는 것을) 나는 인정하고 싶지 않습니다. 이 책의 가치가 있다면, 이 책은 당시 90년대 초의 나 자신의 기록이자, 한국 영화 청년들의 공통된 문화 기록이라 생각합니다. 「영화의 이해」 「세계 영화사」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1992년 판 정성일 _ 거기에 대해서 나는 생각이 조금 다릅니다. 이 책이 나올 당시 이미 한국에는 영화에 대해 알고 싶다면, 훨씬 더 체계적으로 잘 정리된 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가 번역되어 있었고, 세계 영화사에 대해 알고 싶다면 잭 C. 엘리스의 「세계 영화사」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이 책이 나왔을 때, 즉각적인 반응을 일으켰습니다. 그런 다음 25년이라는 세월이 짧은 시간은 아닌데 그 시간 동안 이 책이 견딜 수 있었던 가장 큰 힘은, 주변에 나와 있는 대부분의 책이 교과서들이었다면, 이 책이 유일한 시네필 입문서였다는 점에서 저는 이 책이 갖는 매우 독특한 자리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시네필들에게 교과서를 보고 영화의 사랑을 일깨우라고 말하는 건 이상한 일입니다. 그래서 단지 정보의 문제가 아니라 인터넷과 SNS가 없었던 시절에 영화를 좋아하기 시작한, 심지어 시네필이라는 단어가 ‘수입’되기도 전의 시네필들, 그 사람들이 이 책을 보면서 거의 고립되어 있다시피 한 외로운 시네필들이 아아, 한반도에도 나와 같은 피를 가진 사람이 있구나, 내가 그렇게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구나, 나에게는 시네필 선배가 있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아닐까, 라는 연대감이랄까 공감의 공명이 반응을 불러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홍준 _ 그렇다면 시네필 커밍아웃을 한 책인 건가....(웃음) 정성일 _ 그렇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대한민국 시네필의 영년(零年, zero year)이라는 자리, 그 시간의 기록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김홍준 _ 그 말을 들으니, 자생적 공산주의라는 말이 있었듯 일종의 자생적 시네필이었다고 말하고 싶어지는군요(웃음). 시네마테크가 있어서 선배들이 야, 저기 가서 영화 좀 봐라, 해서 가 봤더니 비슷한 동료들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그러고 보니 내가 이 책을 쓸 때 영화판에 들어와 있는 조감독이었다거나 영화비평을 하고 있는 평론가였던 것도 아니고, 정말 영화계와는 공식적으로 아무 관계가 없는 아마추어이자 시네필이었습니다. 이 책을 쓰고 나서 충무로에 들어갔던 것이지, 영화 현장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 이 책을 쓴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것이 나의 의도와는 무관하게, 아마도 무의식적으로 이 책의 바닥에 깔린 목소리는, 위에서 옆에서 간섭을 하고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앞에서 말을 걸어오는 목소리였던 것 같습니다. 내가 영화 일을 하게 되었을 때, 이 책을 쓸 때와 가장 비슷한 느낌을 받았을 때가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에서 프로그래머 일을 할 때였습니다. 나는 프로그래머의 여러 일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고 영화제 프로그래머가 가져야 할 태도는, 내가 어떤 영화를 보자마자 그 영화가 너무 좋아서 흥분한 상태로 돌아와 다른 일을 하고 있는 친구를 흔들며 방금 어떤 영화를 보고 왔는데 그 영화 죽인다고, 그러니 그 영화를 보러 가라고 설득하면서 막 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런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쩌면 이 책도 그런 의미에서 소통하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방금 깨달은 건데, 이 책이 아직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사람들이 영화에 대한 정보는 갈급한데, 그걸 채워줄 길이 없었고, 기존의 영화 잡지도 없었고, 「로드쇼」「스크린」이 있었지만 팬덤 잡지에 가까웠고, 종이 매체들도 영화를 포함한 대중문화에 대해 진지하게 다루지 않았습니다. 내가 어디 가서 자랑하는 게 있는데, 왕가위의 < 열혈남아 >(1988) 한글리뷰를 처음 썼다는 것입니다. (웃음) 이런 것이 ‘도시에’가 했던 일이고. 나는 단순히 정보가 부족했던 시절에 나름대로 정보를 집약했던 책이라 사람들이 좋아했나 보다, 그리고 지금은 낡은 정보이고 틀린 정보도 있을 수 있고, 손쉽게 정보를 구할 수 있으니 시효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정성일 평론가가 말한 그 점에 있어서처럼 시네필의 목소리로, 그래서 시네필의 정체성을 드러낸 채로, 친구에게 동료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느낌을 사람들이 받을 수 있다면, 이 책의 가치가 있다 볼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설령 이 책에 거짓말과 틀린 정보가 있더라도 적어도 이 책을 쓴 저자의 태도는 의심할 수 없는 것이니까. 정성일 _ 이 책이 처음에 열렬히 받아들여지고 긴 시간 버틸 수 있었다는 것은 정보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책을 읽는 동안 전달되었던 태도와 감정적인 공감의 문제였던 것 같습니다. 2016년에 와서 보면 이 책에 있는 많은 정보는 교양이 되었습니다. 1995년 「키노」를 처음 만들면서 독자엽서를 받았을 때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이 ‘미장센이란 무엇인가요’ 였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에는 ‘미장센’ 샴푸가 나오더라구요(웃음). 그런 이후에도 이 책은 여전히 살아남았습니다. 이 질문이 어쩔 수 없이 뒤따라 쫓아 나오는데, 25년의 시간이면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개정판이 나오기 충분한 시간인데, 심지어 2편이 나올 수도 있는 시간이었을 텐데, 이 책의 어떤 것도 건드리지 않은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김홍준 _ 두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는 아까 이야기했던 것과 겹치는데, 쉽게 말해 구회영은 김홍준이 아닌 것입니다. 이 책을 세상에 내보낸 후로, 내가 영화계로 나간 후로는 구회영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스스로 생각한 것입니다. 두 번째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아니 그때도 말할 수는 있었는데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던 것인데(웃음), 이 책은 정확히 말하면 나 혼자 쓴 것이 아닙니다. 두 가지 의미에서. 많은 사람들이 놓치고 있지만 책은 구회영이 쓴 거로 되어있는데 로드쇼에 연재된 ‘도시에’는 세 사람의 이름으로 되어있습니다. 구회영, 김주현, 오윤평. 그래서 한때 이 세 사람에 대한 루머가 누구다, 라는 말이 돌곤 했는데 (웃음) 그런데 내가 지금 생각해봐도, 그게 한 달에 원고지 150매 분량이었습니다. 도비라(특집의 표지) 빼고 10개 꼭지(items), 꼭지마다 들어가는 박스 기사까지. 어마어마한 분량인데, 그걸 한 명이 매달 써낸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원고 매수였습니다. 학교를 다닌다든가, 다른 직업이 있다든가 그랬다면(웃음)... 완전히 먹고 자고 사우나 가고 ‘도시에’만 쓴 일 년이었습니다. 이쯤에서 플래시백으로 가보십니다(웃음). “그럼 ‘도시에’, 어떻게 쓰여졌나. 세상에 나오기까지” 자 일단, 첫 회는 생략하고 두 번째 회부터. 로드쇼가 서점에 깔리고 나서 반응이 오기 시작합니다. 독자들이 “이번 달 ‘도시에’ 좋았어요”, “미장센이 뭔가요” 등등의 엽서가 도착합니다. 「로드쇼」의 도시에(dossier) 지면 정성일 _ 인서트를 하자면, 당시 구회영 필자는 편집부에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독자엽서 다 가지고 와보죠”, 이러고는 ‘도시에’에 대한 엽서만 읽었습니다(웃음). 김홍준 _ 「로드쇼」사무실이 홍대 앞에 있었는데, 그때 거기서 살다시피 했습니다. 심지어 사장은 나를 직원인 줄 알았을 정도였으니까요. 늘 책상에 앉아있으니까. 일단 책이 나오면 일주일은 휴식 시간을 갖습니다. 그러면서 다음 달 ‘도시에’를 뭘 쓸까를 고민하는 건데, 그때 정성일 편집장과 계속 대화를 했습니다. 반응이 어떻고, 요즘 영화가 어떻게 돌아가고, 다음 달이 칸 영화제인데 올해는 코엔이 받을 것 같다는 둥(< 바톤 핑크 >), 데이빗 린치가 받을 것 같다는 둥(< 광란의 사랑 >), 그러면서 거의 다 맞혔습니다. 그렇지 않았나요, 우리가 예상한 게 거의 다 맞았어요. 정성일 _ 아, 맞아요, 그랬죠(웃음). 김홍준 _ 그래서 일주일간은 지난 한 달간 도시에를 쓰면서 피폐해진 몸과 마음을 다스리며 영화도 보고 맛있는 것도 먹고 사우나도 가고 하면서 다음 달 아이템을 고민합니다. 그 일주일이 지나면 정성일 편집장과 아이템을 정합니다. 이를테면 ‘이번에는 80년대 할리우드를 다뤄보자’, 그때는 인터넷도 없고, 컴퓨터도 없던 시절이었어요. 당시 난 ‘도시에’를 모두 원고지에 썼었습니다. 원고를 쓰려면 자료가 필요한데,「로드쇼」에 「카이에 뒤 시네마」「사이트 앤 사운드」「필름 코멘트」등이 매달 도착했습니다. 일본어를 못하는 것이 다행이었습니다. 영어는 어느 정도 됐고, 불어도 사전 찾아가며 읽을 수 있는 정도였는데, 일본어까지 알았다면 읽을 게 너무 많아서 ‘도시에’를 쓰지 못했을 것입니다. 「로드쇼」에 있는 영어와 불어로 된 자료를 모두 읽는데 열흘이 걸리고, 그다음 열흘 동안 쓰는 겁니다. 그런데 그 쓰는 방식이 다 같은 건 아니었습니다. 어떤 꼭지는 150매를 한 자리에서 다 쓰고 쓰러진 적이 있습니다. 어찌 보면 이 책에 있는 열두 꼭지는 제작방식이 다 다른 단편영화라고 봐도 됩니다. 어떤 것은 잘 풀려서 자료 정리 수준으로 빨리빨리 써서 띵까띵까 했던 것도 있고, 어떤 것은 끝내 안 풀려서..(잠시 생각) ‘제3세계 영화’ 같은 꼭지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일단 자료가 없었으니까요. 외국에서는 책을 내는 데 편집자 역할이 굉장히 중요하다, 라는 말을 그 전에 들은 적이 있었습니다. 편집자가 다 간섭하고, 의심나면 빨간 줄을 긋고, 하지만 이런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예술을 간섭하는 건 아니지 않나 했는데, 「로드쇼」의 ‘도시에’는 책으로 나오기 전 잡지에서, 편집자와 작가가 한국에서는 처음이자 어쩌면 마지막으로, 가장 이상적인 의미로 서로의 입장에서 최선의 것을 뽑아내는 협업을 했던 것 같습니다. 내가 이 주제를 감당할 수 있을까 했을 때 편집자가 끄집어내주고, 반면 잡지쟁이로 하루하루를 보내야했던 편집자가 가지지 못했던 감각, 혹은 아까 말한 시네필적인 순수함을 편집자에게 보호받으면서 쓸 수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로드쇼」는 정신 분열적인 잡지였습니다. (웃음) 표지에는 유덕화가 나오면서 속에는 누리끼리한 종이로 ‘도시에’ 라는 제목아래 ‘제3세계’, < 불타는 시간의 연대기 >, (<칠레 전투>의) 파트리시오 구스만, 이게 도대체 뭐야(웃음). 그래서 이 글은 편집자와 나의 공저입니다. 혹은 진정한 의미에서 편집자는 편집자의 역할을 했고 필자는 필자의 역할을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 정성일이라는 편집자와 그 당시 ‘도시에’를 썼던 그런 식의 관계와 작업조건이 갖춰지지 않는다면 이 작업은 내가 더 이상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내가 구회영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그런 조건이 필요한 것이지요. 그래서 못한 것입니다. 정성일 _ 쓰면서 가장 재미있었던 특집은 무엇이었습니까? 김홍준 _ 물어보나마나 ‘홍콩영화’입니다. (웃음) 첫 ‘도시에’이기도 했고. 정성일 _ 만일 개정증보판이 나온다면 남겨져야 할 것 중에서 가장 먼저 2016년 버전으로 다시 쓰고 싶은 챕터는 무엇입니까? 김홍준 _ 우선 빼고 싶은 것을 말하자면, ‘할리우드’에 대한 두 챕터입니다. 이건 통째로 빠지거나, 아니면 90년대 이후로 더 쓰여 시리즈로 가거나. 그게 아니라 다시 쓰는 거라면, 그건 원본을 보존하고 남겨야 할 가치가 있다는 거니까. 1번 ‘영화용어’는 워낙 일반적이고 굉장히 핵심적인 이야기들이라 영화가 존재하는 한 크게 만질 것 없을 것 같고, 2번 ‘영화의 역사’는 역사니까, 여기서 기록된 80년 이후가 첨가되면 첨가되겠지만 크게 바뀔 건 없다. 어려운 질문인데... (한참 생각 후) 3번 ‘우리 시대의 영화작가’를 다시 쓰고 싶습니다. 자비에 돌란 같은 감독들을 포함해서 새롭게 더 공부를 해서 써보고 싶습니다. 사실 지금은 영화감독을 발견하는 것도 힘든 시대가 되었습니다. 영화경력이 20년에 가까웠던 키에슬로프스키가 < 살인에 관한 짧은 필름 >(1988)으로 비로소 주목받았는데. 그런 시절은 이제 지나갔습니다. 지금은 기획사들이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아이돌 연습생으로 키우듯, 영화제들이 완성된 영화를 기다리는 수준이 아니라 탤런트 캠퍼스를 만들어서 끌어들이고, 거기서 점점 내려가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심하게 말하면 사육된다고 할까, 물론 나쁘게 말하는 건 아닙니다. 영화학교에서 만든 단편영화가 단편영화제에 나가는 순간 이미 그들의 레이더에 걸리는 시대가 되어버렸달까요. 정성일 _ 사실 저는 다시 써야 할 수정 버전에 좀 다른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오히려 첫 장으로 배치한 ‘영화용어’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왜냐하면 이 책을 쓰던 시절은 영화를 필름으로 찍던 시절이었고 우리들에게 디지털 영화라는 개념이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사실 지난 25년간 영화의 가장 큰 변화라면 필름에서 디지털로의 이행이었습니다. 이러한 이행을 지켜보면서 한 명의 감독으로서, 한 명의 영화선생으로서, 한 시절 영화제 프로그래머로서, 필름 시대에 시작한 시네필로서, 디지털 영화 시대의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이라면, 어떤 것들을 더 첨언하고 싶지 않을까, 했습니다. 필름의 많은 것들이 남겨져 있지만 동시에 디지털 시대이기 때문에 새로이 첨언하거나 수정해야 할 항목들이 생겨나지 않았습니가? 김홍준 _ (잠시 생각)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한, 우리가 오늘날 영화라고 부르는 것은 어떤 형태로든 존속될 것입니다. 영화라는 것도 예전 동굴 벽화에서 시작한 것이라 볼 수 있듯이. 우리 세대가 몰랐던 것은, 마치 르네상스의 프레스코가 그랬고, 건판사진이 그랬듯, 알고 보니 영화 말고 ‘필름’이란 것은 단기간 존재하는 포맷이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철썩 같이 뻗어 나갈 것이라 생각했던, 적어도 물리적 재료로서의 필름은 단기간 존재하는 포맷이었던 것입니다. 이 생각이 굉장히 재미있다고 생각했던 것이, 10여 년 전에 동경 FIAF 총회에 다녀왔었는데, 당시 주제는 단명한 필름 포맷(short-lived film format)이었습니다. 각 나라의 연구자들이 한때 존재했다 없어졌던 포맷을 발표했는데, 일본에서는 9.5mm 필름을 소개했습니다. 이는 무성영화 시절, 그러니까 비디오가 없던 시절이니 1시간 반짜리 35mm 필름의 장편영화를 9.5mm 필름으로 만들면서, 10분짜리 축약본으로 제작해 개인적으로 소장했다고 합니다. 개인적으로 집에서 보고, 아버지가 변사를 했던, 그렇게 집에서 틀어서 봤던, 지금 짤막짤막하게 남아있는 무성영화들은 그런 게 많다고 합니다. 원본 영화는 사라졌는데, 가정용 축약본은 남아있는 그런 단명한 포맷들이 있었다고 합니다. 사실 길게 보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필름이 그런 겁니다. 쿠엔틴 타란티노와 크리스토퍼 놀란이 필름으로 찍고 코닥을 살려야 한다는 운동도 있고, 필름의 장점을 이야기하지만 그런 것이 벌어지는 자체가 오늘날에도 프레스코화를 그리는 사람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디지털을 기술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시각 매체의 진화의 역사로 보는 것입니다. 여기서 진화를 오해하지 말 것은 낮은 단계에서 높은 단계로 발전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환경에 적응해가면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우연한 방향으로 바뀐다는 의미의 진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가 영화라고 부르는 것, 영화 속에 필름과 디지털이 있지만, 뒤집어 말하면 전혀 다른 방향으로 분화해가는 과정일 수도 있습니다. 우리가 현재 영화라고 부르는 것은 필름으로 상영하건 디지털로 상영하건 극장에서 보고 극장 개봉이 끝나면 집에서 혼자 보거나 소장하거나,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닌, 지금의 YouTube로 대변되는, 말하자면 랜덤 억세스(random access)가 되는, 전체를 볼 수도 있고 부분을 볼 수도 있는, 쌍방이 소통할 수 있는. 디지털과 무관하게 영화라는 것이 아직 우리가 모르는 다른 것으로 갈 수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100년 후 영화박물관에서는 영화에 대한 것을 소장하고 전시를 하고 있는 것뿐 아니라 거기 가면 옛날 방식으로 영화를 볼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똑같은 영화를 필름 프린트로 본다는 차원이 아니라 역시 거기서도 디지털로 상영하긴 하나, 그 시기에는 정해진 시간에 사람들이 모여 영화를 본다는 그 경험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르기 때문에 그런 영화를 보는 방식까지도 영화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게 나의 생각입니다. 디지털은 사회문화적인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생산되고 소비되고 관객과 만나는 이러한 시스템 자체를 진화시키는 동인으로 작용하지, 단순히 필름과 디지털을 테크놀로지의 차이로 보는 것은 착시 현상이 아닐까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얼마 전에 코닥이 수퍼 8 필름을 다시 내놓기로 했다는 것입니다. 일반인들이 필름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영사기와 카메라들까지 시리즈로 내놓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벌써 부자들의 호사스러운 취미용이라는 비난도 들리고 있습니다. 표1: 영화 100선 중 상위 10편의 영화 정성일 _ 다음 장으로 넘어가볼까요. (웃음)「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이 갖는 시대적인 한계 안에서 반대로 동시대적인 통찰력(contemporary insight)라고 할까요. 아마 그것을 보여주는 대목이 100선의 챕터일 것입니다. 이 책에서 1990년에 뽑은 영화사상 베스트 10 목록과 2012년 영국 영화잡지「사이트 앤 사운드」가 전 세계의 평론가들에게 앙케이트 한 베스트 10 목록을 비교해보았습니다. 긴장되죠? (웃음) 구회영 버전에서는 1위 < 시민 케인 >(1941), 2위 < 잔 다르크의 수난 >(1928,) 3위 < 전함 포템킨 >(1925), 4위 < 수색자 >(1956), 5위 < 대지 >(1930), 6위 < 게임의 규칙 >(1939), 7위 <칠레 전투>(1975~79,) 8위 < 거미집의 성 >(1957), 9위 < 현기증 >(1958), 10위 < 비정성시 >(1989) 였습니다. 가장 놀라운 건 2012년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는 1위가 < 현기증 >입니다. 사실 <현기증>이 <시민 케인>을 제치고 1위로 올라온 것이 2012년이 처음이었고, 10위 안에 들어온 것도 2002년이 처음이었습니다. 김홍준 _ (다소 흥분한 어조로) 그러니까 우리가 이보다도 10년 전에 먼저 한 것입니다. 정성일 _ 2위가 < 시민 케인 >, 3위 < 동경 이야기 >(1953), 4위 < 게임의 규칙 >, 5위 < 선라이즈 >(1927), 6위 <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1968), 7위 < 수색자 >(1956), 8위 < 카메라를 든 사나이 >(1929), 9위 < 잔 다르크의 수난 >, 10위 < 8과 1/2 >(1963)이었습니다. (10위 안에 없는) < 동경 이야기 >는 구회영의 목록에서는 13위에 랭크되어 있고, <카메라를 든 사나이>는 15위에, <8과 1/2>은 32위에 올라와 있습니다. 이 목록이 이미... 김홍준 _ 신들린 목록이구만. (웃음) 정성일 _ (웃음) 다소 거만하게 말하자면 이미 25년전에 ‘컨템포러리’한 목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만약 2016년 버전으로 이 목록을 만든다면 어떤 영화가 베스트 1이 될 수 있을까요? 김홍준 _ 대세로 간다면 < 현기증 >이여야겠지만, (한참 생각한 후) 지금이라면 < 동경 이야기 >인 것 같아요. 정성일 _ 그 영화가 1위가 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김홍준 _ < 시민 케인 >을 1위로 뽑았던 30대 중반의, 아직 직업적 영화인 전의 시네필이었던 어떤 사람이 25년의 세월 동안에 영화를 직업으로 택했고, 운이 좋아서 어쩌면 한 사람의 일생 속에서 영화에 대한 정말 다양한 일을 하고, 25년 후 리스트를 다시 볼 때, 그 사이에 내가 어떻게 변했는지, 한 명의 인간으로서, 또 영화에 대한 생각과 태도, 그걸 표현하는 방법이 있다면, 25년 전에는 <시민 케인>인데, 지금은 < 동경 이야기 >라는 결론을 내린 거죠. (잠시 생각) 이렇게 스스로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거기에 대해서는 각자 다양하게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환갑이 되더니 정신을 차렸나 보다, 복고적인 가족주의로 회귀하는 수구파가 됐나 보다 등등. (웃음) 표2: 1980년대 영화 10편 정성일 _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재미있는 것은 이 목록을 연대별로 다시 정리를 했다는 것입니다.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에서도 80년대 영화 100편을 뽑기도 했죠 김홍준 _ 그때가 제일 신나고 재미있었죠! 정성일 _ 그래서 「사이트 앤 사운드」에서 2012년에 평론가들이 뽑은 80년대 영화들과 80년대가 막 지난 일 년 후 1990년에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에서 뽑은 목록을 다시 비교해보았습니다. 이쪽이 훨씬 흥미롭습니다. (웃음) 김홍준 _ 여기엔 전제가 있습니다. 이게 구회영이니까 가능했던 것이 여기 있는 80년대 100편 중 80퍼센트는 한국에서 볼 수 없는 영화들이었습니다. 내가 예술전용관도 있었던 필라델피아에서 유학생활을 했기 때문에, 그리고 80년대부터 아트하우스 영화들이 미국에서 비디오로 출시되기 시작했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빔 벤더스의 초기작이니 파스빈더 영화들이니 하는 이런 영화들을 내가 보고 와서 이 목록을 채울 수 있었습니다. 심지어 나도 당시에 자막이 없는 영화를 보고 나중에 다시 보고 아, 이런 이야기였구나, 이런 창피한 비화도 있습니다.(웃음) 정성일 _ 당시 구회영이 뽑았던 80년대 100편의 1위는 < 비정성시 >... 김홍준 _ 그 작품에 대해서는 현재도 이의가 없습니다. 정성일 _ 2위가 <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 거야 >(1989), 3위 < 나쁜 피 >(1986), 4위 < 성난 황소 >(1980), 5위 < 집시의 시간 >(1989), 6위 < 쇼아 >(1985), 7위 < 베를린 천사의 시 >(1987), 8위 < 메이트원 >(1987), 9위 < 똑바로 살아라 >(1989), 10위 < 희생 >(1986). 김홍준 _ 리스트를 듣는데 왜 눈물이 나려고 하지. (웃음) 정성일 _ 「사이트 앤 사운드」가 뽑은 목록은 1위가 < 쇼아 >, 2위 < 성난 황소 >, 3위가 공동순위 3편입니다. < 블레이드 러너 >(1982), < 태양 없이 >(1983), < 블루 벨벳 >(1986). 6위 < 화니와 알렉산더 >(1982), 7위 < 비정성시 >, 8위가 공동 순위 두 편입니다. < 돈 >(1983)과 < 똑바로 살아라 >. 10위가 공동 순위 5편인데 < 컴 앤 씨 >(1985), < 먼 목소리, 정지된 삶 >(1988), < 이웃집 토토로 >(1988), <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1984), < 샤이닝 >(1980)입니다. 이 목록이 구회영의 100편 안에서는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가 12위, <컴 앤 씨>가 20위, <블레이드 러너>가 17위, <블루 벨벳>가 31위, <태양 없이>가 36위, <화니와 알렉산더>가 46위, 브레송의 <돈>이 86위, <먼 목소리, 정지된 삶>이 96위, <샤이닝>이 97위입니다.「사이트 앤 사운드」가 뽑은 14편 중 미야자키 하야오의 <이웃집 토토로>, 단 한 편만 빠졌습니다. 80년대가 끝난 지 일 년 후, 1990년에 뽑은 100편 안에, 22년 후에 뽑을 목록의 14편 중 한 편을 제외하고 모두 다 목록에 있었다는 것은, 이 책이 가지고 있는 ‘동시대성의 안목’이라고 믿습니다. 원래 질문은 두 가지였습니다. 지금도 1위는 <비정성시>라고 이야기했으니, 남은 질문을 하겠습니다. 지금 다시 80년대 영화를 뽑는다면 열편 중에서 빼고 싶은 영화는 무엇입니까? 김홍준 _ 카네프스키의 < 얼지마, 죽지마, 부활할 거야 >. 정성일 _ 이유가 궁금합니다. 김홍준 _ 당시 소련영화에 대한 환상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그 영화 자체가 가지고 있는 한계, 그것이 나쁜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던 것을 당시에는 못 봤던 것 같습니다. 감독의 이후 행보가 역설적으로 증명했던 것 같아요 그래서 이 10편중에 시간의 흐름을 견디지 못한 영화는 그 영화인 것 같습니다. 다른 영화들은 시간의 흐름을 견디거나 가치가 올라간 면이 있는 반면에... 표3: 김홍준의 21세기 영화 10편 정성일 _ 21세기 영화 10편을 부탁했습니다. 이 열편은 어떤 기준으로 뽑았는지 궁금합니다. 여기서 궁금한 건 평가의 척도가 아닌 맥락입니다. 김홍준 _ 목록은 제작연도순입니다. 내가 이 영화들을 처음 만났던 순간에 어느 정도까지 매혹되었는지, 그 매혹이 기준입니다. 영화는 물론 복제된 것이지만 누구와 봤는지, 어디에서 봤는지, 언제 봤는지, 내가 어떤 상태에서 봤는지, 실연당한 직후에 < 나쁜 피 >를 볼 때와 한참 사랑에 빠질 때 <나쁜 피>를 볼 때 전혀 다른 영화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2000년대에는 내가 이미 직업 영화인으로 살고 있었기 때문에 각각의 영화를 볼 때, 어떤 영화는 프로그래머로서 만났고, 어떤 때는 시네필로 만났고, 어떤 때는 교수로서 만났고. 하지만 이 목록은 나의 자리와 무관하게, 말 그대로 보는 순간 나를 시네필의 자리로 돌려보낸 영화들입니다. 그냥 영화에 빠지고 매혹되고, 그냥 너무 좋았던 영화들입니다. 그러니까 더 찾으면 더 있을 것입니다. 우선 떠오르는 대로 10편을 찾아본 것입니다. 때로는 매혹이란 것이 끝난 후에는 뒤끝이 찝찝할 때도 있고, 때로는 당장 그 당시에는 어리둥절하지만 다시 볼 때 아, 비로소 이해하게 되고, 그런 영화가 있었고. 말 그대로 척도가 아닌 영화를 보는 맥락과 적어도 그 순간에 영화를 보는 나를 매혹시켰던 영화들입니다. 그리고 지금 다시 본다고 해서 그 매혹이 돌아온다는 보장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 뽑은 건 어제 뽑았지만, 그 기준은 내가 그 영화를 처음 봤던 그 순간의 매혹입니다. 가령 < 엘리펀트 >를 처음 본 것은 로테르담 영화제에서였는데, 이미 그때 칸에서 상을 받았기 때문에 이름은 알려져 있었지만 못 보고 있었습니다. 사실 로테르담에 가서 이렇게 유명한 영화를 본다는 것은 약간의 직무유기지만 너무 궁금해서, 그리고 본 다음에는 아, 이런 거였구나. 전혀 내가 생각했던 영화와 다르구나, 이런 느낌이었습니다. 정성일 _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의 12개의 챕터 중에서 한 사람의 감독에게 바친 것은… 김홍준 _ 빔 벤더스. 정성일 _ 네, 빔 벤더스입니다. 사실 벤더스에 대한 사랑은 25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하구나, 라고 생각한 건 이번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하는 ‘2016 시네마테크의 친구들 영화제’에 빔 벤더스의 <이 세상 끝까지>를 추천한 것을 보고 일편단심에 약간 감동을 받았습니다. (웃음) (영화제에서는 < 이 세상 끝까지 >의 수급이 어려워 <패널티킥을 맞이한 골키퍼의 불안>으로 대체하였다.) 김홍준 _ 고백하자면, 벤더스의 영화는 2000년 이후의 영화들은 보지 않습니다. 안 보는 게 예의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웃음) 정성일 _ 물론 빔 벤더스가 처음 나타났을 때, 가장 눈 밝은 비평가일 세르주 다네와 하스미 시게히코가 지구 정 반대편에서 가장 기대하는 영화감독으로 주목을 했었습니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선 이후 거의 모든 영화 비평가들, 혹은 영화제들, 시네필들의 관심에서 멀어져버렸습니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를 발견했다고 그렇게 자랑하는 하스미 시게히코의 흑역사인 셈인데(웃음), 김홍준에게 빔 벤더스는 어떤 감독입니까? 김홍준 _ 간단합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실제 만나본 감독입니다. 약간 과장하자면 감독도 살아있는 사람이구나, 를 알게 해준 감독이랄까, 그전까지 난 감독이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고 뭔가 신과 같은 존재인 줄 알았습니다. 감히 인간이 영화를 만들 수 있나 싶었습니다. 가까이에서 본 건 아니고 멀리 있는 빔 벤더스에게 손을 들어 질문을 한 것이었지만. (웃음) 정성일 _ 그 후 어느 지점까지는 계속 벤더스 영화에 관심을 갖고 본 셈이군요. 김홍준 _ 계속 감탄을 금치 못하고 봤습니다. 빔 벤더스 정성일 _ 빔 벤더스의 어떤 면이 김홍준을 매혹시켰습니까? 김홍준 _ 일단 나이로 치면 11살 차이가 나는데, (웃음) 벤더스가 유년기를 보냈던 곳이 50년대의 분단 독일이었습니다. 벤더스라는 내성적이고 머리는 좋고, 의대 들어갔다가 때려치우고 오직 영화를 보러 파리에 간, 그리고 열심히 록큰롤을 듣던 청년. 벤더스가 50년대 록큰롤을 들을 때 난 딱 10년 후에 태어나서 60년대 한국에서 팝송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벤더스가 의대 공부를 때려치우고 파리 시네마테크에서 죽치고 앉아 영화를 보고 있었을 때, 그때 벤더스는 일 년에 천편을 봤다고 합니다, 그때 난 서울대를 가서 8mm 카메라를 들고, 과외로 번 돈을 열심히 탕진하고 있었습니다. 뭐랄까, 이상한 평행의 간극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런 거장과 나를 비교하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그래서 급(急) 친밀함을 느꼈던 게 아닐까 합니다. (웃음) 내가 벤더스의 영화를 처음 본 것이 < 도시의 알리스 >였는데, 뭐랄까 나를 보라고 만든 영화인가, 이거 내가 만든 거 아냐,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작년에 유럽 여행을 갔었는데, 바쁜 투어 일정 중에 <도시의 알리스>에 나오는 모노레일을 코스에 넣기도 했습니다. 거기서 모노레일을 탔는데 좋더라고요. 이런 것들이 그의 초기작을 볼 때 테크니션이나 프로페셔널로서가 아니라 시네필로서 영화 만들기라는 것이 첫 영화부터 느껴졌습니다. <패널티킥을 맞이한 골키퍼의 불안>(1972), <도시의 알리스>(1974), < 빗나간 동작 >(1974), < 시간이 흐르면 >(1976), < 미국인 친구 >(1977), <룸 666>(1982), <물 위의 번개>(1980), < 도쿄가 >(1985) 여기까지가 내가 생각하는 벤더스의 영화입니다. < 파리 텍사스 >(1984)부터는 내가 좋아하는 벤더스의 영화가 아닙니다. 정성일 _ 만약 2016년 개정판을 만든다면 벤더스의 자리에 누구를 넣고 싶습니까? 김홍준 _ 너무 진부해서 말하면 화낼 것 같은데, 한 번 맞혀본다면? 정성일 _ 허우 샤오시엔? 김홍준 _ 허우 샤오시엔입니다. < 자객 섭은낭 >(2015)을 본 순간,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면 에드워드 양. 어쩌면 100년 뒤의 사람들은 허우 샤오시엔 보다는 에드워드 양을 기억하고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정성일 _ 저는 이미 그런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크라이테리언 출시) 김홍준 _ 이번 크라이테리언에서 에드워드 양의 < 고령가 소년 살인사건 >(1991) 블루레이가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까? 난 21세기 크라이테리언 최대 사건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이 영화를 본 사람이 지구상에 다 합쳐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근데 이제는 이론적으로 수십 수백만이 볼 수 있는 거 아닙니까! 또 하나, 벤더스를 쓸 수 있었던 조건 중 하나가 벤더스를 사심 없이, 편견 없이 그 사람이 거장이기 전에 우연찮게 내가 꼬마였을 때 봤던 행운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허우 샤오시엔과 에드워드 양도 마찬가지입니다. < 장미빛 인생 >(1994)을 찍고 그 영화가 영화제에 불려갈 것이라고는 꿈도 꾸지 않았는데, 기술 시사 때 우연히 토니 레인즈가 보고 밴쿠버 영화제에 초청했습니다. 그해 밴쿠버에 대만 감독웰옘섯?초청받았습니다. 에드워드 양, 차이밍량, 우닌지엔. 각각 <독립시대>(1994), < 애정만세 >(1994) 그리고 <다상>(1994)을 들고 왔습니다. 난 그때 그 우닌지엔이 < 비정성시 >의 (각본을 쓴) 오념진인 줄도 몰랐습니다. 거기서 에드워드 양을 처음 만났었는데, 형처럼 너무 잘해줬습니다. 그리고 몇 달 후 낭뜨에 초청을 받아서 갔더니 거기에도 그 팀들이 또 와있었습니다. 그 후에 칸에서도 보고. 에드워드 양에 대해 생각하면 그래서인지 많이 애틋합니다. 에드워드 양은 나를 기억하려나 모르겠지만. 임권택 감독님과 함께 < 춘향뎐 >(2000)을 가지고 텔루라이드 영화제에 갔었을 때 에드워드 양은 < 하나 그리고 둘 >(2000)을 가지고 왔었습니다. 이 영화를 나와 임권택 감독님이 같이 봤는데, 영화가 너무 길고 영어자막밖에 없어서 혹시 감독님이 지루해하시는 건 아닌가했는데, 영화를 보시더니 “잘 만들었구만” 하시더니 “감독이 어디 있나” 해서 소개해드렸습니다. 그런 추억들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보면 에드워드 양... 아아, 허우 샤오시엔 취소! 에드워드 양은 또 딱 7편입니다. (웃음) 정성일 _ 이 책을 읽다가 느껴지는 또 하나의 쓸쓸함 중 하나는 영화가 시간 안에서 얼마나 연약한가, 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수많은 영화들, 감독들이 25년이 지난 후에, 심지어 어떤 감독은 머릿속에서 완전히 사라졌다가, 이 책을 들쳐보면서 아, 그때는 참 주목받았었지, 이런 이름들도 있었습니다. 너무나 많은 제목들이 문득, 아 그때 그런 영화가 있었구나, 싶었습니다. 구회영에게 이 책을 쓸 때로부터 객관적으로나 마음속으로 가장 추락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꼭 한 사람이 아니더라도... 김홍준 _ 거기까지 깊게 생각은 안 해 봤습니다. 정성일 _ 나에게 있어… 이 책이 열광하고 있는 이름 중에 가장 극적으로 추락한 사람은 첸 카이거였습니다. 김홍준 _ 아, 근데 첸 카이거는 이미 그때부터 조짐은 있었습니다. 정성일 _ 그래도 1990년까지는… 김홍준 _ (잠시 생각) 첸 카이거, 그렇죠. 기대치에 비해서. 그리고 어떤 감독은 우리가 오해했구나, 원래부터 아니었구나 싶은데, 첸 카이거는 원래부터 아니었던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뭐가 그렇게 그 사람을 망가뜨렸을까 라는 점에서 좋은 예가 될 것 같아요. 정성일 _ 또 다른 의미에서 오해했던 사람이 뤽 베송이었던 것 같습니다. 미학적인 뭔가를 블록버스터와 연결시키면서 뭐랄까, 프랑스의 스필버그 같은 감독이 될 줄 알았는데 이런 지경이 될 줄이야... 김홍준 _ 프랑스의 하비 와인스타인이 된 거지.(웃음) 그때는 < 니키타 >(1990)가 워낙 좋았으니까. 뤽 베송을 더 주목했던 것에 비해, 장 자끄 베넥스를 좀 우습게 봤던 것 같아요. 지금 보면 오히려 베넥스가 자기 목소리를 내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합니다. 거기에 비하면 뤽 베송은 그냥 장사꾼이었던 거죠. 정성일 _ 이 책이 쓸 즈음에 우리에게 가장 운이 나빴던 것은 스티븐 스필버그가 슬럼프였던 게 결정적이었습니다. 김홍준 _ 아, 맞다. 이제 끝났다고 생각했죠. 반면 이 책에서 예언처럼 주목했던 미국의 인디작가들은 거의 100 퍼센트 성공했습니다. (웃음) 정성일 _ 대표적으로 코엔 형제가 있죠 김홍준 _ 그때는 감독으로서 애였죠! 완전! 이 책을 쓰고 있을 때 < 밀러스 크로싱 >을 찍고 있었으니까. 정성일 _ ‘도시에’를 쓸 당시 코엔형제의 이름은 어디서도 볼 수 없었으니까요. 하지만 이 책이 열렬하게 지지했음에도 시간을 못 견딘 또 하나의 사람은 스파이크 리인 것 같습니다. 김홍준 _ 근데 스파이크 리는 문화 현상으로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 똑바로 살아라 >까지는 괜찮았습니다. 컬드영화 10계명(「로드쇼」 도시에) 정성일 _ 이 책에서 한편 가장 견디지 못한 챕터 중의 하나가 컬트영화였던 것 같습니다. 역설적으로 이 책이 처음 나왔을 때 가장 열광적인 반응을 부른 챕터가 또 컬트영화였습니다. 김홍준 _ 뜨거웠죠! 지금도 기억나는 게 독자엽서에 이달에 가장 좋았던 기사, 이런 게 있었는데 그 달에는 압도적으로 컬트영화에 대한 거였습니다. 다들 이 영화가 컬트영화야, 이러면서도 막상 그게 뭔지 물어보면 아무도 몰랐던, 그런 시절에 이 책이 ‘십계명’ 이러니까... (웃음) 정성일 _ 한편으로 컬트영화라는 현상이 한국에서 가능했던 까닭은 정확하게 그 시기에 마치 신흥종교처럼 번져나갔던 비디오테이프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말하자면 이 특집은 제 시간에 도착했다 할까요. 하지만 인터넷이 시작되고, 온갖 경로를 통해 한국에서 온갖 영화를 볼 수 있는 관람환경이 만들어지자 토렌트나 YouTube를 통해 접하지 못하는 영화가 없어지다 보니까 컬트영화라는 현상 자체가 사라져 버린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영화현상이라는 측면에서 그 당시의 기이하고 특별한 컬트영화라는 현상이 있었다면 지금 이 세기에는 어떤 현상이 그 자리에 있다고 생각합니까? 김홍준 _ (단호하게) 일단 영화학교에 시네필이 없습니다. 정성일 _ 그건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김홍준 _ 가장 기이한 현상은 영화학교에 다니면서 본인이 시네필이라는 것 때문에 굉장히 고민하고 고생하는 학생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진짜 마이너리티들. 얘네들이 구축하고 있는 독특한 세계가 있는데 굉장히 기이해요. 정성일 _ 영화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칠 때, 이 학생은 어떻게 하다가 영화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을까 궁금한 학생들이 많습니다. 영화를 전혀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영화 보는 것도 전혀 좋아하지 않습니다. 영화 수업 시간에 영화를 설명하기 위해 영화를 보라고 하면 너무 괴로워할 때 사실 당황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영화를 만드는 것과 영화를 보는 행위가 완전히 분리되었다고 할까요. 김홍준 _ 영화과 학생들의 새로운 경향은 YouTube에서 명장면만 보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유튜브에 대해 명대사를 날린 적이 있어요. (웃음) 요즘 학생들에게 < 펄프 픽션 >(1994) 봤냐고 하면 “어떤 장면이요?” 라고 물어봅니다. 그래서 도입부에 이런저런 장면이 있잖아, 라고 설명하면 “YouTube에서 봤어요”라는 대답이 돌아옵니다. 우리 시대는 영화를 문화원에서 봤고, 하다못해 DVD로 빌려서라도 봤는데, 요즘 영화캠프 등에 다녀온 영화에 관심 있는 어린 친구들은 그냥 검색으로 시작해서 검색으로 끝냅니다. YouTube에서 ‘펄프 픽션’을 검색하면 주르륵 짤막한 ‘유명 장면’ 동영상이 나옵니다. 그것만 보는 겁니다. 영화를 본 것도 안 본 것도 아닌 상태가 되는 거죠. 결국은 자기가 좋아하는 이미지만 취하는 것입니다. 그걸 보고 내가 하도 딱해서 한마디 했어요. “인생을 YouTube로 채우지 마라.” 정성일 _ 영화를 찍는 것만이 관심이고 영화를 보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건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요? 김홍준 _ 가령 내가 도자기를 만드는 것은 좋아하는데, 남의 도자기를 보러 가는 것은 싫어하는 거죠. 그런데 그런 학생들 중에 재능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뭐랄까, 그들을 만나면서 느끼는 건 그들 자신이 굉장히 파편화되어있다는 것입니다. 그들 사이에서 (영화학교의 시네필들은) 자기들이 영화를 좋아하는 방식이 동시대의 영화를 공부하는 학생들 사이에서는 웃음거리가 되는데, 오히려 나나 정성일을 보면서 자기들은 선배의 시대에 더 맞는 것이라 생각하는 거죠. 영화학교 안에서조차 굉장히 고통스러워한다는 것입니다. 구태여 비교하자면 각 대학에 있는 운동권 학생들과도 비슷한 처지에 놓여있다고 할까요. 애들이 걔들을 비웃진 않습니다. 굉장히 진지하니까. 하지만 이상한 취급을 하고 약간은 웃음거리가 되기도 합니다. 시대착오적이라고 생각하는 거죠. 영화를 보기 위해서 서울아트시네마를 쫓아다니고, 이런 게 촌스럽다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되어버린 거죠. 이런 건 꼰대들이나 하는 구린 것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나는 너무 좋은데 남들은 나를 왜 구리다고 할까. 그것도 같이 영화 공부하는 동료들이. 영화를 하겠다는 사람들이. 하여튼 내 입장에서는 이게 몹시 기이하게 보입니다. 정성일 _ 우리의 이야기가 끝이 안날 것만 같습니다. 그러니 무리하게 마지막 질문을 하겠습니다. 이 책의 독특한 관점 중의 하나는 시네필로서 드물게 영화기술 변화에 대해 기울이는 관심입니다. 영화 바깥에 있다가 그런 다음 감독으로 영화를 만들고, 영화제 프로그래머를 하며, 또 영화학교 선생님을 하면서, 그렇게 지난 25년을 지켜보면서 가장 흥미롭게 생각한 영화기술의 등장은 무엇입니까? 지나치게 포괄적으로 디지털, 이렇게 대답하는 대신 그 무언가를 주목했고 그것이 등장했을 때 그건 하나의 특집이었다, 라는 혁신이 있습니까? 김홍준 _ 최근 흥미롭게 보고 있는 것은 아마추어와 프로의 경계를 허무는 테크놀로지, 하이-테크놀로지와 로-테크놀로지의 경계가 완전히 허물어지는 현상입니다. 그 중에서 내게는 드론이 그렇습니다. YouTube만 들어가도 드론으로 찍은 별별 영상이 다 있습니다. 얼마 전 세그웨이 동호회가 자신들의 정모로 미사리 가는 걸 드론으로 찍은 걸 봤는데 말 그대로 ‘끝내준다’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습니다. 예전에 항공촬영이란 것은 영화 선진국에서의 특권이었습니다. 내가 < 정글스토리 >(1996)의 첫 장면을 헬기로 찍을 때 농약 뿌리는 헬기에 카메라 달고 어떻게 하면 안 흔들리게 찍을까 고민했는데, 이젠 그런 걸 드론에 고프로 카메라 달고 찍으면 되는 겁니다. 지금은 < 샤이닝 >의 도입부를 아무나 다 찍게 된 것입니다. 이게 어떤 의미가 있는냐, 고 자문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히치콕이 자랑하던, 혹은 < 악의 손길 >(1958)의 도입부처럼 너네 이런 거 할 줄 알아? 하던 마지막 보루가 항공촬영이었습니다. 드론이 나오면서 마지막 보루가 무너진 것입니다. 쇼 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보면 관객들이 아직 혹하니까 쓰는데, 이제 좀 있으면 관객들이 지루해할 거예요. 도 닦는 티벳 승려가 산속에 있는 우리 절의 모습을 알리기 위해 드론을 구해서 찍어 YouTube에 올리고 있는 시대입니다. 어마어마합니다. 무슨 말이냐면, 이젠 테크놀로지는 아무도 독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영악한 타란티노가 그것을 수퍼 파나비전 70mm로 찍을 아무런 이유가 없는 < 헤이트풀 8 >(2015)을 찍어서 이벤트화 하는 것입니다. 그 줄거리에 블랙을 더 살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어차피 한 편의 소동극인데. 70mm로 찍을 이유가 하나도 없는데 영화 외적으로, 이런 건 아직 너네들이 흉내 내지 못할 테크놀로지다, 라고 내세울 수밖에 없게끔, 거기까지 지금 몰려있는 것입니다. 아까도 말했듯이 영화 공부하는 학생들은 YouTube로 인생을 채우고 있고. 그러니까 약간 탄식하듯이 말하자면 우리가 알던 영화의 시대는 끝난 것입니다. 정성일 _ 「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은 다음 세대에게 어떻게 전달될까요? 김홍준 _ 이 자리에 오면서 그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새로운 매체로 다시 표현하거나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지 않을까. 5년 후, 그러니까 2021년 8월에 학교에서 은퇴를 하게 되는데, 그때는 이 책이 나온 지 정확히 30년이 되는 해입니다. 약간 멋대로 상상을 해보고 싶어집니다. 내 생일, 8월 4일에 개국하는 거로 해봅시다. 그때는 YouTube도 없어질지 모르고 SNS도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뭔가 다른 것이 대체하고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로썬 팟 캐스트겠지만, 이 이야기를 현재에 멈춰 서서 이야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은 무엇일지 알 수 없지만 5년 후의 가장 적합한 매체로「영화에 대하여 알고 싶은 두세 가지 것들」의 2편을 만들면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이미 말했지만 그러기위해서는 편집장으로서 정성일의 역할은 필수적입니다. (웃음) 인터뷰_ 2016년 1월 13일 날씨 흐리다가 갑자기 눈이 내림 참석자_ 김홍준 (영상원교수, 영화감독) 정성일 (영화평론가, 영화감독) 진행_ 유성관, 김홍윤 사진_ 김하영
임권택 이라는 상상의 공동체 혹은 영화라는 우정의 이름으로 나눈 대화 (1) 영화에서 우정이란 말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싶다. 나는 여기서 철학에서 사랑을 말하는 것처럼 이 말을 개념적으로 꺼내든 것이 아니다. 그저 우정에 대해서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싶어진다. 지금 당장 내 안에 가득 찬 사랑의 감흥이 막 넘쳐나고 있어서 그걸 참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이 말이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만들 수도 있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누군가와 마주치기 싫어진다. 지금 막 보고 나온 영화에 대한 기분을 망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기분? 물론이다. 나는 이 말을 엄밀하게 사용하는 중이 아니다. 약간 핵심을 벗어나고 싶다. 영화를 마주 대할 때 가장 당혹스러운 사실 중의 하나는 이 모든 것이 지나칠 정도로 기계군의 집합과 규칙으로만 이루어져있다는 어쩔 수 없는 결론이다. 노엘 버치는 좀 더 단정적으로 말하고 싶을 것이다. 그는 영화감독이나 분석가들, 비평가들이 사용하는 영화 용어를 보면 영화에 대한 그의 사유를 알 수 있다고 선언하듯이 장황한 영화의 요소들에 대한 설명(을 하기 위해서 그의 저서 「영화의 실천」의 첫 문장)을 시작한다. 기술의 수사학들. 테크놀로지의 개념들. 그 안에서 만들어진 미학적 계보. 그 안에서 모든 것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그때 우리는 이 기계군의 인간성을 증명해야 하는 다소 난처한 입장에 처한다. 비평의 투쟁은 이 자리에서 이율배반적인 태도를 취한다. 한편으로는 영화라는 기계군의 리듬이 만들어내는 선과 면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설명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그 리듬의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다시 생명의 개념으로 옮겨놓아야만 한다. 이때 우리는 파국적 진술을 주의 깊게 경계해야만 한다. 잠시 게을러질 때 이 둘 사이에 있지도 않은 서사를 만들어 하나로 봉합시켜버리고 싶은 유혹이 단숨에 우리를 삼켜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를 설명하기 위한 노력 중에서 이미 만연한 프로젝트는 다른 데서 가져온 시도를 내세운 다음 거짓 화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시도로서의 서사. 이때 서사는 이상할 정도로 논리적이거나 과잉에 가득 찬 정치적 파토스로 넘쳐나거나 때로 허수아비의 정신분석이라는 불장난에 걸려든다. 자기참조의 동어반복이라는 함정. 우리는 원래의 자리에로 돌아가서 계속해서 물어보아야 한다. 내가 막 보고 나온 이미지와 사운드의 카오스 속에서 영화는 어디에 있습니까? 나는 당신에게 가 닿기 위해서 이 질문을 반복하고 싶다. 영화는 어디에 있습니까? 낭만적인 메아리. 누군가의 대답을 기다리는 호소. 이때 우정은 지금 보고 나온 영화에 대한 진리를 공유하려는 것이 아니다. 영화에 대한 사랑을 나누려는 사람들은 좀 기이한 몸짓을 보여줄 때가 있다. 나는 지금 그 순간을 설명하려는 것이다. < 스트롬볼리 >(1950), < 리오 브라보 >(1959) 나는 이 자리에 차례대로 친구들을 호명할 생각이다. 아마 임권택 은 좋은 참조점이 되어줄 것이다. 당신께서는 오해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내가 자리를 만든 것은 임권택이라는 이름, 그가 만든 영화에 대한 신화적인 재창조를 위한 것이 아니다. 어쩌면 있을 지도 모를 그런 과정을 생산할 수 있는 담론들과 단호한 거리를 유지할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무언가 혹독한 비판을 견딜 수 있는 지에 대한 비평적 시련을 제공하기 위해서도 아니다. 그렇다면 친구들은 무슨 역할을 요구받을 것인가. 영화를 만나는 시간에 각자가 경험하는 사건 안에서 서로의 경험을 나누게 될 것이다. 나는 영화가 공동체 문화라는 것에 대해서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물론 처음에는 커다란 기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반복해서 한 편의 영화 안에 함께 거주하는 것에 대한 내 바람이 지나친 이상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점점 더 그래서도 안 된다는 믿음을 갖는 쪽으로 선회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좀 미묘한 문제가 있다. 우선 영화라는 사건과 마주칠 때 각자에게 도래하는 힘의 차이뿐만 아니라 그것을 구성하는 방식, 그런 다음 다시 개념으로 옮기는 작업, 종종 거기서 더 나아가 그것을 놓고 대차대조표를 만든 다음 자신이 만들어놓은 전체의 지도 안에 다시 기입시키려 들 때 이루어지는 수정 작업에 이르게 되면 가끔 우리는 서로의 대화의 교차점이 어딘지에 대해서조차 어리둥절해 질 때가 있다. 지금 금방 떠오르는 두 가지 예. 나는 로베르토 롯셀리니의 < 스트롬볼리 >를 설명할 기회가 있었다. 처음에는 별달리 이 영화가 걸작인 이유를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곧장 결론에로 달려가고 싶었다. 영화를 보고 난 관객들 앞에 섰을 때 내 기대가 완전히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내 선택에 대한 설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관객이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내가 유별난 취향을 가졌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나는 우리들 사이에 놓인 간극을 생각해야만 했다. 물론 둘 사이에 놓인 차이를 과도하게 단순한 도식으로 만들어서는 안 될 것이다. 또한 이 둘 사이에 어떤 종합화를 시도하는 것은 이론적 폭력이 될 것이다. 그 둘은 그 자체로 각자의 힘을 소유하면서 공존의 화음을 서로의 노력으로 만들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일시적으로 분쟁을 피하려는 거짓 화해처럼 보일 지도 모른다. 그런 의심으로부터 누구도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는 것을 나도 잘 알고 있다. <스트롬볼리>를 설명하면서 어느 순간 문득 관객 앞에 외롭게 무대에 서 있던 나는 이 간극을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 올려야만 화음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더 정확하게 화음은 하나의 발명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두 번째는 학생들과 하워드 혹스의 < 리오 브라보 >를 서로 논쟁하듯이 의견을 나누는 수업 중에 일어났다. 다소 신기한 것은 그 중에 대부분은 이 영화를 그 전에 본 적이 없었으며 심지어 하와드 혹스의 영화를 처음 본 학생도 있었다. 질문을 열심히 듣고 있다가 우리들의 대화가 완전히 실패로 끝날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단지 여기에는 지식의 차이가 개입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나는 하워드 혹스의 영화를 보면서 미장센의 투명성이랄까, 말하자면 일종의 투시도법과도 같은 방법에 대해서 일종의 영화적인 기적이라는 리베트의 지적에 완전히 감명을 받은 다음 그 위에서 벌어지는 교환의 운동에 심취했기 때문에 무언가 거기서 출발해서 그 기쁨을 나누고 싶었다. 하지만 학생들은 투명성이라는 말이 증명되기를 원했다. 이때 여기에는 의미의 논리나 장면의 수학적 배열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도약의 차원에 대한 공감이라는 결정적 요청이 있다. 이를테면 오즈의 필로우 쇼트가 그저 풍경을 찍은 사진적 장면의 연결이라고 받아들일 때 나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도 상대방을 설득할 방법이 없다. 그건 히치콕의 <사이코>에서 마리온을 샤워 룸에 데려가기까지의 동선을 설명하는 것과는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때로 주석을 길게 달아야 할 필요가 있지만 반대로 직관의 순간이 사유를 건드리고 그런 다음 거기서 울린 공감의 진동판이 비로소 만남을 열어줄 때가 있다. 물론 나는 간극 사이에 놓인 긴장을 즐긴다. 어떤 경우에는 끝내 좁혀들지 않는 거리를 통해서만 서로를 존중하면서 끝까지 예의를 잃지 않고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나는 이제까지 타르코프스키의 영화에 호의를 지닌 수많은 지지자들을 만났지만 나와 동일한 방식의, 말하자면 체험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기쁨, 그 안에서 영화가 만들어낸 효과와의 접촉, 그 과정에서 얻게 되는 진정한 의미의 긍정적인 좌절과 희열에 가득 찬 패배를 공유할 수 있는 사람을 단 한 명도 만나본 적이 없다. 아마 나도 그들에게 반대편에서 동일한 자리에 있을 것이다. 차라리 이럴 때는 나의 지지에 동의하지 않는 친구를 만났을 때 비로소 더 많은 의견을 나눌 수도 있다. 친구란 살아있는 하나의 범주이자 서로 다른 견해의 선험적 존재이다. 영화에서의 우정. 말하자면 내가 영화를 본 다음 친구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것은 어떤 경우에도 나의 분신을 대면함으로써 나 자신의 믿음을 증명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허문영 문화평론가 첫 번째 초대한 친구는 허문영 이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가 지난해 부산 영화제에서 (한국영상자료원 바깥에서는) 처음으로 임권택 전작 회고전을 했기 때문이지만 그것이 이유의 전부는 아니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는 허문영의 영화에 대한 견해에 항상 전적으로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그건 그도 그럴 것이다. 나는 처음에는 그걸 거의 의식하지 않았는데 그러다가 그의 첫 번째 비평집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의 추천사를 쓰기 위해 1998년부터 2009년에 이르는, 말하자면 거의 십년간에 걸쳐 서 있는, 58편의 글을 읽으면서 우리들이 서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멀리 떨어져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쩌면 내가 오해한 것인 지도 모른다. 단지 서로 다른 영화를 지지한다는 차원에서가 아니라 같은 영화에 대해 우리는 서로 다른 감각의 바탕 위에서 각자의 개념 제작방법을 찾고 있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충돌할 일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자주 만난 것은 아니지만 영화를 보고 나면 종종 서로의 견해를 궁금하게 생각했다. 우리가 매번 확인한 것은 (심지어 바로 옆자리에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서) 같은 영화를 보고 난 다음일 지라도 그 안에서 전혀 다른 영화적 순간의 비탈(傾斜)에서 각자 서로 다른 참을 수 없는 기쁨과 고통을 느낀다는 사실이었다. 나는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허문영은 영화에서 욕망이 활동하는 반경 거리를 측정하는데 언제나 예민했으며 때로 매혹되었고 그런 만큼 그 활동에 대해서 비판적인 거리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이때 허문영이 사용하는 욕망은 정신분석학에서 말하는 용법이 아니다. 종종 남근을 영화의 중심으로 끌어당기고 그 안에서 성숙하지 않은 소년성에 대해서 주목을 하고 막(膜)의 신비로운 장벽과 폭력적인 파괴에 대해서 다루긴 하지만 은유적인 차원을 넘어서지 않는다. 오히려 그가 욕망을 꺼내들 때 거기서 그는 영화적인 순간이 하나의 힘으로 집결된다고 느낀다. 그래서 그에게 힘의 화음은 소중한 속도이며, 거기서 외부와 접촉하는 쟁점들은 단지 사회적인 것이 아니라 예술과 세상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에너지이며, 종종 그 흔적들과 변주는 위대한 영화를 위한 조건이다. 허문영이 존 포드를 위대하다고 느끼는 장면은 여기에 있다. 수 없이 주문처럼 되풀이해서 불러오는 존 포드의 ‘랜드스케이프(landscape)’는 분명히 거기 있는데 가 닿을 수 없다. 가 닿을 수 없는 욕망. 닿을 수 없는 데도 마치 사이렌처럼 잡아당기는 힘. 둘 사이의 긴장. 사로잡힌 존재의 시선. 사로잡힌 자의 시선. 그 존재와 미칠 듯이 접촉하고 싶은데도 만질 수 없을 때 겪는 결핍 안에서의 시련. 그가 ‘랜드스케이프’를 풍경이라고 부르지 않은 것은 존 포드의 풍경은 영화 용어이기 때문이다. 다소 도식적으로 내가 이해한 것이긴 하지만 그는 가끔 욕망과 의지를 섞어서 사용한다는 느낌을 불러 일으켰다. 나는 이 설명으로 허문영을 니체(-푸코)주의자라고 손쉽게 부르기 위해서 서둘러 정의 내리려는 것은 아니다. 만일 그런 방식이라면 (허문영 자신은 별로 동의하지 않겠지만) 말리노프스키를 연상케 할 정도로 그는 영화 안에 들어가서 살면서 체험을 하고 그런 다음 그것을 설명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인다, 고 말하고 싶어진다. 허문영은 내가 알고 있는 한 모든 영화비평가들 중에서 촬영 현장의 자리에 가는 것을 가장 즐기는 관찰자이다. (일종의) 인류학을 방불케 하는 태도. 마치 현장탐사와도 같은 참여. 심지어 그는 홍상수의 <밤과 낮>에서 연출부를 하기도 했다. 꼼꼼하게 지켜보는 카메라의 위치와 이동. 그 안에서 스텝들의 활동. 아니, 말 그대로 공기의 리듬. 그런 다음 그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자주 바르뜨의 에로티시즘에 이끌렸다. 현대 영화이론은 그를 전혀 매혹시키지 못했으며, 다소 거슬러 올라가서 앙드레 바쟁을 자주 참조하긴 했지만 때로 경계심을 갖고 있다는 느낌을 불러일으킬 정도로 거리를 유지했다. 조나단 로젠바움을 존경하지만 그건 시네필의 태도에 한정해서일 뿐이며 그의 문제의식을 자기의 글 안으로 끌어들이진 않았다. (최근의 글로 한정지어) 제한적으로만 말한다면 토마스 엘세서와 D. N. 로도윅의 그림자를 읽지만 허문영은 이론과 불장난에 빠진 적이 없다. (그런 다음 당연히 미처 내가 알지 못하는 또 다른 그림자들이 있을 것이다) 영화를 보고 난 다음 언제나 그는 영화 안에서 자기를 불러 세웠던 욕망 주변으로 흩어져있는 개념들을 배열하려고 애를 쓴다. 애를 쓴다? 그렇다. 바로 그 태도가 그의 영화 비평을 읽을 때 다소 음란하게 논쟁을 전개되고 있을 때조차도 예의바르게 느껴지게 만든다. < 천년학 >(2006) 영화에 관한 우정의 대화를 빨리 시작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제목들을 호명하는 일이다. 나는 여기서 허문영 을 설명하기 위하여 그가 작성한 두 개의 명단을 내놓을 것이다. 먼저 그 하나는 영화 주간지 씨네21에서 2008년 창간기념호에서 1995년부터 2008년까지 당신에게 10 베스트 영화는 무엇입니까, 라고 물었을 때 한 대답이다. 허문영은 다음 열편을 썼다. (공동) 1위 < 아버지의 깃발 >과 < 이오지마에서 온 편지 > (클린트 이스트우드). 2위 < 엘리펀트 > (거스 반 산트). 3위 < 밤과 낮 > ( 홍상수 ). 4위 < 스틸 라이프 > (지아장커). 5위 < 천년학 > ( 임권택 ). 6위 < 폭력의 역사 > (데이빗 크로넨버그). 7위 < 남국재견 > (후 샤오시엔). 8위 < 멀홀랜드 드라이브 > (데이빗 린치). 9위 < 우주전쟁 > (스티븐 스필버그). (공동) 10위 < 일상적인 연인들 > (필립 가렐), < 행진하는 청춘 > (페드로 코스타). 나는 이 명단에서 임권택만을 물어볼 생각이다. 1995년에 임권택은 < 태백산맥 >을 만들었고, 2007년에 <천년학>을 만들었다. 그 사이에 < 축제 >와 < 춘향뎐 >, < 취화선 >, < 하류인생 >이 있다. 그런데 허문영은 그냥 간단하게 <천년학>을 선택했다. 배치는 구조나 체계, 혹은 과정이 아니다. 두 번째 명단. 한국영상자료원은 2014년에 40주년을 맞으면서 영화비평가들과 영화학자들, 기자들, 영화제 프로그래머들에게 앙케이트를 돌렸다. 당신의 한국영화 100편은 무엇입니까? (아마 전체 명단은 이 토크가 소개될 무렵에 공개될 것이다) 여기서 허문영은 임권택의 영화를 15편이나 선정했다. 아무리 1950년 이전의 영화 프린트 상당수가 사라졌다 할지라도 이건 한국영화사 전체를 놓고 100편을 결정하는 작업이다. 하지만 허문영은 어떤 균형감각을 가져야 한다는 생각이 전혀 없(는 것처럼 결정했)다. 현재 볼 수 있는 임권택의 영화중에서 허문영은 < 두만강아 잘 있거라 >,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 < 족보 >, < 만다라 >, < 짝코 >, < 길소뜸 >, < 티켓 >, < 씨받이 >, < 개벽 >, < 서편제 >, <축제>, <춘향뎐>, <취화선>, <하류인생>, <천년학>을 추천했다. 나는 이 목록 사이의 여백을 채워나가거나 혹은 간격 사이의 빈칸을 파고들거나 (같은 말이지만) 거기 있지 않은 제목을 호명하여 상속의 위계질서를 세우려 들지 않을 생각이다. 그냥 이 목록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한다. 내가 이 명단에서 놀란 것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미 말한 것처럼) 숫자이다. 일백편의 목록 안에서 그저 우글거린다는 표현 이외에 달리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임권택의 영화들은 허문영의 한국영화의 역사를 구성하고 있다. 한국영화사에서 백번의 사건 중에서 열다섯 번의 의미의 매듭. 다른 하나는 반대로 그 안에서 임권택의 영화들에 대한 표준 판본의 선택에 머물기 위해서 이상할 정도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간단한 비교. 허문영은 김기영 의 이름으로 물론 < 하녀 >를 추천했다. 하지만 그런 다음 갑자기 < 이어도 >와 < 살인나비를 쫓는 여자 >에로 옮겨간다. 김수용 의 < 안개 >는 걸작이다. 그러나 < 화려한 외출 >이 김수용이 그려낸 소시민 인정극을 대신할 만큼 중요한 영화라고 주장하는 것은 매우 특별한 견해이다. 신상옥 은 < 지옥화 >도 없고 <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도 없고 < 로맨스 빠빠 >도 없고 < 폭군 연산 >도 없다. 단지 < 다정불심 > 단 한 편만이 있을 뿐이다. 반대로 이만희 의 목록을 만들면서 < 생명 >과 < 04:00 -1950- >를 포함시킨 것은 단지 역동적일 뿐만 아니라 과격한 인상을 자아낸다. 목록을 쳐다보는 내 감상은 이렇다. 허문영은 자신의 목록에서 계속해서 균형을 무너트리고 자꾸만 열어놓은 다음 그 무언가와 접속하려고 시도한다. 나는 그 접속의 목표가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윤곽 전체가 부서지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이만희는 허문영의 한국 영화사 안에서 벗어나려는 동력을 만들어내고 있다. 반대로 임권택은 그 안에서 역사를 옹호하려는 듯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왜 그럴 필요가 생긴 것일까. 우리들의 대화는 여기서 시작되었다. 나는 이것을 우정이라고 믿는다. 말하자면... 정성일_ 이렇게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작년 부산영화제에서 ‘한국극영화의 개벽, 거장 임권택 의 세계_ Fly High, Run Far, The Making of Korean Master IM Kwon-taek’이라는 제목아래 전작전을 한국영상자료원 바깥에서 가장 큰 규모로 행사를 진행하였습니다. 이 행사의 프로그래머셨는데, 행사를 진행하면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영화적 순간은 언제였습니까? < 장군의 아들 > (1990) 허문영_ (망설이지 않고) 그냥 기억에 깊게 남았던 장면 하나는, 사실 제가 그 자리에 있지는 않았지만, 류승완 감독이 < 장군의 아들 >을 보고나서 관객과의 대화를 했는데, 그때 제가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류승완 감독이 처음부터 끝까지 어떤 말을 했는지는 듣진 못했고, 나중에 감독과 통화를 했어요. 류승완 감독이 굉장히 들뜬 목소리로, 나는 충격을 받았다. 나는 액션영화 전문 감독으로 알려져 있고, 그리고 <장군의 아들>은 임권택 감독님의 가장 완성도 높은 액션 영화이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한국의 액션영화 중 한 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연히 선택해서 관객과의 대화를 하는 게 좋다고, 고민하지 않고 선택을 했다. 그런데 정말 오랜만에 이 영화를 다시 보고 깜짝 놀랐다. 내가 본 <장군의 아들>이 아니었다. 이 영화는 액션영화라기보다는 풍경의 영화다, 혹은 무드의 영화다. 이 영화는 액션을 풍경처럼 다뤘다. 정통 액션이 벌어지는 순간보다 그 액션을 둘러싼 무드로 찍은 영화다. 어떻게 이 영화가 당대 상업영화로 인식되었는지 알 수가 없다. 그런데 모든 걸 떠나서, 나도 이런 영화를 찍고 싶다. 이러한 말을 들었어요. 그 말을 하는 순간 류승완이라는 젊은, 지금은 그렇게 젊지도 않죠(일동 웃음) 어쨌든 임권택 감독에게는 열혈 청년 액션 매니아 감독이라고 인상지어진 류승완이라는 후배 감독이 십여 년 만에 임권택 영화를 다시 보면서 거기서 완전히 새로운 영화를 보았고, 그 새로움에서 임권택 감독의 어떤 비밀을 본 것 같은 인상의 말을 했을 때, 그때 이것은 이 회고전의 멋진 순간 중의 하나다, 라는 생각을 했어요. 더 재밌는 건 제가 그 말을 임 감독님께 전해드렸어요. 감독님, 류승완 감독이 그러는데요, 이거 상업영화 아니래요. 거의 마치, 고도의 예술영화를 본 것처럼 얘기 하던데요. 그때 임권택 감독님은 충격을 받으셨어요. 그게 무슨 말이냐. 나는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본 적이 없다. 여러 인터뷰에서도 밝혔지만, 나는 <장군의 아들>은 장사하려고 만든 영화다. 물론 개인적인 궁금함이 있긴 했지만, 예전에 찍었던 다찌마와리 영화들에 대해, 남성성, 남자다움이라는 것에 대해 오랜만에 다시 생각해보는 개인적인 계기가 있었지만, <장군의 아들>은 철저히 상업영화로 기획되고 맞춰서 찍은 거다. 근데 그게 무슨 소리냐, 하시는 거예요. 굉장히 충격을 받으신 거죠. 이 장면은 굉장히 재밌어요. 실제로 제가 <장군의 아들>을 이번에 다시 본 느낌은 류승완 감독의 것과 비슷해요. 저도 이 영화를 굉장히 잘 만든 우아한 액션 영화라고 생각했어요. 근데 이 영화를 지금 2013년에 보고 있으면, 이 영화가 왜 상업영화였지? 그 해 흥행 1위였잖아요. 아마 서울에서만 60만이 본 영화죠. (<장군의 아들>은 1990년, 67만 9천명의 관객 동원하며 흥행 신기록을 세웠고, 그 이전 최고 기록은 < 겨울여자 >로 58만6천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이해할 수 없는 거죠. 대대적인 흥행 기록을 세운 거죠. 여기에는 액션영화가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액션장면의 화려함, 격렬함이 없어요. 두 번째, 비극적 결말도 없어요. 남성영웅의 비극적 최후도 없고 그렇다고 화려한 승리가 있는 것도 아니죠. 게다가 90년대 이후 모든 한국의 액션영화가 갖고 있던 로맨스도 없어요. 하다못해 남성간의 로맨스도 있거든요. 90년대 이후 한국액션영화에는 남성 공동체, 의리의 파토스 같은 게 있는데. 물론 남자주인공과 여자와의 로맨스가 반드시 끼어들긴 하지만. 어쨌거나 로맨스, 사랑의 파토스 같은 게 하나도 없는데 어떻게 상업영화가 될 수 있지, 생각했어요. <장군의 아들> 하나만 가지고도 임권택 감독님의 작품 세계를 완전히 되짚어 봐야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죠. 다시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임권택 감독님의 반응은 생각을 해봐야 겠다, 라고 하셨어요. 내 의지는 철저히 상업영화를 만드는 것이었는데 당신들이 왜 그렇게 얘기하는지 알 수 없다. 그걸 충격이라고 말씀하신 건, 뭔가 자기의 의지를 벗어나 작품에 투영된 중핵이 따로 있다는 거죠, 그걸 감독님도 생각해보실 수밖에 없는 거 같아요. 개인적으로 임권택 감독이야말로 인터뷰를 통해 알기 가장 어려운 감독이 아닐까 하는 건, 그가 말을 아끼기 때문이 아니라, 종종 자신의 의지를, 의도를 벗어나는 영화적 순간을 만들기 때문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해요. 정성일_ 그렇다면 이번 임권택 감독님 전작전을 통해 재발견을 했거나, 재평가했거나, 말하자면 생각이 바뀐 작품들이 있습니까? < 상록수 > (1961) 허문영_ 저 개인적으로 굉장히 감동을 받았던 건 < 상록수 >였어요. 정 선배가 그 영화를 미지의 보석중의 하나로 추천하시기도 하셨지만, 저는 그전에 그 영화를 보지 못 했어요. 줄거리는 진짜 너무너무 뻔한 계몽영화인데, 이 뻔한 계몽영화를 만들면서, 저는 정 선배처럼 쇼트 단위로 기억을 하지는 못하겠어요. 기억이 안돼요. 그냥 그 영화를 보고 즉각적으로 받은 느낌은, 이것은 사무치는 기다림의 영화다. 사무치는 기다림의 어떤 순간을 끝내고자하는데. 그걸 다 알고 있어요. 나도 알고 있고, 만든 사람도 알고 있고, 심지어 (영화 속의)인물들도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웃음) 그런데 기다릴 수밖에 없는 장(場)에 놓인 사람들이 그냥 기다리는. 그게 너무 사무치는 느낌. 그 사무치는 느낌은 단순히 하나의 쇼트를 잘 찍어서도 아닌 것 같고 연기를 잘 해서도 아닌 것 같고, 뭔가 카메라와 인물과 감독이 그냥 어떤 순간에 어떤 시간으로 만났기 때문이 아닌가라고 밖에 생각을 못하겠어요. 임권택 영화를 종종 보고 나면 분석하고 해명을 하고 싶은 의욕을 잃어버리게 만드는데, 그냥 그 느낌 자체에 빠져있게 되는데,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상록수>가 그런 영화였어요. 끝나고 나서 그냥 멍하게, 멍하게 있던 기억이 나요. 정성일_ 이 마음의 상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네필처럼 질문을 할 수밖에 없는데, 말하자면 이건 지금의 마음의 상태가 < 상록수 >를 그렇게 느끼도록 만들게 한 건데 올해 본 새로운 동시대 영화중 베스트는 무엇입니까? 허문영 선생의 심리적 상태를 알아봐야 하니까요. (웃음) 과거 영화는 무조건 존 포드가 차지하고 있으니 궁금하지 않잖아. (일동 웃음) < 풍경 > (2013) 허문영_ 과거영화를 얘기해야한다면 (존 포드의) < 선 샤인 브라이트 The Sun shines bright >(1953년)를 얘기하려고 했지만. (웃음) 그냥 인상적으로 떠오르는 영화는, (망설이다가) 이미 평가받은 영화들은 재미없으니까, 제일 최근에 본 영화가 말씀하시니까 막 떠오르는데, 저는 장률 의 < 풍경 >이었어요. 저는 (씨네 21에 실린) 정 선배의 인터뷰를 보니, 이걸 장률의 걸작으로 꼽고 있지는 않다는 인상을 받았거든요. 근데 저는 이 영화가 걸작이라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이를테면, 그냥 사람의 얼굴을 쳐다볼 수 있도록 해주는 구나. 그냥 사람의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을 우리가 얼마나 오랫동안 제대로 하지 못했나, 그 사람이 놓인 사회적 처지나 운명이나 뭐, 여러 가지 현실적 어려움, 곤경, 그 사람의 개인적인 소망. 그런 거와 아주 무관하게 얼굴을 바라본다는 것. 그게 우리가 못해오고 있었던 일이었구나. 그렇게 영화를 많이 보면서도, 우리의 생활자체는 점점 타인의 얼굴을 외면하고 살도록 되어가잖아요. 심지어 카페에서도 얼굴대신 스마트 폰을 보고, 생활이 그렇게 흘러갈 뿐만 아니라, 영화에서도 그런데, 근데 이 영화는 얼굴을 보도록 권유하고 있구나. 아니, 보는 것이 좋은 일이고, 보는 것이 괜찮은 일이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구나, 이런 느낌. 저는 영화 보면서 그게 드문 일이었어요. 그게 다큐여서 가능한 일이고, 장률이라는 사람이 어제 꾼 꿈이 무엇이었습니까?, 라는 질문을 잘 선택하기도 했고, 이게 영화적으로 훌륭하다, 아니다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저는 그런 점에서 <풍경>이 올해 최고의 영화는 아니어도 굉장히 특별한 영화라고 머리에 남을 것 같고, 그런 생각이 듭니다. 정성일_ 질문을 조금 바꿔보겠습니다. 우리가 영화를 보기 전부터 임권택 감독님은 영화를 만들었잖습니까?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는 의식하지 않고 있다가, 이 영화를 찍은 사람이 누구지, 하고 임권택이라는 이름을 처음 확인하게 된 영화는 어떤 것이었습니까? 임권택 감독의 존재를 의식하게 된 첫 번째 영화는 무엇이었습니까? < 짝코 >(1980) 허문영_ 저는 정 선배보다 훨씬 늦은 나이에 그런 순간이 있었던 거 같아요. 물론 극장에서 개봉한 임권택 영화를 보기 시작한 것은 잘은 기억은 안 나지만 <만다라>였던 거 같아요. 그게 대학 1학년 즈음 됐겠죠. < 아제아제 바라아제 >도 극장에서 봤었고. 물론 < 만다라 >이후부터 임권택이라는 이름을 모를 수가 없죠. 하지만 제가 20대부터 영화를 의식하고 공부하고 찾아보고 한 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전에 직접 뵙기도 했었죠. 70년대 말인가, 80년대에 아버지를 따라 뵌 적도 있었던 거 같아요. ( 허문영 씨의 아버지는 영화평론가인 고 허창 선생이다) 학생시절에 OB 베어즈에 가서 뵈었던 거 같아요. 아버지가 당시 영화진흥공사에 계셨던 시절에, 그때 임 감독님을 가끔 뵌 거 같은데,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같이 따라가서 인사를 드렸던 거 같아요. 막연히 그때는 <만다라>이후 임권택 감독님은 한국영화에서 가장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거장 감독이라고 평판이 굳어졌기 때문에 그 평판의 영향아래 영화를 보았던 거 같고, 영화로 감독님의 이름이 불쑥 튀어나왔다, 라는 느낌을 받은 건 그 뒤였던 거 같아요. 80년대 말인지 90년대 초인지 잘 기억이 안 나지만, 1990년 즈음 < 짝코 >를 비디오로 우연히 보았을 때였습니다. 개봉할 때는 못 봤고. 물론 그 영화가 임권택의 영화라는 건 표면적인 지식으로 알고 있는 상태였고, 이 어른이 이런 영화도 만들었네, 뭐지? 하고 본거 같아요. 이 영화가 얼마나 정교한 플래시백의 기법을 구사하고 있는지는 그 뒤에 다시 한 번 봤을 때 느꼈고,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제 머릿속에 남은 건 이 영화가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무대는 1980년 현재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이야기의 배경은 6.25이기 때문에, 한국의 역사적 사실을 다루고 있기는 하지만, 그것을 넘어서는 좀 심원한 비극성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굉장히 마음이 아픈데, 이건 역사적인 어떤 허깨비를 쫓는 거잖아요. 평생을 바쳤는데 그게 허깨비였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는 것. 그 허망함의 무게가 굉장히 크게 느껴졌어요. 기억에 남는 장면이 그거였어요. 정교한 플래시백보다 훨씬 기억에 남아요. 두 사람이 탈출하고 나서 싸우는 데, 세상에 그렇게 비루하고 그렇게 초라하고 어이없는 싸움이나 액션이 도대체 어딨나, 심지어 카메라가 계속 찍지도 않아요. 둘이 계속 싸우는데 카메라 (프레임) 밖에 나가요. 둘이 빠져나가는데 카메라는 그냥 가만히 서있어요. 사실 아무것도 아닌 걸 잡고 있는데, 여기 지금 찍히고 있는 게 뭔가라는 생각. 카메라가 대체 뭘 찍고 있나. 그런 기억. 뭐, 이런 저런 이유로 이걸 만든 사람은 참 특별한 사람이다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훌륭한 감독이 아니라, 특별한 사람이다. 임권택 감독은 참 특별한 사람이구나. <짝코>를 90년대에 보고 그런 생각이 들었던 거 같아요. 정성일_ 임권택 감독님의 무슨 영화 다음에 < 짝코 >를 보았습니까? 허문영_ 아마 < 아제아제 바라아제 >와 < 씨받이 >를 띄엄띄엄 보고 보았어요. 정성일_ 1989년 전후가 될 텐데 그때 허문영 씨가 심취했던 영화들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걸작의 명단이라고 움켜쥐고 있던 그런 영화들, 그때는 사실 애매한 시절이었죠. 비디오가 쏟아진 것도 아니고 DVD가 도착한 것도 아닌 시절. < 화이트 히트 >(1949) 허문영_ 그때는 영화를 열심히 본 시기가 아닌데, 한동안 제가 그 시기 3-4년 정도 완전 사로잡혔던 영화는 < 화이트 히트 >였어요. (감독) 라울 월시의. (주연배우) 제임스 캐그니의 정유 공장의 마지막 시퀀스는!! “Mom, I'm on the Top!”하고 불타버리는 장면은... 아, (깊은 한숨) 세상에... 남자의 심금을 울리죠.. 오우삼? 너는 라울 월시의 손자다. 손자라는 생각이 들었죠.(웃음) 또 당연히 그때는 우리가 홍콩영화에 혼절할 때가 아닙니까? 다 봤죠. 열심히 봤죠. 그때 (필름 포럼을 운영하는) 임재철이, 너 그런 이상한 영화를 보지 말고 이런 영화 좀 봐, 하고 영어 자막 캡션이 달린 영화를 보라고 주더라구요. 아, 영어 자막 피곤한데,.. (하고 집에 가서 본 다음) 그날로 형님, 월시 형님! (일동 웃음) 오우삼이 최고의 남자 감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부터 월시 형님을 모시겠습니다, 했죠. 정성일_ 사실 많은 영화 비평가들, 혹은 연구자들이 겪는 일이기도 한데, < 짝코 >를 전후로 해서 임권택 이라는 이름을 의식하게 되었을 때, 이전의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들과 이후의 영화들은 비평가들에게 내면적으로 어떤 불화를 일으킬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허문영 씨께서는 앞의 영화들은 불완전하거나, 그 영화가 갖고 있는 다른 기준들, 그런 불화를 화해시킬 수 있었던 비평적 프레임의 변화랄까, 아니면 영화의 어떤 새로운 방점을 찍거나, 미학적이거나 영화의 존재론적인 방점이 어떤 것이었습니까? 임권택이 자신의 비평적 프레임워크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 < 개벽 >(1991) 허문영_ 저는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세계 전체를 어떻게 볼 것인가, 그런 고민을 해본 건 오히려 최근 들어서고 그전에는 계속 잘 모르겠다, 였던 거 같아요. 새로 만든 영화를 지속적으로 챙겨보진 않았지만, 어쨌든 90년대는 꾸준히 극장에서 보게 되었는데, 제가 90년대 겪었던 건 제가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극장에서 볼 때는 계속 놓치게 돼요. 이를테면 < 개벽 >을 극장에서 봤거든요. 참 아름답다 근데 잘 모르겠다, 근데 그 영화가 비범한 영화란 생각이 든 건, <개벽>을 다시 본 건 2-3년 뒤에 TV에서였습니다. 그걸 보고 완전히 빨려들어 갔습니다. 그냥 아름답고 약간 비극적인 이야기가 좀 있는 영화라고 생각했었는데, TV에서 <개벽>을 다시 보며 이 영화가 인물을 찍은 게 아니구나, 인물이 이 영화에 주인공이 될 수 없는 이유를 찍었구나, 라는 느낌. 일종의 패배의 이야기. (동학 2대 교주인) 최시형이 일본과 싸워서 졌다는 게 아니라, 인물이 서사 안에서 주인공이 되기에 실패한 영화구나, 그 실패가 어디서부터 온 건지 영화가 대답해주지는 않지만, 그 패배의 불가피성에 대해 풍경이 대답을 해야 하는데, 풍경은 침묵하고 있다는 이상한 느낌을 받았어요. 풍경이 사무치게 슬프다는 그런... (잠시 생각하고) 굉장히 특별한 영화구나. 그 격동기에 격렬한 역사적 사건 한가운데 있는 인물을 찍으면서, 그 인물의 역사적 문제가 아니라 서사 안에서 실패라는 것들. 그 풍경의 비애라는 것. 굉장히 특별한 영화구나. 근데 정선배도 (지금 이 ‘임권택 X 101’) 연재에서 여러 가지 다른 방식으로 지적을 하고 있으시지만, 임권택 감독의 다음 영화를 봤을 때 그 이전 영화의 가설이나 프레임이 무너질 때의 난처함. < 축제 >를 극장에서 봤을 때 또 놓쳤어요. 이 동화적인 화해의 서사는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그렇게 철저한 실패를 다룬 감독이 왜 동화를 통해 화해를 하려고 하는가. 그 영화를 또 다시 보고 영화가 또 그게 아니구나, 깨달은 것은 몇 년 후 비디오로 보고서였죠. 임권택 영화를 보는 제 반복된 체험은 처음 봤을 때는 계속 놓친다는 겁니다. 두 번 봤을 때 새로운 영화를 보게 되고, 세 번 봤을 때 또 다른 영화를 보게 되고. 오히려 임권택이라는 이름으로 그의 영화 전체가 무엇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해준 계기는 <개벽>에서 시작되었다고 봐야죠. 그간 어떻게 받아들여야 될 것인가를 본격적으로 고민하지는 않았지만, 그 이름은 굉장히 이상하다, 절대 한 번에 닿을 수 없는 세상. 계속 진격을 거듭하지 않으면 절대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다. 그 직감이 전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은 오히려 2000년대 들어와서 이런저런 방식으로 좀 더 자주 보게 되면서 계속 느끼게 되죠. 딴 것 보다 임권택 영화를 보면, 너무 재밌어요. 어떤 영화를 골라 봐도 재밌어요. 심지어 두세 번 봤는데도 또 새로운 것이 펼쳐지기 때문에. 어떤 때는 그냥 계속 보기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성일_ 이렇게 나눌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지금 막 영화비평을 시작하고 있는 세대와 우리 세대가 다른 것 중의 하나는 처음부터 한국영화를 좋아하기 힘들었던 세대이지 않았습니까. 왜냐하면 영화들이 너무 나빴으니까. 그 나쁜 한국 영화들을 끌어안게 된 계기, 의식적인 포섭, 그런 계기를 개인적으로 얘기해줄 수 있습니까? 전 사실 그 한국 영화가 너무 싫었기 때문에 그 시간이 매우 오래 걸렸고 그것을 끌어안는 게 너무 힘이 들었습니다. 의식적으로 보지 않았다면 훨씬 더 긴 시간 한국영화에 대해 더 무관심했을 거 같아요. < 칠수와 만수 >(1988) < 개그맨 >(1988) < 성공시대 >(1988) 허문영_ 저는 20대였던 80년대에 영화광으로 살지는 않았기 때문에 영화를 열심히 챙겨본 것은 아니었지만 꽤 많이 보았고, 의식적인 고민의 대상은 20대 후반이 될 때까지는 아니었던 거 같아요. 제게 임권택 은 한국영화에서 굉장히 예외적인 인물이기 때문에, 임권택이 한국영화 범주나 역사 안에 있다기보다는, 한국영화가 있고 임권택이 또 있어서. 이 사람이 만드는 것은 굉장히 특별한 영화이기 때문에. 그걸 깨준 건 사실은 코리안 뉴웨이브라고 봐야죠. < 칠수와 만수 >( 박광수 ), < 개그맨 >( 이명세 ) 그리고 장선우 감독의 < 성공시대 > 인거죠. 한국영화에 대해서 완전히 다른 이미지를 준 것은 이 세 사람이었어요. 게다가 그 사람들이 만든 두 번째, 세 번째 영화들까지도 굉장히 훌륭했기 때문에 88년부터 90년, 91년까지 이 세 사람이 한국영화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놨어요. 이 세 사람이 또 전혀 다르잖아요. 사실은 코리안 뉴웨이브를 쓰는 게 가능한지도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특히 이명세를 거기에 끼워 넣는 건 굉장히 이상하죠. 하지만 한국영화에서 완전히 새로운, 없던 것들이 만들어지기도 했구나. 그 세대는. 정성일_ 조금 사적으로 질문을 해볼게요. 허문영 씨 경우에는 다른 비평가와 달리, 영화비평가 아버지를 갖고 있는 유일한 비평가이지 않습니까. 그리고 아버님이 매우 눈이 밝은 분, 이런 얘기가 듣기 불편할 수는 있지만, 저는 살아생전에 아버님을 뵙고 영화에 관한 인터뷰도 했었으니까요, 눈 밝은 의견을 존중할만한 영화비평가이셨는데, 아버지와 영화 얘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까? < 그들도 우리처럼 >(1990) 허문영_ 거의 없어요. 아버지는 얘기를 하려고 하셨는데, 제가 피했어요. 의견이 달라서가 아니라, 아버지란 존재 자체를 피하고 싶었기 때문에. 하나 기억나는 건 있어요. 대화를 나눴다기보다는 그냥 일방적으로 들은 건데, 좀 전에 말씀드렸지만 저한테 한국 영화의 이미지를 완전히 바꿔준 게 박광수 , 장선우 , 이명세 라고 말씀드렸는데, 90년에 < 그들도 우리처럼 >을 보고 말 그대로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그냥 아, 이건 정말 걸작이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근데 아버지가 그때 대종상 심사 예심을 할 땐가 본심을 하실 땐가 인데, 그때 잠시 같이 살았던 때인데, 피할 수 없이 얘기를 해야 하는 자리가 있잖아요, (웃음) 같이 밥을 먹어야하는 자리. 그때 <그들도 우리처럼>을 봤는데 그건 한국영화사 최고의 걸작이라고 생각한다고 말씀하셨어요. 그리고 나는 이 영화가 대종상 본심에 올라오지 않은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심사를 안 하기로 했다고 말씀하셨어요. 어떤 과장이 있었던 건지 모르겠어요. 내 기억이 조금 과장되었을 수도 있는데,.. 제가 절대 피해왔지만, 일상적인 대화와 영화에 관한 대화를 피해왔지만, 갑자기 그 말씀을 하셨을 때 두 가지가 분명해졌죠. 이 사람이 나하고 한 편의 영화에 대해 완전히 공감을 하고 있구나, 그건 쉽지 않은 체험이잖아요. 영화 글을 찾아 읽었을 때도 아니니까. 또 다른 하나는 이 사람은 비평가구나. 자기가 절대적으로 존중하는 영화가 존중받지 않았을 때 자신의 선택을 어떤 행동으로 보여주는 사람이구나, 이 사람 비평가구나, 괜찮은 사람이구나... 이게 얼마나 사실에 근거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대화밖에는 내 머릿속에 남은 게 없어요. 자기가 정말 최고라고 생각한 영화가 대종상 본심에 올라오지 않았다고 해서 대종상 심사위원을 거절한다, 정말 비평가적인 태도잖아요. 물론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고 해서 계속 대화를 하지는 않았지만 (웃음) 여전히 아버지란 존재에 대한 부담, 무게가 버거웠으니까. 그래도 그때 그 말은 계속 기억이 나요. 정성일_ 영화 비평을 쓰거나 보거나, 영화에 대한 자신의 사유를 진전시켜 나가면서 지금 생각해보니 자기에게 가장 영향을 끼친 영화 비평가, 비평의 방법을 보여줬던 사람. 그 사람이 꼭 비평을 쓰지 않았다 할지라도 그걸 전용할 수는 있는 거니까. 이 사람에게 영화에 대한 배움을 내가 구했지 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김현 문학평론가 허문영_ 사유를 배웠다기보다는, 그 태도를 늘 떠올리게 한 사람은 김현이었어요. 우리 시대 제가 20대 때 많은 스승들이 있었지 않았습니까, 백낙청, 김현, 유종호, 김우창, 김치수도 있었고. 단순히 문학 평론가여서가 아니라 비평가란 말에 어울리는 사람들이 꽤 많았죠. 그렇게 보면 인문학적 환경에 있었다고도 볼 수 있는데, 김현이 좀 특별했다고 볼 수 있는 건, 한 사람의 작품을 말할 때 그 작품 안으로 기꺼이 들어간다는 느낌. 그게 애정일 때도 있고 비판을 위해서 일 때도 있지만, 보통 다른 글을 읽을 때는 작품 밖에서 얘기를 한다는 느낌인데, 이 사람의 글을 읽을 때는 그 작품 안으로 들어가서 그 작품과 함께 어떤 것을, 정 선배가 많이 쓰시는 말인데, 느껴본다, 아, 이 사람이 느껴보는 것 같아요. 제 표현으로 하자면 작품 안으로 기꺼이 들어간다, 그 안에서 헤매고 뭔가 바깥으로 나오는 줄을 놓치는 한이 있더라도 들어간다는 그 태도가 굉장히 특별하게 느껴졌어요. 게다가 그런 태도를 가진 사람 글이 너무 아름답잖아요. 한국어로도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쓸 수가 있구나. 김윤식 선생의 그 훌륭한 평론도 글의 딱딱함 때문에 질리게 될 때가 있잖아요. 김현은 자기 작품 안에서의 방랑, 방황의 과정을 너무 아름답게 표현하는 사실이 좋았고, 뭐, 무엇보다 그 사람의 태도가 첫 번째로 비평의 굉장히 훌륭한 선택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뒤로 오랫동안 뭘 쓰다가, 그게 무슨 기사든지, 잡문이든지, 비평이든지 상관없이, 글이 막히면 김현 선생의 글을 아무 거나 읽으면 약간 뭔가 정화되는 느낌이 있어요. 직접적인 힌트를 준다거나 사유의 틀을 제공한다거나 하지 않더라도. 정화하고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정성일_ 다시 임권택 감독님 안으로 기꺼이 들어가겠습니다. (웃음) 당장 내일 바뀔 수 있다는 전제 아래 임권택 감독님의 최고 걸작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허문영_ 최근의 마음으로는 < 장군의 아들 >이에요. 영화를 다시 보는데, 영화에 걷잡을 수 없이 빨려들어 갔어요. 그 영화를 이전에 두세 번 정도는 봤었겠죠, 당연히. 정성일_ 우리 토크의 제목을 “결국 임권택 은 < 장군의 아들 >이다”라고 하면 어떠실까요? (웃음) 허문영_ 굉장히 안 좋아 하시겠죠. 이거는 뭐, 할 수 없습니다. 최근의 체험이기 때문에. 최고작이라는 질문은 사실 이성적인 판단을 요구하기 때문에, 이렇게 얘기하겠습니다. 지금 당장 극장에 가서, 임권택 의 영화를 한 편 봐야 한다면 뭘 보고 싶으십니까, 라고 질문하신다면... (잠시 생각) 약간 황홀하다는 느낌, 그런 게 있었어요. 뭔가 기적 같은 영화다, 이런 느낌. < 춘향뎐 >이야말로 정말 기적 같은 영화긴 한데. < 장군의 아들 >은 전혀 다른 철저히 상업적인 기획 아래 태어난 영화고 그렇게 소비되었기 때문에 그런 영화를 다시 볼 때 이런 느낌을 준다는 게, 황홀감을 준다는 게 기적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정성일_ 그 대답을 보충하기 위해 두 가지 질문을 더 하겠습니다. 단 한편의 한국영화라고 하면, 완전히 주관적으로 얘기할 때, 공식적이거나 객관적으로 말고. ‘한국영화는 무엇이다’라는 화법으로 얘기하면, 어떤 영화를 말하고 싶습니까? 허문영_ 사실 정 선배는 임권택 의 영화 세계를 고민하시면서 한국적인 쇼트, 한국의 영화를 지속적으로 말씀하시는데, 저는 그 범주가 아직 제 비평적 생각 속에서 안정적으로 자리를 잘 못 잡겠어요. 그래서 어떤 영화를 볼 때나 그 범주는 먼저 내 머릿속에 들어오지는 않는데, (망설임) 글쎄, 지금 그렇게 물어보신다면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영화는 < 개벽 >이에요. 정성일_ 임권택 이 아니어도 한국영화는 < 개벽 >이다. 이만희 가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허문영_ ‘한국’이 붙어 있으니까... 한국의 최고작, 한국영화사의 최고작과는 다른 뉘앙스로 생각하게 되는 게, 이만희 영화에는 풍경에 대한 사유가 없어요. 장소에 대한 사유는 있는데... (망설이다가) 심지어 < 원점 >같이 설악산에 가서 찍은 영화도 풍경에 대한 사유가 없어요. 임권택 영화는 사유라고 표현하면 적절하지 않은 것 같지만, 풍경에 대한 깊은 감각. 존 포드의 서부극이 미국 풍경에 대한 깊은 감각이 있듯이, 그 감각을 가진 영화는 임권택의 영화 같고. 제일 내 머릿속에 깊이 남게 한 영화는 < 개벽 >이었던 거 같아요. < 취화선 >이나 < 춘향뎐 >이 굉장히 아름다운 영화이긴 하지만, 그때 풍경은 장식적이라는 뉘앙스가 더 강했던 거 같아요. 장식이 아니라 거기 있는 풍경, 그 풍경과 나와의 거리, 되게 특별한 풍경에 대한 감동을 전해주고 내 머릿속에 남긴 것이 <개벽>이었습니다. 정성일_ 부록으로 두 번째 질문입니다. (웃음) 한국영화를 제외하고, 내일 당장 명단이 바뀔 수 있다 치고, 마음속의 단 한편의 영화는 무엇입니까? 마음속의 가장 큰 별이랄까, 자기 머릿속에 영화의 별자리를 짜고 있는 그 중심의 별이랄까... < 바람 >(1928) 허문영_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나오기 싫었는데 (일동 웃음) 즉각적으로 그것도 비교적 최근에 본 영화기 때문에, 계속 오래 남아 있는 영화는 빅토르 쉐스트롬의 < 바람 The Wind >(1928년)이에요. 영화사에도 자주 언급되지도 않고, 시네마테크 프로그램에도 잘 안 들어오는 영화이기도 하지만, 전 그 영화의 굉장히 단순한 구도 안에 거의 모든 게 다 담겨있는 듯한 느낌이 들어요. 사람, 자연, 선택, 사랑... 게다가 그 무성영화 시대 말기의 영화들은 어떤 시대, 어떤 영화들보다 제일 시네마틱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1925년부터 1930년 그 5년 동안 나온 영화들은 어떤 영화보다 더 훌륭해요. 유성영화가 나왔을 때, 마치 무성을 고집하듯이 만든 영화들이 가지고 있는 시네마틱한 힘이라는 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한 힘, 에너지가 있는 거 같아요. 그 시대 많은 위대한 여러 영화들이 있고, 다 훌륭하지만, 그 중에서도 압도적으로 훌륭하다는 건 <바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작품 자체로 치면 < 썬 라이즈 >가 더 훌륭하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썬 라이즈>는 워낙 오랫동안 표준화된 전범처럼 남아있으니까요. 하지만 영화를 봤을 때 충격은 <바람> 쪽이 훨씬 셌어요. 바람이 스크린 바깥으로 불어오는 듯한 느낌. 어떤 특수효과도 없이 대형 선풍기만으로 그 바람을 만들었다는 거... 그거는 카메라가 혹은 만드는 사람들이 바람을 찍겠다가 아니라 바람과 대결하겠다는 방식으로 찍지 않았다면 그 느낌이 안 살아났을 거 같아요. 거의 원시림 안에서 자연을 찍는 다큐멘터리스트의 방식으로 찍은 게 아닌가하는 느낌이 들 정도로 바람이 주는 그 감각적인 느낌은 굉장히 셌어요. 굉장히 특별한 영화다, 라는 느낌을 갖고 있어요. 정성일_ 이렇게도 한 번 물어보고 싶습니다. 영화의 전체적인 완성도와 상관없이, 이 질문을 받는 순간 즉각적으로 떠오르는,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의 명장면은 어떤 것입니까? < 길소뜸 >(1928)의 장면들 허문영_ 사실 이렇게 말하면 너무 재미없는 말이긴 하지만, 임권택 감독님 영화는 명장면 투성이에요. 이야기가 아무리 후져도 명장면을 만들어내는 이상한 감독인데, 제가 지금 떠오르는 건 < 길소뜸 >에 관한 장면이에요. 간단하게 거기에 대해 쓴 적도 있는데 <길소뜸>에서 신성일 과 김지미 가 자기 아들로 추정되는 남자를 찾아가 하룻밤을 묵어야하는 상황이 나오잖아요. 신성일은 그 남자 집에 들어가자고, 김지미는 중산층이자 비교적 그 영화에서 상류층 계급인데, 김지미는 그 남자 집에서 잘 수 없어서 자기 차 안에 기대있어요. 그 남자, 한지일 은 술 퍼먹고 있다가 잔소리하러 나온 자기 아내를 평상 위에서 부부 사이인데도 거의 강간하려고 하다가 실패하고, 부인이 쌩하고 들어가 버리는 그 장면. 아주 짧은 장면이죠. 마누라가 쌩하고 들어가고, 한지일이 몸을 김지미 쪽으로 스윽 돌려요. 카메라는 그대로 서있고 차 안의 김지미의 시선으로 그 장면이 찍혀 있는데, 그 장면이 임권택 영화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 무서운 순간이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내 기억 속에는 어떻게 남아있냐면 한지일이 걸어오는 거예요. 김지미는 차를 빼고 어디론가 가버려요. 나중에 다른 숙소에서 잔 걸로 나오기는 하는데, 이쪽에 발기한 아들의 성기가 있고, 또 상류층 엄마가 있고. 나는 임권택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어떤 특별한 관심이 있다거나 그걸 주요 모티브로 찍은 적은 한 번도 없다고 생각하지만 이 장면 같은 경우는 너무 사악하고 강렬한 성적 에너지로 가득한 장면이어서, 실제로 그 장면 없이도 영화는 성립되지만, 이 여인의 선택에 있어서는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고, 이 장면이 나온 후 김지미는 이 장면이 없던 것처럼 어떤 선택을 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게다가 한지일은 이미 낮에 차에 치어 죽은 개를 잡아먹었잖아요. 사악한 성기, 사악한 아들의 성기. 이걸 역사적인 맥락으로도 해석을 할 수 있고, 계급적으로 해석을 할 수도 있지만, 이 장면에서 절대적으로 바로 끊어내지 않으면 안 되는 사악한 리비도로 가득 차있는, 그래서 <길소뜸>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길소뜸>도 보면 앞에 처음부터 얼마나 구린 대사가 많습니까. (웃음) 그 구린 대사를 완전히 다 한방에 보내버리는 장면이었던 거 같아요. 1980년대 임권택 영화에는 이상하게 그로테스크한 정념의 쇼트들이 되게 많아요. 많다기보다 그런 장면들이 느닷없이 튀어나와요. < 티켓 > < 씨받이 > < 만다라 >도... < 안개마을 >은 그 자체가 모티브이고, 그 자체가 모티브가 아닌 영화도 리비도가 그 서사를 초과해 버려요. 정성일_ 허문영 씨의 자리에서 1980년대 임권택 의 영화를 ‘리비도’의 시대라고 다시 한 번 정의할 수도 있겠네요. 허문영_ 네, 저는 그런 느낌이 강하게 들어요. < 아제아제 바라아제 >도 굉장히 센, 정념, 리비도가 막 서로를 키워나가는 순간이 있고, 그게 어떻게든 수습되거나 차단당하면서 결말이 대부분 다 비극적이거나 우울하거나. 근데 임권택 스스로는 그런 장면들에 대해서는 늘 말씀을 안 하시는 것 같아요. 정 성일_ 늘 피하시죠. 그냥 그런 장면도 필요한거요, 라고 대답하시죠. 허문영_ <길소뜸>의 그 장면은 너무나 강렬해서 다시 보니까 그 장면에서 한지일 이 김지미 차로 걸어오는 건 아니에요. 그냥 몸만 살짝 틀었는데, 그 튼 것만으로 성기가 막 다가오는 느낌인거에요. 그만큼 이 장면의 리비도가 센 거죠. 사실 잘못 기억된 상태로 있는 게 훨씬 더 이 영화를 정확하게 보는 거 같고, 보고 걸어온 건 아니었네, 라고 정리하는 게 오히려 잘못 기억하는 거 같고, 걸어오는 걸로 기억하는 게 이 영화에 대한 정확한 기억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 두만강아 잘있거라 >(1962) 정성일_ 좀 이상한 질문이긴 하지만 임권택 감독님의 첫 번째 영화 < 두만강아 잘 있거라 >는 처음 개봉했을 때 볼 수 없었고 긴 시간이 흐른 다음 비평가라는 자의식을 가지고 본 영화이기 때문에 오히려 지난 영화를 회고한다기보다는 이 영화를 마치 1962년에 만들어진 현대영화처럼 본 느낌이 있는데, 이 영화를 보면서 임권택 감독의 시작은 어떤 감독이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허문영_ 그 영화에 대해서는 정 선배가 잘 말씀하셨기 때문에 제가 더 보탤 말은 없고 (웃음) 그 영화는 29살에 만드신 첫 영화인데, 제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감독의 의도와는 관계없이 인상만으로는 감독이 마지막 장면만을 위해 만든 영화라고 생각되었습니다. 마지막 장면까지 이르는 이야기는 일종의 핑계처럼 느껴지고, 오직 마지막 한 장면에서 모두 죽었고, 정 선배가 전멸의 테마라고 말씀하신 걸로 기억되는데, 설원에 서 있는 건 나무밖에 없고 인간은 전부 가느다란 실이나 점처럼 누워있는 느낌. 그 영화가 충격을 주는 것은, 임권택 감독이 데뷔작부터 잘 만들어서가 아니라, 데뷔작에서부터 철저히 상업영화를 만들겠다고 한 사람이 만든 첫 영화에 순전한 죽음의 이미지로 시작한다는 건 도대체 어떤 시작일까, 어쩌자고 이런 것일까, 실제로 어떤 마음으로 그랬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모든 영화를 제가 다 보지 않았지만 임권택의 대부분의 영화들은 끝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아는 듯한 느낌으로 흘러간다는 생각을 지우기가 힘들어요. 실제로 그렇게 끝나지 않는다고 해도 그런 느낌으로 흘러가고, 인물들도 끝이 아닌 척 하지만, 실제로는 알고 있는 게 아닌가하는 느낌으로 행동하면서 말과 이미지가 계속 충돌해요. 굉장히 특별하고 괴기스러운 데뷔작이다, 란 생각이 들어요. 그게 임권택 영화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습작이 아니라 굉장히 의미 있는 출발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정성일_ 두 번째 질문은, < 잡초 >가 블랙홀처럼 머물러 있긴 한데,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젊은 임권택, 작가 임권택이라고 이분화 시키는 건 굉장히 위험한 시도이긴 합니다만, 그리고 오랜 동안 저 자신이 반대해온 방법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전작전을 진행하면서 임권택이 임권택다워졌다고 생각한 그런 단락(短絡)의 지점은 언제였다고 생각됩니까? < 망부석 >(1963) 허문영_ 필모그래피가 워낙 울퉁불퉁해서 시작부터 어느 시점부터 명백히 임권택 적이라고 말하는 건 쉽지 않은 것 같은데, 제가 받은 느낌은... (잠시 생각) < 망부석 >. 아마 그렇게 훨씬 앞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인거 같아요. 그렇다고 해서 그 이후 바로 임권택적인 세계가 자리를 잡아간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의외로 너무도 젊은 나이, 64년 31세에 만든 작품인 <망부석>에는 임권택적이라고 말할 만한 게 많아요. 이 네 번째 작품에서 제가 그 이후의 임권택 영화에서 느끼는 게 여기 아주 많이 있구나하는 느낌. 이를테면 < 짝코 >에서 두 죽어가는 노인이 말도 안 되는 싸움을 프레임의 한 귀퉁이에서 벌이다가 프레임 밖으로 거의 빠져나는 그런 느낌과 유사한 느낌을 주는 쇼트가 <망부석>에도 있어요. 혜경궁 홍 씨가 진짜 망부석처럼 서서 죽은 남편을 그리워하는데, 거기서 그 장면의 주인공은 혜경궁 홍 씨가 아니라 그 마당이고 정원이에요. 이미 자기의 네 번째 영화에서 어떤 예술을 찍겠다는 의도 없이 만들어진 전형적인 사극영화에서도 임권택의 쇼트가 등장하는구나. 되게 특별한 쇼트다, 라는 느낌. 물론 <망부석>은 이야기가 굉장히 울퉁불퉁하죠. 이후에 <요화 장희빈>만해도 <망부석>보다는 훨씬 세련되게 잘 짜여 졌어요. 그런데도 <망부석>은 이야기를 어떤 시점까지 끌고 가다가 자기가 찍고 싶은 쇼트를 그 순간에 등장시키는 어떤 연출의 힘이 여기 들어갔다고 생각됩니다. 정성일_ 비평가들의 습관이자 씨네필들의 버릇 중의 하나로 이해할 텐데, 임권택 의 영화를, 말하자면 다른 감독의 영향 관계 아래 놓으려는 시도, 노력이 있지 않습니까, 이를테면 끈질기게 임권택 감독을 미조구치 겐지의 계보 아래 놓으려고 한달까, 정작 임권택 감독 자신은 자기에게 영향을 끼친 감독으로 존 포드, 윌리엄 와일러, 빌리 와일더 이 세 사람을 얘기합니다. 좋아하는 영화로 꼽은 펠리니의 < 길 >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씀하시는데, 아마 그건 심정적인 공감일 것입니다. 결국 임권택의 영화에 영향을 준 것을 세 명의 할리우드 감독인데. 이 명단이 우리를 몹시 당황하게 만듭니다. 그 세 감독은 워낙 다른 사람이니까, 교집합을 찾자면 찾을 수 있겠지만, 영화사의 상식적인 교집합은 아니니까요. 질문은 두 가지입니다. 먼저 우리 쪽의 질문인데, 영화사 안에서 임권택을 의식하든, 안하든 계보 안에 끌어들여 놓아야한다면 임권택 영화를 우리는 어느 계보 안에 놓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허문영_ (망설임) 솔직히 계보는 잘 모르겠어요. 해외 비평가들이 임권택 의 영화를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계보 아래 놓으려고 한다는 얘기를 하는데, 그게 잘 동의가 안 돼요. 정성일_ 저는 임권택 감독님 영화 중 사실 미조구치 겐지의 영향을 받은 건 < 아제아제 바라아제 > 단 한편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허문영_ 저도 전적으로 동의하는데, 정 선배가 생각하시는 이유는 다를 수 있겠지만, 해외 비평가들이 떠올리는 건 미조구치 겐지 감독의 50년대, 미학화된 미조구치 겐지의 영화일 텐데, 그것과 임권택 의 유사성은 거의 없는 것 같습니다. 왜냐면 임권택의 롱 테이크와 롱 쇼트는 장식적이거나 미학적이지 않다고 생각됩니다. 뭔가 다른 게 있어요. 그게 역사적 시간에 관한 것이든, 풍경의 침묵에 관련되었거나, 임권택의 경우 롱 테이크와 롱 쇼트는 장식적이지 않아요. 미조구치 겐지의 50년대의 카메라 워크는 거의 즐길 수 있을 만큼 장식적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미조구치 겐지의 50년대 영화 못지않게 30년대 영화가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미조구치 겐지는 어쨌든지 인물의 힘을 어떤 방식으로든 믿었던 사람이고, 그것으로 버텨내려고 했는데 임권택 감독은 믿지 않는 것 같아요. (망설이다가) 그냥 지켜보는 사람인 거 같아요. 이렇게 지켜보고 저렇게 지켜보고, 이 스산한 거리감은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 것 같고, 그런 점에서 미조구치 겐지가 떠오르지는 않아요. 그 스산한 거리를 말한다면 차라리 존 포드가 가깝다는 생각이 들고, 오히려 롯셀리니 이후의 모던 시네마에 정신적으론 더 가까울 수는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모던 시네마는 역사적 시간에 걸쳐 있기 때문에 직접 연결시키기는 좀 힘든 거 같고 임권택 영화는 계보에 넣기에 참 까다로워요. 지금 우리가 보기에 < 춘향뎐 >과 < 축제 >는 거의 전위적인 아방가르드 영화 아닙니까. 이 아방가르드 영화의 역사적 시간, 역사적 풍경, 역사적 소재라는 풍경, 인물이 있고 심지어 전통적인 서사가 있고 동시에 가장 비서사적인 음악적인 리듬과 공존해요.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당분간은 임권택 영화를 어떤 계보에도 포함시키지 않고 생각을 하는 게 차라리 더 낫지 않는가하는 생각이 듭니다. 훨씬 더 많은 연구를 하고 정교하게 분석해서 언젠가는 누군가, 혹은 정 선배가 찾아내시겠지만, 저는 계보에 넣지 않는 게 좋다고 생각을 하고, 저는 KMDb에 지금 연재하는 글의 제목을 '임권택 X 101'로 잡은 건 그런 뜻이라고 생각해요. 101명의 임권택이 있다는 뜻이라고 생각해요. 임권택이 101편을 만들었다는 게 아니라, 101명의 임권택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는 어떤 틀이나 모델은 당분간 없는 걸로 하자, 그것이 억지로 찾아내는 것보다는 임권택에 좀 더 가깝게 다가갈 수 있는 길이다, 그런 취지에서 이런 제목을 달았다고 멋대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존 포드. 윌리엄 와일러 정성일_ 그렇다면 이번에는 임권택 쪽의 질문인데, 존 포드, 윌리엄 와일러, 빌리 와일더, 그 세 명의 감독들로 부터 어떤 영향을 받은 걸까요? 사실 이게 더 모호하게 느껴집니다. 계보를 짜는 건 주관적으로, 편의적으로, 실용적으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짤 수 있지만, 임권택 쪽의 방법이 더 이해가 안된달까... 허문영_ 빌리 와일더 쪽은 잘 모르겠어요. 윌리엄 와일더나 존 포드 쪽에서는 (망설이다가) 너무 딱딱하고 진부한 표현일 수는 있겠지만, 공동체의 윤리라는 문제, 혹은 공동체적 제의? 공동체적 윤리라는 영화적 가치와 공동체적 제의라는 모티브는 임권택 영화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거 같아요. 존 포드의 영화에서는 그 윤리를 어쨌거나 실천하는 사람이 있고, 임권택 영화에서는 그 실천이 사실은 늘 실패로 끝나는 경우가 더 많다는 차이가 있지만 두 사람 다 그 문제를 끝끝내 붙들고 있었다, 라는 생각이 들어요. 윌리엄 와일러도 그런 점에서 비슷하게 얘기할 수 있겠지만, < 우리 생애 최고의 해 >나 < 작은 아씨들 >이 갖고 있는 공간의 드라마라는 게 있잖아요. 사람의 드라마, 사건의 드라마도 있지만 공간의 드라마틱한 배치라는 게 있잖아요. 굉장히 아름답고 영화적인 느낌을 그의 몇몇 영화에서 받습니다. 그 우아함이란 것도 임권택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거 같아요. 그 우아함, 고귀함이라는 가치. 임권택이 보통 한국의 전통 문화를 중시한다, 라고 하는데, 저는 그 말이 그렇게 정확하지 않은 거 같아요. 임권택은 오히려 전통 문화에 대해 굉장히 냉소적인 태도를 취할 때가 많아요. < 씨받이 > 같은 경우도 그렇고. 임권택이 갖고 있는 윤리적 질문은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는가, 그게 가능한가, 라는 오히려 보편적인 질문에 가까워요. 그것이 혹시나 전근대적인 혹은 종교적인 어떤 것에서 그걸 찾을 수 있는가 질문을 하고 있는 거지, 전통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다고 하는 건 정확하지 않은 거 같아요. 반복해서 < 장군의 아들 > 얘기로 다시 돌아오면 화면도 굉장히 아름답지만, 그런 것들이 다 들어있어요. 윌리엄 와일러 적인 것, 존 포드 적인 것, 심지어 빌리 와일더 적인 것. 되게 훌륭한 영화라니까요 (웃음) 정성일_ 재평가하겠습니다. (일동 웃음) 허문영_ 그 영화가 갖고 있는 여러 가지 좋은 점 중에서 영화적인 요소가 아닐 수는 있어도,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예의에요. 예의라는 게 참 아름다운 거구나. 예의의 몸짓이라는 게 있잖아요. 싸우고 나서도 어떻게 예의를 지킬 것인가. 그게 사람을 되게 감동시키는 게 있어요. 영화적 훌륭함과 별개로. 예의라는 것, 공동체의 윤리라는 것, 우아함이라는 게 어쨌든 뭔가 연결되어 있는 거 같고 그게 < 장군의 아들 >이라는 영화에서 집약화 되어 있다는... 정성일_ 사실 대사를 할 때마다 굉장히 뭉클하죠. ''동생, 내가 졌소. 떠나겠소'' 허문영_ 그게 영화적으로 촌스럽다거나 대사가 후지다 그런 느낌이 드는 게 아니라, 되게 가슴이 아픈... 정성일_ 마치 우리 시대가 인간에 대한 예의라는 점에서 일제 식민지 강점기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드니까요. 허문영_ 저렇게 해도 행위가 성립하고 얘기가 성립하는데 그게 지금은 마치 없는 것처럼 얘기가 만들어질까 싶은 거죠. 얘기가 성립하잖아요. 임권택 이 그런 세계를 보여주는 거죠. 예의를 지키면서 성립되는 세계. 정성일_ 장르를 갖고 얘기하자면 임권택 감독 자신은 수많은 장르를 찍었습니다만, 그 자신이 언급하는 것은 서부극 외에는, 많은 인터뷰를 하면서도 장르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어요. 말하자면 이제 KMDb에 '존 포드'를 연재하는 허문영 존 포드 매니아 덕후께서 (웃음) 임권택과 서부극이란 것 사이에서, 그가 만든 짧은 시기 만주 웨스턴이 아니라, 임권택 영화 전체를 놓고, 그런 다음 그 곁에 서부극을 놓고 임권택 영화와의 친화성을 어떻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 수색자 >(1956) 허문영_ 굉장히 도식적으로 대답하게 돼요. 왜냐하면 저는 개인적으로 서부극은 하나의 장르가 아니라 원형적인 장르라고 생각해요. 서부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싶어요. 다른 모든 장르들은 서부극의 하위 장르다, 서부극의 어떤 특정한 측면을 가져온 하위 장르다, 라고 까지 다소 지나치게 말하고 싶어요. 그게 원형적인 장르인 이유는 제가 아까 말씀드렸을 때 임권택 영화에서 발견하게 되는 세 층위가 있는데, 하나가 쉽게 말해서 인물의 시간이 있고, 인물이 하나의 얘기를 만들어가는 거죠. 또 임권택 영화에서 역사적 시간이라는 층위가 있잖아요. 영화에 끊임없이 역사적 인물을 끌어들이면서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역사적 시간, 또 다른 시간으로는 풍경의 시간, 전 이 점이 굉장히 특별한 층위라고 생각되는데요. 제가 가지고 있는 개인적인 가설은 임권택 영화는 이 세 가지 시간이 끊임없이 서로 긴장하는, 서로 서로 모습을 바꾸고 자리를 바꾸는 긴장과 자리바꿈의 영화라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갖고 있습니다. 근데 이 세 개의 시간을 같이 담고 있는 유일한 영화가 서부극인데, 서부극은 미국의 역사적인 경험으로부터 만들어졌는데, 그 경험으로부터 신화적인 영웅이 태어나지만, 신화적인 영웅은 풍경에서 자유롭지 않죠. 풍경이 무언가를 바라보고 심지어 이 두 개의 시간들을 삼키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서부극이 갖고 있는 아주 원형적인 세 층위의 긴장과 대립이라는 게 임권택 영화에서 똑같이 나타난다는 점에서 임권택 영화는 서부극적 이라고 생각해요. 정성일_ (잠시 생각) 음... 설득력이 있네요. 허문영_ 정확한 용어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제 느낌으로 항상 세 층위가 같이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늘 다른 모습으로 등장하고, 자리를 바꾸기도 하고, 어느 한쪽이 가려서 안보기이기도 하지만, 임권택 영화에서 늘 그 세 개가 항상 작용한다... 굉장히 도식적이죠. 정성일_ 느닷없이 질문을 하자면, 영화에서 고전주의란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혹은 대체 그런 게 존재한다고 생각하십니까? 허문영_ 저는 개인적으로 고전주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자크 오몽에게 전적으로 동의합니다. 고전주의적인 영화가 있을 뿐이지, 고전적인 시대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존 포드에 관한 글을 연재하면서 그 이야기를 말할 생각인데, 존 포드는 고전적인 서부극을 만든 적이 없어요. 영화학자나 평자들에게 고전적인 서부극이라는 틀이 있지만, 그 틀에 맞는 존 포드 영화는 없어요. 서부극은 가장 고전적인 장르이고 존 포드는 서부극의 가장 고전적인 장인인데, 그가 고전적인 서부극을 만든 적이 없다면 고전기란 게 도대체 있었는가라고 물어볼 수밖에 없습니다. 무성영화가 얼마나 아방가르드의 천국이었는지 우리 모두 알고 있잖습니까? 정성일_ 그 관점에 따른다면 영화라는 건 모던 시네마, 울트라 모던 시네마, 포스트모던 시네마 같이 시기적으로 존재한다고 보는 입장이네요? 허문영_ 그것들이 비중을 달리하면서 어떤 경향을 만들어 낸 적은 있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진화론적인 단계를 거친 적은 없다, 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아직도 1925년에 만들어진 무르나우의 < 썬라이즈 >가 항상 영화사상 최고의 작품으로 언급되겠습니까? 말이 안 되잖아요. 항상 다른 어법들이 명멸하고 진행되어 오면서 어떤 기법들, 어떤 방식들이 추세적으로, 경향적으로 우위에 선 적은 있지만, 고전적인 시대가 있고 모던한 시대가 있었던 적은 없었고, 심지어 가장 고전적인 것처럼 보이는 영화들조차 모던한 혹은 포스트 모던한 힘이나 요소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성일_ 만일 그렇다면 영화란 결국 모던한 것이다, 라고 얘기할 수밖에 없는 것인데, 모던한 것이라고 부를 수 있는 영화의 가장 중요한 힘, 양태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모던을 작동시키는 그런 힘? 허문영_ 시간과 풍경, 시간과 장소. 이건 영화 이론가들이 말하는 의미에서의 시간이라기보다는, 저는 개인적으로 영화만이 장소의 시간, 풍경의 시간을 담아낸다고 생각해요. 20세기의 영화만이... 풍경이나 장소는 사실 보통 영화에서 고정적인 것으로 등장한다고 생각을 하는데, 실제로 위대한 영화들에서는 항상 풍경이 승리하고, 장소가 승리한단 말이죠. 시간적 승리죠. 개인적 시간과 역사적 시간이 풍경의 시간과 장소의 시간 앞에서 어떻게 버텨내는가가 영화가 시도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그 앞에서 위대한 영화들은 종종 결국 풍경의 시간과 장소의 시간 앞에서 승리를 하는 방식으로 끝나거든요. 모든 인간의 개인적 승리와 역사적 승리는 잠정적인데, 영화만이 그걸 했던 거 같아요. 그런 점에서 그런 영화는 1910년대, 20년대에도 있었고, 영화만이 아직 그걸 가능한 것으로 보여주는 매체이기 때문에 영화는 본질적으로 모던하게 찍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본질적으로. 아무리 고전적인 의도를 가진 감독이라고 하더라도 영화를 찍는 순간 모던한 세계에 진입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거기에 장소가 나오고 풍경이 나오는 거죠. 정성일_ 우리 얘기로 돌아온다면, 그 주장을 따라가면서 임권택 영화를 가장 모던하게 만드는 시네마틱 모멘트는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허문영_ 제가 어느 순간부터 임권택 영화에서 감동받는 것은 카메라가 갑자기 물러설 때. 사건을 찍고 있다가 카메라가 느닷없이 물러서면서, 심지어 그것을 정면으로 찍지도 않아요. 한쪽에 몰아놓고 찍는데, 누구의 시선도 아니죠. 오직 카메라의 시선이나 감독의 시선인데 그게 미학적인 선택이 아니라 임권택이 인물에 대해서, 역사에 대해서, 사건에 대해 그가 갖고 있는 세계관이나 감각을 고스란히 한 표현인데, 그 표현이 저에게 그걸 굉장히 감동적으로 받아들이게 합니다. 시간이 갈수록 그런 느낌이 들거든요. 임권택의 롱 쇼트는 미학적인 선택이 아닌데도, 구도를 아름답게 한 것이 아닌데도 그자체로 너무 아름답지만, 물러서는 순간 굉장히 쓰라리고 뼈아픈, 슬픈 느낌이 동시에 들고, 인물이, 인간이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니구나. 임권택의 롱 쇼트가 갖고 있는 굉장히 특별한 힘인 거 같아요. 이를테면 롱 쇼트를 굉장히 아름답게 찍은 영화들이 많이 있잖아요. 하지만 임권택의 롱 쇼트만큼 슬픈 느낌을 주는 롱 쇼트는 거의 못 본거 같아요. 정성일_ 임권택 영화를 굉장히 모던하게 만드는 힘 중의 하나는 플래시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특히 이미 < 망부석 >에도 플래시백이 등장하고, 여러 가지 변주를 거쳐서 이제 < 짝코 >에서부터 의식적으로 쓰기 시작했습니다. 플래시백의 구조는 가장 영화적인 토픽 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만, 플래시백은 시간을 다루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기억의 방식이기도 한 것인데, 임권택의 플래시백이란 문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천년학 >(2006) 허문영_ 저는 임권택 의 플래시백에 대해서는 아직 정리된 견해가 없어요. 그냥 잠정적으로만 말씀드리면, 임권택 영화에서 플래시백은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서 등장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현재와 플래시백으로 등장하는 과거가 결별하기 위해 등장한다는 것이 제 잠정적인 가정입니다.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플래시백이 등장한 적은 없어요. 그렇게 등장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최종적인 결말은 그 플래시백이 현재에 도달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끝나는 거 같아요. 굉장히 이상한 플래시백인거죠. 현재와 늘 불화한다는 게 참 이상한 건데, 그 불화라는 게 명시적으로 드러나는 건 아닌데, 항상 그것을 등장시켜놓고 그것으로부터, 오늘을 설명하진 않아요. 아주 예외적인 경우 하나가 < 천년학 > 마지막 장면에서 송화가 등장해버리잖아요, 이것은 변형된 임권택의 플래시백이지 전통적인 플래시백은 아닌 거 같아요. 아 그래서 이렇게 됐구나가 아니라 튀어 나버린 거죠. 그렇게 보면 <천년학>도 매우 기괴한 영화인 거죠. 정성일_ 그렇죠, 매우 기괴한 영화죠. 카메라가 물러나는 것이 임권택 영화에서 감동적인 부분이라고 하셨는데, 임권택 영화에서 가장 흥미롭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허문영_ 흥미롭다기보다는 말 그대로 재미있다고 보는 건 섹슈얼한 부분이에요. 임권택 감독님은 자연스러운 거라고 하시지만. 성적인 것에 대한 관심? 성적인 에너지가 불쑥불쑥 튀어나올 때 재밌어요. 90년대 이후 영화에는 그런 게 오히려 절제되어 있는 편이긴 한데 < 장군의 아들 >도 다시 보면서, 여기에 노골적인 정사 장면이 있다는 걸 다시 보고 깨달았어요. 완전히 까먹었거든요. 노출이 다 되어 있을 뿐 아니라 장군의 아들이 게다가 조루라는 설정... (웃음) 심지어 하고 나서 벗은 두 남녀의 뒷모습이 보이고, 여자가 박상민의 등을 툭툭 두드려주고... 그거 너무 재밌지 않습니까? 그리고 그 에피소드는 이 양반이 도대체 저 에피소드를 왜 넣었을까, 그 다음에 성적으로 성공한 장면이 나오는 것도 아니고, 또 < 티켓 >같은 영화는 몰락하는 영화고 타락하는 영화고 그 몰락과 타락에 분노하는 영화인데, 이상하게 그 막내 다방 레지가 고객과 섹스를 하면서 오르가슴을 느끼는 장면을 굉장히 구체적으로 찍어요. 그런 대목들이 임권택 영화의 균질성을 깨뜨린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실제로 이걸 분노의 영화로 보면 그 장면은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하거든요, 근데 그 장면이 있어요. 저는 임권택이 가지고 있는 정직함, 솔직함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자기도 모르게 드러난 솔직함일 수도 있고 설계된 솔직함 일수도 있는데 어느 쪽인 지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 질문을 드리면 그럴 수도 있지 않나요, 라고 틀림없이 반문하실 거 같아요. 정성일_ 대담무쌍하게 제가 27살에 딱 그런 맥락으로 질문을 했어요. (웃음) 임권택 감독님이 대답을 하다말고, 저를 30초 동안 경멸의 시선으로 바라보시더라구요. 그러시더니 그건 정성일 씨가 더 살아봐야 아는 거요, 하시는 거예요. 그냥 멍한 표정으로 다음 질문을 잊어버린 거죠 (일동 웃음) 허문영_ 이를테면 < 천년학 >에서 백사 노인의 화려한 죽음도, 표면적으로 보면 화려함이지만, 그 이면을 보면 솔직함이거든요. 그 친일파가 호사스럽게 지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죽음을 맞습니다. 그걸 이 영화가 거부합니까? 거부하기는커녕 어마어마한 방식으로 찬미하지 않습니까? 찬미한다는 표현이 그렇다면, 그 아름다움을 수긍하지 않습니까? 그걸 수긍한다는 건 엄청난 솔직함, 정직함인 거 같아요. 정성일_ 그런 것이 임권택 감독의 영화에서 흥미롭다면, 불편한 대목은 어떤 것이 있습니까? 허문영_ 불편한 대목들은 대사들이죠, 대사들. 어마어마하게 교훈적인 대사들. 저는 임 감독님께 직접 말씀드린 적은 없는데, 감독님이 < 짝코 >를 말씀하실 때 늘 삭제되어서 아쉽다고 말씀하시는 장면 있잖아요, 그게 뭐냐면 행려 감호소에 있는 TV에서 방영하는 내용인데, 거기서 아나운서의 멘트로 6.25는 열강들에 의한 대리전 이었다, 그걸 말하는 장면인데 그게 짤린 거에 대해 굉장히 아쉬워하시잖아요. 그 말씀을 두세 번 들었는데, 임 감독님은 그게 그 영화의 주제와 직결된 중요한 장면이라고 하셨는데 제 마음 속으로는 그 장면이 없는 게 더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장면은 너무 설명적이고, 그 장면을 보고 두 사람이 깨닫는 건 말이 안 돼요. 두 사람은 이미 삶 자체로써 충분하고 그리고 상대방의 죽어가는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충분해요. 거기에 무슨 새로운 각성이 필요해요? 그런 설명은 없어도 되는데, 말로 꼭 설명을 해줘야 애들은 알아먹어, 하는 순간이 있어요. 그런 대목이 되게 많아요. 그 설명이 나올 때마다, 감독님 설명을 조금 줄이셔도 좋을 거 같습니다, 말하고 싶어요. 정성일_ 이를테면 허문영 씨께서 새로이 등극시킨 한국영화를 대표하는 걸작, < 장군의 아들 >에서도 김두한과 김동회가 싸우는 클라이맥스의 순간에 김두한의 친구가 싸움판에 끼어들어 저놈은 일본의 개다, 라고 소리칠 때, 김동회는 나는 맞아죽어도 싸다, 라는 표정으로 일방적으로 맞을 때는 사실 김이 세죠. (일동 웃음) 허문영_ 자기가 생각하기에 이건 젊은이들에게 꼭 말해줘야 한다고 생각할 때, 그 대사는 늘 설명적이 되고 교조적이 돼요. 그때 저 장면이 빨리 넘어가면 좋겠다 싶어요. 정성일_ 우리가 임권택 감독님의 걸작의 시기만 얘기를 했었는데, 임권택 감독님의 68년에서 < 잡초 > 직전에 이르는 영화들, < 삼국대협 >, < 뢰검 >, < 비검 >... 참으로 장점을 말하기 힘든 영화라고 할까, (웃음) 말하자면 주어진 조건이나 상황에서 정말 어쩔 수 없었지만 하여튼 영화를 만들어야만 했던 이 시기의 영화를 바라보는 느낌이 어떻습니까? 허문영_ 그 얘기가 나왔으니까 거기에 대해서는 제가 질문을 드릴게요. 사실 제가 할 말은 특별히 없는데, 정 선배가 연재를 하시기 때문에 제가 여쭤보고 싶습니다. 정 선배가 쓰신 <장안명기 오백화>와 <뢰검- 번개칼>을 읽었습니다. 그 글을 보고 필사적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웬만하면 구원비평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데, 이건 구원비평을 넘어서 신을 사도가 방어하듯이 필사적으로 방어한다는 느낌이었어요, 한 사람의 작가를 방어하는 게 아니라, 그렇게까지 했어야했나요? <삼국대협>(1972) 정성일_ (잠시 생각) 무언가 이 시기를 비평이 써야 한다는 것은 고통입니다. 아마 그건 허문영 씨께서도 동의하실 것입니다. 저는 거기서 무언가를 발견하지 못하면 더 미루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영화들을 다시 보기 시작했습니다. 자, 이 영화들이 무언가 부서져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 수밖에 없습니다. 그때 제가 본 것은 의도적인 자포자기였습니다. < 망부석 >을, < 법창을 울린 옥이 >를, < 황야의 독수리 >를, < 원한의 거리에 눈이 나린다 >를 만든 감독이었습니다. 심지어 < 삼국대협 >에서 대나무 숲에서의 검술 액션 장면도 그 자체로 어떤 영화적 쾌감이 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그걸 찍을 수 있는 사람이 한 영화 안의 마지막 장면에서 갑자기 적장 구로다가 명검을 휘두르니까 대결이 시작되자 마자 중국의 외팔이, 일본의 맹협, 조선의 일지매의 칼이 그냥 무 잘리듯 부러져나갑니다. 이건 대결장면 자체를 찍지 않겠다는 선언 같은 것입니다. 검술 영화가 클라이맥스에서 마지막 대결의 순간에 그걸 포기해버린 것입니다. 심지어 구로다가 명검을 두 번째 휘두르니까 외팔이의 팬티가 벗겨져서 그걸 추스르며 이 방 저 방을 도망쳐 뛰어다닐 때, 이건 그냥 이 순간을 마치 망쳐버리고 싶은 포기의 의지랄까, 긍정이 아닌 부정 안의 결단이 있을 때, 물론 저는 이것이 < 잡초 >로 가는 길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정말 그때 막바지까지 와있는 임권택 을 보는 느낌이 있었던 거예요. 저는 구원하고자 한 게 아니라 자포자기를 묻고 싶었던 거예요. 이 시기에 제가 건드려보고 싶었던 건 자포자기의 연출이란 무엇인가, 이것도 하나의 개념이 되지 않을까. 한 번도 영화비평이 건드려보지 않았던 문제, 만약 이걸 이론적으로 정식화할 수 있다면 60년대에서 70년대로 넘어갔었을 때 수많은 감독들, 이런 관점에서 이만희 를 구원할 수 있고 김기영 을, 또 유현목 을 새로운 자리에로 끌어올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있는 거예요. 우리는 이 시기가 단지 폭력적인 검열뿐만 아니라 끔찍한 산업적 구조 안에서 영화에 어떤 기대도 없는 구경꾼에 가까운 관객들을 대상으로 영화가 만들어지고 있었다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세대의 감독들이 견디는 와중에 자신을 표현하는 유일한 방법은 자포자기의 연출, 의지가 아니라 할지라도 매우 부정적인 방식으로 말하자면 살아냄이랄까, 그런 것에 관한 하나의 서문을 써보고 싶었습니다. 68년에서 79년에 이르는 이 시기의 한국영화를 위해서 누군가는 새로운 비평의 전술이랄까, 모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1960년대가 에덴동산이었다면 1970년대는 지옥의 연대기였습니다. 저는 지금의 영화 학자들이 하는 방식으로는 그 시기를 복원시키지 못할 것이라는 어떤 실망감이 있습니다. 이건 절대적으로 비평가들의 임무 같은 것입니다. 이건 영화의 담론이 망가진 것이 아니라 영화의 형상이 부서진 것이니까요. 그런 생각이 있는 거죠. 너무 위험한가요? 허문영_ 약간은 이해가 되네요. < 뢰검 >을 보며 들었던 생각은 이건 너무 지나치다. 이 영화를 정 선배가 설명하는 방식도 오마주도, 그리움도, 그 시대에 대한 회복에의 의지도 없는 어떤 특별한 방식의 회상이다, 라고 말했을 때, 이 설명이 성립하려면 이 영화를 만든 감독의 인격과 기억이라는 완전히 영화 외적인 요소를 동원하지 않으면 전혀 설명이 성립하지 않잖아요. 이 감독의 인격과 영화적 경험을 동원해야지 설명된다면, 이 영화에 대한 설명이 아니지 않은가, 이 감독의 평전이 아닌가, 이건 이 감독의 삶을 말하기 위해 영화가 끌려온 게 아닌가, 그래서 과도하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처음 이 연재를 시작할 때 모든 영화를 처음 보듯이 본다고 했는데, 그럼 처음 보듯이 봐야지 왜 임권택 감독의 개인사와 영적 고뇌와 기억을 영화를 설명하는데 끌어들여서 이 영화를 왜 그의 삶을 말하는 데 쓰고 있는가, 이건 본인 필자의 처음 약속과 다르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질문을 하고 싶었는데 정 선배가 지금 하신 말씀은 이건 임권택 개인의 어떤 선택일 뿐만 아니라 그 시기를 살아온 감독들, 어떤 시기에 감독들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일종의 패턴이고 양식이었다면 비평적으로 충분히 고민해 볼 수 있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렇다고 과도하다는 느낌 자체가 없어지진 않네요. 정성일_ 이제 제 질문에 답할 시간입니다. (웃음) 허문영_ (웃음) 저는 그 질문 외에는 정 선배의 질문에 대해 답할 수 있는 게 없네요. 어쨌든 임권택 영화뿐만이 아니라 히치콕, 존 포드 영화에도 버려야 할 영화는 버릴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아직은. 그걸 다른 평자가 선택해서 내가 못 본 걸 말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걸 내 눈으로 보기에 버릴 수밖에 없는 영화는 버려야한다고 생각해요. 그걸 다 끌어안을 만큼의 힘은 없는 거 같아요. 그거는 인정을 해야 할 거 같고. 그래서 그 시절의 영화들, < 뢰검 >이나 < 장안명기 오백화 >에 대해 고민하고 싶지 않아요. 더 이상 묻지 마세요. (웃음) <하류인생>(2004) 정성일_ 알겠습니다. 이건 제 숙제이군요. (웃음) 임권택 감독님이 < 만다라 > 이후에, 혹은 < 씨받이 > 이후에, 혹은 < 서편제 > 이후에 < 취화선 > 이후에 비평가들의 환호를 받고 잘 받아들여진 것 같지만, 사실 들여다보면 비평가들이 가장 오해하고 있는 감독 중 한 사람이지 않습니까. 대표적인 게 최근작, < 하류인생 >에 대한 비평의 실패, < 천년학 >에 대한 비평적 무관심. 말하자면 곁에서 생각하기에 한국의 비평 담론이 임권택 영화에 대해 가장 오해하는 측면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허문영_ 저는 그 오해에 가장 결정적인 기여를 한 사람이 임권택 감독님 본인이라고 생각해요. 그 스스로 자신의 영화를 < 개벽 >에서 인본주의라고 말한 순간부터 저는 그 오해가 완전히 지배적인 게 되어서, 아직도 그 안에서 못 벗어났다고 생각해요. 저는 극단적으로 말해서 임권택 영화는 한 번도 인본주의적이지 않은 적이 없었고 이 세상의 모든 영화는 인본주의적이에요. 따라서 인본주의는 임권택 영화를 설명할 어떤 키워드도 되지 못한다고 생각해요. 차라리 임권택 영화는 반인본주의적인, 통상적인 의미로 인본주의라고 말하는 것과 정반대이기 때문에 그가 영화적 순간을 끊임없이 만들어낸다고 생각해요. 임권택 영화의 키워드를 굳이 말하자면 저는 반(反)인본주의라고 생각해요. 임권택 감독님 스스로 굉장히 공들여 찍었고 알아봐줬으면 하고 바라는 장면 중 하나인, 춘향이가 곤장을 맞을 때 카메라가 뒤로 휙 빠질 때 그게 인본주의적입니까? 그게 곤장을 맞는 춘향이의 아픔을 카메라가 지금 같이 겪고 있습니까? 전혀, 천만의 말씀이죠. 전혀 아니죠. 인간의 개별적 고통이라는 것에 영화가 몰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에요. 그걸 외면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거에 매달려서는 영화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인본주의라는 틀로는 카메라가 뒤로 빠지는 순간을 볼 수가 없죠. 그게 보입니까, 안보이죠. 뒤로 빠지면서 그 영화는 무엇에 봉사합니까? 판소리의 리듬, 음악적인 어떤 조화의 순간, 아름다움.. 인간의 개별적 사연, 인간의 개별적 드라마로써는 도달할 수 없는 어떤 아름다움의 순간을 위해 개별적인 고통과 시련을 포기해버리잖아요. 포기하는 게 아니라 그걸 뒤로 밀어내면서, 카메라가 뒤로 빠진단 말이에요. 이 카메라는 반인본적인 카메라에요. 이 카메라를 선택한 사람이 자신의 영화를 인본주의적이라고 설명하는 순간 그걸 듣는 사람은 그런가 생각하고 그때부터 오해의 말들이 나온다고 생각해요. 장승업이 불가마 속에 뛰어 들어가는 장면이 인본주의적입니까? 전혀 아니죠. 장승업은 인본주의자가 되려고 노력했으나 결국 실패한 사람이잖아요. 실패한데서 이 영화가 끝나는 게 아니라, 그런 인간사와 다른 층위가 뭔가 있지 않을까하는 게 장승업의 최후의 선택이잖아요. 자기가 가마가 되고 자기가 도자기가 되고, 자기가 도자기 표면에 새겨진 그림이 되는 거잖아요, 흙이 되고 어떤 물질이 되는 거잖아요. 임권택의 영화는 끊임없이 자기도 모르게, 인간이 인간의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느냐는 고민을 끊임없이 하지만, 결국 그게 불가능하다면, 대신 어떤 고백을 계속 해왔다는 느낌이 들어요. 고백의 어떤 시점부터 말 그대로 미학적인, 어떤 비약으로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지점까지 결국 자기 영화를 밀고 나갔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래서 < 하류인생 >에서 다시 인간의 얘기로 돌아왔을 때 미학으로 나갈 가능성이 전무한 인간의 이야기로 돌아왔을 때, 그 모든 시간은 죽어버리잖아요. <하류인생>에서 주인공의 시간은 결국 다 죽어버리잖아요. 각성이 없잖아요. 각성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각성이 어떤 비약도 만들어 내지 못하고 죽어버려요. 죽어버리기 때문에 영화가 자막으로 보충하는 거잖아요. 그 자막이 뭡니까? 맑아질 조짐이 보입니다. 맑아졌다는 것도 아니야, 맑아질 조짐이 보인다는 것, 이 드라마가 얼마나 완전히 실패했는지를 이 자막보다 더 철저히 드러내주지 않아요. <하류인생>은 아마 제 생각에는 감독님이 이렇게 만들려고 하지 않았는데, 만들다보니까, 아, 내가 더 이상 인간의 드라마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냥 깨달은, 스스로 만들면서 알게 된 영화, 그래서 마침내 그 영화를 어처구니없는 자막으로 보충할 수밖에 없는 영화, 마지막 그 몇 문장의 자막이 영화를 덮어버리는.. 그래서 난 이 오해로부터, 영화를 평하는 사람뿐 아니라 영화를 보는 사람들도 임권택 감독님 스스로 표명하신 인본주의라는 키워드를 빨리 폐기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감독님 본인이 들으시면 굉장히 화를 내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기 때문에 임권택 영화를, 상식적인 의미와는 다른 반인본주의적인 영화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끊임없이 우리를 자극하고 볼 때마다 우리를 새롭게 만든다는 생각이 듭니다. 정성일_ 자, 마지막 질문입니다. 비평가들이 정식화시킨다면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가 우리에게 준 영화적 유산이란 뭘까요? 너무 서두른 것일 수도 있지만. 허문영_ (망설이다가) 임권택 의 영화는 컨셉츄얼한 모던 시네마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던 거 같아요. 한 번도 없었어요. 한 번도 임권택은 컨셉츄얼한 모더니즘에 이끌린 적은 없었는데,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모르겠지만 임시적인 표현으로 하자면 임권택의 영화는 체험적인, 경험적인 모더니즘 영화인 거 같아요. 어떻게 시작하고, 어떤 소재에서 시작을 하더라도 모던 시네마가 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그의 모던 시네마가 주는 어떤 감흥은 형식이 주는 감흥이 아니라 생(生)체험이 주는 감흥. 모던 시네마는 사실은 생체험이라는 게 키워드가 아니거든요. 근데 희한하게도 임권택의 모던 시네마는 생체험이 거의 절대적인 요소예요. 그게 임권택의 영화를 아주 특별하게 만들어요. 스스로 만들면서도 그걸 새겨놓고 그걸 보는 사람에게도 전이시켜요. 아마 우리가 임권택과 같은 땅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그걸 좀 더 잘 느낄 텐데, 해외 관객들에게 종종 알쏭달쏭한 영화처럼 비쳐지는 이유가 거기 있는 거 같기도 하고. 굉장히 특별한 유형의 특별한 모던 시네마이지 않을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임권택이 어떤 형식의 모험을 하고 실험적인 시도를 하더라도 어떤 미학적인 몸부림으로 느껴지기 이전에 그가 처음부터 자기 머릿속에서 떨어질 수 없는 공동체의 윤리라는 문제.. 일종의 탐구과정이라고.. 뭐 잘, 하나의 몇 가지 키워드로 잡힐 수 없는 세계가 아닌 것만은 분명해요. 공동체의 윤리가 사라졌다, 불가능해졌다라는 얘기는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데 그래서 모던 시네마는 그 이후에 찍는데, 임권택은 그 이후를 살면서 그 이전을 결코 잊지 못하는 사람.. 잊지 못한다는 자신과 눈앞에 보이는 가능성이 모두 사라진 세상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잖아요. 분열 자체를 그 영화가 계속 담고 있기 때문에 항상 위태위태한, 언제든지 분열 직전, 파열 직전의 모더니즘.. 그래서 임권택의 영화를 보면 늘 아슬아슬한 느낌. 아슬아슬하게 넘어간다는 느낌을 벗어날 수가 없어요. 그냥 미학적인 선택을 해버리면 되는데, 미학적인 선택에 만족을 못하거든, 그래도 혹시 라는 게 임권택의 영화를 위태롭게 만들고 그래도 정직하기 때문에 필사적으로 자기 분열을 방어하기 위해 장치들이 들어오고, 그 장치들이 혼란스럽기도 하고, 또 어떤 때는 기적적으로 조화를 이루기도 하고 어느 경우든지 위태로운 느낌은 들어요. < 하류인생 >이나 < 천년학 >은 엄청나게 위태롭고 < 취화선 >도 위태롭고, <춘향전>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점에서 몸으로 버텨낸다는 게 어떤 감독에게도 찾기 힘든 진정한 미덕이라기보다는.. 뭐, 팔자고 운명이고, 그 운명이 그 사람을 만들기 때문에 영화적으로 영화라는 출구로 삐져나온 힘 같은 게 되는, 그런 느낌을 남겨주신 것 같습니다. 정성일_ 잘 들었습니다. 함께 임권택 감독님의 영화를 생각해주어 감사합니다. 2013년 12월 26일 약간 비가 내린 다음 몹시 바람이 차가웠음 진행, 정리, 사진_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