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과 여교사
- 감독
- 임권택
- 제작년도
- 1965
- 출연
- 박암, 엄앵란, 이경희, 최성호, 김진규, 이예민, 이해룡, 문태선, 유춘수, 김기범, 박병기, 주상호, 최성진, 이기동, 주선태, 이예성, 이상사, 이용, 박민호, 이영호, 전무송, 권성택, 박승진, 차길, 태일, 최재호, 이주빈, 김경길
1. “'나의 한국고전영화'(가제)라는 주제로 (…) 한국고전영화 대해 애정을 쏟는 부분이나 관심을 갖게 된 지점 등 한국고전영화에 대한 다양한 시선의 이야기를 KMDb 에 싣고자 합니다. (…) 조금 더 개인적인 에세이 형식의 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원고 청탁은 덜컥 받았지만―KMDb에 글을 써보는 게 소망이었다.―빈 문서에 주제 적어두니 정말 불안하고 의아해졌다. ‘나의’는 불안하게 만들었고, ‘한국고전영화’는 의아하게 만들었다. 먼저 의아함은 ‘한국고전영화’라는 단어의 모호함과 관련된다. 비슷한 이름의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Classical Hollywood Cinema’가 특정 역사적 시기나 미학 체계를 지칭하는 것과 달리, 1) ‘한국고전영화’는 용어로 정립되지 않은 것 같다. 가령 영상자료원 운영 유튜브 채널 [한국고전영화 Korean Classic Film]에는 많은 영화가 업로드 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 근로의 끝에는 가난이 없다 〉(이규설, 1920년대 추정), 〈 귀로 〉(이만희, 1967), 〈 미지왕 〉(김용태, 1996)도 있다. 이 세 편 영화를 하나로 묶는 역사적 시기와 미학 체계를 찾는 건 어려워 보인다. 차라리 조선영화, 남한영화, K영화… 이런 식이라도 따로 지칭하는 게 더 실재에 가까울수도 있을 것 같고. 아무튼 ‘한국고전영화’를 모호하게 사용하는 예는 논문, 기사 어디에서도 비근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고전영화’는 그냥 이렇게 사용되는 것 같다. “여러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졌던 영화, 여러분들의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가 봤던 영화, 한마디로 옛날영화(김홍준, 2008)” 2) 당연하지만 ‘한국고전영화’를 “한마디로 옛날 영화”라고 해서 의아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의아해진다. 올해 태어난 내 친구의 아들에게는 〈 범죄도시 3 〉이 한국고전영화가 되는 걸까? ‘한국고전영화’를 ‘한국옛날영화’로 넘어간다 해도, ‘나의’라는 수식어는 나를 불안하게 한다.‘나의 한국옛날영화’ 이 말은 나를 불안하게 한다. 특히 “한마디로 옛날영화”라는 말을 하필 김홍준으로부터 찾았다는 것은 더욱 더. 시간을 조금 돌려보자. 2021년 나는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영화제-오래된 미래’에 김홍준의 〈나의 한국영화〉 연작을 초청했다. (아마도 〈나의 한국영화〉에서 따왔지 않을까 하는) ‘나의 한국고전영화’라는 주제를 받자마자, 나는 그 영화와 그때 보낸 추천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비디오 대여점이 사라지고 있었고, 시네마테크 같은 근사한 이름들은 멀게 느꼈던, ‘굿다운로더’라는 이름이 낯설었던 과거. (합법 영역이 욕망을 좌절시켰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웹하드를 통해 한국고전영화-사실 거의 모든 영화-를 다운로드 하고, 봤다. 다른 영화 파일과 달리, 한국고전영화는 구성이 유달리 이상했는데 꼭 어떤 사람의 해설이 영화 앞에 붙어있었고, 때때로 출연진과의 짧은 대담이 이어지기도 했다. 뒤늦게 알았다만 그 파일은 ‘한국영화걸작선’을 녹화한 것이었고, 해설자는 김홍준이라는 사람이었다. / 〈나의 한국영화〉는 김홍준이 한국영화걸작선 프로그램 진행자로서 비디오를 획득할 수 있었던 위치를 활용해 만든, (모든 에피소드에 해당되지는 않지만) ‘오디오비쥬얼에세이’ 작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의 한국영화>를 시네필 1세대-문화원 세대-가 바라본 ‘한국영화’, 또 오디오비쥬얼에세이의 아직 도달하지 못한 가능성이 담겨있는 작품이라 소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고 천진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나의 한국영화〉가 저작권을 클리어하지 않고 제작되었다는 점에 핵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한국영화’라는 간단한 이름처럼, 그저 대면하고픈 작은 욕구에서 관점의 순수성이, 그리고 그로부터 새로운 형식이 가능했던 거라 믿는다. / 〈나의 한국영화: 에피소드 4 키노99〉는 유튜브에 업로드 되어 있다. 저작권 문제로 마지막 배경음악은 제거 되어있는데, 제거 된 노래의 이름은 ‘Je te veux’ 한국어로는 ‘당신을 원해요’다. 〈나의 한국영화〉의 첫 편 〈나의 한국영화1: My 충무로〉에서 김홍준은 〈 개벽 〉(임권택, 1992)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던 기억, 〈 서편제 〉의 마지막 장면에 자신의 딸이 출연했던 것, 〈어느 여배우의 고백〉과 충무로 활동 경력을 내레이션 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의’는 화자가 그 피수식어와 맺고 있는 삶의 관계를 함축하는 수식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인 한국옛날영화에 ‘나의’라는 수식어를 붙인 주제로는 아무런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았고, 급기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의+한국고전영화 = 불안+의아함 = 포기… 임재철: 기본적으로 세계 어느 나라나 자국영화에 대해 냉담하다. 미국을 제외하면 거의 그렇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건 자국영화가 자국어를 사용해서 그렇다. 그걸 나는 ‘영화는 외국어다’라는 명제를 써서 설명하는데, 그게 문자 그대로 영화가 외국어여야 한다는 게 아니라 영화는 외국어처럼 쉽게 포착이 안 되는 게 본질이라는 거다. 예를 들어 한국 영화 보는 경우엔 우리 현실에 안 맞다 거나 연기가 서툰 것을 굉장히 빨리 포착한다. 영화라는 건 우리가 가볼 수 없는 곳, 우리가 막연히 몽상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점이 있어서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건데 3) 정성일: 영화는 보지 말라고 하니까 더 매혹적이고, 힘을 얻는 것이다, 문학도 학교에서 가르치니까 찾는 사람이 없는데, 왜 영화를 벌써 박물관으로 보내려 하느냐, 그런 얘기였다. 지금 영화는 공식문화가 돼버려, 매력적인 대상이 되기엔 힘이 부족한 것 같다. / 김홍준: 매혹과 열정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옛날 한국영화를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봐라. 모르는 거니까, 흥분할 수 있다. 둘째. 제도교육으로 배우려 하지 말아라. 4) 그렇게 원고를 회피하다가 영화평론가 임재철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리고 정성일·김홍준의 좌담을 떠올리고 포개어보았다. 임재철에게 ‘영화는 외국어’라서, 분명해서가 아니라 무언가 불분명한 점이 있어서 매혹적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세계 어느 나라나 자국영화에 냉담하다 5) 정성일·김홍준의 문제의식도 유사하게 읽을 수 있다. 그들은 공식문화가 된 이후에 영화는 매력을 잃었다고 말한다. 물론 임재철, 정성일·김홍준이 겨냥하는 지점에 차이는 있다. 임재철은 스크린 내 요소들의 익숙함이 매력을 저감시키는 점을, 정성일·김홍준은 스크린을 접하기 이전 정보의 과다함이 순수한 체험을 방해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표면적인 연상으로 두 인터뷰를 포개어보자. 영화는 외국어라서 흥미롭다(임재철) 그런데 공식 교육에서 외국어를 너무 가르치곤 한다. 그러므로 오히려 흥미로운 건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옛 우리말이다(김홍준)? 실로 옛 우리말은 지금의 우리말보다 불분명하다. 훈민정음의 유명한 구절을 안다면 들리는 것과 써진 것을 함께 떠올릴 수 있지만, 그냥 음성만 듣고 있으면 꼭 외국어 같다. 그러다가도 ‘사람마다’라거나 ‘사람이니라’ 같은 부분에서는 또 익숙하여, 불분명하던 앞뒤의 말을 이어맞춰보곤 한다. 그리고 더 궁금증이 생긴다면 ‘우리말’이므로, 여러 방면으로 궁금증을 해결하기 편하다. 개인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나의 한국옛날영화’라며 말할 수 있는 고유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측면이다. ‘한국옛날영화’는 예나 지금이나 시네필의 관심 영역에서 벗어나 있어서 희귀한 ‘순수한 감상자’의 자리를 허용한다. 친절한 공급자도 적고, 알고리즘의 되먹임(KMDb가 알고리즘 기반 vod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기를…)도 없다. 그런데 영화 혹은 그 영화를 만든 사람에 궁금하거나 의아한 점이 생긴다면 그 영화·사람의 주변/관련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물론 2001년 정성일·김홍준이 ‘한국옛날영화’를 모르는 것으로 거명했을 때보다 한국영화사 연구는 훨씬 많이 누적되었다. 그럼에도 정전(canon) 이외의 작품은 소위, ‘작가’의 작품인 경우에도 아직 충분히 감상 되지 않았으며 해명되지 않았다. 한국옛날영화는 우리 영화팬에게 감상뿐만 아니라 역사적 해명을 충분히 시도해 봄직한 미개척의 공간이다. 박진희가 「한국고전영화 상대하기-나의 경우」에서 거명한 “역사가로서의 강력한 감상자”는, ‘옛 우리말’이라는 부분적인 분명함의 조건에서 비단 영화사 연구자/영상자료원 직원에게 한정되지 않는 모델이 될 수 있다. 6) 2. 이러한 맥락에서 내가 하나의 한국옛날영화감독에 접근하고 있는 것을 소개해보고 싶다. 이만희는 연구사의 첫머리부터 ‘숙명적 운명론자’로 논해지곤 했다. 사람들의 삶에는 조건과 한계가 정해져있고 그로부터 탈출은 불가능하다. 이만희의 주제는 반복되는 노동 혹은 일상의 갑갑함이었다. 이만희 또한 자신의 주제를 분명히 인지했던 것 같다. 그는 1973년 08월 「혼자이기 때문에」라는 짧은 글을 썼다. 이 글은 지금껏 인용되지 않은 게 의아할 정도로, 이만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조금 길게 인용해보자. (…) 우리 인간이 느끼는 여러가지 감정 중에서 맨 처음의 감정이나 또는 이 세상에 미련을 남기며 혼자 쓸쓸히 죽어가는 마지막의 감정은 바로 소외감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읍내의 극장에서 화려한 상류(上流) 생활을 그린 영화를 보고 어두운 논뚝길을 타박타박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가난한 시골처녀, 사방 1미터도 채 안되는 공간 속에 하루종일 앉아서 담배를 피는 아주머니, 똑같은 노선을 하루 종일 오락가락하는 버스 안내양, 분필가루 속에서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가르치던 것을 금년에도 반복해야 하는 여교사, 잠깐 한눈 팔면 무슨 짓을 할는지 모르는 개구장이들을 마치 간수처럼 하루종일 지켜야 하는 어머니,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와 기묘하게 폭발하고 말듯이 주체할 수 없는 생명력 사이에 끼어서 방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턱을 고이고 앉아 있는 여대생, 장성한 자식들과 출세한 남편은 제 볼일로 각기 바빠 값비싼 장신구와 함께 버려져 있는 중년부인… 등등, 여유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지식 수준이 높으면 높은대로 낮으면 낮은대로, 어디선가 남들은 풍족한 생활을 하며 쭉쭉 뻗어가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이 아무 변화 없이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날로 퇴보하고 있는 것만 같은 소외감을 느낀다. (…) 나로서 가장 관심이 깊은 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이 느끼는 이 소외감이다. 영화를 통해서 나는 인간들이 그 소외감을 어떻게 느끼며 어떻게 처리해 가는가를 그리려고 애써 왔다. 그러면서 내가 발견한 것은 소외감 그 자체는 명백한 인간의 조건일 뿐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에 따라서 선하게도 되고 악하게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얻은 결론은, 자기의 소외감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해소시키려 할 때 무리가 생기고 악이 되기 쉽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일일지라도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 소외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선 「일」을 찾을 것, 그것에 몰두할 것, 그것을 완성시킬 것, 또 「일」을 찾을 것…그래야만 우리는 훼진 운동화를 신고도 남루한 옷을 입고도 아무런 소외감을 느끼지 않으며 번화한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것이다. 7) 이 글에서 이만희는 인간 보편의 문제에 가까운 소외를 주목한다. 이만희는 이 소외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일을 제시하지만, 마지막 문단의 “「일」을 찾을 것, 그것에 몰두할 것, 그것을 완성시킬 것, 또 「일」을 찾을 것”이라는 반복은 소외의 극복이 불가능함을 역설적으로 강조―기실 이만희는 “똑같은 노선을 하루 종일 오락가락하는 버스 안내양”과 “분필가루 속에서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가르치던 것을 금년에도 반복해야 하는 여교사”처럼 반복되는 일에서 소외를 찾고 있다―한다. “훼진 운동화”, “남루한 옷”이 풍기는 쓸쓸한 정서는 극복 불가능한 소외를 강화하는 전략 같이 느껴진다. 이런 글과 그의 영화에서 나는 우거지상 혹은 무표정한 사람으로 이만희를 떠올렸다. 그런데 최근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한국영상자료원’이 2015년 04월 29일에 facebook에 올린 포스트를 보게 되었다. (https://www.facebook.com/koreanfilmarchive/photos/%EC%B5%9C%EA%B7%BC%EC%97%90-%EC%98%81%ED%99%94%EB%B0%B0%EC%9A%B0-%EB%AC%B8%EC%88%99%EB%8B%98%EC%9D%B4-%EC%83%88%EC%82%BC-%EC%A3%BC%EB%AA%A9%EF%BF%BD/797165160399351/) 이 포스트에는 멋진 사진이 있었다. (사진에는 1974년 여름 〈 삼포 가는 길 〉 촬영장이라 적혀 있지만, 입고 있는 옷은 문숙과 이만희가 처음으로 작업을 함께 한 〈 태양 닮은 소녀 〉의 촬영장이 분명하다.) 급하게 촬영한 것처럼 초점은 흔들려 있고, 초점이 맞지는 않지만 사진 속의 이만희는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이 웃음이 낯설었고, 좋았다. 그래서 의미심장하게 느껴졌고 궁금했다. 혹시 이만희는 일상의 갑갑함이나 소외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사랑을 찾은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정말 그랬던 것 같았다. 비록 앞서 길게 인용한 「혼자이기 때문에」처럼 이만희가 직접 밝힌 적은 없지만, 이만희의 경력에서 사랑은 하나의 주제를 이뤘다. 먼저 14년의 짧은 경력 동안 이만희는 무려 51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일」을 찾을 것, 그것에 몰두할 것, 그것을 완성시킬 것, 또 「일」을 찾을 것…”을 실천하듯 이만희의 영화 제작 소식은 그의 활동 기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그리고 이만희는 사랑을 했다. 감독 데뷔 시점부터 사실혼 상태였던 이만희는 1966년 〈 만추 〉의 배우 문정숙과 연애를 했고, 1974년의 시점에서는 배우 문숙과 연애를 했다. 1975년 4월 13일 이만희의 사망 이후에도 신문·잡지에는 이만희의 연인들의 말이 널리 보도되었다. 영화배우인 이혜영이 그의 아버지 이만희를 추억하는 글에 붙인 제목처럼 “은막의 대들보 우리 아버지(인용자-이만희), 천재는 오직 사랑뿐이었다.” 8) 그런데 이만희의 이 편력에는 독특한 구석이 있다. 여성 편력이 (특히 당사자 여성에게) 통념상 부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만희와 시간을 함께 보낸 여성들은 그와의 시간을 후회하지 않았다. 이만희의 두 번째 아내 9) 인 오흥순은 이만희와 결별 후에도 “그이와의 7년간의 결혼생활이 내게는 너무 아름다운 추억”이었기에 오랜 기간 재혼을 하지 않았다. 10) 문정숙 또한 이만희가 죽은 후에도 “「만추」(이만희와 함께 촬영한 영화의 제목-인용자)라는 음식점을 운영”하기도 했고 매해 가을 “낙엽속에서 그의 숨소리와 뜨거운 「영상의 혼」을 발견”하곤 했다. 11) 그의 마지막 연인인 문숙 또한 2007년 한 권의 책 마지막 한해를 통해 이만희와의 사랑을 추억했다. 12) 이만희는 사랑을 많이 한 사람일 뿐 아니라, 사랑을 참 열심히 그리고 잘 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학부 때였나? 수업 시간에 한 교수가 사랑의 비효율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다. 사랑에 목을 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고, 대학생이 조심해야 하는 일이라고. 나는 그 교수가 바보라고 생각했다. 목맬 수 있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건 복된 일이다. 사랑이 끝난다고 해서 그 복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사랑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준다. 소외를 말한 우거지상의 이만희가 문숙 옆에서 웃을 수 있었던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이러한 사료/정보로부터 우리는 이만희 영화에서 무엇을 어떻게 다시 볼 수 있을까? 〈삼포 가는 길〉(이만희, 1975)로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영달과 정은 백화를 떠나 삼포로 향한다. 이만희는 떠나는 영달과 정의 얼굴을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다. 일상적 삶의 프로젝트에서 상상되지 않는 백화라는 존재를 담을 수 없는 그들을 이만희는 화면에서 추방시켜 버린 것 같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가 개발의 증표로 ‘삼포’라는 가짜-외부가 영화에 삽입된 것이 나는 참 슬프다.) 이미 정해진 원고 매수는 넘었고, 나는 무엇보다 당신이 이러한 정보들을 참조하며 (아마 그의 가장 언급되지 않은 영화 중 한 편인) 〈태양 닮은 소녀〉(이만희, 1974)를 보길 바란다. 이 영화에는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일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은 어떤 의미로 배치된 걸까? 나는 우거지상의 이만희가 문숙을 만나 활짝 웃는 걸 떠올린다. 그리고 찰칵!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이 남은 것에 대해서도. *** 1) 임재철,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 세계영화사 강의: 초기영화에서 아시아 뉴웨이브까지, 연세대학교출판부, 2001, 123-151쪽 참조. 2) 김홍준, 「한국의 고전영화 읽기―사실적 재현, 장르, 스타일, 공간의 구축」, (영화감독 10인의) 연출 수업 1, 동서대학교 임권택 영화연구소, 2012, 98-99쪽. 3) 임재철, 한승희, 「영원한 구경꾼: 임재철」, 필름 2.0, 290호, 2006.07. 74쪽. 4) 김홍준, 정성일, 박은영 정리, 「김홍준·정성일의 종횡4담 [5] - 영화광·에필로그」, 씨네 21, 2001.02.22. http://m.cine21.com/news/view/?mag_id=573(2023.06.18. 확인) 5) 미국을 제외한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한편, 브라질의 영화평론가 Filipe Furtado는 이렇게 트윗한 적 있다. “누구나 자국 영화에 애증 관계를 갖습니다. 다만 미국인들은 자국 영화를 기본값으로 보는 데 너무 익숙해서 애초에 그것을 ‘자국 영화’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https://twitter.com/filipefurtado/status/1172522298093506560) 6) 박진희, 「한국고전영화 상대하기-나의 경우」, 마테리알 7호 https://ma-te-ri-al.online/archive/641 7) 이만희, 「혼자이기 때문에」, 샘터 4권 8호, 샘터사, 1973.08. 30-31쪽. 8) 이혜영, 「「은막의 대들보 우리 아버지」 「천재」는 오직 사랑뿐이었다」, 여성동아 185호, 1983.02. 9) 이혜영에 의하면 이만희는 55년에 한 번 결혼을 한 후 바로 이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난 것이 오흥순이다. 이혜영은 오흥순이 “극예술협회라는 극단에 들어가셨어요. 거기서 아버지를 만났다고 하더라구요.”라고 구술한 바 있다. (이혜영, 「이만희를 말하다」, 영화천재 이만희, 한국영상자료원, 2006, 258쪽) 이와 달리 오흥순은 이만희와 그가 처음 만난 것이 ‘서울문화학원’이었다고 회고했다. 오흥순과 이만희는 각각 ‘서울문화학원’에 배우와 연출이 되기 위해 다녔다고 한다. 이후 그들은 학원을 다니면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나도 인간이 되련다〉에 함께 출연하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오흥순, 「사랑이 머물다 간 세월」, 아리랑 21권 8호, 아리랑사, 1975.08. 172쪽.) 서울문화학원의 한국연극학회가 〈나도 인간이 되련다〉를 공연한 것은 1955년 11월이다. (「全國大學演劇 콩클 作品은 「푸른聖人」」, 경향신문, 1955.11.06.」)이다. 이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극예술협의회(劇藝術協議會)’ 주최로 1956년 06월이다. 오흥순이 출연한 기록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劇藝術協議會 創立 公演」(경향신문, 1956.06.02.)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화천재 이만희 15쪽에 실린 ‘57년 공연장에서’라는 사진 또한 1956년 공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이 공연에는 이만희가 감독으로 데뷔하는데 도움을 줬다는 김승호도 출연했다. 10) 오흥순, 위의 글, 174쪽. 11) 문정숙, 「그 만추의 못잊을 사랑」, 여성동아 185호, 동아일보사, 1983.02. 236쪽. 12) 문숙, 마지막 한해, 창비, 2007.
1926년 12월 2일 경기도 광주에서 태어난 함완섭은 진학을 위해 상경해 외숙부인 김성춘 조명기사의 집에서 기거하면서 자연스레 영화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장차 자신과 함께 작업하게 되는 영화인들과도 인연을 맺게 된다. 일제강점기 <전과자>(김소봉, 1934)의 최진과 더불어 1세대 조선인 조명기사로 활동했던 김성춘은 해방 후 한국영화 조명기사의 계보가 그로부터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며 한국영화 기술자들에게 ‘오야지(おやじ, 親父)’로 통했던 인물이다. 기술학교인 홍아학원을 거쳐 1944년 경성전기공업학교 전기과를 졸업한 함완섭은 김성춘의 추천으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의 광희동 촬영소 조명부에 입사하면서 영화 조명 일을 시작했다. 1942년 9월 발족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는 조선영화령(조선총독부제령 제1호)에 의거해 기존 10개의 민간 영화사가 강제 통합되어 친일, 군국주의 선전영화를 제작한 국책 영화사였지만, 200여 평의 촬영 스튜디오를 비롯해 녹음실, 현상소, 최신식 기자재 등을 구비하고 말단 기술진에게도 공무원 월급의 두 배를 지급했던, 당시로서는 최고의 직장이었다. [사진 1]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창립 기념 사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에서 김성춘의 조명 조수로 최인규 감독의 <태양의 아이들(太陽の子供達)>(1944), <사랑과 맹서(愛と誓ひ)>(1945), <신풍의 아들들(神風の子供達)>(1945)에 참여한 함완섭은 해방 후에도 김성춘을 따라 조선영화건설본부의 뉴스영화와 최인규가 설립한 고려영화협회의 <자유만세>(최인규, 1946), <독립전야>(최인규, 1948), <죄 없는 죄인>(최인규, 1948) 등에 조명 조수로 참여했다. 그리고 스물세 살 되던 해인 1948년 계몽영화인 <국민투표>(최인규)로 최연소 조명기사로 데뷔한다. [사진 2] 영화 <사랑과 맹서>(최인규, 1945) [사진 3] 영화 <자유만세>(최인규, 1946) [ 사진 4] 영화 <독립전야>(최인규, 1948) 같은 해 <반도의 봄>(이병일, 1941)의 원작자였던 김성민의 감독 데뷔작 <사랑의 교실>(1948)로 극영화 조명기사로 정식 데뷔한 함완섭은 이후 조수 시절 인연을 맺은 최인규의 조감독 출신들인 홍성기, 신상옥, 정창화 등의 감독 데뷔작 조명을 담당하기도 했다. 한국 최초의 컬러 극영화 <여성일기> 1948년 함완섭은 한국 최초의 컬러 극영화인 홍성기 감독의 데뷔작 <여성일기>(1949)에 조명기사로 참여했다. 바로 1년 전 일본계 미국인이 촬영한 기록영화 <무궁화동산>(안철영, 1948)이 컬러로 제작된 바 있지만, 순수 국내 자본과 제작진으로 만들어진 극영화로는 이 영화가 처음이었다. [사진 5] 영화 <여성일기>(홍성기, 1949)의 신문광고(출처: 경향신문 1949년 6월 6일자 2면) ‘최초’라는 수식어답게 함완섭은 이 영화로 한국에서 가장 먼저 컬러 영화의 조명을 경험할 수 있었지만, 그만큼 더 큰 시행착오를 겪어야 했다. 자신은 물론 감독도 촬영기사도, 심지어 스승인 김성춘도 컬러 촬영에 대한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함완섭은 늘 하던 대로 흑백 영화 촬영 때처럼 조명을 했는데, 결과물을 보고선 차마 고개를 들 수 없었다고 한다. 컬러 필터를 쓰는 법도 몰라 낮에도 텅스텐 조명을 그대로 쓴 데다 마침 낙엽이 지는 가을에 촬영해 화면에 붉은색이 많이 돌았던 것이다. 더욱이 <여성일기>는 네거티브 단계 없이 원본 자체가 포지티브 프린트로 변하는 리버설 필름(reversal film)으로 촬영했는데, 이 때문에 러쉬(rush)를 뜰 수가 없어 원본 필름으로 편집해야 했고 프린트도 만들 수 없어 극장에 영사기 두 대를 설치해 원본 필름과 녹음 필름을 따로 걸어 상영했다고 한다. 흥행은 어느 정도 되었다지만, 기술적으로는 함완섭의 표현대로 “반쪼가리 작품이나 마찬가지”였다. 이후 함완섭은 <애국자의 아들>(윤봉춘, 1949), <여인애사>(신경균, 1950)를 거쳐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 <악야>(1952)를 촬영하던 중 전쟁을 맞았고, 피난 시절에도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 <최후의 유혹>(정창화, 1953), <출격명령>(홍성기, 1954) 등에 참여하며 활동을 이어나갔다. 홍성기 감독과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조명 양상 한국전쟁 후 김성춘의 조명 조수 출신인 고해진, 이한찬 등과 함께 2세대 조명기사로 자리매김한 함완섭은 신경균, 윤봉춘, 이병일 등 원로 감독의 작품들뿐만 아니라 홍성기, 정창화, 유현목 등 한국영화의 중흥기를 이끈 젊은 감독들의 작품에 다수 참여했다. 특히 홍성기와의 작업이 많았는데, <열애>(1955), <애원의 고백>(1957), <실락원의 별>(1957), <별아 내 가슴에>(1958), <실락원의 별(후편)>(1958) 등 그의 전성기 시절을 함께했다. [사진 6] 영화 <애원의 고백>(홍성기, 1957)의 한 장면 [사진 7] 영화 <별아 내 가슴에>(홍성기, 1958)의 한 장면 사실 1950년대 중반 한국영화의 조명은 열악하고 부족했던 기재와 여건 등으로 인해 조명기사 고유의 미학적 조명은 꿈도 꿀 수 없었고, 단지 화면을 밝히는 수준의 인물 삼점 조명(three point lighting) 같은 기본적인 조명만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홍성기는 조감독 시절부터 함께 고락을 같이한 함완섭을 유독 신뢰했고 조명에 있어서만큼은 그에게 전적으로 일임했다고 한다. 이 시기 홍성기 감독의 작품들 중 유일하게 필름이 남아있는 <열애>는 당시 한국영화의 조명 양상을 잘 보여준다. 세트 촬영이 흔치 않았던 시절이라 영화의 모든 공간을 오픈에서 촬영했는데, 실내 낮 장면에서 창문에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치고 촬영했던 것은 바깥의 광량을 커버할 만한 실내 조명이 부족해서였으며, 벽에 인물 그림자가 많이 지는 것은 세트 촬영일 경우엔 부감대 같은 높은 위치에서 조명을 할 수가 있지만 오픈에선 아무리 조명기의 키를 높여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진 8~11] 영화 <열애>(홍성기, 1955) 속 장면들. 부족한 실내 조명으로 인해 커튼과 블라인드로 광량을 조절해야 했으며, 그림자가 벽면에 가득 드리워졌다. 또한 당시 영화들에서 카메라에 감마(gamma) 필터를 끼워 낮에 밤 장면을 찍는 데이 포 나이트(day-for-night) 촬영이 많았던 이유는 산이나 해변에서 촬영할 경우 전기를 끌어올 재간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랬던 것이지만, <열애>에서 영옥(염매리 분)의 집 앞 장면처럼 전기를 끌어오기 용이한 장소에서의 촬영은 당시에도 웬만하면 밤에 촬영했다고 한다. [사진 12, 13] 영화 <열애> 속 야외촬영 장면들. 촬영 장소의 전기 수급에 따라 촬영 방식과 시간을 바꿔야 했다. 화영공작소와 <자유결혼> 1950년대 중반 조명 기재는 김성춘이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 시절 일본의 아라시간주로(嵐寛壽郎)프로덕션에서 수입해 보유하고 있던 조명기 150kw와 전쟁 당시 북한의 국립영화촬영소에서 노획해온 국방부 정훈국 영화과에서 보유하고 있던 소련제 조명기 100kw, 미공보원(USIS)에서 썼던 미제 조명기 70kw 등이 있었는데, 파손이 심해 실제 사용할 수 있는 대수는 얼마 되지 않았다. 더욱이 당시 영화 한 편에 50~100kw 정도의 조명기가 필요했는데, 네 명의 기사가 동시에 사용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양이다 보니 함완섭은 자신의 촬영을 마치고 급하게 김성춘의 작업 현장으로 조명 기재를 실어날라 가며 번갈아 사용하는 일이 다반사였다고 한다. 그러던 중 1957년 함완섭은 자신이 대여해 쓰던 미제 조명기를 샘플로 화영공작소에 의뢰해 총 120kw의 조명기를 자체 제작했다. 화영공작소는 김성춘의 문하에서 조명 조수로 일했던 김종철이 설립한 조명 기재 제작소로, 비록 수공업적 방식이긴 했으나 당시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영화 조명기를 국내에서 제작할 수 있게 되어 한국영화 조명인들의 숨통을 틔워주었던 곳이다. [사진 14] 영화 <자유결혼>(이병일, 1958)의 세트 촬영 현장 <자유결혼>(이병일, 1958)은 함완섭이 화영공작소에 의뢰해 제작한 조명기를 사용한 첫 번째 작품으로, 당시로선 나름 풍족했던 조명기 덕에 <열애>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세련된 조명이 보여진다. 오픈 실내 장면에서 벽에 드리워졌던 인물 그림자는 말끔히 사라졌고, 낮임에도 항상 커튼이나 블라인드를 쳐놓아 답답했던 화면도 커튼을 걷어냄은 물론 창문을 활짝 열어 놓고 촬영해 시원한 느낌마저 준다. [사진 15~18] 영화 <자유결혼> 속 장면들 함완섭은 이러한 것이 풍부해진 조명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실내 장면을 세트에서 촬영했기 때문에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세트 촬영을 하면 조명기의 위치를 높일 수 있고 실외 광원 설정도 조명기로 조절할 수 있어 여러모로 오픈 촬영 때보다 작업하는 데 유리했다는 것이다. 최훈 감독과 광보영화사 함완섭은 홍성기의 조감독 출신인 최훈 감독의 데뷔작 <모녀>(1958)에서 조명을 맡은 후부터 <느티나무 있는 언덕>(1958), <사모님>(1959), <장마루촌의 이발사>(1959) 등 최훈과 호흡을 맞추어 나간다. 그렇다고 홍성기와의 작업을 곧바로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사진 19] 영화 <모녀>(최훈, 1958)의 한 장면 [사진 20] 영화 <느티나무 있는 언덕>(최훈, 1958)의 한 장면 당시 제작 편수에 비해 조명기사가 부족해 기사 한 명이 여러 작품을 동시에 진행했는데, 함완섭은 3팀을 운용했으며 각 작품마다 제1조수가 책임을 맡고 자신은 세트 촬영이나 로케이션 밤 촬영 같은 어려운 촬영에만 들여다보았다고 한다. 같은 시기 작업한 홍성기의 <별아 내 가슴에>, <실락원의 별(후편)>도 당시 최고참 조수였던 방영원(방기찬)이 전담하고 있었는데, 함완섭은 <청춘극장>(홍성기, 1959)부터 아예 그를 독립시켰으며 이후에도 자주 홍성기의 촬영장을 찾아 일을 도왔다. <사모님>, <장마루촌의 이발사>를 작업하며 기획⋅제작에도 관여했던 함완섭은 1959년 최훈과 함께 광보영화사를 설립한다. 당시 한국영화계는 해를 거듭할수록 풍작을 거두고 있었고, “영화가 흥행을 하면 몇 배가 남는 장사가 되니까” 너나 할 것 없이 우후죽순 영화사를 만들던 시기였다. 1958년에 제작된 작품 편수가 74편인데 반해 당시 영화사가 72개사일 정도였다. 1959년엔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100편대를 넘어 111편이 제작되기도 했다. 하지만 제작자로 변신한 함완섭에게 운은 따라주지 않았다. 광보영화사로 <어느 여교사의 수기>(최훈, 1960),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1960), <아버지>(최훈, 1961) 등을 제작했는데, 하필 <어느 여교사의 수기>가 개봉할 때 4.19가 터졌고 <아버지>가 개봉할 땐 5.16 쿠데타가 일어나 흥행은커녕 손해만 크게 입었던 것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62년 영화법이 제정되며 영화사 통폐합 조치가 내려졌고, 광보영화사는 동아영화흥업주식회사와 통합되고 만다. [사진 21] 영화 <어느 여교사의 수기>(최훈, 1960)의 포스터 [사진 22] 영화 <애수에 젖은 토요일>(최훈, 1960)의 포스터 이후 함완섭은 동아영화흥업에서 제작 담당으로 일하며 <사랑의 승부>(최훈 ․ 이용호, 1962), <비밀통로를 찾아라>(이용호, 1962), <천동(天動)>(정승문, 1963)을 기획, 제작했지만, 동아영화흥업마저도 1963년 6월 영화사 등록요건이 더 강화된 제1차 개정 영화법의 시행으로 등록이 취소되었다. 신상옥 감독과의 재회 <에밀레종>(홍성기, 1961) 이후 조명을 중단했던 함완섭은 1964년 최훈 감독의 <눈물의 자장가>(1964)를 시작으로 다시 조명기사로 복귀했다. 그리고 홍성기 감독의 <대석굴암>(1964), <처녀성>(1964), 최훈 감독의 <울지마라 물새야>(1964), <파도>(1967), <밀어(密語)>(1967), <지금 그 사람은>(1968), <난풍(暖風)>(1968), 김묵 감독의 <폭력지대>(1965), <최후의 대결>(1967) 등을 작업하며 조명 활동을 이어나갔다. 그러던 중 1968년 함완섭은 신상옥의 부름을 받는다. <악야> 이후 16년 만이었다. <지옥화>(1958) 때부터 신상옥의 대부분 작품에서 조명을 담당했던 이계창이 1967년 3월 베트남에서 <여자 베트콩 18호>(강범구, 1967)를 촬영하던 중 불의의 폭파 사고로 사망하면서 그 공백을 함완섭에게 대신 맡기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게 신상옥과 해후한 함완섭은 <여자의 일생>(1968)을 시작으로 <내시>(1968), <천년호>(1969) 등의 조명기사로 신상옥과 함께했다. [사진 23, 24] 영화 <여자의 일생>(신상옥, 1968) 속 장면들 당시 신필름은 안양촬영소를 인수하고 자회사를 설립해 연간 30여 편의 영화를 제작하던 국내 최대의 영화사였고, 일본의 류덴샤(柳電社)에서 수입한 조명기 등 최신 기재를 보유하고 있던 꿈의 영화공장이었다. 함완섭은 <내시>를 작업할 때 당시 보통 영화 한 편에 소요되던 광량의 두 배에 달하는 1,200kw를 썼을 정도로 풍족한 환경이었다고 기억한다. 촬영 스튜디오에는 300kw 이상의 기본 전력이 들어왔고, 한 장면에만 100kw 이상 쓴 적도 여러 번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격세지감(隔世之感)이었다. [사진 25, 26] 영화 <내시>(신상옥, 1968) 속 장면들 [사진 27, 28] 신상옥 감독의 영화 <천년호>(1969) 속 장면들 하지만 그 호사(好事)도 오래가지 않지 않았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한국 영화산업은 장기 불황에 빠져들었고 신필름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실 그 조짐은 함완섭이 신상옥의 작품에 참여하기 시작할 때부터 보였었다. 큰 몸집을 유지하기 위해 연간 30여 편의 영화를 양산해야 했지만, 흥행 성과는 미미했고 빚만 불어나는 악순환이 이미 그때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더욱이 신필름은 1970년 시설 기준 미달로 등록이 취소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고, 규모가 대폭 줄어든 안양영화제작주식회사로 재설립된다. 함완섭은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를 작업한 후 1972년부터 최은희가 교장으로 있던 안양영화예술학교에서 조명과 전기 등을 관리하는 시설감독으로 근무했다. 이후 1973년 <삼일천하>(신상옥)에 조명기사로 참여하기도 하지만, 1975년 7월 신상옥이 외화 쿼터를 획득하기 위해 뇌물을 제공한 혐의로 구속되는 등 어수선해지자 퇴사했다. [사진 29] 영화 <삼일천하>(신상옥, 1973)의 한 장면 [사진 30] 영화 <평양폭격대>(신상옥, 1971)의 한 장면 <세종대왕>과 마지막 작품 함완섭은 한동안 일선에서 물러나 지내다 1978년 당시 최대 제작비와 인력을 투입한 대작 사극 <세종대왕>(최인현)에서 조명 책임을 맡게 된다. 자신이 조명기사로 참여한 59편의 작품들 중 가장 애착하는 작품으로 꼽기도 한 이 영화에서 함완섭은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동안 쌓아왔던 모든 역량을 쏟아부어 작업했다. 낮 장면에 쓰는 데이라이트(daylight) 조명기 10대를 홍콩에서 전구를 수입해와 자체 제작했고 경복궁 오픈 촬영에서 유용하게 사용했다. 기존의 텅스텐 조명기도 당시 모을 수 있는 최대의 물량을 동원해 유려한 롱 쇼트 밤 장면을 구현해내기도 했다. 더욱이 1년여의 긴 촬영 기간에 로케이션과 오픈 촬영이 많아 고생을 많이 한 작품이었지만, 그해 대종상 후보에까지 오르고 수상은 하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고 한다. [사진 31~33] 당시 최대 제작비와 인력을 투입한 영화 <세종대왕>(최인현, 1978) 속 장면들 이후 함완섭은 1979년부터 현진영화사에서 조명실장으로 재직하며 직접 나서기보다 후배들을 돕는 일에 매진했다. 그리고 1980년 <느티나무 있는 언덕>에서 촬영기사와 조명기사로 만나 오랫동안 친구로 인연을 맺어온 심우섭 감독의 <난 모르겠네>를 마지막으로 극영화 조명을 그만두었고, 1986년 아시안게임 기록영화의 조명을 끝으로 은퇴했다. [사진 34~36] 함완섭이 참여한 마지막 극영화 작품 영화 <난 모르겠네>(심우섭, 1980) 속 장면들
<여명> 이후 ‘과부’ 전문 배우로 전환 이민자(李民子)는 이향이나 김동원과 거의 같은 시기에 배우가 되었다. 일본 도호(東寶)영화사에서 조감독 생활을 한 안진상(安鎭相)이 처음 메가폰을 잡은 <여명>(1948)을 통해서였다. 해방 후 <안중근사기(史記)>(이구영, 1946)로 한국영화사의 서막을 연 후 34편째 제작된 작품이다. 뇌물을 받고 밀수를 묵인하려던 경찰관(이금룡 분)이 양심의 가책을 받은 나머지 이 사실을 자백, 밀수범을 일망타진케 한다는 밀수 근절용 계몽영화로, 이민자는 여기에서 어촌의 처녀 역을 맡았다. ‘이민자의 섬세한 표정은 앞날이 촉망된다’ (정용배, 「영화평 ‘여명(黎明)을 보고’」, 『자유신문』, 1949.3.25) 는 고무적인 평을 들었다. 이 영화를 제작한 인천의 건설영화사 대표 최철(崔鐵)은 뒷날 배우가 된 최불암의 아버지이다. [사진] 데뷔작 <여명>에서의 이민자 이민자는 2년 후 신상옥의 감독 데뷔작 <악야>(1952)에 여주인공 양공주 역으로 기용돼 다시 카메라 앞에 서게 된다. 6.25 전쟁이 일어나는 바람에 제작이 무산될 뻔했으나 피난지 대구에서 촬영돼 부산에서 빛을 볼 수 있었다. 환도 후 정창화 감독의 <최후의 유혹>(1953)을 출발점으로 <미망인>(박남옥, 1955)을 비롯한 <마의태자>(전창근, 1956), <마인>(한형모, 1957), <유혹의 강>(유두연, 1958), <생명>(이강천, 1958), <어머니의 길>(안현철, 1958), <내가 낳은 검둥이>(김한일, 1959), <행복의 조건>(이봉래, 1959) 등과 <과부>(조긍하, 1960), <내일의 태양>(오영근, 1962), <아낌없이 주련다>(유현목, 1962), <여인천하>(윤봉춘, 1962), <피리 불던 모녀 고개>(강찬우, 1962), <김약국의 딸들>(유현목, 1963), <모녀 기타>(강찬우, 1964), <갯마을>(김수용, 1965), <산호의 문>(엄심호, 1966), <슬픔은 파도를 넘어>(김효천, 1968) 등 모두 140여 편에 출연하게 된다. 절반 이상이 주연이었다. 이 가운데 신경균 감독의 <화심(花心)>(1958), <애모>(1959), <유정무정>(1959), <회정>(1959), <그대 목소리>(1960), <울지 않으련다>(1960), <정조>(1961), <여자의 일생>(1962), <형부와 새 언니>(1964) 등 9편에 출연함으로써 그의 단골배우가 되었다. [사진] <내가 낳은 검둥이>에 출연한 이민자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미망인>에서는 사회윤리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전쟁미망인의 삶을, <유혹의 강>에서는 납북된 남편을 잊지 못해 수절하는 여자의 고행을, <내가 낳은 검둥이>에서는 혼혈아로 인해 겪어야 하는 차별의 비애를, <마인>에서는 복수를 위해 위장 결혼한 여성의 마성을, <모녀 기타>에서는 모진 삶의 시름을 노래로 사르는 극단 가수의 사연을, <아낌없이 주련다>에서는 연하의 청년에게 모성애적 사랑을 쏟는 30대 미망인의 열정을, <김약국의 딸들>에서는 초혼에 과부가 된 큰딸(용숙)의 빗나간 배금주의적 면모를, <갯마을>에서는 풍랑 속에 주체하지 못하는 과부 해녀의 애욕을, 그리고 <산호의 문>에서는 가정교사와 도색행각에 빠진 과부의 회한을 특유의 농염한 몸매와 감정선으로 표출해냈다. 그 대부분이 박복한 미망인, 과부 캐릭터였다. [사진]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의 연출작 <미망인>에서의 이민자, 오른쪽은 이택균 이와 같은 그녀의 욕망이 총체적으로 집약된 배역이 바로 <아낌없이 주련다>의 댄스홀 마담 우정원이였다. “어마! 사내 냄새.” 파도가 밀려오는 송도 바닷가에서 막냇동생과 같은 11세 연하의 지배인 하지송(신성일 분)의 품에 안기며 놀란 듯이 쏟아낸 우 마담의 대사는 육감적인 그녀의 개성을 함축한 것으로, 제6회 부일영화상 여우주연상의 트로피를 쥐게 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사진] 이민자의 매력을 유감없이 발현한 <아낌없이 주련다>의 한 장면 학업마저 포기하고 들어선 배우의 길 이민자는 1929년 4월10일 서울에서 한의사의 넷째 딸로 태어났다. 호적상의 이름은 이용량(李容瑯)이다. 다음은 그녀가 언급한 과거 회상기. “우리 집은 11대 선조가 충무공 할아버지였다는 사실 때문에 가정적으로 항상 엄숙한 분위기가 감도는 편이었다. 그러기에 귀여움을 받는 초등학교 때도 나는 쾌활하고 성미 급한 버릇 때문에 항상 어른들의 꾸중을 많이 들었다. 물론 내적으론 무척 귀여워했겠지만 외형적으로는 항상 근엄한 아버지였다. 내가 서울에서 방산국민학교를 졸업하고 무학여중(경성 무학여자고등보통학교 : 필자)을 다닐 때였는데, 어느 날 밤 친구들과 같이 한복으로 옷을 바꿔 입고 부모님 몰래 극장에서 현대극장의 공연을 보고 있었다. 나는 이때 마음속으로 “저렇게 화려한 배우가 되어 보겠다”고 굳게 맹세했다. 그리하여 다음날 현대극장을 찾아가서 책임자를 만났는데 의외로 반가워하면서 훌륭한 배우가 될 수 있는 소양이 있다고 격려를 아끼지 않는 것이었다. 부모님의 따뜻한 사랑을 아랑곳하지 않고 배우의 길을 선택한데는, 선천적으로 적극적인 성격을 지녔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민자. 「나의 데뷔 시절을 회상한다」 , 『스크린』, 1964년 9월호) 이용량이 학업을 중단하고 찾아간 곳이 현대극장 연구부였다. 1944년이었다. 현대극장은 1941년 유치진이 함세덕과 함께 이른바 ‘국민연극’을 표방하며 설립한 극단이다. 이민자라는 예명이 알려질 무렵 영화 <태양의 아이들>(최인규, 1944)에 출연하게 된다. 종을 치는 학교급사로 두세 컷에 불과한 단역이었다. 16세 때였다. 이 영화는 섬마을 초등학교 여교사(김신재)가 학생들에게 내선일체 교육을 시켜 군 입대를 독려하는 내용을 담았다. 일제 강점기 아래서 제작(1944년 11월4일 명치좌 상영)된 마지막 영화이기도 하다. 해방 이듬해, 서울 동양극장에서 조선악극단의 뮤지컬 <카츄샤>의 공연이 있었다. 이 작품의 음악 지휘를 맡은 김형래는 김진규와 숙질간이었다. 그는 조카를 단역으로 출연시키고 이민자를 발탁했다. 그녀는 잇따라 같은 해 6월 현대극장과 아랑이 통합해 만든 낙랑극회의 창단공연 <산적>(함세덕 작, 연출)에 황철, 이해랑 등과 함께 출연하고 2개월 후 <산홍(山紅)아, 너만 가고>에 주역으로 나서게 된다. 눈이 크고 살결이 고운 이민자는 이 무렵 7살 연상인 김진규와 결혼하고 첫 아들을 낳았다. 이 같은 행복감 속에서 영화 <여명>에 출연하게 된다. 하지만 무명배우나 다름없던 남편(김진규)이 이강천 감독의 <피아골>(1955)로 부각돼 인기 스타의 반열에 오르면서 그녀는 두 아들을 둔 채 이혼하게 되는 시련을 겪는다. 1959년이었다. 30대 중반에 이른 남편이 영화 <옥단춘>(1955, 권영순)으로 배우의 길에 나선 열아홉 살 처녀 김보애와 사랑에 빠져 가정을 돌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에바 가드너’로 불렸던 고혹적인 관능미의 소유자 이민자는 1968년 은퇴 후, 5년 만에 일본 도쿄로 건너가 룸살롱을 경영하며 재일 한국인과 재혼,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듯했으나 이혼 끝에 1986년 5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