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명의 눈물
- 감독
- 여소룡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정패패, 증강, 원자혜, 여일훤
일제강점기 조선의 중심도시 경성은 인구가 대폭 증가하면서 4대문 밖으로 그 영역을 확대하여 나갔다. 1910년 경성부에 편입된 용산 지역 외에도, 서쪽으로는 서대문 넘어 신촌과 마포 방향으로, 동쪽으로는 동대문을 지나 청량리와 왕십리 방향으로 도시가 확장되었다. 1930년대 새롭게 도시로 편입된 지역에는 영화관이 설립되었다. 도화관(桃花館), 도화극장(桃花劇場) 도화관(桃花館)은 서울 마포 도화동에 위치한 극장이다. 1930년 11월 1일부터 이곳에서 <여류명창대회> 공연 기록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1930년 이전에 건설된 것으로 보인다 .(”여류명창대회“, 《동아일보》, 1930.11.1) 일설에 의하면 도화관이 1929년 정기준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1 극장의 규모가 협소한 탓에 건물의 신축을 꾀해 1933년 10월 7일 낙성식을 거행하고 영업을 재개하게 된다 .(“도화관 낙성식”, 《조선신문》, 1933.10.8) 당시 건물주는 토미이 지츠타로(富井實太郞)였다. 그는 1877년 일본 효고(兵庫)현에서 태어나 포목상으로 일하던 사람으로, 1905년 5월 조선으로 건너와 용산 원정(元町) 3정목에서 토미이상점(富井商店)을 열었으며 용산상영회(龍山商榮會) 회장을 역임한 바 있다. 도화관 신축을 추진할 당시 이를 반대하는 도화동 주민들의 진정이 있었다. 도화동 주민 150여명은 연명 날인하여 도화관이 활동사진상설관으로 신축되면 풍속의 아름다움을 해치게 하여 아직까지 보존하여 오든 동리의 미풍을 해롭게 할 것이라는 이유를 들어 경기도 보안과에 반대 진정을 냈다. 지역 주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극장의 신축은 이루어졌다. 1933년 신축된 극장의 이름은 도화관에서 도화극장으로 바뀌었다. 일제말기까지 도화극장은 토미이가 운영하고 있었다. 《영화순보》에 실려 있는 도화관에 관한 정보를 확인해 보면 흥행주는 토미이, 지배인은 스가와라(管原)였으며, 총 좌석 수는 782석이었다 .(“全鮮映畵館錄”, 《映畫旬報》, 1943.7.11., 42쪽) 해방 후 적산처리 된 도화극장은 1950년대 경보극장으로 그 이름이 바뀌었다. 신부좌(新富座) 신부좌는 동대문 밖 신당정에 설립된 영화관으로 1936년 10월 10일 낙성식을 개최하고 12일 개관했다. 설립자는 도화극장의 운영자인 토미이 지츠타로(富井實太郞)이다. (“新富座成る”, 《京城日報》, 1936.10.11.) 신부좌의 개관을 알리는 기사를 보면, “4층의 철근 콩크리트 극장으로 수용인원이 1,200명이나 되는 큰 건물이며 12일부터 동극좌(東劇座) 일행의 공연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영업을 한다고 보도하고 있다. (”동부의 신극장 신부좌 낙성(落成)“, 《매일신보》, 1936.10.14.) 1943년 당시 신부좌의 흥행주는 토미이(富井實太郞), 지배인은 古都勇作으로 총 좌석수는 758석이었다 .(<全鮮映畵館錄>, 《映畫旬報》, 1943.7.11., 42쪽) 해방 후 적산처리 되었으며 이름을 한성극장으로 개칭했다 .(“신부좌, 한성극장으로 개칭”, 《동아일보》, 1946.1.20.) 광무극장(光武劇場) 1930년 5월 2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광무대는 상왕십리 쪽에 가설극장을 짓고 영업을 이어갔다. 그러던 중 1933년 봄 상설극장으로 전환을 꾀하게 되면서 이름도 광무극장으로 바꾸었다 .(“광무극장 상설”, 《조선중앙일보》, 1933.5.18.) 영화와 연극을 고루 상연하던 광무극장에서는 1934년 5월 카프에서 세운 극단 신건설이 <서부전선 이상 없다>, <누가 제일 바보냐>, <신임 이사장> 등을 공연 한 바 있다. (“신건설 순회공연 시외 광무극장서”, 《동아일보》, 1934.5.2.) 1943년 당시 광무극장의 흥행주는 소노다(園田實生)였다. 총 400석의 좌석수를 가지고 있었다 .(“全鮮映畵館錄”, 《映畫旬報》, 1943.7.11., 42쪽) 해방 후 적산처리 되었다. 영등포연예관(永登浦演藝館), 영보극장(永寶劇場) 영등포연예관은 1930년대에 들면서 공업지역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영등포 지역에 들어선 영화관으로 1935년 10월 개관했다. 설립자는 써커스단을 운영하며 다년간의 흥행 경험을 가지고 있던 오오타(太田光)란 일본인인데 그는 충남 예산에서 큰 농장을 경영하던 오오타 칸(太田寬)의 동생으로 1939년 《국민신보》 창간 기념 광고에도 관주로 기록된 인물이다 .(“광고”, 《國民新報》, 1939.8.20.) 영등포연예관은 213평의 부지에 총공비 5만여 원을 들여 연와의 2층 건물로 만들어졌다. 개관 첫 공연은 연극호(演劇號)의 연극이었다. (”영등포연예관 연극호 대인기“, 《매일신보》, 1935.10.13.) 영등포 지역의 유일한 영화관으로 존재하던 영등포연예관은 1942년 9월 1일자로 흥행주가 환영영화사(丸榮映畵社)의 무라이(村伊德治)로 바뀌게 되면서 그 이름을 영보극장(永寶劇場)으로 바꾸었다. 새로운 경영자가 운영하게 된 영보극장은 최신식 『로-라』 발성영사기를 장치하는 등 시설과 외관을 정비하여 영화관으로의 새롭게 변신하였다 .(“영보극장 래 일일 개관”, 《매일신보》, 1942.8.26.) 1943년 당시 영보극장은 흥행주 무라이(村伊德治), 지배인 기하라(木原督夫)로 총 좌석수는 400석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존속했다. 1. 이에 관한 이용남의 글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마포 도화정의 도화극장은 1929년 정기준이 세운 목조 1층 건물의 극장으로, 무대는 허술하였으며 수용인원도 300명 정도의 초라한 극장이었다. 개관 후 1년이 못되어 일본인 富井實太郞이 사들여 2층 벽돌 건물로 다시 지었다. 새 건물은 무대도 넓었으며 8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극장이었다. 도화극장은 영화 상영을 주로 하였으며 가끔 연예나 연극 등도 공연하였다. 후일에는 영화관으로 사용되었다.” 이용남, 「해방 전 조선 영화극장사 고찰」, 청주대석사논문, 2001, 116쪽. * [사진](상단) 신부좌 작성 당시 기사에 게재된 사진 [자료] 《매일신보》, 1936.10.14. 동부의 신극장 신부좌 낙성(落成), 십이일부터 개관 대경성(大京城)의 실현에 ᄯᅡ라 경성 근교의 인구증가률은 기하급수(幾何級數)적인 숫자를 보이고 잇슴에 반하야 근교(近郊) 부민들의 오락기관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업서 곤난중이더니 이것을 유감으로 역이든 유지의 손으로 이번에 신당정(新堂町)에다 신부좌(新富座)라는 사층의 철근 『콩크리-트』 극장을 세웟다는데 수용인원이 일천이백명이나 되는 큰 건물로 십이일부터 동극좌(東劇座) 일행을 맞이하야 개관하얏다고 함니다.(사진은 신부좌) [자료] 《매일신보》, 1942.08.26. 영보극장 래(來) 일일 개관 영등포 유일의 영화상설관 연예관(演藝館)이 금번 새로운 경영주를 마지하는 동시 이름도 영보극장(永寶劇場)으로 곳친 후 최신식 『로-라』 발성영사기를 장치하는 한편 내용과 외관도 일신해가지고 오는 구월 일일부터 개관하기로 되엇는데 환영영화사(丸榮映畵社) 무라이(村伊德治)씨가 신경영주로 제반경영을 담당하게 되엇다. [자료] 《동아일보》, 1937.08.12. ●팔월 십이일부터 특별대공연 개관 일주년 기념대흥행 ○ 납량특별 『선물』 진정! = 요금특별 봉사제공 = 대인석 십오전 균일 조선극계의 정화! 극단 혜성좌(彗星座) 대공연 ▲ 혜성좌 名극본 대진용! =예제 매야 교환 상연= ○ 만주애화(哀話) 만주의 십년몽 이막 ○ 정의극 마음의 꽃다발 이막 ○ 사회비극 나는 왜 범죄를 하였나 삼막 ○ 희비극 온천장 행진곡 이막 ○ 시대물 임거정전(林巨正傳) 삼막 ○ 모성비극 모성애의 금자탑 삼막 막간 = 넌센스, 합창, 민요, 스켓취, 독창 무용 =혜성 올째스뺀드= 요금 싸고 『선물』 가저가시게 만원되기 전 일즉 일즉 오십시요 왕십리정 광무극장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3.05.18. 광무극장 상설 부외 상왕십리(上往十里)에 잇는 가설극장 광무대(光武臺)를 금번에 상설극장(常設劇場)으로 개혁하는 동시에 극장 일흠도 광무극장(光武劇場)으로 고치고 활동사진과 기타 연극 등을 흥행하리라 한다. [자료] 《조선중앙일보》, 1933.10.21. 시외 도화동에 도화극장 신축 【경서(京西)】 시외 도화동(市外 桃花洞)에 잇는 영화상설관 도화극장(映畵常設館 桃花劇場)은 지난 십일일 동극장 내에서 신축 낙성식을 대성황리에 거행하엿다는대 동 극계에 경험이 잇는 부정실태랑(富井實太郞)씨와 동 지배인 김년(同 支配人 金年)씨가 가티 삼만 오천원이란 거금을 드리여가며 조선극예술을 위하여 만흔 노력을 한다하며 또 부정씨는 마포에 양영학교란 보교를 건설하고 조선무산아동을 모아서 가르킨다는데 근처 일반은 부정씨에 대한 칭송이 자자하다. [자료] 《동아일보》, 1932.07.22. 상설극장 반대 도화동민 진정 시외 도화동(桃花洞) 주민 일백오십여명은 련명 날인으로 부정(富井)씨의 경영하는 도화관(桃花館) 신축을 반대키 위하여 금 이십일일 오전 십일시경 경기도 보안과를 방문하고 진정한 바 잇섯다고 한다. 동 도화관은 활동사진 상설관으로서 풍속의 아름다움을 손하게 하여 아직ᄭᅡ지 보존하야 오든 동리의 미풍을 해롭게 한다는 것이 반대 진정의 주요 원인이라 한다.
영화가 시작되면 파리의 아름다운 전경들이 펼쳐진다. 공중과 첨탑 등에서 부감으로 촬영된 멋진 풍경!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파리. 그리고 울려나오는 이브 몽땅의 고혹적인 목소리. “확인하고 싶었다. 이곳이 가장 아름다운 도시인가?” 크리스 마르케의 영화 < 아름다운 5월 >은 이렇게 시작된다. 1962년 5월. 그는 촬영 감독 피에르 롬과 함께 영화 카메라에 포착할 수 있는 5월의 시간들을 기록하기 시작하였다. 파리의 풍경들을 포착하고, 사람들을 만났다. 부르주아들, 상인들, 알제리 이민자들, 아이들, 여성들, 노동조합원들.. “당신은 언제 행복하신가요?” “62년 5월의 가장 중요한 사건은 무엇이었나요?” “알제리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파리 사람들은 이 낯선 질문자의 카메라 앞으로 모여들고, 의외로 자신들의 욕망과 생각들에 대해 쉽게 이야기한다. 여기까지라면 이 영화는 시네마 베리테의 출발점이라고 이야기되는 장 루슈와 에드가 모랭의 < 어느 여름의 연대기 >(1961)와 다르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크리스 마르케가 포착하고자 했던 것은, 1962년 5월 파리 사람들이 다양한 삶의 흔적과 단순한 답들이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를 영화감독이라기보다는 ‘필름 에세이스트’라고 불렀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것은, 답변의 내용이 아니라 그 질문과 대답의 간극 속에서 사유되는, 62년 5월 파리에 관한 한 좌파적 지식인의 근심과 불안에 관한 것이다. 크리스 마르케의 관념 속에서 62년 5월의 파리는 격전지였다. 61년 10월 파리에서 자행된 알제리인 대량 학살(이때 희생당한 알제리인 200여명은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한 채 세느강에 던져졌다)에 대한 지식인의 죄의식과 트라우마, 제국 프랑스의 전승비 앞에 아직도 사열하는 군국주의자들의 행진들, 수탈당하는 이민 노동자들의 비참한 삶의 양태들, 돈을 숭상하며 주식거래장 앞으로 모여드는 군중들.. 그러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파리 사람들에게 5월은 그렇게 인식되지 않았다. 그들은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이상기온을 꼽았고, 알제리에 대해서는 국수주의적 적대를 보였으며, 여성들은 정치를 남성의 전유물로 여겼다. 행복의 조건으로 돈을 꼽았고, 직면한 문제로는 연애과 결혼, 휴가에 관한 것을 언급했다. 크리스 마르케는 제국 프랑스, 근대적 자본주의 프랑스의 지배와 정치가 어떻게 소소한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과 욕망 속에 관철되어지는가를 들여다본다. 미시적 일상에 갇힌 사람들. 지배 논리와 권력의 그물망 속에서 자유롭지 못한 군중들. 그러나 스스로 정당하다고 믿는 사람들. 그래서 영화 < 아름다운 5월 >은 이른바 몽타주의 미학과 방법을 채택한다. 영화의 첫 장면, 대부분의 사람들의 추상적 관념 속에 있는 파리는 에펠탑과 아름다운 관광지, 전승지, 문학과 예술의 집결지였다. 마르케의 사유는 그 신화적 이미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이곳이 가장 아름다운 도시인가?” 이 질문과 함께 아름다운 에펠탑과 도시 풍경의 이미지는 사이렌 소리와, 사람들의 신경증적인 대화 목소리들, 교통 소음들처럼 불안하고 음울한 사운드들과 충돌한다. 그리고 영화의 후반부. 파리의 곳곳을 포착하던 카메라는 이윽고 파리의 감옥으로 향한다. 높은 담장과 팔각형의 건물은 방향감각을 상실케 하고, 발걸음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며, 서로에 대한 증오와 적대를 키워나간다. 에펠탑과 파리의 아름다운 풍경들에 대한 부감숏으로 시작됐던 이 영화의 후반부는 이제 감옥을 거쳐 파리의 가장 낮은 곳으로 향한다. ‘추상에서 구체로’라는 맑스의 변증법적 사유가 그러했듯 마르케의 카메라는 거의 바닥에 닿을 듯 낮게 장착되어 파리의 거리들을 질주한다. 그리고 불현 듯 제시되는 파리 사람들의 얼굴들. 무언가 잔뜩 화가 난 얼굴들, 불안과 의심으로 가득 찬 얼굴들. 이어지는 이 영화의 가장 아름다운 내레이션. “슬픔이 있는 곳에 행복이 있을 수 없다. 가난한 자가 있는 곳에 부자가 있을 수 없다. 감옥이 있는 곳에 자유가 있을 수 없다.” 2012년, 7월 29일. 아흔 한 살의 크리스 마르케가 세상을 떠났다.(그는 1921년 7월 29일 생이다) 스스로 엄격한 좌파 사회주의자의 삶을 살았던 그는 1952년부터 총 52편의 다큐멘터리를 연출했고(그 중에는 유일한 극영화 < 환송대 >도 포함된다), 자신의 작품뿐만 아니라 러시아와 쿠바, 칠레의 사회주의 혁명에 관한 기록들을 지원했으며(그 중에는 < 칠레전투 >의 파트리시오 구즈만도 포함된다. 실제로 <칠레전투>는 크리스 마르케가 보내준 필름으로 촬영되었고, 편집작업을 도와준 쿠바의 이카익도 크리스 마르케가 연결해준 것이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새로운 영상매체에 대한 놀라운 실험정신으로 무장한 뉴미디어 아트도 선보였다. 다큐멘터리 영화사에 엄청난 획을 그었고 동료들에게 영향을 미쳤지만, 그는 은둔주의자의 삶을 살았다. 그래서 그의 얼굴조차 거의 알려지지 않았으며, 남아있는 사진도 거의 없다. < 아름다운 5월 >은 그의 이후 작품에서 지속적으로 관철되는 이미지와 사유, 현실과 기억, 역사와 개인의 관계에 대해 이전의 다큐멘터리 역사에서 선보이지 않았던 새로운 혁신과 방법론을 선보인 작품이었다. 지금 이 작품이 더욱 놀라운 것은, 1962년 5월 무작위의 파리 사람들에게 던졌던 질문과 사유는 2012년을 마감하는 대한민국에도 유효하다는 점이다. 거대한 정치적 권력과 게임 속에서 어떻게 사람들의 일상의식과 욕망이 포획되고 관리될 수 있는지, 이때 이 절망적 풍경 속에서 카메라를 든 자, 영화 감독, 아니면 크리스 마르케가 스스로 피력했듯 영화 에세이스트는 이제는 무엇을 사유하고, 무엇을 증언하고, 무엇을 기억해야 하는지에 대한 실천적 단초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기억은 망각의 반대 개념이 아니라, 그 이면이다. 우리는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마치 역사를 다시 쓰듯 기억을 다시 써야한다.” 크리스 마르케의 방법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