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배우는 오늘도
- 감독
- 문소리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문소리
연예인이 아닌 사람들은 연예인의 삶이 자신들의 삶과 어떻게 다른지 혹은 다르지 않은지 궁금해 한다. 그 마음은 지금껏 기자나 PD와 같은, 연예인과 비연예인을 잇는 중간자들에게 접수되어왔다. 그들에 의해 연예인의 일상은 ‘리얼’, ‘관찰’과 같은 수식어가 붙어 방송되고, 연예인이 SNS에 올린 글과 사진은 기사화된다. 이제는 연예인이 직접 카메라를 들고 유튜브 계정을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요구와 응답이 적극적으로 만나, 어쩌면 우리는 관계 맺지 않은 타인에 대해 알고 싶었던 것 이상으로 알게 되어 버리는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러나 관계 맺지 않은 타인을 보는 시선은 자주 왜곡된다. 우리는 한계를 인정하고, 때로 이용하면서 연예인의 삶을 가벼운 스토리 콘텐츠로 소비해버린다. 그렇게 받아들이는 것이 쉽고도 익숙하기 때문에. 그런데 연예인이 자신의 직업적 정체성을 제목삼아 직접 감독하고 주연한 창작물은 우리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문소리가 ‘문소리’로 등장하는 그의 첫 연출작 < 여배우는 오늘도 >( 문소리 , 2017)의 외피는 일면 ‘여배우’라는 소재를 앞세워 흥미를 유발한 후 ‘여배우’지만 별 거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모큐멘터리 내지는 시트콤처럼 보인다. 실제로 문소리는 세 개의 단편으로 이루어진 이 영화에서 흡사 3부작짜리 ‘인간극장’의 주인공 같다. 자신을 향하는 여러 눈길을 영화상에 배치한 후, 그 사이에서 요리조리 분투하는 ‘여배우.’ 그에게 꽂힌 시선의 주인은 친구, 가족에서부터 동료 영화인들, 그를 알지만 만나본 적 없는 낯선 이들, 즉 대중까지 다양하다. 그들은 자신이 문소리에게 지닌 애정이나 관심의 크기를 핑계 삼아, 가끔은 그것과 관계없이, 오직 각자의 렌즈로 그를 훑어낸다. 하지만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는 문소리가 타인의 시선을 경유해서 자신을 설명하려거나 그 시선에 대항해 자신을 변호하려는 알량한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시선들의 존재양식을 보여줌으로써, 그것을 전면에 내세워야지만 ‘여성’이자 ‘배우’인 자신에 대해 이야기 꺼내기를 시도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꺼이 객체가 됨으로써, 주체로서의 자신이 지닌 이상과 현실이 또 다른 여러 주체들에 의해 위협받아 왔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영화는 논증의 과정에 심각한 표정으로 뛰어들기보다 가볍고 유쾌한 톤으로 일관한다. 영화 속 사건들은 결코 가볍지도 유쾌하지도 않지만. 우선 이 영화에서 문소리는 내내 다른 인물들의 ‘액션’에 따른 ‘리액션’을 하고 있다. 1막 ‘여배우’에서 문소리는 친구가 가자고 했기에 산을 오르며, 자신을 캐스팅하지 않는 감독 및 제작자들의 선택을 두고 자신이 가진 ‘나름의’ 매력을 복기할 뿐이다. 우연히 만난 남성들과의 술자리에서도 그들이 던지는 무례한 언행에 통쾌히 일갈하는 대신 껄끄러워하는 표정만을 보이며 차분히 대답을 이어간다. 2막 ‘여배우는 오늘도’는 아예 가족구성원들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이곳저곳을 누비는 문소리의 하루를 따라간다. 하루 끝에 그가 당도한 곳은 친한 프로듀서와 감독의 특별출연 요청을 ‘거절’하기 위한 자리다. 3막이자 이 영화의 가장 이질적인 에피소드 ‘최고의 감독’은 자신의 첫 주연작을 연출한 감독의 장례식장에 가는 이야기인데, 여기에서도 문소리는 상대역이었던 남성 배우가 그를 붙잡고 나서야 망자와 그의 작품을 논하는 토론의 장에 합류된다. 영화 속 문소리가 처하는 대부분의 상황은 타인들에 의해 꾸려진 판이며 그는 그 판 위에서 그들의 기대를 따르거나 배반해가며 자신의 정체성을 요리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문소리가 ‘액션’이 아닌 ‘리액션’으로 현현해야 했던 이유는 제목이 내포한 두 가지 조건과 무관하지 않다. 첫째, 그는 배우, 곧 연예인이다. 둘째, 그는 여성이다. 분명한 것은 <여배우는 오늘도>의 방점이 문소리가 ‘배우’로서 겪는 파란만장보다 ‘여성 배우’라서 견디는 진퇴양난에 찍혀있다는 것이다. 제아무리 한국의 ‘메릴 스트립’이라지만 ‘조폭 아님 경찰’인 한국 영화에 자주 초대받지 못하는 여자. “힘들면 뭐라도 줄이라”고 다정히 말해주는 남편이 있지만 유치원 가기 싫다 통곡하는 딸을 달래줘야 하는 여자. “여배우 발을 닦아줘 훌륭하다”소리를 듣는 감독의 작품 세계를 비판하다가도 그가 남긴 영상을 보며 예술을 다시 고민하는 여자. 그렇게 멀리 나아갈 수도 더 이상 물러설 수도 없는 여자. 이 영화에서 문소리가 처한 모든 특수하거나 일반적인 상황들은 그가 ‘여성’이라는 사실과 교묘하게 톱니바퀴를 맞물리며 진행된다. 다른 인물들의 눈짓을 앞세우고 문소리의 대꾸를 뒤세우는 영화의 흐름은 톱니바퀴를 굴러가게 하는 기름칠에 다름없다. 시선에 화답하기 위해 준비되는 주재료는 어김없이 ‘외모’다. 그는 산에서 만난 남성들과의 술자리, 치과의사와의 사진 촬영을 앞두고 열심히 화장을 한다. ‘여배우’로서 기대 받는 미모를 충족시키기 위해. 그러다가도 특별출연을 거절하기 위해 찾은 주점의 화장실에서는 화장을 지운다. ‘여배우’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을 가꾸지 못할 만큼 힘들다는 것을 암시하기 위해. 또한 선글라스는 꾸미지 않은 겉모습을 가리는 용도로, 드레스는 ‘여배우’로서 기대되는 외형을 극적으로 재현하는 장치로 쓰이는데. 흥미로운 것은 이 물건들을 대하는 문소리의 태도다. 그는 선글라스가 없으면 불안해하다 못해 고성을 지르며 길 한복판을 달린다. 그렇다고 드레스를 입은 자신의 모습을 특별히 자랑스러워하는 것도 아니다. 딸이 드레스를 입은 레드카펫 위 문소리를 가리키면 “엄마 아니야”라며 텔레비전을 꺼버리고, 프라이빗 뱅킹 직원이 “여배우는 드레스 맨날 입고 좋으시겠다”며 웃을 땐 호응조차 안 한다. 이렇듯 문소리가 화장을 하고 지우는 장면은 그가 ‘여배우’를 보는 타인의 시선에 적당히 화답하는 방식을, 선글라스에 집착하고 드레스에 무심하게 구는 설정은 ‘여배우’를 택한 자기 자신의 다짐을 은유한다. 나는 나와 내 직업을 두고 유별나게 굴고 싶지 않으며, 그렇다 하더라도 내게 갖는 당신들의 기대에는 불평 않고 따르겠으나, 그 순응은 내가 나를 존중할 수 있을 때만 가능하다는 선언. 영상을 통한 문소리의 발화는 코미디로 눙쳐지다가도 어느새 한국 영화계, 더 넓게는 이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환영하다가도 무시해왔는지 넌지시 그러나 적확하게 짚고 넘어간다. 그 점이 영화를 기어이 블랙 코미디로 만든다. 결국 문소리는 첫 연출작에서 자신을 시선에 둘러싸인 존재로 만들고, 늘 타인들의 반경에 위치하게 했다. 자신을 ‘고뇌하는 예술가’나 ‘고통 받는 워킹맘’과 같이 보다 본격적인 존재로 명명할 의지를 내려놓고 일상으로부터 끌어온, 조금은 소소한 이야기를 시도한 것이다. 이 시도는 경력 단절 비슷한 것을 경험한 유명 ‘여배우’ 감독으로부터 관객이 기대할 ‘진짜 자기 이야기’보다는 얕은 수준일지 모른다. 영화의 코믹한 톤마저 어쩌면 진지한 논의를 빗겨가기 위한 수단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렇게 평가내리는 것은 여성 창작자의 자의식을 납작하게 관망한 결과에서 비롯된 판단이지 않을까. 실제 현실과 재현된 현실 속에서 여성이 시선의 주인이 아닌 대상으로 존재해온 역사는 뤼스 이리가라이, 로라 멀비, 존 버거 등 여러 학자들에 의해 지적되어왔다. 이들은 여성이 남성에게 어떻게 비치는지 의식해야 했던 동시에 여성 스스로도 자신을 검열하며 압박해왔음을 수많은 사연과 매체를 들어 역설했다. 너무나 유구해서 학문에까지 자리 잡은 이 역사를, 20년째 카메라에 찍히다가 처음으로 메가폰을 잡은 여성 창작자가 지나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가 보여준 것과 보여주지 않은 것은 여성이 자기 이야기를 시작하기 위해 처음으로 들려준 이야기와 나중으로 미뤄둔 이야기에 다르지 않다. 자기 이야기의 주인이 되기 위해 자신이 주인이 아니었던 순간들을 먼저 꺼내 보이는 용기. 그것만으로도 언젠가 문소리가 자기만의 목소리로 이야기를 장악하길 기대하기에 충분하다. 배우로서든, 감독으로서든 그가 계속해주기를 기원한다.
배우 문소리 의 연출작 < 여배우는 오늘도 >는 세 편의 단편 <여배우> < 여배우는 오늘도 > < 최고의 감독 >을 묶어 만든 장편이다. 영화는 개봉에 즈음해 한국과 한국 영화 산업 내에서 ‘여배우’로 사는 일의 직업적 피로와 ‘여배우’이기에 겪는 부당함에 대해 말하는 하나의 방편이 되기도 했다. 한 편의 영화가 당대의 사회적 문제의식과 맞물려 영화 외적으로 반향을 불러일으킨다면 그 역시 <여배우는 오늘도>가 품고 있는 힘일 것이다. 나는 이러한 반향에서 얼마간 떨어져 조금 더 영화 안으로 들어가 보고 싶어졌다. 배우 문소리가 연출자로서 스스로 기대한 바와 고민한 지점은 무엇인가. 한 작품에서 연출과 연기를 병행하는 감독 겸 배우는 각각의 역할을 수행할 때 무엇을 견지하고 싶어 할까. 특히 ‘여배우’라는 정체성을 전면에 내세운 이 영화에서 실제 ‘여배우’ 문소리는 ‘여배우’ 역 문소리를 연기하며 연출까지 함께했다. 이때 문소리는 자기와의 거리 두기와 자기 반영 사이에서 상당한 긴장 관계를 유지해야 했을 거라 짐작된다. 세 단편은 배우 문소리 가 중앙대학교 첨단영상대학원 영상학과(영상예술학 영화제작 전공 과정)에서 연출한 작품이다. 나는 작품과 함께 문소리의 석사 학위 논문 「단편영화 < 여배우는 오늘도 > 제작보고서-연출을 중심으로-」를 살펴봤다. 논문의 서론에서 문소리는 페델리코 펠리니의 < 8과 1/2 >, 아녜스 바르다의 < 아녜스 바르다의 해변 > 등을 언급하며 자의식과 자기 반영의 미학을 드러낸 작품들에서 큰 인상을 받았다고 밝힌다. 그러면서 단편 <여배우는 오늘도>가 “영화에서 ‘자기 반영’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다큐와 극영화의 어떤 경계에 놓인 것처럼 보일 수 있는 본인의 연출 작품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나 자신을 반영해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의 결과임을 말한다. 또한 문소리는 “<여배우는 오늘도>는 나 자신을 다각도로 반영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 허구의 이야기이며 픽션이다…다큐멘터리적으로 나를 반영하고 있지만 극영화로 관객들에게 인식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필자는 스스로의 삶에 대한 패러디의 방식에 주목하게 되었다”라고도 덧붙인다. 문소리의 이 고민은 곧 장편 <여배우는 오늘도>를 관통하는 화두다. 연출자와 배우 사이, 다큐멘터리와 픽션 사이, 원본과 패러디 사이, 극 중의 문소리와 극 바깥의 배우 문소리 사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오갈 것인가. 또한 이러한 사이‘들’에 관한 진지한 질문은 영화의 3막에 이르러 ‘예술은 무엇인가’라는 보다 확장된 영역에의 물음으로 이어진다. (감독의 부고 소식에 오랜만에 모인 이들은 죽은 감독의 작품을 두고 예술인지, 짜깁기에 불과했는지, 그럼에도 당시 한국에는 없던 작품이라는 점에서 의미 있는지 등을 놓고 언쟁을 벌이는 장면이 그렇다.) 앞서 말한 ‘다큐멘터리적’이라 함은 감독 문소리 가 세 편의 영화에 직접 출연해 극 중의 배우 문소리를 연기할 때 생기는 ‘리얼리티’의 문제를 말하는 것 같다. 극 중의 배우 문소리는 어디까지, 얼마나 ‘진짜의’, ‘사실의’, ‘실제의’ 배우 문소리와 비슷한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극 중 문소리와 극 밖의 문소리를 동일시하는 입장들에 대해 문소리는 상당히 경계하는 것 같다. 논문에서 밝히듯 문소리는 숏의 구성을 두고 극 중 문소리를 클로즈업하거나 단독으로 보여줘 감정을 고조시키는 방식, 즉 ‘나르시시즘적’으로 보일만 한 숏을 의도적으로 배제했다. 반면 극 중 문소리는 주변 인물들과 함께 하거나 블로킹 되는 위치에 있다. 같은 의도에서 2막에서 문소리가 시골길을 미친 듯 뛰어가는 장면이 와이드 숏으로 찍혔다. 이 경우는 거리를 둔 촬영이 인물이 처한 답답한 상황과 맞아떨어지면서 카타르시스를 불러일으킨다. 거리를 두는 방식에 대해서라면 숏의 구성과 더불어 몇몇 장면도 함께 말해볼 수 있다. 극 중 문소리 는 종종 거울 앞에 서서 자신의 민낯과 마주한다. 그때의 문소리는 ‘여배우’라는 이유로 곤란한 상황에 처해 화장을 해야 하거나 지워야만 한다. 이 순간, 거울 앞의 문소리는 배우이기도 하고(또는 처한 상황 때문에 배우여야만 하고) 배우가 아니기도 하다(또는 처한 상황 때문에 배우가 아니고 싶다). 2막의 또 하나의 장면도 그렇다.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레드카펫 위를 걷는 TV 속 문소리를 보며 딸아이가 “엄마”라고 하자 TV 밖 문소리는 “엄마 아니라”고 단호하게 말한다. 이 부정은 무엇인가. 직업으로서의 배우 문소리와 연기하지 않는 일상의 문소리 사이에 상당한 격차가 있음을 문소리 스스로가 아주 냉철하게 알고 있다는 의미다. 그래서 이때의 부정은 자신은 TV 속 문소리인 동시에 TV 속 그 문소리가 아니라는 자기 인정이다. 한편, < 여배우는 오늘도 >는 ‘패러디’라는 방식만큼은 적극적으로 활용한다. 문소리 하면 떠올릴 법한 이미지, 그녀 연기에 대한 평가, 경력, 수상 이력 등을 가져와 ‘여배우’의 현재, 가정사와 배우 일을 동시에 해야 하는 ‘여배우’의 상황을 보여준다. 이러한 자기 반영적 패러디가 가능한 것은 실제 문소리가 자신이 걸어온 배우로서의 궤적을 정확히 알고 있기에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기와의 거리 두기와 자기 반영의 방식은 마침내 3막에 이르러 자기 성찰적인 방향으로 나아간다. 특히 장례식장을 찾은 문소리 가 죽은 감독이 남긴 영상을 그의 어린 아들과 함께 볼 때 그녀가 흘린 눈물은 단순히 죽은 자에 대한 애도의 뜻은 아닐 것이다. 더 이상 찾는 이 없는 잊힌 감독의 죽음, 영화적 의미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남아 있는 영상, 그것을 바라보는 어느 ‘여배우’의 심정은 ‘슬픔’의 감정만도 아닐 것이다. 극 중 문소리의 짧은 울음 뒤 영화는 마침내 공동묘지와 그 옆을 걷는 문소리와 일행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문소리는 이 장면을 다시 보며 자신이 무의식적으로 극장의 풍경을 떠올린 게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때 문소리는 “연기는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느냐”는 신인 배우의 질문에 “될 때까지 하는 거지, 계속”이라 말한다. < 여배우는 오늘도 >를 통해 연기와 연출 작업에 질문을 던지던 문소리는 그렇게 영화를 통해 잠정적인 자기 대답에 이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