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영화인사전 인터뷰] 심재명
- 출연
- 심재명
지난 4월 8일 한국 최초의 여성영화감독으로 불리는 박남옥 (朴南玉) 감독이, 향년 94세의 나이로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별세했다. 그가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처음 열린 서울여성영화제를 통해서다. 그 때 한국영상자료원에 결말부 영상과 일부 사운드가 유실된 채로 네거티브 필름만 보관되어 있던 그의 연출작 < 미망인 >(1955)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고, 이를 통해 그간 한국영화사 기록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박남옥을 시작으로 한 역사 속 여성영화인들의 활동상도 새롭게 조명되었다. 당시 이러한 작업을 주도한 여성영화인들은 사단법인 여성영화인모임을 결성하였고, 『여성영화인사전』(주진숙·장미희·변재란 외 지음, 도서출판 소도, 2001)과 다큐멘터리영화 < 아름다운 생존-여성영화인이 말하는 영화 >( 임순례 , 2001) 등의 결실도 맺게 된다. 박남옥 감독이 그 출발점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학생 박남옥 열렬한 영화 팬에서 영화계로 1923년 경북 하양에서 태어난 박남옥은 어려서부터 영화를 무척 사랑했고, 문학, 미술, 체육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이던 만능 소녀였다. 특히 운동 실력은 깜짝 놀랄 만한 수준인데, 당시 신문기사를 검색해 보면 1938, 39년 전조선육상선수권대회에서 투포환 부문의 우승자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처럼 타고난 체력은, 훗날 영화연출 현장에서 갓난아기를 둘러업은 채 레디 고를 부를 수 있는 원동력이었지 않았을까 싶은 대목이다. 신문기사 속 그의 이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당시 각 대학의 입시합격자를 게재한 1940년 3월 27일자 『동아일보』의 ‘입시합격발표’란을 살펴보면, 박남옥은 이화여자전문학교의 합격생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가 인터뷰를 통해 언급한 해방 이전의 이력들이 정확하게 확인되는 셈이다. 박남옥은 일제 시기 조선영화의 최고 스타였던 김신재 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영화잡지인 『신영화』(1942년 11월호)에 나온 최인규 영화에 대한 기사 중 부인 김신재에 대한 언급을 읽고 팬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 < 집없는 천사 >(1941)에서 꽃파는 소녀 역을 맡은 김신재의 모습에 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의 매일 김신재에게 팬레터를 보내고 기사와 사진들은 모두 스크랩했다는 그의 증언은, 식민지 조선의 한 소녀가 영화에 열중하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어 무척 인상적이다. 사실 필자는 대학원 석사과정 중 <아름다운 생존>의 촬영으로 참가했는데, 이 때 박남옥 감독을 실제로 뵙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소중한 기회가 있었다. 일제 말기 노골적인 국책영화들 사이에서 조선의 농촌 풍경을 담은 < 풍년가 >(1942, 방한준 )가 정말 아름다운 영화였고, 최인규 의 < 수업료 >(1940) <집없는 천사>가 얼마나 뛰어난 예술영화였는지 증언하시던 대목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이기 전에 식민지 영화문화를 향유하던 영화 팬이었고, 초창기 한국영화사의 산 증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박남옥이 본격적으로 영화 작업에 참여할 기회는 해방과 함께 찾아왔다. 친구의 남편인 윤용규 감독(그는 해방기의 대표작 < 마음의 고향 >(1949)을 감독하고 월북했다)의 소개로 조선영화건설본부 산하의 광희동 촬영소에 스태프로 입사한 것이다. 그 곳에서 드디어 꿈에 그리던 김신재를 만날 수 있었고 이후 말년까지 인생의 친구로 지내는 출발점이 된다. 이 시기 박남옥은 돈암동의 예술인촌이라 불린 마을에 살았는데, 바로 이웃이 유명한 영화인들 즉 김신재와 최인규 부부, 김소영 과 무용가 조택원 커플, 문예봉 , 전창근 , 독은기 , 윤용규, 한형모 등이었다. ‘여성영화’ <미망인>의 완성과 의미 해방 직후 영화인들이 집결했던 광희동 촬영소에서 편집조수로 일하던 박남옥은 드디어 현장으로 나가게 된다. 바로 배우 최은희 의 데뷔작이기도 한 < 새로운 맹서 >(1947, 신경균 )에서 스크립터를 맡은 것이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당시 영화 현장에 정착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결국 ‘딴따라 판’을 벗어나 정상적인 결혼을 바라는 부모의 강요로 귀향을 선택하게 된다. 영화에 대한 그의 열망이 너무나도 강했던 것일까.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박남옥은 다시 영화계로 돌아갈 기회를 잡는다. 1953년 국방부 촬영대에 입대해 기록영화 작업에 참여했고, 극작가 이보라를 만나 결혼까지 이른다. 전쟁이 끝났고, 드디어 그는 자신의 영화에 착수한다. 박남옥의 데뷔작이자 유일한 작품인 <미망인>(1955)은 이보라가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일단 언니에게 돈을 빌려 영화에 착수했다. 영화사 이름이 ‘자매영화사’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개인적으로 친했던 이민자 를 주연으로 내세웠고, 스태프 역시 지인들로 꾸렸다. 촬영도 아예 저예산 제작의 기본이라 할 16미리 필름으로 시작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데뷔작에 착수하기까지도 힘들었지만, 영화 현장을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한다. 촬영하는 날보다 제작비를 빌리러 다니는 날이 더 많았고,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를 맡길 곳이 없어 포대기에 둘러업고 촬영 현장을 누볐다. 직접 편집을 하고 전창근 감독 등의 도움으로 겨우 녹음실을 구해 후반 작업을 마치는 등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영화를 개봉시켰다. “여성감독이 아니면 착안하기 어려운 ‘앵글’의 각도와 사건의 ‘템포’ ‘리듬’의 명쾌, 화면과 동작(연기) 등에 생활감정을 예리하게 융화”(『동아일보』 1955.2.27)했다는 개봉 직전 영화평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영화는 평단의 인정을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전후 여성들의 욕망을 과감하게 묘사한 그의 영화가 너무 앞서갔던 탓이었을까. 변재란 등의 영화학자들이 지적하듯이, <미망인>은 단지 최초의 여성감독의 영화로 수식되기보다 여성영화로서의 의미가 더 클 것이다. 박남옥감독 촬영 현장 박남옥 감독이 남긴 것 안타깝게도 박남옥은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했고, 1960년 창간된 『씨네마 팬』의 편집장으로(그는 해방 전 대구의 신문사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영화평을 쓰기도 했다) 영화 일을 이어나가다, 영화계를 떠나게 된다.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 영화판에서 기회를 잡은 것이 해방 직후와 한국전쟁 시기 그리고 전후, 즉 한국 사회가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박남옥 이후 < 여판사 >(1962)의 홍은원 , < 민며느리 >(1965)로 연출에 데뷔한 배우 최은희, < 첫경험 >(1970)의 황혜미 , < 수렁에서 건진 내딸 >(1984)의 이미례 등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여성감독이 이어졌다. 이후 임순례 감독을 필두로 굳이 여성감독으로 부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여성영화인들은 각 분야에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이 박남옥에서 출발한 계보를 이룬다고 또 박남옥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감독 데뷔의 기회를 잡기 위한 고군분투의 역사가 박남옥에서 출발했다는 사실, 그의 영화 인생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큰 의미일 것이다. 김영희 편집기사와 박남옥 감독 본 글은 2017년 4월 『씨네21』호에 실린 '[추모] 김신재를 동경하던 '영화소녀' 영면에 들다'를 재수록한 것이다.
50~60년대의 인기 영화배우이자 김진규 의 전부인이었던 이민자 씨가 뇌일혈로 19일 하오 6시 숨졌다. 향년 58세. 이씨는 지난1일 고혈압으로 쓰러져 일본의대 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 왔으나 의식을 회복하지 못하고 이날 타계했다. 장례식은 21일 상오 많은 동료와 친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도쿄의 고단다의 한 절에서 있었다. (서울신문 1986년 1월22일) < 생명 > < 유혹의 강 > < 모녀기타 >등 90여편의 영화에 출연, 50~60년대 한국 영화를 대표했던 배우 이민자 씨가 지난 19일 저녁8시 일본 동경대부속병원에서 뇌일혈로 별세했다. 향년57세. 이씨는 46년 배우 김진규 씨와 결혼했다가 59년 이혼하고 68년 일본에서 재혼, 사업을 해왔다. 이씨의 유해는 25일경 서울로 운구될 예정이다. (동아일보 1986년 1월22일) 이민자 는 이렇게 쓸쓸하게 갔다. 새해가 열리는 정월 초하룻날 쓰러졌다. 제대로 치료도 못 받고 스무날을 못 채우고 그냥 갔다. 그것도 현해탄 건너 이국땅에서. 장례도 그곳에서 치러졌다. 그렇게 많은 갈채를 받던 고국에 핏기없는 주검으로 돌아왔다. 60을 채우지 못한 이민자 의 일생은 그녀의 죽음만큼이나 쓸쓸하고 복잡다단했다. 그래서 일까. 이민자는 그녀의 일생을 그대로 영화에 반영 하다시피 했다. ‘미망인의 세계. 어쩌면 이것으로 이민자의 영화경력을 요약할 수 있을 듯 하다. 어딘지 청초하고 수심에 잠긴 듯 한 모습의 이민자는 영화계에서 ‘과부형 배우’로 인식되었다. 실제로 그의 출연작을 살펴 보더라도 대부분 과부의 삶을 소재로 한 것이고 그런 역에서 성공을 거두어 왔음을 알수 있다… (여성영화인사전- 여선정 ) 이민자 의 다섯째 작품이 < 미망인 >(1955)이다. 이 영화는 이민자의 ‘미망인의 세계를 그렸다는 점 말고도 한국 영화의 역사에서 크게 기록되고 있다. 한국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 이 연출한 영화가 바로 이 <미망인>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그녀의 감독데뷔작품이다. 어린 딸을 데리고 사는 전쟁미망인이 도덕윤리와 욕망의 늪 사이에서 갈등하고 고민하는 모습을 그린 이 작품은 좋은 점수를 받았다. 53년 이민자는 네번째 작품 < 최후의 유혹 >에 출연했다. 유현목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정창화 감독이 연출한 이 영화에서 이민자는 바 마담역을 맡았다. 김 화의 <이야기 한국영화사>는 …이민자는 이 때부터 술집 마담역으로 명성을 떨쳤다…고 쓰고 있다. 52년에 만들어진 < 악야 >는 거장 신상옥 감독의 데뷔작품인데 여기서 이민자는 작가( 황 남 )와 하룻밤을 지내는 양공주역을 맡았다. 56년 < 마의태자 > ( 전창근 감독) , < 사도세자 > ( 안종화 감독)등 2편의 사극에 출연하고 57년에도 < 마인 > ( 한영모 감독), < 오해마세요 > ( 권영순 감독)등 2편의 영화에 출연한다. 1958년. 이 해부터 1964년까지를 한국영화 중흥기로 구분 ( 호현찬 의 <한국영화100년>)하는 만큼 이민자의 출연영화는 5편으로 늘어난다. 한국최초의 시네마스코프 < 생명 > ( 이강천 감독)에 출연하여 연기력을 높이 평가받은 이민자는 뒤이어 < 어머니의 길 > ( 안현철 감독), < 자유결혼 > ( 이병일 감독), < 유혹의 강 > ( 유두연 감독), < 소낙비 > ( 이경식 감독)등 모두 5편에 출연했다. 111편의 한국영화가 만들어진 59년 이민자 는 모두 1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 아름다운 여인 > ( 유현목 감독), < 청춘극장 > ( 홍성기 감독), < 행복의 조건 > ( 이봉래 감독)등이었다. 60년에는 < 울지 않으련다 > ( 신경균 감독), < 사랑해선 안될 사랑 > ( 이봉래 감독), < 과부 > ( 조긍화 감독)등 모두 9편,61년 2편, 62년에는 < 이십구세의 어머니 > ( 이강원 감독 ), < 여자의 일생 > ( 신경균 감독), < 여인천하 > ( 윤봉춘 감독), < 아낌없이 주련다 > ( 유현목 감독)등 모두 8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이 가운데에서 이민자 를 크게 부각시키고 여러모로 화제를 뿌린 작품은 단연 < 아낌없이 주련다 >라 하겠다. 교양있는 연상의 미망인과 먹물 든 연하의 청년사이의 사랑이야기로 물론 멜로드라마 이지만 6촵25전쟁을 배경으로 인간의 고뇌를 그렸다는 점에서격조높다는 평가를 받은 작품이다. 말할 나위없이 이민자는 고민하는 연상의미망인상을 훌륭히 표출해 냈다. 이 작품은 또한 영화기자 출신 호현찬이 기획촵제작(극동영화사와 합작)하여 흥행면에서도 아낌없이 주는 반응을 얻었다는 기록을 누렸다. 이민자 는 63년에도 59년과 마찬가지로 16편의 영화에 출연했다(총 제작편수는 148편). < 언니는 좋겠네 > ( 이형표 감독), < 김약국집 딸들 > ( 유현목 감독), < 오색 무지개 > ( 조긍하 감독), < 남자조종법 > ( 정일몽 감독), < 자문밖 설마담 > ( 한상훈 감독), < 율곡과 그 어머니 >( 이종기 감독)등이다. 이 가운데서<김약국의 딸들>은 < 미망인 > < 생명 > <아낌없이 주련다>등과 함께 이민자의 대표작으로 꼽히고 있다. 김약국의 네딸 중 큰 딸 역을 맡은 이민자는 과부의 삶과 심리를 밀도 있게 연기함으로써 이 작품을 문예영화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일조를 했다. 64년에는 < 모녀기타 > ( 강찬우 감독), < 청춘은 목마르다 >( 박상호 감독), < 학사주점 > ( 박종호 감독)등 모두 11편의 영화에 이민자 는 출연했다. 65년에는 < 장보고 > ( 안현철 감독), < 7인의 여포로 > ( 이만희 감독), < 모녀봉 > ( 권영순 감독), < 갯마을 > ( 김수용 감독)등 9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어떤 기록에는 14편으로 되어있다. 이는 아마도 주연 또는 주요역할을 중심으로 했느냐 여부에 따른 차이일것이다. 실제로<갯마을>의 주연은 이민자가 아니다. 이 작품의 과부는 고은아이고 시어머니역은 황정순이다. 이민자는 66년에는 < 친청 어머니 > ( 김기덕 감독), <특급 결혼작전> (유현목 감독)등 4편, 67년엔 <빙우> (고영남 감독) 68년에는 <슬픔은 파도를 넘어> (김효천 감독)에 출연했다. 광복전인 1944년< 태양의 아이들 >( 최인규 감독)에 데뷔한 뒤로 24년동안 90여편의 영화에 출연한 이민자 는 < 슬픔은 파도를 넘어 >를 끝으로 한국영화와 작별할 뿐만 아니라 현해탄의 파도를 넘어 모국도 떠난다. 50년대 후반 60년에 전반 한국영화 전성기에 이민자 는 한국의 에바가드너로 불렸다. 저 헐리우드의 전설적인 사랑의 여신 에바가드너로승격을 시킨 것이다. 입소문으로만 전해진 것이 아니라 아예 기록으로 남게 되었다. 호현찬 의 <한국영화100년>은 < 아낌없이 주련다 >대목에서 …여주인공은 한국의 에바가드너라고 불리는 이민자를 …이라고 못박았다. 이민자는 좋은 연기자였다. 거기에 에로티시즘의 화신이랄까,섹스 어필 만점의 연기자였다. 한국의 에바가드너라는 칭호가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에바가드너와 달리 이민자 는 유복한 집안, 한의사의 넷째딸로 태어났다. 무학여중 2학년때 극장 구경을 갔다가 배우가 되는 계기에 부딪혔다. 44년 동랑 유치진이 이끄는 현대극장 연구생으로 들어갔다. 무대에서 주목을 받은 어린 이민자는 같은 해에 < 태양의 아이들 >로 영화데뷔를 한다. 뒤이어 48년 두번째 영화< 여명 >( 안종화 감독)에 출연한다. 데뷔작품에서는 단역을 맡았기 때문에 이민자의 데뷔작으로 첫 주연인 <여명>을 흔히 든다. 이 연극-영화와의 인연은 이민자 에게 인생의 인연을 안겨주었다. 연예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해, 16세때 이민자는 같은 극단 같은 무대에 선 김진규 를 만나 그 다음해인 45년 정식결혼을 했다. 광복전의 일이었다. 이들의 결혼은 14년만에 파경을 맞았다. 이민자를 둘러싼 사랑의 기쁜 이야기, 슬픈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고, 이것은 그대로 그녀의 배역과 직결되었다. 그래서 미망인전문배우가 되다시피 한것이다. 새로운 인생을 개척하기로 결심했는지, 이민자 는68년 일본으로 건너갔고, 이 해에 재일교포와 재혼을 했다. 그리고, 18년뒤 이민자는 미소가 사라진 주검으로 돌아왔다. 60년대초 퇴계로의 아스토리아 호텔의 밀실에서 이민자 와 인터뷰한 기억이 희미하게 떠오른다. 이 졸문을 쓰면서 그때의 기사를 찾아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또한 이민자의대표작들을 볼 수 없다는 것이 사뭇 안타깝다. 신우식(영화평론가) / 2002년 <프로필> 본 명 : 이용랑 출 생 : 1929년 4월10일 서울 1986년 1월 19일 사망 데 뷔 : 1944년 최인규 감독 < 태양의 아이들 > 주요 작품 : < 미망인 >, < 유혹의 강 >, < 아낌없이 주련다 >, < 생명 > 등 다수
한국영화의 또 한번의 꽃이 활짝 핀 1950년대 중반에 노경희 란 여배우의 위치는 든든했다. 흔히들 해방 후 1세대 글래머 스타가운데 노경희를 꼽지만 그는 역시 탄탄한 연기자로 평가되어야 한다고 본다. 노경희 는 뭐니뭐니 해도 < 피아골 >의 ‘노경희’이다. 1955년 이강천 감독이 만든 <피아골>은 지리산의 피아골을 무대로 하여 한 여자 빨치산을 둘러싸고 빨치산들 사이에 벌어지는 갈등, 그리고 빨치산의 귀순 과정이 사실적으로 그려진 작품이다.‘한국영화의 수작’으로 영화사적으로도 높이 평가 받고 있다. 이 <피아골>에서 노경희는 바로 여주인공인 여자 빨치산 ‘애란’역을 훌륭히 해냈다. 이 영화가 높은 평가를 받은 것은 작품성과 함께 연기진의 연기가 훌륭했기 때문이었다. 남자 주인공 김진규 는 이 작품으로 영화 데뷔를 했으며 이예춘도 이 작품으로 영화와 인연을 맺었다. 허장강 은 역시 이강천 감독의 < 아리랑 >으로 데뷔하여 뒤이어 이 작품에 출연했다. 노경희를 포함하여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악극단 출신 연기자들이라는 것이었다. 현직 경찰관이 각본을 쓴 이 ‘반공영화’ (당시 용어)는 빨치산의 생태를 너무나 사실적으로 묘사한 죄(?) 때문인지 한동안 용공성(容共性) 시비가 없지 않았다. 군부에서도 의견이 갈려 국방부 정훈국에서는 상영불가론, 육군본부 정훈감실에서는 우수작품론을 펼쳤었다. 신문지상에도 군인과 평론가의 논쟁이 있었다. 당시 문학평론가 임긍재는 다음과 같이 이 작품을 평가했다. “…< 피아골 >은 선전적 가치로 보나 영화예술성으로 보나 아직까지 한국영화로서는 볼 수 없었던 우수한 작품이다. 왜냐하면 이 <피아골>을 보면 공산주의자들이 얼마나 악독하고 잔인하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까닭이다. 가령 부상공비 A가 무기를 버리고 왔다고 해서 대장 아가리는 총살을 명령하고 뒤이어 만수로 하여금 잔인하게 돌로 쳐 부셔죽이는 것이다…”(동아일보 1955·8·12)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에 회의적인 먹물 든 빨치산 철수( 김진규 )를 사랑하는 골수 공산주의자인 여자 빨치산 애란 역을 멋있게 해낸 노경희 는 이 < 피아골 > 한 작품으로 당당하게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노경희 자신도 세월에 상관없이 이 작품에 대한 애착을 간직하고 있었다. “내가 가장 아끼는 영화는 < 피아골 >이지요. 대표작입니다.” 회갑을 1년 앞둔 87년 7월 노경희 (당시 영화인협회 연기위원회 부위원장)가 한 말이다. (주간조선 87.9.13) 노경희 는 10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지만 피아골 다음으로는 < 춘향전 >(1955)과 < 망나비비사 > (1955)가 연기력을 평가받고 많은 화제를 남겼다. 한국영화사의 거목인 이규환이 생전 “각본 감독 편집을 손수 내 손으로 한<춘향전>은 나의 영혼이 깃든 작품이었다”(김화: 이야기 한국영화사)고 말한 작품. “…1월 설날 프로그램으로 개봉된 이규환 감독의 < 춘향전 >이 전국 흥행계를 강타했다. 해방 후 최초의 춘향전 영화이다. 춘향전은 한국영화사의 길목에 가끔씩 나타나 마치 구원의 여신과 같이 한국영화산업에 활기를 불어넣은 작품이다…”( 호현찬 : 한국영화 100년) < 춘향전 >은 노경희 의 연기 길목에도 큰 활기를 불어 넣어 주었다. 춘향= 조미령 , 이도령= 이 민 , 향단 = 노경희, 방자= 전택이 …. 당시로서는 다시 맞출 수 없는 ‘호화배역’이었다. 더구나 노경희·전택이는 부부사이었으니 향단·방자역을 얼마나 멋있게 해냈겠는가. 두 사람이 깡충깡충 뛰는, 활력 넘치는 장면들이 지금도 눈앞에 선하다. 흥행은 ‘대박’이었다. 개봉관인 서울의 국도극장 한 곳에서만 20일 상영에 10만 명이 넘는 관객을 동원했다는 이야기이다. 당시 서울 인구가 2백여만 명 ( 이규환 감독의 기록)이었으니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춘향전>을 본 셈이다. 2년 동안 그야말로 전국 방방곡곡, 면소재지에서까지 상영되었다고 하니 향단이 노경희의 연기가 그만큼 평가되고 인기가 오를 수밖에 없었다. <춘향전>의 히트로 한국영화계에 사극 붐이 일었다. 김성민 감독의 < 망나니 비사 >도 만들어졌다. 이 영화에도 노경희는 남편 전택이와 함께 출연했다. 이 작품은 제목처럼 비사(슬픈 역사), 슬픈 이야기이다. 전택이가 망나니 ‘먹’역을, 노경희는 술집 작부‘달’로 분했다. “…얼굴 가득 불안스러움을 내비치며 그 특유의 빈정거리는 말투로 먹을 다루는 노경희는…”(여성영화인사전:여선정) 성격 배우로서의 역량을 한껏 발휘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의 첫머리에서도 지적했듯이 노경희는 역시 글래머 스타라기보다는 단단한 연기자로 대접해야 한다고 본다. 노경희는 1955년 한해동안 < 피아골 >, <춘향전>, <망나니 비사> 3편의 작품에 출연하여 그 연기 능력을 충분히 인정받았다. 이 세 작품만으로 노경희의 연기자로서의, 배우로서의 위치는 굳혀진 셈이다. 노경희 는 1929년 12월 25일 강원도 화천에서 태어났다. 서울의 배화여고를 졸업했다. “…배화여고 시절 하루도 빠짐없이 극장에 다녔던 노경희는 친구들 사이에서 ‘극장대장’으로 통했다…”(여성 영화인사전) 노경희는 17세 때 감독 최인규와 배우 전택이 가 제작준비 중이던 <마의 산> 히로인 역에 음모하여 뽑혔다. 그러나 <마의 산> 촬영이 자금난으로 중단되자 노경희는 길을 잃었다. 전택이 선배를 찾아갔다. 그의 소개로 약초가극단 (단장 김해송)에 들어갔다. 이 가극단 동기생으로는 김진규 , 이예춘 , 허장강 이 있다. 신청년악극단에서도 활동하는 등 무대생활은 모두 6년이었다. 1948년 < 수우 >에도 출연한 기록이 없지 않지만 본인이나 한국 영화사 기록에서는 1950년의 < 흥부와 놀부 > ( 이경선 감독)을 노경희 의 본격적인 데뷔작품으로 꼽고 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 2편의 영화가 만들어져 서울에서 개봉되었는데 그중 1편이 바로 <흥부와 놀부>이다. 노경희는 한국전쟁 중 종군다큐멘터리 제작에 연기자로 참여했으며 1954년 홍성기 감독의 < 출격명령 >에 출연했다. 공군 조종사간 사랑의 삼각관계와 전우애를 그린 이 영화에는 전택이도 출연했다. 그리고 앞에서 특기한 < 피아골 > < 춘향전 > < 망나니 비사 > 3편이 1955년의 노경희를 빛냈다. 뒤이어 다음과 같은 작품에 출연했다. < 인생역마차 > < 자유부인 > < 애인 > < 여성의 적 > (이상 1956년) < 실락원의 별 > < 애원의 고백 > (1957년) < 산넘어 바다건너 > < 돈 > < 실락원의 별 2 > < 유혹의 강 > < 애정무정 > < 느티나무 있는 언덕 > (1958년) < 고바우 > < 내일 없는 그날 > < 백만장자가 되면 > < 별하나 나하나 > < 삼여성 > < 애련의 꽃송이 > < 젊은 안내 > < 푸른 날개 > < 황금의 상처 > (1959년) < 버림 받은 천사 > < 어느 하늘 아래서 > < 울지 않으련다 > < 청춘화원 > < 추억은 영원히 > (1960년) <애정행로> (1961년) < 양귀비 > <어딘지 가고싶어> <흑태양> (1962년) < 거지왕자 > < 검은 꽃잎이 질 때 > < 약혼녀 > < 연애주식회사 >(1963년) 노경희 가 출연한 100여 편의 영화를 여기 다 적을 수는 없다. 위에서는 주요 작품만 열거해 본 것인데 1950년대 중반이후 1960년대 초반에 걸쳐 한국 영화계에서 노경희가 얼마나 ‘맹활약’을 했는가를 알 수 있다. 당시 한국영화에는 주연이든 조연이든 노경희가 거의 출연하다시피 했다. < 자유부인 > < 애인 > < 실락원의 별 > < 느티나무 있는 언덕 > < 삼여성 >등은 연기면에서나 이야기거리로나 노경희의 이름을 기억하게 하는 작품들이다. 특히 <애인>에는 전택이가 주연으로 출연했는데 노경희는 이 작품을 ‘전택이의 대표작’으로 평가하곤 했다. <삼여성>에서는 당시의 스타 최은희 이경희 그리고 노경희 세 사람의 연기 대결을 보여주었다. 왕성하게 영화 출연을 하지 않게 된 뒤로도 노경희 는 선배로서 후배들의 연기지도 또는 영화인의 권익 옹호를 위하여 열심히 뛰어 다녔다. 회갑을 넘기고도 그의 왕년의 글래머 스타의 건강을 여실히 보여주었었다. 그러나 노경희에게는 지병이 복병처럼 숨어 있었다. 1995년 7월 17일 제헌절 날 새벽 서울 을지병원에서 노경희는 세상을 떠났다. 67세였다. 당뇨와 심부전증이 사인이었다. 당시 83세인 남편 전택이와 4남1녀를 남겨 두고 갔다. 전택이는 3년뒤인 1998년 3월2일 86세를 일기로 아내 노경희 곁으로 갔다. 두 사람은 영화계의 선배·후배로 만나 ‘사랑하는 사이’가 되고 전택이가 본 부인과 이혼한 뒤 1954년 정식으로 결혼했다. ‘…두 사람은 말년에도 잉꼬부부로 주위의 부러움을 샀다. ’(동아일보 1998·3·4) 신우식(영화평론가) / 2003년 <프로필> 본명 : 노숙진 1929년 12월 25일 강원도 화천 출생 배화고녀 졸업 1950년 이경선 감독의 < 흥부와 놀부 >로 데뷔 1995년 7월 7월 타계 <주요 작품> 인생 역마차 , 애인 , 삼여성 , 자유부인 , 망나니비사 , 실낙원의 별 등 <수상 경력> 1955년 < 망나니비사 > 제1회 금룡상 여우주연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