팻걸
- 감독
- 니게스트 라이키
- 제작년도
- 2006
- 출연
- 모니크, 지미 장-루이스, 가드프리, 켄드라 C. 존슨
2000년대 한국영화는 종종 호러 장르를 경유해 여자들의 세계를 다뤘다. 이 영화들은 가족, 아파트 단지, 학교, 종교단체 같은 특정 여성 공동체 내부의 관계나 감정을 서사의 동력으로 삼으면서 신인 여성 배우들을 발굴하는 데 일조하기도 했다. 1998년에서 2009년까지 5편을 제작한 < 여고괴담 > 시리즈가 가장 대표적이며 < 장화, 홍련 >(2003)과 < 4인용 식탁 >(2003)도 이 범주에 포함될 수 있다. 이번 칼럼에서 다룰 김미정 감독의 첫 장편 < 궁녀 >(2007) 역시 그러한 경향 속에서 나온 영화다. <궁녀>는 조선시대 궁궐에서 살해당한 한 궁녀의 진실을 추적하는 미스터리 서사, 궁 안의 사람들에게 복수하는 귀신의 존재를 암시하는 호러 코드, 가부장제 하에서 생존하려는 여성들의 쟁투와 과잉된 모성표현의 멜로드라마 정서가 섞인 흥미로운 장르영화다. 이 영화가 제목으로 삼고 있는 ‘궁녀’는 대중문화에서 왕과의 성적 관계를 통한 여성의 신분상승 서사로, 그리고 때로는 성차별적 신분제 사회에서도 가려지지 않는 출중한 능력과 지력을 갖춘 직업인의 성장서사로 그려져 왔다. ‘궁녀’라는 소재는 요리, 봉제, 의료처럼 전문성을 갖고 있는 직업인으로 다룰 수 있기에 현대 대중문화 콘텐츠로 각색하기에 적절할 뿐 아니라 이성 간 그리고 동성 간의 역동적 관계를 모두 다루기에도 충분한 조건을 갖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아무리 현대적 각색을 거친다 해도 ‘궁’이라는 시간적이고 공간적인 체제의 한계를 벗어나기 힘들다. 때문에 이 소재는 늘 시대를 벗어나려는 힘과 시대에 의해 좌절되는 상반되는 힘을 서사화하며 과거와 현재의 교차적 한계를 전경화 한다. 영화 <궁녀> 역시 2000년대 사극 장르에서 여성 서사를 다루는 데 있어 상상적 한계를 돌파함과 동시에 체제의 전환 없이는 벗어나기 힘든 그 한계 내에 재포획 되는 양가적 면모를 보여준다. 이 한계를 재조정하고 재설정하는 상상력에 따라 ‘궁녀’라는 공동체는 매번 다르게 그려진다. 양반도 아니고 기록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은 여성의 역사를 현대에 상상하고 각색하는 것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젊은 여성의 적극적인 성적 욕망의 표현과 여성 동성애 등 섹슈얼리티의 표현에 있어 시대에 도전한 영화로 평가받으면서도 자살이라는 자기 파괴를 통해서만 궁을 벗어날 수 있는 여성들을 보여준 < 내시 >(신상옥, 1968)가 1960년대의 상상력이라면, 최근에 대중적 인기를 끌었던 MBC 드라마 <옷소매 붉은 끝동>(정지인, 송연화, 2021-2022)은 자기 능력을 최대치로 발산하고 인정받기를 열망하는 한편 안전하게 소시민적인 일상을 유지하길 원하는 상반된 여성의 욕망을 반영한 2020년대의 것이다. 영화 <궁녀>는 조선시대에 대한 역사적 상상일 뿐 아니라 2000년대 한국 장르영화의 역량이기도 하다. 영화 <궁녀>에서 궁녀들의 공동체는 꽉 닫힌 사회다. 표면적으로는 왕이라는 가부장제와 신분제의 정점에 있는 한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고 내명부의 지배를 받지만 궁녀들은 자기들만의 규율과 비밀을 갖고 움직인다. 공동체의 비밀은 ‘자매애적 연대’ 같은 여성들 간의 끈끈한 결속과 감정을 형성하지만 동시에 집단의 이익이나 개인의 생존을 위해 동료를 무자비하게 희생시키기도 한다. 억압적 체제에 속한 공동체에서는 연대와 우정의 감정을 갖게 될지라도 체제 자체를 벗어나거나 무너트리지 않는 이상 그것이 지속되기는 힘들다는 것을 궁녀들의 사회가 보여준다. 이 공동체의 존재조건인 지배적 체제의 힘은 그들의 세계를 새로운 변화나 이질적인 것이 틈입할 수 없는, 꽉 닫힌 세계로 만들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그렇다고 궁녀들이 왕족을 위해서만 움직이는 건 아니라는 것이다. 영화 <궁녀>는 어떻게 궁궐의 여자들이 왕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끊임없이 왕과 봉건적 체제를 배신하고 일사분란하게 비밀을 만드는지 보여준다. <궁녀>가 그 시대 장르영화와 차별화되는 지점은 그 배신을 파격적으로 전면화하는 오프닝씬에 압축되어 있다. 한밤 외진 숲의 어둠에 파묻혀 형태도 잘 보이지 않는 한 여자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내고 있다. 그리고 곧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린다. 여자는 홀로 출산을 하고 잠시 아이에게 젖을 물리지만 곧 죽게 내버린다. 보통 장르영화의 오프닝에서 이렇게 환영받지 못하는 아이를 낳은 여자들은 이후 실종되거나 시체로 발견되어 서사를 진행시키는 도구로 사용되곤 한다. 그러나 이 영화는 익숙한 장르적 기대를 통쾌하게 배신한다. 자신의 목숨과 직업 모두를 지켜내고 궁녀로 살아가기 위해 아이를 낳고 죽인 여자가 이 영화의 주인공 천령(박진희)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씬에 멀쩡히 등장해 의녀로 활약하는 천령은 ‘정절’을 지키지 않음으로써 왕족을 배신하고서도 죽지 않고 잘 살아남은 (기록되지 않은) 여자들이 있었음을 증명한다. 그 과정에서 천령의 스승 의녀는 천령이 죽지 않고 살아갈 수 있도록 지혜를 나눠주고 비밀을 지켜준다. 그러나 모두 천령처럼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아니다. 의녀인 천령은 목매달아 죽은 채로 발견된 궁녀 월령(서영희)의 시체를 검안하고 그의 출산 사실을 밝혀내며 죽음에 얽힌 진실을 추적한다. 천령은 자신의 임신사실을 알리자 잔인하게 그녀를 내쳐버린 대비의 처조카 이형익(김남진)을 의심한다. 천령은 월령이 자신과 비슷한 억울한 사정이 있을 것이라 짐작하며 타락한 남자들의 부도덕함과 불공정에 대항하며 금기시된 욕망을 표출했던 동료 궁녀들을 구원하려 한다. 그러나 감찰상궁(김성령)과 월령이 일했던 희빈전 심상궁(김미경)은 천령의 탐색을 방해하며 월령의 죽음을 자살로 덮으려 한다. 혼란스럽게도 피해자 중 한명으로서 가부장제와 신분제에 대항해 진실을 밝혀내려는 탐정 의녀 천령의 정의로운 수사극처럼 보였던 영화는 중반 이후 죽은 월령으로 추정되는 혼령이 개입해 직접 사건을 해결하려 들면서 전혀 예측할 수 없는 방향으로 흐른다. 월령의 사건을 계기로 왕을 비롯한 남자들의 체제에 대항하려던 천령은 월령이 같은 궁녀들에게 배신을 당해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목숨을 걸어서라도 정의를 찾고 진실을 밝혀내려던 천령은 다른 궁녀들과 마찬가지로 침묵을 선택한다. 모성이라는 이름하에 월령이 빙의한 것처럼 보이는 희빈(윤세아)은 궁녀들에게 비밀서약을 강제하고 천령도 그에 동조한다. 궁녀들은 서로를 경계하고 질투하면서도 같은 궁녀였던 희빈이 아들이 원자가 될 수 있도록 협력한다. 그렇게 표면적인 ‘여성들의 연대와 결속’은 오히려 자신들을 억압하는 체제를 공고히 하는 모순에 도달한다. 궁녀들이 서로 갈등하고 자기 결정과 욕망을 금기시하게 된 원인은 왕으로 대표되는 가부장제와 신분제이다. 그러나 월령의 혼령은 왕을 죽이거나 그의 몸을 찬탈하지 않고 자신이 속했던 여성 공동체를 지배하는 것에 만족한다. 대담한 오프닝 씬처럼 천령이 현대적 상상력을 통해 과거를 다시 써내려간 캐릭터라면, 어두운 그림자로만 묘사되는 혼령은 특정 인물의 귀신이라기보다는 천령도 벗어나기 힘든 시대적 한계 그 자체를 재현한다. 무력하게 침묵을 선택하고 궁의 문을 나오는 천령의 모습은 체제에 균열을 내지 않고 오히려 그것에 기댄 ‘여성 결속’이 또한 얼마나 퇴행적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문예영화’ 표방한 <해연>의 여학생 극장 정원제(5월 1일)가 실시되고 입장료 제한(8월 1일)이 폐지된 1948년 11월 21일 서울 중앙극장에서 개봉한 <해연(海燕: 일명 갈매기)>(예술영화사 제작)은 해방 후 <똘똘이의 모험>(1946), <민족의 새벽>(1947), <그들의 행복>(1947)에 이어 이규환 감독이 내놓은 네 번째 작품이다. 문예영화를 표방한 해방 이후 첫 문교부 추천 영화이기도 하다. 이 영화는 당초 일제 말기에 <처의 윤리>(1941)와 <우러르라 창공>(1943) 두 편을 만든 김영화 감독이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불문학을 전공하고 귀국한 이철혁과 손잡고 만들게 돼있었다. 그런데 과도정부의 초대 공보처 영화과장 제의를 받은 김영화 감독이 연출을 사양하였고, 김영화의 추천에 의해 이규환 감독이 대신 연출을 맡게 되었다. (이규환,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44) : 황금기」, 『중앙일보』, 1980.02.15) [사진] <해연>(이규환, 1948)에서 조미령(오른쪽) <해연>은 계모의 구박을 피해 언니 정애(남미림)가 일하는 동해안의 소년원을 찾아온 여학생(정숙)이 말썽을 부리는 문제아들을 보고 그곳에 남아 봉사하며 계도한다는 얘기다. 그 여주인공 정숙 역을 20세의 조미령이 맡았다, 서울관현악단의 연주와 남성합창단이 부르는 노래를 배경으로 소년원생들이 여선생과 함께 곡괭이질 하는 마지막 장면이 뜻하듯이, <해연>은 국가건설기의 과업이 어떤 것인지를 잘 말해 준다. 이 영화의 언니 애인 역으로 등장하여 서울에 올라가도록 만든 박학은 그 뒤 월북한 후 북한 최초의 예술영화(극영화) <내 고향>(1949)에 출연했다. 춘향 역으로 스타의 반열에 오르다 한동안 영화계와 멀어져 있던 조미령이 다시 은막에 나타난 것은 그로부터 7년 만인 1955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1955)부터였다. 그 사이 조미령은 변기종이 주도한 상록극회(1951)와 자유극회(1953)의 창단 동인으로 활약했다. 아울러 그녀의 신변에도 변화가 있었다. 16년의 차이가 나는 <해연>의 프로듀서 이철혁과 결혼한 것이다. 스물두 살 때였다. 그러나 조미령이 처음부터 흔쾌하게 춘향 역으로 선택된 것은 아니었다. 이규환 감독의 회고 (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영화 60년(48): ‘춘향물색’」, 『중앙일보』, 1980.02.19) 에 따르면, 이 역할은 당초 신인에게 맡길 생각이었다. 그래서 마땅한 얼굴을 찾기 위해 그는 유장산 촬영기사와 함께 신촌 이화여대 정문 앞으로 갔다. 몇 시간을 드나드는 학생들을 살펴봤으나 마땅한 후보가 눈에 들어오지 않자 어쩔 수 없이 그 대안으로 키가 작아 제쳐두었던 조미령을 불러내기로 한 것이다. 이 감독은 이런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신바닥을 10센티미터 가량 높이기로 하였다. 다행히 긴 치마가 이를 가려주었다. <춘향전>의 촬영이 시작된 것은 1954년 7월부터였다. 원작에 나오는 남원의 광한루가 아닌 풍광과 촬영 조건이 좋은 경북 달성군 가창면 냉천동(冷泉洞)에서였다. 그런데 2주일 뒤 장마가 시작되면서 촬영이 중단되고 자금의 압박까지 받아 고리대금을 끌어다 쓰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렇게 9월 중순이 되어서야 촬영을 마친 <춘향전>은 2시간 15분(필름 길이 1만2천자) 분량의 편집과 명창 임방울, 박초월의 ‘춘향가’가 들어간 녹음과정을 거쳐 이듬해 1월 6일 국도극장에서 개봉되었다. 그 결과 밀려드는 관객들로 하여 세 차례나 상영기한이 연장되며 24일까지 18만 여명을 동원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화제의 영화 춘향전, 한국영화사상 초유의 힛트」, 『한국일보』, 1955.12.06) 극장이 개관된 이래 최대 인파였다. 더욱이 <춘향전>은 이에 앞서 시행된 정부의 ‘국산영화 입장세 면세(1954년)’라는 혜택까지 누려 제작자에게 돈더미를 안겨 주었다. [사진] <춘향전>(이규환, 1955) 촬영현장에서 조미령, 왼쪽은 이규환 감독 일반적으로 춘향이라면 갸름한 얼굴에 날씬한 키를 연상하기 쉬우나 조미령이 꾸며 보인 춘향은 그저 야무진 일편단심의 모습에 지나지 않았다. (「금주의 스타 조미령」, 『한국일보』, 1955.02.06)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남주인공 이민과 함께 일약 영화계의 정상급 배우로 떠올랐다. 여기에는 아역 출신 셔리 템플이 결혼 후 스크린에서 자취를 감춘 것과는 달리 소녀시절부터 ‘극장에서 크고 화장대에서 자라난 체험’이 큰 힘이 되었다. 조미령은 뒤이어 <춘향전>의 조감독 유현목이 첫 메가폰을 잡은 <교차로>(1956)를 비롯하여 <단종애사>(전창근, 1956), <여성의 적>(김한일, 1956),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6) 등 4편에 출연하게 된다. 이 가운데 특히 관심을 끈 것은 <시집가는 날>의 하녀 입분이 역이었다. 욕심 많은 맹진사(김승호)가 딸과 혼담이 오가는 세도가의 아들(최현)이 절름발이라는 말에 속아 대리 신부로 내세우는 바람에 행운을 잡게 된 여주인공이다. 더욱이 이 풍자극이 국내 최초로 해외영화제(제4회 아시아영화제 특별 희극상)에서 수상하면서 그 후광마저 입게 된다. 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조미령의 연기는 무난했으나 신부다운 신선미가 없는 게 결점” (이봉래, 「희극영화의 가능성, 영화 ‘시집가는 날’에서」, 『조선일보』, 1957.02.19) 이라는 평을 듣는 수준이었다. [사진] <시집가는 날>(이병일, 1956)의 한 장면 그런데 김기영 감독의 <여성전선>과 김소동 감독의 <아리랑>(이상 1957)에 이르면서 진가가 드러나기 시작한다. <여성전선>의 주인공 옥란 역이 현대여성의 타산적인 행위를 잘 표현 (김규대, 「발전의 소지 개척, 영화 ‘여성전선’에서」, 『조선일보』, 1957.03.09) 했다면, <아리랑>의 여동생 영희 역은 ‘시달림을 받는 처녀로서 훌륭한 연기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특히 오빠의 친구이자 애인인 윤현구(윤일봉)에게 말하는 대사가 퍽 세련되었다는 평가가 따랐다. [사진] <아리랑>(김소동, 1957) 촬영현장에서 조미령, 왼쪽에서 두 번째는 상대역인 배우 윤일봉, 오른쪽에서 두 번째는 감독 김소동 이 무렵 그녀의 대중적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월간 대중지 『희망』(1957년 8월호)과 영화잡지 『국제영화』(1958년 8월호)가 독자를 대상으로 한 여론 조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희망』은 조미령이 주증녀와 양미희를, 『국제영화』는 주증녀와 최은희를 제치고 인기배우 제1위로 집계했다. 남배우 1위는 김동원과 최무룡이었다. 조미령이 다수표를 얻은 데는 왜소한 청순미가 관객들의 보호본능을 자극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사진]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에 출연한 김동원, 오른쪽은 배우 신성일 구경꾼들 폭소 자아낸 <밤의 태양>의 야외 촬영 1948년 밀수 근절을 위한 수도청 후원의 정책 홍보영화 <밤의 태양>(박기채 감독)에 출연한 김동원(金東園)은 신극배우로서 은막에 진출한 첫 사례가 된다. 그동안 극단 황금좌를 중심으로 활약하다가 영화에 출연한 황철, 심영 등 해방 전 신파배우들과는 달리 그는 신극을 지향한 극예술협회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상대역은 최은희, 조연으로 전택이, 한은진 등이 합류했다. 그는 영화가 연극과 장르는 달라도 연기의 이치는 같은 것이라고 여겼다. 하지만 막상 카메라 앞에 서자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일관된 흐름 속에서 전개되는 무대 연기와는 달리 감독의 콘티에 따라 진행되는 토막 촬영이어서 감정을 잡지가 쉽지 않았다. 거리에서 교통사고로 쓰러진 애인(최은희)을 안아 일으키는 장면을 찍을 때였다. 긴장한 나머지 여자를 안고일어서다가 그만 주저앉고 말았다. 이 광경을 지켜보던 구경꾼들 사이에서 폭소가 터졌음은 물론이다. 그의 첫 출연은 이렇게 ‘실망스럽게’ (김동원, 『미수의 커튼콜: 나의 예술과 삶』, 태학사, 2003, 144~145쪽) 끝났다. <밤의 태양>에 출연한 후 다시는 외도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김동원이 문화영화 <코리아>(신상옥, 1954)로 영화계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그로부터 6년 만이었다. 명승지와 그곳에 담긴 일화를 소개하는 이 영화에서 그는 남원을 무대로 전개되는 <춘향전>의 이몽룡 역할을 맡아. 춘향 역인 최은희와 다시 호흡을 맞추게 된다. 그사이 그는 악몽 같은 ‘6,25 동란’을 겪었다. 극단 신협이 앙코르 공연으로 마련한 번역극 <뇌우(雷雨)>(부민관)가 끝난 지 이틀 만이었다. 미처 피난하지 못하고 종로구 필운동 처가에서 숨어 있다가 붙들려 한밤중에 연극인 일행과 함께 북으로 끌려가게 된 것이다. 유엔군의 인천상륙작전이 임박한 때였다. 그러나 다행히 평양을 지나 대동강 중류 연안의 순천지역에 이르렀을 때 유엔군과 함께 진격해온 국군에 의해 극적으로 구출된다. (김동원, 앞의 책, 173~180) <자유부인> 이후 형성된 신사풍의 캐릭터 김동원이 관객들의 시선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한형모 감독의 <자유부인>(1956)부터였다. 1954년 선풍적인 인기를 끈 정비석의 서울신문 연재소설(215회) 『자유부인』을 영화화한 이 작품에 양품점 주인 안태석 역이 주어졌다. 검열 당시 그가 유부녀 오선영을 끌어안은 포옹 장면과 그녀가 이웃청년 신춘호(이민)와 가진 키스 장면이 한국의 도덕 기준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상영이 보류될 위기 (“키스 장면이 말썽, <자유부인>도 상영 불허”, 『동아일보』, 1956.6.9) 를 맞기도 했으나 수도극장에 개봉되면서 15일간 15만 관객을 동원하는 흥행 기록을 세웠다. 그러나 그의 안태석 역할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영화평론가 이봉래는 ‘완전한 미스캐스트’라고 전제하고 “그 신파조의 대사와 움직임이 없는 생경한 연기는 이분이 어떻게 연기를 한 분인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비판했기 때문이다. (“근래의 쾌작, 영화 ‘자유부인’”, 『한국일보』, 1956.6.7)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동원은 이 영화의 성공과 함께 대중들에게 더욱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그런 후광 덕인지 그는 잇따라 같은 해에 김소동, 김한일 형제 감독에 의해 각기 만들어진 <왕자 호동과 낙랑공주>(1956)와 <여성의 적>(1956)에 출연하게 된다. [사진] <자유부인>(한형모, 1956)에 출연한 김동원, 상대역은 여주인공 오선영을 맡은 배우 김정림 이후 그는 홍성기 감독의 <실낙원의 별>(1957)을 비롯한 <장미는 슬프다>(박상호, 1958), <별아 내 가슴에>(홍성기, 1958), <한말 풍운과 민충정공>(남홍일, 윤봉춘, 1959)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신상옥, 1959), <연산군>(신상옥, 1961), <유정>(김수용, 1966), <엘레지의 여왕>(한형모, 1967), <장군의 수염>(이성구, 1968), <엄마 결혼식>(조문진, 1973) 등 160여 편에 캐스팅 된다. 이 가운데 주연급이 ‘영화연기로서의 이행을 확실히 실증 ’(유한철, “57년 영화계 총평”, 『조선일보』, 1957.12.26) 한 <실낙원의 별>(소설가 역) 등 60편에 이른다. 1950년대 중후반 김동원은 그동안 연극배우로서 누려온 정상의 위상에 버금하는 인기를 누렸다. 이 사실은 당시 월간 대중지 《희망》이 독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현역 남녀배우 인기투표’ 결과 (“제2회 배우 인기투표, 제1위에 남 김동원, 여 조미령”, 『조선일보』, 1957.8.3) 가 말해 준다. 그는 2위의 전택이, 3위의 최무룡을 제치고 대중들로부터 가장 많은 사랑을 받는 배우로 선택받았다. 그동안 그는 왕(<왕자 호동과 낙랑공주>, <연산군>)이거나, 회사 사장(<장미는 슬프다>), 독립운동가(<별아 내 가슴에>), 충신(<한말풍운과 민충정공>,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대학교수(<낭만열차>(박상호, 1959), <일월>(이성구, 1967)) 소설가(<실낙원의 별>, <장군의 수염>), 초등학교 교장(<저 하늘에도 슬픔이>(김수용, 1965)) 등 악역과는 거리가 먼 점잖은 신사풍의 인물들을 만들어 내었다. [사진] <장미는 슬프다>(박상호, 1958)에 출연한 김동원, 상대역은 여배우 김지미(사진제공: 김종원) 일본 유학 시절의 단역 출연 김동원은 1916년 11월 14일 경기도 개성군 송도면에서 양화점을 경영하는 김경순의 7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동혁(東爀)이 본명이었으나 해방이 되는 해 11월 <검찰관> 공연 때부터 획이 많고 딱딱한 본명 대신 대중들이 알기 쉽게 평소 좋아한 작가 이광수의 아호 ‘춘원’에서 원(園)자를 따서 새로 쓰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아들이 개성제일공립보통학교 4학년이 되자 사업을 확장하기 위해 서울로 이사했다. 보통학교 과정을 마치자 배제고등보통학교로 진학한 후 처음 유진 오닐의 〈고래〉로 연극무대에 섰다. 부풀어 오른 그의 ‘대배우로의 야망’은 결국 일본대학 예술과를 선택하게 만들었다. 유학시절 그는 조선유학생들끼리 동경학생예술좌라는 연극 서클을 조직하여 본격적인 연극 활동을 시작했다. 이때 일생에 연극의 동반자가 된 이해랑을 만나게 된다. [사진] <실낙원의 별>(홍성기, 1957)의 한 장면, 왼쪽이 여배우 주증녀, 오른쪽이 노경희(사진제공: 김종원) 이 무렵 그는 쇼치쿠(松竹) 영화사의 연기자 모집에 응모하여 8개월 동안 연수를 받고 ‘얼굴도 보이지 않는 단역’ 몇 편에 출연하기도 했다 .(김동원, 앞의 책, 70쪽) 그러나 더 이상 기회가 주어지지 않자 결국 1939년 5년간의 일본 유학생활을 청산하고 귀국에 오른다. 이후 그는 신협 등에서 활약하며 국내 최초의 <햄릿>(1951)에 출연, ‘한국의 로렌스 올리비에'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정확한 발성과 화술로 중후한 연기를 보여줬던 김동원은 2006년 5월 13일 아흔 살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