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여의도 벚꽃 만개, 지금 여의도 벚꽃 축제 놀러오세요
- 제작년도
- 2010
이야기는 현실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보고 들었던 엄청나게 많은 기억들 속에서 일부만 골라낸 이야기를 영화라고 한다면, 미처 이야기가 되지 못한 나머지 기억들은 기록영상 컬렉션 곳곳에 심드렁하게 담겨 있습니다. 그에 대한 이야기를 되는대로 늘어놓아 보겠습니다. “나를 웃음거리 정도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1] 제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세상에 정말 필요한 건 진짜로 연대하고 있다는 느낌이라는 거예요. 스타든, 노동자든, 흑인이든, 유대인이든, 아랍인이든, 우리는 모두 형제입니다. 부디 저를 웃음거리로 다루지 말아주세요. 이런 제 신념과 함께 인터뷰 기사를 마무리해 주세요. Steinem, Gloria. Marilyn . New York: H. Holt, 1986, 23. * 마릴린 먼로가 사망 전 마지막 인터뷰에서 했던 말이다. 이 마지막 부탁은 무시됐다. 죽음은 그 자체로 한 인간의 발언권을 몰수하는 사건이다. 죽음의 강을 건넌 사람의 생애를 함부로 규정짓는 것은 자칫 폭력이 될 수 있다. 1926년에 태어나 1962년에 사망한 한 미국인, 노마 진 모텐슨(Norma Jeane Mortenson)과 같이 혼란스러운 생을 살았던 이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도 이 정도는 말할 수 있다. 그녀는 타고난 스타였다. 그녀는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지녔다. 그녀는 일생 내내 유·무형의 성적 폭력에 시달렸고 순탄치 않은 개인사를 겪었다. 그리고 그녀의 언행은 자주 모순적이고 불안정했다. 이 마지막 인상은, ‘시대의 아이콘’이라는 연막에 그녀의 본 모습이 가려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녀는 늘상 ‘배우’로서의 자신을 강조했지만 일반적인 연기론과는 다르거나 불분명했다. 성적 매력을 부각시키는 배역 위주로 맡기는 소속 영화사에는 항의하면서도 자신의 아름다움에 사람들이 환호하는 것에는 행복해 했다. 오히려 유명인사나 거물과 적잖은 염문을 뿌렸으니, 정서적으로 불안하다거나 성공을 위해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했다는 세간의 평을 듣기에도 충분했다. 그런데, 그녀를 배우 ‘마릴린 먼로’가 아니라 ‘노마 진 모텐슨’이라는 한 사람의 관점에서 이해하려고 하면 이런 것들이 어느 정도는 오해가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그녀는 배우라는 탈출구를 통해 자신을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하는 관객들을 갈구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외적 아름다움을 포함한 자신의 ‘전체’를 보고 좋다고 말하는 사람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것이다. 어느 순간에는 ‘밤에는 샤넬 No. 5를 입고 자요’라는 발언이 의도적으로 성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려는 것이었을지, 아니면 정말 본인 말대로 피부가 민감해서 옷을 걸치지 않고 잔다는 의미였을지조차 헷갈리게 된다. 영화산업과 언론이 만들어낸 신화적인 이미지가 무려 60년 이상 재생산되고 있다. 이걸 걷어내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닐 것이다. 하물며, 본인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하는 상상에서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신혼여행 중 도피한 여배우 6.25전쟁이 끝나고 고작 반 년이 지난 1954년 2월 16일, 서울 여의도공항에 C-54 수송기가 도착하고 마릴린 먼로가 모습을 드러냈다. 미군위문협회(USO, United Service Organizations)가 해외 파병 미군을 대상으로 한 캠프 쇼(Camp Show) 공연에 출연하기 위해 왔다고 하지만, 이때의 기획은 다소 즉흥적이고 특별했다. 당시 마릴린 먼로는 메이저리그의 전설적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Joseph Paul DiMaggio)와 결혼하고 일본의 도쿄, 오사카 등지에서 신혼여행 중이었다. 이 결혼생활은 해가 가기 전에 고통스러운 파경 으로 치달을 것이었고, 신혼여행 중에도 이미 그 전조가 보였다. 조 디마지오는 신혼여행 중에도 일본 야구팀과의 공식 일정을 진행했고, 마릴린 먼로는 한국의 최전선에 근무하고 있는 미군들을 위해 위문공연을 하기로 결정한다. 신혼여행 출발 전부터 염두에 두고 있었다거나 비행기 안에서 제의를 받았다거나 일본에서 전격적으로 결정했다는 등의 여러 설이 있지만 모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다. [2] 다만, 한국에서의 모든 공연에서 그녀는 보라색 칵테일 드레스 한 벌을 입고 무대에 섰는데, ‘원래 파티장에서 입으려고 가져온 것이고 이것이 무대에서 입을 수 있는 유일한 옷이었다’고 밝힌 것으로 보아 최종 결정 자체는 긴급하게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1954년 2월 1일, 도쿄 제국호텔 기자회견장에서 마릴린 먼로와 조 디마지오 부부 출처: 111-SC-452331, National Archives 마릴린 먼로는 2월 16일 여의도공항에 도착한 순간부터 19일까지 3박 4일동안 미군 기지 십여 군데를 순회하며 부대 내 야외 가설무대에서 위문공연을 했다. 한국영상자료원이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tional Archives) 2관에서 수집한 기록영상 중에는 미군 촬영병들이 이때의 마릴린 먼로의 모습을 기록한 푸티지가 3점 있다. 이 영상들은 현재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4) > [3] 을 통해 공개되고 있는데, 모두 흑백으로 촬영됐고, 특별한 경우 외에는 음향을 함께 녹음하지 않는 군 기록영상의 특성상 군인들의 환호성과 마릴린 먼로의 음성이 담겨 있지는 않다. 원 소장처에서는 모두 “MARILYN MONROE SHOWS, K-2 AND K-16, KOREA”라는 동일한 제목으로 관리되고 있었는데, 이를 자료원 컬렉션에서는 <1954년 2월, 마릴린 먼로 내한 - 미군부대 순회공연> (A), (B), (C) [4] 로 구분했다. (이하, <영상 A>, <영상 B>, <영상 C>로 지칭하겠다.) 이 부부의 결혼은 ‘세기의 결혼’으로 일컬을 만했다. 결혼과 신혼여행도 평범하지는 않아서 화제성이 충분했다. 하지만 의외로 국내는 물론이고 미국의 신문보도에서도 이 순회공연의 전 일정이 빠짐없이 명시된 기사는 찾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마릴린 먼로 헌정 사이트나 각종 블로그의 내용들은 서로 일치하지 않은 경우가 많고 출처도 분명하지 않다. 그런 면에서 슬레이트 정보와 부대마크가 포함된 기록영상들은 귀중한 근거가 된다. 다만, 이 영상들에는 당시의 몇몇 일정이 빠져 있고 시간 순서대로 묶여 있는 것도 아니라서 정리가 필요하다. 이 영상들과 당대 신문기사를 종합해 마릴린 먼로의 일자별 방문지 순서를 재구성해 보면 다음과 같다. ◦ 2월 16일(화) : 여의도 K-16 비행장 도착, 미 제1해병사단 제1보병연대(첫 공연) [5] , 미 제7보병사단 ◦ 2월 17일(수) : 미 제3보병사단, 제40보병사단 제160보병연대, 제24보병사단, 제25보병사단 [6] ◦ 2월 18일(목) : 미 제2보병사단, 제45보병사단 [7] ◦ 2월 19일(금) : 대구 K-2 공군기지(마지막 공연) 이렇게 확인된 일정만 봐도 4일 동안 총 9군데의 미군 부대를 방문했다. 기억에 의존한 일부 블로그 글, 예를 들어 마지막 날 대구 전에 춘천 공연이 있었다든지 하는 것들을 신뢰한다면, 18일과 19일에 각각 최소 2~3군데의 일정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촬영된 부대들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최소한 18일까지는 군사분계선을 따라 최전선 부대들을 방문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기사들은 공연이 있었던 장소를 시간이 흐를수록 점차 ‘서부 전방’(‘Western Front, Korea’), ‘중부 전방’(‘Central Front, Korea’), 그리고 마지막 날인 19일 제45보병사단 기사에서 ‘동부 전방’(‘Eastern Front, Korea’)으로 보도하고 있다. 따라서 마릴린 먼로와 공연팀들은 서울을 기점으로 경기 북부와 강원도의 전방 부대들을 동쪽으로 순회한 후 마지막 날 대구를 비롯한 후방 주요기지를 방문한 뒤 일본으로 귀환했다고 볼 수 있다. 신문보도에 따르면 가는 곳마다 적게는 6,000여 명에서 많게는 13,000여 명의 군인들이 몰려들었다. 17일까지 이틀 동안 집계된 관객수를 6만명 으로 보도한 기사가 있고, 대략 19일까지 총 관객수를 10만여 명 이상으로 추산하는 견해가 일반적인 듯 하다. 영상들은 주로 마릴린 먼로에 초점을 두고 촬영됐지만 다른 전반적인 정보도 함께 담고 있다. 마릴린 먼로는 서울에 도착할 때와 대구 비행장으로 갈 때만 수송기를 탔고, 부대에서 부대로 이동할 때는 군용 헬리콥터를 탔다. 이 위문공연 이름을 따서 지은 것으로 보이는 밴드 ‘Anything Goes’ 일원들, 남편 조 디마지오의 동료 야구인의 아내 진 오둘(Jean O’ Doul), 그 외에 매니저 역할을 한 장교로 추정되는 인물이 늘 마릴린 먼로와 함께 이동했다. 따라서 이 인원들과 악기까지 감안하면 헬리콥터도 최소 3기가 필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대마다 사단장급이 나와서 일행을 영접했고 도착 장소에서 한동안 포토타임을 가졌다. 공연은 보통 밴드원들이 노래, 연주, 만담 등으로 분위기를 띄운 후 마릴린 먼로가 등장해 노래를 몇 곡 부르고 군인들과 포토타임을 가지는 식으로 진행됐던 것 같다. 마릴린을 데려와라! - 신경쇠약 직전의 군인들이 애정을 표현하는 방법 마릴린 먼로는 1953년 한 해 동안 출연한 영화 세 편이 모두 흥행하면서 떠오르는 스타로 인정받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영화배우 데뷔 이전에 누드모델로 활동했고, 당시 군인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핀업걸(Pin-up Girl) [8] 중 하나였다. 대중문화 접근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졌을 한국의 미군들에게 마릴린 먼로는 영화배우라기보다는 핀업걸로 익숙했고, 사진에서 보던 모델이 현실에 나타났다는 것만으로도 흥분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9] (왼쪽) 미 제1해병항공단 비행대대 “Devil Cats”, 퀀셋 안 벽에 가득 ‘핀업’된 여성 모델과 배우 사진들 출처: 127-GR-223-A345138 , Box 32, Folder 223, National Archives. (오른쪽) 1953년 2월 14일, 미 제9군단 항공관측부대 간이비행장 관제소에서 통신 중인 병사. 창에 ‘핀업’된 여성 사진. 출처: 111-LC-31969, National Archives / 열람: < 미국 NA II 기록영상 컬렉션 (4) > 중 <AERIAL PHOTO MISSION, IX CORPS, KOREA (2)> 2분 40초 지점 하지만 여의도공항에 마중 나온 군인들의 뜨거운 열기는 그것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비정상적인 수준이었다. 이때의 미군 병사들은 물리적으로나 정서적으로나 먼 다른 나라에 와서 3년간 전장을 경험했다. 특히 전방 부대들은 정전 후 7개월이 지난 시점에도 귀환하지 못하고 군사분계선 이남의 방비태세를 정비하거나 잔존하는 전쟁 재발의 위협에 대응하는 임무를 수행 중이었다. 생존의 불안감과 오랫동안 누적된 피로감, 고국의 민간 사회와 동떨어져 있다는 느낌이 이들의 전반적인 정서였을 것이다. [10]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USO가 발족하고 캠프 쇼를 기획했던 것도 바로 파병 군인들의 이런 정서를 달래 사기를 진작하고자 하는 것이었고, 6.25전쟁 중에도 캠프 쇼가 수차례 열렸던 것으로 확인된다. 그렇더라도 마릴린 먼로에 대한 이들의 반응은 한국 땅을 밟은 다른 ‘레전드’급 연예인들 이상이었는데, 그만큼 이때의 미군들이 지쳐 있었고 절실히 귀환을 바라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왼쪽) 1954년 2월 18일, 제2보병사단 공연 후 자신이 담겼을 것으로 추정되는 포스터에 사인을 해 주는 모습 (<영상 C>, 3분 58초 지점) (오른쪽) 저마다 카메라를 들고 즐거워하는 제2보병사단 군인들 (<영상 C>, 21초 지점) 한 군인은 너무 당황해서 카메라 렌즈 뚜껑 벗기는 것을 잊었다. 먼로가 뚜껑을 열어주며 말했다. “자기야, 그거 벗기는거 잊었어.” 한국 전역 군부대 PX에서는 필름이 모두 매진되었고 제7보병사단 공연에서는 플래시가 너무 많이 터져, 한 기자가 "공산군들은 제7보병사단이 야간 기동 중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라고 보도했을 정도였다. " 카메라 셔터 소리와 함께 끊임없이 터지는 플래시 불빛에 하늘이 계속 환했다." [11] 1954년 2월 16일, 제7보병사단. 무대 조명을 세팅하는 모습(왼쪽, <영상 A> 3분 44초 지점)과 공연 중 플래시가 터진 순간(오른쪽, <영상 A> 4분 29초 지점) 영상에서 비춰진 마릴린 먼로는 여신처럼 군림하는 스타가 아니라 군인들과 팔짱을 끼고 대화를 나누는 ‘친구’였다. 마중 나와 기념사진을 찍은 장교보다는 사병들이 카메라에 추억을 담을 수 있도록 충분히 시간을 내어 주었다. 그녀는 영하의 날씨에도 얇은 어깨끈만 있는 칵테일 드레스를 입고 무대에 올라 헌신적으로 공연을 펼쳤다. 비나 진눈깨비가 온다고 하여 공연을 취소하거나 연기하지 않고 예정대로 진행했다. 제40보병사단에서는 비와 추위로 잠시 무대 뒤로 들어가기도 했지만 이내 다시 나와 공연을 이었다. 일본으로 돌아간 후에 39도의 고열로 앓아누운 것은 이때 무리했기 때문일 가능성이 높다. [12] 지친 병사들은 이토록 친밀하고 친절한 모습으로부터 아마도 위로 또는 이해받고 있다는 감정 비슷한 것을 느꼈을 것이다. 한편 마릴린 먼로가 군용항공점퍼를 입고 헬리콥터나 전차, 지프 등에 올라타 미소를 지으며 손을 흔드는 모습은 병사들에게 긴 긴장상태가 끝날 날이 머지 않았다는 안도감을 줬으리라 생각한다. [13] 한국에서 군인들을 위한 위문 공연을 하러 갔을 때, 그녀는 영하의 추위에도 불구하고 1만 3천 명의 미군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에 진심으로 놀라고 감동했습니다. 군인들이 끊임없이 그녀를 부르자, 그녀는 그들을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추위를 무릅쓰고 어깨끈 없는 드레스 [14] 와 샌들을 신고 무대에 섰습니다. 그녀는 나중에 "사람들에게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라고 회상했습니다. Steinem, Gloria. Marilyn . New York: H. Holt, 1986, 20. 병사들은 이렇게 억눌렸던 욕구가 해소되고 위로 받는 감정을 폭동에 가까운 격렬한 호응으로 표출했던 것 같다. 영상에 누락됐지만 당시 신문 기사에 따르면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공연 중에는 무대로 달려들려는 군인들 때문에 안전상의 이유로 공연이 일시 중단되는 상황이 있었다. [15] 이어 가장 격렬했다고 알려진 2월 18일 제45보병사단 공연에서는, 약 6,000명의 군인들이 마릴린 먼로의 차례를 기다리지 못해 앞 순서 공연자들에게 ‘마릴린을 데려와라!(Bring on Marilyn!)’라며 야유를 하고 돌을 던졌다. 결국 마릴린 먼로가 예정보다 일찍 등장하자 이들이 일제히 무대로 달려드는 통에 한 군인이 부상을 당해 구급차에 실려가는 사건이 발생했다. [16] 이런 해프닝들도 있었지만 현장에 있었던 군인들은 한결같이 회고록이나 구술을 통해 이때를 좋은 추억으로 회고하며 특히 마릴린 먼로에 대해서는 ‘최고로 멋진 여성이었다’, ‘여배우지만 겸손해서 놀랐다’ 등 좋은 인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영상에 드러나는 이때의 마릴린 먼로는 ‘추억보정’이라고 하기엔 유별나게 헌신적이었다. 한마디로 스타성과 진정성이 함께 폭발한 순간이었다고 할 수 있다.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야외 무대 ‘Grenadier Palace’ 공연 : 진눈깨비에 가까운 비가 내리자 마이크를 손으로 닦아주는 관계자(위, <영상 A> 7분 7초 시점). 결국 잠시 퇴장했다가 다시 나오는 마릴린 먼로(아래, <영상 A> 7분 21초 시점) (왼쪽)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공연장에 가득 찬 군인들(<영상 B> 1분 24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7일, 제25보병사단 공연 장면. 추위에 입김이 나오는 모습 (<영상 C>, 5분 48초 지점) (왼쪽) 1954년 2월 17일, 제40보병사단. 패튼 전차를 타고 퍼레이드하며 공연장으로 이동하는 마릴린 먼로 (<영상 B> 50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6일, 여의도 비행장에서 첫 공연장으로 향하기 위해 헬리콥터로 옮겨탄 모습. 이 순간에도 다리를 내밀고 포즈를 잡는 모습 (<영상 B> 5분 19초 지점) 마릴린 먼로의 다시 없을 순간 이번에는 마릴린 먼로의 입장에서 바라보자. 이 순간 마릴린 먼로가 미국의 배우이자 엔터테이너로서 국가를 위해 충성한 군인들을 위해 본분을 다 한 것이었다면 ‘프로’로서 존경할 만하다. 하지만 그녀의 때로는 지적이고 때로는 충동적인 발언들, 그녀에 관한 여러 전기들을 보면 그렇게 단순하게만 볼 일은 아니다. 이런 시각은 어떨까? 그녀의 모든 발언은 늘 오해를 살 만 했다. 진심이 립 서비스로 받아들여지거나 화제성을 노린 발언으로 곡해되기 딱 좋은 유형의 사람이었다. 여의도공항에 도착해서 수백명의 군인들을 보고 한 유명한 발언, “내 평생 이렇게 많은 남자를 본 적이 없어요. 남편도 왔으면 좋았으련만.”은 자신의 관능적인 이미지를 활용한 의도적 발언으로 보이기 쉽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이번 여행은 여러모로 제 커리어의 정점이에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제가 영화 스타라고 느꼈어요.”라고 말한 것도 스타의 의례적인 발언처럼 들린다. 하지만 공적인 발언에 소심하게 내면의 결핍을 드러내곤 하던 그녀의 성향에 주목한다면 모두 다른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녀가 지인들에게 한, 좀 더 내밀한 발언을 들어보자. “스타라고 느껴본 적이 없었어요.” 그녀는 미국으로 귀환한 후 자신의 무용 선생인 로테 고슬라르(Lotte Goslar)에게 말했다. “정말 진심으로, 한국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어요. 그 많은 젊은 친구들이 웃으며 나를 보는 것을 내려다보는 것이 너무 좋았어요. 내가 필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것을 느꼈어요.” [17] “7만여 명의 군인들이 내 앞에서 목이 터져라 환호하는데...” 먼로는 각본가이자 감독인 벤 헤크트(Ben Hecht)에게 말했다. “...그저 행복뿐이었어요. 집에 온 느낌처럼 .”(“I only felt happy. I felt at home.) [18]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에서 군인들과 즐거운 한 때. 다친 오른손 엄지손가락은 신혼여행 출발 때부터 남편의 폭행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19] (<영상 B>, 31초 지점) 이렇듯 가장 뜨거운 대중적 인기를 모으고 있는 여배우이면서도 관심과 애정을 갈구했던 28살의 젊은 마릴린 먼로에게는 어쩔 수 없이 혼란스럽고 비극적인 앞날이 겹쳐 보인다. 극단적 상황 속에서 지칠 대로 지쳐 있던 군인들이 보인 맹목적이면서 순수해 보일 정도의 격렬한 애정표현은 역설적으로 마릴린 먼로의 결핍된 정서를 보듬어 줬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적어도 기록영상에서는 성욕이든, 갈증이든, 관심이든 뭐든, 구분하기 어려운 혼란과 결핍상태에 놓여 있던 같은 처지의 군인들과 여배우가 이 짧은 며칠동안 서로를 위로했다고 느껴진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사실은 영상 중 한 슬레이트에서 ‘Marilyn Monroe + ME’라는 문구를 보고 촬영자가 벅차는 마음으로 ‘마릴린 먼로와 나(ME)’라고 적었을 것이라고 넘겨 짚었다. 지금이야 그럴 리 없다, 이것이 군 오락(Military Entertainment)과 같은 다른 용어의 약어일 것이다, 등으로 생각하지만 말이다. 그 정도로 영상 속에서 군인들과 여배우의 소위 ‘케미’는 끈끈해 보인다. (왼쪽) 1954년 2월 16일, 제7보병사단의 탈의실 또는 대기실 입구에서. ‘마릴린, 총검사단의 연인(SWEETHEART of the BAYONET DIVISION).’ (<영상 A>, 3분 27초 지점) (오른쪽)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 슬레이트, ‘Marilyn + ME’ (<영상 A>, 16초 지점) 1954년 2월 17일, 제3보병사단 무대에서. (왼쪽: <영상 A> 1분 25초 지점. 오른쪽: <영상 A> 1분 15초 지점) 1954년 2월 18일, 제2보병사단 무대 ‘Bulldozer Bowl’에서. (각각 <영상 C> 4분 1초, 3분 41초 지점) 그리고 여배우들의 인생선이 교차한 순간 마릴린 먼로의 이 역사적인 내한공연은 한국어 콘텐츠에서 보통 다음의 두 가지 꼭지로 소비된다. ‘세상에, 마릴린 먼로가 한국에 왔었다고?’ 아니면 ‘마릴린 먼로가 최은희 와 만났던 것 알아?’. 사실 두 나라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이 여배우들의 만남에 대해서는 어떤 맥락도 찾기 어렵다. 심지어 국내 신문에서도 딱히 보도된 기사를 발견하지 못했다. 이 만남은 일정 마지막 날인 19일, 대구 동촌비행장(K-2 공군기지)에서 이뤄졌다. 이 순간은 <영상 A>에 기록돼 있는데, 이로부터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이 영상은 슬레이트 외에는 매우 어둡게 찍혀서 처음에는 인물이 잘 식별되지 않았다. 보통 이런 경우는 아무리 조명 부족 등의 여건을 감안하더라도 실제로 새벽이나 늦은 저녁 등 어두운 시간대에 찍혔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럴 때 시간대를 반영하면서도 내용이 잘 식별되고 현실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도록 색상을 보정하는 것이 바로 기록영상 색보정의 핵심이다. 색보정 후에 비로소 마릴린 먼로 양 옆에 나란히 서서 카메라를 보고 포즈를 취하고 있는 영화배우 최은희, 연극배우 백성희 의 모습을 알아볼 수 있었다. 사진으로 널리 알려진 바로 그 장면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내외를 막론하고 잘못 퍼져 있는 대표적인 정보 중 하나를 확실히 검증할 수 있게 됐다. 이 대구 장면은 이따금 잘못 안내되는 것처럼 최은희 등이 마릴린 먼로의 ‘입국’을 환영하기 위해 마중 나온 장면이 아니라, 마지막 일정을 앞두고 대구에 도착한 마릴린 먼로를 맞이하러 온, 크게 보면 수일 동안의 공연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환송의 의미로 나온 장면이다. 심지어는 이 장면의 장소를 여의도공항으로 오인하는 내용도 은근히 많이 보인다. 아마도 마릴린 먼로가 군 수송기에서 내리는 모습이 담겨 있어서 이 모든 오해가 시작됐을 듯 하다. 하지만 여러 소스를 교차 검증하고 전체 맥락을 살펴보면 사실이 명확해진다. 1954년 2월 19일, 대구 K-2 공군기지에서. 슬레이트(<영상 A> 4분 35초 지점) 및 세 배우가 함께 한 모습(<영상 A> 5분 18초 지점) 영상에서 마릴린 먼로는 군용기에서 내려와 카메라를 든 수많은 헌병에 둘러싸여 환대를 받는다. 그러고는 환영 인파에 포함돼 있던 두 배우를 만나 함께 팔짱을 끼고 촬영 시간을 가진다. 이때 관계자로 보이는 한국인 중년 남성이 둘 보이는데, 이중 하나가 마릴린 먼로에게 무어라 말하자 ‘Thank you’라고 말하는 입모양이 보인다. 아마도 한국의 두 배우가 마중 나왔다는 설명을 들었을 듯하다. 이 남성들의 존재로 인해 이 만남이 배우들의 의사보다는 어떤 이유로 기획된 것이었다고 추정할 수 있다. 일정 내내 처음 보는 군인들과 놀랍도록 친밀한 모습을 보였던 그녀도 이 순간에는 딱히 긴 대화를 나누지 않고 데면데면한 모습을 보인다. 이 짧은 장면 이후는 그녀가 주변의 전투기 날개에 올라 원래 그렇듯이 포즈를 취하며 카메라 촬영에 응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이 시기의 백성희 배우에 대해서는 의미 있는 정보를 찾을 수 없지만, 최은희 배우는 이때 자신의 여섯 번째 출연작인 신상옥 감독의 < 코리아 >(1954) 촬영이 끝났거나 막바지 단계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코리아>는 신상옥 감독의 두 번째 작품으로서, 한국의 각 명승지와 관련된 고사를 극화하여 엮은 문화영화였다. 신상옥 감독은 이 영화를 1952년부터 제작에 착수해 1954년 5월 1월에 개봉하게 되는데, 이때의 인연으로 1954년에 최은희와 결혼한다. 해방 공간에서 신예 영화인으로 주목받던 최은희는 전쟁기를 거치며 여러 가지 사건으로 배우로서의 경력과 개인사 모두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 돌이켜 보면 <코리아>는 신상옥, 최은희 부부에게 앞으로 펼쳐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영화같은 인생 역정의 출발점이었다. 마릴린 먼로와의 뜬금없는 만남에 대해 구체적인 맥락이 밝혀지지 않은 상황에서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지만, 둘의 인생 역정에서 꽤나 비슷한 시기에 조우했다는 생각은 든다. *** [1] 마릴린 먼로의 마지막 인터뷰 중 발언이다. 원어로는 “ Please don’t make me a joke. ”로서, 의미는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으나 선정적 이미지나 가십거리로 자신을 단순화하고 규정해 온 언론과 대중에 대한 마지막 호소로 읽힌다. [2] Liesl Bradner (2026. 2. 18), When Marilyn Monroe Interrupted Her Honeymoon to Go to Korea , HistoryNet Retrieved from https://www.historynet.com/when-marilyn-monroe-interrupted-her-honeymoon-to-go-to-korea/ [3] 컬렉션 사이트의 검색 필터 중 ‘미군위문협회(USO)’를 선택하면 이 영상들이 조회된다. [4] 원 소장처의 local ID로 구분하면, (A)는 111-LC-35128, (B)는 111-LC-35129, (C)는 111-LC-35130이다. [5] 제1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와 스틸사진들이 존재한다. [6] 제24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됐다. 24, 25보병사단의 방문 순서는 알 수 없다. [7] 제45보병사단 방문 장면은 영상에 기록되지 않았으나 신문보도 됐다. [8] 핀업걸(Pin-up girl)은 매력적인 여성을 촬영한 사진이나 여성을 묘사한 일러스트레이션 또는 이를 활용한 잡지나 달력 등을 말하며, 주로 벽에 핀으로 고정하고 감상하던 것에서 유래한 명칭이다. 제2차 세계대전기부터 군인들을 중심으로 유행했으며, 이후에도 남성 중심의 작업장 등에서 흔히 볼 수 있었다. 마릴린 먼로는 미군 기관지 Stars & Stripes 에서 선정한 ‘1951년 미스 치즈케이크’(치즈케이크는 핀업걸의 은어임)였다. [9] 남성 중심의 군대에서 여성의 신체를 대상화하는 문화 자체를 비난하는 것은 충분히 가능하나, 정치적 올바름을 위해 아키비스트가 실존하는 과거의 기록과 현상을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윤색할 수는 없다. 이 글은 ‘바람직함’에 대한 논고가 아니라 시대적 맥락 속에서 미군과 마릴린 먼로가 어떤 결핍 상태에 놓여 있었으며 서로를 어떻게 바라봤는가에 대해 주목한 것임을 밝힌다. [10] 미 육군의 TV시리즈 The Big PIcture 중 < USO - Where ever We Go >는 USO의 탄생 배경과 취지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 “군인이 자신이 속했던 민간사회(old civilian)와의 연결을 유지하는 것이 사기를 위해 중요한 것임을 미군 당국도 알고 있습니다”, “USO는 고향의 사람들이 당신을 잊지 않았으며 신경쓰고 있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군인과 민간의 삶을 연결지어 주는 곳입니다.” [11] Liesl Bradner, 앞의 글 [12] The Daily Record . (Dunn, NC), Feb. 23 1954. [13] 필자 개인의 인상이 포함됐으며 어쩌면 ‘군인과 꽃’ 클리셰를 바라보는 시각과 유사한 안이한 해석일 수도 있다. [14] 정확히 말하면 끈 없는 드레스(strapless dress)는 아니다. 얇은 끈의 드레스를 수사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15] The Daily Record . (Dunn, NC), Feb. 17 1954. [16] The Key West citizen . (Key West, FL), Feb. 18 1954. [17] Liesl Bradner, 앞의 글 [18] Liesl Bradner, 앞의 글 [19] Spoto, Donald. 2001. Marilyn Monroe: The Biography . New York: Cooper Square Press. Originally published New York: Harper Collins, 1993. p.262.
한국영화의 못다 한 이야기는 인물들이 살아가는 '도시 공간'에서 계속되기도 합니다. 조금의 시차는 있지만, 카메라가 남긴 이미지와 함께 그 이야기를 돌아봅니다. 영화감독의 투신자살 시퀀스로 담긴 충격적인 영화가 있다. 심지어 연기한 사람은 해당 영화의 감독( 이장호 ) 본인이다. 마지막 장면에서는 주인공들이 웃통을 벗어 던지고 국회의사당에서 기괴한 춤을 추며 영화는 막을 내린다. 바로 1984년 개봉작, 영화 < 바보선언 >의 도입부와 결말이다. 개봉 연도를 보면 금세 눈치챌 수 있듯이, 이 영화는 제5공화국 전두환 독재 정권의 악행이 가장 극에 치달을 때 제작되고 개봉된 영화이다. 이 영화에 대한 비평을 검색해 보면, 이 영화는 서슬 퍼런 정부의 검열을 피하여 어떻게든 작품을 세상에 내놓기 위해 ‘자포자기한 상태(김동원, 2008)’에서 만들어진 괴작이자 걸작이라는 평이 대다수이다. 검열을 피하고자 극의 내용을 처음부터 끝까지 기행으로 채워놓고, 촬영조차도 기행 그 자체였던 사실 덕분에 역설적으로 1980년대 초반,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이라고는 상상하기 힘든 초현대적인 함의와 시사점을 주는 영화가 탄생한 것이다. 물론, 신군부 검열 당국이 풍자와 해학에 조예가 깊었거나, 혹은 영화를 보는 눈(교양)을 더욱 갖췄더라면 이 영화 또한 가위질을 당했을 수 있었겠으나 천만다행으로 그러지 못했던 듯 하다. 덕분에 우리는 1980년대 초반 서울을 중심으로, 비인간적인 현대사회(혹은 정치 환경)에서 소외당한 이들이 거니는 한국의 도시공간을 ‘괴상한 시각’으로 2024년 지금 이 시점에서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는 어떤 공간이 어떤 시각으로 담겨져 있는지 주요 장면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자. 하월곡동 빈민가 영화의 인트로는 주인공인 동칠( 김명곤 )이 하월곡동 빈민촌 주거지를 걸어 내려오는 시퀀스로부터 시작된다. 수 초 동안 마을 주민들이 마치 축제와 같이 왁자지껄하게 노는 모습을 카메라는 잠시 비추는데, 이 영화에서 ‘인간적인 도시공동체’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등장하는 사실상 마지막 장면이라 보아도 무방하다. 다리가 불편한 동칠이지만, 수많은 자동차가 오고가는 큰길에는 횡단보도가 없기 때문에 육교를 지나가야만 한다. 40년이 지난 지금, 이 지역들에서는 재개발이 활발히 이뤄지고 있으며 영화 속에 담긴 야트막한 서민 주거지의 모습은 머지 않아 완전히 사라질 지도 모른다. 도입부에 등장하는 하월곡동 빈민가.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모하였다. 하월곡동의 아이들과 어르신들이 한데 모여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모습. 이 영화를 통틀어서 가장 '인간적인' 장면일지도 모른다. 명동과 을지로입구 아마 동칠은 영화 속에서도 잠시 비춰진 8번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한 것일까, 다음 시퀀스에서 카메라는 명동과 을지로입구 일대를 비춘다. 깔끔하게 정리된 길가, 산뜻한 중형차(현대 그라나다), 고동빛깔의 미도파 백화점과 갓 개업한 롯데백화점 본점과 누가 봐도 썩 세련되지 못한 모습의 동칠은 내내 부조화를 이룬다. 카메라가 미도파와 롯데백화점을 올려다보는 씬은 영화 < 오발탄 >(유현목, 1961)에서 주인공 철호( 김진규 )가 이 부근을 걷는 씬을 연상케한다. 촬영 각도와 흑백·컬러 여부가 다르긴 하지만, 소외되었거나 불쌍한 시민과 화려한 서울 속 백화점 간의 대비만한 극적인 표현 수단이 또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드는 장면이다. 끊임없는 자동차의 행렬과 미도파 백화점(좌측), 롯데백화점 명동본점(우측)이 추레한 차림의 동칠 뒤편을 장식한다. 당대 최고급 승용차였던 현대 그라나다와, 명동 거리를 정처없이 누비는 동칠의 조우. 이대 앞과 신촌 이윽고 동칠은 청계5가 부근의 어느 빌딩에서 투신한 의문의 영화감독의 옷가지와 장신구 등을 탈취한다. 카메라는 빌딩의 옥상에서 청계고가도로와 그 인근 평화시장을 훑다가, 이화여대 정문 앞 번화가를 타임랩스로 추적한다. 장장 1분 동안 이어지는 이 시퀀스는 40년이 지난 지금 보아도 감탄을 절로 자아낼 정도로 지극히 현대적이다. 일부러 간판과 옷차림과 자동차만을 옛날 것을 가져다가 요즘 찍었다고 해도 믿을 정도로, 1983년의 이대 앞은 40년의 세월을 순식간에 건너뛰어 2024년 시청자의 눈동자에 내리꽂힌다. 나아가 이대 앞의 상권은 육교에서 동칠이 한눈에 반한 ‘가짜 여대생’ 혜영( 이보희 )이 도시적인 소비를 마음껏 누리는 공간으로서 그 역할을 부족함 없이 해낸다. 실은 매춘부이지만 그림 같은 대학생의 생활을 동경하는 혜영과, 그 뒤를 쫓는 동칠, 그리고 이 둘을 포착하는 카메라를 통해 우리는 1983년의 대학가 상권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하게 된다. 번화하기 그지 없는 이화여대 정문 앞의 풍경. 지금도 분위기도 크게 다르지 않다. 이대 앞 골목을 누비는 여대생들과 차량의 행렬. 40년이 지난 지금 같은 장소에서 같은 구도로 이 씬을 재현하면 어떨까. 이런 혜영을 어떻게든 납치하고자 하는 동칠은 우연히 마주친 자동차 정비공인 육덕( 이희성 )의 택시에 올라타는데, 여기서 등장하는 포니 택시가 이대 앞과 신촌 기차역 앞을 위험천만하게 종횡무진하며 사실상 카 체이스와 비슷한 활약을 펼치는 점도 볼 만한 부분이다. 16분 언저리에 누가봐도 교통 통제라곤 없이 이대 정문으로 포니 택시가 돌진하는 씬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저거 무슨 짓인가?” 싶을 정도로 제법 긴박한 느낌을 준다. 이대 정문으로 돌진하는 육덕의 택시. 깜짝 놀란 학생들과 달려나온 경비원의 모습이 뚜렷하게 담겼다. 청량리역 앞 광장 40분부터 45분까지 장장 5분 동안, 이번에는 청량리역 앞 광장에서의 시퀀스가 이어진다. 이대 앞 시퀀스가 그랬듯이, 제법 멀리서 망원렌즈로 인파 사이를 종횡무진하는 주인공들을 담아내는 데에 여념이 없다. 어떻게든 ‘장사’를 하려고 남자에게 접근하는 혜영, 허기진 배를 채우려고 고군분투하는 동칠과 육덕의 씬이 교차되는 와중에, 이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제 갈 길을 가는 인파의 모습은 한 편의 역전 광장 다큐멘터리처럼 다가오기도 한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영화 속 모습이 거의 그대로 유지되었지만, 지금은 화려하기 그지 없는 롯데백화점과 코앞에 들어선 200미터급 초고층 주상복합, 현대적인 버스 승강장으로 인해 이 시절의 모습은 거의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당시에 갓 등장했던 패스트푸드 체인점인 롯데리아의 광고, 청량리역 맞은편의 미주아파트와 그 상가건물의 모습만이 40년 전과 지금을 이어주는 매개체로 여겨진다. 망원으로 담아낸 청량리역 앞 광장 씬. '장사' 대상을 물색하는 화면 정가운데의 혜영 너머로 지하철 출입구가 눈에 들어온다. 당시의 고급 유행 식품이었던 롯데리아를 하염없이 바라보는 육덕과 동칠의 뒷모습. 태안군 연포해수욕장 동칠과 육덕, 그리고 혜영은 매춘부의 거주지에서 도망쳐 나와 충남 태안군의 연포해수욕장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낸다. 아마도 이 셋은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사이 좋게 버스를 타고 태안으로 향했을 것이다. 54분경, 즐겁게 뛰노는 세 사람의 머리 위로 큼지막하게 비춰지는 ‘연포해변무대’라는 여섯 글자는 이 곳을 찾지 않았던 이라 할지라도 단박에 촬영장소를 캐치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지금도 야외 무대는 리뉴얼을 거쳐서 그대로 존속하고 있으며, 부근에는 이 영화의 촬영 기념비까지 세워져 있다고 하니, <바보선언>의 ‘성지순례’ 코스로서 안성맞춤아라 할 수 있겠다. 연포해수욕장의 야외무대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세 사람.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 혜영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후, 동칠과 육덕은 대관령의 목장에서 그들의 방법으로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슬픈 ‘장례’ 의식을 치러준다. 그리고 이 둘은 비가 쏟아지는 국회의사당 앞, 여의도 광장에서 또다시 우스꽝스러운 춤을 추며, 막판에 이르러서는 웃통까지 벗어 던진다. 이대 앞과 청량리역 앞 광장에서 그랬듯이, 이 장면도 사전에 촬영 허가 없이 기습적으로 찍은 것으로 전해진다. 물론 이런 장면을 찍겠다고 사전에 촬영 허가를 낸다고 해서, 수리될 가능성은 0에 수렴할 것이다. 이 시퀀스는 사전 지식 없이 보더라도, 동칠과 육덕이 작중에서 겪어 온 부조리함과 그에 기인한 울분을 국회의사당으로 대표되는 ‘국가’를 향해서 남김없이 토해내는 의미로 단박에 이해될 수 있는 ‘명장면’이기도 하다. 이 영화를 촬영할 당시의 제11대 국회에는 야당다운 야당이라곤 일절 존재하지 않았으며, 전두환이 속한 여당 민주정의당과, 국가가 개입한 ‘관제 야당’만이 존재하던 시절이었다. 그런만큼 이 시퀀스는 더더욱 그 의미가 깊다고 할 수 있겠다. 군사정권의 거수기 역할을 하던 제11대 '괴뢰 국회' 앞에서 반라의 광기를 보여주는 동칠과 육덕의 뒷모습. 이상으로 꼭 40년 전에 개봉한 영화, <바보선언>의 주요 공간을 짧게나마 돌아보았다. <바보선언>은 감독 스스로가 평했듯이 제대로 ‘각을 잡고’ 찍은 것이 아니라 군부독재와 검열이라는 사회적 한계를 어떻게든 비집고 들면서 제작된 덕분에, 당대의 공간적 배경이 오히려 더욱 생생하게 꾸밈없이 담겨진 영화가 되었다. 40년 전과 비교하여 물질적으로 엄청난 성장을 이루고, 도시 곳곳이 말끔하게 새단장을 거친 지금이지만, 영자원 한국고전영화 유튜브 채널 에 올라온 이 영화의 덧글란에 ‘걸작’이라는 상찬이 계속해서 달리는 것은 분명 이 영화가 지금의 우리 사회에도 깊은 울림을 준다는 뜻일 것이다. 참고문헌 김동원, “ 사전검열이 만들어낸 명작 <바보선언>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2008. 9. 2. 김성욱, “ [한국영화걸작선]바보선언 ”, 한국영상자료원 한국영화데이터베이스(KMDb) 홈페이지, 2012. 11. 28. 김영준(도시공학 연구자) ㅣ일본 도쿄대학에서 일제강점기 서울의 도시계획사로 박사학위 취득 후, 연구원으로 일하며 ' 서울의 현대를 찾아서 '라는 필명으로 도시 경관을 기록해오고 있다. 영화의 또 다른 '등장인물'이라 할 수 있는 배경 속 도시 공간을 읽어내는 법을 계속해서 탐구한다. 『영화와 서울: 영화로 보는 도시 공간』(2022), 『새시각 #01 : 대전엑스포'93』(2021) 집필(공저).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한국 영화평론가가 '한국'영화를 대하는 법) 이 원고를 청탁받은 날, 나는 영상자료원 시네마테크KOFA에서 열리는 대담에 참여했다. “ 1990s 시네마테크의 필름들 ” 기획전의 일환으로 진행된 “1990s 시네필 대담 part 2”라는 제목의 대담이었다. 하길종 의 < 화분 >(1972)의 상영 뒤, 1990년대 사설 시네마테크를 운영했던 시네필과 1990년대생 영화평론가 사이의 대화를 만들고자 했다. 준비해 간 질문 중 하나를 옮겨보자. “이번 기획전 상영작을 보고 있자면 90년대 비디오테크에서 상영된 영화들이 지금은 영화사의 ‘정전’으로 다뤄지는 영화들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타르코스프키, 고다르, 파스빈더, 앙겔로풀로스 뿐 아니라 데이비드 린치나 그리너웨이, 오시마 나기사처럼 당시엔 일정 부분 ‘컬트’로서 소화되던 감독과 영화들도 지금의 관점에서는 영화역사의 만신전에 오른 이름들이라고 생각되는데요. 오늘 대담과 붙여서 상영된 하길종의 <화분>은 하나의 예외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중략) 이번 기획전에 <화분>이 포함된 것은 90년대 시네필들이 단순히 영화 교과서에 수록된 정전들을 직접 감상하는 것을 넘어 적극적으로 영화를 (재)발굴 혹은 (재)발견하려 시도했음을 드러내는 것만 같습니다.” 기획전의 라인업을 보며 느꼈던 의문 중 하나를 옮긴 질문이라 할 수도 있겠다. 나만 그런 것인지 모르겠지만, 타르코프스키, 고다르, 파스빈더 등의 이름과 함께 하길종을 배열하는 것은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진다. 상영작이 꼭 <화분>이었기 때문은 아니다. 저 자리에 < 바보들의 행진 >(하길종, 1975)을 놓았더라도, 이만희 의 < 휴일 >(1968)이나 김기영 의 < 하녀 >(1960)을 놓았더라도 어딘가 어색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한국어로 글을 쓰며 한국어로 말하고 한국영화를 상대하는 한국의 영화평론가로서, 한국영화는 어딘가 이상한 존재처럼 다가온다. 한국영화라는 이름 뒤에 무엇이 따라붙든 간에 그것을 어색하지 않게 납득하는 것은 아마 이뤄지지 않은 일일 것이다. 한국영화란 무엇일까? 한국에서 만들어진 영화? 한국인이 만든 영화? 한국 자본이 투입된 영화? < 패스트 라이브즈 >(셀린 송, 2023)에서 노라(그레타 리)는 남편에게 해성( 유태오 )을 설명하며 “Korean”이라는 단어를 아홉 번 사용한다. 그의 대사 속 한국인은 “평범한 직업과 평범한 삶을 사는 어른이 여전히 부모님과 함께 사는 것”이고, 한국계(Korea) 친구와는 다른 한국인(Korean) 친구인 한국인-한국인(Korean-Korean)이다. 이 대사에서 느껴지는 뭔지 모를 반발감 혹은 어색함이 한국영화를 대하는 나, 동료 평론가들, 그리고 온라인상의 무수한 글로써 존재하는 시네필들이 한국영화에 대해 갖는 어떤 공통감일지도 모른다. <패스트 라이브즈> 중 대담으로부터 일주일 뒤 한국영상자료원의 ‘ 한국영화 100선 ’ 발표가 있었다. ‘영화를 보는 사람’ 171명과 ‘영화를 만드는 사람’ 69명이 참여한 이 리스트를 통해 한국영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 순위가 공개된 10편의 영화 중 절반이 21세기 영화이며, 봉준호 , 박찬욱 , 이창동 이라는 세 명의 이름뿐인 이 리스트를 두고 한국영화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리스트에 오른 100편의 영화를 전부 본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나 또한 10편의 영화 를 적어서 보냈지만, 그 영화들이 한국영화에서의 ‘한국’을 구성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영화들은 한국의 파편들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며, 한국영화라는 전체는 그 파편들의 집합을 통해 구성될 수밖에 없다. 케이팝을 필두로 무분별하게 난발되고 있는 접두사 “K-”가 결국 그 모든 파편의 집합일 수밖에 없는 것처럼. 영화평론가의 일상과 비평에 관한 생각을 터놓는 지면에서 갑자기 왜 한국영화 이야기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나는 한국의 시네필들이 한국에 별로 관심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건 나의 자기반성이기도 하다. 단지 영화제에서 한국영화를 후순위로 미뤄두고, 극장에 걸리는 한국영화들을 해외 영화들만큼 열심히 챙겨보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다. 한국영화에서 한국이 무엇으로 구성되고 재현되는지, 그것은 항상 이야기 바깥에 놓여 있는 것이었다. 함연선 마테리알 편집인의 “ 비천한 영화를 위하여, 그중에서도 한국영화 ” 발표 녹취록을 보고 있자면, 그리고 그 위에 2024년 버전의 ‘한국영화 100선’을 겹쳐 놓는다면, 한국영화는 마치 과거에 존재했다가 사라진 뒤 봉준호와 박찬욱에 의해 부활한 것만 같다. 그리고 무수한 ‘비천한’ 영화들이 누락되어 사라진다. 나는 이 ‘비천한’ 영화들, 함연선의 발표에서 등장한 <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 >(곽재용, 2004)와 < 달마야 놀자 >(박철관, 2001)를 포함한 일련의 조폭 코미디를 포함해, < 마파도 >(추창민, 2005), < 중천 >(조동오, 2006), < 고사: 피의 중간고사 >(창, 2008)처럼 지금은 누구도 이야기하지 않을 영화들이 나의 ‘비천한’ 한국영화의 리스트를 채우고 있다. 이 영화들이 얼마나 비천하고 구리며 지루하건 간에, 이 영화들은 한국을 담아내는 것으로서 보였다. 한국영화라는 하나의 장르 속에서, 한국은 영화적 장소로 기능할 수 있었다. 그것이 설령 불쾌함을 자아내는 것일지라도. 지금의 한국영화들은 그것의 반대로 향하고 있다. 작년과 올해 개봉한 영화들을 떠올려 보자. < 밀수 >(류승완, 2023)는 극 중 등장하는 지도상 군산을 배경으로 삼고 있음이 명백함에도 ‘군천’이라는 가상의 지명을 사용한다. 소재만 바뀐 같은 영화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 모가디슈 >(류승완, 2021), < 교섭 >(임순례, 2020), < 비공식작전 >(김성훈, 2022)은 한국의 바깥에서 한국을 찾아내려는 기묘한 시도를 선보인다. 이들 영화에서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레바논이라는 각기 다른 중동 국가는 한국에서 폐기된 것처럼 느껴지는 ‘야만성’을 간직한 곳으로서, 한국과 대비되는 야만의 땅으로서 묘사될 뿐이다. 아예 지구 바깥으로 향하는 < 더 문 >(김용화, 2023)이나 국가 자체의 구분이 무의미한 미래를 그리는 < 정이 >(연상호, 2022)와 같은 영화들은 한국이라는 장소에 영화가 묶여있고 싶지 않다는 의지 표명에 가까워보인다. <중천>, <모가디슈> 중 <경마장 가는 길>, <괴물> 중 ‘한국영화 100선’의 리스트를 작성하며, 나는 두 편의 영화에 다음과 같은 코멘트를 덧붙였다. “한국영화가 한국을 찍는 방법,” "충무로가 한국을 영화적 장소로 대했던 마지막 순간." 전자는 장선우 의 < 경마장 가는 길 >(1991)이고, 후자는 봉준호의 < 괴물 >(2006)이다. <경마장 가는 길>을 보며 우리는 90년대 서울의 풍경을, 붉은 십자가로 가득한 야경과 무너지기 이전의 삼풍백화점과 사람으로 가득해 “산책이 노동이 된” 길거리를 목격할 수 있다. <괴물>을 보며 여의도 한강공원의 풍경을, 합동분향소와 한강의 매점을, 일상의 풍경이 순식간에 장르적 장소로 변화하는 순간을 목격할 수 있다. 한국영화의 장소가 해외 로케이션으로, 그린스크린으로 옮겨감에 따라 사라진 풍경들, 길을 걷고 뛰는 사람들. 물론 지금의 영화들에 그런 풍경이 사라졌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 여름날 >(오정석, 2019)의 거제도, < 아워 미드나잇 >(임정은, 2021)의 서울, < 아워 바디 >(한가람, 2018)의 한강공원, < 썬더버드 >(이재원, 2021)의 정선과 같은, 여전히 사람들이 걷고 대화하며 싸우고 도망치고 뒤따를 수 있는 영화적 풍경으로서의 한국은 여전히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충무로가 그것을 잊어버렸다는 인상을 반복해서 주고 있을 뿐이다. 물론 한국에서 활동하는 영화평론가이기에 한국영화에 관해 말해야 한다는 의무가 존재한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내셔널 시네마의 기획을 재차 가져와야 한다고 말하려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한국에서 살아가며 한국어를 사용하는 사람으로서, 내가 발 딛고 살아가는 공간을 담아내는 영화를 보고 싶다는 단순한 욕망이 있다. 앞서 언급한 영화들과는 다른 예시일지도 모르지만, 엄태화 의 < 콘크리트 유토피아 >(2023)는 포스트 아포칼립스라는 장르적 틀 안에서 서울의 이미지를 드러내는 데 일정 부분 성공한다. 이것은 마치 “더 라스트 오브 어스 파트 2”(2020)나 “호라이즌 제로 던”(2017)과 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게임에서 시애틀이나 샌프란시스코라는 도시의 흔적을 발견하는 것과도 유사하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지진 이전의 서울을 아주 짧게만 보여준다. KBS의 아카이브 다큐멘터리 <모던 코리아> 제작진이 참여한, 한국 아파트의 역사를 짧게 보여주는 푸티지 영상은 아파트로 뒤덮인 서울의 풍경으로 이어진다. 이윽고 저 멀리서부터 마치 밭이 갈리듯 땅이 뒤집히기 시작한다. ‘도큐먼트’로서의 아파트 이미지와 CGI로 그려진 아파트 숲의 연결은, 비록 그것이 완전한 폐허를 그려낼 뿐인 그린스크린 촬영의 결과물일지라도 연속성을 지닌다. 아주 짧게만 등장하는, 민성( 박서준 )이 대지진을 목격하는 장면을 떠올려 보자. 그곳은 지하철 3호선 금호역과 약수역 사이의 도로로, 실제 도로의 건물들을 스캐닝하여 제작되었으며, 저 멀리서 장충체육관의 건물이 날아오는 것을 볼 수도 있다. <콘크리트 유토피아> 중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그려내는 세상은 모두 세트와 그린스크린 촬영을 통해 제작되었으며 로케이션 촬영이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따라서 이 영화를 두고 ‘영화의 다큐멘터리적 기능’을 이야기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 이 영화는 <경마장 가는 길>이 그러한 것처럼 1990년대 초 종로의 길거리와 서초동의 모습을 담아내지도, <괴물>이 그러한 것처럼 2000년대 중반의 한강공원을 담아내지도 않는다. 다만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실제의 지리적 공간을 끌어와 장르적 장소로 재가공한다. 물이 말라버린 한강 바닥에 넘어져 있는 동호대교, 금호동의 황궁아파트에서 한강을 건너 마주한 압구정의 백화점, 아파트에서 도망친 민성과 명화( 박보영 )의 뒤로 보이는 구 서울역과 그들이 도착한 명동성당. 물론 이 이미지들은 (서울역 정도를 제외하면) 명시적인 이미지로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그 공간들을 익히 알고 있으며 서울의 지리정보를 알고 있는 사람에게만 그 공간들이 드러날 뿐이다. 당장 비슷한 (그리고 같은 세계관을 공유한다고 처음엔 알려졌었던) < 황야 >(허명행, 2023)를 떠올려보면, <콘크리트 유토피아>에서 작동하는 지리학이 보다 구체적임을 감지할 수 있다. 나아가 지난 몇 년 간 재개발 이슈가 존재해온 금호동의 맥락을 알고 있는 사람에게, 황궁아파트의 생김새 자체가 익숙한 이미지로서 다가오기도 한다. 지난 60년 동안 아파트는 한국영화의 중요한 장소였다. *주1 아파트는 성공의 트로피이자 욕망의 대상이었으며, 중산층 거주 형태의 기본형이자 일상의 장소였고, 종종 비밀스럽고 두려운 사건들이 발생하는 장르적 장소였다. 영화 속 아파트의 모습, 아파트가 그려지는 방식을 상상하는 것은 한 편의 영화가 그려내는 시대상을 압축적으로 묘사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포스트-아파트-아포칼립스라 부를 수 있을법한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오래된 아파트와 신축 아파트가 바로 옆에 붙어 공존하는 서울의 특수성을, 실제의 지리학 위에 펼쳐냄으로써 ‘한국’이라는 맥락을 획득한다. 나는 이 영화가 대단한 걸작이거나 수작이기 때문에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영화가 아파트로 상징되는 한국의 부동산 자본주의를 너무 단순하게만 바라본다고 생각한다. 다만 < 해운대 >(윤제균, 2009)나 < 곤지암 >(정범식, 2018)에서 실제의 지역을 분리해 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처럼, <콘크리트 유토피아> 또한 그렇게 하고 있을 뿐이다. 가상의 지명을 내세우고선 실제의 지도 위를 가리킨다거나 한국의 바깥에서 한국성이라는 것을 만들어내고자 하는 영화들과 달리, 어쨌거나 한국을 영화적 토양으로 삼아보려는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점에서 흥미로울 뿐이다.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비춘 아파트 그러니까 이 글은, 결국 한국영화가 뭔지 여전히 모르겠는데도 ‘한국의 영화평론가’라는 이름표로 활동하고 있는 누군가가 스스로에게 재차 질문하는 글이다. “K-”라는 접두사가 붙은 일련의 영화들 속에서, 한국형 블록버스터라는 이름 아래 한국을 벗어나고자 하는 영화들 사이에서, 이 비천한 영화들 안에서, 우리는 어떻게 한국을 발견할 수 있을까? *** 주1. 『아카이브 프리즘』 vol. 13, 한 국영상자료원, 60~82쪽. 박동수(영화평론가) l 보고 듣고 읽고 쓰는 일을 반복하는 사람. 2021년 독립영화비평상 당선. 한국독립영화협회 비평분과 회원.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