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녀목
- 감독
- 정진우
- 제작년도
- 1984
- 출연
- 원미경, 김용선, 박정자, 김희라, 전무송, 최병근, 홍성민, 임해림, 최재호, 박종설, 안진수, 김경란, 조정수, 전현숙, 나정옥, 윤일주, 이설산, 박예숙, 양춘
현재 열리고 있는 성대한 프로그램 ‘프랑수아 트뤼포 특별전’의 주인공인 프랑수아 트뤼포는 영화를 몹시 사적으로 대했던 연출자, 자신의 삶을 곧 영화로 만들고자 했던 연출자다. 그런 그의 태도를 기리며, 이 글에서는 평소보다 더 사심을 담아 트뤼포의 영화 세 편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혹은 ‘여자를 좋아했던 남자’ 트뤼포의 세 여자를. 공교롭게도 세 여자는 모두 범죄의 세계에 발을 들이고 있지만, 세 여자의 운명에 대해서는 염려하지 않으셔도 된다. 이건 트뤼포의 영화니까. 첫째, 〈 미시시피의 인어 〉 혹은 카트린느 드뇌브. 미리 말하자면 이 영화는 당대에나 지금이나 트뤼포의 수작으로는 거론되지 않는다. 하지만 고백하건대 이것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트뤼포 영화다. 일단 〈미시시피의 인어〉는 〈 비련의 신부 〉와 마찬가지로 미국 범죄 소설계의 거장이요, 밤과 서스펜스의 시인인 윌리엄 아이리시/코넬 울리치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가장 훌륭한 울리치 영화는 아니더라도, 〈미시시피의 인어〉에는 울리치 특유의 논리를 넘어서는 휘몰아치는 낭만이 존재한다. 또 〈미시시피의 인어〉는 트뤼포의 장편 연출작 중 유일하게 컬러 시네마스코프로 촬영한 작품이며, 이 형식을 과시하듯 사용한다. 60년대의 제임스 본드 영화처럼 극장의 큰 스크린에 가득 찬 이미지를 구경하는 호사를 누리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휴가용 영화’라는 이야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카트린느 드뇌브가 어마무시하게 아름답다. 물론 드뇌브는 〈셰르부르의 우산〉에서도, 〈 로슈포르의 숙녀들 〉에서도, 〈 세브린느 〉에서도 아름다웠다. 하지만 〈미시시피의 인어〉는 드뇌브를 향한 숭배 의식이나 다름없다. 더구나 그녀는 자신이 아름답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이에 대해 생색을 내거나 자의식적 윙크를 던지는 일도 없이 그저 ‘해는 동쪽에서 뜨고 나는 아름답지요’라고 말하는 듯 아름다움을 무심하게 발산해댄다. 이 드뇌브가 악당이라는 사실은 처음부터 명백하다. 그런데도 넘어갈 것인가. 말하자면 〈미시시피의 인어〉는 장-폴 벨몽도와 관객들을 상대로 카트린느 드뇌브라는 패를 보여준 채 벌이는 게임인데, 벨몽도와 우리는 알면서도 질 수밖에 없다. 둘째, 〈 나처럼 예쁜 여자 〉 혹은 베르나데트 라퐁. 베르나데트 라퐁은 이번에 상영되는 단편 〈개구쟁이들〉에서 개구쟁이들이 환상을 품고 흠모하는 묘령의 아가씨로 출연하는 배우로, 그 작품은 트뤼포의 첫 연출작인 동시에 라퐁의 첫 출연작이기도 했다. 그 후 15년 만에 두 사람이 재회하여 만든 영화가 〈나처럼 예쁜 여자〉다. 제목부터 뻔뻔한 이 영화에서 라퐁은 자신의 행실에 한 점 후회 없는 범죄자로 출연하여 자신을 연구하고자 하는 순진무구한 사회학자 앞에 속어를 쏟아내며 얼을 빼놓는다. 범죄자의 행적을 여러 개의 플래시백으로 재구성한다는 소재와 구조는 필름 누아르에서 온 것이지만, 그보다는 막스 브라더스나 바보 삼총사(Three Stooges) 유의 슬랩스틱 코미디, 루니툰 애니메이션, 그리고 장-뤽 고다르의 60년대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인공적이고 과장된 세계를 전면에 내세우는 코미디다. 베르나데트 라퐁은 이 안에서 거의 시종일관 달리고 있다는 인상을 받을 정도로 기운차게 고함을 지르고 질주하며 형형색색의 패션을 과시하고 모든 남자들을 때려눕힌다. 아드레날린과 깔깔거림을 원한다면 바로 이 영화다. 셋째, 〈 신나는 일요일 〉 혹은 파니 아르당. 〈신나는 일요일〉은 트뤼포의 유작이지만, 여기에서 억지로 죽음의 기운을 찾을 필요는 없다. 그런 영화가 필요하다면 〈녹색방〉을 찾아가시길. 이것은 트뤼포가 할리우드식 B무비의 기운을 불어넣고자 일부러 촬영을 재촉하며 경쾌하게 찍은 작품이다. 줄거리만 봐서는 여러 사람이 죽어 나가고 밤과 매춘과 폭력으로 얼룩져 있는 이야기이지만, 실제로는 범인도 잡고 연애도 하는 하워드 혹스 풍의 로맨틱 미스터리다. (시네마테크KOFA 단골 관객 여러분께서는 얼마 전 상영한 〈 빅 슬립 〉을 기억하시리라.) 여기서는 누구보다도 트뤼포가 마지막으로 사랑한 여자, 파니 아르당을 잊을 수 없다. 영화는 파니 아르당이 활기차게 길을 걷는 모습에서 시작한다. 바로 그 걸음걸이가 〈신나는 일요일〉의 주제나 다름없다. 아내를 죽였다는 혐의를 받고 있는 사장을 가게에 가둬둔 채 트렌치코트를 입고 돌아다니며 사건을 수사하는 흑발 비서의 모험담. 이 사랑스러운 소품을 통해 트뤼포는 흡사 자신의 스승인 알프레드 히치콕에게 반기를 드는 듯하다. 누명 쓴 사나이는 누명 쓴 채로 가만히 계시라. 차가운 섹스어필 가득한 금발 미녀도 안녕. 수다스럽고 활기찬 흑발의 비서가 나가신다! 그리고 히치콕식 범죄극으로 시작하여 혹스식 말다툼으로 발전하는 이 영화는 드뇌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잘 알고 있는 아르당의 패션쇼와 다리 과시를 거친 다음 문득 순진무구한 아이들의 장난을 바라보며 막을 내린다. 영원한 영화 소년 트뤼포의 마지막 인사로 이보다 더 어울리는 영화는 없으리라.
힘겨운 일상을 보내는 중년 여성들의 지친 삶과 발랄하고 분방한 소녀들의 삶이 교차되는 < 써니 >를 보노라면 떠오르는 시가 있다. “저 높은 빌딩의 숲, 국회의원도 장관도 의사도/ 교수도 사업가도 회사원도 되지 못하고/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밀쳐져서/ 아직도 생것으로 굴러다닐까/ 크고 넓은 세상에 끼지 못하고/부엌과 안방에 갇혀 있을까/그 많던 여학생들은 어디로 갔는가”라는 문정희 시인의 질문에 <써니>는 웃음과 눈물겨운 전복적 답을 보여주는 것만 같다. 이 작품이 품고 가는 80년대 대중음악과 춤을 타고 넘치는 에너지는 복고열풍과 더불어 관객의 적극적인 호응을 이끌어냈다. 전작인 < 과속스캔들 >에서 가족을 둘러싼 코믹정신을 폭발시켜 낸 강형철 감독의 연출 에너지는 <써니>로 시대결합과 세대전복을 유쾌하게 달성해낸다. 제3의 인류처럼 ‘아줌마’로 불리는 여자들. 그러나 그녀들도 한때 꿈을 가졌던 소녀들이었다. 25년을 간격으로 두고 과거 소녀와 중년 여성을 오가는 서사는 우정의 힘으로 부활하는 자신의 얼굴을 가진 여성들의 새로운 인생 만들기와 연대의 힘을 보여준다. 나미( 유호정 )는 무덤덤한 가족관계 속에 시들어가던 전업주부이다. 그런 나미가 어머니 문병 차 들린 병원에서 고교 시절 친구 춘화( 진희경 )를 만나면서 인생이 다시 시작된다. 병실 벽에 기대 “그저 바라만 보고 있지...”를 부르며 이루어지는 이 둘의 재회가 친구 찾기 프로젝트의 시작이다. 시한부 환자인 춘화가 ‘죽기 전 친구를 보고 싶다’는 유언이 미리 집행되는 셈이다. 그녀들은 그 때 그 시절, 학교를 주름잡던 불량서클 ‘7공주파 써니’였고, 춘화( 강소라 )는 카리스마 넘치는 멋들어진 대장이자, 벌교에서 전학 온 나미( 심은경 )가 왕따당하기 직전 챙겨준 왕언니이기도 했으니까. 수업 중에도 쌍꺼풀 만들기에 매진했던 장미( 김민영 , 고수희 )는 영업실적에 시달리는 보험설계사. 입에 욕을 물고 살던 진희( 박진주 , 홍진희 )는 성형과 내숭 기술로 사모님으로 변신했다. 문학소녀 금옥( 남보라 , 이연경 )은 시집살이에 지친 눈치보기 주부가 되었고 미스코리아를 꿈꾸던 복희( 김보미 , 김선경 )는 남루한 술집 여자로, 약자 중의 약자로 전락해버렸다. 냉정한 얼음공주 수지( 민효린 )는 찾아내기도 힘들지만 그녀가 냉랭했던 이유도 서사가 진행되며 점차 드러난다. 영화보기의 재미는 불량서클 소녀들의 일상과 80년대 문화풍경이다. 음악다방, 기차여행과 민주화 거리투쟁 재현이 거기에 얹혀진다. 또 다른 불량써클 ‘소녀시대’와 ‘써니’가 맞장뜨는 장면은 ‘청년 대 전경’과 몽타주되어 80년대 거리 자체를 ‘터치 바이 터치 Touch by Touch’ 음악으로 풀어낸다. 일상과 사회상의 오버랩, 음악과 이미지의 공감각이 폭발하는 순간이다. 80년대 장안을 풍미한 음악들, 나미의 ‘빙글빙글’, 영화제목이기도 한 보니 엠의 ‘써니’가 폭발력을 과시하며 우정의 힘을 25년 만에 회복시킨다. 결말 씨퀀스에서 상복을 벗어 던지며 시작되는 춘화가 원했던 ‘춤추고 노래하는 연대의 힘’은 아이러니의 묘미를 선사한다. “써니, 예전 내 인생엔 비가 내렸지. 써니, 네가 미소 짓자 고통이 지워졌지. 이제 어두운 날들은 가고, 밝은 날들이 왔어.” 노랫말처럼 옛 친구와의 우정 회복은 망가진 인생, 나 아닌 누군가의 부속물로 살아가는 것이 여자의 운명이라 감수하며 시들어가던 중년 여성들의 삶에 자기 뜻대로 살아보는 제2의 인생을 예고하는 죽음과 삶의 파티이다. 한국영화에서 매우 드물게 여성의 생동감이 뿜어져 나오는 연기를 펼치게 된 덕인지, 진희경, 김장미 등등... 모든 배우가 멋지다. 그들의 십 대 시절 역을 맡은 소녀배우들도 멋지다! 인물의 이름들은 그 시절 가수들과 일치한다. 나미, (하)춘화, (윤)복희 등등. 마치 그녀들을 추억하며 기리는 것처럼.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난 김수용 감독의 영화를 비교적 많이 본 축에 속했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미성년자 관람불가 영화를 변두리 삼류극장에서 몰래 보았는데 그때 본 상당수의 에로틱한 한국 영화가 그의 작품이었다. 그 시절 본 영화의 제목을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 화려한 외출 > < 야행 > < 웃음소리 > 등을 포함해 고등학생 시절 본 < 물보라 > < 만추 > < 도시로 간 처녀 > < 저녁에 우는 새 > 등에 이르기까지 1970년대 중후반과 80년대 초반의 영화들이었다. 어린 나이에도 김수용 의 영화는 다른 대다수 한국 영화와 다르다고 생각했다. 도회적인 세련됨이 묻어나는 영화라고 할까, 동시에 어른들만 아는 세상의 불편함도 보여주는 것이 있었다. 좀 더 철이 들어 본 < 도시로 간 처녀 >와 같은 영화는 버스 안내양이 상영 반대 데모를 해서 사회적으로 화제가 됐던 영화인데 검열에서 많이 잘려나갔어도 상당히 충격적이었다. 훗날 대학에 들어와 그의 영화에 더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그가 <영상예술>이라는 영화진흥공사에서 발간한 무크지에 비운의 < 야행 >에 대해 쓴 글을 읽고 나서였다. <야행>은 1973년에 제작됐으나 검열에 묶여 창고에 들어갔다가 1977년에 개봉된 작품이다. 김수용은 그 영화에 대해 개봉 당시 <영상시대>의 합평란에서 평자들이 가혹한 평을 한 것을 두고, 특히 검열 전의 버전에 비해 검열된 버전이 차라리 나은 구석이 있다고 한 것을 두고 조목조목 논리적으로 반박했다.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뒤에 씌어진 글이지만 이 글에서 나는 김수용이라는 감독의 논리적 이성, 그의 영화를 세련되게 해준 그 창작자의 이성을 봤다. 그게 다소 모범생 기질의 영화처럼 보이는 그의 작품세계의 한계를 가리킬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故 하길종 감독이 야바위판이라고 평가했던 당시의 한국 영화계에서는 돋보이는 지성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그런 그의 지성과 창작적 의지가 조화를 이룬 작품이 바로 <야행>이라고 생각한다. 나의 방황은 끝났다 김수용 자신이 현대적 감각으로 한 여자의 방황을 추적하고 모든 여자의 운명은 동일하다는 명제를 담고 싶었다고 말하는 < 야행 >은 당시의 사회 윤리에 비춰보면 매우 파격적인 여성의 일탈 심리를 추적하고 있다. <야행>의 주인공은 은행에 근무하는 미모의 노처녀 현주이며 그는 월남전에서 전사한, 여고 시절의 선생이었던 육군 소위와 연애한 추억을 갖고 있다. 나날이 이어지는 메마른 생활을 견디면서 현주는 첫 애인이 묻혀 있는 국립묘지가 멀리 내려다보이는 아파트에서 살면서 늘 여고 시절의 첫사랑을 추억한다. 현주의 생활은 매우 규칙적이다. 낮에는 은행원으로 일하고 일을 끝내고 나면 버스를 타고 돌아온다. 국립묘지 앞에 내려 늘 만나는 목석 같은 경비원의 곁눈질을 받으며 아파트에 들어가 저녁밥을 짓고 나면 비밀리에 동거 중인 남자 박이 술에 취해 들어오는 식이다. 현주는 어느 순간부터 이런 삶에 의식적으로 저항하기 시작한다. 집에서는 남자의 성적 도구이고 밖에서는 돈 버는 도구인 자신에 대해 혐오를 느끼며 동시에 단조로운 노동을 술로 달래고 모든 여자를 성욕의 대상으로만 대하는 남자들의 세계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은 욕구를 느낀다. 휴가를 받은 현주는 고향에 내려가 여고 시절을 회상하며 마을의 돈 많은 젊은 사장을 유혹해 몸을 준다. 휴가 기간을 다 채우지 않고 서울에 돌아온 현주는 밤늦게 어두운 뒷골목길을 방황하며 남자들에게 몸을 내맡긴다. 달라진 자신을 향해 결혼하자고 조르는 박과 함께 박의 부모에게 혼인 승낙을 받으러 열차에 몸을 실은 현주는 박이 잠든 틈에 서울로 되돌아온다. 뒤늦게 달려온 박에게 현주는 나의 방황은 끝났다는 내용의 편지를 건넨다. 그러고는 다시 예전의 자기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부유하는 인간을 둘러보다 현주는 과거의 추억에 현재의 삶을 결박한 인물이다. 현주의 현재의 삶은, 남자와 사회로부터 도구화될 것을 강요받는 그런 삶이다. 현주는 방황하기 시작하고 사람들이 밟는 타락의 길에 매우 적극적으로 몸을 내맡기는 쪽을 택한다. 한국 영화에서 이만큼 공격적으로 여성의 적극적인 반사회적 일탈 심리를 다루고자 하는 시도는 드물었을 것이다. 현주의 삶은 이미 사회에서 타자화돼 있지만 그가 타자화된 자신을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사회에 동화시키기로 작정했을 때 놀랍게도 사회는 그 자신만큼이나 타자화돼 있다는 것이 드러난다. 날마다 정해진 일과를 마치고 술과 여자에 대한 욕정으로 탈출구를 찾는 남자들의 삶은 본질적으로 타자화된 현주 자신의 삶과 다를 게 없다. 현주가 육교 위를 서성거리며 불안한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볼 때 그의 눈에 비치는 풍경과 사람들은 모두 대지 위에 정착하지 못하고 부유하는 인간들과 신기루처럼 흩어져 있는 추한 사물뿐이다. 김수용 은 이 타자화된 자아와 현실의 초상 이면에 희미하게 정치적 함축을 깔아놓는다. 아주 명쾌한 것은 아니지만, 여고 시절에 사랑했던 남자는 월남전에 참전했다 사망했으며 그의 무덤이 있는 국립묘지 근처에서 현주는 오늘의 삶을 산다. 현주가 국립 묘지 근처의 버스 정류장에 내려 흘러내리는 스타킹을 추켜올리면 목석 같은 경비병은 아주 어색하고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그의 노출된 신체 일부를 훔쳐본다. 균일하게 하나의 삶, 오로지 생산을 향해 달려가는 것을 요구했던 근대화 시기를 배경으로 이 영화는 욕망이 비정상적인 방식으로 통제되고 분출되는 일그러진 모습을 여주인공 현주의 일상과 의식을 통해 파고든다. 실험영화풍의 거친 편집과 화면 각도로 혼란스럽게 꾸며놓고는 있지만 그것이 당대의 드러나지 않은 비윤리적 일탈의 기운과 조응하는 측면이 있는 것도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영화의 결말은 예상했던 대로 비관적인 분위기로 끝난다. 현주가 방황과 일탈을 통해 얻은 결론은 다시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현재의 일상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가 정착할 곳은 아무 데도 없다. < 야행 >은 1970년대에 만들어진 한국 영화 가운데 가장 어둡고 혼란스러운 영화로 기록될 것이다. 그건 당시 사회의 표정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