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습격
- 감독
- David Heavener
- 제작년도
- 1990
“어쩌면 세상은 자기가 바라는 남자는 멀어져만 가고 대수롭게 생각 않는 남자는 눈앞에 귀찮게 서성거릴까. 여자는 자기 배우자를 찾는 거로 인생이 정해진다. 정해진 남자에게 육체를 제공하고 동화돼서 그 사람의 자손을 이어주는 일로, 여자의 전부가 끝나니까 말이다. 그러나 젊은 여자에게 남자의 선택의 자유가 있었던가. 또는 그런 긴 안목이 구비되어 있단 말인가. 어느 시대건 여자는 장님처럼 눈을 못 보고 남자를 골라 왔다.” 젊은 여자에게 선택의 자유가 없기로는 남자를 고를 때만은 아니었다. 직업을 구할 때도 마찬가지다. 권유받는 일자리는 다방 레지. 막무가내로 선물을 안겨주고 그녀를 호텔로 끌고 가려는 남자에게 “싫어, 싫어, 나 안 갈래, 싫단 말이야” 라고 분명하게 거절해도, “내 육체를 들뜨게 했으면 가라앉혀줘야지, 이 도둑년아”라는 말과 함께 따귀를 맞는다. 이후 이어지는 강간 장면에서 그녀의 몸을 손에 넣고자 하는 남자들 사이에 거래가 있었음이 밝혀진다. 기차에 앉아 고통뿐인 과거를 회상하는 이 여인은 누구인가. 그녀는 왜 여수로 향하는가. 그녀가 기다리는 사람은 누구인가. 거의 플래시백뿐인 이 영화에서, 여러 시간대의 과거를 액자처럼 늘어놓는 기억의 주체는 숙영( 김지미 )으로 보인다. 그녀가 열차에 타 과거를 회상하고 있기 때문이며, 내레이션 역시 그녀의 목소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에는 숙영이 알 도리가 없는 사건들이 포함되어 있다. 가장 긴 플래시백으로 거의 영화 본편이라 해도 좋을 3년 전 상황이 중요한 것은 현재의 숙영이 기다리는 사람과의 사연이 거기 있으며, 그녀가 살고자 하는 현재의 선체험과도 같은 시간여서다. 3년 전, 숙영은 다른 여성( 박정자 )과 함께 기차를 타고 여수로 가고 있다. 옆자리의 여성은 숙영에게 사탕을 먹이고 그녀는 그것을 무력하게 받아먹는다. 맞은편 자리에는 훈( 이정길 )이 타고 있는데 그는 숙영에게 수작을 부린다. 숙영과 그 옆 여성의 관계는 곧 밝혀지는데, 옆자리의 여성이 훈을 따로 불러내 이야기를 들려준다. 자신은 교도관이며, 숙영은 죄수라는 것이다. 교도관이 훈을 설득하기를, 숙영이 자꾸 자살하고자 하니 내일 교도소로 돌아갈 때까지 “남은 시간 내에 여자는 남자가 꼭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이 세상에 믿음이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세요.” 이 말은 숙영이 없는 자리에서 이루어진다. 왜 훈이 숙영에게 애초에 접근했는지를 숙영이 추측한 것에 가까워 보이는데, 그런 장면은 또 있다. 여수에 가서 그녀는 묘비도 없는 무덤에서 울부짖고, 그런 그녀에게 훈이 다시 접근해 다짜고짜 혼인을 올리자고 한다. 그러고는 남은 시간 동안 관광이라도 하자며 저녁에 만나자고 약속을 하는데 여기서 숙영이 알 수 없는 사건이 하나 더 등장한다. 훈은 친구를 만나 빌려준 돈을 돌려받고자 한다. 그의 친구는 택시 강도로 그 빚을 갚으려 하고, 훈이 기겁하자 자살해버린다. 칼에 찔린 택시기사도 도망친 상황, 약속시간으로부터 5시간이나 늦게 나타난 훈은 이전의 여유 많고 껄렁하던 태도와 달리 뭔가에 쫓기고 좌절한 모습이다. 왜 훈의 태도가 바뀌었는지, 숙영이 그 공백을 채워 넣고 있다. 숙영은 본 적 없으나 이 긴 플래시백에 등장하는 장면 마지막은, 결국 세 사람이 다시 서울역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과정에 있다. 교도관은 화장실을 간다고 자리를 비우는데, 그때 세 남자가 숙영을 따라붙는다. 자신들은 형사이며 훈을 잡으러 왔다고 말한다. 그 자리에서 교도관은 그들을 설득한다. 서울에 갈 때까지 시간을 달라고. 이 설득하는 내용은 이후 교도관의 말을 듣고 숙영이 상상한 것에 가깝다. 본 적 없는 이 세 장면은 결국 그녀가 끊임없이 시도하던 자살을 포기하고 삶의 의지를 갖기까지, 타인들의 선의를 상상해낸 것들이다. 그녀의 수난이 다른 남성들로 인한 것이었다면 그녀의 남은 삶 역시 다른 남성의 희생(훈이 붙잡혀갈 것을 알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숙영의 교도소 앞까지 동행한)으로 인해 가능해진다. 그의 희생을 알고 나서야 숙영은 그를 “여보”라고 부르며, 사기당해도 매 맞고 그래도 믿음을 다시 가져보겠다며 “여보, 당신 이름 뭐야. 이름 말이야. 내 이름은 효순이, 효순이란 말이야.”라고 울부짖는다. 매년 그 날짜 여수의 그 벤치에서 기다릴 테니 그곳에서 만나자고. 교도소 문을 사이에 둔 두 사람의 절박한 마지막 만남 이후 훈은 사복형사들에게 끌려가는데 정작 그는 “저렇게 사느니 차라리 자살을 해버리겠어.”라며 반항한다. 훈 앞에서 자살한 친구가 “넌 감상적인 것이 실수야”라고 그를 비난했던 것을 떠올려보라. 플래시백이 전부 마무리되면 영화의 첫 대목, 특징 없는 한 남자가 어린아이를 데리고 숙영을 서울역에 데려다주는 부분에서 이어지는 현재 그녀의 삶에 대한 설명이 등장한다. 숙영은 이제 새 출발을 하려 한다. 첫 대목에 잠시 등장한 남자는 이제 그녀가 신뢰하기로 마음먹은 사람이다. 이 기나긴 플래시백은 마지막으로 훈을 기다려보기 위해 여수로 향하는 그녀가 떠올리는 마지막 작별 의식이었다. 자살을 몇 번이고 기도한 그녀가 살아보기로 마음먹기까지, 훈이 그녀에게 직접 보여준 행동은 사려 깊다기 보다는 그간 그녀를 착취해 온 다른 남성들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앙탈을 부리는 건 봐줄 수 있지만 남자를 조롱하는 것은 못 참아!” 성관계가 강간의 형태로만 존재하며, 성욕과 고통을 구분하기 어려운 그녀의 세계에서, 그녀가 훈을 믿는 결정적 이유는 교도소 입소의 마지막 순간에 교도관이 하는 설득(그 젊은 남자가 이제 사형대로 끌려갈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그녀를 위해 여기까지 왔다는)과 숙영이 직접 기억의 빈틈을 상상으로 채워 넣은 훈과 관련된 사연이다. 숙영은 이제 자신의 서사를 완성한다. 플래시백의 시간은 이제 끝났다. 그녀는 여수에 왜 갔을까. 재회하기 위해 갔을까, 완전히 이별하기 위해 갔을까. <육체의 약속>은 후자라고 보게 되는 것이다. 숙영을 품평하고 학대하는 남성들의 언어가 전시되는 방식은 조롱에 가깝다. 그들의 권력은 이제 그 플래시백 안에 봉인되었으며, 이제 그녀는 그 시간에 이별을 고한다. 김기영 감독의 <육체의 약속>(1975)은 이만희의 <만추>(1966)를 리메이크한 영화다. <만추>를 직접 확인할 수 없는 지금 <육체의 약속>은 <만추>가 (실물 없이) 상징적으로 갖고 있는 오리지널의 위치를 영화라는 육체로 대신 차지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같은 작품을 원작으로 한 김태용 감독의 <만추>(2011)와 비교해보면 인물과 감정을 설명하는 방식이 크게 다르다. 스산한 풍경으로 애나(탕웨이)의 내면을 외부에 전시하며 많은 부분을 상상에 맡기는 김태용의 <만추>와 달리, 김기영의 <육체의 약속>은 상상의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흔히 <만추>와 그 리메이크 영화들의 여자 주인공을 설명할 때 ‘남성 혐오에 빠진’이라는 설명이 이어지곤 하는데, 김기영 감독은 그러지 않는 게 이상해 보일 정도의 과정을 전부 펼쳐 보인다. 쥐어뜯듯 선물의 포장을 벗겨내고 한번 가지고 놀면 흥미를 잃는 아이처럼, 남자들은 그녀를 갖고 버린다. 그녀는 그렇게 여러 남자에게 이용당했고, 낙태도 여러 번 경험한 듯 보인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살인을 저질러 교도소에 가게 되었고, 죄인의 감정을 통제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교도관은 그녀의 입에 계속 사탕을 물린다. 입에 넣어주는 사탕을 수동적으로 받아먹던 퇴행적인 모습의 숙영이 마지막 순간, 훈의 희생을 알고 나서 스스로 사탕을 뱉는다는 설정도 흥미롭다. 사탕을 뱉으라는 말을 해 준 이가 훈이었음을 떠올려보라. 그녀가 플래시백을 통해 회고하고자 하는 기억은 적나라한 수난사와 훈이 개입된 구원의 순간뿐이다. 그녀가 교도소에 가게 된 살인 장면은 아예 플래시백에 등장하지 않는다. 일인칭 시점의 역사인 플래시백이 갖는 자기 기만성을 잘 보여주는 셈이기도 하다. <만추>와의 연관성 외에도 1970~80년대에 많이 만들어진 호스티스 영화의 계보에서 <육체의 약속>을 살펴보는 일도 가능하다. 그래서 <육체의 약속>의 숙영은 김지미가 그 전에 맡았던 영화 속 주인공들의 연장선에 있는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흔히 말하는 ‘남자 때문에 팔자를 망친, 하지만 남자 없이 살 수 없는’ 여성의 전형으로 그려지는 숙영은 남자를 죽이고서야 남자가 없는 곳(여자 교도소)으로 갈 수 있었지만, 결국 남자가 그녀를 살게 한다. 그런 이야기를 숙영은 플래시백을 통해 완성해낸다. 기다리는 이야기가 아닌, 이별하는 이야기. <육체의 약속>의 흥미로운 점이다.
이만희 감독의 사라진 영화 < 만추 >의 흔적이라도 느껴보겠다는 심정이었다. < 육체의 약속 >은 김기영 감독의 작품이라는 사실보다 <만추>의 리메이크작이라는 사실 때문에 더 궁금했던 영화다. 그러나 <육체의 약속>의 첫 장면을 대면하자마자, 나는 직감했다. 이 영화는 다른 무엇과의 영향관계 안에서가 아니라, 이미 그 자체의 기이한 숨결로 펄떡이는 세계라는 것을. 무언가 압도적이고 무서운 기운이 돌진해왔다. 영화가 시작되면, 머리에 스카프를 두른 여인이 남자와 어린 여자아이의 배웅을 받으며 기차역에 들어선다. 홀로 기차에 오른 여인의 내레이션이 시작된다. 좀 길지만 인용해보려 한다. “지독히 특징 없는 남자가 어머니 없는 딸을 데리고 역까지 전송을 해준다. 그러나 이 남자를 이해하는 세상에 대한 능숙한 보는 눈을 가졌던가. 평범에 안처하는 인생관에 대통해야 할 것 같다. 나는 금년도 나타나지 않는 그 사람을 만나러 남행열차를 타야 했다. 약속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세상은 자기가 바라는 남자는 멀어져가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 않는 남자는 눈앞에 귀찮게 서성거릴까. 여자란 자기 배우자를 찾는 거로 인생이 정해진다. 정해진 남자에게 육체를 제공하고 동화되어서 그 사람의 자손을 이어주는 일로 여자의 전부가 끝나니까 말이다. 그러나 젊은 여자에게 남자의 선택의 자유가 있었던가. 또는 그런 긴 안목이 구비되어 있단 말인가. 어느 시대건 여자는 장님처럼 눈을 못 보고 남자를 골라왔다.” 이 긴 내레이션은 이상하다. 자기비하와 체념에도 불구하고 끝내 욕망을 감추지 못하는 내용과 그걸 전달하는 냉소적이면서도 공격적이고 칼처럼 날카로운 목소리의 기운, 거기 화면을 찢을 듯 틈입하는 불길한 기차의 정적소리와 화면을 부유하는 여자의 무심한 표정. 어딘지 아귀가 맞지 않는 영화적 요소들이 정체를 감춘 채 서로를 자극하며 화면을 팽창시키고 있다. 그리고 마치 귀신에게 홀리듯이 기차의 시간은 여자의 과거로 진입하고 있다. ‘그 사람을 만나러’ 가는 여수행 기차의 현재가 그녀의 얼룩진 과거를 보여주는 플래시백으로 건너뛸 때마다, 거기에는 그녀를 거쳐 간 폭력적인 남자들이 등장한다. 남자들은 자신의 정체를 속이고 ‘여자의 역할은 자손을 번식시키는 데 있다’는 노골적이고 상투적이어서 실소가 나올 지경인 말로 그녀를 유혹한다. 그런데 괴이한 건 이 남자들의 거짓됨이 아니라, 이에 대한 여자의 반응이다. 그녀는 매번 배신당하면서도 그녀의 몸을 탐하는 남자들의 접근에 넘어가고 그 때 그녀의 표정과 제스처는 설명하기 어려운 모호함으로 일렁인다. 그녀는 단 한 번도 상대 남자를 욕망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그녀의 얼굴에서는 그녀 자신이 제어하지 못하는 미세한 욕망의 결들이 흘러나온다. 그 결들은 망설임과 수치심과 거부감과 두려움과 쾌감 사이에 있다. 신경질적이고 광기 어린 빠른 선율과 리듬의 음악이 섹스 신을 추동하며, 그 장면들의 성격을 판단하기 어렵게 만든다. 이 영화에 등장하는 섹스 신들은 관능적이거나 폭력적이기 전에, 음습하고 무섭다. 여인의 기구한 운명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니라, 화면을 채우는 영화적 요소들의 불협화음 때문에 그렇다. < 육체의 약속 >에서만큼 보는 이의 심신을 소진시키는 무서운 섹스 신을 본 기억이 적어도 내게는 없다. 모든 플래시백이 지나간 뒤, 그녀는 마지막 기억 속에 남아있는 ‘그 사람’을 기다리며 벤치에 앉아 있다. “몇 해째 여기에 찾아옵니다. 당신 덕분에 피해망상도 사라져 새 출발을 할 수 있었습니다. 이제는 행복을 쥐고 늘어질 겁니다. 지금 어디 계세요. 자도 깨도 당신 걱정뿐입니다.” 지금 그녀에게는 새 출발을 함께할 “지독히 특징 없는” 남자와 그의 어린 딸이 있다. 무엇보다 그녀는 그가 오지 않을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감옥으로 복귀하던 날, 그 남자가 사형대에서 사라질 운명(실상 남자는 누구도 죽이지 않았지만 체포되었고 이후 그는 영화에서 사라진다)이라는 사실을 간수에게 들었다. 말하자면 그녀는 안정된 가정을 뒤로하고 여수의 벤치에서, 즉 자신의 과거에서 알 수 없고 올 리 없는 무언가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그녀는 정녕 알고 있을까. 기차를 타고 홀로 돌아가는 여인의 얼굴은 공허하다. 내게 < 육체의 약속 >은 영화적으로 흘러넘치는 플래시백의 육체성이 결국 여인의 텅 빈 얼굴로 돌아오고 마는 허무하고 비관적이며 섬뜩하고 마침내 절실하게 고독한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