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적흑야묘
- 감독
- 장위광
- 제작년도
- 1966
- 출연
- 진보주, 호풍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먼저 깊은 한숨을 내쉰다. 나는 글을 쓰는 게 정말 힘들다. 그렇긴 해도 대상이 되는 작품이 있을 땐 어떻게든 시작하게 된다. 그런데 이 기획의 실체 없는 주제가 주는 자유 속에서는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게 될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내게 한국영화 비평의 안녕에 대해 말할 자격이 있는 걸까? 간간이 영화평론가라는 이름으로 활동을 하지만, 나는 제대로 된 비평을 쓴 적이 거의 없다. 이 사실에서 오는 민망함을 무릅쓰고, 무슨 연유에서인지 내게 기회가 닿은 이 글을 일단 시작해보려 한다. 얼마 되지는 않지만 그간 내가 무엇을 했는지 돌이켜 보기로 했다. 영화의 주변을 알짱거리며 한 것들 중에는 ‘말’을 하는 일이 많았던 것 같다. 주로 빛이 사라진 스크린 앞 객석을 바라보는 자리에 서서 말이다. 1. 영화와 관련해 내가 처음 맡은 일은 CGV 아트하우스 큐레이터라는 이름으로, 상영이 끝난 후 작품을 해설하는 것이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그 일이 사라지기 전까지 1년 넘는 시간동안 매 주말 한 극장의 객석을 마주하고 섰다. 그리고 방금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작품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의미를 독해해주었다. 실은 큐레이터가 아니라 ‘해설자’나 ‘도슨트’ 정도의 이름이 걸맞은 일이었다. 15분 남짓한 짧은 시간 동안 혼자 말한 후에는 객석의 질문을 받는 시간이 이어졌다. 해설을 듣기 위에 자리에 남은 적지 않은 관객들은 영화에서 감독이 감추어놓았을 수수께끼들에 관심이 있었다. 한 번은 작품에 등장한 상징을 알려달라는 한 관객의 요청을 완곡하게 거절했다가 다른 관객으로부터 ‘두부’에서 순수함이라는 상징을 왜 읽지 못하느냐는 꾸지람을 들은 일도 있다. 주인공 의상의 색상에서 어떤 변화의 도식을 찾아내려는 집착의 눈을 마주하기도 했다. 나는 이런 욕구들을 충족시키기 위해 일부러 애쓰지는 않았지만, 아트하우스 영화를 즐겨 보는 관객들의 성향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주어진 시간이 짧다는 핑계로 쉬운 길을 택했다. 이 일을 하면서 나는 남들 앞에서 말하는 것에 대한 공포를 약간 덜었고, 이론 용어를 덜 쓰게 되었으며, 때로는 관객의 반응에서 보람도 느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영화를 읽는 어떤 습관이 생겼고, 따로 활동을 하지는 않았기에, 비평과는 멀어지고 있었던 것 같다. 비평은 단지 감독이 의도한 것을 대신 전달하는 것으로 끝나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 십개월의 미래 >(남궁선, 2020) 관련 전주국제영화제 장기 상영회 중 필자 진행 GV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X ) 2. 내가 가장 최근에 활동한 장소는 인천 디아스포라영화제 다. 나는 영화제 기간에 청소년과 성인을 대상으로 한 영화비평워크숍 ‘활동사진’의 전체 진행을 맡았고(이동윤 평론가가 처음 기획한 것으로, 나는 멘토로 참여해오다가 작년부터 이 일을 했다), 영화제 GV의 모더레이터를 했다. 인천 지역 중·고등학교를 찾아가 디아스포라영화제 상영작을 보고 감독과의 대화를 진행하는 프로그램, ‘영화, 학교가다!’의 모더레이터를 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이번에도 내 역할은 주로 앞에서 말하는 것이었다. GV(Guest Visit) 또는 관객과의 대화. 영화 상영 후 게스트(주로 감독)를 초청하여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 이 자리에서 모더레이터는 감독과 관객 사이의 대화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이를 위해서는 미리 작품을 세심하게 보고 정보를 찾아 알고 있어야 했다. 아트하우스 영화 해설과는 다르지만, 나는 GV 진행을 하면서도 비평 활동을 하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았다. 때로는 비평적 시각을 지켜내면서 감독으로 하여금 영화의 무의식적인 수행을 발견하게 하는 뛰어난 GV 진행을 보기도 한다. 하지만 경험이 많지 않고 역량이 부족한 내게는 진행의 매끄러움이 우선 과제가 되었고, 순발력을 중요한 능력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진행자는 이 열린 대화의 장에서 발생할 수 있는 여러 상황들에 유연하게 대처해야하기 때문이다. 객석의 질문이 없거나 감독의 대답이 지나치게 짧아 진행자의 말이 많이 필요한 경우가 있고, 단편 섹션에서 한 쪽으로만 질문이 몰리거나 순차통역으로 인해 시간이 부족해서 조율이 필요할 때도 있다. 사실 이것들은 사전에 잘 준비하면 그리 어렵지 않게 넘어갈 수 있다. 무엇보다 예상하기 어려운 것은 어떤 관객이 말을 걸어올지 모른다는 사실이 아닐까. 이제는 클래식 밈이 된 ‘GV 빌런’의 존재 말이다. GV에 참석 좀 해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 분에 대한 저마다의 피로한 기억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 상황에 어떻게 대처하는 것이 진행자의 덕목일까? 나는 빌런을 직접 만난 적은 없다. 그런데 관객으로서 나는, 가끔은 일부 관객들이 질문에 대해 지나치게 엄격한 태도를 갖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얼마 전 참석한 한 영화제 GV에서 나는 영화제에 거의 처음으로 온 듯한 어느 비시네필 관객이 영화를 본 후 한껏 들뜬 자신의 감상을 길게 늘어놓는 동안 관객 여럿이 우르르 자리를 뜨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장황하게 표현할 수밖에 없었던 관객의 소감과 그에 대한 감독의 대답에는 왠지 모를 감동 같은 것이 있었다. 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대상으로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는 ‘영화, 학교가다!’ 프로그램에서는 시네필이 만족할 전문성 있는 질문만을 기대할 수는 없다. 초대받은 감독과 진행자인 나는 이곳에서 영화제 GV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시네필 바깥의 시선들을 만난다. 학생들이 영화에 대해 주로 궁금해 하는 것은 엔딩 크레딧이 올라간 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주인공이 어떻게 살아갈 지에 대한 것이다. 그리고 그 질문을 학생들에게 되돌렸을 때 흥미로운 반응을 만날 수도 있었다. 한 번은 주인공인 남자 고등학생이 숨겨왔던 자신의 디아스포라적 정체성을 친구들 앞에서 밝히며 끝나는 한 작품(< 동우 >(박호범, 2022))을 여러 학교에서 상영한 적이 있다. 그런데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각자의 경험을 통해 서로 다른 시선을 갖게 된 두 집단의 의견이 뚜렷이 갈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주로 여학생들이 이 영화의 결말을 감동적으로 받아들인 반면, 대부분의 남학생들은 암울한 후일담을 예상한 것이다. 나는 이후에 이 작품을 보게 된 학생들에게 앞서 확인한 이 결과를 이야기해주기도 했다. 그리고 영화가 촉발시킬 수 있는 대화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3. 한 명의 강사가 강의를 하고 과제에 대해 피드백을 해주는 일반적인 비평워크숍들과 달리, ‘ 활동사진 ’은 한 명의 멘토와 네 명의 참가자로 구성된 복수의 모둠이 각각 활동하는 워크숍이다. 총 4회 차로 구성된 이 워크숍에서 각각의 모둠은 이틀간 디아스포라영화제에서 상영작들을 함께 보고 토론하는 시간을 갖는다. 영화제를 기준으로 1주 전에 영화 비평 특강이 있고, 1주 후에는 비평문 초고에 대한 멘토의 피드백 시간이 있으며, 활동 종료 후 비평문 최종고를 엮어 비평집을 발간한다. 나름대로 고심한 구성이지만 비평적 글쓰기를 훈련하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많이 부족하다. 그래서인지, 이 워크숍 활동의 정점은 글쓰기보다는 활기 넘치는 토론시간이라고 느껴진다. 여러 참가자들이 자신을 소개하며 ‘그간 영화에 대한 관심을 공유하고 대화를 나눌 친구가 주위에 없었다’고 말한다. 그런 그들에게 비슷한 관심으로 만난 일면부지의 사람들이 함께 영화를 본 후 즉각적인 감상을 나누고 각자의 비평적 주제를 찾아가는 일은 분명 특별한 경험일 것이다. 노출된 정보와 평가가 거의 없는 영화제 작품들을 선입감 없이 보고 판단한다는 상황이 흥분과 긴장을 더하는 것 같다. 워크숍 '활동사진' 활동 장면 (사진: 필자 제공) 영화를 본 직후에 이루어지는 토론은 말끔하게 진행되지 않는다. 본 것을 글로 바꾸고 고치면서 생각을 정련하는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말하는 것이니 어려운 게 당연하다. 멘토가 주제를 제시하며 방향을 잡지만, 간혹 대화는 참가자의 의식의 흐름을 따라가다 엉뚱한 길목을 기웃거린다. 한 모둠이 토론하는 모습을 한발 떨어져서 지켜본 적이 있다. 영화의 어느 장면에서 개인적인 경험을 떠올린 한 참가자가 다소 긴 이야기를 이어가고 있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지점이었다. 그때 고개를 열심히 끄덕이는 한 사람의 몸짓과 그의 말이 언제 끝날 지를 살피고 있는 듯한 다른 사람의 복잡한 얼굴이 함께 보였다. 여느 대화와 별반 다르지 않은 그 상황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기입되었다. 나는 언제 어느 장소에서 어떤 사람들과 보고 그들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는지에 따라 그 영화가 전혀 다른 말을 걸어올 수 있다는, 그리 특별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4. 역동적이고 미묘한 대화의 장에 대해 생각하면서, 지극히 단순하게도 김덕중 의 < 컨버세이션 >(2021)을 떠올린다. 유운성 평론가는 “ 한국독립영화 속, 대화의 언어 ”라는 글에서 한국독립영화에서 대화 장면의 빈약한 연출을 지적한 바 있다. <컨버세이션>은 한국(독립)영화에서 긴장감을 만들거나 정보를 전달하는 수단에 그쳤던 ‘죽은’ 대화 장면을 섬세한 연출로 살려냈다. 이 생생한 장면들에서 우리는 대화를 구성하는 것이 말뿐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본다. 세 친구가 집에서 차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20대에 파리에서 함께 유학 생활을 한 적 있는 은영( 조은지 ), 다혜( 송은지 ), 명숙( 김소이 )이 은영의 집에서 오랜만에 모인 것이다. 코너형 소파에 나누어 앉은 이들의 모습은 풀숏의 고정된 프레임 안에서 함께 보인다. 카메라를 마주한 명숙이 먼저 파리 시절에 새겨진 자신의 열등감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느새 그의 이야기가 끝나고 다혜가 입을 뗀다. 그런데 한 박자 늦은 은영이 다혜보다 큰 자신의 목소리를 밀고나간다. 카메라 가까이에 앉은 은영이 몸을 기울일 때마다 화면에서 얼굴이 가려져버리던 다혜가 결국 은영에게 발화권도 빼앗긴 것이다. 이제 카메라는 은영과 다혜를 마주보는 자리로 옮겨간다. 다혜의 눈은 초점을 잃었고, 은영은 삶에 대한 느낌과 남편의 반응에 대해 이야기한다. 이때 화면 오른쪽에 있게 된 명숙이 끼어들어 말하기를 시도하지만 은영의 말이 멈추질 않는다. 실패한 명숙은 이후 소파에 몸을 기대어 슬며시 프레임 밖으로 나간다. 동시에 나온 목소리들이 서로 부딪치고 어떤 말들은 묻혀버리는 상황. <컨버세이션>은 발화 경쟁이 있는 익숙한 대화 상황에서 활동하는 힘들을 자연스러우면서도 또렷하게 가시화한다. 얼굴을 마주한 대화의 장을 구성하는 것은 말뿐만 아니라 표정과 몸짓이라는 시각적인 요소들이기도 하다. 그뿐일까. 이 장면에는 초대받지 않은 바깥의 존재들이 영향을 미치고 있다. 끓고 있는 커피포트는 은영을 프레임 안팎으로 들락거리게 해 분위기를 산만하게 하고, 근처에 잠들어 있는 아기의 존재는 음량을 조절하게 만든다. 창으로 들어온 오후의 강한 태양마저 은영의 얼굴 위에서 빛과 그림자의 그림을 부단하게 그린다. 이 바깥의 존재는 이어진 씬에서 대화의 다른 차원을 지시하기도 한다. 다혜와 명숙이 아파트 복도 끝 계단에 서서 담배를 피우며 대화를 나눈다. 이때, 다혜가 명숙에게 자신이 말을 하지 못하면 ‘빡이 친다’고 말하며 앞선 발화 경쟁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밝힌다. 그런데 이처럼 강한 토로 후에 이어진 다혜의 말은 하필 도로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묻혀 때때로 우리에게 잘 들리지 않게 된다. 건물 고층에 서있는 두 사람과 건너편 같은 높이의 어느 장소에서 그들을 바라보는 카메라 사이에 마치 심연과 같은 무한한 거리가 있는 것이다. 앞선 장면에서 인물들의 대화에 영향을 미치는 외부의 것들이 시선과 몸짓을 통해 드러났다면, 이 장면에서는 인물들의 세계와 관객이 자리한 현실 사이에 놓인 모종의 간격이 시청각적인 거리감으로서 드러난다. 말하자면, 어떤 외부가 항상 대화에 끼어들고 있다. (영화와 현실의) 사람들 사이의 대화에서 뿐만 아니라, 영화와 관객 사이의 대화에서도. 5. 대화의 장에서 발신자의 말은 수신자에게 진실을 온전하게 전하지 못한다. 홍상수 의 < 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 >(2015)는 이 불완전한 ‘말’을 대하는 한 인물의 두 가지 상반된 태도를 보여준다. 이 작품은 동일한 두 인물이 우연히 만나 같은 장소들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보내는 이틀간의 여정이 반복되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수원에서 열리는 GV 행사에 하루 일찍 도착한 영화감독 함춘수( 정재영 )는 화성행궁을 서성이다 윤희정( 김민희 )이라는 여자를 만난다. 둘은 대화를 나누고 함께 윤희정의 화실에도 간다. 만남이 술자리까지 이어지자 함춘수는 부지런히 구애를 하고, 윤희정의 요청으로 자리를 옮겨 그녀의 지인들과 합석하게 된다. 영화의 1부(‘그때는맞고지금은틀리다’)와 2부(‘지금은맞고그때는틀리다’)는 이 기본적인 상황 위에서 그려진다. 이때, 1부와 2부의 두 세계 사이에서 차이를 만드는 것은 상황을 대하는 인물의 말, 그리고 그에 따른 표정과 몸짓, 감정 등의 변화다. 1부에서 함춘수와 윤희정이 나누는 대화들은 우스꽝스럽다. 두 사람은 ‘알 것 같다’는 말을 앵무새처럼 서로 반복한다. 함춘수는 윤희정의 그림을 보면서도 이렇게 말한다. “좋아요. 정말로 좋아요. 뭘 한 건지 알 것 같아요.” 이어서 그는 자기 영화를 표현하는 데 쓰던 말로 그녀의 그림을 상찬한다. 하지만 그날 밤, 술자리 동석자들에 의해 그가 빈말을 했다는 사실이 까발려지고, 함춘수는 자신에 대한 말(사실과 소문)들에 둘러싸여 난처해진다. 결국 수치심을 느낀 윤희정이 자리를 벗어나자 둘의 관계는 맥없이 끝나버린다. 이튿날, GV에서 모더레이터는 ‘감독님에게 영화란 무엇이냐’는 ‘빌런’같은 질문을 던진다. 굳은 얼굴로 입을 연 함춘수는 기어이 격분하며 이렇게 소리치고는 극장을 나간다. “우리의 삶은 그런 말들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말의 힘? 저는요, 그런 중요한 말이라는 게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 대사는 말에 대한 그의 입장을 친절하게 설명한다. 어차피 진실을 전하지 못하는 말에 목을 맬 필요가 없다는 냉소적인 태도 말이다. 그렇기에 함춘수는 마음을 ‘어떻게 말로 표현 할 수 있느냐’고 생각하면서, 텅 빈 말들이 불러일으키는 ‘공감’이라는 착각, 그것이 주는 편안함에 기대려한 것이다. 그래서일까. 1부에서만 들을 수 있는 함춘수의 보이스 오버 내레이션은 그와 우리 사이의 거리를 좁히기보다는, 그가 독백의 공간에 갇혀 영원히 나올 수 없을 것 같은 느낌만을 남긴다. 2부의 함춘수는 ‘말’에 대해서는 1부와 전혀 다른 사람이다. 그는 말을 ‘함부로’ ‘많이’ 하면서 어떻게든 진실을 전하려고 분투한다. 윤희정은 처음엔 함춘수의 말에 상처받지만 곧 그를 믿고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낸다. 새벽이 오자 두 사람은 그들의 짧은 만남을 정리하며 부드러운 말들을 서로 주고받는다. 함춘수는 자신이 ‘너무 말을 많이 했다’며 사과의 말을 건네고, 윤희정은 함춘수의 실수를 덮으며 자신이 ‘말을 잘 할 테니 걱정 말라’고 다독인다. 또 다시 이튿날, 다행히 이번 GV는 무사히 끝난 것 같다. 함께 담배를 피우던 모더레이터가 함춘수에게 감사를 표한다. 그리고는 스태프에게 좀 전에 만난 GV 빌런 이야기를 꺼낸다. “근데 아까 안경 낀 걔는 너무 깼어.” “너무 말을 많이 하죠?” 함춘수는 여기서 자신의 영화를 보러 온 윤희정과 재회한다. 이 대화 장면은 영화의 예고편으로 쓰였다. 그런데 예고편은 영상을 거꾸로 재생한다. 이 역재생된 화면 위로 ‘지금’, ‘그때’, ‘맞다’, ‘틀리다’라는 단어들로 조합된 말들이 자막으로 나온다. 말의 언어적 의미가 소거된 이 영상에는 서로에게 집중하는 두 사람의 표정과 몸짓이 더욱 잘 보인다. 신기하게도, 두 사람은 그 비언어적인 소리와 시각적 표현들을 통해, 혹은 우리가 배우지 못한 미지의 언어를 가지고서 정말로 대화하는 것처럼 보인다. 말이 세계를 탐험하는 동안, 비언어적 의미들이 함께 부지런히 활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6. 영화는 대화들로 구성된다. 영화 속에는 등장인물들의 대화뿐 아니라, 인물과 세계 사이, 세계와 세계 사이의 대화가 있다. 영화비평은 그런 영화와의 대화다. 우리는 영화의 대화를 추적함으로써 그것이 의도로 귀결되지 않게 하는 외부의 활동을 발견한다. 아니, 거꾸로 이 잉여적인 것이야말로 비평이라는 대화의 장을 연다. 비평은 다른 비평과의 대화를 진행하기도 한다. 극장의 평론가 대담이나, 온라인 팟캐스트 같은 것들이 있다. 내가 이따금 참여하는 ‘ 비평의 편지 ’는 영화를 두고 두 사람 사이에서 오고간 세 통의 편지를 독자에게 발송하는데, 잠재적인 다수의 수신자를 가정하고 쓰인 사적 대화라는 점에서 영화 속 인물들의 대화를 닮았다. 영화의 대화, 영화와의 대화, 그리고 비평의 대화는 이렇게 서로 연결된다. 우리는 독백 속에 갇히지 않기 위해, 외부에 주의를 기울이면서 ‘지금’에 충실한 말을 찾아 계속해서 새로운 대화를 시도하게 될 것이다. 강소정(영화평론가) l 가끔 영화에 대해 말하거나 쓴다. 제2회 독립영화비평상 오디오비주얼필름크리틱 부문 당선.
이동우의 < 셀프-포트레이트 2020 >(2020)은 우정의 영화화를 시도한다. 영화는 아침부터 술에 취해 이동우에게 20만 원을 요구하는 이상열의 모습에서 시작된다. 보들레르의 말을 말라르메의 말로 착각하는 그는 오즈 야스지로나 하길종 같은 영화감독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그의 정체는 2000년 단편영화 <자화상 2000>(2000)을 통해 베니스국제영화제 등에 진출했던 영화감독이다. 하지만 뒤이어 벌어진 여러 불행으로 인해, 이동우를 만난 2017년의 시점의 그는 알코올 중독과 조울증을 앓고 있는 노숙자가 되었다. 이동우는 영화 속 자막을 통해, “집 앞에서 이상열을 처음 만난 날 그는 나에게 자기만큼 멋지다고 말을 걸어왔다. 심심했던 나는 그를 집으로 데려왔다.”라고 이상열과의 첫 만남을 밝히고 있다. 한때 유망한 영화감독이었던 이와 현재 주목받고 있는 감독의 만남은 순전히 우연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에도 몇 차례 이상열과 우연한 만남을 반복하던 이동우는 카메라를 들고 그와 동료 노숙자들을 만나게 된다. 이상열이 영화감독이었음을 알게 되는 것은 그즈음의 일이다. 영화 만드는 것을 도와주겠다는 이동우의 말에 이상열은 동료 노숙인을 스탭과 배우로 캐스팅하여 영화를 만들려 한다. 하지만 이는 반복하여 좌절된다. 조울증은 갈수록 심각해지고, 이상열은 구치소에 오가게 된다. <셀프-포트레이트 2020>은 이 과정을 담아낸다. 이동우는 첫 영화 < 노후 대책 없다 >(2016)에서 자신과 펑크 동료들을 비슷한 방식으로 담아낸 바 있다. 영화제작을 의도하고 촬영된 것이 아닌 푸티지들을 편집하여 만들어진 이 영화에서, 카메라는 이동우 감독을 대리한다기보단 현장을 경험하는 또 하나의 인물로서 존재하는 것처럼 다가온다. 무엇보다 <노후 대책 없다>의 카메라는 이동우만의 것이 아니다. 영화의 크레딧에는 이동우와 박수환, 두 명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크레딧에 정확하게 담겨 있지는 않지만, 카메라가 두 사람 외에도 여러 사람의 손을 거쳤을 것임을 영화 속 여러 장면을 통해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 수 있다. 반면 <셀프-포트레이트 2020>의 크레딧에는 촬영이 따로 명시되어 있지 않다. 이동우 감독은 ‘연출’ 크레딧으로만 엔드크레딧에 올라가 있다. 이는 곧 촬영과 편집을 비롯해 엔드크레딧에 기재되지 않은 대부분의 역할을 수행했음을 알려준다. 크레딧에 자신을 단순히 ‘연출’ 역할로만 표기했다는 점은 이 영화 속 카메라의 사용을 떠올렸을 때 흥미롭게 다가온다. <노후 대책 없다>의 카메라가 ‘펑크 공동체’라 할 수 있는 곳에 속한 또 하나의 인물과, 다시 말해 관객을 자신들의 공동체에 초대하는 것과 같았다. 반면 <셀프-포트레이트 2020>의 카메라는 촬영 크레딧을 따로 기재할 필요를 느끼기 어려울 정도로 이동우 자신과 결부되어 있다. 이 영화 또한 전작처럼 영화제작을 염두에 두고 촬영된 것은 아니다. 이 영화의 카메라는 이상열과 함께한 이동우의 시간에 관한 단순한 기록만을 수행하고 있을 뿐이다. “영화를 만들기 위해 온 것보다 같이 약속을 하고 시간을 보내러 왔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1) 는 이동우 감독의 말처럼, 그 기록을 재구성하여 지금의 영화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촬영된 순간과는 별개의 사안으로 다가온다. 적어도 이 영화에 한정해서는. <셀프-포트레이트 2020>은 이상열의 < 자화상 2000 >으로 시작하고 끝난다. 이상열이 비디오로 소장하고 있던 15분가량의 <자화상 2000>과 메이킹 영상, 영화제 현장 영상은 이 영화 전체에 흩어져 삽입되어 있다. 특히 이상열이 구치소에 있던 2019년의 분량 대부분이 이상열의 영화와 영상들로 채워져 있다. 마치 이상열의 부재를 이상열이 찍었고 이상열의 과거가 담겨 있는 영상들로 대체하려는 것처럼 말이다. 이나라 평론가의 말처럼, <셀프-포트레이트 2020>의 구조는 “이상열의 영화가 이동우의 영화를 감싸 안고” 2)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동우의 카메라가 찍을 대상을 잃어버렸을 때조차, 이상열의 영화는 그의 다른 분신처럼 이동우 앞에 놓여 있다. 3시간에 가까운 영화 전체에서 이동우와 이상열이 한 프레임 안에 들어오는 순간은 단 두 번이다. 하나는 이상열이 이동우의 집에 찾아온,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순간이다. 다른 하나는 출소한 이상열이 이동우와 함께 편의점 테이블에 만나 금주의 방법을 이야기하는 영화의 마지막 순간이다. 영화의 부제 “나는 나를 바라보는 나를 바라본다”는 <자화상 2000>의 부제 “나는 나자신을 바라보는 나를 바라본다”를 잘못 말한 이상열의 말에서 따온 것이다. 이동우의 카메라는 두 사람이 함께 담긴 그 장면을 기록했고, 이동우의 영화는 두 개의 영화를 함께하는 영화로 만들었다. 영화의 부제는 단순히 이동우가 이상열의 지금을 자신의 미래처럼 느껴, 그를 일종의 반성적 거울로 여긴다는 말이 아니다. “나”와 “너”의 지칭이 뒤섞이는 순간, 카메라 앞의 대상이 모두 “나”이면서 “너”가 되는 순간을 향해 이 영화는 흘러간다. 그 순간 이 영화는 우정의 기록이나 증거가 아닌, 우정 자체를 관객 앞에 제시한다. 하지만 이동우 감독은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이 사람이 나 때문에 더 힘들어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3) 이 말 한마디로 이동우가 <셀프-포트레이트 2020>과 영화 이후의 이상열에 관해 가진 생각을 갈음할 수는 없다. 다만 그의 신작 < 사갈 >(2022)을 통해 그것을 얼핏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사갈(蛇蝎)은 뱀과 전갈이라는 뜻으로, “남을 해치거나 심한 혐오감을 주는 사람”을 뜻한다. <사갈>은 이동우가 영화과 동기인 박건호를 오랜만에 만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채업자이자 도박중독자인 그는 돈을 버는 족족 술과 도박으로 탕진한다. 성실하게(?) 사채 일을 하며 빚을 갚아 다른 생활을 꾸릴 수 있는 상황이 충족되는 순간에도 그의 손은 도박을 향한다. <셀프-포트레이트 2020>이 우정의 순간이라는 찰나를 담아내기 위해 168분의 시간을 동원했다면, <사갈>은 156분 동안 박건호와 그 주변 인물들의 끝없는 실패를 담아낸다. 사채업자라고는 하지만, 박건호가 수금해야하는 돈은 대부분 100만원이 채 되지 못하는 작은 돈이다. 5만원, 10만원, 20만원가량의 빚들은 불법도박으로, 돌려막기로, 또 다른 샛길들로 사라진다. 이는 사채를 쓴 채무자뿐 아니라 박건호 본인에게도 해당하는 말이다. <사갈>에 담긴 박건호와 그 주변 사람들의 상황은 그야말로 빠져나올 수 없는 무간지옥이다. 박건호가 재기할 수 있을 것 같은 상황이 영화에 등장하는 순간, 그는 어김없이 추락한다. <사갈>은 러닝타임 내내 그 과정을 반복하여 보여준다. 이 영화의 외형은 이동우의 다른 영화들과 유사하다. 격렬하게 흔들리는 카메라, 길거리에서 적당히 촬영한 인터뷰, 상황을 설명하는 작은 폰트의 자막. 흥미로운 것은 이동우 감독의 존재 자체다. 세 편의 영화에서 이동우는 점차 자신의 출연을 줄여간다. <사갈>에서 이동우가 프레임 속에 들어오는 장면은 박건호의 본가에서 식사하는 그의 뒷모습 정도다. 박건호 등과 대화할 때 그의 목소리가 영화에 담기긴 하지만, 그의 모습 자체는 전작들에 비해 극히 적은 순간에만 등장한다. 반면 자막을 통한 이동우의 발화는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다. <사갈>은 “다큐멘터리를 만드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다”는 자막으로 시작해서 "이 영상이 내가 만드는 마지막 다큐멘터리였으면 좋겠다"는 자막으로 끝난다. 전작이 이상열의 이야기였던 만큼이나 그와 함께하는 이동우의 이야기였다면, <사갈>은 박건호의 이야기를 담아내지만 다큐멘터리 자체에 관한 이동우의 복잡한 생각을 그대로 끄집어낸 이야기다. 영화 중반 즈음의 자막은 박건호를 왜 찍기 시작했는지 까먹었다고 고백한다. 그와 더불어, 이동우는 자신의 영화 때문에 박건호가 불행해지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와 함께 영화는 잠시 <셀프-포트레이트 2020> 이후의 이상열을 잠시 보여준다. 이동우는 이상열이 영화 촬영 이후 조울증이 심해지고 구치소를 들락거리며 살고 있음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다큐멘터리가 헛된 희망을 심어준 것 같다는 죄책감을 토로한다. 그 죄책감은 <사갈> 전체에 맴돌고 있다. <사갈>의 이동우는 이상열을 만날 때와 마찬가지로 카메라를 들고 박건호를 찾고, 박건호를 찍는다. 하지만 이 영화에서의 이동우가 박건호에게 갖는 거리감은 관찰적 다큐멘터리라기엔 너무 가깝고, 참여적 다큐멘터리라기엔 너무 멀다. “이동우의 카메라가 이상열을 찍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이 무의미한 것처럼, “박건호를 찍지 않았다면…”이라는 가정 또한 무의미하다. 하지만 이동우는 이 무의미한 가정을 토대로 누적된 죄책감을 토로하고 있다. “남을 해치거나 심한 혐오감을 주는 사람”이라는 의미의 제목을 다시금 떠올려보자. <사갈>은 우정의 순간을 포착하여, 우정이라는 추상적 개념을 관객 앞에 펼쳐 놓는 영화가 아니다. 오히려 이 사람과 우정을 나누는 것은 불가능하겠다는 판단을, 끔찍하게도 자기파괴적인 죄책감을 수반하는 그 판단을 고백하는 영화다. 이동우의 고백대로, 그가 처음 카메라를 들고 박건호를 만났을 때 떠올렸던 생각은 그도 관객도 알 수 없다. 그러한 지점에서 <사갈>은 꽤나 비겁한 영화다. 이동우 감독의 생각을 옮긴 자막들을 보고 있자면 그가 박건호라는 ‘사갈’을 수단삼아 자신의 죄책감을 토로하고 있을 뿐이라는 느낌을 준다. 혹은, 그러한 박건호를 찍어 다큐멘터리로 제작하고 있는 자신을 ‘사갈’이라 지칭하는 것만 같다. <셀프-포트레이트 2020>이 촬영된 ‘함께’의 순간을 ‘우정’으로 만들어가는 영화였다면, <사갈>은 어느 순간 ‘함께’일 수 없는 이와의 동행을 담아낸다. 우정이 불가능함을 깨달은 이후에도 이동우는 카메라를 들고 박건호를 찍었다. 그렇다고 <사갈>이 절교를 찍은 영화라고 할 수는 없다. 관객은 이 영화 이후의 박건호를 모른다. 관객이 볼 수 있는 것은 이동우가 박건호와, 이상열과, 동료 펑크들과 보낸 시간들이다. 관객은 영화 이후의 그들을, 그들과 이동우의 관계를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는 가능한 우정의 순간과 우정이 불가능해지는 순간을, 그 순간을 찍고자 그 순간과 뒤엉켜버린 영화를 보고 있을 뿐이다. 때문에 이동우의 영화들을 보고 난 뒤에 이러한 질문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당신과 나 사이에 놓인 카메라는 우리를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는가?” *** 1) 2021 제12회 부산평화영화제/기록문 <셀프-포트레이트 2020> GV, 「부산평화영화제 아카이브」 2021.12.31, https://bpff.tistory.com/entry/셀프-포트레이트-2020-GV 2) 이나라, [무주산골영화제 영화평론가상 수상작 비평 전문] <셀프-포트레이트 2020> : 불타는 우정의 자화상, 「씨네21」, 2021.10.12, cine21.com/news/view/?mag_id= 98724 3) 앞의 글, 「부산평화영화제 아카이브」 2021.12.31, https://bpff.tistory.com/entry/셀프-포트레이트-2020-GV
열여덟 살 소년 한슬기는 남산순환로 통행 매표소 동전함을 털다 걸려 1년 6개월 형을 언도받는다. 카메라는 비좁은 구멍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려는 듯 한슬기가 수감된 소년원의 내부를 관음적인 앵글로 비추고 있다. 정해진 시나리오 없음, 정해진 배우 없음, 정해진 카메라 없음, 정해진 미술 없음, 정해진 음악 없음, 정해진 편집 없음, 정해진 거 다 없음, 이라는 자멸적 어조의 자막이 순서에 의거하여 나타나고 인디 밴드 ‘삐삐롱스타킹’이 부르는 노래 ‘나쁜 영화’가 울려 퍼진다. 노란색으로 머리를 물들인 보컬 이윤정의 울부짖는 듯한 보이스가 “책상 위에 수많은 아주 좋은 영화가/ 잠을 자고 있는데 식탁 밑엔 수많은/나쁜 영화... (좋은) 영화 (나쁜) 영화 (좋은) 100편 (나쁜) 1편/말도 안돼 기분 나쁜 그 제목은 나쁜 영화...”로 이어지는 가사를 통해내는 동안 아이들은 어두컴컴한 기차 안에서 무리를 지어 본드와 가스를 불고 갈피를 잃은 저들의 내면적 정황이 ‘환각 재현’이라는 제목의 키치적인 애니메이션으로 재생된다. 다음 쇼트에서 이어지는 한 장의 영정사진, 가스와 본드를 과다 흡입한 한 여자아이의 장례식장에서 지루해진 아이들이 춤을 춘다. 순간 나쁜 조감독의 나레이션이 나쁜 감독을 꼬시기로 했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우리가 본 것은 나쁜 조감독이 찍은 단편영화의 러프컷인가? 시험에 든 나쁜 감독. 나쁜 조감독의 꾐에 넘어간 나쁜 감독은 생각나는 대로 사는 아이들에 관한 생각나는 대로 찍는 영화를 시작한다. 나쁜 배우들을 구하는 광고를 통해 모인 아이들은 그들이 쓴 짧은 이야기를 자기 멋대로 찍는다. 상술(上述)한 < 나쁜 영화 >(1997)의 도입부는 서울의 10대 청소년들과 그들의 무모하고 환멸에 찬 라이프 스타일에 관한 혼란스럽고 무정부적인 이야기의 개요를 이해하는 열쇠가 된다. 서정적이고 영적인 것에서부터 정치적으로 민감한 소재를 다뤘던 장선우의 이전 영화들과 달리 <나쁜 영화>는 길을 잃은 아이들처럼 거칠다. <제목이 없는 영원한 나쁜 영화>(Timeless, Bottomless Bad Movie)라고 하는 영문 제목이 암시하는 바처럼 <나쁜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영화의 구조화되지 않은 특성을 자랑스럽게 여기면서 기성 영화의 기준과 규칙, 문법을 따를 생각이 없음을 선언한다. 항상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열망을 가졌던 감독 장선우는 이제 나쁜 영화를 만들 때가 되었다고 판단하였고, 그 결과는 놀랍다. 자학과 폭력, 섹스, 환각, 범죄의 만화경을 묘사하는 이 영화는 갈피를 잡지 못하는 10대 아이들이 쓴 대본을 재연하면서, 때로는 술 취한 거리의 사람들을 다큐멘터리의 방식으로, 특정 장면에서 애니메이션과 게임을 삽입하는 예술적 만용으로, 일부는 35mm, 다른 일부는 16mm 내지는 슈퍼 8미리로 촬영하였다. 그러나 영화는 경계를 짓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 모든 경계를 지우가 위해 다양한 출처의 이야기와 장르, 형식, 캐릭터를 비빈다. 영화의 1/4 지점에서 서사는 기성의 논리와 계율을 거부하는 10대들의 삶에서 자본주의적인 체제의 바깥에 있기를 선택한 홈리스의 삶으로 건너간다. 외환위기가 한국 사회를 강타한 1997년 한국의 경제적 투쟁이 버려진 이들에게 미친 영향을 탐구하는 장선우의 방식은 틀에 박힌 사회에 풍요에 저항하는 거리의 방랑자들에 대한 사실과 거짓의 앙상블이다. 이때부터 영화는 거친 젊은이들, 안전하게 부유한 삶을 좇는 체제를 회의하는 홈리스들의 정신적 풍경을 기린다. 장선우는 새와 레드변, 감자, 이쁜이, 아이떡 따위의 유치한 별명으로 불리는 10대 등장인물들이 지루함의 공백을 범죄, 학대, 장난, 폭력 및 섹스로 채우려고 하는 맹목적인 행동들을 스토리로 만들어 연기하도록 하고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서울역 주변을 어슬렁대는 홈리스들의 일상과 10대들의 존재 양식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가를 질문한다. 체제로부터 버림을 당한 이들의 무모한 욕망이 혈관을 타고 흐른다는 것만이 저들의 공통점일까? 10대 청소년들과 홈리스들 사이의 접점을 상상하게 하면서 카메라는 즉흥적인 퍼포먼스와 느슨한 플롯에 의해 사전에 설계하지 않았던 의미가 발발하는 과정을 따라간다. 원초적인 분노, 평온한 포기, 특정한 순간을 위해 사는 것, 경고를 무시하고 사는 무정부주의적인 삶의 가치를 찬미하는 장선우의 예술적 자의식은 도전적이다. 형식적으로 <나쁜 영화>는 유사 다큐멘터리적인 스타일로 거리의 유목민들을 묘사하는 픽션 영화이다. 시네마베리테 양식으로 촬영되었지만 재연 에피소드와 현실, 구성된 이벤트 사이를 오가며 현실과 무대 사이의 경계를 흐리기 위해 애쓴다. 계획과 우연을 병합한 사이비 다큐멘터리 형식은 영화가 사실과 허구의 경계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게 한다. 카메라를 든 영화 스태프가 길바닥에 주저앉은 한 소년을 인터뷰하는 장면을 보자. 이제부터 카메라를 든 사람과 붐 마이크가 화면 안으로 들이닥친다. 여기서 카메라는 스스로 참여적이 되는 동시에 촬영 대상의 개입을 촉발하는 촉매가 된다. 영화적 진실을 생산하는 순간처럼 의도된 그 장면에서 실제적인 세계에 속한 자연인은 허구적 스토리가 요구하는 캐릭터를 연기한다. 실재하는 존재와 대상에게 부여되는 역할이 중첩되어 어느 한 가지로 규정하기 힘든 영화적 실천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렇게 연출된 무수히 많은 장면들은 상당한 정도의 혼란을 유발한다. 카오스는 캐릭터들의 재현 방식과 그들의 행동 뿐 아니라 운동의 방향에서도 발생한다. 때때로 등장인물들은 의도적으로 화면서 속도를 덧붙이면서 골목길을 질주하거나 추적자들의 추궁을 피하기 창밖으로 뛰어내린다. 섹스와 성적인 방종은 자유로운 행동 양식의 소여(所與)인 것처럼 변덕스러운 스타일로 전달되고 목표나 의도, 지향을 버린 말과 행위, 결과가 수반된다. 예술의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을 습격하고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적 태도와 유머, 냉소를 시전하는 특성은 어떤 한국영화도 도달하지 못했던 미학적 혁신의 지점을 보여준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에게는 실제 영상과 가공된 재연의 흐릿한 경계가 명확해지는 장면 중 하나는 송강호와 안내상, 기주봉, 이문식 등 익숙한 얼굴의 배우들이 홈리스 분장을 하고 실제 홈리스들과 섞여 들어가는 장면일 것이다. 찬송가를 부르는 거리의 전도자들 사이로 슬금슬금 이동하여 능청스럽게 박수를 치며 노래를 따라 부르는 송강호는 픽션과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지우는 전략을 육체적 제스쳐를 통해 몸소 실행한다. 기주봉은 어린 딸을 데리고 다니는 서울역의 홈리스가 되어 현실의 풍경 속으로 들어가고, 진짜 행려들과 3개월 간 합숙을 한 안내상은 놀라운 친화력으로 진짜와 가짜의 구분을 무색하게 만든다. 10대 아이들, 홈리스들과 달리 이 진짜를 연기하는 가짜들은 오랜 기간 훈련한 스킬을 발휘하여 능숙하게 현실에 자리를 잡는다. 감독과 스태프, 감독과 배우, 배우와 일반인, 진짜와 가짜, 선과 악, 미와 추, 현실과 허구 따위의 기준들을 깔아뭉개는 장선우의 방임적 태도는 야심적이다. 현재 시점에서 회고해 보건대 <나쁜 영화>의 위상은 시네마베리테와 에세이 필름의 언저리에 둘 수 있을 것 같다. 이 영화는 대상들의 세계로 들어가 의도된 구성을 포기하고 그들에 의해 영화가 생성되는 과정을 조직한다. 젊음의 기쁨과 발견의 시기를 거리에서의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묘사하면서 장선우는 미학적 논쟁을 야기할 수 있는 방식으로 일체의 영화적 형식을 제거한 상태로 나아간다. 진실(과 진실한 사람)을 기록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를 말하고 그 과정에서 매체의 성질을 다시 설정하며, 가치판단의 기준을 재정의하도록 하는 불온한 의도는 시네마의 역량을 시험한다. 도전적이지만 의도적으로 한계를 두지 않는 이 이야기는 체제에 저항하는 존재들의 삶과 예술적 반항의 태도를 일치시킨 현대 한국영화의 시금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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