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판사
- 감독
- 홍은원
- 제작년도
- 1962
- 출연
- 문정숙, 김승호, 김석훈, 유계선, 엄앵란, 박암, 방성자, 황정순, 복혜숙, 김동원, 강선희, 추석양, 김숙일, 김현주, 서월영, 조항, 최삼, 김정옥, 남미리, 라정옥, 윤신옥, 임운학, 이종하, 김주오, 이한종, 김현미, 박미혜, 조강수, 곽태용, 전운출, 하룡, 김홍, 박일, 마틴 모나, 한진
< 오마주 >는 신수원 감독의 다섯 번째 장편 연출작이다. 신수원 감독은 < 레인보우 >로 2010년 장편데뷔한 후 올해까지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꾸준히 영화를 만들어왔다. 장편영화를 개봉하지 않은 해에는 옴니버스 영화, 텔레비전 단막극, 다큐멘터리를 연출하며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영화연출에 전념해 왔다. 한국영화에서 성별과 나이를 막론하고 이만큼 생산적인 감독은 드물 정도다. 데뷔작인 <레인보우>는 교사를 하다 그만두고 서른아홉의 나이에 첫 장편영화를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감독지망생 지완(박현영)의 좌충우돌을 그린 자전적인 영화다. <레인보우>는 저예산 독립영화였던 만큼 크게 흥행을 하지는 못했지만 여러 영화제에 수상을 하고 비평적으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배급사가 제공한 줄거리에 따르면 <레인보우>는 최악의 상황에도 “꿈”과 “희망”을 잃지 않고 도전을 멈추지 않는 재기발랄하고 따뜻한 “응원”의 성장영화이자 음악영화다. 물론 이 설명은 전혀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의 진정한 매력은 전형적인 성장영화를 넘어선 ‘근본 없음’과 지리한 일상에 느닷없이 침투하는 ‘날 것의 폭력’을 응시하고 그려낸 데 있다고 본다. 오래 전 태백의 한 미디어센터에서 <레인보우> 공동체 상영과 토크를 진행한 적이 있다. 평일 낮이었던 탓인지 대부분의 관객이 노년층이어서 낯선 독립영화 스타일과 영화감독의 장편 데뷔 이야기에 공감을 해줄까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그 우려는 기우였다. 관객들은 영화계의 맥락을 잘 알지 못하면서도 주인공 지완의 고생담을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코미디로 즐겼다. 특히 모든 시도가 엎어지고 지완이 친구인 조감독과 함께 바닷가를 지나다 우연히 마주친 영화현장에서 지인의 부탁으로 ‘행인3’으로 출연하는 장면에서는 예상을 넘어선 박장대소가 나왔다. 마지막 즈음에 나오는 이 장면은 영화의 클라이맥스라 할 수 있다. 지인인 감독은 그냥 지나가기만 하면 된다고 했지만 막상 연기가 시작되자 만취한 남자를 연기한 배우는 느닷없이 행인인 지완의 뺨을 때린다. 만취한 남자: 아줌마 어디가? 어디 가냐고? 행인3(지완): 몰라요. (만취한 남자가 행인3의 뺨을 때린다) 감독은 지완의 리액션이 맘에 들지 않는다며 계속 NG를 부르고 지완은 열 번에 걸쳐 뺨을 맞는다. 바스트 쇼트으로 반복되는 열 번의 뺨 맞는 장면은 지완의 움찔하는 신체반응과 매우 사실적인 사운드로 관객들의 몸도 오그라들게 만든다. 지완은 열 번째에 이르자 마침내 참지 못하고 “아프잖아! 그렇게 뺨을 때리고 그래. 그렇게 만만해 보여. 내가 그렇게 우습냐고. 나도 때리면 아프다고.”라고 폭발하며 행인의 존재감을 보여준다. 이 순간 일상과 판타지, 현실과 연출, 카메라 앞과 뒤, 스크린 안과 밖의 경계가 급격히 무너져 내린다. 신수원 감독 특유의 비린내 나는 날 것의 폭력은 거리를 지우고 포장을 벗겨버린다. 그것은 현실의 은유라기보다는 직접적인 직유이고 관객들은 스크린 위의 폭력을 슬랩스틱 코미디를 보듯이 반응한다. 지완의 친구인 조연출은 “맞으니까 좋냐? 이 매저키스트, 또라이야. 어디가 그렇게 가고 싶었냐.”라고 웃으며 말한다. 이 말은 관객들에게도 적용된다. 자학적인 폭력은 지완과 관객 모두에게 이상한 카타르시스의 순간을 만들어낸다. 신수원 감독은 <레인보우>를 만들면서 지완의 간절한 바람을 이루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내용은 지난한 실패의 과정만을 담는다. 이로써 ‘성취’와 ‘실패’는 구분되지 않고 서로 엉키게 된다. 근본 없음과 느닷없는 폭력은 신수원 감독의 이후 장르영화들뿐만 아니라 최근작인 <오마주>에서도 도드라지는 특징 중 하나이다. <오마주>에서는 여자들이 만든 창작물들은 빈번히 실종되며 연속성을 갖지 못하고, 여성 창작자들은 뿌리 없는 자기 욕망과 쓸모의 근거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한다. 근본 없음은 자유로움을 줄 수도 있지만 또한 때때로 생존을 힘들게 만들며 심지어는 자기 존재에 대한 파괴적인 상황을 야기할 수도 있다. <오마주>는 지완(이정은)과 친구인 프로듀서 그리고 남편과 아들로 구성된 가족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레인보우>의 자전적 세계관을 고스란히 가져온다. 지완은 이제 조금 더 나이가 들고 세 번째 영화 ‘유령인간’을 개봉했다. 흥행은 너무나 어렵고 그래서 첫 번째 영화만큼 그 이후의 영화 만들기도 녹록치 않다. 여전히 ‘성취’와 ‘실패’가 얽혀있다. <레인보우>에서 시나리오가 잘 써지지 않는 가운데 뜬금없이 개미의 환영을 마주했던 것처럼 <오마주>에서도 지완은 갑자기 ‘되’와 ‘돼’가 헷갈리며 시나리오의 진도를 뽑아내지 못한다. 장편데뷔가 <레인보우>의 미션이었다면, 이제는 영화계에서 생존하기가 목표가 된다. <레인보우>에서처럼 남편과 아들은 지완의 창작 작업을 막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전폭적으로 이해해 주지도 않는다. 그는 외롭고 막막하다. 여전히 기댈 곳이 없는 상황, ‘근본 없음’이 그의 뿌리가 된다. 오랜 동반자였던 프로듀서도 영화를 그만둬야겠다고 하는 상황에서 지완은 과연 영화를 계속 만들 수 있을까? 만들어야 할 동기는 무엇일까? 지완이 따라갈 수 있을 만한 선례가 있는가? 심란한 상황에서 지완은 영화박물관에서 1960년대 활동하던 여성 감독 홍재원의 새로 발굴된 영화 프린트에서 사운드가 소실된 장면의 복원을 위한 연출을 의뢰받는다. 지완은 사운드 복원을 넘어서 아예 사라진 장면의 프린트를 찾아내기 위해 홍재원 감독의 주변인들을 찾아다니며 그의 흔적을 쫒는다. 그러는 동안 지완이 사는 아파트의 주차장에서 자살한 여자의 사건을 알게 되고 한참 동안 집에 들어오지 않는 옆집 여자가 실종되었을 수도 있다는 의심을 품게 된다. <오마주>에 등장하는 1950-60년대 영화계에서 활약한 여성 삼인방 홍재원과 박남옥 감독 그리고 이영희 편집감독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다. < 여판사 >는 한국영화사에서 두 번째 여성감독으로 기록된 홍은원의 데뷔작이다. 실제로 신수원 감독은 <레인보우> 개봉 이후 MBC에서 창사기획 특집으로 <여자만세>(2011)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박남옥 감독과 홍은원 감독에 대해 알게 되었다고 한다. 홍은원 감독은 약 12년 간 스크립터, 편집, 조감독으로 일하다 1962년 <여판사>로 데뷔를 하게 된다. 이 영화의 프린트는 유실되었다가 2015년 발굴되어 복원되었다. 하지만 일부 장면의 사운드가 온전치 않은 상태였다. 한국 최초의 여성 판사였지만 1961년 서른셋의 나이에 타살인지 사고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갑자기 사망한 황윤석의 실제 이야기를 소재로 삼은 영화였다. 이 영화는 “홍일점 여판사에 홍일점 여감독”이라는 광고카피를 달고 있었던 만큼, 1960년대 각자의 직군에서 거의 유일했던 여성 전문직업인들을 연결짓는다. 여성 감독들에게는 끊임없이 텍스트 안과 밖을 연결 지으려는 시도가 스스로도 그리고 타인들에게서도 보인다. 이것은 때로 창조적 자양분이 되기도 하고 또 때로는 독이 되기도 한다. 박남옥 감독이 < 미망인 >(1955)으로 장편데뷔한 후 차기작을 연출하지 못했던 것과 달리, 홍은원 감독은 세편의 장편영화를 만든다. 그러나 나이 들어서도 계속 영화를 연출하고자 했던 바람은 이어지지 못했다. 홍은원 감독은 <여판사> 연출을 맡으며 실제 사건이나 원작 시나리오와는 다른 결말을 원했고 수정해 연출했다고 한다. “오랜 세월을 두고 불행했던 이 나라 여성들”을 위해 법관으로서 일하겠다는 굳건한 사명감을 갖고 판사가 된 진숙(문정숙)은 시댁과 남편의 괴롭힘 속에서 결국 가부장제 체제에 굴복하고 판사를 그만두고 희생적인 며느리 역할을 맡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시어머니가 살인죄를 뒤집어쓰자 변호사로 변신해 법정에서 변론하며 공적 역할과 사적 역할을 협상하고 생존을 꾀한다. 시어머니를 비롯해 남편과 시댁은 여성이 판사로 일하는 것은 쓸모없는 일일 뿐 아니라 심지어 가족의 해체를 촉진하는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주장한다. 대의명분이 중요한 진숙은 사적영역에서 가부장제가 요구하는 역할을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의 욕망과 존재 자체를 부정 당한다. 진숙은 자신을 억압했던 바로 그 시어머니를 살리고 가족을 유지하기 위해 그리고 여성들을 도우려 했던 대의를 실천하기 위해, 변론을 통해 공적영역과 사적영역 모두에서의 자신의 가치를 재증명한다. 여성이 되고, 여성으로서 생존하는 것은 가부장제가 구분지어 놓은 경계를 허무는 일이 된다. 그런 면에서 법정의 변론 장면에서 진숙의 설명적인 보이스오버와 사건을 재구성하는 플래시백으로 명징하게 재현되는 것 그리고 그중 일부 사운드 유실된 것은 너무나 상징적이다. 홍은원 감독은 당시 여성들에게 일단 실종되거나 죽지 않고 ‘생존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수정한 시나리오의 결말에서 일단 실제 사건과 달리 진숙을 살린다. 그리고 생존 그 자체에서 그치지 않고 설사 일부 타협이 있을지라도 법관으로서의 공적영역을 되찾아준다. 그래서 <오마주>의 지완도 실종된 프린트 일부를 찾는 것과 옆집 여자의 생존을 확인하는 것이 모두 중요하다. 지완은 이제는 폐허가 된 오래된 단관 영화관에 버려진 밀짚모자에서 우연히 유실된 프린트를 찾는다. 밀짚모자의 챙을 세우기 위해 사용된 필름 조각들은 설사 영화로서 기능하지 못했을 때조차도 또 다른 사용가치를 부여받고 있었다. 지완은 왜 그렇게 유실된 장면을 찾으려했던 것일까? 실종으로 뚝뚝 끊기며 연결되지 않는 서사는 어떤 폭력을 야기하는가? 여성들이 자신의 경력에서 일이 잘 진척되지 않아 자기회의에 빠질 때 성별은 징크스가 되기도 한다. 성차별적인 사회에서 여자라는 성별이 혹시 일에 방해가 된 것은 아닐까하는 의심. 그 의심은 때때로 사실에 근거한다. 그럴 때 역사 속 선례는 그 징크스를 깨는 모티브가 될 수 있다. 홍은원 감독의 경우 영화 3편을 연출하고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하면서 나이 들 때까지 평생 영화를 만들겠다는 자신과의 약속은 지키지 못했지만, 데뷔작 영화 한편을 만들고 더 이상 영화를 연출하지 못했던 박남옥 감독보다는 나아간 것이다. 홍은원 감독은 박남옥 감독, 최은희 배우/감독/제작자 같은 선배, 동료들과 함께 이것을 만들어 간 것이다. 군데군데 비어있고 희소하고 유실되어서 소재와 개연성이 떨어지는 것 같은 여성 영화사에서 여성영화인들은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회의감과 근본 없음에 빠진다. 그럼에도 그 희귀한 조각들을 우연히 발견했을 때, 특히 여전히 모자의 틀을 잡아주는 심으로 여전히 사용가치를 발휘하고 있을 때 그것은 징크스인 동시에 영화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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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직 여성 기술 스태프로서의 편집기사 편집기사 김영희(金英姬)를 조명하는 것은 한국영화를 추동한 큰 힘이었지만 잘 드러나지 않았던 기술 인력의 존재를 한국영화사에 기입한다는 큰 의미가 있다. 특히 2007년 김영희의 구술채록은, 감독이나 배우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영화사 연구의 작가주의적인 비평의 전통을 벗어나 한국영화사의 이면과 빈 곳을 채워줄 수 있는 연구방법론으로서의 구술사의 힘이 더 발휘될 수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주요 스태프들보다는 ‘뒷 스태프들’(편집, 미술, 특수효과, 녹음 등)의 구술을 보다 더 충분하게 채록하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갖는다. 더불어 김영희를 상세히 기록하는 일은 씨네-페미니즘의 틀로 한국영화사를 재구성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전문직 여성 영화인의 존재와 그 역사에 대한 재발견이기도 했다. 근현대 한국 사회의 공적인 영역에서 여성의 활동이 많지 않았던 데다가 얼마 안 되는 여성 전문인의 역사적 자취를 찾기 힘든 것처럼, 영화계에서도 여성 전문 인력이 활발하게 활동한 공적인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까지 여성 영화감독은 박남옥, 홍은원, 최은희, 이미례 네 명뿐이었고, 여성이 영화계에서 담당한 분야는 주로 배우였다. 그나마 일부가 연출부, 시나리오, 스크립터, 의상과 편집의 분야에서 활약했다. 특히 한국에서도 여성이 기술 인력으로서 전문성을 담보하고 분야로서는 편집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 1, 2] 서울 미공보원 시절 편집하는 김영희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시작한 영화 인생 김영희가 영화인의 길로 들어선 것은 큰 언니(김갑순)의 남편인 촬영기사 양세웅의 덕분이었다. (양세웅의 딸 양성란도 김영희에게 편집을 배웠으니 가히 영화인 집안이라 해도 무리는 아니겠다.) 그녀는 1924년 충청도 공주에서 김동화와 김옥봉의 6녀 2남 중 다섯째 김옥례로 태어났다. 운송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덕분에 꽤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라도 순천으로 이사 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고녀를 다니고 있을 때만 해도 그저 노래 부르기를 즐겨 하고 영화 보기를 좋아하던 소녀였다. 김영희가 광주고녀 재학 중에 가족은 서울 청량리로 옮겨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자 자신의 학업은 포기하게 되고 큰언니의 부탁으로 형부의 손에 이끌려 일제의 군국주의 선전영화를 제작하던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이었다. 19살이 되던 1943년부터 1970년 즈음까지 김영희는 수백 편의 문화영화, 뉴스영화, 기록영화와 극영화를 편집하며 27년 가량을 현역에서 활동했다. [사진 3, 4] <춘풍>(박기채, 1935)의 한 장면(상)과 스태프 사진(하). 이 영화로 박기채는 연출로, 양세웅은 촬영으로 조선영화계에 출사표를 던졌다. 도아키네마에서부터 수련을 같이 한 이 둘은 이후 콤비가 되어 활동했다. 김영희의 형부 양세웅(1906~?)은 일본 교토의 1924년 도아키네마(東亞キネマ) 촬영부에 입사해 영화를 시작했고, 동활영화(東活映畵) 촬영부에서 다년간 촬영을 연마해 1932년 조선인 최초로 촬영기사가 되었다. 귀국 후 양세웅은 <순정해협>(신경균, 1937). <군용열차>(서광제, 1938), <한강>(방한준, 1938), <애련송>(김유영, 1939), <새출발>(1939), <처녀도>(1939)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 후반 촬영기사로 맹활약하면서, 조선의 촬영 기술을 도약시키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사진 5, 6] 귀국 후 양세웅이 촬영한 작품 <순정해협>(신경균, 1937)의 한 장면(상)과 영화 <한강>(방한준, 1938) 속 장면(하) 1940년대부터 양세웅은 친일영화 제작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941년 <반도의 봄>(이병일)의 촬영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노래를 잘 불렀던 17세 김영희는 큰언니의 추천으로 이 영화의 주제가를 부를 기회가 있었지만 형부의 반대가 심했다. 대신 그는 처제를 조선영화주식회사 촬영소의 현상실 조수로 취직시켰다. 김영희가 출근하던 조선영화주식회사 현상실은 광희동(본사는 남대문 근처)에 있었다. 그는 현상과 편집을 하던 양주남 밑에 있었다. 먼저 현상 기술을 익히고, 곧 양주남이 책임지고 있는 편집실에서 편집 조수로 일하게 되면서 영화계에 입문한다. 조선영화주식회사에 막 들어가자마자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해변 장면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던 에피소드가 있지만 이 영화는 그녀가 처음 네가 편집을 한 영화가 될 줄은 몰랐다. [사진 7, 8] 김영희가 주제가를 부를 수도 있었던 <반도의 봄>(이병일, 1941)의 촬영 스틸(상), 그리고 처음 네가 편집을 한 영화인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한 장면(하) 해방이라는 열린 시공간 속에서 조선의 영화 인력들은 민족영화 제작을 향한 의지를 가지고 새로운 일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때 김영희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조선영화주식회사 시설에서 후반작업을 하고 있던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의 편집조수를 했다. 1946년부터 1년 간 김영희는 ‘이필우 프로덕션’이라고 회고하는, 중앙청에 위치했던 미군정청의 공보부 영화과로 자리를 옮겨 문화영화, 기록영화, 뉴스 등에 자막을 입히는 작업과 편집을 담당했다. 그러다 짧은 미군정기가 끝날 무렵인 1947년 이필우의 권유로 미공보원(USIS)으로 자리를 옮겨 편집기사로 함께 일했다. 6.25 전쟁 당시 곧바로 피난을 가지 못해 인민군 100일 적치(敵治)의 서울에 있었다. 그때 강홍식에게 평양국립촬영소로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보위국에 끌려가 자술서를 쓰는 등, 중앙청 공보실의 편집실에서 북한군에게 9일 동안 북한군의 전쟁 촬영분에 대해 편집을 강요당했다. 식민지 시기, 해방, 건국과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김영희는 무비올라 앞에서 조선-일본/한국/미국 영화를 잘라 붙이고 있었다. [사진 9, 10] 진해와 상남 시절 미공보원에서 일하는 김영희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리에 이루어지자 그 틈을 타 북한군에게서 탈출하여 숨어 지냈는데, 이때 형부 양세웅은 북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1950년 12월에 미공보원이 진해로 피난하면서 김영희도 공보원을 따라 진해로 왔다. 이후 계속 진해(2-3년), 상남(2년)에서 미공보원에서 편집기사로 근무했다. 그러다가 1955년 즈음에는 1년가량 진해의 해군 교재창(敎材廠)에서 교육영화를 편집하기도 했다. 이때 미공보원이 제작한 <주검의 상자>(김기영, 1955)를 촬영하러 온 최무룡과 강효실을 만난 일도 있다. 진해와 상남에서 일하던 김영희가 충무로와 연을 맺은 것은 잠시 서울에 올라왔던 길에 일주일 간 이규환의 <춘향전>(1955) 편집을 담당해준 덕이었다. 이 즈음 충무로는 폐허를 딛고 활력을 띠기 시작했는데 김영희는 아예 서울로 터전을 옮겨 와 이만흥의 <결혼진단>(1955), <원한의 성>(1955)를 시작으로 극영화에 본격적으로 투신했다. 1 이 시기 아시아재단의 지원으로 정릉에 만들어진 정릉촬영소에서 2년 간 편집 일을 하기도 했다. [사진 11] 해군 교재창의 편집실 모습 충무로 입성, 신필름 편집실 생활 [사진 12, 13] 김영희가 편집한 <춘향전>(이규환, 1955)의 한 장면(상)과 <원한의 성>(이만응, 1955)의 신문 광고(하) 2, 3년 간은 알음알음 충무로의 호텔을 전전하며 <백치 아다다>(이강천, 1956), <황진이>(조긍하, 1957), <무영탑>(신상옥, 1957) 등을 편집했다. 편집 1세대 양주남, 유재원을 이어 김영희는 편집 2세대라 할 수 있는 김희수, 이경자, 김덕진 등과 함께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충무로 극영화를 맹렬히 이어 붙였다. 1958년부터 4년 간 신필름 편집실로 출퇴근하면서 편집조수로 박양자와 조카 양성란을 편집 인력으로 키워내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시절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 <지옥화>(신상옥, 1958), <촌색씨>(박영환, 1958),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 <성춘향>(신상옥, 1961), <연산군(장한사모 편)>(신상옥, 1961) 등 신필름의 작품 대부분이 그녀의 손을 거쳤다. 좀 더 전문적이고 적극적으로 편집 일을 하기 위해 충무로 3가 스타다방 맞은편에 김영희 편집실을 차리고 독립한 그녀는 1970년 영화계를 떠날 즈음까지 120여 편의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 14, 15] 신필름 편집실에 근무하던 시절, 조카 양성란과 함께 편집한 신상옥의 <열녀문>(1962) 속 장면들. 이 영화로 김영희는 제2회 대종상 편집상을 수상했다. 스타다방 옆 김영희 편집실, 인서트의 재발견 1편당 5만원을 받고 한 달에 서너 편씩 편집을 했던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밤낮없이 김영희 편집실이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어떤 편집 기계를 썼던 것일까, 극영화 편집 규칙과 스타일은 어땠을까. 감독과 편집자의 관계란 어떤 것이었을까. 미공보원에서 일했던 그녀는 스플라이서(splicer)와 무비올라(moviola)를 일찍이 접했다. 충무로에 개인 편집실을 내고 극영화를 편집했던 1960년대에는 조선영화주식회사와 미공보원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직접 편집대를 주문⋅제작해 돋보기와 스플라이서로 편집을 하였다. 완성된 16미리 영화의 경우는 본인이 소유한 영사기에 돌려보고, 35미리의 경우는 영사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시사했다. 편집에 철두철미했던 신상옥,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조긍하와 이강천 감독 같은 이들은 김영희가 재촬영을 요구해도 용인해 줄 정도로, 믿고 맡기는 편집인으로 그녀를 택했다. 이 시기 편집의 장면 전환은 커트(cut)-커트(cut)로 연결되어 급박하게 전환되는 편집 스타일보다는 부드럽게 장면이 전환되는 방식이 더 선호되었다. 그래서 페이드인(fade in)-페이드아웃(fade out)과 오버랩(over lap)을 사용하여 ‘스무쓰(smooth)’한 장면 전환 능력이 편집자에게 있어 가장 요구되었다. [사진 16] 조긍하 감독 [사진 17] 이강천 감독 “편집을 하면서 느끼는 점인데요. 왜 감독들이 「인서트·카트」를 쓸 데에다 안 쓰느냐 하는 것을 역설하고 싶어요.” 2 인서트(insert)는 영화에서 극의 흐름을 전환하고 또 잠시 극의 속도를 조절하기 위한 휴지기를 주기 위한 장치로 연출자는 이를 종종 은유적인 방식으로 사용해 자신의 미학을 드러내기도 한다. ‘스무쓰(smooth)’한 편집이 대세였던 당시 김영희는 감독들에게 인서트 장면의 삽입을 제안하곤 했다. ‘화면이 부드럽고 좋기’로 입소문을 타자 인서트 장면이 필요한 감독들은 종종, 촬영 시에 충분히 인서트를 따놓지 못해서 난감할 때 그녀를 찾았다. 특히 기록영화에서 길게 찍어 두었던 설경, 바닷가 모래사장 경치, 석양의 풍경 같은 것은 하나 둘 모아두었다가 연출자가 특정 장면을 요구하거나 극의 흐름을 조절하기 위해 편집기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인서트 커트가 삽입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단풍이 짙은 명산, 비 오는 서울 거리 같은 커트는 촬영기사들의 손에서 만들어져 항상 편집실 한쪽에 걸려있었다. 우리가 쉽게 넘겨버렸던 혹은 감독의 미학으로 불렸던 소소한 그 인서트는 어쩌면 편집기사의 손에서 만들어졌던 장면이었을지 모른다. 충무로의 걸출한 그녀들, 삼바가라쓰(さんば-がらす) [사진 18, 19] 1984년 충무로의 '삼바가라쓰' 김영희와 박남옥(상), 김영희와 홍은원(하)의 사진 김영희: 인제 남옥이랑 웬만큼 알게 되니까요. 그리고 역시 감독, 여감독이라놔서 그런지 서로 신경이…… 나도 응, 홍은원 씨 보고 싶고, 또 홍은원 씨는 또 김영희라는 사람을 보고 싶고. 이러니까 저 서이가 인저 만나노니까 ‘삼바가라쓰’ 3 라고 서이서 아주 그냥 정이 들어가지고, 면담자: ‘삼총사’ 이런 말이에요? 김영희: 예, 삼…… 여자니까 삼총사 이런 말은 못하고, 우리는 일본말로 ‘삼바가라쓰’. <중략> 서이서 잘 돌아다녔었어요, 만나서. 그때 친해진 게, 여자니까 서로 기냥 말도 못 하게 친해지드라고요. <중략> 그니까 지가 바쁠 때는 “야, 홍 감독. 자고 가라, 우리 집에 가서 자자.” 그러면 “느이 영감 있는데……” “영감, 저 방에 가라 그러고 나하고 자면 되잖아.” 이러면서 지냈었어요, 서로가. 우리 집에 오면 또 영감님하고 얘기도 잘하고요, 말이 통하니까. 그리고 응, 오면은 같이 밥도 먹고, 드뤄 눠 자고, 차도 먹고, 이러고 참. 남옥이는 남옥이 대로 바뻤지만은, <중략> 서이 만나노면 아주 그냥, 남옥이가 그냥 사내 같이 굴었어요. (웃음) <중략> 그런 정도로 우리는 그렇게 지냈지, 뭐 감독, 편집기사 이런 정도로서, 따악 한계를 지어놓고 일을 한 게 아니었었어요. 4 김영희의 구술문을 보면, 남성의 활동이 단연 독보적인 영화 제작현장에서 여성영화인들 간의 공적 사적 교류와 우정에 대해서 전면화하는 구술들이 있다. 이 부분이야 말로 여성영화인들의 구술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부분인데, 가정을 가진 동시에 같은 직종의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우정과 일을 어떻게 함께 병행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미망인>(1955)을 만든 박남옥 감독과 <여판사>를 만든 홍은원 감독은 충무로의 ‘삼바가라스’였다. 홍은원의 작품 <홀어머니>(1964), <오해가 남긴 것>(1966)은 친구 김영희의 손을 거친 것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 배우를 제외한 여성 스태프들만의 모임이었던 영희회는 남성적인 영화 제작현장에서 여성 스태프의 권익을 위해 모였다. 김영희의 구술을 통해, 역설적으로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남성적인 작업 환경 속에서 비교적 보조적인 역할의 직업군에 종사하는 직업 생명이 짧은 여성 스태프들은 모임을 지속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모임은 아쉽게도, 곧 와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20, 21] 홍은원의 <홀어머니>(1964)와 <오해가 남긴 것>(1966)의 포스터. 두 작품 모두 김영희가 편집을 담당하였다. 격변의 시기 국가기관과 영화, 그 속에서 활약한 영화인 김영희 공식적으로는 이봉래의 <역전파출소>와 <장미의 성>(1969)를 마지막으로, 1970년 즈음 그녀 나이 마흔 아홉에 편집실을 접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27년을 재봉틀 같은 편집기 앞에 앉아 바느질 하듯 밤낮없이 일을 했고, 이 중 15년은 충무로에서 극영화를 자르고 붙였다.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인화와 현상을 익혔고, 워낙 ‘기계에 관심이 많아’ 영사 일도 배우고, 결국은 양주남의 편집조수를 하면서 어깨너머로 편집을 배웠다. 일본인 스크립터에게서 일본에서는 어떻게 편집을 하는지 들어보고, 외국영화를 보면서 편집하는 방법들을 공부했다. 김영희의 영화 인생은 역경의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국가 기관과 관련해 그 줄기를 연명해왔던 한국영화사 제작 인력들의 굴곡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제치하의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근무하던 상황과 광복 후에는 다시 미국의 영향 하에 군정청 공보부 영화과에서 일하던 주변 상황, 이후 미공보원으로 다시 재편⋅흡수되었던 제작 인력들의 활동 경로가 그녀의 행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녀는 연출자가 요구하지 않아도 인물의 행동 시간을 스스로 계산해서 맞추고, 조심스럽게 편집 순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보다 안정적이고 ‘스무쓰’한 극의 흐름을 위해서 인서트 필름을 요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모두는 그러한 것이 영화의 원활한 흐름과 조화를 최우선 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편집자의 능력으로 꼽았다. [사진 22, 23, 24] 김영희가 충무로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편집한 이봉래 감독의 작품 <역전파출소>(1969)와 <장미의 성>(1969) 숨겨진 여성영화인의 역사, 한국 최초의 여성 편집기사 김영희 편집기사 마가렛 부스(Margaret Booth, 1898~2002)는 1915년 데이비드 그리피스의 네가편집자로 함께 일하면서 <동도Way Down East>(1920)의 명장면을 만들어냈고, 1919년에는 MGM으로 가 일하면서 할리우드의 편집 규칙을 만들어갔다. 5 제인 게인즈가 언급했던 것처럼 무성영화기를 비롯,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여성 영화 인력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들은 배우로, 감독으로, 제작사 사장으로, 편집자로 오늘날 못지않게 넓은 분야를 점령했었다. 6 숨겨진 영화사를 발굴해낸, 지난 100년 간의 여성 편집기사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편집 : 여성 편집기사(Edited By: Women Film Editors)>(Su Friedrich, 75min.)에서 던지는 질문을 살펴보자.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빅터 플레밍, 1939)를 편집했고, <알렉산더 네브스키([Alexander Nevsky]>(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1938)를 편집했고, <400번의 구타(The 400 Blows, 1959)>(프랑수아 트뤼포, 1959)를 편집했고, 아카데미 편집상을 가장 많이 수상했고, 그저 ‘자르는 사람(cutter)’을 ‘편집 기사(film editor)’라는 전문 분야 종사자로 명칭을 바꾼 사람.” 7 그렇다, 모두 여성 편집 기사였다. 한국영화 100년, 우리 영화사에서는 김영희가 그 처음이었다. 신필름 황금기, 신상옥의 많은 작품이 김영희의 손을 거쳤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필자가 면담자로 참여한 구술, 「김영희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3』,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한국영상자료원, 2007과 「원로 여성영화인의 삶을 듣는다는 것의 의미: 편집기사 김영희와 이경자의 구술채록을 중심으로」, 『영상예술연구』 vol. 18, 2011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김영희의 구술과 달리, KMDb에는 <춘향전>의 편집은 이성파로, <구원의 정화> 편집은 홍일명으로 되어있다. 2) 「예술의 주변 8 : 영화편집의 마무리 김영희 영사 필름 다루어 20년」, 『경향신문』, 1962년 3월 20일자 4면. 3) 삼바가라스(さんば-がらす), 어떤 분야에 특출한 세 사람을 말한다. 4) 심혜경·김영희, 『2007년도 원로영화인 구출채록 자료집 : 김영희 편』, 한국영상자료원, 125∼127쪽. 5) Kristen Hatch, "Cutting Women: Margaret Booth and Hollywood’s Pioneering Female Film Editors." In Jane Gaines, Radha Vatsal, and Monica Dall’Asta, eds. Women Film Pioneers Project. New York, NY: Columbia University Libraries, 2013. https://wfpp.columbia.edu/essay/cutting-women/ 6) Girish Shambu, “Hidden Histories: The Story of Women Film Editors”, https://www.criterion.com/current/posts/6582-hidden-histories-the-story-of-women-film-editors 7) 이는 프린스턴 대학 시각예술 교수이자 실험영화 작가인 수 프레드리히(Su Friedrich)가 만든 서베이 다큐멘터리로, 206명의 여성 편집기사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프로젝트이다. 비메오(https://vimeo.com/310219288)를 통해 볼 수 있다. http://womenfilmeditors.princeton.edu 참고.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대일본 레코-드 회사 문예부장 이서구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 조선권번기생 오은희 한성권번기생 최옥진 종로권번기생 박금도 빠-「멕시코」 여급 김은희 영화여우 오도실 동양극장여우 최선화 경무국장게 보내는 아등의 서 삼교경무국장 각하여 우리들은 이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여 줍시사고 연명으로 각하에게 청하옵나이다. (하략)” 1) ‘서울에 딴스홀을 許하라’며 경무국장에게 편지를 보낸 장안의 내로라하는 문화계 인물 중에는 ‘끽다점 「비-너스」 매담 복혜숙(卜惠淑(馬利),1904~1982)’도 있었다. 한국의 대중문화, 연예계에 대해 이야기를 하자면 예의 복혜숙으로 시작해야 할 것이다. 연극, 영화, 방송에서의 연기 생활은 물론 가수와 성우 활동에 이르기까지 한국 대중연예사의 곳곳에서 그녀의 이름을 빼놓을 분야는 없기 때문이다. 연극 연기로 배우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마호정, 이월화에 이은 세 번째 여성 영화배우로 이름을 올렸다. 일제강점기 조선영화계를 점령했던 예쁘장하고 다소곳하고 이목구비가 뚜렷한 여성 배우와는 거리가 멀었던, 배우 복혜숙은 초창기 조선영화에서 담대하고 현대적인 역할을 맡아 대중의 이목을 끌었다. 숨을 다하는 그날까지 복혜숙은 한국 대중연예사에 살아있는 성좌로, 원로 여성영화인으로 선구적인 역할을 해내며 60여년의 연기생활을 이어갔다. (사진1) 왼쪽부터 배우 전계현, 배우 복혜숙, 홍은원 감독 (사진2) 배우 최은희(가운데)와 함께 한 노년의 복혜숙 (오른쪽) 충청남도 대천에서 태어난 복혜숙은 서학을 공부해 기독교를 받아들인 아버지와 담대하고 영민한 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어머니에게 한글은 물론 한학도 배워 당시 배우로서는 보기 드문 학식과 지식을 갖추고 있었다. 이화여자고등학교에 다니며 배운 수예에 흥미를 느껴 수예 선생이 될 요량으로, 16세에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 기예학교에 들어갔다. 정작 일본에서는 영화, 연극, 가부키에 마음을 빼앗겼다. 특히 <충신장 忠臣藏>에 감동을 받아, 그녀는 연기자가 될 생각에 수예학교를 나와 시와모리 모리노무용소에 입학했다. 하지만 딸을 찾아 나선 일본까지 건너온 아버지는 복혜숙을 자신이 관여하던 강원도 금화학교의 일본어 교사로 만들어 버렸다. 1920년, 배우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도망치듯 상경한 그녀는 단성사의 인기 변사 김덕경의 소개로 김도산을 알게 되어 신극좌에 입단했다. 이듬해 복혜숙은 <오! 천명>으로 첫무대에 서게 되었다. 복혜숙은 극단이 지방 공연을 다닐 때면 악대를 앞세우고 공연 홍보를 위한 거리행진(街廻り)을 도맡았다. 또 일본에서 여러 번 관람하여 대사를 기억하고 있던 <대위의 딸 大尉の娘>을 각색한 <누교 淚橋>를 직접 쓰고 주연까지 맡아 공연을 성공으로 이끌었다. (사진3) 젊은 시절의 복혜숙 극단생활을 이어나가면서도 1925년에 복혜숙은 연기공부를 위해 일본 유학에서 돌아온 현철이 세운 최초의 연기학교인 조선배우학교에 입학했다. 비슷한 시기 극단 토월회에도 입단했다. 토월회의 인기 배우 이월화를 대체할 배우로 복혜숙이 등장했던 것이다. 복혜숙은 토월회가 공연한 <춘향전>의 ‘춘향’ 역으로, <카쥬-샤>의 ‘카쥬-샤’ 역으로 이월화 이후 최고의 스타가 됐다. 2) 그 뒤에는 조선극우회와 중앙무대로 옮겨 무대에 섰다. 무대에서 인기를 얻은 그녀는 1926년부터는 최초의 방송국 경성방송국에서 시험용으로 내보낸 첫 방송극 <새벽종>(1926)에도 성우로 출연했다. 3) 또 복음성가를 잘 부르던 복혜숙이 음반도 냈다. 영화대본을 직접 연기하듯 읽어 녹음하는 영화극 음반인 <장한몽>(1929)이 그 시작이었다. 이어서 <쌍옥루>, <부활>, 그녀가 출연한 <낙화유수>에서 주인공의 비련의 운명을 담은 주제곡 ‘강남 달이 밝아서 임이 놀던 곳~’으로 시작되는 <강남달>을 선보였다. 그 후로도 <숙영낭자전>, <심청전>, <춘희> 등의 수많은 음반을 취입했다. 곧 1930년 <애(愛)의 광(光)>을 발표하고는 장안 최고의 재즈가수로 불리기도 했다. 4) 연기를 시작하면서부터 다재다능한, 명실공이 그녀는 ‘만능 탤런트’였다. 물론 그녀가 이렇듯 많은 재능을 발휘하게 된 데에는 한국 대중문화사 초창기의 한계적 특징이 작용했기 때문이다. 당시 대중문화에 투신했던 인원이 적기도 했거니와 연극배우, 영화배우, 성우나 가수 등의 역할 분할이 뚜렷하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복혜숙은 한국의 개척기 대중문화사에서 빛나는 공적을 쌓은 선구자이자 연예계의 지주로 살았다. 하지만 그녀의 주요 활동 영역은 영화였다. (사진4) 영화 <농중조>(이규설, 1926)의 현장. 복혜숙은 아버지의 엄한 감시 때문에 새장 속의 새처럼 집안에 갇혀 사랑을 이루지 못하는 여학생 화숙을 연기했다. 연극계에서는 이미 장안에 이름이 났던 복혜숙은 1923년 영화에도 출연을 시작한다. 첫 출연은 마호정과 함께 조선총독부가 계몽을 목적으로 제작한 것으로 윤백남이 연출을 맡은 위생 영화 <방역 防疫>이었다. 5) 출연료 2원을 받은 영화에서 그녀는 길거리에서 파는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호열자(콜레라)에 걸려 눕는 주인의 딸 역할을 했다. 곧 극영화에도 출연하는데, 첫 출연작은 당시 인기 있었던 일본 제국키네마의 <농중조 籠の鳥>(松本英一, 1924)를 번안한 이규설의 <농중조 籠中鳥, 새장 속의 새>(1926)였다. 유교사상이 팽배했던 조선에서 젊은이들의 자유연애를 다루어 당시로서는 퍽 파격적인 작품이었다. 사랑을 쫓는 신여성 화숙으로 분한 복혜숙은 다리를 노출하기도 하고 안식(이규설)과 손을 잡는 러브신이 있어 인구에 회자되었다. 통속 신파 번역극이라는 비판 속에도, 남녀 학생들에게는 큰 환영을 받았다. 6) (사진5) <낙화유수>(이구영, 1927)의 한 장면. 이 영화는 단성사의 변사였던 김영환이 진주 기생이던 어머니의 일생을 극화한 <낙화유수>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복혜숙은 주인공 기생 역할을 맡았다. (사진6) <낙화유수>(이구영, 1927)에 참여한 스태프들 이듬해 복혜숙은 조선배우학교 시절 선생님이던 이구영이 연출하는 〈낙화유수〉(1927)를 찍었다. 배우학교의 동기생 이원용이 남자 주인공이었다. 이번에는 기생 역할이었다. 당시 단성사의 변사였던 김영환이 진주 기생이던 어머니의 일생을 극화한 <낙화유수>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기구하게 기생이 된 여인과 젊은 화가의 이루지 못할 사랑을 그린 이 신파극은 개봉 당시 장안의 기생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라며 치맛자락을 휘감고 구경들을 와 더 화제가 되었다. 7) 실연의 마음을 가누지 못해 여인이 투신하는 장면이 두고두고 회자되었는데, 장마철에 한강에 자살하기 위해 뛰어드는 장면을 회고하는 그녀의 말을 들어보면 알 수 있다. ‘오고가는 행인들이 여자가 자살한다고 구경이 났었던’ 것이었다. 이처럼 그녀는 대담한 연기를 선보였다는 점에서 당대의 다른 여배우와는 달랐다. 그녀는 연기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배웠다. 서예를 배우는가 하면 창과 러시아 댄스, 유도는 물론 자동차 운전을 배우는 데에 망설임이 없었다. 8) 그렇게 배운 솜씨들은 배우 생활을 하면서 충분히 활용할 수 있었다. (사진7) 감독이자 배우 이규설. 복혜숙은 이규설의 작품 <농중조>(1926), <홍련비련>(1927), <순정은 신과 같다>(1928)에서 주연으로 열연했다. 그 뒤 ‘현대학생극’으로 불리던 〈홍련비련〉(이규설, 1927) 9) 에서 복혜숙은 지극히 우정이 깊은 두 대학생 김일과 현진의 사랑을 한 몸에 받는 여배우 편실 역할을 했다. 이어 이규설 감독과의 세 번째 작업은 <순정은 신과 같다>(1928)였다. 둘은 지주의 아들 이규설과 소작인의 딸 복혜숙로 만나 부부로 연기했다. 같은 해 <세 동무(세 걸인)〉(김영환, 1928)에서 복혜숙은 어부의 딸 역을 맡아 사랑에 빠지는 연기를 선보였고, 만주 현지 촬영으로 이월화와 함께 출연했던 〈지나(支那)가의 비밀(일명 흑진주)〉(유장안, 1928)에서는 중국인 거리에 인질로 납치된 조선 여자 송미례 역을 맡았다. 주연으로 활동하던 이 시절 ‘얼굴이 땡그랗’던 복혜숙은 쾌활하고 발랄한 왈가닥 ‘잇 걸(It girl)’로 불린 클라라 보(Clara Bow)를 닮았다는 말을 듣곤 했다. 10) 해방 이전은 배우 복혜숙의 전성기였다. (사진8) <세 동무(세 걸인)〉(김영환, 1928)의 한 장면, 복혜숙은 사랑에 빠지는 어부의 딸 역을 맡았다. (사진9) <지나 가의 비밀>(유장안, 1928) 신문 광고. 만주 현지 촬영을 감행한 이 영화에서 복혜숙은 질로 납치된 조선 여자 송미례 역이었다. 《동아일보》 1928년 5월 25일자 6면 하지만 배우 활동만으로 생활을 꾸려내기가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1928년부터 8년간 카페 비너스를 운영했고, 이때 결혼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곧 두 젊은이들의 사랑의 도피를 다룬 영화 박기채의 <춘풍>(1935)에 출연으로 영화계에 복귀했다. 안종화의 <역습>(1936)에는 살인자의 아내 역으로 출연하면서 카페 비너스를 제작 사무실로 제공하면서 실질적인 제작에 참여했다. 11) <반도의 봄>(이병일, 1941)에서는 배우가 되기 위해 서울로 올라온 정희와 함께 방을 쓰는 음반회사 직원으로 등장했다. 조선인들의 영화 제작이 힘들어진 식민지 말기에는 <감격의 일기 感激の日記>(신경균, 1943), <그대와 나 君と僕>(허영, 1944)를 비롯한 다수의 어용영화에도 출연했다. (사진10) <역습>(안종화, 1936)의 한 장면 (사진 11) <반도의 봄>(이병일, 1941)에서 음반회사 직원 모경숙 역의 복혜숙 1920년대 말 자유분방한 신여성의 아이콘이던 복혜숙이 연기를 전환하게 된 계기는 최인규의 <수업료>(1940)에 출연하면서부터였다. 동시녹음이 진행된 이 영화에서 30대 복혜숙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다. 그녀는 이 영화에서 자식 내외가 행상을 하러 도시로 나가자 소학교에 다니는 손자 영달을 돌보기 위해 넝마를 주우며 근근이 생활을 이어가는 할머니 역을 맡았다. 당시 그녀 나이 37세였다. 이 영화 이후 그녀는 노역을 주로 맡았다. 인자한 어머니, 억척스럽고 생활력 강한 상인, 유난스런 할머니 같은, 그녀는 연기력을 요구하는 조역으로 이후 300여 편의 영화에 얼굴을 비쳤다. 또 텔레비전 드라마 <아내의 얼굴>(KBS, 1962), <아씨>(TBC, 1970), <옛날 나 어릴 적에>(MBC 신년특집, 1981) 같은 작품에도 종종 출연하였다. (사진12) <수업료>(최인규, 1940)에서 복혜숙은 병상에 누워서도 어떻게든 손자 영달이의 수업료를 마련해보려는 애달픈 할머니를 연기했다. 해방 후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서 기자재와 필름이 부족해 영화제작이 열악했던 시기, 새롭게 시작하는 영화계에서 그녀 역시 주조연을 마다않고 성실히 한몫을 했다.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에 간호사 혜자(황려희)의 어머니를, 〈똘똘이의 모험〉(이규환, 1946)에서는 똘똘이의 어머니를 맡았다. 또 〈죄 없는 죄인〉(최인규, 1948), 〈여명〉(안진상, 1948), 〈수우〉(안종화, 1948),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에도 작은 역이나마 출연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국방부 정훈국 문예중대에 입대해 공연을 하며 전장을 누볐고, 잠시 머물렀던 마산에서 촬영한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에서는 전선에서 실명한 아들(최현)에게 자신의 눈을 이식해주는 어머니로 분했다. (사진13) <여명〉(안진상, 1948) 신문광고 (사진14) <성벽을 뚫고>(한형모, 1949) 신문광고 (사진15) <삼천만의 꽃다발>(신경균, 1951) 광고. 아들에게 자신의 눈을 이식해 주는 어머니 복혜숙이 보인다. 전후 본격적으로 활기를 띠기 시작한 한국영화계에서 복혜숙은 전성기를 넘은 나이에도 활동을 이어나가는 거의 최초의 여성 배우였다. 더 이상 주연을 할 만한 시나리오가 없었지만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 <아리랑>(김소동, 1957), <조춘>(유두연, 1959), <삼등과장>(이봉래, 1961), <청춘교실>(김수용, 1963), <여판사>(홍은원, 1963), 그리고 미공보원(USIS-Korea)이 제작한 문화영화 <황토길 Litany of hope>(양승룡, 1962)에서 어머니와 할머니 역할을 전담하면서 꾸준히 식지 않은 연기력과 열정 보여주었다. (사진16) <청춘쌍곡선>(한형모, 1956)에서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중학교 교사 명호(황해)의 어머니로 분했다. (사진17) <삼등과장>(이봉래, 1961) 구소장(구봉서)의 어머니 역을 맡았다. (사진18) <황토길>(양승룡, 1962)에서 한센 병을 앓고 있는 시인 한하운(김웅)의 어머니로 출연한 복혜숙 (사진19) <청춘교실>(김수용, 1963)에서는 손녀 셋을 거느린 왈가닥 할머니로 등장했다. (사진20) <여판사>(홍은원, 1963)에서는 치매를 앓고 있어 우연히 독을 마시게 되는 시할머니 역할을 했다. 김수용 감독이 배우 복혜숙이 자신의 영화에서 열연했던 강렬한 장면을 회고한 적이 있다. 해방촌 빈민들의 군상을 그린 김영수의 희곡을 영화화한 <혈맥>(1963)에서 김덕삼(김승호)은 새로 얻은 아내가 자신의 돈을 훔쳐 달아나자, 중신을 선 대폿집 주인(복혜숙)에게 무작정 따지러 간다. 아내를 찾아내라는 어깃장을 놓는 덕삼과 이 어이없는 주장에 맞서는 꼿꼿이 맞서는 대폿집 주인 아낙의 대단한 육탄전이 펼쳐진다. 이 장면에서 복혜숙은 담배를 입에 물고 김승호와 몸싸움을 하면서 거칠게 대거리를 하는데, 그녀는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생활 전선에 나서야했던 강단 있는 우리네 어머니의 모습을 몸소 보여준다. 김수용의 또 다른 영화 <사랑의 조건>(1979)에서 일흔이 넘은 복혜숙은 어린 손자를 데리고 필사의 힘으로 한 겨울 눈 내리는 대관령을 넘는 할머니로 특별출연을 했다. 이 영화에서 그는 모진 날씨 따위에는 아랑곳없던, 여전히 두 눈에서는 광채를 내뿜으며 서슬 퍼런 연기를 해내던 노년의 복혜숙을 잊지 못한다. 12) (사진21) <혈맥>(김수용, 1963) 중 김덕삼(김승호)과 대폿집 주인(복혜숙)의 육탄전 복혜숙은 평생을 배우로 무대 위와 또 카메라 앞에 있었다. ‘남들이 안하던 때에 배우로 입문해 연예계의 여러 방면에서 초창기 증인으로 또 산 역사 노릇’을 했다. 다방면에서 최고의 인기와 함께 여성으로서 선각자의 길을 걸었다. ‘복혜숙 여사의 연기생활 40주년 기념하는 스타의 밤’에는 많은 동료와 후배들이 기꺼이 함께 해줄 만큼 평생 한국영화를 지켜온 한국영화의 어머니로 평가를 받았다. 또 ‘뭐든 뒤로 미루지 못하는 성격 탓’에, 또 연예계를 통찰하는 식견을 갖춘 몇 안 되는 배우로 영화인들의 존경과 대우를 받으며 행복한 삶을 살았다. 13) 18세부터 연기해 온 그녀의 일대기가 특별드라마 <얼굴>(1981, KBS)로 만들어질 만큼 그녀의 생 그 자체가 한국 대중연예사이기도 했다. (사진22) <대한뉴스>(제 387호, 1962) 연예계 소식 중. 962년 10월 12일부터 2일간 시민회관에서 복혜숙의 연기생활 40주년을 기념하는 스타의 밤‘ 행사가 열렸다. 당시 이원우 공보부 장관이 복혜숙에게 표창을 수여하고 있다. 스크린 밖에서도 그녀는 영화계의 원로로서 업계의 권익을 위해서라면 발 벗고 나섰다. 1954년 한국영화 입장세 면세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해 선봉에 섰고, 한국영화협회가 한국영화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영화회관 건립 기금을 위해 야심차게 기획된 영화 <애정삼백년>(윤봉춘, 1962)에도 앞장 서 힘을 보탰다. 1955년 대한영화배우협회를 창설해 10년간 초대 회장을 맡기도 했으며, 1962년부터 한국영화인협의의 연기분과 위원장으로 배우들의 뒷바라지에 힘을 쏟았다. 그녀의 은막 인생을 마지막으로 장식한 영화는 진용(박재호)의 할머니 역을 맡은 〈낮은데로 임하소서〉(이장호, 1982)였다. 하지만 78세의 그녀는 아직도 ‘못 다한 일 많아 은퇴할 생각이 없’ 14) 었다. (사진23) 한국영화 40년을 기념하기 위한 영화회관 건립 기금을 위해 야심차게 기획된 영화 <애정삼백년>(윤봉춘, 1962) 포스터. ‘윤봉춘 복혜숙 지휘’라는 문구가 보인다. (사진24) <낮은데로 임하소서>(이장호, 1982)에서의 복혜숙 1)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삼천리》 1937년 1월호 9권 1호, 162~166쪽. 2) “명우와 무대(7), 복혜숙 양의 『카쥬-샤』, 부활의 여주인공으로, 토월회 무대에”, 《삼천리》 제5권 4호, 1933년 4월, 11쪽. 4) 복혜숙의 생애는 다음 자료들을 참고해 요약 기술하였다. 『여성실화: 빛나는 성좌 복혜숙』, 명서원, 1976: 이영일, 「스크린을 빛낸 예도 60년-복혜숙」, 『한국영화인열전』, 영화진흥공사, 1982; 황문평, 「여성 연예계의 선구자 복혜숙」, 『삶의 발자국』(1), 선, 1988; 조영만, 「여배우 복혜숙의 활약」, 『30년대 문화예술인들: 격동기의 문화계 비화』, 범양사, 1988; 한국예술연구소 편, 「2장 복혜숙」, 『이영일의 한국영화사를 위한 증언록 : 김성춘·복혜숙·이구영 편』, 도서출판 소도, 2003, 이순진, 「복혜숙」, 이승희 외 지음, 『식민지시대 대중예술인 사전』, 도서출판 소도, 2006; .한상언, “한상언의 <한국영화스타>3 :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 한국영화의 어머니 복혜숙”, 오마이스타, 2004년 10월 13일,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0214631 4) 이동순, “이동순의 가요이야기, 한국 최초 재즈가수 복혜숙의 노래를 들어보세요”, 조선Pub, 2013년 10월 18일, 조선Pub 홈페이지 http://pub.chosun.com 5) 복혜숙, 「나와 영화반세기 복혜숙 편」, 월간 《영화》 1974년 1월호, 53쪽;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3> 영화계 데뷔”, 《동아일보》 1981년 5월 6일 7면. 6) “영화평 농중조 조선키네마 작품”, 《동아일보》 1926년 6월 27일 5면. 7) 안종화, 앞의 책, 157쪽; 김남석, 「배우 복혜숙 연구」, 『인문과학연구』 13,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5, 123~125쪽. 8)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1>”, 《동아일보》 1981년 4월 29일 7면. 9) KMDb에는 이필우가 감독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신문지상에는 이규설이 감독으로 명시되어 있다. “홍련비련”, 《동아일보》 1927년 2월 5일 5면. 10) 한국예술연구소 편, 「2장 복혜숙」, 앞의 책, 144쪽. 11) 복혜숙, “나와 영화반세기: 32세 때부터 노인역만”, 월간 《영화》 1974년 3월호, 68쪽. 12) 김수용, “서울국제여성영화제와 여성신문이 함께하는 “그리운 여배우” 1탄 복혜숙: 드라마 분위기 설정해가는 역광 같은 배우, 복혜숙”.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블로그, 2014년 2월 26일, 서울국제여성영화제 블로그 http://siwff.tistory.com/503 13)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97> 첫 TV드라마”, 《동아일보》 1981년 5월 26일 7면. 14) 복혜숙, “나의 교유록-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100> 복혜숙 연예생활 60년”, 《동아일보》 1981년 5월 30일 12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