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명미상(여행기록(조선-만주-북지))
- 제작년도
- 1930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과거에 만난 작품과 그로부터 얻은 영감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어떤 소리가 어떤 영상을 구제하러 와서는 결코 안 되고, 어떤 영상이 어떤 소리를 구제하러 와서는 결코 안 된다. - 로베르 브레송(Robert Bresson) 나는 영화 음악 작업을 할 때 내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생각을 놓지 않으려 애쓴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만 관성에 기대게 되기 때문이다. 관성에 기댄 받아쓰기는 순간을 모면하도록 도와줄 수는 있겠지만 이 일을, 혹은 나를 이끄는 건강한 동력이 되지는 않는다. 다행히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여기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등의 질문을 던질 때 후반 작업에는 연출이 곁에 있다. 그러나 조금은 두려운 표정으로. 내 홈페이지의 자기 소개란에는 10년 넘게 “저와 재미있는 작업을 하고 싶으신 분들은 겁먹지 말고 연락 주세요”라고 쓰여있다. 재미있는 사실은 나를 개인적으로 모르는 연출들이 메일을 보낼 때 팔 할은 이 부분을 언급한다는 것이다. “음악을 잘 몰라서 두렵지만 겁먹지 말라고 쓰신 것을 보고 용기 내어 연락드립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토록 두렵게 만드는 걸까? 두려움에는 여러 이유가 있다. 영화제 제출 기한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일정이 딜레이 되어서 후반 작업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거나 이미 예산이 초과되었다거나 하는 현실적인 문제일 때도 있고, 음악 감독과 작업해 본 경험이 많지 않아서 어떤 방식과 일정으로 소통해야 할지 막막할 때도, 음악적인 소양이 부족(하다고 생각)해서 어떤 말로 자신이 생각하는 음악을 형용해야 하는지 몰라 어려움을 겪을 때도 있다. 실질적인 워크플로우에서의 문제를 내가 해결해주기는 어렵지만, 후자 둘의 경우 문제는 음악에 대한 설명을 음악적인, 음악의 문법으로 풀어내야 한다는 강박에서 벗어나면 쉬워진다. 이 부분에서 왜 음악을 원하는지, 여기서의 음악은 누구의 생각을 대변해야 하는지, 음악은 기억을 소환해야 하는지, 미래를 예지해야 하는지, 누구의 시점이어야 하는지, 혹 필요 없지는 않은지. 아리송한 표정으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왜”들을 나누는 동안 우리는 알게 된다. 그림에 음악을 붙일 때 필요한 대화가 꼭 음악적 문법 안에 갇혀있을 필요는 없다는 것을. 이미 연출의 머릿속에는 음악 외적(이라고 알려진)인 단서들이 가득하다는 것을. 조금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크레딧을 제외한 모든 음악이 영화 안에서 존재하는 < 사랑의 고고학 >(이완민, 2022) 같은 예외적인 경우가 아니고는 수많은 “왜”들 속에 연출의 두려움뿐 아니라 나의 두려움도 자리한다. 내가 만든 음악들이 영화에서 어떤 당위를 잃은 채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혹은 실패한 환영(phantom)의 대리인이 되지 않을지, 현란한 몸짓으로 언어와 그림의 간극을 메우는 모종의 또 다른 거짓말을 하게 되지는 않을지, 거짓말을 하더라도 그 거짓말은 환영받을 수 있을지, 관객을 이 세계로 끌어들이는 마법이 될지, 이 음악이 도움이 된다면 어디에, 누구에게 도움이 될지. 몇 편의 작업을 거치면서, 그리고 작업 과정이 익숙해질수록(!) 이런 끝없는 의심과 두려움은 사라지기는커녕 거의 실재하는 무엇이 되어 작업실 한 켠에 자리하면서,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하는 이 일이 지루할 틈 없도록 나를 긴장시키고 이끄는 재미가 되었다. 재미. 역시 재미가 중요하다. 혹자에겐 식상한 레퍼런스일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대학 초년생 때 보았던 장 뤽 고다르(Jean-Luc Godard, 1930-2022)의 < 미치광이 삐에로 >(Pierrot le fou, 1965)가 영화 음악을 만들 때 맞닥뜨린 두려움을 재미로 치환시키는데 일조한 영화임을 부정할 수 없다. <미치광이 삐에로>(장 뤽 고다르, 1965)의 첫 시퀀스 중 한 장면 <미치광이 삐에로>의 인트로는 앙투안 뒤아멜(Antoine Duhamel, 1925-2014)의 세련된 오케스트레이션과 그 위를 타고 흐르는 유려한 멜로디로 시작한다. 오 아주 신경 써서 음악을 썼구만, 생각이 드는 것도 잠시, 음악은 음악적인 흐름과 무관하게 끊기고 나레이션으로 넘어간다. 내 첫 고다르 영화였던 이 영화의 인트로를 보았을 때 나는 생각했다. ‘이 음악 편집 작곡가랑 협의된 건가?’ 놀랄 겨를도 없이 음악의 나타남과 사라짐은 바로 대사와 현장음, 컷과 뒤섞이면서 편집에 고유한 리듬감을 부여하고 성큼성큼 나아간다. 멀찍이 떨어진, 어딘지 모르게 쑥스러운 모습이 아닌, 스크린 앞에서 배우와 함께 대사도 치고 연기도 하면서 독자적인 존재감을 드러내고, 종래에는 갑작스러운 연출에 정당성마저 부여하는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음악은 두 주인공 마리안느와 페르디낭의 나레이션을 우스꽝스럽게 과장하기도 하고, 관객과 영화 속 인물의 경계를 허물면서 인물들이 가진 권한을 확장하기도 한다. 화면에서 벌어지는 이야기와 인물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연속성을 가져오기도 하고, 갑작스럽게 이야기에 반주를 맞추며 자신의 쓸모로 재주를 넘기도 한다. 무엇보다 일부러 뭉그러뜨린 질감과 갑작스러운 등장과 사라짐은 관객으로 하여금 지금 들리고 있는 것이 만들어진 영화 음악이고 당신은 만들어진 허구를 보고 있다, 라는 점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물론 매 순간 자신의 정당성을 뽐내는 이 칼춤 같은 음악의 사용이, 혹은 이것이 주는 쾌가 무조건 옳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자신이 쥐고 벼려온 도구의 사용 방법과 기능을 끊임없이 의심하고 그것이 의심 없이 사용되는 것을 경계해 온 사람의 고민의 흔적은 현재 나의 고민이 어떤 방향을 향해야 하는지 길잡이가 되어주고, 때로는 위안이 되어준다. 이런 소리의 질감과 음악의 사용이 어떤 사고와 고민을 거쳤겠구나, 천천히 짐작하며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수많은 선택지가 깔린 두려운 길에 친구가 있는 것만 같다. 그것은 음악 사용의 옳고 그름과도, 성공과 실패와도 무관하며, 오히려 그런 것이 없다는 것, 수많은 선택지 안에는 어떤 더 많은 (드러나는 혹은 숨겨지는) 선택지들이 있는지를 확인하는 과정에 가깝다. 음악이 화면에서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신경 쓰면서 보는 것과 그냥 영화를 감상하는 것은 매우 다르다. (일례로 음악과 전혀 관련이 없는 직종에 종사 중이신 나의 부모님은 당신의 자식이 영화 음악을 시작한 뒤로 극장에서의 청취 경험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한다) 어떤 방식이 더 적절한(?) 영화 감상인지를 논하는 것은 내 역량 밖의 일이지만, 영화에서 어떤 감동과 위로를 받는 것만큼이나 영화의 말하기 방식이나 그 속성에 관심이 있는 관객이라면 지금 극장을 울리는 음악이 어떤 이유로 거기 있는지, 그림과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지도 신경 써서 감상해보시기를 권한다. 그 과정은 영화와 새로운 관계 맺음의 가능성이 될 수도 있고, 무엇보다 정말로 재미있을 거니까. *** 사진: "Pierrot le Fou", IMDb, < https://www.imdb.com/title/tt0059592/?ref_=fn_al_tt_1 > 이민휘(음악가) l 종종 다른 사람들의 영화, 드라마, 연극이나 미술 작업에 음악으로 함께 하기도 한다. 2012년 무키무키만만수 [2012]로 데뷔, 2016년 첫 솔로 음반 [빌린 입], 2023년 두 번째 정규 음반 [미래의 고향] 발표. 둠-메탈 밴드 'Gawthrop'에서 베이스 담당. 드라마 < 박하경 여행기 >(이종필, 2023). 영화 < 사랑의 고고학 >(이완민, 2022), < 같은 속옷을 입는 두 여자 >(김세인, 2021), < 최선의 삶 >(이우정, 2020) 등의 영화에 음악.
<로보트 태권브이>와 <외계에서 온 우뢰매>로 한국 로봇 애니메이션 영화사에 독보적인 업적을 남긴 김청기 감독.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을 보였던 그는 1958년 18세에 단행본 만화를 발간하며 만화작로 데뷔했다. 데뷔작은 펜싱만화 <무적의 오프린>인데 펜싱영화를 보고 아이디어를 얻어 그린 뒤 무작정 아리랑 문고를 찾아가 출판한 작품이었다. 당시 이화여대 근처에 인쇄소와 만화 총판들이 있었는데 만화책이 인쇄되어 나오면 자전거 부대가 각 동네의 대본소에 배달하는 방식으로 만화책이 유통되었다. 그래서 그는 때로 자전거부대가 대본소에서 신발주머니에 받아온 동전으로 작가료를 받기도 했다. 그가 만화작가 활동 중이던 1961년 5.16 이후 출판만화에 대한 검열이 생겨나 소재와 표현방법에 있어 많은 제약을 받게 된다. 예를들어 풍속에 위배 되기에 부모에게 반항적인 인물을 묘사할 수 없었고 한 컷 안에 총과 칼을 겨눌 수 없었으며 ‘이놈’, ‘이 새끼’, ‘이 자식’이라는 단어는 쓸 수 없었다. 결국 극적인 악을 드러내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만화에 대한 공격은 심했고 어린이, 청소년 문제는 모두 만화 탓으로 돌려졌다. 그런 속에서도 그는 작화가 서툴거나 느린 만화가의 그림 작업도 겸하며 수입 좋은 잘나가는 만화가로 활동했다. 그러던 중 1959년 세기극장에서 개봉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1937)를 본 뒤 그는 애니메이션의 매력에 빠져든다. (그림1)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1937)의 한 장면 1967년 최초의 장편 애니메이션 <홍길동>(신동헌)의 흥행을 시작으로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방학시즌을 노리고 대거 제작된다. 그는 박영일의 애니메이션 영화 <손오공>(1968)과 <황금철인>(1968), <보물섬>(1969) 및 TBC 방송 애니메이션 <황금박쥐>(1968)의 원화 및 동화가로 참여한다. 그는 1968년 최초의 단편 애니메이션인 <개미와 베짱이>(1961)를 만든 박영일을 감독으로 세기상사가 제작한 장편 애니메이션인 <손오공>에 처음 참여했다. 작화가들 모두 만화를 그린 경험이 없는 시각디자인과 출신이다보니 작업이 도안 그리듯 늦어졌다. 결국 손이 빠른 그가 하룻밤에 120장씩 그리며 작업을 진척시켰다. 심지어 밑그림 없이 셀에 곧바로 동작을 그려낼 정도로 그의 작업속도는 빨랐다. 기여도가 커지자 월급 6천 원이 8천 원으로 올랐다. (그림2) <손오공>(박영일, 1968) 포스터. 그는 이 작품에 동화작가로 참여했다. 그는 <손오공> 제작 중에 TBC 방송국의 제안으로 TV애니메이션 <황금박쥐> 작업에 참여한다. TBC 방송국이 동화부를 두고 일본만화의 하청작업을 시작했을 때이다. 하지만 1초에 8장을 사용하는 리미티드 애니메이션이었고 일본에서 지시받은 그대로 작업해야 했기에 그로서는 배울 것이 없었다. TBC에서는 월급 1만 3천 원을 받았지만 그는 지루함을 참지 못하고 세 달 만에 나와 다시 <손오공> 제작 현장으로 돌아갔다. 이때는 월급으로 만원을 받았는데 당시 만원이면 쌀 한 가마니를 살 수 있는 정도였다. (그림3) <황금박쥐>(1968년 TBC방영)의 한 장면 그는 세기상사 제작의 <손오공>, <황금철인>, <보물선>에 참여할 때 세기상사가 수입한 디즈니 애니메이션 <백설공주와 일곱난쟁이>(1937), <걸리버 여행기>(1939) 등의 필름을 보고 실사영화와 비교, 분석했다. 움직임을 기계적으로 쪼개는 것이 아니라 작용과 반작용, 리듬을 고려해야 유려하고 자연스러운 애니메이션을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파악했다. (그림4) 그가 작업한 애니메이션 광고의 한 장면 삼성제약 <판토> (그림5) 롯데 라면땅 <황금박쥐>편 그림이 빠르고 애니메이션 작업 경험이 있는 그에게는 곧 많은 기회가 생겼다. 애니메이션이 들어가는 광고와 문화영화 등의 작업과 연출이 밀려들었던 것이다. 그는 1970년대 초 보림영화사, 선진문화사에 입사해 방송 CF, 각종 타이틀백, 문화영화, 기록영화에 사용되는 애니메이션을 맡아했다. 하지만 직장생활이 잘 맞지 않아 유현목 감독의 문화영화사인 유프로덕션으로 옮겨가 프리랜서로 일한다. 유프로덕션에서 때로 기록영화와 문화영화를 맡아 자율적으로 자기 작품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당시 청년 감독들이었던 김호선, 하길종, 홍파 등과 교류하며 실사영화에 대한 흐름을 익히게 된다. 하지만 주요수입은 광고 스토리보드였다. 최고의 광고기획사였던 제일기획, 한일기획의 감독들이 집까지 찾아와 스토리보드를 그려달라고 부탁할 정도로 그는 인기 있는 작가였다. 감각있는 그의 스토리보드만이 광고주에게 쉽사리 통과되었기 때문이었다. 종합적으로 그는 이즈음 CF나 문화영화 한 편을 온전하게 만들어낼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즉, 스토리와 구성, 작화, 음악, 녹음까지 가능한 연출자였던 것이다. 그렇게 그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 준비가 되었다. (광고경험으로 그는 편집에 대한 감각을 익힐 수 있었다. 이런 감각은 빠른 속도감으로 탄생했다. 당시 극영화는 700커트 정도였는데 <태권브이>는 1200커트였고 예고편 3분짜리가 극영화 20분 분량의 커트 수였다.) 본격적으로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기 위해, 그는 애니메이터 육성을 위한 키프로덕션을 용산에 만든다. 키프로덕션에서 그는 중앙정보부로부터 통일전선에 대한 애니메이션을 수주받아 납품하기도 했다. 그리고 1974년 제1땅굴이 발견되자 아이디어를 얻어 <똘이장군>의 스토리보드를 만들어 중앙정보부의 지원을 받아 완성, 개봉시키려 했으나 여의치 않았다. 1974년 박영일과 디즈니를 목표로 애니메이션 회사 서울프로덕션을 광화문에 설립한다. 우선 제작비를 마련하기 위해 CF를 작업을 하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우던 중 1975년 박영일 감독이 서거한다. 결국 그는 홀로 극장용 애니메이션 제작을 시도한다. 마침 TBC 방송에서 상영한 애니메이션 <마징가>가 일본만화인지 모른 채 어린들에게 인기를 끌고 완구가 마구 팔리는 등 애니메이터로서 경각심이 생겨나던 차였다. 극장용 애니메이션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문화영화 라이센스가 있어야 했기 때문에 그는 친분이 있던 유프로덕션을 찾아갔다. 유현목 감독은 지상학 작가의 시나리오 “마징가 태권”을 그에게 권했다. “마징가”라는 주인공 설정이 불쾌해 거절한 그는 제목부터 바꾸고 스토리도 지상학 작가과 함께 한 달간 새롭게 만들며 아이디어와 스토리를 글이 아닌 콘티로 풀어나갔다. 워낙 그림으로 생각하는 게 편하고 빨라 심지어 실제 작업에서도 원화 없이 바로 작화에 들어가는 수준이었다. <로보트 태권 V>는 1976년 초 제작에 들어가 그해 7월 21일 개봉했다. (그림6) <로보트 태권 V> 얼굴 이미지 ‘태권 V’라는 설정은 ‘마징가에 대응할 우리 것을 뭘 하면 좋겠는가’라는 고민 속에서 탄생했다. 당시 태권도 액션 영화들이 등장하고 태권도가 군인들에게 국기로 막 보급되던 시절이었다. 주변의 반응 또한 ‘태권도라면 괜찮다. 제목이 좋다’ 였다. ‘태권 V’의 이미지는 사무실이 있던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동상에서 힌트를 얻었다. 당시 모든 학교에 장군의 동상이 있을 정도로 군부정권은 정권의 정통성을 만들어내고자 무장 출신 이순신 장군에 대한 성웅화 작업에 열심히였다. 그래서 그는 국난의 영웅 중 최고로 칭송받는 이순신 장군에서 모티브를 따와 근엄하고 멋진 이미지를 태권브이에 심어줬다. (그림7,8) <로보트 태권 V> 중 훈이와 마사오의 대련장면 <로보트 태권 V> 대결장면도 월트 디즈니의 책을 참고해 <백설공주>의 ‘로토스코핑 기법’ 즉 실사영화로 찍은 뒤 화면 위에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사용했다. 왕호 도장 유단자들과 유승선이 선릉에서 대련하는 것을 16미리 카메라로 찍고 편집한 뒤 그대로 그려 훈과 마사오의 대련장면에 사용해 리얼한 연출 효과를 냈다. (그림9) <로보트 태권 V>의 캐릭터들 왼쪽부터 윤박사, 악당 카프박사, 훈이, 깡통로봇 철이, 카프박사가 만든 인조인간 메리, 영희 <로보트 태권 V>는 태권도를 하는 로보트 외에도 컴플렉스가 심한 ‘카프 박사’, 인간이 되고 싶은 안드로이드 ‘메리’, 엉뚱하지만 친근한 ‘깡통로봇 철이’ 등 캐릭터 하나하나가 굉장히 흥미롭다. 이중 ‘메리’는 매력과 연민을 지닌 복합적인 캐릭터였다. 당시 <6백만 불의 사나이>(1976년~1978년 TBC 방송), <소머즈>(1976년~1978년 MBC 방송) 같은 사이보그 캐릭터들이 인기를 끌어 ‘메리’라는 인조인간 캐릭터를 만들었다. 그러나 예쁜 여자아이가 도둑질하고 사람을 죽이는 것은 당시의 사회적, 도덕적 상식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검열을 피하기 위해 선한 설정을 한 게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케이스다. 깡통로봇 철이는 그가 어린시절 학교의 큰 주전자를 보며 머릿속으로 상상만 했던 캐릭터를 재현한 결과물이다. (그림10,11) 안드로이드 메리와 깡통로봇 철이 <로보트 태권 V>의 음악은 최창권이 맡았는데 금관, 목관악기 편성을 잘해 음색이 깨끗하고 화려했다. 활기찬 주제곡 또한 인상적인데 태권브이 주제가는 최창권의 큰아들인 가수 최효섭이, 깡통로봇 주제는 작은아들이 불렀다. 효과는 김벌래가 담당했다. OST도 발매해 좋은 반응과 큰 수익을 얻었다. <로보트 태권 V>시리즈는 검열에 걸리지 않기 위해 적을 북한을 의미하는 붉은 제국으로 설정하는 등 반공정신이 투철한 작가의 작품으로 인식시키려 했지만 <로보트 태권 V 제2탄 우주작전>에서 3분 20초 즉, 일주일의 작업분량을 삭제해야 했다. 일본 선수 마사오와 훈이 대결하는 장면에서 마사오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는데 장발이었다는 이유에서 삭제됐던 것이다. (그림12) <로보트 태권 V 제2탄 우주작전> 마사오의 머리길이가 보이는 장면이다. 애니메이션에서도 장발단속이 행해져 바람에 날리는 마사오의 장발이 삭제되었다. <로보트 태권V>는 극영화처럼 지방투자자의 투자금으로 제작비를 충당하기 힘들었다. 그래서 CF 스토리보드로 직접 돈을 모아 대부분 자비로 제작했다. 처음에는 18,000매로 계획했다. 일본 TV만화영화가 30분에 4,000매가 들었기 때문에 그보다 훨씬 많은 18,000매면 1시간 16분 정도를 유연한 동작으로 표현할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그러나 막상 제작에 들어가자 32,000매가 필요했고 이 숫자는 작화 뿐 아니라 트레이싱, 컬러링, 셀까지 이어지다보니 각각의 재료비가 예상보다 훨씬 많이 들게 되었다. 총제작비 4500만원 중 유현목 감독으로부터는 지방투자자에게 단매하고 받은 진행비 200만 원과 후반 작업비용을 제공받았다. 나머지 금액은 김청기 감독의 사비로 빚을 져서 해결했다. 당시 애니메이션 재료들이 고가였고 또 많이 부족했기에 셀은 군사용 항공 필름과 엑스레이 필름을 구해 물에 불린 후 하이타이로 닦아서 사용했다. 종이며 연필 모두 질이 안 좋아 마루펜에 먹을 찍어 그림을 그렸다. 포스터 칼라도 국산은 색을 배합하면 색감이 탁해지는 등 재료에서 오는 고통이 컸다. (그림13) <로보트 태권V> 신문 광고 (그림14) <로보트 태권V) 개봉일 대한극장 앞에 즐비한 관객들 (그림15) <로보트 태권V) 극장 매표소 앞 행렬과 매진표시 작품을 완성시켜 개봉할 때도 고통은 이어졌다. <로보트 태권V> 1탄은 대한극장에서 개봉했는데 극장의 횡포가 심했다. 표돌리기로 극장은 관객수를 줄였고 상영중단 커트라인이 1200명이었지만 개봉 21일이 되자 1800명이 들어도 간판을 내리게 했다. 현금으로 수입을 챙긴 극장은 제작사에 어음으로 대금을 줬다. 그가 최종적으로 얻은 수입은 유현목 감독과 서울흥행수입 절반을 나눈 것이 전부였고 유현목 감독은 서울흥행수입의 절반과 부산흥행 수입을 가져갔다. 결국 그는 빚을 다 갚지 못해 당시 1800만원 상당의 사당동 단독주택을 팔아야 했다. 극장의 횡포에 부당함을 느낀 그는 <로보트 태권 V> 3탄부터 극장이 아닌 시민회관에서 개봉하며 어린이 영화의 새로운 흥행 관행을 만들어냈다. (그림16) <똘이장군> 포스터 그는 <똘이장군>(김청기, 1979)에서 수익을 냈고 <로보트 태권V>로 얻은 빚을 갚을 수 있었다. 키프로덕션 시절 기획했던 이 작품은 『정글북』과 『몽테크리스토 백작』의 소재에 공산주의에 대한 적개심을 섞어 만든 것이었다. 동아광고에서 대명해 제작했고 제작비의 일부는 지방 선판매로 해결했다. 개봉관 상영이 힘들어 서울 2번관 서너 개를 잡았는데 오히려 흥행에 크게 성공했다. ‘똘이’ 라는 이름은 <코주부> 김용환 선생의 <똘똘이의 모험>을 참고해서 지은 작명이다. (그림17) <혹성 로보트 썬더 A>(김청기, 1982) 포스터 그는 <똘이장군>의 흥행이 성공한 후 다시 로봇만화로 돌아온다. 로봇만화가 나오면 각종 완구들이 덩달아 인기였는데, 완구업체 ‘뽀빠이과학’은 <로보트 태권 V와 황금날개의 대결>(김청기, 1978)부터 완구를 만들어 수익을 보고 있었다. <혹성 로보트 썬더 A>(김청기, 1982)때부터 완구업체 ‘뽀빠이과학’은 독점 판매권을 얻고자 김청기 감독에게 제작비의 일부를 대고 판권을 사기 시작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완구 모델을 제대로 개발하지 못할 때라 뽀빠이과학은 일본에서 인기를 얻고 있던 합체로봇을 가져와 “이런 모델로 영화를 만들면 어떠냐”고 제안했다. 결국 그는 일본에서 애니메이션 영화화되지 않는 모델일 경우에 한해 제안을 받아들였고 조금씩 변형시켜 작품에 사용했다. 회사를 유지하고 영화를 제작하기 위해서는 뽀빠이과학의 투자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렇게 뽀빠이과학은 제작비의 3분의 1 정도를 부담했다. (그림18) <초합금 로보트 쏠라 원투쓰리>(김청기, 1982) 포스터 (그림19) <로보트군단과 메카3>(김청기, 1985)의 한 장면 (그림20) <똘이와 제타 로봇>(김청기, 1985)의 한 장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합금 로보트 쏠라 원투쓰리>(김청기, 1982), <로보트군단과 메카3>(김청기, 1985)는 이름을 빼고 싶을 정도로 작가로서 자부심에 상처를 입힌 작품이었다. 하지만 흥행을 위해서는 그의 이름이 필요했다. <똘이와 제타 로봇>(김청기, 1985)도 뽀빠이과학에서 제공한 완구를 모델로 한 작품인데 그래도 어려운 시기를 만회시켜준 영화였다. 소인국의 ‘파라셀 공주’가 완구 비행기에서 뚜껑이 열고 등장하는 것이 당시 아이들이 신선하게 받아들여졌다. <슈퍼 태권V>(김청기, 1982)의 경우 합체는 뽀빠이과학의 요구대로 갔지만 캐릭터의 얼굴과 태권브이의 이미지는 벗어나지 않았다. 1980년대 들면서 태권브이 모델이 조금씩 변하는데 이 또한 완구업체의 영향이 있었다. <84 태권브이>(김청기, 1984)에서는 3단 변신합체로봇과 칼이 등장했다. 그런데 이 작품은 뽀빠이과학과 연출자의 의견 차이로 태권브이의 얼굴이 완구와 애니메이션이 차이가 날 정도였다. (그림21) <84 태권브이>(김청기, 1984)의 한 장면 (그림22) <84 태권브이>(김청기, 1984)의 한 장면 훌쩍 커버린 깡통로봇과 미나 <84 태권브이>(1984)는 <로보트 태권 V>(1976)를 본 아이들이 성장해서 볼 수 있는 작품을 만들고자 주인공인 훈이, 미나, 영희의 외모나 체형 또한 성장하고 분위기도 현대적으로 바뀌는 변화를 보여줬다. 하지만 <84 태권브이>의 흥행은 LA 올림픽과 문화생활의 변화 때문에 기대 이하의 실망을 안겨줬다. 자가용이 늘어 아이들과 교외로 이동하는 레저가 생겨났고 주차가 힘들었던 극장에는 발길이 뜸해졌다. 게다가 1980년대 컬러TV가 보급되어 화려한 원색의 어린이 만화가 연일 방송되었다. 어린이 영화가 퇴조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고 애니메이션의 흥행은 타격을 받게 된다. (그림23) <외계에서 온 우뢰매>(김청기, 1986) 포스터 어린이 영화의 퇴조라는 위기를 타개하고자 새로운 도전으로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합성한 로봇 영화 <외계에서 온 우뢰매>(김청기, 1986)를 만들게 된다. <외계에서 온 우뢰매>는 <황금날개>의 스토리를 각색해 만든 것이다. 순진하고 어벙한 주인공이 덤블링을 하면 히어로가 되는 이야기에 디즈니의 <메리 포핀스>(1964)처럼 실사와 만화가 어우러지는 형식을 더해 만든 작품이었다. 마침 뽀빠이과학이 독수리가 로봇이 되는 우뢰매 완구를 가져왔는데 썩 괜찮았다. 하지만 실사 애니메이션은 실사영화와 애니메이션을 각각 따로 찍은 뒤 합성해야 했기에 제작비가 상당했다. 결국 뽀빠이 과학이 제작비 5천만을 투자해 제작이 시작될 수 있었다. (그림24) <외계에서 온 우뢰매>(김청기, 1986) 실사와 애니메이션의 합성 장면. 우뢰매가 악당 로봇 캉가를 공격하려는 장면 코메디언 심형래가 아이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다행히 덤블링이 가능해 <우뢰매>시리즈에 주연으로 캐스팅했다. 심형래를 주인공 ‘에스퍼맨’으로 설정하고 ‘데일리’ 또한 <로보트 태권 V>의 메리와 같이 외계인이라는 설정을 가져갔다. 그는 이때도 만약 데일리가 지구인일 경우 검열에서 무사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그림25) <외계에서 온 우뢰매>(김청기, 1986)의 한 장면. 에스퍼맨 심형래와 데일리 천은경 <외계에서 온 우뢰매>(1986)가 흥행에 성공하자 그 수입과 <외계에서 온 우뢰매 2>(김청기, 1986)의 선판매금을 합쳐 잠실에 세를 얻고 3억을 들여 올림피아극장을 만들었다. 마침 소극장 붐이 일었을 때였다. <외계에서 온 우뢰매 2>는 겨울방학시즌 개봉 때 올림피아 극장에서도 상영했다. <외계에서 온 우뢰매 2>부터는 <스타워즈>를 모델로 특수촬영을 해보고자 애니메이션과 모형을 사용했다. (사진26) <외계에서 온 우뢰매 2>(김청기, 1986) 데일리 송금란과 에스퍼맨 심형래가 모형으로 된 우뢰매를 출동시키는 장면 그는 <외계에서 온 우뢰매> 시리즈의 성공 후 성인 히어로물에 대한 기대감으로 <바이오맨>(조명화·김청기, 1988)을 제작한다. 이 작품도 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주인공을 <6백만 불의 사나이>나 <소머즈> 같은 사이보그로 그리고자 한 작품이었다. 홍콩, 태국 등지로 로케이션 촬영을 감행하는 등 평균제작비가 1억이던 시절 5억의 제작비를 투자한 대작이었다. (그림27) <바이오맨>(조명화·김청기, 1988) 홍보전단 <바이오맨>은 국도극장에서 개봉하기로 했으나 마침 개방화 물결 속에서 1988년부터 공산권 국가들의 작품이 대거 국내에 상영되고 화제를 모을 때였다. <바이오맨>은 갑작스럽게 중국영화에 밀려 국도극장에서 상영할 수 없게 된다. 지방의 흥행사들은 서울 상영관의 개봉 이력과 선전물을 받아 흥행을 해야 했기에 궁여지책으로 어린이회관에서 <바이오맨>을 개봉하게 된다. 작품의 성격과 상영관이 전혀 맞지 않아 흥행은 요원했다. (그림28) 만화잡지 《월간 우뢰매》 <외계에서 온 우뢰매> 시리즈의 흥행 속에서 1988년에는 잡지 《월간 우뢰매》를 창간한다. 본격 로봇 만화잡지였는데 어린이 대상 잡지여서 광고수입이 없었고 결국 적자를 보며 운영하다 18권까지 발매하고는 폐간한다. 그런데 1990년대 초반 국세청으로부터 잡지 90만 권의 판매에 대한 소득세가 부과된다. 당시 열악한 출판업계 관행상 영수증 처리가 미비해 제대로 된 비용 증빙을 할 수 없어 공제 없이 고스란히 세금을 내야만 했다. 그는 세금을 벌기 위해 비디오사업에 뛰어들었으나 당시 포화상태였던 비디오업계에 진입해 성공하기는 힘들었다. 결국 ‘태권브이’의 아버지이자 한국 로봇애니메이션 영화의 창시자인 그는 1990년대 중반 안타깝게도 파산을 선언하고 낙향한다.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사랑만으로 사업을 운영하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이후 방송국과 주변인들의 요청으로 애니메이션 몇 편을 만들었고 1999년에는 영화사 ‘신씨네’ 신철 대표에게 <태권브이>의 저작권을 넘기고는 제작 일선에서 물러난다. (그림29) 2016년 ‘태권브이’ 탄생 40주년을 기념해 열린 전시 ‘엉뚱산수화전’의 작품 현재는 그림을 그리고 전시를 하며 조용한 시절을 보내고 있다. 그는 위기마다 새로운 시도를 통해 <로보트 태권브이>와 <외계에서 온 우뢰매>라는 성공적인 시리즈를 만들어내 국내 애니메이션과 어린이 영화의 역사에 한 획을 그었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며 애니메이션 영화에 대한 기대와 사랑을 놓지 않고 있다.
단순과 즉흥, 장우진 의 < 춘천, 춘천 >을 설명하기 위해 이 두 단어면 충분하다. 춘천 태생인 장우진 감독은 막연하게 자신의 고향에 관한 영화를 만들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춘천에 대한 장소감과 심상은 그곳을 바라보는 자의 시선과 경험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 기본적인 아이디어였다. 이후 감독은 우연히 서울에서 춘천으로 향하는 기차 안에서 등산복을 입은 중년 커플이 어색하게 대화를 나누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리고 그 즉시 춘천이라는 하나의 공간 안에서 벌어지는 두 개의 영화적인 이야기를 구상한다. < 춘천, 춘천 >의 이야기는 단순하다. 오프닝과 함께 춘천으로 향하는 열차 안에 한 청년이 중년 커플 사이에 앉아 있는 모습이 나온다. 그 청년은 중년 커플이 나란히 앉아서 편히 대화할 수 있도록 자신의 자리를 양보해준다. 등산복을 입고 춘천을 향하는 중년 커플의 대화 속에는 묘한 기류가 흐른다. 그들의 말 속에는 긴장, 설렘, 사랑, 욕망이 뒤섞여 있다. 영화는 1부와 2부로 나누어서, 서울에서 취업 면접을 본 다음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춘천으로 돌아온 청년의 이야기와 중년 커플의 춘천 여행기를 순차적으로 보여준다. 오프닝을 제외하고 청년과 중년 커플은 다시 만나지 않는다. 혹자에게 이 두 개의 이야기는 진부할 수 있다. 미래가 불확실한 청년 세대의 불안함 그리고 중년 커플의 사랑과 욕망은 이미 동시대 텔레비전과 영화의 단골 소재이기 때문이다. 대신에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장우진 감독이 진부하고 전형적인 것들로부터 삶의 진솔한 이야기를 끌어낼 수 있는 영화적 형식을 고민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화는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를 마치 하나인 것처럼 엮기 위해 대칭의 방식을 활용한다. 우선, 영화 전체적으로 청년의 동선과 중년 커플의 동선을 겹치게 했다. 1부에서 청년이 방문한 소양강댐, 선착장, 청평사, 식당 등은 이후 2부에서 중년 커플의 이야기가 펼쳐지는 주요 무대로 다시 쓰인다. 그리고 여러 에피소드를 배열하고 화면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데칼코마니의 구조를 따랐다. 한 프레임을 구성하는 이미지들이 서로 마주 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하나의 쇼트와 다른 하나의 쇼트가 몽타주 될 때 좌우 반전된 이미지의 관계가 만들어진다. 이 외에도 1부의 에피소드와 2부의 에피소드는 유비적 관계를 맺는다. 청년의 현재와 중년 남자의 과거, 청년의 미래와 중년 남자의 현재가 닮은꼴이라는 인상을 주는 상황 또는 대화가 종종 있다. 이처럼 장우진 감독은 하나의 건축물이 여러 단위로 세분되어 있으면서도 그 각각이 모여 하나의 소우주를 이루듯이, 한 편의 영화 안에서 서로 다른 두 개의 이야기가 공존할 수 있도록 이미지와 서사를 직조해나가고 있다. 장우진 감독이 추구하는 단순함의 미학은 하나의 작품에 최적화된 카메라의 움직임을 찾으려는 그의 직관과 통찰이 영화 전체를 관통할 때 그 진가가 드러난다. 전작 < 새출발 >에서 불안한 20대 청년들의 물질적 및 정신적 상태를 다르덴 형제 식의 핸드헬드 카메라로 표현했던 그는, 이번 작품에서 정적인 카메라의 움직임을 선택했다. 춘천의 어느 재개발 지역의 을씨년스러운 풍경, 운무에 잠긴 소양강댐,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빛에 따라 그 형태가 변화하는 청평사의 풍경 등은 모두 고정된 카메라의 시선 속에서 회화적으로 묘사되고 있다. 더불어 이 영화에서 카메라가 움직이는 방식 또한 단순하다. 한 인물이 한 지점에서 다른 지점으로 이동하면서 프레임 밖을 벗어나려는 찰나에 혹은 한 인물의 몸짓이 프레임 밖을 넘어가려는 순간에 카메라는 패닝 또는 틸팅을 한다. 이와 같은 카메라의 움직임은 한 화면에 담긴 상황, 환경, 풍경, 그리고 그것을 포함하는 세계 그 자체의 변화로 이어진다. 즉 영화 속 인물의 움직임 변화, 카메라의 운동, 그리고 상황의 변화가 순차적으로 이어지고, 유기적으로 통합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단순한 규칙을 적용해 이야기와 이미지를 구조화해나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형식주의에 매몰되지 않도록 스스로 경계한다. 영화 곳곳에는 우연적이고, 즉흥적이고, 우발적인 사건이 발생하는 순간이 있다. 극영화적인 세계 내부에 다큐멘터리가 동거하고 있는 양상이랄까. 극과 다큐멘터리의 장르적 경계를 순간적으로 와해시켜보려는 감독의 연출적인 충동은 이 영화가 감독 자신의 고향인 춘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며, 실제 감독이 서울에서 춘천으로 오는 열차 안에서 경험한 것을 모티브로 했고, 또 캐릭터의 이름과 배우의 이름이 일치한다는 점으로부터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다. 또한, 야외 촬영이 대부분이었던 이 영화는 촬영 현장을 별달리 통제하지 않고 실제 그 현장의 우연적인 요소를 영화 만들기의 한 부분으로 포용했다. 그리하여 이미 구조가 짜인 이야기 안에 실제 현실이 침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청년이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고향 친구와 전화 통화하는 장면, 마라톤 경주 대회가 펼쳐지는 장소를 스쳐 지나가는 청년과 중년 커플의 상반된 모습, 그리고 청년이 친구네 어머니의 식당에서 김장을 도와주면서 마을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그러하다. 이 각각의 장면은 극영화적인 캐릭터와 다큐멘터리 적인 출연자들이 한 화면에 담긴 경우이다. 장우진 감독은 구조와 틀을 벗어나지 않는 수준에서 감독의 직관, 배우 혹은 출연자들의 즉흥적인 말과 행동, 그리고 현장의 우발적인 상황을 포용하려고 한다. 이 영화가 우연성을 중시한다는 것은 빛의 변화를 다룬 몇몇 장면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시시각각 변화하는 일조량에 따라서 카메라가 같은 공간을 얼마나 다양하게 담아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청년과 중년 커플이 청평사에서 절을 하러 들어가기 전과 절을 하고 나온 후의 빛의 밝기는 달라진다. 영화는 그들이 평소에 갖고 있던 마음의 짐을 절간에 두고 왔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도록 그들이 절에 들어가기 전과 후의 자연광의 변화 그리고 그로 인한 풍경의 변화가 일어났음을 넌지시 강조한다. 장우진 감독에게 빛은 단순히 화면을 구성하는 이미지의 변화에 국한해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러했듯이 빛의 변화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벌어지는 것이며, 그것은 또한 인상의 변화를 유발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장우진 감독에게 모든 영화적 순간은 어느 하나의 시공간에 고정되어 있지 않고 부단한 생성을 거듭하는 찰나적 순간이 된다. 이처럼 < 춘천, 춘천 >은 단순한 구성과 촬영에 기초해 현실의 어떤 순간을 영화적인 순간으로 변환해보려는 연출적인 충동이 반영된 작품이다. + 이 영화를 보고 나서 문득 떠오른 고전 영화가 있어 조심스럽게 사족을 단다. 그것은 D. W. 그리피스가 만든 두 편의 단편이었다. 하나는 플로렌스 로렌스가 주연으로 나오는 < 시골 의사The Country Doctor >(1909)이다. 이 영화는 오프닝과 엔딩이 데칼코마니처럼 포개질 수 있는 구조를 가지고 있으며, 패닝을 통해서 영화 속 풍경과 영화 속 이야기를 통합하고 있다. 다른 하나는 릴리얼 기쉬가 주연으로 나왔던 < 피그 앨리의 총잡이 The Musketeers of Pig Alley >(1912)이다. 이 영화의 한 장면은 당시 뉴욕 빈민가가 위치했던 로어 이스트 사이드에서 촬영되었다. 행인 중 대다수는 그곳에서 영화가 촬영되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카메라 앞을 지나간다. 그중 한 여인이 자신과 반대 방향에서 걸어오던 릴리언 기쉬와 어깨를 부딪치고는 불쾌한 표정을 짓는다. 그 여인의 표정, 즉 실제 거리의 행인과 배우 릴리언 기쉬의 충돌 때문에 나타난 그 찰나적 순간은 그리피스의 극영화 속에 다큐멘터리적인 순간이 개입했음을 보여주는 증거이다. 이러한 장면들 때문인지 몰라도, 나는 그리피스의 패닝과 그의 현장 연출이 장우진 의 패닝과 그의 현장 연출과 묘하게 닮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두 감독 사이에 직접적인 영향 관계가 있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과거 영화 언어를 새로이 만들어보려던 힘과 오늘날 한 작품에 최적화된 영화 언어를 찾아보려는 힘이 어떤 지점에서 만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신기할 따름이었다. 과거의 앞으로 나아가려는 영화적 힘과 오늘날 뒤로 돌아가려는 영화적 힘은 분명 다른 성질의 것이다. 그런데도 그 두 개의 서로 다른 힘이 느슨하게 이어져 있거나 100년이 넘는 시간적 차이를 극복하고 영화라는 세계 안에서 공명하고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왜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