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역사: 전용 영화관
- 감독
- 장 뤽 고다르
- 제작년도
- 1997
- 출연
- 장 뤽 고다르
경기천년바탕체 R(저작권자: 경기도, 출처: 한국저작권위원회 ) (위 이미지 클릭 시 유튜브 영상으로 이동) 20년 역사의 예술영화 전용관 대전의 원도심이라고 불리는 대전 중앙로에 위치한 대전아트시네마는 예술영화 전용 상영관으로, 스스로를 ‘예술영화 지기’라고 칭하고 있는 강민구 대표가 2006년 4월에 개관하여 이후 계속 운영하고 있다. 대전아트시네마는 1990년대 말부터 전국적으로 본격화된 시네마테크 운동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강민구 대표는 ‘전국시네마테크연합’이라는 모임에서 활동을 하면서, ‘시네마테크 운동’의 관점에서 대전에도 예술영화 상영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처음에는 다른 극장을 대관하거나 문화회관 같은 공간을 대관하여 영화제를 열었으나, 안정된 상영 공간이 확보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면서 본인이 살고 있던 지역에 예술영화관을 개관했다. 2002년 시네마테크 단체들이 연합해서 출범한 한국시네마테크협의회가 서울아트시네마를 개관하는 것을 본 것이 자극이 되었다. 또한 당시 영화진흥위원회에서 진행한 예술영화관 운영 지원사업의 대상이 되어 영화관 개관에 큰 도움을 받았다. 강민구 대표는 처음 2006년에는 대전 선사유적지 근처에서 ‘시네마테크 대전’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일 년간 운영을 했는데, 그 장소가 요양병원으로 바뀌면서 2007년 현재의 자리로 이전했다. 현재의 대전아트시네마 공간은 이전 ‘동보극장’이었다. 영화관 시설이 어느 정도 갖춰져 있다는 점이 이전의 이유가 되었다. 원래는 바로 인근에 7개 관을 운영하고 있던 대전아카데미극장을 임대하고 싶었으나 불가능하다는 답변을 받게 돼서 동보극장을 임대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전아카데미극장은 2016년 7월 31일 영업을 종료했다) 현재도 동보극장의 기물들을 상당 부분 그대로 사용하고 있다. 원도심에는 원래 대형 영화관뿐 아니라 소극장 등도 있었으나 멀티플렉스가 생기면서 2, 3년 사이에 급격하게 다 사라져 버렸다. 대전아트시네마 강민구 대표 현재 대전아트시네마는 옛 충청남도청사 방향으로 목척교를 지나기 전 대로변 건물 3층에 위치하고 있다. 기차역 대전역에서 내려서 도보로 5분 거리이며 인근에 대전의 명소로 불리는 ‘성심당’ 본관은 물론 ‘중앙시장’과 ‘스카이로드’가 있어서 서울과 경기도 지역에서 오는 여행자들이 들러야 하는 지역으로 꼽히고 있다. 현재 대전아트시네마 위치는 기차역과 지하철역에서 도보로 접근이 가능하고, 자동차를 가지고 온다고 해도 중앙시장 공영주차장이나 인근 건물의 복합주차빌딩을 이용할 수 있어서 접근성이 높다. 대전아트시네마가 위치한 지역은 주민들에게 구 시가지의 중심이라는 의미를 가진 ‘원도심’이라고도 불린다. 이전까지는 지리적으로 대전의 중앙에 있었던 지역이었으나 현재는 유성이나 대전 서구 쪽으로 계속 범위가 넓어지면서 둔산이 중앙이 되었다. 2000년대 중후반 지하철 대전역이 생기면서 이 지역이 다시 활성화되고 있다. 특히 시내버스가 대전역 앞으로 오게 되면서 대전의 20~30대들의 원도심 유입이 많아졌다. 또한 대전아트시네마가 영화제나 기획전을 열면 대전 이외의 지역, 특히 서울과 경기 쪽 영화 마니아들이 기차를 타고 참석하는 경우도 많다. 대전아트시네마 로비 전경 138석의 상영관 건물 입구에서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와서 대전아트시네마로 들어오면 좌측에 ‘시네마테크관’이 있다. 시네마테크관은 28석인데 영화 상영이 가능한 강연 공간이다. 기획전이 열리기도 하지만 워크숍과 대관 등의 행사가 주로 진행된다. 우측에는 휴게 공간이자 로비가 있다. 이곳에서는 티켓 발권도 가능하고 음료도 주문이 가능하다. 로비에 영화 관련 서적과 DVD, 영화 포스터 등이 놓여 있고 영화 관람 전 티켓 발권을 하고 쉴 수 있는 카페처럼 꾸며져 있다. 로비에는 방대한 양의 영화 DVD가 있는데 대전아트시네마 회원으로 가입하면 무료로 빌려주고 있다. 회비는 월 만 원이며 영화를 볼 때마다 회원가입을 하면 삼천 원씩 할인해주고 있다. 시네마테크관 전경 로비에서 우측으로 들어가면 상영관이 있는데, 상영관은 1관이고 좌석은 총 138석이며 10분이 경과되면 입장을 할 수 없다. 면적은 전체적으로 보면 100평 정도 되고, 상영관이 50평, 휴게실이 30평, 시네마테크관이 20평 정도이며 옥상이 있다. 날씨가 좋을 때는 옥상에서 ‘옥상영화제’라는 이름으로 영화 상영과 음악 공연 등을 진행했다. 원래 좌석은 2층을 포함하여 193석이었는데 필름 영사기를 대체한 디지털 영사기의 공간을 2층에 마련하게 되어 2층에 관객을 출입시키지 않고 있다. 더 이상 쓰지 않는 필름 영사기의 부속들은 서울아트시네마에 기증했다. 그런데 현재는 10,000안시 빔 프로젝터로 상영을 하고 있다. 디지털 영사기가 있으나 보수비용이 너무 비싸서, 맥미니를 통해서 프로레스 파일로 받아 상영한다고 한다. 취재 시점 영화진흥위원회 지원사업에 선정되어서 상영시스템을 보수할 계획도 가지고 있다. 상영관 1층 전경 대전 영화예술문화의 아지트 대전아트시네마는 예술영화 전용관답게 개관 이래 한결같이 예술영화와 독립영화를 대전 시민들에게 소개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주기적으로 기획전과 영화제를 개최하고, 영화 비평 수업 및 제작 강좌 등을 열기도 하는 등 영화를 사랑하는 시민들에게 아지트 역할을 한다. 2019년부터 시작한 ‘대전철도영화제’는 지역민들로부터도 큰 호응을 받고 있다. ‘대전의 역사와 영화를 교차시킨다’라는 취지를 걸고 있는데 철도와 함께 성장한 도시라는 정체성을 지역 주민들에게 부각함과 동시에 만나기 힘들었던 고전 명작들과 한국 독립영화 신작들을 발굴하여 상영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영화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겨서 《씨네21》이 2020년 독립예술영화관에 대한 기획 기사를 연재했을 때, < 윤희에게 >(2019)를 연출한 임대형 감독과 < 스틸 플라워 >(2016), < 재꽃 >(2016) 등에 출연한 정하담 배우가 본인들에게 인상 깊었던 독립예술영화관으로 대전아트시네마를 지목하기도 했다. 임대형 감독은 대전아트시네마가 2011년에 에릭 로메르 감독의 추모전을 하고 있을 때 방문한 기억을 술회했으며, 정하담 배우는 2017년 <재꽃>을 개봉했을 당시 대전아트시네마 옥상에서 열리는 GV 행사에 참여 한 뒤, 그때의 분위기는 물론 당시 대전아트시네마에서 일하는 청년 스태프의 열정에 대해서도 감탄했다고 한다. 이렇듯 이십 년의 시간을 거쳐 온 대전아트시네마는 이제 많은 영화예술인들에게 추억의 공간이자, 성장의 터전이 되어주고 있다. 공간 및 운영개요 1) 위치 : 대전시 동구 중앙로 192, 3층 2) 설립일 : 2006년 4월 3) 대표자 : 강민구 4) 규모 : 면적 212.37㎡(상영관 약 50평, 휴게실 약 50평) 5) 극장 구성 (관수, 관별 좌석 수, 훨체어석): 대전아트시네마 1관 136석, 시네마테크관 28석 6) 운영시간 및 정기휴무 : SNS 및 공식카페에 상영시간표 공개, 연중무휴 7) 입장료 및 할인 정책 : 일반 8,000원, 청소년/노약자/장애인 7,000원, 회원 5,000원 8) 조직도 및 조직 구성 : 대표, 대전철도영화제 스태프 9) 구성원 : 강민구 대표, 신진희 스태프 10) 주요 장비(영사 장비, 음향) : 빔 프로젝터, 맥미니(ProRes 파일 상영) 취재 일자: 2024년 8월 29일 글/인터뷰 진행: 김문경 사진: 허 성
< 둥글고 둥글게 >(2020)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중심에 두면서 1980년대를 조망하는 오디오-비주얼 프로젝트이다. 한국영상자료원이 기획한 이 프로젝트는 역사적 영상물들을 편집한 파운드 푸티지 필름으로 단순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기념하는 것을 넘어서 역사 이미지에 대한 존재론적 성찰을 환기한다. 미디어 아티스트 장민승은 <보이드>(2016), <보이스리스>(2019), < 오버 데어 >(2019) 등에서처럼 음악감독 정재일과의 긴밀한 협업을 통해 이 작품에서도 ‘빛과 소리’의 특별한 시공간 체험을 선사한다. 여기서 ‘빛’은 ‘빛고을(光州)’이라는 이름을 가진 광주와 그 역사적 존재들이 남긴 흔적인 만큼, 차원들을 넘어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하는 영화와 그 역량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소리’는 기도와 종교음악이 그래왔던 것처럼 역사적 존재들과 현재의 관객이 만나 신에게 고통을 하소연하고 죽은 자들을 위로할 수 있는 제의적 공간을 형성한다. <둥글고 둥글게>는, < 박하사탕 >이 가장 순수했던 ‘나’를 찾기 위해 5.18 광주 직전으로 돌아가는 시간여행을 했던 것처럼, 시청각적 이미지와 역사의 잠재성을 재차 질문하고 그 역사-영화로부터 고통 받고 소외당한 자들을 위로하기 위해 그곳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러나 이 작품은 5.18 광주를 한국 근대사의 기원이나 갑작스러운 독립된 사건으로 부각하지 않는다. <둥글고 둥글게>는 88올림픽부터 시작해 79년 10월 부마민주항쟁까지 시민과 기자들이 찍은 사진, 전두환 정권이 정권홍보를 위해 만든 뉴스영화, 텔레비전 뉴스보도영상 등을 현재에 촬영한 이미지 컷들과 교차편집하며 차근차근 역사를 거슬러 올라간다. 여기서 초점을 맞추는 것은 88올림픽의 아이콘이었던 ‘굴렁쇠를 굴리는 아이’뿐만 아니라 지금은 텅 비어있는 올림픽 스타디움이며, 87년 6월 민주항쟁을 이끈 시위대뿐 아니라 공장과 탄광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다. 역사에는 기록되지 않은 익명의 사람들의 일상의 감정과 노동환경, 작은 정치적 움직임들이 서로 영향을 미치며 5.18 광주라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났고 5.18 광주는 1980년에 끝난 것이 아니라 다른 역사들에 다시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쳤음을 기억하려 한다. 실제로 영화 후반부에는 ‘Memorare(기억하라)’라는 합창이 반복해 울려 퍼진다. ‘Memorare’는 기존에 이미 기억된 것을 넘어서 기억하려는 의지이자 염원이다. 마지막 시퀀스에 등장한 88개의 피아노 건반이 모두 자기 소리와 존재의 의미가 있음을 강조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역사관을 전달하기 위해 <둥글고 둥글게>가 지속적으로 각인하는 것은 존재의 본질 혹은 물질의 기본 요소이다. 오프닝 장면부터 작디작은 빛의 입자, 사라져가는 연기, (피아노 건반과 공장의 기계음을 비롯한 여러) 소리의 파동을 가능한 개별적으로 또렷하게 표현한다. 이러한 표현을 최대화하기 위해 장민승 작가는 전통적 영화 방식을 버린다. 빛을 스크린에 투사하는 프로젝터가 아니라 전류가 흐를 수 있는 유기물 고체를 이용해 자체 발광하는 디스플레이 OLED를 선택한 것이다. OLED는 빛의 전달 속도가 빨라 잔상이 거의 나타나지 않는 선명한 화질을 제공한다. 이는 매우 작은 입자들까지도 그 존재를 도드라지게 할 뿐만 아니라, 빛은 빛으로, 어둠은 어둠으로 그 본질을 감각하게 하며 전기적 운동의 이미지로 표현되는 영화의 새로운 존재방식까지 고민하게 한다. 빛은 시간여행을 가능하게 하고 역사적 존재를 두드러지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전혀 다른 시공간의 차원들을 연결하는 역할도 해왔다. 87년 민주항쟁 당시 시위대가 고가도로에 올라가 아래쪽에 있는 전경들을 방해하기 위해 거울을 들어 빛을 반사시키는 장면은 그런 면에서 매우 SF 영화적인 순간을 만든다. 이때 시위대의 시선에서 관객은 프레임 아래쪽에 배치된 전경과 유사한 위치에 놓이기 때문에, 시위대가 반사시키는 거울 빛은 스크린을 넘어서 관객을 직접적으로 비추는 효과를 만든다. 2차원에서 3차원, 과거에서 현재로 다른 시간과 공간을 연결하는 반사된 빛은 ‘기억하라’는 기호를 전송하는 조난신호처럼 보인다. 오프닝에서 5분에 가까운 시간 동안 하나의 초가 타오르고 꺼지는 것을 보여주는 장면이나 이명박 정권 당시 용산참사의 망루 이미지를 구김이 있는 반투명한 스크린에 투사해, 제사에서 죽은 자를 위로하기 사용되는 종이인 소지(燒紙)처럼 태워 버리는 장면 역시 거기와 여기를 연결하는 빛들을 전면화한다. 이러한 영화적 순간들은 극장상영이 아니라 무대가 있는 공연형식(2020.11.28. 광주 국립아시아문화전당 공연)으로 상영되었을 때 더 극적인 방식으로 연출된다. 87년 민주항쟁 당시 최루탄이 터지는 장면에서 스크린과 관객 사이의 무대에 연무가 뿌려지고, 5.18 광주 당시의 흑백 필름이 현재 광주의 공간과 교차편집 될 때 여러 개의 핀조명이 무대에 떨어지면서 2차원의 스크린과 관객이 있는 3차원의 공간의 경계는 무너진다. 이미지로 표현되는 역사적 존재와 현실의 관객은 ‘둥글고 둥글게’라는 제목처럼 사이-공간에 공통의 대기로 감싸 안아지게 된다. 5.18 광주의 파운드 푸티지 영상이 본격적으로 삽입되는 영화의 후반부는 죽은 자들의 말을 대신하고 그들을 위로하는 씻김굿에 가깝다. 자신의 고통을 알아주기를 원하고 운명을 원망하는 구절로 가득한 시편을 후반부에 삽입하며, 당시의 광주시민들을 영웅적 투사로 세워 기념하기보다는 그들을 위로하고자 한다. 더불어 광주시민들을 ‘폭도’로, 항쟁을 ‘소요와 난동’으로 규정하는 <국립영화제작소>의 뉴스영화로 시작하는 후반부는 영화라는 매체의 윤리적 책임을 묻는다. 영화는 무엇을 보여주고 그렇지 않아왔는가? 광주를 비롯한 역사적 비극들에 영화의 책임은 무엇인가? 이후 광주시민들이 계엄군에 의해 폭행·살해당하고 부모들이 죽은 자식의 관을 붙잡고 우는 모습이 담긴 네가 필름들이 그 사건이 일어났던 현재의 공간과 함께 교차편집 된다. 계엄군에 의한 온갖 폭행과 고문이 일어났던 옛 광주교도소와 국군광주병원은 지금은 폐허가 되어 자연의 침입과 보호를 동시에 받고 있다. 카메라는 수평으로 뼈대만 남아있는 문과 문, 창문과 창문, 기둥과 기둥, 벽과 벽 사이를 이동한다. 이 움직임은 빛이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플리커링(flickering) 효과를 만들며, 이 사적지들을 영화관 그 자체로 만든다. 레퀴엠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현재 카메라의 움직임과 과거의 촬영된 흑백의 푸티지들이 교차편집 되며 관객들은 과거와 현재를 반복적으로 오가는 체험을 한다. 그리고 이러한 시공간 이동은 현존과 부재의 경계를 끊임없이 넘어서게 한다. 장민승 작가는 ‘작가와의 대화’(진행 이은선)에서 ‘둥글고 둥글게’라는 제목에 대해 순환과 반복의 메타포이며, 광주시민들이 전라남도청 분수대를 에워싸고 있던 사진의 모양이고, 80이라는 숫자의 기호이고, 돌고 돌아 역사가 자꾸 제자리로 회귀하는 것에 대한 허망함이며, 한국 근대사의 경제성장에서 쇳물을 부어 제련하던 사람들의 노동을 가리킨다고 말한 바 있다. 한편 그것은 영화의 가장 기본 요소인 빛의 모양이기도 하다. <둥글고 둥글게>는 마지막 시퀀스에서까지 88개의 건반을 모두 보여주고 들려주며 그 존재들, 그리고 그 존재를 구성하는 물질적 요소까지 모두 기억하려 한다는 점에서 철저히 유물론자인 것처럼 보이기도 하다. 역사와 영화를 제련하여 그 존재를 다시 묻고, 잊지 않으려 하고, 그들이 부재하는 것처럼 보여도 여전히 대기 중에 남아있는 빛의 입자와 미세한 숨결을 매개해 위로하려는 의지, 그것이 88분간 이 프로젝트가 하려고 한 것이 아닐까? 그런 면에서 빛의 입자와 미세한 숨결은 단순히 수동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그곳에 존재했던 사람들의 증거이며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거기의 사건과 존재들을 체험하게 하는 역사의 행위소(actant)가 된다.
켈리 레이차트는 가장 소박한 형식으로 동시대 미국인의 삶을 둘러싼 정치, 사회적인 맥락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있으며, 지역의 고유한 풍광 속에서 삶을 버티다가 무뎌지고 바스러지는 인물의 현재를 세심하게 관찰한다. 그녀의 6번째 장편영화인 < 어떤 여자들 >(2016)은 전작을 관통했던 그만의 인장도 찾을 수 있지만, 이 영화가 스케치한 몬태나의 풍경과 여성들의 삶은 ‘오리건 3부작’보다 쓸쓸하고 스산하며 적막하다. 현재 직면한 문제들과 씨름하던 인물들이 이 영화에서 굳게 입을 다문 채 저 멀리로 시선을 던지거나 묵묵하게 계절을 견뎌가는 숲과 나무, 하늘과 구름이 더 이상 사람들의 삶에 포함되지 않으려는 것처럼 저 멀리 떨어져 존재한다. 그들은 이미 사라진 것들의 흔적으로 남거나 곧 사라질 것처럼 고요하고 삭막하다. 레이차트의 고유함은 로컬, 독립, 여성이라는 키워드로 요약될 수 있지만 그녀의 온화하고도 단호한 시선은 이러한 범주에 갇히지 않는다. ‘오리건 3부작’은 지역의 상황을 통해 미국의 동시대적 문제를 진단하는 통찰력을 지니고 있고, 독립적인 제작형태를 통해 미국인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맥락을 주류의 흐름과 다른 각도에서 접근한다. 그녀는 1960년대의 시대정신인 자유와 해방이라는 가치와 폭력에 대한 저항정신을 잃어버린 중년 남성이 대안적인 삶의 방식을 찾는 것이 가능한지, 이미 사라진 세대를 복원하려는 노력이 가치 있는 것인지, 변화하는 세상에서도 온전하게 지켜질 사람 간의 예의가 존재하는지 탐색한다(< 올드 조이 >(2006)). 젊은 여성이 일자리를 찾아 알래스카로 이동하던 중 자동차가 고장 나고 그녀의 개가 사라지는 사건을 겪게 된다. 낯선 공간에 남겨진 그녀는 불안과 대면해야 하며 알래스카에서 맞이하게 될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웬디와 루시 >(2008)). 새로운 삶을 찾아 서부로 이동하는 개척민들이 길을 잃고 사막을 통과하게 된다. 황량하고 피폐한 노정에서 그들이 만난 인디언과 폭력적인 길잡이를 통해 서부라는 지형과 남성의 전유물이 된 서부극을 그녀만의 시선으로 탐구한다(< 믹의 지름길 >(2010)). 레이차트는 공간을 통과하는 행위에 주목함으로써 중심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 은밀하게 숨겨져 있거나 제한적인 관심사의 바깥에 버티고 선 삶의 풍경을 탐색하고 인물들의 노정을 통해 더 나은 삶의 가능성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유하도록 제안한다. 특히 미국인의 꿈과 이상이 어떤 지점에서, 어떻게 좌절되는가라는 질문을 짊어진 여성들이 당면한 문제들은 미국이라는 국가로부터 비롯된 은근하고도 끈질긴 불안을 거쳐 악몽이 되어간다. 그녀의 인물들은 예기치 못한 순간, 낯선 곳에 머물러야 하고 목적지로 향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하루하루 버텨내야 한다. 우리는 사소해 보이지만 살기 위해 당장 필요한 것에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인물과 마주하고 우회로조차 허용되지 않는 그들의 절박한 현실과 대면하게 된다. 그들이 당면한 삶의 조건은 영화 바깥의 우리와 동일한 것들이기 때문이다. 점점 줄어드는 돈, 일자리를 찾는 것, 먹을 것과 마실 물을 확보하는 것, 안전하게 잠들 장소, 부당한 합의금에 대한 소송처럼 실질적인 문제도 있다. 또 무자비하고 무분별한 자본의 횡포와 실용주의적 사고에 맞서 환경을 구하는 것, 신념과 실천의 간극에서 발생하는 윤리적 태도에 대한 질문, 9.11 테러-미국이 벌인 전쟁-2008년의 금융위기와 같은 부시 정권의 악행과 무능함의 폭로에 이른다. 레이차트는 미국인들을 위협하는 정치적 상황과 경제적 위기에 대한 비판을 이어가면서도 개인의 내밀한 삶을 작동시키는 동력을 꾸준히 모색한다. 그녀의 영화는 지역의 풍광 속에 새겨진 당대 삶의 구체적인 문제들과 더불어 세밀한 삶의 순간으로 인해 아름다움과 풍부함을 선사한다. 처음으로 친구가 생길지 모른다고 생각한 소녀의 빛나는 눈동자, 사랑하는 개를 낯선 곳에 떼어놓을 수밖에 없던 웬디의 절망스런 손짓, 낯선 곳에서 만난 경비업체 직원이 건네준 꼬깃거리는 지폐, 깊은 밤 적막한 소도시를 유유히 활보하는 말의 우아하고도 힘찬 발걸음, 개척시대 학교 건물에서 떨어져 나온 사암 더미, 특별하거나 진지하지 않은 하루를 담은 편지, 목동을 따라 뛰어다니는 사냥개의 활기찬 모습은 일상 속에 감춰진 비범하고 고귀한 순간들이기 때문이다. 레이차트의 영화가 지속적으로 우리에게 건네는 것은 겸허함과 친밀함을 바탕으로 한 관계의 풍요로움(< 올드 조이 >의 두 친구, < 웬디와 루시 >의 두 존재, < 믹의 지름길 >의 강직한 신념을 지닌 부부)도 있지만 한편으로 실패한 여정과 균열되는 관계(오랜 친구인 중년 남성들이 온천여행을 떠나지만 그들의 삶은 잃어버린 지난날에 대한 향수조차 허용되지 않을 만큼 불안정하고, 일자리를 찾아 알래스카로 가던 중 사랑하는 루시를 잃어버리고 깊은 절망과 두려움에 빠진 웬디는 유일한 이동수단인 차마저 잃게 된다. 믹과 인디언이라는 두 길잡이를 동원해서 신앙공동체를 세울 약속의 땅을 찾아가는 순례자 가족에게 닥친 공포와 두려움의 확산은 서부라는 공간이 배태한 이주와 정착이라는 근원적인 두려움을 바라본다. <어둠 속에서>(2013)는 환경을 위해 댐을 폭파시키려다 실패한 젊은 운동가들의 회의와 좌절을 통해 머릿속에서 생산되는 신념과 육체를 통해 실천되는 행위에 대해 질문한다. 하지만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은 희박하기만 하다.)에서 파생된 곤경도 존재한다. 무엇보다 풍경과 인물에 대해 일체의 타협을 거부하는 레이차트의 완고한 태도가 중심에 놓여 있다. 그렇기에 그녀의 인물들은 타인과의 관계가 회복되거나 당면한 문제들이 해결될 것이라는 불가능한 꿈에 대해 전력을 다해 거부한다. 불안과 절망을 이겨낼 수 없을지라도 삶은 이어질 것이며, 삭막한 여정에서 친밀한 존재와 교감하거나 이별할지 모르고, 그리하여 인간의 삶이 사막의 모래알갱이처럼 바람에 흩어져 흔적으로 남게 된다는 사실 앞에 그들은 솔직하고 겸허하다. 오랜 시간 묵묵히 존재하는 풍경과 대면한 인간의 유한성을 수용하고, 미완의 삶을 살고 있는 존재가 당도하고자 애쓰는 노정을 끈질기게 응시하는 레이차트의 카메라를 통해 동시대 서부의 풍광과 세밀한 삶의 기록이 조우한다. < 어떤 여자들 >은 네 여성의 이야기가 느슨하게 연결되기 때문에 그녀들이 어떤 삶을 꾸려나가고 어떤 태도로 살아가고 있는지, 타인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불화를 어떻게 대하는지, 서부라는 풍경이 그들을 어떻게 품고 있는지에 집중한다. < 믹의 지름길 >이 서부의 횡단기라면, 이 영화는 서부를 맴도는 인물이 그들을 에워싼 풍경을 응시하거나 회피하는 시선으로 건네받는 풍경과 역사에 대한 사색이다. 그런데 응시의 연결망이 너무 쓸쓸하고 음울해서 서부라는 풍경과 그 시대에 대한 종언처럼 느껴진다. 개척기 서부를 통과했던 이주민과 오랜 시간 땅의 주인이었던 인디언이 사라진 곳에 사암 덩어리나 황야를 달리는 철길, 드문드문 남아 있는 목장이 서부임을 드러낸다. 정착지를 향해 걷는 고된 행렬, 카우보이와 악당들이 허다하게 뿜어내던 총성, 달리는 말들의 격렬한 운동과 추격은 차갑고 어두운 겨울이라는 계절, 마을을 에워싼 산, 고립된 목장, 길게 뻗은 도로에 흡수된 것처럼 보인다. 레이차트는 퇴적물이 되어버린 서부, 이미 죽어버려 생동하는 힘이 사라진 서부를 사색하기 위해 풍경을 기억하고 자신의 삶으로 기입하는 자들(노인과 인디언 소녀), 풍경과 무관하게 살아가거나(리빙스턴에 거주하는 중년의 변호사와 법대생), 서부를 소유하려는 자(집을 지으려는 여성)를 등장시킨다. 그렇기에 <어떤 여자들>은 영원히 끝날 것 같지 않는 겨울의 황량한 풍경을 관찰함으로써 경관이 스스로를 드러내는 모습을 응시하도록 인도한다. 그리고 풍경에 기입된 서부의 원초적인 기억과 사라진 존재들을 불러들인다. 어쩌면 이 영화는 인물들의 세밀한 표정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보다 잔뜩 흐린 하늘과 낮게 깔린 구름,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 바싹 말라버린 목초지, 멀리 보이는 눈 덮인 산이 주인공임을 증명하는 것 같다. 척박한 풍경과 고된 인물의 삶을 드러내는 방식을 살펴보자. 이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자신이 속한 세계에서 미묘하게 어긋나거나 고립되어 있으며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친구라고는 말이나 개가 전부인, 삭막한 겨울을 보내는 인디언 소녀나 골칫덩어리 의뢰인을 설득하지 못하는 중년의 변호사, 대출금을 갚기 위해 왕복 8시간을 운전해야 하는 법대생, 고즈넉한 숲에 집을 짓기 위해 개척시대의 사암이 필요한 일 중독자의 겨울은 반복되는 노동과 고립된 생활, 소원에 대한 과도한 집착, 무기력함과 공허함, 빈곤에 대한 두려움과 피로에 잠식되어 있다. 변호사는 차를 타고 이동하는 동안 창밖으로 펼쳐진 풍경에 눈길을 돌리지 않는다. 그녀의 관심은 의뢰인의 무리한 요구로부터 벗어나는 것뿐이며, 잠이 부족한 법대생은 밤에만 등장하기 때문에 풍경(과 사람)으로부터 배제되고 고립된다. 숲속에 집을 지으려는 여성이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볼 때에도 그녀가 자연을 응시한다기보다 사이가 틀어진 사춘기 딸과 자신의 편이 되어주지 못하는 남편과의 단절이 강조된다. 조깅을 하거나 숲길을 걷고 집이 지어질 장소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그녀조차 아직은 완성되지 않은 집의 미래를 떠올릴 뿐, 현재 그녀가 해결해야 할 문제들에겐 눈을 감고 있다. 그녀의 관심사는 오직 이웃 노인이 소유한 사암뿐이고, 본고장에서 나는 돌로 집을 짓겠다는 소원조차 소유와 과시, 약탈의 행위로 변질된다. 그녀는 노인이 애틋하게 집과 땅의 역사에 대해 회고할 때에도 그저 사암을 가져가라는 허락만 요구할 뿐 그의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기어이 사암을 싣고 가던 날, 노인이 집 안에서 물끄러미 바깥을 바라보는 장면은 이 영화에서 가장 뭉클하면서도 절망적인 선언처럼 다가온다. 집의 형태를 갖춘 가족의 텐트/노인 홀로 사는 미완성의 집, 오랜 시간 녹지 않았을 눈이 더께로 앉은 산을 배경 삼아 서부의 무덤처럼 놓인 사암더미/여인의 텐트 근처에 차곡차곡 정리된 사암, 필요에 따른 거래/증여의 행위 끝에 마치 무덤에 갇힌 왕의 미라처럼 보이는 노인의 끈덕진 응시가 놓여 있다. 개척기의 서부, 마을이 처음 만들어질 때 교회보다 먼저 지어진 학교의 흔적만 남은 돌무더기가 치워진 곳은 노인이 거주한 지 50년 넘게 지켜온 터전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레이차트의 카메라는 노인의 집을 멀리서 지켜보는데, 마치 개척기의 역사가 스며든 대지와 몬태나의 스산한 풍경이 노인의 응시와 더불어 사라질 것임을 알면서도 제자리를 지키는 예언자 같다. 비록 기억하고 응시하는 행위자가 사라질지언정 레이차트는 인물보다 먼저 시선을 거두지 않는 것만이, 그들의 사라짐까지 목도하는 것이 서부와 그곳에서 살았던 인간에 대한 예의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노인이 자신의 죽음과 서부의 소멸을 염려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 어떤 여자들 >에서 가장 서부와 닮아 있는 사람은 목장 소녀이다. 그녀는 미국이라는 국가보다 더 오랫동안 서부와 함께 살아온 존재이자 삶의 터전으로써의 서부와 능동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즉 목장, 말, 카우보이로 대표되는 서부를 공유하고 있으며 원주민인 선조들의 삶을 기억함으로 인해 온전히 풍경에 속해 있는 존재가 된다. 소녀는 우연히 학교법 강의에 참석하게 되고 법대생에게 각별한 감정을 느낀다. 마구간과 목장 숙소를 규칙적으로 오가면서 일하는 그녀의 단조로운 삶에 파장이 일기 시작하지만, 피로에 찌들고 가난에서 벗어나지 못할까 봐 두려운 법대생은 인사도 없이 강의를 그만둔다. 소녀는 그녀를 만나기 위해 리빙스턴으로 향하고 도시의 밤거리를 걸으면서 카우보이모자가 진열된 상점을 구경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는 사람들을 쳐다본다. 결국 법대생을 찾게 되지만, 정작 그녀는 당혹스러워하며 노골적으로 불편함을 드러낸다. 자신을 기다리는 유일한 존재인 동물들에게로, 자신이 속한 서부로 돌아가던 길에 졸음을 이기지 못한 소녀의 차가 스르륵 미끄러지다가 마른 목초지에 멈춰 선다. 이 움직임은 중년의 변호사가 쇼핑몰에서 물끄러미 바라보던 인디언들의 전통춤 공연과 대비를 이룬다. 원주민이었던 인디언들의 삶이 한낱 구경거리가 되면서 도시의 상품으로 전락했고, 그렇게라도 연명해야 하는 삶의 스산함은 쇼윈도에 진열된 모자들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 하지만 기념품이나 상징에 머물기를 거부하는 소녀는 야생의 삶에 대한 열망과 자신에게 충실하겠다는 의지를 아직 지니고 있기에 존귀하다. 어쩌면 생애 처음으로 도시를 찾았을지 모를 소녀의 방문은 실패한 여정이었어도 깊은 감동을 남긴다. 백인 가족의 단란한 식사를 보면서 미소를 짓거나 우아하고 당당한 자세로 말을 타고 활보하는 모습은 정성껏 말의 갈기를 매만지는 손길과 말과 동일한 리듬으로 움직이는 그녀의 발, 목초지를 가로지르는 생생함과 더불어 그녀의 존엄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레이차트는 오랜 시간 거주했던 선조들의 땅을 떠났다가 씁쓸한 감정을 지닌 채 돌아오는 소녀의 얼굴을 오래도록 바라본다. 그녀의 자동차가 갓길로 빠지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지만 다시 소녀의 얼굴로 시선을 돌리지 않는 것은 여행 이후 소녀의 변화 여부를 확인하는 것보다 중요한 사실을 믿기 때문일 것이다. 소녀는 아직도 단단하게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으며, 목장에는 그녀와 겨울을 함께 보내는 동물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또 그녀의 의지로 말을 길들이거나 돌보는 행위가 그녀를 지탱할 것이며, 그녀를 품고 있는 서부 또한 소녀의 삶을 물끄러미 바라볼 것이기 때문이다. 레이차트는 우리에게 주어진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문제를 고심한다. 일상을 영위하는 표면 아래 숨어 있는 것 같지만, 먹고 마시고 잠을 청하거나 노동하는 매 순간 첨예하게 개입된 정치적 사안은 정착하지 못한 채 떠도는 과정에 놓인 인물들의 제스처와 표정, 불온한 시대에 잠시나마 온기를 더하는 숨결, 인물들의 곁을 스쳐 지나가는 미국의 풍경들 속에 깊이 스며든다. 나아가 < 어떤 여자들 >은 서부의 지형과 지리적인 풍경에서 서부라는 역사와 영화적 기억을 덧대어놓는다. 그것은 서부와 이별했던 남자들, 사막으로 돌아가는 그들의 뒷모습, 사막을 달려 멀리 사라지는 기차와 같은 회고의 대상에 머물기를 거부한다. 위대한 풍경이 된 서부는 적막할지언정 그녀들의 삶을 지켜보고 있으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서부를 되살리거나 망각한다. 하지만 사라짐에 대해 무심한 응시가 되었건, 끈질기게 나와 세계를 구성하는 존재임을 알고 있는 시선이건 서부를 떠돌던 그녀들의 고단하고 피로한 삶을 향하고 있다. ‘개인의 경험과 삶의 감각이 지닌 힘을 믿으며, 작고 사소한 것들로부터 시작되는 삶의 가치를 탐색하는 것이 영화가 해야 하는 일’임을 실천하는 그녀의 영화가 아름답고도 위대한 것은 미완의 시간을 견디면서 목적지에 도달조차 하지 못한 인물들에게 고집스럽게 머물러 있는 그녀의 시선 때문이다. ‘어떤’ ‘여자들’이 살아내고 응시한 것은 정직하고 윤리적이며 풍경에 대해 겸손하고 솔직한 레이차트를 향하고 있으며 인물들이 머무는 공간에 깃든 과거와 현재를 대면하도록 인도한다. 그들이 사라진 존재들과 생성되는 것들에게 통감할 때 정치, 사회적 표명과 내밀한 감정이 일체를 이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