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연습
- 감독
- 이체
- 제작년도
- 2006
- 출연
- 이무생, 송진우, 오미란, 임미미
웨스 앤더슨의 스타일에 관하여 웨스 앤더슨(이후 앤더슨)의 영화에 관한 주된 불평은 강박적이고 화려한 이미지의 형식적 아름다움에 비해 내러티브의 밀도가 낮다는 것이다. 영화의 서사가 지닌 명확한 목표가 있음에도 주인공의 감정과 주된 갈등에 집중하기보다 산만하게 여러 인물과 주변 사건을 나열하듯 펼치며, 이야기 자체보다 이야기를 표현하는 시청각적 형식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느끼기 때문이다. 또한, 영화 속 인물들은 그럴듯한 가상의 세계 안에 살아가는 실제 인간이라기보다 인형극 속 인형처럼 존재하며, 배경이 되는 공간도 로케이션과 세트장의 구분 없이 무대화된 허구적 공간처럼 느껴진다. 이러한 앤더슨 영화의 특성은 누군가에게는 불평을 넘어 시각적 스타일 외에는 말할 것 없는 텅 빈 영화라는 비판에 이르게 한다. 텅 비었다는 가치 판단을 제외하고, 강박적으로 통제된 시각적 이미지에 반해 내러티브가 온전히 제어되지 않고 산만하게 구성되어 형식과 내용 사이에 연결성이 떨어진다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사실이다. 하지만 조금 다르게 바라보면, 강박적으로 통제된 이미지를 통해 영화의 허구성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것처럼 서사에서도 그럴듯한 극적 이야기에 이르는 고전적 구조가 아니라 산만한 구성을 통해 몰입을 방해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는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영화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도 있다. 예컨대 앤더슨 세계의 스타일이 완전히 자리 잡기 전인 데뷔작 < 바틀 로켓 >(1996)을 보자. 영화의 핵심 사건을 이끌어가는 인물인 디그넌(오언 윌슨)은 서점과 공장을 터는 행위를 범죄 영화의 한 장면을 모방하듯 실행한다. 하지만 그의 모든 작전은 장르 영화처럼 흘러가지 않고, 모방임이 드러난 방식으로 엉성하고 우스꽝스럽게 작전이 진행되거나 실패에 이른다. 그럼에도 디그넌의 계획들은 그가 추구했던 일상적인 삶 바깥의 일탈적 범죄에 도달하며 그 스스로도 만족한다. 법적 처벌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는 암울한 상황과 그 과정이 그럴듯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도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세상은 몽상가를 필요로 한다”라는 디그넌을 은유하는 영화의 핵심 대사 속에 꿈이란 고전적인 극적 구조로서의 환영이 아니라 그것을 모방함이 드러난 아마추어 같은, 어딘가 부족한 반쪽짜리 환영이다. 디그넌이 그랬던 것처럼, 앤더슨 세계의 꿈 혹은 영화적 꿈이란 두 가지 상반된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꿈이 주는 일탈적 즐거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과 그것이 결국에는 허구일 뿐이라는 무력감, 애상적 감정이다. 그것을 계획하고 통제하는 방식에서 앤더슨은 기묘한 전략을 구사한다. 먼저 시각적으로는 강박적으로 계산된 이미지의 아름다움을 가시화한 프레임과 과도하게 장식적인 이미지로 인해 가짜임이 드러난 형식으로 보여준다. 환영적이면서 일면 자기 반영적(self-reflexivity)이기도 한 모순된 시각화 방식이다. 그것을 가장 직관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그가 만든 < 판타스틱 미스터 폭스 >(2009)와 < 개들의 섬 >(2018)이라는 두 편의 애니메이션과 다른 영화 간의 비교이다. 이 두 편의 영화는, 완전한 가상인 그림이나 CG가 아니라 현실의 인형과 물질을 활용한 스톱모션으로 제작되어 애니메이션이라는 허구의 세계가 하나의 사실적 이미지이기도 함을 이중으로 드러낸다. 이는 현실의 인간들과 공간을 촬영한 영화를 정반대로 비현실적으로 연출하고 미니어처 애니메이션처럼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영화 이미지를 다루는 앤더슨의 의도를 짐작하게 한다. 가상의 것은 사실적으로, 사실인 것은 비현실적으로 그리며 ‘영화’라는 사실을 기록했지만, 이미지에 불과한 매체의 양면성이 빚는 감각을 극대화하여 활용하는 것이다. 앤더슨적인 스타일을 대표하는, 강박적 대칭 구도를 생각해보자. 오른쪽과 왼쪽이 데칼코마니처럼 같아 안정적 아름다움에서 오는 미적 즐거움과 그러한 구도가 극단적으로 반복되어 작위성이 드러나는 일종의 거리 두기 효과를 동시에 획득한다. 마찬가지로 수평과 수직 트래킹 쇼트는 인물에게 다가가는 몰입의 효과도 있지만, 주요인물에게서 멀어지거나 관객들이 몰입하고 있는 프레임을 벗어나 공간이 확장되는 효과를 주면서, 우리가 몰입하고 있는 이야기 바깥에도 다른 세계가 있음을 상기시킨다. 다만 이러한 프레임 밖을 비추며 나타나는 효과가 다른 사실주의 영화들처럼 이야기 바깥에 존재하고 있는, 통제 불가능한 세계의 잠재성을 확인시키는 열린 프레임의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니라, 앤더슨의 영화에서는 완전히 통제된 허구의 세계 바깥에도 통제된 다른 허구적 무대가 계속 이어져 있는 열려있지만 닫혀있기도 한 기이한 프레임의 성질을 나타내고 있다. 열려있지만 닫혀있고, 몰입시키면서 몰입을 저해하는, 이를테면 <기상천외한 헨리 슈거 이야기>(2023)에서 등장인물이 직접 소설 지문까지 읽는 형식처럼 앤더슨 영화의 내러티브에서도 환영성과 자기 반영성의 모순적 충돌이 일어난다. 그의 영화 대부분에서 중심인물에는 결핍이 있고 그 결핍은 어머니의 죽음(< 맥스군 사랑에 빠지다 >), 친구의 죽음(< 스티브 지소와의 해저 생활 >), 아버지의 죽음(< 다즐링 주식회사 >), 부모님의 부재(< 문라이즈 킹덤 >), 아내의 죽음(< 애스터로이드 시티 >)과 같이 사적 전사(前史)를 이룬다. 보통 영화가 그러하듯 앤더슨의 영화에도 인물의 전사는 거대 서사를 만나 해결되는 고전적인 이야기 형태로 마무리된다. 다만 그 과정이 극적 구조로만 묘사되지 않으며 앞서 언급한 대로 산만하게 서브플롯을 다루거나, 시간 순서를 뒤섞거나, 막을 나누거나, 화면비와 색을 바꾸거나, 시각적 형식 자체가 서사의 몰입하는 것을 방해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즉 서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은 고전적이지만 과정이 그렇지 못하다. 이것이 앤더슨 영화의 내러티브가 밀도가 낮다고 느끼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하지만 디그넌이 엉성하고 우스꽝스럽게 범죄를 모방하는 것처럼, 극적 밀도가 낮은 상태 혹은 고전적인 것과 그렇지 못한 과정이 충돌하는 내러티브 방식이 앤더슨의 의도이다. 매혹 시키면서도 부자연스러운 작위성을 나타내는 이미지, 시각 형식의 모호한 감각을 즐기는 것이 앤더슨 영화의 핵심이듯 말이다. <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014)에 이르면 앤더슨은 그러한 자신의 테마에 더 적절한 이야기 구조를 하나 덧붙인다. 수평 트래킹의 움직임을 따라 화면을 확장하여 우리가 보고 있는 허구적 세계 밖에도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통제된 움직임 아래 보여주었던 것처럼 액자식 구조를 활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은 그의 이전 영화처럼 주요인물의 결핍으로 시작하지 않는다. 이야기 속 이야기 안에 제로(토니 레볼로리)가 젊은 시절에 겪은 영화적인 모험이 있고 그 극적인 사건 끝나고 회상 밖으로 나왔을 때 비로소 결핍이 등장한다. 과거의 이야기, 허구적인 모험의 바깥에 전쟁이라는, 파시즘이라는, 독감이라는 재앙의 현실이 있고 더 바깥에는 이 이야기를 전달하는 작가(주드 로/톰 윌킨슨)의 죽음이라는 시간이 있다. <애스터로이드 시티>(2023)에 시간은 약이 아니라 반창고는 될 수 있다는 대사처럼 제로가 작가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얻을 수 있는 것은, 상처의 회복이 아니라 슬픔과 약간의 위로뿐이다. 오기(제이슨 슈왈츠먼)가 어린 시절 어머니에게 돌아가신 아버지가 4.5광년 떨어진 별나라가 아니라 땅속에 있다고 말했듯, 앤더슨은 고전적 이야기 구조가 온전한 위로를 줄 수 없다고 생각한다. 대신 미니어처처럼 작게 보이는 인간과 세계를 액자식 구조를 통해 가까이서도 멀리서도 바라보며 영화가 할 수 있는 건, 우리의 삶과 비슷하면서 다른 허구의 아름다움에 이입하거나 거리를 두며 나의 현실을 비추는, 낯설고 기묘한 감흥을 줄 수 있을 뿐이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말하자면, 앤더슨의 영화적 꿈이란 두 가지 상반된 가치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일탈적 즐거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과 그것이 결국에는 허구일 뿐이라는 크나큰 낙차에서 오는 무력감, 애상적 감정이다. 가상의 공간, 애스터로이드 시티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막 도착한 오기는 자식들에게 아내의 부고를 전하며, 과거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아버지는 별나라에 계신다고 위로했던 일화를 말한다. 그는 그것을 부정하며 시간은 약이 될 수 없고, 반창고 정도는 될 수 있다고 덧붙인다. 이처럼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처음부터 고전적인 이야기의 허구적 위로가 불가능함을 선언하듯 시작한다. 그럼에도 가상의 공간 애스터로이드 시티에 결핍을 지녔거나 상처를 지닌 캐릭터들이 모여든다. 중심인물인 오기는 아내의 죽음을 겪었고, 밋지(스칼렛 요한슨)는 전 결혼생활에 문제가 있다. 이 두 사람은 1층이지만 전경만 보면 공중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물 창을 통해 이야기를 나눈다. 각자의 과거와 상처를 말하고, 사진을 찍고, 연기 연습을 도와주는 과정에서 창을 경계로 마주 보는 두 인물의 관계는 각각 카메라와 피사체이자 관객과 배우처럼 느껴진다. 창이라는 프레임을 경계로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두 인물의 구도와, 오기가 사진작가이고 밋지가 배우라는 직업적 위치가 그러한 생각을 강화한다. 여기에 왜 자신과 오기가 가까워졌는지 알겠다고 말하는 밋지의 말이 덧붙여진다. 둘은 비슷하므로 가까워졌다. 아픔을 가지고 있고 그 아픔을 숨기고 있다는 유사성 때문에 서로의 눈을 바라보기를 멈추지 못한다. 카메라와 피사체, 관객과 배우는 아픔, 결핍을 매개체로 이어져 있다. 물론 시선을 끌어당기는 볼거리라는 본질적인 이유도 있지만, 대개 관객들은 현실과 닮은 허구의 고통과 갈등에 이입한다. 때문에, 영화의 시작에서 해설자(브라이언 크랜스턴)가 완전한 픽션이라고 선언한 애스터로이드 시티에도 상처를 지닌 인물들이 모여든다. 그렇지만 앤더슨 영화가 늘 그러하듯,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인물들의 전사와 감정에 온전히 집중하기보다 액자식 구성을 오가며 여러 인물의 서브플롯들을 산만하게 비춘다. 외계인이 소행성을 훔쳐 가는 비일상적인 사건 또한, 보통의 고전적 이야기 구조라면 주인공의 결핍이나 상처를 거울처럼 비추는 은유가 되거나 갈등을 해소하는 거대 서사로 기능하지만 오기와 밋지에게는 그렇지 않다. 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 밋지는 오기에게 느낌이 다르냐고 묻고 오기는 아무 느낌 없다고 답한다. 그러고 얼마 후 외계인이 나타나 훔쳐 갔던 소행성을 돌려놓는 사건이 발생한다. 외계인은 왜 소행성을 가져갔고 다시 돌려놓았을까? 우드로(제이크 라이언)는 외계인이 소행성을 가져간 후 오기에게 “이제 세상이 변했고, 모든 것이 불확실하며 외계인이 또 올지 오면 무슨 말을 할지 우리는 아는 것이 없고, 어쩌면 저 우주에 뭔가 우리 삶의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외계인이 소행성을 돌려놓고 변한 것은 우습게도 소행성에 적혀진 품목번호뿐이다. 외계인(제프 골드블룸)을 연기하던 배우 또한 외계인 탈을 벗고 자신은 외계인을 하나의 메타포로 이해한다고 말했을 때 오기가 무엇에 관한 메타포냐고 되묻자 대답하지 못하고 모든 것이 모호하다고 답한다. 즉 이 코스믹 한 해프닝은 그저 픽션에 필수 불가결한 비일상적인 사건으로서만 기능적으로 존재한다. 때문에, 오기 역할을 연기하던 존스는 혼자 중얼거린다. “이 연극이 이해가 안 돼” 그는 이 말을 내뱉고 무대 뒤로 연결된 문을 열고 연극 연출자에게 향한다. 허구의 이야기가 상연되는 무대 밖을 벗어나 횡적으로 이어진 여러 공간을 지나쳐 오기는 연출자를 호출한다. 자신이 제대로 연기하고 있는 것인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계속 연기를 해야 하는지, 저 우주엔 뭔가 답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닌지 물으며 이 연극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호소하는 주연 배우에게 연출자 슈버트(에이드리언 브로디)는 “상관없어 그냥 계속 연기해(Doesn't matter, Just keep telling the story)”라고 말한다. 외계인의 말대로 모든 것이 모호하고, 해설자의 말처럼 현대 연극으로 정의되는 이 이야기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창작과정의 고통을 묘사하는 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아무런 답을 내리지 않는 이 둘의 대화에는 이상한 감동이 있다. 내가 아닌 캐릭터의 상처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다는 오기이자 존스의 고민에 연극이라는 하나의 작은 우주를 통제하는 연출자가 삶의 고통 속에서도 그저 계속 연기를 할 수밖에 없다, 살아갈 수밖에 없다고 전하는 말이 현실 세계를 향한 코스믹(Cosmic) 한 시선의 조언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밖에서 안으로 히켄루퍼 박사(틸다 스윈튼)는 우드로를 위로하며 자신의 어머니도 46년 전에 돌아가셨다고 말한다. 두 사람은 어머니가 사망했다는 공통점으로 서로의 마음에 공감하지만 아주 오래전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어른의 마음과 얼마 전에 일을 겪은 아이의 마음은 같을 수 없다. 다만 46년이라는 시간이 아이를 어른으로 만든다면 그때는 우드로가 박사의 마음을 이해할지도 모른다. 마찬가지로 외계인이 등장하는 코스믹 한 사건에도 어른들은 시큰둥하고 격리된 상황에 불평만 늘어놓지만, 아이들은 외계인을 향한 끊임없는 호기심을 보이며 통제된 상황을 타개할 작전을 세운다. 이 맹랑한 아이들도, 죽은 딸이 과거에는 손녀들 같았다고 말하는 스탠리(톰 행크스)의 대사처럼, 언젠가 어른이 될 것이다. 당연히 히켄루퍼의 말대로 몇조 킬로미터 떨어진 별의 빛이 우리에게 닿은 시간만큼은 아니겠지만 끝없이 흐르는 우주적 흐름대로 말이다.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액자식 구조의 여러 겹의 세계 속 현실과 허구를 오가며, 스토리텔링 하는 연기자들처럼 우리의 삶도 일면 가상적이라고 말한다. 아이가 어른이 되는 것처럼 가까운 이의 죽음이, 삶의 고통이, 우주인의 등장과 같은 허무맹랑한 사건이 등장하더라도 결국, 이야기의 처음에 보여주었던 애스터로이드 시티의 황량한 일상으로 돌아오는 우주의 순환적 시간 아래 그러하다. 대신 이러한 무기력함, 허무함 속에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잠을 자는 것이라 덧붙인다. 언젠가 죽음의 시간이 찾아오면 오기의 말대로 땅으로 돌아가 영원한 잠을 자게 되겠지만, 살아가는 동안 자는 잠에는 꿈이 존재한다. 연기 학교의 선생님 솔츠버그(윌렘 데포)가 말한 것처럼 말이다. “자는 건 죽는 것이 아니다. 숨 쉬고 심장이 뛰고 생각도 한다. 죽은 엄마를 만날 수 있고, 전처나 전남편과 잘 수도 있고, 마테호른에 오를 수도 있다. 그게 스토리가 될까? 되지, 밖에서 안으로 씬을 구성해보자고” 밖에서 안으로 씬을 구성한다. 이는 꿈에서 이야기로, 이야기에서 현실로 삶을 구성한다는 말로 바꿀 수도 있을 것이다. 이야기의 안에서 도저히 이 연극을, 이 삶을 이해할 수 없던 오기는 밖으로 나간다. 그 밖이란 무대를 넘어 연극이 상연 중인 건물 외부까지 향한다. 이때 그는 연극에서 잘린 배우를 만나게 된다. 오기의 아내 역할을 했던 배우(마고 로비)와 삭제된 장면의 대사를 나누는 이 장면은 눈물이 나올 정도로 감동적이고 아름답다. 은유적인 의미에서 오기의 죽은 아내와 대화를 나누는 씬이지만,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극적 상황이 아닌 일상적 위치에서, 두 인물이 배우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고, 삭제된 대본을 아내 역할의 배우가 혼자 상대의 대사와 지문까지 읊고 있는 자기 반영적 상태이기 때문이다. 두 배우에게 이 대본 리딩은 감정적인 몰입의 순간이 아니라 쉬는 시간에 겪은 작은 대화처럼 지나가며, 좋은 회상인데 왜 잘랐는지 서로 의문을 표하며 가볍게 헤어진다. 정작, 이 장면 속에서 별나라에 있는 오기의 엄마를 만난 것처럼, 죽은 아내와 조우하게 되는 것은 스크린 밖 우리 관객들이다. 측면에서 두 인물을 약간 멀리서 비추는 쇼트들이 지나가고, 대사의 감정이 극에 달했을 때 정면 바스트 쇼트에서 클로즈업 쇼트로 인물을 비추면, 그 쇼트들이 만드는 환영적 효과는 관객들에게 약은 아니지만, 반창고와 같은 작은 위로의 감동을 선사한다. 또한, 우리가 오기의 죽은 아내를 보지 못했지만 본 것처럼 느끼듯, 배우인 존스가 대본에서 삭제된 부분을 상대역을 통해 듣는 것일 뿐 오기라는 연극 속 캐릭터가 겪은 경험이 아님에도, 오기가 꾸는 꿈처럼 느끼게 한다. 이는 밋지와 창을 통해 나누었던 장면의 구성과도 공명하면서 이해할 수 없던 연극의 의미를 부여하며, 무대의 안과 밖, 스크린의 안과 밖의 경계를 어지럽게 뒤섞으며 환영성과 자기 반영성의 충돌이 만들어내는 소용돌이 속으로 우리를 이끈다. 그리고 “난 돌아올 수 없어 오기”라는 아내의 슬픈 대사와 함께 존재의 부재증명이라 할 수 있는 그녀의 사진을 냉정하지만 일면 따뜻하게 마주하게 한다. 결국, <애스터로이드 시티>는 오기가 무대를 탈주하며 이어지는 이 장면들을 통해 꿈이, 허구가, 이야기가 주는 일탈적 즐거움, 비현실적인 아름다움과 그것이 결국에는 허구일 뿐이라는 사실에서 오는 무력감, 애상적 감정이 뒤섞인 앤더슨 세계의 모호한 매혹을 잘 드러내는 최상의 것으로 남는다.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 이 탁월한 시퀀스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연극의 극작가 콘래드(에드워드 노튼)의 죽음을 알리며 모든 연기자가 다 같이 “잠들지 않으면, 깨어날 수 없다”라는 대사를 외치는 씬으로 이어진다. 콘래드가 연극의 주제가 무엇이냐는 배우의 질문에 “무한함? 나머지는 잘 모르겠어”라고 말한 것처럼, 앞과 뒤를 알 수 없이 순환하고 있는 이 문장은 앤더슨식 세계를 더없이 적절히 요약한다. 이제 영화의 엔딩에서 우리는 잠에서 깬 오기의 모습을 보며 지금까지 나왔던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극작가가 신비한 우주적 체험을 공유한 모든 등장인물이 몽환적인 잠 속으로 제각기 빠져드는 씬을 구상 중이라고 했던 것을 떠올리면, 여전히 연극 속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이것이 안인지 밖인지 헷갈릴 때쯤, 영화는 죽은 엄마를 향해 기도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바라보는 무신론자의 시선으로 끝을 맺는다. “나는 돌아올 수 없다”라는 삭제된 꿈 장면의 슬프지만 차갑기도 한 대사처럼, 신을, 꿈을, 허구를 믿지 않지만, 반창고 같은 위로를 기대하며 그렇게 영화라는 잠에 빠지고 꿈에서 깨어난다.
1. 대사 “구로사와 기요시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감독이라면 에릭 로메르는 흉내를 내보고 싶은 감독이라고 할까? 영화를 구상할 때 대사를 많이 쓰는 식으로 하다 보니 이것이 나의 약점이라 생각했는데 에릭 로메르의 영화를 보면서 이런 식이라면 나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진행된 봉준호 감독과의 대화에서 하마구치 류스케는 자신의 영화와 에릭 로메르의 연관성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하마구치 류스케 영화의 가장 특징이 대화 장면이 많고 대화 장면이 영화의 핵심을 이룬다는 점에서 대단히 중요한 언급이다. 하마구치의 스타일을 각인시킨 < 해피 아워 >부터 < 드라이브 마이 카 >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화는 대화 장면을 빼놓고 성립하기 어렵다. < 우연과 상상 >은 그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다. 단편영화 셋을 묶은 옴니버스 영화인데, 전체가 일종의 대화극으로 이뤄져 있다. 둘의 긴 대화를 어떻게 끌고 가는지, 그들의 말에 어떤 숨은 의미가 있는지 촉각을 곤두세울 수 밖에 없다. 그들은 모두 무엇인가 마음에 품고 있는 것을 숨기면서 때론 진실을 때론 거짓말을 한다. 봉준호는 하마구치 영화의 대사가 “무언가를 설명하는 대신 마음의 풍경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하마구치 류스케도 에릭 로메르 영화에서 대사가 설명이 아니라 캐릭터를 보여주는 장치라는 점에 주목했다며 봉준호의 언급에 동의했다. 여기서 하마구치가 대화 장면을 만드는 방식에 관해서 좀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단순히 대사의 양이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우연과 상상>의 첫번째 에피소드에서 차 안에서 대화를 나누는 두 여자를 보자. 자신이 사랑에 빠졌음을 수줍게 고백하는 여자와 사랑에 빠진 친구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하다 그 대상이 자신의 옛 남자친구임을 알게 되는 여자 사이에 작은 틈이 갈라진다. 이어 여자는 자신의 옛 남자친구를 찾아가 사라진 감정과 남아있는 감정 사이에 위험한 줄다리기를 한다. 대사들은 그들이 언제 어떻게 만났고 어쩌다 헤어졌는지 같은 명백한 정보를 주는 대신 그들이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게 만든다. 지금 그들의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기에 이야기의 결말도 예상할 수 없다. 세 번째 에피소드에 등장하는 두 여인의 대화 역시 진실과 거짓이 밀고 당기는 가운데 현재 두 여인의 삶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비슷한 맥락이다. 같은 학교를 다닌 친구였다는 잘못된 정보에 기반한 둘의 대화는 오해를 정정하면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시작된다. 중요한 것은 그들이 스쳐갔던 과거가 아니라 현재 그들의 삶이 마음에 만들어놓은 무늬들이고 대화는 그들의 쓸쓸함, 외로움, 허전함을 온전히 드러낸다. 말이 캐릭터를 성립시키는 사례는 <우연과 상상>의 두번째 에피소드에도 있다. 에로틱한 소설을 낭독하는 여자와 그녀의 목소리에 마음을 빼앗긴 남자 사이에 흐르는 긴장감은 폭발 직전까지 고양되지만 상상할 법한 성적 행위는 일어나지 않는다. 여기엔 그저 말이 있을 뿐이고 목소리가 있을 뿐이다. 말의 강력함은 어떤 노출도 없이, 비견할 데 없이 강렬한 에로티시즘을 형상화한다. 때로 하마구치의 대사는 사람의 폐부를 느닷없이 찌르고 들어오는 비수가 된다. <드라이브 마이 카>에서 죽은 아내와 섹스를 했을 거라 의심하는 남자에게 어떤 말을 듣는 순간을 보자. 주인공 가후쿠는 섹스를 하면서 이야기를 하는 습관을 지녔던 아내가 자신에게만 들려줬다고 믿었던 이야기를 아내의 숨겨둔 애인에게 듣게 된다. 그것도 자신이 몰랐던 후속 이야기까지. 차 안에서 이뤄지는 이 대화 장면은 가후쿠에게 칼로 베이는 듯한 아픔을 준다. 영화가 가후쿠의 리액션 같은 것을 강조하지 않는데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가후쿠가 아내의 외도를 눈 앞에서 목격했을 때 느꼈던 놀라움과 비교가 안되는 충격이 대사를 통해 전해진다. 이것이 가후쿠가 그토록 대면하기 두려워해왔던 진실이다. 하마구치 영화의 대화 장면을 볼 때마다 마음을 졸이는 이유는 인물의 내면에서 어떤 진실이 드러났다 사라지는 마법이 계속 일어나기 때문이다. 때로 무시무시한 형상으로, 때로 요염한 모습으로 하마구치 영화의 매혹이 생겨나는 지점이다. 흔히 좋은 영화는 말로 설명하는 영화가 아니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을 ‘대사가 많은 영화는 좋지 않다’는 일반론으로 오해하면 안 된다. 보다 간접적인 표현이 더 영화적이라는 통념과 달리 하마구치의 영화는 많은 대사가 오가는 대목에서 ‘영화적’이 된다. <우연과 상상>의 세 에피소드에서 디테일로 가득 찬 대화 장면 없이 인과 관계의 액션과 리액션만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TV 드라마와 다를 게 없다. 에릭 로메르나 하마구치에겐 대사가 곧 영화다. 2. 연기 <드라이브 마이 카>에는 박유림, 진대연, 안휘태 등 한국 배우 몇 명이 출연했다.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그들에게 흥미로운 얘기를 들었다. 실제 영화를 준비하면서 <드라이브 마이 카>에 나오는 연기 연습 장면처럼 시나리오 읽은 연습을 했다는 것이다. 출연 배우들이 모두 한 공간에 둘러앉아 대사를 읽어가는 것인데 영화에서처럼 감정을 빼고 읽다가 일정한 궤도에 돌입한 뒤에 감정을 넣는 방식으로 진행했다고 한다. 하마구치의 영화처럼 대사가 많은 작품이라면 그럴 수 있겠다 싶지만 하마구치의 연기 연출론이 일반적인 것은 아니다(연기를 어떻게 연출하는가에 관해 그가 쓴 책이 조만간 출간될 예정이라 한다). 하마구치는 대사를 온전히 배우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이런 방식을 사용한다고 말한다. 일정한 시간과 노력이 합쳐질 때 뭔가를 이뤄내는 순간이 도래한다. <해피 아워>에서 사람이나 사물 사이에서 균형을 찾아가는 작업처럼 연기에도 그런 최선의 지점이 존재한다. <드라이브 마이 카>의 공원 리허설 장면을 보자. 가후쿠는 물론 함께 연습을 했던 모든 배우들이 함께 ‘뭔가 달라진 연기’를 경험한다. 연기에 대한 가후쿠의 이론이 하마구치와 유사한 것이라면 <드라이브 마이 카>는 영화에 대한 영화, 연기에 관한 영화로도 읽힌다. 가후쿠의 이론은 현실의 사람들과 교감을 하면서 더 발전한다. 윤수가 자신의 아내를 소개하는 대목에서 가후쿠는 윤수의 아내인 배우 윤아로부터 배우들한테도 칭찬이 필요하다는 얘기를 듣는다. 가후쿠도, 배우들도, 미사키도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여는 시작점이다. 공원 리허설 장면과 같은 마법이 정확히 언제 어떻게 일어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시간과 반복된 연습과 적절한 자극이 합쳐졌을 때 그런 순간이 온다. 심지어 서로 이해할 수 없는 다른 언어로 말하는 배우들 사이에도 진심 어린 교감이 이뤄진다. 영화에서 가후쿠는 연극 <바냐 아저씨>의 주인공 역할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내면과 너무 가까워서 대면하기 두려워한다. 그가 연기를 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미사키와 함께 홋카이도까지 갔다 오는 것이다. 미사키가 갖고 있는 죄책감의 근원을 함께 발견함으로써 자신도 내면의 어두움과 마주할 용기를 얻는다. 원작자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을 빌리면 타인을 통해 자신의 밑바닥을 들여다 보는 과정인 것이다. 미사키를 통해 가후쿠는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고 <바냐 아저씨>와 정면 대결을 한다. 가후쿠의 여정은 연기와 현실이 하나가 되는 여정이기도 하다. 삶도 연기처럼 숙성의 시간을 지나 마음의 문을 여는 계기가 생기면 예상치 못한 어떤 순간에 기적 같은 순간을 만들어낸다. 3. 비밀 <드라이브 마이 카>는 내내 외면하다 마침내 자신을 정면으로 들여보는 남자의 이야기다. 그것은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워하던 배역에 도전하는 배우의 얘기이기도 하고 아내에 대한 죄책감을 떨치지 못한 남자가 자신의 트라우마에서 벗어나는 얘기이기도 하다. 문제는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라’고 누가 가르쳐준다고 그럴 수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여기엔 연습과 시간이 필요하다. 하마구치의 연기론은 어느 정도 삶에 적용해도 좋은 원칙이다. 대사를 연습하는 사람처럼 남의 대사를 듣고 정확한 타이밍에 자기 대사를 내뱉고, 처음엔 그냥 하던 것을 나중엔 감정을 넣어 하고 마침내 사람들 사이에 교감이 이뤄지는 마법 같은 순간이 생겨난다. 여기엔 말할 준비 못지 않게 들을 준비가 됐는가가 중요하다. 상대가 말할 준비가 될 때까지 지켜봐 주고 기다려주는 것. 하마구치는 <드라이브 마이 카>의 중심에 ‘관심’이라는 주제가 있다고 말한다. “이전에는 알 수 없던 것들을 작은 관심을 가지면서 통한다고 느끼게 되는 것처럼 <드라이브 마이 카>를 통해 관심의 힘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말한다. 가후쿠와 미사키가 서로의 마음을 여는 과정은 관심에 관한 감독의 생각이 실현되는 과정이다. 하마구치는 이처럼 삶의 비밀스런 양상을 드러내는 영화를 만든다. <우연과 상상>에서 우연이 어떻게 우리 삶의 모습을 바꿔 놓는지 보여준 데 이어 <드라이브 마이 카>에선 묻어놓은 과거, 억눌린 욕망, 피하고픈 죄책감 같은 것들이 삶에 새겨놓은 흔적들을 보여준다. 영화 속 대화를 통해 짐작하게 되는 비밀의 조각들, 수면 위로 오르락내리락 하는 진실의 파편들이 어느 순간 거대한 벽화가 되어 두 눈을 사로잡는다. 하마구치가 그려내는 ‘마음의 풍경’이다.
‘봉테일’이 화제다. 봉준호 영화의 매력을 설명하는 단어인데 아카데미 4관왕 이후 초등학생도 아는 말이 된 것 같다. 봉테일은 그가 촬영현장에서 보여준 모습 때문에 붙여졌다. 미리 완벽한 스토리보드를 만들어서 촬영에 임하는 것에서 알 수 있듯 봉준호는 준비된 감독이다. 머리 속에 찍고 싶은 영화의 그림이 이미 완벽하게 들어 있으니 꼼꼼하고 치밀하게 작은 것 하나도 놓치지 않는 것이다. < 살인의 추억 >(2003)에서 형사가 갖고 다니는 수첩에 농협 마크가 있어야 한다고 했다거나 < 기생충 >(2019)에서 부잣집과 가난한 집이 완벽한 대조를 이룬다는 점 등이 사례로 거론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영화에서 디테일을 이렇게만 이해하면 곤란하다. 영화에서 디테일이란 성격이 세심하다거나 준비를 철저히 한다는 정도의 의미가 아니다. 디테일은 영화라는 매체의 가장 흥미로운 속성 중 하나다. <기생충> 1막의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일명 ‘믿음의 벨트’ 시퀀스가 있다. 기택 가족이 박사장 집의 가정부 문광을 내쫓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실행하는 대목. 문광에게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기택이 병원 진료를 기다리는 문광의 모습을 촬영하고 마침내 문광이 기침을 하는 사이 휴지통에서 핫소스 묻은 휴지를 끄집어내는 장면까지 5분여의 장면이다. 물 흐르듯 우아하게 편집된 장면들은 관객을 현란한 사기극의 현장에 초대한다. 기택 가족의 계획은 착착 맞아 떨어져서 그것이 악행이라 하더라도 마음 졸이며 응원하는 심정이 된다. 마침내 휴지통에서 핫소스 묻은 휴지를 집어들 때 저절로 웃음과 박수가 터져 나온다. 여기서 봉테일은 소품이나 세트의 문제가 아니라 한 장면 한 장면이 어떻게 설계되고 이어지는가에 있다. 피자 가게에서 기택 가족이 피자를 먹으며 핫소스를 뿌리는 장면은 휴지통의 핫소스와 연결되고, 감정이 고조된 기택의 대사는 기우가 연기 연습을 시키는 장면으로 이어진다.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리는 장면들이 마치 복잡한 퍼즐을 맞추는 듯한 쾌감으로 상승된다. 영화사에선 몇몇 범죄영화에서 이런 류의 디테일에 특별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줄스 다신의 < 리피피 >나 장 피에르 멜빌의 <형사>같은 영화다. 범죄의 모의와 실행을 정밀하게 묘사한 영화들로 디테일이 어떻게 영화적 감흥을 만들어내는지 잘 보여준다. 장면들이 빈 틈 없이 연결되어 만들어지는 이런 극적 흥분은 잘 만든 액션영화에서도 두드러진다. < 본 얼티메이텀 >의 워털루 역 장면 같은 경우다. 제이슨 본이 비밀정보를 가진 기자와 만나는 장면에서 영화는 워털루 역에 한번도 못 가본 관객도 그곳을 알 수 있게끔 정확하게 촬영됐다. 카메라가 있어야 할 곳에서 꼭 필요한 시각적 정보를 주기 때문에 관객 또한 인물의 동선을 정확히 그릴 수 있다. 덕분에 영화는 현장에 있는 듯한 긴장감을 전달한다. 아마도 우리는 반대의 사례를 더 많이 알 것이다. 장소와 동선과 연기가 제대로 조율되지 않은 영화들은 배우들이 그냥 영화를 흉내 내는 느낌을 준다. 값 싼 전쟁영화 속 총격 장면에서 총소리만 나면 아무 데로나 나뒹굴며 죽어가는 군인들의 모습을 연상해보면 알 수 있다. 디테일이 없으면 영화는 아이들의 병정 놀이가 되고 만다. 디테일이 특정한 장르영화에서만 중요한 것은 아니다. 나루세 미키오의 < 흐트러지다 >에서 등장인물이 처한 경제적 상황을 묘사하는 장면을 보자. 새로 생긴 슈퍼마켓의 식료품 가격이 얼마나 싼 지를 수치까지 들어 정확히 알려주는 대목에서 나루세 감독 특유의 디테일이 두드러진다. 영화는 당대 사회의 현실을 날카롭게 투영한 경제적 디테일을 더하며 비범해진다. 이처럼 영화에서 주인공의 가난 혹은 경제적 조건을 설명하는 장면은 흔하지만 그런 만큼 예리한 묘사가 필요하다. <기생충>에서 무선 인터넷을 잡기 위해 애쓰는 장면이 그렇듯 단순한 디테일로 많은 것이 설명될 수 있다. 켈리 레이차트의 < 웬디와 루시 >에선 주인공이 수첩에 돈의 수입, 지출을 기록하는 장면으로 한눈에 그런 디테일을 전달한다.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 없이 장면 하나만으로 주인공이 처한 난관이 실감나게 전해지는 것이다. 영화제 프로그래머를 하면 어쩔 수 없이 영화에 대한 평가를 하게 된다. 작품 선정 여부를 판별하는 기준에도 당연히 디테일이 들어간다. 다른 영화나 TV 드라마, 뮤직비디오에서 너무 반복해서 지겹게 느껴지는 장면 묘사, 앞뒤가 연결되지 않는 디테일 같은 것을 보면 좋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 디테일이 좋은 영화에 마음이 끌리는 것은 감독이 완벽주의자여야 한다거나 자잘한 세부가 전체보다 중요하기 때문이 아니다. 영화가 원래 디테일의 예술, 이라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