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렌디피티
- 감독
- 피터 첼섬
- 제작년도
- 2001
- 출연
- 존 쿠삭, 케이트 베킨세일, 제레미 피번, 몰리 샤논, 존 코베트, 루시 고든, 브리짓 모나한
<미망> 중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잘 가,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난다면 어떤 춤을 추면서 너와 나는 둥글어질까, 여름의 장례식, 우리는 오래 나무 아래에 서 있었다 우리는 오렌지의 영혼을 팔에 안으며 혼자서 둥글어졌다 잘 가, 원점으로 어두워가던 너의 발이여, 오렌지빛의 소풍이여 *주1 - 허수경, 「오렌지」 이렇게 한번 주장해보고 싶어진다. 영화는 군중의 걸음걸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 >).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갈 수 있다면, 이렇게까지 믿어보고 싶다. 영화는 단지 걷는 사람들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우리를 충분히 매혹할 수 있다고. 요약해보자면 < 미망 >(김태양, 2023)은 헤어짐과 장례의 시간으로부터 빠져나온 두 남녀가 우연히 만나 나란히 걷는 것을 기록한 영화이다. 이들은 낡은 건물을 허물고 그 자리에 새로운 정육면체를 쌓아 올리는, 붕괴와 재건의 행위가 끊임없이 갱신되는 서울의 복잡한 풍경 사이를 가로지른다. <미망>을 독해하는 첫 번째 방법(이자 대부분의 감상)은, 영화가 결국 인물들의 관계를 매듭짓지 않음으로써 생성되는 ‘서정’에 주목하는 것이다. 분절된 3편의 이야기와, 각 이야기의 틈에 단단하게 박혀있는 ‘단절’과 ‘공백’이라는 영화적・실제적 시간 *주2 이 이 영화의 고유한 시적 리듬감과 정감을 형성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나는 이 영화에 넘실대는 서정을 곱씹어보는 동시에, 엔딩 시퀀스에서 화면 밖으로 서둘러 사라지며 종적을 감춘 남자( 하성국 )의 행방을 계속해서 쫓아보고 싶다는 욕망에 사로잡힌다. 김태양 감독에 따르면, 그의 차기작 <서울 이야기>에는 <미망>의 두 주인공 하성국, 이명하 배우가 다시 등장할 예정이다. 인용한 시구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난다면’이 어김없이 실행되는 곳, 이야기의 지속을 굳게 믿으면서 인물들이 담담하게 작별하고 외화면으로 탈주하는 곳, 이곳은 김태양 감독의 프레임이자 그가 ‘멋진 도시’ *주3 로 명명한 서울의 영화적 설계도이다. 그렇다면 <미망>을 이해하는 두 번째 방식은 감독이 서울을 매핑하는 방식을 가늠해 보는 것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서울은 무엇이며 어디일까. 오류로부터 산출된 서울이라는 픽션 “잘못 내렸어요.”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을지로3가역을 비추는 영화의 첫 숏 안으로 사람들이 마치 쏟아지듯 들어온다. 남자는 아마도 만나기로 약속된 사람과의 통화에서 자신이 잘못 내렸음을 알린다. 공사 현장과 초록색 잎사귀가 무성하게 달린 나무 앞을 지나며, 남자는 ‘여기가 이렇게 연결되네요’라고 말한다. 그의 발걸음은 어떤 연결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일까? 다음 숏에서 남자는 과거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여자(이명하)와 맞닥뜨린다. 두 사람이 나란히 걷고 대화하면서 영화는 비로소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아즈마 히로키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실수로 내리지 말아야 할 곳에 내린 남자는 생경한 장소로 잘못 배송됨으로써 우연성이 내재된 세계로 뛰어든 오배(誤配)의 존재이다. 예정된 곳으로 향하는 것이 아니라, 길을 잃어야만 시작되는 이야기. <미망>은 남자의 잘못 내린 행위, 다시 말해 오류로 산출된 행위들로 조합된 서울의 픽션이다. 물론, 우연성에 기대어 영화를 읽는 것은 유별난 발견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상술했던 마지막 시퀀스를 다시 떠올려보자. 잠에서 깨어난 남자는 창밖으로 뿌옇게 보이는 서울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광화문 광장으로 보이는 곳을 버스가 지나치자 황급히 하차벨을 누르고 프레임의 오른쪽으로 사라진다. 프레임의 왼쪽으로부터 걸어 들어오며 출현했던 오프닝 숏을 환기하는 이 남자의 몸짓은 여자와 헤어진 후 또다시 잘못 내리기를 결심한 것 같은, 즉 불확실성의 세계를 능동적으로 선택하는 행위에 가까워 보인다. 배역의 이름과 플래시백이 부재하는 이 영화에서, 불릴 이름과 기억이 없는 남자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자신의 신체로 오류를 기꺼이 실천하는 것이다. 적어도 <미망>에서 남자가 잘못 내린다는 것, 그리고 어딘지 모르겠는 미로 같은 서울의 한복판을 걷는다는 것은 끝을 맺지 못했던 관계의 대상과 다시 조우하는 행위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망>은 안타까움의 서정과 서울이라는 복잡한 노선도를 해체하며 재회를 향하는 반복적인 발걸음이 만들어내는 역동성이 공존하는 영화이다. <미망> 중 남자와 여자 (사진: 전주국제영화제 ) 남자의 발걸음이 길 잃은 사람의 것이라면, 여자의 발걸음은 죽음을 겪고 다시 생의 공간으로 걸어 나온 사람의 것이다. 첫 번째 이야기에서 어머니의 죽음을 고백하는 여자는, 그 후 연락처를 바꿨음을 말하며 남자에게 ‘나 변한 것 없어?’라고 물어본다. 두 번째 이야기에서 그녀는 ‘서울극장’이라는 장소의 죽음을 선언하며, 마지막 이야기에서는 함께 알던 예전 사람의 넋을 기리는 장례식에서 남자와 재회한 후, 광화문 일대를 다시 걷는다. 여자에게 죽음은 지난 관계를 매듭지으면서 새로운 관계로 연결되는 선험적인 사건이며, 그런 그녀가 걷는 걸음이란 장례의 시간으로부터 나와 생의 공간으로 복귀하여, 살아있는 사람과 변한 것과 변하지 않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시간을 빚어낸다. 여자는 마지막 이야기에서, 택시를 운전하는 옛 친구에게 ‘난 죽을까봐 운전 못 하겠어’라고 말한다. 운전하지 않는 그녀가 길을 걷는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것을 감각하는 행위이다. 말하자면 <미망>이 그려내고 있는 서울의 거리란 길 잃은 사람과 삶으로 복귀한, (이미지적으로) 환생한 사람이 멈추지 않고 각자의 궤도에 따라 걸으면서 서로의 간격을 좁혀보고자 하는 몸짓들이 조우하는 잠재적인 시공간이다. 영화는 촘촘하게 조립된 서울의 노선도를 해체하고, 출발시간과 도착시간, 환승 방법들이 지겹도록 나열된 정합적인 도시인 서울을 탈영토화시킨다. 세 번째 이야기 중간 즈음, 택시 안에서 이뤄지는 세 사람의 대화 사이에 초월적 시선으로 서울의 저녁 풍경을 담은 익스트림 롱숏이 등장한다. 이 숏은 다시 한 번 나를 부추긴다. 미세혈관처럼 배치된 긴 도로와 그 위를 채우고 있는 차량들, 그리고 그 안에 있을 사람들. 어쩌면 이들은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길 잃은 사람들일 뿐이며, 누구와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할지 모르는 우연과 잠재성으로 가득 찬 도시, 서울의 이름 없는 시민들은 아닐까. 그러니까 서울은 순수한 강렬함을 가진 미세한 입자들이 끊임없이 탈주하는 선들로 구성된 기관 없는 신체 *주4 인 것은 아닐까. 이 주장을 견고히 하기 위해, 주인공들이 걷던 길 위로, 배우와 카메라 사이를 개의치 않고 침입하여 활보하던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영화의 주인공들과 마찬가지로 이름을 부여받지 못한 사람들이 어딘가를 향한다. 아니, 향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걷고 있다고 해야겠다. 이름 없는 사람들이 유기체처럼 조직된 노선도를 벗어나 구태여 길을 잃고, 살아있음을 스스로의 발걸음으로 감각하는 곳. 김태양 감독의 장편 데뷔작 <미망>은 기관 없는 신체, 서울의 픽션을 발명한다. 20세기의 결말 없는 영화와 이름 없는 이들의 발걸음을 호명하면서 두 번째 이야기. 여자가 문을 열고 들어간 어둠 속 스크린에선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 박남옥 의 < 미망인 >(1955)이 상영되고 있다. 여자는 상영 후 관객과의 대화를 진행하면서, ‘극장 문을 열고 나서면 1955년과 같은 거리를 걷는 것’이라 말한다. 그런가 하면, 여자를 따라나선 남자( 박봉준 )는 피맛골의 유래를 이야기하면서 서울의 뒷골목에 무수히 쌓여온, 만난 적 없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상기시킨다. <미망>은 결말이 유실된 20세기의 영화와, 서울의 길거리를 채웠던 사람들의 무한한 발걸음을 호명하면서, 서울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픽션이 되기를 자처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걸었던 자리를 다시 걸어보는 신체의 반복적 행위가 역사를 환기할 수 있을까? 마지막 이야기에서 여자의 머리 위로 떨어졌던 대낮의 빗방울이, 남자에게는 여자와 헤어진 후 홀로 골목길을 걷던 밤이 되어서야 그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장면은, 첫 번째 이야기에서 여자가 담배를 피우던 골목길로 돌아가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는 장면과 대구를 이룬다. 헤어진 존재의 행위를 복각해보면서 지금은 내 옆에 없는 상대방의 마음을 그림자처럼 어렴풋하게나마 추적하는 것. 이것은 <미망>이 서정의 회로를 만드는 방식이자, 신체의 재연을 통해 발현되는 픽션의 역량을 믿어보고 싶게 만든다. <미망> 중 골목의 여자, 그를 따라나선 또 다른 남자 올해 2월 21일부터 3월 1일까지 진행되었던 ⟪ 각각의 영화사 ⟫는 한 영화가 다른 영화들과 맺는 연속적인 관계를 되짚어보기 위해 마련된 기획전이다. <미망>은 박남옥 감독의 <미망인>(1955)과 더불어 강대진 감독의 < 마부 >(1961), 이용민 감독의 < 서울의 휴일 >(1956)과 한데 묶였다. 나는 이 영화들을 하나의 이미지 집적체로 상정하기 위해, <미망>이 사용한 방식, 즉 행위의 반복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서로 다른 시공간을 살았던 사람들을 마치 하나의 시공간에 있는 것처럼 둥근 나선의 형상으로 모아보는 것. 이 불가능해 보이는 미션은 영화가 이미 성취한 바 있다. 그 중, 아피찻퐁 위라세타쿤(Apichatpong Weerasethakul)의 작품 중 < 엉클 분미 >(Uncle Boonmee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 2010)의 한 시퀀스를 언급하고 싶다. 영화의 초반부에 등장하는 식사 장면이 그것이다. 분미와 젠, 통이 한데 모여 식사를 하고 있을 때 19년 전 죽었던 분미의 아내 후아이의 유령이 나타난다. 늙지 않은 모습 그대로. 이어서, 13년 전 가출했던 아들 분쏭은 원숭이 유령의 모습을 하고 등장한다. 이 시퀀스에서 산자와 망자, 인간과 더 이상 인간이 아닌 존재는 한데 모여 이야기를 나눈다. 재현 불가능성을 초월함으로써 영화의 한계를 극복한 <엉클 분미>는 한자리에 있을 수 없는 존재들과 그들이 머무는 불가능한 시공간을 태국의 숲으로 한 데 불러 모아 하나의 숏 안에 현시한다. 이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경탄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으면서 안부를 묻는다. <엉클 분미> 중 (사진: " Loong Boonmee raleuk chat ", IMDb) <미망>과 함께 상영된 세 한국 고전을 한 데 묶는 가장 명료한 방법은 사람들과 자동차, 대중교통과 마차가 복잡하게 교차되는 서울의 광장이라는 시공간과 그곳을 누비고 있는 인물들을 상상해보는 것이다. 영화의 인물들은 모두 ‘사건’ 후에 남겨진 사람들이다. 세 고전은 한국전쟁이라는 비극을 겪은 후 살아가는 사람들의 다양한 형상을 포착한다. 그리고 <미망인>, <마부>, <서울의 휴일> 모두 죽음과 죽음이 촉발하는 인물, 그리고 서사의 변화를 그린다는 점에서 <미망>의 여자와 겹쳐지며 네 영화는 성글게 연결된다. <미망인>은 한국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한 여인의 욕망을 대담하게 그려내고 있으며, <마부>는 이탈리아 네오리얼리즘, 예컨대 비토리오 데 시카(Vittorio De Sica)의 <자전거 도둑>(Ladri di biciclette)을 떠올리게 하면서, 한국전쟁 후 한 가족이 겪는 질곡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마부>에서 첫째 딸, 옥례( 조미령 )가 죽은 후 수원댁( 황정순 )이 이 가족의 비어있던 어머니 역할을 메우면서 네오리얼리즘에서도 두드러졌던 연대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서울의 휴일>은 살인 사건에 휘말린 신문기자 송재관( 노능걸 )의 행적을 좇는 동시에 남편의 부재로 계획과 다른 휴일을 보내게 된 의사 남희원( 양미희 )의 하루를 채우는 여러 해프닝을 나열한다. 그녀는 우연히 한 여인의 출산을 돕게 되는데, 그녀는 살인자의 아내라는 점에서 죽음이 생으로 변환되는 지점을 보여주며 끝을 맺는다. 세 고전과 <미망> 모두, 여성이 주도적으로 상황을 이끌어나간다는 점에서도 유사점을 갖는다 할 수 있겠다. (상) <미망인> 중 클로즈업되는 이신자의 발걸음 / (하) <마부>, <서울의 휴일> 중 길 위의 인물들 <미망>의 인물들이 걷던 서울의 길. ⟪각각의 영화사⟫는 이 거리의 형상을 재편한다. 주위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자신의 의지로 삶을 이어나가려 했던 이신자( 이민자 )의 굳건한 발걸음, 춘삼의 가족들을 위해 자신의 것을 망설임 없이 내어주며 그들에게 먼저 다가갔던 수원댁의 온정어린 발걸음, 초조한 마음으로 시험결과를 확인하기 위해 눈길을 헤쳐 나가던 수업( 신영균 )의 무거운 발걸음. 그리고 유혹에 굴하지 않고 생명을 살리는데 거리낌이 없었던 남희원의 발걸음. ⟪각각의 영화사⟫에서 추출해볼 수 있는 서울이란, <미망>의 인물들이 증언하였듯 사람들의 무수한 발걸음으로 구성된 도시이자 역사이며, 과거와 현재, 서정과 삶의 의지가 역동적으로 진동하는 픽션이다. 비평이라는 퇴행하는 몸짓에 대하여 얼마 전 ⟪씨네21⟫ 편집부로부터 올해 영화평론상 공고문에 들어갈 전년도 수상자의 소감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물론 당선 시점을 생각하면 아직 1년에 한참 모자라지만(그렇게 믿고 싶다), ‘전년도’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원고지 1.6매의 짧은 분량 안에서, 비평을 ‘퇴행하는 몸짓’이라 말했다. 더 겸허한 자세를 취하겠다는 다짐을 적었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와 생각해 보니 그건 비평의 자리가 사라지고 있는 건 내 탓이 아니라는 새침한 변명에 불과한 것 같기도 하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 누군가는 왜 ‘비평에 대한 생각’은 끄트머리에 짧게 등장하고, ‘비평’만 가득한 것인지 불만을 제기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등단 이후 쓴 글 중 가장 요란한 고통의 몸부림을 치게 한 이 글의 개요를 구상할 때부터 이러한 구조를 생각했다. 마지막에 등장하기. 이건 피날레를 장식하겠다는 야망과 무관하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깝다. 왜냐하면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는 ‘몫 없는 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먼저 영화라는 텍스트가 선행되어야 할 테고, 그 이후에 텍스트를 중심으로 생성되는 얕은 사유들이 뒤따른다. 이상적으로는 담론을 형성할 것이고, 안타깝게도 대부분은 읽히지 않은 채 ‘요즘에 누가 비평을 읽어?’라는 뼈아픈 비판을 견고히 하는 예시로 사용될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비평을 가까이하려는 누군가가 ‘혹시 거기에도 사람이 살고 있나요?’라고 빈곤한 A4용지 너머로 물어봐준다면, 그제야 쑥스럽게 고개를 내밀고 ‘사실은 말이에요’라며 나타나는 사람이 내가 생각하는 비평가의 모습이다. 그렇기에 용량을 초과한 이 글의 대부분은 <미망>에 대한 비평일 수밖에 없고, 그 뒤를 따르는 것은 <미망>을 다시, 그리고 치열하게 보게끔 해준 ⟪각각의 영화사⟫에 대한 단평인 것이다. 이 글을 읽다 지쳐 중간에 떠난 사람들은 마지막 문단을 보지 못할 테지만, 선행하는 글들을 흥미롭게 읽은 사람이라면, 전년도 수상자가 말하는 비평에 대한 이 고백을 읽고 있을 것이다. 피에르 위그(Pierre Huyghe)는 “영화는 흔한 장소인 공공 공간이다. 그것은 기념비가 아니라 토론과 행동의 공간이다. 그것은 하나의 생태계다.” *주5 라고 말한 바 있다. 비평의 영역을 만들어주는 것 같은 이 말은 조금은 희망적이다. 한편, 연극에 대한 두 철학자, 필립 라쿠-라바르트와 장-뤽 낭시의 논쟁을 다룬 책 『무대』(2020)의 서문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혔다. 두 개의 대화가 처음으로 함께 출판되었다. 두 대화는 서로 긴 시간 간격을 두고 이루어졌지만, 그 목표는 언제나 두 대화 상대자 사이에서 새롭게 토론을 시작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 토론은 필립 라쿠-라바르트의 죽음으로 중단되었다. *주6 - 장-뤽 낭시 이 책을 채우고 있는 아름다운 문장들과는 별개로, 둘의 대화를 단절시킨 것이 죽음이었단 사실은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킴과 동시에, 죽음 외엔 이 사유를 멈출만한 사건이 없었다는 점에서 작은 안도감을 느낀다. 한편에는 비평의 무용함을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있고, 다른 한편에는 영화의 죽음을 예견하는 목소리들이 있다. 나는 그 사이 어디쯤 어정쩡하게 서 있다. 언제까지 두 목소리 사이를 오가며 비평을 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죽음을 말하기엔 아직 못 본 영화들과, 만들어지고 있는 영화들이 많다는 점은 분명하다. 이제 마지막 인사를 해야겠다. 한 영화에 대한 글을 써보기로 결심했을 때, 나는 적어도 비평을 쓰는 동안만은 지구상에서 그 영화를 가장 잘 아는 사람은 내가 되어야만 한다는 허황된 다짐을 하곤 한다. <미망>을 여러 차례 보면서도, 그런 절박함에 휩싸인 순간들이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인사를 하고 싶다. 잘 가, 원점으로 어두워가던 너의 발이여, 오렌지빛의 소풍이여 *** 주1. 허수경, 「오렌지」의 후반부,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 지성사, 2016, pp. 42~43. 주2. <미망>은 두 단편 < 달팽이 >(2020)와 < 서울극장 >(2022), 그리고 중편 <소우>(2022)를 한데 모아 배치한 장편이며, 여기에는 4년이라는 시간이 축적되어있다. 영화는 코로나로 인한 단절의 시간을 겪으면서 완성되었으며, 이로 인해 형성된 공백과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체화한 배우들의 변화는 역설적으로 이야기의 지속을 증명한다. 주3. 지난 3월 1일 진행된 관객과의 대화에서, 김태양 감독은 차기작의 제목을 <서울 이야기>로 정한 배경에 대해, < 동경 이야기 >(오즈 야스지로, 1953), < 타이페이 스토리 >(에드워드 양, 1985), < 뉴욕 스토리 >(우디 알렌,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마틴 스코세이지, 1989)는 있지만 <서울 이야기>는 아직 없다며, 이 ‘멋진 도시’를 영화 제목으로 선점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주4. 기관 없는 신체(Corps sans organes, CsO)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와 펠릭스 가타리(Pierre-Félix Guattari)가 함께 집필한 『천 개의 고원』(새물결, 2001)에서 인용한 것으로, 이 개념은 잔혹극의 창시자인 앙토냉 아르토(Antonin Artaud)에게서 빌려온 것이다. 주5. George Baker and Pierre Huyghe, An Interview with Pierre Huyghe , The MIT Press, 2004, p. 96. 주6. 필립 라쿠-라바르트, 장-뤽 낭시, 조만수 옮김, 『무대』, 문학과 지성사, 2020. 문주화(영화평론가) l 2024년 씨네21 영화평론상을 통해 등단했다. 아직은 비평이라는 퇴행하는 몸짓이 가진 역량을 믿고 있다. 세상이 지겨울 때 영화관을 가고, 좋은 영화를 만나면 세상이 다시 궁금해진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와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가 간직한 이미지의 존엄에 관해 벨라 타르는 영화감독을 은퇴하면서 설립한 영화학교 ‘필름팩토리’의 취지문에서 이미지의 존엄성(dignity)이라는 표현을 쓴다. 그가 자신의 영화를 말할 때도 이따금 사용하던 단어다. 영화 작업은 존엄을 보존하는 이미지를 생산하는 것이다. 벨라 타르는 연출자다운 확신의 언어로 말하지만, 존엄의 이미지가 무엇을 가리키는지 명확한 논리로 제시하지는 않는다. 영화가 인간의 존엄성을 지켜야 한다는 그의 믿음엔 의심할 바 없는 진실이 있다. 하지만 존엄을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존엄의 이미지는 어떻게 스크린에 정착할 수 있을까? 우리는 영화가 세계의 가려진 진리를 밝히는 안내서가 되길 바라지만 그런 믿음은 언제나 불투명한 결과로 돌아오기 마련이다. 사적인 인상이지만, 많은 이들에게 경험의 빈칸처럼 남겨진 코로나19 팬데믹을 통과하면서 그 불투명한 자국은 더욱 짙게 남겨진 것처럼 느껴진다. 이런 시기에 존엄을 보여주는 이미지는 절실한 필요성을 가질 것이다. 지극히 사소하고 범용한 사물이지만, 올해 지켜본 두 편의 영화에 나온 두 장의 종이가 마음에 남는다. 하나는 팬데믹 시기를 거치며 은퇴를 번복하고 돌아온 거장의 영화에 등장하고, 다른 하나는 팬데믹 시기에 촬영된 영화에 나온다. 모든 사회적 활동의 절차가 온라인과 디지털로 정립된 시기에 종이를 다루는 영화의 감각은 무척 희박하거나 시대착오적이라 말하기 쉽다. 두 편의 영화는 그처럼 미약하기 짝이 없는 종이의 물질성과 그 위로 글씨를 쓰는 손짓을 잊기 힘든 동작으로 새겨둔다. 두 장의 종이가 존엄을 증명하는 이미지의 사례라고 확신하기는 어렵다. 그런데도 그 이미지들을 떠올리면 존엄이라는 거창한 단어를 입에서 내뱉고 싶은 충동을 참기 힘들다. 한 장의 종이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 사랑은 낙엽을 타고 >에 나온다. 앞서 벨라 타르를 말하며 거론한 단어들(공장, 인간, 존엄)에 더없이 적합한, 일찍이 타르 또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카우리스마키의 신작이다. 슈퍼마켓 계약직으로 일하는 안사와 건설노동자인 훌라파는 영화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각자의 사정으로 일자리에서 해고된다. 계약직과 일용직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지는 익숙한 광경이다. 그들은 노동의 권리를 잃어버린다. 물품을 다루고 건설 도구를 쥐던 손, 유통기한이 지난 샌드위치를 가져가고 술병을 들던 손에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안사가 일하던 식당이 문을 닫자 갈 곳이 없어진 두 사람은 밤의 극장으로 향한다. 영화를 보고 나온 안사는 종이에 연락처를 적어 훌라파에게 건넨다. 안사가 떠나고 훌라파가 담배를 피우려고 주머니에 손을 넣다 그만 연락처가 적힌 종이가 바람에 날려 바닥에 떨어지고 만다. 종이를 잃어버린 훌라파는 아무런 단서도 없이 극장 앞에서 담배를 피우며 안사를 기다린다. 극장 문 앞에 두 사람이 있었고, 한 사람이 사라진다. 다른 한 사람이 기다리다 마저 사라지면 그가 피운 담배가 바닥에 남는다. 단순하지만 다른 방법이 없는 이 막연한 기다림이 말로 설명되지 않는 깊은 비애감을 불러온다. 극장 앞에서 누군가를 기다려 본 사람이라면 연인을 기다리며 피우고 버려진 담배에 마음이 흔들릴 것이다. 카우리스마키의 화면은 평면적이고 정적이다. 공간이 침묵하는 것은 물론이고 인물들조차 몸을 움직이고 동작을 구사하는 것에 서투르다. 거의 움직이지 않는 그의 화면은 몇 개의 단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구름이 떠다니는 천국과도 같은, 하지만 카우리스마키가 다루는 인물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하늘(< 어둠은 걷히고 >의 원제는 ‘지나가는 구름’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인물들이 머무는 지상의 벽과 바닥이 있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는 공간을 극도로 단순화하는 절차에 속한다. 이러한 절차는 카우리스마키가 밝힌 촬영의 과정에 깃들어 있다. 그가 밝힌 화면의 단순화 과정은 이런 식이다. 하나의 벽이 있고, 벽 앞에 두 사람이 머무른다. 그 위로 미약한 빛과 깊은 어둠을 드리우고, 한 사람을 사라지게 한다. 그러면 남은 한 사람과 벽과 공간에 드리운 빛과 어둠이 있다. 남은 한 사람을 마저 사라지게 하면 벽과 빛과 어둠이 남는다. 벽을 제거하면 빛과 어둠이 남겨지고 마지막으로 빛을 제거하면 어둠이 남는다. 카우리스마키는 그 과정에 영화가 있다고 말한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에서 안사와 훌라파는 극장 문 앞의 벽에 선다. 그들 뒤에는 (두 사람이 함께 보고 나온 영화인) 짐 자무쉬의 < 데드 돈 다이 >와 데이비드 린의 <밀회>의 포스터가 붙어 있다. 안사가 전화번호가 적힌 종이를 남기고 떠나면 훌라파가 남는다. 훌라파가 자리에서 벗어나면 벽과 빛과 어둠이 담긴다. 극장은 카우리스마키가 제시한 영화의 원리를 전하는 연인들의 장소다. < 그들 각자의 영화관 >에 수록된 카우리스마키의 짧은 단편 <주조공장>은 공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의 쉬는 시간을 묘사한다. 그들은 점심시간이 되면 공장 안에 있는 영화관에서 샌드위치를 먹으며 공장을 나서는 노동자들을 카메라에 담아낸 뤼미에르의 단편영화를 본다. 건조하고 무뚝뚝하지만 친밀한 감정을 공유하는 관객들의 장소. 돈이 없는 채로 갈 곳을 잃은 안사와 훌라파가 일시적인 도피와 무뚝뚝한 사랑을 이루는, 상실된 만남을 기다리고 다시 재회하는 장소도 영화관이다. 과거 없는 남자가 새로운 삶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그들은 기억 없는 극장에서 다른 시간으로 들어서고, 다른 현실의 경로를 택한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를 애틋하게 기억하는 이들이라면, 인간적 존엄과 기억의 흔적을 흰 종이나 천에 담아낸 장면을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 과거 없는 남자 >의 첫 장면에서 기차에 도착한 남자가 담배를 피우기 위해 집어 든 종이, 그리고 기억을 잃고 바닥에 쓰러진 그의 몸에 둘린 흰 붕대. 그것들을 바라보는 카우리스마키의 시선은 인물의 시선이 위치한 곳보다 더 낮은 곳을 향한다. 안사가 떨어뜨린 종이와 훌라파가 피운 담배는 모두 바닥에 남는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는 떨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듯이 지상에 당도하는 시간을 담아낸 영화다. 영화 초반부, 안사가 일자리를 알아보기 위해 들른 인터넷 카페가 30분에 10유로를 받는 규칙을 설정해두듯, 어느새 카우리스마키의 영화에서도 시간은 자본의 논리에 붙잡혀 있다. 카우리스마키가 전제하는 영화적 실천의 방법은 그 시간의 질서에 격렬히 저항하기보다는 다른 속도의 시간을 동반하는 데 있다. 극장 앞에서 이름도 연락처도 모르는 상대방과 다시 만날 때까지 서 있는 믿음과 기다림의 시간이 그러할 것이다. 극장 불이 꺼지고 훌라파가 화면에서 사라지면 우리는 그가 기다린 시간이 영화에 담겨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카우리스마키의 카메라에 포착된 이들은 세계의 질서를 벗어나 높은 곳으로 향하는 이상적 천사들이 아니라 지상의 중력에 속한 평범한 노동자이자 관객들이며 연인들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그들은 어딘가로 떠난다. 카우리스마키 영화의 엔딩에서 인물들은 배를 타고 바깥으로 떠나거나, 지상에 남아 삶을 이어간다. <사랑은 낙엽을 타고>의 결말은 조금 다른 인상을 남긴다. 안사와 훌라파는 어디론가 떠나간다. 하지만 그들은 바닥에 닿은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그들 사이에 한 마리의 개가 있다. 안사는 개의 이름으로 ‘채플린’이라는 정체성을 부여하지만, 그들은 채플린의 떠돌이처럼 세계의 바깥을 배회하다 어느새 돌아오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이곳에 있을 것이다. 그들 사이의 한 마리 개는 탈출을 모색하는 대신 이곳에 남아 삶을 지속하도록 이끄는 조건이다. 그렇게 두 사람과 한 마리 개의 뒷모습을 담아낸 마지막 장면이 이어진다. 존엄은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지상에서 대응하는 자들의 뒷모습에 기록되어 있다. 또 다른 종이에 대해 짧게 말하고 싶다. 미야케 쇼의 <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 >에서 주인공이 작성하는 공책이다. 많은 설명이 필요한 영화는 아닐 것이다. 다른 평자와 관객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나도 이 영화의 아름다움에 즉각적으로 사로잡혔고, 특히 첫 장면을 무척 매혹적으로 기억한다. 선천적 청각장애로 귀가 들리지 않는 복싱선수 케이코를 다루는 이 영화는 그녀가 일기장에 무언가를 적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 내용은 아직 알 수 없고 그녀가 들을 수 없는 볼펜 소리와 얼음을 씹는 소리가 관객에게 전달될 뿐이다. 16mm 필름의 질감 위에 정밀한 거리감으로 포착된 케이코의 옆모습은 이 영화의 특별한 자질을 순식간에 설득시켜버린다. 아름다운 도입부다. 소리가 들리지 않는 인물을 주인공으로 삼기에 이 영화에서 글자를 쓰는 몸짓은 무척 특별하게 다뤄진다. 카메라는 잡다한 대화나 심각한 갈등을 포착하는 대신 무표정으로 일관하는 케이코의 침묵에 초점을 맞춘다. 그리고 가끔 그녀가 공책에 무언가를 적는 순간을 기록한다. 얼마 동안의 시간을 지나 공책에 무언가 적는 케이코의 습관이 기억에서 희미해질 즈음, 우연히 그 기록이 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진다. 갑작스럽게 입원한 체육관 코치의 병문안을 온 케이코는 병실에 들른 코치 아내의 요청에 공책을 건네준다. 케이코가 그린 그림과 매일 같이 실천한 자기명령의 기록들이 타인의 목소리를 타고 영화에 도착한다. <너의 눈을 들여다보면>은 한 장의 종이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고 타인의 목소리를 매개로 스크린의 표면에 도착하기까지를 기다리는 영화다. 그러고 보니 이 영화에도 확신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한 막연한 기다림이 있다. 두 편의 영화가 오늘날의 광폭한 시스템과 질서에 대항해 복고적 취향을 되살리는 영화라는 뜻은 아니다. 아키 카우리스마키와 미야케 쇼는 영화가 간직한 고전주의적 믿음(두 연출자는 필름 촬영을 고집해 이 영화들을 완성한 이들이기도 하다)이 오늘날의 환경에서도 여전히 유효한지 자문하는 긴밀한 긴장과 불화를 도입한다. 하지만 이는 영화의 복잡한 문제로 향하지 않는다. 두 영화는 무척 단순하다. 에드워드 양이 < 하나 그리고 둘 >의 제작 의도의 핵심으로 ‘극도의 단순성’을 말하던 것처럼, 장 뤽 고다르가 < 언어와의 작별 >에 관해 직접 작성한 개요에서 영화를 “단순한 왈츠”에 빗댄 것처럼 영화는 고독하고 아름다우며 무엇보다도 단순한 문제다. 두 편의 영화는 그 단순함의 원리를 한 장의 종이에 담아 보여준다. 누군가는 그 자리에서 어렴풋이 떠오르는 영화 이미지의 존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코로나19 바이러스 감염증의 확산으로 인한 거리두기는 영화 산업의 존립을 위협했다.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는, 이 매체의 가장 본질적인 체험 행위를 덜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극장의 위기에 부쳐 내 경우만 고백하자면, 강도 높은 사회적 거리두기 기간 동안 나는 극장에 채 열 번도 가지 않았다. 2020년은 열두 살 이후의 내 인생에서 가장 극장에 안 간 해가 되었다. 교회에 절대 안 가는 기독교인은 자랑스러운 일면조차 있지만, 극장에 통 안 가는 시네필이 그렇지는 못할 것이다. 위기가 왔을 때 말이 아니라 육체로 증명할 수 없다면 진실한 사랑이 아니다. 나의 뜨뜻미지근한 사랑은 그 사실을 절대로 들켜선 안 되는 바로 나 자신에게 뽀록났다(‘뽀록나다’는 속된 표현이나, 엄연한 표준어다). 나는 시네필로 자각할 자격을 상실했다. 지난 봄, 방역 상황을 주시하며 시네마테크와 멀티플렉스의 예매와 취소를 반복하던 중, 설마 확진자와 접촉해 감염되는 한이 있더라도 봐야만 하는 영화가 나타났다. 마침내 나를 극장으로 다시 불러들인 영화는 조지 A. 로메로의 < 시체들의 새벽 >(1978)이었다. 40여 년간 국내 개봉한 적이 없었던, 모든 현대 좀비 장르물의 원본이 하필이면 “이 시국에” 극장에 걸렸다. 이 영화에 대한 내 오랜 사랑과 강박(커버에 “안녕하시었어요?”가 적힌, 출시 제목 <이블 헌터>의 비디오로 접한 이후, 인생이 어떻게 망했는지 글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87855 (오독의 라이브러리, 2017-08-03, cine21)을 쓴 적 있다) 때문에, 이런 상황일수록 더욱 극장에서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상한 조바심에 사로잡혔다. 같은 작품의 DVD가 판본별로 있고 영화를 처음부터 끝까지 뇌내(腦內) 재생할 수도 있지만 꼭 극장이어야 했다. 4월 15일, 나는 전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한 상황에 거의 텅 비다시피 한 쇼핑몰의 극장에서 <시체들의 새벽>을 보았다. 극장엔 개봉 취소나 연기된 영화들의 선전물만 덩그러니 놓인 채 관객은 커녕 표를 확인하는 직원조차 보이질 않았다. < 오메가 맨 >(1971)의 찰턴 헤스턴처럼 객석에 홀로 앉아 “이제 이런 영화는 안 만드는 모양이군!” 읊조릴까 했는데, 나를 포함해 총 네 명의 관객이 들어왔다. 좀비 떼를 피해 아무도 없는 쇼핑몰 안에 숨어드는 영화 속 주인공도 딱 네 명이다. 극장이 선전한 리클라이너가 편안했고, 방역이 아니라 방해받지 말라고 만들어놨던 칸막이가 있는 관람은 쾌적했다. 영화가 끝나고, 똥땅거리는 쇼핑몰 음악과 함께 좀비들이 지상에서 뒤뚱거리며 엔드 크레딧이 오르자 깨달았다. 나는 영화를 보러 왔다기보다 영화를 현실에 재현하러 온 관객이었다.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는 말은 옳았다. 집으로 돌아가는 전철 안에 기침 소리가 들리자 나의 나들이는 심리적 자해처럼 느껴졌고, 픽션은 현실의 고민이 되었다. < 우주전쟁 >(2005)의 말미에 허망하게 고꾸라지던 외계인들처럼 인간이라는 종도 겨우 바이러스에 함락되는가. 세상이 망하기 전에 영화부터 사라질까. 그럼 다 같이 종말을 맞이할 때까지 나는 뭘 먹고 사나? 또 언제 극장에 올 수 있을까? 극장이 이렇게 망할 줄이야. 친구의 영화가 결국 극장 개봉 대신 OTT를 택했을 때, 강제 넷플릭스 진출을 축하한다며 주고받은 메시지는 그나마 다행이란 위로에서 어떤 우려로 남았다. 극장이 아니라면 내가 만들고 싶어 하는 영화는 영화일까? 극장 밖에서 영화는 진정으로 존재할까? 혹시나 만약에 정말로 극장이 사라지더라도, 물론 영화까지 사라지진 않을 것이다. 이미 영화는 어디에든 넘칠 정도로 있다. 손아귀의 디바이스, 책상 위 모니터, ‘언택트’ 시대를 맞아 거실에 “거거익선”으로 장만한 4K 디스플레이 속에 극장만큼 충분히 친숙하고 또렷하고 거대하게 존재한다. 거의 극장에 있는 것 같은 환경을 구현해주는 VR 어플까지 있다. 영화는 아날로그(필름)가 아니라 생성될 때부터 디지털(파일)이고, 네트는 광대하며 스트리밍은 빠르다. 그러니 둘 중에 하나만 영영 잃어야 한다면, 지극히 합리적인 선택은 극장의 죽음이다. 만국의 시네필들이여 선택하라. 그러나 이렇게 외치고픈 충동이 울컥할 것이다. 아뇨, 극장에서가 아니면 그건 결코 영화가 아니에요. 영화는 오로지 극장의 캄캄한 어둠 속에서, 커다란 스크린으로 내 망막에 눈부시게 빛으로 쏟아질 때만 영화예요. 이 빛과 어둠의 예술은 극장에서만 기적을 일으킨단 말입니다. 객석에서 모두와 함께 울고 웃으며 다 같이 탄식할 때만! 시네마테크를 향한 내 예전 간증을 지금 다시 적노라니 가슴이 뜨끔하다. 그 믿음은 유효합니까? 6월, 여름 시즌에 내야 할 영화들이 줄줄이 훗날을 기약하고 뒤로 밀리며 눈치만 볼 때 한 영화가 매를 맞아보겠다는 듯 용감히 개봉했다. 극장에 같이 가려 동행을 구했지만 누구도 나서질 않고, 코로나 때문이 아니어도 내가 고립된 인간임을 직시하며 혼자 < #살아있다 >( 조일형 , 2020)를 보러 갔다. 체온을 재고 연락처를 남긴 다음 극장 안으로 들어와, 테이핑으로 간격을 띄워놓은 좌석에 앉으니 이 정도면 극장은 오히려 전에 없이 쾌적한 상태로 지속할 수 있을 걸로 보였다. 처음 이 영화의 정보를 접하고, 미국 작가가 쓴 시나리오지만 한국판 리메이크가 아니라는 점이 흥미로웠다. 같은 시나리오로 두 편의 영화가 동시에 제작되며, 감독의 연고지도 미국 기반이라고 했다. 나는 괜히 영화사들이 이제부터 오리지널 시나리오를 외국에서 사오고 모국어만으로는 업계에서 버틸 수 없게 되는 상상을 했다. 캐릭터와 플롯만 정확하게 보고, 모호하게 문장력으로 눙치는 시나리오는 솎아지는 날이 오는 거다. 퇴출 확정이군. 아무튼 티저를 보고 인스타그램과 유튜브, 틱톡 시대에 도래한 SNS 맞춤 좀비 스릴러일까 싶었는데, 시의적절한 아이템이 시국에 맞춤인 결과로 나왔다. 심지어 감독 역시 코로나 때문에 입국을 못하고 미국에서 화상을 통해 원격 편집과 마스터링을 했다니 거의 언택트 시대의 산물 같은 영화다. 좋든 나쁘든 원하건 말건 간에 세상에 의해 현실이 되는 픽션이 있고, 이 영화도 그렇다. 하루아침에 바깥세상이 망해 집 안에 꼼짝없이 갇힌 남자( 유아인 )가 고립 끝에 별 수 없이 나도 망할까, 하다가 맞은편에 사는 여자( 박신혜 )와 소통하고 함께 살아남고자 서로 돕는다. 좀비 떼를 피해 둘이 도망갈 수 있는 세상의 가장 멀고 높은 곳이란 겨우, 아파트 옥상이다. 이 세팅은 지금 현실과 닮았다. 팬데믹으로 집에 갇힌 우리는 마스크를 끼고 밖으로 나서는 일에 종말이 온 듯 호들갑을 떤다. 이 영화 속 캐릭터의 생존 투쟁도 절박하기보다 호들갑 같다. 영화를 보면서 걸리는 개연성은 이제 나 같은 직업병자 아니면 위키에 비판 항목을 적는 사람에게만 문제일 것이다. 관객 눈에 즉각 보이지 않는 맥락과 읽히지 않는 의미부여 대신, 상황에만 집중해서 단순명쾌하게 콘셉트만 끝까지 밀고 가는데 의외로 산뜻하게 다가왔다. 무엇보다 나는 이렇게 공권력을 긍정하는 좀비 아포칼립스 영화를 본 적이 없다. 국가가 해시태그(#)를 검색해 당신이 SNS에 남긴 생존 증명만으로 헬기에 특수부대원을 태워 구하러 온다고?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나타났는데 어째 그다지 촌스러워 보이지 않았다. 이걸 문제 삼고 싶은 내가 촌스러운 것 같았다. 영화는 무리 없이, 딱 아파트 옥상까지만 도달했고, 살아남았다. 나는 무리를 보길 기대했었다. 영화란 만드는 과정도 그 결과물의 내용도 온통 무리하는 것이라 믿어 왔는데, 그 무리한 욕망을 관객에게 납득시키는 게 영화 아닌가? 이제 다들 그런 영화는 안 만드나? 개인적인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영화를 긍정하기로 했다. 극장을 나서는 순간 깨끗이 잊히게끔 만든, 딱 그 정도의 적당한 야심을 품은 영화가 주는 미덕을 생각했다. 이런 하이 콘셉트 영화를 더 많이 더 잘 만들 수 있게 된다면, 언젠가는 뒤통수를 후려치는 기분을 선사하는 현실의 우화 같은 작품을 내놓을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인 나로선, 다만 그 수준에 도달한 시나리오가 또 어느 미국인이 영어로 쓴 책이 아니도록 애쓰면 될 일이다. <#살아있다>는 코로나 상황의 박스오피스에서 선전하여 초여름의 극장가가 잠시나마 지탱할 수 있도록 견인한 공이 있다. 극장이 살아있고 다녀간 관객이 무탈함을 세상에 알려줬던 것이다. 8월 중순 2차 대 확산이 발생하여 다시 극장이 셧다운을 거듭하는 동안에는 넷플릭스에서 월드와이드 영화 차트 1위에 오르기도 했다. 한국산 콘텐츠 중 최초 기록이라니, 팬데믹 상황의 전 세계 구독자들이 꽤 공명한 것 같고, ‘K-좀비’라는 모호한 장르도 존재감을 확인했다. K-좀비라니, < 괴시 >( 강범구 , 1981) 이후 이런 날이 다 왔다. 그러나 나는 한국산 좀비 영화의 경향에 신체를 물어뜯고 내장을 쏟아내고 그것들을 먹는 직접적인 묘사를 여간해선 하지 않는 것에 의구심을 갖는다. 내가 고어(gore)를 요구하는 건 좀비 영화의 윤리 때문이다. 굳이 보여주지 않을 윤리가 있다면, 마땅히 보여야 할 윤리도 있다고 생각한다. 옛날 좀비 영화에 대한 근본주의를 품은 사람의 무리한 요구일 뿐이려나? 뭐 이제 그런 영화는 안 만드는 모양이니까. 암담한 거리두기의 시간을 지나 1단계로 돌아왔지만, 극장의 위기는 여전히 녹록하지 않다. 기대했던 많은 영화들이 끝내 극장을 포기하고 OTT로 돌아서고 있다. 왜 영화를 마땅히 극장에 걸지 않느냐며, 손해를 감수하라고 강요할 순 없다. 영화는 결국 돈을 벌어야 지속할 수 있고, 극장은 믿음이 굳건한 몇몇 시네필에게만 의존하기엔 지나치게 크고 구태의연한 산업이다. 이 구태의연한 행위가 영화를 경험하기에 가장 옳은 양식(樣式)이기에 나는 OTT의 영화 독식도 극장의 명예로운 죽음도 언택트와 뉴 노멀 어쩌고 하는 대단한 변화도 원하지 않는다. <시체들의 새벽>을 극장에서 보며, 앞으로 인류가 지독히도 재수가 없다면 이것이 내가 마지막으로 극장에서 보는 영화가 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괜찮네? 나다운데, 나쁘지 않은 선택이야. 이런 감상적인 호들갑보다 <#살아있다>를 보고 극장에서 집으로 돌아가며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기분으로 극장은 안전해, 다음에 무슨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 있을까? 생각하는 쪽이 훨씬 나았다. 영화의 구원과 극장의 부활에 대한 소박한 믿음을 요상한 맹신의 종교적 호들갑이 하루아침에 막막하게 만들 줄 그땐 몰랐다. 다시 그런 상황이 오는 건 사양한다. 종말, 멸망, 아포칼립스란 그렇게 떠들썩하지 않고 오히려 조용하고 쓸쓸할 거라 생각한다. 집에 갇힌 채 홀로 훌쩍이는 일이 진짜 종말에 가깝다. 이 상황을 탈출해도 별로 대단한 미래는 없겠지만, 그래도 예전의 평화로운 일상으로 귀환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행운을 빈다. 그 행운이 너무 힘들게 멀리 있지 않고, 우리가 갇힌 집에서 아파트 옥상 정도의 거리에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