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분유희
- 감독
- Dennis Chan
- 제작년도
- 1989
- 출연
- Idy Chan, Robert Hung
< 현해탄은 알고 있다 >는 1944년 현해탄을 건너 일본 나고야 시의 육군부대로 끌려간 조선인 학도병들의 고난을 그린다. 그중에서도 반항심이 강해 일찌감치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힌 주인공 아로운(김운하)은 일본 군인들에게 끊임없이 괴롭힘을 당한다. 유일한 위안은 일본 여자 히데꼬(공미도리)와의 연분뿐. 하지만 그마저도 앗아갈 파병의 날이 다가온다. 안 봐도 어떤 영화인지 알 것만 같은 줄거리다. 조선의 청년이 고초를 겪는 과정에 비분강개하고, 그에게 반한 일본 여자의 ‘조국을 배반하는’ ‘올바른’ 연정을 응원하다가, 전쟁의 폭압에 짓밟히고 마는 둘의 섬약한 사랑에 눈시울을 붉히라고 만든 영화 아니겠나. 곧 시네마테크 KOFA에서 열릴 김기영 전작展 프로그램 에서도 <현해탄은 알고 있다>를 “태평양전쟁과 일본 제국의 수탈에 대한 감독의 비판적 시각이 탁월하게 녹아든 작품”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관점은 얼마나 유효할까? <현해탄은 알고 있다>의 정치적 태도는 설명만큼 그렇게 뚜렷하지 않다. 적어도 민족적 수난에 대해 울분을 토해내고자 하는 이들에게 손쉬운 카타르시스를 제공할 정도는 아니다. 아로운의 병영 생활은 수난사라고만 말하기에는 헐렁한 구석이 한둘이 아니고, 히데꼬와의 관계는 ‘불온’하기까지 하다. 히데꼬가 일본 옷을 입은 아로운에게 “옷을 그렇게 입으니까 일본 사람과 다름이 없어요.”라고 말한다든지, 아로운이 파병 직전에 “히데꼬 상을 위해 훌륭한 일본 군인이 돼주고 싶어!”라고 말한다든지, 히데꼬의 어머니가 아로운 옆에서 일본 헌병의 칼을 맞아 쓰러지면서도 “일본은 진다! 난, 난 그게 보기 싫다!”라고 말하는 대목처럼 친일 영화의 기억을 환기하는 순간들도 있다. 하기야 인간의 사회적 외피를 발가벗기고 동물적 욕망을 들여다보는 데에 주력했던 김기영이 새삼 민족혼에 불타 ‘고통 받는 조선인들/사악한 일본 놈들’이라는 구도에 매혹되었을 것 같지는 않다. 사실 관객의 감각에 호소하는 대립 구도는 따로 있다. ‘실내 세트 촬영분’과 ‘삽입 화면’의 대립이다. 영화의 도입부를 살펴보자. 첫 장면의 공간은 현해탄을 건너는 배 안이다. 바다는 보이지 않고, 실내 세트에서 촬영했음이 분명하다. 카메라가 선실들을 가로질러 격벽의 단면을 드러내면서 이곳이 실내 세트임을 공개한다. 이어 출렁이는 바다 위로 오프닝 크레딧과 “1944년 일본 나고야”라는 자막이 지나간다. 다음으로 나고야 항구를 수직으로 내려다 본 항공 촬영 화면이 등장하고, 나고야 시내 정경이 뒤따른다. 이 두 풍경은 보는 이를 움찔하게 하는 데가 있다. 우선 작은 실내 세트에 머물러 있던 영화가 갑자기 거대한 규모의 실외 공간을 항공 촬영이라는 사치까지 누리며 펼쳐 보이는 데에서 오는 충격이 있고, 이어서 동시대의 나루세 미키오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일본의 북적이는 시가지가 느닷없이 끼어든다는 데에서 오는 충격이 있다. 이후에도 이런 삽입 화면은 여러 차례 등장하면서 나고야 시의 정경을 보여주기도 하고, 전투 장면을 보여주기도 한다. 물론 스튜디오 세트 촬영을 중심으로 하는 영화가 공간 배경을 제시하기 위해 로케이션에서 따로 찍은 화면을 삽입하는 것은 무척 흔한 수법이다. 대공황이나 전쟁 등 거대한 역사적 사건을 요약 전달하기 위해 다른 극영화나 기록 영화를 인용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그럼에도 <현해탄은 알고 있다>의 삽입 화면들이 유달리 도드라져 보이는 까닭은 실내 세트에서 촬영한 영화의 나머지 대목들과 잘 섞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통 공간 배경을 제시하는 삽입 화면은 앞뒤 장면과 관련이 있기 마련이다. 스포츠 경기가 벌어지기 전에는 경기장 외관을 보여주고, 번화가의 술집에서 다툼이 벌어지기 전에는 시끌벅적한 도심 풍경을 보여주어야 자연스럽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이런 논리에 무심하다. 병영을 배경으로 한 장면이 끝나고 다음 장면도 병영을 배경으로 하는데 굳이 둘 사이에 고성의 전각이 우뚝 선 평화로운 나고야 시 전경을 삽입한다. 세트에서 찍은 유곽 장면이 끝나자 웬 절 풍경이 들어가더니 다음 장면은 히데꼬의 집이다. 유곽이나 히데꼬의 집이 절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것은 물론이고, 세 공간들의 정조도 전혀 연결되지 않는다. 풍경이 삽입될 때마다 영화는 중단된다. 전황을 담은 삽입 화면도 맥락이 희박하기는 마찬가지다. ‘전황이 이렇게 전개되어 등장인물들에게 이런 변화가 찾아왔다’는 식의 서사적 흐름은 잘 짚이지 않는다. 더구나 이 삽입 장면은 전장을 담은 기록화면과 다른 전쟁 영화에서 가져온 듯한 명백한 연출 장면을 뒤섞어 파괴의 스펙터클을 전시하고 있어 한층 당혹스럽다. 문자 그대로 다른 영화를 보는 듯한 기분이다. 그러고 보니 정말로 다른 영화를 보는 장면도 있다. 아로운을 헌병대 본부로 호출한 헌병 대장은 돌아가는 길에 찬바라 영화를 보고 일본도가 얼마나 잘 드는지 확인하라고 말한다. 아로운은 정말로 극장에 가서 찬바라 영화를 보다가 견딜 수 없다는 듯 도중에 밖으로 나온다. 이제 앞서 ‘실내 세트 촬영분’과 ‘삽입 화면’의 대립이라고 했던 것을 다른 말로 고쳐 보자. ‘안’의 실내 세트에서 아로운을 주인공으로 하는 드라마가 전개되는 사이사이 ‘다른 영화’가 무심하게 끼어들어 드라마 ‘밖’의 세계를 환기한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그 바깥 세계를 차단하려 애쓴다. 바깥은 위험해. 안에 있어야 해. 본디 대립 관계에 놓여야 했을 병영과 히데꼬의 집은 오히려 폐쇄적인 실내라는 점에서 닮았다. 히데꼬 집의 미닫이문이 창살처럼 닫히는 모습은 병영의 영창을 떠올리게 하는데, 여기서 영창은 수난의 공간이 아니라 피난의 공간이다. 영창은 아로운이 일본 군인들에게 반항하다 갇힌 뒤 동료와 웃음을 터뜨리는 곳이며, 영창에 들어가면 전쟁터에 가지 않아도 되니 살 수 있다는 말까지 나온다. 실제로 포로로 붙잡힌 미군 병사들은 영창에서 밖으로 나가는 순간 죽음을 맞이한다. 그들을 탈출시켜 주었더라면 아로운도 일본군들의 함정에 걸려 죽었을 것이다. 갇힐수록 안전하다. 바깥은 위험하다. 어떻게든 미루어 왔던 안과 밖의 만남이 아로운의 탈영 결심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의미심장하다. 아로운의 탈영을 숨기기 위해 폭격으로 죽은 이름 모를 사람의 시체가 동원된다. 아로운과 히데꼬가 찾은 피신처는 아마도 폭격으로 무너졌을 공장의 폐허다. 병영과 히데꼬의 집을 오가며 느긋하다 싶을 정도로 통속적인 드라마를 전개하던 영화는 이제 순식간에 결말로 나아간다. 그리고 바로 그 결말. <이어도>의 악명 높은 클라이맥스와 비교해도 뒤지지 않는 이 말문이 막히는 결말은 직접 보아야만 하기 때문에 자세한 묘사는 피하겠지만, 에둘러서라도 말해 보자. 그간 애써 차단했던 바깥세상이 드라마가 진행되던 안전한 내부로 기어이 쏟아져 들어오고야 만다. 또는 답답한 실내 세트에서 전개되던 드라마가 갑자기 <독일 영년>을 방불케 하는 폐허로 나간다. 이 영화를 위해 미술팀이 준비했으리라고는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광대한 폐허다. 여기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묘사도 남다르지만, 일단 폐허의 정체에 관심이 쏠린다. 중간 중간 나고야 시의 풍경이 들어갔다지만 영화 전체를 일본에서 촬영했을 리 없다. 한국일 것이다. 대체 저긴 어디지? 왜 저런 폐허가? 그제야 <현해탄은 알고 있다>의 발표 연도를 찾아본다. 1961년 11월 개봉. 6.25가 끝난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았다. 폐허는 전국에 흔했을 것이다. 그리고 개봉 한 해 전에 4.19가 있었고, 개봉 여섯 달 전에 다시 5.16이 있었다. 가능하면 안에 머무르고 싶었을 테지만 살기 위해 죽음의 공간으로 나간 사람들이 있었고, 너무 많은 시체들이 나왔고, 그 시체들을 제대로 수습하기 전에 세상이 또 뒤집혔다. 그리고 지난 글에서 김보년 필자도 언급했듯, 죽은 자들을 되살리는 것은 김기영의 장기다. 그러니 다시금 묻는다. <현해탄은 알고 있다>는 “태평양전쟁과 일본 제국의 수탈에 대한” 영화인가?
동시녹음 시대의 한국영화를 기억하는 사람들이라면 성우의 대명사는 고은정 일 것이다. 고은정을 모르더라도 “경아, 오랜만에 누워보는군”, “아 행복해요. 더 꼭 껴안아주세요”라는 1970년대 영화의 대사는 익숙할 것이다. 각종 TV프로에서 패러디되어 마치 후시녹음 시대의 전형처럼 남아있는 그 목소리, <별들의 고향>(이장호, 1974)에서 안인숙이 연기한 경아의 목소리가 바로 성우 고은정의 소리이다. 1960~70년대 한국영화를 제대로 접하지 않았어도 그 시대 영화 속 인물들의 목소리나 말투는 왠지 익숙하다. 고은정을 위시한 많은 성우들이 만들어낸 영화 속 인물들의 목소리와 말투는 이 시기 한국영화의 특징 중 하나로 남아있다. 고은정은 영화 후시녹음은 물론 라디오 드라마 연기자, 문화영화의 나래이터 때로는 텔레비전 외화 시리즈 더빙과 텔레비전 방송진행까지 영화와 방송계를 넘나들며 활동한, 한 시대를 대표하는 목소리의 주인공이었다. 고은정은 1936년 2월 1일 서울에서 태어나 그해 일본으로 건너가 6년간 일본에서 자랐다. [사진1, 2] 1940년 일본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 고희정과 모친 김재순, 그리고 좌로부터 오빠 고흥욱, 동생 고흥호, 구술자 고은정이다. 1941년 말을 타고 찍은 사진을 보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를 확인할 수 있다. 1940년 일본에서 찍은 가족사진이다.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사업을 했던 부친 고희정(高犧鼎)과 모친 김재순(金在順), 그리고 좌로부터 오빠 고흥욱, 동생 고흥호, 구술자 고은정이다. 1941년 말을 타고 찍은 사진을 보면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를 확인할 수 있다. 채 6살이 안된 어린 그녀는 당구를 삼백 정도나 치던 어머니가 아버지와 함께 당구장에서 당구를 즐기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녀는 자줏빛 카페트 위에서 연분홍 와이셔츠에 감색 망사 조끼 그리고 회색 스커트를 차려입은 어머니의 모습을 생생하게 떠올렸다. 생모와 보낸 시간이 짧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어머니의 영향은 크고 강렬했다. 음악과 미술에 조애가 깊은 어머니는 사별하기 전까지 어린 그녀의 예술적 감수성을 부지런히 키워줬다. 그래서 어린 그녀는 밀레의 만종을 보고 그림에서 종소리가 난다 말할 만큼 충만한 감성과 관찰력을 지닌 아이로 자랄 수 있었다. 헌신적이고 생활력이 강했던 할머니와 새어머니로부터는 오랜 세월 동안 방송과 영화계에서 지치지 않고 일할 수 있는 근성을 배웠다. 그녀는 개화기와 일제강점기, 해방과 한국전쟁을 겪으며, 미망인으로 가족을 지켰던 강인하고 지혜로운 할머니를 일컬어 시대를 살아낸 모성이라고 표현했다. 어린 시절에는 모친의 죽음을, 청소년기에는 한국전쟁과 부친의 죽음을 겪었고 전후 재건기 대학생 시절에 사회생활을 시작해 목소리 하나로 시대를 풍미한 그녀 또한 집안의 강인한 모계혈통을 이을 만한 여성이라 할 만한다. 그녀는 1954년 KBS방송극회원 1기 (서울중앙방송극단 연구원 1기) 즉, KBS성우로 방송계에 입문한다. 라디오가 유일한 전파매체이던 시절, 인기 있는 라디오드라마는 사람들의 일상적인 말투를 바꾸어 놓았다. 심지어 성격파 배우 노경희 조차 영화 후시녹음에서 당시 인기였던 최초의 라디오드라마 <청실홍실>(1956, 조남사 작, 이경재 연출)의 전후파 여성 동숙(성우 정은숙 연기)의 말투를 따라 말끝을 흐리며 대사를 했다하니 라디오드라마 성우들의 영향력은 대단했던 것이다. 고은정은 KBS방송극회원으로 선발되고 난 뒤 1955년 KBS 아나운서 시험에도 합격하여 8개월 동안 아나운서로 활동했다. [사진3] 1955~56년 KBS 아나운서시절, 국회부의장실에서 찍은 사진이다. 왼쪽부터 당시 KBS 아나운서였던 장금자, 고은정, 강영숙, 라연수 이다. 어린 시절부터 웅변보다는 동화구연에 더 뛰어났던 그녀는 아나운서 생활을 8개월 만에 정리했다. 목소리에 배어있던 바이브레이션은 아나운서의 발성에 적합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그녀의 자유로운 성격은 다소 경직되고 보수적이던 아나운서실의 문화와 어울리지 않았다. 물론 발성을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게 된 후에는 국립영화제작소의 뉴스와 나래이션을 도맡아 했지만, 이제 막 방송에 데뷔해 연기에 대한 설렘으로 가득 차있던 시절의 그녀에게는 보도보다 드라마가 훨씬 더 어울렸다. 실제로 그녀는 대단한 이야기꾼이었다. [사진4] 1957년 KBS남산 사옥에서 찍은 KBS 방송극회원 1기생들. 왼쪽 뒤부터 김수일,고은정, 박용기, 김옥경, 윤미림, 오른쪽아래부터 이창환, 김소원, 심영식, 신원균 당시 KBS 방송극회원 동기생들은 영화를 보는 대신 그녀에게 영화 줄거리를 들으며 영화를 즐겼고 그래서 그들 사이에 영화 보러 가자는 말은 그녀에게 영화 이야기를 들으러 가자로 통했을 정도로 그녀의 이야기 능력은 자타가 인정하는 수준이었다. 그녀가 가진 이야기꾼으로서의 재주는 후에 방송작가로 등단할 수 있는 바탕이 된다. 그래서 그녀가 구술한 사건과 경험들은 늘 흥미롭거나 아련한 이야기들이다. 그녀가 들려준 한국전쟁 경험은 전쟁을 배경으로 한 애틋한 우정과 사랑의 드라마였다. 십대 문학소녀의 시선에서 전쟁과 피난의 여정은 친구와의 아쉬운 이별 이야기로 그려졌고, 9.28 수복 후 여군으로 생활하며 지낸 부산의 훈련소는 소공녀의 방으로 도치되었다. 물론 성장소설의 한 대목처럼 묘사된 그녀의 이야기 속에도 잔인하고 고된 현실은 존재한다. [사진5] 서울 수도여고 1학년 재학시절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우정사진. 왼쪽부터 고은정, 최도영, 최순림. 그녀는 9.28 수복 후 서울에서 여자의용군 2기를 모집할 때 예술대에 자원입대한다. 이때 동덕여고 무용부, 한성여고 밴드부가 단체로 입대했고 그녀를 포함한 수도여고 학생 4명 또한 중창단으로 들어가 병과 훈련과 예술대 훈련을 받았다. 당시 여자의용군은 정훈대, 첩보대, 전투부대, 예술대에서 활동했고 1, 2기생 중 우수자는 전선에 배치되어 현지 임관되기도 했다. 그녀는 1.4후퇴 때 의용군 예술대 대원들과 함께 부산으로 피난해 영도의 학교건물에서 내무반 생활을 이어갔다. 위문공연을 하며 종군할 생각으로 연습과 훈련을 이어가는 속에서도, 여고생 4명은 내무반 건물 한 쪽에 책을 쌓아 소공녀의 방을 꾸미며 막막한 전쟁기를 버텨갔다. 그녀는 내무반에서 입은 부상으로 병가 제대를 하고 부산에 피난 와 있던 수도여고에서 학업을 재개했다. 여고생들에게 지낼 곳을 내어준 신부님 댁에 기숙하면서 장갑을 짜고 수를 놓아 교통비를 마련해 어렵게 학교에 다녔다. 그 속에서도 친구와 함께 쓰던 좁은 방에 씨레이션 박스로 책상을 만들고 보리밥풀로 교복의 각을 세울망정 벽에는 그리어 가슨, 그레고리 펙, 몽고메리 클리프트의 사진을 붙여 놓고 창 밖 하늘과 연결되도록 해 서정적인 상상의 공간을 만들어 어려운 현실을 견디려했다. 전쟁기 고단한 생활을 이어가는 속에서도, 휴전반대시위에 참여한 학생들을 인솔하는 규율부였던 그녀는 인기 많은 경기고 대대장과 안면을 트고 YMCA 영어강좌에 함께 참석하는 등 설레는 순간들로 그 시절을 회상한다. 그녀의 전쟁담은 사춘기 소녀가 주인공인 성장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사진6] 1952년 수도여고 부산 피난 시절 동기생들과 함께 찍은 우정 사진. 왼쪽 아래 황양자, 고은정. [사진7] 1952년 수도여고 부산 피난 시절 휴전반대시위 중 규율부 동료와 함께 찍은 사진. 왼쪽부터 김진숙, 고은정 역사적인 사건을 정서가 도드라지는 개인사와 연결시켜 묘사하고, 감정이 고리가 되어 이야기를 자유롭게 이동시키는 방식이 그녀의 구술이 지닌 논리이자 특징이다. 그러다보니 그녀의 구술 채록문에서 가령 한국전쟁에 관한 사건은 각기 다른 주제로 다른 회 차에 반복해서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나 모두 완결된 이야기로 정리되기에 전쟁과 피난생활에 관련된 다양한 면들을 풍부하게 접할 수 있다. 그녀는 전쟁이 끝나고 숙명여대에 진학하여 연극반 활동을 한다. 이때 선배의 권유로 우연히 지원하게 된 KBS방송극회원 모집에 합격하여 방송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녀는 연극에 대한 갈증이 있어 친구와 함께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에도 진학을 결심한다. 그래서 백병원에 줄을 서서 피를 팔아 번 돈으로 서라벌예대 입학원서를 내고 남은 돈으로 당시 한창 유행하던 핫케익을 먹었던 기억을 떠올렸다. 연기욕심 덕에 매일 정동의 KBS방송국과 남산 서라벌예술대학 그리고 청파동의 숙명여대를 발에 못이 박히도록 뛰어다녀야했다. [사진8] 1956~7년경 KBS방송국(HLKA 서울중앙방송국) 정동사옥 앞. 성우로서의 그녀의 기초체력은 연극에서 나오는 것이었다. 고은정는 성우란 아름다운 목소리 뿐 아니라 연기에 대한 이해와 사랑, 그리고 면도날처럼 섬세한 감각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 말한다. 그녀는 끝까지 라디오를 떠나지 않았기에 오랜 시간 동안 목소리로 표현할 수 있는 섬세한 연기실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물론 처음부터 그녀가 뛰어난 성우로 자리매김하지는 않았다. 그녀가 데뷔했을 당시 이미 전문 성우로 이름이 알려진 동료들이 있었다. 작은 녹음실에서 뿜어져 나오는 젊은 에너지들이 경쟁하고 상처받고 번민하는 일은 빈번했다. 그녀는 방송국에서 연습하던 대본들을 주워와 매일 집에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여러 역할을 독학으로 연습했다. 그러던 순간 귀가 트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신체 내부의 울림으로 자신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타인이 듣는 소리로 인식하며 자신의 객관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경험으로 자신감을 얻은 후 KBS 라디오드라마 <산넘어 바다건너>(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 1957)의 미라 역으로 주목 받기 시작한다. 이후 박남옥 감독의 남편인 연출가 이보라의 연기지도로 관습화된 연기와 언어가 아닌 현장의 연기와 실제 언어를 반영하는 훈련을 통해 KBS 라디오드라마 <동심초>(조남사 작, 이보라 연출, 1958)에서 19살 경희 역을 훌륭하게 소화해낸다. 그리고 이어서 KBS 라디오드라마 <장희빈>(이서구 작, 박동근 연출, 1959)에서 독한 장희빈의 연기를 탁월하게 해내 10년 뒤 텔레비전드라마 <장희빈>이 등장하던 시기에도 그녀의 이름이 회자될 정도로 대중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사진9] 1959년 KBS방송국(HLKA 서울중앙방송국) 라디오 드라마 <장희빈>의 마지막 녹음을 마치고 촬영한 사진이다. 서있는 이들 왼쪽부터 성우 박동근, 백성희, 고은정, 정애란, 박순옥, 작가 이서구, 김소원, 오정환, 앉아있는 이들 왼쪽부터 나옥주, 오승룡, 장서일. 1959년 <장희빈>의 마지막 녹음을 마치고 나온 사진 속 화사한 그녀의 모습처럼 그녀는 1954년에 KBS 성우로 발탁된 뒤 5년 만에 주연급 성우로 자리를 잡게 된다. 1950년대 후반 인기 라디오드라마가 방송 직후 영화로 만들어지던 시절에 성우 즉, 라디오연기자였던 고은정이 동명 영화의 후시녹음을 맡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구술자는 영화 <동심초>(신상옥, 1959)에서 자신이 했던 19살 경희를 연기한 엄앵란의 목소리를 맡게 된다. [사진10] <동심초>에 미망인의 딸 경희역으로 출연한 배우 엄앵란의 목소리를 고은정이 더빙했다. 애초에 좀 더 큰 비중의 역을 추천받았지만 본인에게는 라디오에서 했던 역의 연결이 중요했고, 귀엽고 사랑스러운 동작이 돋보이는 엄앵란의 연기가 마음에 들어 경희 역을 고집했다고 한다. 엄앵란 또한 자신의 이미지를 잘 살려준 그녀의 목소리 연기가 간절했기에 배우 엄앵란과 성우 고은정의 콤비 관계는 영화 <동심초>(신상옥, 1959)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심지어 엄앵란이 영화제 연기상 수상을 목적으로 후시녹음을 직접 했던 작품에서도 그녀의 도움과 보완이 필요했을 정도로 고은정은 엄앵란에게 각별한 존재였다. 두 사람은 적어도 영화텍스트 안에서는 하나의 정체성으로 움직였고 때때로 개인사적인 궤적 또한 묘하게 겹쳐지기도 했다. 1963년 3월 잡지 국제영화 주최 독수리상 시상식에서 여자방송인상을 수상한 고은정과 여자영화배우상을 수상한 엄앵란의 행복한 사진을 보면 두 사람의 얼굴마저 닮아 보인다. [사진11] 1963년 3월 잡지 국제영화 주최 독수리상 시상식에서 여자방송인상을 수상한 고은정과 여자영화배우상을 수상한 엄앵란이 축하연을 즐기고 있다. 숙명여대 사진동아리 숙미회에서 주최한 고은정과 엄앵란 사진전에서 보듯 대학 동문인 둘은 오랜 기간 동안 연기자로서 서로에게 기대고 의지하며 대표적인 배우-성우 콤비로 자리매김한다. [사진12] 1960년대 초반 숙명여자대학교 사진동아리 숙미회의 엄앵란·고은정 사진전에 참석한 고은정과 엄앵란 1963년 8월 방송문화상을 수상하는 고은정은 이미 당시 최고의 성우였다. [사진13] 1963년 8월 15일 방송문화상 수상식 현장. 공보부장관 임성희, 고은정. 엄앵란 뿐만 아니라 김지미, 문희, 윤정희, 남정임, 정윤희, 안인숙 까지 당대의 내노라할만한 여배우들의 목소리는 전부 고은정을 거쳐 갔다. 영화 후시녹음에서 목소리 연기는 입모양에 맞춰 대사를 넣어주는 역할 뿐 아니라 배우들이 미처 다 하지 못한 연기를 완성시켜주어야 했다. [사진14] 1960년대 후반 남산 한양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 중인 성우들. 왼쪽부터 강부자, 고은정, 김순원. 1960년대 후반 남산에 있던 한양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 중인 그녀의 표정을 보면 성우 또한 연기자임을 확인할 수 있다.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이 싫어 제대로 울지 않는 영화 속 여배우의 표정에 소위 된장을 풀어달라는, 즉 눈물을 펑펑 쏟게 해달라는 감독의 제안을 받을 때면 여배우가 얼굴을 가리거나 커트가 바뀌는 순간을 노려 눈물을 쏟아내야 했다. 연기자가 대사를 실수한 채로 어영부영 넘어갈 경우 입모양에 맞춰 애드리브나 웃음으로 그 장면을 살려내는 것은 전부 성우의 몫이었다. 배우들의 겹치기 촬영으로 연기의 몰입도가 부족하거나, 빠르게 진행되는 촬영현장에서 놓칠 수밖에 없는 부분은 후시녹음 단계에서 성우들의 연기로 보완해야만 했다. 그러다보니 후시녹음 된 한국영화에서 배우가 말꼬리를 흐리거나 대사를 반복하는 장면이 종종 등장하는데 이는 배우의 대사가 대본과 맞지 않아 성우가 궁여지책으로 보완한 경우이고 또 컷이 바뀔 때 웃음소리 등이 이어지는 경우 편집의 속도나 연속성이 맞지 않아 목소리로 연결을 맞춰 준 장면들이라 하겠다. 남산의 한양녹음실 위층에는 다방이 있어 녹음하다 잠시 다방에서 쉴 때면 연예부 기자들이 찾아와 인터뷰를 요청하기도 했다하니 녹음실과 주변 풍경 또한 영화촬영 현장만큼이나 분주했던 듯하다. 때로 후시녹음이 한국영화의 진보를 더디게 했고 더빙을 탁월하게 잘 해준 성우들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역설적인 비난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당시의 영화제작의 관행인 입도선매와 입도선매로 투자받을 수 있는 조건인 특정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 그리고 배우들의 겹치기 출연을 지탱해야 하는 빠른 제작 속도 등, 꼬리에 꼬리를 무는 영화 제작의 악조건은 촬영현장에서 부족한 부분을 후반작업에서 성우들이 메워주기를 원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실력 있고 인기 있는 성우들은 낮 시간에 라디오방송 녹음을 마치고 영화녹음실로 출근해 밤새 영화를 녹음하는 식으로 밤낮없이 일하며 1960~70년대를 보내게 된다. [사진15] 1963년 만리동 녹음실에서 러시필름을 보며 후시녹음 중인 성우들. 그러나 영화가 극장에 걸리기 전 마지막 순간에 숨을 불어넣는 그들의 역할은 영화 텍스트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다. 영화의 크레딧에 올라가지 않았기에 기록으로 남아있지 않아 그녀의 영화후시녹음 작품목록을 완전하게 완성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밤낮없이 녹음실에서 영화 후시녹음을 했고 심지어 고은정과 엄앵란, 이창환과 신성일 등 성우와 배우 콤비가 공공연하게 회자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영화 크레딧에 성우들의 존재는 남아있지 않다. 당연하고 공공연하지만 기록되지 않은 채, 타인의 연기에 목소리를 넣어주는 일에 대한 회의감 때문에 그녀는 1983년도를 마지막으로 영화후시녹음을 그만둔다. 물론 1980년대 들어 한국영화계도 동시녹음으로의 변화를 꾀하긴 했지만 장비, 자본과 제작시스템의 문제 때문에 1980년대 내내 여전히 성우들의 후시녹음은 이어졌다. 연기에 갈증이 있는 그녀는 영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이름으로 독보적이고 온전한 연기를 보여줄 수 있는 라디오가 항상 우선이라고 생각했다. [사진16] 1963년 동아방송 개국 시 동아일보사 정문 모습. 그러나 방송계 또한 1960년대 초중반부터 민영방송국들이 대거 등장하며 성우와 탤런트를 확보하기 위해 전속제를 추진하다보니 KBS에서 나와 프리랜서로 일을 고수해 온 그녀는 불이익을 받게 된다. 그리고 1960년대 후반 텔레비전 시대가 도래 하자, 엄연히 성격이 다른 매체임에도 불구하고 라디오가 부차적으로 여겨지는 안타까움에 직면해야 했다. 그럼에도 그녀는 라디오 방송의 인기시리즈 <법창야화>(MBC, 최풍 각본, 고무송 연출, 1977)나 <고백>(MBC, 1975~76)같은 프로그램의 주인공으로 활동을 이어갔다. [사진17] 1975년 2월 MBC 텔레비전 프로그램인 <유쾌한 청백전>에 출연한 MBC 라디오드라마 <법창야화>팀. 뒷줄 왼쪽 세 번째부터 고은정, 최풍, 김현직, 변웅전, 고무송PD, 아랫줄 왼쪽 두 번째부터 최선자, 김성옥, 홍성민. [사진18] MBC라디오 1인 드라마 <고백>팀. 성우 고은정이 홀로 엮어 나가는 모노드라마 형식으로 주목받았다. 왼쪽부터 고무송PD, 첫 회 주인공이었던 가수 문주란, 고은정, 유현종 작가. 뿐만 아니라 인기 텔레비전 외화시리즈 <왈가닥 루시>(1971)의 루시, <사랑스런 지니>(1977)의 지니 역을 더빙해 텔레비전에서도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실 그녀는 1950년대 말 종각에 있던 한국 최초의 상업텔레비전 방송국인 HLKZ에서 이순재, 김승호와 함께 텔레비전 드라마에 성우가 아닌 연기자로 출연하기도 했다. 1959년 목조건물인 HLKZ방송국이 불에 타지 않았다면 텔레비전 연기자로 활동을 이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라디오로 목소리가 널리 알려진 상태에서 1970년대 다시 텔레비전에서 얼굴과 목소리를 일치시켜 활동해야 된다는 것은 부담이었다. 20년이 넘도록 라디오와 영화, 텔레비전 방송에서 목소리를 전달했던 그녀가 방송 매체의 변화와 보이지 않는 역할에 회의를 느낀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그녀는 1977년 작가로서의 이력을 새롭게 시작한다. MBC 라디오 각본공모에 <대니 할머니>로 당선되며 성우에서 작가로 자리바꿈을 시도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12년간 동아방송의 동명 프로그램에서 직접 집필했던 방송 원고를 바탕으로 한 에세이 <고운정 미운정>을 출간한다. 이 책은 1996년에 다시 재간되기도 했다. 작가로 데뷔한 뒤 성우 일을 접고 세계를 돌며 취재 여행을 다니기도 했으나 그녀의 목소리가 만들어 놓은 세계는 너무도 견고하여 작가로서의 활동은 성우의 명망 뒤에 숨겨지게 된다. 1977년 이후 그녀는 방송작가와 성우를 겸했고 영화 <위기의 여자>(정지영, 1987)를 각색하고 정지영 감독의 권유로 잠시 출연하기도 했다. [사진19, 20] <위기의 여자>(정지영, 1987)에서 각색을 맡았고 수명(정윤희)의 정신과 의사로 출연했다. 사실 그녀는 연극을 통한 연기활동을 대학시절부터 꾸준히 이어왔다. 라디오드라마 <동심초>(이보라 연출, 1958)와 <장희빈>(박동근 연출, 1959)으로 한창 바쁠 때에도 그녀는 제작극회 초기작인 연극 <불모지>(김경옥 연출, 1958)와 현대극회의 창립작인 연극 <칵테일파티>(이보라 연출, 1959)에 출연했다. 현대극회는 중앙방송국(KBS)과 기독교방송국(CBS)의 성우들과 작가 및 연출가인 이보라, 임희재, 조남사가 모여 만든 극단이다. [사진21] 1958년 7월 제작극회 4회 발표작 연극 <불모지>(차범석 작, 김경옥 연출). 왼쪽부터 효과 최창봉, 건너 띄고 이두연, 박현숙, 조동화, 건너 띄고 작가 차범석 작가, 연출 김경옥. 아랫줄 가운데 노인 분장을 한 고은정, 아랫줄 오른쪽 끝 안평선. [사진22] 1959년 10월 공연한 현대극회 창립기념 작 연극 <칵테일파티>(T.S 엘리엇 작, 이보라 연출). 앞줄 왼쪽에서 두 번째 꽃을 들고 있는 이가 박용기, 고은정, 연출 이보라, 이미경, 박기선, 오승룡. 둘째 줄 안경을 쓴 이가 각색 윤병일, 최을선 가운데 위쪽 분장하고 꽃을 들고 있는 신원균, 이우영, 최난희. 1962년 유치진이 만든 드라마센터의 연극에도 꾸준히 출연했다. 1966년 드라마센터의 연극 <나도 인간이 되련다>(오사량 연출)에는 나타샤 김역으로 1968년 드라마센터의 연극 <동굴>(유인형 연출)에는 유애 역으로 열연했고 1972년 7월 국립극장에서 공연한 극단 성좌의 연극 <돈 후안>(1972, 권오일 연출)에는 첼레스티나 역으로 유인촌과 함께 출연했다. [사진23] 1966년 5월 공연한 드라마센터 연극 <나도 인간이 되련다>(유치진 작, 오샤랑 연출) 중 한 장면. 왼쪽이 나타샤 역의 고은정이다. [사진24] 1968년 4월 공연한 드라마센터 연극 <동굴>(김승규 작, 유인형 연출)의 한 장면. 왼쪽부터 김정철, 민지환, 고은정, 백성희. [사진25] 1972년 7월 공연한 극단 성좌의 연극 <돈 후안>(막스 프리쉬 작, 권오일 연출)의 출연진. 왼쪽 상단 유인촌, 아랫줄 가운데 첼레스티나 역의 고은정, 오른쪽 옆에 최병학, 건너 띄고 이수나, 고은정 뒤로 돈 후안 역의 황일청, 그 오른쪽에 미란다 역의 노경자. 그뿐 아니라 막역한 사이인 최은희 선생의 배우극장 멤버로 꾸준히 공연을 올렸고 지방 순회공연까지 참여했다. 그녀는 성우로 인기를 구가하던 시절에도 연극에 출연하며 연기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보여주었다. 공적인 영역의 활동 또한 활발해 1982년부터 1985년까지 성우협회 이사장을 지내며 성우 에이전시를 만들어 처우개선에 힘썼고 정당 활동을 통해 정치적 신념을 표출하기도 했으며 오랫동안 성우, 작가, 배우, 교수 등 다양한 역할로 전문성을 펼쳐왔다. 그러한 전문성과 노련함이 그녀의 구술채록문에 고스란히 담겨있다. [사진26] 1977년 단행본 『고운정 미운정』에 실린 작가 고은정의 소개 사진. 1950년 말 우미관에서 개봉한 서부영화들을 극장 영사실에서 더빙한 기억, 1971년 개봉 영화 <러브 스토리>(아더 힐러, 1970)의 영화홍보용 라디오드라마에 출연했던 경험, 영화후시녹음의 다양한 기술, 성우들과 영화감독들의 작업 스타일, 국립영화제작소의 뉴스녹음 방식 등 무척 흥미로운 내용들이 담겨져 있다. 하지만 그녀의 구술이 지닌 가장 큰 의미는 수많은 작품에 참여했지만 단 한 번도 크레딧에 이름을 올린 적 없고 영화와 관련된 수상을 해본 적 없는, 영화의 공적 기록과 역사에서 부재된 채 남아있는 그녀의 역할을 그녀의 목소리로 기록했다는 것이다.
필자가 속해있는 단체인 ‘성적소수문화환경을 위한 모임 연분홍치마’(이하 연분홍치마)의 여섯 번째 다큐멘터리 프로젝트의 마무리를 앞두고 있다. 다큐멘터리 < 노라노 >. 이 작업은 지금까지 연분홍치마가 해왔던 작업과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매우 달라서, 때때로 도전이나 실험이라는 말이 떠오를 정도였다. 다소 과장된 표현이지만 제작과정에서의 도전이나 실험이라는 느낌은 실존인물이자 어느 정도 대중적 인지도가 있는 인물을 재현하고자 할 때 많은 감독들이 만나게 되는 고민의 한 측면일 것이라 생각된다. 그런 의미에서 연분홍치마 작업이자, 필자가 프로듀서로 참여한 작업이지만 <노라노>를 이 공간에서 소개하려고 한다. 이 작업에 프로듀서라는 역할로 참여하면서 때때로 연분홍치마의 첫 번째 프로젝트이자 필자의 첫 번째 (공동)연출작이었던 < 마마상, Remember me this Way >(2004, 이하 마마상)라는 작업이 떠오르곤 했다. 물론 <마마상>과 < 노라노 >라는 작업을 통해 접근하고자 했던 두 여성은 계급, 직업, 시대, 사회적 자원, 제작진과의 관계 등 거의 모든 것이 다른 여성이었다. < 마마상 >의 주인공인 신○○ 씨의 경우, 1946년생으로 17살에 미군 남성을 대상으로 하는 성산업에 유입되어 `broken english`를 익히고 그것을 기반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자신의 성적 가치가 하나의 ‘상품’으로서 더 이상 유통되기 어려워지면서, 마마상이 되었다. 마마상은 업주를 대신하여 성매매 여성들을 관리하고 업소에서 벌어지는 온갖 궂은일은 도맡아 하는 일종의 ‘중간 포주’이다. 제작진은 신○○를 ‘이모’라는 호칭으로 부르며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 노라노 >의 주인공이신 노라노 씨의 경우, 1928년생으로 굉장히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녀는 일본군 장교와의 17살에 결혼을 했지만 19살에 이혼을 했다. 그 이후 미국으로 유학을 다녀와서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로서 한국 대중문화에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더군다나 제작진들은 노라노 씨에게는 언제나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너무나도 다른 이 두 여성의 삶을 그리고 있는 다큐멘터리의 제작과정은 그 두 여성의 다른 삶만큼이나 차이가 있었다 (지금도 역시 신○○의 경우, 그 이름을 공적인 것으로 만드는 것에 대해 긴장감을 갖는 반면에 노라노 씨의 경우, 그 이름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상징’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녀들의 얼마나 다른 삶을 살고 있는지가 드러난다). 이러한 차이로 인해서, 이 두 다큐멘터리의 제작과정은 익숙한 질문을 비틀어 제시하여, 새롭고 섬세한 답을 요구하는 것만 같았다. 하나는 실존 인물의 생애를 다루는 다큐멘터리의 장르적 어려움에 관한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여성들의 ‘나이 경험’이 한국사회 성별 체계와 어떻게 관련되어 있는지 그리고 나이 듦이 가져오는 변화가 갖고 있는 함의에 대한 질문들이었다. 우선 특정한 삶을 살고 있는 실존인물의 생애를 담고자 할 때, 현존하는 주인공과 제작진 사이에는 주인공의 삶을 바라보는 (혹은 해석하는) 관점에서 차이가 생기기 마련이다. 이 차이는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다큐멘터리의 제작과정은 물론이거니와 그 결과물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특정한 인물의 삶을 통해 사회적 이슈를 전달하는 이야기방식을 채택한 모든 다큐멘터리 작가들이 그러하듯이, 인물의 삶에 대한 존중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그러한 삶을 가능하게 했던 조건으로서의 사회적, 역사적 구조를 제시하고자 노력해왔던 것 같다. 또한 인물에 대한 정보나 사회적 이슈를 전달함에 있어 스토리텔링에 대한 구성적 고민을 흥미롭게 해보려고 노력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 마마상 >의 경우, 미군 기지촌을 중심으로 지속되어 온 성매매 메커니즘의 역사와 그 메커니즘의 일부로서의 삶을 살고 있는 한 여성을 이야기할 때, 중간매개인 ‘마마상’이라는 이라는 직업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는 방식이 전체 내터티브나 표현형식과 어떻게 맞물리게 해야 할지 (어설프지만) 공들여 고민했었던 기억이 있다. 조금 풀어 말하자면, 신○○ 씨 스스로가 생각하는 마마상으로서의 삶과 제작진이 바라보는 신○○ 씨의 마마상으로서의 삶은 분명히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다. 이 차이에 주목하면서 그것이 갖는 의미들을 찾고 그것을 다큐멘터리의 중요한 이야기로 담으려고 노력했었던 것 같다. 그러나 이번 < 노라노 >의 주인공인 ‘노라노’ 씨의 경우는 그 차이에 대한 질문이 조금 까다롭게 던져졌다. 노라노 씨처럼, 이미 사회적으로 알려졌으며 자신의 성과에 대해 이미 일정한 평가를 내리고 있는 인물이라면 그 차이에 대한 긴장은 다층적으로 커질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으로는 ‘어떤 집단’에게, ‘어떤 이미지’로, ‘얼마나’ 알려져 있는가(혹은 반대로 ‘어떤 집단에게 잊혀졌는가’라는 질문도 가능하다). 주인공 스스로는 ‘자신의 이미지’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가(혹은 타인이 인식하는 이미지와 자신이 설정하는 이미지 사이의 간극을 인정하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답을 하는 과정은 주인공과의 소통인 동시에 다큐멘터리의 구성적 측면에 영향을 미쳤던 것 같다. 다른 한 측면에서, 제작진들은 여성들의 ‘나이 경험’에 대해서 각별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개별 여성들은 계급, 성 정체성, 세대, 결혼 여부 등 여러 조건이 교차하며 만들어내는 구체적인 조건 속에서 지배적인 생애 주기와 다양한 방식으로 경합하며 ‘나이 듦’을 경험한다. 그러나 <마마상>과 < 노라노 >의 두 주인공은 지배적인 여성의 생애 주기와는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것은 평생 ‘여성’으로 살아간다는 것도 혹은 나이와 무관하게 살아가는 것도 아닌, 의미화가 필요한 지점이 있었다. 그 두 여성의 삶은 젊은 몸이 쇠락하는 늙음도 아니고, 생식력을 잃어버리는 여성성의 쇠퇴도 아니며, 그리고 일할 수 있는 노동력의 상실만으로도 이해될 수 없는, 다른 ‘나이 듦’의 표현을 필요로 하는 삶이었다. 아마도 그것은 가부장제와 이성애 중심적인 사회에서 변칙적인 삶을 살고 있는 여성의 삶에서 비롯되는 것으로 보였다. 특히 이성애 남성들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변칙적인 삶을 살아온 여성들의 ‘나이 경험’은 두 여성의 경제적 계급적 차이를 넘어서는 것으로 보일 정도로 유사한 점이 있었다. 성매매 여성과 패션 디자이너. 여성주의 활동가로서 이 두 여성의 삶이 만들어 놓은 여성의 ‘나이 듦’에 관한 질문에 답을 찾아보고 싶었다. 프로듀서로서 < 노라노 >라는 작업에 참여하면서 이러한 고민들을 할 수 있었던 것이 무엇보다 큰 의미로 다가온다. 물론 이러한 고민들은 다큐멘터리 <노라노>의 핵심적인 이야기라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이러한 고민들을 하게 된 것은 현재 필자의 위치가 어느새 생물학적 ‘나이 듦’과 다큐멘터리 감독으로서의 ‘나이 듦’을 의식하는 과정을 지나고 있기 때문일 것 같다. 그리고 이러한 감정은 <노라노>의 김성희 감독에게도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 곧 <노라노>가 관객들을 만나게 된다. 감독의 바람처럼, 이 다큐멘터리 <노라노>가 많은 여성 관객들에게 규범적인 ‘노년’을 넘어, 자신의 ‘나이 듦’을 상상해 볼 수 있는 흥미로운 계기가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