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놀이
- 감독
- 정유미
- 제작년도
- 2012
2014년은 그 어느 때 보다 한국 애니메이션이 승승장구했던 정말 신나는 한 해였다. 세계 4대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이라 손꼽히는 자그레브 국제 애니메이션 페스티벌에서 한국 애니메이션으로는 최초로 정유미 감독의 < 연애놀이 >가 대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날아들기가 무섭게 바로 뒤이어 프랑스에서 열린 안시국제애니메이션페스티벌에서도 한국 애니메이션이 단편 부문 대상을 거머쥐었다는 잇따른 낭보가 전해졌기 때문이다. 안시를 사로잡은 주인공은 바로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계에 혜성 같이 등장한 정다희 감독이었다. 애니메이션이 시간을 다루는 매체인 동시에 움직이는 이미지라는 점에 매료된 그녀는 한국에서 시각디자인을 전공한 후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고, 2012년 파리 아르데코 애니메이션과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게 된다. 그리고 그녀는 졸업작품 < 나무의 시간 >(2012)으로 2013 인디애니페스트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무서운 신예로 떠올랐다. < 의자 위의 남자 >는 어느 한 남자의 존재에 대한 성찰에서부터 시작되지만, 그것은 동시에 작가 자신이 스스로에게 던지는 화두이기도 하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디에서 왔을까?’ 거울 속 한 남자가 의자 위에 앉아있다. 그곳에 얼마나 오래 앉아 생각에 잠겨 있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 조차 버거워 보인다. 남자의 머릿속 의식의 흐름은 존재의 근원에 대한 물음으로 가득 차 있고,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남자가 있는 방안의 공간을 타고 넘어 어느 새 우주 공간까지 확장되어 뻗어 나간다.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과연 실제 존재하는 것일까?’, ‘만약 눈에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내 관념 속에서만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면, 과연 나는 실존하는 것일까?’ 남자가 스스로에게 던지는 존재론에 대한 철학적 회의는 꼬리에 꼬리를 물며 시작과 끝이 모호한 순환의 고리 위에서 계속 돌아간다. 그림 속 남자는 분명 작가에 의해 창조된 형상이지만, 작가 역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세계 안에서 살아가는 존재는 아닐까 하는 성찰로까지 확장시켜 나가는 설정이 독특하고 재미있다. 존재에 대한 질문들이 경계가 모호한 관념의 세계까지 다다랐다고 생각할 즈음, 남자의 시간과 공간은 되돌아 감기를 시도하며 파편화된 생각의 흐름을 재배열하여 또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녀의 공식 데뷔작 < 나무의 시간 >(2012)이 나무들의 다양한 삶에서 영감을 받아 노인과 나무의 관계를 통해 우리의 삶을 관조한 작품이라면, < 의자 위의 남자 >(2014)는 남자와 화자(작가)간 관계를 통해 존재에 대한 내적 성찰의 흐름을 무한대로 제시하고 있는 짧지만 강렬한 인상을 주는 작품이다. 그녀의 신작 < 빈방 >(2016) 역시 주된 테마는 전작들과 연결성상에 있는 작품이지만 이번에는 방이라는 공간 안에 있는 벽, 문, 창문을 비롯한 다양한 재료들을 사람의 기억과 흔적의 알레고리로 치환시켜 이를 통해 존재에 대한 내면의 이미지를 변주하고 있다. 흥미로운 것은 그녀의 작품에서는 좀처럼 조급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의 이야기는 마치 여러 해를 묵혀 오랫동안 숙성시킨 장맛처럼 담담하지만 쉽게 흉내 낼 수 없는 깊이와 풍미를 담아내고 있다. 그런 그녀의 이야기와 함께 유려하고 정제된 드로잉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그녀가 펼치고 싶은 상상력의 세계를 자유자재로 유영하며 보는 관객의 마음 한 구석을 교묘하게 자극하면서 작품 속으로 동참하게 만드는 묘한 매력을 발산한다.
인생은 가까이서 볼 땐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 찰리 채플린 인생은 희극과 비극이 언제나 교체한다는 저 말. 맞다. 비극으로만 점철될 것이라 믿었던 군대생활도 통틀어 20분 정도는 재미있었으니까, 아니면 굳이 경험하지 않더라도 공중화장실 변기 위에 삶의 격언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고, 비슷한 맥락으로 우리 동네 백수형도 가끔 나에게 말하곤 할 정도로 저 말은, 그냥-누구나-대충-던질 수-있는 말이다. 그런데도 저 말이 (적어도 나에게는) 빛나는 것은 채플린이 저 말 속에서 영화적인 표현을 사용했다는 점이다. 클로즈업과 롱샷. 클로즈업에서는 비극이며, 롱샷에서는 코미디라는 말. 가만히 채플린의 영화를 떠올려 보면 그의 말이 어느 정도 수긍이 간다. 그는 모든 롱샷에서 코미디를 만들어내었고, 그의 모든 클로즈업은 아려오는 슬픔과 애잔함이 가득하였다. 보통 하나의 프레임이 인물을 잡아낼 때 사용되는 용어인 롱샷과 클로즈업은 일반적으로 카메라와 인물 간의 거리, 또는 대상과 관객의 사회적 거리를 표현하는 가장 근본적인 장치이다. 말하자면, 카메라에 비친 대상에게 일정한 심리적 거리를 두고 보는 것을 롱샷의 거리(distance)이고, 대상과 상당히 개인적으로 친숙한 거리에 두고 보는 것을 클로즈업이라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롱샷에서는 대상이 되는 인물에게 일정한 거리감을 두면서 개인적 친밀감 보다는 낯선 이로 남게 한다면, 클로즈업에서는 인물과 카메라가 가까워지면서 친밀감을 중시하고, 감정의 거리를 줄여서 심리적 동질성을 가지게 하는 점이다. 채플린이 등장하는 롱샷에서 관객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멀찌감치 앉아서(상대적으로 타자화 되어 있는 상태에서) 넘어지고, 떨어지고, 실수하는 우스꽝스러운 상황을 웃음으로 받아들인다. 즉 카메라와 대상의 거리(롱샷), 이로 인한 사회적 거리는 그것을 구경거리 정도로만 국한시키고 말뿐이다. 하지만 인간의 얼굴이나 대상을 클로즈업으로 촬영하게 되면 관객을 더 이상 구경꾼이 되지 못한다. 대상에 가까워지면 우리는 거리감을 지우고, 개인적인 거리 상태에 돌입하기 때문이다. 원근법적 거리를 사라지게 하고, 대상을 촉지적으로 만지게 되는 상황. 정신없이 흔들리는 정동의 상태. 채플린의 클로즈업은 특히 더 그러했다. 정유미 감독의 < 연애놀이 >를 처음 접했을 때의 감정도 그랬다. 클로즈업으로 시작되어서는 요상한 80년대 복장을 한두 명의 연인의 롱샷으로 이어지는 첫 오프닝부터 말이다. 이러한 쇼트 구성은 이후 계속 이어지는데, 놀랍게도 이 작품은 딱 그 두 개의 쇼트, 롱샷과 클로즈업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롱샷(long-shot), 놀이의 프레임 보통 인물의 롱샷의 경우는 설정 쇼트로 알려져 있다.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공간의 설명, 실사영화에서는 마스터 쇼트라고 불리는. < 연애놀이 >의 경우에도 롱샷은 작품의 제목처럼 놀이를 위한 공간설정이다. 바닥에 네모난 금을 긋고, 나란히 신발을 벗고 네모난 공간으로 들어간 두 명의 남녀. 이 작품 전체를 통틀어 변화하지 않는 롱샷의 구도이다. 아예 작품 속에서 모든 롱샷의 레이아웃은 이 장면을 바탕으로 고정되어 있다. 다른 별도의 배경이 없이, 바닥에 별도로 그려진 프레임은 ‘연애놀이’가 일어나는 공간이자, 그들이 벗어나지 않는 공간이다. 놀이라는 속성상 그들은 그 프레임 안에서 다양한 역할극을 하거나, 그곳에서 지켜야 하는 룰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 속에서는 그들은 소년, 소녀가 되거나, 젊은 연인이 되거나, 늙은 부부가 되어야 하는 운명이다. 따라서 그들의 놀이에는 금 그어진 공간, 그려진 네모의 공간 외부로는 갈 수 없다. 모든 놀이가 그렇듯이 구별된 공간은 살아온 기억이 되거나, 현재의 갈등이거나, 미래의 다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간의 설정은 그어진 금(밟으면 죽는 그 ‘금’)과 신발(구두)에 의해서 더욱 강화된다. 금의 외부가 일상과 외부의 삶이라면, 금의 내부는 연애와 삶의 공간인 셈일 텐데, 이를 끝없이 재생산하거나 재고하게 하는 것이 금의 외부에 놓인 신발이다. 신발은 외부의 삶에서 새로운 공간으로 들어옴을 상징하는 역할을 하면서도, 언제든 다시 돌아나갈 수 있는 상징이기도 하다. 세상의 모든 연애가 이처럼 위태하지 않았던가? (금을 밟으면 죽는, 경계를 넘나들기 힘든. 실제로 작품에서 여성 캐릭터가 넘어지면서 우연히 금을 밟는 장면이 나오는데, 인과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바로 다음 에피소드에서 그녀는 아픈 설정으로 된다.) 하지만 처음 이 작품을 대할 때의 롱샷들은 그 위태함을 바라보는 두려움보다는 묘한 웃음을 번지게 한다. 그것은 롱샷으로 보이는 인물들의 움직임과 상황 때문인데, < 연애놀이 >에서 롱샷으로 잡힌 인물들은 컷아웃 애니메이션의 그것처럼 묘한 타이밍과 특유의 단축법으로 그려진 신체의 표현으로 구성되어있기 때문이다. 물론 거기에는 롱샷에서 클로즈업으로 넘어가는 몇몇 재치 넘치는 샷 구성도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롱샷 장면에서 보이는 장면들은 공간 설정에 대한 정보로 구성되어 인물들과 카메라, 즉 대상과 관객과의 거리는 멀다. 그 때문에 연애놀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은 그들이 하는 놀이(오래되고, 가물가물한, 무덤덤한)가 롱샷으로 펼쳐질 때 재밌는 구경이 된다. 그러나 그 때문에 이 작품이 단순한 희극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작품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 아픈 아련함이 있다. 클로즈업(close-up), 대상을 향한 무한한 촉감 < 연애놀이 >에서의 클로즈업은 주로 놀이에 사용되는 사물, 손, 그리고 얼굴로 구성되어 있다. 여기서 사물은 놀이를 위한 주요한 소도구이며, 손은 놀이를 이어주고, 인물들을 이어주는 도구가 된다. <연애놀이>의 롱샷이 상당히 단순화된 드로잉과 레이아웃으로 구성된 것에 비해, 클로즈업으로 보이는 각각의 대상, 특히 놀이의 사물들은 그것들과는 대조적으로 디테일한 표현을 두고 있다. 이는 감독이 가지는 사물에 대한 애정과도 같은데, 이로 인해 각각의 에피소드에서 사물들은 더욱 깊은 주의와 의미를 품게 되고, 놀이는 단순한 놀이가 아닌 특별한 은유의 모습을 띠게 된다. 말하자면, 에피소드에서 등장하는 돌, 찻잔, 모래, 과자, 방울, 핸드백, 청진기, 주사기 등등은 실제 삶의 과정에서 나타나는 갈등이나 희망, 기억, 시간 등으로 환유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작품이 적절한 유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여러 복잡한 감정을 떠오르게 하는 것은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이를 더욱 강화시켜주는 또 다른 중요한 지점은 바로 얼굴의 클로즈업이다. 보통 상당히 단순화되어 있는 데생에서 인물의 모습을 클로즈업으로 제시하기는 쉽지 않은데, 그것은 단순화된 이미지 때문에 클로즈업 내부에 등장하는 정보의 양이 너무나 적어서 수용자들이 쉽게 따분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 연애놀이 >에서의 얼굴 클로즈업은 전혀 다른 양상이 된다. 그들의 얼굴은 윤곽선으로 그려진 선들의 끝없는 떨림으로 이야기를 전달하고, 감정을 전달한다. 이때 떨림의 선은 이미 앞서 제시된 애정 어린 사물들과 인물들 간의 손의 연결, 그리고 클로즈업된 얼굴의 이미지로 이어지면서 이것이 그려진 애니메이션이라는 존재적 층위를 알림과 동시에 인물의 얼굴을 복잡한 감정이 휘몰아치는 공간으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얼굴의 작은 떨림은 그야말로 인간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하는 선, 그 자체의 존재의 함성인 셈이다. 그리고 우리는 마치 그 선을 만지듯이 바라볼 수 있다. 놀이에서 삶으로 이 작품이 농익은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감독은 각각의 에피소드들의 순서를 구성함에 있어서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한 흔적을 찾을 수가 있는데, 각각의 에피소드는 놀이의 순서이면서, 삶의 순서이고, 미묘한 감정의 고리가 연결되는 과정이 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먼 곳(long-shot) 에서 살펴야 했던 누군가의 놀이가 그들의 내부(close-up)를 드러내면서 (복잡하게 떨리는 사물을 대면하게 함으로) 우리는 비로소 이것이 삶에 닿아 있는 것임을 느끼게 된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80년대 복장을 한 부모세대의 기억을 인터뷰하는 것일 수도 있고, 현재 우리가 느끼는 삶의 재연(reenactment)일 수도 있으며, 누군가가 겪게 될 누군가의 재현(representation)일 수도 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의 백미라 느끼는 것은 마지막 두 개의 에피소드인 병원놀이와 시체놀이인데, 이 두 에피소드는 앞선 이야기들이 들려주는 단순한 놀이를 삶의 영역으로 옮기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메마른 감정의 얼굴이 슬픔과 비극의 클로즈업으로 변환되고, 놀이의 구경꾼이 어느새 그들의 감정 한가운데로 들어오게 만들어 버린다. 놀이에 불현듯 끼어든 느닷없는 비극. 눈물을 왈칵 쏟아내는 여성 캐릭터의 모습에서는 그야말로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짧은 지면상 더 많은 이야기를 할 순 없지만, 그 장면의 배경과 이야기의 내부를 향한 궁금증은 정말 감독에게 묻고 싶을 정도다) 짧은 15분짜리 단편 영화지만, 그만큼 여기에는 수많은 이들의 이야기가 있다. 작가는 분명 누군가의 사랑을 사랑하고, 기억을 가다듬고 손질하는 유려한 양식을 가지고 있으며, 따뜻한 유머(humor)와 애정을 가지고 있는 그야말로 애절하고, 사랑스러운 휴머니스트임에 분명하다. 채플린이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장난감(Toy), 변신(Transform), 교육(Teaching). 최근 한 메이저급 제작-배급사가 보도자료를 통해 내 놓은 현재 한국 애니메이션의 주요 키워드이다. 변신하는 로봇이나 캐릭터가 등장하여 교육적인 이야기를 전달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캐릭터 시장에서도 괄목할 만한 수익을 창출해 낸다는, 말하자면 최근 애니메이션 산업의 제작과 수익구조의 수요관계를 정확하게 집어낸 것이다. 투자, 제작, 방영 및 노출, 그리고 수익으로 이어지는 애니메이션의 산업적 과정 내부가 워낙 하이리스크로 구성되어 있다 보니, 적어도 예의 키워드는 흔한 말로 안전빵(?)과 같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한국의 성공한 애니메이션들은 “교육적인 변신 장난감이 주인공”이었다는 것. 부분적으로는 동의하는 바가 있다. 하지만 이 어색한 문장의 내부를 천천히 살펴보면 동의하는 지점 너머에 불쾌한 무언가가 있다. 먼저, 변신(Transform). 변신이라는 말은 애니메이션의 오래된 특성이자 강력한 무기 중의 하나이다. 애니메이션에서는 하나의 점, 선, 면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변화하면서, 플라즈마 같은 속성으로 “이것으로부터 저것으로 옮겨가는” 이미지의 특성을 명확하게 보여준다는 것이다. 에이젠슈타인과 발터 밴야민과 같은 이들이 애니메이션에 호감을 가졌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와 같은 애니메이션의 속성은 신체와 신체, 신체와 사물 등으로의 이행, 즉 ‘~이 되기’가 익숙한 어린아이들에게는 상당히 주요한 커뮤니케이션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가면을 사용하여 신체를 변화시키거나, 신체와 결합하거나, 아니면 성장의 시간을 압축시켜 사건을 전개하는 방식 - < 요술공주 밍키 >와 같은 변신물 - 의 경우들도 여기에 포함된다. 수많은 설화들을 기반으로 하는 이러한 변신은 다양한 이야기소로 변형/재가공 되면서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 내며, 서사를 풍부하게 만들어낸다. 하지만 예상했다시피, 여기 (3T)에서의 변신은 그런 것이 아니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변신하는 기계 또는 로봇이다. 여기에는 이후에 도달하는 다른 키워드 ‘장난감(Toy)과 결부’되는 지점이 있는데, 이는 형상의 변화와 다양성에 주목하는 것이 아닌, 변신로봇이라는 고정된 캐릭터를 의식하는 것이다. 그냥 냉정하게 변신 로봇이라 말하자. 두 번째, 장난감(Toy). 엄밀하게 말하자면 5세 이하 (남자)아이들을 위한 완구 시장을 염두에 두고 한 표현이다. 가장 폭발적인 소비시장으로 자리 잡은 이들의 구매력은 상상을 초월하는데, 적절한 상품미학이 결합된 로봇 완구는 높은 구매 충성도까지 형성하며 재구매의 효과까지 가지고 있다. 문제는 완구의 타겟 특성상 노출과 소구가 지속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에서 완구가 애니메이션이라는 매체와 결합한다. 애니메이션은 홍보와 노출이라는 마케팅의 요소가 되고, 제품은 완구로 대체된다. 그러다 보니 작품의 이야기나 캐릭터들의 디자인은 완구를 위한 디자인으로 고착된다. 예컨대, 캐릭터의 팔과 다리는 가늘어서는 안 되고, 완구로 만들어졌을 때 안정적으로 바닥에 고정될 수 있어야 하며, 변형이나 가동의 방식이 복잡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듯 캐릭터라는 것이 작품의 이야기라는 내부에서 설정되는 것이 아니다 보니 인물의 성격이나 외연에서 구성되는 이미지는 배제되고 만다. 이러한 설정 내부에서 인간이라는 캐릭터가 남아있기/끼어들기는 상당히 어렵다. 그 덕에 작품에는 이야기가 구축되기보다는 이야기가 끼어드는 형국이 되기 쉽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교육(Teaching). 예의 두 키워드가 장난감(Toy)으로 귀결되고 마는 상황에서 교육은 서사에 대한 일반적인 키워드가 될 수가 있다. 이야기의 기본적인 설정은 미취학 아동들에게 필요한 인성 교육 등이 될 터인데, 우정, 협동, 배려심 등의 것들일 것이다. 분명 캐릭터들의 구축 방식을 따르자면 작품의 성격은 엔터테인먼트적인 요소가 강함에도 불구하고 교육이 끼어든 것에는 서브 타겟으로 볼 수 있는 부모세대에 대한 어필이라 할 수 있다. 이렇다 보니 모순적 양식이 발생한다. 변신하는 로봇이 등장하는 엔터테인먼트의 성격에 교육적 요소를 심어야 하는 부담감이다. 그러니 모두 협동이 필요한 ‘구조대’다. 선악의 관계망에서 번민하거나 갈등하지 않으면서도 변신하는 로봇의 액션이 필요하니 당연히 구조대 만큼 좋은 요소는 없는 셈이다. 게다가 최근의 화두들이 ‘힐링’과 ‘안전’이라는 표제 아래에 줄 서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 같은 바람도 이해가 가능하다. 어쩌면 3T는 한국 애니메이션 시장의 현황과 지속가능성, 그리고 발전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주요한 키워드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 키워드가 한국 애니메이션의 미래를 장담해 줄 요소는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함정에 가깝다. 상업적 성공만을 위한 애니메이션의 기획이 여전히 이러한 안전빵 내에 머물려 하기 때문이다. 아울러 그 키워드라는 것이 그냥 문득 툭툭 뱉어진 듯 구성된 허술하거나, 모순적인 형국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한국 애니메이션의 키워드를 언급하였던 예의 보도자료를 뿌렸던 국내 굴지의 대기업도 스스로 안전하다는 주문을 거는 듯한 모습이라 간혹 실소를 짓게 한다. 냉정하게, 아주 냉정하게 5세 이하 미취학 아동들의 완구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라는 점에서는 박수를 보내 주겠다. 그러면서도 그곳이 아주 통 크게 다양한 우리 애니메이션도 배급해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에겐 정다희 감독의 < 의자 위의 남자 >, 정유미 감독의 < 연애놀이 >도 있고, 장형윤 감독의 < 우리별 일호와 얼룩소 >, 안재훈 , 한혜진 감독의 작품들도 있으며, 연상호 감독의 작품들도 있다. 여전히 건재한 이성강 감독의 작품들도 있으며, 홍덕표 감독의 < 발광하는 현대사 >나, 단편 문학을 그려낸 < 메밀꽃, 운수 좋은 날, 그리고 봄봄 >도 있었고, 그리고 한지원 감독의 < 생각보다 맑은 >(등)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