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치
- 감독
- 황문수
- 제작년도
- 1973
- 출연
- 한태원, 이대훈
김수용 의 < 산불 >(1967)은 지리산 어느 마을 대나무 숲에서 국군인지 빨치산인지 모를 이들에게 식량을 갖다 바치는 일군의 아낙네들 모습으로 시작한다. 보자 하니 그들 아낙네들 사이에 연배가 높은 두 여자는 사이가 아주 나빠서 서로 할당량을 채웠느니 못 채웠느니 하고 시비를 가른다. 갑자기 그들 두 사람이 카메라 앞으로 다가와 자기 사정을 하소연하는 뜻밖의 숏이 이어진다. 온전히 관객의 시점을 점유한 이 화면의 주인공, 아낙네들이 하소연하는 대상은 보이지 않는다. 순식간에 관객을 구경꾼에서 연루자로 만들어놓는 이 대담한 도입부는 김수용이 당대의 한국영화계에서 흔치 않은 자의식으로 영화언어를 벼리는 스타일리스트였음을 드러낸다. 낮에는 국군이, 밤에는 빨치산이 지배하는 영화 속 마을에는 아녀자들과 늙은이만이 살고 있고 남자들을 국군 아니면 빨치산으로 징발당한 여자들은 남편의 생사를 모르는 채 당장 하루하루 연명하는 삶에 이골이 나 먹이를 찾아 이빨을 드러낸 짐승처럼 곧잘 서로 으르렁댄다. 이 마을에 숨어든 규복은 빨치산 진영에서 탈영한 전직 선생으로 시어머니와 시할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과부 점례를 협박해 대나무 숲에 은거한다. 남자 없는 마을에 살던 점례는 인텔리 분위기가 밴 규복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며 그의 사정을 듣다가 호감을 품고 급기야 정을 통한다. 마을의 또 다른 과부 사월이 이 상황을 눈치 챈다. 그는 규복을 밀고하겠다고 어르며 규복의 육체를 점례와 공유한다. 한창 기운이 왕성한 젊은 과부 두 사람과 남자 한 사람이 전쟁의 복판에서 몸을 나눈다는 이 영화의 설정은 생존에의 욕구와 애욕이 비례하는 상태를 가감 없이 보여준다. 이 마을 사람들은 동네 바깥의 전황을 풍문으로만 들을 수 있을 뿐이고 마을 상공을 선회하는 국군 비행기를 보며 허둥대는 상황이 되풀이되는 가운데 먹고 살기 위한 끼니를 겨우 해결하는 극빈 상태에서 그들은 문명사회의 기초적인 관례를 유지할 여력이 없다. 주인공 점례를 제외한 마을의 대다수 사람들은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에 인간적인 염치가 없다. 점례의 시할아버지는 자나 깨나 먹을 것 타령이고 살짝 지능이 모자란 점례의 시누이 역시 일하는 것과 담을 쌓고 어린애처럼 천방지축 동네를 헤집고 다니며 사월은 남자를 향한 욕구불만으로 히스테리에 차있다. 아낙네들은 동네 개울가에 모여 빨래를 하며 음담패설 아니면 생존에 대한 불안을 토로하는 농지거리로 일관한다. 후반부에 이르기까지 규복과 점례의 시할아버지 외엔 남자들이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에서 평상시의 남자와 여자의 권력관계는 뒤바뀌어 있다. 점례 집안의 가장인 시할아버지는 숨 쉬는 것 빼면 헛소리만 내뱉는 치매 노인으로 투명인간 취급을 당하며 규복은 자신의 몸을 탐하는 사월이의 공세에 굴종하며 스스로 짐승에 불과한 존재라고 탄식한다. 전쟁 도중의 극단적인 상황에 몰린 등장인물들의 애욕의 민낯을 생생하게 드러내지만 그것이 인간에 대한 냉소로 귀결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에너지의 역설로 다가온다는 것이 이 영화의 미덕이다. 극작가 차범석이 1963년 <현대문학>에 게재한 대표적 동명희곡을 영화화면서 김수용은 1: 2.35 화면비의 스코프를 효과적으로 이용해 인물과 사물의 수평 배치를 활용한 시원한 구도와 움직임으로 화면을 힘 있게 추진시킨다. 특히 영화의 주배경인 대나무 숲의 풍경이 압도적인데 흑백 화면의 질감 속에 햇빛이 차단된 대나무 숲에 부분적으로 빛이 떨어지고 그 빛의 줄기들과 그림자들이 교차하는 가운데 남자 사람과 여자사람들의 애욕과 생존에의 갈구가 펼쳐진다. 영화의 말미에 마을에 등장한 국군 토벌대가 빨치산을 색출하기 위해 대나무 숲을 태울 때 규복은 그 숲 안에서 절규하며 죽어가고 마을에서는 규복의 아이를 임신한 사월이 자결을 택한다. 점례는 까맣게 그을린 채로 개울가에 나와 죽은 규복의 시체를 보듬으며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세상의 불우와 직면한다. 국군과 빨치산 편으로 나뉘어 반목과 질시를 거듭하던 마을 사람들 역시 잿더미만 남은 숲의 잔해를 보며 자신들의 삶의 실체를 깨닫는다. 알맹이가 없는 적대와 살육의 악순환 속에서 오직 살아남기 위한 본능에 갇혀 버둥거리던 삶의 슬픔과 허무를 보는 것이다. >> 산불 VOD 보러가기 <<
신상옥 의 < 꿈 >(1955)을 동시대 세계영화의 자장 안에서 본다면 시간을 거슬러 만들어진 영화처럼 보일 것이다. 빈번하게 깔리는 배경음악과 그리 많지 않은 대화 장면이 없다면 거의 무성영화로 봐도 무방할 정도이다. 신상옥 자신이 리메이크한 1967년 판 색채 영화 < 꿈 >과 비교해 봐도 서사는 단출한 상태를 넘어 앙상하고 사건을 추동하는 인물의 내적 동력은 거의 가늠하기조차 힘들다. 그런데도 상대적으로 각본이 훨씬 정교하고 인물의 관계도도 풍부한 색채판 <꿈>에 비해 이 무성영화 비슷한 흑백영화 오리지널이 더 재미있다는 게 신기하다. 이광수의 소설에 기초한 소재지만 이 영화는 서사의 기본 얼개를 여러 이유로 자세하게 축조하는 걸 포기한 인상을 준다. 한국전쟁 직후 폐허에서 시작했을 영화산업의 물적 토대가 그 첫 번째 이유일 것이고 최인규 감독 밑에서 도제식 조감독을 했다고 하나 데뷔작 < 악야 > 이후 세 번째로 장편영화를 연출한 신상옥의 얕은 연출 경험도 또 다른 이유일 것이다. 일종의 자서전 비슷한 책 「난, 영화였다」에서 신상옥은 “영화는 근원적으로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꿈을 창조하는 작업이다. 미술을 공부하면서부터 내 의식의 내부에는 탐미적인 요소가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고 쓰면서 이 영화가 문학의 영화화를 통해 나름의 영상미를 탐구한 성과라고 자평한다. ‘탐미적인 영상미’의 수준에 오리지널 판 <꿈>이 이르렀는가에 대해서는 고개를 갸우뚱할 수 밖에 없지만, 기술적 열악함이 화면에 그대로 드러나는 낭패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 기묘한 정기가 서려 있어 홀린 듯이 빠져들게 되는 매력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말장난 같지만 실제로 그렇다. 초기 신상옥 영화의 파트너였던 배우 황남 ( 배창호 감독이 연출한 < 꿈 >에서 주연을 맡았던 안성기 와 외모가 비슷한)이 연기하는 승려 조신이 지체 높은 태수의 딸 달례( 최은희 )를 보고 한눈에 반해 파계하는 초반 설정에서 영화는 훌쩍 서사적으로 비약해 그 두 사람이 절에서 멀리 도피해 달아나는 장면으로 치닫는다. 쫓는 쪽은 화면에 나오지 않는데 쫓기는 그 두 사람은 다급하고 절박하다. 화면은 이들의 반쪽짜리 추격전을 10여 분 가량 담아내는데 쫓는 자들과의 대비가 화면에 구현되지 않는데도 장중하고 긴박한 음악이 깔리며 그들은 스스로 위기감을 재촉하면서 열심히 달아난다. 조신(안성기와 외모가 비슷한...황남) 여기서 시간에 대한 공간의 절대적 우세가 형식적 특징으로 자리 잡는다. 조신과 달례의 욕망의 장의 배경으로 존재하는 자연이라는 조형공간이 그 자체로 서사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면서 안티 서사에 가까운 틀을 세우는 결과가 만들어짐으로써 영화를 현대적 기운으로 채우는 작은 기적이 일어난다. 이는 앞서 말한 무성 영화적 외양의 활기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인데 서사를 미니멀하게 축조하는 대신 극적 사건의 계기로 작동하지 않는 자연 그 자체를 지속적으로 전경화함으로써 주인공들의 탈주 욕망을 품는 숭고한 대상으로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이는 조신의 경쟁자인 평목 스님이 등장해 조신에게 죽임을 당하는 것을 급작스럽게 처리하는 중반부의 성급한 극적 리듬이나 달례의 정혼자인 모레아손 화랑 일행이 후반부에 등장해 본격적인 추격전을 벌일 때에도 어딘가 모르게 어설프고 인위적으로 극적 구성을 꾸미는 걸 감추지 못하는 허술한 완성도를 보완할 만큼, 이 영화만의 특이한 기운이다. 모든 욕망의 대상 달례(최은희) 숭고한 대상으로서의 자연과 짝을 이루는 것은 달례를 연기한 배우 최은희의 존재감이다. 이 영화에서 최은희는 처음부터 스스럼없이 조신을 연모하는 자신의 욕망을 고백하고 기꺼이 그를 따라 신분을 버린 사랑의 도주를 감행하며 조신의 곁에서 평범한 아내로 그를 보필하면서 아름다운 존재 그 상태로 남아 있다. 조신과의 도주 중간에 조신이 너구리굴에 불을 내어 너구리들을 쫓아내고 그 굴에서 쉬려 할 때 달례는 굴에서 도망쳐 나온 새끼 너구리들을 보며 “아유, 가엾어라.”라고 탄식한다. 달례에게 흑심을 품은 평목을 조신이 죽인 것을 알았을 때도 달례는 그런 조신을 책망한다. 결정적으로 본래의 성정을 잃고 조신이 느닷없이 난폭하게 굴 때조차도 그런 조신을 품어준다. 요컨대 달례는 범접할 수 없고 웅장하며 심술궂은 자연이 아니라 언제나 어머니처럼 생육 번성이 가능한 자연과 비슷한 존재로 누구에게나 욕망을 받는 대상이다. 달례는 모레아손의 부서진 욕망의 대상이며 평목의 욕망을 받았고 심지어 연못가에서 목욕을 하다 (역시 느닷없이 나타난) 불한당의 습격을 받는다. 조신은 그들 가운데 유일하게 달례로부터 욕망의 화답을 받은 인물이지만 그 때문에 결국 자신을 쫓아온 모레아손에게 죽임을 당한다. 모레아손의 칼이 허공을 가르는 순간, 조신은 꿈에서 깨어나고 죽음과 삶이 인접한 경계에서 깨달음을 얻는다. 조신의 욕망과 좌절은 당시 신상옥이 처해 있던 상황을 간접적으로 유추하게 한다. 신상옥은 선배 영화인 김학성 촬영감독의 부인인 최은희와 사랑에 빠졌고 그들의 사랑은 사회적 지탄을 받았다. 신상옥이 최은희를 주연시켜 만든 두 번째 영화 < 코리아 >는 충무로 영화인들이 후반 작업을 거부해 곤란을 겪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꿈>에는 욕망에 따른 과보를 치른다는 것에 대한 무의식적 두려움이 투사된 흔적으로서의 달뜬, 동시에 매혹적인 기운이 서투르지만 맹렬한 영화적 활기로 팽배해 있다. 인간으로서, 예술가로서 신상옥은 자신의 트라우마를 서슴없이 영화적 자양분으로 삼는 화면을 만들어낸다. 최은희는 신상옥이 연출한 그 화면 속에서 남자들의 그 비루하고 염치없는 욕망을 당당하게 취사 선택해 스스로 자족하며 존재하는 그런 아름다움을 드러낸다. <꿈>(신상옥, 1955) 영화보러가기 →
“내가 졌소. 종로 바닥을 떠나겠소.” 요즘 이렇게 대사를 썼다간 현실감각이 없는 시나리오 작가로 낙인찍히기에 십상이다. 임권택 감독의 액션활극영화 < 장군의 아들 >(1990)은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급습과 뒤통수치기가 난무하는 요즘 누아르 영화 속 건달들과 달리 이 영화 속 주먹들의 대결은 예를 갖춘다. 싸움을 걸 때는 “한판 붙읍시다”하며 도전장을 내민다. 대결에서 진 사람은 패배를 인정하고 물러난다. 아무리 못 돼 보이는 악당이라도 염치를 알고, 이긴 사람의 뒤를 노리지 않는다. 이긴 사람 또한 기가 꺾인 상대에게 모욕을 주지 않는다. 상대의 부하들에게 “병원에 빨리 모셔가라”고 큰 마음씨를 베풀기까지 한다. 양쪽 패거리를 포함해 구경꾼들이 싸움의 참관인이자 심판자다. 김두한( 박상민 )과 전라도 주먹 망치, 우미관 김만목 사장( 이해룡 )이 영입한 이또우 무사시와 쌍칼( 김승우 ), 김두한과 이또우 무사시, 하야시의 사주를 받은 김동회( 이일재 )와 왕십리파 왕막 등 영화 속 주먹들의 대결이 흥미로웠던 것도 그래서다. < 장군의 아들 >의 김두한은 싸우면서 성장한다. 어릴 때 부모를 잃고 고아가 돼 각설이 생활을 하다가 우미관패의 우두머리인 김기환의 눈에 띄어 극장 우미관에 들어갔으니 살아남기 위해 주먹을 써야만 했을 것이다(반면 영화 속 그의 친구는 책을 택했다). 그는 우미관패 조직원 둘, (우미관에 들어간 뒤 처음 상대하는) 전라도 주먹 망치, (우미관의 김만목 사장이 김기환 하나로는 하야시패에 대적할 수 없다고 판단해 영입한) 이또우 무사시, 유도 유단자인 마루오카 종로경찰서 경부, (하야시패가 영역을 넓히기 위해 돈을 주고 영입한) 김동회 등 약한 상대부터 강한 상대까지 차례로 맞붙는다. 모든 액션신에서 정일성 촬영감독의 촬영은 정교하다. 관객의 눈을 속이고 타격감을 강조하기 위해 클로즈업숏을 연달아 배치하는 보통의 액션영화와 달리 <장군의 아들>은 롱테이크숏과 클로즈업숏 그리고 부감숏을 번갈아 활용하는 게 인상적이다. 두 사내가 서로 노려본 채 빙빙 돌며 기 싸움을 하는 롱숏(어떤 장면에서는 부감숏)은 매우 긴장감이 넘친다. 서부영화에서 총잡이들이 권총을 꺼내기 직전의 그 긴장감처럼 말이다. 이 롱숏 다음 장면으로 (서로에게 주먹을 주고받는) 클로즈업숏이 이어지니 긴장감과 속도감 모두 살아난다. <장군의 아들>은 컷을 잘게 잘라야, 컷의 사이즈가 타이트해야 영화의 속도가 빠른 게 아니라는 가르침을 준다(특히, 김동회가 왕십리파를 접수하는 액션시퀀스에서 김동회의 날렵함을 강조하기 위해 컷 분할 없이 담아낸 달리숏은 대체 어떻게 찍었을까 궁금하다). 액션신이 생생하게 설계되는데 세트가 한몫했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재현해야 하고, 세트를 만들더라도 넓은 공간을 활용할 수 없는 지금과 달리 종로 시장거리, 우미관, 혼마찌(충무로) 거리, 술집 등 < 장군의 아들 >의 주요 공간 대부분 세트로 구현돼 낯설고, 그래서 신선하다(이 영화가 세트영화의 부활을 알렸다는 평가를 받은 것도 이 때문이다). <장군의 아들> 속 공간과 관련해 몇 번을 봐도 울컥하는 장면이 몇 있다. 신마적( 김형일 )이 패거리들과 함께 술에 취한 채 혼마찌의 술집으로 가는 길에 <봉선화> 노래를 단체로 부르는 영화의 후반부다. “울 밑에선 봉선화야/네 모양이 처량하다 길고 긴 날 여름철에/아름답게 꽃필 적에 어여쁘신 아가씨들/너를 반겨 놀았도다~.” 화면의 왼쪽부터 오른쪽으로 터벅터벅 걸어갈 때만 해도 그들은 하야시패와 맞붙어 봉변을 당할 줄 몰랐을 것이다. 술집에서 하야시패와 맞붙다가 봉변을 당한 그들 중 한 명이 종로에 있는 김두한에게 이 사실을 알린다. 김두한이 신마적을 구하기 위해 신마적 일행이 걸어간 길의 반대 방향(그러니까 화면의 오른쪽(종로)에서 왼쪽(혼마찌))으로 달린다. 이 장면은 단 몇 컷만으로도 김두한의 절박함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어 숨이 턱턱 막힌다. 정일성 촬영감독의 촬영이 경제적이면서도 경이로운 순간이다. 이밖에도 김두한이 우미관에 처음 들어갔을 때 본 무성영화는 애절하고, 김두한이 화자( 방은희 )와 함께 절에서 데이트를 하는 장면은 쓸쓸하다. 누구는 < 장군의 아들2 >가 더 좋았다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내게는 이 장면들만으로도 < 장군의 아들 >이 충분히 아름다운 액션활극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