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신랑
- 감독
- 신기
- 제작년도
- 1965
- 출연
- 금매, 가준웅, 구위, 유청, 정향
1. 솔직히 말하자면 내가 한국고전영화를 보는 이유는 전부 비디오에세이 만들기와 관련이 있다. 한국고전영화를 ‘본다’기보다 다음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기 위해 ‘탐색’하는 것이다. 누가 들으면 ‘비디오에세이깨나 만드나 보다’라고 생각하겠지만, 부끄럽게도 그건 아니다. 재작년에 어도비 프리미어 프로그램을 구입한 이후 계속해서 결과물들을 산출하고 있기는 하나 누군가와 함께하는 작업이 아닌 이상 혼자 하는 것들은 다 재미를 위해 하는 것일 뿐이어서 그냥 폴더에 담아두기만 한다.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기 위한 목적으로 영화를 본다’라고 얘기하는 지점에서 이미 나는 ‘땡’ 소리를 들을 수도 있다. 수년 전 미디액트에서 ‘오디오비주얼크리틱’을 가르쳐주신 선생님들이 들으면 혀를 차실 얘기이기 때문이다. 영상을 영상으로서 비평하는 시도로서 ‘오디오비주얼크리틱’이 의미 있는 작업이 되려면 역시나 그 작업의 최종 목적지는 여러 영상을 짜깁기해서 그럴듯하게 붙여놓고 거기에 어울리는 음악을 깔아서 산출하는 mp4 파일이 아니라, 상대하고 있는 대상(물)과 그 대상(물)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적극적인 이해와 적절한 통찰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그 자체로 매혹적인 또 하나의 작품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시도여야 하기 때문이다. 즉, 영화를 이것저것 보다가 괜찮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비디오에세이를 만든다고 하면 그건 자연스러운 흐름이지만,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겠다고 작정하고 그것에 걸맞은 영상을 탐색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행위이다. 하지만 그 수업에서 선생님들은 분명 이렇게 말씀하시기도 했다. ‘비디오에세이’를 만들기 위해서라도 안 보던 고전영화들을 본다면, 그것 자체로도 좋은 일이라고. 사실 ‘한국고전영화’야말로 아도르노가 정리한 대로 “문화적으로 형성된 특수한 대상에 대한 고찰”1)이라고 하는 에세이적 방법론의 대상으로 삼기에 가장 좋은 소재다. 여튼 그런 불순한 목적으로 한국고전영화를 보는데, 최근에 관심을 갖고 있는 소재를 말하기 위해 내가 만들다가 만 한 편의 비디오에세이 <60년대 샐러리맨의 하루>를 말해보려 한다. 1959년작 < 여사장 >(한형모)부터 < 구봉서의 벼락부자 >(김수용, 1961), < 삼등과장 >(이봉래, 1961), < 월급쟁이 >(이봉래, 1962), < 골목안 풍경 >(박종호, 1962), < 두고만 보세요 >(김봉환, 1964), < 떠날 때는 말없이 >(김기덕, 1964), < 회전의자 >(이형표, 1966), < 억울하면 출세하라 >(심우섭, 1969) 등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중반 사이의 영화에서 직장인들의 출퇴근, 회의, 월급날, 신입사원 채용, 면접, 점심시간, 사내연애, 근무 중 농땡이 부리기, 상사의 꾸지람 등의 장면들을 골라 붙여 만든 것이다. 부끄럽게도 어느 정도 만들고 나서 조금은 재밌지 않나 하는 생각에 몇 명에게는 보여주고 반응을 살핀 적도 있었다. 그중 몇 명으로부터는 냉철한 피드백을 받아 수정하려는 생각으로 처박아 두었다. 이 <60년대 샐러리맨의 하루>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 오발탄 >(유현목, 1961)을 갖다 쓴 부분인데, 바로 김진규의 직장 동료인 여성 타이피스트가 등장하는 두 장면이 그것이다. 첫 번째 장면은 계리사사무소에서 상사가 자리를 비운 사이 타이피스트가 분첩을 꺼내 찍어 바르며 “육시랄하게 시간도 안 가지”라고 말하고 김진규에게 상사 없을 때나 쉬지 언제 쉬냐고 말하는 장면이다. 그런데 곧바로 상사가 돌아오는 소리가 들려 타이피스트는 후다닥 분첩을 집어넣고 다시 바쁜 손동작으로 타자기를 친다. 두 번째 장면은 이들이 퇴근하는 장면으로, 타이피스트가 “월급도 받았는데 집에 그냥 가냐”며 김진규를 낚으려고 하다 김진규가 “월급을 아내에게 주는 것도 멋진 일이다”며 거절하니 “흥, 재~미없어”하고 사라지는 장면이다. 타이피스트가 쌩하고 사라지자 혼자 남은 김진규는 이가 아파 볼을 만지면서 제 갈 길을 가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노잼인증’을 당해 겸연쩍은 느낌으로 빠르게 자리를 뜨는 느낌으로도 보인다. 원작을 읽지 않아서 이 장면이 원작에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김진규 같은, 즉 세상의 모든 고민을 다 짊어진 것 같은 매사 진지하기만 한 직장 동료에게 어떻게도 손쓸 수 없는 더없이 적절한 공격 타이밍으로 촌철살인의 일갈을 할 수 있는 젊은이 특유의 여유랄까, 매력을 느낄 수 있는 <오발탄>의 보석 같은 장면이었다. 심지어 ‘육시랄’이라는 욕설의 처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마치 그 대사엔 욕설이라곤 전혀 없었던 것 같은 느낌을 받을 정도였다. 그런데 이 외의 영화들에서도 사무공간을 배경으로 하는 장면에서 김숙일, 도금봉, 최지희 같은 여배우나 이름을 알 수 없는 단역 여배우들이 김승호나 김희갑, 주선태 같은 문제적 상사들에게 속 시원한 한마디를 날리는 모습은 꽤나 자주 볼 수 있었고, 대사뿐 아니라 존재 자체로도 전통적인 규범이나 집단으로부터 자유로운 전후 세대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일군의 여배우들 즉, 노경희, 양미희, 나애심, 안나영, 김의향 같은 배우들의 활약도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이중에 < 서울의 휴일 >(이용민, 1956)과 < 화심 >(신경균, 1958) 등에서 너무나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준 양미희의 팬을 자처하며 그녀의 필모를 깨기 위해 보게 됐던 홍성기 감독의 < 열애 >(1955)에서, 나는 한국고전영화에 대한 새로운 고찰의 국면을 만나게 되었다. 2. 한국고전영화를 가끔이지만 조금씩 보다 보니 어느 순간 한국고전영화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을 느낀다. 영화를 보는 데에 익숙하고 안 하고 할 게 뭐가 있냐고 반문할 수도 있지만 나는 내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한국고전영화를 픽션으로서 이해하기 어렵다고 보는 쪽이다. 바꿔 말하면, 한국고전영화에서 내가 목격하는 ‘과거의 한국’이나 ‘과거의 한국인’은 내가 아는 현실의 그것과는 너무 다르거나, 반대로 내가 아는 현실의 그것들을 너무 적나라하게 드러내기 때문에 이들의 작용이 픽션으로 느껴지기보다는 ‘영화’의 외피를 쓴 무의식의 덩어리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잘 찍고 내러티브가 깔끔하게 떨어지는 영화를 볼 때도 뭔가 뒷맛이 씁쓸하고, 내러티브가 산만하고 완성하기에 급급했다 싶은 영화를 볼 때는 오히려 마음이 편해진다. 그런 면에서 한국고전영화는 내게 있어 재미가 있다/없다, 이해가 잘 된다/안 된다 하는 문제가 아니라 충분히 익숙한가 아닌가의 단순한 문제였던 것 같다. 다만 ‘익숙해진다’는 것은 한국고전영화의 ‘디폴트값’을 알아챘다는 뜻이어서, 익숙해지게 되면 익숙한 것들 사이에서 특이한 것을 구분할 수 있게 된다. 그것이 왜 특이하게 여겨질까를 생각하는 과정에서 가끔 의외의 재미가 찾아오기도 한다. 홍성기 감독의 <열애>를 본 후, 나는 내가 배우 ‘석금성’과 ‘복혜숙’을 혼동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열애>에 나오는 복혜숙은 출연뿐 아니라 영화의 시작과 끝에 등장하는 인상적인 내레이션을 담당하고 있기도 한데, 그 목소리가 석금성의 목소리인 걸로 착각이 되었던지 나는 <열애>의 그 인물을 한참이 지난 뒤까지도 ‘석금성’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사실 영화나 드라마를 보다가 닮은 꼴 배우를 헷갈리는 일은 흔한 일이다. ‘닮았다’ ‘안 닮았다’라고 하는 조형적 유사성에 근거한 판단조차 개인의 이미지 경험이나 레퍼런스에 영향받기 때문에 심지어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전혀 닮지 않은 배우들도 가끔은 헷갈림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복혜숙과 석금성은 젊은 시절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동그란 얼굴에 눈이 새까맣고, 항상 깔끔하게 뒤로 빗어넘긴 머리를 하고 있는 게 약간 비슷하다. 심지어 음성도 걸걸하면서 중저음인 게 비슷하다. 하지만 내가 헷갈린 건 그 둘이 외양과 음성이 비슷해서가 아니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복혜숙’이란 배우가 있고 ‘석금성’이란 배우가 있는 것은 알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영화에서 할머니 역으로 많이 등장하는 그 사람을 나는 ‘한 명의 사람’으로 뭉뚱그려 생각했었다. 그 사람이 어떨 때는 착하게 나오고(복혜숙), 어떨 땐 고약하게도 나온다고(석금성) 생각했던 것이다. 왼쪽은 24세의 석금성이고 오른쪽은 26세의 복혜숙의 모습이다. 둘 다 토월회에 몸담고 있던 시절. 사진 출처: 석금성-1930년 1월 8일 자 《조선일보》, 복혜숙-1931년 8월 9일 자 《동아일보》 복혜숙과 석금성을 빠르게 구별하기 위해 찾은 김남석의 『조선의 여배우들』(국학자료원, 2006)은 연배마저 비슷한(복혜숙이 1904년생, 석금성이 1907년생으로 세 살 차이) 이 두 사람이 토월회라는 신극단체에서 함께 활동했던 인연이 있음을 알려주었다. 김수용 감독은 복혜숙과 석금성이 1957년 여름 < 배뱅이굿 >을 찍기 위해 충청도 온양에 머물렀을 때 사이가 굉장히 나빠 각기 다른 민박을 쓰면서 서로를 비방했다고 썼다. 2) 석금성은 워낙 동료 연예인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었고 3) , 실제로 모 배우가 석금성의 거친 성격을 증언하기도 했다고 영화사연구자 L선생님으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복혜숙이 남긴 ‘나의 교유록(交遊錄)’ 4) 을 보면 복혜숙의 성격도 만만치 않다. 토월회에서 활동하다 영화계에 들어왔고 영화에선 둘 다 주로 할머니 역을 했던 공통점도 있으니 거의 지척에서 서로를 봤을 텐데 사이가 안 좋았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니 두 배우에 대한 흥미가 더 커졌다. 3. 1904년생 복혜숙과 1907년생 석금성은 각각 10대 후반에 신극 단체인 토월회에 입단해 타고난 끼를 바탕으로 각각 인기 여배우로 거듭났지만 토월회 입단 전후로 기생 활동을 할 정도로 당시의 불안정한 쇼비즈니스계를 통과하고 있었다. 5) 20~30대 시절 영화에 단발적으로 출연했지만(복혜숙은 < 농중조 >(1926), 석금성은 < 심청 >(1937)) 본격적으로 영화를 시작한 것은 40대 전후의 나이였다(복혜숙은 < 수업료 >(최인규, 1940)에서 영달이 할머니로, 석금성은 < 마음의 고향 >(윤용규, 1949)에서 최은희 어머니로). 이들보다 불과 10살가량이 어린 문예봉, 김신재, 김소영 등이 당시 조선에 형성되기 시작하던 영화 저널리즘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현숙하고 정갈한 이미지로 전시 체제 프로파간다의 얼굴이 되어가는 동안, 복혜숙과 석금성은 현실 세계에서도 영화 속에서도 이미 ‘여성’보다는 ‘모성’을 수행하는 중이었다. 복혜숙은 <수업료>에 영달이 할머니로 출연했을 때 고작 37세였다. 그녀의 당시 나이를 알고 <수업료>를 다시 봤더니 그냥 할머니 분장한 젊은이여서 웃음이 절로 나왔다. 바로 그다음에 출연한 < 반도의 봄 >(이병일, 1941)에서만 해도 그는 치마 정장에 하이힐을 신고 라디오를 할부로 구매하는 활달한 커리어우먼으로 등장하는데, 그 후로 맡은 역할은 거의 다 온정적인 할머니나 어머니, 유모, 식모 같은 것들이었다. 마찬가지로 석금성은 <마음의 고향>에서 최은희의 완고한 친정어머니로 등장하는데 그 이후 < 그 여자의 일생 >(김한일, 1957), < 자유결혼 >(이병일, 1958), < 촌색씨 >(박영환, 1958) 등에서 표독스러울 정도의 거친 모성을 연기하거나 아예 무당(< 김약국의 딸들 >(유현목, 1963)이나 < 강화도령 >(신상옥, 1963), < 만고강산 >(최인현, 1968)) 같은 강렬한 역을 연기했다. 영화계에 본격적으로 들어온 이후 연거푸 전형적인 역할에만 캐스팅되었기 때문에 이들의 출중한 연기력은 안타깝게도 개점휴업한 상태로 있을 수밖에 없었다. 6) 내가 이들을 혼동한 데에는 연달아 비슷한 역(온정적인 어머니냐 완고한 어머니냐의 차이가 있을 뿐)으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연유도 있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실생활에서 두 사람이 사이가 좋지 않았다면 그건 두 사람이 사람들과 교류하는 방식의 차이에서 기인했을 수 있을 것 같다. 복혜숙은 자신이 ‘연기’를 좋아하고 원한다는 사실을 일찍부터 알았기 때문에 연기를 지속하기 위해 기생 활동이나 다방 마담을 하는 것도 마다치 않았고 7) 대한영화배우협회, 성우협회 회장을 맡는 등 영화계 대표 ‘인싸’였다. 심지어 임화수도 복혜숙 앞에서는 꼼짝을 못 했다고. 8) 하지만 석금성은 데뷔 전 기생 이력을 잘 드러내지 않으려 하거나 9) 연예인 친구보다는 평범한 주부들이나 동네 부인들과 주로 어울리다가 흔히 말하는 '주부도박단' 사건에 두 번이나 연루되는 등의 사정으로 봤을 때 연예계에서는 전형적인 '아싸'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오부자>(권영순, 1958)에서 55세의 나이로 10대 처녀 시절을 연기하고 있는 복혜숙. 하지만 이 둘은 오히려 생애 말기에 연기자로서 활발한 모습을 보였다는 점에서 또 다시 공통분모를 형성한다. 둘은 토월회 50주년 기념행사에 나란히 참여해 연극 <이대감 망할대감> 공연을 같이 하기도 했고, 10) 복혜숙은 79세에 사망하기 전까지 약 10여 년간, 석금성은 89세에 사망하기 전까지 약 10여 년간 활발하게 활동했다. 76세의 나이로 < 사랑의 조건 >(김수용, 1979)에서 한겨울 눈밭 한가운데서 연기를 펼친 복혜숙이나, 80세 넘어서 출연한 TV문학관 <사평역>, KBS 설특집 드라마 <너도 늙어봐라>, SBS 드라마 <분례기>,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 등에서 엄청난 존재감과 명연기를 선보인 석금성을 보면 생애 마지막 나날까지도 꾸준한 자기 관리로 일을 해나갔던 커리어우먼으로서의 모습에 존경을 바치지 않을 수 없다. 유작인 SBS 드라마 <친애하는 기타 여러분>(1993)에 출연한 석금성의 모습. 4. "악역을 많이 맡아 욕을 무던히 먹어서인지 오래 살지요? 이제까지 살면서 한숨도 많이 쉬고 눈물도 많이 흘렸지만 이제는 오늘 일은 오늘, 내일 일은 내일 하는 식으로 산답니다.” 1983년의 인터뷰에서 석금성은 이렇게 말했다. 덧붙여 “지난해에 선배인 복혜숙 씨마저 타계하는 바람에 인생이 덧없다는 생각이 든다”고도 말했다. 복혜숙은 72년의 인터뷰에서 토월회의 가장 큰 성과로 1929년에 공연했던 <아리랑고개>를 언급하며 “처녀 봉이(석금성)가 일본인에게 농토를 빼앗긴 아버지를 따라 괴나리 봇짐을 들고 간도로 가면서 사랑하는 총각과 이별하는 구슬픈 장면이 나오는 것인데, 석금성의 눈물을 따라 온 극장 안이 울음바다가 됐으며 임검경관마저 같이 울었다”고 회고했다. 11) 이는 두 사람이 서로를 공식적으로 언급한 흔적으로, 내가 찾은 바로는 이 두 개가 유일한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도 한 장 발견했다. 《동아일보》 1981년 5월 14일 자 11면. 함께 찍었다기보다 단순히 한 공간에서 찍힌 사진 같기도 하다. 복혜숙과 석금성은 복혜숙의 남편인 김성진을 사이에 두고 카메라를 바라보고 있다. 언제 찍은 사진인지는 미지수이지만 아마도 1973년에 있었던 토월회 50주년 행사 때가 아니었을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토월회에서 데뷔했다는 것 말고는 사실상 별다른 연결고리가 없는 두 사람을 무리하게 묶어서 생각을 한다는 생각도 했지만 내가 두 사람의 행적을 파악하며 느낀 건, 진부하게도 ‘마지막에 살아남는 자가 승자’라는 문구이다. 두 사람은 그 어느 여배우보다도 길게 살았고, 길게 연기했다. 올해 40대에 접어들어 ‘위기의 중년’을 체감하는 나로서는 그 어떤 누구의 조언보다도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오는 점이 아닐 수 없다. 내가 생각한 다음 비디오에세이에 대한 계획은 우선 여기까지이다. ※ '시청각연구인'이라는 바이라인에 대한 추가 설명: 지난해까지는 원고 쓸 일이 있으면 '한국영상자료원 직원'이라는 직함을 썼고 그전까지는 항상 '중앙대 대학원 박사과정생'이라는 표현을 썼었다. 그런데 지금은 한국영상자료원 직원도 아니고 중앙대 박사과정생으로서 뭔가를 수행하고 있지도 않아 이 원고를 다 써놓고 '영화연구자'라는 표현을 이름 옆에 달아두고는 있었지만 뭔가 찝찝했다. '연구자'라고 하는 표현은 우리나라에서는 특히 영어의 researcher가 아닌 scholar와 거의 동의어로 쓰이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쓰기 부담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영상자료원 4층 사무실의 복사기 앞에서 출력물이 나오길 기다리며 뭔가를 심사숙고 하고 있는 김기호 차장님을 봤다. 김기호 차장님은 복원팀에서 오랜 기간 아키비스트로 일했고 지금은 학예연구팀에서 조금은 다른 연구들을 수행하고 있다(고 알고 있다. 내가 팀을 떠났기 때문에 자세한 건 모른다.) 순간 그 어떤 연구자보다 자신의 일에 대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성찰하는 김기호 차장님 같은 사람이야말로 ( KOFA Issue paper vol. 1 , vol. 2 ) '연구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고, 대학원 따위(표준국어대사전에서 '따위'를 검색했을 때 나오는 1번, 2번 용례에 해당. 3번 아님)의 제도적 과정을 거치지 않았다고 해서 저 사람을 '연구자'라고 부르지 못할 일은 없기는 하나 '연구자'보다 그럴듯한 표현이 없을까 하다가 '연구인'이라는 단어를 생각하고 거기서 더 나아가 '시청각연구인'이라는 말을 생각하게 됐다. 내 주변에는 확실히 '박사'라고 하는 학계에서 인증한 소위 '메이카'를 갖고 계신 연구자 선배님들도 많지만 내가 그들을 존경한다면 그건 '메이카'를 갖고 있어서가 아니라 그들이 항상 꾸준히 우리의 삶과 사회가 노출하는 모순들을 자신의 연구영역 안에서 이리저리 관찰하고 연구하기를 게을리하지 않기 때문이다. 아직은 '메이카'를 취득하지 못한 때문도 있지만 일단 나는 김기호 차장님 같은 '시청각연구인'을 표방하고자 한다. 그리고 그 말에 부합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앞으로도 계속 노력해보고자 한다. *** 1) Translated from the German by R. Hullot-Kentor and F. Will, 'The Essay as Form', New German Critique , No. 32. (Spring-Summer, 1984), p.151 2) 김수용, '드라마 분위기 설정해가는 역광 같은 배우, 복혜숙', "한국의 여배우들",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공식블로그, 2014. (https://siwff.tistory.com/503) 3) '77세의 원로여우 석금성 씨 20년 만에 <백구야...>로 컴백하면서 또 악역', 《경향신문》, 1983년 1월 29일 자. 4) 복혜숙이 1981년 4월부터 두 달에 걸쳐 《동아일보》에 연재한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5) 석금성은 데뷔 전 기생이었고 데뷔 후에는 권번생활을 하지 않았으나, 복혜숙은 오히려 데뷔 후에 이름이 알려진 것을 이용해 권번에 적을 두고 기생 활동 및 기생 교육 활동을 했다. 복혜숙, '나의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6> 복혜숙⑯: 권번시절', 《동아일보》 1981년 5월 11일 자; 김정은, 「일제시대 기생과 여배우의 관계: 대표적인 여배우를 중심으로」, 숙명여대 석사학위논문, 2007.; 이승연, 송지영, 「일제시대 인천권번에 대한 연구: 용동권번을 중심으로」, 『인천학 연구』 6, 2007.2. 6) 약간 예외적인 모습을 보여준 영화도 있기는 했다. <오부자>(권영순, 1958)에서 복혜숙은 55세의 나이에 10대 처녀 시절을 연기했는데 어딜 가나 사람들을 웃겼다는 복혜숙의 진가가 이 영화에서 조금이지만 발휘되고 있다. 석금성은 <고려장>(김기영, 1963)에서 그나마 전형적인 표독스러운 계모를 탈피한 연기를 할 수 있었는데, 그의 강렬한 이목구비가 오히려 이런 톤 다운된 역할에 잘 어울리는 것으로 봤을 때, 그가 다양한 역할을 맡지 못했다는 점이 정말 안타깝다. 7) 복혜숙은 권번 활동이 적잖은 돈벌이가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최성해, 이월화, 김소진 등 토월회 멤버들과 함께 권번을 드나들었으며, 권번에서 돈을 벌어 연극을 하자고 의기투합했었다고 한다. 복혜숙은 특히 권번에서 기생들에게 일본어와 현대무용을 가르치기도 하고 후에 판소리 명창이 된 박녹주와 콤비를 이뤄 손님들을 웃겼다고 한다. 복혜숙,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2> 초창기의 여배우 복혜숙⑫: 초창기의 여배우', 《동아일보》 1981년 5월 1일 자;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86> 복혜숙⑯: 권번시절', 《동아일보》 1981년 5월 11일자. 8) 복혜숙, '나의 교유록 - 원로여류가 엮는 회고 <96> 복혜숙 26: UN군 환영 연극', 《동아일보》 1981년 5월 25일 자. 9) 석금성은 1930년대의 언론 인터뷰에서 토월회 배우 데뷔 전 이력을 '개인 사정'이라고 표현하는 정도였고, 언론들도 '쓰라린 세파에 몸을 적시고 있었던' 시기 정도로 완곡하게 표현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선지 그녀의 생애 후반기 인터뷰들은 토월회 입단 전에 그녀가 진명고녀 졸업생이었다고 쓰고 있다. '대리석 같은 여인 - 눈물을 흘리는 역이 적역, 신흥 토월회 스타편 - 석금성', 《조선일보》 1930년 1월 8일 자; '석금성 여사 - 처녀와 귀부인이 적역', 《동아일보》 1931년 6월 17일 자; '77세의 원로여우 석금성 씨 20년 만에 <백구야...>로 컴백하면서 또 악역', 《경향신문》, 1983년 1월 29일 자. 10) '토월회 창립 50돌 기념 공연', 《조선일보》 1973년 10월 23일 자. 11) '내가 겪은 20세기 (25) 복혜숙 여사', 《경향신문》, 1972년 6월 23일 자.
1. “'나의 한국고전영화'(가제)라는 주제로 (…) 한국고전영화 대해 애정을 쏟는 부분이나 관심을 갖게 된 지점 등 한국고전영화에 대한 다양한 시선의 이야기를 KMDb 에 싣고자 합니다. (…) 조금 더 개인적인 에세이 형식의 글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원고 청탁은 덜컥 받았지만―KMDb에 글을 써보는 게 소망이었다.―빈 문서에 주제 적어두니 정말 불안하고 의아해졌다. ‘나의’는 불안하게 만들었고, ‘한국고전영화’는 의아하게 만들었다. 먼저 의아함은 ‘한국고전영화’라는 단어의 모호함과 관련된다. 비슷한 이름의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Classical Hollywood Cinema’가 특정 역사적 시기나 미학 체계를 지칭하는 것과 달리, 1) ‘한국고전영화’는 용어로 정립되지 않은 것 같다. 가령 영상자료원 운영 유튜브 채널 [한국고전영화 Korean Classic Film]에는 많은 영화가 업로드 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 근로의 끝에는 가난이 없다 〉(이규설, 1920년대 추정), 〈 귀로 〉(이만희, 1967), 〈 미지왕 〉(김용태, 1996)도 있다. 이 세 편 영화를 하나로 묶는 역사적 시기와 미학 체계를 찾는 건 어려워 보인다. 차라리 조선영화, 남한영화, K영화… 이런 식이라도 따로 지칭하는 게 더 실재에 가까울수도 있을 것 같고. 아무튼 ‘한국고전영화’를 모호하게 사용하는 예는 논문, 기사 어디에서도 비근히 찾아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한국고전영화’는 그냥 이렇게 사용되는 것 같다. “여러분들이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졌던 영화, 여러분들의 부모님이나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가 봤던 영화, 한마디로 옛날영화(김홍준, 2008)” 2) 당연하지만 ‘한국고전영화’를 “한마디로 옛날 영화”라고 해서 의아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오히려 더 의아해진다. 올해 태어난 내 친구의 아들에게는 〈 범죄도시 3 〉이 한국고전영화가 되는 걸까? ‘한국고전영화’를 ‘한국옛날영화’로 넘어간다 해도, ‘나의’라는 수식어는 나를 불안하게 한다.‘나의 한국옛날영화’ 이 말은 나를 불안하게 한다. 특히 “한마디로 옛날영화”라는 말을 하필 김홍준으로부터 찾았다는 것은 더욱 더. 시간을 조금 돌려보자. 2021년 나는 ‘오오극장 관객프로그래머 영화제-오래된 미래’에 김홍준의 〈나의 한국영화〉 연작을 초청했다. (아마도 〈나의 한국영화〉에서 따왔지 않을까 하는) ‘나의 한국고전영화’라는 주제를 받자마자, 나는 그 영화와 그때 보낸 추천사를 떠올리고 있었다. 비디오 대여점이 사라지고 있었고, 시네마테크 같은 근사한 이름들은 멀게 느꼈던, ‘굿다운로더’라는 이름이 낯설었던 과거. (합법 영역이 욕망을 좌절시켰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웹하드를 통해 한국고전영화-사실 거의 모든 영화-를 다운로드 하고, 봤다. 다른 영화 파일과 달리, 한국고전영화는 구성이 유달리 이상했는데 꼭 어떤 사람의 해설이 영화 앞에 붙어있었고, 때때로 출연진과의 짧은 대담이 이어지기도 했다. 뒤늦게 알았다만 그 파일은 ‘한국영화걸작선’을 녹화한 것이었고, 해설자는 김홍준이라는 사람이었다. / 〈나의 한국영화〉는 김홍준이 한국영화걸작선 프로그램 진행자로서 비디오를 획득할 수 있었던 위치를 활용해 만든, (모든 에피소드에 해당되지는 않지만) ‘오디오비쥬얼에세이’ 작품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의 한국영화>를 시네필 1세대-문화원 세대-가 바라본 ‘한국영화’, 또 오디오비쥬얼에세이의 아직 도달하지 못한 가능성이 담겨있는 작품이라 소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이상하고 천진하게 들리겠지만, 나는 〈나의 한국영화〉가 저작권을 클리어하지 않고 제작되었다는 점에 핵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의 한국영화’라는 간단한 이름처럼, 그저 대면하고픈 작은 욕구에서 관점의 순수성이, 그리고 그로부터 새로운 형식이 가능했던 거라 믿는다. / 〈나의 한국영화: 에피소드 4 키노99〉는 유튜브에 업로드 되어 있다. 저작권 문제로 마지막 배경음악은 제거 되어있는데, 제거 된 노래의 이름은 ‘Je te veux’ 한국어로는 ‘당신을 원해요’다. 〈나의 한국영화〉의 첫 편 〈나의 한국영화1: My 충무로〉에서 김홍준은 〈 개벽 〉(임권택, 1992)에 엑스트라로 출연했던 기억, 〈 서편제 〉의 마지막 장면에 자신의 딸이 출연했던 것, 〈어느 여배우의 고백〉과 충무로 활동 경력을 내레이션 한다. 이런 맥락에서 ‘나의’는 화자가 그 피수식어와 맺고 있는 삶의 관계를 함축하는 수식어라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태어나기도 전에 만들어진 영화”인 한국옛날영화에 ‘나의’라는 수식어를 붙인 주제로는 아무런 글을 쓸 수 없을 것 같았고, 급기야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의+한국고전영화 = 불안+의아함 = 포기… 임재철: 기본적으로 세계 어느 나라나 자국영화에 대해 냉담하다. 미국을 제외하면 거의 그렇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그건 자국영화가 자국어를 사용해서 그렇다. 그걸 나는 ‘영화는 외국어다’라는 명제를 써서 설명하는데, 그게 문자 그대로 영화가 외국어여야 한다는 게 아니라 영화는 외국어처럼 쉽게 포착이 안 되는 게 본질이라는 거다. 예를 들어 한국 영화 보는 경우엔 우리 현실에 안 맞다 거나 연기가 서툰 것을 굉장히 빨리 포착한다. 영화라는 건 우리가 가볼 수 없는 곳, 우리가 막연히 몽상하는 것을 보여줄 수 있는 점이 있어서 사람들을 매혹시키는 건데 3) 정성일: 영화는 보지 말라고 하니까 더 매혹적이고, 힘을 얻는 것이다, 문학도 학교에서 가르치니까 찾는 사람이 없는데, 왜 영화를 벌써 박물관으로 보내려 하느냐, 그런 얘기였다. 지금 영화는 공식문화가 돼버려, 매력적인 대상이 되기엔 힘이 부족한 것 같다. / 김홍준: 매혹과 열정을 누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첫째 옛날 한국영화를 수단방법 가리지 말고 봐라. 모르는 거니까, 흥분할 수 있다. 둘째. 제도교육으로 배우려 하지 말아라. 4) 그렇게 원고를 회피하다가 영화평론가 임재철의 인터뷰를 읽었다. 그리고 정성일·김홍준의 좌담을 떠올리고 포개어보았다. 임재철에게 ‘영화는 외국어’라서, 분명해서가 아니라 무언가 불분명한 점이 있어서 매혹적이다. 그래서 “기본적으로 세계 어느 나라나 자국영화에 냉담하다 5) 정성일·김홍준의 문제의식도 유사하게 읽을 수 있다. 그들은 공식문화가 된 이후에 영화는 매력을 잃었다고 말한다. 물론 임재철, 정성일·김홍준이 겨냥하는 지점에 차이는 있다. 임재철은 스크린 내 요소들의 익숙함이 매력을 저감시키는 점을, 정성일·김홍준은 스크린을 접하기 이전 정보의 과다함이 순수한 체험을 방해한다는 점을 말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표면적인 연상으로 두 인터뷰를 포개어보자. 영화는 외국어라서 흥미롭다(임재철) 그런데 공식 교육에서 외국어를 너무 가르치곤 한다. 그러므로 오히려 흥미로운 건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는 옛 우리말이다(김홍준)? 실로 옛 우리말은 지금의 우리말보다 불분명하다. 훈민정음의 유명한 구절을 안다면 들리는 것과 써진 것을 함께 떠올릴 수 있지만, 그냥 음성만 듣고 있으면 꼭 외국어 같다. 그러다가도 ‘사람마다’라거나 ‘사람이니라’ 같은 부분에서는 또 익숙하여, 불분명하던 앞뒤의 말을 이어맞춰보곤 한다. 그리고 더 궁금증이 생긴다면 ‘우리말’이므로, 여러 방면으로 궁금증을 해결하기 편하다. 개인적인 관계는 아니지만 ‘나의 한국옛날영화’라며 말할 수 있는 고유한 점이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측면이다. ‘한국옛날영화’는 예나 지금이나 시네필의 관심 영역에서 벗어나 있어서 희귀한 ‘순수한 감상자’의 자리를 허용한다. 친절한 공급자도 적고, 알고리즘의 되먹임(KMDb가 알고리즘 기반 vod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기를…)도 없다. 그런데 영화 혹은 그 영화를 만든 사람에 궁금하거나 의아한 점이 생긴다면 그 영화·사람의 주변/관련 자료를 찾아볼 수 있다. 물론 2001년 정성일·김홍준이 ‘한국옛날영화’를 모르는 것으로 거명했을 때보다 한국영화사 연구는 훨씬 많이 누적되었다. 그럼에도 정전(canon) 이외의 작품은 소위, ‘작가’의 작품인 경우에도 아직 충분히 감상 되지 않았으며 해명되지 않았다. 한국옛날영화는 우리 영화팬에게 감상뿐만 아니라 역사적 해명을 충분히 시도해 봄직한 미개척의 공간이다. 박진희가 「한국고전영화 상대하기-나의 경우」에서 거명한 “역사가로서의 강력한 감상자”는, ‘옛 우리말’이라는 부분적인 분명함의 조건에서 비단 영화사 연구자/영상자료원 직원에게 한정되지 않는 모델이 될 수 있다. 6) 2. 이러한 맥락에서 내가 하나의 한국옛날영화감독에 접근하고 있는 것을 소개해보고 싶다. 이만희는 연구사의 첫머리부터 ‘숙명적 운명론자’로 논해지곤 했다. 사람들의 삶에는 조건과 한계가 정해져있고 그로부터 탈출은 불가능하다. 이만희의 주제는 반복되는 노동 혹은 일상의 갑갑함이었다. 이만희 또한 자신의 주제를 분명히 인지했던 것 같다. 그는 1973년 08월 「혼자이기 때문에」라는 짧은 글을 썼다. 이 글은 지금껏 인용되지 않은 게 의아할 정도로, 이만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조금 길게 인용해보자. (…) 우리 인간이 느끼는 여러가지 감정 중에서 맨 처음의 감정이나 또는 이 세상에 미련을 남기며 혼자 쓸쓸히 죽어가는 마지막의 감정은 바로 소외감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읍내의 극장에서 화려한 상류(上流) 생활을 그린 영화를 보고 어두운 논뚝길을 타박타박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가난한 시골처녀, 사방 1미터도 채 안되는 공간 속에 하루종일 앉아서 담배를 피는 아주머니, 똑같은 노선을 하루 종일 오락가락하는 버스 안내양, 분필가루 속에서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가르치던 것을 금년에도 반복해야 하는 여교사, 잠깐 한눈 팔면 무슨 짓을 할는지 모르는 개구장이들을 마치 간수처럼 하루종일 지켜야 하는 어머니,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공포와 기묘하게 폭발하고 말듯이 주체할 수 없는 생명력 사이에 끼어서 방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턱을 고이고 앉아 있는 여대생, 장성한 자식들과 출세한 남편은 제 볼일로 각기 바빠 값비싼 장신구와 함께 버려져 있는 중년부인… 등등, 여유가 있으면 있는대로 없으면 없는대로, 지식 수준이 높으면 높은대로 낮으면 낮은대로, 어디선가 남들은 풍족한 생활을 하며 쭉쭉 뻗어가고 있는데 자기 혼자만 이 아무 변화 없이 좁은 울타리 안에 갇혀 날로 퇴보하고 있는 것만 같은 소외감을 느낀다. (…) 나로서 가장 관심이 깊은 것은 바로 우리 인간들이 느끼는 이 소외감이다. 영화를 통해서 나는 인간들이 그 소외감을 어떻게 느끼며 어떻게 처리해 가는가를 그리려고 애써 왔다. 그러면서 내가 발견한 것은 소외감 그 자체는 명백한 인간의 조건일 뿐 선하지도 않고 악하지도 않다는 것이었다. 문제는 그것을 처리하는 방법에 따라서 선하게도 되고 악하게도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얻은 결론은, 자기의 소외감을 다른 사람을 통해서 해소시키려 할 때 무리가 생기고 악이 되기 쉽다는 것이었다. 아무리 보잘 것 없는 일일지라도 자기가 하는 「일」을 통해서만 우리는 그 소외감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선 「일」을 찾을 것, 그것에 몰두할 것, 그것을 완성시킬 것, 또 「일」을 찾을 것…그래야만 우리는 훼진 운동화를 신고도 남루한 옷을 입고도 아무런 소외감을 느끼지 않으며 번화한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것이다. 7) 이 글에서 이만희는 인간 보편의 문제에 가까운 소외를 주목한다. 이만희는 이 소외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일을 제시하지만, 마지막 문단의 “「일」을 찾을 것, 그것에 몰두할 것, 그것을 완성시킬 것, 또 「일」을 찾을 것”이라는 반복은 소외의 극복이 불가능함을 역설적으로 강조―기실 이만희는 “똑같은 노선을 하루 종일 오락가락하는 버스 안내양”과 “분필가루 속에서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가르치던 것을 금년에도 반복해야 하는 여교사”처럼 반복되는 일에서 소외를 찾고 있다―한다. “훼진 운동화”, “남루한 옷”이 풍기는 쓸쓸한 정서는 극복 불가능한 소외를 강화하는 전략 같이 느껴진다. 이런 글과 그의 영화에서 나는 우거지상 혹은 무표정한 사람으로 이만희를 떠올렸다. 그런데 최근 인터넷 서핑을 하다가 ‘한국영상자료원’이 2015년 04월 29일에 facebook에 올린 포스트를 보게 되었다. (https://www.facebook.com/koreanfilmarchive/photos/%EC%B5%9C%EA%B7%BC%EC%97%90-%EC%98%81%ED%99%94%EB%B0%B0%EC%9A%B0-%EB%AC%B8%EC%88%99%EB%8B%98%EC%9D%B4-%EC%83%88%EC%82%BC-%EC%A3%BC%EB%AA%A9%EF%BF%BD/797165160399351/) 이 포스트에는 멋진 사진이 있었다. (사진에는 1974년 여름 〈 삼포 가는 길 〉 촬영장이라 적혀 있지만, 입고 있는 옷은 문숙과 이만희가 처음으로 작업을 함께 한 〈 태양 닮은 소녀 〉의 촬영장이 분명하다.) 급하게 촬영한 것처럼 초점은 흔들려 있고, 초점이 맞지는 않지만 사진 속의 이만희는 활짝 웃고 있었다. 나는 이 웃음이 낯설었고, 좋았다. 그래서 의미심장하게 느껴졌고 궁금했다. 혹시 이만희는 일상의 갑갑함이나 소외를 벗어나는 방법으로 사랑을 찾은 것처럼 느껴지곤 했다. 정말 그랬던 것 같았다. 비록 앞서 길게 인용한 「혼자이기 때문에」처럼 이만희가 직접 밝힌 적은 없지만, 이만희의 경력에서 사랑은 하나의 주제를 이뤘다. 먼저 14년의 짧은 경력 동안 이만희는 무려 51편의 영화를 만들었다. “「일」을 찾을 것, 그것에 몰두할 것, 그것을 완성시킬 것, 또 「일」을 찾을 것…”을 실천하듯 이만희의 영화 제작 소식은 그의 활동 기간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그리고 이만희는 사랑을 했다. 감독 데뷔 시점부터 사실혼 상태였던 이만희는 1966년 〈 만추 〉의 배우 문정숙과 연애를 했고, 1974년의 시점에서는 배우 문숙과 연애를 했다. 1975년 4월 13일 이만희의 사망 이후에도 신문·잡지에는 이만희의 연인들의 말이 널리 보도되었다. 영화배우인 이혜영이 그의 아버지 이만희를 추억하는 글에 붙인 제목처럼 “은막의 대들보 우리 아버지(인용자-이만희), 천재는 오직 사랑뿐이었다.” 8) 그런데 이만희의 이 편력에는 독특한 구석이 있다. 여성 편력이 (특히 당사자 여성에게) 통념상 부정적임에도 불구하고, 이만희와 시간을 함께 보낸 여성들은 그와의 시간을 후회하지 않았다. 이만희의 두 번째 아내 9) 인 오흥순은 이만희와 결별 후에도 “그이와의 7년간의 결혼생활이 내게는 너무 아름다운 추억”이었기에 오랜 기간 재혼을 하지 않았다. 10) 문정숙 또한 이만희가 죽은 후에도 “「만추」(이만희와 함께 촬영한 영화의 제목-인용자)라는 음식점을 운영”하기도 했고 매해 가을 “낙엽속에서 그의 숨소리와 뜨거운 「영상의 혼」을 발견”하곤 했다. 11) 그의 마지막 연인인 문숙 또한 2007년 한 권의 책 마지막 한해를 통해 이만희와의 사랑을 추억했다. 12) 이만희는 사랑을 많이 한 사람일 뿐 아니라, 사랑을 참 열심히 그리고 잘 하기도 했던 것 같다. 학부 때였나? 수업 시간에 한 교수가 사랑의 비효율성에 대해 이야기한 적 있다. 사랑에 목을 매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고, 대학생이 조심해야 하는 일이라고. 나는 그 교수가 바보라고 생각했다. 목맬 수 있는 사랑을 할 수 있는 건 복된 일이다. 사랑이 끝난다고 해서 그 복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사랑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준다. 소외를 말한 우거지상의 이만희가 문숙 옆에서 웃을 수 있었던 이유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이러한 사료/정보로부터 우리는 이만희 영화에서 무엇을 어떻게 다시 볼 수 있을까? 〈삼포 가는 길〉(이만희, 1975)로 간단한 예를 들어보자. 영달과 정은 백화를 떠나 삼포로 향한다. 이만희는 떠나는 영달과 정의 얼굴을 더 이상 보여주지 않는다. 일상적 삶의 프로젝트에서 상상되지 않는 백화라는 존재를 담을 수 없는 그들을 이만희는 화면에서 추방시켜 버린 것 같다. (이러한 맥락에서 국가 개발의 증표로 ‘삼포’라는 가짜-외부가 영화에 삽입된 것이 나는 참 슬프다.) 이미 정해진 원고 매수는 넘었고, 나는 무엇보다 당신이 이러한 정보들을 참조하며 (아마 그의 가장 언급되지 않은 영화 중 한 편인) 〈태양 닮은 소녀〉(이만희, 1974)를 보길 바란다. 이 영화에는 영화사에서 가장 아름다운 생일 장면이 나온다. 그 장면은 어떤 의미로 배치된 걸까? 나는 우거지상의 이만희가 문숙을 만나 활짝 웃는 걸 떠올린다. 그리고 찰칵! 초점이 맞지 않는 사진이 남은 것에 대해서도. *** 1) 임재철, 「고전적 할리우드 영화」, 세계영화사 강의: 초기영화에서 아시아 뉴웨이브까지, 연세대학교출판부, 2001, 123-151쪽 참조. 2) 김홍준, 「한국의 고전영화 읽기―사실적 재현, 장르, 스타일, 공간의 구축」, (영화감독 10인의) 연출 수업 1, 동서대학교 임권택 영화연구소, 2012, 98-99쪽. 3) 임재철, 한승희, 「영원한 구경꾼: 임재철」, 필름 2.0, 290호, 2006.07. 74쪽. 4) 김홍준, 정성일, 박은영 정리, 「김홍준·정성일의 종횡4담 [5] - 영화광·에필로그」, 씨네 21, 2001.02.22. http://m.cine21.com/news/view/?mag_id=573(2023.06.18. 확인) 5) 미국을 제외한 이유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다. 한편, 브라질의 영화평론가 Filipe Furtado는 이렇게 트윗한 적 있다. “누구나 자국 영화에 애증 관계를 갖습니다. 다만 미국인들은 자국 영화를 기본값으로 보는 데 너무 익숙해서 애초에 그것을 ‘자국 영화’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https://twitter.com/filipefurtado/status/1172522298093506560) 6) 박진희, 「한국고전영화 상대하기-나의 경우」, 마테리알 7호 https://ma-te-ri-al.online/archive/641 7) 이만희, 「혼자이기 때문에」, 샘터 4권 8호, 샘터사, 1973.08. 30-31쪽. 8) 이혜영, 「「은막의 대들보 우리 아버지」 「천재」는 오직 사랑뿐이었다」, 여성동아 185호, 1983.02. 9) 이혜영에 의하면 이만희는 55년에 한 번 결혼을 한 후 바로 이혼을 했다고 한다. 그리고 만난 것이 오흥순이다. 이혜영은 오흥순이 “극예술협회라는 극단에 들어가셨어요. 거기서 아버지를 만났다고 하더라구요.”라고 구술한 바 있다. (이혜영, 「이만희를 말하다」, 영화천재 이만희, 한국영상자료원, 2006, 258쪽) 이와 달리 오흥순은 이만희와 그가 처음 만난 것이 ‘서울문화학원’이었다고 회고했다. 오흥순과 이만희는 각각 ‘서울문화학원’에 배우와 연출이 되기 위해 다녔다고 한다. 이후 그들은 학원을 다니면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나도 인간이 되련다〉에 함께 출연하면서 친해졌다고 한다. (오흥순, 「사랑이 머물다 간 세월」, 아리랑 21권 8호, 아리랑사, 1975.08. 172쪽.) 서울문화학원의 한국연극학회가 〈나도 인간이 되련다〉를 공연한 것은 1955년 11월이다. (「全國大學演劇 콩클 作品은 「푸른聖人」」, 경향신문, 1955.11.06.」)이다. 이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극예술협의회(劇藝術協議會)’ 주최로 1956년 06월이다. 오흥순이 출연한 기록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劇藝術協議會 創立 公演」(경향신문, 1956.06.02.)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화천재 이만희 15쪽에 실린 ‘57년 공연장에서’라는 사진 또한 1956년 공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이다. 이 공연에는 이만희가 감독으로 데뷔하는데 도움을 줬다는 김승호도 출연했다. 10) 오흥순, 위의 글, 174쪽. 11) 문정숙, 「그 만추의 못잊을 사랑」, 여성동아 185호, 동아일보사, 1983.02. 236쪽. 12) 문숙, 마지막 한해, 창비, 2007.
1. 1973년 싱가폴에서 열린 제18회 아시아영화제를 참관하고 돌아온 신상옥은 위기의 한국영화가 “새로운 돌파구를 발견하지 못하면 재생할 길이 없다”고 일갈한다. 1) 그에 따르면 “몇 년 전만해도 일본영화와 함께 정상을 달렸던 한국영화”가 “전근대적인 작품으로 관객으로부터 유리되는 인상은 참으로 영화산업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문제는 한국을 제외한 9개 출품국의 영화들이 한결같이 “액션과 섹스물로 관객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제작된 데 반해 “우리나라에서 좋다고 출품한 작품은 기복이 없는 너무나 평범한 작품”이라는 데에 있다. 그는 “오늘의 관객은 평범하고 짜증이 나는 영화를 보려는 것이 아니고 액션이나 청춘이 불타오르는 충족 표현을 보려는데 있는데 우리 여건은 이러한 것들을 제작하는데 너무나 많은 제약을 받고 있음”을 지적하며, “빠른 시일 내에 해외 진출의 돌파구를 열어줘야 한다”고 강변한다. 신상옥 이라는, 1960년대 이후 한국영화 산업의 최전선을 담당했으며, 공인된 국제통이 전하는 이 진단이 흥미로운 이유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첫 번째, “액션이나 청춘이 불타오르는 충족표현을 보려”는 “오늘의 관객”이라는 범주. 그들은 과연 누구인가? 적어도 이들이 1960년대 신필름의 기틀을 다지는 기폭제가 되었던 영화 < 성춘향 >(1961)이 구성해냈던 관객들, <연산군> 시리즈(1961-1962)와 쇼브라더스와의 합작으로 만들어진 < 달기 >(1964), < 대폭군 >(1966)에 이르기까지의 스펙터클 시대극이 소구했던 그 관객이 더 이상 아니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1960년대 말에서 70년대 초 한국영화 산업은 주지하다시피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였다. 여러 위기의 원인 중 가장 먼저 이야기될 수 있는 것은 다른 지역들에서 그러한 것처럼 TV의 급격한 보급에 따른 절대 관객수의 감소였다. 1969년 절정에 달했던 영화관객수는 1972년에 이르면 2/3 수준으로 급감했으며, 1975년에는 전성기의 1/10 수준으로 내려앉았다. 신상옥의 언급이 있던 1973년 TV 수상기 보급대수는 100만대를 돌파했다. 이와 같은 수치가 보여주는 것은 단지 영화관객의 감소라는 문제만이 아니다. 이는 관객구성체라고 할만한 것이 완전히 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그에 따라 영화의 위상 또한 바뀌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중장년 관객이 TV로 대거 이동한 이후 이 자리를 채운 것은 젊은 관객들이었다. 1960년대 후반부터 가시화되기 시작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여파는 도시 저임금 노동자라는 새로운 관객층을 급부상시켰으며, 서울과 같은 도시 내부의 공간 재편은 이 관객들이 점유하는 새로운 공간의 창출을 가능하게 했다. 그렇다면 “액션이나 청춘이 불타오르는 충족표현을 보려”는 “오늘의 관객”이란 바로 이러한 관객에 다름 아닐 것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홍콩-일본을 잇는 강력한 커넥션의 구축자이자(아시아영화제는 바로 신상옥이 이 국제적 커넥션을 만들어냈던 중요한 장이었다), 동시대 누구보다 민감한 국제적 감각의 소유자였던 신상옥은 영화의 위상 변화를 절감하고 있었다. 두 번째, 그런데 이 위상의 변화, 더 정확히 말하면 관객의 변화에 따른 이 위상 변화란 일국 레벨에서 끝나는 문제가 아니었다. “한국을 제외한 아시아 각국의 영화는 액션과 섹스물로 관객의 욕구를 충족시키는 방향으로 제작되고 있다”는 전언이 의미하는 바는 단지 한국영화가 얼마나 시대에 뒤처져 있는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이는 ‘액션과 섹스’라는 취향을 공유하는 국경을 넘어선 공통의 관객이 등장하기 시작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국경을 넘어선 공통의 관객. 유신시대 한국이라는 이 극도로 폐쇄적인 장소에서조차도 이 공통 관객의 형상이 등장하고 있는 것은 확실히 흥미로운 지점이다. 아마도 그 대표적인 사례는 이 연재에서도 다룬 적 있는 196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무협영화, 쿵푸영화, 그리고 무엇보다 1973년의 이소룡 붐을 극적인 전기로 삼아 지역을 막론한 장사치들의 이합집산으로 만들어진 소위 홍콩식 권격영화들의 광범위한 유행이 될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사례, 어떻게 여기에 섹스가 결합되는가. 신상옥의 1976년 영화 < 여수 407호 >/< 속 여수 407호 >는 한 시기의 가장 마이너하지만 동시에 ‘초국적’으로 소비되었던 한 장르의 ‘지역적’ 양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사례이다. 이 장르는 익스플로이테이션 영화의 하위 장르 중 하나인 여감방 영화, WiP(Women in Prison)로 불리웠던 영화인데, 간단히 말해 남자 간수들과 여자 죄수들로 구성된 감옥을 배경으로 하는 이 영화들의 ‘진정한’ 볼거리는 (문자 그대로) 헐벗은 여성들에 대한 성적 착취라고 할만한 것이다. 감옥이라는 이 절대적 위계의 공간은 집단 누드, SM, 윤간, 레즈비언 성애까지 ‘자유자재’의 성적 표현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더없이 효율적인 공간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제스 프랑코, 잭 힐, 게리 드 레온 같은 이름들이 ‘악명’을 떨치고 있던 이 장르를 동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처음으로, 가장 창조적인 방식으로 흡수해온 것은 일본이었다. 1972년 일본에서 <The Big Doll House>(잭 힐)가 <잔혹여형무소>라는 제목으로 공개되어 인기를 모았다. 이미 포르노액션이라는 섹스와 폭력이 결합된 장르를 열정적으로 실험중이던 도에이는 재빨리 시노하라 토오루의 만화 『사소리』의 영화화를 서둘렀고, 그 결과 만들어진 <여수 701호-사소리>(이토 슌야)는 놀라운 성공을 거뒀다. 이 영화는 곧 시리즈로 이어졌으며(<여수 사소리-제41잡거방>(1972), <여수 사소리-짐승의 방>(1973)), 주인공 카지 메이코(梶芽衣子)는 일약 도에이의 간판 여성스타로 등극하였다. 이 영화는 남자의 배신, 강간, 감옥 수용, 탈출, 복수로 이어지는 전형적인 여감방 영화 스토리를 변주하지만 또한 남자로부터의 배신이라는 사적인 원념으로부터 시작하여 체제에 대한 원념으로 나아가며(이 남자는 경시청 간부이고 여타의 ‘남자들’ 또한 모두 국가 권력과 어떤 식으로든 관계맺고 있는 자들이다) 격렬한 젠더대립과 체제 전복에의 의지로 충만해 있다. 그럼으로 <사소리>는 여감방영화라는 공통 장르에 기대는 동시에 우먼 리브(women’s liberation)와 국가 폭력에 대한 대항 폭력이라는 일본의 포스트 68적 주제를 정확히 반영해낸다. 두 번째로 이 지역에서 등장한 WiP 영화는 1973년 홍콩 쇼브라더스가 제작한 < 여집중영 女集中營 >(퀘이치훙)이었다. 일본군 수용소에서 ‘다채로운’ 인종의 여성 수감자들이 그야말로 다종다양한 성적, 육체적 착취에 신음하는 이 영화는 곧 아시안 WiP의 대표작으로 자리매김했으며, 한국에서 역시 영감의 원천이 되었다. 2. 1973년, 신상옥이 세계적 동시성을 호소했던 그해 말 신프로덕션은 ‘합작’ 타이틀을 내걸고 가장 뻔뻔스럽고, 가장 노골적이며, 가장 성공적인 결과를 갖게 될 한 편의 영화를 시장에 내놓았다. < 여감방 >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개봉한 <여집중영>은 1974년 10만 이상의 관객을 동원한 네 편의 영화 중 한편으로 기록되었다.(참고로 말하자면 1974년의 최대 히트작은 한국영화의 흥행기록은 갱신한 < 별들의 고향 >(50만)이었으며, 나머지 두 편은 영화진흥공사가 제작한 < 증언 >과 < 아내들의 행진 >이었다. 당시의 한 신문기사는 국책영화 <증언>과 <아내들의 행진>을 제외한다면 10만을 넘은 한국영화는 <별들의 고향>과 <여감방>에 불과하다고 한탄하고 있다.) 한국어 더빙을 거친 <여집중영>은 정말로 극적으로 ‘한국영화’ <여감방>으로 탈바꿈하였다. 당시 한국 개봉 버전을 유추할 수 있는 심의대본(영상자료원 소장)에 따르면 이 영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인’ 독립군 김대만은 죽기 직전 ‘조선인’ 아내 정숙에게 군자금의 은닉장소를 알려준다. 정숙은 기독교 병원의 백인 여간호사들과 함께 일본군이 세운 여자 수용소로 끌려가는데, 이곳은 상시적인 능욕과 때로 죽음에 이르게 하는 고문, 잔학한 일본인 여장교에 의한 레즈비언 강간을 포함한 집단윤간이 횡행하는 장소이다.(이 장면들이야말로 이 영화가, 이 영화를 포함한 여감방 영화들이 진정 보여주고 싶어하는 볼거리라는 점에 주의하자.) 여자들은 살기 위해 탈출을 꿈꾸고, 위장 일본군 장교로서 은밀히 작전을 수행중인 ‘박대령’이 그녀들을 돕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 영화가 위의 설정을 믿을만하게 만들어줄 어떤 장치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여집중영>→<여감방>으로의 이동이 진정 흥미로워지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먼저 이 영화의 ‘조선인’ 등장인물이라고 설정된 자들은 당연한 말이지만 ‘중국인’으로서의 그들의 표식을 전혀 감추지 않는다. 중국 복장의 이들은 중국 가옥에서 살고 있다. 한국-홍콩 합작 프로젝트를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가 얼마나 ‘한국영화’로의 전이에 무심했는가는 배우 로례의 존재로부터도 확인가능하다. 일단 ‘박대령’으로 기술되어 있는 그는 이미 한국 영화시장에 <금연자>(한국 개봉제목: 심야의 결투 )와 <용호투>(한국 개봉제목: 용호의 결투 ), 그리고 < 철인 >이라는 제목으로 한국에서 개봉된 영화 <죽음의 다섯 손가락>으로 익히 알려진 홍콩배우였다. 이 이야기는 이 영화의 표면으로부터 그 어떤 ‘한국성’ 혹은 ‘한국성’의 위장 따위도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당시 본격화되기 시작한 소위 ‘위장합작’ 영화들의 거개가 그러한 것처럼 이 영화 또한 몇몇 한국인 배우들의 존재로 아슬아슬한 합작의 암묵적인 최저 조건에 부합하려고 한다.(이 영화에는 고상미, 나하영 등의 한국인 여배우들이 출연한다.) 그러나 반라의 학대받는 여성들의 육체 중 하나로 기입되어 있을 뿐인 그녀들의 국적이 한국인지 아닌지는 전혀 중요해보이지 않는다. <여집중영>→<여감방>이 한국영화로의 전이에 이토록 무심할 수 있었던 이유는 간명하다. 이 영화를 보는 관객들이 여기에 무심하기 때문이다. 중국인인가, 한국인인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간악한 일본군이라는 적이며, 이 공동의 적 앞에서 벌거벗은 채 학대받는 여성들은 하나로 묶인다. 심지어 백인 여성들 또한 오로지 벌거벗은 육체로 다채로운 육체적, 성적 학대를 견디어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그 어떤 인종적 위계 혹은 차이도 없이 학대받는 ‘아시안’ 여성들과 하나가 된다. 이 지점에서 한 가지 덧붙이고 싶은 것은 간악한 일본군이라는 적또한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는 없다는 사실이다. 물론 이 설정을 믿을만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한국과 홍콩 양쪽의 공통된 민족적 공분일 터이지만, 생사여탈권을 쥔 이 절대악의 형상은 이런 류의 영화들에서 익숙한 것이다. 이를테면 70년대식 WiP 영화의 선구적 작품으로 평가(?)받는 <러브 캠프 7 Love Camp 7>(1969)은 나치 수용소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사 Ilsa> 시리즈로 대표되는 1970년대 내내 이어질 나치 수용소 배경의 WiP 영화, 이름하여 나치 익스플로이테이션의 효시가 될 이 영화는 나치 수용소에 끌려간 여성 유태인 박사와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잠입한 연합군 여성요원을 중심으로 수용소의 여성 수감자들이 겪는 능욕과 고문, 집단윤간, 새디스틱한 레즈비언 섹스를 그리고 있다. 요컨대, 이 영화들에서 배경이란 다채로운 방식으로 학대받는 여성들이라는 진정한 볼거리를 위해서 필요한 최소한의 장치일 뿐이다. 물론 이 볼거리는 국제적으로 순환하는 동시에 각각의 지역적 맥락이 부여하는 노골적인 성적 판타지와 결합한다. <여집중영>→<여감방>의 최대 볼거리가 기독교 병원의 간호사들로 설정된 백인 여성들에게 가해지는 능욕이라는 것이야말로 아마도 이에 대한 가장 뻔뻔스러운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채로운 육체적, 성적 학대의 대상이 된 이 벌거벗은 백인 여성들의 존재가 아시안 남성들에게 가져다주었을 노골적인 인종적, 젠더적 쾌감을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3. 어쨌든 <여감방>의 성공은 아마도 이 시기 신상옥을 가장 고무시켰던 사건인 것처럼 보인다. 그는 여기에서 홍콩과 한국 (그리고 일본)의 ‘공통 관객’에 대한 확신을 얻은 것 같다. <여감방>의 히트 이후 신상옥은 곧바로 신프로덕션 제작의 < 혼혈아 쥬리 >를 일본인 감독을 초청해서 완성, ‘여감방 시리즈 제2탄’으로 개봉했으며, 그 스스로 <여수 407호>/<속 여수 407호>를 만들었다. <여수 407호> 시리즈는 ‘액션과 섹스’라는 공유 트랜드에 대한 신상옥의 확신이 어떤 형태를 얻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이곳은 만주국의 수도 신경. 간호사 강희는 의사 하윤과 약혼한 사이이다. 어느날 밤 그들의 병원에 강희의 오빠 동민이 일본군이 쏜 총에 맞아 실려온다. 마침 강희가 일본군을 따돌리기 위해 나간 사이 유격대원인 동민은 금궤가 묻힌 장소를 하윤에게 알려주고 죽는다. 강희와 하윤은 부상당한 다른 유격대원들을 치료하기 위해 산에 오르고, 하윤은 강희에게 관동군 군의에게 가서 약을 가져오라고 시킨다. 약을 구해 돌아오자 유격대는 일본군에게 일망타진당한 상태. 강희 또한 어느날 밤 쳐들어온 네 명의 일본군에게 강간을 당한다. 그 중 한명을 가위로 내리꽂은 강희는 현재 교도소에서 복역중이다. 강제노역과 여자들에 대한 학대가(왜인지 이 학대받는 여죄수들 중에는 금발의 백인 여죄수도 끼어 있다) 만연한 이곳에서 유일하게 조선인 소장만이 여죄수들에게 온정적이지만, 이곳의 실권은 일본인 부소장 가토가 쥐고 있다. 가토의 노골적인 성적 착취를 견뎌내는 강희에게는 이곳에 같이 들어온 춘자만이 유일하게 마음을 열 상대이다. 그러던 어느날 옛 동료 하연이 이곳에 새로 수감된다. 강희는 하연으로부터 하윤이 오빠를 죽이고, 혼자 금궤를 독차지하기 위해 일본군과 밀통하여 유격대를 몰살시켰으며, 이제 그 모든 일을 도왔던 하연마저 만철 총재의 딸과 결혼하기 위해 버렸다는 사실을 듣게 된다. 복수를 결심한 강희는 호시탐탐 감옥에서의 탈출을 꿈꾼다. 남자의 배신-강간-감금-탈출-복수로 이어지는 이 이야기 구조는 WiP 영화의 한 전형이기도 하지만 더 직접적으로는 <사소리> 시리즈의 반복이다. <여수 407호>/<속 여수 407호>가(이 두 영화는 주인공 강희 역을 맡은 홍콩배우 엽영지와 가토 부소장 역의 장패산의 스케쥴 때문에 거의 동시에 만들어졌다) 신상옥이 <사소리>를 강력하게 참조하고 있음은 <속 여수 407호>에서 <사소리>의 화재 장면이 유사하게 반복되고 있는 데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런데 이 적극적인 참조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것은 <여수 407호>에서는 <사소리> 시리즈의 저 격렬한 젠더 대립과 체제전복적인 폭력이 거의, 전적으로 사라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이 가능한 이유는 이 영화의 배경이 식민지 시기이며, 그럼으로써 <여집중영>이 그러한 것처럼 절대악으로서의 일본, 일본인이라는 설정이 유지되기 때문이다. 이 설정의 결과 적은 민족적으로 ‘외재화’되고, 체제전복의 폭력적 열망은 사라진다. 아직 오지도 않은 ‘국가’를 어떻게 ‘전복’할 수 있겠는가. 여자를 배신한 남자는 개인의 영달을 위해 일본과 내통한 자, 독립군을 밀고한 자, ‘밀정’이며 이것이야말로 그가 악당인 이유이다. 이 악당을 제외한다면 ‘한국인’ 남성들은 정말로 세심하게 그들의 윤리적 지위를 보호받는다. 그들은 정의로운 독립군이거나, 나라가 없음을 통탄하는 인정많은 조선인 소장이다. 아마도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캐릭터는 이 조선인 소장일 것이다.(의미심장하게도 그를 따르는 유일한 부하는 중국인으로 설정되어 있다.) 이 캐릭터가 흥미로운 이유는 내러티브의 전개 속에서 그가 전혀 ‘무능’하기 때문이다. 이 조선인 소장은 공정한 ‘법’에 기대어 이 여감방을 정의롭게 운영하고 싶어하나 법 따위는 상관하지 않는 악독한 일본인 가토 때문에 빈번히 좌절에 이른다. 그는 내러티브의 전개상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이 캐릭터의 존재 이유를 내러티브 내에서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 그 이유는 1976년 한국이라는 영화 바깥에서 찾아야 한다. 긴급조치의 시대에 등장한 이 공정한 공권력에 대한 기대, 그러나 무력하기 짝이 없는 이 형상은 이 영화 속에서 유일하게 1970년대의 한국이라는 ‘리얼리티’를 담보하고 있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동시에 이 존재는 마치 동시대의 한국 액션영화가 태권도라는 애매한 기표로 위장하고, 반일/반공의 서사들로 최소한의 정당화 기제를 만들어냈던 것처럼, 이런 류의 섹스플로이테이션 영화가 한국에서 만들어질 수 있었던 최소한의 장치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수 407호>/<속 여수 407호>는 곧 홍콩에서 <老虎嶺女子監獄 1, 2>로 공개되었으며, <Girls in the Tiger Cage>/<Revenge in the Tiger Cage>라는 제목의 ‘언컷’ 버전으로 전세계에 유통되었다. 이 유통과정까지를 포함한다면 <여수 407호>/<속 여수 407호>는 섹스와 폭력(종종 이 둘의 결합)이 낳은 전지구적인 영화 네트워크 속에 어떻게 한국산 영화가 개입해들어갔는지는 보여주는 유감없는 사례이다. 4. 1970년대 한국에서 만들어진 <여수 407호>가, <사소리> 시리즈에서 노골적으로 보여준 성정치와 전혀 무관한 지점에서 성립되고 있었다면, 30년 만에 한국에서(즉, 1990년대를 통과한 이후의 한국에서) <사소리> 시리즈에 대한 어떤 응답과 마주하는 것은 기이하고도 흥미로운 경험이다. 박찬욱 의 < 친절한 금자씨 >(2005)는 아마도 WiP 영화라는 관점에서만 보자면 여기에 대한 가장 진지한 장르적 성찰의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시네필’ 박찬욱은 <사소리> 시리즈를 경유함으로써, 이 장르가 보여준 성정치를 말 그대로 동시대적 차원에서 구현해내었다. 동시에 공통장르로서의 WiP를 창조적으로 전유해온 이 사례는 한국영화가 어떻게 보편성을 획득해나갔는가에 관한 하나의 사례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 1) 「亞洲영화제를 보고, “邦畵제작에 새 돌파구를”」, 『경향신문』, 1973.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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