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면
- 감독
- 이승호, 서오름, 방성훈, 이세영
- 제작년도
- 2021
- 출연
- 성승택, 김정수, 홍석연, 김나래, 이병수, 김기백, 이하늘, 김호용, 박채희, 홍산, 박민우, 김미라, 정시율, 박혜숙, 김영용, 곽민준, 오강진, 김봉희, 박영준, 송화정, 노재준, 정혜선, 이용탁, 박건률, 박영준
한 시절이 끝나고 하나의 챕터가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다. 대나무 줄기처럼 시대를 구분하는 기준이 있다면 그 마디의 끝은 5년, 10년 같은 숫자가 아닐 것이다. 사랑했던 사람들이 세상을 떠나갈 때 비로소 한 시대가 나뉘는 마디를 느낀다. 2022년에도 많은 영화인들이 떠났다. 국내만 돌아봐도 김보경 배우, 이춘연 대표, 강한섭 영화평론가, 신정원 감독, 강수연 배우 등 각 분야의 영화인들이 우리 곁을 떠났다. 해외로 눈을 돌려보니 크리스토퍼 플러머가 세상을 떠났고 장 폴 벨몽도가 영면에 들었다. 장 마크 발레는 별이 되었고 시드니 포이티어는 역사에 새겨졌다. 그리고 마침내 장 뤽 고다르가 영원이 되었다. 장 뤽 고다르의 죽음과 함께 20세기 영화도 막을 내렸다는 탄식은 그저 수사가 아니다. 그의 죽음 앞에서 비로소 한 세기가, 영화의 한 챕터가 과거가 되었음을 실감한다. 현재는 과거다. 많은 이들이 현재를 산다 착각하지만 우리의 의식은 대체로 과거, 현재, 미래에 동시적으로 겹쳐 있다. 오늘을 살면서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보고 내일의 일을 걱정하는 식이다. 물리적으로 접근하자면 과거의 흔적들이 축적되어 오늘의 토대가 되고 그렇게 조성된 환경 위에 오늘의 내가 존재한다. 이건 과거에 얽매이는 집착과는 다르다. 해결될 수 없는 과거의 문제를 끌어안고 끙끙대는 게 집착이라면, 과거를 제대로 돌아보는 건 ‘나’를 나로 인식할 수 있게 하는 성찰의 시간에 가깝다. 몇 해 동안 사사로운 베스트 영화를 꼽았지만 올해만큼 유달리 ‘되돌아보는’ 시간이 길어졌던 적도 없었다. 어떤 해는 내가 다시 극장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위주로 골랐고, 언젠가는 온전히 취향을 고백하며 영화를 고른 적도 있다. 완전히 떠나보내기 위해 이별 편지를 쓰듯 영화 평을 남기기도 했다. 올해는 지난 1년 뿐 아니라 영화 보고 글 쓰는 일을 업을 삼은 지난 10년을 되돌아보며 영화를 골랐다. 그리하여 지금 나와 마주보고 있는 영화는 제임스 그레이 감독의 < 아마겟돈 타임 >이다. 과거라는 이름의 오래된 미래 그러고보니 매년 습관처럼 하는 서두의 말이 있다. <아마겟돈 타임>이 제임스 그레이의 최고작은 아니다. 감독의 최고작은 감독이 세상을 떠난 뒤에나 고를 수 있을 것이다. 아니다. 세상을 떠난 감독들의 지난 작품들을 살펴보니 애시당초 그런 건 불가능하다. 다르게 표현할 수는 있을 것 같다. 그 작품이야말로 나와 가장 깊숙이 접속하여 내밀한 대화를 나누었다고. 세간의 평가, 작품의 완성도, 지난 작품과의 비교를 염두에 두지 않고 말한다면 <아마겟돈 타임>은 2022년 본 영화 중 가장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 방문을 두드린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보며 제일 먼저 든 생각은 의문이었다. 왜 굳이 이걸 지금 만들어야 했을까. 모든 영화에는 감독의 자전적 경험이 일정 부분 반영되는 게 자연스런 일이지만 제임스 그레이는 그 농도가 꽤 높은 편이다. 자신이 나고 자란 뉴욕을 배경으로 한 다섯 편의 내밀한 드라마를 만들었던 제임스 그레이는 어느 날 갑자기 아마존 정글로 떠나더니(< 잃어버린 도시 Z >) 내친 걸음 아예 우주까지 다녀왔다가(< 애드 아스트라 >) 다시 집으로 귀환했다. 아니 단지 고향인 뉴욕 퀸즈로 돌아온 것을 넘어 가장 내밀하고 자전적인 이야기를 털어 놓았다. 약간의 과장을 보태 <아마겟돈 타임>의 전반부는 픽션이라기보다는 거의 일기에 가깝다. 제임스 그레이는 유대인 이민자의 자녀였고 아버지는 배관공이었다. 기술직인 아버지는 혹독한 환경에서 치열한 노력 끝에 중산층에 겨우 편입한다. 어머니는 할아버지가 그랬듯 교사였고 사친회의 회장이었다. 주말이면 조부모와 대고모,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대가족이 함께 모여 식사를 했고 부모님의 성화로 사립학교인 큐 포레스트로 전학을 간다. 제임스 그레이는 전학을 가기 전까지 학교에서 친하게 지낸 흑인 친구를 기억한다. 우주비행사가 되고 싶다던 친구는 양아버지가 보내준 아폴로 미션 패치를 보물처럼 아꼈다. 어느 날 학교에서 흑인 친구와 마리화나를 나눠 피던 걸 걸린 제임스 그레이는 학습부진아로 낙인 찍힌다. 제임스 그레이의 어머니는 이 제안에 분노하며 제임스 그레이를 사립학교로 전학 시킨다. 불행히도 함께 잡혔던 흑인친구에겐 대신 보호해줄 보호자가 없었다. 할머니와 함께 살던 흑인 친구는 사회복지사들에 의해 보호시설에 들어갈 처지에 놓이고 도망치듯 가출한다. 제임스 그레이는 그 친구가 자신의 집 뒷마당에서 얼마간 몰래 숨어 있던 나날을 기억한다. 오해하지 마시길. 이건 제임스 그레이의 어린 날이다. 동시에 영화 <아마겟돈 타임>의 전반부 내용이기도 하다. “상상력을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기억에 의존”했다는 감독의 고백처럼 거의 다큐멘터리라 해도 무방할 정도로 토씨 하나 다르지 않고 똑같다. 영화와 실화의 길이 갈라지는 건 6학년 폴(뱅크스 레페타)가 할아버지의 죽음 이후 가출을 결심하는 지점부터다. 폴은 경비를 마련하기 위해 흑인 친구 죠니(제일린 웹)을 설득해 사립학교의 컴퓨터를 훔쳐내기로 한다. 하지만 결국 이들의 범죄는 발각되고 두 사람은 함께 경찰서로 끌려간다. 여기서 또 한번, 한층 더 가혹하게 둘의 운명이 갈라진다. 다시 돌아와, 왜 하필 지금인가. 제임스 그레이가 자전적인 체험담을 굳이 지금 이런 방식으로 제작한 이유가 무엇일까. 문득 주변을 둘러보니 비슷한 사례가 적지 않다. 폴 토마스 앤더슨은 70년대로 돌아가 < 리코리쉬 피자 >를 찍었고,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는 6년 만의 복귀작 < 바르도, 약간의 진실을 섞은 거짓된 연대기 >를 통해 지난 생을 통째로 반추한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중심으로 한 첫 번째 자전적 영화 < 더 파벨만스 >를 선보였다. 스필버그의 첫 번째 자전적 영화라니, 이미 여러 번 꾼 꿈을 다시 목격하는 것 같아 기분이 이상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건가. 중견 감독들이 왜 새삼 지금 자전적 이야기에 몰두하는가. 일련의 유행 아닌 유행이 코로나 이후에 나타난 현상이라는 분석도 있다. 활동이 축소되고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며 ‘되돌아보는 이야기’가 일종의 시대정신이 된 건지도 모르겠다. 이유가 무엇이든 분명한 건 지금이 잠시 멈춰서 과거를 되돌아보고, 정리하는 대나무 마디 같은 시간이라는 사실이다. 다만 과거를 되돌아본다는 행위는 목적에 따라 도착지가 판이하게 달라진다. 제임스 그레이가 일기에 가까운 자전적 영화를 만든 이유를 한번 상상해보았다. 어디까지나 추측의 영역이지만 단언할 수 있는 게 하나 있다. 자전적 상황의 재현 자체가 <아마겟돈 타임>의 목적은 아니라는 점이다. 되돌아보는 행위 자체를 즐기는 영화들은 과거를 그리워한다. 아름답고 행복했던 그 시절을 추억하거나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을 안타까워하며 애상에 잠긴다. 지금 시점에서 과거를 낭만화 하는 필터링, 이른바 노스텔지어의 정서에 흠뻑 젖은 영화들. 그런 의미에서 <아마겟돈 타임>은 되돌아보기 ‘위한’ 영화가 아니다. <아마겟돈 타임>은 건조하고 담담하다. 최소한 그런 위치를 유지하려고 의식적으로 애를 쓴다. 제임스 그레이가, 아니 소년 폴이 그리워하는 시절은 소년 폴의 시절이 아니라 차라리 아버지 어빙(제레미 스트롱)의 시절, 더 거슬러 올라가 할아버지(안소니 홉킨스)의 시절이다. 소년이 직면한 상황은 더 이상 회복될 수 없는, 그야말로 멸망 직전인 것처럼 느껴진다. 왜냐면 <아마겟돈 타임>의 ‘지금’은, 1980년은 희망도 낙관도 없는 망해버린 세상의 초입이기 때문이다. 핵전쟁의 위협에 시달리는 불안과 위협의 시대. 레이건이 대통령에 당선된 해. 아메리칸 드림이 종말을 고한 해. 소년의 시간이 끝나고 이제 어른으로서 생존의 시간. 그래서 ‘아마겟돈 타임’이다. 유령과 함께 살기로 결심하다 제임스 그레이 감독이 1980년을 이야기의 무대로 택한 건 그 때 자신이 사립학교에 진학했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오늘날 미국이 망가진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니 1980년에 도달한 쪽에 가깝다. 신자유주의, 무한 경쟁, 두터운 유리천장과 사라진 사다리, 무엇보다 연대에의 희망이 사그라들고 분리, 차별, 혐오에 잠식당한 미국의 오늘을 어떻게 마주 봐야 할 것인가.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거슬러 올라가다 발견한 변화의 첫 번째 분기점이 레이건이 당선된 1980년이었게 아닐까. 다시 말해 <아마겟돈 타임>의 자전적 이야기와 회상은 목적이 아닌 도구다. 오늘의 폐허를 환기시키는 거울의 무대라고 해도 좋겠다. 아버지 어빙 역의 제레미 스트롱 배우는 말한다. “1980년 레이건 당선은 오늘날 우리의 모습을 미리 보여둔것과 같아요. 제임스 그레이 감독은 아주 사적인 렌즈를 통해 큰 이야기를 만든 거죠.” 사실 제임스 그레이가 그리워하는 시절은 소년 폴의 시절이 아니라 차라리 아버지의 시절, 더 거슬러 올라가 할아버지의 시절이다. 할아버지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미국에 정착해 아메리칸 드림을 이룬 시절이 있었고 아버지가 간신히 중산층의 끄트머리에서 간신히 버틸 수 있는 시절도 지나가는 중이다. 이제 폴이 바야흐로 맞이해야 하는 시대는 계급 이동의 사다리가 사라지고 3루에서 태어난 이들이 3루타를 치고 노력했다고 당당히 말하는 시대다. 2022년의 제임스 그레이는 이미 폐허가 된 세상에 서서 과거를 바라본다. 그 시선에는 그리움보다는 어떤 결연함으로 가득 차 있다. 우리는 이미 폴의 미래를 알고 있다. 폴이 할아버지처럼 약자를 존중하고 차별을 멀리하고 불의에 분노하며, 그러니까 할아버지의 조언대로 “남자답게 맞서며” 살 수 있을까. 양심을 가진 사람들도 “인생은 불공평해. 행운이 찾아오면 감사해야 해.”라고 자조하면서 자신을 지키기도 급급한 세상에서 말이다. 조금씩 비겁해진 세상은 이윽고 고개 숙이고 침묵하며 각자도생 하는 지옥이 되었다. 계급의 사다리에서 추락할까 전전긍긍하는 개인의 비겁함과 소심함을 탓하는 게 아니다. 모두가 투사가 될 수 없음을 안다. 다만 침묵에 저항하는 걸 실패한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저항할 수 있다. <아마겟돈 타임>은 세상을 바꾸자고 설득하는 영화가 아니다. 망각에 맞서, 최소한의 저항을 시도하는 영화다. 할아버지가 살았고, 믿고, 꿈꿨던 낙원은 이제 없다. 다시 온다해도 그것은 할아버지가 겪었던 낙원이 아니다. 우리는 이제 낙원을 부활시키는 방법이 아니라 지옥에서 살아남을 방법을 궁리해야 한다. 그럼에도 지옥에서 단순히 생존하는 것을 넘어 희망을 꿈꿀 수 있다. <아마겟돈 타임>은 내게 낮은 목소리로 그렇게 읊조린 것처럼 들린다. 영화는 말한다. “지금 네가 할 수 있는 건 네게 주어진 삶을 단지 받아들이는 거야. 뒤돌지 말고.” 이것은 유령의 목소리다. 유령은 사라진 존재가 아니다. 보이지 않지만 여전히 옆에 있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유령은 지나간 과거가 아닌 축적된 현재의 흔적이다. 마찬가지로 “뒤돌지 말라”는 영화의 속삭임은 타협도 낙담도 포기도 아니다. 내가 나로 살겠다는 결연한 의지다. 언젠가 다음 세대를 이어받을 너의 손을 놓지 않고, 기꺼이 유령이 되어 이 폐허 속을 함께 걷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그렇게 우리는 유령과 함께 오늘까지 생존했다. 내일도 그럴 것이다.
춘사 나운규 의 28주기 추모작품 신상옥 감독의 < 벙어리 삼룡 (1964)>은 “춘사 나운규의 28주기 추모작품”이라고 홍보되었다. < 오몽녀 >를 유작으로 남기고 1937년에 영면한 나운규는 1929년에 < 벙어리 삼룡 >을 감독하고 또 그 자신 삼룡 역을 맡아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당시 리뷰에서는 한결같이 마지막의 화재 장면에 1,000여명의 비(非)전문배우(엑스트라)가 동원되어 공들여 촬영되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출세작 < 아리랑 (나운규, 1926)>에서부터 광인, 부랑아, 떠돌이 등 방외인 연기로 자신의 페르소나를 구축한 배우 나운규에게는 계급적 원한에 사로잡힌 벙어리 캐릭터가 꼭 맞는 옷처럼 어울렸을 것이고, 역시 <아리랑>에서부터 수백, 수천명 농민이 등장하는 몹씬 촬영을 시도했던 감독 나운규에게는 원작에 나오는 화재 장면이 탐나는 스펙터클이었을 것이다. 나운규의 <벙어리 삼룡> 프린트가 유실되어 신상옥의 <벙어리 삼룡>이 얼마나 그에 대한 오마쥬를 표하고 있는지 확인할 길은 없지만, 일단 위의 화재 장면에서 신상옥이 공을 들인 것은 수많은 엑스트라 촬영이 아니라 순덕아씨에 대한 삼룡의 ‘헌신’이었던 걸로 보인다. 나도향의 원작소설(1925)에는 불타는 집에 뛰어든 삼룡이 제일 먼저 오생원을 구해내고 다음으로는 자기 몸이 불에 상하는 것도 잊은 채 순덕아씨를 구하면서 “여태까지 맛보지 못한 즐거운 쾌감,” “이제 처음으로 살아난 듯”한 기분을 느끼며 숨이 끊어지는 것으로 그려진다. 아씨를 구해냈다는 사실에 “평화롭고 행복스러운 웃음”을 입가에 띄우면서 죽어가는 삼룡의 사랑과 헌신이 클라이막스가 되는 셈이다. 나운규의 <벙어리 삼룡>이 원작의 결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으로 보이는 반면, 신상옥의 작품에서는 삼룡의 손에 구출된 순덕아씨가 삼룡에게 ‘서방님(광식)’도 구해달라고 청하자 삼룡이 마지못해 다시 불속에 뛰어들어 광식을 구해내다가 둘다 빠져나오지 못하는 걸로 마무리된다. 그래서 그 마지막 순간 과연 삼룡이 “평화롭고 행복”했는지는 알 수 없다. 피터팬 콤플렉스 왜 원작이나 나운규의 버전과 달리 신상옥의 작품에서는 삼룡이 광식과 같이 불속에서 사라지는 것으로 설정되었을까. 영화에서 내내 순덕아씨와 삼룡의 관계는 어머니와 아들의 관계처럼 그려지기 때문에, 마지막에 삼룡에게 남편도 구해달라며 간청하던 순덕아씨는 결국 화마(火魔)에 남편과 아들을 동시에 잃은 셈이 된다. 원작에서 삼룡은 살려달라는 광식을 불구덩이에 남겨두고 순덕아씨만을 구한 후 숨을 거두기 때문에 삼룡과 광식 둘 다 사라지는 건 마찬가지이지만, 신상옥 버전에서는 순덕아씨의 청 ‘때문에’ 삼룡이 광식을 구하다가 목숨을 잃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치 순덕아씨는 아들을 남편이 있는 사지로 몰아넣은 여자처럼 보인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미루나무 강가를 거닐며 삼룡이 어리광부리던 모습을 회고하는 순덕아씨의 모습은 자신을 성가시게 하던 남성 가족들을 다 ‘처리’하고 홀가분해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물리적 폭력을 행사하던 봉건주의자 남편과 성장을 멈춘(삼룡의 장애는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피터팬 콤플렉스인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아들 없이 이제 홀로 서게 된 몰락양반 가문의 딸. 당시 서울대 국문학과 교수였던 정병욱은 이 영화에서 삼룡과 순덕아씨를 학대하는 광식의 행태가 “지나치게 지루하고 참혹”하다며 이를 “악의 과장된 표현”이라 비판한 바 있다. 박노식 이 연기한 광식은 어려서부터 같이 자란 삼룡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는 것은 물론, 양반의 예법을 운운하는 순덕아씨를 고까와하며 결혼 첫날부터 폭행한다. 정병욱은 “삼룡을 뭇매질을 하고 쇠스랑으로 마구 찍어대고 새댁을 걷어차고 할 적마다 곁 좌석에서 혀를 차고 비명을 올리고 하는 것을 분명히 들었다”며 악을 표현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전통에 어긋나는 표현이나 수법”을 쓰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1) 삼룡의 지고지순함과 대비시키기 위해 광식의 악함을 부각시키는 것은 멜로드라마의 장인인 신상옥에게는 자연스러운 선택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광식의 폭력성은 삼룡처럼 피터팬 콤플렉스에 사로잡혀 성장을 거부하는 아들이 지니는 철없음처럼 보이기도 한다. 원작에는 없던 식모 범실( 도금봉 분)의 “품에서 사내가 됐”던 광식이 그녀와 맺는 육체적 관계는 삼룡이 순덕아씨와 맺는 지순한 관계와는 얼핏 대조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두 커플의 투샷이 모두 모자(母子)처럼 그려진다는 점에서는 유사하다. 향토색짙은 문예작품 2) 물론 이런 현재적 해석과 무관하게, 당시 언론과 평단의 관심은 <벙어리 삼룡>이 1964년의 “최우수 영화,” “예술성을 살린 작품”으로서 아시아영화제, 샌프란시스코영화제, 베니스영화제 등에서 본선에 진출하거나 수상을 했다는 점, 국적불명의 “청춘영화”가 판치는 국내 극장계에서 관객 21만명을 모아 흥행에도 성공했다는 점에 쏠려 있었다. 비록 “테마와 감각에서는 낡았”지만 “스타일면에서는 세련”되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3) , 무엇보다 벙어리 삼룡 역을 평소 반듯한 지식인 캐릭터에 어울리던 김진규 가 맡았다는 점이 화제가 되었다. 이 영화가 각종 영화제에서 작품상, 감독상과 더불어 남우주연상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1) 정병욱, “영화수상: 학대 속에 피어난 인간미,” <동아일보> 1964.12.17. 2) 진(振)의 <벙어리 삼룡> 리뷰(경향신문 1964.11.16.) 제목. 3) R, “베니스 영화제에서 장려상을 탄 <벙어리 삼룡>,” <영화예술> 1966.4. >> 벙어리 삼룡 고화질 VOD 보러가기 <<
지난 4월 8일 한국 최초의 여성영화감독으로 불리는 박남옥 (朴南玉) 감독이, 향년 94세의 나이로 미국 로스엔젤레스에서 별세했다. 그가 우리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97년 처음 열린 서울여성영화제를 통해서다. 그 때 한국영상자료원에 결말부 영상과 일부 사운드가 유실된 채로 네거티브 필름만 보관되어 있던 그의 연출작 < 미망인 >(1955)이 다시 빛을 보게 되었고, 이를 통해 그간 한국영화사 기록에서 주목받지 못했던, 박남옥을 시작으로 한 역사 속 여성영화인들의 활동상도 새롭게 조명되었다. 당시 이러한 작업을 주도한 여성영화인들은 사단법인 여성영화인모임을 결성하였고, 『여성영화인사전』(주진숙·장미희·변재란 외 지음, 도서출판 소도, 2001)과 다큐멘터리영화 < 아름다운 생존-여성영화인이 말하는 영화 >( 임순례 , 2001) 등의 결실도 맺게 된다. 박남옥 감독이 그 출발점이 되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여학생 박남옥 열렬한 영화 팬에서 영화계로 1923년 경북 하양에서 태어난 박남옥은 어려서부터 영화를 무척 사랑했고, 문학, 미술, 체육 등 다방면에 재능을 보이던 만능 소녀였다. 특히 운동 실력은 깜짝 놀랄 만한 수준인데, 당시 신문기사를 검색해 보면 1938, 39년 전조선육상선수권대회에서 투포환 부문의 우승자로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다. 이처럼 타고난 체력은, 훗날 영화연출 현장에서 갓난아기를 둘러업은 채 레디 고를 부를 수 있는 원동력이었지 않았을까 싶은 대목이다. 신문기사 속 그의 이름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당시 각 대학의 입시합격자를 게재한 1940년 3월 27일자 『동아일보』의 ‘입시합격발표’란을 살펴보면, 박남옥은 이화여자전문학교의 합격생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그가 인터뷰를 통해 언급한 해방 이전의 이력들이 정확하게 확인되는 셈이다. 박남옥은 일제 시기 조선영화의 최고 스타였던 김신재 의 열렬한 팬이었다고 한다. 당시 일본영화잡지인 『신영화』(1942년 11월호)에 나온 최인규 영화에 대한 기사 중 부인 김신재에 대한 언급을 읽고 팬이 되었다고 한다. 아마 < 집없는 천사 >(1941)에서 꽃파는 소녀 역을 맡은 김신재의 모습에 반한 것일지도 모르겠다. 거의 매일 김신재에게 팬레터를 보내고 기사와 사진들은 모두 스크랩했다는 그의 증언은, 식민지 조선의 한 소녀가 영화에 열중하는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어 무척 인상적이다. 사실 필자는 대학원 석사과정 중 <아름다운 생존>의 촬영으로 참가했는데, 이 때 박남옥 감독을 실제로 뵙고 말씀하시는 모습을 지켜보는 소중한 기회가 있었다. 일제 말기 노골적인 국책영화들 사이에서 조선의 농촌 풍경을 담은 < 풍년가 >(1942, 방한준 )가 정말 아름다운 영화였고, 최인규 의 < 수업료 >(1940) <집없는 천사>가 얼마나 뛰어난 예술영화였는지 증언하시던 대목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 있다. 그는 한국 최초의 여성감독이기 전에 식민지 영화문화를 향유하던 영화 팬이었고, 초창기 한국영화사의 산 증인이기도 했던 것이다. 박남옥이 본격적으로 영화 작업에 참여할 기회는 해방과 함께 찾아왔다. 친구의 남편인 윤용규 감독(그는 해방기의 대표작 < 마음의 고향 >(1949)을 감독하고 월북했다)의 소개로 조선영화건설본부 산하의 광희동 촬영소에 스태프로 입사한 것이다. 그 곳에서 드디어 꿈에 그리던 김신재를 만날 수 있었고 이후 말년까지 인생의 친구로 지내는 출발점이 된다. 이 시기 박남옥은 돈암동의 예술인촌이라 불린 마을에 살았는데, 바로 이웃이 유명한 영화인들 즉 김신재와 최인규 부부, 김소영 과 무용가 조택원 커플, 문예봉 , 전창근 , 독은기 , 윤용규, 한형모 등이었다. ‘여성영화’ <미망인>의 완성과 의미 해방 직후 영화인들이 집결했던 광희동 촬영소에서 편집조수로 일하던 박남옥은 드디어 현장으로 나가게 된다. 바로 배우 최은희 의 데뷔작이기도 한 < 새로운 맹서 >(1947, 신경균 )에서 스크립터를 맡은 것이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당시 영화 현장에 정착하는 것은 쉽지 않았고, 결국 ‘딴따라 판’을 벗어나 정상적인 결혼을 바라는 부모의 강요로 귀향을 선택하게 된다. 영화에 대한 그의 열망이 너무나도 강했던 것일까. 한국전쟁이 발발하는 바람에 박남옥은 다시 영화계로 돌아갈 기회를 잡는다. 1953년 국방부 촬영대에 입대해 기록영화 작업에 참여했고, 극작가 이보라를 만나 결혼까지 이른다. 전쟁이 끝났고, 드디어 그는 자신의 영화에 착수한다. 박남옥의 데뷔작이자 유일한 작품인 <미망인>(1955)은 이보라가 쓴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일단 언니에게 돈을 빌려 영화에 착수했다. 영화사 이름이 ‘자매영화사’인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개인적으로 친했던 이민자 를 주연으로 내세웠고, 스태프 역시 지인들로 꾸렸다. 촬영도 아예 저예산 제작의 기본이라 할 16미리 필름으로 시작했다. 그의 증언에 의하면 데뷔작에 착수하기까지도 힘들었지만, 영화 현장을 유지하는 것이 더 힘들었다고 한다. 촬영하는 날보다 제작비를 빌리러 다니는 날이 더 많았고, 돌도 지나지 않은 아기를 맡길 곳이 없어 포대기에 둘러업고 촬영 현장을 누볐다. 직접 편집을 하고 전창근 감독 등의 도움으로 겨우 녹음실을 구해 후반 작업을 마치는 등 그야말로 천신만고 끝에 영화를 개봉시켰다. “여성감독이 아니면 착안하기 어려운 ‘앵글’의 각도와 사건의 ‘템포’ ‘리듬’의 명쾌, 화면과 동작(연기) 등에 생활감정을 예리하게 융화”(『동아일보』 1955.2.27)했다는 개봉 직전 영화평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그의 영화는 평단의 인정을 받았으나 안타깝게도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전후 여성들의 욕망을 과감하게 묘사한 그의 영화가 너무 앞서갔던 탓이었을까. 변재란 등의 영화학자들이 지적하듯이, <미망인>은 단지 최초의 여성감독의 영화로 수식되기보다 여성영화로서의 의미가 더 클 것이다. 박남옥감독 촬영 현장 박남옥 감독이 남긴 것 안타깝게도 박남옥은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못했고, 1960년 창간된 『씨네마 팬』의 편집장으로(그는 해방 전 대구의 신문사에서 기자생활을 하며 영화평을 쓰기도 했다) 영화 일을 이어나가다, 영화계를 떠나게 된다. 그의 이력이 말해주듯, 영화판에서 기회를 잡은 것이 해방 직후와 한국전쟁 시기 그리고 전후, 즉 한국 사회가 가장 혼란스러웠던 시기라는 점은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박남옥 이후 < 여판사 >(1962)의 홍은원 , < 민며느리 >(1965)로 연출에 데뷔한 배우 최은희, < 첫경험 >(1970)의 황혜미 , < 수렁에서 건진 내딸 >(1984)의 이미례 등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여성감독이 이어졌다. 이후 임순례 감독을 필두로 굳이 여성감독으로 부르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여성영화인들은 각 분야에서 존재감을 발휘하고 있다. 그들이 박남옥에서 출발한 계보를 이룬다고 또 박남옥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여성으로서 감독 데뷔의 기회를 잡기 위한 고군분투의 역사가 박남옥에서 출발했다는 사실, 그의 영화 인생이 우리에게 전하는 가장 큰 의미일 것이다. 김영희 편집기사와 박남옥 감독 본 글은 2017년 4월 『씨네21』호에 실린 '[추모] 김신재를 동경하던 '영화소녀' 영면에 들다'를 재수록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