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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작년도
- 2011
사진: “ 너와 나 ”, 서울독립영화제 영화에 대해 쓰고 말하는 사람들이 영화와 비평 사이에서 고민해온 시간을 들려줍니다. 그러다가 떠오른, 한국영화에 대한 감상도 꺼내봅니다. ---------- Original message ---------- From: "함연선" Date: 2025-03-XX XX:XX Subject: 마테리알 10호 기획의 건 To: "박채연", "박현" 두 분께, 안녕하세요, 채연 님, 현 님. 날이 많이 따뜻해졌습니다. 지난달 지원했던 비평매체 지원사업 공모 결과는 오늘 발표 날 줄 알았건만, 다음 주 중이나 되어야 나올 예정인가 봅니다. 이제 슬슬 마테리알 10호를 준비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메일을 드립니다. 10호라는 숫자가 주는 의미가 있어서인지, 자연스럽게 지난 5년간의 마테리알 여정을 돌아보게 됩니다. 10호는 단순한 숫자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우리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과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함께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독자층은 조금씩 늘고 있고, 잡지 자체의 완성도도 높아져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뭔가 이대로 괜찮은가 하는 불안에 종종 시달립니다. 요즘 특히 더 그렇네요. 2019년 창간 당시 마테리알의 원동력이 되었던 기존 예술비평 제도에 대한 반발심과, 그 무모했던 열정이 조금은 옅어진 것 같아서일까요? 돌이켜보면, 창간 초기 마테리알의 태도는 꽤 도전적이고 자극적이었습니다. 처음 개최한 행사인 창간 기념 집담회 홍보문에는 “오늘날 한국 비평의 고지혈증에 대한 책임은 모두가 나눠가져야 할 것이다”라는 다소 과격한 문구가 들어있었죠. 또 “과연 (젊은 세대가 죽이고 싶어하는 아버지가) 죽일 만한 아버지인지 먼저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라는 선배 평론가의 말에, 우리는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죽일 만한 아버지’인지는 자식들이 판단할 문제다” *주1 라고 꽤 건방지게 대답하기도 했습니다. 사진: “ [마테리알 창간기념 토크] 비평의 비평 – The Book Society ”, 텀블러 당시 저는 기존 비평계의 권위(일종의 ‘아버지’)에 도전하는 그 행위 자체가 우리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칼이 아무리 무디더라도, 그것을 휘두르는 행위 자체에 의미가 있다고 믿었죠. 지금 생각해보면, 우리의 무모하게 큰 야심과 정확하지 못한 방법이 한데 섞여 있었던 셈입니다. 좋고 나쁨을 떠나, 마테리알의 초기 에너지는 무지에서 비롯된 용기에 크게 빚졌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저는 다른 종류의 야심에 대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초기에 우리가 추구했던 야심이 높고 커다란 것이었다면, 이제는 ‘크기’와 상관없는 야심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이 야심은 정확하되 비루하지 않은 것이었으면 좋겠습니다. 크기에만 집착하여 막연하고 허황된 말로 시끌벅적한 마음만큼이나, 너무 정확하고자 하여 오히려 작아지는 마음 역시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어떤 야심이 크기와 상관이 없다면, 무엇과 상관있는 것이어야 할까요? 이 고민을 하던 중에 우연히 하길종 감독의 < 바보들의 행진 >(1975)을 다시 보게 되었습니다. 이 영화는 1975년 개봉 당시에 크게 흥행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발견되는 것은 흥행을 향한 상업적 계산이나, 혹은 반대로 소위 ‘실험적’인 작업들에서 보이는 관습적인 작가적 야심이 아닙니다. 거칠게 말해보자면 철저히 실패하는 야심, 절망하는 야심에 가까운 것 같아요. 그리고 그것은 이내 야심을 가진 절망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두 분은 이 영화에 대해, 그리고 ‘크기와 상관없는 야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언제든 편히 답장 주세요. 두 분 모두 평안한 하루 보내시기를요! 연선 드림 ---------- Original message ---------- From: "박현" Date: 2025-03-XX XX:XX Subject: RE: 마테리알 10호 기획의 건 To: "박채연", "함연선" ‘절망하는 야심’이라는 연선 님의 표현이 인상 깊어 저도 <바보들의 행진>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어요. 전우형은 <바보들의 행진>이라는 제목을 국책 새마을영화인 임권택 감독의 < 아내들의 행진 >(1974)에 대한 패러디 로 보고 있는데요. *주2 근면한 아내들이 마을을 변화시켜 밝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는 <아내들의 행진>에서와 달리 이 영화에서 ‘바보들’의 ‘행진’은 어디로도 나아가지 않죠. 인물들의 서사뿐 아니라 영화의 구성에도 뚜렷한 진행 방향이 없어요. 맨 처음 오프닝 시퀀스에서 무음 상태로 재생되는, 착착 맞아떨어지는 군대 행진의 모습을 점차 깨부수는 게 이 영화의 목표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요. 어떤 거창한 주제 또는 클라이막스를 향해 발맞춰 나아가는 진행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거부하는 이 영화의 방식은 연선 님의 말대로 실패와 절망을 제대로 선언하겠다는 야심일지도 모르겠어요. 사실 청년기의 삶은 생각만큼 낭만으로 가득 차 있지는 않잖아요. 어린 시절의 순진한 이상과 동떨어진 현실의 보잘것없음에 적응해가야 하는 시기이기도 한데, 냉혹한 시대 속에 무력감을 겪는 청년들에겐 더더욱 그 낙차가 컸겠죠. 그런 실망 속에서 어떤 이들은 ‘바보’로 남을 수밖에 없는 현실을 이 영화는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설렘을 안고 연극 무대에 오른 영자( 이영옥 )는 고작 우스꽝스러운 하인 역할로 번개처럼 나타났다 사라져 버리는데요. 연극이 끝난 후 쓸쓸한 실망에 잠긴 영자의 표정도 인상적이었지만, 더욱 기억에 남은 건 이어지는 술자리 씬이었어요. 이야기의 진행에 별 역할을 하지 않는 영철( 하재영 )의 술주정에 영화는 이상하리만치 많은 시간을 할애하잖아요. 빨뿌리 장사를 해서 돈을 잔뜩 벌겠다는 허무맹랑한 꿈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늘어놓죠. 하지만 반복되면 될수록, 이것이 단지 헛된 꿈에 지나지 않으며 영철은 빨뿌리 장사를 하지도, 돈을 벌지도 못할 거라는 음울한 예감만이 더욱 강해져요. 그 꿈의 종착지가 ‘고래사냥’이라는 허상이기에 더더욱요. 연극이 끝난 후, 하인 역할을 한 영자의 쓸쓸한 표정 / 술자리에서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영철 영철은 영화 초반부터 어딘가 부족한 말더듬이로 등장하죠. 하지만 모든 것을 그의 캐릭터성 탓으로 돌리기엔 자꾸만 영화 외부를 가리키는 힌트가 눈에 들어와요. 검열을 피해 우회적으로, 잠깐씩 등장할 뿐이어도, 아는 사람들이라면 영화가 암시하는 시대상을 유추해내기란 어렵지 않죠. 이상을 가진 청년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바보가 될 수밖에 없는 사회. 영철이 그런 사회의 희생양임을 영화는 말하지 않고도 생각하게 만듭니다. 이는 《영상시대》 1호에 실린 하길종의 글에 담긴 야심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듯해요. “그러나 단지 영화적인 <재미>를 통해 스토리를 서술하는 일차적인 차원을 떠나서, 새 세대의 영화는 인간의 가치관과 기존 모랄을 재고하고 날카롭게 현실을 관찰하도록 대중을 선도하는 힘이다.” *주3 하지만 영화의 새로운 대안을 꿈꿨던 하길종은 검열 당국의 감시에 시달리며 흥행에 실패하다가 결국 요절했고, 그가 몰락한다고 보았던 “흥밋거리” 위주의 할리우드 영화는 되려 끈질기게 살아남았죠. 하길종에게 영향을 준 뉴 아메리칸 시네마 역시 결국 취사선택되어 주류에 흡수되었고요. 이전에 채연 님이 ‘독립’이나 ‘대안’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시작한 움직임들이 변질되지 않는 방법은 그 전에 소멸해버리는 것뿐인 듯하다고 말씀하신 것이 기억나요. 마테리알도 결국 소멸이라는 숙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걸까? 싶어 당시엔 잠시 울적한 기분이 되었는데요. 다시 생각해보니 세상은 늘 소멸과 재생을 반복하잖아요. 70년대의 청년영화는 사라졌지만, 그들이 존재했기에 훗날 그 자리에 새로 태어난 또 다른 대안이 있을 테고요. 그렇게 생각하니 미래를 두려워하지 말고 지금 필요한 것을 하자는 결심이 서는 것 같아요. 언젠가는 소멸하게 되더라도, 지금 당장은 마테리알이 우리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낼 수 있는 목소리가 남아 있을 테니까요. 혹은 어쩌면… 스스로를 죽이고 다시 태어나는 방식으로 우리의 자리를 계속 만들어 나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드네요. ---------- Original message ---------- From: "박채연" Date: 2025-03-XX XX:XX Subject: Re: RE: 마테리알 10호 기획의 건 To: "박현", "함연선" 두 분 메일을 읽고, 저도 서둘러 <바보들의 행진>을 보고 왔습니다. 영화의 흐름에 “발맞춰 나아가는 진행을 요리조리 피해가며 거부”한다고 현 님이 말씀해주셨는데, 정말 잘 표현해 주신 듯해요. 조금 다른 말일 수도 있는데, <바보들의 행진>을 보며 저는 < 너와 나 >(조현철, 2022)가 계속해 떠올랐어요. 정확히는, <너와 나>에 관한 김병규 평론가의 글 *주4 이요. 이 비평에서 문제시하는 <너와 나>의 연출이 <바보들의 행진>에서도 보이더라고요. 잘 아시는 대로 김병규 평론가는 <너와 나>가 “넘칠 만큼 치장되어” 있다며 “화면 안의 요소들은 자연스러움을 훼손하는 의식적인 ‘의도’로 (...) 화면에 돌출되어 있다”라고 평하는데요. <너와 나>에서는 이야기와 동떨어진 사물들이 등장한다면, <바보들의 행진>에서는 이야기와 동떨어진 사건들이 거듭 등장해요. 서사의 진행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않는, 맥락 없는 사건들이요. 이를테면 병태( 윤문섭 )와 영자가 처음 만난 날, 영자가 (병태에게 거짓말하면서까지) 교수를 찾아가 시험 점수를 정정해 달라고 말하는 장면이라든지, 축구경기 중에 병태가 공을 차는 순간 운동화 한 짝이 날아가고 돌연 화면이 멈추는 장면이라든지, 교내에서 각종 스포츠 경기가 열리는 장면 말이에요. 현 님이 짚어주신 대로 이상하리만치 긴 이런 장면들 덕에, <바보들의 행진> 또한 김병규 평론가가 <너와 나>를 칭하듯 “은유적이고 우회적”이라고 볼 수 있겠더라고요. <너와 나>에서 조현철 감독이 “통제”의 주체가 되어 연출과 편집을 행한 데 반해 <바보들의 행진>은 검열이라는 (진짜) 통제의 대상이 되어, 화면이 삭제되고 대체되면서 이런 구조를 취하게 되었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기는 하죠. 특히, 수업을 듣다가 응원전 연습을 위해 교실을 우루루 빠져나가는 학생들은 원래 시나리오대로라면 시위에 참여하러 가는 것이었다고 해요. 영철의 권유에도 꿋꿋이 교실에 남아 수업을 듣는 병태는 홀로 괴로워하는데, 이때 병태의 모습과 스포츠 경기 장면을 교차해 보여주죠. 검열받지 않은 원래 시나리오대로라면 스포츠 경기가 아닌 학생운동 현장이겠고, 그렇다면 운동에 참여하지 않는 병태의 심리상태가 꽤나 직접적으로 드러났을 테죠. 병태의 운동화가 하늘로 날아가며 멈춘 화면 각종 스포츠 경기 장면과 교차되는, 홀로 교실에 남은 병태의 모습 하길종 감독은 검열의 흔적을 숨겨 매끄럽게 다듬기보다는 오히려 그 이음매를 도드라지게 만들어, 이 영화가 검열되었다는 사실을 보란 듯이 드러내 보이죠. 이러한 맥락 없이 영화의 결과물 그 자체만 본다면 되게 전위적인 영화 같아요. 느닷없고 당황스러운 장면들이, 김병규 평론가의 말 그대로 “돌출되어” 보이는 거죠. 검열이 없었다면 <바보들의 행진>이 조금은 더 밋밋하고 직접적인 영화가 되지 않았을까, 라고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검열로 인해 영화가 어떤 형식적 효과를 얻게 된 점이 굉장히 아이러니하네요. 영화를 보다 보면 “엥?” 하는 순간이 있죠. 푹 빠져 몰입하고 있는데, 예기치 못한 장면에 당황하는 순간들이요. 분명 <너와 나>를 보는 내내 김병규 평론가는 물론 많은 관객들이 “엥?”들을 경험했을 테죠. 저도 그랬고요. 김병규 평론가의 비평은 이런 장치들, 영화 속 은유와 상징들이 모두 일정한 의미값을 갖고 영화 속에서, 또 서사의 흐름에서 제 역할을 다해야만 한다고 전제하는 듯해요. 하지만 저는 이들의 역할이, 서사 중간중간에 그런 긴장감을 줌으로써 주의를 환기하는 것이라고 봐요. 몰입을 방해하면서, 서사가 아닌 영화에 주의를 다시 집중시키는 핑거 스냅 같은 역할인 것이지요. (“야! 너 지금 서사에 너무 몰입하고 있어”) 다른 말로, “자연스러움을 훼손”함으로써 내가 보는 화면이, 실제 장면 속에 들어가 있는 게 아니라, 카메라를 통해 보고 있다는 점을 일깨우는 역할 말이에요. (“야! 이건 영화야”) 장면 하나하나의 의미를 해석해 가며 영화를 감상하는 것 자체가 가능한지는 차치하고, 과연 그러려고 애써야 할까요? <너와 나>에서 거울을 들고 있는 두 어린이는 과연 누구를 상징하는지, 브라키오사우루스는 왜 물웅덩이에 빠져 있는지, 그리고 <바보들의 행진>에서도, 병태가 축구경기를 하는 장면은 어떤 의도로 삽입되었는지, 하키 경기 장면은 왜 혼자 화질이 다른지, 이렇게 물어가며 감상해야 하나요? 그걸 묻고 답을 찾을 동안 영화는 계속되는데 말이죠. 그러니까, “엥?”이라는 감각이 추임새를 넘어서서 문장이 되고 “이건 어떤 의미일까? 무얼 상징하는 걸까?” 묻는 순간 관객은 함정에 빠지는 게 아닐까 싶어요. 스스로 판 함정 말이에요. 그럴 때는 몰입하던 고개를 조금 뒤로 젖혀 자세를 고쳐 앉고 미간 사이 힘을 빼, 함정에서 얼른 벗어나 다시 영화로 되돌아오면 되지요. <너와 나> 중 / <바보들의 행진> 중 저화질로 재생되는 하키 경기 장면 (사진: “ [너와 나] 메인 예고편 ”, 유튜브 너와 나) 마테리알의 야심에서 시작해 너무 멀리 와버렸네요. 다시 돌아가자면, 이 기회를 빌려 마테리알을 독자로서 접하다가 이제는 내부인원이 된 제 입장을 말씀드려봐도 좋을 듯해요. 저에게 마테리알은 연선 님 표현대로 “높고 커다란” 야심으로 무장하고 돌진하는 듯 보였어요. 마테리알이, 혹은 비평이 모종의 변화를 일으킬 수 있으리라 믿는 효능감이 돋보였죠. 불만이 많고, 목표지향적이며, 대범합니다. 편집부원으로 활동을 시작하고 난 뒤 생각이 바뀌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에요. 마테리알은 실로 변화를 꾀하고, 불만이 많고,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애쓰며, 쉽게 겁먹지 않습니다. 마테리알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할 때 연선 님이 특히 ‘동료’를 많이 언급한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어요. 어쩌면 마테리알의 동력은 개인의 야심이 아니라 공동의 야심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스포츠 경기 전, 선수들이 둥글게 모여 손을 포개 승리를 다짐하는 이미지가 스칩니다. 야심의 크기가 아니라, 야심의 겹을 따져 보는 것은 어떨까요? 박채연 드림 ---------- Original message ---------- From: "함연선" Date: 2025-XX XX:XX Subject: RE: Re: RE: 마테리알 10호 기획의 건 To: "박채연", "박현" 두 분께, <너와 나>에 대한 부정적 평가들은 영화 내에 상징적인 것을 과하게 배치해 놓는 창작자에 대한 반감에서 기인한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런 반감을 적극적으로 표명하다 오히려 반감의 대상이 가진 논리에 포섭되어 버린 듯한 인상이에요. 상징적인 것들이 너무 많다고 지적하다가, 끝내 많은 것을 상징으로 읽어내고야 마는… <너와 나>가 세월호 사건을 다룬다는 사실은 개봉 전부터 명약관화한 사실이었고, 영화의 뽀얀 화면, 컨테이너 박스에 갇힌 개들, 물웅덩이에 빠진 브라키오사우루스 인형 등은 세월호에 대한 놀랍도록 뻔한 상징이죠. 하지만 그처럼 쉬운 상징이었기 때문에 오히려 그것들이 상징이라는 사실을 금방 지나칠 수 있지 않나요? 그리고 영화적 현실로서 그것들을 감각할 수 있지 않나요? 저는 그런 생각을 했습니다. 채연 님이 말씀 주신 것처럼 상징을 읽어내는 와중에도 영화는 계속되고, 그렇기에 상징이나 의미를 발견하는 비교적 어려운 책무를 맡는다는 사실이 비평가들에게 중요한 것 같기도 해요. 스스로의 존재 가치에 대한 불안을 자신의 기능에 대한 확신으로 대체할 수 있으니까요. 저는 예전에 같은 영화나 영상작품을 여러 번 보면서, 그것이야말로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유사-전문성이다, 라고 생각하기도 했었어요. 일반 관객들은 굳이 같은 작품을 여러 번 안 볼 테니까요. 그들이 다른 데 배분할 시간들을 나는 같은 작품을 여러 번 보는 데 씀으로써 독자들에게 다른 기능을 제공한다, 는 생각으로 불안을 달랬던 셈이죠. 하지만… 지금은 솔직히 말해 비평이 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자꾸만 비평가로서의 저 개인보다는 마테리알에 집중하고 싶어져요. 얼마 전에 마테리알 7, 8호의 객원편집인이기도 했던 독립기획자 김신재 님께서 건넨 말이 생각나요. “점점 작품에 부속된 작품론을 안 다루고, 어떤 비평가의 작업을 연속선상에서 보고 비평적 야심(?)을 밀고 갈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속도와 사이클을 따라서 뭔가를 계속 뽑아내야 할 때가 많으니까요. 작가나 비평가 모두 창작의 고민과 방법론, 비평적 과제를 자기 속도와 방향으로 풀어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그런 바람입니다.” 이 얘기를 듣고 조금 정신 차렸어요. 같은 자리를 맴도는 듯한, 뭔가 막혀버린 듯한 느낌이 드는 이유가 자꾸만 스스로의 야심에 대해서만 고심해서였단 사실을 깨달았거든요. 좁은 의미에서의 동료들의 야심뿐 아니라 같은 그라운드에서 각자의 포지셔닝을 가져가고 있는 타인들의 야심에 대해서 보다 주의깊게 관찰하고 그들의 야심을 엮어내는 게 현재 마테리알의 사명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독립’이나 ‘대안’ 등의 영역에 속한 움직임들은, 대체로 이질적인 외부의 저항에 무너지는 게 아니라 동질적인 주변의 사랑—또는 그 비슷한 것—에 파묻혀 괴사하는 경우가 많지 않나 합니다. 언제나 커다란 야심을 품으시길… 메이웨더와 싸운 맥그리거처럼…” 마테리알 7호 피드백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독자 코멘트를 요즘도 종종 생각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야심은 ‘무엇을 이루어 보겠다고 마음속에 품고 있는 욕망이나 소망’일 텐데요, 물론 위의 코멘트를 남긴 익명의 독자분은 마테리알로 하여금 “커다란 야심”을 가지길 요청하셨지만, 저는 앞선 메일에서 말했듯 우리의 야심을 ‘크기’와는 떨어뜨려 생각해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맥그리거의 야심이 크기와는 관련 없었을 수도 있잖아요. 어쩌면 하길종 감독의 ‘절망하는 야심’과도 공명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어요. 하길종 감독은 검열로 인해 산산조각 난 영화의 이음매를 오히려 의도적으로 드러냄으로써 검열이라는 현실 자체를 폭로했고, <너와 나>는 때로는 촌스럽게까지 느껴지는 솔직함과 직접적인 ‘상징’으로 영화와 현실의 관계를 밀어붙였죠. 두 영화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이 놓인 현실과의 관계를 정직하게 표현했다는 점에서 닮아있습니다. 마테리알의 ‘크기와 상관없는 야심’ 역시 여기에 있지 않을까요? 만듦새보다는 지향점을 보려는, 자본과 제도와 관습을 걸고 넘어지려는 비평의 몸짓 말입니다. 작품이 던진 스루패스의 궤적을 감각하고, 우리도 그 공간으로 달려 나가는 열린 움직임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은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읽히느냐, 얼마나 큰 반향을 일으키느냐의 ‘크기’와는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 오히려 우리가 그라운드 위에서 얼마나 예리하게 기존의 흐름을 간파하고, 얼마나 과감하게 새로운 공간을 향해 패스를 보내거나 패스가 보내질 곳으로 달려가느냐의 문제겠죠. 이런 관점에서 마테리알 10호는 그동안의 여정을 돌아보면서도, ‘스루패스로서의 비평’이라는 비전에 우리가 어떻게 계속해서 새로운 해석과 실천을 더해갈 수 있을지 함께 고민하는 장이 되면 좋겠습니다. 서로의 생각을 꾸밈없이 나누는 이 서신교환처럼요. 아, 그리고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방금 전에 비평매체 지원사업 결과가 나왔어요. 지원이 확정되었습니다! 영화계에서는 비평에 대한 지원이 거의 없어서 결국 미술계를 통해 길을 찾아야 했네요. 다들 너무 고생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오랜만에 좋은 영화들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고, 마테리알의 실무가 아닌 추상적인 미래에 대해서도 여러분과 이야기 주고받을 수 있어서 좋았어요. 감사합니다. 조만간 오프라인에서 뵈어요! 연선 드림 <바보들의 행진> 중 / <너와 나> 중 *** 주1. 이예지, “TEXT TEXT TEXT”, 《아레나》, 2020. 5. 13. 주2. 전우형, “ <바보들의 행진>(하길종, 1975) 의 검열 표상 ”, KMDb, 2018. 1. 28. 주3. 하길종, 「새 세대•새 영화•새 정신」, 『영상시대』 1호, 1977. 주4. 김병규, “ [비평] 〈너와 나〉와 한국 독립영화라는 문제, <너와 나>, <괴인> ”, 《씨네21》, 2023. 12. 6. 마테리알(영상비평지) l 마테리알은 ‘스루패스로서의 비평’을 지향한다. 박채연, 박현, 함연선으로 구성된 마테리알은 동시대 무빙이미지를 중심으로 미술계와 영화계 및 그 주변부를 아우르는 비평 활동을 펼친다. 축구에서의 스루패스가 상대팀 수비진의 틈새를 뚫어 새로운 기회를 만들듯, 마테리알은 예술계에 열린 공간을 창출하고자 한다. 영상비평지 《마테리알》 발행을 중심으로, 온라인 지면 의 비평적 텍스트 발행과 오프라인 행사 ‘오픈 스페이스’ 등을 통해 다양한 플레이어들의 비평적 상호작용을 모색한다.
이장호 는 70년대 '영상시대' 활동과 더불어 ‘청년영화의 기수’였으며 ‘최초의 스타감독’이라고 불린 시대적 문화 아이콘이었다. 특히 80년대는 이장호의 전성시대였다. ‘80년의 봄’, 4년여의 공백을 깨고 발표한 < 바람 불어 좋은 날 >은 당시 청년 영화인들의 교과서였다. 당대 발표된 ‘80년대 한국영화 베스트 10’에는 그의 영화가 4편이나 선정되었다. <바람 불어 좋은 날>,< 바보선언 >,< 과부춤 >과 더불어 그 목록에 포함된 영화가 바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이다. 85년도 '이상 문학상'을 수상한 이제하의 단편 소설을 영화로 옮겼다. 85년 영화제작 자율화 시행 이후 그가 설립한 판영화에서 제작하였는데, 87년 어렵게 허리우드 극장에서 개봉을 했으나 관람 숫자는 미미했다. 당대의 지배적인 한국영화 관람 체험 속에서 이 영화는 낯설었다. 오프닝 시퀀스부터 영화는 편안한 관람 행위를 허하지 않는다. 수려하지만 그 수려함을 세피아톤으로 톤 다운시켜 놓은 강원도 산길을 익스트림 롱 쇼트의 롱테이크로 찍은 화표면은 마치 정지된 스틸의 그것 같다. 화면 왼쪽으로 원경에서부터 쭉 뻗은 길로 남자와 여자가, 그리고 한 무리의 아이들이 천천히 다가온다. 그러나 화면 앞 가장 가까운 거리에 도달할 때 까지도 그들은 식별되지 않는다. 아울러 영화가 시작되자마자 다른 내재적 사운드가 소거된 상태에서 마치 보이스오버처럼 원근감 없이 들려오는 남자와 여자의 대화 소리는, 현재 그들이 나누는 대화인 것처럼 보이지만, 동시에 이미지와 비동조화된 사운드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인과법칙에 기초하지 않은 서사의 진행, 행위에 대한 동기와 설명의 희박함, 현실과 환각의 경계를 지우는 쇼트의 배열, 극적 흐름과 맥락을 단절시키는 몽타주 시퀀스들은 시공간적 통일성과 연속성의 감각을 흩뜨리면서, 샤머니즘적인 운명론적 세계관의 묘사와 맞물려, 종국에는 불가해한 재현의 지점에 다다른다. 영화는 크게 황토 빛 모노크롬과 푸른 빛 모노크롬으로 처리된 두 개의 의미 계열체로 구성되어 있다. 몇 개의 시간적 재배치가 있으며 간헐적으로 현실과 환각의 경계를 허무는 주관적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황토 빛 모노크롬의 세계는 대체로 3박 4일의 여정을 연대기적으로 보여주는 영화적 현재를 재현한다. 반면 그 황토 빛 시공간을 절단하고 틈입하는 푸른 빛 모노크롬의 의미 계열체는 인물들의 회상, 주관적 플래시백, 의식의 흐름, 운명적 암시 같은 현재 시제를 벗어나, 충돌하며 운동하는 이미지들의 배열이다. 이장호는 <바보선언>에서 실험했던 즉흥적이고 연상적인 연출법을 재도입하는데, <나그네>에서 그러한 연출 방식은 명확한 좌표 없이 강원도를 떠돌며 예기치 못한 사건들에 직면하는 인물들을 그리는 데에는 더없이 잘 맞아 보인다. 개성이 고향인 사내와 전쟁 통에 고향이 어딘지를 정확히 알지 못하는 아내, 휴전선 부근 월산이 고향인 노(老) 회장 모두 전쟁으로 인하여 이산을 경험한 사람들이다. 속초, 원통, 강릉, 경포, 인제에 이르는 영화적 공간에서도 원통, 속초 등은 분단과 그 결과인 휴전선 아래 마을들이다. 영화는 이러한 공간의 지정학적 의미를 예민하게 포착한다. 예컨대 여행 첫날 사내가 아내의 유골을 바닷가에 뿌리려다 군인에게 제지를 당하고 결국 철수하는 것이라든가, 강릉에서 경상도 사투리를 쓰며 회를 파는 전주식당의 사장이 "전쟁 통에 나같이 된 사람들이 어디 한둘이냐"고 반문하는 것 등이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몇몇 장면은 자유연상과 자동기법으로 이러한 역사적인 지정학적 트라우마 의미를 기입한다. 백사장에 놓은 가방 속 아내의 유골을 바라보던 시선이 “고향이 원산은 아니라예”라는 아내의 목소리 사운드와 연결되면, 강릉 앞바다 위로 포화와 피난 행렬을 담은 한국전쟁 당시의 뉴스릴이 오버랩 된다. 그리고 영화의 중반부, 시선의 주체를 알 수 없는 일련의 국도 이미지의 몽타주 시퀀스 끝에, 우리는 국방 한계선과 상판이 없이 끊어진 다리와 마주하게 된다. 그러한 시도들은 오늘날의 관점에서도 담대하다. 영화 전체에 걸쳐 산포되어 있는 분단의 트라우마가 영화적 주요 배음을 이루고 있다면, 후반부로 갈수록 샤머니즘적 운명이라는 또 다른 배음이 날 선듯한 감각으로 강화된다. 사내의 주체의 중심 없음 혹은 부유(浮遊)함은 실향(失鄕)과 상처(喪妻)의 중층 결정의 결과물이다. 실향의 감각은 아내의 죽음과 이중 노출되어 있으며, 그와 연합된 상실감과 죄책감은 노정에서 우연히 마주치게 되는 성매매 여성과 ‘색시’, 그리고 ‘미세스 최’에게 투사된다. (아내, ‘색시’, ‘미세스 최’는 모두 이보희 가 연기한다) 서사가 진행될수록 영화는 최가 몇 해 전 받았던 점괘, 즉 “나이 서른에 물가에서 관을 세 개 짊어진 남자를 반드시 만날 것, 그가 전생의 남편”이라는 운명론적 예언을 향해 가는데, 기실 색시와 최는 모두 아내의 더블들이다. 그와 간밤에 관계를 가졌던 ‘색시’의 죽음은 아내의 죽음에 대한 환시(幻視)로 대체된다. 최가 고향을 언급하며 “아우라지강을 아세요”라고 언젠가 죽은 아내가 했던 말을 똑같이 사내에게 건넬 때, 최는 정확히 아내의 도플갱어로 확증된다. ‘미세스 최’란 인물은 철저히 대리보충적인데, 그녀는 지난 2년간 중풍환자 회장의 ‘인간 핫 팩’으로서 그가 결여한 혹은 상실한 온기, 활력, 고향의 따스함을 대리보충 해왔다. 그 역할은 사장 아들이 특파한 상무에게 끌려가면서 회장이 손에서 놓아 버린 낡은 사진과 기능적으로 같다. 또한 그녀는 남자에게는 죽은 아내의 대리보충이며, 마지막에는 오구굿 중 신내림을 받음으로써 영혼에게 몸을 주는, 사령(死靈)들의 대리보충 역할이 된다. 결국 남자의 주체성의 위기는 복구되지 않으며 파국을 맞는데, 그것은 죽은 아내의 대리보충으로써는 온전한 애도작업을 완수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완수되지 못하는 개인적인 동시에 집단적인 애도작업은 신내림의 형태로 최에게로 전이되며, 민족적 해원의 무게는 그녀의 무속 연행에 맡겨진다. 이장호의 80년대 작품 연보에는 사회적 참여의식이 강한 리얼리즘 계열의 영화들과 대중추수적인 흥행 영화들, 그리고 작가의식이 녹아든 영화들이 교차했다. ‘황토빛 모노크롬 영화 한편 찍고 싶다’는 로망을 실현하고자 이장호가 직접 제작한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는 처음부터 지방흥행업자들의 투자를 받을 생각이 없었다. 그 결과 그의 작품연보에서 그리고 한국영화사에서 아주 낯설고 특별한 순간을 만들어 내었다. >>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 고화질 VOD 보러가기 <<
한국적인 영화란 무엇인가? 영화 < 한네의 승천 >(1977)을 보면서 이런 질문을 떠올렸다. 하길종 감독의 어떤 다른 영화보다 덜 표현적이지만, 이 작품은 더 전통적인 표면을 가지고 있다. 극작가 오영진이 발표한 ‘의례3부작’ 중 동명의 이야기를 각색해 완성된 시나리오로, 주인공은 동네 머슴 만명( 하명중 분)이다. 그는 신세를 비관해 자살하려고 하는 한네( 전영선 )를 구해내 자신의 움막으로 데려온다. 언뜻 소재 면에서는 영화는 전통극의 전형처럼 보인다. 그런데 연이어 등장하는 ‘환상 시퀀스’가 내러티브의 구조를 바꾼다. 모더니즘 방식으로 몽타주된 무성의 모노톤 화면들이 영화의 전체적인 감상을 뒤흔든다. 단언컨대 <한네의 승천>은 관객들의 기대를 거스르는 영화일 것이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장르적인 ‘초현실주의’나 ‘환상영화’ 등으로 소급해서 소개하기는 어렵다. ‘문예영화’라고 분류되는 것에서 짐작하듯, 특정한 영화언어를 구현하기 위해 만든 작품은 아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한(恨)’을 소개하는 통속적 민속극과 다르게, 영화는 인물이 아닌 ‘이야기’ 중심으로 서사를 다룬다. 기억의 ‘주체’가 일정하지 않고 바뀌어서 소개되는 것도 특징이다. 어쩌면 이 영화의 현대성은 당대 ‘<영상시대> 그룹’이 도전했던 ‘새로운 영화언어 찾기’의 과정으로 이해하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 총 두 가지의 회상장면 중 첫 번째는 한네가 주인공이다. 그녀에 따르면 자신은 어떤 ‘아저씨’의 선택으로 부모와 떨어져 생활하게 됐다. 이후 원치 않은 곳을 떠돌며 살았고, 그 과정에서 삶의 목표를 찾았다. “어디로 가려고?” 묻는 아저씨의 질문에 그녀는 “꽃신을 신어야지요”라고 답한다. 추상적이지만 숭고한 이상향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 회상은 만명의 것이다. 어린 만명을 보면서 “쌀밥 먹고 싶지?”라 묻던 다정한 어머니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어느 바람 부는 아침에 그녀는 ‘선녀’가 되어 그의 곁을 떠났다. 만명의 기억에서 어머니는 한네의 얼굴과 동일하게 묘사된다. 그런 그를 보면서 한네가 말한다. “서방님은 나와의 인연이 아니라, 어머님의 아들일 뿐이다”라고. 이 두 번째의 회상 이후에 일상은 조금씩 어긋난다. 영화에는 ‘환상 같은 현실적 장면들’이 차례로 등장하는데, 그 장면들 모두에 ‘한네와 닮은 여성들’이 나타난다. 만명이 마주치는 빨간 옷의 ‘술집작부’가 대표적이다. 그녀가 살해당하는 과정은 그야말로 꿈인지 생시인지 알지 못할 정도로 혼돈스럽게 그려진다. 그리고 한네를 ‘만명의 어머니’라 착각하는 재수 영감( 황해 )의 환상에도 그녀의 얼굴이 등장한다. 기필코 감추려던 늙은이의 불순한 만행이 그 여린 얼굴을 통해 세상에 드러난다. 생각해보면 ‘한네’는 단 한 번도 땅 아래에 뿌리내린 적 없는 캐릭터다. 실존적 인간으로서 그녀는 소개되지 못한 채 스크린에서 사라진다. 애초 ‘놀이패’ 생활을 하던 어린 시절도 그랬고, 아저씨를 따라 나선 이후에도 그녀는 정착한 적이 없었다. 이곳 ‘선녀동’에 당도한 후로도 마치 선녀처럼 생활했다. 단적으로 그녀의 새 공간인 ‘만명의 방’으로 카메라는 다가가지 못한다. 마치 ‘헤스티아의 신전’을 그리듯 영화는 그곳은 금줄 쳐진 터부시된 공간으로 묘사한다. 욕망 그득한 프리아포스들이 그 장벽을 깨려고 하지만, 모두 내쳐진다. 그녀는 상징적인 처녀로서 생을 마감한다. 만일 표현이 아닌 기억이나 주관적 시점 등의 ‘환상 시퀀스’가 이 영화의 특이점을 드러낸다면, 영화 외향이 내부적 요인들과 상충되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길종 감독은 마치 아이스킬로스라도 된 듯 한국식 리얼리즘을 그리스식 비극으로 연출한다. 그가 운명을 선호하는 감독이라 생각했던 적은 없지만, 적어도 이 영화의 양식에서 우리는 서구 비극의 운명성을 감지한다. <한네의 승천>이란 제목부터 아이러니를 감추고 있다. ‘로망스’를 꿈꾸며 시작된 영화가 ‘불안’을 끌어당기기 때문이다. 어쩌면 감독이 전작 < 수절 >(1973)이나 < 바보들의 행진 >(1975)에서 겪었던 과격한 행정 검열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미학적인 자기검열을 행한 것인지 모른다. 소재가 아닌 구조의 영역에서, 이 모든 내부의 이야기들이 상쇄되어 가리어진다. 주인공이 겪는 자기징벌적인 사랑의 행로는 결국 외향적인 전통의 틀과 어긋난다. <한네의 승천>을 한국적 영화라고 소개하기 어렵다는, 간단하지만 역설적인 첫 인상을 소개하려고 먼 길을 돌아온 것은 아니다. 다만 이 작품의 과격하고 구조적인 발상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어쩌면 최근의 한국영화가 겪는 경계에서의 함정을, 이 작품은 기묘하게 비켜나간다. 고의적으로 작성된, 날카롭고도 잔인한 프레임을 지닌 심플한 드라마를 바라본다. 이 극이 비록 설득력을 갖지 않고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하더라도, 시대가 비켜야할 함정을 영리하게 뛰어넘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이건 일종의 게임일 수 있다. 점점 더 지능적이 되어야만 하는 새로운 시대의 영화에 대해 <한네의 승천>은 일종의 우화로서 작용한다. >> 한네의 승천 VOD 보러가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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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시대 감독들과 검열 | 77건 | 2025-03-19 | 2025-02-1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