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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 공연예술과 검열 제도 <1> (한국영화사연구소 2009 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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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 공연예술과 검열 제도 <2> (한국영화사연구소 2009 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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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지 시대 공연예술과 검열 제도 <4> (한국영화사연구소 2009 심포지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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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충무로까지, ‘기계 만지던 것을 좋아했던’ 편집 김영희
전문직 여성 기술 스태프로서의 편집기사 편집기사 김영희(金英姬)를 조명하는 것은 한국영화를 추동한 큰 힘이었지만 잘 드러나지 않았던 기술 인력의 존재를 한국영화사에 기입한다는 큰 의미가 있다. 특히 2007년 김영희의 구술채록은, 감독이나 배우를 중심으로 하는 한국영화사 연구의 작가주의적인 비평의 전통을 벗어나 한국영화사의 이면과 빈 곳을 채워줄 수 있는 연구방법론으로서의 구술사의 힘이 더 발휘될 수 있는 작업이라 하겠다. 주요 스태프들보다는 ‘뒷 스태프들’(편집, 미술, 특수효과, 녹음 등)의 구술을 보다 더 충분하게 채록하는 것은 이런 의미를 갖는다. 더불어 김영희를 상세히 기록하는 일은 씨네-페미니즘의 틀로 한국영화사를 재구성할 때 간과할 수 없는 전문직 여성 영화인의 존재와 그 역사에 대한 재발견이기도 했다. 근현대 한국 사회의 공적인 영역에서 여성의 활동이 많지 않았던 데다가 얼마 안 되는 여성 전문인의 역사적 자취를 찾기 힘든 것처럼, 영화계에서도 여성 전문 인력이 활발하게 활동한 공적인 기록을 찾기는 쉽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1980년대까지 여성 영화감독은 박남옥, 홍은원, 최은희, 이미례 네 명뿐이었고, 여성이 영화계에서 담당한 분야는 주로 배우였다. 그나마 일부가 연출부, 시나리오, 스크립터, 의상과 편집의 분야에서 활약했다. 특히 한국에서도 여성이 기술 인력으로서 전문성을 담보하고 분야로서는 편집뿐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진 1, 2] 서울 미공보원 시절 편집하는 김영희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시작한 영화 인생 김영희가 영화인의 길로 들어선 것은 큰 언니(김갑순)의 남편인 촬영기사 양세웅의 덕분이었다. (양세웅의 딸 양성란도 김영희에게 편집을 배웠으니 가히 영화인 집안이라 해도 무리는 아니겠다.) 그녀는 1924년 충청도 공주에서 김동화와 김옥봉의 6녀 2남 중 다섯째 김옥례로 태어났다. 운송업에 종사하던 아버지 덕분에 꽤나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전라도 순천으로 이사 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광주고녀를 다니고 있을 때만 해도 그저 노래 부르기를 즐겨 하고 영화 보기를 좋아하던 소녀였다. 김영희가 광주고녀 재학 중에 가족은 서울 청량리로 옮겨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가세가 기울자 자신의 학업은 포기하게 되고 큰언니의 부탁으로 형부의 손에 이끌려 일제의 군국주의 선전영화를 제작하던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게 된 것이었다. 19살이 되던 1943년부터 1970년 즈음까지 김영희는 수백 편의 문화영화, 뉴스영화, 기록영화와 극영화를 편집하며 27년 가량을 현역에서 활동했다. [사진 3, 4] <춘풍>(박기채, 1935)의 한 장면(상)과 스태프 사진(하). 이 영화로 박기채는 연출로, 양세웅은 촬영으로 조선영화계에 출사표를 던졌다. 도아키네마에서부터 수련을 같이 한 이 둘은 이후 콤비가 되어 활동했다. 김영희의 형부 양세웅(1906~?)은 일본 교토의 1924년 도아키네마(東亞キネマ) 촬영부에 입사해 영화를 시작했고, 동활영화(東活映畵) 촬영부에서 다년간 촬영을 연마해 1932년 조선인 최초로 촬영기사가 되었다. 귀국 후 양세웅은 <순정해협>(신경균, 1937). <군용열차>(서광제, 1938), <한강>(방한준, 1938), <애련송>(김유영, 1939), <새출발>(1939), <처녀도>(1939)에 이르기까지 1930년대 후반 촬영기사로 맹활약하면서, 조선의 촬영 기술을 도약시키는 데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사진 5, 6] 귀국 후 양세웅이 촬영한 작품 <순정해협>(신경균, 1937)의 한 장면(상)과 영화 <한강>(방한준, 1938) 속 장면(하) 1940년대부터 양세웅은 친일영화 제작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1941년 <반도의 봄>(이병일)의 촬영을 담당하고 있었는데, 노래를 잘 불렀던 17세 김영희는 큰언니의 추천으로 이 영화의 주제가를 부를 기회가 있었지만 형부의 반대가 심했다. 대신 그는 처제를 조선영화주식회사 촬영소의 현상실 조수로 취직시켰다. 김영희가 출근하던 조선영화주식회사 현상실은 광희동(본사는 남대문 근처)에 있었다. 그는 현상과 편집을 하던 양주남 밑에 있었다. 먼저 현상 기술을 익히고, 곧 양주남이 책임지고 있는 편집실에서 편집 조수로 일하게 되면서 영화계에 입문한다. 조선영화주식회사에 막 들어가자마자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해변 장면에 엑스트라로 출연하기도 했던 에피소드가 있지만 이 영화는 그녀가 처음 네가 편집을 한 영화가 될 줄은 몰랐다. [사진 7, 8] 김영희가 주제가를 부를 수도 있었던 <반도의 봄>(이병일, 1941)의 촬영 스틸(상), 그리고 처음 네가 편집을 한 영화인 <조선해협>(박기채, 1943)의 한 장면(하) 해방이라는 열린 시공간 속에서 조선의 영화 인력들은 민족영화 제작을 향한 의지를 가지고 새로운 일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때 김영희는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조선영화주식회사 시설에서 후반작업을 하고 있던 최인규의 <자유만세>(1946)의 편집조수를 했다. 1946년부터 1년 간 김영희는 ‘이필우 프로덕션’이라고 회고하는, 중앙청에 위치했던 미군정청의 공보부 영화과로 자리를 옮겨 문화영화, 기록영화, 뉴스 등에 자막을 입히는 작업과 편집을 담당했다. 그러다 짧은 미군정기가 끝날 무렵인 1947년 이필우의 권유로 미공보원(USIS)으로 자리를 옮겨 편집기사로 함께 일했다. 6.25 전쟁 당시 곧바로 피난을 가지 못해 인민군 100일 적치(敵治)의 서울에 있었다. 그때 강홍식에게 평양국립촬영소로 권유를 받았지만 거절하고, 보위국에 끌려가 자술서를 쓰는 등, 중앙청 공보실의 편집실에서 북한군에게 9일 동안 북한군의 전쟁 촬영분에 대해 편집을 강요당했다. 식민지 시기, 해방, 건국과 한국전쟁을 겪는 동안 김영희는 무비올라 앞에서 조선-일본/한국/미국 영화를 잘라 붙이고 있었다. [사진 9, 10] 진해와 상남 시절 미공보원에서 일하는 김영희 인천상륙작전이 성공리에 이루어지자 그 틈을 타 북한군에게서 탈출하여 숨어 지냈는데, 이때 형부 양세웅은 북으로 갔다는 말을 들었다. 1950년 12월에 미공보원이 진해로 피난하면서 김영희도 공보원을 따라 진해로 왔다. 이후 계속 진해(2-3년), 상남(2년)에서 미공보원에서 편집기사로 근무했다. 그러다가 1955년 즈음에는 1년가량 진해의 해군 교재창(敎材廠)에서 교육영화를 편집하기도 했다. 이때 미공보원이 제작한 <주검의 상자>(김기영, 1955)를 촬영하러 온 최무룡과 강효실을 만난 일도 있다. 진해와 상남에서 일하던 김영희가 충무로와 연을 맺은 것은 잠시 서울에 올라왔던 길에 일주일 간 이규환의 <춘향전>(1955) 편집을 담당해준 덕이었다. 이 즈음 충무로는 폐허를 딛고 활력을 띠기 시작했는데 김영희는 아예 서울로 터전을 옮겨 와 이만흥의 <결혼진단>(1955), <원한의 성>(1955)를 시작으로 극영화에 본격적으로 투신했다. 1 이 시기 아시아재단의 지원으로 정릉에 만들어진 정릉촬영소에서 2년 간 편집 일을 하기도 했다. [사진 11] 해군 교재창의 편집실 모습 충무로 입성, 신필름 편집실 생활 [사진 12, 13] 김영희가 편집한 <춘향전>(이규환, 1955)의 한 장면(상)과 <원한의 성>(이만응, 1955)의 신문 광고(하) 2, 3년 간은 알음알음 충무로의 호텔을 전전하며 <백치 아다다>(이강천, 1956), <황진이>(조긍하, 1957), <무영탑>(신상옥, 1957) 등을 편집했다. 편집 1세대 양주남, 유재원을 이어 김영희는 편집 2세대라 할 수 있는 김희수, 이경자, 김덕진 등과 함께 1950년대 후반과 1960년대 충무로 극영화를 맹렬히 이어 붙였다. 1958년부터 4년 간 신필름 편집실로 출퇴근하면서 편집조수로 박양자와 조카 양성란을 편집 인력으로 키워내며 바쁜 나날을 보냈다. 이 시절 <어느 여대생의 고백>(신상옥, 1958), <지옥화>(신상옥, 1958), <촌색씨>(박영환, 1958),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1961), <서울의 지붕밑>(이형표, 1961), <성춘향>(신상옥, 1961), <연산군(장한사모 편)>(신상옥, 1961) 등 신필름의 작품 대부분이 그녀의 손을 거쳤다. 좀 더 전문적이고 적극적으로 편집 일을 하기 위해 충무로 3가 스타다방 맞은편에 김영희 편집실을 차리고 독립한 그녀는 1970년 영화계를 떠날 즈음까지 120여 편의 크레딧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 14, 15] 신필름 편집실에 근무하던 시절, 조카 양성란과 함께 편집한 신상옥의 <열녀문>(1962) 속 장면들. 이 영화로 김영희는 제2회 대종상 편집상을 수상했다. 스타다방 옆 김영희 편집실, 인서트의 재발견 1편당 5만원을 받고 한 달에 서너 편씩 편집을 했던 1950년대와 1960년대는 밤낮없이 김영희 편집실이 돌아가던 시절이었다. 당시는 어떤 편집 기계를 썼던 것일까, 극영화 편집 규칙과 스타일은 어땠을까. 감독과 편집자의 관계란 어떤 것이었을까. 미공보원에서 일했던 그녀는 스플라이서(splicer)와 무비올라(moviola)를 일찍이 접했다. 충무로에 개인 편집실을 내고 극영화를 편집했던 1960년대에는 조선영화주식회사와 미공보원에서 근무한 경험을 살려 직접 편집대를 주문⋅제작해 돋보기와 스플라이서로 편집을 하였다. 완성된 16미리 영화의 경우는 본인이 소유한 영사기에 돌려보고, 35미리의 경우는 영사기가 있는 곳으로 가서 시사했다. 편집에 철두철미했던 신상옥, 신중하게 생각하고 또 생각하는 조긍하와 이강천 감독 같은 이들은 김영희가 재촬영을 요구해도 용인해 줄 정도로, 믿고 맡기는 편집인으로 그녀를 택했다. 이 시기 편집의 장면 전환은 커트(cut)-커트(cut)로 연결되어 급박하게 전환되는 편집 스타일보다는 부드럽게 장면이 전환되는 방식이 더 선호되었다. 그래서 페이드인(fade in)-페이드아웃(fade out)과 오버랩(over lap)을 사용하여 ‘스무쓰(smooth)’한 장면 전환 능력이 편집자에게 있어 가장 요구되었다. [사진 16] 조긍하 감독 [사진 17] 이강천 감독 “편집을 하면서 느끼는 점인데요. 왜 감독들이 「인서트·카트」를 쓸 데에다 안 쓰느냐 하는 것을 역설하고 싶어요.” 2 인서트(insert)는 영화에서 극의 흐름을 전환하고 또 잠시 극의 속도를 조절하기 위한 휴지기를 주기 위한 장치로 연출자는 이를 종종 은유적인 방식으로 사용해 자신의 미학을 드러내기도 한다. ‘스무쓰(smooth)’한 편집이 대세였던 당시 김영희는 감독들에게 인서트 장면의 삽입을 제안하곤 했다. ‘화면이 부드럽고 좋기’로 입소문을 타자 인서트 장면이 필요한 감독들은 종종, 촬영 시에 충분히 인서트를 따놓지 못해서 난감할 때 그녀를 찾았다. 특히 기록영화에서 길게 찍어 두었던 설경, 바닷가 모래사장 경치, 석양의 풍경 같은 것은 하나 둘 모아두었다가 연출자가 특정 장면을 요구하거나 극의 흐름을 조절하기 위해 편집기사들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인서트 커트가 삽입되는 경우가 있었던 것이다. 단풍이 짙은 명산, 비 오는 서울 거리 같은 커트는 촬영기사들의 손에서 만들어져 항상 편집실 한쪽에 걸려있었다. 우리가 쉽게 넘겨버렸던 혹은 감독의 미학으로 불렸던 소소한 그 인서트는 어쩌면 편집기사의 손에서 만들어졌던 장면이었을지 모른다. 충무로의 걸출한 그녀들, 삼바가라쓰(さんば-がらす) [사진 18, 19] 1984년 충무로의 '삼바가라쓰' 김영희와 박남옥(상), 김영희와 홍은원(하)의 사진 김영희: 인제 남옥이랑 웬만큼 알게 되니까요. 그리고 역시 감독, 여감독이라놔서 그런지 서로 신경이…… 나도 응, 홍은원 씨 보고 싶고, 또 홍은원 씨는 또 김영희라는 사람을 보고 싶고. 이러니까 저 서이가 인저 만나노니까 ‘삼바가라쓰’ 3 라고 서이서 아주 그냥 정이 들어가지고, 면담자: ‘삼총사’ 이런 말이에요? 김영희: 예, 삼…… 여자니까 삼총사 이런 말은 못하고, 우리는 일본말로 ‘삼바가라쓰’. <중략> 서이서 잘 돌아다녔었어요, 만나서. 그때 친해진 게, 여자니까 서로 기냥 말도 못 하게 친해지드라고요. <중략> 그니까 지가 바쁠 때는 “야, 홍 감독. 자고 가라, 우리 집에 가서 자자.” 그러면 “느이 영감 있는데……” “영감, 저 방에 가라 그러고 나하고 자면 되잖아.” 이러면서 지냈었어요, 서로가. 우리 집에 오면 또 영감님하고 얘기도 잘하고요, 말이 통하니까. 그리고 응, 오면은 같이 밥도 먹고, 드뤄 눠 자고, 차도 먹고, 이러고 참. 남옥이는 남옥이 대로 바뻤지만은, <중략> 서이 만나노면 아주 그냥, 남옥이가 그냥 사내 같이 굴었어요. (웃음) <중략> 그런 정도로 우리는 그렇게 지냈지, 뭐 감독, 편집기사 이런 정도로서, 따악 한계를 지어놓고 일을 한 게 아니었었어요. 4 김영희의 구술문을 보면, 남성의 활동이 단연 독보적인 영화 제작현장에서 여성영화인들 간의 공적 사적 교류와 우정에 대해서 전면화하는 구술들이 있다. 이 부분이야 말로 여성영화인들의 구술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부분인데, 가정을 가진 동시에 같은 직종의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 우정과 일을 어떻게 함께 병행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미망인>(1955)을 만든 박남옥 감독과 <여판사>를 만든 홍은원 감독은 충무로의 ‘삼바가라스’였다. 홍은원의 작품 <홀어머니>(1964), <오해가 남긴 것>(1966)은 친구 김영희의 손을 거친 것이었다. 이 뿐만 아니라 1970년대에 배우를 제외한 여성 스태프들만의 모임이었던 영희회는 남성적인 영화 제작현장에서 여성 스태프의 권익을 위해 모였다. 김영희의 구술을 통해, 역설적으로 바로 그러한 이유 때문에 남성적인 작업 환경 속에서 비교적 보조적인 역할의 직업군에 종사하는 직업 생명이 짧은 여성 스태프들은 모임을 지속할 여건이 되지 않았고 그로 인해 모임은 아쉽게도, 곧 와해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진 20, 21] 홍은원의 <홀어머니>(1964)와 <오해가 남긴 것>(1966)의 포스터. 두 작품 모두 김영희가 편집을 담당하였다. 격변의 시기 국가기관과 영화, 그 속에서 활약한 영화인 김영희 공식적으로는 이봉래의 <역전파출소>와 <장미의 성>(1969)를 마지막으로, 1970년 즈음 그녀 나이 마흔 아홉에 편집실을 접었다. 1940년대 후반부터 27년을 재봉틀 같은 편집기 앞에 앉아 바느질 하듯 밤낮없이 일을 했고, 이 중 15년은 충무로에서 극영화를 자르고 붙였다. 조선영화주식회사에 입사하여 인화와 현상을 익혔고, 워낙 ‘기계에 관심이 많아’ 영사 일도 배우고, 결국은 양주남의 편집조수를 하면서 어깨너머로 편집을 배웠다. 일본인 스크립터에게서 일본에서는 어떻게 편집을 하는지 들어보고, 외국영화를 보면서 편집하는 방법들을 공부했다. 김영희의 영화 인생은 역경의 정치적인 상황 속에서 국가 기관과 관련해 그 줄기를 연명해왔던 한국영화사 제작 인력들의 굴곡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일제치하의 조선영화주식회사에서 근무하던 상황과 광복 후에는 다시 미국의 영향 하에 군정청 공보부 영화과에서 일하던 주변 상황, 이후 미공보원으로 다시 재편⋅흡수되었던 제작 인력들의 활동 경로가 그녀의 행보에서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그녀는 연출자가 요구하지 않아도 인물의 행동 시간을 스스로 계산해서 맞추고, 조심스럽게 편집 순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고, 보다 안정적이고 ‘스무쓰’한 극의 흐름을 위해서 인서트 필름을 요구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모두는 그러한 것이 영화의 원활한 흐름과 조화를 최우선 원칙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편집자의 능력으로 꼽았다. [사진 22, 23, 24] 김영희가 충무로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편집한 이봉래 감독의 작품 <역전파출소>(1969)와 <장미의 성>(1969) 숨겨진 여성영화인의 역사, 한국 최초의 여성 편집기사 김영희 편집기사 마가렛 부스(Margaret Booth, 1898~2002)는 1915년 데이비드 그리피스의 네가편집자로 함께 일하면서 <동도Way Down East>(1920)의 명장면을 만들어냈고, 1919년에는 MGM으로 가 일하면서 할리우드의 편집 규칙을 만들어갔다. 5 제인 게인즈가 언급했던 것처럼 무성영화기를 비롯, 192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여성 영화 인력의 활약은 눈부셨다. 그들은 배우로, 감독으로, 제작사 사장으로, 편집자로 오늘날 못지않게 넓은 분야를 점령했었다. 6 숨겨진 영화사를 발굴해낸, 지난 100년 간의 여성 편집기사의 이야기들을 풀어놓는 <편집 : 여성 편집기사(Edited By: Women Film Editors)>(Su Friedrich, 75min.)에서 던지는 질문을 살펴보자. “<오즈의 마법사(The Wizard Of Oz)>(빅터 플레밍, 1939)를 편집했고, <알렉산더 네브스키([Alexander Nevsky]>(세르게이 에이젠슈타인, 1938)를 편집했고, <400번의 구타(The 400 Blows, 1959)>(프랑수아 트뤼포, 1959)를 편집했고, 아카데미 편집상을 가장 많이 수상했고, 그저 ‘자르는 사람(cutter)’을 ‘편집 기사(film editor)’라는 전문 분야 종사자로 명칭을 바꾼 사람.” 7 그렇다, 모두 여성 편집 기사였다. 한국영화 100년, 우리 영화사에서는 김영희가 그 처음이었다. 신필름 황금기, 신상옥의 많은 작품이 김영희의 손을 거쳤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글은 필자가 면담자로 참여한 구술, 「김영희 편」, 『한국영화를 말한다 : 한국영화의 르네상스 3』, 한국영화사연구소 엮음, 한국영상자료원, 2007과 「원로 여성영화인의 삶을 듣는다는 것의 의미: 편집기사 김영희와 이경자의 구술채록을 중심으로」, 『영상예술연구』 vol. 18, 2011을 참고해 재구성하였다.) 1) 김영희의 구술과 달리, KMDb에는 <춘향전>의 편집은 이성파로, <구원의 정화> 편집은 홍일명으로 되어있다. 2) 「예술의 주변 8 : 영화편집의 마무리 김영희 영사 필름 다루어 20년」, 『경향신문』, 1962년 3월 20일자 4면. 3) 삼바가라스(さんば-がらす), 어떤 분야에 특출한 세 사람을 말한다. 4) 심혜경·김영희, 『2007년도 원로영화인 구출채록 자료집 : 김영희 편』, 한국영상자료원, 125∼127쪽. 5) Kristen Hatch, "Cutting Women: Margaret Booth and Hollywood’s Pioneering Female Film Editors." In Jane Gaines, Radha Vatsal, and Monica Dall’Asta, eds. Women Film Pioneers Project. New York, NY: Columbia University Libraries, 2013. https://wfpp.columbia.edu/essay/cutting-women/ 6) Girish Shambu, “Hidden Histories: The Story of Women Film Editors”, https://www.criterion.com/current/posts/6582-hidden-histories-the-story-of-women-film-editors 7) 이는 프린스턴 대학 시각예술 교수이자 실험영화 작가인 수 프레드리히(Su Friedrich)가 만든 서베이 다큐멘터리로, 206명의 여성 편집기사들을 대상으로 조사한 프로젝트이다. 비메오(https://vimeo.com/310219288)를 통해 볼 수 있다. http://womenfilmeditors.princeton.edu 참고.
검열의 자의적 응시와 음화의 발견
<춘몽>(유현목, 1965)은 한국영화사 최초로 감독이 ‘음화제작혐의’로 기소되며 ‘음화(淫畫)’ 논란을 촉발시킨 영화다. <춘몽> 사건은 외설 음란에 대한 판례를 남겼고, 식민지시기 이후 검열에서 줄곧 ‘공안’에 가려져 있던 ‘풍속’ 문제가 대두하는 계기가 되었다. 1960년대 후반은 서구에서 시작된 섹스 혁명과 성 담론이 한국에도 유입된 시기였다. 불황에 직면해 있던 한국영화계에서는 이러한 물결과 조응하며 ‘섹스영화’ 2) 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러한 경향은 세계적 조류와는 반대로 나날이 강고해지던 한국의 검열과 부딪히며 음란 외설 논란이 일어난다. 이때 <춘몽>의 판례는 음란 외설을 판단하는 중요한 기준이 되었고, <내시>(신상옥, 1969), <벽 속의 여자>(박종호, 1969)와 같은 영화에도 적용되었다. 이후 그러한 기준은 박정희 정권기 내내 한국영화를 통어하며 수많은 ‘불허’와 ‘가위질’의 근거가 된다. ‘음화 반포’가 아닌 ‘음화 제조’ 1966년 1월4일에 유현목 감독은 ‘음화 제조’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다. 그 이유는 “1965년 5월 <춘몽>을 제작할 때 신인배우 박수정(25) 양을 ‘세트’ 안에서 완전 나체로 뒷모습을 촬영” 3) 했기 때문이었다. 두 달 후 유현목 감독은 유죄를 선고받게 되는데, 당시 신문에 공개된 판결 요지는 다음과 같다. ◇ 판결요지 음화제조 서양문화침투로 性의 개방풍조가 과거보다 높아 전통적 성 풍속 감정에 큰 변화를 가져온 것은 사실이나 유방 또는 신체 전부 내지 일부를 함부로 노출시키는 풍속 감정은 우리 사회의 전통에는 아직 찾아볼 수 없고 이러한 노출이 일반화되지도 않아 정상적인 대중에게 혐오 수치의 감정을 주고 선량한 사회의 성적 도의 관념을 파괴하는 한계를 넘어섰으므로 성적 도의와 사회 일반의 이익을 위해 이 점 한계를 그어야 한다. 따라서 지난 65년 5월 일본영화 <白日夢>을 번역한 <春夢> 제작 시 피고인이 여배우 박수정(25) 양으로 하여금 완전 나체를 명령하고 변태 성욕자에게 쫓겨 나체로 6초 동안 20피트나 쫓겨가는 장면을 필름에 담은 것은 음화를 제조한 것으로 인정한다. 4) 명분은 신체 노출의 풍속이나 전통이 아직 우리 사회에 없으므로 ‘정상적인 대중’에게 혐오 수치의 감정을 주기 때문에 음화 제조라는 것이었는데, 그 근거는 최종적으로 표출된 화면이 아니라 제작 과정으로부터 제시되고 있다. 즉 감독이 여배우에게 나체가 될 것을 명령하고 그것을 6초 동안 찍었다는 사실[음화 제조] 자체가 그 장면이 공개[음화 반포]되지 않았더라도 문제가 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점은 논리상으로는 억지나 궤변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논리 아닌 논리로 <춘몽>은 기소되었다.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이 사건의 경위와 그것이 일어난 맥락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용공(容共)에서 음화(淫畫)로 외설이나 음란을 규제하는 ‘풍속’ 차원의 검열은 식민지시기부터 있어온 것이었다. 그런데 식민지시기 규정에서도 ‘공안풍속(公安風俗)’으로 묶어서 명시하고 있듯이, 5) 풍속 검열의 범주는 외설이나 음란에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한국영화사 최초의 음화제조 유죄 판결’에 해당하는 <춘몽> 사건에서 영화 <춘몽>이 음화냐 아니냐의 여부가 사건 촉발의 핵심이 아니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1965년, <7인의 여포로>를 연출한 이만희 감독이 용공 혐의로 기소되자 유 감독은 이만희 감독을 옹호했고, 그러한 태도와 발언 때문에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되면서 <춘몽>까지 음화로 기소되었던 것이다. 1965년 7월13일 상오 검찰은 유현목 감독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입건, 구속 여부를 검토 중이라고 발표한다. 그 이유는 유 감독이 1965년 3월23일 한국본부 주체로 서울에서 열린 제21회 세계문화자유회의 문화 세미나에서 발표한 「은막의 자유」라는 글이 반공법에 저촉된다는 것이었다. 6) 「은막의 자유」는 앞서 반공법으로 기소된 <7인의 여포로>를 언급하며 영화 표현의 자유를 주장한 것이었다. 사실 유현목 감독은 월남한 개신교도로서 철저한 반공주의자였기 때문에 이 발표문도 반공을 부정한 것은 아니었다. 7) 그러나 이때의 검열은 그러한 진의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따져 보면 <7인의 여포로>를 용공 영화로 몬 것부터 말이 안 되는 일이었다. 당시 정권은 1963년 합법적 집권에 성공한 이후 한일국교정상화에 대한 반대 여론이 비등하는 가운데 영화판 길들이기에 나섰고, 평소 비판적인 발언에 거침이 없었던 이만희 감독이 마침 본보기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유현목 감독이 <7인의 여포로> 사건에 반기를 들고 8) 국제적인 포럼에서까지 이 사건을 언급하자 정권은 그의 글 중 일부를 트집 잡으며 또 하나의 본보기를 삼았던 셈이다. 당시 기사에 의하면 문제가 된 구절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한국의 작가는 국가적 현실 때문에 주체로서의 권리가 타의에 의해 침해당하고 있다. 아무리 한국적인 현실이 미묘하다 해도 몇 가지의 조문이나 법관복(法官服) 몇 벌의 위력만으로는 작가의 내면생활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다정다감한 작가에게 오늘의 정부는 국시에 위배된다는 명목으로 걸핏하면 무서운 눈초리를 보이거나 고랑쇠를 채우곤 한다. 9) 여기에서 결정적으로 빌미가 된 것은 “국시에 위배된다는 명목으로” 작가들을 부당하게 처벌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국시는 곧 반공(反共)이었고 ‘(영화예술에서) 반공이란 무엇인가?’와 같은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당시 정권의 관점에 의하면 국시[반공]에 반(反)하는 것이었으며, 그것은 결과적으로 용공(容共)이었다. 이에 1964년 말에서 1965년까지 한국영화계는 용공 논란에 휘말리게 된다. 그것은 ‘반공이 국시’라는 말이 얼마나 단순하고 포괄적이며 무자비한 권력이 될 수 있는가를 한국영화계가 인지하는 과정이었고, 모든 것에 최우선하는 검열의 원칙을 영화인들에게 깊이 각인시키는 계기가 된다. 10) 그러나 이러한 궤변이 법정에서 관철되기 어려워지자 그 불똥은 엉뚱하게도 형식실험에 치중한 영화인 <춘몽>으로 튀어 유현목 감독은 ‘음화제조혐의’로 기소되기에 이른 것이다. 요컨대 <춘몽> 사건은 검열 당국의 자의적 판단에 의한 용공 시비가 음란과 외설로 옮겨가며 식민지시기 이후 지속되었던 검열 기준에서 성적 표현의 문제가 대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림 1] 한국영화사에서 예술vs외설 논란을 일으킨 <춘몽>의 포스터. “희열과 번뇌의 신음에 젖은 쇽킹한 장면의 연속! 가면을 벗겨본 인간애욕!”, “완전이색의 예술명작”이라는 선전 문구가 눈에 띈다. 포스터 자체가 ‘외설’과 ‘예술’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는 듯하여 흥미롭다. [그림 2] 연극 무대를 연상시키는 <춘몽>의 한 장면. 이 영화는 일본 영화 <백일몽>(테츠지 다케치, 1964)을 리메이크했다는 것 때문에 처음에는 표절 문제가 불거졌으나, 나중에 음란 문제로 비화되었다 . <춘몽>이 음화(淫畫)가 되기까지 <춘몽>의 검열 서류를 통해 이 영화가 우여곡절을 거쳐 개봉하는 과정을 살펴보면, 한국영화사에서 최초의 음화 사건이 발생하는 상황이 보다 분명히 드러난다. <춘몽>의 제작사인 세기상사는 1965년 1월29일에 제작신고서를 공보부에 접수하는데, 4월22일에 제작신고가 반려된다. 그 이유는 <춘몽>이 일본영화 <백일몽>의 표절이고, 그 내용이 비속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부대 참고에서는 ‘비속하다’는 것을 “그 표현방법이 선정적”이라고 바꾸어 말하고 있다. [그림 3]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 반려」, 공보국 영화과, 1965.4.22. 그러자 제작사는 2월25일에, 저작자의 승인을 받은 ‘공연권 취득증명서’를 첨부하여 제작신고서를 다시 제출한다. 이때 제작사는 공보부장관 앞으로 「극영화 <춘몽> 제작에 대한 건의서」도 제출한다. 그것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앞부분은 작품의 제작의도를 설명하는 것이고, 뒷부분은 14개 항목에 걸친 자진 개작 부분을 상세히 밝히는 것이었다. 그 내용을 요약하자면, 앞부분은 <춘몽>이 이미지를 위주로 한 전위적인 영화이자 예술지상을 모토로 하는 유현목 감독의 실험작이라는 것이었고, 뒷부분은 건의서에서 개작하겠다고 한 14개 장면은 물론이고 다른 부분에 대해서도 상영허가 심사 기준에 저촉될 우려가 있을 경우에는 계속적으로 주의하여 촬영하겠으니 부디 제작을 허가해달라는 것이었다. [그림 4] 세기상사 대표 우기동, 「극영화 <춘몽> 제작에 대한 건의서」, 1965.4.24. 이 제작신고는 3개의 선정적인 장면을 삭제하거나 개작하라는 시정사항과 함께 5월13일에 수리 통보된다. [그림 5] 「극영화 <춘몽> 제작신고 수리통보」, 공보국 영화과, 1965.5.13. 그리고 5월24일 상영허가신청이 접수되어 5월26일에 필름 검열이 실시된다. 그런데 중앙정보부에서 재심을 요청하면서, <춘몽>은 상영이 허가되기까지 우여곡절을 겪게 된다. 그 경위를 기록한 공보부 서류를 보면 다음과 같다. [그림 6] 「邦畫 <春夢> 上映許可經緯」, 공보부 영화과, 1965.6.28. (원본) 1965년 5월26일 중앙정보부의 요청에 의해 재심이 실시되고 5월31일 중앙정보부에 의해 보류가 요청되어 영화분과위원회에서 심의가 다시 이루어지는데, 6월5일 다시 중앙정보부가 외설 부분에 대해 관계기관과 협의하라고 공보부에 요청한 것으로 보인다. 6월5일 중앙정보부 보안과에서 중앙정보부장 명의로 공보부장관 앞으로 보낸 「영화재심의견통보」에 의하면 “당부에서 영화 <춘몽>에 대한 재심 결과 그 내용이 자학적 변태성의 생태를 묘사한 것으로서 국민 대중으로 하여금 건전한 성도덕을 해할 우려가 지대한 것이며 형법 제243 및 244조에 저촉되는 것으로 사료되어 검찰기관과 협조하여 조치 함이 가할 것으로 사료됩니다.”라고 적혀있다. [그림 7] 「영화재심의견통보」, 중앙정보부 보안과, 1965.6.5. 이후부터 6월21일까지의 과정은 서류로 남아있지 않아 알 수 없으나, 적어도 공보부, 검찰, 그리고 제작사 사이에 일종의 조율과 타협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6월21일에 공보부 영화과는 중앙정보부장 앞으로 “세기상사 주식회사 제작품 <춘몽>에 대한 재심 의견에 관하여 본 작품이 외설이라 관과되는 부분은 영화법 시행규칙 제5조 규정에 의거 대폭 삭제하고 상영허가 조치할 것을 통보합니다.”라는 전언을 보낸다. [그림 8] 「국산극영화 <춘몽> 재심 의견 처리」, 공보부 영화과, 1965.6.21. 그 결과 6월30일자로 상영허가가 통보된다. [그림 9] 「국산영화 <춘몽> 상영허가」, 공보부 영화과, 1965.6.28. 이 서류에서 흥미로운 것은 공보부에서 서류 및 필름을 실사하고 요약한 <춘몽>의 내용이다. 여기에서는 <춘몽>을 ‘이색적 전위영화’로 기록하고 있다. 서류에 적힌 바를 옮겨보자면 <춘몽>은 “善男善女가 齒科에서 治療中 서로 알게 되자 各各 冥○○과 痲醉로서 意識을 잃게 되며 이에 따라 이들의 思惟作用으로서 時空을 超越한 人間性情이 極限相으로서의 幸과 不幸을 醫師를 介入시킨 三角關係로서 ○○하다가 結局 性으로서의 慾情的行爲에 破綻을 結末하고 無限한 悔恨에 울부짖을 무렵 意識을 恢復하여 意情을 풀어가는 異色的 前衛映畫”라는 것이다. 나름대로 줄거리 요약이기는 한데 문장이 어법에 맞지 않아 문맥을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다만 마지막 문장을 통해 <춘몽>이 검열관들에 의해 ‘이색적 전위영화’로 받아들여졌다는 것은 분명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상영허가 서류에는 ‘제한사항’으로 필름에서 다음과 같은 6개 처를 삭제하는 조건이 붙어 있다. [그림 10] 「국산영화 <춘몽> 상영허가」, 공보부 영화과, 1965.6.28. (제한사항 나와 있는 두 번째 페이지) 위 제한사항에 적혀있는 원색적인 어구들과 영화에 대한 몰이해를 드러내는 요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색적 전위영화’라는 결론적 명시는 너무 불균질해서 코믹하거나 그로테스크하게까지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모순 내지 불균질에는 1980년대 전반기까지도 외설에 관한 검열에서 지속적으로 작용하는 원리 아닌 원리가 들어있다. 검열관들은 이 영화가 제작사에서 주장하는 대로 전위적 실험영화임을 인정하는 듯하지만, 사실 검열관의 그러한 인정이 실제 가위질을 하는 단계에서는 전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제한사항을 통해 드러난다. 제한사항은 어차피 여성 신체의 일정한 부분은 노출할 수 없고, 폭행이나 기타 범법 장면도 보여서는 안 된다는 규칙에 따라 기계적으로 선별되기 때문이다. 전위영화라는 정체성 속에서의 그 장면들의 기능이나 역할 등은 전혀 고려의 대상이 될 수도 없고 그것을 고려할 수 있는 검열관도 없다. 검열관들은 시행규칙, 나아가 그것을 하달하는 행정적 검열권력의 시선과 요구를 의식하며 검열을 수행한다. 그 시선이 여성의 젖가슴 노출은 텍스트의 구조나 맥락에 상관없이 외설이라고 명령하고 있다면 일선의 수행자인 검열관은 설사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음란으로 바라보며 삭제할 수밖에 없다. 이는 영화 제작자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검열에서 외설로 규정되면 어차피 찍은 필름을 잘라내야 했기 때문에 애초에 그러한 장면을 찍지 않는 것이 가장 손해를 덜 보는 길이다. 그러려면 검열권력이 요구하는 기준에 따라 자진 검열이 사전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때 자진 검열의 주체는 이미 검열권력의 시선을 내면화하고 있다. 검열권력의 보이지 않는 시선을 의식하여 그가 원하는 대로 일정한 부분만을 응시하고 잘라내는 것 자체가 도착이다. 그런데 거기에는 검열권력의 도착적 상상력이 또한 작용한다. 여성의 젖가슴을 음란한 것으로만 바라보는 관점,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집착하는 페티시즘, 그래서 감시라는 명분으로 그것만을 엿보는 관음증(觀淫症)이 언제나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검열의 도착적 상상력 <춘몽>은 위와 같은 상영허가를 받고 1965년 7월3일 개봉한다. 그런데 개봉한 지 6개월이 지난 1966년 1월에 새삼스럽게 ‘음화제조’ 혐의로 감독이 기소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것이 외설의 문제만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사건을 통해 보여준 권력의 억지 내지 궤변, 즉 그것이 텍스트에 등재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세트 안에서 완전 나체로 뒷모습을 촬영했기 때문에 음화제조라는 판결은 검열권력의 도착적 상상력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이기도 하다. 검열권력은 언제나 텍스트를 보지 않고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만을 본다. 검열권력이 상상하는 세계에서 그것은 외설, 즉 보여서는 안 되는 것이 보인 것인데, 언제나 보여서는 안 되는 것만을 찾기 때문에 볼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든지 상상된 외설의 세계로 편입될 수 있다. 검열권력은 외설의 세계를 상상하기 때문에 외설을 더욱 철저히 금지하는 것이며 무엇으로든 외설을 볼 수 있기도 하다. 요컨대 유현목 감독에 대한 음화제조 판결은 권력이 오버(over)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언제나 일정한 부분 너머[over]를 음란한 것으로만 상상하는 권력이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했다. 이러한 원리 아닌 원리는 박정희 정권기 내내 한국영화를 지배한 것은 물론이고, 1980년대 신군분 정권에까지 답습되어 한국영화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1. 이 글은 박유희, 「검열이라는 포르노그래피」, 한국영상자료원 편, 『한국영화역사 속 검열제도』, 한국영상자료원, 2016.12, 159-168쪽의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2. ‘섹스영화’란 1960년대 말에 한국 신문에 등장하기 시작한 용어로, 처음에는 ‘불륜영화’를 대체하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1940년대 이후 사라졌던 ‘에로(티시즘)’라는 말이 영화와 합성되어 ‘에로(티시즘) 영화’로 재등장하면서 ‘섹스영화’와 ‘에로영화’는 거의 동일한 의미로 사용된다. 이후 1980년대까지 두 용어에서는 ‘팔기 위해 벗기는’ 저질 상업영화의 뉘앙스가 점차 강해진다. 3.《경향신문》, 1966.01.04.7면. 4. “영화 <춘몽>에 음화 판결”, 《동아일보》, 1967.03.15.3면. 5. 활동사진필름규칙 제5조에 의하면 “검열관청의 검열을 거친 필름으로서 공안 풍속 또는 보건 상 지장 있다고 인정할 때는 그의 영사를 제한 또는 금지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다. 6. “영화감독 유현목 씨 입건”, 《경향신문》, 1965.7.13.3면; “유현목 감독 입건/ 논문 「은막의 자유」 등 말썽”, 《동아일보》, 1965.07.14.3면. 7. 유현목 감독이 “반공의 국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것은 잘못 전해진 것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박유희, 「문예영화와 검열: 유현목 영화의 정체성 구성과정에 대한 일고찰」, 『영상예술연구』 17호, 영상예술학회, 2010, 201-203쪽 참조. 8. “이만희 감독 관대처분을”, 《경향신문》, 1965.02.08.5면. 9. “영화감독 유현목 씨 입건”, 《경향신문》, 1965.07.13.3면. 10. 박유희, 「문예영화와 검열: 유현목 영화의 정체성 구성과정에 대한 일고찰」, 『영상예술연구』 17호, 영상예술학회, 2010, 1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