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들
- 감독
- 파우 프레이자스
- 제작년도
- 2010
- 출연
- 알렉스 브렌데뮬, 엠마 수아레즈, 루이스 호마르, 에바 산토라리아, 네레아 카마초
KMDb 연재를 시작한 지 2년이나 되었다. 코로나 팬데믹이 지속되는 동안 연재와 함께 했다. 처음 기획단계에서 한국영화의 여성주의적 ‘정동’을 주제로 삼았고, 당시 양분된 반응을 얻었던 < 아워 바디 >로 연재를 시작했다. ‘정동’이란 주제로 연재한 마지막 글은 시작 같은 끝이 될 수 있는 영화로 고르고 싶었다. 그래서 한국영화사의 첫 여성감독인 박남옥이 연출한 < 미망인 >(1955)을 선택했다. 복잡하게 얽힌 오각관계를 재현하는 대화씬의 연출력이 빛나는 <미망인>은 거리를 방황하며 혼란스러움을 드러내는 발의 몽타주로 끝난다. 이 엔딩씬은 10분가량의 사운드와 마지막 장면의 프린트가 소실되어 있기에 아이러니하게도 그 방황을 영원히 끝낼 수 없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미망인>은 박남옥 감독의 첫 번째 영화이자 마지막 영화이다. 차기작에 대한 열망을 돌아가시기 전까지 갖고 있었다고 전해지지만 결국 그 꿈을 이룰 기회는 없었다. 1955년에 개봉한 <미망인>은 전후 여성들의 삶을 다루고 있다. 일제식민지와 한국전쟁, 그리고 미군통치 시기를 지나며 조선의 전통적 이데올로기는 균열이 나고 어느 정도 단절될 수밖에 없었다. 특히 전통적인 성역할은 현실적으로 급격하게 해체되는 수순에 이르렀다. 그것은 단순히 도덕이나 관습의 문제가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전통적인 성역할이 유지되기 위해선 경제권을 갖고 있는 남성 가부장이 유지되어야 하는데 많은 남자들이 참전 중 전사하거나 부상을 입은 채 돌아와, 가장이 된 여자들이 오롯이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경우들이 많았다. 또한 전후 미처 특정 체제가 구축되기 전 미군을 통해 유입된 새로운 문물의 파장도 있었다. 문학과 영화는 당시 전후를 묘사하기 위해 전통적 성역할에 도전하는 신여성들을 그리기 시작한다. 아프레걸(après-girl)이 그것이다. <미망인>뿐 아니라 동시대에 나온 < 자유부인 >(한형모)과 < 지옥화 >(신상옥) 등도 그러한 여성들을 그리고 있다. <미망인>의 주인공 이신자(이민자)는 전쟁 중 남편이 죽은 후 어린 딸을 홀로 키우고 있다. 신자는 딸과 함께 잘 살아 보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은 남편이 없다고 그녀를 우습게 본다. 옆집 여자 숙은 술 먹으며 빈둥대는 나이 든 옆집 남자와 신자를 엮어보려 하고, 남편 친구의 아내는 갑자기 집으로 찾아와 자기 남편에게 들이대지 말라고 협박한다. 그녀는 생활비가 모자라 돈을 빌리려던 신자를 극도로 경계한다. 신자는 남편 없는 설움을 겪는다. 이때부터 신자는 태도를 바꾼다. 어차피 자기의 감정과 욕망이 저자거리에서 다른 이들에 의해 쉽게 취급받을 바에야 정말로 좋아하는 남자와 사랑에도 빠져보면서 자기 생존에 유리한 방식으로 관계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신자는 무작정 순진한 여성도, 그렇다고 다른 영화들에서 묘사된 아프레걸처럼 치명적 매혹으로 남자들을 위험에 빠트리는 팜므 파탈도 아니다. 눈치 빠르고 생존력 강한 신자는 자신에게 성적으로 접근하는 유부남의 호감을 적절한 선에서 이용하고, 양장점을 운영할 만한 능력과 성실함이 있다. 이 과정에서 전후 여성의 관점에서 경제적 문제들이 치밀하게 묘사된다. 현물이든 인맥이든 자원이 없는 신자가 왜 남편친구인 이사장을 찾아갈 수밖에 없는지, 왜 사랑하는 딸을 자신이 키울 수 없고 모성과 사랑 사이에서 양자택일 하도록 강요되는지, 그리고 여성들 간의 불화와 연대는 왜 발생하게 되는지 등을 보여준다. 서사적으로는 신여성들을 도덕적으로 단죄하면서 시청각적으로는 그 여성들에 매혹되며 성적으로 착취하는 이중적인 태도가 이 영화에는 없다. 오히려 남편 있는 중상층 여자, 남편 없이 홀로 딸을 키우는 여자, 결혼하지 않고 혼자 사는 여자들이 각기 자기의 위치와 계급에서 어떠한 삶을 살고 욕망을 추구하며 꿈을 잃지 않으려 하는지를 보여준다. 모두가 ‘해바라기’인 이들은 각자가 위치한 계급과 가족구성에 따라 남성들과 각기 다른 관계를 맺는다. 세 여자가 택이라는 한 남자와 모두 성적 관계를 맺기 때문에 그 차이가 더 극명하게 드러난다. 신자는 애인과 딸, 그리고 사업적 성공 모두 갖고 싶다. 그러나 현실의 삶은 ‘미망인’인 그녀에게 어느 하나만을 선택하도록 강요한다. 이 영화는 신자가 그러한 선택의 강요 속에서 오래 갈등하는 것을 보여 준다. 영화는 “이웃에 이러한 미망인이 있었다. 수렁에 빠졌을 때라도 그는 해바라기였다”라는 자막으로 시작한다. 영화는 신자를 도덕적으로 판단하지 않으며, 관객도 섣부른 단죄 이전에 그가 무엇을 원하고 어떠한 선택을 하게 되는지 지켜봐줄 것을 요청한다. 신자는 전후 팍팍한 삶에서도 포기하는 삶보다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바라고 선택하는 생명력 있는 인간이다. 박남옥 감독은 각기 다른 위치에 있는 여성들뿐 아니라, 계급이 다른 남자들을 배치해 그들도 비교한다. 이사장은 유부남이면서도 은근슬쩍 돈을 이용해 신자에게 호감을 표명한다. 신자는 그 노림수를 알면서도 생활비와 사업비를 위해 그의 접근을 안전한 거리까지만 허용한다. 신자가 이사장과 고급 한정식 식당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장면은 상투적인 대화 장면인데도 이면에 서로 다른 의도들을 갖고 있다는 것을 관객들은 알기에 긴장감을 이끌어 낸다. 관객들은 오프닝에서 그의 아내가 신자를 찾아가 한바탕 대거리를 하고 돌아간 것을 이미 보았다. 그의 호감을 적절한 수준에서 받아내면서 신자는 그의 아내가 찾아온 사실을 전하고 오해를 불러 일으켜 유감이라고 한다. 관객들은 그의 호감에 기반 해 도움을 받으면서도 더 이상의 성적 접근은 분명하게 거절하는 신자의 대화기술 속에서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느낀다. 극장 간판을 그리며 혼자 사는 젊은 남성인 택(이택균)은 자신의 성적 매력을 이용해 다양한 계급과 조건의 세 여성 모두와 관계를 맺는다. 신자를 포함해 세 여자는 옴므 파탈인 이 남자에게 매혹 당한다. 택은 돈이 많은 이사장 아내의 불륜남으로, ‘미망인’인 신자의 애인으로, 전쟁 중 헤어졌던 옛 애인 진의 순정남으로 오고간다. 오히려 전후에 여자들을 이용해 살았던 것은 가진 것 없는 젊은 남성일 수 있다. 박남옥 감독은 ‘아프레보이’(après-boy)라고 불릴 만한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 낸다. 전후는 압도하는 폭력과 파괴가 휩쓸고 지나간 시간이지만, 또한 개인이 자기만의 윤리 속에서 선택의 기준을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는 때이기도 하다. <미망인>의 인물들은 전쟁 중 죽은 줄 알았던 애인(택과 진)과의 재회처럼 극적인 사건과 선택을 맞닥뜨린다. 이사장과 신자, 택과 이사장 부인이 술집에서 마주치는 장면은 복잡하게 얽힌 선택의 길에 놓인 인물들을 동선과 공간화로 보여준다.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넷이 따로 차에서 내려 대문을 지나 방으로 들어가기까지 정원길을 걸어들어가고 나오는 장면을 정성들여 보여준다. 그 길은 선택의 길이다. 먼저 들어온 택과 이사장 부인이 있는 방의 옆방에 이사장과 신자가 들어온다. 두 방의 교차편집이 진행된다. 이사장 부인은 택이 신자를 만난 것을 추궁하고, 이사장은 신자를 만나 자신의 아내의 외도를 알리며 신으로부터의 위로를 바란다. 그리고 먼저 방을 나온 신은 따로 나온 택과 그 길에서 만나 같이 나가버리고, 이사장 부인은 급작스럽게 만난 남편에게 냉대를 당한다. 신자는 택과의 사랑도 이루고, 이사장에게 투자도 받는다. 신자는 택과의 연애를 이어가기 위해 딸인 주를 동네 나이든 부부에게 맡기지만, 택은 옛 애인인 진을 만난 후 사라진다. 신자는 이후 양장점을 열고 경제적 독립을 이룬다. 신자가 낮에 소설책을 읽다 방에 누워 애인 택과 딸 주의 환상을 보는 장면은 신자의 욕망을 적나라하게 재현한다. 신자가 독백으로 읽어 내려가는 소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인은 그 사나이와 평생을 행복하게 살고 싶었지만, 그 사나이는 하루의 향락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여인은 큰 유리컵에다 진한 술을 붓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방바닥에 누운 신자 위로 디졸브된 택과 주가 교차로 편집된다. 신은 경제적 독립, 사랑, 가족 어느 하나 포기하려 하지 않는다. 신자는 신여성으로 방안 탁자에 놓여있는 액자 속 마를린 디트리히와 근대소설의 욕망하는 여성 주인공과 자신을 동일시한다. <미망인>의 마지막 10분은 안타깝게도 사운드가 손상되어 대사를 들을 수 없으며, 마지막 장면은 프린트가 완전히 소실되어 엔딩을 알 수 없다. 우리는 신자, 택, 진이 어떤 선택을 내렸는지 알 수 없다. 사운드가 없는 무성영화의 상태는 그들의 혼란스러움을 더 극명하게 드러낸다. 속상한 신자가 옆집 친구 숙과 술을 마시며 대화를 나누는 장면이, 진과 택이 함께 있는 장면과 교차된다. 그 술자리에서 어떤 대화가 오고가는지는 사운드가 소실되어 알 수 없다. 신자와 숙의 대화 장면은 깊은 고뇌에 빠진 척하며 홀로 방황하는 택 그리고 휘청대며 걷는 몽따주된 그의 발들과 교차편집 된다. 욕망의 대상을 뚜렷하게 알고 그것을 다 갖기 위해 달려가는 생존력 강한 신자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른 채 정처 없이 떠도는 무력한 택 모두 혼란에 빠진다. 미망인은 ‘(남편과 함께 죽어야 하는데) 아직 죽지 않은’이라는 뜻을 갖고 있다. 여자의 삶이 철저하게 남자에게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여기는 가부장제적 단어이다. 하지만 <미망인>은 남편이 죽은 후에도 자신의 주체적 삶을 살아가고 복잡한 현실과 욕망의 간극 속에서 갈등하는 신자를 매력적으로 그려낸다. 그녀의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스크린 위 여성들의 복잡한 마음이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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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
< 완다비전 >은 OTT 플랫폼인 월트디즈니플러스(이하 ‘디즈니’)의 오리지널 드라마이다. 총 9화로 구성된 <완다비전> 시즌1은 마블시네마틱유니버스 페이즈4(Marvel Cinematic Universe: Phase Four)의 첫 번째 드라마 시리즈다. 절대적 권능을 가진 인피니티 스톤을 모아 우주의 절반을 절멸시키려는 타노스와의 전쟁을 치룬 슈퍼히어로들의 모험을 그린 페이즈3는 < 어벤져스: 엔드게임 >(앤서니 루소·조 루소, 2019)을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아이언맨, 블랙 위도우, 비전 등 여러 슈퍼 히어로는 자신들의 죽음을 통해 타노스가 절멸시킨 우주의 절반을 되돌린다. 되돌릴 수 없는 죽음은 비극성을 띠며 영웅서사를 완성한다. 페이즈4는 그 이후의, 특히 멀티버스를 강조한 세계관을 그리고 있다. 첫 시리즈인 <완다비전>은 멀티버스를 이용해 트라우마와 회복을 서사화 한다. 타노스는 급증하는 인구에 비해 자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최대다수의 행복을 위해 모든 행성의 절반을 단 한 번에 절멸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다. 그가 공익을 위한다는 목적으로 야기한 재난은 전체주의적으로 인구를 통치하는 정치의 결과다. 그렇다면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영웅들의 세상을 구하는 방식은 어떤가? 그들 역시 사라진 인구를 원상태로 돌려놓는 것, 즉 숫자의 회귀에 집중한다. 그 이후 사람들이 어떠한 삶을 살아가게 될지에 대해선 관심이 없다. 회귀는 회복과 같지 않다. 그렇기에 블록버스터 프랜차이즈 시리즈로써 트라우마와 회복의 서사를 만들어 내는 <완다비전>은 분명 페이즈3와 다르다. <완다비전>은 미학적인 완성도나 세계에 대한 뛰어난 성찰을 보여주는 시리즈는 아니지만, 대중 플랫폼 시대의 메타서사와 팬덤으로서의 관객성을 텍스트 내외부에서 자기 반영적으로 현란하게 구사하는 놀라운 면모를 보여준다. 이것은 거의 MCU의 선언문과 같다. ‘사사로운 리스트’에 이 시리즈를 넣은 것은 이 시대의 대중 미디어 콘텐츠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는 점에서 놀라운 ‘아방가르드’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MCU가 그래픽노블, 피규어, 극장, 온라인 스트리밍 플랫폼을 넘나들며 영화를 제작·유통하고 팬덤을 구축하는 방식은 새로운 관객성을 만들어 내고 있다. MCU의 팬덤은 민족국가를 비롯해 장소에 기반 한 지역 공동체들이 더 이상 크게 영향력을 갖지 못하고 극장을 중심으로 한 관객성이 유지되지 못하는 가운데 국가경계와 플랫폼을 가로지르며 세계에서 가장 단단한 영상문화 공동체를 만들어 내고 있다. 고유의 개성과 능력을 갖고 있는 슈퍼 히어로 캐릭터들이 개별 영화와 드라마 시리즈를 가로지르며 서사를 상호교차하고 리부트하고 보철하고 있는 방식은 관람자들이 개입할 여지를 많이 남겨둔다. 슈퍼 히어로 캐릭터들도 상호교차 출연하면서 어떤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이었던 이가 다른 영화에서는 조연이 되고, 또 그 반대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원한 주인공도 조연도 없다. MCU가 계속되는 한 언제든, 심지어 죽은 이들도 다양한 방식으로 서사가 써 내려갈 수 있다. 캐릭터와 텍스트 모두 언제든 다양한 매체로 상품화될 수 있는 콘텐츠가 되고, 그 콘텐츠의 중심은 캐릭터들이다.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완결된 닫힌 서사가 아니고 언제든 변형가능하고 유연한, 그리고 평행 우주가 발생할 가능성이 많은 콘텐츠로 이루어진 영화적 우주에는 끊임없이 생성하고 확장할 여지가 있다. 어떤 우주가 되었든 (미래에 캐릭터와 콘텐츠가 추가되면서) 늘 그보다 더 큰 우주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더니즘 시대에는 기존 체제의 해체와 성찰 혹은 진리의 장소였던 개방성과 사이-공간은 이제 도래할 콘텐츠로 빼곡히 채워질 공간이 된다. 심지어 페이즈3에서 가장 인기가 많았을 뿐 아니라 <어벤져스: 엔드게임>에서 가장 극적인 영웅적 희생을 보여주며 진정한 주인공이 된 아이언맨도 다음과 같은 대사를 듣는다. “스타크 씨, 당신은 더 큰 우주의 일부일 뿐이에요. 아직 모를 뿐이지.” 늘 더 큰 우주로 열린 가능성과 그들의 복잡하면서도 유연한 관계성 때문에 MCU 팬은 슈퍼히어로들과 조연으로 보이는 캐릭터들의 네트워크에 참여 가능한 것처럼 느낀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노력과 투자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노력을 통해 얻은 특별한 ‘능력’이야말로 MCU의 영화적 우주 네트워크에 참여 감각을 높여준다. 그것은 바로 MCU를 읽어 내기 위한 리터러시이다. 끊임없는 확장을 위해 잉여공간을 만들고 그를 통해 이윤을 생산하는 자본주의가 영구엔진을 믿는 것처럼 MCU는 지속적으로 수많은 슈퍼 히어로와 서사들을 양산하고 있고 그들 간의 관계도 쉽게 파악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하다. 멀티버스는 그러한 경향을 강화한다. MCU 팬은 그 우주에 참여하려면 해당 텍스트 그 자체만 소비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매해 양산되는 영화와 시리즈를 감상하는 것만으로도 많은 시간과 돈이 들지만, 별도로 해당 텍스트 밖에서 그들의 개성과 관계에 대한 정보를 습득하고 더 나아가 남들의 이해를 돕는 콘텐츠를 부가적으로 생산한다. 그래서 MCU 팬은 기본적으로 메타적이고 생산적인 성격을 가질 수밖에 없다. 한 영화학자는 이러한 MCU 관객성을 “연속성의 리터러시(literacy of continuity, 패리 댄츨러)”라고 개념화한 바 있다. MCU 팬덤은 MCU가 지속되고 확장되기 위해 필수적이다. 그들은 개별적인 텍스트들이 복잡하게 연결되며 배치되는 가운데 그 빈 간극을 메워주며 연속성을 유지시켜준다. 이들은 다양한 장르, 매체, 플랫폼을 오가는 와중에도 그 모든 이벤트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다양한 스타일들을 읽고 쓸 수 있는 능력을 발전시키고 박식한 정보를 모으고 공유한다. 단순히 트랜스미디어 스토리텔링의 방식으로 서로 다른 텍스트들이 서로의 빈자리를 메워주는 것이 아니라, 관객들이 각 텍스트가 지닌 상징, 기호, 의미를 적극적으로 밀도 있게 독해하며 그것들을 상호텍스트적으로 네트워킹한다. 이러한 작업을 위해선 많은 에너지를 투자할 수밖에 없고 투자를 회수하기 위해 다시 MCU를 소비하게 된다. 그렇기에 관객의 적극적 리터러시는 MCU의 확장과 응집력을 만드는 데 필수적이다. 또한 그들의 참여감각은 현실에서는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공동체성을 시뮬레이션 한다. MCU의 관객성은 리터러시가 높고 메타적이지만 그렇다고 역사적 성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공동체 감각을 강화하는 연속성은 영화적 우주가 잠재적으로 확장 가능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세계 바깥을 더 이상 상상 불가능하도록 만든다. 역사적 성찰은 바깥의 사유를 통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MCU 팬덤의 리터러시는 슈퍼히어로의 슈퍼 파워 같은 것이 된다. 그리고 이 슈퍼 파워는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 성장 가능한 것이다. 페이즈3에서 남성 영웅들이 장애를 갖거나 허약한 신체에서 기술적 보철을 통해 무적의 영웅으로 성장하는 서사가 많은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들의 ‘능력주의’ 성장서사, 팬들이 리터러시를 키워며 MCU에 점증적으로 몰입하는 활동, MCU의 확장은 그 자체로 평행/멀티 우주를 구성한다. 여기서 장애는 비정상성/능력 없음이 되고 비장애는 정상성/슈퍼 파워가 된다. 장애가 있는 신체를 대가로 MCU가 연속성과 확장성을 얻게 된다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나온 페이즈4의 <완다비전>은 매우 흥미롭다. 제목 ‘완다비전’은 다중적 의미를 갖는다. 스칼렛 위치 완다(엘리자베스 올슨)의 비전, 즉 완다가 바라보는/보고 싶은 세상일 수도 있고, 완다가 만든 연인 비전을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고, 아니면 완다와 그의 연인 비전이 만든 가상세계를 가리키는 것일 수도 있다. 이 드라마의 초반 에피소드들은 매우 낯설고 혼란스럽다. 미국 텔레비전 문화의 역사와 MCU에 대한 정보와 정동이 모두 필요하기 때문에 ‘시네필’과 같은 높은 리터러시를 요구한다. 완다는 ‘엔드 게임’에서 연인 비전(폴 베타니)을 잃는다. 그런데 비전을 잃는다는 문장 자체가 말이 안 될 수도 있다. 비전은 골격과 외장부터 세포단위까지 무한 재생력을 가진 비브라늄이라는 합성소재로 만들어진 인공적인 포스트휴먼이기 때문이다. 사실 비전은 남성처럼 묘사되고 남성 배우가 연기하지만 그의 성별과 외양도 어쩌면 결정된 것이 아닐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의 트랜스젠더들은 가장 많은 영감을 받는 MCU 슈퍼 영웅으로 비전을 택한다고 한다. 그럼에도 인간 완다는 비전의 상실과 트라우마 그리고 애도를 주제로 드라마를 만들었다. 포스트휴먼을 상실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 드라마는 깊이 탐색한다. 완다의 트라우마는 비전만이 아니라 동유럽 이민자 가족으로서 오빠 퀵실버와 그리고 다른 가족들의 상실이 축적되어 발생한 것이다. 동유럽 이민자와 인공생명체의 애도는 왜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가. 어떻게 애도가 가능한가. 왜 백인 남성영웅 아이언맨에 대한 애도는 ‘엔드게임’ 내내 중요하게 다뤄짐에도 인공생명체인 비전이나 러시아계 여성영웅 블랙 위도우는 그 죽음의 의미가 제대로 서사화되지 못했는가. 완다의 슬픔과 분노는 단지 비전을 잃었다는 사실 뿐 아니라 그의 죽음이 공동체 내에서 제대로 애도되지 못했다는 것, 아니 애초에 애도불가능성에 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애도의 이중적 불가능성, 즉 애도불가능성이 애도되지 못하는 것이다. 비전은 비브라늄이라는 신소재만 있으면 언제든 재생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다. 고전적인 죽음이 불가능하다는 의미다. 완다는 비전을 상실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런 면에서 사건의 완료가 불가능하다. <완다비전>은 과잉된 메타성, 혹은 빠른 속도로 급증하는 하이퍼매개성을 특징으로 하는 MCU와 같은 콘텐츠들이 도래할 메타콘텐츠들로 인해 외부가 불가능하고 그래서 성찰적 비평이 불가능함을 텍스트 내적으로 서사화한다. 완다는 비전을 다시 만들어내 자신의 가상공간을 만든다. 그 가상공간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 여전히 아메리칸 드림과 교외의 이성애 ‘정상가족’ 신화를 믿었던 시대에 만들어진 1950-60년대 시트콤을 오마주한다. 흑백에서 칼라까지, <Mary Tyler Moore Show>, <I Love Lucy>, <The Dick Van Dyke Show>, <Bewitched> 등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정상성’에 편입되기 힘든 인공생명체인 비전과 마녀인 완다는 아이들까지 낳으며, 정상가족을 시뮬레이션 한다. 사실 그 시트콤들은 당시에도 정상가족이 신화라는 것을 이미 드러낸 바 있다. 이 코미디들은 ‘정상성’을 슬로건으로 걸면서도 넘어지고 부딪히는 신체 코미디와 말실수, 농담, 각자 맡은 성역할에의 무능함 등으로 ‘정상성’의 불가능성을 노출시킨다. 중산층의 존중받는 직업을 가진 모범적인 남편과 그를 보살피고 위로하는 전업 가정주부인 아름다운 아내, 그리고 장난꾸러기인 귀여운 아이는 사실 그 자리에 잘 적응하지 못해 늘 해프닝과 슬랩스틱 코미디를 만들어 낸다. 완다의 아버지는 동유럽 이미자 출신으로 미국 텔레비전 쇼가 담긴 해적판 DVD를 파는 일을 했고, 완다와 오빠 퀵실버는 부모가 일을 하러 나간 사이 그 DVD를 보며 자랐다는 설정을 갖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미국의 정상가족에 들지 못한 완다의 매체적 정동을 드러내는 콘텐츠들이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정상적인’ 백인 중산층 가족을 다룬 프로그램들이 된다. 회복을 위해 바깥으로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매체메타성을 작동시키며 완다는 점점 텍스트 내부로 진입한다. 완다의 비전은 결국 종말을 맞을 수밖에 없다. 시트콤에서 매우 중요한 장치가 되는 ‘제 4의 벽’이 늘 존재하기 때문이다. <완다비전>은 매체성찰적이고 매체고고학적인 모더니즘 영화들이 해오던 작업을 진지하게 수행한다. 메타성의 바깥을 끊임없이 사유하고 텍스트 내로 끌고 들어온다. 외부가 되는 즉시 내부가 되는 그런 방식이다. 드라마에서 완다는 결국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제 4의 벽을 뚫고 나온다. 그러나 여전히 외부의 사유, 즉 ‘비브라늄’이라는 소재의 조건(이중적 애도불가능성의 트라우마)과 ‘이민자’라는 위치를 사유할 여력이 남아있는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우리에게 또 다른 멀티버스가 도달할 것이고 또 다시 재현체계 안으로 주름 접힐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늘 사유는 지연되고 성찰성은 포르노가 된다.
재일 교포 2세인 양영희 감독이 < 디어 평양 >(2005)과 < 굿바이 평양 >(2011)에 이어 < 수프와 이데올로기 >를 개봉하면서 가족 3부작을 완성했다. <디어 평양>이 조총련계 간부로 일한 부모님, 특히 일제식민지, 한국전쟁, 냉전이라는 탈식민적 역사를 통과하며 자신의 신념을 형성해온 아버지와 그의 행보를 향한 양가적 감정을 다뤘다면, <굿바이 평양>은 평양에 사는 조카 선화를 중심으로 그들 가족의 일상을 친밀하게 보여준다. 최근작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홀로 남은 어머니의 사적 역사를 다룬다. 세 영화는 양영희 감독이 그의 가족을 이해하기 위해 만든 사적 영화인 동시에 남북한과 일본을 둘러싼 탈식민적 역사에 대한 정치적 영화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영화는 다채로운 감정들로 가득 차 있다. 양영희 감독은 고집스럽고 냉철한 카메라로 거침없이 가족의 친밀한 초상을 그려낸다. 그의 카메라는 비판적 거리를 유지하는 가운데서도 가족들을 역사 속 한명의 주체로 인정하며 그 선택을 이해하려는 노력과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 양영희 감독의 부모는 제주도에서 태어났지만 각기 다른 이유로 일본에 와 결혼하고 오사카에 정착했다. 양 감독의 아버지는 일본의 차별을 온 몸으로 체감했고, 그때 재일 조선인들에게 관심 갖고 지원을 해준 북한의 편에 서게 된다. 그리고 조청련 간부로서 당시에는 경제적으로 남한보다 더 나았던 북한으로 세 아들을 보낸다. 양영희 감독도 어린 시절 조총련계 학교에서 조국 북한에 충성해야한다는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양영희 감독은 성인으로 성장하고 부모에게서 독립하면서 아버지와 사이가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오빠들을 북한에 보낸 아버지를 원망한다. 오빠들이 북한에서 잘 사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어 평양>은 아버지에 대한 애증과 적응에 힘들어하는 오빠들에 대한 애상으로 가득 차 있다. 그러나 양영희 감독은 끈질기게 아버지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아버지는 비극적 역사의 한복판에 있었고 그때마다 자신과 가족에게 최선으로 여겨지는 선택을 해왔다. 평양은 이전에는 자신의 신념의 기반이 있는 곳이었지만 이제는 가족들이 사는 장소로 고향 같은 곳이다. 양영희 감독은 어쩌면 카메라를 매개해 아버지를 비로소 이해한다. 아버지도 카메라가 있고 나서야 자신이 무슨 마음으로 그러한 선택을 했는지 그리고 어떻게 변화해왔는지를 표현한다. 카메라의 매개는 가족들이 서로를 이해하는 장치가 되며, 여러 감정이 실린 가족들의 얼굴은 정치적이고 역사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단초가 된다. <굿바이 평양> 역시 북한을 다룬 어떤 영화보다도 더 친밀하고 애틋하며 솔직한 카메라를 매개해 교육받고 공인된 얼굴 이면의 다른 북한 주민들의 얼굴을 포착한다. 관객들은 모두 선화가 자신의 꿈을 이루길 열렬히 응원하게 된다. 마지막 작품인 <수프와 이데올로기>는 고집스러운 아버지와 자신 사이에서 그리고 일본과 평양의 가족을 뒤에서 묵묵히 지원했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어머니는 자신의 신념을 따르는 데 몰두했던 아버지 대신 가족 경제를 도맡아 오다시피 했다. 양영희 감독은 제주 출신인 어머니가 일본에 건너오게 되고 조선국적을 택하게 된 이유를 듣게 된다. 어머니가 조선국적을 택한 건 단순히 아버지를 따른 것이 아닌 그의 선택이었다. 어머니는 십대 시절 제주 4.3사건을 겪게 된다. 그녀의 약혼자를 포함해 친척과 동네 사람들이 ‘빨갱이’로 몰려 학살당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그녀는 당시 어머니가 살던 일본으로 동생들을 데리고 목숨을 걸고 밀입국해 오사카로 넘어오게 된다. 어머니는 한국 사람이라면 치가 떨렸다고 말한다. 그것은 신체에 각인된 분노와 불안이다. 그래서 딸인 양영희 감독에게도 4.3 사건에 대해 오랫동안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 양영희 감독은 그제야 어머니가 자신의 세 아들을 북한으로 보내고 조총련 간부로 오래 일하고 나이 들어서까지 자신의 생활비를 쪼개 돈과 선물을 평양에 있는 가족으로 보내는 이유를 이해하게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들과 조카 선화 모두 한국 근대사의 비극 속에서 최선의 결정을 내리며 용감하게 생존해온 것이다. 가족에 대한 이해는 곧바로 역사에 대한 이해가 된다. 영화는 어머니가 4.3 사건을 기억해 내고 구술하는 상황과 양영희 감독이 결혼하게 될 일본인 남편 카오루를 맞이하고 둘이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병행해 보여준다. 가족이 되고 서로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딸이 결혼하길 바랐지만 일본인 사위는 안 된다고 했던 어머니는 어떤 거부감도 없이 카오루를 친절하게 받아들이고 카오루는 그런 어머니를 알뜰히 보살핀다. 엄청난 양의 마늘이 들어간 어머니의 삼계탕에 반한 카오루는 그 비법을 전수받는다. 어색함과 이념적 차이, 역사적 장벽은 깊고 따뜻한 국물 속에서 녹아내린다. 양영희 감독은 3부작을 통해 ‘가족’이란 무엇인가, 가족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가족 사이의 갈등과 차이를 어떻게 대면할 수 있을까를 질문한다. 어머니가 사위 카오루를 받아들였다고 해서 일본의 차별을 다 이해하고 용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한 4.3 재단이 어머니의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고 해서 자신의 애인과 친척들을 위협하고 죽였던 한국을 모두 용서할 수도 없을 것이다. 이제야 자신이 4.3사건 2세대라는 것을 알게 된 양영희 감독도 어머니를 완전히 이해하기란 어렵다. 심지어 어머니는 얼마 후 노환으로 알츠하이머에 걸려 기억을 잃어간다. 그 옆에는 온전히 이해하지 못해도 어머니의 슬픔과 분노, 불안을 포착하려는 양영희 감독의 카메라가 있다. 제주 4.3 기념관을 방문해서도 어머니는 제주에서의 기억을 제대로 떠올리지 못한다. 그의 얼굴은 피곤하고 때때로 무표정하다. 그러나 양영희 감독은 어머니에게 말 걸기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지금 기록하는 것이 그의 시선이라는 것도 숨기지 않는다. 어떤 면에선 카메라가 지나치게 밀어붙이고 집요해 고독하다는 느낌도 든다. <디어 평양>과 <굿바이 평양>을 개봉한 후 양영희 감독이 방북금지를 당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실제로 타자를, 특히 가족을 이해하려는 카메라는 외로워질 수밖에 없다. 이해하려는 노력에 있어서는 ‘꺾이지 않는 마음’이 중요하다. 그것이 아무리 지루하고 고통스럽고 때로는 외면당한다 해도 말이다. 그렇게 양영희 감독의 카메라는 영웅적인 면모를 띤다. (관련글) 1. 소진과 이상한 기운 - <아워 바디>(2018), 2021.04.23. 2. 의심의 씨앗과 취약한 영웅들 - <도희야>(2013), 2021.05.21. 3. 여름밤 초록색 전구불빛이 가만히 당신을 응시할 때 - <남매의 여름밤>(2019), 2021.06.18. 4. 당신의 안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 - <내가 죽던 날>(2019), 2021.07.16. 5. 피해와 가해의 알레고리 - <소리도 없이>(2019), 2021.08.13. 6. 돌봄의 정동 - <우리집>(2019), 2021.09.10. 7. 유년과 재난 - <벌새>(2018), 2021.10.22. 8. 목격의 시간 - <휴가>(2020), 2021.11.19. 9. 한평생 이야깃거리가 된 삶을 찢고 나온 웃음소리 - <임신한 나무와 도깨비>(2019), 2021.12.17. 10. 이름을 불러 닿는 시간 - <윤희에게>(2019), 2022.01.14. 11. '혼자'의 정동 - <혼자 사는 사람들>(2021), 2022.03.15. 12. 억압의 체제와 닫혀있는 여자들의 세계 - <궁녀>(2007), 2022.04.13. 13. 소원성취, 환상, 실재 사이의 어딘가에서 - <팬지와 담쟁이>(2000), 2022.05.18. 14. 몫과 값 그리고 경계물 - <82년생 김지영>(2019), 2022.06.24. 15. 실종의 감각과 징크스의 미학 - <오마주>(2022), 2022.07.21. 16. 레즈비언 편집술, 혹은 시계가 된 여자 - <연애소설>(2002), 2022.08.19. 17. 탐정-엄마의 각성하는 모성 - <비밀은 없다>(2016), 2022.09.16. 18. 시간과 정념의 지층을 찾아서 - <누에치던 방>(2018), 2022.11.04. 19. More or Less - <모어>(2021), 2022.12.09. 20. 이름을 지우고 살아남기 - <안나-감독판>(2022), 2023.01.09. 21. 우리에겐 따뜻한 국물과 유머가 필요하다 - <수프와 이데올로기>(2021), 2023.02.07. 22. 아직 끝나지 않은 - <미망인>(1955), 2023.0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