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시간 영화제
- 감독
- 김지원
- 제작년도
- 2012
- 출연
- 김수철, 이인희, 김경철, 김혜진, 이원호, 앵무새
2020년대의 ‘한국 독립영화’는 가능한 문제일까? 사사로운 기분으로 한 해를 돌아보는 지면에 어울리지 않는 난데없고 거창한 질문이다. 하지만 2020년대의 절반을 지나치는 이 시점에 짚어볼 만한, 그리고 한국 독립영화의 관객인 우리에게도 여전히 불투명한 질문이라고 느낀다. 대체 2020년대는 무엇일까? 2010년대를 여는 첫해에 낯설고도 특별한 다큐멘터리 < 보라 >(2010)를 공개한 이강현 감독은 2010년대의 마지막 해에 낯설고 특별한 극영화 < 얼굴들 >(2017)을 개봉한다. 개봉 당시엔 누구도 생각할 수 없었지만, 이 영화는 2023년 3월에 사망한 이강현의 마지막 작업이 되었다. 그는 <지도를 만드는 사람>이라는 제목의 영화를 제작하고 있었지만 미완의 기획으로 남았다. 공교롭게도 <얼굴들>이 개봉한 이듬해 세계는 대규모 전염병이 일으킨 코로나 팬데믹 시기를 통과하게 된다. 갑작스럽게 도래한 사회적 거리두기와 전면 봉쇄, 흰 마스크가 표상하는 대면의 불가능성과 접촉 금지는 우리를 불투명한 얼굴(들)과 비대면의 세계로 이끌었다. 텅 빈 영화관과 차단된 연결. 전염병의 유행은 수많은 얼굴을 차단하는 형태로 세계를 재구성했다. 한 영화감독의 때 이른 죽음과 전 세계를 뒤흔든 전염병 사태는 물론 서로 무관한 사건이다. 하지만 우연히 맞물린 두 사건을 겹쳐두는 데서 2020년대 한국 독립영화가 잃어버린 것과 되찾은 것의 틈새가 있다. 그것은 얼굴이다. 이강현이 포착한 ‘얼굴들’과 전염병이 봉쇄하고 차단한 ‘얼굴(들)’을 몽타주하는 것은, 영화 속의 얼굴이라는 공통의 기반이 무너진 시대의 표상에 대한 한 가지 단서를 마련할 수 있다는 가설을 소환한다. 세계는 얼굴이 보이지 않는 불투명하고 미스터리한 대상이 되었다. 영화가 여전히 얼굴과 또 다른 얼굴을 결합하는 것으로 의미를 생산하는 장치라면, 두 얼굴을 결합할 수 없는 시대의 영화는 무엇을 표상으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한낮의 공원에서 짧은 시간 동안 벌어지는 풍경의 변화를 묘사하는 손구용 의 < 공원에서 >는 인간의 얼굴을 중심에 두지 않는다. 그의 카메라는 마치 곤충학자 같은 시선으로 비인간적이고 비인칭적인 장소의 단면을 소묘한다. 한 여자가 벤치에 앉아서 시집을 읽고, 한 남자는 나무 근처에서 서성인다. 하지만 그들의 독서와 배회는 명확한 목적을 갖는 행위로 결정되지 않고 끝없이 지연된다. 그들은 계속해서 시집을 읽고 나무 근처를 움직인다. 공원에는 빛이 드리운 잔디밭과 나무, 물을 내뿜는 분수, 돌아다니는 고양이, 구름이 지나가는 하늘이 있다. 영화는 장면들 사이에 오규원의 시 「뜰의 호흡」의 텍스트를 삽입한다. 얼핏 일상적이고 평범한 장면들이 반복되는 것처럼 보일지 모른다. <공원에서>는 시간과 공간의 단면을 무작위적으로 이어 붙이는 듯 보인다. 영화의 카메라는 엇비슷한 몇몇 장면의 연쇄로 세계를 정밀하게 포착하는데, 미묘하게도 연속된 장면들이 영화에 도입하는 효과는 역설적이다. 그것은 눈에 비치는 세계의 불확실성을 덧씌운다. 카메라는 정밀하게 단면을 포착하지만 그럴수록 영화가 지각하는 세계의 총합은 모호해진다. 관객은 장면의 구체적인 세부를 하나씩 지켜볼수록 카메라 앞에 놓인 공원이 어떤 공간적 구조로 이루어진 것인지, 장면과 장면이 어떤 시간 관계로 접속하는 것인지 파악하기 까다로워진다. 영화를 구성하는 모든 숏은 그 자체로 투명하기 짝이 없으면서도 아이러니하게 다른 모든 숏과 관계 맺을 수 있는 모호한 비결정의 상태에 위치한다. 세계는 한없이 열린 미확정적인 상태로 팽창하는데, 팽창하는 시공간은 물리적으로 닫혀 있다. 모든 것을 선명하게 보여주고 들려주는데 정작 어느 것도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는 세계가 펼쳐진다. 손구용은 다큐멘터리적인 상상의 세계라는 형용 모순의 가능성을 발명한 것 같다. <공원에서>는 오후의 공원이라는 일상적 시공간의 이미지를 포착하는 단순한 작업이면서 동시에 그 이미지들을 반복적이고 무작위적으로 배치해 방향감각을 상실한 영화적 시공간으로 재구성하는 추상적 실천이기도 하다. 정독도서관 전경이라는 구체적 현실은 영화가 새롭게 창출한 허구적 질서 속에서 픽션화된다. 영화는 현실의 정돈된 질서를 훼손하고 현실의 단면을 프레임 안에 집어삼킨다. <공원에서>의 허구적 프레임 속에는 아름다운 풍경과 흉한 구도가, 현실의 기록과 추상적 형상이, 빛의 움직임과 물의 흐름이, 문학의 문장과 영화의 화면이, 물리적으로 선행하는 시간과 감각적으로 멈춰 있는 시간이 공존한다. 장면이 하나씩 덧붙여질수록 <공원에서>의 고정된 지각은 거듭해서 위태로워진다. 화면에 담기는 풍경은 카메라에 포착된 장소의 이미지이지만, 물이 튀기는 수면을 가까이에서 찍은 장면처럼 구체성이 존재하지 않는 순수한 이미지의 한 단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 영화가 창안하는 공간은 깊이감이 부여된 실제 공간이지만, 구름이 지나가는 흑백의 하늘을 찍은 장면처럼 깊이가 제거된 모노크롬의 평면처럼 보이기도 한다. 일반적인 분류를 따르자면 이 영화는 세계를 기록한 다큐멘터리에 속하지만, 결코 세계를 있는 그대로 담아낸 작업은 아니다. 손구용은 반복된 숏의 조합 아래서 거의 시간이 흐르지 않는 것처럼 행위를 지속하는 세계를 창조한다. <공원에서>는 일상적인 속도로 움직이는 장면을 조각내어 배열함으로써 한없이 느리게 지속되는, 마치 정지한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을 직면하게 한다. 영상 매체인 영화의 시간은 불가피하게 장면 위에서 진행되고 있지만, 인물의 행위와 공원 전경의 총합은 달라지지 않는다. 흐르는 물과 움직이는 빛처럼 끊임없이 움직이고 변화하지만 장면은 계속 같은 자리에 놓여 있다. 그리하여 질문은 영화의 근원적인 속성으로 향한다. 화면의 움직임에 기반한 영화는 정말 변화하는 시간을 포착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이 얼굴 없는 영화는 한 뼘 더 나아가 우리가 알고 있던 영화를 지우고 우리가 지각하지 못하던 또 다른 규칙의 영화를 창조하는 작업에 가까워진다. 무엇보다 <공원에서>의 매혹은 단지 구조적이고 개념적인 영화적 세계를 창조했다는 측면에만 달려 있지 않다. 이 영화는 영화적 프레임 안에서 재구성된 세계의 풍경을 눈으로 보게 만들고, 세계의 소음을 귀로 듣게 하는 지극히 쾌락적이고 감각적인 영화이기 때문이다. 관객은 여기서 이미지를 보고 사운드를 들으며 영화의 가장 기초적인 실천을 생경하게 다시 마주한다. 이 영화는 얼굴이라는 공동의 기반을 잃어버린 오늘날의 영화가 지탱할 수 있는 장소가 감각적 공동체의 장소일지도 모른다는 점을 환기한다. 한국 독립영화의 2020년대가 얼굴의 투명한 결합을 상실한 비대면의 시간이라고 가정한다면, 우리는 얼굴이 아닌 다른 매개로 영화를 활성화하기 위한 몸짓을 발명할 수밖에 없다. <공원에서>는 인간 중심적 서사의 습관이 달라붙은 장면을 활용하는 동시에 공원 곳곳에서 생겨나는 비인간적인 얼굴들의 생경한 표정을 나란히 배열한다. 이로 인해 영화가 다루는 얼굴과 장소의 초점은 다수의 형상으로 분리되고 인간의 얼굴에 초점을 맞추는 세계의 질서는 무너진다. 숏이 창출하는 순열과 조합의 수학적이고 감각적인 질서가 그 자리를 대체한다. 손구용은 단 하나의 현실을 한없이 길게 늘어뜨리지도 않고, 극단적 감각으로 채워진 현실이 카메라 앞에 존재한다고 강변하지도 않으며 세계에 대한 지각적 반응을 매 순간 조정하고 갱신한다. <공원에서>는 비인격적이고 비인칭적인 시각을 매개로 인간의 얼굴을 다시 만나게 한다. 카메라와 풍경을 매개로 지켜본 시각에서 공원 속 인간의 표상은 마치 영화에 불시착한 외계인의 모습처럼 낯설어진다. <공원에서>는 한 편의 영화가 단독적인 얼굴과 얼굴의 결합이 아니라 인간의 시간과 풍경의 시간과 영화의 시간을 허구적 공간 위에 배합하는 것으로 성립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혹은 다르게 말할 수도 있다. 손구용은 인간중심적 감각에서 이탈한 낯선 얼굴들의 결합을 통해 불투명한 상태에 머물러 있는 영화의 몸짓을 갱신한다. <공원에서>는 쾌락적이고 감각적인 영화의 수단을 동원해 인간적인 얼굴의 특권을 무너뜨린다. 나는 작년에 공개된 한국영화 가운데 정재훈 의 < 에스퍼의 빛 >(2024)과 더불어 <공원에서>가 보고 듣는 감각의 경험을 낯설게 재배치하는 얼굴 없는 영화의 연대기를 작성했다고 말하고 싶다. 우리는 어쩌면 이 영화들로부터 2020년대의 한국 독립영화를 다시 가늠해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김병규(영화평론가) l 2018년 《Filo》 신인평론가에 선정되고 《씨네21》 영화평론상을 수상하며 비평을 쓰기 시작했다. 만든 영화로 단편 < 늦은 산책 >(2023), < 오후 >(2023)가 있다.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연재를 시작한지 2년이 되었고 완성은 커녕 시작도 제대로 못한 오디오 비주얼 에세이를 마무리 지을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간보다 더 쏜살 같은 건 우리 자신이며 한국영화고 시네마 그 자체다. 사실 시간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다. 우리는 시간을 볼 방법이 없다. 움직이는 초침을 보거나 스마트폰의 숫자를 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와 세계를 관찰할 수 있다. 첫 연재 분에서 금정연과 나는 서교동의 콜마인이라는 카페에서 대화를 나눴다. 연재를 위한 기획회의 자리였다. 그리고 지금 카페 콜마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카페 직원과 관련된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고 폐업했으며 그 자리엔 오버트라는 이름의 다른 카페가 들어섰다. 그 사이 니콜라스 케이지가 부활의 신호탄을 알린 영화 < 미친 능력 >이 개봉했고(졸작) 최동훈의 야심작 < 외계+인 1부 >가 개봉했고(ㅠㅠ) 장 뤽 고다르와 장 마리 스트라우브가 죽었다. 그 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다쳤고 서울 아파트 집값이 떨어지기 시작했고 루나코인의 권도형은 도망자가 됐으며 일론 머스크가 트위터를 샀고 윤석열이 해외 순방을 다니고 문재인이 추천한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됐다. 한 친구에 의하면 문재인과 윤석열은 오바마와 트럼프의 거울쌍이다. 우리는 거울에 비친 모습을 그림자처럼 질질 끌고 다닌다. 완전히 다르지만 완전히 같은 존재, 현실이 아니지만 현실인 곳에 존재하는 또 다른 자아가 픽션처럼, 이미지의 세계 속에서 우리를 조종하고 예견하고 습격한다. 2022년이 끝나가는 지금, 극장에 걸려있는 한국 영화는 < 압꾸정 >, < 데시벨 >, < 올빼미 >, < 인생은 아름다워 >, < 동감 >, < 우수 > 등이다. 내 주변에 이 영화들을 본 사람은 없고 보러갈 사람도 없다. 한국 영화는 괴멸한 것처럼 보이지만(내 주변에서) 잠시 그렇게 보일 뿐인지도 모른다. 며칠 전 청룡영화상에서 박찬욱의 < 헤어질 결심 >이 상을 독차지한 것을 생각해보라. 1960년대 TV의 습격으로 사망선고를 받은 영화는 십년 후 블록버스터 군단으로 세계 문화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러니 OTT도 게임도 두려워할 것 없다. 전 세대의 거장들이 죽었다는 사실에 우울해할 것도 없다. 그보다 더한 거인들도 일찍이 명을 다했지만 영화는 끄덕하지 않았다. 영화는 영웅들의 놀이터가 아니다. 영화는… 영화는……. 지그프린트 지린스키는 과거의 영화를 임대업으로 간주했다. 영화의 본질은 돈을 받고 2시간 동안 특정 공간의 좌석을 대여해주는 것이다. 그에 반해 TV는 사람들이 기계를 소유할 수 있다는데 방점이 찍힌다. 그러므로 TV는 가구이며 인테리어 업종이다. 디지털 이후에는 문학적인 텍스트에만 해당했던 선택적인 명령과 속도, 중단 가능성, 반복에의 의지, 표시와 보관할 수 있는 능력에 의해 영화 그 자체가 소유되고 이용되기 시작했다. 시청각의 서적화가 이루어진 것이다. 우상 파괴의 도구로 미디어 이론만큼 유용한 게 없다. 이러한 관점은 경주마처럼 작품 그 자체에만 몰두하는 경향을, 과도한 감정 이입을 막아준다. 극장이 중심인 영화가 임대업이라는 생각으로 돌아가보자. 그렇게 생각하면 OTT가 기승을 부려도 시네마와는 상관이 없다. 사람들은 신체의 부동성을 강제하는 임대 공간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극장에 간다. 나윤이 아버지인 금정연씨와 정원이 아버지인 오한기씨가 극장에 갈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TV용 영화가 큰 의미없이 사라진 이유도 여기 있고 OTT 콘텐츠의 질이 떨어지는 이유도 여기 있다. OTT는 개별 콘텐츠가 아닌 리스트의 문제다. 개별 작품은 빨리 감기나 건너 뛰기로 감상하면 된다. 중요한 건 내가 영원히 보지 않더라도 무엇을 볼 가능성이 있느냐다. 선택되지 않은 잠재성, 가능세계가 OTT의 우주를 이룬다. 우리는 선택한 것이 아니라 선택하지 않은 것을 소유한다. 반면 극장은 지금 당장 행동하고 선택할 것을 요구한다. 서두르지 않으면 용산 아이맥스는 매진되고 영화는 내려갈 것이다. 그러니까 영화의 시간성에서 중요한 건 러닝타임이 아니라 상영 기간이다. 영화는 점점 더 이벤트화 되고 이 이벤트에 참여할 것을 요구한다. 그러나 OTT는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닌자처럼 통장에서 구독료를 가져가게 허락만 해준다면 가능세계는 언제나 당신의 곁에서 당신의 존재론적 불안을 잠재워준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 어디서나 넷플릭스를 보며 시간을 때울 수 있고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언젠가 < 수리남 >을 볼 것이다. 언제 볼진 모르겠지만… 그러므로 종말은 없다. 시네마에는 새로운 시작 만이 존재한다. 우리가 원했던 방향이 아닐지라도, 우리가 미디어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미디어가 우리를 사용하는 것이므로. 금정연은 말했다. 한국 사람이 한국영화를 만드는 게 아니라, 한국영화가 한국 사람을 만든다고. 영화 이전의 나는 목적도 의미도 불분명한 떠돌이 개에 불과하지만 영화 이후에야 비로소 K정연이 될 수 있었다고, 그게 바로 존 포드가 말한 픽쳐의 의미라고 말이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내 삶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는 것을 보지 못했다. 2005년, 정성일은 씨네21에 신설된 코너 《전영객잔》에 들어갈 글을 청탁받으면서 당시 편집장인 남동철에게 “꼭 영화에 관한 평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첨언을 들었다. 남동철은 “이제 영화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을 전영객잔의 소개에 덧붙인다. 정성일은 2005년에 쓴 이 글을 2010년에 책으로 묶으면서 5년 동안 상황이 어떻게 후퇴했는지 돌아본다고 쓴다. 아마 영화에 관심있는 사람이라면 한번쯤은 봤을 그의 책 「언젠가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의 첫 꼭지에 실린 글이다. 제목은 “영화비평에 대한 근심과 다시 시작한다는 것.” 이제 영화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재밌는 말이다. 어느 시대에나 어느 분야에나 반복되는 후렴구이기 떄문이다. 이제 문학비평을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제 시를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 이제 전시를 진지하게... 이제 브릿팝을 진지하게… 하지만 그렇다고 이 후렴구가 언제나 동일한 의미를 갖는 건 아니다. 문학비평의 경우에는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많은 시대가 분명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영화는? 영화에 대한 담론, 영화 글이 진지하게 소비되고 이야기된 시기는 언제일까? 그런 시대가 있었나. 만약에 있었다면 그것은 영화에 대해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거의 없다고 남동철이 한탄한 바로 그 시절일 것이다. 다시 말해 이제 아무도 안 읽어! 라고 말할 수 있을 때는 아직 누군가 관심을 가지고 있고 책을 읽고 분노하고 절망할 때라는 것이다. 정말 아무도 읽지 않는다면 정말 아무도 읽지 않는다. 그리고 다행인지 불행인지 아직 그때는 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2005년에 글을 쓴 정성일은 왜 영화비평에 관한 해묵은 수사에 동의한 걸까. 그는 이렇게 쓴다. “위대한 영화를 쓸 때 우리는 위대한 생각을 해야한다. 마찬가지로 하찮은 영화를 쓸 때 우리는 하찮아진다는 사실을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위대함과 하찮음을 점점 구분하지 못한다. 혹은 하찮은 영화 앞에서 자기만 위대한 척한다. 눈이 멀어 갈 때 점점 희미하게 보이는 것을 보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기만이다.” 그러니까 문제는 영화비평을 읽는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진지하게” 읽는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다. 비평이나 리뷰를 쓰긴 쓰고 읽긴 읽는데 거기에 더 이상 가치가 없다는 사실, 좋음과 나쁨을 구분하지 못하고 기준과 권위가 사라지고 하찮음이 위대함으로 둔갑한 시대가 도래했다는 것이다. 내가 종종 농담 삼아 어둠의 정성일이라고 칭하는 임재철 역시(두 분 모두에게 심심한 사과를) 금정연과 내게 이와 유사한 이야기를 했다. 지금은 똥인지 된장인지 구분하지 못하는 시대라고, 영화도 아닌 걸 영화라고 한다고 말이다(인용은 정확하지 않음). 그러면서 그가 우리에게 건네준 책은 V. F. 퍼킨스의 「영화로서의 영화」(1972)였다. 영국의 영화비평가 빅터 퍼킨스의 유일한 단행본인 이 책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시작한다. “이 책은 영화를 판단하는 데 있어 필요한 기준(표준)criteria을 제시하려고 한다.” 그러나 정성일, 임재철 두 선생님의 훌륭함과 무관하게 나와 정연씨가 하려고 했던 것은 그와 정반대의 것이었다. 처음 작가로 활동할 때부터 그랬고 영자원 연재를 시작하고 한국영화에 대한 오디오 비주얼 에세이를 만들기로 결심한 순간에도 그랬다. 우리는 기준을 제시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이 단지 교란, 전복, 위반, 철폐와 같은 의미가 아니라 기준과 규칙, 권위, 규범 이후에도 우리가 살아남을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 우리는 개별의 특수성들이 특수성인 상태를 유지하면서도 공통의 무언가를 실현할 수 있는 세계를 원했다. 취향, 상호존중 따위로 퉁 쳐지는 것이 아닌, 새로운 영화경험. 쑨거에 따르면 1950년대 말 미국 지리학자들 사이에서 보편성과 특수성에 대한 논쟁이 있었다고 한다. 각 지역의 독특한 상태에 초점을 두어야 하는지, 모든 지역이 공유하는 지리적 특징을 수집해야하는지 여부였다. 이 논쟁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불러왔다. “특수성의 상태로 재현된 대상이 일반적 규칙으로 다듬어지거나 추상화되지 않은 채 여러 사람을 연결하는 고리가 될 수 있을까요?” 이때 리처드 하트숀은 유사성에 대해 인습과 다른 정의를 내리면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그가 정의하는 유사성은 “서로 비슷한 지엽적인 부분을 쳐낸 후 남은 주요 차이”였다. 국어사전에 의하면 유사성은 “서로 비슷한 성질”인데, 유사성이 바로 차이라니 이게 무슨 말일까. 어떻게 특수성들 속의 차이가 우리를 연결하는 보편적 고리가 될 수 있을까. 좋고 나쁨, 옳음과 그름을 구분하고 분별하지 않는 기준이 기준이 될 수 있을까? 얼마전에 만난 강보원은 내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요즘 심심해서 Dbpia에서 금정연과 정지돈이 과거에 쓴 글을 보는데요, 아니 이 사람들이 자꾸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있더라구요. 거기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이미 다 지난 일이지만 저는 그 글을 읽으면서 이러는 거죠. 아니, 자꾸 그러지마, 그걸 왜 열어, 이사람들아.” 글쎄, 그걸 왜 열까. 하지만 중요한 건 이 말을 하는 강보원이 웃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뭐가 그리 신나는지 웃으며 말하고 있었다. (관련글) 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 , 금정연, 2021.03.19. 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 , 정지돈, 2021.05.07. 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3) , 금정연, 2021.06.11. 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4) , 정지돈, 2021.07.03. 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5), 금정연, 2021.08.06. 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6), 정지돈, 2021.08.31. 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7) , 금정연, 2021.10.08. 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8) , 정지돈, 2021.11.05. 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9) , 금정연, 2021.12.03. 1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0) , 정지돈, 2021.12.31. 1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1) , 금정연, 2022.03.02. 1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2) , 정지돈, 2022.03.30. 13.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3) , 금정연, 2022.05.11. 14.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4) , 정지돈, 2022.06.10. 15.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5) , 금정연, 2022.07.08. 16.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6) , 정지돈, 2022.08.03. 17.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7) , 금정연, 2022.08.31. 18.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8) , 정지돈, 2022.10.14. 19.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19) , 금정연, 2022.11.11. 20.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0) , 금정연, 2022.12.07. 21.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1) , 정지돈, 2022.12.15. 22. 한국 영화에서 길을 잃은 한국 사람들 (22) , 정지돈, 2022.12.30.
무용 작품은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에만 존재하며, 그 작품의 지속은 오롯이 기억의 몫이다. < 아이 바이 유 바이 에브리바디 >(김남석/최승윤, 2019)는 이처럼 한순간 일어났다 영원히 사라지는 무용의 시간을 간직하고 싶은 마음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다. 그런데 영화의 시간이 카메라 앞에 일어나는 현재를 포착하고 그것을 반복적으로 재생하는 기계에 기반을 두고 나타난다면, 무용의 시간은 매번 다른 현재를 만드는 신체의 움직임 속에서 산다. 영화와 무용은 서로 완전히 다른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에 기록된 무용이란 무용 작품과는 또 다른 것으로, <아이 바이 유 바이 에브리바디>는 공연을 기록하는 영상이 되지 않으려 한다. 다시 말하면 이 영화는 무용이 아닌 것으로 무용을 남기려는 시도다. 영화가 공연일 수 없다면 영화는 어떻게 무용을 기록하고 간직할 수 있을까? 무용이라는 것은 어떻게 간직될 수 있을까? 영화는 공연이 무대에 오를 수 있도록 하는 이면의 시간을 기록한다. 총 5명의 무용가가 자신만의 공간에서 시간을 보낸다. 이들은 무용학원 강사로 일을 하고, 요가 스트레칭으로 몸을 단련하고, 승무원 시험을 준비하면서 미래를 모색하고, 진정한 욕망을 들여다보기 위한 여행을 준비하고, 안무 연습을 한다. 무용가이자 영화를 기획 중인 감독 최승윤은 이 무용가들을 각각 만나서 그들과 돈, 열정, 꿈 등에 관한 대화를 나눈다. 그들 삶에는 불안정한 미래를 나아가야 하는 불안이 존재하는 한편 그들에게 무용은 좋고 충만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용가들은 저마다 다른 방식으로 자기 삶을 조직해가고 있다. 이들이 함께 한 공연은 영화에서 단지 포스터로만 소개되고, 공연을 함께 만들어낸 5인이 이야기를 나눈다. 무용이란 무용가들의 몸을 통해 실현되고 작품은 무용가들의 몸에 흔적을 남기는데 그것은 단지 안무를 기억하는 일이 아니다. 무용의 시간은 공연하는 순간 속에 존재하지만, 그 순간은 이미 다양한 열정들이 마주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도달하게 되는 감정, 깨달음, 성취감, 유대감 등을 품고 있는 시간의 발현이고, 이러한 시간은 그것을 몸에 새긴 무용가들의 삶을 운영하는 영감이나 동력으로도 지속한다. 그런데 작품 전후 시간을 담아가는 형식 속에서 영화와 무용은 서로 더 복합적인 협업을 이룬다. 영화는 인물들이 인터뷰하면 카메라가 뒤에서 취재한 결과물의 편집이 아니라, 미리 공들여 계산된 장면들과 연출된 대화들을 통해 진행된다. 동료들과 만나고 있는 최승윤에게는 한 영화감독과의 만남도 끼어드는데, 그 대화에서는 영화와 무용 간의 공통점 및 차이점에 관한 생각이 오간다. 이 대화를 주고받는 영화감독은 영화의 장면 역시 한 번만 일어나는 것이라고 말한다. 촬영 때마다 매번 온갖 사물들이 빚어내는 상황이 다르다. 예를 들면 같은 앵글에 놓고 찍더라도 어떤 때는 바람에 나뭇잎이 흔들리지만 어떤 때는 미동도 없다. 그러므로 한 장면을 반복해서 찍는 작업은 똑같은 것의 반복이 아니다. 이 영화는 이런 영화 작품 이전의 반복과 변주를 영화 장면 자체로 실행한다. 장면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인물들의 동선은 같은 구성을 반복하는데, 그 반복은 조금씩 다른 앵글이나 시선 그리고 속도를 갖는다. 영화는 반복하지만, 그 반복 속에는 변화가 담겨 있다. <아이 바이 유 바리 에브리바디>는 마치 리허설 필름 같기도 하다. 영화 촬영이란 반복해서 찍으면서 좋은 것을 찾아내는 일종의 연습 시간인데, 이 영화에서는 반복 자체가 작품의 리듬을 형성하고, 그 반복의 시간 자체가 주제다. 영화는 작품이 리허설을 품기보다는 역으로 리허설이 작품을 품게 되는 모양을 그려나간다. 여기에서 리허설은 더 이상 작품 안에 완전히 포함될 수 없으며, 심지어 작품이라는 결과를 향한 목적론에 복무하지도 않는다. 영화의 시간과 무용의 시간 모두 작품이라는 목적보다 더 크거나 혹은 그러한 목적을 잘 모르는 리허설들로 채워져 있다. 작품 전후 활동 과정을 작품보다 부각하는 영화의 방향이 단지 자족적인 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이러한 방향이 예술 작품이 무엇인지에 대한 잘 조직된 질문으로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작품은 우선 무용과 영화 각각이 가진 고유한 특성을 표현한다. 그리고 작품을 만드는 시간을 성찰하고 작품에 구현하기 위해, 일방적으로 흘러가지 않는 시간의 순환을 작품 내에 만든다. 영화는 최승윤 감독이 영화를 만들고자 결심하고 김남석 감독에게 조언을 구하면서 서로 편지를 나누는 보이스오버를 포함하고 있다. 그 편지는 최승윤 감독이 촬영을 막 완료하고 김남석 감독에게 소회를 밝히는 때까지 이어지는데, 우리는 이미 두 감독의 협업으로 완성된 영화를 보고 있다. 영화의 끝은 영화의 시작으로 이어지고, 이 영화는 협업으로 나아가는 만남의 과정이자 협업의 결과이기도 하다. 메이킹 필름과 동시에 완성된 이야기인 것이다. 과정과 결과는 선형적인 관계나 위계를 벗어나고, 결과는 늘 과정 중인 시간 안에서만 존재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아이 바이 유 바이 에브리바디>는 무용과 영화가 각각 작품으로서 무엇을 남기는지, 또 작품을 도출하는 작품 바깥의 시간이 가지고 있는 지위는 무엇인지를 질문한다. 남산타워가 창 너머로 잘려 보이기도 하고, 바깥에서 비스듬히 보이기도 하며, 또 밤하늘에 빛을 내며 오롯이 드러나는 위치에 놓이기도 하는 것처럼 영화의 반복은 새롭게 보면서 더 나은 것을 향하는 방법이 되고, 무용은 새롭게 움직이면서 더 나은 것을 찾는 경험으로써 몸에 기억으로 남아 일상을 이끈다. 이 영화에서 주목하는 반복의 시간은, 무용이 지속하는 시간의 성격을 성찰하게 하는 한편, 영화가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결정적인 시간이란 소위 사건의 클라이맥스보다도 오히려 그 사건을 도출해내는 전후 시간 속에 있는 것이 아닐지 질문하게 만든다.
| No | 분류 | 리스트명 | 영화 수 | 상세 |
|---|---|---|---|---|
| 1 | 국내 | [인디스페이스 등] 단편영화의 시간(2019) | 304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