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의 역사: 전용 영화관
- 감독
- 장 뤽 고다르
- 제작년도
- 1997
- 출연
- 장 뤽 고다르
<히어> 중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애니메이션은 만화영화인가? 엄밀히 따지자면,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 누군가는 이런 우유부단한 답변이 엄밀한 것이냐고 반문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만화’와 ‘영화’라는 여타의 매체들과 복합적으로 엮여 있는 것이 애니메이션의 분명한 현실이니 말이다. ‘만화영화’란 말이 애니메이션의 고유성 내지 자율성을 해칠 수 있다는 반론도 있을 것이다. (요즈음에 만화영화라는 호칭이 잘 쓰이지 않는 것은 이 때문이리라) 그러나 고유성 내지 자율성이 위협받는 지점에서 그 매체의 성질이 잘 드러나기도 한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런 반론은 오히려 애니메이션이 겪는 고유한 문제를 묵과한 결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런 거친 단언들에 책임을 지기 위해서, 매체사적 관점에서 애니메이션의 역사를 서둘러 훑어봐야만 하겠다. 그런데 애니메이션이 무엇인가? 여기서는 저 위대한 애니메이터 노먼 맥라렌의 (1950년대 조지 시피아노스에게 보낸 편지에서 쓰인) 정의를 일단 따르기로 하자. “애니메이션은 움직이는 그림의 예술이 아니라 그려진 움직임의 예술이다. 각 프레임 사이에 무엇이 발생했는가는 각각의 프레임상에 무엇이 존재하느냐보다 중요하다. 그러므로 애니메이션은 프레임들 사이의 속임수로 눈에 보이지 않는 틈새를 교묘하게 조작하는 예술이다.” 즉 우리네 세계에 존재하는 물질들의 운동성을 (기록하는 대신) 만들어내고 나아가 시간의 흐름을 생성하기 위한 프레임 바이 프레임의 작업이 요구되는 미적 결과물 일체를 맥라렌은 애니메이션으로 정의한 것이다. 애니메이션의 특성을 기초적이면서도 광범위하게 짚는 이 정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아니 오늘날이라서 더욱 탁월하게 느껴진다. 그렇다면 어째서 만화와 영화의 조합어가 특정 매체를 표현하는 말이 된 걸까? 아무래도 ‘만화’는 그려진 가상의 세계를 표현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과장하여 초현실적인 묘사를 왕왕 보여준다는 점이 같기 때문에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그리고 ‘영화’는 시간(의 흐름)과 운동(성)으로써 작용한다는 점, 그리고 이 작용의 주 형식이 프레임과 숏이라는 점 때문에 이름이 붙었을 것이다. 물론 동아시아에서의 번역된 명칭만으로 너무 많은 걸 해석하려는 건 아닌가 싶을 수도 있을 테다. 하나 만화영화라는 명칭은 사실 동아시아만의 것이 아닌데, 만화를 이르는 말 중 하나인 카툰(Cartoon)은 미국에서 만화영화와 비슷한 용법으로 쓰였기 때문이다. 당장 대표적인 애니메이션 전문 TV 방영사인 카툰 네트워크를 떠올려 보시라. 카툰 네트워크 스튜디오 그 태동기인 1910년대에 (< 리틀 네모 >의) 윈저 맥케이나 (< 고양이 펠릭스 >의) 오토 메스머 같은 위대한 만화가들의 세례를 받으면서 (셀-)애니메이션과 카툰은 창작에 있어서든 산업에 있어서든 깊이 뒤섞이고 혼용되기 시작했으며, 이 때문에 애니메이션학자 찰스 솔로몬이 『마법의 드로잉: 애니메이션의 역사(Enchanted Drawings: The History of Animation)』에서 말했듯 “애니메이션은 역사의 대부분에 걸쳐서 그려진 카툰의 동의어”가 되었다. 다시 한 번 “그려진 가상의 세계를 표현한다는 점, 그리고 이를 과장하여 초현실적인 묘사를 왕왕 보여준다는 점”을 곱씹어 보자. 하지만 당연하게도, 21세기의 우리들은 애니메이션의 세부적이고 다양한 갈래를 ‘만화’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노먼 맥라렌의 추상 애니메이션, 이리 트른카의 퍼핏 애니메이션, 그리고 < 터미네이터 2 >(제임스 카메론, 1991)와 < 쥬라기 공원 >(스티븐 스필버그, 1993) 이후 컴퓨터 그래픽스의 영화적 활용을 순전히 만화와의 상관만으로 논할 수 있을까? 혹은 스탠 브래키지, 존 휘트니, 바술카 부부 등의 작업들처럼 분명 애니메이션의 성립 요건을 충족하는 것으로 보이나 (후대에 나온 3D 애니메이션과 달리) 애니메이션사 서술에서 주로 누락되고 실험영화사나 영상미술사에만 등장하는 경우는 또 어떤가? 이렇듯 오늘날 광대해진 애니메이션에 있어 ‘만화’의 특권성이란 어딘가 불충분한 게 사실이다. 그렇다면 ‘영화’는 어떨까. 영화학자 톰 거닝이 「순간을 애니메이션화하기: 애니메이션과 사진의 은밀한 대칭성(Animating the Instant: The Secret Symmetry between Animation and Photography)」을 비롯한 여러 연구에서 말했듯, 실사 영화의 역사와 전통적 애니메이션의 역사는 (단지 애니메이션이 좁은 의미에서 영화사의 일부인 것을 넘어) 서로 깊이 얽혀 있을뿐더러 순전히 기술의 계보로만 따지면 애니메이션이 실사 영화에 앞서서 우리네 세계에 출몰했다. 더군다나 요즈음 대부분의 대중적 실사 영화는 실사 이미지와 그래픽 이미지 사이의 디지털 합성으로 이루어진, 사실상의 부분적/비가시적 애니메이션이기도 하다. (애니메이션학자 수잰 부캔은 이를 ‘편재하는 애니메이션(pervasive animation)’이란 용어로 표현한 바 있다) 사정이 이러하니 ‘디지털 이후 영화는 근본적으로 애니메이션의 특수한 일종이 되었다’라는, 미디어학자 션 커빗과 레프 마노비치의 따로 또 같은 주장은 그 도발성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논리적인 결론이라 할 만한 것이다. 거꾸로 말하자면, 영화(사 서술)에 있어 렌즈 기반의 사진적 이미지가 지닌 특권성은 애니메이션을 주변화하거나 보조화함으로써 가능했던 것이다. 은폐된 기원이자 기둥으로서 애니메이션. (상) 원작 『여기서』(리처드 맥과이어, 2014) 중 / (하) 실사 영화 <히어> 중 (사진: " Here, 2014 ", Richard McGuire) 요컨대 애니메이션이란 범주는 ‘만화영화’로서의 요소를 강하게 지닌 동시에 이를 완전히 초과하는, 근원적인 ‘혼동과 분산(발터 벤야민)’에 처해있는 것이다. 애니메이션은 만화영화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는 말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흥미롭게 볼 만한 작품이 있다면, 아무래도 로버트 저메키스의 근작 < 히어 >(2024)이지 않을까? 리처드 맥과이어의 급진적인 반(反)만화 『여기서』를 영화화한다는 난제를 수행하면서, 저메키스는 원작의 (드라마적 서사와 정돈된 타임라인 없이 펼쳐지는) 초월적 고정 시점과 다중 프레임 구조에 적당한 인간적 중력을 부여하려 애쓴다. 그런데 어떻게? (마구 혼재된 타임라인을 관통하기 위한) 모션 캡처와 3D 애니메이션 기술을 적극 활용해 작품을 부분적인 가족 드라마로 변형시킴으로써. 그럼에도, 혹은 그렇기에, 영화는 불안정하고 과포화된 시각적 구도와 지나치게 매끈한 사물 이미지 등 그 외양에 있어 동시대 연극 같기도 하고, 제프 월이나 그레고리 크루드슨의 사진 같기도 하며, (저메키스 자신이 지난 2000년대에 천착했던) 모션 캡처 CG 애니메이션 같기도 한, 지극히 비(非)영화적인 형태를 띠게 된다. 달리 말해 반만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비영화 <히어>에는 애니메이션이 활용된다는 것을 숨기거나 완화하려는 노력의 흔적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이를 그저 작품의 실패라고 쉽게 치부해서는 안 된다. 어쩌면 저메키스에게는 ‘애니메이션다움’을 부상시키는 것 자체가 목표는 아니었을까? 우리가 지식으론 알고 있는 ‘편재하는 애니메이션’의 비가시적인 사실을 과도하리만큼 가시화하는 것 말이다. 고정된 위치에서 인간사와 자연사를 번잡하게 조망할 수 있는 초월적 시선이란 (적어도 영화 내적으로는) 애니메이션 기술을 통해서만 구현 가능하다. 이런 당연한 사실을, 저메키스는 그러한 시선으로 보는 세계는 인간적 지각(의 기준)과 닮기보다는 퍽 애니메이션적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는 믿음으로 치환하여 밀어 붙여본 것이다. 이는 반만화적인 구상과 비영화적인 구성을 지탱하고 구축하는 것이 애니메이션 기술이란 사실과도 겹치며, 우리를 마지막 장면으로 끌고 간다. 기억을 더듬는 노년의 부부를 무심히 바라보다 마침내 거대하고 유려하게 움직이는 ‘영화적’ 시선. 그것의 감동은 애니메이션적인 것과 영화적인 것 사이의 내재적인 혼융이 양자의 전환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근사하게 제시한다는 데에서 온다. 다시 한 번, 이 무모한 작품은 애니메이션이 만화영화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함을, 그리고 애니메이션이 이 이중구속 속에서 제 역량을 탁월하게 발휘하기도 한다는 것을 입증한다. 그렇기에 이 근원적인 ‘혼동과 분산’은 은총에 가깝다. 윤아랑(비평가) l 대중문화와 시각예술을 주로 다루며, 주체성과 현실감각을 문제시하는 문화 비평에 관심이 있다. 지은 책으로 『뭔가 배 속에서 부글거리는 기분』(2022), 『영화 카페, 카페 크리틱』(공저, 2023), 『악인의 서사』(공저, 2023), 『라임 앤 리즌 2호: 오컬트』(공저, 2025) 등이 있다.
<폭설> 중 '실사'에 드리운 한계를 넘으면 비로소 선명해지는, 영화가 낳은(을) 새로운 감각과 지형을 발견합니다. 영화는 태생적으로 기술 발전에 조응하며 미학적, 산업적 변화를 거듭해 온 매체이다. 무성에서 유성으로, 흑백에서 컬러로, 아날로그 필름에서 디지털로 이행하는 기술사적 변곡점마다 영화 창작자들은 새로운 표현 가능성과 방법론적 도전에 직면해왔다. 최근 부상하는 인공지능(AI) 기술 역시 이러한 영화 기술사의 연장선상에서 주목해야 할 중요한 변수로 부상하고 있으며, 이는 영화 제작 방식과 미학 전반에 걸친 또 다른 전환을 예고한다. 최근 필자가 제작한 단편 < 폭설 >(2024)은 AI를 기반으로 전체 제작 과정이 이루어진 코즈믹 호러 영화이다. 전통적인 촬영과 후반 작업 대신 인공지능 생성 기술을 전면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기존 영화 제작 방식으로는 구현이 불가능했던 시각 요소들을 구현할 수 있었다. AI 기반 제작 방식은 물리적 세트나 대규모 시각효과팀이 없이도 연출자의 순수한 상상력을 직접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는 혁신적 가능성을 열었다. <폭설>은 종말을 앞둔 2009년 겨울, 설국(雪國)을 배경으로 구축된 디지털 세계이다. 주인공 소요는 어릴 적 친구인 유코를 기다린다. 작은 섬마을에서 벌어진 초자연적 현상은 종말로 확대되고, 소요가 유코가 남긴 수취인 없는 유서를 떠올리며 벌어지는 이야기를 다룬다. 영화는 특히 ‘몬사로(漢字道)’라 불리는 초월체. 형이상학적 존재를 시각화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러한 비물질적이고 초월적 존재의 표현은 전통적 시각효과로는 구현하기 어려웠으나, 생성형 AI 파이프라인을 통해 이전에는 불가능했던 시각적 표현을 달성할 수 있었다. <폭설> 제작에서는 프리 프로덕션부터 포스트 프로덕션까지 AI 기술을 다층적으로 활용했다. 특히 시나리오에서 묘사된 ‘몬사로’라고 하는, 형체가 정확히 드러나지 않는 형이상학적 존재의 시각화 작업은 정교한 프롬프트 엔지니어링을 통해 점진적으로 구체화되었다. 이 과정에서 작업을 안정화하기 위해 대규모 언어 모델인 Claude API를 활용하여 엔지니어링 프로그램을 개발하였고,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AI 프로덕션을 진행할 수 있는 구조화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는 시나리오의 핵심 시각 요소와 정서적 톤을 분석하고 이를 이미지 생성 명령어로 변환하는 중간 매개체로 기능했다. 독백으로 전개되는 14분 분량의 이 작품은 대화 장면보다는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와 분위기를 통해 이야기를 전달한다. 이러한 접근은 AI 영화 제작의 특성을 고려한 의도적 선택이었다. 당시 AI 기술로는 자연스러운 대화 장면과 입술 동기화를 구현하기 어렵기 때문에, 내면의 독백을 통한 서사 전개 방식을 선택하고 시각적 요소에 집중했다. <폭설, 暴雪> 중 전체 설국 시퀀스 제작을 위해 직접 촬영한 눈의 텍스처를 학습시켜 AI로 생성된 설산 배경 이미지를 기본 레이어로 사용하였고, 특히 사실적인 표현과 초현실적 요소 사이의 균형을 세심하게 조정했다. 여기에 ControlNet을 결합한 워크플로우를 구축했다. 기본 배경 이미지에 ComfyUI 노드 기반 워크플로우를 적용해 시네마틱한 로그 프로파일을 구현했다. 이후, 35mm 필름의 할레이션 효과를 재현하고, ControlNet으로 아나모픽 렌즈 플레어와, 얕은 피사계 심도와 대기 원근법을 구축했다. 이후 후반 작업에서는 Film Grain 노드로 Pro-Mist 필터 효과를 시뮬레이션 후, 시네마틱 톤매핑을 완성하여 애너모픽 스퀴즈와 쿨-웜 색상 대비를 정교하게 조절하며 실제 영화의 질감을 구현하기 위해, 본 단계들이 점진적으로 추가되었다. 특히 캐릭터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환경이 서서히 변화하는 과정을 표현하기 위해 이미지 변환 기술을 여러 단계로 적용하며 진행되었다. 이 과정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은 AI가 때로 예측하지 못한 창발적 결과물 을 생성한다는 것이었다. 초기에는 이러한 ‘알고리즘적 우연성’을 오류로 인식했으나, 점차 이를 창의적 발견의 기회로 활용하는 방향으로 접근법을 전환했다. 특히 설산 시퀀스 작업 중 한 번의 생성 과정에서 AI가 만들어낸 모호한 형체가 의도했던 것보다 더 본질적인 불안감을 자아내는 효과를 발견했다. 눈보라 속에서 형체가 완전히 뚜렷하게 드러나는 대신, 눈의 패턴 자체가 미묘하게 얼굴이나 실루엣을 연상시키는 방식으로 왜곡되는 효과가 우연히 생성되었는데, 이는 결국 최종 장면에 반영되었다. 이 경험은 단순히 계획한 이미지를 기술적으로 재현하는 것을 넘어, AI와의 대화적 창작을 통해 새로운 시각적 가능성을 발견하는 과정이었다. 이러한 AI와의 협업을 통한 창발적 발견은 <폭설> 이후 진행되고 있는 새로운 프로젝트에서도 지속되고 있다. 현재 제작 중인 <어령(御靈)>은 <폭설>의 후속 이야기를 다루는 인터랙티브 영화로, 관객의 선택에 따라 서사가 달라지는 새로운 형태의 영상 작품이다. <폭설>에서 구축된 세계관을 바탕으로 하되, 인터랙티브 요소를 통해 관객이 직접 서사에 개입할 수 있는 구조를 설계하고 있다. 이 작품에서는 기존의 AI 영화 제작 기법에 더해 실시간 선택 분기와 동적 서사 생성이라는 새로운 기술적 도전이 추가되었다. 특히 관객의 선택에 따라 실시간으로 변화하는 시각적 요소들을 AI를 통해 구현하는 것은 전통적인 영화 제작 방식으로는 불가능한 실험적 시도이다. <어령>은 AI 기술이 단순한 제작 도구를 넘어 새로운 형태의 영화적 경험을 창조할 가능성을 탐구하는 프로젝트로 기획되었다. <어령, 御靈> 중 <폭설>과 <어령>의 제작 과정에서 핵심 미학적 도전 중 하나는 등장인물의 얼굴 일관성을 유지하는 문제였다. 이를 위해 포스트 프로덕션 단계에서 ComfyUI 기반의 얼굴 일관성 파이프라인을 구축했다. 특히 AI 생성 영화에서는 동일한 인물이 장면마다 미묘하게 달라지는 현상이 발생하는데, 이는 AI가 매번 새롭게 이미지를 생성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본질적 특성이다. 이러한 일관성 부재는 서사적 몰입을 저해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로, 이를 해결하기 위해 얼굴 치환 기술을 활용했다. 이 기술은 영화 중반부의 주요 장면에서 특히 중요했다. 이 장면에서 인물의 대화와 표정은 서사적 긴장감 형성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이 미묘한 변화를 시각화하기 위해, ComfyUI의 얼굴 치환 기능과 함께 감정 표현 보존 알고리즘을 적용했다. 이는 이미지가 지닌 감정적 뉘앙스는 유지하면서도, 얼굴의 미세한 형태적 변형을 통해 내적 변화를 암시하는 효과를 창출했다. 특히 인물의 얼굴이 대화 중에 일관성을 유지하면서도 미묘한 감정 변화를 표현하는 것은 관객들이 인물의 심리적 상태를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장치로 기능했다. 이는 단순한 기술적 해결책이 아닌, 몰입적 요소를 강화하는 서사적 장치로 작용했다. <폭설, 暴雪> 중 공간 구현에 있어서는 Blender와 SketchUp을 기반으로 한 3D 모델링 작업에 더해, NeRF(Neural Radiance Fields) 기반의 공간 캡처 파이프라인을 접목하였다. 이는 AI 생성 영화에서 공간 연속성과 시각적 정합성을 유지하기 위한 핵심적인 기술적 구현 방식이었다. 장면마다 공간의 형태와 구조가 미묘하게 변화할 경우 시청자의 몰입감이 저하될 수 있다고 판단하였기에, 이 부분은 특히 신경 써야 할 주요 과제로 설정되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먼저 3D 모델링을 통해 기본적인 공간 구조를 구성하고, 이후 NeRF 기반의 신경망 기술을 적용하여 실제 공간의 광학적 특성과 깊이 정보를 정밀하게 재구성하였다. 이렇게 구축된 3D 공간 데이터는 AI 이미지 생성을 위한 프롬프트의 기준점으로 활용되며, 결과적으로 전체 서사 내 공간의 일관성과 장면 간 구조적 연속성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어령, 御靈> 중 인물 표현에 있어서는 표정과 제스처의 자연스러운 구현이 중요한 도전이기도 했는데, AI가 생성하는 인물의 표정은 종종 부자연스럽거나 과장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OpenPose 모델을 활용하여 인물의 자세와 제스처를 정밀하게 제어했고, 이를 통해 감정 표현의 섬세함을 구현하였다. 특히 대화 장면에서 인물 간의 시선 처리와 반응 표현은 자연스러운 상호작용을 표현하기 위한 핵심 요소였다. 동적 장면 구현을 위해서는 Stable Video Diffusion(SVD)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진행했다. 정적 이미지 사이의 자연스러운 전환과 움직임을 구현하기 위해 키프레임 기반 접근법을 적용했다. 주요 장면의 키프레임을 먼저 생성한 후, 중간 프레임을 보간(Frame interpolation)하는 방식으로 움직임의 연속성을 확보했다. 이는 특히 인물의 미묘한 표정 변화나 환경의 점진적 변형을 표현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AI와의 협업 과정은 ‘대화적 생성’이라는 새로운 창작 모델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계기가 되었다. 초기 단계에서는 명확한 지시에도 불구하고 AI가 생성하는 결과물이 연출자의 세부적인 의도와 괴리되는 현상이 관찰되었다. 하지만 반복적인 프롬프트 엔지니어링과 생성된 결과물에 대한 비판적 피드백 과정을 통해, AI는 점진적으로 연출자가 설정한 시각적 목표치에 수렴하는 결과물을 도출하기 시작했다. 제작 과정에서 미학적으로 가장 도전적이었던 부분은 AI 생성 이미지의 ‘제어 가능성’과 ‘창발적 우연성’ 사이의 균형을 찾는 과정이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AI와의 ‘ 대화적 창작 ’ 프로세스를 발전시켰다. 구체적으로는 초기에 다양한 방향성을 탐색하는 ‘발산적 프롬프팅’에서 시작해, 점진적으로 선택된 요소들을 정교화하는 ‘수렴적 프롬프팅’으로 이어지는 다단계 접근법을 적용했다. AI가 제시하는 예상치 못한 가능성에 열린 상태로 창작 방향을 조정해나가는 쌍방향적 협업으로 프로세스를 전환하는 계기가 되었다. 기본 기획보다 흥미로운 방향성을 제시하는 AI 생성 요소들이 캐릭터의 심리적 상태를 더욱 효과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다는 발견은 제작 과정 자체를 재해석하게 했다. 이 과정은 단순한 도구적 활용을 넘어, AI라는 비인간 행위자와 상호작용하며 결과물을 구축해나가는 독특한 협업 모델을 경험하게 했다. 이는 AI가 창작 과정 자체에 능동적으로 개입하는 변수로서 기능할 수 있음을 시사하며, 향후 영화 제작 패러다임의 변화 가능성을 내포한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물론, 이러한 기술적 전환이 영화계 전반에서 보편적으로 수용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사를 고찰해보면,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늘 기대와 동시에 기존 질서에 대한 불안과 저항을 야기해왔다. 활동사진의 등장부터 유성영화, 컬러영화, 디지털 시네마에 이르기까지, 기술적 전환기에는 어김없이 미학적, 산업적 논쟁이 수반되었다. AI 기술 역시 이러한 역사적 맥락에서 자유롭지 않다. 그러나 핵심적인 논점은 기술 자체의 속성보다는, 이를 창작의 도구로서 어떻게 사유하고 활용하는가에 대한 창작 주체 의 문제로 귀결된다. 제작 환경의 제약으로 인해 창작의 기회를 충분히 얻지 못하는 사례는 영화계에서 지속적으로 관찰되어 왔다. AI 기술은 이러한 구조적 한계를 일정 부분 해소하고,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할 잠재력을 지닌다. 최근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BIFAN) 국제경쟁 AI 영화 부문의 공식 선정작 감독들이 영화 관련 교육 배경을 가졌거나 현업에 종사하는 인력들이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는 AI 기술이 창작의 효율성을 높이는 유용한 도구임은 분명하지만, 영화적 서사를 구축하고 미학적 판단을 내리는 핵심적인 역량은 여전히 영화 매체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를 갖춘 인간 창작자에게 의존하고 있음을 방증한다. 나아가, 기존에 기회를 얻지 못했던 창작자들에게 새로운 가능성을 열어 줄 계기가 될 것이라 확신한다. 따라서 AI는 단순한 기술적 진보를 넘어, 영화적 표현의 외연을 확장하는 새로운 매체적 조건으로 이해될 필요가 있다. 과거 네오리얼리즘이 동시대 현실을 포착하는 새로운 영화 언어를 제시했고, 누벨바그가 기존의 영화 문법에 도전하며 새로운 미학을 추구했듯이, 새로운 기술과 도구의 등장은 늘 새로운 영화 언어와 미학적 탐구의 가능성을 열어왔으니, 현재 우리는 AI 기술이 촉발하는 또 다른 영화사적 변화의 과정에 위치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을 터이다. <폭설, 暴雪> 중 <폭설>의 제작 과정은 AI와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 전통적 방식과는 구별되는 연출 실험이었다. 프리 프로덕션 단계의 시각화 작업부터 포스트 프로덕션의 특수효과 생성에 이르기까지, AI에게 연출 의도를 명확히 전달하고 생성된 결과물을 비판적으로 평가하며, 피드백을 통해 최종 결과물을 구축해나가는 과정은 새로운 형태의 협업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대화적 창작’ 모델은 감독에게 AI라는 새로운 기술적 도구를 효과적으로 운용하고 그 결과와 소통하는 능력을 요구한다. AI 기술의 발전 속도는 예측하기 어려울 정도로 빠르다. 단기간 내에 현재보다 훨씬 고도화된 기술이 등장할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급격한 기술 변화 앞에서 창작자들이 불안감을 느끼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영화의 역사는 본질적으로 이러한 기술적, 미학적 변화를 끊임없이 수용하고 내재화하며 발전해 온 과정이었다. 핵심은 기술의 발전이 영화가 다룰 수 있는 이야기의 폭과 깊이를 확장하고, 이를 효과적으로 표현할 새로운 방법론을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AI는 창작 도구의 스펙트럼을 넓히는 것이지, 창작 행위의 본질 자체를 대체하는 것은 아니다. 서사를 통해 세계를 이해하고 질문하려는 욕구, 인간의 감정과 경험을 미학적으로 형상화하려는 의지, 스크린이라는 매개를 통해 관객과 소통하려는 영화 고유의 시도는 여전히 인간 창작자의 고유한 영역으로 남는다. <폭설>의 제작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AI가 감독의 창조적 비전을 시각적으로 구현하는 데 있어 강력하고 효율적인 도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도구를 사용하는 감독의 명확한 비전과 미학적 판단 능력이며, 이는 창작자의 경험, 감수성, 그리고 세계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에서 비롯된다. 기술이 발전할수록 창작자는 상상하는 바를 더욱 효과적으로 구현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AI 시대 영화 창작이 마주한 새로운 가능성이며, 지속적인 탐구가 요구되는 지점이다. 궁극적으로, 매체 환경이 어떻게 변화하든 창작자는 늘 그랬듯이 동시대의 현실과 인간의 삶에 대해 발언하고 질문해야 한다. 사용하는 기술적 언어가 달라진다 해도, 영화를 통해 탐구하고자 하는 근원적인 문제의식과 주제는 지속될 것이다. 영화는 역사적으로 새로운 기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고 창조적으로 활용하며 스스로의 미학적, 산업적 지평을 넓혀 온 예술 형태이다. AI 시대 역시 이러한 진화의 과정 속에 있을 것이다. 이야기하려는 우리들의 근원적 욕망이 존재하는 한, 영화는 시대와 기술의 변화에 조응하며 그 형태를 달리하며 지속될 것이다. 도구는 바뀌어도, 우리는 늘 그랬듯이 표현하고자 하니깐. 배준원(영화감독) l 표현자로서의 경계 없음을 안간힘을 다해 믿으며 표현합니다. <몬사로>(2025), < 폭설 >(2024), < 침묵 >(2023) 연출. 인간과 사회를 응시하며, 틈 사이로 비추는 균열들에 대한 영화를 만든다.
영화 너머의 포스트-시네마를 가늠하면서, 여전히 남아있는 영화의 흔적도 제시합니다. 필름이 유령처럼 배회하다 떠난 자리를 상속받은 것은 극장이다. 영화가 디지털화되는 과정에서 필름의 쇠퇴는 곧 영화의 죽음이라는 담론이 있었고, 그 서사의 효력이 다하자 극장의 위기론이 부상했다. 오늘날 극장은 베일을 두른 채로 우리 앞에 나타나 지난날의 영광을 추억하면서, 그와 동시에 DVD, 불법 다운로드, 스트리밍 플랫폼에 밀려나고 있는 자신의 처지에 대해 하소연하는 유령과 같다. 어떤 이들은 극장에서의 유일무이한 영화 관람 경험이 사라지면 그때의 영화는 더 이상 예전과 같지 않을 거라고 경고한다. 그들은 극장이 영화의 위기와 죽음을 방어하기 위한 최후의 보루라고 굳게 믿는 듯하다. 하지만 극장의 경험을 포함하는 과거의 영화 경험을 상속하지 않으려는 이들도 있다. 동시대 영화 관람 경험은 모순적이다.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신성한 것과 세속적인 것, 이상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연속적인 것과 단절적인 것 사이에서 팽팽한 줄다리기가 벌어지는 모양새가 나타나고 있다. 극장에 앉아 스크린에 투사된 이미지를 바라보던 과거의 관람 방식은, 오늘날 노트북, 태블릿 PC, 핸드폰과 같이 이동과 휴대가 편리한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여 관객이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서 모니터에 출력된 이미지를 바라보는 관람 방식으로 바뀌었다. 프란체스코 카세티(Francesco Casetti)는 자신의 책 『뤼미에르 은하계 : 도래하는 영화를 위한 일곱 개의 핵심어(The Lumière Galaxy: Seven Key Words for the Cinema to Come)』(2015)에서 이런 변화를 영화의 재배치 (relocation)라고 부른다. 그는 영화가 새로운 환경 속에서 그리고 새로운 기기를 통해서 재활성화 또는 재목적화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 영화를-넘어서는-영화의 경험 ’과 ‘ 영화로-회귀하는-경험 ’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고 말한다. 영화는 여전히 영화적인 것으로 회귀하는 동시에 전혀 영화적이지 않은 것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영화의 재배치를 결정하는 핵심적인 요소는 미디어 환경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는 관객의 실천 에 있다. 단순히 영화가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상태가 아니라 영화가 우리에 의해 구성되는 방식과 그 결과가 중요한 것이다. 영화의 위치가 달라져도 영화에 대한 관객의 감각과 기억이 남아 있고, 이전과는 분명하게 달라진 영화를 기존의 영화처럼 바꾸어 놓기 위한 관객의 실천이 있다면, 여전히 영화는 영화적인 어떤 것으로 존속할 수 있다.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 경험도 마찬가지이다. 관객은 극장이 아닌 장소에서도 극장의 경험을 복원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디지털 기기로 영화를 관람하면서 모니터의 밝기를 조정하거나 스피커의 볼륨을 조정하여 최대한 극장에서 영화를 볼 때와 유사한 관람 환경을 구축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오늘날 관객은 디지털 기기를 활용하여 극장과 같은 곳에서 보장되는 몰입의 환경, 즉 외부의 자극으로부터 관객을 지킬 수 있는 실존적인 버블(existential bubble)을 스스로 구축할 수 있다. 이처럼 관객은 영화를 둘러싼 달라진 환경을 수리함으로써 본래의 영화적 경험을 복원한다. 카세티에 따르면, “영화는 새로운 환경에 직면했고 새로운 조건을 마주하고 있지만, 그것은 우리를 포기 하지 않았다. 요컨대, 우리로 인하여 영화는 재배치되고 있는 것이다.” 카세티(좌)와 앙드레 고드로, 필립 마리온(우)의 저서 (사진: “ The Lumière Galaxy ”, “ The End of Cinema? ”, Columbia University Press) 극장은 다른 자리에서 다른 경험과 함께 다시 태어나고 있다. 이를 살펴보기 위해 앙드레 고드로(André Gaudreault)와 필립 마리온(Philippe Marion)이 『영화의 죽음?: 디지털 시대의 위기 속 매체(The End of Cinema?: A Medium in Crisis in the Digital Age)』(2015)에서 제시한 ‘영화의 이중 탄생 (cinema’s double birth)’이라는 개념을 참고하고자 한다. 이 개념에 따르면, 영화는 역사적으로 여러 위기를 거치면서 새롭게 태어나기를 반복했다. 영화의 이중 탄생은 영화가 기술적으로 한번 그리고 제도적으로도 다시 한번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영화의 탄생이 역사적으로 반복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실제로 영화는 사운드의 도입, 텔레비전의 발명, 비디오 기기의 보급, 디지털화와 같은 기술적 발전 속에서 위기와 변화를 겪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은 영화의 탄생이 반복되고 있다는 것을 넘어서 아직 영화의 탄생이 완료되지 않았음을 암시한다. 그러니까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영화는 영화의 탄생에 있어서 가장 최신 버전에 해당하는 것일 뿐이다. 극장의 이중 탄생, 즉 극장 문화의 제도적 안착은 영화사 초기 30년 동안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그 과정은 유랑, 정착, 성전의 세 단계로 세분화할 수 있다. 1) 유랑 의 단계: 19세기 말, 카메라와 영사기의 발명과 함께 등장한 영화는 카페, 놀이공원, 박람회, 보드빌, 장터와 같은 곳을 전전하면서 일시적으로 상영되는 문화적 이벤트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2) 정착 의 단계 : 1905년을 전후해서 미국을 중심으로 작은 상점을 개조하여 만든 극장인 니켈로디언(Nickelodeon)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비로소 영화만을 위한 공간이 생겼다. 상설영화관으로서의 니켈로디언은 30석 내외의 좌석을 갖추고, 5센트의 입장료를 책정했고, 주 고객은 노동 계급이었다. 3) 성전화 의 단계 : 1920년대를 기점으로 다양한 인종, 성별, 세대를 수용하기 위해 대규모의 좌석, 화려한 외관과 실내 장식, 주차장과 매점과 같은 편의시설을 갖춘 영화 궁전(movie palace)이 등장한다. 영화학자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Siegfried Kracauer)는 영화 궁전이 오락을 숭배하는 공간이면서 고단한 현실로부터 달아나려는 관객을 위해 마련된 일종의 도피처와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그는 영화 궁전이 정신적으로 거주할 곳을 잃은 자들을 포용하는 성격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그곳을 ‘집 없는 자들을 위한 안식처’라고 불렀다. (좌) 1908년부터 1914년까지 5센트의 입장료를 받고 운영되었다고 기록된 캐나다의 “Comique movie theatre” (우) 미국 텍사스 샌 안토니오에 위치한 극장 “Majestic Theatre”. 스페인의 지중해풍 양식을 반영해 1929년에 지어졌다. (사진: “ Front of Comique movie theatre ”, City of Toronto Archives / “ The Venues ”, Majestic & Empire Theaters) 이런 역사적 사실은 크게 두 가지를 시사한다. 하나는 극장이 영화의 유일한 경험이 아니라 여러 가능한 경험 중 하나라는 것을,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그럼에도 극장의 경험은 영화의 역사와 대중의 기억 속 깊은 곳에서 단단한 지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넌지시 지시한다. 디지털화 이후 영화는 더 이상 극장에 귀속되지 않는다. 이런 변화 속에서 극장은 영화의 경험을 위한 유일한 장소는 아니지만 영화적 경험의 회귀를 발생시킬 수 있는 근원적 장소이자 여러 영화적 경험이 참조하는 하나의 이념으로 존재한다. 그렇다면 극장의 경험은 어떻게 이루어지며, 그것은 어떻게 정의할 수 있는가? 이미 여러 비평가와 이론가들이 지적한 것처럼,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은 건축적 공간, 각종 기계 장치, 그리고 관객이 결합해서 만들어낸 하나의 거대한 시스템의 결과물이다. 구체적으로 그 경험은 극장이라는 건축적 공간이 외부의 자극을 차단함으로써 만들어내는 밀폐된 공간, 카메라, 영사기, 스크린으로 구성된 기계적 시스템이 만들어내는 환영의 세계, 그리고 좌석에 기댄 채 스크린을 응시하는 관객의 욕망이 상호작용하면서 만들어낸 것이다. 프란체스코 카세티는 자신의 최근 저작인 『스크리닝 공포(Screening Fears)』(2023)에서 영화관 특유의 스크린 경험을 “ 투사/방어 복합체 (projection/protection complex)”라는 용어로 설명한다. 투사/방어 복합체는 기계적, 심리적, 사회적 장치들로 구성된 것으로, 물리적으로 폐쇄된 공간을 통해서 관객을 현실로부터 분리하는 동시에 스크린의 투명한 이미지를 통해서 관객을 다른 세계와 연결하는 것을 의미한다. 투사/방어가 하나의 짝을 이룬다는 것은 영화적인 경험이 현실과의 연결/분리의 모순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과 같다. 이 모순은 관객의 심리적 요구와도 무관하지 않다. 관객은 영화 속 세계와 연결되거나 그 세계에 몰입 하고 싶으면서도 그와 동시에 영화가 제시하는 환영을 거부 하고 자신이 실제 현실에 발을 딛고 있음에 안도감을 느낀다. 관객은 영화를 통해 꿈을 꾸면서 영화에서 깨어나기를 바라는 이중의 욕구를 가지고 있다. 카세티는 계보학적인 관점에서 영화가 아닌 것에서도 투사/방어, 즉 관객인 우리를 스크린 속 세계와 연결하면서도 분리하는 이중의 경험이 나타난 역사적 사례가 있음을 지적한다. 그에 따르면, 영화-이전(pre-cinema)의 시기에 해당하는 판타스마고리아는 숨겨진 영사기의 빛을 통해 죽은 자의 이미지를 안전하게 바라보는 경험을 제공한 경우이다. 그리고 영화-이후(post-cinema)의 시기에 해당하는 화상 채팅과 같은 오늘날의 디지털 버블은 타인과의 접촉 없이 실시간으로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한 경험을 제공하는 경우이다. 각각의 매체적 경험은 극장과 스크린을 매개로 여기와 저기의 분리와 연결을 동시에 가능하게 만드는 영화적 경험과 친연성을 갖는다. 카세티는 이러한 계보학적 접근을 통해서 영화의 탄생과 발전이 물리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안식처를 갖길 바라는 대중의 심리와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재차 강조한다. 그러한 영화적 경험 속에서 극장은 현실의 충격을 방어하기 위한 대피소로, 스크린은 현실에 대한 모의실험을 매개하는 장치로, 영화 이미지는 현실에 대한 예방주사로 존재한다. 만약, 카세티가 말하는 영화적 경험의 기원적, 본질적, 근원적 속성이 관객의 실천과 함께 역사적으로 회귀할 수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면, 우리는 오늘날 제기되는 극장의 위기론이 지나친 기우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설령 극장이 물리적으로 존재하지 않더라도 극장의 경험은 유령처럼 우리에게 상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극장이 없는 자리에서도 극장은 유령처럼 나타나 관객인 우리의 귀에 대고 다음과 같이 속삭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것은 여전히 영화적이라고. 이도훈(영화평론가) l 대학에서 미디어, 대중문화, 영화 관련 강의를 하고 있다. 느리게 보고, 느리게 쓰지만, 꾸준히 영화와 관련된 비평과 연구를 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단독 저서 『이방인들의 영화 : 한국 독립영화가 세상과 마주하는 방식』(2023) 집필, 독립영화, 에세이영화, 포스트-시네마 등과 관련된 학술 논문 집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