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자네티의 영화의 이해
- 감독
- 임지은
- 제작년도
- 2014
- 출연
- 달시 파켓, 이달, 박일, 함윤희, 신정섭
심우섭 감독의 1969년 영화 < 남자와 기생 >은 작품만 따로 떼어놓고 본다면 요즘의 관객에겐 다소 낯선 영화일 수 있겠지만, 이 영화를 한국영화사의 큰 흐름 속에 놓고 본다면 금세 고개를 끄덕일 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짧은 지면에서 한국영화사의 흐름을 다 훑을 순 없겠지만, <남자와 기생>이 만들어진 1960년대의 한국 코미디 영화의 경향 안에서, 그리고 이 영화를 연출한 심우섭 감독의 필모그래피 안에서 우선 이 영화를 자리매김해보는 것은 영화의 이해를 돕는 데 있어 의미 있는 시작처럼 보인다. 1959년 인기를 얻었던 방송드라마 < 백련부인 >으로 감독으로 데뷔한 심우섭 감독은 연출자로 데뷔하기 이전, 1950년대 중반, 홍성기 감독의 <애인>의 촬영감독으로 먼저 영화에 입문했다. 하지만 연출자로서 예술적 야심을 녹여냈던 <백련부인>이 대중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지 못하자 그는 홍성기 감독, 최훈 감독 등 다른 작품에도 촬영 감독으로, 또는 편집자로 계속 참여하면서 경력을 쌓았다. 그 이후로도 몇 편의 작품을 더 연출했지만 정작 그의 이름을 대중들에게 알리게 된 건 코미디 영화 < 청춘사업 >(1965)과 < 주책바가지 >(1965)가 연달아 흥행에 성공하면서 부터였다. 한 인터뷰에서 심우섭 감독은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심우섭과 작업하면 무조건 웃고 돌아 간다”는 소문이 번졌다. 나와 일한 제작자들은 하나같이 주머니를 불려서 돌아갔다. 그저 잘되게 해줘서 고맙다는 소리가 좋았을 뿐이었다. 내 몫으론 얼마가 떨어지든 별로 신경 쓰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였다. 다만 스승 홍성기의 뜻을 거스르는 것 같아 일말의 죄책감은 있었다. 스스로 흥행감독이 되길 원한 바는 아니었으나 작품을 의뢰하는 제작자들의 뜻을 거스를 수도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웃음을 주고 사회에 일침을 가하는 코미디가 내겐 맞았다." 1) 두 영화의 성공 이후 심우섭 감독은 < 남자 식모 >(1968)로 흥행을 보증하는 코미디 영화 감독으로 자리를 굳혔고, 그 이후 <남자 미용사>(1968), <남자와 기생>까지 '(여장) 남자' 시리즈로, 그리고 '팔도' 시리즈 (< 팔도 노랭이 >, < 팔도 며느리 >, < 팔도 주방장 >)을 연이어 연출하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멀리 돌아왔지만 <남자와 기생>은 코미디 감독으로 명성을 얻은 심우섭 감독이 당대를 주름잡았던 서영춘 , 김희갑 , 양훈 , 구봉서 등과 같은 코미디언과 함께 작업한 일련의 코미디 영화의 중심에 놓여 있는 작품인 셈이다. 특정 소재를 가지고 시리즈로 만들어지는 일련의 영화들이 그렇듯 <남자와 기생> 역시 이야기는 제목에서 유추 가능할 만큼 단순하다. 회사에서 쫓겨나 생계가 막막해진 태호(구봉서)는 기생집에서 일하는 지인의 권유로 여장을 하고 기생이 되기로 결심한다. '산월'이라는 기생으로 일하게 된 태호는 기생집에서 자신을 쫓아낸 회사의 사장( 허장강 )을 만나게 되고, 그를 골탕 먹일 계획을 꾸민다. 한편 이러한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허사장은 산월이에게 빠져 흥청망청 기생집에서 돈을 쓰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허사장의 부인 ( 도금봉 )은 허사장의 뒤를 밟고 급기야는 밖으로 도는 남편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어떻게 하면 남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지, 그 '노하우'를 배우려 남장을 하고 직접 기생집에 찾아간다. 물론 이야기는 '코미디'라는 장르의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 선에서 모두가 '정상성'을 회복하고 웃으며 안전하게 마무리되지만, 이 때 이 영화의 핵심이 되는 '옷을 바꾸어 입는' 행위가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 지에 대해서는 한 번 되짚어 볼 만하다. 작지 않은 체구에 선 굵은 얼굴을 가진 '구봉서'가 한복저고리를 입고 교태 섞인 목소리를 내며 기생을 연기한다는 설정 자체가 이미 보증된 일종의 웃음 코드이겠지만, <남자와 기생>에서는 주인공 구봉서를 제외한 주변인물들의 '옷 바꿔 입기'도 등장한다. 산월과 하룻밤을 보내기 위해 허사장은 호텔로 그녀를 유인한다. 하지만 허사장을 골탕 먹일 계획인 산월이 샤워하러 들어간 허사장의 옷으로 바꿔 입고 호텔을 빠져나가자 허사장은 산월의 미니스커트를 입고 집에 가야하는 상황에 처한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태호가 산월이 되기 위해 한복 저고리로 갈아 입는 것과 허사장이 (산월의) 미니스커트로 바꾸어 입는 것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작동하는데, 여기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생이 되기 전 태호는 허사장의 회사에서 바느질을 하거나 동료의 양말 빨래를 해주다가 걸려 해고당한다. 하지만 그가 '바지'를 벗고 '치마'로 갈아 입자 그는 순식간에 기생집에서 가장 잘 나가는 기생으로 탈바꿈된다. 말하자면 '옷 바꿔 입기'를 통해 회사에서 몰래 눈치 보며 남의 빨래나 해주던 남자(태호)가 돈을 마구 주무르며 남자 손님들을 상대로 큰 소리 치는 여자(산월)로 바뀐 셈이다. 이 때 '여장(女裝)'은 여성의 (전통적인, 아니 더 정확하게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성역할을 입히는 대신 정반대로 태호에게 결핍됐던 '남성성' 혹은 (역시나 전통적으로 받아들여져 왔던) '남성의 성역할'을 회복시켜주는 행위가 된다. 이 때 태호의 한복저고리는 흡사 수퍼 히어로의 '수트'처럼 보인다. 바지를 입은 태호는 여동생의 도움 없이는 불량배들로부터 연인을 지키지도 못하는 존재지만, 치마를 입은 산월은 같은 기생집에서 일하는 연인(정미)을 무례한 남자손님들로부터 당당하게 구해낸다. 그러나 허사장의 '여장'은 반대로 (미약하게나마 남아있던) 그의 남성성을 완전히 거세시키는 역할을 한다. 산월의 미니스커트를 입고 집에 들어간 허사장은 기 센 부인의 추궁에 거의 집에서 쫓겨날 지경에 이른다. 심지어 이유가 어찌됐든 그는 부인에게 가부장으로서의 역할마저 빼앗기는데, 이는 부인이 남편의 양복을 입고 (남장(男裝)), (남편이 해왔던 것처럼) 기생집에 찾아가는 전위적 행위로 변주된다. (물론 앞서 말한대로 심우섭 감독은 이 전위성을 영화의 결론까지 밀어 부치지 못하고 익숙하고 안전한 결말을 선택한다.) 말하자면 <남자와 기생>의 안전한 웃음 코드인 남자 주인공의 '여장'은 (또는 더 넓은 의미에서 '옷 바꾸어 입기'는) 전통적인 성역할을 두고 두 개의 젠더 사이를 오가며 이루어지는 일종의 전복적 게임이라 할 수 있겠다. 말년의 한 인터뷰에서 심우섭 감독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감독들은 대다수 예술영화를 꿈꾸지만 결국 살아남기 위해 흥행영화에 무게를 두지 않을 수 없는 갈등 속에 사는 것 같습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감독활동을 하는 동안 흥행보다 예술에 치중하며 연출활동을 한 유현목 감독을 부러워했습니다. 유감독과 가깝게 지내기도 했지만, 내 작품 세계에도 영향을 많이 준 사람이지요. 주로 관객을 염두에 두고 희극 영화를 만들면서도 나 역시 그냥 웃어넘기는 흥행영화가 아닌 작품마다 페이소스의 감동적인 여운을 남기려고 노력했어요." 2) 어쩌면 이제, '공장에서 찍어낸, 그렇고 그런 코미디 영화'라고 치부됐던 그의 영화들을 다시 한번 꺼내 보아야 할 때인지도 모르겠다. 1) 씨네21, 2001-05-02자, "배고픈 민중, 웃음의 배를 불리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1773) 2) 인터뷰365, 2012년 3월 14일, ‘신상옥도 부러워한 코미디 거장 심우섭 감독’ (https://www.interview365.com/news/articleView.html?idxno=17892) >> 남자와 기생 VOD 보러가기 <<
임권택 감독 연출로 1984년 <비구니>는 태흥영화사의 창립 작품이 될 뻔했던 영화, 걸작이 될뻔 했던 영화, 불교계의 반대로 제작중단이 된 군부정권 시절 비운의 영화다. 그런데 당시 송길한 작가의 각본 170여 장면 중 약 1/5 분량 촬영이 끝난 상태로 유실됐던 필름은 2014년 태흥영화사 창고에서 발견됐고, 그 후 한국영상자료원과 전주국제영화제 (이하 JIFF)의 협업으로 39분 길이의 본편으로 복원, 편집됐다. JIFF는 송길한 작가 특별전의 일환으로 관계자 인터뷰 위주의 24분 길이 다큐멘터리도 제작했고, 지난해 본편과 함께 제18회 JIFF 관객과 만날 수 있게 했다. 발굴, 복원된 필름은 편집이 전혀 안 된 16mm 러시 필름이었고, 사운드는 아예 없었다. 박홍렬 촬영감독이 생필름 촬영본을 편집했고, <비구니> 촬영을 맡았던 정일성 촬영감독이 색보정을, <취화선> 등의 작품에서 정일성 촬영팀의 일원이었던 박정훈 촬영감독이 편집과 다큐멘터리 연출을 맡았고, 김영진 JIFF 수석프로그래머가 인터뷰들을 진행했다. 올해 봤던 <비구니>가 인상에 남은 것은 제작 중단으로 실현하지 못했던 가능성에 대한 아쉬움이나 표현의 자유 보장의 필요성에 대해 시사하는 점 때문만은 아니다. 발굴돼서 복원, 편집된 작품 자체가 사운드 없이도 강렬하기 때문이다. 원숙한 김지미 배우의 연기는 무성영화 시절 표정, 자태, 몸짓만으로도 거의 모든 것을 전달하던 배우들처럼 공명한다. 대사는 안 들리지만 그녀의 눈빛만 봐도 극적인 갈등과 욕망, 염원이 충분 느껴진다. 또한 작가, 감독, 촬영감독이 함께 로케이션 헌팅부터 해서 영감을 얻은 후 시나리오 작업을 한 만큼, 장면 하나하나의 압축된 구성 또한 눈여겨볼 만하다. <비구니>는 임권택 감독과 송길한 작가가 1981년 작 <만다라>로 개인 수련을 중심으로 한 소승적 불교 수행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에 이어, 새로운 영화로 ‘중생과 더불어 밝음을 지향하는 대승적 수행’을 그려내고자 한데서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주인공이 세속적인 집착과 번뇌에서 벗어나 마침내 큰 스님이 돼가고 ‘스스로 자기를 완성하는 과정’의 이야기에 매력을 느꼈다고 송길한 작가는 전한다. 마침 그 당시 연기의 전환점을 찾던 김지미 배우도 이 영화 공동기획으로 참여했고, 삭발, 노출, 그리고 영하 12도의 추위에도 물속으로 뛰어드는 등 전심전력을 다 했다. 애초에 제작 의사도 표시했지만, 임권택 감독은 대규모 예산에 안정적인 프로덕션을 꾸려줄 회사의 필요성을 느꼈다고 한다. 그래서 극장 흥행사에서 영화제작으로 활동영역을 넓혀 나가려던 이태원 사장은 국제영화제에서 활약을 기대할 수 있는 <비구니>를 태흥영화사 창립 작품으로 하기로 했다. 이렇게 야심 차게 꾸려진 <비구니>는 1984년 3월 13일 문공부와 영화진흥공사에 제작신고를 했으나, 3개월 후 결국 제작 포기를 하게 됐다. 시나리오 작업할 당시 불교계에서는 자문과 고증을 도왔음에도 막상 대본을 전달받은 조계종에서는 불교를 모독할 우려가 있음을 표명하며 문공부에 제작중지 요청 공문을 보냈다. 태흥영화사와 임권택 감독, 송길한 작가는 조계종 사회부와 만나 대화를 나누고 대본을 수정하는 등 “수준 높은 불교 영화를 만들 수 있도록 협조 요청”을 했으나 종단에서는 불교의 성역을 영화화하는 것 자체를 반대한다고 했다. 주인공이 비구니로 입산 후 속세에서의 사랑과 번민을 회상하는 장면이나 전쟁 통에 고아들을 피난시키기 위해 트럭 운전사에게 몸을 준 것 등을 문제 삼았다. 그리고 결국 제작중지 궐기대회에, 법원에 제작중단 가처분 신청까지 이어 나갔다. 그런데 이때 조계종 전국 비구니 대표자 회의가 내놓은 요구 사항은 한번 살펴볼 만하다. 다음과 같다. 1. 불교재산관리법을 철폐하라. 2. 10.27 불교법란을 정부는 공개 사과하라. 3. 불교 탄압을 중지하라. 4. 국영방송과 기독교인은 공개 사과하라. 5. 극영화 <비구니> 제작을 중지하라. 사실상 <비구니> 관련된 것은 다섯 가지 요청 사항 중의 하나밖에 안 되는데, 심지어 순위도 맨 마지막이다. 여기서 ‘불교법란’은 전두환 정권 초기 1980년 10월 27일 전국의 사찰 및 암자를 수색하고 스님들과 불교 관련자들을 대거 연행하고 고문한 사건을 일컫는다. 불교계는 이런 치욕과 탄압에 분노하다가 영화 <비구니>가 나타나면서 마침 기폭제를 만난 것으로 보인다. 이때쯤 당국에서도 제작자 이태원을 만나 제작을 포기하라며 설득과 회유를 시도했다고 한다. 법원에 가처분 신청 변론과 심문이 진행되는 가운데 데모하던 비구니들이 전경에 맞서다가 다치기까지 했다. 이에 제작자는 사회적 물의가 너무 크다고 판단하여 제작을 포기하기로 했다. 이전에 대본 수정과 함께 제목이 <수연 비구니>로 바뀌어 있었던 영화에 대한 제작신고를 ‘자진 취하’하는 문서를 6월 13일 문공부에 접수하는 것으로 사건은 일단락됐다. 제작비 2억여 원을 날린 태흥영화사도 그랬지만, 임권택 감독, 송길한 작가, 김지미 배우 등 모두가 열과 성을 다해 임하고 있었던 작품이 중단되자 충격을 못 이기고 일정 기간 창작 의지를 상실하게 됐다고 한다. 물론 그 이후에 다시 작품 활동들을 하게 됐지만, 당시 타격이 컸다고 증언한다. 그리고 관계자들은 ‘그때는 우리 영화인들이 힘이 없어 접었지만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영화 안팎에서 표현하고 있다. 어쨌든 30년이 흐른 후, 창고에서 16mm 러시 필름이 나왔다. 시나리오의 1/5 분량밖에 촬영하지 못한 것이라 아무래도 원래 대본에서 빠진 것이 많고, 사운드가 없어서 가끔 보이는 것과 들리는 것이 서로 다른데 중첩될 때 나타날 수 있는 영화적인 효과를 놓치게 되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또 배우들의 소리 없는 모습에서 전달되는 것도 많다. 시작 장면에 수경이 민간인 복장으로 산사로 걸어 들어갈 때 애인쯤 돼 보이는 남자가 얼굴과 발걸음만으로도 ‘정말 이래야만 하겠어?’ 하는 안타까움과 답답함 표현하며 동행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수경은 절에 들어가 추운 날 나무도 해 가고 냇물에서 빨래도 하는 등 행자 생활을 하다가 이윽고 장엄한 삭발식을 치른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군용 앰뷸런스에 타고 가는데 아까 본 남자가 도와주다가 뭔가 엄청난 소식을 전달하면서 떠나고, 비구니는 눈물과 번민에 주저앉기도 한다. 스크린 위의 영상이 펼쳐지는 동안 정적을 깨는 듯한 것들이 가끔 있다. 분명 사운드는 없다. 그렇지만 김지미 배우의 숨소리가 들리는 듯한 순간들이 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어머니 집을 찾아가 원삼을 받아 입고 돌아가신 줄도 몰랐던 어머니 무덤에 삼배한 후, 시집갈 때 입으라고 지어주신 그 옷과 함께 집착을 불태워버리려 할 때 불꽃 타오르는 소리가 들리는 듯도 하다. 대규모 전쟁 장면에서 폭파의 진동이 느껴지는 것 같은 착각도 든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이 전쟁 피난길 장면들인데, 최근에 나온 스펙타클한 CG 전쟁영화들과는 좀 달리, <비구니>는 폭격의 불길과 먼지와 연기 속을 고되게 뚫고 나가야만 하는 인간상들이 인상적이다. 임권택 감독은 1936년생으로 한국전쟁이 터졌을 당시 이미 십 대였고, 정일성 촬영감독은 1929년생으로 심지어 군 복무 중이었다. 그래서인지 화면에 묻어 나오는 인간성이 다른 듯하다. 피난민의 절박하거나 훈훈한 얘기들 외에도 난리 통에 기회주의적으로 실속을 챙기려고 하는 나쁜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는 암시 아닌 암시가 처음부터 떠오르기도 했다. 수경은 가족 잃은 꼬맹이 여섯 명을 챙기며 피난을 가다가 화물 트럭 운전사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그는 단호히 거절한다. 책임감을 느끼고 끈질기게 호소하는 비구니를 순간, 운전사는 음흉한 눈빛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 문제의 협상이 이뤄진다. 아이들을 구하려면 원하는 대로 해달라. 사운드는 없지만 무슨 얘기가 오가는지, 비구니가 무슨 고민을 하는지, 그리고 추위에 떠는 꼬맹이들을 보며 어떻게 결심을 하게 되는지 너무도 뚜렷하게 보인다. 그녀는 폐허에 이끌려가 일을 치르고 와서는 아이들을 트럭에 실어 떠나 보내고 횡 하니 서있는다. 이윽고 눈 덮인 냇가에 가서 아랫도리를 씻는데 얼굴 클로즈업이 되면서 마치 감정에 북받쳐 나온 것처럼 영화에서 기대치 않은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아주 미니멀한 우리 소리가 눈발을 맞으며 땅을 치면서 우는 수경의 모습 위로 흐른다. 정적 속에 마치 귀가 막혔다가 트이는 것 같은 느낌이 흡사 개도나 카타르시스를 얻는 것 같은 느낌 같기도 하다. 마침내 수경은 옷을 다 풀어헤치고 알몸으로 물속에 몸을 던진다. 그리고 거기서 나오지 않고 후두두 떨면서 기도한다. 목숨을 건 김지미 배우의 과감하고 단호한 선택이었다. 정일성 촬영감독의 말 대로 촬영 당시 영하 12도의 날씨면 심장마비로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 그 기도 하는 모습이 연기만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이렇게 목숨까지 건 영화 창작이 그렇게 암울한 시절 중단됐다는 것은 잊혀서 안 될 일이다. 영화제 관계자나 영화 학자, 애호가들뿐만 아니라, 아키비스트, 사회학자, 민속지학자, 박물관 관계자 등이 관심을 갖고 상영 및 포럼을 기획해도 좋을 것 같은 작품이다. 영화의 이해를 도울 수 있다면 무성영화 시절 사용했던 것 같은 인터타이틀 삽입도 고려해볼 만할 것 같다. JIFF는 특별전에 맞춰 『작가 송길한』이란 책에 인터뷰, 기사, 사진 자료 등을 비롯해 영화 <비구니>의 시나리오 전편도 수록했다. 이 글을 쓰는 데에도 참조가 많이 된 것으로 감사하게 생각한다. <비구니> (JIFF 2017 편집 본)에 들을 수 없는 대사와 미처 다 찍지 못해 볼 수 없는 일제강점기부터 시대를 관통하는 이야기와 원래의 엔딩 등 더 많은 것이 궁금한 사람들에게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유령의 세계에는 역사가 없다. 비애극은 죽은 자들을 그 유령의 세계로 보낸다. -발터 벤야민, 『독일 비애극의 원천』 지난 역사 속 특정 시공을, 재현representation의 매체medium라 흔히 일컫는 영화로 만드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공동체에 트라우마를 안긴 사건의 경우는 더하다. 필자의 얕은 안목으로는, 지난 삼십 년간 광주항쟁을 다룬 어떤 영화도, 적벽가 한 대목을 꿇어앉은 배우들이 주야장천 부를 뿐인 연극 <이야기의 방식, 노래의 방식 - 데모 버전>(2014, 극단 그린피그 / 연출 윤한솔)만큼 마음을 끈 작품은 없었다. 최근 전두환 회고록이 출간되고, 5.18 당시 헬기 기총소사 증언 등이 나오는 와중에 본 한국 영화 < 택시 운전사 >는 이러한 편견을 더욱 굳혔을 뿐이다. 한편, 작년과 올해 본 라브 디아즈와 존 토레스의 신작 덕에 3백 년이 넘는 스페인 식민 지배와 미국 강점에 이은 마르코스의 장기 독재를 ‘피플 파워’로 끝냈던 필리핀 역사와 이를 담은 영화들을 한국의 경우와 비교해 보게 된다. 1989년 하와이에서 죽은 마르코스의 시신이 2016년 11월 고향 마을에서 국립 ‘영웅묘지’로 이장되었고, 1983년 암살당한 베니그노와 코라손 아키노의 아들 베니그노 3세를 뒤이어 대통령이 된 두테르테의 통치 방식을 전해 들으며 소스라치곤 한다. 필리핀에서 장편극영화가 처음 제작된 해는 1912년으로 필리핀을 지배하던 미국인들이 만든 작품 두 편이 하루 차이로 공개되었다 한다. 둘 다 호세 리살의 전기 영화였는데, 앨버트 이어슬리(Albert Yearsley)의 <호세 리살 박사의 처형 El Fusilarmiento de Dr. Jose Rizal>과 해리 브라운(Herry Brown)의 <호세 리살의 생애 La Vida de Jose Rizal>였다. 작가이자 의사였던 호세 리살은 필리핀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반제국주의 혁명가이다. 리살은 소설 『나를 만지지 마라 Noli Me Tangere』(1887)를 써서, 7천 개가 넘는 섬에 흩어져 살며 여러 언어를 쓰는 필리핀 사람들에게 1521년 이래 이어진 스페인 식민지배에 맞설 저항정신과 ‘국민국가’를 향한 열망을 일깨우려 했다. (『엉클 톰스 캐빈』(스토우), 『사냥꾼의 수기』(투르게네프) 등과 더불어 “제국의 시대”를 “혁명의 시대”로 이행시킨 19세기 소설 중 가장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는 『나를 만지지 마라』는 2015년에야 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었다.) 호세 리살의 문학 작품들은 필리핀 영화에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운다. 이를테면, 라야 마틴은 『나를 만지지 마라』의 한 구절을 인용하며 < 부에나스 노체스 에스파냐 >(2011)를 시작한다. 또, 라야 마틴의 첫 장편 < 필리핀 인디오에 관한 짧은 필름 >(2006)에서 면벽하고 신부에게 벌을 받을 준비를 하는 성당 종치기 소년은 바로 『나를 만지지 마라』의 주요 인물 바실리오다. 바실리오는 라브 디아즈의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에도 이사가니의 동료로 등장한다. 한편 라브 디아즈의 전작 중 < 엔칸토에서의 죽음 >(2007)의 시인에게도, 1892년부터 1896년 사이 민다나오 다피탄에 유배되어 있던 호세 리살의 체취가 배어 있다. 『나를 만지지 마라』의 주인공 크리소스토모 이베라는 호세 리살 자신을 투영한 인물로 보인다. 리살은 자신의 소설 속 인물 크리소스토모 이베라처럼 개혁을 꿈꿨지만 제안한 개혁안이 반란으로 간주되어, 필리핀 혁명을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1896년 처형당한다. 『나를 만지지 마라』 대단원에서 주인공 후안 크리소스토모 이베라 막살리는 스페인 식민당국 순찰정을 피해 도망치고, 마치 몬테 크리스토 백작처럼 『엘 필리부스테리스모』의 보석상 시모운이 되어 돌아온다. 『나를 만지지 마라』의 속편 격인 『엘 필리부스테리스모 El Filibusterismo(‘폭로자’라는 뜻)』(1892)에 호세 리살은 ‘필리핀 소설 novela filipina’이라는 부제를 붙인 바 있다. 현재 필리핀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 라브 디아즈는 바로 『엘 필리부스테리스모』의 일부를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라는 제목으로 영화화한다.(<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는 2016년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영화 예술의 새로운 차원을 연 작품에 수여한다”는 알프레드 바우어상도 받았다.) 호세 리살과 그의 소설을 연구해 『상상의 공동체』, 『비교의 유령: 민족주의, 동남아시아, 세계』 등을 쓴 베네딕트 앤더슨이 『엘 필리부스테리스모』와 제국주의에 맞선 쿠바 혁명, 아나키즘 투쟁의 삼각지대를 분석한 『세 깃발 아래에서: 아나키즘과 반식민주의적 상상력』(서지원 역, 2009, 도서출판 길)에 따르면, 『나를 만지지 마라』를 통해 리살은 “필리핀 ‘사회’의 전체상(이자 동시대상)을 상상 속에서 창조해냈다. 한편, 리살이 “『엘 필리부스테리스모』에서 한 일은 이 사회의 정치적 파멸 및 사회를 지배하는 권력의 제거나 다름없는 것을 상상해 낸 것”이었다. 그리하여 앤더슨은 『엘 필리부스테리스모 』를 ‘세계 소설 novela mundial’이라 칭한다. 『엘 필리부스테리스모』의 결말 즈음에는 ‘미스터리(El misterio)’라는 짧은 장이 있는데, 베네딕트 앤더슨에 따르면 원본 원고 7쪽 중 3쪽을 호세 리살이 검게 지워버렸다. 라브 디아즈가 붙인 영화 제목의 기원을 유추하게 하는 일화다. 남아있는 소설의 ‘미스터리’ 장은, 영화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 초반처럼 오렌다 가 습격 직후의 혼란을 묘사한다. 사랑하는 파올리타의 목숨을 구하려 램프를 탈취해 강에 뛰어든 학생 이사가니는 보석상 시모운의 무장 피습 계획을 뜻하지 않게 좌초시키고, 『나를 만지지 마라』의 시모운처럼 사라진다. 한편, 영화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에서는, 소설에서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 도피한 시모운이 호세 리살의 유고시 「나의 마지막 이별」을 길에서 읊는 가난한 모녀에게 은전을 베푸는 시퀀스가 이어진다. 호세 리살이 창조한 인물이 리살을 추모하는 “보르헤스적“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다. 역사와 픽션이 함께 머무르고 흐르는 뫼비우스의 띠와 같은 서사는 8시간이 넘는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가 가장 야심차게 시도하는 바일 터다. . (전략) 내 영원히 사랑하고 그리운 나라 필리핀이여 나의 마지막 작별의 말을 들어다오 그대들 모두 두고 나 이제 형장으로 가노라 내 부모, 사랑하던 이들이여 저기 노예도 수탈도 억압도 사형과 처형도 없는 곳 누구도 나의 믿음과 사랑을 사멸할 수 없는 곳 하늘나라로 나는 가노라 (후략) 소설 『엘 필리부스테리스모』의 마지막 페이지들은 죽어가는 시모운과 그를 돌보는 필리핀인 신부 플로렌티노의 긴 대화로 채워졌다. 라브 디아즈의 영화는 이 부분이 리살의 소설과 이 부분이 꽤 다르다. 필리핀의 스타 배우 존 로이드 크루스와 피올로 파스쿠알이 이사가니와 시모운으로 분한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에서, 부상을 입고 이사가니의 도움으로 플로렌티노의 거처에 도달해 임종을 맞는 시모운이 남기는 말은 많지 않다. 그가 죽자 플로렌티노와 이사가니는 시모운의 시신과 더불어 “터전을 태워” 없애고 혁명을 위한 배수의 진을 친다. 한편, 이미 『나를 만지지 마라』에서 사랑은 물론 터전도 모두 버린 소설 속 시모운은 죽음을 기다리며, 신부에게 “이반 카라마조프가 던졌을 법한” 질문을 건넨다. 신이 자신을 용서하겠냐는 시모운의 물음에, 플로렌티노는 신은 시모운의 모든 고통을 이해하며 용서할 테지만 그가 가치 있는 목적을 위해 사악한 방식들을 택한 것은 용인할 수 없다 한다. 베네딕트 앤더슨은 『엘 필리부스테리스모』를 『나를 만지지 마라』와 비교하여, 영웅이 없고, 플롯은 실패와 좌절, 죽음에 대한 이야기라 더 어둡고, 문체도 한층 냉소적인데다 당시 필리핀 식민 사회와 다른 점이 많아 필리핀에서도 인기가 덜하다고 썼다. 앤더슨에 따르면, 리살은 “필리핀 소설”인 『엘 필리부스테리스모』에서 주로 스페인에서 경험했던 사건과 감정들을 필리핀으로 옮겨, 필리핀에 “임박한 미래의 그림자”로 명멸하는 스페인 제국 내 혁명의 불꽃(스페인의 또다른 식민지 쿠바에는 이미 도래했던)을 현시presentation하려 했다. 임박한 미래에의 예감은 소설 출간 당시 권력의 정점에 있었던 웨일레르 총독 시대에 뿌리내린 현실 인식으로 더욱 단단해진 것이었다. 다시 앤더슨의 분석에 기대자면, 소설 속 시모운은 전작 『나를 만지지 마라』에 근원을 둔 인물이며, “스페인으로부터가 아니라 상상된 쿠바로부터, 그리고 지구를 도는 방랑으로부터 소설에 입장”한다. 리살에게 시모운은 한때 공상되던 “인터내셔널이라는 감추어진 마키아벨리적 네트워크”의 거울상이었으며, 장차 필리핀에 출몰하게 될 (혁명이라는) ‘세계적 유령’의 일종이었다. 마치 그의 민족처럼, 아직 현실에는 없지만, 이미 상상되었으므로, 곧 도래할. 한데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의 시모운은 무력함과 타락을 오가며 공포와 연민만을 불러일으키는 인물로, (『독일 비애극의 원천』(최성만/김유동 공역, 2009, 도서출판 길)에서 벤야민이 쓴 표현을 따르자면) “순교하는 폭군”처럼 군림하며 “도취된 상태에서 권력을 펼” 뿐이다. “현란한 빛을 받는 별도의 장면”에 등장하는 웨일레르 총독 등은, 제국주의와 민족주의, 아나키즘이 경합했던 19세기의 정복자이기 보다는 벤야민의 분석을 따르는 전형적인 바로크 드라마의 적대자들 같다. “그들을 움직이는 동기들은 대개 아무런 역할도 하지 않는다. 바로크적 음모는 마치 열린 무대 위에서 무대장식이 바뀌듯 이루어진다. 음모 속에서 환상이 의도되지 않음에 따라 이러한 대립 플롯의 조직도 강하게 두드러진다.” “동작은 기민하나 표정은 무력한” 프로타고니스트 이사가니도, 비애극 속 전형적 인물들처럼 역사의 격랑 속에 “동요하는 육체적 충동”만으로 빛과 어둠을 오가는 신화적 형상으로 보인다. 이에 더해 독일 비애극에 등장하는 ‘라이엔 Reyen(독일 바로크 비애극의 각 막 끝에 있는 코러스를 가리키는데, 대개 극 중 사건을 일반화하여 해석하고 가치평가를 내린다.)과 흡사한 필리핀 악령 틱발랑 셋이 등장하여, 실존인물 웨일레르 총독 일행과 어울려 황음무도하는 시모운을 지켜보는 한편,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의 또다른 주요인물(이자 소설『엘 필리부스테리스모』에는 등장할 수 없었던 진정한 ‘미래의 이브’)그레고리아 데 헤수스(라브 디아즈 전작들의 스태프와 배우로 계속 작업해온 헤이즐 오렌시오가 분했다.)가 남편 안드레스 보니파시오의 시신을 찾아 헤매며 떠도는 길을 동반한다. 호세 리살에게 소설은 미래를 예지하는 것이었는데, 라브 디아즈가 그의 소설을 실제 역사적 과거를 픽션과 교차시키며 영화에는 다른 분기점이 발생한다. 각기 남성, 여성, 양성구유인 세 탁발랑은 닥쳐올 비극도 목도할 것이다. 이를테면 다음과 같은 일들이다. 『엘 필리부스테리스모』가 출간된 지 5년 뒤,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는 살해당했다. 호세 리살이 죽은 지 5개월 남짓 지난 뒤였다. 보니파시오는 독학으로 역사 등을 공부한 뒤 1892년 혁명운동 조직 ‘카티푸난’을 창시하여 반스페인 무장항쟁에 나섰다. 리살의 동의를 얻지 못했음에도, 카티푸난을 창설하며 보니파시오는 리살을 명예 의장으로 추대했다. 1895년 3월 카티푸난 하급자로 입회한 뒤 재빨리 자신의 파벌을 키웠으나 테헤로스 선거에서 보니파시오에게 진 에밀리오 아기날도는 안드레스 보니파시오를 그의 형 프로코피오와 함께 붙잡아 1897년 5월 10일 반혁명 혐의로 처형했다. 스페인을 이어 필리핀을 침략한 미국과의 전쟁 중 1901년 3월, 아기날도가 붙잡히자마자 “재빨리 워싱턴에 충성을 맹세하자 혁명은 끝났다”. 그리고 아기날도는 ‘공식적인’ 필리핀 초대 대통령이 된다. ‘혁명 영웅’ 보니파시오도 호세 리살처럼, 필리핀 영화의 단골 주인공이다. <영생 Ang Magpakailanman>(1983)의 감독 레이몬드 레드는 학살자의 내래이션으로 보니파시오 형제의 삶을 증언하는 <영웅들 Bayani>(1992)을 연출했다. 라야 마틴의 < 오토히스토리아 >(2008)와 <연인들>(2008)이, 증인도 없고 시신을 영영 찾지 못해 재현할 도리도 없고 잊힐 수도 없는 보니파시오 형제의 죽음과 카티푸난 진압이라는 기억을 현시하려는 시도임도 익히 알려진 바다. 미국인들이 필리핀에서 영화를 처음 만들기 전에, 필리핀에서 영화라는 매체를 먼저 소개한 것은 기실 1521년 필리핀을 점령한 뒤 300년 넘어 식민지로 삼았던 스페인인들이었다. 『아시아 영화의 이해』(주윤탁,김지석 편, 제3문학사, 1993)에 따르면, 1897년 1월 1일 포토그라피아 페르티에라Fotographia Pertierra 극장에서 45초 미만의 수입 단편영화 6편이 최초로 상영되었다. 뤼미에르 형제의 작품들이 여기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큰데, 라브 디아즈와 영화 속 틱발랑들은 이 순간을 놓치지 않는다. 최초의 영화를 관람하던 스페인 식민관료들과 고위 인사들은 화면 밖으로 튀어나오는 (‘기차’가 아니라) 틱발랑을 보고 혼비백산한다. 이 날은 호세 리살이 처형된 1896년 12월 30일로부터 불과 이틀 뒤였다.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의 이 장면은 리살의 죽음이 드리운 어둠의 자장 속에서 관객들이 보았을 초기 영화를 재구성한 것이었으리라.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에는 학살(과 전후)을 재현한 신도 여럿 있다. 바로크 비극의 ‘엠블렘’과도 같은 전장의 시체들이 영화 속 곳곳에 즐비하다. (필리핀 역사의 큰 ‘트라우마’인) 안드레스 보니파시오가 노상에서 죽임당하는 장면조차 직접 보여진다. 스페인 군대가 실랑에서 필리핀인들을 죽이기 직전에는, 불을 피워놓고 망을 보던 농민군 중 한 사람이 기타를 잡고 노래를 부른다. 노래를 부르는 반란군으로 분한 이는 필리핀에서 활발히 활동하는 현업 뮤지션 엘리 부엔디아(Ely Buendia)이고, 그가 부르는 ‘민족의 아들 Anak ng Bayan’은 라브 디아즈가 존 지안비토의 <비행운(클라크) Vapor Trail(Clark)>(2010) 대단원에서 직접 불렀던 저항가다. 한데, 형언하기 힘든 비극을 앞둔 이 시점, 이 장면, 이 노래는 한없이 애처로우면서도 연극적으로 “과장된 한탄조”가 담겨있다. 또, 혁명군들이 주둔하고 있는 이 밤의 숲은 확연히 인위적인 세트처럼 보인다. 발터 벤야민은 『독일 비애극의 원천』에서, “전쟁과 전쟁으로 인한 고난에 대해 쓴 모든 저술에는 거의 애처롭게 들리기까지 하는 과장된 한탄조가 고정적으로 담겨 있다. 말하자면 절망에 찬 표현방식을 지속적으로 사용하는 일이 보편적이었던 것이다. 비참함은 그것이 아무리 크다 할지라도 그 정도의 변화가 있는 반면, 비참함을 기술하는 데에서 당대의 저술들은 뉘앙스의 차이를 거의 알지 못했다. ”는 에르만스되르퍼의 말을 인용하며, 바로크 시대 ‘비애극’을 연극무대가 역사무대에 동화된 것에 대한 극단적인 결과라 일컫는다. ‘독일 비애극’은 17세기 ‘30년 전쟁’ 전후에 “잔인한 사람들에 의해, 그리고 잔인한 사람들을 위해 씌어진 작품들”이다. 벤야민은, “전쟁과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의 분위기 속에서 살던 그 시대 사람들은 이러한 장면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여기고 있었고, 그들에게 제공된 그들 자신의 풍속도였”기에 비애극이 그 시대 사람들에게 필요했다고 분석한다. “그들은 그들에게 제공된 쾌락을 소박하고 노골적으로 맛보았다.” 한편으로 그들은 강변한다. “당신께선 저희들이 이 역사를 쓰라린 마음으로 기술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따라서 저희는 일련의 사건을 엮어냈다기 보다는 그것이 지닌 비참함을 비극이란 방식으로 엮어낸 것입니다.” 어쩌면, 예컨데 안드레스 보니파시오 피살은 ‘미망인’ 그레고리아 데 헤수스 뿐 아니라 “민족 해방”을 꿈꾸었던 20세기의 ‘제3세계’인들이 모두 증인이 되고 싶었던 사건일지도 모른다. 그들은 이 트라우마를 직시하여 그것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터이다. 라브 디아즈도 480분에 걸쳐, 호세 리살과 보니파시오의 삶과 죽음이 여전히 피워올리고 있는 불꽃, 그리고 사건과 문학이 지닌 마법의 힘을 빌어 이 비극을 정면으로 바라보려 한다. 그 ‘미스터리’의 기술이 이토록 슬프고 쓰라림은 그러므로 잘 알겠다. 그러나, 벤야민은 “보고 싶은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격렬한 사건들 속에는 바로 연극적인 요소가 강하게 표현되고, 이론까지도 연극장면적 효과를 종종 강조한다”고 일갈했다. 안드레스를 찾아 그레고리아 데 헤수스 일행이 헤매는 산과 강 등은, 최근까지도 국가에 대항하는 본거지가 되었던 동남아시아 ‘조미아’ 산악지대가 표상하는, 지배자의 역사와 대립하며 저항한 실재하는 자연과는 거리가 멀다. 그보다는 풍경을 탐닉하며 “역사적인 것을 세속화하는 바로크의 세계 도피”를 낳는 세트 역할에 충실하다. 이 세트 속에서, 보니파시오 사후에 보니파시오의 측근이었던 훌리오 낙필과 재혼하고 투쟁을 지속했던 실제 그레고리아 데 헤수스의 삶과는 꽤 달리, 오시리스를 찾는 이시스와 같은 여신의 형상이 되어 “민족(국가)의 혼”을 찾는다고 독백하는 그레고리아 데 헤수스가 맺는 영화의 결말은 자못 퇴행적이다. “역사가 무대로 세속화”되니 이 시간들의 움직임은 필리핀의 밀림 속에 갇혀 버리고 만다. 라브 디아즈는 이미 < 멜랑콜리아 >(2008년에 나온 이 작품의 주인공 알베르타는 그레고리아 데 헤수스처럼 남편의 시신을 계속 찾아다닌다)라는 작품을 상재하기도 했는데,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에서 본격적으로 바로크 시대 독일 비애극 작가가 되기를 자청한다.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에서 퇴행적으로까지 만개한 멜랑콜리는, 독일 비애극에 편재하는 주된 정동이기도 하다. 벤야민에 따르면, 비애의 이론은 멜랑콜리적인 인간의 시선 아래 드러나는 세계의 묘사 속에서만 펼쳐진다. 슬픔은 자신의 의도를 특별하게 상승시키고 지속적으로 침잠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침잠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것 앞에서 연대기적 세계사의 거대한 상황들은 일종의 유희로서, 즉 신뢰할 만하게 해독될 수 있는 의미를 위해 주의를 기울일 가치가 있기는 하지만, 그 끊임없는 반복으로 멜랑콜리적 삶의 혐오가 절망적으로 지배하는 것을 촉진하는 일종의 유희로서 모습을 드러낸다.” 독일 비애극의 멜랑콜리를 분석하며, 발터 벤야민은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집요하게 침잠하는 멜랑콜리는 죽은 사물을 구제하기 위해 그것을 자신의 명상 속으로 받아들인다. 나머지는 침묵이다.(햄릿이 남긴 말) 왜냐하면 살아본 적이 없는 모든 것은 구원받지 못한 채 지혜의 말이 오직 기만적으로 유령처럼 떠도는 공간 속에서 쇠퇴해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유령의 세계로의 쇠퇴는 영원한 잠을 낳을 뿐이고, 저항을 깨끗이 소거한 ‘자장가’만 들려줄 수 있을 따름이다. 이런 과정을 반복하며, <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 속 사건은 역사와 멀어지며, 시공은 비애극 속 공허한 신전이나 궁정을 닮아간다. (연극 세트와 닮은 건물을 그린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 포스터는 뚜렷한 자기 고백으로 보였다.) 흑백 이미지를 선호하는 라브 디아즈가 근작에서 저화질 디지털 카메라 대신 HD 포맷을 채용하며, 비애극의 폐허와 흡사한 무대 효과를 자아내는 자연과 인간 사이의 콘트라스트는 더욱 두드러지는 듯하다. 전작 대부분과 달리,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가 구사하는 4:3 화면비가 인물들의 행위를 더욱 극적으로 만들고, 스크린을 하나의 무대처럼 만든다는 분석도 있다.(김소희, 「기울어진 세계: 라브 디아즈의 <슬픈 미스터리를 위한 자장가>와 < 떠나간 여인 >」, 2017, 《오큘로》 4호) 두테르테 집권 후 국가폭력이 노골적으로 발현되고 있는 참이니, 민족과 국가의 ‘혼’을 찾고 싶어하는 바람이 이해되지 않는 바도 아니다. 그러나 파국의 이념을 밝히는 대신, 예술이 "자연주의적 재현"을 택한다면 퇴행과 복고에 기여할 수 밖에 없지 않겠는가. 트라우마를 안긴 역사를 비애극 속 무대로 삼는 재현보다는, 이를테면 1987년 ‘피플파워’라는 사건과 베트남전이라는 기억을 함께 거하게 하며 현전하는 영화 이미지와 사운드 자체를 역사의 질료로 여기고 발굴을 시도하는 존 토레즈의 신작 < 피플 파워 폭탄 선언: 베트남 장미의 일기 >(2016) 같은 시도가, 호세 리살이 지운 검은 페이지를 해독할 수 있게 하는 힘이 되지 않을까. 다른 기회가 있다면, <피플 파워 폭탄 선언: 베트남 장미의 일기>에 대해서 따로 쓰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