映畵製作申告書(단편문화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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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1973년 3월 31일자 중앙일보의 파리 특파원이 쓴 한 기사는 다음과 같은 울분에 찬 문장으로 시작되고 있다. “한국에서 로케 촬영한 <당수태권도>란 영화가 <변증법은 벽돌장을 깨뜨릴 수 있는가>라는 선전 문귀와 함께 완전한 공산주의 계급투쟁을 위한 영화로 둔갑, 파리에서 상영되고 있어 자유민주주의 한국이라는 이미지에 먹칠을 하고 있다.” 이 성실한 특파원은 그저 소문만 듣고 분노를 표출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직접 영화를 보고(“<당수태권도>의 토키가 중국어이기 때문에 원래의 내용은 알 수 없으나”) 이 영화에 대한 관련 평들을 찾아보고(“‘역사적 계급투쟁의 전위이다’라는 유력지 르몽드의 평까지 받았다”) 제작자까지 꼼꼼히 살펴본 후(“이 작품은 비공산계인 Ngay Hong에 의해서 제작된 영화이다”) 이 영화가 어떤 방식으로 “프랑스의 많은 관람객들”로 하여금 “무조건 공산주의 선전물”로 받아들이게 했는지에 관해 정확한 진단을 내리고 있다. “문제의 묘는 상황의식을 가한 자막의 번역이 이 비공산주의 영화에 색채를 바꾸게 한 데 있다. 즉 완전히 자막 번역을 임의로 해 관중을 오도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는 것 같다. 또한 한국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자막을 달아 이곳에서 상영중인 이 영화가 한국에서 촬영되었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한국인들이 등장하고 특히 우리의 자랑인 태권도를 삼고 있다는 데 큰 문제점이 있다.” 1) ‘우리의 자랑인 태권도’를 내세운 공산주의 선전영화라니! 『중앙일보』의 보도 직후 중앙정보부, 치안본부, 경찰서, 문공부가 일제히 진상조사에 들어갔다. 후속 기사에 따르면 진상은 다음과 같다. 문공부에 따르면 이 영화는 “합작영화가 아닌 순수한 우리나라 영화” < 정도 >인데, <정도>의 제작사 한진흥업은 제작에 앞서 홍콩의 장강영화사에 이 영화를 수출하기로 계약을 맺었다. 여기에는 동남아지역상영권 양도가 포함되어 있었다. 수출신고절차를 밟기 전에 한진에서 장강으로 필름을 보냈고, 장강이 <당수태권도>라는 제목의 중국어 더빙 버전을 프랑스의 ‘계급투쟁촉진회’에 이중수출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심각한 ‘오용’은 장강이라는 홍콩 영화사의 농간의 결과인가? 마침 영상자료원에는 이 영화 <정도>의 검열서류가 남아있다. 이 서류들에는 영화제작신고서, 진홍열, 백표(이 영화의 주인공이다), 진호 세 명의 홍콩배우들이 출연을 요청하는 국산극영화 외국배우 출연 승인 신청서와 장강과의 매도계약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매도계약서에 따르면 한진흥업과 장강영화사 사이의 계약은 1972년 2월 27일에 이루어졌다. 영화제작신고서는 이 영화의 제작기간이 1972년 10월 10일부터 1973년 1월 30일까지라고 명기하고 있다. <정도>는 1972년 12월 22일 문공부로부터 검열승인을 받고, 1973년 5월 12일 스카라 극장에서 개봉하였다. 그런데 홍콩 필름아카이브에 따르면 <당수태권도>가 홍콩에서 개봉한 것은 이보다 만 1년 가까이 앞선 1972년 6월 20일이다. 이 검열 서류는 극히 의심스럽다. 만약 홍콩 필름 아카이브의 기록이 맞는다면 한진은 이미 존재하는 영화의 허위 제작 신고를 한 셈이다. 덧붙이자면 <정도>의 감독은 강유신, 오리지날 시나리오 및 심의대본의 작가는 유일수이다. 홍콩영화 <당수태권도>의 감독은 도광계(屠光啟), 시나리오는 예광(倪匡)이다. 강유신은 한진흥업의 전신인 대양영화사의 < 낙조 >(1968)로 감독 데뷔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도>는 그의 세 번째이자 마지막 감독 작품이다. 1930년대말 상하이 시기부터 영화를 찍은 도광계는 1950년대 홍콩 우파 내셔날리스트를 대표하는 감독이었으며, 이후 쇼브라더스 전속으로 활약한 관록의 베테랑이다. 2) 1960년대 중후반 신필름 영화들의 각본을 담당했던 시나리오 작가 유일수는 이 시기 ‘용팔이’ 시리즈로 박노식이 그의 독특한 스타 페르소나를 만들어가는데 공조하고 있었다. < 의리의 사나이 외팔이 獨臂刀 >(장철, 1967)의 작가로 시나리오 경력을 시작한 예광은 < 보표 保鏢 > < 철수무정 鐵手無情 > <십삼태보 十三太保> < 복수 報仇 > 등 이 시기 장철 영화의 가장 중요한 공헌자이자, 홍콩영화계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속필과 다작의 스타 작가였다.(그는 이소룡의 < 정무문 > 각본에도 참여하였다.) 이쯤에서 당신은 물을 것이다. 그럼 대체 <정도>/<당수태권도>는 누가, 언제, 어디에서 만들었다는 말인가? 적어도 서식의 완비라는 관료들의 꿈과 장사꾼의 야합이 만들어낸 저 서류들 안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찾는 것은 무망해 보인다. 진정한 ‘위장’이 이루어지는 것은 바로 이 서류 양식들 안에서일 것이다. 간단히 말해 <정도>/<당수태권도>는 1970년대 한국-홍콩, 한국-대만 여타 등지에서 횡행했던 ‘합작’의 전형적인 형태에 다름 아니다. 이 결합의 양상은 다음과 같다. 아열대 기후의 홍콩은 가을과 겨울이 포착가능하며 오래된 중국적 풍경을 대체할 수 있는 장소가(고궁과 절) 있는 한국에서의 야외 촬영을 선호했으며, 스튜디오 촬영은 홍콩 쪽에서 담당하였다. 각자의 인건비와 상호 체류비를 담당하되 한국 내 배급권은 한국 회사가, 그 외 지역의 배급권은 광대한 화교 문화권 전역에 배급망을 연결해놓은 홍콩 회사에 귀속되었다. 크레딧, 특히 영화의 주요 창작 주체로 상정되는 감독과 시나리오 작가의 이름은 각각의 지역 버전에 따라 그곳의 관객들이 선호하거나 익숙한 이름만을 남기고 그 외의 이름들은 지웠다. 무엇보다 한국 같은 강력한 국가통제와 외화 유출 억제가 영화 정책의 이름으로 자행되던 장소에서 한국인 감독(제작자, 시나리오 작가)의 이름을 단 합작영화란 국내법과 산업적 재생산 모두를 충족시키는 기획이었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복수의 기원의 영화가 발생하는지를 묻고 있는 것만이 아니다. 진정 <정도>/<당수태권도>의 사례가 흥미로워지는 것은 여기에 이미 내재된 포스트프로덕션적 탄력성이라고 할만한 것이다. 이 영화(들)는 이 부류의 영화들이 대개 그렇듯이 서로 다른 편집의, 서로 다른 더빙 버전으로 각각의 영화가 상영되는 지역의 관객들에게 어필하고자 하였다. 당시 후시녹음은 다양한 언어권에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했던 홍콩 영화산업의 중요한 관행이었다. 한국은 1960년대 이래 후시녹음의 탄탄한 스킬을 갖추고 있는 나라 중 하나였다. 여기서부터 더 확장된 지역에서의 자유로운 더빙까지의 거리는 한 끝 차이다. 즉, <정도>/<당수태권도>는 조금 이른 시기이기는 하지만 이 부류의 영화들이 대개 그렇듯이 서로 다른 편집의, 서로 다른 더빙 버전으로 각각의 영화가 상영되는 지역의 관객들에게 어필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이 영화(들)은 무수한 전용 가능성을 향해 이미 열려 있는 것이다. 물론 이때의 전용 가능성이란 소비되는 지역에 따른 더 적절한 상품으로의 교체 가능성에 지나지 않지만. 2. “한국인으로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자막”(이를테면 “착취당하는 자를 위해서는 건배를, 착취하는 자에게는 절멸을”과 같은 자막을 본 1973년의 파리 특파원이 느꼈을 기함을 한번 상상해보라)으로 점철된 르네 비에네의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는 한국인과 중국인 대 일본인이라는 민족적 공분을 국가-자본주의의 앞잡이인 관료들에 맞서는 프롤레타리아의 항거라는 계급적 대립으로 옮겨온다. 이 “이 최초의 전적인 전용영화”는 1967년 비에네가 『인터내셔날 상황주의자 제11호』에 기고한 「상황주의자들과 정치 및 예술에 반대하는 새로운 행동형태」 3) 라는 글에서 제시한 방법론의 현실태로 등장한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들은 이전 세기의 혁명투쟁에서 이어받은 형식과 카테고리를 사용하여 체제 전복활동에 힘써왔다. 나는 과거로부터의 어떤 준거도 갖지 않는 수단을 통해 우리들의 이의 제기에 관한 표현을 완성할 것을 제안한다”는 문장으로부터 시작하는 이 선동적인 글에서 비에네는 ”스펙타클의 명제 그 자체를 전용(détournement)”할 것을 주장한다. 스펙타클 사회에 대항하는 실천이 그 자체로 스펙타클이 되어간다면, 여기에 회수되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가? 스펙타클의 미디어를 전용할 것. 전용의 대상으로 적절한 것은 포트로망과 포르노 사진, 대중잡지, 코믹스, 그리고 예술적 이데올로기로부터 완전히 벗어난 상업영화와 같은 것들이다. “특히 상업영화를 우리의 것으로 하자.” 르네 비에네는 자신이 공언한 바를 적극적으로 실천하였다. 그는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에 이어서 이시이 테루오의 <불량누님전>과 스즈키 노리부미의 <공포여학교>를 전용한 <카마레로부터 온 여자들 Girl from Kamare>(1974)이라는 또 한편의 ‘전용’ 영화를 만들었다. 1970년대 초 일본의 도에이 영화사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섹스와 폭력의 결합태로서 소위 ‘포르노 액션’으로 불리웠던 이 영화들은 노골적인 여성 신체의 전시와 착취, 그리고 젠더적 불안까지를 겸비한 포스트 68적 일본 대중문화의 급진성을 입증하는 실례였으며 또한 전세계 익스플로이테이션 필름 시장의 중요한 공급물로 기능하였다. 즉, 이 영화들 역시 이 시장에서 빈번히 이루어졌던 바, <정도>/<당수태권도>와 마찬가지로 상영장소와 형태에 따른 부단히 탄력적인 대응이 강제되었으며 더빙과 재편집에 자유로웠다. 즉 전세계 대중들에게 가장 싸게 공급되는 염가의 상품으로서 이 영화들은 도작과 도용의 가능성에 활짝 열려 있었다. 르네 비에네는 이 두 번째 전용영화를 통해 국가와 시장과 교회의 권위에 대한 전복을 꾀하였다. 말하자면 이 상황주의자의 실천은 1970년대적인 의미연관은 차치하고라도 상품으로서 어떻게 상품에 대항할 수 있는가, 혹은 상황주의자의 어법을 따라하자면 스펙터클로서 어떻게 스펙터클에 저항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 중요하다. 이는 동어반복이지만 영화가 전적으로 ‘상품’이 되었기에 가능했다. 나는 지금 의도적으로 ‘상품’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이를테면 <정도>/<당수태권도> 같은 영화를 두고 국가적 귀속을 혹은 오리지날을 따지는 것은 무의미해보인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영화를 보는 자들은 이 귀속의 문제에 거의 무감하기 때문이다. 누가 상품을 만든 자를, 상품의 국적을 따지겠는가? 아마도 이 지점이야말로 왜 1970년대 한국에서 이와 같은 영화들이 그토록 유독한 저질영화로 자리매김되었는지, 또는 (거개가 골계로 끝나버렸지만) ‘태권도’라는 국가적 기표를 덧씌우는데 그토록 희화적으로 (정확히 말하자면 이미지가 아닌 담론적 차원에서) 매달렸는지를 해명할 수 있는 지점일 것이다. 이 영화들은 할리우드가 생산하는 고급 산물들의 반대편에 놓인 가장 싼 상품으로서, 싼 값에 더 많은 이윤을 얻고자 하는 자본가들에 의해 잘라지고 이어붙여지는 것을 대가로, 이 지역 영화 중 최초로 말 그대로 글로벌한 이미지-상품으로 소비되었다. 혹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소비 속에서 이 영화들은 상품의 형태를 얻고 비로소 세계성의 획득에 성공하였다고. 이 싸구려 상품은 고급 소비자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마찬가지로 염가의 노동력을 제공하는 자들, 전세계의 하위계급자들이 향유하는 이미지-상품으로 기능하였다. 아마도 20세기 영화의 위계 중에서 가장 최하위에 위치해 있을 이 영화들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면 바로 이 지점일 것이다. 포스트콜로니얼한 열정과 분노, 그리고 장사꾼들의 잇속(과 1970년대 한국이라는 저 유신 시대가 낳은 기괴한 이미지의 유통)으로 형성된 기이한 야합의 산물인 이 이미지-상품은 말하자면 ‘빈곤한 이미지’(히토 슈타이얼)의 영화적 전신이며, <벽돌은 변증법을 깰 수 있는가>라는 상황주의자의 실천은 그 성공 여부와는 별개로 혹은 상황주의의 시효와도 상관없이 무한한 도작과 도용이라는 측면에서 우리에게 제시된 하나의 가능성으로 읽혀져야 한다. 3. 2000년대 이후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를 한국어로 처음 소개한 글은 2004년 4월 『씨네21』에 실린 아드리앙 공보의 「영화의 유용? 그 위험한 변신」이다. 4) 유운성은 아드리앙 공보가 전용의 ‘원본’으로 제시한 <당수태권도 唐手跆拳道>와 <정도 正道>의 관계를 밝혔다. 5) 또, 이 글을 보완, 확장한 글(「전용의 계보: 당수태권도는 변증법의 정도(正道)일 수 있는가?」 6) 에서 유운성은 이 영화의 ‘혼란스러운’ 창작주체에 관한 추측을 <당수태권도>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의 비교 및 <정도>의 심의대본과 오리지날 시나리오의 비교를 통하여 꼼꼼하게 수행한 바 있다. 7) 특히 상황주의자들의 실천에 관한 포괄적인 논의를 전개해가는 멕켄지 와크는 프랑스 마오이즘과 중국학 연구자 르네 비에네 사이의 긴장, 그의 두 편의 ‘전용’ 영화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와 <카마레로부터 온 여자들 Girl from Kamare>(1974)을 논하는 데 책의 한 장을 할애하고 있다. 한편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는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에서 ‘68혁명과 영화’라는 주제하에 상영된 바 있으며, 2019년 부천영화제에서 상영되었다. <당수태권도>는 worldcinemacentral.com이 운영하는 유투브 채널 Wu Tang Collection에서 찾아볼 수 있다. 8) 르네 비에네의 ‘전용’ 영화들은 우부웹(UbuWeb)에서 찾아볼 수 있다. 히토 슈타이얼은 에세이 영화 <11월>에서 그녀의 매혹적인 개념 ‘빈곤한 이미지’와 ‘여행하는 이미지’를 전개해나가면서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를 인용해오고 있다. 또한 당신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의 한국어 자막 버전과 중국어 자막 버전을 각각 유투브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이 자막은 물론 어떤 한국어 화자와 어떤 중국어 화자의 노고 덕택이다. ‘빈곤한 이미지’의 여행은 계속된다. *** 1) 주섭일, 「프랑스서 공산주의 선전영화로 둔갑한 합작 무협영화」, 『중앙일보』, 1973.3.31 2) 국공내전의 와중에 홍콩으로 이주해온 도광계는 특히 1950년대 홍콩에서 1930년대의 상하이 좌파 영화들을 우파 영화로 ‘전용’해오는 데 특별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그런 그의 경력을 생각한다면 프랑스에서의 <당수태권도>의 운명에는 명확한 시적 정의가 있다.” Morris, Meaghan. “Transnational Imagination in Action Cinema: Hong Kong and the making of a global popular culture,” Inter-Asia Cultural Studies, Vol. 5, No. 2, 2004. 도광계는 1957년에 만들어진 한국/홍콩의 첫 번째 칼라 합작영화 <이국정원>에 전창근, 와카스기 미츠오와 함께 공동감독으로 이름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 <당수태권도>는 그가 감독 크레딧에 올라 있는 마지막 영화이다. 3) Viénet, René. “The Situationists and New Forms of Action Against Politics and Art”, Internationale Situationniste No.11, October 1967. 이 글을 포함한 상황주의자들의 글은Situationist International Online(https://www.cddc.vt.edu/sionline/si/against.html)에서 읽을 수 있다. 4)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23961 5) 「<정도 正道>가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 La dialectique peut-elle casser des briques?>가 된 사연」 http://annual-parallax.blogspot.com/2017/10/causerie.html 6) http://annual-parallax.blogspot.com/2019/01/blog-post.html 7) 그 외 <변증법은 벽돌을 깰 수 있는가>에 관한 영어 문헌으로는 다음을 참조. Wark, McKenzie. The Spectacle of Disintegration: Situationist Passages out of the Twentieth Century, London: Verso, 2013. 프랑스어 자막을 입힌 이 독특한 전용의 형태에 대해서는 Shochat, Ella and Stam, Robert. “The Cinema After Babel: Language, Difference, Power”, Screen, vol.26 no.2, 1985. 8) https://www.youtube.com/watch?v=ZmM2-SZV3Rs (관련글) 1. 비행기의 시선, 무정한 시선 - 2021.04.30. 2. 액션영화의 한 기원, 안중근과 무협 - 2021.05.31.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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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절>(하길종, 1973) 행정서류를 통해 본 1970년대 초 제작 전 검열절차 나는 한때 영화를 거의 포기하였다. <화분>을 연출한 후, 써낸 시나리오는 매번 제작자의 거부 반응을 받거나 칼자루를 든 관에서 나의 시나리오는 항시 보이콧을 받아왔다. 그래서 최대한도로 현실과 타협한다고 해서 만든 <수절>이란 영화는 작품의 배경이 한사군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저항적이다’ ‘반사회적이다’라는 이유로 20분 길이의 필름이 무참히 커트당했고, 극장 스크린에서는 알맹이가 빠진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졌다. 나는 그때 마치 눈알과 입이 없고 팔다리 하나가 잘려나간 나의 모습을 공개하는 것 같은 큰 아픔을 느꼈고, 구토와 분노를 함께 느끼며 영화를 포기하기로 작정했던 것이다. 1) 이번 편에서는 영상자료원에 보존된 1973년 작 <수절>의 검열서류를 통해 이 시기 검열제도와 환경을 살펴보고자 한다. <수절>은 한사군 시대를 배경으로, 전쟁을 하러 타지에 간 유신(하명중)을 기다리던 부인 질례(박지영)와 그녀의 딸 용분(이영옥)이 온갖 고초를 겪다 남편의 스승이자 폭군인 지거도사(윤일봉)와 그 패거리에게 강간과 죽임을 당한 후 귀신이 되어 복수를 한다는 내용을 바탕으로 한다. 10년 만에 돌아온 유신은 부인과 딸의 귀신을 만나 그녀들의 억울한 사정을 안 후 지거도사와 최후의 대결을 벌인다. <수절>은 미국 UCLA에서 영화학 석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하길종이 <화분>(1971)에 이어 두 번째로 연출한 작품이다. 1970년 귀국한 하길종은 독립 제작의 어려움 끝에 겨우 데뷔작 <화분>을 완성하였으나, 이탈리아 영화 <테오라마> 표절 시비로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고심 끝에 두 번째 작품 <수절>을 연출하였으나, “최대한도로 현실과 타협한다고 해서 만든” 이 영화 역시 고난의 상황을 면치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감독 본인이 무려 20분 길이의 분량을 검열당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영화의 검열서류를 통해 당시 한국영화 검열( 및 행정) 절차와 환경을 살펴보도록 하자. 1960년대(특히 후반) 이후 영화의 검열은 크게 제작 전 시나리오 검열과 제작 후 본편 검열로 나누어졌다. 시나리오 검열은 원래 존재하지 않았고, 1962년 제정 영화법 이래 존재했던 제작신고 절차에서 문공부가 시나리오를 검토한 후 제작상의 유의사항을 전하는 관행이 제도화된 것이다. 1960년대 후반부터 시나리오 검열이 실질적으로 강화되기 시작했고, 1970년부터는 예륜을 통한 시나리오 검열이 독자적으로 시행되었다. 이와 함께 문공부가 주관하는 제작신고 역시 존속하였다. 그러다보니 제작 이전 검열 혹은 행정 절차는 1970년 이후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와 문공부의 제작신고로 대별된다. 특히 이 편이 주목하는 것은 앞서 언급했던 바, 1972년 이후 시나리오 단계에서 검열 혹은 제작신고 체제의 변화를 서류를 통해 확인하는 것이다. 1960년대 이후 한국영화 검열체제의 주요한 변화와 혼란은 거의 항상 시나리오 검열단계의 복잡화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우선 시나리오 신청과 제작신고 단계의 절차를 영상자료원 검열서류의 일자 순으로 살펴보기로 하자. 1. 1973.6.25. 시나리오 심의 신청(화천공사->예술문화윤리위원회) 2. 1973.6.29. 시나리오 심의의견서(문화예술위원회) 3. 1973.7.3. 국산 극영화 제작권 배정신청서(화천공사->문화공보부) 4. 1973.7.9. <수절> 시나리오 심의결과 통고(예술문화윤리위원회->문화공보부) 5. 1973.7.13.(작성, 7.16일 접수) 73 2/4분기 시나리오 심사 작품 제출(화천공사->문화공보부) 6. 1973.7.20. 2/4분기 제작권 배정에 대한 작품 지정(문공부 내부서류) 7. 1973.7.21. 영화제작신고서(화천공사->문화공보부) 8. 1973.7.21. 우리영화 제작현황(문공부 내부서류) 9. 1973.7.24. 73. 2/4분기 제작권 배정에 따른 작품 지정(문화공보부->화천공사) 10. 1973.7.25. 극영화 “수절” 제작신고 수리통보(문화공보부->화천공사) "국산극영화 제작권 배정신청서"와 "73년 2/4분기 제작권 배정에 따른 작품 지정"(영화 <수절>) 1970년을 거치며 체계화된 영화정책에 따르면 영화를 제작하고자 하는 자는 예륜을 통해 시나리오 심의를 통과한 다음(1, 2, 4번) 이를 바탕으로 문공부에 제작신고를 진행해야 했다(7, 10번). 제작신고는 말 그대로 제작이 시작된다는 것을 정부에 신고하는 행정절차이나, 실제 문공부는 예륜과 별도로 시나리오를 심의하곤 하여 시나리오 단계의 이중검열 논란을 낳기도 했다. 그런데 앞의 편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두 단계에 별도로 제작사에 대한 제작쿼터(제작권) 부여 단계가 추가되었다. 이에 따라 행정서류에도 이 절차에 따른 변화가 나타난다. 볼드체로 표시한 부분이 71년까지 존재하지 않던 서류들이다.(3, 5, 6, 8, 9번) 제작사 별로 양적인 제작권을 부여하는 방식(연간 00편, 분기별 0편 등)과 달리, 개별영화에 대한 심사를 거쳐 제작사에 제작권을 배정하는 절차는 국가비상사태 이후 권위주의 정권의 영화검열 강화를 위해 신설된 것이다. 1972년에는 이 제작권 배정을 위해 영화계 안팎의 권위자 20명 내외가 예륜의 심의 이후 별개로 문공부 촉탁으로 참여하여 시나리오를 검토하게 하였는데, 이는 실질적인 검열의 과정이었다. 그 결과 1972년 신규 제작의 부진으로 이어졌고, 이를 감안 1973년 영화시책을 통해 문공부가 직접 결정하기로 했다는 점은 전편에서 언급한 바 있다. 그렇다면 1973년 실질적인 검열이 아닌 형식적 행정절차로 전락한 이 제작권 배정절차가 절차의 번거로움을 강화하는 외에 어떤 실질적인 효과가 있었는지 의문시 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73년 들어 예륜의 심의가 강화되고 있는 추세임을 감안한다면 더욱 그러하다. 우리영화 제작현황(1973.7.21)(<수절>) 그럼에도 이 절차의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었는데, 영화법 개정 이후 새롭게 허가받은 12개 사의 제작내역을 미리 점검함과 동시에 통제하는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일종의 인적(생산주체) 통제 기능을 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면에서 8번 “우리영화 제작현황”이라는 양식은 다소 흥미롭다. 제작신고가 접수된 날 작성된 이 양식은 본편 검열예정일, 상영예정일과 극장, 촬영 일정까지 적시되었다. 국가가 영화의 제작 및 상영일정과 개봉관, 주조연 배우까지 관리하는 이러한 상황은 제작사의 입장에서는 직간접적으로 상당한 압박요인이 되었을 것이다. <수절>의 주요 검열사항 검토 이제 이 영화의 주요 검열 사항에 대해 살펴보자. 1973년 영화시책이 밝히고 있듯이 73년부터 예륜에 의한 시나리오 검열이 강화되었다. 당시 영진공의 기관지 『영화』의 한 기사에 따르면, 1973년 6월부터 11월까지 시나리오 심의를 마친 작품 53편의 경우 반려가 11편, 전면개작이 6편, 개작이 9편, 수정통과가 26편이며 수정이 되지 않고 초심에서 통과된 작품은 단 1편 뿐이었다. 2) 그렇다면 <수절>의 시나리오 검열은 어떠했을까? 이 영화에 대해 예륜은 13개의 사항을 지적했고, 재심 판정을 내리지는 않았다. 말하자면 53편 중 26편에 해당하는 “수정통과” 작품 중 하나였던 셈이다. 13개 내역 중 자구나 사실관계 수정 정도에 해당하는 사항이 5개, 잔혹성 지적이 4개, 외설성 지적이 1개, 고증 유의 1개, 사유 불명 2개 등이다. 항목이 적은 편은 아니지만, 당시 반 이상의 작품들이 반려나, 개작을 통한 재심 및 삼심까지 이어졌음을 감안한다면 검열이 심했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수절> 시나리오 검열 수정지시 사항 13개 영화 촬영 후 촬영본 본편에 대한 검열은 11월 14일에 신청되었다. 첨부된 문서 중 “영화배급신청서 접수필증”(11월 17일자)이 눈에 띈다. 제작사인 화천공사가 한국영화배급협회(이사장 김태수)로부터 발급받은 접수필증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4차 개정 영화법 이후 영화배급의 전국 일원화를 목표로 설립된 영화배급협회가 관련된 행정절차의 흔적을 보여준다. <수절>의 본편 검열은 1973년 11월 17일에 진행되었다. 당시 영화 본편의 검열은 문화공보부, 중앙정보부, 내무부(치안국) 3개 기관이 주관하였다. 순전히 공무원 중심의 검열체제였다. 중앙정보부는 국가 안보사항, 내무부 치안국은 미성년자 관람가부를 중심으로 보았고, 문화공보부가 전체 검열사항을 종합하여 의견을 내는 것으로 역할 분담이 이루어져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위 중앙정보부 검열관의 검열사항은 4개에 불과한데, 최종적으로 문화공보부가 지시한 검열사항은 9개처에 달한다는 사실이다. 문화공보부의 추가 검열사항이 부가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를 통해 볼 때, 당시 문화공보부가 중앙정보부나 내무부 치안국의 검열사항을 취합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자체적인 판단에 따라 종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시 문화공보부가 최종적으로 통보한 9개처의 검열사항은 대사삭제 2개처(“상납할까요”, “돈과 권력이면 전부지” 등), 화면삭제 4개처(강간 장면 2개처 등), 화면단축 3개처(나체로 춤추는 여자들과 이를 보는 질례의 얼굴 등)이다. <수절> 본편 검열 수정사항 시나리오 단계의 엄격한 검열을 거친 후, 시나리오대로 진행된 본편 완성본의 경우 검열되는 경우가 많지 않았던 당시 관행을 감안할 때, 9개처에 달하는 이 영화의 본편 검열 분량은 상대적으로 많은 편이며 꽤 심각한 검열의 대상이 되었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저항적이다’ ‘반사회적이다’라는 이유로 20분 길이의 필름이 무참히 커트당했”다는 감독의 주장에 대해 보다 구체적으로 검토해보기로 하자. 우선 검열서류 상 절제된 이후의 총 분량은 96분으로 제시된다. 그런데 검열되지 않은 원본으로 추정되는(실제 서류상 검열사항이 모두 남아있는 것으로 확인된다) 현재 영상자료원에 보존된 오리지널 네거티브(ON) 원본을 변환하여 서비스 중인 동영상의 러닝타임은 1시간 32분 28초(93분 28초)가량이다. 오히려 원본이 짧은데, 영상자료원 버전에 크레딧롤이 빠져있어 발생한 결과로 보인다. 크레딧롤이 길어야 3-4분임을 감안할 때 검열의 분량이 그리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20분가량 “커트”됐다는 감독의 회고는 다소간의 과장이거나, 시나리오 검열 단계까지 언급한 것이거나, 공식적인 서류에서가 아니라 막후에서 조정된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또 하나의 주제로 “저항적” 혹은 “반사회적”이라는 면에서 검열당했다는 감독의 주장에 대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대사 2개에 대한 검열 근거는 저항적이거나 반사회적인 이유에서 비롯된 것임을 직관적으로 인정할 수 있다. 문제는 나머지 7개 처 외면상 잔혹이나 신체 노출 등의 이유로 절제된 것으로 보이는 장면들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데 있다. 관습적인 의미에서라면, 감독의 자의식에 찬 주장과 달리 이 절제된 장면들이 “저항적”이라거나 “반사회적”이라 보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장면들이 당시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충분히 저항적이거나 반사회적이라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다고 본다. 우선 이 영화가 전반적으로 권력에 대한 비판을 목표로 진행된다는 점을 거론할 수 있다. 사실 <수절>은 과도한 실험성과 다소 미숙한 촬영이나 편집, 개연성 없는 인물간의 관계 설정, 앞뒤 안 맞는 서사 등이 난삽하게 흐트러져 전체적으로 잘 조율된 작품이라 보기는 어렵다. 이는 감독의 전작 <화분>에서 역시 마찬가지지만, 어찌된 일인지 <화분>에 비해 그 문제가 두드러져 보인다. 본인이 익숙하지 않은, 당대 유행하던 검술영화라는 장르적 외피 속에 자신의 메시지와 실험정신을 새기고자 한 결과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이 영화는 사실 과할 정도로 당대 권력자의 횡포와 피수탈자의 고난(유신의 부인과 딸) 장면들을 강조 내지 나열하고 있고, 이는 앞서 언급한 영화의 단점들과 어우러져 영화를 매우 보기 불편하게 만들고 있다. 이를 영화적 실패로 볼 수도, 당대 상업 주류 영화들이 도외시한 영화적 실험의 성취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평가가 어떠하건, 이 영화가 유신 이후 강화되어가던 권위주의 체제 속에서 역사무협극을 경유하여 권력 일반의 폭력에 대한 매우 노골적인 고발의 의지를 담고 있다는 것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 영화에서 절제된 외설적이거나 잔혹한 장면들은 대개 권력자들의 횡포와 폭력을 가시화하는 사례들로 제시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장면들이 직간접적으로 비판적이거나 반사회적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다고 보겠다. 영화 <수절>의 한 장면 또한 박정희 정권기, 특히 유신 이후의 권위주의 정권기에서 높은 수준의 섹슈얼리티나 잔혹함, 혹은 사회적 일탈행위의 재현 일반이 가지는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다. 지면이나 글의 성격상 이에 관한 논의를 본격적으로 진행할 수는 없겠으나, 당시 권위주의 정권이 국민에게 요구했던 절제와 질서, 미풍과 양속의 덕목들, 그리고 그러한 덕목의 강화를 통해 현행 권력체제를 유지하고자 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과도한 잔혹성과 퇴폐, 섹슈얼리티, 일탈은 도구적 이성을 넘어서는 정동과 개인적 욕망들의 분출을 표방함으로써 권력의 체제에 구멍을 뚫고 탈주하고자 하는 개인들의 (무)의식적 의지를 담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각주 1) 하길종, "신문 광고와 바보의 초상", 한국영상자료원, 『하길종 전집1, 태를 위한 과거분사, 백마 타고 온 또또』, 2009, 263-264쪽 2) “양질의 작품 빈곤: 시나리오”, 영화진흥공사, 『영화』, 1973년 12월호, 33-34쪽
한 작품의 두 제목: <남녀공학>과 <학창시절> 1976년 개봉한 영화 <학창시절>의 신문광고 포스터에는 작게 ‘原名(원명): 男女共學(남녀공학)’이라는 또 다른 제목이 표기되어 있다. 본 작품이 특정 영화의 리메이크작이거나 원작 소설 등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원명’이 따로 명기되어 있다는 것, 그러니까 <학창시절>이라는 작품명보다 원래 의도한 이름이 따로 있었다는 것을 명기하는 것은 다소 의아한 일이다. 당시 영화제목을 변경하기 위해서는 문공부에 서류를 제출하고 그 합당함을 인정받아야 했기에, <남녀공학>과 마찬가지로 <학창시절> 역시 학교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일에 대한 영화라는 것을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데도 굳이 제명을 변경한 것은 그 수고스러움에 비해 크게 얻을 것이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목을 변경했다면, 그리고 이전의 제목까지 명기했다면 제명을 변경한 것은 적어도 제작자의 의도와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당겨 말하자면 영화 <학창시절>은 시나리오 표절시비사건에 휘말리면서 세간의 이목을 끈 작품이었다. 1960-70년대 한국영화에서 표절시비는 그리 드문 일은 아니었지만, 이를 규제할만한 저작권법이 명확하게 마련되지 않은 상태에서 표절은 그리 중요한 문제로 간주되지 않았고, 특히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는 문제시 되었던 구체적인 사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표절에 대한 무관심이 이어졌다 1 . 이러한 상황에서 <학창시절>의 시나리오 표절시비사건이 대두된 것은 꽤나 이례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게다가 이 작품의 표절시비 사건으로 인해 당시 한국예술문화윤리위원회(이하 예륜) 위원장이 사퇴의사를 밝히는 등 이 작품의 표절시비 사건은 표절을 여부를 가리는 문제를 넘어서는 데에 까지 확대되면서 당시 ‘민간심의기구’라는 예륜의 지위와 책임, 그리고 문공부가 이 심의기구를 대하는 태도 등을 매우 흥미롭게 보여준다. 영화검열에 있어 1970년대라는 시대적 레토릭이 발휘하는 힘은 생각보다 크다. 검열에 대한 상(像)이 고정되어 있는 것, 영화검열은 곧 삭제라는 행위로 간소화되고 이는 정치적인 목적에 따라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상식과 같은 생각들은 여기에서 비롯된다. 이에 따라 검열자는 국가라는 단일한 주체로 결정되고, 심의와 관련한 모든 기구의 의견은 국가의 것으로 간주된다. 특히 1960년대부터 이어져 온 예륜, 1976년 5월 이후 이름을 바꾼 한국공연윤리위원회(이하 공윤)의 시나리오 심의는 폭력적인 검열을 행한 국가의 의견과 등치에 놓인 채 구분되지 않는 경향이 짙다. 물론 당시 민간심의기구라는 이름을 달고 있었던 예륜이나 공윤은 예산이나 위원장의 임명 등을 문공부의 관리 아래에서 진행했지만, 이것으로 예륜이나 공윤이 국가 검열권력과 동등한 선상에 놓여 있다고 보는 것에는 무리가 따른다. <학창시절>의 표절시비 사건을 파악할 수 있는 심의서류는 당시의 예륜이 수많은 돌발 상황 속에서 어떻게 대처했는지, 쉽게 책임질 상황을 만들지 않는 국가 검열로 인해 어떠한 취급을 받았는지 등을 여실히 드러내면서 예상 밖의 검열의 이면을 바라보게 한다. 검열 질서를 깨뜨리는 돌발적 상황들 <학창시절>은 1975년 11월 15일 <고교남녀공학>이라는 제목으로 2 예륜에 심의 신청했던 시나리오가 수정 통과된 후, 같은 해 11월 21일 영화제작신고서를 제출, 12월 7일 문공부로부터 제작신고 수리를 통보 받은 후 영화제작에 착수한다. 이 과정은 1960년대부터 이어져 온 영화검열의 기본적인 절차로 제작사는 예륜을 통해 먼저 시나리오 심의를 받은 후, 그 결과에 따라 문공부 측에 제작하겠다는 허가를 요청하며 3 , 문공부가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와 자체적으로 심의한 유의사항을 덧붙여 영화제작을 허락하는 절차에 따른 것이다. 이 과정에서 중요한 것은 문공부의 제작허가는 절차상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이기에, 만약 시나리오에서 문제가 발생할 시 그 책임을 전적으로 예륜의 몫으로 미룰 수 있다는 점이다. <남녀공학>의 표절시비 사건이 일어났을 때의 문공부의 태도는 이를 잘 보여준다.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에서 미성년자의 음주나 일탈 등에 대한 몇 군데의 지적에 그쳐 제작에 착수했던 <남녀공학>은 12월 5일 접수된 ‘대한민국 영화 애호가’의 투서에서부터 문제가 발생한다. <남녀공학> 표절 시비를 촉발시킨 청원서 문공부장관 앞으로 보낸 청원서에는 <남녀공학>이 소화34년(1959)년에 발행된 『月刊 シナリオ』(월간 시나리오)에 실렸던 <ハイティーン>(하이틴)을 ‘표절 각색한’ 작품이라고 지적하며, 이미 일본에서 제작·상영된 바 있는 이 영화의 허가·상영은 내년 ‘아세아 영화제가 개최되는 시기에’ ‘이 작품 내용을 아는 일본인들이나 그 외 사람들이’ 안다면 ‘엄청난 챙피’와 ‘국위를 손상 시킬 것’이며, ‘민족 고유 미풍양속을 저해시키는’ 일이 될 것이라 덧붙인다. 이에 문공부는 곧바로 예륜 측에 청원서에 대한 의견 조회를 요청하고 해를 넘긴 1976년 1월 8일, 예륜은 「영화 1733-16853(청원서에 대한 의견조회)에 대한 결과보고」를 통해 ‘상황 및 디테일(부분, 항목) 설정이 전체적으로 흡사한 점이 많고’, ‘교사의 봉임과정에서 일어나는 에피소드’ 등 인물들의 설정에 유사성을 들어 ‘표절이라는 판정을 면하기 어렵다고 사료(인정)됨’이라는 의견을 문공부 측으로 전달한다. 이러한 예륜의 판정은 처음 시나리오를 심의 후 통과시킨 자신들의 결정에 문제가 있었다는 것을 사실상 인정하고 그 결과를 번복한 셈이다. 그러나 <남녀공학>의 문제는 표절에만 한정된 것은 아니었다. 이 작품이 표절시비에 휘말리면서 예륜의 의견서를 제외하고도 제출된 표절관련 의견서가 세 편에 이르는데 이 중 한국영화인협회(이하 영협) 시나리오 위원회라는 정확한 주체를 밝히고 제출한 한 편을 제외하고는 모두 그 출처가 불명확하다 4 . 이렇게 영화인들이 직접적으로 의견서를 제출한 데에는 이 작품의 각본을 담당했던 황영빈의 당시 지위가 문제되었기 때문이다. <남녀공학> 원작자 황영빈의 영화제작승낙서 <남녀공학>의 제작신고서에는 각본이 원작자 황영빈, 각색자 서인경으로 명시되어 있으며, 「원작자의 영화제작 승낙서」가 첨부되어 있다. 이 중 황영빈은 당시 영협의 시나리오 위원회 위원장이자 영협의 부이사장, 예륜의 윤리위원이기도 했다는 점에서 시나리오 표절문제는 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황영빈이 시나리오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당선된 직후 발생한 이 작품의 표절시비는 시나리오 위원회 내부의 권력 다툼의 연장선상에서 이해되었다. 표절이라 판단한 예륜의 의견서와 비슷한 시기에 제출된 시나리오 위원회의 자체 의견서는 표절이 아니라고 결정 두 기구 간의 의견도 엇갈렸지만, 시나리오 위원회 내부에서도 80여명의 회원이 양쪽으로 갈려 치열한 논쟁이 오고갔던 것이다. 표면적으로는 표절시비사건이었지만 그 내막에는 직전에 있던 시나리오 위원회 위원장 선거에서 패배한 측에서 보복으로 라이벌이었던 황영빈을 몰아세워 위원장직에서 사퇴시키려 의도가 도시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5 . 앞서 살펴본 청원서의 내용이 매우 구체적이라는 점, 그러니까 영화와 관련한 업무를 맡아보는 문공부와 예술국장을 명시하고 있으며, 현재 <남녀공학>을 찍고 있는 지역과 제작사 일시 등을 알고 있고, 각본가와 감독의 이름, 표절이 의심되는 작품의 출처와 상영의 여부 등을 명시한 것으로 보아 영화계 내부인사의 청원서라는 것은 충분히 짐작 가능하기에 시나리오 위원회 내부의 표절에 대한 상반된 결정이 시나리오 위원회의 권력다툼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은 충분히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6 . 결국 이러한 다툼 속에서 제출된 보고서들은 완전히 상반된 견해를 내놓고 있었고, 작가들은 <하이틴>이라는 작품은 본 적도 없다고 주장하면서 사태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 바로 이런 상황 속에서 예륜은 이 작품이 표절이라 판단 내렸던 것이다. 예륜은 왜 표절 판정을 번복하는가? 예륜이 1월 8일 문공부 측에 보낸 「영화 1733-16853(청원서에 대한 의견조회)에 대한 결과보고」는 하루 전인 1월 7일에 작성된 것인데, 같은 날 작성된 「예륜 위원장 개인의견서」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서류는 1월 8일 문공부 측에 보내는 위의 공문과 작가들의 해명서와 함께 발송된 것으로 예상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표절을 인정한 예륜 위원장 개인의견서 결국 예륜 위원장은 이 작품이 표절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표절문제가 불거진 것이 ‘원작자의 직소(直訴)’, 즉 <하이틴> 원작자의 직접적인 호소에 의한 것이 아니니 선처를 베풀어 달라는 첨언을 한 것이다. 이는 예륜 위원장이 표절 자체를 중대한 문제로 삼는다기보다 사후적인 처리에 더욱 신경을 쓰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신들의 시나리오 심의 결과를 번복하고 있는 예륜의 입장에선 문공부의 처분에 따라 자신들의 위상이 흔들릴 수도 있었기에, 「예륜 위원장의 개인의견서」라는 가장 정중한 방식을 통해 자신들의 의견에 대한 신뢰와 심의기구에 대한 존중을 요청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공부는 이러한 예륜의 공문을 받은 지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은 1월 14일, 「국산영화 시나리오 표절 여부에 대한 재조회」라는 제목의 공문을 예륜에 발송한다. 이 공문에는 예륜에서 보낸 재심의 결과 보고서로는 작품 전체의 표절 여부를 확정할 수 없으며, 이 영화는 예륜의 판단에 따라 제작 신고를 수리하여 이미 촬영이 완료된 작품으로 예륜의 판단이 이 작품은 물론 향후의 작품들에게 까지 영향을 미칠 것이니 확대 심의회의를 개최하여 결과를 보고하라는 명령이 담겨 있다. 덧붙여 원작 대본과의 씬 별 대조표를 작성, 작품 전체 중 ‘유사 장면 수, 모방 장면 수, 표절 장면 수, 전혀 다른 장면 수’를 적고 ‘원작의 어느 정도를 모방함으로써 표절이라 판정할 수 있는 지의 기준’을 제시하라고 통고하고 있다. 조용히 넘어가 달라는 예륜 위원장의 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문공부는 누구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내용에 대해 수치로 환산할 수 있을 만큼의 객관적인 결과를 요구했다. ‘유사’, ‘모방’, ‘표절’을 장면별로 구분하라는 것도 황당한 일이지만, 이를 바탕으로 표절을 판정할 수 있는 기준을 제시하라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게다가 문공부는 이 작품이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 결과에 ‘따라’ 자신들이 제작신고를 수리하여 영화가 이미 완성되었다고 언급하며 영화가 겪을 불이익을 고스란히 예륜의 탓으로 돌리면서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에도, 표절이라는 판단에도 의심의 눈초리를 보내고 있었다. 이 사이 영화를 완성한 제작사는 영화 본편검열신청서와 미성년자 관람신청서 등을 제출하지만, 문공부는 표절여부를 조회 중인 작품이니 이후 진행하겠다며 검열 자체를 진행하지 않았고, 예륜은 약 2주가 지난 1월 28일 이 작품은 표절이 아니라는, 이전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문공부 측에 보내온다. <국산영화 시나리오 표절여부에 대한 재조회>에 대한 예륜의 결과보고 위의 서류를 살펴보면 예륜이 얼마나 이 문제를 고심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예륜은 1월 20일 내부적으로 가졌던 재심의에서는 의견 일치를 보지 못했고, 1월 22일 긴급윤리위원회라는 이름으로 외부 인사 3인을 위촉하여 재심의를 진행한다. 여기에서 예륜이 최대한 내부적인 의견 개진과 그로 인한 결정을 거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3인의 외부인사의 입을 통해서야 9개의 씬 일부와 인물의 설정과 배치, 배경 등의 유사성은 있으나 전체적으로는 표절이 아니라고 판단 내린 것은 이러한 이유에서 기인했을 것이다. 이러한 번복에는 작품 자체의 비교를 넘어 다소 위압적인 문공부의 통고와 이 작품을 둘러싸고 벌어진 시나리오 위원회의 분란 등이 더욱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은 물론이다. 이러한 결정 후 문공부는 1월 30일 <남녀공학>의 제작사인 대영흥행 측으로 「<남녀공학> 검열에 따른 조치」라는 공문을 보낸다. 문공부는 예륜이 표절로 판단했을 때에는 제작사 측으로 즉시 통고를 하지 않고 오히려 재심의 요청을 한 것과는 다르게, 표절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때에는 즉시 그 결과를 통보하면서 표절이라는 판단을 부담스러워했다는 것을 드러낸다. 문공부는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를 통해 자신들이 본 작품을 허가한 것이라 책임을 회피하지만, 제작신고 수리 공문에는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 시 지적되지 않았던 사항들이 포함되어 있어 문공부 역시 이 작품의 시나리오를 살펴보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럼에도 문공부는 이 모든 책임을 예륜으로 넘기며 영화검열 업무를 관장하는 문공부의 결정에 오점을 남기지 않으려 했던 것이다. 「<남녀공학> 검열에 따른 조치」에 명시된 보완사항에서 문공부가 주력한 것은 표절시비 사건의 흔적을 지우려 한다는 점에서 표절로 ‘판단되어서는 안 된다’는 문공부의 의지가 더욱 명확하게 읽힌다. <남녀공학> 검열에 따른 조치 위의 공문에서 문공부는 세 가지의 보완을 지시한다. 하나는 ‘사회적 물의를 야기시’킨 제명을 변경하라는 것, <하이틴>과 유사한 부분을 삭제하거나 개작하라는 것, 수정한 부분을 명시하라는 것 등이다. 이러한 지시사항은 문제가 되었던 부분을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모두 없었던 것처럼 만들라는 뜻으로 문공부가 문제가 생긴 영화들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제작자는 이러한 지시를 받은 후 「<남녀공학> 제명사용에 관한 건의」라는 문서를 통해 이미 제작수리에 본 제목으로 들어갔으며, 본편과 예고편 등에 타이틀 화면을 다시 찍어야 하고, 이 제목으로 배급 계약을 마쳤기에 제목의 수정지시를 거두어 달라는 내용을 전달한다. 그러나 직후 「<남녀공학> 지시사항에 대한 복명」이라는 문서를 통해 제목을 <남녀공학>에서 <학창시절>로 바꾸겠다는 내용을 전달, 제작사의 요청은 거부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남녀공학>은 <학창시절>로 그 제목을 바꾸어 개봉했고, 포스터에는 원제가 <남녀공학>이었다는 것을 작은 글씨로나마 명시되어 있었던 것이다. 문공부가 영화검열 업무를 책임지는 법 결국 <학창시절>은 문공부의 예륜으로의 책임전가, 예륜의 판단 번복, 이로 인해 발생한 물의를 잠재우기 위해 최대한 원제와 유사하게 붙인 제목이었다. 이 일을 겪으면서 예륜 위원장은 사표를 제출한다. 일신상의 사정이라는 이유였지만, 시나리오 파벌싸움의 부작용이자 문공부의 예륜 불신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해석에 더욱 무게가 실렸다 7 . 상반된 표절 판정에 최종적으로는 문공부가 가려내야 한다는 견해가 대두되기도 했지만 8 문공부는 어떠한 판정도 내리지 않은 채 이 일을 마무리 지었다. 이후 문공부가 내린 결정은 ‘여고생’ 소재의 영화 제작을 규제하겠다는 것이었다. 남녀 고교생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 그들의 부정적인 측면을 부정적으로 그린다는 것이 그 이유였는데 9 「표절시비 극영화 <남녀공학> 예륜, 윤리위에 심의위임」 10 이라는 기사와 바투 붙어 있는 이 기사는 문공부 결정의 이면을 상상하게 한다. <남녀공학>과 <하이틴>의 표절 여부를 판단할 때에 고교생활을 다루는 데에 있어 소재나 등장인물, 배경, 사건 등이 유사할 수밖에 없다는 난점이 의견서마다 반복적으로 기술되어 있던 것을 생각한다면, 문공부의 결정은 아예 문제가 생길 수 있는 가능성 자체를 차단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것으로 읽히기 때문이다.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지 않으려는 문공부의 태도는 영화법이 시행된 이후부터 꾸준히 보인 것으로, 강압적으로 영화의 삭제를 지시했을 것이라는 국가 검열에 대한 상(像)과는 거리가 있다. <학창시절>의 검열과정은 검열에 끼어든 상황과 주체 그리고 그(들)에 대한 대처가 늘 예상을 뛰어넘는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1. 이는 1970년대에 들어 표절이 줄어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1970년대에는 수많은 합작영화로 표절에 관한 지적이 많을 수밖에 없던 시기였다. 그러나 1970년대의 언론에서 영화검열에 관한 언급 자체 줄어들었고, 검열과 관계 된 표절에 대한 언급 역시 찾아보기 힘든 것이라 할 수 있다. 1960년대 영화검열의 언론 노출에 비한다면 1970년대 영화검열은 그 빈도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줄어든다. 2. 이 작품은 <고교남녀공학>이라는 제목으로 제작신고 직후 <남녀공학>이라는 제목으로 제명변경을 신청하고, 제작신고수리가 된 이후부터는 <남녀공학>으로 명기된다. 이 글에서 역시 이 작품을 가리킬 때에는 <남녀공학>이라는 제목을 사용하고자 한다. 3. 시나리오 심의에서 통과 판정을 받지 못한다면 예륜의 요청에 따른 시나리오에 대한 수정과 심의가 반복된다. 이를 통해 예륜의 시나리오 심의에 통과해야만 제작신고를 할 수 있다. 4. 출처가 분명치 않은 두 개의 보고서 중 하나에는 ‘익명의 영화인 제출’이라 수기로 표기되어 있다. 나머지 하나는 시나리오 위원회의 분열로 인해 시나리오 위원회 내부에서 작성된 것으로 보이는데 이에 대해서는 이하의 내용과 각주 6번 참조. 5. 「극영화 <남녀공학> 표절시비」, 《일간스포츠》, 1976.1.17. 본 신문기사를 비롯 관련 내용을 다루고 있는 6-7개의 신문기사가 심의서류에 스크랩되어 있다. 6. 당시 시나리오 위원회는 시나리오 문학회와 시나리오 위원회로 나뉘어 전자는 이 작품을 표절로, 후자는 표절이 아닌 것으로 판단하며 첨예하고 대립했다(「극영화 <남녀공학> 표절논쟁 확대: 표절이다 아니다 상반된 보고서」, 《일간스포츠》, 1976.1.22.). 이 기사를 바탕으로 표절에 관해 의견을 제시했던 총 세 개의 보고서 중 출처가 분명치 않았던 두 개 중 하나는 시나리오 문학회의 것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7. 「표절논쟁 2라운드 접어들어-판정 뒤집히면 책임소재 시비 또 일 듯」, 《일간스포츠》, 1976.1.24. 8. 「극영화 <남녀공학> 표절논쟁 확대: 표절이다 아니다 상반된 보고서」, 《일간스포츠》, 1976.1.22. 9. 「여고생소재 무절제 극영화-문공부 제작 규제」, 《일간스포츠》, 1976.1.23. 이 기사의 표제는 ‘여고생’으로 한정되어 있지만 그 내용은 ‘남녀’ 고등학생을 소재로 한 영화들이 탈선이나 반항 등을 내세우는 경우가 많아 이를 규제하겠다는 것이다. 이 기사에서 문공부는 ‘특히 여고생의 경우 담임 선생님을 사모하’는 설정이나 ‘기성세대에 대한 반항의식, 탈선’등이 최근 남녀 고등학생을 소재로 한 작품들의 문제로 꼽아 규제의 필요성을 언급하는데, 이러한 설정은 모두 영화 <남녀공학>에도 해당되는 것이다. 10. 「표절시비 극영화 <남녀공학> 예륜, 윤리위에 심의위임」, 《일간스포츠》, 1976.1.23.